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만 | 콜래트럴 Collateral

인간이 도시의 부수물로 전락한다는 것.


톰 크루즈가 처음으로 악당 역할을 맡았다고 해서 화제가 된 영화 <콜래트럴>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반백의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고급 수트를 입은 쿨한 살인 청부업자 톰 크루즈도, 약간의 결벽증을 가진 성실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소중히 간직하고(만) 있는 택시기사 제이미 폭스도 아니다. 그것은, 인구 삼백만이 넘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LA 그 자체이다. 톰 크루즈의 냉소적인 대사에 의하면 LA는 지하철 역에 사람이 죽어도 6시간이나 방치가 되어서야 발견이 되는 도시다. 옆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모르는 비정한 도시고, 총을 맞아 죽어도 여간해선 범인을 잡을 수 없다. 검찰청 건물은 심지어 옆에 있는 철제 쓰레기통을 집어던져도 깨지지 않은 강화유리로 문을 달아놓았고, 거대하게 위로 솟은 건물 사이의 인간은 그저 개미 한 마리 정도로만 보인다. 그러니 살인 청부업자가 유유히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인 건 당연한 일이다.


언제나 도시들의 공통된 특성이긴 하지만 LA는 특히나 이민자들이 많은 도시다. 서유럽계 백인들마저 실은 이민자(혹은 침략자)들의 후손이니, 이탈리아계(같은 백인임에도!)나 멕시코 및 중남미계와 아시아인들만을 이민자 혹은 이민자의 후손으로 부르는 것은 언어도단이긴 하지만, 서유럽 출신의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40%가 채 안 되는, 그런 도시다. 이제껏 LA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다수의 백인과 끼워주기 식의 (주로 악당 전문) 히스패닉 혹은 이탈리아 계열, 그리고 가뭄에 콩 날 정도로 아시아인을 등장시켰던 건, 그러니까 몽땅 구라인 셈이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서유럽계 백인으로 ‘거의 유일하게’ 톰 크루즈가 등장하는 것이, 실제 LA의 현실에 가깝다. 특히 한국 관객들을 웃게 만든, 영화 곳곳의 한글 간판들은, 사실은 이제까지 LA를 배경으로 한 백인 감독들의 영화가 인종적 편견에서 의도적/무의도적으로 무시해온, LA의 확실한 구성 요소이다.


정말이지, 이 영화의 LA가 보여주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흑인이거나, 이탈리아 계 혹은 히스패닉계이다. 첫 등장 순간 양아치일 거라고 대부분의 관객의 오해를 받는 패닝 형사는 상징적인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이제껏 범죄물에서 취해온 형식, 그러니까 백인 남녀 커플 주인공과 흑인의 침입자, 다수의 백인 주변인물이라는 구도를, 이 영화는 정확히 반대로 뒤집고 있다. 톰 크루즈야말로 이 도시에 흘러들어온 낯선 침입자이자 도저히 LA라는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며,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주목을 받는 거의 유일한 서유럽계 백인이다. 그렇기에 그는 택시에 가방을 두고 내리고, 택시기사의 삶에 간섭을 하고(심지어 문병을 간다), 가방을 병실 바닥에 내려놓은 채 움직이는 안이함을 보이며, 직업적 살인 청부업자이면서도 아무리 사고 직후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노트북과 메모리 자료를 사고차량 안에 그대로 놓은 채 자취를 감춘다.


환락과 타락의 도시, 살인과 강도와 각종 범죄와, 토박이보다 뜨내기와 밖에서 유입된 유동인구가 훨씬 많은 도시 LA. 뉴욕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라 하더라도, 뉴욕과 LA에 대한 미국 바깥 사람들의 이미지가 극과 극을 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간 I Love NY을 외치는 수많은 영화들을 봐왔고, 정말 아무 특징 없이 시끄럽기만 한 도시인 LA 영화를 많이 봐왔지만, 조금 더 속살을 드러낸 LA를 그리는 이 영화가 처음인 듯. 영화 내내, 톰 크루즈는 제이미 폭스에게 다음 목적지를 (당연하지만, 구체적인 거리와 장소의 이름까지) 일러주고 제이미 폭스의 택시(와 영화제작진의 카메라)가 그곳을 향해 가면서, 우리는 일반적인 관광안내 엽서가 보여주는 LA의 광경이 아닌, 뒷골목과 좀더 현실적인 장소들로 이루어진 조금 특이한 아이템으로 구성된 LA 관광을 하게 된다.


