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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에 해당되는 글 10건

우디 앨런 | 스윗 앤 로다운 Sweet and Lowdown (1999)  -  2010/08/31 03:18

Sweet and Lowdown

으하하하 이 포스터!

우디 앨런 감독의 1999년작 <스윗 앤 로다운>은 가상의 천재 재즈 기타리스트 에밋 레이(션 펜)의 변덕스러운 삶을 그린다. 재즈 역사가는 물론, 재즈광으로 잘 알려진 우디 앨런 감독 자신까지 나서 그들의 인터뷰 증언장면과 일종의 '재현' 화면을 교차시켜 일종의 페이크 다큐 기법을 도입했다. 션 펜이 그려내는 에밋 레이는 자신이 세계최고라는 자부심, 그리하여 "예술가라면 응당 이래이래야 한다"는 허세의 자부심이 컸던 만큼, 당대 최고라 알려진 장고 라인하르트에 대해서는 끝없는 열등감과 경외를 가지며 이른바 '열폭'하곤 했다. 에밋 라이의 삶을 증언하는 이들에 의하면, 그는 파리에서 장고의 연주를 들으며 두 번이나 그만 기절을 해버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물론 천재 예술가들의 여자들과의 스캔들은 대중의 가장 큰 관심사일 터. 에밋 라이는 "나는 예술가니까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아, 자유로워야 하니 결혼은 안 해" 따위의 말들을 주절거리며 여자들과 연애는 하되 책임감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피했다. 즐기는 건 좋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라는 거다. 많은 여자들과 그런 식의 연애를 이어갔던 것으로 설정되지만,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해티(사만사 모튼) 및 블랜치(우마 서먼)와의 관계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블랜치는 한편으로 해티를 돋보이게 하는 한편, 레이가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기만을 깨닫게 하는 일종의 '계기'로 작용하는 좀더 기능적인 인물이다. 해티가 어릴 적부터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였던 반면 블랜치는 끊임없이 노트에 기록을 하는 작가지망생이다. 고아 출신으로 세탁부였던 해티와 달리 블랜치는 명성과 돈이 있던 가문의 여성이었던 점도, 해티가 레이를 숭배하며 그럴 어린아이같은 심성으로 사랑했던 것과 달리 블랜치가 매순간 레이를 분석하려 들며 그와 일종의 줄다리기 게임을 즐겼던 점도 해티와 블랜치가 얼마나 극명한 극을 이루는 사람들인지 잘 드러내는 특징들이라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해티는 변덕스러운 레이에게 하룻밤새 버림을 받지만 블랜치는 그 자신이 레이에게 배신을 때린다.

그러나 이런 식의 줄거리 요약이 <스윗 앤 로다운>의 아름다움과 근사함을 특징지어주는 요소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이 언제나 천착했던 남과 여의 관계, 또 한편으로는 예술가와 그의 팬의 관계를 버무리면서, 그 특유의 유머와 신랄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작품이다. 영화 전반을 통해 우리는 허세와 연약함, 자만심과 가련할 정도의 열등감과 자기 방어 기제, 빛나는 재능과 어이없을 정도의 어리석음을 함께 갖고 있던 '에밋 레이'라는 인물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디 앨런 특유의 신랄한 유머와 션 펜의 탁월한 연기 덕에, 관객의 입장에선 그를 한심스러워하며 조롱의 비웃음에 동참하게 되면서도 동시에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연민을 함께 품게되는 것이다. 그건 그가 언제나 무대 위 빛나는 별이 되고 싶었으되, 태생적으로 어둠과 진창에서 태어났고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심지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렇기에 그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에서만 투쟁적이었으며, 그럼에도 그런 투쟁의 삶은 언제나 너무나 쉽고도 허무하게 여자와 자고 싶다거나 차를 사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너무나 가볍게 바람에 흩어지곤 했다.

Sweet and Lowdown

사만사 모튼과 션 펜.

자신의 거울과도 같은 사람과의 연애와 상처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이미 너무 늦어버린 사람의 가치를 깨닫는 어리석은 남자의 이야기야 이 우주에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넘치도록 넘친다. 재능은 지녔으나 그 재능을 유지해줄 성실함은 없고 더욱이 자만과 허세가 하늘을 찌르던 예술가의 추락, 그것도 처음엔 서서히 진행되다 점점 가속도를 더해 막판엔 겉잡을 수 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그 자신은 너무 늦은 뒤에야 그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역시 세상에 흔하게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우디 앨런은 <스윗 앤 로다운>에서 옛날옛적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꾼들이 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도, 그 안에 자신만의 독특한 숨결을 불어넣는 데에 성공한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빛나는 듯하다 대공황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이 퇴색했던 미국의 그 20년대와 30년대를 그 빛나는 재즈 음악으로 한껏 되살려내고,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어리석은 한 남자를 통해 예술과 삶과, 사랑을 되짚는 것이다. 이후 2000년대의 우디 앨런의 영화들이 여전히 매력은 있지만 어딘가 예전의 우디 앨런답지 않은 맥빠진 면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에게 있어서도 가장 찬란히 빛난 뒤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든 그의 영화예술 세계의 가장 마지막으로 빛나는 정점에 있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ps 1. 이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의 2010 시네바캉스의 상영작으로 상영되었다. 99년경 헐리웃 리포터 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처음 접하고 수입개봉만을 기다렸으나, <브로드웨이를 쏴라> <마이티 아프로디테>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등이 개봉되고 있던 와중에도 이상하다시피 수입되지 않았던 걸작.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10년을 기다려 본 셈이 된다.

ps 2. 기타를 부숴버린 채 망연히 앉아있는 션 펜의 모습을 부감으로 잡은 거의 마지막 숏은 역시 명불허전, 백문이 불여일견.

ps 3. 당연한 얘기지만, 음악이 너무 좋다. 중간중간 같이 재즈 잼을 연주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역시나 너무 좋다.

ps 4. 션 펜 오빠 만세! 아울러, 역시 허세와 허영으로 가득찬 블랜치의 모습을 매우 매혹적으로 그려낸 우마 서먼도 뜻밖에 우디 앨런 영화에 아주 잘 어울리는 언니였다는.

ps 5. 2000년대에 우디 앨런이 함께 작업했던 주요 배우 중 그나마 우디 앨런 영화에 잘 어울렸던 이는 스칼렛 요한슨 한 명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니 우디 앨런도 요한슨과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함께 작업했던 거겠지만. 사실 이 영화의 사만사 모튼도 우디 앨런의 영화와는 묘하게 불균형을 이루는데, 사만사 모튼이 맡은 해티 역은 워낙에 그런 불균형이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경우라 해야 할듯. 사실 2000년대 우디 앨런 영화 중 최악의 미스캐스팅은 역시 <애니씽 엘즈>의 제이슨 빅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ps 6. 그러므로 결론은... 역시 션 펜 오빠 만세!

김성호 | 그녀에게 (2010)  -  2010/08/28 15:10

그녀에게

이 허한 포스터 감성 어쩔 거야;;

조너선 캐럴의 『웃음의 나라』는 마셜 프랜스라는 동화작가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한 남녀 한 쌍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던 작가가 평생을 보냈던 마을에 도착하지만, 곧 그 마을의 무서운 비밀을 알게 된다. 꽤나 충격적인 반전과 장면이 포함된 이 소설을 읽고, 허구의 창작이야말로 신의 천지창조를 흉내낸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창세기에서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따고 생령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모든 창작자들도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들의 소소한 설정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 환경, 그리고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에 반영하면서, 점차 보이지 않는, 그러나 우리의 물리적 세계를 꼭 닮은 허구의 세계가 형태를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떤 창작자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캐릭터를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끌고가지 못하게 된다. 대신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들이 스스로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행하는 선택들을 그저 뒤좇게 된다.

그러고 보면 바벨탑 이야기가 ‘언어’의 흩어짐으로 끝을 맺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후대의 신학자들은 바벨탑 이야기를 ‘신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들’에게 신이 내린 징벌로 해석한다. 그리고 테드 창 같은 작가는 오히려 “신을 경배하고자, 그래서 신을 닮고자 만든 것”이라는 전복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물론 나는 테드 창의 해석이 좀더 마음에 든다. 나아가 바벨탑이 그저 높이만 높은 탑일 뿐 아니라, 실은 소설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도서관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인간 복제나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보다도, 허구의 창작야말로 신의 영역을 넘보는 모방 행위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재능이 있든 없든, 사춘기 적 한번쯤은 소설 습작을 해보고, 고통과 무력의 시기에 한번쯤은 시나리오를 써볼 궁리를 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성호 감독의 영화 <그녀에게> 역시 허구를 창조하는 창작자의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배우 미팅을 위해 부산에 내려가는 한 영화감독과, 실명(失明)을 앞두고 오래 전 버린 딸을 찾아가는 중년의 사진가를 교차하며 시작한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를 고쳐쓰다 부산의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묘령의 신비로운 여자와 만나 그녀와 동행하게 된다. 한편 전화번호가 적힌 낡은 사진 한 장만을 들고 딸을 찾는 중년 남자는 필사적으로 딸의 행방을 좇지만 좀처럼 그녀를 만날 수 없다.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평행하게 달리며 서로 교차되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엮이기 시작한다.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여자가 들려주는 사연을 자신의 시나리오에 반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여자의 사연이 밝혀질수록, 초반에 제시됐던 영화감독의 사연이 하나씩 거짓으로 판명될수록, 영화 안에서 이야기와 현실, 실제와 허구가 뒤섞일 뿐 아니라 시간까지 뒤섞인다. 주인공인 영화감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섞인 채 한 영화 안에 여러 개의 이야기로서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러 개의 이야기가 다시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그녀에게

여배우가, 내가 좋아하는 서늘한 인상의 미녀다. 그러나 실제로 본 인상은 또 좀 다르더라는.

