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캐럴 | 웃음의 나라

오래된 논쟁거리 몇 개를 잠깐 다시 생각해 보자.


논쟁 하나.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대체로 우리는 서사를 통해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인간과 사회와 우주의 본질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의 본질을 빌려 그 중의적이고 모호한 세계를 역시 중의적이고 모호한 방식으로 재생하려는 행위로 보기도 하고, 허구의 인물을 통해 현실의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로서 문학을 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질문을 잠깐 틀어보면, 그렇다면 소설가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러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사람? 이야깃꾼? 삶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짓말을 사용하는 사람? 여기에서 잠깐 성경으로 생각을 돌려보면, 기독교에서 이 세상은 신의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 하고, 특히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원래는 logos – 이성)이 있었고 말씀이 곧 신이며 말씀에 의해 천지가 지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설가의 행위는 또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주의 행위를 모방하고 본뜬 행위도 되지 않을까?


논쟁 둘. 본격적으로 기독교로 들어가서, 특히 기독교의 칼뱅의 예정설에 따르면 신에게 구원을 받을 인간들은 애초부터 예정되어 있으며 이들의 길 역시 신에 의해 미리 예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혹은 꼭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신년초마다 보는 사주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운명이 세세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대강의 틀거리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믿음이 우리 인식계에서, 꼭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부정되지도 않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 운명을 알고 있다면?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언제 죽는지 안다면 어떨까? 우린 삶에 적극적으로, 지금을 더욱 행복하게 향유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에 지금을 즐겨야 하는 걸까? 만약 내가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임을 판정받는다면, 그것은 나름 복인 걸까 더할 수 없는 불행인 걸까. 내가 점을 믿지 않고 점집에 거의 가지 않으면서도 그 언젠가 보았던 점괘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기억하며 되새기고 의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땐 아주 밝고 달달한 판타지 계열인 줄 알았다. 비교적 초반부에서 이 제목이 소설 속에 주인공이 좋아하던 책 이름이라는 걸 알았을 땐 그런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워낙에 첫인상이 그랬고 그게 강했던… 게다가, 어릴 적 좋아하던 동화작가를 찾아간다니, 이건 사실 굉장히 문학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설정 아닌가. 하지만 결론적으로 딱 집어 표현하자면, 이 책은 요 몇 년 간 읽은 책들 중 H.P. 러브크래프트의 [공포의 계곡] 이후 처음으로 마지막 문장에서 소름끼치는 ‘악!’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책이다. 물론 그 이유는, 뜬금없이 이 글을 시작한 저 논쟁거리들과 관련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이제껏 소설이라는 것을, 작가가 제시해 주는 그 세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세계를 즐길 줄만 알았지 작가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스티븐 킹이니 존 어빙이니 제인 오스틴이니 브론테 자매니 빅토르 위고니 하는 작가의 이름을 들먹일 때조차도, 그들을 그저 나를 재미있게 해주는 말하자면 이야기 서비스 제공자라 느끼며 그저 즐거이 소비를 하거나, 상상력이 혹은 이야기를 만들고 구성하는 능력이 풍부하다며 감탄하거나, 작품 속에 드러난 그의 성정과 성격이 참 어떻다거나 혹은 그 자신의 인생, 혹은 당시 사회적 배경이 작가에게 어떤어떤 영향을 주었나 보다, 식으로만 생각했지, 그 소설을 창조주의 창조행위와 연결시켜 본 적은 없다. 오히려 나는, 자신의 목표와 필요를 위해 캐릭터를 말도 안 되게 굴리거나 작가의 억지를 캐릭터에 투영시키는 그런 작가들을 ‘이야기 구성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인물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증오했다. 나는 그들을 한번도 내 세계 위에 군림하는 어떤 특별한 존재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은, 소설가란 그럴 수도 있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초반부는 비교적 나른한 분위기로 흘러간다. 삶에 별로 재미가 없는 고등학교 영어교사 토머스 애비가, 따분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휴가를 받기로 하고, 그동안 자기가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동화작가인 마셜 프랜스의 자서전이나 한번 써볼까 궁리한다. 우연히 서점에서 자기만큼이나 그 작가를 좋아하던 여자인 색스니 가너를 만나고, 그걸 핑계삼아 이 소설의 원천적인 존재로 설정된 마셜 프랜스가 소개되고, 둘은 어찌어찌 엮어지고…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소설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건, 이들이 마셜 프랜스의 고향인 게일런으로 향하는 2부에서부터다.


