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의 정치학 : 2000년대에 좀비영화는 어떻게 부활했는가

2002년 대니 보일이 <28일 후>를 내놓았을 때만 해도 21세기의 첫 10년이 좀비영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2년 후 잭 스나이더가 데뷔작으로 <새벽의 저주>를 내놓았을 때 판도는 바뀌었다. 조지 A. 로메로의 시체 3부작 중 동명의 두 번째 영화를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28일 후>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질주하는’ 좀비가 등장하는 액션물이었고, 곧 ‘좀비가 빨라도 되느냐’를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영화가 그저 어쩌다 나온 예외적인 좀비영화가 아니라 이후 좀비영화의 붐의 선봉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해 영국에서 날아온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정통 좀비영화 계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로 팬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다. ‘빠른 좀비’의 등장에 격분했던 ‘좀비영화의 제왕’ 조지 A. 로메로의 귀환도 이듬해 이루어졌다. 좀비와 인간의 갈등을 계급 갈등으로 치환하며 좀비의 각성까지 담은 <랜드 오브 데드>를 내놓은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가 개봉한 2007년은 여러 모로 좀비영화의 붐에 정점을 찍은 해로 기억할 만하다. 이때를 전후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좀비물들은 국적과 형식, 내용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해졌고 ‘로컬화’됐다. <28일 후>의 속편 <28주 후>를 비롯해 로메로 감독의 <시체들의 일기>와 <시체들의 생존>, 스페인에서 날아온 <REC>, 미국산에 해당할 <좀비랜드>와 <아메리칸 좀비>, 캐나다의 <폰티풀>, 그리고 국내 독립영화 진영에서 만들어진 <이웃집 좀비>까지 다양한 좀비영화들이 국내 극장에서도 개봉했다. 물론 <워킹데드>나 <데드셋> 같은 TV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본격 좀비영화는 아닌 영화들도 좀비영화의 이미지나 플롯을 상당 부분 차용한 흔적을 보이곤 했다. 예컨대 <디센트>의 괴물도 근래 좀비들의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 반면 좀비가 현실세계의 여러 치명적인 전염병을 은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좀비영화와는 거리가 먼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도 플롯의 형식만으로는 좀비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바깥을 벗어나면 좀비를 다룬 컨텐츠들의 양은 더욱 방대해진다. 원래 고정적인 컬트팬들에게나 어필하던 하위장르였고 국내에서는 더욱 그랬던 좀비물이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장르가 됐을까? 게다가 이 기간 동안 좀비영화만이 흥한 것이 아니었다. 매혹적인 로맨스의 대상이든 좀비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 끔찍한 공포의 주체든, 뱀파이어 영화들 역시 함께 대중을 유혹했다. 그리고 올해 개봉 예정이라는 영화들의 리스트를 보건대 이런 현상은 한동안은 더 지속될 듯하다.

지상 최후의 사나이 The Last Man on Earth

동유럽에서 온 신비로운 귀족 혹은 구 유럽 앙시에레짐의 유물을 은유하는 뱀파이어와 달리, 좀비는 부두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아프리카에서 납치돼 강제이주를 당한 흑인노예들이 식민 지배를 받으며 발전시킨 종교가 바로 부두교다. 결국 좀비는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의 그늘 속 존재이자, 피식민지의 착취계층에서부터 퍼져나와 백인들을 잠식한 존재인 셈이다. 일반인으로 위장이 가능한 뱀파이어가 한때 에이즈와 동성애, 혹은 정체를 감춘 채 암약하는 공산주의와 간첩의 은유로 각광받았다면, 망가진 신체로 외형부터 식별 가능한 좀비는 보다 명백하고 또렷이 눈에 띄는 억압 기제를 은유하기 쉽다. 젠더, 인종, 이주노동자, 노숙인… 여기에 빠른 확산을 가속화하는 미디어의 존재. 이것들이 영화 속 뱀파이어와 좀비의 사회적 맥락의 의미를 풍성하게 해주는 키워드들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2000년대에 좀비물과 뱀파이어물이 동시에 부흥기를 맞았다는 점이 의미심장해진다. 사회계층의 양극화를 반영하는 두 얼굴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뱀파이어와 좀비는 전혀 다른 근원을 가졌음에도 미국 대중문화에서는 한때 거의 구별이 되지 않게 그려지곤 했다. 이는 ‘나는 전설이다’에서부터 이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지상 최후의 사나이>에서도 공히 확인되는 사실이다. 마늘과 거울을 싫어하고 밤에만 활동하는 좀비라니? 그러나 2000년대 뱀파이어와 좀비는 너무도 또렷이 구분된다. 뱀파이어는 아름답고 부자이며 우월하고 여러 초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좀비는 떼를 지어 다니며 힘만 셀 뿐 끔찍하고 잔인하고 멍청한 물이다.

애초 조지 A.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좀비영화의 근대의 원형을 제시했을 때, 혹은 소설 ‘나는 전설이다’가 아메리칸 좀비 컬쳐의 효시가 되었을 때, 느릿느릿 걸으며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좀비는 ‘풍요로운 미국 자본주의 하에서 향락적인 소비지상주의에 푹 젖은 중산층’을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랬던 좀비가 2000년대 들어 무섭게 질주하는 좀비로 변한 건 미국 역시 70년대부터 신자유주의를 거치며 중산층이 서서히 붕괴한 사회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좀비영화의 르네상스를 목격한 이 기간이 미국식 금융자본주의가 막장을 향해 치달았던 바로 그 기간과 정확히 겹친다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가 개봉한 2007년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진 해이기도 하고, 이 파국이 차곡차곡 준비돼온 것은 9.11과 이라크 전쟁 이후, 바로 2000년대 초부터였다. 급기야 작년 뉴욕 월가에서 점령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 불안, 즉 ‘어쩌면 자본주의가 정말로 망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혁명분자들의 허랑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의 공포로 전세계의 공기 속에 퍼져있다. 여기에서, 좀비가 은유한다는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대중(mass)’으로 바꿔보자. 그 편이 애초 좀비의 이미지에 더 잘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중산층이 붕괴된 상황에서는 더욱 정확한 기표이기도 하다.

