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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세이준의 남자들 - 2012/11/18 16:08
<야수의 청춘> 보다. 어제 트위터에 "나는 시시도 조보다는 고바야시 아키라"라고 썼는데 그 말 취소해야겠다. 물론 시시도 조의 매력을 제대로 본 건 한 편뿐이지만 반대로 단지 한 편만으로 불과 어제 뱉은 말을 취소한다면 게임 끝이지 뭐. 아니 그렇다고 고바야시 아키라가 싫어졌다는 건 아니고...
고바야시 아키라가 무겁고 진중하다면 시시도 조는 뭐랄까, 가볍다기보다,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다. 고바야시 아키라가 야쿠자의 과거로부터 도망치거나 현재 아쿠자임을 가족에게도 숨긴 채 괴로워한다면, 시시도 조는 친구의 죽음을 캐기 위해 적극적으로 과거로 돌아가 의도적으로 신분을 숨기고 위장해 적진에 잠입한다. 고바야시 아키라가 그런 회의에도 불구하고 가족 혹은 조직, 동료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고 적진 한가운데에 우직하게 돌진해 들어간다면, 시시도 조는 진짜 얼굴을 감춘 채 비밀을 캐내거나 적들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간계를 구사한다. 그리하여 고바야시 아키라가 끝내 그를 배신할 여자를 위해 오른쪽 뺨에 기다란 칼자국 흉터를 얻을 때, 시시도 조는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멋지게 속여넘긴다. 고바야시 아키라가 고지식하고 답답한 느낌인 반면, 시시도 조는 유들유들하고 능수능란한 타입. 평생을 순하고 모범생으로 살아온 나 같은 재미없는 인간은 당연히도 고바야시 아키라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시시도 조를 동경할 수밖에 없다.
<관동무숙>에서의 고바야시 아키라.
<탐정사무소 23, 죽어라 악당들>에서의 시시도 조.
스무 살 시절 출연한 <푸른 유방>과 <돌아오지 않는 봄>에서 고바야시 아키라가 제멋대로 반항하는 청소년이었던 건 그래서 유난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의 반항은 소년과 청년 사이에 걸쳐진 이들의 흔한 방황 정도가 아니라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의 목을 졸라 소년원에 갔다 오는가 하면 새어머니가 과거 강간을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빌미로 갱과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개망나니의 수준이다. 20대 후반 ‘남자 어른’이 되어 야쿠자로서의 과거 혹은 현재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고바야시 아키라의 모습은 마치 스무 살 적 망나니짓에 대한 후회이자 참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두 남자의 나이가 든 모습은... 아아 고바야시 아키라는 찾아보지 말 걸 그랬다. 예상은 했지만 살이 붙고 느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저씨의 모습. (엉엉 세월아...) 요즘은 종종 TV 예능에 나이든 게스트로 나와 폼을 잡으시는 것 같고... 젊었을 적에도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화의 주제곡을 간간이 불렀던 모양이지만 나이가 좀 더 들고 나서는 배우보다도 엔카 가수로 더 유명한 것 같다. 포털 아무데에서나 고바야시 아키라를 돌려보면 그의 노래를 올려놓은 블로그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반면 시시도 조의 모습은 오, 카리스마 넘치고 멋지심... 젊을 적 너무 잘생긴 얼굴이 평범해 보여 개성을 부여하고자 양 볼에 실리콘을 집어넣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처음 봤을 때 저 배우는 볼에 웬 심술살이 저렇게 많냐고 킬킬댔는데) 더욱 그의 연기 스타일이나 미간의 주름 같은 걸 더 들여다 보게 된다. 고바야시 아키라가 듬직한 스타일에 이목구비가 큰 데도 어딘가 고운 선을 갖고 있다면 시시도 조는 전형적인 '숫컷'의 모습. 게다가 <육체의 문>에서는 전형적으로 조또 아무것도 없고 빌붙어사는 주제에 가오 잡고 큰소리나 내며 꼰대질하는 전형적인 재수똥 남자...이지만 몸은 좋다! (으잉?)
사족 같지만 전혀 다른 배우 한 명을 짧게 얘기해 보자면, <관동무숙>에서 오른쪽 상처에 칼자국을 하고 나오는 가와지 다미오는, 거기에서의 모습만 그랬는지 어쩐 건지 대체로는 유약하고 섬세한 청년 역할들을 맡았던 것 같다. 같이 영화를 본 이들이 ‘상당히 현대적인 얼굴’이라 평했는데, 나는 옆으로 늘린 김주혁 같다고 느꼈다. <야수의 청춘>에서 노모토파 두목의 동생으로 평소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이나 꼭지 돌면 면도칼로 얼굴을 회 뜨는 살벌한 청년)으로 나온다. <하이틴 야쿠자>, <모두가 미쳤어> 같은 청춘물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이가 이후 고바야시 아키라와 시시도 조, 노가와 유미코 옆에서 조연으로 나오는데(그래서 블로그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그를 '조연급 스타'라 호칭), 아직 못 본 스즈키 세이준 영화에 그의 출연작이 꽤 많은 듯하여 또 다른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려는 중이다.
ps.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오전 7:41에 페북에 쓴 글을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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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의 정치학 : 2000년대에 좀비영화는 어떻게 부활했는가 - 2012/09/10 14:10
2002년 대니 보일이 <28일 후>를 내놓았을 때만 해도 21세기의 첫 10년이 좀비영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2년 후 잭 스나이더가 데뷔작으로 <새벽의 저주>를 내놓았을 때 판도는 바뀌었다. 조지 A. 로메로의 시체 3부작 중 동명의 두 번째 영화를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28일 후>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질주하는’ 좀비가 등장하는 액션물이었고, 곧 ‘좀비가 빨라도 되느냐’를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영화가 그저 어쩌다 나온 예외적인 좀비영화가 아니라 이후 좀비영화의 붐의 선봉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해 영국에서 날아온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정통 좀비영화 계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로 팬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다. ‘빠른 좀비’의 등장에 격분했던 ‘좀비영화의 제왕’ 조지 A. 로메로의 귀환도 이듬해 이루어졌다. 좀비와 인간의 갈등을 계급 갈등으로 치환하며 좀비의 각성까지 담은 <랜드 오브 데드>를 내놓은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가 개봉한 2007년은 여러 모로 좀비영화의 붐에 정점을 찍은 해로 기억할 만하다. 이때를 전후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좀비물들은 국적과 형식, 내용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해졌고 ‘로컬화’됐다. <28일 후>의 속편 <28주 후>를 비롯해 로메로 감독의 <시체들의 일기>와 <시체들의 생존>, 스페인에서 날아온 <REC>, 미국산에 해당할 <좀비랜드>와 <아메리칸 좀비>, 캐나다의 <폰티풀>, 그리고 국내 독립영화 진영에서 만들어진 <이웃집 좀비>까지 다양한 좀비영화들이 국내 극장에서도 개봉했다. 물론 <워킹데드>나 <데드셋> 같은 TV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본격 좀비영화는 아닌 영화들도 좀비영화의 이미지나 플롯을 상당 부분 차용한 흔적을 보이곤 했다. 예컨대 <디센트>의 괴물도 근래 좀비들의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 반면 좀비가 현실세계의 여러 치명적인 전염병을 은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좀비영화와는 거리가 먼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도 플롯의 형식만으로는 좀비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바깥을 벗어나면 좀비를 다룬 컨텐츠들의 양은 더욱 방대해진다. 원래 고정적인 컬트팬들에게나 어필하던 하위장르였고 국내에서는 더욱 그랬던 좀비물이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장르가 됐을까? 게다가 이 기간 동안 좀비영화만이 흥한 것이 아니었다. 매혹적인 로맨스의 대상이든 좀비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 끔찍한 공포의 주체든, 뱀파이어 영화들 역시 함께 대중을 유혹했다. 그리고 올해 개봉 예정이라는 영화들의 리스트를 보건대 이런 현상은 한동안은 더 지속될 듯하다.
지상 최후의 사나이 The Last Man on Earth
동유럽에서 온 신비로운 귀족 혹은 구 유럽 앙시에레짐의 유물을 은유하는 뱀파이어와 달리, 좀비는 부두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아프리카에서 납치돼 강제이주를 당한 흑인노예들이 식민 지배를 받으며 발전시킨 종교가 바로 부두교다. 결국 좀비는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의 그늘 속 존재이자, 피식민지의 착취계층에서부터 퍼져나와 백인들을 잠식한 존재인 셈이다. 일반인으로 위장이 가능한 뱀파이어가 한때 에이즈와 동성애, 혹은 정체를 감춘 채 암약하는 공산주의와 간첩의 은유로 각광받았다면, 망가진 신체로 외형부터 식별 가능한 좀비는 보다 명백하고 또렷이 눈에 띄는 억압 기제를 은유하기 쉽다. 젠더, 인종, 이주노동자, 노숙인... 여기에 빠른 확산을 가속화하는 미디어의 존재. 이것들이 영화 속 뱀파이어와 좀비의 사회적 맥락의 의미를 풍성하게 해주는 키워드들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2000년대에 좀비물과 뱀파이어물이 동시에 부흥기를 맞았다는 점이 의미심장해진다. 사회계층의 양극화를 반영하는 두 얼굴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뱀파이어와 좀비는 전혀 다른 근원을 가졌음에도 미국 대중문화에서는 한때 거의 구별이 되지 않게 그려지곤 했다. 이는 ‘나는 전설이다’에서부터 이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지상 최후의 사나이>에서도 공히 확인되는 사실이다. 마늘과 거울을 싫어하고 밤에만 활동하는 좀비라니? 그러나 2000년대 뱀파이어와 좀비는 너무도 또렷이 구분된다. 뱀파이어는 아름답고 부자이며 우월하고 여러 초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좀비는 떼를 지어 다니며 힘만 셀 뿐 끔찍하고 잔인하고 멍청한 물이다.
애초 조지 A.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좀비영화의 근대의 원형을 제시했을 때, 혹은 소설 ‘나는 전설이다’가 아메리칸 좀비 컬쳐의 효시가 되었을 때, 느릿느릿 걸으며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좀비는 ‘풍요로운 미국 자본주의 하에서 향락적인 소비지상주의에 푹 젖은 중산층’을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랬던 좀비가 2000년대 들어 무섭게 질주하는 좀비로 변한 건 미국 역시 70년대부터 신자유주의를 거치며 중산층이 서서히 붕괴한 사회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좀비영화의 르네상스를 목격한 이 기간이 미국식 금융자본주의가 막장을 향해 치달았던 바로 그 기간과 정확히 겹친다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가 개봉한 2007년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진 해이기도 하고, 이 파국이 차곡차곡 준비돼온 것은 9.11과 이라크 전쟁 이후, 바로 2000년대 초부터였다. 급기야 작년 뉴욕 월가에서 점령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 불안, 즉 ‘어쩌면 자본주의가 정말로 망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혁명분자들의 허랑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의 공포로 전세계의 공기 속에 퍼져있다. 여기에서, 좀비가 은유한다는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대중(mass)’으로 바꿔보자. 그 편이 애초 좀비의 이미지에 더 잘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중산층이 붕괴된 상황에서는 더욱 정확한 기표이기도 하다.
좀비영화가 그려내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그 안에서 강화되는 ‘대중’ 현상이 단지 미국 내의 일만인 것도 아니다. 전세계가 ‘비슷한 시간대’를 경험하는 현재, 미국의 경제 위기의 여파로 타격을 받은 데다 정치적 불안기를 함께 겪고 있는 한국에서도 다를 건 없다. 광장에는 항상 사람이 모였고 함께 버스를 탔으며 미국 월가 점령시위를 인터넷을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들을 기존의 계급 혹은 계층의 언어로 통칭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게다가 불특정한 익명의 무책임한 거대한 군중인 ‘대중’은 이제 끔찍한 매카시즘의 구호를 아무렇지도 않게 외칠 뿐 아니라, 흔히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가치의 구호도 내뱉는다. ‘한국식 로컬화된 좀비물’이 자체 생산되기 시작한 분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 많은 호러영화의 괴물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좀비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가족과 친구였던 이가 순식간에 때려죽여야 할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 나의 생존을 위해 가족과 친구도 죽이고 짓밟아야 하는 현대인의 삶을, 좀비물 만큼 잘 드러내는 장르도 없지 않을까? 따라서 저 무시무시한 좀비에 치를 떠는 나야말로 실은 진짜 좀비일지 모른다. 또한 오늘의 사건사고에 손쉽게 남을 손가락질하고 함부로 인터넷에서 말을 나르면서도 별다른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나, 우리 개인 각자야말로 진짜로 이미 좀비가 되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평론가 이명석은 올해의 사회 키워드로 ‘좀비’를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와 생각이 다른 모든 집단의 움직임은 좀비의 습격이 된다. 공감을 잃어버린 우리에겐 두 개의 선택지밖에 없다. 좀비, 혹은 좀비를 죽이는 대량학살자.(<한겨레> 2012년 1월 3일자)”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The Night of the Living Dead
2012 시네바캉스 서울의 ‘좀비 섹션’은 바로 이런 고민들에서 시작해 이 장르의 시작을 소박하게 보여주는 영화들로 구성됐다. 조지 A. 로메로의 오리지널 3부작이나 새로운 3부작, 혹은 이 6편 전체를 상영하는 것도 고려했으나 결국 로메로의 전설적인 시체 시리즈의 시작, 또한 좀비영화의 원형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중심으로 놓고 계보를 그리고자 하였다. 설명이 더 필요 없는 이 영화가 국내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것은 이번 시네바캉스가 처음이다. 그러한 조지 로메로가 (오리지널) ‘좀비 3부작’을 위해 청사진으로 삼았던 작품이 바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보다 4년 먼저 공개됐던 <지상 최후의 사나이>다.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긴 버전으로, 리처드 매디슨은 이 소설의 각색에도 직접 참여했다. “어쩌면 나야말로 진짜 좀비, 진짜 괴물일지도 모른다”라는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담아내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빈센트 프라이스의 탄생 100주년이었던 작년, 미국 곳곳에서 이 영화가 특별상영작으로 새삼 다시 불려나오기도 했다.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리메이크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90>은 탁월한 특수분장가로 호러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군림하고 있는 톰 새비니가 1990년 로메로의 도움을 받아 연출한 작품이다. (톰 새비니는 로베르토 로드리게즈의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섹스머신 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칼라영화에 여주인공이 거의 여전사로 변모한 데서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엔딩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좀비에게 잔혹성을 드러내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2000년대 로메로의 새로운 3부작의 전조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댄 오배넌의 <바탈리언>(혹은 ‘시체들의 귀환’)과 함께 로메로의 팬들에게 시체 3부작을 제대로 계승한 비공식 속편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폰티풀>은 2008년 부천영화제 상영작이자 작년에 국내 개봉을 짧게 거쳤던 캐나다산 좀비영화로, 이번 좀비섹션 준비에 큰 도움을 준 영화평론가 허지웅의 강력 추천작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통해 로메로의 시체 3부작으로부터 시작된 좀비영화의 정치학이 현재 어디까지 확장돼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미디어 그 자체가 권력이자 다국적 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는 현재, ‘언어’로 전파되는 좀비현상을 통해 때로 진실을 밝히는 힘이 되기도, 때로 사회의 암을 급속도로 전파시키기도 하는 미디어의 속성과 힘을 드러내는 우화라 할 수 있다.
저술가 박권일의 말을 빌면 “정치에 대한 축제적 열정과 탈진과 냉소가 반복되는” 현재다. 이 네 편의 좀비영화가 현재의 우리를 다시 성찰하고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장르영화, 특히 이 장르의 전설적인 고전들이 주는 말초적 즐거움과 쾌감을 새삼 다시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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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타이틀, 뮤지컬 <레미제라블> 영화화 - 2011/09/15 03:00
추석 연휴 벽두부터 충격과 경악과 공포를 안겨준 소식은 다름 아닌 <레미제라블> 뮤지컬의 영화화 소식이다. (참고: 버라이어티의 영문기사) 사실 소설 원작의 영화화도 그리 만만한 프로젝트가 아니고, 높은 인기를 누린 원작이 다른 형태의 예술로 재창조될 때의 저항도 일정 부분 당연히 따라붙는 현상이지만, 내가 이토록 우려를 하는 건 단순히 '감히 이 걸작 뮤지컬을!'의 차원은 아니다. 일단 동영상 하나 본다.
이게 갈라콘서트라 두 사람이 서로 사이 두고 얌전히 서서 부르고 있지, 실제로는 가장 강력한 갈등을 형성하는 장 발장과 자베르가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며 몸싸움 직전으로 살기등등한 대결과 기 싸움을 펼치며 부르는, 'The Confrontation'이라는 제목 그대로의 노래다. 자, 이젠 이걸 휴 잭맨과 러셀 크로가 부른다고 생각해 보시라. ... orz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워낙에 한곡 한곡이 다 명곡이지만, 아예 노래를 같이 부르며 서로 상대 잡아먹겠다고 부르는 제목 그대로의 이 곡은 이 작품 통틀어서 가장 강력하고 손에 땀을 쥐는 긴장을 자아내는 장면으로 1막에서 클래이막스에 해당하는 장면을 형성한다. 팡틴의 임종을 지킨 장발장은 그녀의 유언 및 그녀에게 한 약속대로 코제트를 데리러 가려 하지만, '마들렌 시장'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 자베르는 장 발장을 잡겠다며 그의 길을 막아선다. 가사만 봐도 "장 발장 널 잡고야 말겠다, 한번 범죄자는 범죄자, 사람은 도통 안 변하거든, 이 자베르를 물로 보지 마"라며 장 발장을 위협하고, 처음엔 제발 보내달라고 보내만 주면 코제트만 데려온 뒤 제발로 다시 나타나겠다고 애원하고 간청하던 장 발장이 나중엔 "자베르 너 내 길을 막았다간 내가 널 어떻게 할지 몰라"라며 협박한다.
참고로 위 동영상 속 장 발장은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였던 콤 윌킨슨, 자베르는 호주 캐스트 필립 퀘스트. 사실 여태까지도 장발장은 콤 윌킨슨이 진리...라는 설이 다수설. 물론 이런 식의 다수설은 원래 '초연' '오리지널 캐스트' 이런 거에 목매기 좋아하는 팬들의 보수적인 성향이 많이 반영된 것이긴 하다. 그러니 호주 캐스트였던 필립 퀘스트가 10주년 기념 무대에 오른 건 이 배우가 워낙 탁월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국내 발매된 CD 중 '인터내셔널 하이라이트 앨범' 버전에도 필립 퀘스트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혁명의 아이콘
뮤지컬 버전의 영화화란 여러 가지 위험요소가 골고루 존재한다. 1985년 초연된 이후 25년이 넘도록 여전히 세계 3대 뮤지컬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여전히 유효한 뮤지컬계의 걸작, 게다가 1995년 로열알버트홀에서 열린 10주년 기념 갈라콘서트의 전설적인 명성. <에비타> 혹은 <스위니 토드>의 예에서 보았듯, 그 아무리 걸출한 가수와 배우와 감독이 자신의 재능을 쏟아부어도,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인 클로즈업과 다양한 앵글과 숏으로 이루어진 편집의 묘를 아무리 발휘해도 '잘해야 본전'이 되기 십상인 게 유명 뮤지컬의 영화화 프로젝트다. 무대 위에서의 공연을 전제로 만들어진 장면과 노래들은 영화의 '편집' 앞에서 고유의 힘과 매력을 잃기 일쑤다. 노래로 서사가 진행되곤 하는 뮤지컬 특유의 내레이션은 영화라는 매체로 오면 때때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민망함을 느끼게 한다. 그나마 이런 우려를 조금이나마 상쇄시켜주는 점이 있다면 제작사가 관록의 워킹타이틀이라는 점. (근데 워킹타이틀이 뮤지컬 영화를 제작한 적이... 있었던가?) 감독은 <킹스 스피치>의 톰 후퍼 감독이 맡았는데, 솔직히 <킹스 스피치>가 재밌는 영화긴 하지만 대단한 연출력을 보여준다고 하기엔 좀...
