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윤성현 감독 인터뷰 (2011. 3. 8)

많은 성장영화와 청춘영화들이 ‘빛나는 청춘’을 다루지만, 그 빛이 언제나 찬란하고 형형색색의 눈부심만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때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베이는 듯한 고통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겹겹의 어두움의 빛이기도 하다.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은 그 어둡고 격렬한 청춘의 빛을 다른 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빚어냈다. <파수꾼>의 기태(이제훈)와 동윤(서준영), 희준(박정민)은 이미 성인이 된 당신과 내가 여전히 지워내지 못한 채 마음 속 금고에 꽁꽁 숨겨뒀던 상처이기도, 아직 성인이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지금도 여전히 겪으며 통과하고 있는 고통이기도 하다. 마치 오래 전 알고 있었던 실존하는 어떤 사람처럼 그렇게 곁에 왔다가 다시 길을 떠난 기태와 동윤, 희준. 그들이 못내 아쉬운 관객들을 위해 여기 윤성현 감독과의 ‘영화 수다’의 기록을 남긴다.

파수꾼

김숙현(이하 ‘김’) : 흥행은 어떤가. 아카데미 시상식 시즌이라 영화가 많은 시기에 개봉했다. 극장 잡기가 쉽지 않았을 듯하다.

윤성현(이하 ‘윤’) : 개봉 첫 주에 삼천 명 정도 들었는데 이 정도 규모 영화에선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 한다. 첫 주부터 퐁당퐁당 상영을 한 건 사실인데, 흡족한 편이다. 만 명만 넘겨도 좋을 것 같다. (편집자 주 : 윤성현 감독을 인터뷰한 시점은 개봉한 지 6일째, 4천 명 가량이 들었던 때였다. 개봉한 지 3주인 현재 만 명 돌파를 바로 목전에 두고 있다.)

: ‘관객과의 대화’를 계속해서 많이 다니는 것 같다.

: 사실 관객과의 대화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관객들마다 다들 각자 해석하고 정리하는 게 다른 법인데, 내 의도를 말해주게 되면 그게 그냥 하나의 ‘정답’이 돼버리니까. 영화를 만든 자로서 분명 의도가 있긴 하지만, 그 의도대로만 영화가 읽혀야 하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관객 각자 자신만의 해석과 이야기들이 분명 있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부분들, 혹은 공백에 대해서 관객들이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로 그 공백을 채우기 마련이고, 그렇게 영화는 하나지만 각자의 이야기가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하나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관객들이 “나는 영화를 이러이러하게 봤다”고 말해주면 나는 “아,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도 맞는 것 같다”고 반응하는 편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다. 하지만 내가 ‘정답’을 말하게 되면, 영화를 보는 시선 자체가 제한적이 된다. 그런 면에서 관객과의 대화가 썩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관객 입장에서도 자신만의 해석과 감상이 ‘틀렸다’는 판정을 대하게 된다면 그리 좋을 것 같지 않다. 

: 영화란 게 원래 관객이 스스로 채워 넣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전혀 엉뚱한 해석들이 나올 경우 마음에 걸리지는 않는가.

: 영화를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게 나는 오히려 재미있더라. 예를 들어 <파수꾼>이 미스터리 구조를 갖고 가기는 하지만 관객들 중엔 이 영화를 스릴러로 보는 경우가 있다. 또 주인공 기태를 보며 공포를 느끼면서 영화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포영화로 받아들이는 관객도 있다. 내가 처음에 의도한 건 그런 게 아니었지만,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또 일정 정도 맞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부분이 내포될 수 있었겠다 싶으니까. 영화를 만들 때 모든 걸 공식처럼 1+1=2, 3+4=7처럼 계산해서 짜맞추는 건 아니니까. 본능적으로, 직관적으로 만드는 부분도 분명 있다. 그렇게 내가 무의식적으로 느낀 부분들을 읽어내고 끄집어내 언어로 공식화해주는 걸 들으면, 나도 깨달음을 얻고 나아가 재미와 쾌감도 느낀다. 내가 다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무의식적으로는 나 역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겠구나 싶으니까. 오히려 재미가 없어지는 건 정답을 요구하는 순간부터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부분은 ‘영화는 영화로서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로 해설하는 입장이 되는 순간 피곤해진다. 재미도 없고. 