<그녀에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시나리오를 쓰던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여자를 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결국 창작자가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주인공을 붙잡는 장면으로 판명난다. 자신이 피조물에게 그런 고통과 상처를 주었고, 그 자신이 그녀가 사고를 당하도록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나 그녀가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 아니 그가 그 장면을 쓰던 그 순간, 그는 스스로 깜짝 놀라 키보드를 내던지고 이야기 속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는다. 이건 뒤집어 말하면, 결국 고통과 눈물의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의 상처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인 되는 셈이다. 어쩌면, 인간을 연민한다는 신의 마음이 저런 것일까. 제가 만들고 제가 안겨준 고통이면서, 막상 그 고통에 힘겨워하는 인간을 보면서 연민과 고통을 경험하는 것일까, 신이란 존재는.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신이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흩뜨려놓긴 했으나 문학을 포함해 허구 자체를, 나아가 예술 자체를 파괴하지 않은 이유가 무얼까에 생각이 미친다. 신을 닮고 싶어하는 인간의 그 가련한 욕망에 결국 연민을 품어버린 것일까. 이 세계를 창조한 자신들의 영광을 기리는 것이니 그냥 관대하게 굴자고 마음먹어서인 걸까. 혹은, 인간이 허구와 예술을 즐기다가 어느 순간 신을 이해하는,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의 순간을 맞기에 그냥 고이 내버려둔 것일까.

그런데 김성호 감독은 이 영화를, 애초에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로 일단 찍어놓고 나중에 편집을 통해 이야기를 짜맞췄다고 한다. 어쩌면 신도 이 세상을 만들 때 실은 아무 계획없이 창조의 욕구 때문에 무작정 만들고 본 게 아니었을까 싶다. 완벽한 조물주가 만들었다고 하기엔, 빈 틈이 너무 많은 우리 세상이 아닌가.


+ 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독립영화데이터베이스 페이지 중 '독립영화 초이스'에 기고한 글. (2010. 3. 10)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ps . 이 영화 역시 한국 주요도시 관광홍보 프로젝트인 '영화, 한국을 만나다'의 부산 편으로 제작된 영화다. 영화제 때문에 매년 내려가고 1년간 살기도 한 곳이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풍경들은 "부산에 정말 저런 이국적인 곳들이 있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생경하고 이국적이다. 이는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씨네21 김도훈 기자의 리뷰의 언급처럼 '그저 겉멋에 겨운 장소만 모은' 결과일 수도 있지만,... 매년 영화제 때문에 부산에 내려가는 서울 영화인구 반 이상이 부산을 아무리 익숙하게 여기고 안다고 착각한다 해도 실은 부산의 맨 얼굴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 그건 겨우 1년, 그것도 곧 떠날 이방인으로만, 게다가 해운대에서만 살아본 나 역시 마찬가지다 -  이 영화의 분위기가 부산과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물론 철저히 '서울내기' 입장의 폭력적 시선이기도 하다.

ps 2. 영화에서 주인공 영화감독 역을 맡은 이우성은 본업이 배우가 아니라 뮤지션이다. 그룹 코코어의 보컬. 김성호 감독과는 이전에 <판타스틱 자살소동>의 김성호 감독 연출 에피소드에서 협업한 바 있는데, 이 영화에선 그 '어설픈 연기'가 나름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반면 중년 포토그래퍼 역의 조성하는 연극판에서 뼈가 굵은 안정된 연기력의 배우. 

ps 3. 글 말미에서 밝힌 대로 시나리오 없이 일단 무작정 찍고 편집실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낸 영화라고 하는데, 그런 영화치곤 아귀가 제법 잘 맞고 일관성도 또렷하다. 하지만 덕분에 전주영화제에서 첫 상영되기 직전까지도 편집이 이뤄지고 있었다나 어쨌다나. 이 영화의 일부 장면 역시 캐논 5D Mark II의 동영상 기능으로 촬영되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이우성의 차를 부감으로 따라가는 장면이 그 장면인데, 전주에서 상영 당시 이 장면은 화면 일부가 깨지며 픽셀 일부가 확대된 것같은 부분이 있어 아쉬웠다. 그나저나 이 장면은 헬리콥터...가 아니라 경비행기에 촬영감독이 타서 촬영한 장면이라는데, 촬영 직후 비행기가 추락;;;해 촬영감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전계수 | 뭘 또 그렇게까지 (2009)  -  2010/08/28 00:26

뭘 또 그렇게까지

포스터도 촌스럽지만, 저 70년대스러운 카피라니.

기차 안에서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을 읽고 있던 촉망받는 젊은 화가 조찬우(이동규)는 춘천에서 열리는 미술학회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는 중이다. "얼른 춘천역에 와서 치킨집 술자리에 합류하라"는 독촉전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동적으로 김유정 역에서 내린다. 그리고 역시 '김유정'이라는 이름을 지닌 젊은 미술학도 여성과 만난다. 젊고 예쁜 여자가 자신을 존경한다며 "선생님, 선생님"하며 졸졸 쫓아다니니, 우리의 속물 예술가 조찬우는 어깨에 힘을 좀 주며 그녀를 꼬시고 싶다. 조찬우의 눈에는 김유정 역시 그걸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영화가 흥미로운 반전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니체'를 권하며 잘난척을 하던 조찬우의 '권위'가, "실은 고등학생 때 니체는 다 읽었다"는 유정의 말에 순식간에 뒤집히는 것이다. 거기에 조찬우는 유정을 스토킹하던 젊은 감독지망생 민호에게 '쫓기며'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후 영화는 단순히 한 여자와 두 남자를 둘러싼 소동만으로 코미디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관계와 태도를 통해 '자연'과 '예술'에 대한 담론으로 비약한다. 민호가 찬우에게 술대결을 청하며 들려주는 유정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름 신빙성 있는 '근거'들을 지니고 있지만, 이야기 자체가 기괴한데다가 민호라는 인물도 부담스러울만치 과잉된 자의식으로 뜬금없는 행동을 일삼는 캐릭터다. 곧 우리는, 그녀가 유정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 역시 실은 민호가 제멋대로 구성해 믿고있는 이야기들일 수 있다고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진술이 자연과 예술에 대하여 찬우가 유정에게 흘리듯 던졌던 말들, 그리고 세미나에서 토했던 열변들이 유정에 대한 기괴한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유정이란 인물은 다층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녀는 찬우가 낯선 곳에서 만난 그저 신비한 여인일 수도 있다. 민호의 말대로 기괴한 믿음과 행동을 일삼는, '어른 남자 찜쩌먹는 무서운 어린 여자아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또한, 찬우가 '예술'과 '자연' 개념을 그대로 육화한 존재이기도 하다.

'예술가'로서 찬우에게 '유정'은 처음엔 손을 내밀면 닿을 것 같은 '예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가 감히 통제하기는커녕 어찌할 수도 없는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로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민호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영화 역시 유정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찬우는 홍상수 감독의 남자캐릭터들과 달리,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기보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그에 복종하는 인물인 것 같기는 하다. 빈 호텔방에서 잠을 못 이루던 찬우가 '유정이 즐겨 한다던' 백팔 번 절하기를 하는 코믹한 장면이 바로 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될 것이다.

뭘 또 그렇게까지

영화의 클래이맥스를 이루는 공간은 젊은 예술가들의 축제가 열리는 공간이다. 애초 '춘천'이라는 도시를 알리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이 영화는 찬우와 유정의 동선 뒤로 춘천의 유명한 명소들을 배치해놓는 한편, 춘천을 대표하는 음식인 막국수와 닭갈비를 화면에 반복해서 등장시킨다. 그러나 <뭘 또 그렇게까지>가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춘천의 얼굴이라면, 서울과는 또 다른, 언제나 젊은 예술가들의 활기로 넘치는 '예술의 도시'로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영화와 음악, 춤, 판토마임, 행위예술, 그림 등 모든 장르의 예술이 어우러진 이 축제에서 찬우는 비로소 자신의 맨얼굴을 보게 될 뿐 아니라, 민호로 상징되고 있는 자신의 과거를 직시한다. (민호와 찬우는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이다.) 그리고 삐딱한 냉소와 비웃음이 몸에 배 있던 찬우는 비로소 이곳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고 겸허한 자세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후에 또 한 번의 반전을 준비한다. 찬우가 마침내 유정에게 다가갈 수 있겠다고 느꼈을 법한 순간, 유정은 다시 그의 이해와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예술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유정에게 짓는 찬우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인상적이다. 그 얼굴이야말로, 예술 언저리에서 밥을 먹으며 예술을 좀 아노라 하는 우리 모두가 가장 두려워할 순간의 얼굴일지 모른다. 우리가 원하고 희구하는 그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진실을 맞닥뜨리는 그런 순간이니까. 하지만 이 글을 유정이 읽는다면,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을 할 것 같다. "뭘 또 그렇게까지 이 영화를 보셨어요?"라고.



+ 프레시안에 기사로 올린 글. (2010. 4. 24)

ps 1. 캐논이 내놓은 DSLR 카메라인 OD 5D Mark II의 동영상 기능으로 완성된 전세계 최초의 영화. <하우스>의 몇 시즌이더라... 하여간 그 시즌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바로 같은 기종으로 전체가 촬영된 바 있다. 현장에서 제대로 모니터도 못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 초점이 빗나간 장면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기대 이상의 화질을 보여준다.

ps 2.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영화, 한국을 만나다'라는, 한국의 주요도시 다섯 곳에 대한 일종의 '관광홍보' 차원으로 기획된 시리즈 중 춘천 편이다. 부산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처음 상영됐을 때 보면서 관광홍보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영화 그 자체로 재미있으면서도 춘천의 명소와 춘천을 대표하는 키워드가 모조리 등장하는 것을 보며 감탄했던.

ps 3. 불쾌하기 짝이 없는 '90년대 홍상수 영화들'에 대한 아주 통쾌한 복수...라고 생각해서 이 영화를 더욱 좋아한다. 그러나 정작 전계수 감독은 이 영화가 "내 자식 같지 않다"고 한다. 전계수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이 이야기를 듣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란. 인터뷰를 보시려면 여기로.

