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 농담




밀란 쿤데라에 대해 내가 가지고있던 뿌리깊은 오해와 편견은, 그러니까 소련 해체 이후 그가 마치 ‘사회주의의 실패’의 증인인양 내세워졌던 대한민국의 후진 정치적 환경에서 그렇게 무식하게 후진 개념을 갖고 살았던 데에서 비롯했다. 실제 정치적 이념이 어떻건, 소련에 저항하고 봄 기운을 탄 동구권에서 소위 반체제 인사 – 반 스탈린 – 라 불리었던 사람들은 모두 한두릅으로 “콩사탕은 실패했어요”의 증인인 양 내세워졌던 슬픈 코미디. 사회주의자이면서 스탈린과 소련을 비판하는 것이 상상 불가능한 대한민국의 그 무지막지한 ‘콩사탕 아니면 우리 편’ 구도에서, 그게 코미디인 줄 모른 채 역시나 무식했던 나는 그 주제에 또 ‘손바닥 뒤집듯 입장 바꾸어서 어제 동지라 부르던 사람을 적극적으로 욕하고 다니는 이들은 경박하다’고 싫어하는 경향 탓에, 쿤데라도 솔제니친도 별로 안 좋아했다. 이들이 실제 지향과 상관없이 그렇게 ‘선전됐’고 내가 오해했다는 걸, 또 그 오해 역시 뿌리깊은 무지에서 비롯했다는 걸 명확히 깨달은 건, 부끄럽게도 요 며칠간 이 책을 읽고나서다.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은 스탈린을 비판했다고 조지오웰도 반공작가로 둔갑시킨 나라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밀란 쿤데라의 가장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있어보이는 척하기 딱 좋은 제목! (내가 또 이런 거에 거부감이 있다.) 밀란 쿤데라가 유행한지 언제인제 이제사 첫 만남인 이유는 그래서다.


총 7장에 걸쳐, 챕터마다 1인칭 화자가 변하는 이 소설은, 고향 모라비아를 오랜만에 방문한 루드빅이 중심이 되어 그가 벌이는 복수극과, 복수의 이유가 된 젊은 날의 사건에 대한 회상이 주를 이룬다. 챕터마다 변하는 화자 때문에, 루드빅의 입장에서 단 한 줄로 표현된 동작이 예컨대 야로슬라브의 입장에선 큰 의미를 가진 상징적 사건이 되어 수 장에 걸쳐 묘사되기도 하고, 루드빅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남아있던 추억이 다른 화자를 통해 ‘폭력’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서술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여러 개의 진실을 다루며 여러 시각으로 하나의 사건을 들여다보게 한다. 루드빅의 입장에서 그의 처지를 동정하다가, 정반대에 놓인 다른 사람의 생각과 처지에 또 그만큼 감정이입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곤 하면서, 결국 진실은 ‘해석’에 불과한 게 아닐까, 란 생각을 다시 하곤 했다. 이론영역에서는 이런 서술방식은 이른바 ‘근대적 양식’이라 부르는 모양인데, 이론을 잘 모르는 나는 이쯤에서 패스~ 다만, 이 설정은 대단히 매력적이어서, 나는 뒷부분을 읽다가 종종 앞으로 다시 건너가 책장을 뒤적이곤 했다.