: 많은 감독들이 현장에서는 물론 관객들의 반응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개중엔 “평론가들의 평을 평론하는” 감독들도 많다.

: 전문가들의 평과 관객평을 꾸준히 찾아보는 편이다.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만든 사람으로서는 궁금하니까. 작고하신 이청준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비평가가 있는데, 작품을 완전히 잘못 읽는 비평가가 있고 작가의 의도를 정확해 읽어내는 비평가가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 본인도 몰랐던 작품의 비밀을 발견해주고 무의식 속에 있었던 부분을 끄집어내주는 비평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이야기를 직접 만든 작가라고 해도 틀릴 수 있다는 얘기다. 나도 그 얘기에 동의한다. 작가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신처럼 “이건 이거다, 저거다” 할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인해서 읽는 것도 재밌게 느껴지고, 의도대로 읽어주면 좋고 뿌듯한 거고.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은 특히나 직관이 많이 개입한다. 사람을 다룰 때, 캐릭터를 만들 땐 공식에 기대어 쓰는 게 아니니까. 내가 몰랐던 새로운 지점들을 발견해줄 때 도리어 그 얘기를 통해 내 영화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생각해보는 기회가 된다.

: 감독들 중에는 시나리오를 쓸 때나 연출을 할 때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산하고 통제해야 하는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보다 직관과 본능에 의존해 본능적으로 반응하거나 즉흥적으로 바꾸는 스타일도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 반반인 것 같다. 일단 영화란 것은 현장에 나갈 때 완벽한 준비를 해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면 장면에 언제나 최선의 것만을 요구할 순 없다. 예를 들어 원래는 화창한 날씨를 원했지만 계속 어둡고 구름 낀 날씨라고 했을 때, 혹은 그와 비슷한 다른 상황이 발생했을 때 거기에 대한 대처가 돼 있어야 한다. 운에 맡기지 말아야 하고, 최선의 순간을 기대하고 가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최악의 경우에 대한 모든 만반의 준비와 대비를 해야 한다. 모든 스탭이 시나리오라는 지도를 가지고 다들 준비하기 마련인데,. 어떤 장면을 찍으려는 상황에서 갑자기 “이렇게 찍기 싫다”라며 바꿔버리면 준비한 사람들이 다 당황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같이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러고 싶진 않다. 영화 현장은 최고의 순간보다는 최악의 순간이 훨씬 많다.

: 만반의 준비를 해갔는데 현장에서 아니란 판단이 든다면?

: 전체의 얼개를 틀어버릴 정도로 바꾸진 않지만, 만반의 준비를 통해 갖춘 전체적인 얼개가 있다면 그 얼개를 지키는 한도 내에서 바꿀 수 있는 최대의 것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리허설을 하면서 배우가 어느 정도의 선을 해줄 수 있는지 알았다면, 촬영 현장에선 그걸 더 끌어올리기 위해 목표치를 더 높게 설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원하는 건 그 목표치보다도 더 높기 마련이다. 실제로 원하는 그 수위까지 끌어내기 위해, 리허설 때부터 엄청나게 준비를 하고 요구하기보다 배우한테 최대의 자유를 주는 쪽이 낫다. 대사의 자유를 줄 수는 없다, 편집을 해야 하니까. 하지만 ‘정서상의 자유’를 줄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배우한테 울라고 했는데 배우는 그 장면에서 울고 싶지 않다고 하면 울지 말라고 한다. 배우한테 자기 캐릭터를 새롭게 창조하고 자기 자신을 연출하기를 바라는 편이다. 배우뿐 아니라 스탭들에게도 ‘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창조적일 것’을 요구하는 편이다. 그러니 결국 나는 틀을 만들어주고, 각자 그 틀 안에서 최대한 노는 것이다.

: 시나리오 쓸 때는 어떤가? 계산과 이성에 많이 의존하는 편인가, 아니면 직관과 본능에 의존하나?