이제 남은 것은 2부에서 극적인 멜러라인을 담당해 주는 에포닌과, 마리우스보다 비중은 낮되 혁명씬에서 탁월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며 여러 합창곡들을 중저음으로 이끄는 앙졸라, 그리고 1부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여공에 창녀임에도 고귀한 인간의 품위를 드러내는 팡틴의 역을 누가 맡느냐 하는 것. (사실 뮤지컬 버전에선 성인 코제트의 경우 에포닌에게 존재감이 밀리는 캐릭터다.) 이런 배역들은 극의 중요한 포인트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들인 만큼, 다소 얼굴은 덜 알려졌어도 실력있는 배우들이 맡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참고로 여기서 다시, 10주년 알버트홀 공연에서 에포닌을 맡았던 레아 살롱가가 부르는 'On My Own' 동영상을 붙인다. 과연 레아 살롱가의 이 전설적 버전을 능가...까진 못 해도 대략 흉내까지는 낼 만한 에포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 밑에 붙인 건, 러셀 크로의 노래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동영상.
ps. 러셀 크로의 목소리는 사실 굉장히 맑고 좋은 편. 하지만 자베르한텐 안 어울려...
ps2. 사실 영화화 한다고 했을 때 장 발장으로 스타급 배우 중 휴 잭맨 말고 대안이 거의 없지 싶기도 하지만...
ps3. 원래 뮤지컬 프로듀서였던 캐머론 매킨토시가 영화 제작에도 참여한다고. 미국개봉은 2012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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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더 이상 달에 우주인을 보내지 않는가? - 2011/09/02 02:10
미국의 유인우주선 발사는 1972년 아폴로 17호 발사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뒤로 미국은 더 이상 유인우주선을 우주에 쏘아보내지 않았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공식적으로 나사가 마지막으로 발사한 유인우주선은 방금 언급했듯 아폴로 17호다. 그러나 실은 1년 뒤 아폴로 18호가 비밀리에 임무를 띄고 발사되었다. 그러나 나사는 이 사실은 물론, 아폴로 18호가 보내온 것들에 대해 전혀 공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급 비밀에 부쳤다. 그리고 이 아폴로 18호 사건이, 미국이 더 이상 유인우주선을 발사하지 않게 된 이유이다. 실은 비밀리에 달에 발사된 아폴로18호가 임무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실패의 이유가 아폴로 18호에 탔던 두 우주비행사가 달에서 기괴하고 무서운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사가 아폴로 18호의 두 우주비행사가 겪은 무섭고 끔찍한 사건이 토막토막 기록된 촬영 기록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사는 이 필름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사건을 함구하였으나 이 필름 푸티지는 30년 가까이 된 시간이 지난 얼마 전 미디어에 유출되었다. 나사는 공식적으로 이 동영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 라는 것이 바로, 곧 미국에서 개봉 예정인 <아폴로 18호>의 내용이다. <블레어 위치>나 <파라노말 액티비티>처럼 페이크 다큐멘터리(이 말 모르는 사람 없겠지. 즉 위에 기술한 내용은 한마디로 다 뻥! 픽션이란 말이다)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9월 2일 미국에서 개봉 예정인데, 몰래 시사회 등에서의 반응이 매우 좋은 듯하다. (...왜 안 그렇겠냐마는.)
<블레어위치>의 성공 때만 해도, 그런 식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한마디로 휴대성과 기동성이 좋은 홈비디오 기계가 발명된 뒤 경험할 수 있는 일종의 '깜짝 이벤트' 같은 영화였다. 그러나 맷 리브스의 <클로버필드>(2008)나 오렌 펠리 감독으로 시작된 <파라노말 액티비티>(2007)와 그 속편 시리즈들로 오게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디지털영화가 보편화되고 마음만 먹으면 개인이 혼자 영화를 찍어 집에서 편집에 (온라인)배급까지 할 수 있게 된 지금의 시대에, 이 영화들은 한편으로는 이 새로운 기기와 매체 시스템에 대한 실험이기도 하고, 이것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새로운 쾌락의 영역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클로버필드>는 사실 정교하게 구성된 다소 큰 규모의 괴수영화였고, 이 새로운 기기와 시스템을 헐리웃이 어떻게 산업 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가를 탐구해본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는 (적어도 1편은) 내용상 <블레어 위치>의 본래의 '사적기록 훔쳐보기'라는 특징으로 돌아가되, 기술의 발달로 인해 더욱 정교한 화면과 사운드와 영화-기술적 성취가 가미된 보다 작은 규모의 영화였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영화학도들이 친구들과 함께 자비를 털어 만든 아마추어 영화였고, 이 영화를 영화제에서 본 스티븐 스필버그가 판권을 사면서 헐리웃의 메이저 배급망을 타고 배급된 케이스다. 이후 헐리웃은 <파라노말 액티비티>의 속편 제작에 매진했는데, 2편이 2010년에 공개돼 다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고 3편은 올해 10월 미국서 개봉할 예정이다. 즉, 작은 규모로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해 만들어진 영화가 헐리웃에 오면서 돈을 적게 들이면서도 기성 작가들이 정교하게 구성한 제작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메인포스터, 좀 후지네.
ps. 씨네21 사이트의 '개봉월 확정영화'(10월) 리스트에는 올라있는 걸 보니 일단 국내에 수입은 된 것 같다. 수입사가 어디인지는 아직 파악이 안 되는 중. 수입사는 포시즌픽쳐스인 듯. 예고편 등급심의를 받은 적이 있다. 아직 본편 등급심의는 받지 않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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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형제 신작, 60대 뉴욕 배경의 포크음악영화 - 2011/09/02 00:32
코엔형제의 신작 소식. Llewyn Davis라는 인물(Llewyn이란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고 표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레윈? 류인? 유언?)이 60년대 뉴욕에서 포크 뮤지션으로 성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다루는 영화로, 제목은 <Inside Llewyn Davis>다. 아직 imdb에 등록되지도 않았을 정도로 따끈따끈한, 이제 막 각본이 윤곽을 드러내거나 완성된 정도의 프리 프러덕션 단계인 듯한데, 다만 스콧 루딘이 제작을 맡고 카날플러스가 공동제공 및 해외세일즈를 담당할 것이라는 정도의 소식만 버라이어티에 실려있다. 엠파이어온라인이나 다크호라이즌 등의 뉴스도 이 버라이어티의 보도를 인용해서 전하고 있는 상태.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촬영도 언제 들어갈지 모르는 프리 중에서도 아주 초기 상태라는 것이다. 다만 제작비는 마련한 것 같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프리-프러덕션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캐스팅 소식이 전해진다면 계속 업데이트할 예정.
웃지 마! 아저씨들이 쌍으로 너무 귀엽잖아!
어쨌든 이 영화는 데이브 반 롱크(Dave Van Ronk)라는 실존인물을 토대로 그의 삶을 느슨하게 각색한 내용이라 하는데, 데이브 반 롱크는 조운 바에즈, 밥 딜런 등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친 포크 뮤지션이자 좌파 액티비스트였다고 한다. 애초 두어 달 전경부터 "코엔형제가 데이브 반 롱크의 전기영화를 찍는다!"로 알려졌던 모양인데, Llewyn Davis로 주인공 이름을 바꾼 걸 보면 좀더 자유로운 픽션화 과정이 가미될 듯 보인다. 주인공 한 사람의 삶에 집중하기보다 당시 분위기를 코엔식으로 되살려내면서 이 인물과 당대 사회를 코엔식으로 해석한 버전의 내용이 되지 않을까 싶고. 참고로 'Inside Llewyn Davis'라는 제목은 데이브 반 롱크의 앨범 중 'Inside Dave Van Ronk'라는 1963년 앨범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바로 이 앨범! | 1963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
코엔형제가 만드는 음악영화 - 정확히 말하면 뮤지션 영화 - 라니 어딘가 좀 벙찌면서 낯선 데가 있는 게 이제껏 코엔형제가 영화에 음악을 잘 쓰는 편이긴 했어도 본격적으로 음악에 대한 애착이나 그런 걸 드러내 왔다고 보기엔... 그러나 코엔형제가 만드는 영화라면 무조건 기대를 해도 되겠다, 는 것이 이 바닥의 정설인 만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특히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후 코엔형제는 신의 경지로 갔기 때문에. 참고로 제작자인 스콧 루딘과 제작총지휘를 맡은 루퍼트 그래프는 코엔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또 다른 걸작인 <더 브레이브>(라니 망할 이딴 후진 제목을... <진정한 용기>!)도 함께 만들었던 사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ps. <더 브레이브>(망할....! <진정한 용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영화는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영화적인 영화' 중 한 편인 것 같다. 요즘 이 영화의 장면이 가끔씩 생각난다. 보는 순간엔 우와, 하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영화가 태반인데 이 영화는, 볼 때는 '으흐흥 므찌네' 정도로 봐놓고 돌아서서 몇 달이 지난 지금 가끔씩 생각나면서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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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전 네오이마주 편집장 사건 관련 (1) - 2011/08/20 13:23
1.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하여
애초의 성폭력 사건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나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을 존중한다. 검찰에선 나 같은 제3자는 접근할 수 없는 양쪽 모두의 증거자료와 진술을 자세히 검토했을 거고, 그에 따라 전문가다운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이런 사건에서 법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제3의 권위가, 당사자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제3자의 입장에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 재구성은 때때로 진실과 상당히 동떨어질 때도 있고, 당사자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에 근접할 때도 있다. 법의 판단은 언제나 만인에게 만족스럽지 않다. 더욱이 성추행, 성폭력 사건에서는 법이 재단하기 힘든 - 혹은 재단할 수 없는 - 미묘한 성질의 부분들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법적으로 범죄가 되느냐 아니냐, 혹은 그로 인하여 기소를 하느냐 안 하느냐와는 별개로, 다른 차원에서, 특히나 페미니스트인 내 입장에서 비판할 만한 부분이 존재한다.
여기서 잠깐 성추행을 포함하여 성폭력 사건의 본질을 다시 상기해본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오해하고 있지만 성폭력은 ‘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폭력’에 관한 문제이며, 나아가 ‘권력’에 관한 문제다. 당시 일이 “설사 두 사람의 적극적인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가해자가 비난 받아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네오이마주라는 매체에서 당시 가해자는 편집장이었고, 피해자는 어린 나이의 신임 에디터였다. 여기서 피해자의 ‘어린 나이’라는 것은, 피해자가 이제 막 영화비평이라는 분야에 발을 내딛어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기 시작하려는 나이, 그리고 이제 막 학교 외 다른 조직 및 사회생활을 새로이 시작하려 하는 나이였다는 점에서 단순히 가해자에 비해 나이가 어리다는 표면적 사실을 뛰어넘는 중요성을 가진다. 피해자의 위치를 가해자에 비해 더욱 취약한 위치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분명한 권력적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만큼, 나는 법의 판단과 상관없이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의 약자의 위치를 약취한 것이라 생각한다.
2. 불기소 처분 이후
법과는 무관하게,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사후에 ‘성폭력’으로 정의하는 경우에 대해선 다소 민감한 논란거리가 남아있다. ‘당시엔 아니었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경우는 법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이건, 다양하고 구체적인 온갖 사례들에 일관되게 적용을 해야 하는 보편적/선재적 법이라는 존재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법이 아닌 도덕과 윤리의 차원에서, 나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사후의 정의’가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보는 편이다. 사건 당시 설사 ‘합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합의’가 권력의 상위에 있는 자가 하위에 있는 자에게 ‘강요한 합의’, 그리하여 ‘마지못해 한 합의’인지, 혹은 피해자가 절대적인 권력의 하위의 위치에서 절대적 상위의 위치에 있던 가해자에게 심리적으로 위축된 나머지 ‘자신이 합의해줬다고 착각한 결과의’ 합의인지 애매하기 때문이고, 피해자가 사건 당시 당황해 제대로 행하지 못한 규정과 정의가, 이후에 시간을 들여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누가 봐도 성폭력인 경우에도 피해자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고 당연한 일인데, 이렇게 미묘한 결이 있는 경우는 더욱 피해자 스스로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뒤늦게 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사후적 규정과 정의’에는 다소 예민한 부분들이, 그리고 보다 신중히 접근해야 하는 면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3. 시간을 거슬러 : 처음 사건이 공개되었을 당시
내가 사건을 안 것은 인터넷에 공개가 된 후였고, 그 직전 네오이마주 에디터를 그만둔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공식입장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활동했던 당시엔 네오이마주 모임에 거의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해서도 거의 몰랐다. 반면 가해자와는 몇 년에 걸친 우호적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내 위치는 대충 ‘가해자 주변’쯤으로 정리가 되는 것 같다. 나는 가해자의 입장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6월 중순경 그와 개인적인 만남의 자리에서 ‘가해자 버전’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사건은 이미 검찰에 송치된 후인 만큼 검찰의 판단이 나온 후 최종적인 판단을 하자고 생각했는데, 저 위에 기술한 내 입장은 가해자를 만나기 전 이미 정리된 내용이자 가해자에게 그 자리에서 전달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지켜온 원칙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버전 이야기에 동요되기도 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한편으로 사건을 알게 된 후 가해자에 대한 끝없는 의심과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예컨대 “사건 공개 이전에 가해자가 내게 했던 (네오이마주와 관련한, 그리고 내가 거절한) 어떤 제안이 실은 이런 게 터질 것을 대비해 나를 일종의 무마용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 아닐까?” 따위. 온갖 혼란과 충격, 공포와 배신감, 그리고 인간에 대한 회의와 의심 속에서 종종 울컥하며 쏟아지는 감정적 폭풍을 겪었다. 원망은 때로 가해자를, 때로 인터넷에서 내 이름을 언급하며 입장을 밝히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향하며 폭발하곤 했는데, 그 와중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는 법”이라는 조언과, “확인되지 않은 상상의 의심을 증폭시키는 건 쓸데없는 일”이라는 충고가 마음을 진정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내 입장에선 다소 억울한 부분들도 약간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직전까지 네오이마주 에디터였다면,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최소한 신뢰할 수 있는 공식적 기구(이번 경우는 검찰)의 판단이 내려지기 전에는 말을 아끼는 것이 옳다는 생각엔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내가 새삼 들춰보게 된 것은, 소위 ‘가해자 주변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렇든 저렇든 ‘대충’ 가해자 주변인으로 몰린 상황은 분명 내게는 새롭고도 충격적인 일이었고, 그만큼 당황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이에 관해 내가 도움을 받았던 글 두 개를 링크한다:
http://www.sisters.or.kr/index.php/subpage/feminism/33
http://stoprape.or.kr/266
그러나, 가해자 주변을 향해 쏟아졌던 어떤 ‘요구’들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아무래도 나 역시 그런 ‘요구’를 들었던 당사자이니만큼 감정이 앞서 글이 간결하게 정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다음 글에서 계속하고자 한다. 일단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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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 | 부운 浮雲 Floating Clouds (1955) - 2011/08/09 04:49
구글신이 찾아주심
이 남자가 얼마나 한심하냐 하면, 아내를 놔두고 전쟁 중 파견지에서 젊은 여자랑 바람피운 주제에, 패전 후 집에 돌아와서는 마누라 눈치는 더럽게 보면서 여자를 내팽개친다. 아니 좋아, 그래도 조강지처 버리는 건 아니지. 문제는 그래놓고 잊을 만하면 찾아와서 자자고 하거나 돈을 꿔달라고 한다는 것. 나타나는 횟수가 반복될수록 행색은 점점 더 남루해지고 곤궁하기 짝이 없고, 추측컨대 돈도 여자가 다 쓰는 것 같다. (여자는 남자와 가정을 꾸릴 꿈이 깨진 후 미군현지처 노릇... 같은 걸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면서도 심지어 이 여자와 같이 여행을 가서는 여자가 보는 눈앞에서 여관집 주인 아내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고는 여행에서 돌아와 소식을 딱 끊어버린다. 나중에 찾아가보니 그 여관집 여자와 살림까지 차렸다. (아니 마누라 버릴 수 없어서 이혼/결혼 못 한다며!) 무능하기 짝이 없는 주제에 또 '남자'라는 가오는 잡고싶...은 건가 하면, 글쎄 또 이 여자한테 와서 돈 어쩌고 하는 걸 보노라면 아주 그냥 콱. 심지어 제 마누라 죽었는데 장례비가 없다며 돈을 꾸러오는데, 그래도 죽어도 이 여자와 결혼하겠단 소리는 안 하고 잊어버리라는 둥, 각자 제 갈 길 가자는 둥, 그래놓고 또 저 아쉬우면 찾아오는 거다.
그런데 이 여자는 번번이 이 남자 때문에 울고 상처받고 심지어 이 남자가 얼마나 찌질하고 한심한지 충분히 알고 그래서 앞에선 피식, 조소와 비웃음을 날리면서도, 그러면서도 결국은, 또 번번이,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리며 질질 끌려가는 거다. 더 화나는 건 이 여자를 연기하는 게 무려! 우리의! 다카미네 히데코 언니라는 거. 정말 이 상황은 한 마디로밖에 표현이 안 된다: “아샹~”
거의 거지꼴 행색이 되어 길을 떠나는 두 사람. 남자놈 뒷통수를 빠악 치고싶은 마음과 별개로, 애틋하다.
그런데, 이 커플에 이렇게 짜증을 내며 진저리를 치면서도 극장을 박차고 나오지 못하고 그들의 여정에서 연민에 찬 눈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일단 영화가 너무나 아름다워서다. 나루세 미키오가 영화에서 인물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인물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은 다분히 기능적으로 인물들을 ‘처리’하는 근래의 무수한 장르영화들과 달리 대단히 섬세하다. 나루세의 인물들은 영화 속 허구의 인물인데도 마치 내가 실제로 아는 사람마냥 독특한 개성과 존재감을 가질 수 있고, 그 안에서 문학적, 혹은 영화적 미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그려낸다.
또한 이 커플이 시간을 버텨내면서 지나가는 모습에 당시 일본사회의 변화상이 겹쳐 흐르면서, 우리는 이들의 ‘사적인 연애사’가 실은 당시 일본사회의 변화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서로 상응하는지 지켜볼 수 있다. 인도차이나에서 돌아온 유키코가 남자의 결별선언을 들은 이후, 아무데도 기댈 수 없고 취직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미군과 고정적인 연애(!)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데, 당시 연고 없는 도시 처녀가 - 그리고 전쟁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된 상황에서 그나마 돈을 벌러 도시로 흘러들어간 젊은 여성들이 - 어떤 식으로 자기 생계와 가족 부양을 책임졌는지 유추할 수 있다. 사실 나루세 미키오가 연출한 많은 ‘여성영화들’, 특히나 하야시 후미코의 원작을 영화화한 경우 이런 젊은 여성들은 부지기수로 나온다. 오히려 <부운>의 유키코는 다른 나루세의 여인들보다 훨씬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편이다.