그 거대한 과잉인구의 도시에서, 소외되고 고독한 현대인이라는 모티브가 상반된 직업과 배경을 가진 두 남자의 ‘적과의 동침’ 모드의 플롯을 통해 “심리적 대결”이라는 스토리를 취하며 갈등이 증폭된다. 현란한 비주얼과 액션의 ‘보이는 스펙터클’ 대신, 캐릭터 간 대결과 변화라는 ‘보이지 않는 스펙터클’을 취한 이 영화는 그래서, 영화 중간중간 코믹한 지점들마저 웃음과 함께 묘한 무게를 얻으며, 지구 반대편 인구 천만의 도시에 살고 있는 동양인에게도 정서적 동질감을 얻어낸다. 범죄물 중에서도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이런 타입의 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인 캐릭터의 확실한 구축과 캐릭터 간 갈등과 변화의 완급과 조절을, 마이클 만은 매우 능숙하게 다루면서 정확한 포인트를 집어내어 증폭시키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매우 훌륭하다. 톰 크루즈는 충분히 수긍 가는 살인 청부업자이며, 매우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제이미 폭스 역시 신뢰감을 준다.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음악도 매우 좋다. 각본가이기도 했던 마이클 만 감독과 그는 LA를 상징하는 음악으로 ‘재즈’를 설정했고, 이는 한인타운의 피버 클럽 씬을 제외한 영화 전반을 관통한다. 톰 크루즈의 재즈에 대한 취향은 일종의 조크인 듯. 흑인들의 음악이 어느새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이 되고, 그 이후엔 흑인들보다 백인들에게 주로 소비되는 사회적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역시나 외부의 이방인으로서, “LA에서는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재즈에 대한 취향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씬은 그 자체로 충분히 유머러스하기 때문에.


Oct. 18, 2004



(Otc. 28 추가) ps. 실은 서유럽계 백인, 이라는 말 대신 WASP라고 쓰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WASP들의 공포를 얼핏 드러내는 이 영화의 백인 톰 크루즈는 아일랜드계다.

김동원 | 송환

로버트 플래허티, <북국의 나누크>


자주, 다양하게 접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다큐멘터리는 무지막지한 오해의 대상이다. 일부는 엄정한 객관성의 산물이라 생각하고, 일부는 그것이 사회고발과 비판의 도구이자 결과물로 주로 사고한다. 그리고 일부는, 다큐멘터리 감독들까지 포함하여,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도구로 오해된다.


첫번째 오해는 다양한 견해와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충돌을 경험해보지 못한 미숙한 사회에서의 미숙한 오해에서 기반한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객관이란 인간 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올바른 의미에서의 객관도 아니며, 말하자면 ‘기계적 중립’이란 말이 그나마 가장 가깝다. 기계적 중립이 올바른 객관을 담보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기계적 중립이란 실질적 편들기이다. 형식적 평등이 실질적 평등을 담보하지 못하고, 도리어 실질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처럼. 다큐멘터리가 객관물의 산물이라 할 때에는, 다큐 감독이 어느 한 편을 들지 말아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자기가 지지하는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그리고 피사체의 이면의 진실을 보다 깊게, 다각도로 파헤쳐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영화이긴 하지만 <데드맨워킹>은 사형제도를 반대하면서도 지극히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독재정치를 막 지나쳐온 한국역사에서의 특수한 – 그러나 비슷한 역사를 가진 공동체들이 비슷하게 겪고 있는 – 결과이다. 거대한 적이 눈앞에 있을 때, 그리하여 우회적 비판과 풍자가 무기력할 때, 특히나 ‘영화’처럼 주류 필드에서 선수로 뛰려면 대규모 자본이 모여야 가능할 때(이것은 곧 권력의 통제권 하로 더 많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과 권력의 손이 덜 미치는 인디매체는 보다 직설법을 택하기 마련이고, 한국의 영화학도들은 ‘사회를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 카메라를 들었고, 사적이고 예쁜 이야기에도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다는 사실은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옳은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그러지 않는 게 더 좋은 주제에도 ‘소통’이 아닌 ‘설교’를 목적으로 삼는 우를 범하는 많은 경우들을 태동하고, 이것이 세번째 오해가 된다. (나는 ‘일방적’인 정보전달과 계몽의 다큐멘터리의 필요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이런 다큐멘터리가 많이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러지 않는 게 더 좋은’ 곳에도 이런 잘못을 한다는 데에 있다.) 이 경우 심할 때에는 피사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한다는 1차적 기본전제도 건너뛰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마이클 무어, <로저와 나>


