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드 팔마 | 패션, 위험한 열정 Passion (2012)

근래 개봉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신작 <패션, 위험한 열정>(이하 ‘<패션>’으로 칭한다)은 원래 알랭 코르노 감독의 유작 <러브 크라임>을 원작으로 삼은 리메이크 영화다. 원래의 이야기는 50대의 우아하고 세련되며 회사에서 중역을 맡고 있는 크리스틴과, 그녀를 흠모하고 동경하는 직속 부하직원인 젊은 이사벨의 이야기다. 크리스틴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스킨십을 가장한 은근한 유혹 때문에 약간의 성적 텐션도 느껴지던 이들의 롤 모델 – 후계자의 관계는, 크리스틴이 실은 교활함과 부하직원에 대한 착취로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긴장과 대결의 국면에 들어선다. 그 와중 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영화는 새로운 방향으로 방향을 튼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가 인맥과 경륜은 물론 교활함까지 갖춘 세련된  크리스틴을 연기하고, 루디빈 사니에르가 상사에게 휘둘리다 반격을 가하고자 하는 이사벨 역할을 맡았다. 아름다운 여자들의 우아하고 독을 품은 싸움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이들의 관계를 지배욕구 강한 어머니와 성인으로서 독립하려는 딸의 유사-모녀 관계로 본다면, 이 영화를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세대 간 갈등을 묘사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모녀 간의 갈등과 투쟁에 대한 우화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형식적으로도 매우 우아하고 세련된 스릴러인데, 너무 우아해서 다소간 맥아리 없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이런 걸 이야기하는 데엔 관심이 없다. <러브 크라임>이 펜싱 경기에 가까웠다면 <패션>은 진흙탕에서 부엌칼을 들고 싸우는 막싸움에 가깝다. 그는 크리스틴 역에 레이첼 맥아담스를, 이사벨 역에 누미 라파스를 캐스팅하면서 세대 차이를 날려버렸고, 여기에 섹스와 ‘피칠갑’이라는 자기다운 특징들을 대량 추가시켰다. 원작에서는 남자였던 이사벨의 비서 다니엘은 이사벨을 짝사랑하던 붉은 머리의 레즈비언 비서로 바뀌었다. 대신 그녀에게 원작의 캐릭터와 최대한 유사한 ‘다니’라는 이름과 함께, 원작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도 적극적인 역할이 부여된다. 해서 <패션>은 세 명의 젊은 여성들 사이의 물고 물리는, 좀 더 끈적한 유혹과 라이벌 심리, 섹스, 그리고 진흙 레슬링 같은 대결의 장이 된다. 크리스틴은 좀 더 여린 면과 앙칼진 면을 동시에 갖게 된 반면, 이사벨은 완숙하고 경륜 있는 여성에게 느끼는 경외가 아닌, 성공한 동년배의 상사 여성에게 열등감과 질투를 갖는 캐릭터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크리스틴과 이사벨 간 라이벌 심리의 결에 상당한 변화를 준다. 알랭 코르노의 원작에서 이사벨이 여성 버전의 전형적인 외디푸스에 가까웠다면, 브라이언 드 팔마의 리메이크작에서는 같은 커뮤니티 내에서 ‘여왕벌’에 도전하는 ‘여왕벌 워너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한동안 사랑스러운 여인 역할만 했던 레이첼 맥아담스가 원래는 <퀸카가 살아남는 법>의 악녀로 할리웃의 눈도장을 찍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상기된다. 다만 더 이상 틴에이저로 출연할 수 없는 레이첼 맥아담스는 <패션>에서 얄팍한 금발 악녀이긴 하되 좀 더 느물느물하고 교활하며, 자신의 연약함도 무기로 쓸 수 있다. 

Crime d'amour / Love Crime

의 한 장면. 뤼디빈 사니예가 이렇게 컸어요!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뭐 타입캐스팅...

뿐만 아니다. 영화 좀 본다 하는 이들은 누구나 알다시피 브라이언 드 팔마는 히치콕의 광팬이고, 자신의 영화에 ‘히치콕스러운’ 요소들을 집어넣고 시시덕거리던 감독이다. <패션>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원작에선 크리스틴이 갈색머리, 이사벨이 금발이었지만 <패션>에서는 크리스틴이 금발이고 이사벨은 흑발이다(히치콕의 영화들의 특징 중 하나가 금발 여성에 대한 편애였다.) 나아가 크리스틴에게는 금발에 어울리는 화려한 원색 계열을, 누미 라파스에겐 시종일관 검은색의 옷을 입힌다. 그리고 레이첼 맥아담스의 대대적인 마지막 반격의 컷을 준비해 놓는데, 이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첼 맥아담스는 히치콕 영화에 등장했던 고전적인 금발 악녀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크리스틴의 샤워씬이 <드레스드 투 킬>(1980)에서도 그랬듯 히치콕의 <사이코>의 샤워씬에 대한 오마주인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다니의 카메라를 통해 ‘훔쳐보기’와 ‘기록’이라는 요소도 빼먹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감독 이름을 지우고 그냥 본다면 <패션>은 그럭저럭 볼 만하고 다소 선정적이지만 어딘가 이상한 스릴러가 될 텐데, 드 팔마의 특징들을 아는 관객들에게는 굉장한 코미디가 된다. 좀 더 세게 말하면 <패션>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장난질’로 가득한 영화이다. 

