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토로 |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El Laberinto del Fauno

Faun's Labyrinth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해 새삼 생각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화려한 비주얼에 취해 한동안 잊고 있었다. 판타지는 현실의 고통, 세계와 세계의 충돌과 그로 인한 파괴와 재생의 순환, 그 과정에서 유혹받는 인간의 나약함과 악과 타락을, 그리고 시험에서의 승리를 은유적으로 다룬다. 판타지는 당연히 잔혹하고 격렬할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판타지에서는 그러므로, ‘전쟁’이 빠질 수 없다. 판타지는 원래 현실에서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견디게 해주는 힘을 선사해주는 존재이다. 때로 그래서 판타지는 현실도피적이라는 비난을 받곤 하지만, 만약 그마저도 없다면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판타지가 현실도피적인 게 아니라, 현실에서 ‘너무 쉽게’ 도피하는 사람들이 판타지를 남용하는 게 문제인 게 아닐까. 판타지의 본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퇴행적 핑계로 후퇴하지 않는, 간만에 훌륭한 판타지 영화를 봤다. 하지만 난 확실히 어른인가보다. 오필리아가 요정나라의 공주로 갔으니 기뻐해야 마땅할텐데, 영화 본지 하루가 지난 지금도 가슴이 이토록 아프며 슬픔의 눈물이 나는 걸 보면.


영화의 배경인 1944년의 스페인은, 스페인 혁명이 패배하고 혁명은커녕 (부르주아적이라며 혁명세력에게 비판받았던) 공화국 정부도 지키지 못한 채 프랑코의 독재정권에 권력을 내주었던 때다. <랜드 앤 프리덤>과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혁명의 공기를 숨쉬며 자신의 존엄성을 걸고 일어났던 사람들은 이제 정부의 군대에게 쫓기며 산 속에서 생활하는 게릴라(빨치산!)가 되어 있다. 오필리아의 모험은, 만삭의 어머니와 함께 새아빠인 (프랑코 군대의) 비달 중위가 주둔해있는 기지로 이사오면서 시작한다. 어른들의 절망과 슬픔은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느껴지기 마련이고, 게다가 이 아이는 자신이 어찌해볼 수 없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새아빠는 냉정하고 무서우며 엄마는 몸져누워서는 오필리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고통을 이해해 달라고 요구한다. 외로운 아이는 부대의 안살림을 도맡아하는 메르세데스에게서 아파 누운 어머니가 줄 수 없는 또다른 모정을 느끼지만 메르세데스와 온전히 교감할 수는 없다. 그 와중에 요정의 초대를 받고 나무요정 판을 만나며, 자신의 원래 신분 – 요정나라의 공주 모아나 – 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너무 오래 살았기에, 요정나라로 돌아가려면 세 가지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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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스페인 내전 직후라는 정치적 현실에서 근거한, 게릴라의 활동과 비달 부대의 토벌 작전. 비달의 부대에서 일하는 메르세데스와 부대에 출입하며 부상자와 오필리아의 어머니를 돌보는 의사 역시 실은 게릴라들을 돕고 있다. 또 한 축은, 이 살풍경한 환경에서 도저히 적응하지 못한 채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며, 그리하여 환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오필리아의 내밀한 여행. 메르세데스나 오필리아는 각자 비밀을 가지고 있고 서로에게 호감과 애정을 느끼지만 그 비밀을 온전히 소통하지 못한다. 오필리아에겐 게릴라니 전쟁이니 하는 게 도저히 이해 안 갈 어른들의 고통이며, 메르세데스에겐 요정과 판의 이야기란 아이들에게나 존재하는 동화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저 각자의 비밀의 흔적(메르세데스의 조심스러운 행동, 오필리아가 그려놓은 마법의 문)을 볼 뿐이다.


나의 원래 정체는 요정나라의 공주 모아나. 혹은 혁명의 노동자.


나는 이 영화가 혁명 실패의 슬픔과 고통을 은유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이 사라지고 모두가 서로를 인간으로서 존중하며 새로운 희망을 품었던, 실제로 혁명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스스로 파시스트에 맞써 싸우고 있었던 당시 스페인 국민들에게 혁명의 실패가 주었던 암울한 고통과 슬픔은, 자신의 힘으론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워 할 수밖에 없는 오필리아의 절망적인 상태와 연결된다. 게릴라들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 즉 메르세데스와 의사선생, 그리고 토벌작전 중 잡혀온 말더듬이(‘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고문에 의해 동지를 팔아넘길 말만을 강요당하는 민중, 그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매우 상징적인 캐릭터) 등의 이야기를 꽤 자세하게 전개시키고 있으며, 스페인 내전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에겐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이 이전에 연출했던 영화 <악마의 등뼈> 역시 스페인 내전 당시 의용군(이자 게릴라) 부모를 둔 아이들의 이야기였음을 기억한다면, 이 영화가 오필리아의 암담한 현실을 그리기 위해 스페인 내전을 그저 끌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확연해진다. 오필리아의 죽음은 곧 혁명의 실패를 의미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현실에서의 오필리아는 죽었다 해도 사실은 훌륭하게 미션을 마치고 – 그것도 가장 어려운 미션을 자신의 희생으로서 지혜롭게 통과하고 – 요정나라의 공주로 돌아간다. 그녀는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오필리아의 주검은 안고 눈물을 흘리는 메르세데스는 오필리아가 남긴 웃음의 의미를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이가 더 들면 알게 될 것이다. 현실에서 표면적으로 혁명은 실패했지만, 혁명은 결코 끝나지도 실패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아이들은 어른들의 선생님이란 말은 과연 맞다.