<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 <그들만의 월드컵> 등을 연출한 최진성 감독, 그리고 <로저와 나>와 <볼링 포 콜럼바인> 등을 연출한 마이클 무어를 비난하는 일각의 목소리는 주로 첫번째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그들만의 월드컵> 상영장에서 영화 상영 이후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어느 관객이 ‘객관성을 전제해야 할 다큐멘터리에서 일부 피사체를 희화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여전히 첫번째 오해가 지독히 넓게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최진성 감독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이라면 오히려 세번째 오해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가 최진성 감독에게 던졌던 ‘영화를, 너무 쉽게 – 성의없이 – 만든다’는 비판은, 다큐멘터리가 다루고자 하는 대상, 즉 피사체에 대해 더 깊게 파헤치고자 하는 노력이 부재한 가운데 감독이 (객관적이 아닌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생각만을 밀어부쳤던 흔적에 대한 정당한, 그리고 다소 모호하게 표현된 비판이다.


사실 이 세 가지 오해는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근본적 원인도 비슷비슷하다. 우리는 다큐멘터리의 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경험해 보지 못했고, 나아가서는 사회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을 축적하지 못했다. 고발과 비판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던 시대의 흔적은, 이제 한 편의 다큐멘터리의 특징이나 완성도에 대한 논의는 침묵한 채 그 다큐멘터리의 소재에만 집중하는 버릇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물론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다큐멘터리의 교과서


<송환>을 보며 감동한 것은, 이 다큐멘터리가 감독의 고뇌를 솔직하게 그대로 드러내며, 피사체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송환>은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오해를 가볍게 뛰어넘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의 송환’이라는 정치적 주제를 다루면서, 김동원 감독은 지극히 성실한 소통과 관용, 그리고 다큐멘터리스트에게 요구되는 올바른 의미의 객관성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다.


<송환>의 카메라는 다른 다큐멘터리보다 훨씬 빈번하게 클로즈업을 사용한다. 피사체의 삶과 일상 속에 깊이 들어간 탓이다. 지독하게 성실하고, 지독하게 정직하다. 피사체뿐 아니라 관객과도, 그리고 다큐멘터리스트 그 자신과도 소통을 계속한다. 이 소통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더욱 넓고, 깊어진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러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한다. 첫 만남에서 시작해 해가 가고, 그들과 교류가 깊어질수록, 영화가 계속될수록, 우리는 감독의 눈을 통해 보이는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에게 카메라의 안내를 따라 점점 다가간다. 그리고 감독이 건네는 문제제기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들의 공존과 충돌을 생생히 목격하고, 이에 반응할 것을, 생각할 것을 요구받는다. 대부분 <송환>을 기꺼이 보러 간 사람들은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당연히’ 송환되어야 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겠지만, 이들은 이전에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납북자 가족의 문제, (그저 비웃을 수만은 없는) 반공주의자들의 송환 반대에 대해서도 들끓는 단순한 감정이 아닌 차분한 이성의 문제로 바라볼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새삼,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순과 그 복잡함,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의식적 / 무의식적 ‘상처’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민족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 운동을 함에 있어서의 몇 가지 힌트들.