: 그것도 반반인 듯하다. 이야기, 플롯을 만들 때에는 굉장히 계산적으로 한다. 캐릭터 A가 이런 생각을 했으니 행동은 이렇게 하겠다는 행동의 흐름들 같은 것. 인과관계나 개연성을 굉장히 많이 따진다. 이 씬이 있었을 때와 빠졌을 때도 따져보고. 여백을 넣었을 때, 그 여백에 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수 있는 반면 결과적으로 개연성이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 판단은 이성적으로 한다. 하지만 캐릭터를 만들고 대사를 쓸 때는 다르다. 얘는 이런 애니까 이런 대사를 해야 하고 이런 정서를 갖는다, 고 계산하기보다는 얘는 왠지 이럴 것 같다, 이런 정서를 가졌을 것 같다는 직관적 느낌에 많이 의존한다. 나는 한마디로 말하면 ‘삘을 받았을 때’ 막 써내려가는 편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화면을 들여다보며 “이 인물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할까, 어떤 정서일까” 머릿속에서 공식을 만들어내고 계산을 하기보다는, 버스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화장실을 가든 어디를 가든 항상 그 인물을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딱 ‘삘이 오면서’ 대사가 생각나면 곧바로 녹음을 하거나 수첩에 메모를 한다. 그렇게 만든 캐릭터와 대사들이 확실히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전체 얼개는 이성적이고 계산적으로 쓰고, 디테일한 부분은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쓰는 셈이다. 

그런데 실은 이성과 본능이 같이 가는 것 같다. 보는 사람이 언제나 만드는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건 당연하지만, 나는 단지 이런 의도로 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쓴 부분인데 보는 사람은 거기서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걸 발견해내기도 하니까. 그런가 하면 나는 이성적이고 다 계산해서 의도적으로 썼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나중에 발견된다. 특히나 얼마 전 어느 잡지에서 <파수꾼>에 대한 평을 하나 봤는데 정말 맞고 정확한 말씀이더라.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너무도 정확했다. 내가 그 정도까지 계산해서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니 머릿속에서 직관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정말 신선한 느낌이었다.

김 : 그렇게 ‘삘로 건진’ 대사 중에 “아, 이건 내가 썼지만 정말 마음에 든다” 싶은 대사가 있다면.

윤 :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을 가다듬다가) 그런 순간이 몇 순간 있긴 하지만 ‘가장’이라고 말하긴 힘들 것 같다. 다만 가장 마지막으로 시나리오를 바꿨던 건 이미 촬영에 들어간 이후, 마지막 엔딩 신이었다. 아마 2회 차 촬영이었던 것 같은데, 기태가 자기 어머니 얘기를 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갑자기 삘이 확 온 거다. 그래서 마지막 엔딩 신을 고쳐 쓰게 됐다. 원래 시나리오에선 엔딩이 달랐다. 동윤이의 죄의식만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장면이었다. 물론 동윤이는 죄책감을 지닐 수밖에 없고 그걸 보여주는 엔딩이라는 점에서도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원래 시나리오 상태로 가면 안 되겠다 싶더라. 기태의 본질, 기태가 느끼고 있는 결핍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다. 예를 들어 기태가 “그렇게 하면 세상이 다 날 볼 거 아냐” “누가 최고야? 누가 최고야?” 하는 대사들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지 않았다. 그 장면(기태가 어머니 얘기를 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영감을 받아서 시나리오 위에다 바로 다시 고쳐서 새로 썼다. 기태란 인물에 대해 연민이 확 올라오더라. 연민어린 시선을 보여주자는 의도라기보다, 불안하고 유리알 같은 내면을 지닌 기태에게 내가 연민을 느꼈다. 그 대사들에 대해 어떤 관객들은 간지럽다, 쑥스럽다는 반응들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진심이었다. 그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맨 처음 필을 받았던 장면은 기태가 동윤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순간적으로 갑자기 삘이 와서 그 장면을 제일 먼저 썼던 것 같다. 기태와 동윤의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었는데, 그들의 담겨진 마지막 모습이 순간적으로 왔고 그걸 굉장히 직관적으로 썼다.

: 그 장면은 연인이 헤어질 때의 느낌도 난다. 사실 그 장면뿐 아니라,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기존에 통념상 ‘여성적’이라고 부르던 정서들이 주축이 된 것 같다. 

: 글쎄, 우리가 소위 말하는 ‘마초적’인 성향이 있는 관객들이 내 영화에 정서적으로 굉장히 격렬하게 반응하는 편이던데. <무비위크>의 송지환 편집장도 그렇고, 양익준 감독도 그렇고. <아저씨>의 이정범 감독은 영화 끝나고 눈물까지 흘리셨다. 그럴 만한 영화는 아닌데…

: (잽싸게 말을 자르며) 그럴 만한 영화 맞다(웃음).