이준익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  -  2010/08/28 00:14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본 포스터보다 멋진 티저 포스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조선시대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하는 정여립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이후 그가 조직했던 대동계의 향방을 두고, 왜구의 침입이 가시화되고 있음에도 이에 전혀 대처할 수 없는 "썩어빠진 조정을 쓸어버리려는" 이몽학(차승원)과, "대동계를 이용해 자신이 왕이 되려는 이몽학을 저지"하기 위한 황정학(황정민)의 추격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한신균을 아버지로 두었으나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고 방황하던 견자(백성현)가 이몽학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난 뒤 복수를 위해 황정학과 동행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기축옥사를 일으켰던 당시 극심했던 동인과 서인 간 정쟁이 영화에서도 (그저 정여립의 죽음을 설명하는 기능적 측면을 넘어서서) 매우 코믹하지만 결정적인 몇 장면으로 묘사된다. 다만 실존인물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회원을 받고 정기적인 무술훈련도 병행했던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끌어오되, 실제로 정여립이나 대동계와는 별 관련이 없었던 이몽학을 정여립의 제자이자 대동계 회원으로 설정한 데에서 상상력이 발휘됐다. 이몽학이 정여립과 대동계로 연결되면서 이몽학의 난이 실제 역사보다 4년 정도 앞서서 임진왜란 직전에 일어난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영화를 이끄는 두 주인공인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비에 있다.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이몽학이 주로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절도있는 말과 동작을 보여주는 '직선의 미'라면, 남루한 행색으로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는 소경 검객인 황정학은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능청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일관하는 '곡선의 미'다. 맹인 검객이라는 면에서 얼핏 '자토이치'의 인상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영화 속 황정학은 오히려 <스타워즈>의 장난기 많은 괴짜노인 요다나 <취권>의 사부 쪽에 가까운 성격을 드러내 보인다. 이몽학과 황정학이 마침내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근래 액션영화들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정반대로 '슬로우 모션' 액션으로 표현돼 다른 종류의 시각적 쾌감을 준다. 길게 이은 중심컷을 슬로우로 표현하되 그 앞뒤에 짧고 빠른 연이은 컷들을 붙이는 식으로 동양 무협액션의 아름다운 곡선의 동선을 최대한 살리고 표현하는 것이다. 칼과 칼이 부딪히는 무협액션의 쾌감을 잘 살린 이 씬은 가히 영화의 클래이맥스라 할 만한 장면이다. 두 시간이 조금 안 되는 러닝타임 안에 사건과 이야기의 흐름을 안정적으로 쌓아가는 호흡 좋은 플롯 구성도 영화의 강점이다. 촬영과 편집, 연출의 호흡, 그리고 지나치게 과용하지 않으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있는 음악도 나무랄 데가 없다.

<황산벌>과 <왕의 남자>에서도 드러났듯,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도 이준익 감독은 '권력'에 대해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시선을 그대로 견지한 채, 권력다툼의 와중에 일어나는 '난'이 빚는 끔찍함과 허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이 가장 적극적으로 투영된 인물이 바로 황정학이다. 그는 권력이나 대동계가 가진 '힘'에 초연한 채 반 거지행색을 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생물학적 아버지를 잃은 견자에게는 이상적인 스승이자 실질적인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전 작품들과 달리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권력을 사유하는 인물, 혹은 권력의 유혹 앞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의치가 너무 부담스러웠던. 혁명가이자 야심가이기도 했던 이몽학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야심만 도드라진다.

임진왜란을 피해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가버린 후 텅텅 비어버린 궁에 도착한 견자는 근정전 안의 왕좌에 앉아본다. 이 순간 관객들은 영화 초반, 서자라는 이유로 반항을 일삼던 견자에게 한신균(견자의 아버지)가 던져줬던 "지금 이 나라 왕도 서자 출신"이란 말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에서는 별로 강조가 되지 않았으나 이몽학 역시 실제 서얼 출신이었고, 그는 영화의 초기부터 왕이 되려던 야심을 숨기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권력에의 의지를 드러내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 역시 '너무 쉽게 입성한' 한양의 텅 빈 궁에 도착한 뒤, 허탈한 표정으로 근정전 앞마당에서 칼을 끈다. 그리고 견자는 이몽학을 맞아 "겨우 여기 앉으려고 그 많은 피를 흘렸냐"고 비난을 함으로써, 자신이 이몽학이 아닌 황정학의 길을 선택했음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왕의 남자>의 연산군조차 자신의 의지보다는 주변에 떠밀린 채 현실도피를 하는 듯한 인물로 그려졌고, '권력의 맛'을 알게 된 공길도 견자만큼 '적극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은 아니었음을 떠올렸을 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의 인물들은 이전의 이준익 감독의 인물들과 일관되면서도 어딘가 달라진 면모가 있다.

아쉬운 것은, 그 '다른' 면모가 제대로 입체성을 갖고 영화에서 발휘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인물들은 매우 단선적이고, 이 때문에 각기 정해진 방향으로 앞만 보고 내달린다. 이몽학은 고뇌를 지닌 혁명가라기보다는 그저 야심에 날뛰는 악당으로만 보이고, 그런 이몽학과 대척점을 이루는 황정학은 '너무 당연하게 옳기에' 오히려 "이몽학을 견제하기 위해 어린 소년의 치기어린 복수심을 이용하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관객의 입장에서 가장 감정이입을 할 만한 인물이자 실질적인 화자는 응당 견자가 돼야겠지만,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립구도에 지나치게 눌리는 데다 무작정 분노와 반항기를 내보이며 '버럭대기만 하는'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이몽학과 견자의 연결점이 되는 인물인 백지 역시 존재감이 약한 편으로, 이몽학과 백지 사이의 멜로 역시 다소 성기게 표현된 편이다. 이 때문에 인물들이 전면적으로 충돌하는 영화의 말미는 아드레날린의 폭발은 있되 가슴벅찬 감동이나 카타르시스는 기대하기 어렵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멘토로서의 황정학은 황정민에 의해 아주 매력적으로 재현되기는 했으나, 정작 그의 명분과 철학엔 별 입체감도 깊이도 없다.

영화의 클래이맥스를 이루는 이몽학과 황정학의 칼싸움, 그리고 이것의 '변주'인 이몽학과 견자의 칼싸움은 서로 팽팽하게 대립했던 상대와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이자 동시에 그랬던 상대에 대한 이해와 인정, 그럼에도 각자의 '다른 선택'이 엇갈리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간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인물들이 비로소 상대를 거울삼아 자신의 맨얼굴을 보는 장면이기도 하고, 그들이 시종일관 숨겨왔던 번민과 의심, 회한과 아이러니와 연민이 비로고 균열의 얇은 틈을 뚫고 새어나오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들은 관객에게 채 도달할 새도 없이 곧바로 공중에 흩어져 버리고 만다. 각자 앞만 보고 달려온 인물들이 마침내 일생일대의 대결을 펼치며 장렬히 산화하는 동안, 관객들은 그저 이들의 싸움을 '구경'만 하는 입장이 되기 십상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모처럼 꽉 짜이고 안정적인 이야기와 구성과 화면으로 두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영화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의 전작들에서 언제나 이야기를 이기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사람'의 온기 - 그것이 다소 이상적인 방향으로 단순화된 면이 있었을지언정, 그리고 언제나 동의를 받지는 않았을지라도 - 가 이 영화에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은 언제나 특유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힘, 무엇보다도 '사람'의 온기로 이런저런 소소한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무수하고도 뛰어난 장점들 가운데 그리 많지 않은 단점이 유난히 도드라지게 눈에 와서 박힌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분명 긴장과 재미를 느꼈음에도 극장을 나오면서는 허탈감과 아쉬움, 답답함이 더 컸던 이유다.




+ 프레시안에 기사로 올렸던 글. (2010. 4. 20)

ps1. 원작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보면서도, 이 이야기는 틀림없이 견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배우며 그의 눈에 비친 이몽학과 황정학의 모습일 거라 짐작했고, 그게 맞게 이야기를 푸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립구도를 강조하다보니 견자를 어정쩡한 위치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안습이었던 주연급 인물은 아무래도 백지. 이준익 감독은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데에 여전히 서툰듯.

ps2. 조정의 신하들이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고 얄팍하게 희화화되는 걸 보면서 어이없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아주 소박하면서도 대중적인 이런 식의 냉소주의는 하나도 건강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솔직히 그 조정 신하들이 아니라 이 영화의 그런 태도야말로 가장 유치하고 우습게 느껴진다. 그런 태도는 내용없는 불신과 근거없는 무력감과 무관심만을 만들어낼 뿐, 정확한 비판이나 풍자나 조롱이 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순간적인 웃음에 머무를 뿐 진짜 쾌락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는 이처럼 깊이 없이 얄팍한 대중적 정서가 영화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잡고 앉아있는 경우가 많다.

앤디 비클바움, 마이클 버나노 | 예스맨 프로젝트 The Yes Men Fix The World (2009)  -  2010/08/19 10:28

The Yes Men Fix The World

멀쩡하게 생긴 일련의 사람들이 WTO같은 세계적인 기구부터 엑손, 다우와 같은 글로벌기업, HUD(미국주택개발공사) 같은 국가 공기업의 대변인을 사칭하며 '사기를 치고 다닌'다. 공명심에 휩싸여 웬 이상한 걸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 경쟁하는 얼빠진 악동들일까? 방송에 이름이 나기만 한다면 무얼 해도 좋다는 괴짜들일까? 하지만 세계적인 대기업인 다우의 대변인을 사칭해 무려 영국 국영방송인 BBC 생방송에 출연해서 "인도 보팔 사태의 책임을 지고 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발언을 한 뒤 두 시간만에 들통이 났을 때, 그 장난의 주연이었던 앤디 비클바움은 자신을 찾아온 BBC의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거짓말은 불과 두 시간이었지만, 보팔을 방치하고 버려둔 다우의 거짓말은 20년을 끌었다."

