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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에서의 '아버지'의 위치에 대한 잡담  -  2011/07/19 02:01

예전에 굴리던 제로보드를 오랜만에 들어갔다가 이런 글을 발견했다. 무려 2008년 1월 28일, 오후 7시 28분에 올린 글이다. (월요일이었다고 한다.)

 1. 왜 최근의 헐리웃 재난영화에는 그토록 '좀비영화'들이 많은가.

2. 왜 한국영화는 현재 '장르영화', 특히 스릴러에 천착하는가.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고, 글을 써보고 싶은 주제입니다.

몇 년동안, 씨네21 평론가 공모가 나면 글 내야지, 내야지 하면서 결국 못 썼는데, 제가 부여잡고 있던 주제는 '한국영화와 아버지'였습니다. 저도 이제 그저 닥치는 대로 영화를 영화별로만 봤던 때보다 눈이 틔였는지, 일련의 '흐름'이라는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중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지금도 이 '아버지'란 주제가 변주되는 양상은 굉장히 흥미롭게 제 눈을 잡아끌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도저히 기성세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고아'들의 방향찾기가 저 스릴러 붐이란 생각을 합니다. 우석훈 식 세대구분으로 따지면 딱 X세대. 386도 아니고, 그들이 가진 권력을 나눠갖지도 못했으나, 정신적 유산은 그들에게 거리를 두려 하면서도 오롯이 공유하고 있는 이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기에(할 이야기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결국 '장르영화'로 몰려간다는 게 제 대강의 생각.

아울러 아버지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현재 헐리웃에서 아버지가 표현되는 양상은. 정확히 하면, 모든 죄짐을 지고 결국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30대~40대의  남자 주인공이라 생각하는데요. 이들은 아직 누군가의 아들이면서도 이제 막 어린 아이의 아버지가 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헐리웃 영화에서는 이미 권위를 모두 가진 아버지가 아들이 아닌 '딸'에게 자신의 권위를 승계하는 어떤 양식을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막 아버지가 된 저 나이 남자주인공들이 자신을 희생하는 건 이에 대한 아버지이자 아들인 그들의 어떤 '대답'이란 생각이 들고, 이 흐름은 꽤나 윤리적이라는 생각. 그러나 한국영화에선, 당분간 가부장들의 아버지 찾기와 인정투쟁이 계속될 것이고, 그 와중에 딸들은 여전히 소외될 겁니다. 그래도 요즘은 변화가 아주 빠른 편이니까, 5년 정도 후면, 아버지들이 점차 아들 대신 딸을 후계자로 삼는 과정이 영화에서 나타나게 될까요? 그리고 나면 또 몇 년 동안 박탈당한 아들들의 울부짖음이 계속될 거고, 현실에선, '페미 다 죽일년들'의 메아리가 더더욱 강하게 울려퍼지겠지요. 계급과 성차가 교차하며 부르주아의 딸이 정말로 노동자의 아들보다 우위를 가져버릴 수 있게 된 ('가질 수 있다'와 '가졌다'는 다르죠.) 이 현실이 제겐 대단히 흥미로운 관찰대상입니다. 내가 부르주아의 딸이 아닌 이상, 이 현상이 이전보단 낫게 보이긴 해도 그렇게 반가운 현상도 아니라는 점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제 관심은 이러나 저러나 그럼에도 버려지고 소외된 가난한 노동자의 딸들이니까요. 이게 제 존재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참, 갑자기 생각난 건데, 프레시안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아마 씨네21 평론공모 같은 거에 응시 자격이 안 될 듯해요. 이 '어정쩡한' 위치, 정말 싫군요.

 

내개 '아버지가 가부장의 권위를 (아들이 아닌) 딸에게 이양해주는' 장면은 <나이트 플라이트>의 촬영장 사진 한 장의 이미지로 박혀 있다. 바로, 이 사진.

사실 영화 촬영장에서의 한 장면일 뿐인데,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나이트 플라이트>가 개봉했던 그때, 이 사진은 그저 촬영장 사진 하나가 아니라 좀더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이 주제를 좀더 진득하게 팠더라면 상당히 흥미로운... 정도는 아니고 나름 나쁘지 않은 평문 하나를 완성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이미 지나가 버린 버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새롭지도 않게 된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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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크레이븐 | 나이트 플라이트 Red Eye  -  2011/07/19 01:42

호러영화는 원래부터가 여성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고 스릴 혹은 샤커(shocker)를 주무기로 삼는다. 호러에서도 슬래셔라는 서브 장르는, 가장 약해보이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온갖 갖은 고생을 시키면서, 역으로는 감독의 역량에 따라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여성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억압받고 소외된 결과물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또다시 혐오와 공포를 강화시키는지) 그 어느 장르보다도 더욱 섬세하게 드러내는 장르이기도 하다.