사실 <부운>의 인물들은 나루세 미키오의 다른 영화들 - 이번에 본 영화는 <부운>을 제외하면 네 편에 불과하지만 - 의 인물들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껴진다. 나루세 영화의 남자들이 하나같이 한심한 민폐에 기생충 캐릭터라곤 해도 <부운>의 도미오카는 유독 그 정도가 심하다. 유키코 역시 다른 여성들처럼 진취적으로 자기 생을 꾸려나가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미군 장사를 접은 후엔 자신을 성폭행했던 사촌오빠가 창시한 사이비종교에의 교당에서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여전히 도미오카와의 관계를 이어가는데, 나루세 영화 중 이렇게 ‘남자한테 의존하는’ 캐릭터가 또 있을까 싶다. 그녀가 도미오카에게 집요하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 역시 그녀의 주체적인 의지라기보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인간의 맹목적 집착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인물이 공히 유지하고 있는 특별한 태도가 바로 ‘무기력’인데, 이는 분명 나루세 영화의 다른 남녀 등장인물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 무기력과 뿌리깊은 좌절감은 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걸까. 나는 이 영화가, 패전과 동시에 영혼이 죽어버린 일본인들의 피폐한 정신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키코의 도미오카에 대한 집착이, 한편으로는 전세가 기울기 전 대동아전쟁이 막 시작되며 풍요를 경험했던 짧은 시절을 ‘좋았던 시절’로 향수하며 회고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기는커녕 받아들이고 인정하지도 못한 채 과거에 매달리고 집착하며 어떻게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인간의 절망적인 몸짓. 도미오카에 대한 지속적인 구애와 실패가, 매번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다 매번 좌절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지젝에 의해 소개된 라캉식 용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익숙한 단어들 몇 개를 떠올리겠지만, 나는 라캉 잘 모르므로 패스.)
여행 가서 함께 목욕하는 씬. 이 씬 바로 뒤에, 남자놈이 여관집 주인여자 꼬셔서 똑같은 씬을 연출한다. 나쁜노무시키...
반면 도미오카의 무기력은 조금 달리 보이는 측면이 있는데, 나는 도미오카의 모습이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이의 ‘시체로서의 삶’을 견디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유키코가 전쟁이 끝났고 화려한 과거 역시 끝났다는 사실을 아예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면, 도미오카는 이를 잘 알고 인지하며 과거에의 절연을 소망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의 모습에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전쟁에 복무했으나 그 전쟁이 끝난 뒤, 더욱이 원자폭탄과 함께 ‘패전’으로 끝난 뒤 방향을 잃은, 다시 일어서서 살아갈 의지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전형적인 인텔리의 무기력을 본다. 두 사람 모두 농림성 직원이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대동아전쟁 당시 전쟁에 복무했던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에서 더욱. 영화의 초반, 유키코의 회상에 등장하는 전쟁 당시 인도차이나에 처음 온 유키코에게 “여긴 말그대로 낙원”이라 소개하던 도미오카의 동료의 대사도 의미심장하지만, 당시 유키코와 도미오카가 근무하던 인도차이나의 본부가 더없이 화려한 유럽풍의 대저택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던 것도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어쩌면 해외에서 이 <부운>에 그토록 열광했던 것 역시, 유럽인들이 산업혁명 직후 전쟁 발발 전 짧았던 황금시대를, 혹은 미국인들이 그 화려했던 재즈시대를 향수 속에서 그리워하던 그 정서와 기묘할 정도로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두 사람의 여정은 의사도 전기도 없는 섬마을 야쿠시마에 이르러서야 끝이 난다. (이곳은 하야시 후미코가 3년간 머물며 원작소설 <부운>을 집필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야쿠시마로 향하는 배 안에서야 도미오카는 그간 그토록 밀쳐냈던 유키코를 비로소 받아들이는데, 유키코는 이미 병색이 완연해 죽음을 앞에 둔 상태다. 어떤 굴욕과 모멸 하에서도 삶을 간신히 이어가던 유키코를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그녀에게 죽음이 깃들기 시작하고서야 그녀를 받아들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이 돈도 역사도 사회적인 그 무엇과도 다 상관없게 된, 현대의 문명과 동떨어진 곳을 향하는 길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뒤늦은 회환과 슬픔의 눈물이, 유키코의 시신 앞에서 떨어진다. 그리고서야 이 영화(및 원작소설)의 제목, ‘부운’이란 단어의 의미가 또렷해진다. 현실에 발을 붙이지도, 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채 떠도는 인생들을 많은 작가들은 ‘부초’로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땅도 물도 아닌 저 하늘 위를 떠돌며 또렷한 물질적 형상도 가질 수 없었던, 풀도 되지 못한 뜬구름과 같은 것이었다.
ps. 서울아트시네마,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2011. 7. 15- 7. 24)에서, 2011년 7월 22일(금) 17:00에 보다.
ps2. 도미오카 역으로 출연해 이 글에서만도 나한테 줄창 욕을 먹는 모리 마사유키는 나루세 미키오의 다른 영화,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에서도 다카미네 히데코를 '갖고 노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남자로 나온다...만,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서 줄창 주연을 맡으신 엄청난 배우이심. 어딘가 우리나라 배우 정성모와 비슷한 느낌이 좀 있다. (사실 정성모도 참 좋은 배우인데 어째 주로 야비하고 비열한 역을 많이 맡으셔서...)
ps3. 다카미네 히데코가 첫 등장하는 씬이, 필리핀에서 돌아오는 배에서 내리는 씬. 몸에 큰 남자 군복을 대충 입은 모양새인데, 그래도 멋이 나더란...
ps4. 극 중 유키코는 처음 농림성에 취직하게 위해 도쿄에 올라왔다가 사촌오빠한테 강간을 당한다. 영화에서 이 씬은 짧게 휙 묘사되고 마는데, 아마도 소설에서는 그 사건이 두고두고 유키코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에 그 사촌오빠놈(...)이 바로 사이비종교 교주가 되고 유키코가 몸을 의탁하게 되는 그놈인데, 유키코더러 교단에 오라고 하면서 "너한테 나는 첫 남자잖아" 따위의 정말 뺨을 연타로 갈겨주고 싶은 대사를 우리 다카미네 언니한테 날린다. 써글넘 같으니.
ps5. 근데 정말,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왜 이리 하나같이 못돼처먹었거나 비열하거나 무능력하거나 찌질하거나 그 모두 다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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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와 뱀파이어물의 진화 - 2011/08/07 22:35
이 글은 제가 2009년에 우연히 접했던 뱀파이어 로맨틱 탐정물 <문라이트>의 리뷰로 시작했다가, 곧 뱀파이어물 이것저것을 언급하면서 본격적인 '뱀파이어물에 대한 메타적인 분석글'을 지향하며 야심차게 전개하...다 흐지부지된 글입니다. 2009년 6월 22일 00시 17분에 이 블로그에 올려두었고, 처음부터 비공개 상태로 저장해 단 한 번도 외부에 공개한 적도, 이후 가필이나 수정 등의 손을 댄 적도 없습니다. 뱀파이어물의 장르적 특징이나 역사에 대해 좀더 보강을 해서 좀더 완성도 있는 형태로 글을 공개를 하자는 것이 당시 '공개 보류'의 이유였는데, 2년이 훌쩍 지나도록 이후 손을 거의 대질 못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이미 2년 전 글이라 시간적 한계가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럭저럭 재미있습니다. 제 글이 재미있다기보다는(뭐 저는 그렇다고도 생각합니다만), 뱀파이어물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 때문이겠죠. 한편으로는, 2000년대 초반과 중반의 획기적인 '뱀파이어물의 진화'의 양상은 다소 주춤한 대신, 그 진화를 시리즈물을 통해 '유지'하는 데에 더 주력하는 분위기인 듯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의 일부분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뒤늦게나마 공개합니다. 글의 내용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언급이 빠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대한 언급이나 그외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난 첨언 등은 각주로 처리했습니다. 중간제목 역시 조금 손을 보고 사진을 추가했습니다.
장르물에 지식이 일천한지라 곳곳에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선 댓글이나 트랙백으로 지적해 주시면 감사히 받고 수정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2011년, August 7, 22:30)
1. <문라이트 Moonlight>는 어떤 시리즈인가
<트와일라잇>이 '새로운 뱀파이어' 얘기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현대 도시 안의 뱀파이어를 좀더 매력적이고 시크하게 표현한 걸로 미국 TV 시리즈 <문라이트>가 있다. 비록 쇼 러너가 넷이나 되는 바람에 그리 나쁘지 않은 시청율에도 시즌 1로 끝나버린 비운의 드라마긴 하지만.1 호주 출신의 알렉스 오로클린(그러나 국내 인터넷에서는 '알렉스 오로린'으로 통용되는)과 영국 출신의 주목할 만한 젊은 연기파 배우 소피아 마일즈, 거기에 <기사 윌리엄>이나 <40 데이즈 40 나잇> 등에 나왔던 독특한 매력의 섀니언 소서몬이 주연을 맡았다. 사립탐정과 인터넷 기자가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명목상 탐정물. 그러나 실질적으론 간질간질하지만 지나치게 손발이 오그라들지는 않은, 꽤 괜찮은 로맨틱 뱀파이어물이다. 알렉스 오로클린과 소피아 마일즈가 워낙 괜찮은 배우들인데다 둘 사이 케미스트리도 썩 좋았다. 여직도 시즌 2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여성팬들이 전세계에 많은데, 알렉스 오로클린은 <쓰리 리버스>(대니얼 헤니가 주연 중 하나로 나온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바로 그 드라마)의 주연으로 이미 파일럿 촬영을 마쳤다. 이변이 없는 한 올가을 미국 CBS에서 전파를 탈 예정이니, <문라이트>의 2시즌 제작은 거의 물 건너간 셈이다.2
<문라이트>의 두 주인공, 알렉스 오로클린(오른쪽)과 소피아 마일즈.
<문라이트> 시리즈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뱀파이어물에 그 분장이 꽤 요란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설정들은 제법 쿨하다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역시 뱀파이어 탐정물인 <블러드 타이즈>가 각종 악마와 저주와 주문 등등을 요란하게 다루는 것과 달리, <문라이트>에서는 초현실적 존재로 오직 뱀파이어만이 등장하고, 뱀파이어도 감각 예민하고 일반 인간들 기준으로는 괴력과 초능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도시 정도라면 햇볕 아래에서도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3 뱀파이어를 죽이는 전통적인 방법 중 하나로 알려진 '심장에 말뚝박기'도 이 시리즈에서는 '뱀파이어를 마비만 시킬 뿐 죽일 수는 없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2. 넘쳐나는 새로운 뱀파이어물
그러고 보면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만들었다는 게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 요 몇 년간 서양은 확실히 이런 새로운 뱀파이어 바람이 꽤 심하게 불고 있는 중이다. <트루 블러드>는 올해 그래미상에서 안나 파퀸에게 TV시리즈 여우주연상을 안겼고 14일부터 2시즌 방영에 들어간 상태다.4 올 가을 CBS에서는 <뱀파이어 일기>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론칭할 예정이다.5 물론 위에서 언급했던 <문라이트>도, 캐나다에서 제작된 <블러드타이즈>도 모두 근간에 제작된 새로운 뱀파이어물로, 국내에도 케이블을 통해 소개되었다. 영화 쪽으로 가면 물론 <트와일라잇>이 있고, 이것의 속편 <뉴문>은 벌서 티저 트레일러가 인터넷에 유포되고 있는 상태. 작년엔 <렛미인>도 있었다.6
불과 15년 전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뱀파이어를 처단할 존재로 전제하고 영혼을 가진 뱀파이어 '엔젤'을 저주에 걸린 예외의 타자로 상정했던 것과 달리, 근간의 뱀파이어물은 보다 적극적으로 뱀파이어를 매력적인 이존재로, 도시에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존자'로 그린다. 또한 전통적으로 알려진 뱀파이어에 관한 여러 가지 신화들을 오히려 '뱀파이어들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퍼뜨린 루머'로 역이용하는 재치도 보인다. 단적으로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십자가를 무서워한다'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최근의 여러 뱀파이어물은 공통적으로, 이것들이 뱀파이어들이 일반사람인 척하기 위해 일부러 뿌린 잘못된 루머라고 주장한다. 마늘도 취향의 문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다른 신화들에 대해서는 시리즈마다 이견이 있다. <문라이트>에서 뱀파이어들이 햇빛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않는 걸로 표현하고 있지만 <트루 블러드>나 <블러드 타이즈>는 여전히 햇빛이 뱀파이어에 치명적이라 주장한다. 다만 <트루 블러드>의 경우 과거만큼 심하지는 않아서, 스티브 모이어가 연기하는 주인공 뱀파이어 빌 콤튼은 1시즌 마지막회에서 연인인 수키(안나 파퀸)를 구하기 위해 대낮에 나왔다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쓰러지기는 하지만 목숨은 부지한다.
뱀파이어물이 이토록 급증하고 더욱이 과거와 달리 뱀파이어를 매혹적인 이방인 정도로 그려내며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인종, 다문화 사회가 일반화되면서 그로 인한 사회적, 문화적 충격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과거 뱀파이어물이 시골에서 폐쇄적 생활을 하는 지주, 유지로 설정되며 근대 이전의 귀족을 상징했다면, 이후 불야성의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도시물이 활기를 띄었다가 지금은 도시물과 시골물이 공존하는 듯한 모양새다. 그러나 현대의 뱀파이어물은 아무래도 도시가 어울린다. 도시야말로 바로 옆동네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모르는 데다가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는 올빼미족들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시골물은 과거 시골에 은둔하는 지주나 지방 유지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골에 새로이 보금자리를 틀러 온 타지 출신 정도로 묘사된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깡촌, 그러니까 촌스러운 시골 백인들을 가리키는 '힐빌리' 혹은 '레드넥'들만 살던 동네에도 이젠 유색인종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게다. <트와일라잇>만 해도 배경은 분명 워싱턴 주의 시골 깡촌인데 인종 분포는 LA의 웬만한 동네 못지 않을 정도로 다채롭다. 전형적인 북구 미남들부터 네이티브 어메리칸은 물론, 심지어 동양인들까지. <트루 블러드>의 배경도 루이지애나 주의 깡촌 시골이다. 그러니까 봉건시대의 잔재에 대한 더없이 적절한 비유였던 뱀파이어가 21세기 현대 자본주의에 와서는 도시의 여피를 상징하거나, 시골로 낙향한 부유한 도시 출신 백인, 혹은 미국 정착에 성공한 흑인 외 다종다양한 유색인종들의 비유로 그려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저 할리퀸 로맨스 수준이었던 원작소설과 달리 <아메리칸 뷰티>의 작가 앨런 볼의 손을 거친 <트루 블러드>가 종교적 광기와 이종존재간 문화충돌, 카트리나 이후의 미국 남부의 트라우마를 다루며 6, 70년대 반문화적 성격까지 차용해와 복잡한 문화지도를 그리고 있는 것은 너무나 상징적이다. [자본론]에 등장하는 마르크스의 훌륭한 통찰과 비유도 이제는 시대적 효력을 살짝 상실했다는 얘기다.
3. 앤 라이스와 버피와 엔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뱀파이어물'을 어제 오늘 갑자기 튀어나온 것으로 얘기하긴 힘들다. 분명 과거의 뱀파이어물과 오늘의 뱀파이어물은 성격이 상당히 다르지만, 그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작품들로 한편으로는 앤 라이스의 전설적인 뱀파이어 연대기(와 이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들)를, 또 한편으로는 무려 7시즌까지 갔던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이는 5시즌짜리 스핀오프 <엔젤>을 낳기도 했다.)를 언급해야만 한다. 사악한 공포의 존재로만 여겨졌던 뱀파이어가 매혹적일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한 게 바로 앤 라이스 연대기에 등장하는 레스타드일 것이다. 그러나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들은 매혹적이고 유혹적인 악으로서 고딕세계에 갇혀있다는 차이점이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기보다는 이전의 시기의 마지막 뱀파이어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람들이 레스타드에게 열광한 것은 그의 '귀족적인' 자태, 그러니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유산처럼 간직해온 그의 귀족의 분위기와 전통 때문이다.7 지금의 뱀파이어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리즈는 결국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된다. 여전히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뱀파이어를 과거의 사악한 악마로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예외적 존재로 설정된 엔젤을 통해 '유혹적인 악'으로보다는 '공존이 가능한 존재'로서의 매혹적인 뱀파이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스핀오프 시리즈인 <엔젤>은 그런 뱀파이어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사람들을 돕는, 그러니까 도시의 밤에 더없이 잘 섞여 살아가는 뱀파이어를 다루며 뱀파이어 탐정물의 시작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뱀파이어의 세계와 인간 세계에 그어주는 구분선으로 <버피와 뱀파이어>가 제시한 깜찍한 트릭이 의외로 긴 수명으로 다른 시리즈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뱀파이어가 보통 인간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집의 거주자가 공식적으로 '초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 <버피와 뱀파이어>에서 처음 선보인 이 설정은 <트루 블러드>에서는 물론 북구에서 날아온 영화 <렛미인>에도 고스란히 사용된다. 과거 뱀파이어물이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조차 나를 공격할 수 있는 괴물로 변할 수 있다' 혹은 '원치 않음에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집중했던 시기에 이런 설정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상조차 못할 설정이었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인간들과 섞여 살아가고 있다는 보다 잠재되고 은밀한 공포를 다루거나, 이존재와의 소통과 교감을 다루는 보다 로맨틱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일종의 '안전지대'를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고, 그 결과 '초대'와 관련한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8 이는 '대중 속 고독'으로 대표되는 소외현상을 심화시키는 도시 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과거에는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을 공동체에 속해있는 구성원으로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지금 도시의 성원들은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여기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 괴물이나 이존재 중에서도 뱀파이어는 가장 감정이입하기 쉽거나 매혹을 주는 대상으로 떠올랐다는 얘기다.
<트루 블러드>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
이후 만들어진 뱀파이어 시리즈들, 그러니까 <블레이드> 시리즈나 <언더월드> 시리즈 같은 것은 버피가 제시한 혁명적 전환의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변화를 작게든 크게든 반영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인다. <블레이드> 시리즈는 반인 반뱀파이어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이 역시 뱀파이어는 죽어 마땅한 사악한 존재로 전제한다. 당장 주인공의 직업부터가 뱀파이어 슬레이어다. 다만 뱀파이어보다 더 악한 리퍼들이 등장할 때 일시적으로 휴전과 동맹의 대상이 되기는 한다. <블레이드> 시리즈보다는 <언더월드> 시리즈가 좀더 새로운 뱀파이어물에 한 발 가까이 가있다. 이 시리즈는 적어도 도시 속에 인간들 모르게 살고 있는 뱀파이어의 존재라는 사실을 잘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더월드>의 세계는 21세기에 여전히 살아 존재하는 뱀파이어를 다루며 주인공 역시 뱀파이어인 여전사로 설정돼 있긴 하되, 일반 인간들의 세계와는 유리된, 자신들만의 지하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물론 이 시리즈가 <트와일라잇>에 미친 영향을 언급할 수 있다. 늑대인간과 뱀파이어의 전쟁이라는 테마야말로, <트와일라잇>의 속편 <뉴 문>이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뱀파이어들'의 출현은 2000년대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의 뱀파이어물들은, 말하자면 과도기의 것이었다. 2000년에 나온 <드라큐라 2000>과 2002년에 나온 <퀸 오브 뱀파이어>가, 그리고 2004년에 나온 <반 헬싱>이 일견 촌스러워 보이는 것도, 뱀파이어 장르에 밀어닥치고 있는 일련의 변화를 별로 반영하지 못한 탓일 게다. 하긴 <퀸 오브 뱀파이어>는 앤 라이스의 원작을 뒤늦게 영화한 버전이었고, <반 헬싱>은 본격적으로 뱀파이어를 다룬다기보다 유니버설이 판권을 갖고 있던 온갖 괴물류를 한 화면에 등장시킨다는 야심이 더 컸던 영화이긴 했다. 그보다 살짝 이전, 1998년에 나온 <슬레이어>는 정통적인 뱀파이어 슬레이어물로서 사악한 뱀파이어들을 다 때려잡는 화끈한 슬래셔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새로이 보이는 지점이 있다.