해서 <패션>에선 실은 스토리가, 등장인물 간 갈등이 함축하는 의미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브라이언 드 팔마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스타일들이 어떻게 활용되고 변주되며 종합되는가가 훨씬 중요해진다. 나아가 이제껏 브라이언 드 팔마가 소위 ‘히치콕적 요소의 활용’을 통해 해왔던 장르 문법의 탐구, 그리고 장르의 클리셰를 ‘가지고 노는’ 방식 등 영화의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면이 훨씬 중요해진다. 과하게 신파적인 음악으로 시작하는 오프닝, 분할화면, 굳이 목을 ‘따는’ 살인방식과 이때 깊이 패인 칼자국 및 거기서 쏟아지는 피를 보여주는 카메라의 앵글, 심지어 마지막 장면의 ‘깜짝 쇼커’신까지. 이 영화는 브라이언 드 팔마가 그간 자신의 스릴러, 아니 ‘스릴러 장르를 탐구하는’ 영화에서 보여줬던 거의 모든 특징들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Passion

흑발 미녀 vs. 금발 미녀.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캐릭터들이 마냥 드 팔마를 위한 인형으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레이첼 맥아담스가 ‘쌍둥이 언니’를 이야기할 때뿐 아니라 누미 라파스를 대놓고 망신을 줄 때조차도 그녀에게서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이 노골적으로, 혹은 은근하게 드러나는 건 매우 흥미롭다. 그녀는 ‘금발 악녀’의 매우 클리셰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그 전형성을 어느 순간 슬쩍 배반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누미 라파스가 ‘억울한 피해자’로서 느끼는 분노와 좌절, 심지어 공포는 생생하고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놀라운 흡입력으로 관객들을 감정이입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가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순간마다 그녀의 혼란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패션>을 볼 때쯤 나는 우리 극장에서 상영했던 <침실의 표적>을 보았고, 또 거의 20년 가까이 미루어두었던 <드레스드 투 킬>을 드디어 봤다. <패션>의 레퍼런스로는 여러 모로 <드레스드 투 킬>이 잘 어울리지만, <침실의 표적>이 (일부러) 싸구려 에로영화처럼 전개되던 영화가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갑자기 돌변해 근사한 스릴러가 됐던 것처럼, <패션> 역시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영화의 흐름이 급변한다. 직장 내 억울한 주눅들고 억울한 여성의 고군분투가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꿈과 현실이, 환각과 현실이 뒤섞이며 스릴러가 된다. 원작이 어떤 영화인지 모르는 관객이었다면, <패션>에서 이사벨이 살인범의 누명을 썼다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내는 처절한 과정들에서 손에 땀을 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처절한 과정들조차 기묘한 코미디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건, 역시나 브라이언 드 팔마가 <패션>을 통해 이야기의 내용보다는 ‘형식’을 갖고 노는 데 더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일 게다. 이 점이 누군가들에겐 상당한 불쾌감으로 다가갈 수도 있겠지만, 브라이언 드 팔마라면, 제 영화에 대한 메타영화를 스스로 찍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 하지만 사오정인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이 영화 코미디였어…”라며 뒤늦게 뒹굴었을 뿐이고…

ps 1. 누미 라파스 vs. 레이첼 맥아담스 연기 스타일의 대조도 꽤 흥미로운 요소. 캐릭터가 생겨먹은 게 그런지라, 누미 라파스는 굉장히 처절하게 리얼한 연기를 하고, 레이첼 맥아담스는 일정 부분 양식화된, 연극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ps2. 금발 미녀의 귀환에서 아주 짜릿한 쾌감을 느낀 게 저만은 아니겠죠? 드 팔마가 그러라고 만든 장면인데?

ps3. 솔직히 이사벨과 다나가 유투브에 올려 대박낸다는 그 광고는… 좀… 그게 대박날 동영상이 맞나 싶던데 말이죠……

ps4. ‘빅 네임’을 내 손님으로 꼬시기 스킬을 시전하는 장면. 사실 알랭 코르노의 원작에서 그 장면은 보는 나까지 위축되고 “아 연륜… ㅠㅠ” 뭐 이랬었는데 <패션>에서 레이첼 맥아담스가 할 땐 “기집애 기술부린다”의 느낌… 물론 나이 차이가 크지만,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가 가진 그 무시무시한 포스와 연륜과 상류층 이미지는 역시나, 저런 역에 특화돼 있구나 싶기도.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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