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원 | 송환

로버트 플래허티, <북국의 나누크>


자주, 다양하게 접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다큐멘터리는 무지막지한 오해의 대상이다. 일부는 엄정한 객관성의 산물이라 생각하고, 일부는 그것이 사회고발과 비판의 도구이자 결과물로 주로 사고한다. 그리고 일부는, 다큐멘터리 감독들까지 포함하여,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도구로 오해된다.


첫번째 오해는 다양한 견해와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충돌을 경험해보지 못한 미숙한 사회에서의 미숙한 오해에서 기반한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객관이란 인간 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올바른 의미에서의 객관도 아니며, 말하자면 ‘기계적 중립’이란 말이 그나마 가장 가깝다. 기계적 중립이 올바른 객관을 담보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기계적 중립이란 실질적 편들기이다. 형식적 평등이 실질적 평등을 담보하지 못하고, 도리어 실질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처럼. 다큐멘터리가 객관물의 산물이라 할 때에는, 다큐 감독이 어느 한 편을 들지 말아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자기가 지지하는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그리고 피사체의 이면의 진실을 보다 깊게, 다각도로 파헤쳐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영화이긴 하지만 <데드맨워킹>은 사형제도를 반대하면서도 지극히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독재정치를 막 지나쳐온 한국역사에서의 특수한 – 그러나 비슷한 역사를 가진 공동체들이 비슷하게 겪고 있는 – 결과이다. 거대한 적이 눈앞에 있을 때, 그리하여 우회적 비판과 풍자가 무기력할 때, 특히나 ‘영화’처럼 주류 필드에서 선수로 뛰려면 대규모 자본이 모여야 가능할 때(이것은 곧 권력의 통제권 하로 더 많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과 권력의 손이 덜 미치는 인디매체는 보다 직설법을 택하기 마련이고, 한국의 영화학도들은 ‘사회를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 카메라를 들었고, 사적이고 예쁜 이야기에도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다는 사실은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옳은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그러지 않는 게 더 좋은 주제에도 ‘소통’이 아닌 ‘설교’를 목적으로 삼는 우를 범하는 많은 경우들을 태동하고, 이것이 세번째 오해가 된다. (나는 ‘일방적’인 정보전달과 계몽의 다큐멘터리의 필요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이런 다큐멘터리가 많이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러지 않는 게 더 좋은’ 곳에도 이런 잘못을 한다는 데에 있다.) 이 경우 심할 때에는 피사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한다는 1차적 기본전제도 건너뛰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마이클 무어, <로저와 나>


<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 <그들만의 월드컵> 등을 연출한 최진성 감독, 그리고 <로저와 나>와 <볼링 포 콜럼바인> 등을 연출한 마이클 무어를 비난하는 일각의 목소리는 주로 첫번째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그들만의 월드컵> 상영장에서 영화 상영 이후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어느 관객이 ‘객관성을 전제해야 할 다큐멘터리에서 일부 피사체를 희화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여전히 첫번째 오해가 지독히 넓게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최진성 감독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이라면 오히려 세번째 오해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가 최진성 감독에게 던졌던 ‘영화를, 너무 쉽게 – 성의없이 – 만든다’는 비판은, 다큐멘터리가 다루고자 하는 대상, 즉 피사체에 대해 더 깊게 파헤치고자 하는 노력이 부재한 가운데 감독이 (객관적이 아닌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생각만을 밀어부쳤던 흔적에 대한 정당한, 그리고 다소 모호하게 표현된 비판이다.


사실 이 세 가지 오해는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근본적 원인도 비슷비슷하다. 우리는 다큐멘터리의 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경험해 보지 못했고, 나아가서는 사회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을 축적하지 못했다. 고발과 비판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던 시대의 흔적은, 이제 한 편의 다큐멘터리의 특징이나 완성도에 대한 논의는 침묵한 채 그 다큐멘터리의 소재에만 집중하는 버릇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물론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다큐멘터리의 교과서


<송환>을 보며 감동한 것은, 이 다큐멘터리가 감독의 고뇌를 솔직하게 그대로 드러내며, 피사체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송환>은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오해를 가볍게 뛰어넘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의 송환’이라는 정치적 주제를 다루면서, 김동원 감독은 지극히 성실한 소통과 관용, 그리고 다큐멘터리스트에게 요구되는 올바른 의미의 객관성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다.


