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

시네마데크를 지지하는 글에다 정성일이 “XXXXX 같은 영화를 필름으로 보지 않은 사람과 말도 하기 싫다.”는 구절을 넣었을 때 난 그냥 웃고 말았다. 창간호 때부터 키노를 봐왔고, 정성일이 글 쓰다가 곧잘 자기 글에 자기가 흥분해서 하지 않아도 될 – 하지 말아야 할 – 오바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난 저 발언도, 감정에 취해서 결국 뱉어낸 오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 머릿속에서 따로 찍은 얼터너티브 버전 <괴물>을 따르지 않았다고 <괴물>을 난도질하는 요즘의 정성일을 보면, 문득 그게 정말 진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J.의 태도가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J.는 어릴 때부터 무협영화들과 나이에 안 어울리게 홍콩누아르를 포함한 각종 액션영화들을 많이 보았고, 지금도 각종 액션영화들을 즐겨 찾아본다. (제이슨 스태덤과 빈 디젤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가 본 영화들이 후졌건 걸작이었건, 그리 적지 않은 양을 이미 본 데다 감각이 그리 둔하지 않은 사람인지라 가만 보면 샷과 시퀀스와 편집에 대한 감각이 있고 안목도 꽤 괜찮다. 다만 영화광이라면 꼭 봐야할 영화로 언급되곤 하는 영화들을 많이 보지 않았고, 지식과 안목이 ‘체계적’이지 않을 뿐. 영화에 ‘경외감’을 갖고 그리하여 지나치게 진지해지곤 하는, 그러다가 나이 들면서는 많이 완화되고 장르물로 관심대가 옮겨가는 나와는 여러 모로 상반된다.

이런 태도는 소위 “걸작” 혹은 소위 “아트영화들” 앞에서 완전히 다른 태도를 드러내게 된다. 그는 일단 기회가 주어지게 되면 마이클 파웰의 영화건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건 쫄지 않고 담담하게 대하며, 때로 순수하게 그 영화들의 장점을 찾아내며 때론 열광한다. 반면 나는 일단 쫄며 ‘경외’의 모드가 되고, 내 스스로의 안목을 믿지 못한 채 어떻게든 영화에 – 그리고 평론가들의 찬사에 – 설득되려 노력한다. 영화 한 편 볼 때마다 바싹 긴장하여 에너지 소모가 많고 그래서 오히려 그런 영화 앞에서 졸기도 하고, 그래서 걸작들을 오히려 피해다니는 경향까지 보인다. 영화에 ‘경외감’을 갖는 태도가 내 ‘즐거운 영화세상’을 필요 이상으로 딱딱하게, 그리고 힘들게 만드는 걸 생각해 보면, 가끔 억울해지기도 하고, 이게 상당 부분 키노의 정성일 일파한테서 영향받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슬그머니 약이 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진짜 영화광은, 저렇게 액션이면 액션, 괴수면 괴수, 로맨틱 코미디면 로맨틱 코미디, 장르물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러다 한 장르를 더욱 깊이 파 일가를 이룰 수도 있고, 다른 영화들을 발견할 수도 있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상업영화들의 또다른 덕목들을 발견하는 것 역시 그리 나쁘지 않다. 만약 내게 그런 식의 스노비즘이 없었다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의 바로 그 장면에서 진심으로 감동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잉그마르 베르히만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며, 그와 동시에 롭 라이너를 좋아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고전이기에 남들이 아트라 생각하는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상업영화적 관점에서 좋아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5 Comments

  1. 정성일 평론가의 그 말은 저도 오프라인에서 친한 사람들을 만날 때면(인터넷에서는 반론이 들어와도 실시간 덧글을 달아주기가 곤란해서, 논쟁이 될만한 이야기들은 안하는 편이죠) 꽤 자주 인용하는 말인데, 영화에 대한 사랑고백의 과잉 외 아무 것도 아닌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에는 장단이 있고, 왕도란건 없다라고쯤 덧붙이는게 나머지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이 되겠네요. 전 장르로 영화를 배웠고, 어지간해서 이름값에 주눅들지는 않는 편이죠. 다만 체계는 확실히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장르내에서의 체계는 얼추 잡혀가고 있지만서도.

    • 우연하게도 어제 시네큐브에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함께 본 후배와 했던 이야기와 거의 비슷하네요. 볼 수 없는 영화를 봤다라는 것에서 나오는 권력, 그리고 먼저 보았음에서 나오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어졌었죠. 사랑고백이란건 그야말로 생사람을 잡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심스러운 표현이었구요.

      제가 바라보는 정성일 평론가는 조금 오만한 구석은 있는 것 같아요. 하긴 밥벌어먹는 자의 특권인지도 모르겠지만. 혹시해서 말씀드리지만 그렇다고 제가 정성일씨를 엄청나게 싫어하는 안티수준은 아닙니다. 저는 어떤 식으로든 다양한 글쓰기가 이루어진다는데 찬성하는 입장이고, 게다가 정성일 자체보다는 그저 무비판적으로 모방/찬동하는 것에 그치는 사람들(뭐, 듀나를 모방하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지만)이 더 큰 문제다라고 생각하는 측면도 없지 않기 때문에 정성일씨와 같은 평론가의 존재의의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수준은 아니거든요.

      일가를 이루었다는건 정말 부끄러운 표현이지만, 공포영화를 잘 못 본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제 블로그를 종종 찾아주신다는 엄청난 영광이네요. ^^ rss 업어 갑니다.

    • 우왓, 사형대의 앨리베이터! 오래 전 비디오로만 본 영화인데 필름으로 보셨다니 정말 부럽군요. ㅠ.ㅠ
      사실 정성일 평론가, 존경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양반을 극복할 때도 됐다 싶기도 하고요. ^^;

    • 저도 사실 영화는 필름으로 봐야 한다는 주의자예요. 필름으로 본 것과 DVD / 비디오로 본 것은 다르니까요. 이 블로그에서 필름으로 본 것과 다른 매체로 본 것의 감상문을 카테고리를 구분해서 올리는 것도 그런 이유죠. 다만 정성일이 언급한 그 영화들은, 국내에서 필름으로 보는 게 거의 불가능한 영화들이라는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정성일의 저 발언은 저에게는, 이런저런 다른 이유들과 연관돼서 사랑고백보다 권력 과시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에 대해선 따로 사실 글을 쓰고 있답니다.)

      Arborday님은 이미 일가를 이루신 분이잖아요 ^^ 제가 호러영화를 잘 못 봅니다만, Arborday님 블로그는 종종 훔쳐보고 있답니다.;;

  2. 저도 개인적으로 정성일씨 좋아라 하는데 … 님의 말씀처럼 정성일씨와 같은 어떤 권위를 가진 평론가들은 꼭 … [영화를 필름으로 보지 않은 사람과 말도 하기 싫다]는 류의 말을 내뱉는다는 … 자신들의 권위, 혹은 일반과 다른 차별성을 강조 – 이게 결국에는 강요하는 것 같아요.

    결국, 영화 평론판 역시 계급이죵 … 사실 정성일의 발언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는데도 비디오가 아닌 필름을 강조하는 것은 … …그래도, 이런 류의 발언은 귀엽워요. 왠지 [왜 너희들과 다른 나를 몰라주느냐]는 식으로 땡강을 부리는 정성일씨의 모습이 떠올라서 … 한참을 웃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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