: 글쎄, 엄청나게 울면서 볼 영화는 아니지 않는가. 정서적인 민감대가 강력하게 왔기 때문일 거란 확신은 든다. 내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서도 엄청 남자답다는 친구들이 격렬하게 반응하더라.

: 흔히 남자들은 ‘거하게 싸우면 친구가 된다’는 둥, 여자들보다 의리가 끈끈하다는 둥의 허세어린 과시를 여자들에게 하지 않는가. 반면 여성들의 우정은 말 한 마디에 삐지고 상처받는다고들 하고. 하지만 영화에선 희준이 삐져서 기태를 슬슬 피한다. 동윤도 나중엔 기태가 가장 아파할 말을 골라서 한다. 이런 건 흔히 ‘여자들의 싸움’이라고들 하지 않나. 반면 이제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온 흔한 스테레오타입 화된 남성의 방식으로 행동하는 건 오히려 기태다. 때린 다음 날 와서 웃으면서 “야, 많이 아프냐?” 한다던지.

: 난 기태를 포함한 세 명 다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세 명이 스테레오타입 화된 인물들은 아니지만 실제 남자아이들의 정서이지 특별히 여성적이라거나 새롭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 정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서적인 뒤틀림에서 오는 갈등이 있었던 거고. 난 오히려 그 아이들이 ‘보편적’이라 생각한다. 마초적 성향이 강하단 사람들도 그 정서를 이해하기 때문에 공감하는 것일 거다. 내가 마초인데 기태도 마초니까 공감한다는 차원보다는, 정서에서 오는 디테일함, 그 틀어짐을 다들 느끼는 거다. 기태는 겉이나 표현 방식은 투박하지만 내성적이고 아주 디테일하고 섬세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런 갈등을 느끼는 거겠지. 무딘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갈등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다. 영화들에서 “이런 게 여성적인 것들”이라고 하는 전형적인 부분들을 나는 여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보편적이라 생각한다.

: 사실 남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있는 부분들을 사람들이 남성적, 여성적이라고 가르는 거지.

: 맞다. 만약 굳이 그런 어휘를 빌려 표현한다고 한다면, 나는 오히려 여성이 더 남성적이고 남성이 더 여성적이라 생각한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살아오면서 느낀 바로는 남자는 정말 약하다. 여자는 정말 강한 것 같고. 그 강함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자의 내면이 훨씬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다들 너무 약하고 상처도 잘 받고 잘 준다. 그러니 실제적으로는 우리가 스테레오타입화한 ‘여성적’이란 말은 남자에게 더 어울리고 강인함 등 ‘남성적’이란 말은 여자한테 더 어울린다.

: 마초적인 사람일수록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말을 듣고 보니, 기태의 그런 약한 부분을 경험했기 때문에 사회에 나와서 더 마초적인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그렇다. 만약 내면이 강하거나 무디고 상처도 잘 안 받는 성격이라면 그런 식의 소통 방식을 취할 리가 없으니까.

<파수꾼> 윤성현 감독


: 기태가 희준을 때리는 장면도 참 간절함이 보였다. 희준이가 폭력 외엔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때리면 어쨌든 반응을 하니까 그 실낱같은 반응을 얻기 위해 때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참 희준이 얄밉기도 하고.

: 참 얄밉긴 하지. 하지만 그런 소통 방식을 취하는 게 희준이 입장에선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기태가 희준에게 원하는 반응과 행동이 있다. 희준은 그걸 알지만 애써 외면하는 거다. 그걸 해주는 순간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진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둘이 서로 상승효과로 가는 거다. 누구 한 명이 다르게 행동했다면 같이 주저앉을 테지만 둘이 서로 치고 올라가듯이 상승하는 거다. 하지만 참, 얄밉지.

: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심지어 때리는 기태보다 오히려 희준이 정서적으로는 더 폭력적이 아닌가, 란 생각까지 들더라. 상대를 자꾸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희생자 포지션을 더 강화한 달까. 하지만 두 번째 보고 감독의 말을 들으니 희준이가 이해가 간다. 기태와 갈등하게 된 이후 “내가 니 꼬봉이냐?”라는 대사를 반복하던데, 기태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면서 기태한테 종속이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보이기도 하고.