좀비영화가 그려내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그 안에서 강화되는 ‘대중’ 현상이 단지 미국 내의 일만인 것도 아니다. 전세계가 ‘비슷한 시간대’를 경험하는 현재, 미국의 경제 위기의 여파로 타격을 받은 데다 정치적 불안기를 함께 겪고 있는 한국에서도 다를 건 없다. 광장에는 항상 사람이 모였고 함께 버스를 탔으며 미국 월가 점령시위를 인터넷을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들을 기존의 계급 혹은 계층의 언어로 통칭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게다가 불특정한 익명의 무책임한 거대한 군중인 ‘대중’은 이제 끔찍한 매카시즘의 구호를 아무렇지도 않게 외칠 뿐 아니라, 흔히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가치의 구호도 내뱉는다. ‘한국식 로컬화된 좀비물’이 자체 생산되기 시작한 분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 많은 호러영화의 괴물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좀비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가족과 친구였던 이가 순식간에 때려죽여야 할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 나의 생존을 위해 가족과 친구도 죽이고 짓밟아야 하는 현대인의 삶을, 좀비물 만큼 잘 드러내는 장르도 없지 않을까? 따라서 저 무시무시한 좀비에 치를 떠는 나야말로 실은 진짜 좀비일지 모른다. 또한 오늘의 사건사고에 손쉽게 남을 손가락질하고 함부로 인터넷에서 말을 나르면서도 별다른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나, 우리 개인 각자야말로 진짜로 이미 좀비가 되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평론가 이명석은 올해의 사회 키워드로 ‘좀비’를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와 생각이 다른 모든 집단의 움직임은 좀비의 습격이 된다. 공감을 잃어버린 우리에겐 두 개의 선택지밖에 없다. 좀비, 혹은 좀비를 죽이는 대량학살자.(<한겨레> 2012년 1월 3일자)”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The Night of the Living Dead

2012 시네바캉스 서울의 ‘좀비 섹션’은 바로 이런 고민들에서 시작해 이 장르의 시작을 소박하게 보여주는 영화들로 구성됐다. 조지 A. 로메로의 오리지널 3부작이나 새로운 3부작, 혹은 이 6편 전체를 상영하는 것도 고려했으나 결국 로메로의 전설적인 시체 시리즈의 시작, 또한 좀비영화의 원형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중심으로 놓고 계보를 그리고자 하였다. 설명이 더 필요 없는 이 영화가 국내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것은 이번 시네바캉스가 처음이다. 그러한 조지 로메로가 (오리지널) ‘좀비 3부작’을 위해 청사진으로 삼았던 작품이 바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보다 4년 먼저 공개됐던 <지상 최후의 사나이>다.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긴 버전으로, 리처드 매디슨은 이 소설의 각색에도 직접 참여했다. “어쩌면 나야말로 진짜 좀비, 진짜 괴물일지도 모른다”라는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담아내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빈센트 프라이스의 탄생 100주년이었던 작년, 미국 곳곳에서 이 영화가 특별상영작으로 새삼 다시 불려나오기도 했다.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리메이크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90>은 탁월한 특수분장가로 호러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군림하고 있는 톰 새비니가 1990년 로메로의 도움을 받아 연출한 작품이다. (톰 새비니는 로베르토 로드리게즈의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섹스머신 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칼라영화에 여주인공이 거의 여전사로 변모한 데서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엔딩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좀비에게 잔혹성을 드러내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2000년대 로메로의 새로운 3부작의 전조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댄 오배넌의 <바탈리언>(혹은 ‘시체들의 귀환’)과 함께 로메로의 팬들에게 시체 3부작을 제대로 계승한 비공식 속편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폰티풀>은 2008년 부천영화제 상영작이자 작년에 국내 개봉을 짧게 거쳤던 캐나다산 좀비영화로, 이번 좀비섹션 준비에 큰 도움을 준 영화평론가 허지웅의 강력 추천작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통해 로메로의 시체 3부작으로부터 시작된 좀비영화의 정치학이 현재 어디까지 확장돼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미디어 그 자체가 권력이자 다국적 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는 현재, ‘언어’로 전파되는 좀비현상을 통해 때로 진실을 밝히는 힘이 되기도, 때로 사회의 암을 급속도로 전파시키기도 하는 미디어의 속성과 힘을 드러내는 우화라 할 수 있다.
저술가 박권일의 말을 빌면 “정치에 대한 축제적 열정과 탈진과 냉소가 반복되는” 현재다. 이 네 편의 좀비영화가 현재의 우리를 다시 성찰하고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장르영화, 특히 이 장르의 전설적인 고전들이 주는 말초적 즐거움과 쾌감을 새삼 다시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욱 좋겠다.

ps. 서울아트시네마 소식지 ‘시네마테크’ 7/8월 여름 합본호에 실린, 2012 시네바캉스 상영작 중 ‘좀비 섹션’ 소개글.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