인도 보팔 사태란, 보팔에 공장을 둔 세계적 화학기업 유니콘 케미컬의 공장이 폭발하면서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유니콘 케미컬은 폭발지역의 오염제거나 적절한 피해자 보상 등을 거의 하지 않은 채 보팔을 방치해뒀다. 유니콘이 '적절한 피해자 보상'을 딱 한 번 했던 것은, 미국 텍사스 주의 주민들이 집단 소송을 걸었을 때 뿐이었다. 폭발사고가 나고 17년 뒤 유니콘은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 다우에 의해 인수됐고, 다우 역시 보팔을 외면했다. 예스맨들은 다우가 유니콘을 인수한 3년 뒤, 영국 BBC 방송이 마련한 보팔사태 20주년 특별 생방송 중 프랑스 파리의 BBC 지부에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다우의 대변인'을 사칭해 "다우가 유니콘을 인수할 때부터 보팔에 대한 피해보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보팔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적절한 피해보상에 나서겠다"고 발표한다. 이 발표 직후 다우의 주가는 거의 20억 달러가 폭락하며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으나, 결국 이들의 '사기 사건'은 불과 두 시간 뒤에 들통이 났다.

예스맨들이 골탕먹인 회사는 다우만이 아니다.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가 담은 이들의 6개 활약상 중 첫머리를 장식할 뿐이다. 이들의 활동의 시작은 무려 WTO의 대변인을 자청하는 것이었고, 뒤이어 온갖 군수산업체와 글로벌 대기업, 심지어 미국주택개발공사(HUD)의 대변인을 자청하며 사기극을 벌인다. 방식도 웃기다. 예를 들어 석유에너지 회사들의 국제회의에서는 시치미 뚝 떼고 엑손의 대변인을 자청해서 사기를 쳤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인간의 사체를 제공받은 양초로 무공해 에너지원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군수업체의 심포지엄에서는 환경오염과 온난화로 전지구적 재난이 닥쳐올 것에 대비해 1인 구명장치를 발명했다며 코미디 SF에서나 나올 것 같은 기구를 선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을 더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이 시장만능주의자들의 논리를 차용한 가짜 연설이나 프레젠테이션이 결국 지독하게 비인간적인 방향의 결론으로 흘러가는데도, 컨퍼런스에 참석한 이들이 '매우 진지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위기관리 솔루션을 개발하는 회사의 대변인을 사칭해서는 "자본주의 시대에 위기관리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논리 하에 "나치한테서도 배울 건 배우자"는 결론을 내리며 자본주의 시대 비인간적 시스템을 조롱하는데도, 컨퍼런스나 심포지엄에 참석한 전세계 대기업 관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역겨움이나 도덕적 저항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참신한 사업적 아이디어"라며 이들을 찾아와 앞다투어 명함을 내밀거나, 오히려 "이런 구명장치는 대테러용으로 더 적합하지 않겠는가"는 사업적 조언까지 건넨다.

The Yes Men Fix The World

다우의 피해보상 발표가 거짓말이란 사실이 밝혀진 뒤 예스맨을 향한 보팔 주민들의 반응. 실은 '연출'된 장면으로, 실제로는 매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는 앤디 비클바움, 마이클 버나노 등 예스맨 프로젝트 활동의 주축이 되는 인물들의 활약상 중 6개를 추려 이들이 스스로 연출까지 손을 댄 기막히게 웃기는 다큐멘터리다. 이들이 대기업과 신자유주의 국제기구들을 골탕먹이는 방법들도 너무나 기상천외해서 웃기거니와, 이를 화면에 담고 영화를 진행시키는 방식 역시 지독하게 웃기고 유머러스하게 만들어졌다. 영화의 시작부터 앤디 비클바움과 마이클 버나노가 양복을 입은 채 수영장에 다이빙해 어설픈 포즈로 싱크로나이징을 하면서 자기들을 소개하는 식이다. "다음 타겟은 어디로 할까" 고민하는 장면에서는 폐가 공장 같은 곳에서 TV 한 대를 놓고 양복차림의 두 사람이 쭈그려 앉아있는 식으로 표현되고, 내레이션으로는 어느 기업을 고발하는 '문자'를 받았다면서 정작 화면으로는 쪽지를 붙인 돌이 창문을 깨고 날아오는 것으로 묘사하는 식이다. 거기에 화면에 종종 삽입되는 풍자적인 애니메이션 장면, 이들이 진지한 국제회의와 심포지엄에서 사용하는 프레젠테이션의 풍자적인 3D 자료화면도 배꼽을 잡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유머와 장난의 이면에는, 진지한 문제의식과 끝없는 열정이 있다. 물론 여전히 그들에게 호되게 당한 기업들은 이들을 '사악하고 심술궂으며 어이없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시민사회운동이라고 하면 의례히 거리에서의 격렬한 집회와 경찰들의 폭력, 각종 피켓과 격렬한 구호, 그리고 이면의 법정싸움과 기자회견 등 뭔가 '진지하고 비장한' 것을 떠올리기 마련인 우리들에게 '예스맨'들의 활동은 너무 장난질 같아 한심해 보이거나 당황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활약을 우스꽝스럽게 담은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와 마침 영화개봉과 때맞춰 발간된 동명의 책을 보고 나면, 이들의 활동이 실은 연기 아닌 연기를 하면서 미디어를 철저히 이용하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교묘한 미디어 운동이자 퍼포먼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결국 이것이다. "규제없는 자본주의란 결국 빈익빈 부익부를 가중화하며 소수의 부자들만 배불린 채 다수의 가난한 이들을 절망과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므로 적절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들이 벌이는 장난질은 한편으로 충격이고, 또 한편으로는 신기하다. "운동과 시위를 저런 식으로도 할 수 있다니."라는 놀라움도 준다. 하지만 이들의 유머는 배를 잡고 웃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혹은 변화시킬 게 너무 많은 우리의 현실을 상기시키며 묘한 슬픔과 눈물을 주기도 한다.

The Yes Men Fix The World

권위주의적인 독재정부를 가까스로 청산한지 불과 20년도 안 된 한국, 그 짧은 사이에 심지어 기업 하나가 법과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는 한국, 거기에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보다 신나는 운동'을 고민하면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이전 세대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에서, 어쩌면 이들의 활약은 지나치게 앞선 것이거나 여전히 생경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이것도 미국이니까 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섣부른 패배의식을 느끼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홍보차 직접 한국을 방문한 앤디 비클바움도 스스로 강조했듯, "변화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그토록 '즐겁게 투쟁하는' 앤디 비클바움도 국내 관객과의 대화와 책 <예스맨 프로젝트>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2003년 칸쿤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며 세계화에 저항한 故 이경해 씨를 언급하며 그의 저항에 경의를 바치기도 했다.

결국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란, 어제의 비장했던 투쟁 덕에 오늘의 즐거운 투쟁이 있을 수 있고, 이것들이 쌓이고 쌓여 내일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으로 2008년 11월 당시 예스맨들이 6개월 후의 날짜로 '행복한 뉴스만을 담은' 미래의 가짜 뉴욕타임즈 신문을 만들어 배포한 사건을 담은 것 역시, 그런 '내일에의 희망'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이 장면의 인터뷰에서 <샌프란시스코의 하룻밤>, <더 혼팅> 등에 출연했던 영화배우 릴리 테일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모처럼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강추'를 할 만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 프레시안무비 기사로 올린 글. (2010. 3. 31)

ps 1. 예스맨들의 활약을 담은 영화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댄 올먼, 새러 프라이스, 크리스 스미스 등 세 명이 연출을 맡은 가운데 마이크와 앤디의 활약을 주축으로 한 <예스맨 The Yes Men>이 완성돼 그 해 토론토영화제와 이듬해 선댄스영화제, 암스테르담영화제 등에서 상영되었고, 비록 한정적 규모나마 북미시장 내 극장개봉도 거친 바 있다. 2003년작 <예스맨 The Yes Men>에 대한 IMDB 페이지는 이곳이니 참조하시라. 2009년작인 <예스맨 프로젝트 The Yes Men Fix The World>는 <예스맨>의 두 주인공인 마이크와 앤디가 직접 연출과 제작까지 맡아 완성한 일종의 속편격인 영화다. 2009년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면서 미국개봉과 DVD 출시 등도 거쳤다.

ps 2. 실제로 만나본 앤디 비클바움은 영화 속에서처럼 유머감각이 뛰어나긴 하되, 훨씬 사람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유머감각과 함께 겸손한 진지함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몇몇 매체가 함께 한 라운드 인터뷰 자리에 참석했다가 완전 반해버렸다는. 당시 인터뷰는프레시안무비에 이 기사로 실었다.

ps 3. 예스맨들의 공식 홈페이지는 이곳 : http://theyesmen.org

김상진 | 주유소 습격사건 2 (2010)  -  2010/08/19 05:59

주유소 습격사건 2

1편보다 재미가 덜한.

10년만에 나온 속편인 <주유소 습격사건 2>는 전편만큼 후련한 통쾌감이나 폭발적인 해방감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들에게도 공감을 크게 느끼기 어렵고, 네 명의 캐릭터나 존재감도 무척 약해보인다. 1편에서 노마크, 무대뽀, 딴따라, 뻬인트가 각각의 개성과 또렷한 존재감을 과시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물론 김상진 감독 특유의 액션-코미디 감각은 여전하구나 싶고, 전편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억눌린 괴로움을 풍자하며 웃음을 주기는 한다. 1편의 유머를 활용한 개그들도 그저 '반복'만은 아니어서 노력이 가상해 보인다. 그럼에도 활기와 해방감보다는 오히려 답답하고 어수선한 혼돈만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영화의 실패인가. 아니면 영화 속에 반영된 현실의 실패인가.