Scream

<스크림>. 호러 컨벤션이 여기서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졌었지... 스킷 울리치 오랜만이군

영화에서 섹스를 한 여자주인공이 가장 먼저, 그것도 가장 잔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언제나 10대의 성에 대한 경고라는, 지극히 꼰대적인 가치관에서 비롯한다. <스크림>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보여준 것은 이제껏 공고하게 쌓아올려진 호러장르의 가장 전통적인 장르 컨벤션을 정확히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었고, 내 눈에 가장 강하게 띈 것은 역시나 여주인공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옆집 여동생같은 여린 소녀(니브 캠벨이 TV 시리즈 <파티 파이브>를 통해 스타가 된 배우임을 상기하라.)는 단적으로 섹스를 하고도 살아남는다. 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듬직하고 믿음직한 남자주인공의 노력과 보호를 착취하다가 막판에서야 뭔가 시늉을 하고 살아남는 여자 캐릭터가 아니라, 철녀도 아닌 주제에 갖은 고생을 하며 오히려 옆집 오빠(데이빗 아퀘트)를 구해내고, 당연히 그녀를 지켜주다가 장렬히 죽을 것같았던 남자친구가 오히려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므로 스크림 2, 3는 1에서 오히려 퇴행한 결과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몸은 젊은이라고, 또한 진보라고 떠들어대는 숱한 젊은 (남자) 호러감독들이 하지 못했던 것(혹은 하기 싫어했던 것을 오히려 웨스 크레이븐이 '아버지의 권위로' 해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스크림> 시리즈가 가진 맹점은, 기존의 호러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었다는, 바로 그 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여전히 기존의 호러 컨벤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브장르가 바뀌긴 했지만(<나이트 플라이트>는 슬래셔가 아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 결과, 그러나 아직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 영화가 바로 <나이트 플라이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90분도 채 안 되는 이 짧은 영화가 맥빠지고 심심한 영화로 느껴지는 것은 비행기가 도착한 후부터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기 때문이다.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면서 안타까움과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절대적인 공포의 담지자일 것만 같았던 '그'는 알고보니 허풍쟁이 삼류에 어설픈 마초근성을 드러내다가 망신을 산다. 마초의 법칙은 대놓고 비웃음을 당한다. '상황논리에 맞게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숫컷의 법칙을 따르라' 블라블라는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받는 것이다.

Red Eye

아 그러게 폼만 그럴 듯하면 뭐하냐고... (그래도 넘 예뻐, 킬리안! ㅠ.ㅠ)

'그녀'가 눈부신 방어자이자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폭력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폭력의 희생자와 다른 점은, 그녀가 단지 폭력의 '희생자'(Victim)가 아니라 '생존자'(Survivor)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존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 폭력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다시는 희생자가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것이, 그녀가 다시 닥친 일생 최대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고 다른 이의 목숨까지도 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참으로 눈부시게, 킬러가 초라해보일 정도로, 고난을 이겨낸다. 너무 쉽다 싶을 정도로.)

여기서 또다시 재미있는 것은 딸을 욕망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욕망을 느끼는 딸의 관계, 이른바 프로이트적인 아버지-딸의 고착은 스크린 안과 밖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호러영화의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고 새로운 여성성을 부여해준 존재가 B급 호러 영화의 대부, 즉 '아버지의 권위를 가진 자'인 웨스 크레이븐이다. 스크린 안에서, 다 큰 딸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은 '포악한 아버지'(브라이언 콕스, <트로이>에서 아가멤논을 연기한 바 있는 그는 이제껏 너무나 자주 '포악한 아버지'를 연기해왔다)가 아니라 그녀 또래의 미성숙한 젊은 남자 잭슨(킬리언 머피, 뭇 젊은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게스모델 출신의 '예쁜' 남자배우)이다. 이 영화의 갈등구도는 마치, 딸이 데려온 남자친구를 번번이 트집잡아 싫어하다가 딸이 마침 남자친구와 문제가 생기자 '거봐, 내가 뭐랬냐'라고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하며 딸을 위로하는 아버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그녀 주변인물들은 이러한 딸에 대한 아버지의 욕망을 온통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뿐이다. 딸보다 어린 남자는 '연필을 잃어버리고 당황하는' 바보일 뿐이고, 딸의 친모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그 친모의 친모는 막 죽었으며(그녀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딸의 어머니 세대의 다른 여성은 그녀의 호의를 입었으면서도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희망도 되지 못하고 실망만 끼친다. (그녀의 호의로 전달된 '책'은, 나중에 그녀의 SOS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매개가 됨에도 부주의하게 분실되어 악당의 손으로 들어간다.) 반면 여전히 사회적인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자신의 가족을 단단히 보호하는 것은 아버지 또래의 남자, 키프 의원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딸은 아버지를 구하고 아버지는 딸을 구한다. 딸에 대해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여전히 고착된 딸의 이상한 근친관계가 더욱 강화된다. 그들 부녀 사이에 이제는 아무도 (아무것도) 쉽게 끼어들 수 없다.

