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현 | 파수꾼 (2010)

파수꾼

Bleak Night. 영어제목도 맘에 든다.

2010년의 마지막 인디포럼 월례비행 자리에서 <파수꾼>을 봤다. 부산영화제 때부터 워낙 <무산일기>와 함께 호평이 자자했던지라 기대가 컸다. 대체로 그런 경우 살짝 실망하게 되는 게 일반적일 텐데, <파수꾼>의 경우는 달랐다. 기대 이상이었다. 영화를 보기 며칠 전 2010년 최고의 한국영화 열 편을 뽑았었는데, <파수꾼>을 보고 나자 그 리스트는 ‘뒤늦게 본 <파수꾼>을 제외한 열 편’의 리스트가 되었다. 아무려나, 올해 극장에서 정식 개봉을 하게 됐으니 ‘2011년 최고의 한국영화 10편’ 중 한 편이 이미 정해진 셈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을수록 시간이 더욱 쏜살같이 간다. 어릴 땐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른들이 “나이 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년씩 지나있다.”라고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몸과 마음과 환경을 옥죄는 감옥과 족쇄가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하루는 너무 길었다. 왜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은 많은지. 무엇을 하라는 명령엔 그저 ‘공부 열심히 하라.’ 정도나 있었나, 대체로 ‘하지 마라.’라는 금지의 연속. 그러니 1년이란 길지 않은 시간이 <파수꾼>의 세 주인공 소년들에겐 긴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토록 서로 붙어 지내며 제일 친했던 친구들이 그렇게 갈가리 찢겨나가고 서로에게 최악의 상처들을 주고받은 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는 건 그 어떤 신파 이별 영화를 보는 것보다 슬프고 아팠다. 균열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했고 작은 오해와 작은 거짓말들이 이 균열을 걷잡을 수 없을 정도까지 키웠다.

<파수꾼>은 소년들의 성장기와 우정을 다루는 영화들이 으레 묘사하고 따르는 ‘남자들만의 질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힘과 주먹을 향한 동경을 강조하거나, 남자아이들끼리 모여 포르노를 보면서 우의를 다지고 서로 일탈 행위의 ‘공범자’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집단을 공고히 하거나, ‘남자들만의 의리’가 가장 끈끈하고 강한 것인 양 허풍을 떨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존에 답습돼 온 소년 성장물의 공식을 아무렇지 않게 날려버리거나 비튼다. 영화가 오히려 집중하는 것이 이 소년들의 관계가 어떻게 작은 거짓말과 순간의 욱하는 마음으로 그토록 쉽게 어그러지는가이다.

학교의 ‘짱’인 기태는 주먹과 힘, 권력에 대한 동경보다는 ‘누구에게나 주목받고 관심 받는’ 데에 대한 갈망이 더 커 보인다. 베키에게 주먹질을 행사하는 것에도 응징과 보복의 의미보다는 ‘그렇게라도 말을 걸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 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척하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베키가 유일하게 그에게 ‘반응’을 보일 때가 기태가 주먹을 날리고 괴롭혔을 때이기 때문이다. 반면 매번 기태에게 맞기만 하고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으며 괴롭힘을 당하는 베키, 혹은 희준(박정민)에게는 피해자 특유의 움츠러듦이나 공포, 무력감보다는 오히려 고행을 적극적으로 감내하려는 수도자들 특유의 굳건한 의지가 보인다.

파수꾼

서로 짐짓 여유를 가장하고, 상대를 탐색하며, 잽을 날린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런 면에서 주먹질을 행사하며 패거리를 불러모아 베키를 괴롭히는 기태만큼이나, 기태를 대하는 베키의 태도에서 더 무섭고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한 구석이 있다. 마음을 닫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주먹질의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이 아이러니. 하지만 이것은 물리적 폭력에도 이유가 있다는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손쉽게 물리적 폭력을 쓰는 것이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은지를 드러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 기태는 참 나쁘고 한심하면서도, 불쌍하고 안쓰럽다. 기태의 어리석음이 심지어 자신을 유일하게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친구 동준을 향해서도 발휘될 때도, 그리하여 결국 동준까지도 기태에게 등을 돌릴 때도, 기태가 더없이 한심하게 여겨지면서도 기태의 그 상실감과 절망에 오롯이 감정 이입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 친구의 우정이 유지됐던 것도 철없고 어리석은 기태에 대해 베키와 동준이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딱 그 한도까지였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쩐지 이런 풍경이, 낯설지가 않다. 그렇게 서로 깊이 신뢰하고 우정을 나눴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쉽게 오해하고 마음을 져버리나, 싶었지만 돌아보면 나도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누군가를 내치기도, 의절하기도 했다.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뒷담화를 하고, 누군가랑 감정의 날을 세우면서 일부러 그가 가장 상처받을 만한 말을 골라서 하고(가까운 사이일수록 그가 무엇에 가장 상처받을지 잘 알고 있다!), 때로는 거짓말로 상대의 속을 긁는 ‘공작정치’를 하고…. 학창시절은 물론 사회에 나와서도, 피해자로서뿐 아니라 가해자로서도. 다만 나이를 먹으면 이런 걸 ‘기술적으로 조금 더 세련된 형태로’ 하게 될 뿐이다. 매 순간 누구에게 상처를 입고 누구에게 상처를 주면서, 대체로 자신을 이유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피해자로만 여기거나 정의를 행하는 공정한 심판관으로 착각하기 마련이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며 다른 이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상처를 주고 있으면서도 그게 상처주는 행위인지 폭력은 아닌지 성찰도, 인식도 못 하는 게 일반적이기도 하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이렇게 영화를 통해 보기만 해도 모든 것의 양면이 보다 넓게 눈에 들어오는데, 정작 자신의 일이 되면 제대로 보질 못하는 게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리고는 상처받고 울고, 분하고 억울하다고 울고, 죄책감과 고통에 운다.