: 기태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도 불만이 있었을 거다. 친구 관계라는 건 기본적으로 자신과 대등하게 느꼈을 때 친구지,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했을 때 상대를 친구로 느끼진 못한다. 차라리 위에 있는 사람을 친구로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아마도 기태를 정말 좋아하니까 기태랑 대등해지고 싶었을 거고, 대등해지기 위해 그러한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나도 만약 기태에 대한 애정이 있고 기태와 정말 친구가 되고 싶었다면, 기태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거다.

: 그런 점에서 동윤은 기태가 미쳐 날뛸 때 유일하게 기태를 제압할 수 있었던 아이였던 것 같다. 기태를 따라다니던 다른 아이들도 말 한 마디로 제압한다. 사실 남자들의 서열과 수직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인물로 보였다.

: 그렇다. 희준과 기태의 갈등이 계급적인 갈등이라면, 기태와 동윤의 갈등에는 계급의 문제가 제외돼 있다.

: 희준이가 또 얄미웠던 게, 기태가 애지중지하는 공까지 받았으면서 모든 책임을 동윤이한테 떠넘기는 듯하다는 거다. 기태 아버지한테 얘기할 때도, 마치 세 사람이 모두 친했던 시절은 기억도 안 난다는 듯 말하지 않나. 아무리 사람의 기억이 사후에 재구성되는 법이라곤 해도 말이다. 심지어 동윤에게 “피하지는 마라”는 대사까지 하지 않나. 정작 피했던 건 자신이면서.

: 발 빼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확실히 비겁해 보이지. 하지만 그건 무의식적인 비겁함이다. 자기가 기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거란 걸 아예 생각을 못 하는 거다.

: 당신이 아까 언급한 그 평에서도 지적했듯, 희준인 아마 평생 그걸 생각도 기억도 못한 채 살아갈 것 같다. 반면 동윤인 보다 많은 걸 기억하고 살아갈 것 같다.

: 그렇기 때문에 동윤이가 좀 더 가까이 진실에 접근하는 거다.

: 영화에서 시간대가 마구 오가는 건 시나리오에서부터 그렇게 설정한 건가? 아니면 편집 때 손을 본 건가? 

: 시나리오 쓸 때부터 설정한 거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전형적인 이야기의 형태를 하나 던져놓고 이후 그것의 터닝 포인트를 주지 않나. 아버지와 가해자/피해자라는 두 가지 정보를 준 뒤 ‘아버지는 피해자의 아버지겠구나, 가해자를 잡으러 가겠구나’라는 게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의식이라면, 그걸 뒤집고 상상을 깨면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나가는 거지. 그러면서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이 되는 거다. 그러다보니 그런 형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편집으로 만들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아까 언급한 그 평이 이걸 제대로 분석을 해줬다. 하지만 정작 쓸 때 그런 정도까지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쓴 건 아니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라는 표피를 보여준 다음에 통념을 한 번 꼬고 내적인 디테일, 진실에 다가가는 이야기를 쓰자, 라고 정한 수준이었다.

시간이 분절적이다 보니 이래저래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겠구나, 더 자유롭겠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더라. 착각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분절적이라 해도 그 안엔 이미 플롯이 있었고 틀이 생겨져 있더라. 그 틀을 벗어났을 때 굉장히 이상해지더라. 도리어 영화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갈 때 편집이 더 자유롭고, 분절적으로 했을 때 더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 많아진다. 틀을 완전히 바꾸게 되진 않더라. 그러다보니 그 틀을 지키는 선에서 아예 에피소드를 통째로 빼는 경우는 있었어도 신을 바꾸고 재배치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신의 흐름에 의도와 이유가 다 있었으니까. 콘티를 짤 때도 촬영할 때도 다 시나리오에 맞춰서 하게 되더라. 지금 영화는 시나리오보다 조금 날씬해졌긴 한데 척추가 바뀌거나 하진 않았다.

: 관객이 혼란을 느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지는 않던가? 사실 많은 영화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고 해도 화면의 톤을 달리 하거나, 자막을 박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친절한 구분점을 주려 하지 않나. 

