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와 조지 오웰)

이번에 켄 로치 특별전에서 본 영화들에 대해 감상문을 써보고자 시도하지만, 쉽지가 않다. 몇번을, 시도했다 지우다를 반복하다, 그냥 닥치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시 읽고 있다. 통일노동자당(일명 P.O.U.M, 품)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스페인 내전이 서술되는 것은,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이나 [카탈로니아 찬가]나 비슷하다. 심지어 오웰과 데이빗 카(이안 하트, <랜드 앤 프리덤>의 주인공)가 P.O.U.M의 의용군에 소속된 계기 – 우연히 열차 안에서 그쪽 사람과 만나 합류했기 때문에! – 도 비슷하기 때문에, <랜드 앤 프리덤>이 [카탈로니아 찬가]를 느슨하게 각색한 것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아마 데이빗 카가 속해있던 정당도 독립노동자당이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이 독립노동자당원이었다.)


두 작품이 비슷한 것은 같은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인”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의용군에 입대하게 되는 과정, 전선에서 생활하는 모습은 다들 비슷비슷했을 테니까. 언어적 차이, 문화적 차이를 겪는 것과 함께, 스페인 내전이 정치적인 방향에서 진행된 양상에 대해 반응하는 것도 비슷했을 테니까. 다만 조지 오웰은 데이빗 카처럼 공산당에 입당하고 국제여단으로 적을 옮겼다가 다시 의용군으로 돌아온 적은 없다. 오웰은 휴가 나왔다가, 데이빗 카는 부상 치료차 후방에 왔다가 ‘엉겁결에’ 바르셀로나 시가전에 휘말리는데, 이때 둘은 서로 반대편이다. 오웰은 통일노동자당 계열 의용군으로서 당시 노동조합(정확히, CNT 계열)이 관리하고 있었던 전화국을 사수하는 입장이었지만 데이빗 카는 마침 공산당에 입당하여 제복을 입고 전화국을 접수하기 위해 공격하던 입장이었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데이빗 카가 CNT의 플랭카드가 달린 전화국 저쪽에서 영국인을 발견하고 그에게서 “대체 그쪽에서 뭘하고 있는 거요?”란 소리를 들을 때, 그 영국인이 조지 오웰일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상상하는 건 관객-독자가 취할 수 있는 즐거운 특권이리라.


Ken Loach


<랜드 앤 프리덤>은 5, 6년 전, 처음으로 본 켄 로치 영화이기 때문에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 바로 뒤에 본 <레이닝 스톤>과 함께 이 영화는 내게 ‘켄 로치 영화’에 대한 일종의 ‘각인’으로 너무 강하게 남아있어서, 나는 켄 로치의 영화들을 내멋대로 <랜드 앤 프리덤> 계열과 <레이닝 스톤> 계열로 나누곤 한다. 사회/역사적인, 거시적 질서 안에 개인이 휘말려 들어가는 걸 다루면 <랜드 앤 프리덤> 계열, 개인 혹은 그의 가족이 겪어나가는 사건들을 찬찬히 미시적으로 다루면 <레이닝 스톤> 계열. 구분 기준이 너무 자의적이라 당연히도 두 계열에 속하지 않는 영화가 더 많긴 하지만 하지만 이게 그래도 내게는 꽤 쓸모가 있다. 예를 들어 전자 계열이라 할 수 있는 켄 로치의 최근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랜드 앤 프리덤>과 플롯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하층민들>, <내 이름은 조>는 전형적인 <레이닝 스톤> 계열. <달콤한 입맞춤>은 <레이닝 스톤> 계열로 넣을 수 있겠지만 살짝 변종으로 느껴진다. 역시 근작이라 그간 스타일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일까.