2부에서도, 뭐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색스니의 조사 결과에 근거해 마셜 프랜스가 젊은 시절 잠깐 일했다는 장의사가 들려주는 얘기도, 이들이 도착한 촌구석 마을 게일런에서의 첫 대면도, 그저 마셜 프랜스가 좀 괴짜였고, 게일런은 어쩔 수 없이 시골이구나, 정도를 전해줄 뿐이다. 마셜 프랜스가 괴짜인 거야 소설 처음부터 누누히 강조되던 거고. (마셜 프랜스는 평생 게일런에서만 살았고, 그 딸은 전기작가들을 증오하며 편집자에게도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마셜 프랜스의 딸인 안나 프랜스를 제외하고는 마을 사람들도 촌스럽고 수선스럽고, 도시내기인 우리들이 ‘시골 사람들’이라 할 때 떠올리는 그런 종류의 낯선 느낌만 던져줄 뿐이다. 책 뒷표지에서는 ‘위대한 작가의 딸을 만난 두 사람은 흥분과 기대감에 부풀어 마을에 머물지만, 하나둘씩 기묘하고 이상한 일들과 맞닥뜨리게 되는데…’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2부가 다 지나도록 뭐 기묘하고 이상한 사건이 어딨지, 싶다. 2부 끝머리에 가서야 으음…? 하게 되는 정도. 그럼에도, 책이 지루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굉장히 가볍고 경쾌한 필치로 토머스 애비와 색스니 가너의 모험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3부에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사건들이 펼쳐진다. 그러다 보면 책장 넘기는 속도가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빨라지는데, 그러다보면 1부와 2부의 그 일상적이고 평화로우며 별달라 보이지 않았던 설정들, 그 안에서 일어났던 작은 언급들이 실은 별다른 것, 게일런의 비밀과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것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역시나 도시내기들이 시골마을에 대해 갖는 편견을 박살내는 것. 하나둘 빠르게 폭로되는 게일런의 비밀은, 대단히 독창적이고 기발하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대단히 문학적인 물음들과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져주기 때문에 충격적이다. 이 작가는 이런 판타지스러운 설정, 그럼에도 ‘어릴 적 내 세계를 지배한 내 영웅의 과거를 짚어간다’는 지극히 미국문학 내의 전통적 행위를 통해 지금 창조주를 얘기하고 있잖아. 해서 내 눈과 손가락은 빠르게 책장을 넘기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계속 분주했다.


소설의 엔딩 장면은 대단히 비주얼하면서도 인상깊다. 마셜 프랜스가 좋아했던 기차역을 그런 식으로 쓰다니! 영화로 만든다면 엄청난 스펙터클의 장면이 될 터이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기차역으로 몰려가고, 축제를 벌이고, 불꽃이 터진다. 하지만 정말로 헉!하는 느낌을 준 건 이 장면이 아니라 엔딩 뒤에 붙은 에필로그, 말그대로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생각들이, 그 맨 마지막 문장을 통해 머릿속에서 불꽃놀이를 하듯 연속적으로 터지며,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계속 머릿속에 폭죽을 울려대는 느낌. 그럼에도 어딘가 참 슬픈 느낌. 그런 것들. 사실 우리의 주인공 토머스 애비는 어딘가 부족하고 찌질하고 애처로운 면을 갖고 있어서(소설 처음부터, 사회성 제로에 여자엔 젬병이란 사실이 드러나고, 유명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존재감이 묽게 희석된 존재로 설정돼 있다.), 그런 인간이 겪은 충격적인 사건과 모험, 상실을 통해 결국 아버지의 소환으로 가는 것은, 몰릴 대로 몰릴 인간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귀환으로도 느껴진다. 사실 유명인인 친부가 아닌 마셜 프랜스야말로 토머스 애비에겐 정신적인 아버지였을 것이다. 결국 그 아버지를 떠나, 오래 전 죽은 아버지의 손에 안착하는 것. 어쩌면, 먼 곳을 부유하던 영혼이 집, 자기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혹은 운명으로 지워진 자기 인생의 짐을 수긍하는 것.