: 별로. 관객들이 당연히 어렵지 않고 익숙하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영화 100편 중 30편이 시간이 왔다 갔다 하고 과거 플래시백이 오간다. 30년대 영화서부터, <시민 케인> 이전부터 그랬고 느와르 장르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플래시백도 아니다. 이 영화는 작가의 시점에서 진행되지 누구의 의식을 따라 흐르지 않으니까. 영화가 진행되면서 화자가 서서히 바뀌고 시간대도 그냥 과거 한 시점이 아니라 그보다 더 과거, 보다 현재에 가까운 과거 등 다양한 시간대가 있으니까 관객이 영화를 보며 재배치를 해야 하는데, 충분히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끊임없이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게 되고 나름대로 각자 플롯에 있는 불규칙 속에서 규칙을 만들어나가게 되는데, 이 정도 선이면 크게 어렵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관객의 머릿속에서 재배치되는 과정이 있어야 이 이야기가 더 힘을 갖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확신이 좀 없었다. 시나리오 모니터링을 하는데, 사람들이 시간을 계속 재배치하면서 유추하는 과정에서 헷갈려하더라고. ‘과거’라고 써달라고 하거나 자막을 박으라거나. 난 굳이 그렇게 할 필요를 못 느꼈고 오히려 짜증이 났다. 정말 헷갈리나? 의심이 들기도 하고. 그러니까 삐딱한 오기가 생겨서 더 헷갈리게 만들고 싶더라. 과거가 분절적이고 불규칙한 형태로 배열돼 있던 걸 통합을 해버리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영화가 실제로 그렇게 돼버렸다. 기태나 동윤이 지닌 정서적 맥락에서 그게 너무나 적절한 표현 방식이 돼버린 거다. 처음 의도는 ‘에잇 나 삐닥해질 테다’라는 마음이 일부 있어서 시간의 인과관계를 확 틀어버린 건데 말이다. (웃음)

: 특히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동윤이 자기 방에서 울다가 일어나서 나가면 1년 전 식탁 신이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면 다시 1년 후였던 그 장면이었다. 그런 전환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게 너무 신기하고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식탁에서는 나중에 카메라가 서서히 동윤 쪽으로 이동하는데, 프레임 안에 있는 기태는 거울 속의 기태다. 과거와 현재가 통합된 느낌이기도 하고, 기태가 마치 유령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 환영 같기도 하고.

: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다. 고집스럽게 한 프레임에 한 인물씩만 잡는데, 동윤이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는 걸 보면 과거의 장면이 아니지 않나. 과거와 현재가 같이 있는 느낌이다. 과거와 대화하는 느낌, 동윤이 현재에서 과거에 말을 걸고 독백을 하는 느낌이었다. 정서적인 힘이 정말 강력하더라.

윤 : 하나의 정서적인 표현방식이라고 보면 되겠다. 과거라고 하기도, 현재라고 하기도 뭐하다. 순전히 과거이기만 하면 현재의 정서가 그렇게 나올 순 없을 거다. 반대로 온전히 현재의 시점에서 하는 회상이라면 과거의 부분들이 그런 식으로 표현됐을 것 같지 않다 그냥 과거의 모습이 담겨졌겠지. 단순히 과거의 장면을 회상한다거나 환상인 장면은 아니다. 과거에 느꼈던 감정과 현재에 느낀 정서적인 부분을 통합한 거라고 보면 된다. 이전 영화들이 흔히 그걸 비주얼적으로 혼합을 시켰다면, 이 영화에선 정서적인 측면에서 혼합이 된 것이다.

: 그 모든 짐이 살아남은 자 중에서도 동윤의 어깨에 짐으로 남겨진다는 생각에 참 마음이 아팠다. 동윤은 평생 그 짐을 지고 살아나갈 것 같고.

: 정확히 그런 의도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성장영화’라고 표현한다. 글쎄, ‘성장’이라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성장은 긍정의 의미가 강하니까. 하지만 부정적 의미에서의 ‘성장’도 포함된다면, 내 입장에선 그러니까 동윤이 어른이 된 거라고 볼 수 있다. 죄의식과 상처를 지닌 채로 성장을 해버린 거다. 그런 의미들이 어깨에 짐이 되어 그걸 평생 짊어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다. 