롤랑 조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켄 로치 영화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점을 딱 집어 표현한 게 롤랑 조페다. “켄 로치 영화에는 ‘사람’이 있다. 그들을 꼭 껴안아주고 싶다.” 나는 켄 로치 영화들에 나오는 사람들이, 픽션의 인물들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도저히, ‘만들어진 인물’이라 느껴지지 않는 그 생동하는 인간들, 생생한 인간들. 심지어 그 인물들이 ‘배우들’이라는 너무 당연한 사실마저도 잊어버리곤 한다. (그리고선 어! 빌리 엘리엇네 아빠 아냐? 이러고 있다;;) 켄 로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시나리오가 개연성이 없다는 둥 이념에 함몰되어 있다는 둥 하는 소릴 들으면, 난 그들이야 말로 ‘이념을 갖기 싫다는 이념’에 함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탈정치를 외치는 이들이야말로 실은 가장 정치적이다.) 그 이념의 편견 때문에 켄 로치의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켄 로치 영화에서 혁명의 선전과 이데올로기적 공세만 본다면, 당신은 켄 로치 영화의 3/4을 그냥 망막 위로 흘려보내버린 것이다. 극히 일상적인, ‘영화의 사건’이 될 성 싶지 않은 사건들을 묘사하면서도 그저 에피소드와 에피소드의 연결이 아닌 ‘플롯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짐 앨런, 폴 래버티의 시나리오와, 낭비 없이 간결하고 건조하게 바로 들어갔다 빠지는 배리 애크로이드의 카메라, 켄 로치와 함께 하는 게리 루이스, 로버트 칼라일 등 켄 로치 전문 배우 혹은 이전엔 연기란 걸 해본적이 없는 비전문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이 모두를 조율하며 구현해내는 연출 등, “켄 로치와 그 친구들”이 만들어내는 성과는 사실,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도큐멘터리 아닌 ‘극영화’로서의 기본기에 충실한 영화를 보여주곤 한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빠지고 있다는 소릴 듣고 있긴 하지만(그는 이미 70세의 ‘할아버지’감독이고, 아무래도 그의 최전성기는 90년대 초중반이었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한편으로는, 한결 여유로워진 그의 후기 영화를 오히려 이전 영화보다 더 좋아하는 관객들도 분명 존재하리라.


켄 로치는 지금 또 신작을 찍고 있다. 변함없이 폴 래버티의 시나리오를, 이번에는 <9.11> 때 잠깐 같이 한 – 물론 <랜드 앤 프리덤>과 <히든 아젠다>에서 한참 밑엣 스탭으로 참여한 적이 있긴 하지만 – 나이젤 윌로비 촬영감독과 함께 한다. 프로듀서 짝꿍 레베카 오브라이언도 여전히다. 참 노인네가 정정도 하지. ㅎㅎ 그저 부디, 건강하시라. 그래서 그 식지 않는 열정으로 계속, 영화를 보여주시라.

ps. 이 글을 완성하고 나면, 영화들의 감상문을, 쓸 수 있을까.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9 Comments

  1. 정말로 ‘카탈로니아찬가’를 각색한것 같아요.책을 봐서 그런지 전화국장면에서는 묘한 느낌을 주더군요.

  2. 뜨금….숫자로 켄 로치감독의 나이를 접하고 나니, 슬슬 그 다음세대들이 걱정됩니다. 이념으로 함몰된 영화들 어쩌구하는 잡소리를 습관마냥 반복하는 평자들이 판치고, 그들에게서 영화세상을 주입받은 그 다음 세대사이에서 그의 반만이라도 실천을 이루어낼 어린 영화쟁이가 나온다면 전 늘 습관처럼 ‘그나마 다행이다’라고 안심하겠죠. 영화가 아닌 영화가 영화의 궁극이라는 선문답같은 명제를 실천으로 이루어 낸 켄 로치도 생물학적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그것은 너무도 슬프지만 어쩔 수 없네요.

  3. 저도 데이빗과 얘기를 나누던 인물이 조지 오웰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데이빗의 모델에 관해서는 http://www.bolshevik.org/hangul/1917/swar.html 에,
    “데이빗의 모델은 실존 인물인 스태포드 코트먼이다. 그는 오웰이 소속된 민병대의 가장 어린 대원으로 영국노동당의 청년조직에서 공산당 청년동맹으로 획득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민병대의 일원이 되었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오자 공산당원들은 그의 집 앞에 모여 그를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라고 되어있더군요..^^;;

  4. 수하이 / 그쵸그쵸. 정말 기분이… 사실 그 장면, 너무 슬펐어요. 오웰 책에서는 그냥 ‘그들’이라고 얘기되지만, < 랜드 앤 프리덤>에서는 제복의 그들 역시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온 사람들이니까요. 양측이 대치하고 있던 사이를 지나가며 할머니가 “같은 편들끼리 싸우지 말아요…”라고 안타깝게 외치고, 총격이 오가는 도중 할머니 장바구니가 산산조각이 나고, 양측이 모두 할머니에게 미안해요, 빨리 지나가요, 외치던 그 장면… 가슴 아팠습니다.