파수꾼

이랬던 아이들인데...

영화 속의 아이들이 아직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아이들’이지만, 스크린 밖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는 내가 그들보다 정말 어른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만약 내가 기태의 상황이었다면 과연 베키의 마음을 돌릴 다른 방법을 제대로 찾아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베키를 잃고 그냥 “나도 너 싫어”라며 등을 돌렸을까. 내가 기태였다면 과연 베키에 대한 내 진심을 제대로 전할 수 있었을까. 극장을 나오면서 이 아이들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무너져 내리는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 어쩐지 부끄러웠던 이유다.

ps. 이 글은 지난 3/21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내 독립영화kmdb 페이지 독립영화 초이스 란에 실렸다. 원문은 여기.

ps2. 요즘 떠오르는 섹시 미중년 조성하 님하가 나온다. 이분은 극에서 맡은 캐릭터에 따라 미친 존재감을 마구 드러내실 때도 있지만 <파수꾼>에선 말하자면 세 친구의 사연으로 관객을 안내하는 ‘가이드’이자 죽은 아이의 아버지기 때문에 세 젊은 배우 뒷편으로 조금 물러나 이 캐릭터들의 불안하고 방방 뛰는 혈기를 밑에서 쫘악 안정적으로 잡아주신다. 난 사실 이분과 같이 술도 마신 적이 있다, 작년 전주영화제 <그녀에게> 상영 뒷풀이장소에서. 화면과 별 다를 바 없으시다. 잘생기셨고 인상도 좋으시고 목소리도 좋고 진지하시다. 다만 눈빛은 조금 무서웠다. 마치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빛, 그래서 괜히 움찔하게 되는 눈빛이어서. <그녀에게> 리뷰는 여기

ps3. 여기저기 이제훈 찬양이 넘쳐나더라. 확실히 이제훈은 차세대 ‘스타’감으로서의 아우라가 있다. 그래서 <고지전>도 기대. 하지만 서준영과 박정민도 꽤 좋다. 사실 <파수꾼>에서 나는 서준영의 연기가 제일 좋았다. 제일 뭐랄까, 자연스럽고 능글맞아서. 앞으로도 스타쪽보다는 어느 캐릭터든 다른 배우들과 잘 어우러지며 케미스트리를 잘 만들어내는, 무슨 장르의 영화에 출연해도 다 일정 이상 해내는 재주꾼 배우가 될 것 같다. 박정민은 정말 일생일대 캐릭터 하나 잘 맡으면 그걸로 연기파로 바로 굳어질 것 같은 느낌. <파수꾼>에선 좀 뻣뻣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신인이니까.

ps4. 박정민 글솜씨가 굉장히 좋다. 읽다보면 빵빵 터진다. <파수꾼> 블로그의 ‘귀여운 베키의 일기’ 코너는 맛뵈기. 내가 이 친구 블로그를 찾았었는데 주소를 어디 뒀더라…

ps5. 6월 하순에 2만명 돌파했다. 장하다. 하지만 난 사실 10만명은 들 줄 알았…던 건 아니고. 그렇게 들기를 바랐다. 사실 옛날 같으면 들 수도 있었을텐데 요즘 시절이 하 수상해서 사람들이 영화를 안 보니까.

ps6. 감독님 인터뷰 하는 날 영화를 두 번째로 봤었는데, 그러느라 서교동으로 옮긴 이후의 필름포럼을 처음으로 가봤다. 뭔가 좀 대형 비디오방 같은 느낌;;;이었지만 교통편도 좋고 하니 앞으로도 자주 가게 되지 않을까. 우리집에서 버스로 한번에 20분이면 간다. 인터뷰 했던 거는 조만간 여기에 올릴 예정. 그리고… 오랜만에 영화 한 번 더 보고프다. 엉엉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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