: 한편으로는 살짝 위안이 느껴지기도 했다. 동윤 외엔 기태란 아이가 얼마나 심약한 아이었는지, 고통을 겪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10년 후쯤 동창회에서 만나면 “아 그때 그런 애가 있었는데 자살했어”라고 가볍게 말하겠지. 그 짐을 혼자 갖고 가는 동윤이가 안쓰럽고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동윤이 한 사람이라도 기태를 기억해주겠구나, 기태를 이해해주겠구나 싶더라. 근데 나는 왜 이렇게 기태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걸까, 내가 마초라서? (웃음)

: 나도 그렇다. 기태는 참 외로운 존재구나 싶다. 이 영화의 관객들은 주로 동윤의 입장에서 정서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기태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객이 많을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썼을 때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구상하게 됐는지 여러 가지 계기가 있고 기존의 인터뷰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본질적인 부분이 따로 있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왜 이 시나리오를 쓰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처음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얼마 전에 다시 떠오른 거다. 물론 기존에 했던 대답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호기심이나 이해하고 싶은 마음, 어두운 성장, 다 맞고 내 의도였다. 실제로도 어두운 성장을 표현했고. 한국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무게감과 죄책감, 상처를 지닌 채 성장할 수밖에 없고 김 : 그걸 ‘성장’이라 표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 : 고통에 익숙해진다는 것 아닌가. 그런 허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이 영화의 의도 맞다. 영화에서 어른이 진실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방관자로 머무르지 않는다. 결국 어른은 허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핵심은 아니다. 얼마 전에야 처음 이 시나리오를 쓸 때의 마음을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국 본질과 핵심은 ‘외로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통의 부재, 소통의 공격적인 방식… 모두 ‘외로움’에 관한 거다. 그리고 기태는 외로움의 근원이 되는 존재다. 만약 이 영화에 공감한다면 그 외로움에 공감하는 것일 게다. 나 역시 참 외로운 존재고. 친구나 부모가 있든 없든,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고 누구나 결핍돼 있는 부분이 있다. 그 외로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자 했다는 게, 이 영화를 만든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이유다. 내가 이 영화를 만들긴 했지만 나 역시 관객의 입장에서 위안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기태는 내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외로움이 싫어서 항상 친구들을 몰고 다닌거겠구나. 싶다. 마지막 장면 대사에서도 유추되지만, 기태가 학교에서 ‘짱’이었던 것도 권력이나 힘, 서열에 대한 욕망보다는 너무 외롭기 때문에, 외롭지 않고 싶어서 주목받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단 한 장면, 죽기 전 기태가 혼자 집안 소파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 많은 관객들이 그 장면, 기태가 혼자 앉아 있다가 뒷모습이 나오면서 일루전이 생기는데 그 장면에 대해서도 궁금해 한다. 기태가 실제로 그랬던 적이 있는 건지 아니면 동윤의 꿈이나 환상인 건지. 일부러 모호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기태가 혼자 앉아있었던 건 사실이겠지만 동윤의 죄의식이 반영된 꿈의 잔상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그 장면의 비밀을 밝히자면, 망원렌즈인데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을 막 움직인 거다. 아, 이런 얘기 하면 안 되는데.

: 사실 영화가 처음 시작하는 장면에서도 초점을 다 날려서 아이들 얼굴이 안 보이지 않나. 초점이 아주 얇아서 어쩌다 가까스로 초점이 맞는 게 애들이 피우는 담배 연기나 머리카락 정도다. 그러다 바로 기태가 누구를 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거기서 맞는 애가 당연히 희준인 줄 알았다. 그 뒤로 바로 가방 신이 이어지기도 하고. 그런데 두 번째로 영화를 보니 맞는 애가 희준이 아니더라. 기태가 때리는 걸 동윤과 희준이 보고 있던데. 

: 타 학교 아이다. 원래 편집에서 들어낸 부분이긴 한데, 기태와 아이들 사이의 사건에서 시간 순서로 보면 중반 정도에 해당하는 에피소드다. 기태가 희준이를 때리게 되는 거 바로 이전에 있는 사건이다. 일련의 에피소드를 통째로 들어내서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한데, 그 장면만을 끝까지 남겨둔 이유 중 하나는 기태의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도 그 장면이 시작 부분에 놓이니 영화 전체가 핀이 나간 느낌이 나지 않던가? 전반적인 이야기의 진실의 핀이 나간 느낌말이다. 그 핀을 맞추는 게 관객의 몫이고. 안개 같은 느낌이기도 한데, 안개를 보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면서 진실을 알기 위한 열망의 첫 장으로서 보여주고 싶었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지진 않더라.

: 차기작은 준비하고 있는지?