4. 다시, <문라이트>로
다시 <문라이트>로 돌아와서, <문라이트>의 믹 세인트 존이 특별한 것은, 저 엔젤을 적통으로 이은 거의 유일한 존재라는 것. 캐나다산 시리즈인 <블러드타이즈>만 해도 뱀파이어인 헨리 피츠로이를 매개하는 여자주인공으로 비키가 등장한다. 시리즈의 진짜 주인공 역시 비키라는, 시력을 잃어가는 형사 출신 탐정이고, 헨리는 관객에게 그녀의 유혹자로서, 그녀의 타자로서 비키의 매개를 통해서 제시되는 것. <트루 블러드> 역시 '수키'라는 여주인공을 통해 뱀파이어 존이 제시되며, <트와일라잇> 역시 여주인공 벨라를 통해 컬렌 가문의 뱀파이어들이 비로소 소개된다. 뱀파이어에게 매혹된 여성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서만이 타자로서 뱀파이어 주인공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문라이트>의 주요 출연진. 나쁘지 않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1시즌 15화로 종방된 비운의 시리즈.
그러나 <문라이트>의 믹 세인트 존은 엄연히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보통 인간인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인간이던 시절을 잊고싶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만 있다면 다시 인간이 되기를 소망하는 그는 그럼에도 뱀파이어로서 자신의 능력과 성격을 최대한 활용하며, 괴물/야수로서의 성격도 서슴없이 드러낸다. (다소 '불쌍하게' 생긴 알렉스 오로린이 가장 섹시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뱀파이어로서 난폭하게 날뛰는 장면들에서다.)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믹 세인트 존은 뱀파이어로서의 욕망에 충실한 다른 뱀파이어들(그를 뱀파이어로 만든 코럴린(섀넌 소서몬)과 조셉(제임스 도어링))과, 그에게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일반 인간 베스(소피아 마일즈) 사이를 잇는 중간자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와 사랑에 빠지는 베스보다 오히려 더욱, 뱀파이어에 대한 매혹과 공포의 상반된 이중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도 바로 믹 세인트 존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믹 세인트 존은 코럴린을 통해 임시방편적이기는 하지만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얻고, 단 며칠 인간으로 살며 베스와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베스가 다른 뱀파이어 조직에 납치돼 위기에 닥친 순간, 그는 조셉의 도움을 빌어 다시 뱀파이어로 돌아간다. 뱀파이어들과 싸워 베스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가 뱀파이어 시절에 가졌던 괴력과 초능력이 필요했던 탓이다. 시리즈의 외형상, 이는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로맨틱한 희생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뱀파이어 시절 그가 가지고 누렸던 뱀파이어의 초능력은, 그가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던 또 다른 형태의 일종의 기득권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5. 덧붙여
앞으로 뱀파이어물이 어떤 형태로 더 진화해갈지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당장 앞으로 나올 뱀파이어물들은 지금 제시된 이 다양한 버전의 '보다 느슨해진' 신화들과 탐미적이고 로맨틱한 특징들을 철저히 우려먹을 것으로 보인다.국내에서는 올해 가을 개봉한다는 <원더월드 3 : 라이칸의 반란>은 여전히 그 세계에서의 뱀파이어와 늑대인간들의 전투를 계속할 것 같다. <뉴 문>과 이후 만들어질 <이클립스(월식)>, <브레이킹 던(여명의 새벽)>이야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터인데, 1편에서 제시된 쇼킹한 설정에서 새로운 것이 나올 거란 기대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벨라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약간의 파장을 가져온다면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음습한 암흑과 음모의 세계로 들어갈 것 같은 <트루 블러드>의 경우 조금 기대가 크다. 원작의 나이브한 한계가 있고 앨런 볼의 시도가 아직은 위태로워 보인다는 점에서 조금 불안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앨런 볼이 시도하고 있는 보이는 복잡한 문화지도 그리기가 성공할 경우 새로운 전환을 제시해주는 걸작으로 남게될 가능성도 크다. 다만 이야기를 사정없이 벌리고 수습하지 못할 경우, 거기에 원작의 원래의 허술한 기둥이 이런 서브텍스트와 잘 어우러지지 못한 경우 오히려 거대한 재난이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사실 1시즌 피날레가 참... 거시기 했다.) 이 시리즈가 제발 제대로 풍성한 서브텍스트를 발전시키며 나아갈 수 있기를. 또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문라이트>에서 제시된 가능성을 어떤 시리즈든 어떤 식으로든 이어줬으면 하는 것. 이존재가 매혹적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했음에도, 이 쇼가 삼각관계 연애놀음에서 지지부진했던 것, 나아가 좀 엄한 이유로 중단된 것은 여러 모로 아쉽기 그지 없다. (2009/06/22 00:17)
- <문라이트>는 2007년 9월 28일 CBS를 통해 첫 방송되었다. [본문으로]
- <쓰리 리버스>는 대니얼 헤니의 캐스팅으로 국내에서도 관심을 모았으나 별 인기를 얻지 못한 채 1시즌으로 종영됐다. 이후 알렉스 오로클린은 7, 8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를 리메이크한 <하와이 파이브-오>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이 시리즈 역시 한국계 미국배우가 대거 출연하며 심지어 한국 로케이션도 이루어진 관계로 국내 관객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다행히 알렉스 오로클린의 '1시즌 땡 저주'를 벗어난 작품이 될듯, 올해 9월부터 2시즌이 방영될 예정이라 한다. [본문으로]
- '충분히'라는 건 좀 과장이긴 한데, <트루 블러드>의 뱀파이어들이 여전히 낮에는 관 속에서 자고 잠을 자지 않으면 눈과 귀와 코로 피를 흘리며 햇빛에 타죽는다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문라이트>의 뱀파이어는 선글라스를 끼고 낮에도 차 안이나 그늘만 골라가며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별로 요란한 과장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 <트루 블러드<는 이후 소박했던 1시즌의 분위기를 벗어나 광기와 에로티시즘으로 '막나가'면서 엄청난 팬층과 시청율을 확보한다. (원작과 TV 시리즈 모두 그러한데, TV시리즈는 원작에 느슨하게만 기대있을 뿐 상당히 내용을 달리 한다.) 3시즌까지 시청율 고공행진을 기록하며 미국 내 가장 인기있는 미드 시리즈 중 하나로 떠올랐다. 현재 4시즌 방영 중이며 5시즌 제작이 준비되고 있는 중이다. [본문으로]
- 이 시리즈도 미국에서는 십대와 2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나름 인기를 끌고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 9월부터 3시즌 방영 예정. [본문으로]
- <뉴문>에 이은 3편 <이클립스>도 작년에 개봉해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올해 12월 <브레이킹 던 1부>가 개봉할 예정이다. <렛미인>은 스웨덴의 오리지널 버저니 2008년 국내에도 개봉돼 큰 인기를 끌었으며, 맷 리브스 감독에 의해 미국에서 리메이크 된 버전 역시 2010년 국내에도 개봉했다. 이 버전 역시 고른 호평과 지지를 받았다. [본문으로]
- 여기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1992년작 <드라큘라>에 대한 언급을 생략했는데, 이 영화가 한편으로 뱀파이어란 존재의 에로티시즘을 강조하며 게리 올드만의 드라큘라를 연민이 가는 존재로 새로이 창조하긴 했으되, " 브람 스토커의 원작에 충실했다"는 모토대로 매우 전통적인 특징들을 함께 가진 드라큘라를 그리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초대의 신화'에 대한 이 부분의 언급은 정확하지 않다. 코폴라의 <드라큘라>에서만도 초대의 신화는 전혀 보이지 않고, 어릴 적 TV로 드문드문 봤던 뱀파이어물도 마찬가지. 그러나 <버피와 뱀파이어>가 이 설정을 도입한 최초의 시리즈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버피 이전에도 이 설정이 사용된 드라마나 영화가 있다면 제보 바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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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mm 필름의 황혼기 - 2011/08/04 17:13
지난 7월 18일, 버라이어티지는 디룩스(Deluxe)사와 테크니컬러(Technicolor)사의 35mm 필름부문 사업합병 사실을 보도하며 "필름의 황혼기를 예고하다"라고 제목을 뽑았다. (기사 바로가기: David S. Cohen, "Lab pack heralds twilight of film" Variety) 디룩스와 테크니컬러는, 말하자면 영화산업사상 양대 축을 이루던 세계 최대의 필름 현상소라 할 수 있다. 디지털이 일반화되기 전, 우리가 극장서 헐리웃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화를 볼 때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 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가면 이 영화를 어디서 현상했는지 현상소의 로고가 나오게 되는데, 99%가 디룩스 아니면 테크니컬러다. 이러한 두 회사가, 양사의 다른 부문들은 그대로 둔 채 35mm 사업부문 간 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한편, 버라이어티는 이 기사를 내보낸 지 9일 후인 27일 테크니컬러사와 포스트웍스(PostWorks)사 간 계약을 보도했다. (기사 바로가기: David S. Cohen, "Technicolor acquires LaserPacific" Variety) 테크니컬러가 한편으로는 시네디즘(Cinedigm) 사와 협약을 체결해 디지털 배급을 강화하는 한편, 레이저퍼시픽(LaserPacific)사를 인수해 포토웍스에 후반작업 자산들을 팔면서 디지털 후반작업을 재조정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35mm 필름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이 풍경도 곧 '옛 풍경'이 될 것이다.
디지털 혁명이 도래한 후 되도록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는 독립영화는 물론이고 거대 스튜디오의 작품들도 대부분 디지털 소스로 배급하고 있는 지금, 35mm 필름'의 위상이 이전보다 줄어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5mm 필름을 생산하는 회사들이 연이어 도산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일하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독립영화뿐 아니라 고전영화들을 DCP로 상영하는 일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2011 시네바캉스 서울'에서 상영되는 히치콕의 세 작품(<새><현기증><싸이코>)도, 러닝타임 5시간 30분에 달하는 <카를로스>도 DCP로 수급했다. 아마 앞으로는 더할 것이다.
디지털은 35mm 필름의 깊이감과 공간감을 재현해주지 못한다는 말도 이제는 옛말이 될 듯하다. 그만큼 디지털이 발전한 탓도 있겠지만, 새로이 제작되는 영화들이 제아무리 35mm로 촬영됐다 하더라도 후반 작업에서 거의 대부분 DI작업을 거치는 만큼, 이제는 디지털 소스를 다시 필름으로 현상해 필름 프린트로 배급하는 일이 이전만큼 큰 의미를 지니기 힘들어진 것도 사실이다. 거대 체인을 가진 국내 모 멀티플렉스는 앞으로 중앙에서 디지털 상영을 관리하는 '매니저'를 두고 35mm 필름을 더 이상 상영하지 않는 방안(그리하여 나아가 영사기사를 정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영사기사가 사용하는 필름 편집용 테입인 35mm 스플라이서 테입이 국내에서 더 이상 판매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도 들었다. 사라지는 것은 필름만이 아니다. 정말 필름의 시대는 곧 종언을 맞는 것인가, 싶어 새삼 기묘한 기분이 든다.
그런 와중에 최근 Netflix사는, "DVD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온라인배급을 확장하고 강화하고 있다. 필름메이커 지의 스콧 매컬리는 최근 영화제에서 DVD 스크리너로 영화를 보는 경험과 'DVD시대의 종언'에 대한 단상을 칼럼으로 썼다. (Scott Macaulay, "Festival film watching and the death of the DVD" Filmmaker) 기술의 변화가 너무 빨라 따라가기는커녕 아쉬워하기도 벅찬 시대다.
ps. 버라이어티의 기사는 대부분 유료이기 때문에 링크가 잘 열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ps2. 본문에서 글 짧게 쓰고 설명하기 쉬우라고 테크니컬러와 디룩스를 대충 '현상소'로 표현하며 퉁치고 지나갔는데, 실제로 이제껏 해왔던 사업은 그냥 현상소도 아니고,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 동네 사진현상소의 영화 버전회사... 수준이 결코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건 CJ를 대충 '설탕 만드는 공장' 정도로 표현한 거랄까요. 뭐 돈 된다면 아무 분야나 동네 구멍가게 품목에다가도 손뻗치는 국내 재벌에 비유하는 것도 그다지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ps3. 사실 디룩스나 시네디즘의 표기도 그다지 올바르다고는... '디럭스'라곤 차마 못 쓰겠더라고요, 뭐 이것도 딱히 정확한 발음도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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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 | 흐트러지다 乱れる Yearning (1964) - 2011/08/04 02:46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62년작 <흐트러지다>는 형수와 시동생 간 연정이라는, 다소 센세이셔널한 소재를 다룬다. 물론 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1960년대 - 전쟁의 상처는 가셨으되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있는 - 일본에서 이러한 사랑은 상대에게 고백하고 서로 나누기는커녕, 제 감정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조차 버거운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 영화에서 다루는 것은 결국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정념과 애정만이 아니다.
상처한 형수 혼자 가게를 이끌어가든 말든, 대학까지 졸업해 25살이나 되고도 매일 술집에 마작에, 빠찡코나 하고 다니던 시동생이 어느 날 사랑을 고백해온다. 그가 그렇게 방탕하게 지내는 것은 실은 말로 고백할 수도 없었던 사랑, 바로 당신 때문이라고. 여자가 무너지는 건 그 순간이다. <흐트러지다>의 이 장면은 충격을 받아 놀란 표정의 여자, 레이코(다카미네 히데코)의 얼굴에 집중한다. 영화 내내 단정하고 조용한 말씨와 표정과 행동을 보여주던 단아한 그녀는 이 장면에서 격동하는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낸다.
다마키네 히데코의 경이로운 얼굴
레이코가 속해있는 가족 역시, 결혼 반년 만에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 남편은 태평양전쟁에 나가 외지에서 전사했다 - 레이코가 잿더미 위에서 행상을 해가며 시어머니와 시누이 둘, 그리고 어린 시동생을 부양해온 것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술을 파는 이 가게 역시 서서히 위기를 겪는다.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그녀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한편 이 표현의 일환으로 재혼을 위한 맞선을 주선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향하는 가족들의 호의와 고마움의 표현이 실은 그녀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배제의 결과이자, 그러한 배제를 계속 시동케 하는 힘으로 드러난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고마움의 표현은 그녀의 이 집안에서의 위치 - 실질적인 가장 - 를 껄끄러워 하는 대사와 언제나 쌍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녀가 ‘이루어지지 못할 관계’의 남자에게서 고백을 받고 충격을 받는 장면은, 18년간 어떻게든 이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몸부림쳤던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 그리고 가족에 대한 헌신을 통해 가까스로 형성해온 자신의 인생과 정체성이 회복 불가능하도록 완전히 박살나며 무너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이 그토록 파워풀한 힘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파괴가 가족의 일원 중 그녀에게 가장 절대적 신뢰와 지지를 보여주던 시동생 - 더욱이 이 가정의 유일한 ‘남자’, 즉 이 가정의 일원들이 모두 가부장으로서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존재 - 의 애정 고백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나는 절대로 재혼하지 않고 이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그녀의 선언에 재혼을 주선하던 시누이들이 번번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록 마지못한 것일지라도) 그녀의 위치를 재차 수긍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러한 ‘파괴’와 ‘흐트러뜨림’의 순간 이후, 봉합될 수 없었던 그와 그녀의 사이는 결국 그녀의 친정으로 향하는 여정의 길에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가 싶더니 결국 주저앉고 만다. 둘은 낯선 역에 함께 내려 시동생과 형수가 아닌 비로소 남자와 여자로 만나지만, 그녀는 자신 역시 그의 고백에 가슴이 떨렸다고 고백하면서도 결국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결말이 혹여 ‘가부장제의 한계와 억압을 뛰어넘지 못한’ 것으로 읽힐까 우려스럽다. 오히려, 일견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그녀가 실은 자신의 확고한 의지와 욕망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해 왔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해 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역시, 그녀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되(그녀는 그의 키스를 뿌리친 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이러한 자신 스스로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의지에 기반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나는 그의 고백 장면이 실은 그저 애정고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정체성과 기반을 위협하고 결국 그것을 성공적으로(!) 파괴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헌신에 감사를 표하는 가족들에게 그녀가 여러 차례에 걸쳐 “내 스스로 선택한 삶, 당연한 행동”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대사를 한번 하는 것은 그녀가 가부장제를 몸으로 체화한 순종적인 여성, 너무나 착한 여성의 겸손의 표현일 수 있지만, 두번, 세번 반복되는 것은 그저 겸손의 착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헌신을 ‘희생’으로 규정하는 시선과 ‘(가장이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주장 사이에서, 우리는 표면적인 감사 대 겸손과 순종의 입장을 넘어서서, 그녀를 배제하려는 혈연에 기반한 가족관 대 그녀가 '만들어온' 가족관, 나아가 스스로의 위치를 정하고 그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온 그녀의 주체성의 대립을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 결과 그녀가 이 가족 안에서 유지했던 것은 ‘실질적 가장’의 위치였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는 이 실질적 가장의 위치를 안정적으로 보장받지 못한다. 그런 위치에서, 그녀의 헌신이 오히려 안정적 제 위치를 향한 맹렬한 투쟁으로 읽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그와 함께 역에서 내린 뒤 가장 먼저 하는 대사는 “나도 여자랍니다. 당신의 고백을 받고 실은 가슴이 설레었어요”라는 고백이다. 이 고백은 물론 오랫동안 자신을 마음에 둔 남자에게 비로소 화답하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좀더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만약 그녀의 헌신이 정말로 희생이 아닌 그녀의 주체적 선택의 결과였고, 그의 고백이 그녀의 이 선택을 뒤흔들고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이 장면은 흔히 해석되기 쉬운 ‘가부장제적 윤리 대한 도전’보다 오히려 전통적으로 요구된 - 종종 강요된 - 여성의 성역할을 받아들이며 순응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 낯선 곳에서 그에게 자신의 ‘여성’을 선언하고 함께 여관에 들었으면서도 결국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도 충분히 납득된다. 그녀에게 어느 날 찾아온 로맨스는 그녀의 여성성을 복원해주되 대신 자신이 오랫동안 스스로 만들어온 가족 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잃게 만드는 것, 그러므로 결국 자신의 존재를 건 투쟁을 촉발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검을 향해 쓰러질듯 뛰어가던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와 감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표정이 오랫동안 잔상을 남기며 끝없는 상념을 일으키는 가운데,문득 그의 죽음은 그녀에게 파탄을 안겨준 이에게 운명이 내리는 벌, 혹은 그녀를 향한 운명의 '다른 방식의 사랑'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은 결코 그녀가 원치 않았던 복수를, 결코 그녀가 원치 않았던 방식으로 그에게 해준 셈이다. 운명, 혹은 신의 사랑은 인간의 이해, 혹은 인간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고 표현된다. 그녀가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은 바로 이런 점에서다.
ps. 서울아트시네마에서 2011. 7.15-7.24 간 열린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에서, 7/17 19:30에 보다.
ps2. 그 유명한 기차씬은 새삼 언급하지 않겠다. 이 장면은 정말 기차 안 풍경(정확히 하면 그녀를 향한 그의 시선, 그리고 그와 그녀 사이의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와 기차 밖 풍경을 번갈아 병치하는 편집으로 엄청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그 어떤 스릴러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수준의 어마어마한 서스펜스. 덕분에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 과연 '시선의 내러티브'의 거장다운...
ps3. 필름 소유자인 시네마테크부산으로부터 1962년작이라고 소개받았는데 영어자료뿐 아니라 일본 위키 등의 자료에도1964년 1월에 개봉한 1964년작이라고 표기돼 있다. 다시 확인해 보니 내 오류. 1964년작이 맞다.
ps4. 마지막 장면, 레이코의 얼굴 클로즈업을 잠깐 비추다가 더 끌지 않고 그냥 확 끝내버리는 걸 보고 경악을 했었다. 사실 이번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에서 맨 처음 본 게 이 <흐트러지다>였고, 이 영화가 준 충격 덕에 주말도 그대로 반납하고 나루세 미키오 영화들을 계속 챙겨봤다는.
ps5. 그래서 내게 이 <흐트러지다>는 나루세 미키오의 가장 유명한 영화 <부운>보다도 훨씬 더 좋았던, 이번에 본 다섯 편 중 단연 최고.
ps6. 이런 식의 분석이 오히려 영화에의 흥미를 더 떨어뜨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얼굴 *발그레*해지는 형수와 시동생 간 러브스토리로만 봐도 절절하긴 마찬가지. 그런데 저 단아하면서도 단호하기 짝이 없는 다카미네 히데코의 얼굴이, 계속해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언젠가 다시 상영된다면 꼭 다시 보고 싶다.
ps7. 이 영화에선 이토록 청초하고 단아하던 다카미네 히데코가 <방랑기>에선 스스럼없이 '망가지는' 연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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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윤성현 감독 인터뷰 (2011. 3. 8) - 2011/08/03 02:07
많은 성장영화와 청춘영화들이 ‘빛나는 청춘’을 다루지만, 그 빛이 언제나 찬란하고 형형색색의 눈부심만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때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베이는 듯한 고통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겹겹의 어두움의 빛이기도 하다.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은 그 어둡고 격렬한 청춘의 빛을 다른 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빚어냈다. <파수꾼>의 기태(이제훈)와 동윤(서준영), 희준(박정민)은 이미 성인이 된 당신과 내가 여전히 지워내지 못한 채 마음 속 금고에 꽁꽁 숨겨뒀던 상처이기도, 아직 성인이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지금도 여전히 겪으며 통과하고 있는 고통이기도 하다. 마치 오래 전 알고 있었던 실존하는 어떤 사람처럼 그렇게 곁에 왔다가 다시 길을 떠난 기태와 동윤, 희준. 그들이 못내 아쉬운 관객들을 위해 여기 윤성현 감독과의 ‘영화 수다’의 기록을 남긴다.
