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 |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

애송이 올리, 폭풍처럼

보는 내내 든 생각 : 히야, 리들리 스콧 신나게 물량 때려부었군!

좋아하는 배우들이 무더기로 나와주시는 데다가 퍽 관심있는 중세, 게다가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한다고 해서 기대했다가, 어영부영하느라 놓쳤던 영화를. 어찌어찌 스크린으로 보았다. 보고난 후 느낌… 리들리 스콧은 이제 더 이상 나를 흥분시키지 못하는구나…

영화가 클래이맥스로 삼았던 장면은 물론 예루살렘성 방어전이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가 이루어진 이 시퀀스는 확실히 “흥,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따위에 질 수 없어!” 하는 야심이 묻어난다. 거대한 투석탑을 비롯해 스크린을 온통 꽉채웠던, 성벽에 연이어 쏟아지는 불대포들, 엑스트라의 숫자만 해도, 특수효과와 CG… <반지의 제왕>의 그 헬름협곡 전투씬을 ‘물량으로는’ 능가한다. 그런데.

많은 감독 / 프로듀서들이, 스페셜 이펙트 수퍼바이저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영화는 그럼에도 여전히 미장센과 편집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고대 전투씬의 최고봉으로 나는 언제나 케네스 브래너의 <헨리 5세>와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을 꼽는데, (아 미안하다, <코난 더 바바리안>은 보지 못했다.) <반지…>의 경우야 돈이 막대하게 들어갔다고 해도, ‘감독’ 케네스 브래너의 데뷔작인 <헨리 5세>의 그 전투씬은 돈으로 바르기는커녕 제작비를 아끼고 아껴 만든 씬임에도, 그 어떤 ‘돈으로 쳐바른’ 영화가 보여주지 못하는 전투씬을 보여준다. <글래디에이터>의 그 20분 전투씬이, 물량이 없어서 비평가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게 아니지 않는가. 물량으로 바르기만 한다고 훌륭한 시퀀스가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컷을 만들어 붙이느냐라는, 그리하여 흐름을 어떻게 만드느냐라는,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지점들이 훌륭한 시퀀스와 아닌 시퀀스를 가른다. 그리고 그 점에서, 이 예루살렘 전투씬은 실패다.

Kingdom of Heaven

예루살렘성 전투씬, 화려하다. 화려한데...

뭐, 당시 예루살렘 방어전에 쓰인 전술을 얼마나 충실히 복원을 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시나리오 상에서 공을 들인 흔적은 보인다. 훌륭한 ‘전략가’로서의 총사령관 발리안 경은 성벽에서 400미터 지점, 300미터 지점, 150미터 지점에 표시를 해놓고 적군이 그 지점을 통과할 때마다 미리 준비해놓은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며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하는 살라딘 군에게 타격을 입힌다. 예루살렘 성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그는, 성내에 남아있던 물적 자원과 인력자원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면서 지략가로서의 면모를 뽐낸다. 하지만 이것이 스크린에 보여지는 방식은,…

뭐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시시했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어차피 발리안 경이 실제 인물은 아닐 터이고, 당시 시대적 배경에는 가히 혁명적이다 싶을 정도로, ‘백성’을 아끼는 참된 영주 –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가진 귀족… 뭐 살아온 게 그랬다곤 해도 – 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도 오랜만에 본 것같고, ‘우아하고 품위있는 아랍군’의 모습은 말만 들었지 영상으로 보는 건 거의 처음이지 싶다. 야만인 타령을 해대는 중세 ‘꼴통’ 기사들의 편견과 달리 훨씬 더 깔끔하고, 과학적이고,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풍성해 보이는 모습. 그저 대장장이에만 불과했던 평민이 어느 날 영주의 사생아로 밝혀진 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존경받는 장군 및 영주’가 되어가는 과정도 뭐, 별 깊이는 없지만 나름 흥미롭고.

Kingdom of Heaven

위엄에 넘치는 마스크 뒤의 젊은 왕, 볼드윈.

게다가 그 훌륭한 배우들이라니. 비록 에드워드 노튼은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만, 리엄 니슨은 참 일찍도 화면에서 사라져 버리시지만, 그럼에도 나는 배우들이 참 좋았다. 에드워드 노튼, 하면 항상 ‘너무나 미국적인, 미국 남부 촌뜨기 출신’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가 볼드윈 왕을 연기한다고 했을 때 “과연 어울릴까” 했건만, 너무 잘 어울리는 건 기본이고 얼굴을 마스크로 감싸고 온몸을 옷으로 붕대로 둘둘 말았음에도 더할 나위 없는 품위와 존귀한 위엄과 지혜로운 카리스마를 온몸으로 발산한다. (흑… 새삼 버닝…) 언제나 그렇듯 제레미 아이언스와 리엄 니슨도 위엄 넘치고 품위있게 영화를 빛내주시고. 에바 그린은 참으로 매력있으며… – 아아, 완전히 평민이 되어 병사들을 치료해주는 여왕이라니! – 얼굴을 잠깐 보이긴 하지만 데이빗 듈리스도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캐릭터를 참 훌륭하게, 슬프게 보여주시고… 또 살라딘 왕도 멋있었고. 올리도, 이런 대작 영화에 게다가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조연으로 출연하는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조금 존재감이 부족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그 캐릭터를 잘 살린 것도 같고… (아악, 근데 러브러브씬이 왜 그리 짧은 거냐?!!)

어쨌건 다 보고나서 든 생각.

1) 뭐, 그냥 볼 만했네. 사운드 좋고 화면 큰 극장에서 제대로 봤으면 훨씬 나았으려나.
2)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올리의 발리안 경이 아니라 에드워드의 볼드윈 왕이 아니었을까.
3) 이거, 영화를 만들다보니 부시 씹기가 된 게 아니라 부시 씹으려고 작정하고 찾아만든 영화 아닐까.

ps. 난 사실, 저 Kingdom of Heaven이란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든다. 그냥, 아주 개인적으로, 특별한 제목이다. … (땅이 아닌) 하늘의 왕국이여,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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