두번째 관문의 수문장. 영웅신화와 판타지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특징을 골고루 가진.


어린 남동생을 지키기 위해 공주 따위 안 돼도 좋고, 그래서 ‘뭐든 무조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는 (노예의) 맹세를 깨고 아가를 지키겠다는 자신의 주관을 실천하고서는 비록 뭣같은 새아빠에게 총을 맞는다 해도, 바로 그 순간이 요정나라의 공주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것이었음이 드러날 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토록 자신이 싫어하고 증오하는 대위일지라도 그의 아가는 소중하게 품어안고, 그 부대에 있는 어린 소녀를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메르세데스의 선택과 행동은 정확히 오필리아의 선택 및 행동과 겹친다. 혁명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아무리 친부인들 독재자의 하수였던 그의 이름조차 아이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는 것, 애초에 누구의 핏줄이건 혁명의, 자유의 가치를 주고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 지금 흘린 피는 비록 외견상으로 헛된 죽음에 불과해 보일지라도, 바로 그것이야말로 요정나라의 공주로 돌아갈 수 있는 어려운 관문. 혁명은 언제나 ‘내일’을 꿈꾸고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아가는 길이다.


메르세데스 언니 만만세. 혁명의 주체는 역시 여성. 허릿춤에 감춰둔 감자깎는 칼의 위대함. 그럼에도 역시나 영화의 맨 첫 장면(이자 끝부분의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메르세데스의 눈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 어른이라서, 더없이 완성된 성인 어른이라서, 저미는 슬픔을 그저 조용한 흐느낌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던 메르세데스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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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17 Comments

  1. 페일 맨 귀엽지 않나요, 전 민짜 얼굴에 눈을 낄지 알았는데 저렇게 손에다 끼고 움직일 줄을 몰랐어요. 무겁게 영화 보다가 쟤 때문에 잠시 흐뭇했다는 히히

    • 볼수록 정감가요, 그 녀석. 저도 손에다 끼울 줄 몰랐는데, 손에 끼고서 그 손을 이마에 대면서 걸으니까 꽤 귀엽더라구요. 요정들 머리 똑 따먹을 땐 기겁을 했지만요. 이마에 댔던 손을 확 뻗을 땐 다시 후덜덜…

  2. 읽으니까 또 슬퍼지네요.
    결말에 대해서 냉소적인 말까지 튀어나오는게 싫어서 감상문도 안쓰고있는데. 역시 마음을 닦아야겠어요. 시선에 감동감동.

    • 냉소는… 더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겠죠. 쉽게 희망을 말하는 자들이야말로 위험한 거 아니겠어요? 꿈을 꾸게 하니까요, 더 큰 상처가 내포되어 있는… 그런데 저는, 너무 쉽게 혁명을, 희망을 얘기하는 게 아닌가… 싶군요.

    • 대신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결국 적절한 혼합이 최고인가요(웃음)

  3. 그 칼, 나중에 한 건 할 줄 알아쓰. ㅋㅋㅋ

    헉, 근데 첫장면에도 메르세데스가 나왔구나. 나 극장에 늦게 들어가서, “공주님은 죽었습니다” 부터 봤거든. 그래서 모아나 공주님은 원래 왜 죽은 거야? 라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놓쳤나 보네. -_-;

    • 어? 아녀, 첫장면에선 메르세데스 안 나와. 걍 오필리어가 코피를 흘린 채 미로바닥에 누워있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동화 얘기가 나레이션으로 나오지.

