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 숨바꼭질 (2013)

숨바꼭질

포스터는 그나마 이게 낫더라.

무언가 불쾌한 것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것을 승인 혹은 정당화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숨바꼭질>을 보고 나온 뒤 동행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빈자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고 승인하는가”라며 극도의 분노를 표현했었는데, 나는 ‘승인’의 부분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혐오와 공포는 좀 가졌다는 사람들이 빈자에 대해 가지는 ‘상상된’ 공포와 혐오이며, 그 ‘상상된 공포와 혐오’ 역시 일정 부분 상상된 부분에 기반한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적으로 대충 ‘못 가진 자’로 자신을 포지셔닝하기 좋아하는 우리들은 “가진 사람들이 빈자에 대해 ‘그런 상상된’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고 이 영화는 그걸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 백성수에 집에 난입해 무기를 휘두르는 범인의 모습에는 “그래, 그렇게 혐오스럽다면 정말로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돼주지!”라는 오기가 읽힌다. 일부 관객들이 만약 범인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면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가 빈자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는 가장 큰 근거. 주인공 백성수(손현주)는 물론 그의 가족 누구에게도 관객이 감정이입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관객이 가장 무방비적으로 동정과 연민을 품기 쉬운 그의 아이들마저도 상당히 밉살스럽게 그려진다. 전미선이 연기하는 백성수의 아내, 민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손쉽게 편견을 갖고 얄미워하는 ‘사모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백성수의 청결과 정리정돈에 대한 강박은 영화 곳곳에서 표현되고 이는 지나치게 히스테리컬하다. 그의 강박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심해지는데, 이와 함께 그의 과거가 드러날수록 그의 고군분투를 적극적으로 감정이입하며 응원하기보다 오히려 한 발 물러나 냉소적으로 지켜보게 만든다. 그의 불안을 촉발한 것은 실제로 그의 눈앞에 존재를 드러낸 실체를 가진 형이 아니라, 형이 남긴 벌써 몇 달 전의 흔적, 혹은 그가 가게 앞에서 만난 노숙인을 통해 그가 형에 대한 기억을 상기하면서다. 백성수의 죄책감이, 혹은 공포가 투영된 결과다.

사실 빈자들이 살고 있는 슬럼에 대한 혐오는 그곳에서 살고 있는 빈자들부터가 공유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젊은 여성의 전화통화 내용에서도 명백히 드러날 뿐 아니라, 언제나 다른 동네로 이사갈 꿈을 꾸며 “이 동네는 애들을 마음껏 내놓을 수 없다”고 불평하는 문정희의 캐릭터, 주희에 의해서도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현실에서도 종종 듣는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특히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살해를 당하는 여성의 에피소드는 단순히 영화의 도입부 에피소드라고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길다. 불균형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에피소드가 이런 길이와 무게를 가지게 된 것은, 살인마의 존재를 소개하는 통상적인 도입부의 기능뿐 아니라 이후 백성수의 공간과의 대비를 위해서다. 중반 이후 영화의 주요 공간이 되는 백성수의 아파트 내부 및 그 아파트 단지에는 겹겹이 자물쇠와 첨단기술이 차용된 록과 함께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다. 반면 슬럼가 아파트에서 그녀가 옆집 남자를 향해 “다 녹화했다!”며 위협할 때 녹화도구란 고작 컴퓨터 모니터에 달린 웹캠뿐이며, 좁디 좁은 아파트 내부는 사실상 이 웹캠 한 대로 대충 다 커버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하여 이러한 가난과 빈자에 대한 혐오와 공포로 인해 실제로 희생된 자들이 누구냐는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지도 못하고, 생존에 도움을 줄 가족이나 친지도 없이 가난한 사람들, 바로 그 슬럼 아파트의 주민들이 이 영화에서 줄줄이 죽어나간 희생자들이다. 이들은 너무 쉽게 죽음을 맞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죽음도 너무 쉽게 은폐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체를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살인범이 시체를 잘 숨겨서’만은 아닐 것이다.

평론가들이 “빈자에 대한 정상가족의 공포”라 짤막하게 치고 넘어가는 이 부분을 이리 길게 쓰는 이유. 이 영화가 비록 ‘그런’ 살인범의 최후의 발악과 그에 대한 방어와 응징으로 끝을 맺는다 하더라도, 다수의 평들에서 읽히는 어떤 불쾌감과 불편함에 동의하지 않을 뿐더러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가 “가진 자의 정당방위로 끝난다”(김혜리)는 평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영화가 정말로 드러내는 맨 얼굴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숨바꼭질

드라마에서 사람 좋은 이미지로 많이 봐서, 이 영화에서의 모습은 좀 낯설긴 했다.