김숙현(이하 ‘김’) : 흥행은 어떤가. 아카데미 시상식 시즌이라 영화가 많은 시기에 개봉했다. 극장 잡기가 쉽지 않았을 듯하다.
윤성현(이하 ‘윤’) : 개봉 첫 주에 삼천 명 정도 들었는데 이 정도 규모 영화에선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 한다. 첫 주부터 퐁당퐁당 상영을 한 건 사실인데, 흡족한 편이다. 만 명만 넘겨도 좋을 것 같다. (편집자 주 : 윤성현 감독을 인터뷰한 시점은 개봉한 지 6일째, 4천 명 가량이 들었던 때였다. 개봉한 지 3주인 현재 만 명 돌파를 바로 목전에 두고 있다.)
김 : ‘관객과의 대화’를 계속해서 많이 다니는 것 같다.
윤 : 사실 관객과의 대화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관객들마다 다들 각자 해석하고 정리하는 게 다른 법인데, 내 의도를 말해주게 되면 그게 그냥 하나의 ‘정답’이 돼버리니까. 영화를 만든 자로서 분명 의도가 있긴 하지만, 그 의도대로만 영화가 읽혀야 하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관객 각자 자신만의 해석과 이야기들이 분명 있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부분들, 혹은 공백에 대해서 관객들이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로 그 공백을 채우기 마련이고, 그렇게 영화는 하나지만 각자의 이야기가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하나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관객들이 “나는 영화를 이러이러하게 봤다”고 말해주면 나는 “아,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도 맞는 것 같다”고 반응하는 편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다. 하지만 내가 ‘정답’을 말하게 되면, 영화를 보는 시선 자체가 제한적이 된다. 그런 면에서 관객과의 대화가 썩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관객 입장에서도 자신만의 해석과 감상이 ‘틀렸다’는 판정을 대하게 된다면 그리 좋을 것 같지 않다.
김 : 영화란 게 원래 관객이 스스로 채워 넣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전혀 엉뚱한 해석들이 나올 경우 마음에 걸리지는 않는가.
윤 : 영화를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게 나는 오히려 재미있더라. 예를 들어 <파수꾼>이 미스터리 구조를 갖고 가기는 하지만 관객들 중엔 이 영화를 스릴러로 보는 경우가 있다. 또 주인공 기태를 보며 공포를 느끼면서 영화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포영화로 받아들이는 관객도 있다. 내가 처음에 의도한 건 그런 게 아니었지만,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또 일정 정도 맞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부분이 내포될 수 있었겠다 싶으니까. 영화를 만들 때 모든 걸 공식처럼 1+1=2, 3+4=7처럼 계산해서 짜맞추는 건 아니니까. 본능적으로, 직관적으로 만드는 부분도 분명 있다. 그렇게 내가 무의식적으로 느낀 부분들을 읽어내고 끄집어내 언어로 공식화해주는 걸 들으면, 나도 깨달음을 얻고 나아가 재미와 쾌감도 느낀다. 내가 다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무의식적으로는 나 역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겠구나 싶으니까. 오히려 재미가 없어지는 건 정답을 요구하는 순간부터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부분은 ‘영화는 영화로서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로 해설하는 입장이 되는 순간 피곤해진다. 재미도 없고.
김 : 많은 감독들이 현장에서는 물론 관객들의 반응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개중엔 “평론가들의 평을 평론하는” 감독들도 많다.
윤 : 전문가들의 평과 관객평을 꾸준히 찾아보는 편이다.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만든 사람으로서는 궁금하니까. 작고하신 이청준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비평가가 있는데, 작품을 완전히 잘못 읽는 비평가가 있고 작가의 의도를 정확해 읽어내는 비평가가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 본인도 몰랐던 작품의 비밀을 발견해주고 무의식 속에 있었던 부분을 끄집어내주는 비평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이야기를 직접 만든 작가라고 해도 틀릴 수 있다는 얘기다. 나도 그 얘기에 동의한다. 작가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신처럼 “이건 이거다, 저거다” 할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인해서 읽는 것도 재밌게 느껴지고, 의도대로 읽어주면 좋고 뿌듯한 거고.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은 특히나 직관이 많이 개입한다. 사람을 다룰 때, 캐릭터를 만들 땐 공식에 기대어 쓰는 게 아니니까. 내가 몰랐던 새로운 지점들을 발견해줄 때 도리어 그 얘기를 통해 내 영화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생각해보는 기회가 된다.
김 : 감독들 중에는 시나리오를 쓸 때나 연출을 할 때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산하고 통제해야 하는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보다 직관과 본능에 의존해 본능적으로 반응하거나 즉흥적으로 바꾸는 스타일도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윤 : 반반인 것 같다. 일단 영화란 것은 현장에 나갈 때 완벽한 준비를 해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면 장면에 언제나 최선의 것만을 요구할 순 없다. 예를 들어 원래는 화창한 날씨를 원했지만 계속 어둡고 구름 낀 날씨라고 했을 때, 혹은 그와 비슷한 다른 상황이 발생했을 때 거기에 대한 대처가 돼 있어야 한다. 운에 맡기지 말아야 하고, 최선의 순간을 기대하고 가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최악의 경우에 대한 모든 만반의 준비와 대비를 해야 한다. 모든 스탭이 시나리오라는 지도를 가지고 다들 준비하기 마련인데,. 어떤 장면을 찍으려는 상황에서 갑자기 “이렇게 찍기 싫다”라며 바꿔버리면 준비한 사람들이 다 당황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같이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러고 싶진 않다. 영화 현장은 최고의 순간보다는 최악의 순간이 훨씬 많다.
김 : 만반의 준비를 해갔는데 현장에서 아니란 판단이 든다면?
윤 : 전체의 얼개를 틀어버릴 정도로 바꾸진 않지만, 만반의 준비를 통해 갖춘 전체적인 얼개가 있다면 그 얼개를 지키는 한도 내에서 바꿀 수 있는 최대의 것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리허설을 하면서 배우가 어느 정도의 선을 해줄 수 있는지 알았다면, 촬영 현장에선 그걸 더 끌어올리기 위해 목표치를 더 높게 설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원하는 건 그 목표치보다도 더 높기 마련이다. 실제로 원하는 그 수위까지 끌어내기 위해, 리허설 때부터 엄청나게 준비를 하고 요구하기보다 배우한테 최대의 자유를 주는 쪽이 낫다. 대사의 자유를 줄 수는 없다, 편집을 해야 하니까. 하지만 ‘정서상의 자유’를 줄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배우한테 울라고 했는데 배우는 그 장면에서 울고 싶지 않다고 하면 울지 말라고 한다. 배우한테 자기 캐릭터를 새롭게 창조하고 자기 자신을 연출하기를 바라는 편이다. 배우뿐 아니라 스탭들에게도 ‘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창조적일 것’을 요구하는 편이다. 그러니 결국 나는 틀을 만들어주고, 각자 그 틀 안에서 최대한 노는 것이다.
김 : 시나리오 쓸 때는 어떤가? 계산과 이성에 많이 의존하는 편인가, 아니면 직관과 본능에 의존하나?
윤 : 그것도 반반인 듯하다. 이야기, 플롯을 만들 때에는 굉장히 계산적으로 한다. 캐릭터 A가 이런 생각을 했으니 행동은 이렇게 하겠다는 행동의 흐름들 같은 것. 인과관계나 개연성을 굉장히 많이 따진다. 이 씬이 있었을 때와 빠졌을 때도 따져보고. 여백을 넣었을 때, 그 여백에 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수 있는 반면 결과적으로 개연성이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 판단은 이성적으로 한다. 하지만 캐릭터를 만들고 대사를 쓸 때는 다르다. 얘는 이런 애니까 이런 대사를 해야 하고 이런 정서를 갖는다, 고 계산하기보다는 얘는 왠지 이럴 것 같다, 이런 정서를 가졌을 것 같다는 직관적 느낌에 많이 의존한다. 나는 한마디로 말하면 ‘삘을 받았을 때’ 막 써내려가는 편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화면을 들여다보며 “이 인물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할까, 어떤 정서일까” 머릿속에서 공식을 만들어내고 계산을 하기보다는, 버스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화장실을 가든 어디를 가든 항상 그 인물을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딱 ‘삘이 오면서’ 대사가 생각나면 곧바로 녹음을 하거나 수첩에 메모를 한다. 그렇게 만든 캐릭터와 대사들이 확실히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전체 얼개는 이성적이고 계산적으로 쓰고, 디테일한 부분은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쓰는 셈이다.
그런데 실은 이성과 본능이 같이 가는 것 같다. 보는 사람이 언제나 만드는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건 당연하지만, 나는 단지 이런 의도로 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쓴 부분인데 보는 사람은 거기서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걸 발견해내기도 하니까. 그런가 하면 나는 이성적이고 다 계산해서 의도적으로 썼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나중에 발견된다. 특히나 얼마 전 어느 잡지에서 <파수꾼>에 대한 평을 하나 봤는데 정말 맞고 정확한 말씀이더라.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너무도 정확했다. 내가 그 정도까지 계산해서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니 머릿속에서 직관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정말 신선한 느낌이었다.
김 : 그렇게 ‘삘로 건진’ 대사 중에 “아, 이건 내가 썼지만 정말 마음에 든다” 싶은 대사가 있다면.
윤 :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을 가다듬다가) 그런 순간이 몇 순간 있긴 하지만 ‘가장’이라고 말하긴 힘들 것 같다. 다만 가장 마지막으로 시나리오를 바꿨던 건 이미 촬영에 들어간 이후, 마지막 엔딩 신이었다. 아마 2회 차 촬영이었던 것 같은데, 기태가 자기 어머니 얘기를 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갑자기 삘이 확 온 거다. 그래서 마지막 엔딩 신을 고쳐 쓰게 됐다. 원래 시나리오에선 엔딩이 달랐다. 동윤이의 죄의식만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장면이었다. 물론 동윤이는 죄책감을 지닐 수밖에 없고 그걸 보여주는 엔딩이라는 점에서도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원래 시나리오 상태로 가면 안 되겠다 싶더라. 기태의 본질, 기태가 느끼고 있는 결핍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다. 예를 들어 기태가 “그렇게 하면 세상이 다 날 볼 거 아냐” “누가 최고야? 누가 최고야?” 하는 대사들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지 않았다. 그 장면(기태가 어머니 얘기를 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영감을 받아서 시나리오 위에다 바로 다시 고쳐서 새로 썼다. 기태란 인물에 대해 연민이 확 올라오더라. 연민어린 시선을 보여주자는 의도라기보다, 불안하고 유리알 같은 내면을 지닌 기태에게 내가 연민을 느꼈다. 그 대사들에 대해 어떤 관객들은 간지럽다, 쑥스럽다는 반응들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진심이었다. 그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맨 처음 필을 받았던 장면은 기태가 동윤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순간적으로 갑자기 삘이 와서 그 장면을 제일 먼저 썼던 것 같다. 기태와 동윤의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었는데, 그들의 담겨진 마지막 모습이 순간적으로 왔고 그걸 굉장히 직관적으로 썼다.
김 : 그 장면은 연인이 헤어질 때의 느낌도 난다. 사실 그 장면뿐 아니라,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기존에 통념상 ‘여성적’이라고 부르던 정서들이 주축이 된 것 같다.
윤 : 글쎄, 우리가 소위 말하는 ‘마초적’인 성향이 있는 관객들이 내 영화에 정서적으로 굉장히 격렬하게 반응하는 편이던데. <무비위크>의 송지환 편집장도 그렇고, 양익준 감독도 그렇고. <아저씨>의 이정범 감독은 영화 끝나고 눈물까지 흘리셨다. 그럴 만한 영화는 아닌데...
김 : (잽싸게 말을 자르며) 그럴 만한 영화 맞다(웃음).
윤 : 글쎄, 엄청나게 울면서 볼 영화는 아니지 않는가. 정서적인 민감대가 강력하게 왔기 때문일 거란 확신은 든다. 내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서도 엄청 남자답다는 친구들이 격렬하게 반응하더라.
김 : 흔히 남자들은 ‘거하게 싸우면 친구가 된다’는 둥, 여자들보다 의리가 끈끈하다는 둥의 허세어린 과시를 여자들에게 하지 않는가. 반면 여성들의 우정은 말 한 마디에 삐지고 상처받는다고들 하고. 하지만 영화에선 희준이 삐져서 기태를 슬슬 피한다. 동윤도 나중엔 기태가 가장 아파할 말을 골라서 한다. 이런 건 흔히 ‘여자들의 싸움’이라고들 하지 않나. 반면 이제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온 흔한 스테레오타입 화된 남성의 방식으로 행동하는 건 오히려 기태다. 때린 다음 날 와서 웃으면서 “야, 많이 아프냐?” 한다던지.
윤 : 난 기태를 포함한 세 명 다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세 명이 스테레오타입 화된 인물들은 아니지만 실제 남자아이들의 정서이지 특별히 여성적이라거나 새롭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 정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서적인 뒤틀림에서 오는 갈등이 있었던 거고. 난 오히려 그 아이들이 ‘보편적’이라 생각한다. 마초적 성향이 강하단 사람들도 그 정서를 이해하기 때문에 공감하는 것일 거다. 내가 마초인데 기태도 마초니까 공감한다는 차원보다는, 정서에서 오는 디테일함, 그 틀어짐을 다들 느끼는 거다. 기태는 겉이나 표현 방식은 투박하지만 내성적이고 아주 디테일하고 섬세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런 갈등을 느끼는 거겠지. 무딘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갈등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다. 영화들에서 “이런 게 여성적인 것들”이라고 하는 전형적인 부분들을 나는 여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보편적이라 생각한다.
김 : 사실 남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있는 부분들을 사람들이 남성적, 여성적이라고 가르는 거지.
윤 : 맞다. 만약 굳이 그런 어휘를 빌려 표현한다고 한다면, 나는 오히려 여성이 더 남성적이고 남성이 더 여성적이라 생각한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살아오면서 느낀 바로는 남자는 정말 약하다. 여자는 정말 강한 것 같고. 그 강함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자의 내면이 훨씬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다들 너무 약하고 상처도 잘 받고 잘 준다. 그러니 실제적으로는 우리가 스테레오타입화한 ‘여성적’이란 말은 남자에게 더 어울리고 강인함 등 ‘남성적’이란 말은 여자한테 더 어울린다.
김 : 마초적인 사람일수록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말을 듣고 보니, 기태의 그런 약한 부분을 경험했기 때문에 사회에 나와서 더 마초적인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윤 : 그렇다. 만약 내면이 강하거나 무디고 상처도 잘 안 받는 성격이라면 그런 식의 소통 방식을 취할 리가 없으니까.
윤 : 참 얄밉긴 하지. 하지만 그런 소통 방식을 취하는 게 희준이 입장에선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기태가 희준에게 원하는 반응과 행동이 있다. 희준은 그걸 알지만 애써 외면하는 거다. 그걸 해주는 순간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진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둘이 서로 상승효과로 가는 거다. 누구 한 명이 다르게 행동했다면 같이 주저앉을 테지만 둘이 서로 치고 올라가듯이 상승하는 거다. 하지만 참, 얄밉지.
김 :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심지어 때리는 기태보다 오히려 희준이 정서적으로는 더 폭력적이 아닌가, 란 생각까지 들더라. 상대를 자꾸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희생자 포지션을 더 강화한 달까. 하지만 두 번째 보고 감독의 말을 들으니 희준이가 이해가 간다. 기태와 갈등하게 된 이후 “내가 니 꼬봉이냐?”라는 대사를 반복하던데, 기태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면서 기태한테 종속이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보이기도 하고.
윤 : 기태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도 불만이 있었을 거다. 친구 관계라는 건 기본적으로 자신과 대등하게 느꼈을 때 친구지,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했을 때 상대를 친구로 느끼진 못한다. 차라리 위에 있는 사람을 친구로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아마도 기태를 정말 좋아하니까 기태랑 대등해지고 싶었을 거고, 대등해지기 위해 그러한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나도 만약 기태에 대한 애정이 있고 기태와 정말 친구가 되고 싶었다면, 기태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거다.
김 : 그런 점에서 동윤은 기태가 미쳐 날뛸 때 유일하게 기태를 제압할 수 있었던 아이였던 것 같다. 기태를 따라다니던 다른 아이들도 말 한 마디로 제압한다. 사실 남자들의 서열과 수직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인물로 보였다.
윤 : 그렇다. 희준과 기태의 갈등이 계급적인 갈등이라면, 기태와 동윤의 갈등에는 계급의 문제가 제외돼 있다.
김 : 희준이가 또 얄미웠던 게, 기태가 애지중지하는 공까지 받았으면서 모든 책임을 동윤이한테 떠넘기는 듯하다는 거다. 기태 아버지한테 얘기할 때도, 마치 세 사람이 모두 친했던 시절은 기억도 안 난다는 듯 말하지 않나. 아무리 사람의 기억이 사후에 재구성되는 법이라곤 해도 말이다. 심지어 동윤에게 “피하지는 마라”는 대사까지 하지 않나. 정작 피했던 건 자신이면서.
윤 : 발 빼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확실히 비겁해 보이지. 하지만 그건 무의식적인 비겁함이다. 자기가 기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거란 걸 아예 생각을 못 하는 거다.
김 : 당신이 아까 언급한 그 평에서도 지적했듯, 희준인 아마 평생 그걸 생각도 기억도 못한 채 살아갈 것 같다. 반면 동윤인 보다 많은 걸 기억하고 살아갈 것 같다.
윤 : 그렇기 때문에 동윤이가 좀 더 가까이 진실에 접근하는 거다.
김 : 영화에서 시간대가 마구 오가는 건 시나리오에서부터 그렇게 설정한 건가? 아니면 편집 때 손을 본 건가?
