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사랑에 빠진 것처럼 Like Some in Love (2012)

Like someone in love

포스터는 화장발.

영화의 첫 장면부터 매우 당황했다. 고전적인 유럽 비스타비전의 화면비, 즉 1.66:1의 프레임 안에 디지털 특유의 지나치게 쨍하고 선명한 질감의 그림이 만들어내는 이질적인 충돌의 느낌 때문이다. 영화는 좁은 카페 안에서 시작하고 카메라는 거의 한곳에 고정되어 시끌벅적한 카페 안 풍경을 비추는데, 이 기나긴 고정 화면에서 이질적인 느낌은 다시 강화된다. 화면의 전경에 위치하고 있던, 그러니까 주인공인 것처럼 보였던 젊은 여자와, 계속 들리는 여자의 전화 통화 목소리가 또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의처증 심한 남자친구의 집요한 의심의 질문을 받고 있는 듯, 전화받는 여자의 목소리에서 점점 짜증이 높아간다. 화면과 상관 없는 보이스오버인가, 빨리 다음 장면으로 커트되지? 싶을 무렵 비로소 카메라는 아키코를 비춘다. 그러니까 이 카메라의 위치가 실은 아키코의 시선이었던 셈이다. 좀 전에 주인공인 듯 화면을 차지했던 나기사와 반대되는 스타일의, 다소 수수한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한 앳된 아키코가 바로 주인공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편보다는 단편에 어울릴 만한 별 스토리 없는 이야기와 제한된 인물로 일관한다. 헌데 이 영화가 무려 2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이 단순한 이야기에서 끝없이 긴장이 조성된다. 앞서 말한 식의 충돌도 그러하거니와, 아키코가 남자친구와 하는 전화 통화나 이후 히로시와 대화하는 내용도 그렇다. 도무지 평온하고 정상적인 대화가 아니다. 친구와 함께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심지어 그 친구를 바꿔주기까지 해도 전화기 너머 남자친구는 아키코를 계속 의심하고 급기야는 화장실에 가보라고까지 주문한다. 어제도 거의 밤을 샜고 오늘도 시험 공부를 하고 게다가 시골에서 할머니가 올라오셨다는데도, 히로시는 이 모든 이유들을 곧 변명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며 끝까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킨다. 아키코는 이들에게 짜증을 내지만 짜증은 ‘짜증’일 뿐이다. 남자친구의 태도나 히로시의 요구를 바꾸지 못하며 자신의 처지를 설득시키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제 공간을 옮겨 와타나베 교수의 집으로 가면, 우리는 이제 잠시도 이 노교수를 가만 놔두지 않는 전화벨 소리에 시달려야 한다. 안 그래도 노구의 느릿한 노교수는 이 전화벨 소리 때문에 허둥지둥 방 안을 몇 번이고 오간다. 집안에 들어온 아키코와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못한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와타나베 교수의 집 장면이 나오는 씬이 얼마 되지 않는데 영화 내내 이 전화벨 소리를 서른 번 가까이 들은 것 같다. 그리고 중반이 지나 아키코의 남자친구 노리아키까지 등장하고 나면, 이제까지 조용한 가운데 거슬리는 침입과 충돌이 만들어 낸 발 밑의 ‘은밀한’ 긴장들이 표면 위로 부상한다. 이 긴장은 점점 부피와 밀도를 더하며 폭발 직전까지 가며 관객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데, 결국 영화는 기어이 ‘폭발’과 함께 급작스러운 엔딩을 맞는다. 듀나가 이 영화를 ‘스릴러’라 했던 건 바로 아키코의 ‘비밀’을 기반으로 이렇게 긴장을 쌓아가는 과정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우정과 진실된 관계’가 아니라, 아키코가 매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그녀의 ‘비밀’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영화에서 내내 애틋하게 다가왔던 건 인물과 인물 간 거리였다. 초반에 아키코의 ‘핑계’로서 등장했던 할머니는 그녀와 피를 나눈 혈육이지만 그녀와 가깝고도 먼 관계로 제시된다. 할머니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어렵게, 다른 사람을 통해서야 알아낼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도쿄 역 근방에서 그녀에게 7통의 메시지를 남기고, 애틋한 메시지를 전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메시지가 손녀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채 밤 늦도록 그녀를 기다리기만 한다. 그녀는 할머니의 메시지를 모두 수신하고 심지어 할머니의 앞을 스쳐지나가지만, 택시를 타고 도쿄역을 몇 바퀴를 돌면서 할머니를 먼 발치에서만 볼 뿐 할머니에게 다다가지 못한다. 물론 할머니는 아키코의 비밀을 알지 못하지만, 도쿄역에서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 – 그러나 확신하지도, 믿지도 못하는 – 상태가 된다. 헌데 그녀의 부모는 영화 속 어디에서도 흔적조차 감지할 수 없다. 