사실인지 무고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후자에 좀 더 가능성의 무게가 실리긴 하지만) 백성수 역시, 말하자면 ‘박힌 돌을 빼낸 굴러온 돌’ 내지 ‘둥지를 대신 차지한 올빼미’ 출신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가진 것을 지키려는 그의 노력은 더욱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외부의 침입과 공격에 맞서 가족을 지키기 위한 백성수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 노력은 지나치게 히스테리컬하고 꼬여있다. 영화 내내 백성수의 아이들의 입을 통해 노골적으로 몇 번이나 발화되는 “우리집이야!”라는 외침을 듣다 보면, 백성수가 정말로 집착하고 지키려던 것이 사랑하는 가족인지, 물질적 토대(구체적으로 ‘집’)인지 헷갈린다. 이 가족을 가족으로 지탱하는 유일한 기반이 물질적 토대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도 있다. ‘우리 집’, 나아가 ‘편안하고 좋은 집’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비단 주희만의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허점으로 종종 지적되는 바, 백성수와 가족들이 “경찰을 부르지 않는” 것이야말로 집과 재산을 둘러싼 강박관념을 무의식 중에 드러내는 것으로도 느껴진다. 이것이 각본상의 실수인지 감독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에서 경찰이 철저히 배제되는 데에서 도리어 사람들이 현실에서 공권력을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반영된 듯해 흥미로웠다. 백성수는 여러 번, 심지어 범인의 정체를 알고 난 후에도 아내에게 “경찰을 부르라”고 하지만 그 자신은 결코 경찰에 직접 연락하지 않는다. 백성수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반경에서 심각한 범죄가 벌어지는데 이 영화의 그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겹겹의 록과 CCTV로 무장한 아파트 단지는 아파트 거주민과 이들의 편의를 위해 고용된 이들이 허용된 방식과 범위 안에서만 드나들 수 있을 뿐, ‘자격이 안 되는’ 이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통제한다. 또한 아파트 경비원을 포함해 이 아파트가 자생적으로 갖춘 보안체계에만 의지할 뿐, ‘외부’에서 제공되는 공권력/공공서비스마저도 달가워하지 않는 ‘그들만의 폐쇄적인 공간’처럼 보인다. 이 아파트 사람들에게는 경찰 역시 아파트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이기 때문이 아닐까? 경찰에 신고하는 행위가 내부의 문제를 외부에 보고/공개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이들은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정작 경찰을 부르는 것은 껄끄러워하는 것 아닐까? 혹은 경찰보다도 그들이 고용한 민간 보안업체를 훨씬 더 신뢰하는 것은 아닌가?.

이는 심지어 집과 집 사이에 통로가 연결돼 있어 누군가 가장 내밀한 공간까지 마구 드나들고 있다는 게 드러나는 슬럼가 아파트와 대조를 이룬다. 고급 아파트 단지의 주민들이 경찰을 부르지 ‘않는’ 것과는 다른 이유로, 이 슬럼가의 주민들은 아마도 경찰을 부르지 ‘못하는’ 것일 게다. 아마도 이들에게, 경찰은 자신들을 위험에서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을 쫓거나 괴롭히는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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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수네 아파트 단지 사람들이 보이는 히스테리는, 그러나 관객들에게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 영화가 비추는 거울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그러므로, 평범하고 보편적인 대중들, ‘우리’의 이중성이다. 이 영화를 보며 느끼게 되는 불쾌감의 연원은, 과연 이 영화에서 빈자들을 그리는 감독의 시선 때문일까, 아니면 이 영화가 비추는 거울을 통해 ‘우리’의 속내가 드러나기 때문일까. 주희가 백성수 일가를 집으로 초대했을 때, 백성수의 딸이 주희의 딸을 향해 “더러워!”라고 외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딸의 외침에 대해 백성수와 민지의 반응은 “씁! 혼난다!”였는데, 여기에는 난처한 순간에 아이의 입을 막는 억압만 있을 뿐 하다못해 교양인의 예의를 가르친다는 의미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앞뒤 차리지 않는 아이의 솔직한 발언과 그로 인한 난감한 순간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 장면이야말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모든 태도가 농축돼 있지 않나 생각한다. 스스로 ‘못 가진 자’라 포지셔닝하며 가진 자를 욕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진 자의 자리를 욕망하며 언제든 그 자리로 옮겨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돼 있고, 그 욕망만큼이나 가난에 대해서는 맹렬한 혐오와 공포를 갖는 이중성, 나아가 이 이중성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에 대해 이러저러한 공포를 품고 있을 것이라는 어떤 ‘기대’의 상상과, 그 이면에 그 기대와 상상을 내면화하여 오히려 더 격렬하게 빈자에 보내는 경멸의 시선.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그런 ‘빈자’가 아니라는 필사적인 구분짓기. 그리고 ‘저 빈자들을 악마화하는’ 태도에 대한 분노와 경계. 하지만 이 우스꽝스러운 이중성과 일관성 없음이야말로, 이 영화의 거울에 비친 바로 우리들의 모습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우리의 속내가 정말로 이 영화를 불쾌하고 불편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

ps. 영화 본 지는 한참인데 너무 오래 글을 만졌더니 영화가 가물가물… 글을 이렇게 썼다고 내가 이 영화를 좋아했을 거란 편견은 버려!

ps2. 백성수가 처음 형네 아파트 갔을 땐 분명 옆집(도입부에서 죽은 여자의 집)에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는데, 나중에 그 여자 남친이 나오는 씬에선 시침 뚝 떼고 아예 경찰에 신고도 안 되고 실종됐는지 죽은지도 모르는 걸로 처리…… 이럴래요? 

ps3. 검은 헬멧이 터미네이터인 것은 그게 구체적 개인의 사람이 아니라 원념 덩어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그리고 도입부 에피소드에서 웹캠에 찍힌 장면과, 사실이 어떻게 된 건지 보여주는 장면을 연결시켜 보면 검은 헬멧은 분신술도 쓸 수 있음!

ps4. 허정 감독의 단편으로 3년 전 인디포럼 개막작이기도 했던 <저주의 기간> 역시 이 영화처럼 뒷맛이 아주 찝찝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호평이 가득했지만 결코 좋아할 수도 옹호할 수도 없었던. 어쨌든 두 번째 장편이 나와봐야 이 감독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듯하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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