주유소와 아무 상관도 없던 노마크 일당이 느닷없이 주유소에 들이닥쳤던 것과는 달리, 이번 편은 주유소의 직원들이 내부에서 주유소를 접수해 버리는 것이 영화의 전제다. 그러니 정확히 하면 주유소를 '습격'한 것이 아니라, '점거'한 것이다. 이 전제에서부터, 그저 전편의 영광에 기댄 안이하고 게으른 속편으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결의가 읽힌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지금의 '비정규직, 혹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20대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보노라면, <주유소 습격사건 2>는 뜻밖에도 근래에 나온 영화들 중 가장 20대들의 처지를 깊숙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면서도, 이를 우울한 절망보다는 떠들썩한 소동극으로 그려내는 드문 영화다.

20대 필자로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확보해 나가고 있는 《뉴라이트 사용후기》의 저자 한윤형 씨는 지금의 20대들에 대해 "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낙오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라고 분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8, 90년대의 20대들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사회체제나 기성의 질서에 저항하는 '루저의 정서'를 지녔다면, IMF 이후의 20대들은 '잉여의 정서'를 지녔다고 지적한다. 이는 사회학자이자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의 저자 엄기호의 주제의식과도 맞닿는 부분이다.

<주유소 2>의 주인공들은 한윤형이나 엄기호가 지적한 바로 그 '20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녔다. 플래시백으로 삽입되는 이들의 과거를 보노라면, 이들은 사회적 모순에 반발심을 느끼고 부모와 기성세대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간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했다가 주저앉게 된 자신의 현실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관객들은 전편의 네 명과 달리 이번의 주인공들에게 크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좌충우돌과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는 20대들을 '단 한 번'의 실수로 영원히 탈락시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우리사회의 생존경쟁을 풍자하는 것이지 않는가. 네 명은 각자 나름의 능력과 장기를 지녔음에도, 주유소 아르바이트 직에 '면접까지 보면서' 응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정규직도 아니고, 심지어 비정규직도 못 되는 단기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전전해야 하는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이나 기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이런 이들이 주유소를 '점거'하는 것은, 박사장(박영규)의 상습적인 임금 체불과 인격모독 때문이다. 이후 이들의 행보는 매우 흥미롭다. 한 명이 그만두자 모두들 연쇄적으로 그만둔 뒤, '받아야 할 돈은 받아야 한다'는 말에 금세 뜻을 모은다. 이것은 전편에서 '그냥' 저질렀던 습격과 달리, 실은 '떼인 돈을 받기 위한' 자기구제이자 점거투쟁이 된다. 결국 '생존권 투쟁'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하룻밤 반값세일로 벌어야 하는 총 목표액을 이들이 각자 받아야할 노동의 댓가의 합으로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자 점거를 푼다. 그 와중 주유소 사무실에 '인질'로 잡혀있던 20대 내레이터 모델 여성들과도 연대를 이루는데, 이 여성들에게 반값세일 이벤트를 홍보하는 내레이터 모델로 협조를 요청한 뒤 그 노동의 댓가를 정확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니저가 아니라 그 여성들 각자에게 직접 돈봉투를 건넨다.

주유소 습격사건 2

네 명의 캐릭터가 균형을 이루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현선과 지현우에 포커스가 더 맞춰져 있다.

더욱이 이들의 관계는 전편보다 오히려 '민주적으로' 발달한 양태를 보인다. 전편에서는 노마크가 리더쉽을 독점하고 딴따라가 이를 보좌하며, 무대뽀는 딴따라에게 툭하면 "꼴통같은 새끼"같은 말을 들으며 일당 내에서도 은근한 무시를 받았다. 뻬인트는 이들 모두와 떨어져서 '혼자 노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2편에서는 이런 수직적인 서열 대신 보다 수평적인 '네트워크'로서의 관계가 관찰된다. 원펀치와 하이킥(조한선)이 보다 전면으로 나서기는 하지만, 이들 네 명은 대체적으로 성격도 장기도 다른 만큼 각자 자신의 영역을 독립적으로 관할하며 수평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에필로그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하룻밤의 소동 이후 전편에서의 네 명이 각자 흩어진 채 미진하나마 나름의 방식으로 꿈을 이루거나 한을 풀었다면, 이번 편에서의 네 명은 어느 영화촬영 현장에 '함께 모여' 단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나마도 짤린 뒤에는 "이제는 뭐할까" 고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도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함께이다. 각자 성격도 장기도 다르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신들이 '뭉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나면 원펀치가 내세우는 "재미있잖아"라는 말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사실 1편에서 노마크의 "그냥"이라는 말은, 구구절절한 사회의 모순과 이들의 억울함과 한을 그저 쿨하게 압축시킨 한 단어였다. 2편의 "재미있잖아"는 그저 단순하고 순간적인 쾌락을 가리키기보다는, 꿈 없는 현실을 버티기 위한 단 하나의 수단이자, 그러한 현실의 '희생자'가 아닌,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초월하는 자'의 덕목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재미'를 일정한 과정을 통해 승화시킨 결과물을 보통 '예술'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결국 주유소를 나온 뒤 다른 곳이 아닌 영화촬영 현장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다 말이 되는 셈이다. 특히 대중문화/예술이 소위 순수 예술을 상당 부분 압도해버린 지금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유소 2>는 20대들의 이상한 생존권 투쟁과 연대를 다루는 소동극이 된다. 그 와중 주유소를 들르는 '손님'으로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술에 취해 억지를 부리는 조중일보의 기자, 어린 여자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허세만 부리는 중년의 소위 '매니저', 인근 주유소의 다른 사장, 법무부 직원으로 변장한 탈주범들(정확히 하자면 본질은 깡패이나 국가권력의 제복을 입고는 이상한 애국심을 강요하는 현재의 국가질서)이다. 전편에서의 풍자대상이 '천민 자본주의' 하의 부르주아 및 그들의 자식들이었다면, 이번 편의 풍자대상은 오히려 국가와 언론 권력과 20대를 착취하는 기성세대다. 퇴행이 아니냐고? 그렇긴 하지만, 이 역시 영화의 퇴행이 아니라 현실의 퇴행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주유소 2>가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영화가 풍자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재미없고 암담하기 때문이다. 웃음이 그나마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 있었던 시대도 못된 채, 웃음으로도 달랠 수 없는 공허감이 지배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과연 영화의 실패라 말할 것인가. 오히려 <주유소 2>는 지금의 현실을 보다 세밀하고 정밀하게 영화 안에 담고자 그 어떤 영화보다도 치열하게 노력한다.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 적자생존을 펼쳐야 하는 20대들을 향해 '88만원 세대'라고 협박하거나 '희망이 없다'며 무시하는 대신, 20대들의 현실을 애정으로 들여다보고 "너희 잘못이 아니야"라고 토닥인다. 이들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한편 이들의 현실을 만들어낸 '기성세대의 책임감'을 통렬하게 풍자하는 것이다. 이런 영화를 어찌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렸던 글 (2010. 2. 6)

ps 1. <주유소 1>을 만들었을 당시 김상진 감독에게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이 선행했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유소 2>에서는 분명히 보인다. 설사 그것이 어떤 학적인, 일관된 구조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그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주유소 2>에서는 그가 지금의 20대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매우 강력한 일관성 하에 매우 윤리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 어쩌면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실패의 원인일 거라고도 짐작한다. 그러나 영화에 분명하게 일관성을 이루며 드러나고 있는 감독의 이 시선을 읽어주는 게, 영화글 쓰는 이의 나름의 예의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ps 2.  물론 동의하지 못하거나, "해석에 영화를 뜯어맞췄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이런 비난을 굳이 부정하거나 수용하지 못할 바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유소 2>에 대한 반응을 보려고 검색하다가, 듀나 게시판에 누군가 이 글을 링크해놓고 반응을 묻자 또 다른 누군가가 댓글에 "맙소사, 기자가 너무 이빨을 깠어요"라고 써놓은 것을 보니 이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더라. 차라리 내 글이 후지다거나 글을 못 썼다고 비난했다면 이렇게 거슬리지는 않았을텐데, 이런 멘트는 '글쓰기의 윤리'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으로 느껴져 모욕감까지 느껴지더란. 내게는 "너 글 좆같애"보단 저런 게 더 '저질 악플'로 느껴진다. 이빨을 까다니, 사람을 무슨 홍보 알바로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ps 3. 그래도 조한선은 영화에서 안성기와 투톱을 해본 적도 있는 배우인데, TV에서 주로 활동했던 지현우가 비중이 더 큰 캐릭터를 맡았다는 게 살짝 의외였다. 그리고 비록 연기 테크닉은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지현우에게 쇼맨십이나 스타로서의 아우라가 보이는 것도 조금 놀라웠고. 지현우가 그리 뛰어난 가창력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뮤지컬 <그리스>의 대니 역으로 데뷔하게 된 것도 워낙 오디션 장에서부터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스타로서의 자질'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이 영화를 보니 그 에피소드가 대충 수긍이 가더라. (난 한번도 지현우한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골드미스 다이어리>에서도 별 깊은 인상은 못 받았었는데. 음.)

가이 리치 | 셜록 홈즈 Sherlock Holmes (2009)  -  2010/08/05 15:51

Sherlock Holmes

역사상 가장 '팬시'한 홈즈가 아닐까 싶다.

가이 리치 감독이 돌아왔다.