  4. 정말 판타지는 곁들여진 사이드메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의 현실을 잔혹할 만큼 냉혹하게 묘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판타지적 요소는 은유인지 상징인 수많은 현실을 뜻하는 듯한데 이거 하나하나 분석해야 제대로 분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의 < 미의 이름>에 준하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 해요. 디비디 나올 때까지 기다려 봐야 할지 ^^:
    지난 주에 이곳을 들렀다 글이 올라온 것을 보고(읽지는 않았었습니다), 어라라 하다가(아무 영화나 안 올라오는 듯해서 ^^;) 갑자기 주위에서 호평이 날라 들기에 마감 치자 마자 봤는데 늦지 않게 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 스페인 내전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오필리어의 슬픔에 공감하는 관객들이 많은 걸 보면, 이 영화가 ‘판타지 동화’로서도 훌륭한 것같긴 합니다. 물론 스페인 내전에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이 영화가 갖는 의미가 그 이상이지만요. 저나 싱클레어님처럼 랜드앤프리덤과 카탈로니아 찬가까지 겹치면 정말…

  5. 기억하시겠지만 노바리님이 추천해 주셔서.. 이후에 영화를 보았습니다. 본 지도 좀 되었는데.. 아직까지 여운이 남고 두고두고 아끼고 싶은 정말 좋은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이 영화를 바라보는 노바리님의 시각과 해석에 적극 동의하고 특히 오필리아와 메르세데스를 바라보는 노바리님의 다정한 눈길에 진심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르세데스의 눈물이 따뜻하면서도 아프고, 오필리아의 마지막 미소가 포근하지만 결국 가슴이 저려오는, 그 결말의 여운이 자장가의 선율과 함께 잊혀지지 않습니다. 좀 여유로워지면 저도 글 하나 써서 트랙백 남기겠습니다. 새봄과 함께 노바리님께 좋은 일 많이 생기길 기원합니다.^^*

    • 너무 좋은 영화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했는데,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 다시 보기 겁나긴 하지만, 그래도 극장에서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어요…

  6. 스킨을 바꾸셨군요. 노바리님께서 스킨을 바꾸실 때마다 하나 같이 좋아 보이는 것이… 따라서 바꾸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하하^^;; 아참.. 판의 미로 감상문을 트랙백 하려는데 안되더군요. 여기저기 알아보니 태터툴즈의 “트랙백 추적 플러그인”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 그렇다고 합니당~(티스토리에서는 그 플러그인을 없앴다고 하구요). 혹시 노바리님도 사용하고 계신가요? 노바리님 뿐만이 아니라 티스토리에서 트랙백 보내기를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태터에서 아예 없애면 스팸 트랙백을 받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그러기도 쉽지 않을 것 같고.. 그러네요. 암튼 시간나실 때 심심풀이로 읽어 주세요. 내용은 노바리님과 별 차이 없고.. 사진만 대문짝처럼 걸어 두었습니다..^^; 편안한 오후 보내시구요~

    • 하하, 이 스킨이 인기가 많더군요. 친구도 이걸 썼는데, 저도 그 친구가 블로그 닫고서야 조심스럽게 바꿨답니다. 깔끔하죠.
      트랙백에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 트랙백추적 플러그인을 켜둔다고 스팸이 안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 플러그인 차라리 꺼버릴래요.

    • 노바리님 플러그인 끄신거 맞죠? 그래도 안되네요..ㅠ_ㅠ 아.. 또 뭐가 문제인지.. 고민 좀 해봐야겠어요. 트랙백 잘 쓰지도 않다가 안되니까 또 집착을 하게 되는군요..-_- 뭐 아무튼, 꼭 트랙백 걸고야 말겠습니다!! 하하^^;

  7. 저 이 영화 일주일도 전에 봤어요. 재미있었어요.

    모양이 나니아 연대기같은 종류인줄 알고 봤다가 영화보고 기절할뻔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시시덕 거렸죠 – 그 모양은 그러니까, 우주전쟁도 호러물로 분류하고 못보는 아이라, – 마지막에 오필리어의 환상이 산산히 조각이 나서 피가 나선을 채울때 속이 뒤틀린다고 해야할지 뒤집어 진다고 해야할지. 어쨌거나 조금 그랬어요.

    그런데, 이 리뷰 읽다가 저 줄창 울었어요.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환상에서 살았던 – 혹은 도피했던 – 오필리어의 마음은 어떤 것이였을까요. 뱃속의 동생에게 엄마를 아프게 하지 않으면 너를 왕자님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던 마음은 어땠을까요. 어쩌면, 메르세데스도 혹독하게 자신의 환상이 깨지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것도 두번이나. 어린시절의 환상과 혁명과.

    자식들에게 지금을 물려주고 싶지 않을 때 혁명이 일어난다,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었어요. 최소한 그때보다 나은 무언가를 물려주기 위해서 노력했던 분들 덕분에 제가 “옛날이 좋았을리가 없잖아. 난 지금이 좋아. “라고 말할수 있는 걸거예요.

    생각이 많아져요. 그리고 마음이 와닿아요. 그래서 노바리님 글이 좋아요.
    사실은 오늘 제 생일이예요. 좋은 선물받아서 기뻐요.
    좋은 하루 되세요.^^*

    • 맞아요. 옛날이 좋았을 리가 없죠. 지금이 좋아요. 그분들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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