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 미키오 | 흐트러지다 乱れる Yearning (1964)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62년작 <흐트러지다>는 형수와 시동생 간 연정이라는, 다소 센세이셔널한 소재를 다룬다. 물론 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1960년대 – 전쟁의 상처는 가셨으되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있는 – 일본에서 이러한 사랑은 상대에게 고백하고 서로 나누기는커녕, 제 감정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조차 버거운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 영화에서 다루는 것은 결국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정념과 애정만이 아니다.   


상처한 형수 혼자 가게를 이끌어가든 말든, 대학까지 졸업해 25살이나 되고도 매일 술집에 마작에, 빠찡코나 하고 다니던 시동생이 어느 날 사랑을 고백해온다. 그가 그렇게 방탕하게 지내는 것은 실은 말로 고백할 수도 없었던 사랑, 바로 당신 때문이라고. 여자가 무너지는 건 그 순간이다. <흐트러지다>의 이 장면은 충격을 받아 놀란 표정의 여자, 레이코(다카미네 히데코)의 얼굴에 집중한다. 영화 내내 단정하고 조용한 말씨와 표정과 행동을 보여주던 단아한 그녀는 이 장면에서 격동하는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낸다. 


乱れる

다마키네 히데코의 경이로운 얼굴

그런데 이 장면은 영화가 반 이상 진행되고 나서야 등장한다. 그 앞부분에서 공들여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이 가정을 이루고 있는 이들의 관계와, 이 가정이 어떻게 복구되어 지금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사실 이 가정의 사적인 역사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전쟁 후 복구와 재건, 그리고 그 와중 겪는 ‘자본주의화’라는 일본 사회 전반의 변화의 모습이다. 당장 영화의 시작 장면 역시 동네를 돌며 스피커로 ‘세일’을 광고하는 수퍼마켓 트럭의 모습이 아니던가. 영화의 전반부의 긴장을 이끌어가는 것은,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대형 수퍼마켓과 잿더미 위에서 가까스로 가업을 복구해 소매점을 안착시켰다가 대형 수퍼마켓의 등장으로 변화의 기로에 선 ‘동네 구멍가게 주인들’ 사이의 갈등이다. 심지어 이웃 가게의 주인 한 명은 스스로 목을 매기까지 한다.


