선댄스, 슬램댄스, 그리고 한국의 독립영화제들

지난 11월 23일, 선댄스영화제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2011년 선댄스영화제의 변화를 예고하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글이 실렸다. 새로이 ‘다큐멘터리 프리미어’ 섹션이 신설될 것이라는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정작 내 눈을 끌었던 건 레드포드가 선댄스재단의 창작자 지원의 원칙과 정신을 다시 한 번 강조한 부분이다. “우리가 창작자들을 지원하는 기준근거는 ‘시장에서의 잠재성’이 아닌 ‘창조적인 장점’이다.” 올해 영화제의 기자회견 때 레드포드가 “뿌리로 돌아가겠다”고 강조했던 것은 빈 말이 아니었다.


Sundance Film Festival Webpage

선댄스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사실 선댄스영화제는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거대해졌다’는 비난을 이미 90년대부터 지겹도록 들어왔다. 미라맥스를 비롯해 미니스튜디오를 지향하던 중소배급사들은 물론 때로는 거대 스튜디오들까지 선댄스에서 판권경쟁을 벌였던 만큼, “이제 선댄스에는 헐리웃에 간택되기 위해 적당히 말랑하고 적당히 이색적으로 만들어진 보수적인 영화들만 판친다”는 불만과 비난이 공공연했다. 선댄스가 배출해낸 무수한 감독들이 선댄스에서의 수상을 자산삼아 헐리웃에 진출해 블록버스터를 만들고 ‘주류’ 감독들이 되면서, 한동안(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선댄스는 ‘헐리웃으로 가기 위한 급행 티켓’으로 작용했던 게 사실이다. 그 와중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슬램댄스영화제를 위시해 무수한 작은 영화제들이 ‘안티 선댄스’ 혹은 ‘선댄스의 대안’을 표방하며 속속 생겨났다. 문댄스, 랩댄스, 트로마댄스, 노댄스, 디지댄스, 엑스댄스, 슬램덩크… 이제는 유야무야 잊혀져버린 영화제도 많지만, 선댄스와 같은 시기, 바로 그 파크시티에 열리며 선댄스에 대항했던 슬램댄스영화제의 경우 16년의 역사를 거쳐 이제 선댄스 못지않은 인기와 규모를 누리는 안정적인 영화제로 성장했다. (참고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슬램댄스 출신이다.)


그러나 선댄스를 통해 선보이는 영화들은 여전히 흥미롭고 독창적이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원스>는 새로운 뮤지컬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음악영화의 신기원을 개척했고,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베리드>는 단 한 명의 배우를 출연시켜 오직 관 속에서 촬영을 감행했다.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선댄스의 명성에 혁혁한 공을 세워온 다큐멘터리들 역시 다양한 소재와 영화미학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하며, 선댄스에서의 수상을 경력삼아 극장에서 정식으로 개봉하기도 한다. 많은 감독들이 선댄스나 슬램댄스를 통해 여전히 헐리웃행 티켓을 움켜잡지만, 또한 많은 감독들이 여전히 저예산의 독립영화들을 자신들이 했던 방식대로 만들며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다.


2010서독제

2010 서울독립영화제 포스터(왼쪽)과 개막작인 도약선생 중 한 장면


선댄스가 슬램댄스의 도전을 받고 안팎의 비난을 받으며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과 달리, 한국의 독립영화제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독하며, 자본을 경계하고 권력에 대항하며 싸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비난을 받고 표적감사를 당하는가 하면, 지원이 중단되고 탄압을 받는다. 인디포럼은 석연찮은 이유로 ? 촛불시위에 참가한 단체라며 ? 고작 천만 원에서 천오백만 원 남짓 받던 영진위의 단체지원을 작년과 올해 계속 받지 못했다. 서울독립영화제는 저들의 ‘적’으로 지목돼 표적감사를 당한 한독협이 주관하는 행사라서 올해 영진위와 서울시로부터 지원을 중단당했다. 이 와중 인디포럼과 서울독립영화제가 사랑하고 상영했던 독립영화 몇 편이 G20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영화제에 납치될 뻔했다가 ‘물.건’으로 낙인 찍히기까지 했던 에피소드는 웃지 못할 코미디의 절정이기도 했다.


상업화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영화제의 도전을 받았던 선댄스. 그리고 상업적이지 않아서, 상업화를 경계하고 권력에 대항하느라 비난을 받는 인디포럼과 서독제. 어쩌면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매우 행복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도 모른다. 인디포럼이나 서독제 같은 영화제가 여전히 독립영화들의 정신을 지지하고 그 정신을 오롯이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 스스로의 건강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인디포럼과 서독제가 그 맵고 독한 독립영화의 정신을 언제까지고 잃지 말기를. 9일 개막하는 서독제에서 만날 새로운 영화들을, 나는 오늘도 가슴 두근대며 기다리고 있다.


 


ps.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독립영화DB 웹진 페이지에 기고한 칼럼.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ps2. 마침 서독제 개막식 전날 글이 발행되어 다행이다. 영상자료원 쪽에서 센스있게 날짜를 맞춰주셨다.


ps3. 애초 이 칼럼을 쓰고자 결심했던 게 저 ‘G20성공기원영화제’의 영화납치사건 때문이었다. “차라리 너무 상업적이라 비난받았던 선댄스가 부럽다”는 자조와 삐딱한 비아냥이 들었던 건데,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선댄스와 슬램댄스를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 서독제와 인디포럼에게 너무 감사해야 할 일이더라. 그래서 마지막 문단이 참 힘들고 어렵게 나왔다. 어쨌든 서독제 개막하는 시점에 서독제에 대해 쓰고 개막식도 한 번 더 강조하게 된 셈이라 차라리 다행.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2 Comments

  1. “물.건.”에다가 점 두 개 찍는 걸 보고 포복절도 했어요. ‘아, 이놈들은 120% 진심이구나. 이러면 강하고 무서워 보일 거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러다가 우리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이런 덜떨어진 인간들이 감히 이런 짓거리를 시도할까 싶어서 참 슬펐습니다. 힘내야죠, 우리 모두.

    • 어제 서독제 개막식 다녀왔는데,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요. 완전 잔치 분위기. 개막식 뒷풀이도 두 군데에서 나눠서 했는데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구요. 걔들이 아무리 지랄해도, 아 독립영화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는 사람들 다들 잘 지내고 있구나, 다들 힘내서 즐겁게 영화 만들고 보고 있구나, 우리가 즐겁게 열심히 잘 지내는 게 역시 제일 중요하구나, 싶어서 더욱 기뻤던 자리였어요. 앞으로 힘내서 더 열심히 영화보고 쓰고, 해야죠. 파인로님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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