나의 대학생활은 워낙 NL의 아성이었던 곳에 적을 둔 덕에 ‘반미 (반제) 반핵, 양키 고홈’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반미도 중요하지만 본질은 반자본이어야 한다는 쪽으로 옮겨갔다. ‘민족은 허상’이라는 급진적인 친구들의 영향도 분명 지속적으로 존재하지만, 나는 민족문제 역시 아무리 허상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정치적인 / 사회적인) 삶을 조직하는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마치, 수학에서 ‘허수’의 존재와 비슷하단 느낌이 든달까. 반자본이라는 틀에서, 미국의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생각. 하지만 ‘하나의 민족, 하나의 조국’ 따위의 슬로건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 내가 지금 꿈꾸는 건, ‘조국’ 따위의 말이 필요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강조할 때, ‘우리’가 될 수 없는 수많은, 배제되는 사람들, 의 존재 역시 나에겐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우리의 사회적인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모순으로서 민족문제가 존재할 때, 나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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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그 자체가 상처가 되고 만 모자(母子), 마침내 상봉하다.


또 하나,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을 반대하는 이들의 패턴. 그들은 ‘비전향’이 아닌 ‘미전향 장기수’가 맞는 말이라 주장하며(‘미전향’은 아직 전향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이는 ‘전향을 해야 한다’는 가치를 전제한다, 반면 ‘비전향은 가치중립적인 말이다.), 그들의 송환을 반대하는 중요한 가치로 ‘상호주의’를 들었다. 이주노동자 문제에 있어 그들에게 적대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외국인 노동자’라는 용어를 고집하며, ‘미등록 이주노동자’ 대신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라는 용어를 고집한다. 또한 역시나, ‘상호주의’를 내세운다. 참 놀랍도록 닮았다. 송환 반대와 불체자 반대의 슬로건의 본질은 같다. 그렇다면 이 본질의 문제점은? 나는 아직, ‘제도와 법 위에 사람이 있다’는 가치 하에서의 답밖에 못 찾았다. 이것보다 더욱 본질적인 대답이, 내가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송환>은 영화적 측면에서는 다큐멘터리가 지향하고, 진화해야 할 가치에 대한 방향은 무엇인가, 내용적 측면에서는 위에 열거한 저런 문제점들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라는 숙제를 내게 남겼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계속 ‘활동’이란 걸 한다면 어떤 마음자세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아픈 반성의 기회까지. 기분좋고 유용하며 소중한 문제 제기. 그래서 감독에게 감사한다.


Dec. 27, 2006에 다시 정리한 포스트스크립트
1. 마이클 무어 감독의 <로저와 나>는 노동자 뉴스제작단에서 비디오테입을 판매하고 있다. 여기에 작품소개가 있다.
2. 놀랍게도 <송환>의 홈페이지가 아직 살아있다.

최동훈 | 범죄의 재구성

데뷔작으론 매끈하지만...
<범죄의 재구성>은 좀처럼 한국에서 나오기 힘든 영화다. 헐리웃에서 아주 일반화된, 공식화된 이 장르의 영화는 이제껏 한국에서 한번도 제대로 나와본 적이 없다. (아직 안 본 <게임의 법칙>은 예외로 치자.) 이런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은 대부분 코미디를 빙자하여 과도하게 말장난에 기대어 코믹함을 던져주려고 하거나(이는 범죄영화의 ‘무거움’을 굳이 털어내 주려는 애처로운 시도다),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면서 지지부진하고 동어반복만을 반복하며 흐트러지곤 한다(구조의 실패). 그래서, 한국엔 범죄영화는 없고 조폭영화 혹은 깡패영화만 있었다. 아니면 잔머리 쓰는 영화만.


철저하게 ‘약육강식’과 ‘살아남는 자가 승자’라는 법칙에 의거해 등장인물들 간의 두뇌싸움을 펼치는 이 영화는,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반전을 허풍스레 예고하며 그것에만 목숨을 걸지도, 개성없고 엇비슷한 등장인물들의 의미없는 슬랩스틱과 말장난으로 관객을 웃기려 들지도 않는다. ‘사기’를 주제로 한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놀랍도록 정직하다. 끝나고나서 ‘이거야말로 진짜 사기 아니야?’ 싶을 정도다.


