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뇌이유 | 지하실의 멜로디 Melodie en Sous-sol

Any Number Can Win!


감옥에서 막 나온 범죄계의 지존 샤를(장 가뱅)은 오래 전 동료였으나 현재는 마누라와 소위 ‘건실한 삶을 살고있는 친구가 건네준 청사진을 갖고 카지노를 털 계획을 세웁니다. 젊은 몸빵으로는 날건달 백수이자 제비인 프란시스(알랭 들롱), 운전기사로는 프란시스의 매부를 끌어들입니다. 카지노의 호텔에 투숙한 프란시스는 카지노에서 공연하는 댄서를 꼬셔 루트를 만들지요. 그리고 이들의 ‘완벽한’ 카지노 털기 계획은 실행에 들어갑니다. 결과는?


감독 이름도 낯설고, 그 전날 <세번째 희생자>에서 소위 프랑스식 블럭버스터 스릴러에 살짝 실망한 터라 이 영화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야말로 대박을 건진 기분입니다. 젊고 섹시한 알랭 들롱의 ‘껄렁한 매력’과, 장 가뱅의 품위있고 묵직한 매력이 조화를 이루는 이 영화는, 흑백 프랑스 범죄영화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경쾌한 재즈 음악 사이로 아주 경쾌한 편집과 연출을 자랑하며 스릴있게, 그러면서도 여유만만하게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영화 후반, 카지노를 털기 위해 미리 세운 계획을 착착 실행에 옮겨가는 장면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마지막에 현장을 오가는 경찰들 눈치를 보며 태연한 척, 가방을 옮기는 프란시스와 그를 지켜보며 기다리는 샤를을 보노라면 가슴은 콩닥거리고 손에는 땀을 쥔 채, 온몸의 근육을 미세하게 움찔거리며 화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정말… 하하. 나이가 들더니 어느 순간부터 기왕 범죄영화는 ‘완전범죄’가 좋더라고 이 블로그에서 몇 번 말한 적이 있는데, 영화가 제작된 1963년이라는 시대배경상 큰돈을 갖고 무사히 빠져나가는 악당을 그리기가 힘이 들긴 했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범죄가 뽀록나고 권선징악의 결말을 맺는 것도 아니거든요.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이 정도면 만족합니다. 게다가 영화가 좀 멋졌어야지요.


아 정말, 낮은 목소리에 중후한 풍채로 무게를 잡으시는 장 가뱅 형님도 정말 멋지시고, 알랭 들롱의 껄렁한 날건달의 매력이 보석처럼 빛납니다. 그런 느물한 남자는 제겐 하나의 로망이기도 합니다. 보통 여자들은 나쁜 남자에게 잘 이끌린다고 하지요. 보통 주변 친구들이 ‘느끼하다’고 표현하는, 느물느물거리는 바람둥이 캐릭터를, 현실에선 결코 좋아하지 않는데 영화 속에서 호감배우들이 할 때만큼은 뒤로 껌벅껌벅 넘어가거든요. (<마스크 오브 조로>에서도 반데라스 옵화의 그 느끼한 매력이 어찌나 좋던지!) 저는 알랭 들롱이, 호탕하게 웃는 것보다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거나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 멋지다고 생각했는데요.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젊은 날건달 백수 제비의 매력 역시 알랭 들롱에게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자신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두 개의 ‘상반된’ 얼굴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영화 중반까지 알랭 들롱의 프란시스는 번지르르한 얼굴에 속은 얄팍하고 경박하기 그지없는 양아치 청년입니다. 취직 좀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그야말로 철딱서니없는 10대 아이처럼 반응하는데, 초반의 알랭 들롱은, ‘저이한테 저런 매력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귀엽습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을 때, 그는 더없이 집중하고 진지해지면서 ‘남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최고로 꼽았던 대사, “누님, 선수끼리 이러지 맙시다.” 같은 대사는 그 계에서 닳고닳은 느물한 성인남자의 대사예요. 그런데 초반과 중반 이후의 이 상반된 이미지가 전혀 충돌하지 않습니다. 둘 다 알랭 들롱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저 철딱써니없는 동네 양아치에서 진지하고 능숙한 프로페셔널로 넘어가는 게 거슬림없이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휙 넘어가버리거든요. 말하자면 이 영화는 소년 알랭 들롱이 성인남자 알랭 들롱으로 순식간에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저는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우며 느물거리는 알랭 들롱의 이미지를 꽤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그건, 어릴 적 어느 토요일 낮에 본 <흑수선> 때문이에요. 이 영화는 알랭 들롱이 성격이 상반된 쌍둥이 형제를 1인 2역으로 연기하는데, 진중하고 성실하며 민중의 고통에 아파하는 귀족청년과, 어릴 적부터 한량에 난봉꾼으로 노느라 집을 떠나 사고만 치고 다니던 호방한 성격의 청년을 동시에 그려내고 있습니다. 알랭 들롱의 육체가 주는 이미지가 꽤 재미있는데요.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사실 그의 얼굴은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 그 미모가 더욱 빛이 납니다. 그런데 근육이 잘 발달돼 있는 그의 몸과 반드르르한 얼굴의 피부는, 이상하게도 성인남자의 느낌과 어딘지 미숙한 소년의 느낌을 동시에 주거든요. 알랭 들롱은 자신의 육체가 갖고 있는 이 상반된 이미지를 매우 잘 알고 적절하게 통제하고 있는 듯해요. 가죽잠바를 입었을 때의 들롱과 수트를 입었을 때의 들롱, 수영복만 걸쳤을 때의 들롱과 면바지에 니트 스웨터를 입었을 때의 들롱은 손발짓의 제스추어와 걸음걸이, 몸통을 움직이는 방식마저도 변하는 것같아요.