윤 : 시나리오 쓸 때부터 설정한 거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전형적인 이야기의 형태를 하나 던져놓고 이후 그것의 터닝 포인트를 주지 않나. 아버지와 가해자/피해자라는 두 가지 정보를 준 뒤 ‘아버지는 피해자의 아버지겠구나, 가해자를 잡으러 가겠구나’라는 게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의식이라면, 그걸 뒤집고 상상을 깨면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나가는 거지. 그러면서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이 되는 거다. 그러다보니 그런 형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편집으로 만들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아까 언급한 그 평이 이걸 제대로 분석을 해줬다. 하지만 정작 쓸 때 그런 정도까지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쓴 건 아니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라는 표피를 보여준 다음에 통념을 한 번 꼬고 내적인 디테일, 진실에 다가가는 이야기를 쓰자, 라고 정한 수준이었다.
시간이 분절적이다 보니 이래저래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겠구나, 더 자유롭겠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더라. 착각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분절적이라 해도 그 안엔 이미 플롯이 있었고 틀이 생겨져 있더라. 그 틀을 벗어났을 때 굉장히 이상해지더라. 도리어 영화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갈 때 편집이 더 자유롭고, 분절적으로 했을 때 더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 많아진다. 틀을 완전히 바꾸게 되진 않더라. 그러다보니 그 틀을 지키는 선에서 아예 에피소드를 통째로 빼는 경우는 있었어도 신을 바꾸고 재배치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신의 흐름에 의도와 이유가 다 있었으니까. 콘티를 짤 때도 촬영할 때도 다 시나리오에 맞춰서 하게 되더라. 지금 영화는 시나리오보다 조금 날씬해졌긴 한데 척추가 바뀌거나 하진 않았다.
김 : 관객이 혼란을 느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지는 않던가? 사실 많은 영화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고 해도 화면의 톤을 달리 하거나, 자막을 박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친절한 구분점을 주려 하지 않나.
윤 : 별로. 관객들이 당연히 어렵지 않고 익숙하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영화 100편 중 30편이 시간이 왔다 갔다 하고 과거 플래시백이 오간다. 30년대 영화서부터, <시민 케인> 이전부터 그랬고 느와르 장르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플래시백도 아니다. 이 영화는 작가의 시점에서 진행되지 누구의 의식을 따라 흐르지 않으니까. 영화가 진행되면서 화자가 서서히 바뀌고 시간대도 그냥 과거 한 시점이 아니라 그보다 더 과거, 보다 현재에 가까운 과거 등 다양한 시간대가 있으니까 관객이 영화를 보며 재배치를 해야 하는데, 충분히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끊임없이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게 되고 나름대로 각자 플롯에 있는 불규칙 속에서 규칙을 만들어나가게 되는데, 이 정도 선이면 크게 어렵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관객의 머릿속에서 재배치되는 과정이 있어야 이 이야기가 더 힘을 갖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확신이 좀 없었다. 시나리오 모니터링을 하는데, 사람들이 시간을 계속 재배치하면서 유추하는 과정에서 헷갈려하더라고. ‘과거’라고 써달라고 하거나 자막을 박으라거나. 난 굳이 그렇게 할 필요를 못 느꼈고 오히려 짜증이 났다. 정말 헷갈리나? 의심이 들기도 하고. 그러니까 삐딱한 오기가 생겨서 더 헷갈리게 만들고 싶더라. 과거가 분절적이고 불규칙한 형태로 배열돼 있던 걸 통합을 해버리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영화가 실제로 그렇게 돼버렸다. 기태나 동윤이 지닌 정서적 맥락에서 그게 너무나 적절한 표현 방식이 돼버린 거다. 처음 의도는 ‘에잇 나 삐닥해질 테다’라는 마음이 일부 있어서 시간의 인과관계를 확 틀어버린 건데 말이다. (웃음)
김 : 특히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동윤이 자기 방에서 울다가 일어나서 나가면 1년 전 식탁 신이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면 다시 1년 후였던 그 장면이었다. 그런 전환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게 너무 신기하고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식탁에서는 나중에 카메라가 서서히 동윤 쪽으로 이동하는데, 프레임 안에 있는 기태는 거울 속의 기태다. 과거와 현재가 통합된 느낌이기도 하고, 기태가 마치 유령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윤 : 환영 같기도 하고.
김 :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다. 고집스럽게 한 프레임에 한 인물씩만 잡는데, 동윤이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는 걸 보면 과거의 장면이 아니지 않나. 과거와 현재가 같이 있는 느낌이다. 과거와 대화하는 느낌, 동윤이 현재에서 과거에 말을 걸고 독백을 하는 느낌이었다. 정서적인 힘이 정말 강력하더라.
윤 : 하나의 정서적인 표현방식이라고 보면 되겠다. 과거라고 하기도, 현재라고 하기도 뭐하다. 순전히 과거이기만 하면 현재의 정서가 그렇게 나올 순 없을 거다. 반대로 온전히 현재의 시점에서 하는 회상이라면 과거의 부분들이 그런 식으로 표현됐을 것 같지 않다 그냥 과거의 모습이 담겨졌겠지. 단순히 과거의 장면을 회상한다거나 환상인 장면은 아니다. 과거에 느꼈던 감정과 현재에 느낀 정서적인 부분을 통합한 거라고 보면 된다. 이전 영화들이 흔히 그걸 비주얼적으로 혼합을 시켰다면, 이 영화에선 정서적인 측면에서 혼합이 된 것이다.
윤 : 정확히 그런 의도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성장영화’라고 표현한다. 글쎄, ‘성장’이라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성장은 긍정의 의미가 강하니까. 하지만 부정적 의미에서의 ‘성장’도 포함된다면, 내 입장에선 그러니까 동윤이 어른이 된 거라고 볼 수 있다. 죄의식과 상처를 지닌 채로 성장을 해버린 거다. 그런 의미들이 어깨에 짐이 되어 그걸 평생 짊어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다.
김 : 한편으로는 살짝 위안이 느껴지기도 했다. 동윤 외엔 기태란 아이가 얼마나 심약한 아이었는지, 고통을 겪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10년 후쯤 동창회에서 만나면 “아 그때 그런 애가 있었는데 자살했어”라고 가볍게 말하겠지. 그 짐을 혼자 갖고 가는 동윤이가 안쓰럽고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동윤이 한 사람이라도 기태를 기억해주겠구나, 기태를 이해해주겠구나 싶더라. 근데 나는 왜 이렇게 기태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걸까, 내가 마초라서? (웃음)
윤 : 나도 그렇다. 기태는 참 외로운 존재구나 싶다. 이 영화의 관객들은 주로 동윤의 입장에서 정서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기태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객이 많을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썼을 때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구상하게 됐는지 여러 가지 계기가 있고 기존의 인터뷰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본질적인 부분이 따로 있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왜 이 시나리오를 쓰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처음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얼마 전에 다시 떠오른 거다. 물론 기존에 했던 대답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호기심이나 이해하고 싶은 마음, 어두운 성장, 다 맞고 내 의도였다. 실제로도 어두운 성장을 표현했고. 한국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무게감과 죄책감, 상처를 지닌 채 성장할 수밖에 없고 김 : 그걸 ‘성장’이라 표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 : 고통에 익숙해진다는 것 아닌가. 그런 허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이 영화의 의도 맞다. 영화에서 어른이 진실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방관자로 머무르지 않는다. 결국 어른은 허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핵심은 아니다. 얼마 전에야 처음 이 시나리오를 쓸 때의 마음을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국 본질과 핵심은 ‘외로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통의 부재, 소통의 공격적인 방식... 모두 ‘외로움’에 관한 거다. 그리고 기태는 외로움의 근원이 되는 존재다. 만약 이 영화에 공감한다면 그 외로움에 공감하는 것일 게다. 나 역시 참 외로운 존재고. 친구나 부모가 있든 없든,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고 누구나 결핍돼 있는 부분이 있다. 그 외로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자 했다는 게, 이 영화를 만든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이유다. 내가 이 영화를 만들긴 했지만 나 역시 관객의 입장에서 위안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김 :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기태는 내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외로움이 싫어서 항상 친구들을 몰고 다닌거겠구나. 싶다. 마지막 장면 대사에서도 유추되지만, 기태가 학교에서 ‘짱’이었던 것도 권력이나 힘, 서열에 대한 욕망보다는 너무 외롭기 때문에, 외롭지 않고 싶어서 주목받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단 한 장면, 죽기 전 기태가 혼자 집안 소파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윤 : 많은 관객들이 그 장면, 기태가 혼자 앉아 있다가 뒷모습이 나오면서 일루전이 생기는데 그 장면에 대해서도 궁금해 한다. 기태가 실제로 그랬던 적이 있는 건지 아니면 동윤의 꿈이나 환상인 건지. 일부러 모호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기태가 혼자 앉아있었던 건 사실이겠지만 동윤의 죄의식이 반영된 꿈의 잔상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그 장면의 비밀을 밝히자면, 망원렌즈인데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을 막 움직인 거다. 아, 이런 얘기 하면 안 되는데.
김 : 사실 영화가 처음 시작하는 장면에서도 초점을 다 날려서 아이들 얼굴이 안 보이지 않나. 초점이 아주 얇아서 어쩌다 가까스로 초점이 맞는 게 애들이 피우는 담배 연기나 머리카락 정도다. 그러다 바로 기태가 누구를 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거기서 맞는 애가 당연히 희준인 줄 알았다. 그 뒤로 바로 가방 신이 이어지기도 하고. 그런데 두 번째로 영화를 보니 맞는 애가 희준이 아니더라. 기태가 때리는 걸 동윤과 희준이 보고 있던데.
윤 : 타 학교 아이다. 원래 편집에서 들어낸 부분이긴 한데, 기태와 아이들 사이의 사건에서 시간 순서로 보면 중반 정도에 해당하는 에피소드다. 기태가 희준이를 때리게 되는 거 바로 이전에 있는 사건이다. 일련의 에피소드를 통째로 들어내서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한데, 그 장면만을 끝까지 남겨둔 이유 중 하나는 기태의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도 그 장면이 시작 부분에 놓이니 영화 전체가 핀이 나간 느낌이 나지 않던가? 전반적인 이야기의 진실의 핀이 나간 느낌말이다. 그 핀을 맞추는 게 관객의 몫이고. 안개 같은 느낌이기도 한데, 안개를 보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면서 진실을 알기 위한 열망의 첫 장으로서 보여주고 싶었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지진 않더라.
김 : 차기작은 준비하고 있는지?
윤 : 안 하고 있다. 필을 받아야 추진하는 편인데 아직 ‘이거다’ 싶은 것, 나를 열정적으로 만들 만한 아이템이 잡힌 것 같진 않아서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관심이 있고 사람이라는 존재에 흥미가 있다. 뭔가 사회적 이야기를 하더라도 사회보다는 사람이 연관이 돼 있는 부분에 관심이 간다. 사실 사회와 사람은 긴밀히 연결돼 있고 모든 것의 본질엔 사람이 있으니까. 결국 사람에 관한 얘길 하고 싶은 거다. 이야기 구조에서부터 영화적인 것까지, 어떤 사람이 어떤 정서를 이야기할까가 제일 먼저 정해져야 하는데 아직 명확한 게 없다. 좀 여유를 가지면서 계속 고민할 예정이다.
김 : 앞으로도 독립영화 형태로 계속 영화를 찍을 예정인가? 아니면 기회가 된다면 규모가 큰 상업영화 형태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나? 하긴 당신에겐 독립영화, 상업영화의 구분이 의미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윤 : 개인적으로 롤 모델로 생각하고 존경하는 감독이 구스 반 산트다. 굉장한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그도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지 않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유도리가 있다기보다는 중간자적 느낌이다. 어떤 형태로 영화를 만드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엘리펀트>는 그런 규모로 그런 방식으로 찍어야 맞는 영화였다. 돈을 들여 만들 만한 스타일의 영화도 아니었고, 그게 맞는 옷도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굿 윌 헌팅>의 경우는 또 달라서 <엘리펀트>의 방식으로 찍을 영화가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무슨 얘길 할 것인가가 중요하고 거기에 옷을 맞춰야 한다. 큰 예산을 무조건 따고 싶다거나 저예산의 영화만 고집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다. 영화에 따라 맞는 옷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나는 항상 창조적이어야 한단 생각하고, 완벽하게 100% 창조적일 순 없지만 창조적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조력의 바탕인 상상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인간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 구조 자체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경우다. <엘리펀트>는 대단히닣혁신적이지 않나. 세상에 이건 듣도 보도 못한 방식 아닌가. 물론 형태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형태가 특별하다고 대단한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엘리펀트>는 형태와 그 외 모든 게 본질을 꿰뚫고 있는 힘이 있다. 그것 또한 창의력이다. 그런가 하면 <블레이드 러너>처럼 형태적인 창의력, 공간적인 창의력, 사람이 주어져 있는 환경에 대한 창의력도 있다. 그러니 어느 부분이 우선이 되는가에 따라 달라질 거다. 플롯에서 오는 새로움과 실험정신을 담는다면 대중영화에선 리스크가 클 것이다. 그런가 하면 <블레이드 러너>나 <솔라리스> 같은 틀에서 얘기가 되는 영화들도 있다. 그럴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그런 형식으로 하고 싶다. SF영화의 예를 많이 들었는데, 내가 원래 SF를 굉장히 좋아한다. <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 같은 영화나 <미지와의 조우>도 좋아하고. 스필버그는 너무 과소평가된 감독이란 생각도 든다. <우주전쟁>만 해도 그렇고.
김 : <우주전쟁>이 과소평가를 받았다는 데에 격하게 동의한다.
윤 : 스필버그라는 이름 대문에 과소평가를 받은 것 같다. 남들은 지루하다, 겉멋 들었다고 얘기하는 <뮌헨>도 나는 재미있었다. 아 그런데 왜 이런 얘길 하고 있지?
김 : 그럼 언젠가는 당신이 만든 SF영화도 볼 수 있는 건가. 너무 기대되는데.
윤 : 기대는 하지 마시고. (웃음) <엘리펀트>나 <게리>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런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면 너무 즐겁고 행복할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SF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어느 쪽이나 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맞는 옷에 따라 영화의 형태는 달라지겠지만 결론은 ‘창조적인 것’이다. 새로운 걸 창조한다는 면에서 다 같다.
ps. 이 인터뷰는 3월 중순 혹은 하순경 네오이마주에 실렸다. 직접 인터뷰하고 사진찍고 정리했다. 사진을 잘 찍고 싶다.
ps2. 윤성현 감독을 다음에 만난 건 인디포럼 개막식날 내 직장,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극장이라며.
ps3. 이렇게 무서운 데뷔작을 찍은 감독의 두 번째 영화는, 정말 기대되는 한편으로 두렵다, 혹시나 실망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부디 서퍼모어 컴플렉스를 훌쩍 뛰어넘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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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에서의 '아버지'의 위치에 대한 잡담 - 2011/07/19 02:01
예전에 굴리던 제로보드를 오랜만에 들어갔다가 이런 글을 발견했다. 무려 2008년 1월 28일, 오후 7시 28분에 올린 글이다. (월요일이었다고 한다.)
2. 왜 한국영화는 현재 '장르영화', 특히 스릴러에 천착하는가.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고, 글을 써보고 싶은 주제입니다.
몇 년동안, 씨네21 평론가 공모가 나면 글 내야지, 내야지 하면서 결국 못 썼는데, 제가 부여잡고 있던 주제는 '한국영화와 아버지'였습니다. 저도 이제 그저 닥치는 대로 영화를 영화별로만 봤던 때보다 눈이 틔였는지, 일련의 '흐름'이라는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중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지금도 이 '아버지'란 주제가 변주되는 양상은 굉장히 흥미롭게 제 눈을 잡아끌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도저히 기성세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고아'들의 방향찾기가 저 스릴러 붐이란 생각을 합니다. 우석훈 식 세대구분으로 따지면 딱 X세대. 386도 아니고, 그들이 가진 권력을 나눠갖지도 못했으나, 정신적 유산은 그들에게 거리를 두려 하면서도 오롯이 공유하고 있는 이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기에(할 이야기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결국 '장르영화'로 몰려간다는 게 제 대강의 생각.
아울러 아버지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현재 헐리웃에서 아버지가 표현되는 양상은. 정확히 하면, 모든 죄짐을 지고 결국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30대~40대의 남자 주인공이라 생각하는데요. 이들은 아직 누군가의 아들이면서도 이제 막 어린 아이의 아버지가 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헐리웃 영화에서는 이미 권위를 모두 가진 아버지가 아들이 아닌 '딸'에게 자신의 권위를 승계하는 어떤 양식을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막 아버지가 된 저 나이 남자주인공들이 자신을 희생하는 건 이에 대한 아버지이자 아들인 그들의 어떤 '대답'이란 생각이 들고, 이 흐름은 꽤나 윤리적이라는 생각. 그러나 한국영화에선, 당분간 가부장들의 아버지 찾기와 인정투쟁이 계속될 것이고, 그 와중에 딸들은 여전히 소외될 겁니다. 그래도 요즘은 변화가 아주 빠른 편이니까, 5년 정도 후면, 아버지들이 점차 아들 대신 딸을 후계자로 삼는 과정이 영화에서 나타나게 될까요? 그리고 나면 또 몇 년 동안 박탈당한 아들들의 울부짖음이 계속될 거고, 현실에선, '페미 다 죽일년들'의 메아리가 더더욱 강하게 울려퍼지겠지요. 계급과 성차가 교차하며 부르주아의 딸이 정말로 노동자의 아들보다 우위를 가져버릴 수 있게 된 ('가질 수 있다'와 '가졌다'는 다르죠.) 이 현실이 제겐 대단히 흥미로운 관찰대상입니다. 내가 부르주아의 딸이 아닌 이상, 이 현상이 이전보단 낫게 보이긴 해도 그렇게 반가운 현상도 아니라는 점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제 관심은 이러나 저러나 그럼에도 버려지고 소외된 가난한 노동자의 딸들이니까요. 이게 제 존재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참, 갑자기 생각난 건데, 프레시안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아마 씨네21 평론공모 같은 거에 응시 자격이 안 될 듯해요. 이 '어정쩡한' 위치, 정말 싫군요.
내개 '아버지가 가부장의 권위를 (아들이 아닌) 딸에게 이양해주는' 장면은 <나이트 플라이트>의 촬영장 사진 한 장의 이미지로 박혀 있다. 바로, 이 사진.
사실 영화 촬영장에서의 한 장면일 뿐인데,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나이트 플라이트>가 개봉했던 그때, 이 사진은 그저 촬영장 사진 하나가 아니라 좀더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이 주제를 좀더 진득하게 팠더라면 상당히 흥미로운... 정도는 아니고 나름 나쁘지 않은 평문 하나를 완성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이미 지나가 버린 버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새롭지도 않게 된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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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크레이븐 | 나이트 플라이트 Red Eye - 2011/07/19 01:42
호러영화는 원래부터가 여성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고 스릴 혹은 샤커(shocker)를 주무기로 삼는다. 호러에서도 슬래셔라는 서브 장르는, 가장 약해보이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온갖 갖은 고생을 시키면서, 역으로는 감독의 역량에 따라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여성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억압받고 소외된 결과물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또다시 혐오와 공포를 강화시키는지) 그 어느 장르보다도 더욱 섬세하게 드러내는 장르이기도 하다.