Like someone in love

안 잤습니다. 할아버지는 소파에서 잤죠. 근데 영화 내내 이 할아버지가 순진한 척하는 것도 웃기다능.

할머니와의 스침을 지나 아키코가 만나게 되는 이는 와타나베 다카시다. 그는 이 여자와 처음 만났지만 그녀의 ‘손님’이기에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고, 그들은 어색하지만 서로에게 친절하게 구는 시간을 보낸다. 반면 영화의 후반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노리아키는 그녀와 가까운 사이이지만 그녀의 비밀을 모르는, 아니, 끝까지 몰라야 하는 남자다. 그는 (영화의 첫 장면 전화상에서도 그랬지만) 화면에 처음 등장하는 그 순간부터 공격적이고 위협적이다. 그녀에게 하룻밤 손님에 불과했던 와타나베는 그림 ‘교무’에 대한 인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거나 그녀가 와타나베의 가족과 닮아서, 혹은 하룻밤을 한공간에서 보내서가 아니라, 노리아키가 등장하고서야, 노리아키의 존재 때문에 아키코와 가까워진다. 노리아키는 모르는 비밀을 그가 알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다. 반면 누구보다 아키코와 가까운, 혹은 가까워야 할 노리아키는, 그녀와 결혼을 고려하고 있음에도 아키코가 끝까지 비밀을 숨겨야 하는 사람이라는 바로 그 이유, 바로 그 비밀 때문에 그녀에게 타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와 노리아키의 관계는 비밀 때문에 타인이며, 비밀이 탄로난 순간 노리아키와의 관계가 위기에 처할 것이기 때문에 또한 타인이다. 

영화는 외견상 온화하고 점잖은 남녀와 적대적이고 공격적이며 위협적인 젊은 남자의 대결구도처럼 흘러가지만, 이 대결구도의 기반도 결국은 아키코의 ‘비밀’에서 연유한다. 와타나베와 노리아키의 권력관계를 보다 명백히 하는 것도, 이를 위협하는 것도, 일거에 뒤집는 것도 결국 아키코의 ‘비밀’이다. 우리는 와타나베의 점잖음과 친절함, 그리고 와타나베와 아키코 간 상대적으로 더 가까워 보이는 거리와 친밀감 때문에 이 성난 젊은 남자의 분노를 낯설고 무언가 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게다가 영화는 의도적으로 노리아키에 대한 관객의 반감을 부추킨다. 그러나 노리아키의 분노가 과연 그렇게 부당한 것일까? 영화가 한참 진행된 이후, 우리는 노리아키가 아키코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이 그가 원래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모종의 제보를 통해 아키코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니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아키코에게 직접 물으며 아키코의 비밀을 직접 대면하는 대신 이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며 그녀가 ‘고백’하기를 종용하는 한편으로 그 비밀의 폭로의 순간을 지연시킨다. (왜 그는 아키코에게 직접 묻는 대신 자신에게 제보가 들어온 상황을 와타나베에게 말하며 이를 부정하려 하는가?) 그런 노리아키가 결국 비밀을 알게 된 뒤 폭발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거기에는, 노리아키 자신이 감지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하는 ‘아키코와의 거리’가 존재할 뿐이다. 