감독은 알랭 들롱과 장 가뱅이라는 배우의 장점과 이들의 케미스트리를 아주 잘 살리면서도, 범죄영화에 있어서의 스릴과 편집 / 연출의 리듬을 아주 제대로 살리고 있습니다. 미사여구, 군더더기도 없고요. 영화 초반, 샤를이 감옥에서 나와 자기 집을 찾아가는 과정도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자기 마누라와 딱 만나서 나누는 대화들까지도, 참 건조하고 절제돼 있으면서도 어쩐지 신뢰가 가는, 그런 부부관계를 캐릭터라이징해서 보여줍니다. 카지노를 터는 과정 역시 음악을 비롯한 사운드 효과를 아주 잘 살리고 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스릴과 웃음을 동시에 뽑아내는 그 긴장감과 여유는 정말, 아주 노련한 장인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삼 낯선 이름의 이 앙리 베르뇌이유 감독의 다른 작품들이 아주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만약 다른 주제전으로 이 영화가 또다시 어딘가에서 상영된다면, 꼭 놓치지 말고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알랭 들롱 옵화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옛날영화답게 템포는 쪼금 느릴지 몰라도 그 여유로움이 또 한껏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2 Comments

  1. 그날 한 달 만에 애인하고 만나서 놀면서 들롱 회고전 세 편을 볼까 두 편을 볼까 하다가 ‘어제 세 편 봤고 거기에 오늘 두 편이면 많은 거지, 애인하고 만났는데 너무 영화에 치중하는 것도 좋지 않아’ 하는 마음으로 [지하실의 멜로디]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만, “누님, 선수끼리 이러지 맙시다.”라니요! 속이 타네요. 좀 일찍 보고 말씀해주시지 ㅠㅠ (당연히 들롱의 매력에 빠진) 애인에게도 그 대사를 들려줬더니 함께 후회막심. 말씀하신대로 다음에는 놓치지 않고 보겠노라 다짐합니다.

    여담이지만 저랑 애인은 [세 번째 희생자]도 꽤 재밌게 봤습니다. 물론 시시껄렁한 미국 액션 영화의 틀을 따라가고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시큰둥한 마음이었습니다만 7~80년대 액션 영화에서만 나올 수 있는 무분별한(…) 폭력성과, 프랑스 범죄 영화에 어울림직한 허망함(심장마비 최고!)이 정제되지 않은 채 들어차 있는 게 좋더라고요. 이를테면─ 비윤리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태도로 도로를 질주하며 주유소까지 악당들을 쫓아 온 알랭 들롱이 망설임없이 한 명을 죽인 뒤 차 뒤에 숨어서 또 한 명과 대치하다가 문득 (그 전까지의 박력은 갑자기 증발되고) ‘이것 참 난처한 걸’하는 모양새로 우물쭈물하는, 그런 감성이 저를 사로잡았답니다.

    • < 세번째 희생자>는 일단, ‘앗, 알랭 들롱이 나이가 들더니 눈매가 너무 못된 사람처럼 보인다’라는 게 첫 실망이었고… ‘평범한 겜블러’가 계속 프로페셔널한 존재로 오해받는 설정이 재밌었는데 그게 좀더 유머러스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그래도 막판 그 노인네랑 독대하는 장면은… 흐흐흐) 알랭 들롱은 중년이 됐어도 청바지가 매우 잘 어울리더군요. 하하;;

      나중에 기회가 되실 때 < 지하실의 멜로디>, 꼭 놓치지 마세요. 아참 이 영화는 영어제목, Any Number Can Win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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