고작 세 줄짜리 엽서가 발단이 되어 열렬히 믿고 신봉하던 삶의 중심체로부터 완전히 배제당하고, 이후 삶이 완전히 꼬여버린 씁쓸하고 비극적인 경험의 바탕에 있는 것은,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된 사회 체제다. 하지만 그 사회체제를 쿤데라가 ‘그러므로 자유가 억압된, 지양해야 할 체제’로 묘사했던가? 아니, 나는 오히려 그 시대의 체제를 ‘역사의 진보를 긍정하며 활기에 차있던’ 때로 묘사를 하는 쿤데라를 보며 살짝 감명을 받았다. 추악함과 아름다움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임을 소설 전체에서 보여주고 있는 쿤데라는, 역사의 아픔의 시대를 그리면서도 추악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그려낸다. 루드빅의 복수심은 코스트카의 다소 경건하고 종교적인 시각에 의해 비판되며, 심지어 루드빅의 ‘농담’ 역시 자유의 이름으로 무조건 옹호되지도 않는다. (코스트카의 경건함이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지점도 분명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만.) 오히려, 학생위원회 위원장이었다가 바뀐 시대에 재빨리 영합한 파벨이야말로 역겨운 속물-광대로 그려진다. 그런가 하면, 평생을 민속음악의 연구에 바친 야로슬로브의 몰락을 그려내는 시선은 연민에 가득 차 있다. 소박한 신념을 지키며 그 신념의 존중을 바랐던 헬레나는, 우스꽝스럽긴 해도 절대로 비웃을 수 없는 슬픔으로 그려진다. – 과연 맨 마지막 장, 그녀가 화장실에서 끙끙대고 있는 장면이 웃긴가? 나는 절대로 웃을 수 없었다. 루드빅 역시 그것이 헬레나의 잘못과 상관없는, 그녀에게 부과된 지나친 굴욕임을 인정한다.


책을 읽으며 내가 정말 좋아했던 건, 쿤데라의 살짝 냉소적이면서도 애정과 연민이 가득한 시선이다. 서른여섯살에 써낸 이 처녀작에서, 그는 삼십대 중반이 고통과 상처를 통해 가까스로 얻어낸, 인생에 대한 씁쓸한 통찰력을 풀어놓고 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어린아이 주제에 어른의 흉내를 내었던 체제 속 아이들이 결국 그 상처에 고착되어 나이를 먹어도 성장할 줄 모르는 비극,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복수를 한답시고 고작 남의 마누라를 꼬실 생각이나 하는 루드빅이나, 삼십대 중반이 되도록 나이브한 어리석음으로 누굴 향한지도 모르는 사랑 비스무리한 감정에 자신을 속이는 헬레나나, 앞에 나서서 주목받는 것에 모든 인생의 목표가 집중돼 있는 파벨이나, 아무리 나이를 먹은들 하는 짓은 애에 불과하다. 더한 비극은, 이들이 스스로를 어른이라 생각하는 데에 있고, 이들이 소위 ‘어른’으로서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들은, 책임을 질 줄 모르기 때문이다. 15년의 간극을 두고 스무 살의 인물들과 서른 다섯살의 인물들은 사는 모습은 각각 다 달라도, 유치함의 측면에서 별반 나아진 것도 차이나는 점도 없다. 루드빅이 인드라를 보며 그토록 ‘어린아이적 특성’에 증오를 표현하는 것의 정체는 실은 자기혐오인 것이다.


그래서 결론? 별 기대 없었다가 대박 건진 느낌. 이 인간, 인생과 인간이란 걸 쫌 아는 사람이구나, 싶은데다, 엄청 재미있게 쓰잖아! 오죽하면 작가의 이름을 ‘태그’로 올렸겠는가.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2 Comments

  1. 오죽하면 작가의 이름을 ‘태그’로 올렸겠는가. 를 보고 태그를 보는 데, O이 있어서, 응 이건 뭐지 했는데, 그 사이 없어졌네요. ㅎㅎㅎ

    전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군대에서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있어보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네요. 농담도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반갑습니다, 정윤호님. ㅇ은 저도 모르게 들어간 오타였어요.
      전 동생 방 책꽂이에도 꽂혀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이제사 읽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군대 계실 때 읽으셨다면 특별한 의미로 그 책을 기억하고 계실 것같네요. 어떤 작가나 책과의 만남은 때가 정해져 있는 거 같아요. 저한텐 이제야 쿤데라와 제대로 만날 ‘때’가 된 거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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