처음 노리아키가 와타나베의 차 안에 ‘침입’하여 와타나베의 정체를 물을 때, 그는 와타나베가 별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아키코의 할아버지라고 ‘적극적으로 오해’한다. 디제님의 지적대로 차 안에서 이들의 권력관계는 절대적으로 와타나베의 우위로 드러나고 이들의 계급적 격차가 명확하게 드러나며, 이 권력관계는 노리아키의 정비공장에서 완전히 역전된다. 그러나 노리아키가 와타나베의 차 안에서 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고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은 와타나베의 외모와 차에서 드러나는 나이와 사회적 지위, 계급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와타나베를 아키코의 할아버지라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제는 믿음이나 확신이 아니라 “당신이 아키코의 할아버지라 치고…”라는 가정에 가깝다. 그의 도전적이고 불안한 태도는 와타나베가 아키코의 할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당신이 아키코의 할아버지가 아니라면 언제든 치받을 준비가 돼 있다”는 경고 신호가 그의 태도에서 계속 발신된다. 그리고 마침내 노리아키가 와타나베의 차를 자신의 ‘왕국’ – 정비공장 – 으로 인도했을 때,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자신의 의심이 맞을 경우 와타나베의 나이나 사회적 지위, 계급적 우위 등 모든 통상적이고 사회적인 기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절대적 우위에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강조하는 듯하다. 감독은 이 정비공장 씬에서 노리아키를 연기한 가세 료에게 “와타나베의 차에 계속 한 손을 대고 있을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Like someone in love

마침내 비밀을 확실히 알게 된 노리아키가 어떤 식으로든 보복과 분풀이를 할 것이라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그의 보복이 아키코뿐 아니라 와타나베에게도 가해질 것이라는 사실 역시 앞에 제시됐던 노리아키의 성격을 봤을 때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 와타나베의 창에 날아든 돌덩이와 창문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는 모든 관객들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놀란 가슴을 미처 진정시킬 새도 없이 영화의 제목이 된 엘라 핏제럴드의 노래, “Like Someone in Love”가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평화롭게 흘러나올 때, 우리는 방금 전의 놀라움과 충격과 이 노래의 급작스러운 평온함 사이에서 일종의 당황스러운 쾌감을 느끼게 된다. (씨네21의 정한석 기자는 이를 ‘이상한 해방감’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시작부터 내내 상호 이질적인 것들을 병렬 배치하면서 계속해서 갈등과 긴장감을 고조시키다가, 이를 극대화하여 마지막 순간 가장 큰 폭발과 충돌이 벌어지고 나서야 오는 쾌감, 혹은 해방감. 이는 단순히 마침내 비밀이 벗겨졌다는 차원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화 초반, 아키코가 할머니와 차마 대면하지 못하고 할머니가 서 있는 도쿄역 근방을 몇 번이고 맴돌다가 결국 ‘도망쳤’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충돌을 두려워하며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문제를 대면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방식이라면, 이 영화의 엔딩은 타협 없이 이 갈등을 밀어부친 끝에 다가오는 파열이 두려운 것이긴 하되 그 이면에 어떤 쾌감을 안겨 주는지 드러낸다. 

영화가 끝나고도, 또 며칠이 지나고도 오래도록 남았던 이 마지막 장면,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으로 인해 다시 의미를 부여하게 된 앞엣 장면들을 생각하며, 나는 뜬금없이 우리가 두려워하고 피하려 하는 세계의 종말, 혹은 ‘혁명’이란 게 이런 걸까, 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뜬금없는 게 사실이지만, 근간 우리가 봐왔던 “모두 망해버려라!”라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들, 특히나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보다도, 모두가 망하는 순간이 어떤 것인지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엔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