그러고보면 토머스 애비의 취미와 색스니의 취미(이자 생계수단)은 참 단적인 상징이다. 다른 사람들이 토머스의 존재를 지운 채 계속 불러대는 아버지 때문에 고통받는(소위 ‘유명인사 자녀 컴플렉스) 토머스는, 아버지의 오라가 아닌 바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지만, 그에게 확고한 자아라는 것이 있을 리가. 그가 마셜 프랜스의 전기작가로 선택되는 것도 결국은 그런, ‘비어있는’ 에고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이가 천착하는 수집 대상은 마스크이다. 그는 말하자면, 아버지의 오라 위에 자기 자신의 얼굴을 한 마스크를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반면 남자친구의 집필에 헬퍼로서, 배타와 배제의 대상이 되는 색스니, 그러나 말하자면 신의 인간 창조에 ‘생령’의 역할을 한 그 색스니는 인형을 창조해내는 작은 창조주이다. 물론 소설의 엔딩에서 그녀가 맞게 되는 일은, 아마도 바로 그 이유 – 사람이 아닌, 인형의 창조주 – 이기 때문이겠지만.


그리하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 책을 어떤 장르로 구분하는지 모르겠지만, 내멋대로의 기준을 적용시켜도 좋다고 한다면, 난 이 책을 결국 공포소설로 정의할 것같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5 Comments

  1. 저도 공포소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는 2부에서 이미 스멀스멀 드러나는 균열들에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어요. (1인칭 주인공 서술자의 해석 따위, 곧이 곧대로 믿어줄 줄 알고! 하면서요) 그래서 그 균열들이 설명되면서 폭주하는 3부의 전개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그 무시무시한 상황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조마조마하게 따라가고 있었는데…

    3부 마지막에서 책 집어 던질 뻔 했습니다. 캐롤 미워! 색스니를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는데… 그래서 제게는 3부가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 에필로그는 이미 작품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예고되고 있었던지라 3부에 접어들 무렵에는 짐작이 되더라고요.

    아무튼 3부에서 얻은 그 상실감 때문에 다시 읽기가 힘드네요. 감상문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인데 말입니다. 조너선 캐롤의 팬인 분께 이런 소감을 말씀드렸더니 원래 이 작가가 막판에 판 깨는데(…) 일가견이 있다고 해요. [웃음의 나라]는 양반이라고; 캐롤 책이 더 나올 것 같은데, 벌써부터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 사실 전 제목만 보고 제멋대로 상상한 그 ‘밝고 달달한’ 이미지 때문에, 2부에서 조금씩 내미는 가시들이 신경쓰이면서도 애써 무시하고 있었어요. 에필로그의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분명 알고 있었단 생각은 드는데, 왜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실제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봤을 때 꽝!하는 느낌… 그런 거였습니다. 하여간 간만에 참 스릴만점의 독서였어요. ^^

  2. 저도 읽으면서 마지막에 오싹하기는 했습니다만, 마지막 결론이 그런 의미였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프로메테우스’적 요소에 너무 마음이 빼앗긴 나머지.. 주인공이 결국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건 ‘두개골의 서’ 결말과 흡사하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헌데 감상문 쓰기가 어려워서 고민입니다.

  3. 뽐뿌가 장난 아니십니다. 사봐야겠습니다-_-;;;

  4. 永革 / 그 프로메테우스적 설정, 너무 매력적이죠… 근데 아무래도 제 세계는 기독교가 너무 강한가 봅니다. 책 본문에서도 그렇고 표지에도 그렇게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이 나오건만 기독교, 창세기 타령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강력한 그늘이라는 것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쟁가 / 하하, 원래 제 글이 ‘보도자료 쓰기’로 다져진 거라서. ^^ 근데 책 정말 재미있습니다. 뒤가 너무 궁금해서, 머리가 ‘잠시멈춤’ 신호를 아무리 보내도 눈이랑 손가락이 막 재촉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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