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에서의 ‘아버지’의 위치에 대한 잡담

예전에 굴리던 제로보드를 오랜만에 들어갔다가 이런 글을 발견했다. 무려 2008년 1월 28일, 오후 7시 28분에 올린 글이다. (월요일이었다고 한다.)

 1. 왜 최근의 헐리웃 재난영화에는 그토록 ‘좀비영화’들이 많은가.

2. 왜 한국영화는 현재 ‘장르영화’, 특히 스릴러에 천착하는가.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고, 글을 써보고 싶은 주제입니다.

몇 년동안, 씨네21 평론가 공모가 나면 글 내야지, 내야지 하면서 결국 못 썼는데, 제가 부여잡고 있던 주제는 ‘한국영화와 아버지’였습니다. 저도 이제 그저 닥치는 대로 영화를 영화별로만 봤던 때보다 눈이 틔였는지, 일련의 ‘흐름’이라는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중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지금도 이 ‘아버지’란 주제가 변주되는 양상은 굉장히 흥미롭게 제 눈을 잡아끌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도저히 기성세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고아’들의 방향찾기가 저 스릴러 붐이란 생각을 합니다. 우석훈 식 세대구분으로 따지면 딱 X세대. 386도 아니고, 그들이 가진 권력을 나눠갖지도 못했으나, 정신적 유산은 그들에게 거리를 두려 하면서도 오롯이 공유하고 있는 이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기에(할 이야기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결국 ‘장르영화’로 몰려간다는 게 제 대강의 생각.

아울러 아버지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현재 헐리웃에서 아버지가 표현되는 양상은. 정확히 하면, 모든 죄짐을 지고 결국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30대~40대의  남자 주인공이라 생각하는데요. 이들은 아직 누군가의 아들이면서도 이제 막 어린 아이의 아버지가 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헐리웃 영화에서는 이미 권위를 모두 가진 아버지가 아들이 아닌 ‘딸’에게 자신의 권위를 승계하는 어떤 양식을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막 아버지가 된 저 나이 남자주인공들이 자신을 희생하는 건 이에 대한 아버지이자 아들인 그들의 어떤 ‘대답’이란 생각이 들고, 이 흐름은 꽤나 윤리적이라는 생각. 그러나 한국영화에선, 당분간 가부장들의 아버지 찾기와 인정투쟁이 계속될 것이고, 그 와중에 딸들은 여전히 소외될 겁니다. 그래도 요즘은 변화가 아주 빠른 편이니까, 5년 정도 후면, 아버지들이 점차 아들 대신 딸을 후계자로 삼는 과정이 영화에서 나타나게 될까요? 그리고 나면 또 몇 년 동안 박탈당한 아들들의 울부짖음이 계속될 거고, 현실에선, ‘페미 다 죽일년들’의 메아리가 더더욱 강하게 울려퍼지겠지요. 계급과 성차가 교차하며 부르주아의 딸이 정말로 노동자의 아들보다 우위를 가져버릴 수 있게 된 (‘가질 수 있다’와 ‘가졌다’는 다르죠.) 이 현실이 제겐 대단히 흥미로운 관찰대상입니다. 내가 부르주아의 딸이 아닌 이상, 이 현상이 이전보단 낫게 보이긴 해도 그렇게 반가운 현상도 아니라는 점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제 관심은 이러나 저러나 그럼에도 버려지고 소외된 가난한 노동자의 딸들이니까요. 이게 제 존재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참, 갑자기 생각난 건데, 프레시안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아마 씨네21 평론공모 같은 거에 응시 자격이 안 될 듯해요. 이 ‘어정쩡한’ 위치, 정말 싫군요.

 

내개 ‘아버지가 가부장의 권위를 (아들이 아닌) 딸에게 이양해주는’ 장면은 <나이트 플라이트>의 촬영장 사진 한 장의 이미지로 박혀 있다. 바로, 이 사진.

사실 영화 촬영장에서의 한 장면일 뿐인데,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나이트 플라이트>가 개봉했던 그때, 이 사진은 그저 촬영장 사진 하나가 아니라 좀더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이 주제를 좀더 진득하게 팠더라면 상당히 흥미로운… 정도는 아니고 나름 나쁘지 않은 평문 하나를 완성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이미 지나가 버린 버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새롭지도 않게 된 관점.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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