데뷔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를 내놓을 당시 '새로운 천재의 등장'이라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스내치>만 해도 호평을 받았지만, 당시 부인이었던 마돈나를 주연으로 만든 <스웹트 어웨이> 이후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팽겨쳤던 그다. 심지어 <스웹트 어웨이>는 한 해 최악의 영화에 상을 안기는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감독상을 받을 정도로 조롱을 당했다. 이후 비교적 저예산으로 <리볼버>, <록큰롤라>와 같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한번 돌아선 관객과 평단의 마음을 되돌리기란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이 영화들은 국내에는 수입조차 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셜록 홈즈>를 만든다면서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주먹질에 육탄전을 즐기는 '액션 영웅'으로서의 셜록을 그린다고 했을 때, 기대보다 우려가 컸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반짝하고 등장했으나 금방 시들어버린 감독이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 거기에 마구잡이 헐리웃식 액션영웅으로 변모할 것 같은 셜록 홈즈. 그럼에도 기대를 버리지 못한 것은, 역시나 그가 <록 스탁...>과 <스내치>를 내놓았던 감독이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셜록을 연기할 거란 점 때문이었다. 뻔한 슈퍼히어로 영웅의 운명을 지녔던 <아이언맨>에 독특한 뉘앙스를 덧입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면, 셜록 홈즈를 그저 빤한 액션영웅으로 그리진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분명 있었다. 거기에 그저 홈즈의 조수가 아닌 동등한 협력자로서의 왓슨 캐릭터를 주드 로가 출연하며, 그 콧대높은 남성우월주의자 셜록 홈즈가 유일하게 무릎을 꿇은 여성 아이린 애들러가 적지 않은 비중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 역시 기대감을 높이는 데에 일조했다.

마침내 베일을 벗은 <셜록 홈즈>는 '절반의 성공'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충분히 즐겁고 매력적이지만, 가이 리치에 건 일말의 기대는 결국 배반을 당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Sherlock Holmes

근육과 주먹질 자랑에 여념이 없으신 RDJ 버전의 홈즈. 낯설지만 익숙하다...

가이 리치가 야심차게 내놓은 이 영화는 기존에 우리가 머리에 그리고 있던 셜록 홈즈와는 사뭇 다른 성격의 셜록 홈즈를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새로운 셜록 홈즈의 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작에서 제시됐던 요소들을 재해석하고 복원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훌륭하게 그려낸 새로운 셜록 홈즈는 우리가 익히 하는 그 사냥캡에 체크무늬 상의를 절대로 입지 않는다. 파이프 담배를 물기는 하지만 삽화 속 셜록 홈즈의 그것보다 단순한 직선형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상대의 급소를 어떻게 내리쳐야 그가 제압될지 잘 아는 무술의 달인이다. 특히 상대의 급소를 연달아 가격하는 장면에서의 고속 촬영 카메라 촬영은 홈즈의 정확한 계산과 판단을 그대로 드러내는 한편, 타격에 반응하는 신체의 움직임을 세세히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며 쾌감을 선사한다. '너무 빠른' 액션에서 오히려 시각적 쾌감을 놓칠 수 있는 점을 배려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셜록 홈즈>가 묘사하는 홈즈의 일상적인 생활과 취미는 원작에서 제공한 것을 크게 거스르는 것이 없다. 일이 없을 때의 홈즈가 대단히 게으르다는 사실은 이미 원작에서 제시된 것이고, 잘난 척의 거만한 독설은 사실은 사회성과 사교성이 부족한 성격을 가리는 방어기제일지 모른다는 것 역시 셜록의 팬들이 어느 정도 짐작했던 사실이다. 나아가 원작에서의 홈즈 역시 수준급의 권투실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던 만큼, 영화가 제시하는 액티브한 성격의 홈즈 역시 충분히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하다. 한마디로 원작의 정수를 크게 훼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Sherlock Holmes

가이 리치의 새로운 <셜록 홈즈>는 원작에서 분명 제시됐으나 그간 무시돼온 '액티브한' 셜록 홈즈를 그려낸다. 어찌 보면 이는 원래의 셜록 홈즈를 재해석하고 복원한 것에 가깝다.

주드 로가 그려낸 왓슨 역시 기존의 홈즈 영화에서와는 달리 홈즈 못지않은 무게감과 존재감을 갖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실 왓슨은 그간 홈즈의 믿음직한 파트너라기보다 홈즈의 천재성을 돋보이게 해주기 위해 어수룩하고 때로는 맹하기까지 한 인물로 격하되는 경향이 종종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왓슨은 원작에서도 군인 출신으로 반듯하고 정돈된 생활을 하며, 발이 묶인 홈즈 대신 활약을 하기도 하는 등 홈즈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존재다. 영화는 특히나 결혼을 앞둔 왓슨에 대해 불평을 하는 홈즈의 에피소드를 충실히 살려낸다. 홈즈는 영화 내내 왓슨의 결혼을 못마땅해 하며 훼방을 놓지 못해 안달한다. 홈즈 팬들 사이에서 기정사실화 되다시피 한 홈즈와 왓슨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의심을 영화 내내 살려놓고 있는 것. 여기서 발생하는 두 사람의 투닥거림이 영화에 큰 활력을 주는 코미디로 작용한다.

액션 어드벤처 영화로서 <셜록 홈즈>는 분명 아주 새롭지는 않아도 적지 않은 즐거움과 쾌감을 제공하는 영화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홈즈와 주드 로의 왓슨 콤비는 분명 '올해 최고의 커플' 순위에 올릴 만하며, 은비학과 마법의 트릭 때문에 길을 잃을 뻔한 셜록이 결국 과학적 논리와 추리로 사건을 풀어나가며 활약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다. 풍성한 드레스와 남성용 정장을 오가며 기계에도 능하고, 그 대단한 홈즈마저도 어린아이처럼 갖고 노는 아이린 애들러도 영화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홈즈의 숙적인 모리아티 교수가 짧게 등장하며 속편을 예고하는 것 역시 기대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속편에서는 홈즈의 형인 마이크로프트 경도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품게 될 정도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록스탁...>과 <스내치>에서 보여줬던 가이 리치의 독특한 매력이 <셜록 홈즈>에선 별로 보이지 않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순해졌고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며 스토리 역시 단선적이다. 전세계 만인이 즐길 수 있는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변화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배트맨> 프렌차이즈 안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자신의 족적을 선명히 새겨놨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가이 리치가 <셜록 홈즈>를 통해 증명한 것은 결국 그가 대형 상업영화를 매끈하게 잘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의 의미는 자명하다. 가이 리치 감독의 앞으로의 경력은 별 막힘없이 순탄하게 풀릴 것이며 앞으로도 여러 편의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초기작들을 사랑했던 관객들은 결국 '블록버스터를 무난하게 만드는 평범한 감독'을 얻는 대신 걸출하고 독창적인 영화 악동을 영영 잃어버린 셈이 됐다. 결국 가이 리치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아니었던 셈이다.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렸던 글. (2009. 12. 23)

ps 1. 개봉 직후부터 당연히 모라이어티 교수가 등장하는 속편 얘기로 분분했는데, 영화 나온 직후만 해도 브래드 피트가 관심있다는 소문이더니 요즘은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대세인 듯. 몇몇 해외 매체에서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캐스팅 확정됐다고 보도도 나왔으나, 8월 2일자 다른 뉴스에서는 대니얼의 매니저가 사실이 아니라며 부인했다는 설도 있다. (IMDB의 관련페이지를 참조하시라.) 브래드 피트의 모라이어티라니 좀 뜨악스러웠는데, 정말 대니얼 데이 루이스라면 좋겠다. 문제는 대니얼 님이 해주시느냐 마느냐...  어쨌든 <셜록 홈즈 2>는 이미 내년 12월로 개봉일도 정해진 모양이다. 촬영은 올해 가을부터 들어간다고. 감독은 여전히 가이 리치.

ps2. 근데 사회성 제로 잘난척쟁이 홈즈도 꼼짝 못하는 막강 카리스마 미중년 마이크로프트 경이 속편에 등장해주시길 바라는 건 저 뿐인가요.

ps3. 영화를 처음 보고 이 글을 썼던 당시를 회상해보니, RDJ가 셜록 홈즈로 딱이었다기보다는(그게 기존 이미지와 다른 셜록이라 하더라도), '고전적인' 영국풍의 액션활극의 주인공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이다.  말하자면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가 19세기 런던에서 탐정질로 놀고먹었던 '전생' 버전을 즐기는 기분이었던. 블록버스터의 당의정으로 어느 정도 중화된 느낌은 있지만 역시 <셜록 홈즈>는 괴작이었다는 결론. 상당히 즐거운 괴작.

윤종찬 | 나는 행복합니다 (2008)  -  2010/08/04 18:53

나는 행복합니다

포스터는 많이 사기라능.

부스스한 머리를 고무줄로 묶는 한 여자의 뒷모습. 발을 겨우 끌듯 걷는 그녀의 걸음은 느리고 위태롭다. 약간 비틀대듯 걸어가던 그녀의 앞모습을 카메라가 비추자, 무릎까지 내려올 듯 무거운 눈가의 다크서클과 터진 입술이 눈에 띈다.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얼굴과 몸 전체를 가득 짓누르고 있는 피로감과 무기력감만 봐도, 그녀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정신병원의 간호사인 그녀, 수경(이보영)이 새로이 맞게 된 환자는 부스스한 머리와 역시 터진 입술을 한 조만수(현빈)이다. 가족친지가 아무도 없어 마을 이장의 손에 이끌려온 그는 의사와의 첫 면담에서, 종이를 꺼내 볼펜으로 '자기가 발행한' 수표를 써주며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도박빚에 미친 형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다 정신이 나가버렸다는 환자다. 영화는 이때부터 병원에서 생활하는 만수의 사연과 정신과 수간호사인 수경의 사연을 교차한다. 만수의 사연은 명백히 입원하기 전 있었던 '과거'의 일이지만, 수경의 사연은 현재진행형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너무나 큰 고통을 받았거나 받고 있으며, 그 사연이란 특정한 개인에게만 일어나거나 혹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흔한 보는 희귀하고 특별한 사연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익히 듣고 보았음직한 흔하고 일상적인 사연이라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자식도 못 알아보고 어쩌다 집밖을 나가면 길을 헤매기 일쑤다. 정비소를 함께 운영하던 건실한 형은 도박에 미친 후 돈을 내놓으라며, 그리고 이제는 정비소 계약문서를 내놓으라며 만수를 괴롭힌다. 심지어 한밤중에 만수의 목을 조르기까지 한다. 서울에 올라간 뒤 연락이 끊긴 연인은 어느 날 그를 찾아와 새 사람을 만났다며 이별을 고한다. 수경의 사연도 다를 바 없다. 암 말기인 홀아버지 때문에 재산을 모두 날린 그녀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면 아버지의 병실에서 간병을 하며 만성적인 피로와 불면증에 시달린다. 몰래 데이트하던 같은 병동 의사는 그녀를 멀리하고 새 연애를 하면서 그녀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나날이 쌓여만 가는 빚독촉 고지서와 전화 역시 잠시도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흔하고도 익숙한 사건들과 고통들.