<스크림>. 호러 컨벤션이 여기서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졌었지... 스킷 울리치 오랜만이군
영화에서 섹스를 한 여자주인공이 가장 먼저, 그것도 가장 잔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언제나 10대의 성에 대한 경고라는, 지극히 꼰대적인 가치관에서 비롯한다. <스크림>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보여준 것은 이제껏 공고하게 쌓아올려진 호러장르의 가장 전통적인 장르 컨벤션을 정확히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었고, 내 눈에 가장 강하게 띈 것은 역시나 여주인공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옆집 여동생같은 여린 소녀(니브 캠벨이 TV 시리즈 <파티 파이브>를 통해 스타가 된 배우임을 상기하라.)는 단적으로 섹스를 하고도 살아남는다. 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듬직하고 믿음직한 남자주인공의 노력과 보호를 착취하다가 막판에서야 뭔가 시늉을 하고 살아남는 여자 캐릭터가 아니라, 철녀도 아닌 주제에 갖은 고생을 하며 오히려 옆집 오빠(데이빗 아퀘트)를 구해내고, 당연히 그녀를 지켜주다가 장렬히 죽을 것같았던 남자친구가 오히려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므로 스크림 2, 3는 1에서 오히려 퇴행한 결과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몸은 젊은이라고, 또한 진보라고 떠들어대는 숱한 젊은 (남자) 호러감독들이 하지 못했던 것(혹은 하기 싫어했던 것을 오히려 웨스 크레이븐이 '아버지의 권위로' 해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스크림> 시리즈가 가진 맹점은, 기존의 호러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었다는, 바로 그 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여전히 기존의 호러 컨벤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브장르가 바뀌긴 했지만(<나이트 플라이트>는 슬래셔가 아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 결과, 그러나 아직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 영화가 바로 <나이트 플라이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90분도 채 안 되는 이 짧은 영화가 맥빠지고 심심한 영화로 느껴지는 것은 비행기가 도착한 후부터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기 때문이다.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면서 안타까움과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절대적인 공포의 담지자일 것만 같았던 '그'는 알고보니 허풍쟁이 삼류에 어설픈 마초근성을 드러내다가 망신을 산다. 마초의 법칙은 대놓고 비웃음을 당한다. '상황논리에 맞게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숫컷의 법칙을 따르라' 블라블라는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받는 것이다.
아 그러게 폼만 그럴 듯하면 뭐하냐고... (그래도 넘 예뻐, 킬리안! ㅠ.ㅠ)
'그녀'가 눈부신 방어자이자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폭력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폭력의 희생자와 다른 점은, 그녀가 단지 폭력의 '희생자'(Victim)가 아니라 '생존자'(Survivor)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존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 폭력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다시는 희생자가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것이, 그녀가 다시 닥친 일생 최대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고 다른 이의 목숨까지도 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참으로 눈부시게, 킬러가 초라해보일 정도로, 고난을 이겨낸다. 너무 쉽다 싶을 정도로.)
여기서 또다시 재미있는 것은 딸을 욕망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욕망을 느끼는 딸의 관계, 이른바 프로이트적인 아버지-딸의 고착은 스크린 안과 밖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호러영화의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고 새로운 여성성을 부여해준 존재가 B급 호러 영화의 대부, 즉 '아버지의 권위를 가진 자'인 웨스 크레이븐이다. 스크린 안에서, 다 큰 딸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은 '포악한 아버지'(브라이언 콕스, <트로이>에서 아가멤논을 연기한 바 있는 그는 이제껏 너무나 자주 '포악한 아버지'를 연기해왔다)가 아니라 그녀 또래의 미성숙한 젊은 남자 잭슨(킬리언 머피, 뭇 젊은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게스모델 출신의 '예쁜' 남자배우)이다. 이 영화의 갈등구도는 마치, 딸이 데려온 남자친구를 번번이 트집잡아 싫어하다가 딸이 마침 남자친구와 문제가 생기자 '거봐, 내가 뭐랬냐'라고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하며 딸을 위로하는 아버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그녀 주변인물들은 이러한 딸에 대한 아버지의 욕망을 온통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뿐이다. 딸보다 어린 남자는 '연필을 잃어버리고 당황하는' 바보일 뿐이고, 딸의 친모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그 친모의 친모는 막 죽었으며(그녀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딸의 어머니 세대의 다른 여성은 그녀의 호의를 입었으면서도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희망도 되지 못하고 실망만 끼친다. (그녀의 호의로 전달된 '책'은, 나중에 그녀의 SOS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매개가 됨에도 부주의하게 분실되어 악당의 손으로 들어간다.) 반면 여전히 사회적인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자신의 가족을 단단히 보호하는 것은 아버지 또래의 남자, 키프 의원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딸은 아버지를 구하고 아버지는 딸을 구한다. 딸에 대해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여전히 고착된 딸의 이상한 근친관계가 더욱 강화된다. 그들 부녀 사이에 이제는 아무도 (아무것도) 쉽게 끼어들 수 없다.
유사) 아버지와 딸 - 아버지의 새로운 후계자이긴 한데... 실은 영화 속 아저씨는 웨스 크레이븐 감독.
아버지는 비리비리한 아들 - 여전히 남성적 권위를 지탱해주는 사회 제도와 법에 기대어 정작 그 자신의 주체는 나약할 대로 나약해져버린 아들 - 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게임을 치르고 그 누구도 돕지도 돌봐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살아남아 자기 혼자 훌쩍 선택해버린 딸을 선택했다. 이는 어쩌면 앞으로의 세상이 아들이 아닌 딸들의 것이 될 것이라 예감한 아버지의 '약삭빠른' 지분거림일 수도 있고,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폐기당한 것은 아닌 아버지의 권위로 승인한 것일 수도 있다. <나이트 플라이트>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갖는 의미는 이것이다: 아버지는 호기롭게 딸을 승인한다. 딸을 통해 구원받은 아버지의 보상은 자랑스러운 딸에 대한 인정과 승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부와 키프 의원, 둘 다에게서 인정을 받는다.)
기존의 신화구조에서 언제나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만 했다. 새로운 세대는 아버지 세대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딸 역시, 아들과 방식은 다를지라도,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자신을 살해하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아들이 두려워 후계자를 필요로 하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되도록 오래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는 존재로서 딸을 선택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받은 딸에게 굳이 아들처럼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 단계가 필요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또다른 방식으로든 뭐든 아버지를 극복해야만 하는 단계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 한 딸은 아버지 권력의 대리자, 즉 아버지를 제몸에 승화시킴으로서 구세대적 - 낡은 권력을 되도록 오래 지탱해주는 새로운 지지대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승인과 인정은, 아들이 아닌 딸의 가능성과 딸의 주체성을 인정한다는 '한 발 나아간' 진보에도 불구하고, 단지 아들이 아닌 딸을 자신의 '후계자'로 승인했을 뿐 여전히 자식에 대한 소유권과 그 자신의 권위를 과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굳건한 아버지의 권위'를 고수하며 자식에게 '아버지 살해'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앙시엥 레짐이다. (브루주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에게 추파를 보내는 귀족?) 여전히 이것이 웨스 크레이븐이 가진 (어쩌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그리고 이미 '아버지'가 된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ps. 2005년에 이런 글을 썼었다. 저 웨스 크레이븐과 레이첼 맥애덤즈 사진을 찾다가 오래 전에 쓴 이 글을 찾아냈는데, 논점은 그럭저럭 흥미롭게 잡아냈지만 도저히 손발 오글거려서 못 읽겠다. 하긴, 저 글 쓸 땐 나름 자뻑 상태였으니까 지금 손발이 오글거린다는 건 적어도 지금은 그때보다 나아졌다는 얘기겠지. 그러니 부끄럽지만, 새로이 갱신해 올려둔다. (원래 발행했던 날짜는 2005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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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eak Night. 영어제목도 맘에 든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을수록 시간이 더욱 쏜살같이 간다. 어릴 땐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른들이 “나이 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년씩 지나있다.”라고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몸과 마음과 환경을 옥죄는 감옥과 족쇄가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하루는 너무 길었다. 왜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은 많은지. 무엇을 하라는 명령엔 그저 ‘공부 열심히 하라.’ 정도나 있었나, 대체로 ‘하지 마라.’라는 금지의 연속. 그러니 1년이란 길지 않은 시간이 <파수꾼>의 세 주인공 소년들에겐 긴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토록 서로 붙어 지내며 제일 친했던 친구들이 그렇게 갈가리 찢겨나가고 서로에게 최악의 상처들을 주고받은 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는 건 그 어떤 신파 이별 영화를 보는 것보다 슬프고 아팠다. 균열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했고 작은 오해와 작은 거짓말들이 이 균열을 걷잡을 수 없을 정도까지 키웠다.
<파수꾼>은 소년들의 성장기와 우정을 다루는 영화들이 으레 묘사하고 따르는 ‘남자들만의 질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힘과 주먹을 향한 동경을 강조하거나, 남자아이들끼리 모여 포르노를 보면서 우의를 다지고 서로 일탈 행위의 ‘공범자’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집단을 공고히 하거나, ‘남자들만의 의리’가 가장 끈끈하고 강한 것인 양 허풍을 떨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존에 답습돼 온 소년 성장물의 공식을 아무렇지 않게 날려버리거나 비튼다. 영화가 오히려 집중하는 것이 이 소년들의 관계가 어떻게 작은 거짓말과 순간의 욱하는 마음으로 그토록 쉽게 어그러지는가이다.
학교의 ‘짱’인 기태는 주먹과 힘, 권력에 대한 동경보다는 ‘누구에게나 주목받고 관심 받는’ 데에 대한 갈망이 더 커 보인다. 베키에게 주먹질을 행사하는 것에도 응징과 보복의 의미보다는 ‘그렇게라도 말을 걸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 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척하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베키가 유일하게 그에게 ‘반응’을 보일 때가 기태가 주먹을 날리고 괴롭혔을 때이기 때문이다. 반면 매번 기태에게 맞기만 하고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으며 괴롭힘을 당하는 베키, 혹은 희준(박정민)에게는 피해자 특유의 움츠러듦이나 공포, 무력감보다는 오히려 고행을 적극적으로 감내하려는 수도자들 특유의 굳건한 의지가 보인다.
서로 짐짓 여유를 가장하고, 상대를 탐색하며, 잽을 날린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런 면에서 주먹질을 행사하며 패거리를 불러모아 베키를 괴롭히는 기태만큼이나, 기태를 대하는 베키의 태도에서 더 무섭고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한 구석이 있다. 마음을 닫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주먹질의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이 아이러니. 하지만 이것은 물리적 폭력에도 이유가 있다는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손쉽게 물리적 폭력을 쓰는 것이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은지를 드러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 기태는 참 나쁘고 한심하면서도, 불쌍하고 안쓰럽다. 기태의 어리석음이 심지어 자신을 유일하게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친구 동준을 향해서도 발휘될 때도, 그리하여 결국 동준까지도 기태에게 등을 돌릴 때도, 기태가 더없이 한심하게 여겨지면서도 기태의 그 상실감과 절망에 오롯이 감정 이입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 친구의 우정이 유지됐던 것도 철없고 어리석은 기태에 대해 베키와 동준이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딱 그 한도까지였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쩐지 이런 풍경이, 낯설지가 않다. 그렇게 서로 깊이 신뢰하고 우정을 나눴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쉽게 오해하고 마음을 져버리나, 싶었지만 돌아보면 나도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누군가를 내치기도, 의절하기도 했다.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뒷담화를 하고, 누군가랑 감정의 날을 세우면서 일부러 그가 가장 상처받을 만한 말을 골라서 하고(가까운 사이일수록 그가 무엇에 가장 상처받을지 잘 알고 있다!), 때로는 거짓말로 상대의 속을 긁는 ‘공작정치’를 하고.... 학창시절은 물론 사회에 나와서도, 피해자로서뿐 아니라 가해자로서도. 다만 나이를 먹으면 이런 걸 ‘기술적으로 조금 더 세련된 형태로’ 하게 될 뿐이다. 매 순간 누구에게 상처를 입고 누구에게 상처를 주면서, 대체로 자신을 이유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피해자로만 여기거나 정의를 행하는 공정한 심판관으로 착각하기 마련이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며 다른 이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상처를 주고 있으면서도 그게 상처주는 행위인지 폭력은 아닌지 성찰도, 인식도 못 하는 게 일반적이기도 하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이렇게 영화를 통해 보기만 해도 모든 것의 양면이 보다 넓게 눈에 들어오는데, 정작 자신의 일이 되면 제대로 보질 못하는 게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리고는 상처받고 울고, 분하고 억울하다고 울고, 죄책감과 고통에 운다.
이랬던 아이들인데...
영화 속의 아이들이 아직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아이들’이지만, 스크린 밖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는 내가 그들보다 정말 어른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만약 내가 기태의 상황이었다면 과연 베키의 마음을 돌릴 다른 방법을 제대로 찾아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베키를 잃고 그냥 “나도 너 싫어”라며 등을 돌렸을까. 내가 기태였다면 과연 베키에 대한 내 진심을 제대로 전할 수 있었을까. 극장을 나오면서 이 아이들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무너져 내리는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 어쩐지 부끄러웠던 이유다.
ps. 이 글은 지난 3/21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내 독립영화kmdb 페이지 독립영화 초이스 란에 실렸다. 원문은 여기.
ps2. 요즘 떠오르는 섹시 미중년 조성하 님하가 나온다. 이분은 극에서 맡은 캐릭터에 따라 미친 존재감을 마구 드러내실 때도 있지만 <파수꾼>에선 말하자면 세 친구의 사연으로 관객을 안내하는 '가이드'이자 죽은 아이의 아버지기 때문에 세 젊은 배우 뒷편으로 조금 물러나 이 캐릭터들의 불안하고 방방 뛰는 혈기를 밑에서 쫘악 안정적으로 잡아주신다. 난 사실 이분과 같이 술도 마신 적이 있다, 작년 전주영화제 <그녀에게> 상영 뒷풀이장소에서. 화면과 별 다를 바 없으시다. 잘생기셨고 인상도 좋으시고 목소리도 좋고 진지하시다. 다만 눈빛은 조금 무서웠다. 마치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빛, 그래서 괜히 움찔하게 되는 눈빛이어서. <그녀에게> 리뷰는 여기.
ps3. 여기저기 이제훈 찬양이 넘쳐나더라. 확실히 이제훈은 차세대 '스타'감으로서의 아우라가 있다. 그래서 <고지전>도 기대. 하지만 서준영과 박정민도 꽤 좋다. 사실 <파수꾼>에서 나는 서준영의 연기가 제일 좋았다. 제일 뭐랄까, 자연스럽고 능글맞아서. 앞으로도 스타쪽보다는 어느 캐릭터든 다른 배우들과 잘 어우러지며 케미스트리를 잘 만들어내는, 무슨 장르의 영화에 출연해도 다 일정 이상 해내는 재주꾼 배우가 될 것 같다. 박정민은 정말 일생일대 캐릭터 하나 잘 맡으면 그걸로 연기파로 바로 굳어질 것 같은 느낌. <파수꾼>에선 좀 뻣뻣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신인이니까.
ps4. 박정민 글솜씨가 굉장히 좋다. 읽다보면 빵빵 터진다. <파수꾼> 블로그의 '귀여운 베키의 일기' 코너는 맛뵈기. 내가 이 친구 블로그를 찾았었는데 주소를 어디 뒀더라...
ps5. 6월 하순에 2만명 돌파했다. 장하다. 하지만 난 사실 10만명은 들 줄 알았...던 건 아니고. 그렇게 들기를 바랐다. 사실 옛날 같으면 들 수도 있었을텐데 요즘 시절이 하 수상해서 사람들이 영화를 안 보니까.
ps6. 감독님 인터뷰 하는 날 영화를 두 번째로 봤었는데, 그러느라 서교동으로 옮긴 이후의 필름포럼을 처음으로 가봤다. 뭔가 좀 대형 비디오방 같은 느낌;;;이었지만 교통편도 좋고 하니 앞으로도 자주 가게 되지 않을까. 우리집에서 버스로 한번에 20분이면 간다. 인터뷰 했던 거는 조만간 여기에 올릴 예정. 그리고... 오랜만에 영화 한 번 더 보고프다.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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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테일러 우드 | 존 레논 비긴즈 - 노웨어 보이 Nowhere Boy (2009) - 2010/12/10 20:48
존과 미미의 관계가 전형적인 '반항하는 아들-엄격한 어머니'의 관계로 그려진다면, 존과 생모였던 줄리아의 관계는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하고 있듯 거의 준-연인처럼 보인다. 영화에 다소 뜬금없이 삽입됐던 여자친구와의 섹스씬도 실은 어머니에 대한 존의 강렬한 욕망을 설명하는 씬처럼 삽입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이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니 넘어가기로 하자. 사실 존 레넌의 어린 시절에 대해 자세히 알려지기 전에도, 혹은 청소년 시절의 존에 대한 전기작가들의 책이나 이런저런 증언들이 다소 엇갈리는 와중에도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지적됐던 것은, 생모인 줄리아의 죽음이 당시 17세였던 존 레넌에 얼마나 큰 충격을 끼쳤느냐 하는 것이다. 존은 엄마의 죽음 이후 더욱 '삐뚤어'졌다고 하며, 성인이 된 이후에도 어머니에 관한 곡을 여러 곡 작곡했다. 자신의 큰 딸에게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 '줄리아'라는 이름을 주기도 했다. 5살 이후 떨어져 살며 항상 그리워했던 엄마, 자신을 버린 후 남편과 아이들과 잘 살고 있던 엄마, 그리고 자신을 버리게 된 이유를 알게 된 후 실컷 미워할 새도 없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애증과 욕망이 존 레넌의 정신세계와 음악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게, 이 영화의 주장이기도 한 셈이다.
기실 이 영화는 존의 이부동생(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동생)인 줄리아 베어드가 존 레넌에 대해 쓴 책에 기반하고 있는 만큼, 존의 어머니 줄리아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생생하다. 게다가 줄리아를 연기한 앤-마리 더프(제임스 맥어보이의 부인이기도 한)의 연기가 너무도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워서, 영화의 주인공인 존 레넌보다도 줄리아 레넌에게 더 시선이 쏠릴 정도. 사실 부모가 헤어져 친척 손에서 자라며 사무치도록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존의 성장환경이란 게 평범하다곤 할 수 없지만 그렇게까지 드문 일도 아닌 만큼, 소년 존이 아무리 어머니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해도 이것이 그렇게까지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줄리아의 인생은 영화에서 대체로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제시되기 때문에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오히려 이렇게 간접적으로 드러난 줄리아의 인생이 존의 결핍된 성장시절보다 훨씬 비극적으로 느껴지며 강렬한 관심을 끈다.
영화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그녀는 모든 뮤지션과 모든 노래를 알았고(당시 영국에는 제대로 소개되지도 않았던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조차도), 그 어떤 젊은 아들 또래의 아이들보다도 열정적으로 로큰롤과 춤을 즐겼으며, 자유분방하고 삶의 유머와 즐거움을 사랑하는 낙천적이고 쾌활하며 사랑스러운 매력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다. 게다가 밴조도 잘 연주했고(존은 엄마에게서 밴조를 배웠다) 노래 솜씨도 뛰어나서, 존의 천재적인 음악성은 바로 줄리아의 유전자로부터 비롯됐다고 여겨질 정도다. 그러나 자유분방하면서도 언제나 사랑에 목말랐고, 그래이 대중적인 스타 뮤지션이 되었다면 차라리 행복했을 그녀는 자신의 음악적인 재능을 펼칠 기회를 갖지는 거의 못했던 것 같다. 매사 단정하고 엄격하며 고상한 미미와 그런 미미를 대하는 줄리아의 모습을 볼 때, 어릴 적부터 언니에게 위축감을 느꼈으며 언니에게 주로 가는 부모의 관심을 붙잡기 위해 끝없이 재롱을 떨거나 사고를 치는 캐릭터였을 거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영화에선 그녀가 종종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암시되는데, 아마도 음악적 재능과 함께 자유분방하고 쾌활하며 열정적인 성격 양쪽이 모두 심각하게 억압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생기발랄하고 쾌활하며 남의 눈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모습과, 그 뒤로 얼핏얼핏 비치는 어두움이라는 양면성, 그 양면성을 매우 흥미롭고도 매력적으로 그려낸 앤-마리 더프의 연기 덕에 사춘기를 통과하며 마음고생하는 존 레넌보다 줄리아 레넌이 훨씬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러한 그녀가 음주운전 중이었던 비번 순경의 차에 치여 때이르게 세상을 떠났던 건 그 자신에게나 평생의 결핍감을 안겨받게 될 존 레넌에게나 공히 불행한 일이다. 다만 다행인 건, 죽기 전 그녀가 결국 엄격하고 그녀에 대해 '우월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던 미미의 사과를 받고 화해를 했다는 것 정도.