    버디 / 영국 내에선 이미 대니 보일 같은 치들이 켄 로치를 부정했었지만, 대니 보일더러 켄 로치 반만큼만 영화 만들라고 하래죠. (< 쉘로우 그레이브> 외에 보여준 게 거의 없는 대니 보일… 유명연극을 옮긴 것치곤 < 트레인스포팅>도 ‘연출’은 후지지 않았나요? <28일후>도 뛰어난 영화는 아니었다고 평합니다.) 국내엔 안 들어오고 있지만 유럽 – 영국, 프랑스 – 에선 진지하게 켄 로치의 뒤를 잇는 감독들도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 빌리 엘리엇>만 해도 켄 로치가 일구어놓은 성과를 일부 잇고 있고, 제가 너무 좋아하는 영화, < 브래스트 오프>도…

    dakdoo / 아마 오웰의 책과 로치의 영화를 다 본 사람이라면 그 장면을 그렇게 상상하겠지, 싶습니다. 근데 데이빗이,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거였군요. 링크 고맙습니다.

  5. [카탈로니아 찬가] 거의 마지막, 13장과 14장에 – 통일노동자당이 불법선언된 다음 – 스태퍼드 코트먼의 이름이 두 번 정도 나오더군요. 기분이 정말… 그 누구보다 건강했던 스물두 살의 밥 스마일리가 감옥에서 맹장염으로 죽고, 심지어 공병대 장교 후보로서 군사 기밀을 배달하고 있던 콥도 감옥에 갇혔습니다. 새삼 스마일리의 죽음에 분노하는 오웰을 보면서, 블랑카의 죽음 장면이 겹치는군요.

  6.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다가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중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습니다.
    [Land and Freedom]에 마구 끌리는군요.
    조금 남았는데, 얼른 읽고 영화도 찾아봐야겠어요 :D

    • 반갑습니다, 라큐아님.
      < 랜드 앤 프리덤>은 국내에서 개봉이 됐고 비디오도 나왔었는데, 지금은 아마 구하기 힘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둠의 경로에서도 별로 취급을 안 한다고 들은 기억이 있군요. 하지만 정말 멋진 영화입니다. 켄 로치는, 영국영화의 저력을 증명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요즘은 ‘로맨틱코미디’로만 유형한 듯한 워킹타이틀 사에서 켄 로치의 영화를 많이 제작했죠.)

      꼭 보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7. 마지막 David의 장례식 장면을 가끔 보곤 합니다. 손녀가 David이 간직하고 있던 시를 낭독하고, Blanca를 묻은 곳의 흙을 뿌린 뒤에,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는 그 장면은… 매우 간략하여 ‘시시하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인데, 저는 오히려 군더더기 없는 점이 마음에 들고 보면 볼 수록 가슴 벅차게 하더군요. 그 마지막 장면은 디자인의 선구자이면서 시인이기도 했고 영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도 불리우는 William Morris라는 매력적인 사람을 알게 해준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사상가로서 그가 남긴 업적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의 디자인만큼은 정말 마음에 쏙 들더군요. 오죽하면 지금 제 컴퓨터 바탕화면도 모리스풍의 디자인이고, 앞으로도 벽지와 넥타이, 손수건 등을 구매하는 것이 바람입니다. 하하^^;;

    아무튼 영화에서 인용된 William Morris의 시를 찾아보니 ‘The Day Is Coming’이라는 시의 일부이더군요.

    Come, join in the only battle
    wherein no man can fail,
    Where whoso fadeth and dieth,
    yet his deed shall still prevail.

    오라, 전투에 참여하라
    아무도 실패할 수 없다.
    육신은 쇠하고 죽어가더라도
    그 행위들은 모두 남아 승리를 이룰 것이므로.

    • 윌리엄 모리스라. 저도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이름이 낯이 익은 것도 같고요… fides님 덕에 좋은 이름 알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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