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 | 극락도 살인사건 (2007)

프레시안에 실었던 리뷰인데, 어쩐지 이 블로그에는 올려놓지 않고 있었던 걸 지금에야 발견하고 올려놓는다.2007년 4월 10일에 ‘찬반리뷰’ 기획으로, 오동진 편집장의 지지 리뷰와 나란히 실렸다. 원문은 여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83793 글을 다시 읽어보고 좀 놀란 게, 이 지나친 비아냥조의 문장 하며, 내가 이 영화를 정말 이렇게 안 좋게 봤던가… 기억 속 이 영화는 크게 좋아할 영화는 아니어도 이렇게까지 욕 먹을 영화도 아닌데 말이다. 설사 욕 먹을 만했다 해도, 이렇게까지 쓸 필요가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전형적인, 호러 모르고 쓴 글 싶다. 껄껄   

극락도 살인사건

청순한 해일 씨.

<극락도 살인사건>은 고립된 장소에서 한정된 인원 사이에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루는 수많은 추리극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설정으로 시작되지만, 계획적으로 살인을 모의하고 주도하는 범인은 없다. 우발적 상황을 계속 겹쳐놓음으로써 주민 모두가 서로 죽이고 죽는 학살극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면서 ‘범인’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스릴러의 외피 속에 호러의 요소를 차용해 인간의 집단 광기의 공포를 표현하려던 감독의 시도는 꽤 야심만만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어정쩡하고 방만한데다 매우 무책임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112분 동안 16명을 죽이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은 일일 텐데, 춘배(성지루)나 태기(이다윗 – 보건소장을 따르는 남자아이)의 사연, 우성(박해일)과 귀남(박솔미)의 관계, 거기에 고립된 섬에 하나씩 꼭 있을 법한 귀신 얘기까지, 이 모든 것을 미스터리 추리극의 형태에 녹여내려던 욕심 많은 감독이 얼마나 바빴을지는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집단 몸싸움을 벌여 두셋씩 한꺼번에 ‘우발적으로’ 죽여버리는 설정을 반복함으로써 등장인물의 반을 허겁지겁 처치하는 건 너무 안이하지 않는가? 저마다 사연과 설정을 가지고 있었을 각각의 인물들이 이 ‘우발적인’ 상황의 반복을 통해 천편일률적으로 ‘극단적 공격성’이라는 성격 하나만 또렷이 드러내는 좀비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여기에 맥거핀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중이 큰 귀신의 존재는 영화의 흐름을 산만하게 만든다. 귀신이 인간의 신체를 취하는 장면은 (장면 자체는 꽤 큰 공포를 선사하긴 했지만) 도대체 왜 클로즈업으로까지 삽입되어야 했던 걸까? 춘배의 광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너무 넘치는 설명이 아닌가? 사실 ‘귀신’은 초자연적 존재를 긍정하는 전제를 깔고 있지 않는 한, 대체로 인물의 죄책감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중 아무도 죄책감을 느끼는 이는 없다. 마을에서 귀신을 보는 것은 춘배와 용봉거사 두 사람뿐이고 그나마 귀신에게 공포를 느끼는 건 춘배뿐인데, 춘배는 죄책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인물이다. (춘배가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감정은 ‘호기심’이다.) 그런데 영화의 엔딩에 이르면, 영화의 치명적 결함이라 불릴 만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의도적인 것이었단다. 과연 엔딩에서 밝혀지는 ‘비밀’은 영화의 앞뒤 맥락을 지나치게 이가 딱딱 들어맞도록 해준다. 저 평면적이고도 표피적인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도, 춘배의 광기도, 귀신도, 태기가 보는 아버지의 환영도, 갑자기 앓아누운 여자아이도, 우성과 귀남만 이성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한 큐에 다 해결이 돼버린다. 게다가 이 비극의 진짜 원인은 인간을 수단화한, 도시에 있는 자본의 탐욕이었다며 짐짓 엄숙한 얼굴로 설교까지 하려 한다. 영리한 각본의 승리일까? 아니, 이건 매우 무책임한 ‘데우스 마키나’의 변형판이다. 이야기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도저히 수습이 안 될 때 전지전능한 신이 내려와 ‘말씀으로’ 모든 상황을 일거에 정리해버리는 바로 그 ‘데우스 마키나’ 말이다. 허겁지겁 수습하느라 바쁜 막판의 설명조 화면이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최대한의 선의로 이 영화를 이해하려는 이들은 예컨대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1986년)을 주목하여 마을 주민들이 군사독재 하의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기를 강요받았던) 민중들을 상징하는, 시대적 비극을 은유한 사회적 영화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정말 감독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1986년이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거의 보이지 않고, 무전기 외에는 통신수단이 없고 그마저도 고장났다는 설정은 완벽한 고립상황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더 크므로, 그러한 해석은 지나친 아전인수가 될 것이다. 이 영화에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비록 우발적이고 공포에 질린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손에 피를 묻힌 그 누구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은 전혀 없이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고 탓할 뿐이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각본을 직접 쓴 감독부터가 데우스 마키나 설정을 끌어들여 모든 것을 ‘그것’ 탓이라 무책임하게 변명해 버렸는데 캐릭터들이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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