레이코가 속해있는 가족 역시, 결혼 반년 만에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 남편은 태평양전쟁에 나가 외지에서 전사했다 – 레이코가 잿더미 위에서 행상을 해가며 시어머니와 시누이 둘, 그리고 어린 시동생을 부양해온 것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술을 파는 이 가게 역시 서서히 위기를 겪는다.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그녀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한편 이 표현의 일환으로 재혼을 위한 맞선을 주선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향하는 가족들의 호의와 고마움의 표현이 실은 그녀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배제의 결과이자, 그러한 배제를 계속 시동케 하는 힘으로 드러난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고마움의 표현은 그녀의 이 집안에서의 위치 – 실질적인 가장 – 를 껄끄러워 하는 대사와 언제나 쌍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녀가 ‘이루어지지 못할 관계’의 남자에게서 고백을 받고 충격을 받는 장면은, 18년간 어떻게든 이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몸부림쳤던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 그리고 가족에 대한 헌신을 통해 가까스로 형성해온 자신의 인생과 정체성이 회복 불가능하도록 완전히 박살나며 무너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이 그토록 파워풀한 힘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파괴가 가족의 일원 중 그녀에게 가장 절대적 신뢰와 지지를 보여주던 시동생 – 더욱이 이 가정의 유일한 ‘남자’, 즉 이 가정의 일원들이 모두 가부장으로서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존재 – 의 애정 고백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나는 절대로 재혼하지 않고 이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그녀의 선언에 재혼을 주선하던 시누이들이 번번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록 마지못한 것일지라도) 그녀의 위치를 재차 수긍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러한 ‘파괴’와 ‘흐트러뜨림’의 순간 이후, 봉합될 수 없었던 그와 그녀의 사이는 결국 그녀의 친정으로 향하는 여정의 길에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가 싶더니 결국 주저앉고 만다. 둘은 낯선 역에 함께 내려 시동생과 형수가 아닌 비로소 남자와 여자로 만나지만, 그녀는 자신 역시 그의 고백에 가슴이 떨렸다고 고백하면서도 결국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결말이 혹여 ‘가부장제의 한계와 억압을 뛰어넘지 못한’ 것으로 읽힐까 우려스럽다. 오히려, 일견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그녀가 실은 자신의 확고한 의지와 욕망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해 왔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해 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역시, 그녀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되(그녀는 그의 키스를 뿌리친 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이러한 자신 스스로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의지에 기반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나는 그의 고백 장면이 실은 그저 애정고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정체성과 기반을 위협하고 결국 그것을 성공적으로(!) 파괴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헌신에 감사를 표하는 가족들에게 그녀가 여러 차례에 걸쳐 “내 스스로 선택한 삶, 당연한 행동”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대사를 한번 하는 것은 그녀가 가부장제를 몸으로 체화한 순종적인 여성, 너무나 착한 여성의 겸손의 표현일 수 있지만, 두번, 세번 반복되는 것은 그저 겸손의 착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헌신을 ‘희생’으로 규정하는 시선과 ‘(가장이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주장 사이에서, 우리는 표면적인 감사 대 겸손과 순종의 입장을 넘어서서, 그녀를 배제하려는 혈연에 기반한 가족관 대 그녀가 ‘만들어온’ 가족관, 나아가 스스로의 위치를 정하고 그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온 그녀의 주체성의 대립을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 결과 그녀가 이 가족 안에서 유지했던 것은 ‘실질적 가장’의 위치였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는 이 실질적 가장의 위치를 안정적으로 보장받지 못한다. 그런 위치에서, 그녀의 헌신이 오히려 안정적 제 위치를 향한 맹렬한 투쟁으로 읽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그와 함께 역에서 내린 뒤 가장 먼저 하는 대사는 “나도 여자랍니다. 당신의 고백을 받고 실은 가슴이 설레었어요”라는 고백이다. 이 고백은 물론 오랫동안 자신을 마음에 둔 남자에게 비로소 화답하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좀더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만약 그녀의 헌신이 정말로 희생이 아닌 그녀의 주체적 선택의 결과였고, 그의 고백이 그녀의 이 선택을 뒤흔들고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이 장면은 흔히 해석되기 쉬운 ‘가부장제적 윤리 대한 도전’보다 오히려 전통적으로 요구된 – 종종 강요된 – 여성의 성역할을 받아들이며 순응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 낯선 곳에서 그에게 자신의 ‘여성’을 선언하고 함께 여관에 들었으면서도 결국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도 충분히 납득된다. 그녀에게 어느 날 찾아온 로맨스는 그녀의 여성성을 복원해주되 대신 자신이 오랫동안 스스로 만들어온 가족 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잃게 만드는 것, 그러므로 결국 자신의 존재를 건 투쟁을 촉발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검을 향해 쓰러질듯 뛰어가던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와 감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표정이 오랫동안 잔상을 남기며 끝없는 상념을 일으키는 가운데,문득 그의 죽음은 그녀에게 파탄을 안겨준 이에게 운명이 내리는 벌, 혹은 그녀를 향한 운명의 ‘다른 방식의 사랑’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은 결코 그녀가 원치 않았던 복수를, 결코 그녀가 원치 않았던 방식으로 그에게 해준 셈이다. 운명, 혹은 신의 사랑은 인간의 이해, 혹은 인간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고 표현된다. 그녀가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은 바로 이런 점에서다.






ps. 서울아트시네마에서 2011. 7.15-7.24 간 열린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에서, 7/17 19:30에 보다. 


ps2. 그 유명한 기차씬은 새삼 언급하지 않겠다. 이 장면은 정말 기차 안 풍경(정확히 하면 그녀를 향한 그의 시선, 그리고 그와 그녀 사이의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와 기차 밖 풍경을 번갈아 병치하는 편집으로 엄청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그 어떤 스릴러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수준의 어마어마한 서스펜스. 덕분에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 과연 ‘시선의 내러티브’의 거장다운…


ps3. 필름 소유자인 시네마테크부산으로부터 1962년작이라고 소개받았는데 영어자료뿐 아니라 일본 위키 등의 자료에도1964년 1월에 개봉한 1964년작이라고 표기돼 있다. 다시 확인해 보니 내 오류. 1964년작이 맞다.


ps4. 마지막 장면, 레이코의 얼굴 클로즈업을 잠깐 비추다가 더 끌지 않고 그냥 확 끝내버리는 걸 보고 경악을 했었다. 사실 이번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에서 맨 처음 본 게 이 <흐트러지다>였고, 이 영화가 준 충격 덕에 주말도 그대로 반납하고 나루세 미키오 영화들을 계속 챙겨봤다는.


ps5. 그래서 내게 이 <흐트러지다>는 나루세 미키오의 가장 유명한 영화 <부운>보다도 훨씬 더 좋았던, 이번에 본 다섯 편 중 단연 최고.


ps6. 이런 식의 분석이 오히려 영화에의 흥미를 더 떨어뜨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얼굴 *발그레*해지는 형수와 시동생 간 러브스토리로만 봐도 절절하긴 마찬가지. 그런데 저 단아하면서도 단호하기 짝이 없는 다카미네 히데코의 얼굴이, 계속해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언젠가 다시 상영된다면 꼭 다시 보고 싶다.


ps7. 이 영화에선 이토록 청초하고 단아하던 다카미네 히데코가 <방랑기>에선 스스럼없이 ‘망가지는’ 연기를 보여준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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