<송환>의 카메라는 다른 다큐멘터리보다 훨씬 빈번하게 클로즈업을 사용한다. 피사체의 삶과 일상 속에 깊이 들어간 탓이다. 지독하게 성실하고, 지독하게 정직하다. 피사체뿐 아니라 관객과도, 그리고 다큐멘터리스트 그 자신과도 소통을 계속한다. 이 소통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더욱 넓고, 깊어진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러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한다. 첫 만남에서 시작해 해가 가고, 그들과 교류가 깊어질수록, 영화가 계속될수록, 우리는 감독의 눈을 통해 보이는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에게 카메라의 안내를 따라 점점 다가간다. 그리고 감독이 건네는 문제제기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들의 공존과 충돌을 생생히 목격하고, 이에 반응할 것을, 생각할 것을 요구받는다. 대부분 <송환>을 기꺼이 보러 간 사람들은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당연히’ 송환되어야 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겠지만, 이들은 이전에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납북자 가족의 문제, (그저 비웃을 수만은 없는) 반공주의자들의 송환 반대에 대해서도 들끓는 단순한 감정이 아닌 차분한 이성의 문제로 바라볼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새삼,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순과 그 복잡함,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의식적 / 무의식적 ‘상처’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민족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 운동을 함에 있어서의 몇 가지 힌트들.


나의 대학생활은 워낙 NL의 아성이었던 곳에 적을 둔 덕에 ‘반미 (반제) 반핵, 양키 고홈’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반미도 중요하지만 본질은 반자본이어야 한다는 쪽으로 옮겨갔다. ‘민족은 허상’이라는 급진적인 친구들의 영향도 분명 지속적으로 존재하지만, 나는 민족문제 역시 아무리 허상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정치적인 / 사회적인) 삶을 조직하는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마치, 수학에서 ‘허수’의 존재와 비슷하단 느낌이 든달까. 반자본이라는 틀에서, 미국의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생각. 하지만 ‘하나의 민족, 하나의 조국’ 따위의 슬로건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 내가 지금 꿈꾸는 건, ‘조국’ 따위의 말이 필요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강조할 때, ‘우리’가 될 수 없는 수많은, 배제되는 사람들, 의 존재 역시 나에겐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우리의 사회적인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모순으로서 민족문제가 존재할 때, 나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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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그 자체가 상처가 되고 만 모자(母子), 마침내 상봉하다.


또 하나,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을 반대하는 이들의 패턴. 그들은 ‘비전향’이 아닌 ‘미전향 장기수’가 맞는 말이라 주장하며(‘미전향’은 아직 전향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이는 ‘전향을 해야 한다’는 가치를 전제한다, 반면 ‘비전향은 가치중립적인 말이다.), 그들의 송환을 반대하는 중요한 가치로 ‘상호주의’를 들었다. 이주노동자 문제에 있어 그들에게 적대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외국인 노동자’라는 용어를 고집하며, ‘미등록 이주노동자’ 대신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라는 용어를 고집한다. 또한 역시나, ‘상호주의’를 내세운다. 참 놀랍도록 닮았다. 송환 반대와 불체자 반대의 슬로건의 본질은 같다. 그렇다면 이 본질의 문제점은? 나는 아직, ‘제도와 법 위에 사람이 있다’는 가치 하에서의 답밖에 못 찾았다. 이것보다 더욱 본질적인 대답이, 내가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송환>은 영화적 측면에서는 다큐멘터리가 지향하고, 진화해야 할 가치에 대한 방향은 무엇인가, 내용적 측면에서는 위에 열거한 저런 문제점들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라는 숙제를 내게 남겼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계속 ‘활동’이란 걸 한다면 어떤 마음자세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아픈 반성의 기회까지. 기분좋고 유용하며 소중한 문제 제기. 그래서 감독에게 감사한다.


Dec. 27, 2006에 다시 정리한 포스트스크립트
1. 마이클 무어 감독의 <로저와 나>는 노동자 뉴스제작단에서 비디오테입을 판매하고 있다. 여기에 작품소개가 있다.
2. 놀랍게도 <송환>의 홈페이지가 아직 살아있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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