Red Eye

유사) 아버지와 딸 - 아버지의 새로운 후계자이긴 한데... 실은 영화 속 아저씨는 웨스 크레이븐 감독.

아버지는 비리비리한 아들 - 여전히 남성적 권위를 지탱해주는 사회 제도와 법에 기대어 정작 그 자신의 주체는 나약할 대로 나약해져버린 아들 - 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게임을 치르고 그 누구도 돕지도 돌봐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살아남아 자기 혼자 훌쩍 선택해버린 딸을 선택했다. 이는 어쩌면 앞으로의 세상이 아들이 아닌 딸들의 것이 될 것이라 예감한 아버지의 '약삭빠른' 지분거림일 수도 있고,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폐기당한 것은 아닌 아버지의 권위로 승인한 것일 수도 있다. <나이트 플라이트>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갖는 의미는 이것이다: 아버지는 호기롭게 딸을 승인한다. 딸을 통해 구원받은 아버지의 보상은 자랑스러운 딸에 대한 인정과 승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부와 키프 의원, 둘 다에게서 인정을 받는다.) 

기존의 신화구조에서 언제나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만 했다. 새로운 세대는 아버지 세대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딸 역시, 아들과 방식은 다를지라도,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자신을 살해하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아들이 두려워 후계자를 필요로 하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되도록 오래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는 존재로서 딸을 선택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받은 딸에게 굳이 아들처럼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 단계가 필요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또다른 방식으로든 뭐든 아버지를 극복해야만 하는 단계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 한 딸은 아버지 권력의 대리자, 즉 아버지를 제몸에 승화시킴으로서 구세대적 - 낡은 권력을 되도록 오래 지탱해주는 새로운 지지대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승인과 인정은, 아들이 아닌 딸의 가능성과 딸의 주체성을 인정한다는 '한 발 나아간' 진보에도 불구하고, 단지 아들이 아닌 딸을 자신의 '후계자'로 승인했을 뿐 여전히 자식에 대한 소유권과 그 자신의 권위를 과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굳건한 아버지의 권위'를 고수하며 자식에게 '아버지 살해'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앙시엥 레짐이다. (브루주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에게 추파를 보내는 귀족?) 여전히 이것이 웨스 크레이븐이 가진 (어쩌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그리고 이미 '아버지'가 된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ps. 2005년에 이런 글을 썼었다. 저 웨스 크레이븐과 레이첼 맥애덤즈 사진을 찾다가 오래 전에 쓴 이 글을 찾아냈는데, 논점은 그럭저럭 흥미롭게 잡아냈지만 도저히 손발 오글거려서 못 읽겠다. 하긴, 저 글 쓸 땐 나름 자뻑 상태였으니까 지금 손발이 오글거린다는 건 적어도 지금은 그때보다 나아졌다는 얘기겠지. 그러니 부끄럽지만, 새로이 갱신해 올려둔다. (원래 발행했던 날짜는 2005년 9월 22일)


윤성현 | 파수꾼 (2010)  -  2011/07/18 02:02

파수꾼

Bleak Night. 영어제목도 맘에 든다.