전체 스토리의 중간, 그러니까 은행 사기 사건 직후부터 시작하는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진술을 통해 이전 시간들이 재구성된다. 주로 구로동 샤론스톤(염정아)과 얼매(이문식)를 통해서. 이들은 사건 후 잡혔거나 경찰의 감시하에 있다. 이들이 사건 관련자들, 혹은 관련자의 관련자들을 만나면서 시간이 전개되고, 사건 관련자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그리고 비밀이 밝혀진다.


감독이 영리했던 점은, 그 ‘비밀’이 영화에서 더이상 새로울 것도, 참신할 것도 없었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김선생(백윤식)의 행방이나 최창혁(박신양)의 죽음 등에 대해 ‘뭐가 있다는 식’의 지나친 연기를 피우지도, ‘누가 과연 배신자인가?’에 과도하게 집중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이 영화는 한편으로 ‘사기범죄극’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복수극’이기 때문이다.


복수를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해 사건을 만들고, 이후 얼굴까지 뜯어고치고 다른 사람인 척 하며 다른 인물들을 속이는 설정은 굉장히 흔하다. 하지만 배추가 흔하다고 해서 ‘정말 맛있는 김치’를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건 아닌 법. 영화에서 이 ‘흔한 설정’을 이용하는 방식은 매우 정석적이고 우직하다. 잔머리를 쓰지 않기에, 그 흔한 설정은 그럭저럭 참신하고 새로운 것이 된다. “적어도 한국에서 이런 영화는 거의 처음”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미 김선생이 수술을 아주 크게 당하고, 그리고 또다시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슴 졸이며 화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감독이 요구하는 것 역시 그저 제3자의 입장에서 최창혁의 복수를, 혹은 김선생의 파멸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다.


하지만… 보면서 왠지 좀, 심심하다. ‘이 사건은 이런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런 감정 없이 혹은 논평도 없이 뉴스 보도하는 듯해서 말이지. 아무렴 어설프게 논평을 하거나 잔머리를 굴렸을 때 오히려 관객에게 야유를 받을 거라는 걸 충분히 알아서, 겠지만 뭐랄까, 신인감독들 특유의 패기나 이런 것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그것 때문에 밍숭맹숭하고 싱겁고 별로 새콤하지도 않은 뽀인트 없는 나박김치를 먹는 맛이라 할까. 그리고 그림이 너무 안 예뼈. –;; 비주얼은 좀 후지고, 사운드에도 문제가 있다. 영화 시작부터 울려퍼지는 음악은… 따로 노는 듯. 결국 이 영화의 강점은 시나리오와 우직한 연출이다. 하긴, 요즘 그런 영화가 워낙 드물어서 상대적으로 이 영화가 튀긴 하지만 말이다.


ps 1. 다시 읽어보니 1문단이 이상했다. 한국영화는 왜 조폭영화, 깡패영화는 있어도 범죄영화는 없었는가. 곰곰 생각해본 결과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했다. 범죄영화는 보통 폭력과 아주 가깝게 결부된다. 아무리 두뇌싸움이라 해도 막판에 주먹다짐은 꼭 한번이라도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폭력에 대한 향수 및 미화와 더불어 대단히 마초적인 분위기를 동반한다. 그런데 <범죄의 재구성>은 “범죄영화치곤” 놀랍도록 마초냄새가 없다. 액션씬이 등장함에도.(그 액션씬이 “사나이의 멋진 액션을 묘사하더냔 말이다.) 여자만 골라 사기치면서 습관적으로 두들겨패는 제비는 영화에서 가장 먼저 죽는다, 그것도 자기가 사기친 여성의 손에.


ps 2. 아참, 천호진 딥따 멋있었다. 흘흘. 자기가 잡으려 발버둥치던 그 사기꾼들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 닳고 닳은 형사더라. 참고인이 작가라니까 대번에 친한 척 하는 그 속물연기도 너무 코믹하지도, 너무 튀지도 않으며 캐릭터에 근사한 (쌈마이) 매력을 선사하더라. 몇몇 대사는 자칫하면 졸라 어색했을 텐데 천호진이라 그럴 듯하게 넘어가기도 하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