그와 그녀가 착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은 배가 된다. 만수는 목을 조르는 형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노래방에서조차 큰소리를 내지 못한 채 겨우 뒷모습만 보이며 어깨만 가늘게 들썩인다. 수경은 한번쯤 도달할 곳 없는 원망 한 번 입밖에 내놓을 법한데도, 마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가 마지막 희망이기라도 한 듯 아버지의 병간호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세상은 착한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하고, 착한 사람들은 같은 불행이라도 착하지 못한 우리들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는다. 만수가 병원에 와서야 (가짜라고는 해도) 비로소 행복을 찾았듯, 어쩌면 지금 만수의 저 미쳐버린 모습은 수경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합니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형에게 반항 한 번 않은 채, 노래방에서 혼자 노래하며 슬픔을 달래던 만수. 현빈의 도약.

시간차를 두고 고통을 겪었던/겪고 있는 두 남녀는 비록 환자와 간호사의 관계지만, 서로의 고통을 '인지'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지적 관계다. 과대망상 속에서 행복을 찾은 만수는 고통에 대한 위로를 다른 환자가 아닌 '간호사'인 수경에게 건넴으로써 수경을 환자의 커뮤니티 안으로 끌어들인다. 수경은 특별히 간호사와 환자의 관계를 파기하지는 않지만, 다른 환자한테와는 다소 다른 톤으로 만수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그들은 환자와 간호사 이상의 관계로 다가서진 않으며, 특별히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희미한 연대의 순간, 혹은 찰나의 고통의 접점. 그 드물고 귀한 순간, 그들은 상대에게 '당신의 고통을 감지했다'는 희미한 싸인만을 보낼 뿐이다. 서로에게 어깨를 빌려주기엔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자신의 짐의 무게가 너무나도 크다. 그 희미한 순간이 과연 그들에겐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지독한 고통 속에서 과연 '행복'의 순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이 영화가 진정으로 다루는 것은 '고통'이다. 주인공들의 지독한 불행과 고통은, 현실의 갑남을녀가 겪는 일반적인 불행들과 너무 닮아있다. 그런 현실을 직접 겪거나 간접적으로 주변에서 노상 보고듣는 관객들의 입장에선 선뜻 이들의 불행과 행복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들어서기가 힘들다. 실제로는 매우 화사한 외모를 갖고 있는 두 배우가 단순히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추레한 옷차림을 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으며 어디에도 구원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영화의 엔딩에서도 예정된 것이다.

이청준의 원작소설이 끔찍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 것과 달리, 영화는 그 에피소드를 생략한 채 '완치되어 퇴원한' 만수가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달리는 장면으로 끝을 낸다. 오토바이에 달린 희미한 헤드라이트가 간신히 비추는 어두컴컴한 밤길,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다. 수경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수경은 비로소 병원(그가 근무하는 곳과 간병을 하던 곳, 둘 다)을 벗어나 혼자만의 여행을 간다. 그러나 그렇게 절박하게 수경을 땅 위로, 맨정신으로 붙잡아매던 아버지가 죽은 뒤 홀로남은 그 삶을, 과연 그녀는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영화의 보도자료는 그 엔딩이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끝도 없이 이어진, 오토바이의 가느다란 헤드라이트만 켜진 그 어둡고 긴 길을 보며 희망을 느낄 관객들이 얼마나 있을까. 수경과 만수에게 놓인 앞으로의 삶의 시간을 예고하는 그 길엔 여분의 빛도 동반자도 없다. 원작의 드라마틱한 엔딩이 거세된 채 남은 영화의 엔딩은, 오히려 너무 끔찍하게 현실을 닮아있다. 너무 끔찍해서 도저히 불행하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는, 차라리 지독한 역설로서의 행복을 말하며 그 불행을 눈앞에 정면으로 들이미는 이 영화, 참으로 지독하다.

나는 행복합니다

모습 전체에 '지치고 피곤한 삶'이라고 대놓고 써 있었던 이보영의 모습이 참 인상깊었었는데.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실었던 글. (2009. 12. 7)

ps. 우울한 내용 때문에 흥행이 안 되는 건 이미 예상됐던 것이지만, '너무 조용히' 지나가서 참으로 의아했던.

던컨 존스 | 더 문 Moon (2009)  -  2010/08/03 00:34

Moon

원제는 그냥 '문'이다

황홀하고 화려한 CG와 극적인 액션, 긴박한 스릴의 상황이 동원되는 SF(혹은 SF를 표방한 액션 활극)가 워낙 많이 나오고기 때문에, <더 문>은 일견 지루하고 초라한 SF로 보일 수 있다. 허허벌판 달 표면 위에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기지의 외관과 실내의 풍경은 물론이고, 주연배우도 달랑 샘 록웰과 케빈 스페이시 두 명이다. 게다가 케빈 스페이시는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그는 인공지능 컴퓨터 '거티'의 목소리를 맡았다.) 샘 록웰의 아내나 딸, 혹은 이 우주기지를 건설한 글로벌 기업의 중역은 거의 단역으로나 등장하는 정도다. 이 정도 되면 거의 배우 한 명의 '모노드라마'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더 문>은 역으로, 돈을 별로 들이지 않아도 훌륭한 연기와 연출만으로도 흥미진진한 SF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영화다. 신인감독인 던컨 존스가 이 영화에 들인 제작비는 총 5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50억 남짓하는 돈이다. 그러나 샘 록웰의 황홀한 1인 2역 연기에 영화 자체가 던지는 묵직한 주제의식이 더해지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수작'이 됐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샘 벨(샘 록웰)은 달에 우주기지를 세운 한-미 합작 글로벌 회사에 3년 계약을 맺고 달 기지에서 외로이 근무하고 있는 남자다. 그의 임무는 달 표면에 쌓여있는 헬륨3를 지구에 정기적으로 송출하는 것. 전세계가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경험한 뒤 달 표면의 헬륨3를 무공해 청정원료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정된 근미래가 배경이다. 그리고 영화의 공간은 철저하게 달 표면 위에 세워진 '사랑' 기지에 한정되며, 그나마도 기지 안 세트가 주요 공간이다. 지구와 실시간 통신은 끊어진지 오래고, 샘은 목성을 통해 전송된 영상 메시지만으로 지구 위의 가족과 연락을 취할 수 있을 뿐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정해진 일을 하며, 남는 시간을 모형 조립과 흘러간 옛 TV쇼를 보는 걸로 떼우는 매우 외롭고 단조로운 일과다.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은 그가 계약만료 2주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지구로의 귀환을 고대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내던 그는 이상한 환각을 보기 시작하고, 원료 채취 임무에 나섰다가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어떻게 구조됐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이 기지 안 의료실에서 깨어난다. 영화의 진짜 미스테리와 사건은 이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 이후부터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Moon

경이로운 샘 록웰.

<더 문>은 SF장르에서는 매우 익숙한 설정인 '복제인간'을 소재로 한다. 기지 안 금지된 구역 안에는 똑같은 외모로 잠들어있는 무수한 샘 벨이 즐비하고, 3년의 시한부 목숨을 가진 이 복제인간들은 자신이 클론임을 모른 채 그저 조작, 주입된 기억만을 가지고 '계약 초기 사고로' 깨어났다가 3년을 채운 뒤 죽는다. 기한이 만료되거나 극한 부상을 당한 클론은 폐기되며, 살아 생전,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클론임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진짜 사건은, 절대로 서로의 존재를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두 클론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셈이다. 하지만 익숙한 설정과 장르문법을 사용하면서도, <더 문>은 매우 새롭고 참신하며 흥미롭다.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 아니 의심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가 실은 클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격일 터이다. 영화는 '이전의 샘'이 '새로운 샘'을 만난 뒤 비밀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혼란과 충격뿐 아니라, 그로 인한 정서적 파장과 고통을 매우 절절하게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복제인간 설정의 영화가 일반적인 '도플갱어 공식'(자신의 도플갱어를 본 이는 반드시 죽는다, 혹은 한쪽이 다른 쪽을 죽이려 든다)을 따르는 것과는 달리, 두 클론이 서로 유대감을 느끼며 서로 협조하고, 궁극에는 다른 이를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들이 특별히 착하고 희생적이어서라기보다는, 극도의 고립감과 고독, 혹은 서로에 대한 동질감과 연민이 충격과 혼란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서로 성격이 다른 두 샘(이전의 샘은 보다 온화한 성격에 다소 무기력한 면이 보이는 반면, 새로운 샘은 좀더 다혈질에 에너제틱하고 급한 성격이다)은 서로 몸싸움을 벌일 정도로 격한 대결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들을 착취한 거대기업의 음모에 맞서는 한편 예정된 운명을 거스르고 지구로의 귀환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영화는 흔하디 흔한 '클론 설정'의 영화가 손쉽게 드러내는 주제인 '정체성'을 보다 심도있게 다루는 동시에, 이 한계를 넘어 도약한다. 한국의 관객 입장에서는 클론들의 운명을 보며 1회용으로 소모되고 버려지는 일반적인 비정규직의 현실을 겹쳐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감독이 이를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애초에 7, 80년대에 나온 무수한 '낡은 SF영화들' 스타일의 SF영화를 기획하면서 주인공으로 '일하는 노동자'를 설정한 것은 이러한 해석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Moon

첫 샘과 두 번째 샘을 연기할 때의 샘 록웰은 확연히 다르다. 외모뿐 아니라 성격, 말투, 표정까지도. 위대한 샘 록웰.