2010년의 마지막 인디포럼 월례비행 자리에서 <파수꾼>을 봤다. 부산영화제 때부터 워낙 <무산일기>와 함께 호평이 자자했던지라 기대가 컸다. 대체로 그런 경우 살짝 실망하게 되는 게 일반적일 텐데, <파수꾼>의 경우는 달랐다. 기대 이상이었다. 영화를 보기 며칠 전 2010년 최고의 한국영화 열 편을 뽑았었는데, <파수꾼>을 보고 나자 그 리스트는 ‘뒤늦게 본 <파수꾼>을 제외한 열 편’의 리스트가 되었다. 아무려나, 올해 극장에서 정식 개봉을 하게 됐으니 ‘2011년 최고의 한국영화 10편’ 중 한 편이 이미 정해진 셈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을수록 시간이 더욱 쏜살같이 간다. 어릴 땐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른들이 “나이 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년씩 지나있다.”라고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몸과 마음과 환경을 옥죄는 감옥과 족쇄가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하루는 너무 길었다. 왜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은 많은지. 무엇을 하라는 명령엔 그저 ‘공부 열심히 하라.’ 정도나 있었나, 대체로 ‘하지 마라.’라는 금지의 연속. 그러니 1년이란 길지 않은 시간이 <파수꾼>의 세 주인공 소년들에겐 긴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토록 서로 붙어 지내며 제일 친했던 친구들이 그렇게 갈가리 찢겨나가고 서로에게 최악의 상처들을 주고받은 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는 건 그 어떤 신파 이별 영화를 보는 것보다 슬프고 아팠다. 균열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했고 작은 오해와 작은 거짓말들이 이 균열을 걷잡을 수 없을 정도까지 키웠다.

<파수꾼>은 소년들의 성장기와 우정을 다루는 영화들이 으레 묘사하고 따르는 ‘남자들만의 질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힘과 주먹을 향한 동경을 강조하거나, 남자아이들끼리 모여 포르노를 보면서 우의를 다지고 서로 일탈 행위의 ‘공범자’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집단을 공고히 하거나, ‘남자들만의 의리’가 가장 끈끈하고 강한 것인 양 허풍을 떨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존에 답습돼 온 소년 성장물의 공식을 아무렇지 않게 날려버리거나 비튼다. 영화가 오히려 집중하는 것이 이 소년들의 관계가 어떻게 작은 거짓말과 순간의 욱하는 마음으로 그토록 쉽게 어그러지는가이다.

학교의 ‘짱’인 기태는 주먹과 힘, 권력에 대한 동경보다는 ‘누구에게나 주목받고 관심 받는’ 데에 대한 갈망이 더 커 보인다. 베키에게 주먹질을 행사하는 것에도 응징과 보복의 의미보다는 ‘그렇게라도 말을 걸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 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척하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베키가 유일하게 그에게 ‘반응’을 보일 때가 기태가 주먹을 날리고 괴롭혔을 때이기 때문이다. 반면 매번 기태에게 맞기만 하고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으며 괴롭힘을 당하는 베키, 혹은 희준(박정민)에게는 피해자 특유의 움츠러듦이나 공포, 무력감보다는 오히려 고행을 적극적으로 감내하려는 수도자들 특유의 굳건한 의지가 보인다.


파수꾼

서로 짐짓 여유를 가장하고, 상대를 탐색하며, 잽을 날린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런 면에서 주먹질을 행사하며 패거리를 불러모아 베키를 괴롭히는 기태만큼이나, 기태를 대하는 베키의 태도에서 더 무섭고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한 구석이 있다. 마음을 닫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주먹질의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이 아이러니. 하지만 이것은 물리적 폭력에도 이유가 있다는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손쉽게 물리적 폭력을 쓰는 것이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은지를 드러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 기태는 참 나쁘고 한심하면서도, 불쌍하고 안쓰럽다. 기태의 어리석음이 심지어 자신을 유일하게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친구 동준을 향해서도 발휘될 때도, 그리하여 결국 동준까지도 기태에게 등을 돌릴 때도, 기태가 더없이 한심하게 여겨지면서도 기태의 그 상실감과 절망에 오롯이 감정 이입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 친구의 우정이 유지됐던 것도 철없고 어리석은 기태에 대해 베키와 동준이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딱 그 한도까지였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쩐지 이런 풍경이, 낯설지가 않다. 그렇게 서로 깊이 신뢰하고 우정을 나눴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쉽게 오해하고 마음을 져버리나, 싶었지만 돌아보면 나도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누군가를 내치기도, 의절하기도 했다.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뒷담화를 하고, 누군가랑 감정의 날을 세우면서 일부러 그가 가장 상처받을 만한 말을 골라서 하고(가까운 사이일수록 그가 무엇에 가장 상처받을지 잘 알고 있다!), 때로는 거짓말로 상대의 속을 긁는 ‘공작정치’를 하고.... 학창시절은 물론 사회에 나와서도, 피해자로서뿐 아니라 가해자로서도. 다만 나이를 먹으면 이런 걸 ‘기술적으로 조금 더 세련된 형태로’ 하게 될 뿐이다. 매 순간 누구에게 상처를 입고 누구에게 상처를 주면서, 대체로 자신을 이유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피해자로만 여기거나 정의를 행하는 공정한 심판관으로 착각하기 마련이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며 다른 이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상처를 주고 있으면서도 그게 상처주는 행위인지 폭력은 아닌지 성찰도, 인식도 못 하는 게 일반적이기도 하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이렇게 영화를 통해 보기만 해도 모든 것의 양면이 보다 넓게 눈에 들어오는데, 정작 자신의 일이 되면 제대로 보질 못하는 게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리고는 상처받고 울고, 분하고 억울하다고 울고, 죄책감과 고통에 운다.