: 안 하고 있다. 필을 받아야 추진하는 편인데 아직 ‘이거다’ 싶은 것, 나를 열정적으로 만들 만한 아이템이 잡힌 것 같진 않아서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관심이 있고 사람이라는 존재에 흥미가 있다. 뭔가 사회적 이야기를 하더라도 사회보다는 사람이 연관이 돼 있는 부분에 관심이 간다. 사실 사회와 사람은 긴밀히 연결돼 있고 모든 것의 본질엔 사람이 있으니까. 결국 사람에 관한 얘길 하고 싶은 거다. 이야기 구조에서부터 영화적인 것까지, 어떤 사람이 어떤 정서를 이야기할까가 제일 먼저 정해져야 하는데 아직 명확한 게 없다. 좀 여유를 가지면서 계속 고민할 예정이다. 

: 앞으로도 독립영화 형태로 계속 영화를 찍을 예정인가? 아니면 기회가 된다면 규모가 큰 상업영화 형태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나? 하긴 당신에겐 독립영화, 상업영화의 구분이 의미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 개인적으로 롤 모델로 생각하고 존경하는 감독이 구스 반 산트다. 굉장한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그도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지 않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유도리가 있다기보다는 중간자적 느낌이다. 어떤 형태로 영화를 만드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엘리펀트>는 그런 규모로 그런 방식으로 찍어야 맞는 영화였다. 돈을 들여 만들 만한 스타일의 영화도 아니었고, 그게 맞는 옷도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굿 윌 헌팅>의 경우는 또 달라서 <엘리펀트>의 방식으로 찍을 영화가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무슨 얘길 할 것인가가 중요하고 거기에 옷을 맞춰야 한다. 큰 예산을 무조건 따고 싶다거나 저예산의 영화만 고집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다. 영화에 따라 맞는 옷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나는 항상 창조적이어야 한단 생각하고, 완벽하게 100% 창조적일 순 없지만 창조적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조력의 바탕인 상상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인간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 구조 자체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경우다. <엘리펀트>는 대단히닣혁신적이지 않나. 세상에 이건 듣도 보도 못한 방식 아닌가. 물론 형태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형태가 특별하다고 대단한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엘리펀트>는 형태와 그 외 모든 게 본질을 꿰뚫고 있는 힘이 있다. 그것 또한 창의력이다. 그런가 하면 <블레이드 러너>처럼 형태적인 창의력, 공간적인 창의력, 사람이 주어져 있는 환경에 대한 창의력도 있다. 그러니 어느 부분이 우선이 되는가에 따라 달라질 거다. 플롯에서 오는 새로움과 실험정신을 담는다면 대중영화에선 리스크가 클 것이다. 그런가 하면 <블레이드 러너>나 <솔라리스> 같은 틀에서 얘기가 되는 영화들도 있다. 그럴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그런 형식으로 하고 싶다. SF영화의 예를 많이 들었는데, 내가 원래 SF를 굉장히 좋아한다. <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 같은 영화나 <미지와의 조우>도 좋아하고. 스필버그는 너무 과소평가된 감독이란 생각도 든다. <우주전쟁>만 해도 그렇고.

: <우주전쟁>이 과소평가를 받았다는 데에 격하게 동의한다.

: 스필버그라는 이름 대문에 과소평가를 받은 것 같다. 남들은 지루하다, 겉멋 들었다고 얘기하는 <뮌헨>도 나는 재미있었다. 아 그런데 왜 이런 얘길 하고 있지?

: 그럼 언젠가는 당신이 만든 SF영화도 볼 수 있는 건가. 너무 기대되는데.

: 기대는 하지 마시고. (웃음) <엘리펀트>나 <게리>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런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면 너무 즐겁고 행복할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SF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어느 쪽이나 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맞는 옷에 따라 영화의 형태는 달라지겠지만 결론은 ‘창조적인 것’이다. 새로운 걸 창조한다는 면에서 다 같다.

ps. 이 인터뷰는 3월 중순 혹은 하순경 네오이마주에 실렸다. 직접 인터뷰하고 사진찍고 정리했다. 사진을 잘 찍고 싶다.

ps2. 윤성현 감독을 다음에 만난 건 인디포럼 개막식날 내 직장,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극장이라며.

ps3. 이렇게 무서운 데뷔작을 찍은 감독의 두 번째 영화는, 정말 기대되는 한편으로 두렵다, 혹시나 실망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부디 서퍼모어 컴플렉스를 훌쩍 뛰어넘으시기를.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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