두 명의 샘 벨(정확히 하자면 세 명)을 연기해 내는 샘 록웰의 연기는 한마디로 '환상적'이다. 두 클론의 서로 다른 성격을 묘사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비밀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나 고독, 단조로운 일과에서의 무기력감 등 복합적인 감정들을 절절히 표현해낸다. 굳이 SF의 팬이 아니어도, 샘 록웰의 연기만으로도 황홀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사실 이 영화는 애초에 샘 록웰의 팬이었던 감독이 자신의 차기작 <뮤트>(리들리 스콧이 제작을 맡았다)의 캐스팅 과정에서 샘 록웰과 의견차가 생기자 '오로지 샘 록웰과 작업하기 위해' 쓴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사실 샘 록웰은 국내에 '스타급 배우'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연기에 반한 조지 클루니가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웰컴 투 콜린우드>를 위해 조연을 자처하고 제작까지 맡은 건 이제 유명한 일화가 됐다. 이후 조지 클루니는 자신의 연출 데뷔작 <컨페션>에서 샘 록웰을 주연으로 기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샘 록웰의 연기에만 전적으로 기대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다소 소박한 스토리라인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서 스릴을 만들며 긴장과 공포, 충격을 만들어내는 솜씨와, 샘 록웰의 연기를 적절하게 조율하고 대립시키는 던컨 존스의 연출 솜씨는 신인감독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고 솜씨있다. 리들리 스콧이 자신의 후계자로 던컨 존스를 지목한 것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던컨 존스가 위대한 뮤지션 데이빗 보위의 하나뿐인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기지 이름이 '사랑'(한글로도 또렷이 표기된다)인 것은, 감독이 워낙 한국에 관심이 많은 데에다 시나리오를 쓸 당시 박찬욱의 <올드보이>를 보며 오마주를 바치고 싶어했기 때문. 감독이 굳이 한국 개봉에 맞춰 내한해 기자간담회 등을 진행한 것도 이같은 한국에 대한 관심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실린 글 (2009. 11. 16)

ps1. 이 훌륭한 영화가 작년과 올해 초 미국의 각종 시상식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시상식 시즌이 되면 각 배급사들은 자신들의 영화 중 후보가 될 만한 영화들을 뽑아 DVD 패키지를 만들어 심사위원들에게 뿌리며 캠페인을 벌이는데, 던컨 존스 감독이 자신의 트위터(@ManMadeMoon)에서 밝혀 나중에 헐리우드리포터 등에 기사화된 바에 따르면, 미국 배급사인 소니 측에서 "이런 저예산영화는 패키지에 찍을 워터마크 비용이 더 든다"면서 <더 문>을 빼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언맨>의 감독 존 파브로는 이 사실을 알고 소니에 굉장히 화를 내었으며, <스타더스트> <베오울프> 등의 작가 닐 게이먼은 던컨 존스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어쨌든 이 영화는 던컨 존스의 고향인 영국에서는 BAFTA (영국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ps2. 한편 던컨 존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위대한 연기를 보여준 샘 록웰 만큼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야 한다"며 자신의 블로그에서 "샘 록웰을 아카데미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올해 <크레이지 하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제프 브리지스는 충분히 상을 받을 만한 연기를 펼쳐보였을 것이다. (미안, 영화를 못 봤다.) 그러나 샘 록웰이야말로, 작년 모든 영화들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위대한 남자배우였다. 물론 그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훌륭한 연기를 보여줄 것이다.

ps3. 그러므로 결론은, 샘 록웰 만세!

박신우 | 백야행 (2009)  -  2010/08/02 12:58

백야행

한석규, 손예진, 고수 주연의 영화 <백야행>이 10일 오후 2시 언론, 배급시사를 갖고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백야행>은 국내에도 탄탄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원작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신인감독 박신우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다.

영화 <백야행>은 유미호(손예진)의 섹스씬과 김요한(고수)의 살인씬이 교차되면서 시작한다. 피해자는 14년 전 벌어진 살인사건에서 용의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다. 그리고 유미호와 김요한은 각각 14년 전 살인사건의 용의자의 딸과 피살자의 아들이다. 영화는 이들 둘 각자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이들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듯 만 듯한 관계를 파고들어간다.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유미호의 뒷조사를 하던 약혼자의 비서실장 이시영(이민정)과 14년 전 사건의 담당형사였던 한동수(한석규)의 눈을 통해서다. 과연 14년 전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 14년간, 이들은 대체 어떤 관계를 맺어온 것일까?

연쇄살인, 피해자와 가해자 유족의 한 공간에서의 공존, 그리고 근친살해와 유아강간까지. 영화는 온통 자극적인 설정과 사건으로 넘쳐난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유미호와 김요한의 사연과 비밀은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이으면서 조금씩, 천천히 밝혀진다. 그리고 마침내 14년 전의 비밀이 밝혀졌을 때, 관객의 입장에선 이들을 쉽게 단죄하기도, 그렇다고 동정하기도 어려운 심적 갈등에 놓인 채 그들에게 압도되고 만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마도 이것이 원작이 가졌던 가장 큰 매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가져온 14년간의 관계야말로 이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했을 때 기획자들의 주목을 가장 끌었던 요소였을 것이다.

총 세 권 및 20여 년에 달하는 원작의 시간과 분량의 무게 때문인지, 안타깝게도 영화는 조금 줄이거나 쳐냈으면 좋았을 곁가지들이 많아 산만한 편이다. 다소 아귀가 안 맞더라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묵직한 힘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영화는 소소한 부분까지 아귀를 챙기면서도 정작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일관된 힘이 없이 사건을 계속 나열하는 식이다. 각 캐릭터와 이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 역시 거대한 미스테리가 한 조각 한 조각 맞춰져 간다는 쾌감을 주기보다 끝까지 이질적으로 따로 논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다. 한석규나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한 차화연, 정인기, 임지규 같은 좋은 배우들이 나오는데도 그렇다.

사실 이 영화 자체가 거대한 미스테리이기도 하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점들로 가득차 있는 까닭이다. 단역에 불과한 형사들 하나하나를 굳이 클로즈업으로 잡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관객을 억지로 밀착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한동수의 사연은 어떠한가. 과연 어느 누가 그런 현장에 자기 아들을 데려가 그런 부탁을 한단 말인가. 민경호나 호스트바의 '약통' 캐릭터가 굳이 화면에 나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백야행

무엇보다도 영화를 만든 이들이 유미호와 김요한을 너무 연민하고 동정한 까닭에, 이들의 잔인무도한 악행이나 괴물성은 '절절한 사랑이야기' 뒤로 너무 쉽게 면죄부를 부여받는다. 원작에서는 전후 일본의 재건과 자본주의화에 있어 암흑의 역사를 통렬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라던 두 사람은 영화 버전에서는 어찌 그리 '가여운 피해자'로만 그려지며 모든 책임이 당연히 부모 세대에만 돌려지는지 모르겠다. 필요없는 '어린 피해자'를 만든 건 분명 유미호인데,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그를 '외면'을 하는 것이 마치 그 피해자를 지키기 위한 결단인 양 화면을 처리한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왜 인물들에게 변명을 자꾸 보태주는 것일까. 그냥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인물들로 그려졌어도 비극은 충분하지 않은가. 혹은 한 인간에 저질러진 죄악에 대한 '대속'의 과정이 더 큰 악행이 되는 그 아이러니만 잘 표현해냈어도 반은 성공하지 않았을까.

영화 속 모든 주요 캐릭터들과 감독이 이들 남녀를 너무 잘 이해하고 보듬어 안고 알아서 변명까지 해주는데 굳이 관객까지 그래야 할까 싶다. 온갖 악행들이 저질러지지만 아무도 속죄하는 이는 없다. 그나마 한 사람을 향한 속죄는 더 많은 사람들을 향한 악행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연민은 넘쳐난다. 원작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했던, 관객의 어깨에 응당 지워줬어야 할 '선/악의 무게'의 균형점을 잃었거나, 이들의 악화일로의 선택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채 '변명'만 늘어놨거나. 이야기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차라리 일찌감치 니들끼리 도망가 살지 그랬니." 같은 반응이 더 당연해 보인다. 아니, 어쩌면 이런 식의 책임전가와 자기연민이야말로 지금 한국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정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그것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인 건지도 모른다.


+ 프레시안에 올라갔던 기사 (2009. 11. 10)

ps1. <백야행>이 언론시사를 한 뒤, 리뷰기사로는 아마 프레시안의 이 글이 처음이었던듯. 그래서인지 별로 좋지 않은 평에 당장 영화홍보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받지 않아서 다행, 만약 내가 받았다면 영화사와 싸웠을지도.

ps2. 손예진은 <작업의 정석>에 나왔을 때가 가장 잘 어울렸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난 이 아가씨가 진지한 척, 비밀이 있는 척, 혹은 카리스마 있는 척 무게잡는 걸 보면 적응이 좀 안 된다. 배우에 대한 선호도의 문제가 아니라, 손예진은 살짝 얄팍하고 가벼운 역을 라이트하고 사랑스럽게 - 애교를 섞어 -  연기하는 게 가장 잘 어울리는데, 의외로 글래머 몸매인 것 때문에 종종 '섹시한 척'하는 역을 맡는다. 보는 나는 심하게 민망한 게 사실인데, 남자관객들은 의견이 좀 다른 것도 같고...

ps3.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씬은, 한석규와 차화연이 그 낡은 차화연의 바에 앉아 대화하던 씬. 그저 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포스가 넘쳤는데, 고수-손예진이 차지하는 다소 가벼운 느낌의 씬(뭘해도 어쩐지 가볍게 느껴지더란)과 엮이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들어 안타까웠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