파수꾼

이랬던 아이들인데...

영화 속의 아이들이 아직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아이들’이지만, 스크린 밖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는 내가 그들보다 정말 어른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만약 내가 기태의 상황이었다면 과연 베키의 마음을 돌릴 다른 방법을 제대로 찾아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베키를 잃고 그냥 “나도 너 싫어”라며 등을 돌렸을까. 내가 기태였다면 과연 베키에 대한 내 진심을 제대로 전할 수 있었을까. 극장을 나오면서 이 아이들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무너져 내리는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 어쩐지 부끄러웠던 이유다.


ps. 이 글은 지난 3/21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내 독립영화kmdb 페이지 독립영화 초이스 란에 실렸다. 원문은 여기.

ps2. 요즘 떠오르는 섹시 미중년 조성하 님하가 나온다. 이분은 극에서 맡은 캐릭터에 따라 미친 존재감을 마구 드러내실 때도 있지만 <파수꾼>에선 말하자면 세 친구의 사연으로 관객을 안내하는 '가이드'이자 죽은 아이의 아버지기 때문에 세 젊은 배우 뒷편으로 조금 물러나 이 캐릭터들의 불안하고 방방 뛰는 혈기를 밑에서 쫘악 안정적으로 잡아주신다. 난 사실 이분과 같이 술도 마신 적이 있다, 작년 전주영화제 <그녀에게> 상영 뒷풀이장소에서. 화면과 별 다를 바 없으시다. 잘생기셨고 인상도 좋으시고 목소리도 좋고 진지하시다. 다만 눈빛은 조금 무서웠다. 마치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빛, 그래서 괜히 움찔하게 되는 눈빛이어서. <그녀에게> 리뷰는 여기

ps3. 여기저기 이제훈 찬양이 넘쳐나더라. 확실히 이제훈은 차세대 '스타'감으로서의 아우라가 있다. 그래서 <고지전>도 기대. 하지만 서준영과 박정민도 꽤 좋다. 사실 <파수꾼>에서 나는 서준영의 연기가 제일 좋았다. 제일 뭐랄까, 자연스럽고 능글맞아서. 앞으로도 스타쪽보다는 어느 캐릭터든 다른 배우들과 잘 어우러지며 케미스트리를 잘 만들어내는, 무슨 장르의 영화에 출연해도 다 일정 이상 해내는 재주꾼 배우가 될 것 같다. 박정민은 정말 일생일대 캐릭터 하나 잘 맡으면 그걸로 연기파로 바로 굳어질 것 같은 느낌. <파수꾼>에선 좀 뻣뻣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신인이니까.

ps4. 박정민 글솜씨가 굉장히 좋다. 읽다보면 빵빵 터진다. <파수꾼> 블로그의 '귀여운 베키의 일기' 코너는 맛뵈기. 내가 이 친구 블로그를 찾았었는데 주소를 어디 뒀더라...

ps5. 6월 하순에 2만명 돌파했다. 장하다. 하지만 난 사실 10만명은 들 줄 알았...던 건 아니고. 그렇게 들기를 바랐다. 사실 옛날 같으면 들 수도 있었을텐데 요즘 시절이 하 수상해서 사람들이 영화를 안 보니까.

ps6. 감독님 인터뷰 하는 날 영화를 두 번째로 봤었는데, 그러느라 서교동으로 옮긴 이후의 필름포럼을 처음으로 가봤다. 뭔가 좀 대형 비디오방 같은 느낌;;;이었지만 교통편도 좋고 하니 앞으로도 자주 가게 되지 않을까. 우리집에서 버스로 한번에 20분이면 간다. 인터뷰 했던 거는 조만간 여기에 올릴 예정. 그리고... 오랜만에 영화 한 번 더 보고프다.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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