전세계에 '비틀즈식 헤어스타일과 패션'을 전파했던 이 비틀즈 우두머리의 리더인 존 레넌이 '앨비스 프레슬리식 머리와 버디 홀리식 안경'을 하고 아직 소년과 청년의 과도기를 헤매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전설'로 남은 천재 뮤지션이 아직은 어리고 연약하며 미숙하고 반항하는 평범한 10대 청소년의 모습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참으로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이 영화에서 얻은 가장 큰 즐거움과 감동은, 세상에 그 천재 뮤지션을 내보낸 너무나 매력적인 여자, 어쩌면 존 레넌보다도 더 천재였을지 모르나 제대로 기회를 받지는 못한 채 평생 굴절된 삶을 살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줄리아 레넌과, 이름조차 변변히 알려지지 않았던 그녀에게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어 비로소 '줄리아 레넌'이라는 인물로 존재하게 만든 앤-마리 더프라는 탁월하고도 매력적인 배우의 발견이다. 따라서 내게는 이 영화가 원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노웨어 보이'가 아닌 '노웨어 걸'에 대한 영화로 남게 될 것 같다.
ps. 앤-마리 더프는 제임스 맥어보이의 9살 연상 부인. 맥어보이는 인터뷰에서 "배역 선택에 있어 아내가 항상 큰 도움을 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제임스 맥어보이의 영리하면서도 인상적인 캐릭터 선택의 많은 부분이 앤-마리 더프의 식견으로 보인다. 곧 개봉할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 매우 기대되는 건, 이 매력적이고 연기 잘 하는 부부가 나란히 동반출연하는 첫 영화이기 때문.
ps2. <킥애스> 때만 해도 어벙하고 귀여운 소년이었던 아론 존슨이 이 영화에선 장성한 청년이 됐다. 외모나 연기나 매력은 분명 있는데, 캐릭터 자체가 아직은 미숙하고 어린 청소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옆에 앤-마리 더프나 크리스틴 스콧-토마스 같은 후덜덜한 연기를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좀 짜쳐 보인다. 하여간 이 영화를 만들면서 아론 존슨은 23살 연상의 감독과 눈이 맞고...
ps3. 솔직히 영화가 그렇게 맘에 든 건 아니었다. 뭐 그 정도 굴절된 사춘기와 성장환경이야 세상에 쎄고 쎈 사연인데, 그 사연을 엮는 영화의 방식이란 게 좀 나이브하다. 게다가 줄리아 레넌이 저렇게 부각됐다는 건, 워낙 앤-마리 더프가 잘해서이기도 하지만 감독이 영화의 방향을 뚝심있게 끌고가지 못했다는 얘기기도 하다. 존 레논의 성장시절과 줄리아 레넌의 숨겨진 역사가 다소 따로 노는 느낌.
ps4. 그러나 역시, 귀는 즐겁다. 50년대 로큰롤 명곡들이 줄줄이, 배경음악으로 혹은 존과 그 무리들이 카피하는 연주곡으로 나온다.
ps5. 레코드 가게에서 훔쳐온 음반들이 다 재즈라고 강바닥에 버리는 장면을 보며 "아니 이것들이? -_-+"라며 쌍심지를 키우려던 찰나, 지나가던 미국인 단역의 주옥같은 말씀에 마음이 풀어졌다. "어떤 음악이든지 강바닥에 버려지기에 마땅한 레코드는 없다." 하긴 존 레넌에게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의 음악을 알려준 귀인이 아닌가. 이 사람도 알고보면 유명한 사람이라던가... 아니면 감독의 친한 배우 누가 카메오를 해줬다던가... 하는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은데.
ps6. 10대 폴 매카트니로 토마스 생스터가 나온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꼬마 천사였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다니... 왜 이런 모습으로 컸다니...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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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댄스, 슬램댄스, 그리고 한국의 독립영화제들 - 2010/12/09 04:11
지난 11월 23일, 선댄스영화제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2011년 선댄스영화제의 변화를 예고하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글이 실렸다. 새로이 ‘다큐멘터리 프리미어’ 섹션이 신설될 것이라는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정작 내 눈을 끌었던 건 레드포드가 선댄스재단의 창작자 지원의 원칙과 정신을 다시 한 번 강조한 부분이다. “우리가 창작자들을 지원하는 기준근거는 ‘시장에서의 잠재성’이 아닌 ‘창조적인 장점’이다.” 올해 영화제의 기자회견 때 레드포드가 “뿌리로 돌아가겠다”고 강조했던 것은 빈 말이 아니었다.
선댄스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사실 선댄스영화제는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거대해졌다’는 비난을 이미 90년대부터 지겹도록 들어왔다. 미라맥스를 비롯해 미니스튜디오를 지향하던 중소배급사들은 물론 때로는 거대 스튜디오들까지 선댄스에서 판권경쟁을 벌였던 만큼, “이제 선댄스에는 헐리웃에 간택되기 위해 적당히 말랑하고 적당히 이색적으로 만들어진 보수적인 영화들만 판친다”는 불만과 비난이 공공연했다. 선댄스가 배출해낸 무수한 감독들이 선댄스에서의 수상을 자산삼아 헐리웃에 진출해 블록버스터를 만들고 ‘주류’ 감독들이 되면서, 한동안(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선댄스는 ‘헐리웃으로 가기 위한 급행 티켓’으로 작용했던 게 사실이다. 그 와중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슬램댄스영화제를 위시해 무수한 작은 영화제들이 ‘안티 선댄스’ 혹은 ‘선댄스의 대안’을 표방하며 속속 생겨났다. 문댄스, 랩댄스, 트로마댄스, 노댄스, 디지댄스, 엑스댄스, 슬램덩크… 이제는 유야무야 잊혀져버린 영화제도 많지만, 선댄스와 같은 시기, 바로 그 파크시티에 열리며 선댄스에 대항했던 슬램댄스영화제의 경우 16년의 역사를 거쳐 이제 선댄스 못지않은 인기와 규모를 누리는 안정적인 영화제로 성장했다. (참고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슬램댄스 출신이다.)
그러나 선댄스를 통해 선보이는 영화들은 여전히 흥미롭고 독창적이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원스>는 새로운 뮤지컬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음악영화의 신기원을 개척했고,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베리드>는 단 한 명의 배우를 출연시켜 오직 관 속에서 촬영을 감행했다.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선댄스의 명성에 혁혁한 공을 세워온 다큐멘터리들 역시 다양한 소재와 영화미학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하며, 선댄스에서의 수상을 경력삼아 극장에서 정식으로 개봉하기도 한다. 많은 감독들이 선댄스나 슬램댄스를 통해 여전히 헐리웃행 티켓을 움켜잡지만, 또한 많은 감독들이 여전히 저예산의 독립영화들을 자신들이 했던 방식대로 만들며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다.
2010 서울독립영화제 포스터(왼쪽)과 개막작인 도약선생 중 한 장면
선댄스가 슬램댄스의 도전을 받고 안팎의 비난을 받으며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과 달리, 한국의 독립영화제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독하며, 자본을 경계하고 권력에 대항하며 싸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비난을 받고 표적감사를 당하는가 하면, 지원이 중단되고 탄압을 받는다. 인디포럼은 석연찮은 이유로 ? 촛불시위에 참가한 단체라며 ? 고작 천만 원에서 천오백만 원 남짓 받던 영진위의 단체지원을 작년과 올해 계속 받지 못했다. 서울독립영화제는 저들의 ‘적’으로 지목돼 표적감사를 당한 한독협이 주관하는 행사라서 올해 영진위와 서울시로부터 지원을 중단당했다. 이 와중 인디포럼과 서울독립영화제가 사랑하고 상영했던 독립영화 몇 편이 G20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영화제에 납치될 뻔했다가 ‘물.건’으로 낙인 찍히기까지 했던 에피소드는 웃지 못할 코미디의 절정이기도 했다.
상업화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영화제의 도전을 받았던 선댄스. 그리고 상업적이지 않아서, 상업화를 경계하고 권력에 대항하느라 비난을 받는 인디포럼과 서독제. 어쩌면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매우 행복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도 모른다. 인디포럼이나 서독제 같은 영화제가 여전히 독립영화들의 정신을 지지하고 그 정신을 오롯이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 스스로의 건강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인디포럼과 서독제가 그 맵고 독한 독립영화의 정신을 언제까지고 잃지 말기를. 9일 개막하는 서독제에서 만날 새로운 영화들을, 나는 오늘도 가슴 두근대며 기다리고 있다.
ps.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독립영화DB 웹진 페이지에 기고한 칼럼.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ps2. 마침 서독제 개막식 전날 글이 발행되어 다행이다. 영상자료원 쪽에서 센스있게 날짜를 맞춰주셨다.
ps3. 애초 이 칼럼을 쓰고자 결심했던 게 저 'G20성공기원영화제'의 영화납치사건 때문이었다. "차라리 너무 상업적이라 비난받았던 선댄스가 부럽다"는 자조와 삐딱한 비아냥이 들었던 건데,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선댄스와 슬램댄스를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 서독제와 인디포럼에게 너무 감사해야 할 일이더라. 그래서 마지막 문단이 참 힘들고 어렵게 나왔다. 어쨌든 서독제 개막하는 시점에 서독제에 대해 쓰고 개막식도 한 번 더 강조하게 된 셈이라 차라리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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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1989, 수미다의 기억>은 1989년 이른바 ‘수미다 투쟁’을 소재로 한다. 일본에 본사를 둔 수미다전기는 70년대 마산 수출자유지역에 공장을 설립하고 한국수미다전기를 운영했으나, 1989년 10월 14일 일방적이고 기습적으로 공장 도산 및 노동자 전원 일괄 해고를 통보한다. 그것도 고작 네다섯 줄이 적힌 팩스 한 장으로 말이다. 450명의 수미다 노동자들은 곧바로 농성을 시작했고, 노조대표 네 명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에 있는 본사 앞 길바닥에서 투쟁을 벌인다. 이 싸움은 238일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때 어떤 사건이 있어 왜 싸우게 됐는지, 그 결과 어떻게 되고 무얼 얻었는지 기록하는 데에 전력하는 영화는 아니다. 사건을 모르기 십상인 지금의 젊은 관객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으니 기억하라”고 강요하거나 당시 그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요란하게 찬양하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은 당시 싸웠던 이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현재’의 문제다. 이들은 그때의 경험으로 어떻게 바뀌었는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래서 이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20년 전 원정투쟁 당시의 모습을 담은 영상과 이들의 현재의 모습이 계속 교차하면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진정한 승리란 과연 무엇인가”이다. 물론 수미다 투쟁은 (지금까지도) 드물게 외자기업 본사와의 합의에 도달한 ‘승리한 투쟁’으로 기록된다. 일본의 통상적인 쟁의 관례를 깨고 처음으로 합의문에 사측의 공식적인 사죄가 기록됐으며, 10월 14일의 해고통보가 무효화되면서 교섭 타결 바로 전달(1990년 5월)까지의 임금과 퇴직금, 퇴직위로금 등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한 언론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승리 거둔 처녀 노동자들”이라는 헤드카피를 뽑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성과’만으로 진정 승리했다 말할 수 있을까? 결국 공장은 결국 문을 닫았고 수미다 노동자들은 대책없는 일자리 찾기를 위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는데 말이다. 원정투쟁을 갔던 네 명은 이후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곳에 취직하기도 어려웠다. 일부는 전업활동가가 됐고 또 일부는 전업주부가 되거나 보험설계사가 됐다.
수미다 투쟁이 진정 ‘승리’로 기록될 수 있는 이유, 투쟁이란 이미 시작한 그 자체만으로 성공인 이유가 바로 이 영화 안에 있다. 수미다 투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 싸움을 계기로 스스로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싸우던, 혹은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까지 변화시켰다. 영화는 수미다 원정투쟁을 갔던 네 명 외에도, 그 싸움에 함께 하고 지지연대를 했던 일본인 활동가들에게 상당한 비중을 할애한다. 수미다 동지들이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민중가요와 투쟁가를 부르며 그에 맞춰 율동을 하는 모습에 매혹된 이들 일본인 활동가들은 수미다 투쟁이 끝난 후 변화를 겪었고 또한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 모습이 고스란히 이 영화에 담겨있다. 투쟁승리집회에서 한 일본인 활동가가 “’축하한다’는 말 대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머리를 숙여 “아리가토 고자이마스”라고 인사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숱한 ‘감동적인 장면’ 중에서도 최고다.
발레오공조 노동자들이 4차에 이르는 프랑스 원정투쟁을 비롯해 1년 넘게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현재, 이 영화가 더욱 소중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다. 어쩌면 지금 당장은 죽도록 힘들고 결국 '패배'할지는 몰라도, 그 투쟁은 결코 실패도 패배가 아닐 거라는 나직한 위안과 격려가, 이제는 40대 아줌마이자 엄마가 된 '수미다 언니'들의 호탕한 웃음 안에 있다. 한 알의 밀알은 단지 뿌린 한 곳에서만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다른 여러 곳에서도 동시에 싹을 틔우고 잎을 낸다는 사실을 생생히 증언하는 영화가 바로 <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이다.
다만 한 가지,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슬프고도 무서운 점이 하나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수미다 때처럼 똑 같은 이유로 고통당하며 싸워야 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거? 나아가 필리핀 필스전 사건에서도 드러나듯 한국의 기업들 역시 지금 필리핀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곳곳에서 과거 일본 수미다가 저질렀던 것보다 더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거? 아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ps. 서울독립영화제2011 프리뷰 - 네오이마주 송고. 원문은 여기.
ps2. 이 영화는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극장개봉 여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니 모두들 일단 서독제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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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아줌마 감독들! - 2010/12/03 04:36
레인보우, 혹은 '행인 3'
그녀의 영화가 전주영화제에도 초청됐단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영화를 곧 보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이후 몇 번이나 그녀와 마주쳤고, 명함과 전화번호와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인디포럼에서도 전주영화제에서도, 심지어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에서 상영될 때도 나는 <레인보우>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날, <레인보우>가 극장서 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선입견이 좀 있었다. 일단 ‘레인보우’라는 다소 ‘말랑한’ 제목에서부터 아줌마 감독의 좌충우돌 이야기라는 설정만으로 “대충 어떤 영화일지 감이 잡힌다”고, 감히 건방진 편견을 가졌다. 언론시사로 드디어 <레인보우>를 보러 갔던 날,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빌었다. 제발 이런 류의 영화들이 반복하는 그 상투적이고 허무맹랑한 거짓위로와 희망으로 끝나는 영화가 아니기를. 그런데 내 바람 그대로, <레인보우>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가 끝난 뒤, “소품이긴 해도 생각했던 것보다 참 귀여운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한동안 <레인보우>를 봤던 바로 그 날, <레인보우>를 보기 직전에 본 어떤 영화의 강렬한 이미지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며칠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또 한 주가 지나는데, 언제부터인가 전혀 생각지도 않게 <레인보우>의 그 뚱한 고기주의자 아줌마 지완이 생각나기 시작한 것이다. 개미공포에 시달리며 비명을 지르던 모습, 사무실 바닥에 누워 쪽잠을 자던 모습, 독설을 날리던 프로듀서한테 화를 내다가 마지막 고기 한 점을 기어코 뺏어먹던 모습, 그리곤 깻잎에 그 고기를 싸서 그 프로듀서에게 휙하니 내밀던 모습. 인디밴드를 만난 첫 자리에서 대놓고 “너무 겉멋부리는 거 아니에요?”라고 직설법으로 묻던 모습. 후배감독의 촬영장에서 단역을 맡아 주연배우한테 계속 뺨을 맞다가 결국 울면서 폭발하던 모습. 그리고 퉁퉁 부은 뺨을 한 채, 그녀를 똑 닮아 뚱하기 짝이 없는 아들의 방에 슬며시 이펙터를 선물로 놓고 나가던 모습. 그런데 또 이상하다. 그런 장면들 때문에 입에선 계속 비실비실 웃음이 나는데, 눈은 자꾸 축축해지고 뜨거워지는 거다.
새삼 영화에서는 별로 보여주지 않았거나, 슬쩍 깔아두기만 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의 눈치 따위 안 보고 오로지 자신의 영화만을 생각하는 듯했던 그녀는, 사실 얼마나 보이지 않는 눈들과 힘겹게 싸우고 있었던 걸까. 설거지 따위 아무리 쌓여도 아무도 절대로 대신 해주지 않는 집에서, 실은 얼마나 틈틈이 집안일을 열심히 하고 또 얼마나 자주 “아줌마가 가족과 살림도 다 내팽개치고 밖으로 싸돌아다닌다”는 비난과 직면했던 걸까. 그러고보니 이 영화의 첫 시작장면도 그녀가 찌개를 끓이는 장면이 아니었던가. 무뚝뚝한 아들과 그렇게 친구처럼 지내기 위해서 그녀는 또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던 걸까. 나는 고작 일곱 살 아래 막냇동생하고도 그렇게 친근하지 못한데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요구된 시간 내에 요구된 수정본 시나리오를 착착 뽑아내는 참 성실하고 근면한 직업윤리를 가졌다.
'개미공포'에 시달리는 지완. 본인은 괴로웠겠으나 보는 사람은 솔직히... 웃겼다.
새삼 우리 사회에서 3, 40대 아줌마들이 꿈을 꾸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생각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한 발 한 발에는 또 얼마나 무시무시한 투쟁들이 필요한가. 20대들에게는 ‘88만원 세대’라며 좌절된 꿈에 대한 뻔한 립서비스의 위로라도 몇 마디 건네지지만, 3, 40대 아줌마들에겐 마치 그런 꿈조차 대단한 사치라는 듯, 아예 꿈 자체를 부정당하기 일쑤고, 그녀의 노력보다는 가족의 특별한 지지와 ‘허락’에 더 관심이 집중되기도 한다. 게다가 아내/엄마의 꿈을 지지한다던 가족들은 또 얼마나 쉽게 지쳐 나가떨어지는가. 예컨대 가사노동을 분담하기도 싫고 가사노동의 혜택도 포기하기 싫어하며 ‘엄마의 이기심’을 탓하기 십상 아니던가. 그렇다고 꿈과 소망이 순조롭게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도 지완은 용케도, 그리고 ‘감히’ 꿈을 꾸며 또 계속 그 꿈을 위해 ‘감히’ 노력하고 있었다. 사실은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던 거다.
세상의 모든 아줌마 감독들을 위하여
며칠 전 서독제 사전감독모임에 갔다가 박정숙 감독을 만나 <동백꽃 아가씨>가 극장에서 개봉할 무렵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아줌마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외로운 일인지에 대한 고백에 이르렀다. 너무나 힘들어서 한때 영화를 접을까도 생각했었다는 얘기, 부산영화제의 어느 술자리에서 류미례 감독과 손을 맞잡고 “우리 아줌마 감독들은 특별히 더 힘을 내야 한다”며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 그리고 ‘밖으로 도는’ 엄마를 섭섭해하는, 아직은 어려 엄마를 이해하지는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얘기 등등. 박정숙 감독에게서, <레인보우>의 지완의 모습이 보였다. 고통이나 고생이나 힘든 것도 그렇지만, 단연코 ‘외로움’이 참 짙어보였다.
“꼭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 카메라를 놓지 못하는 것은 지완이나, 지완을 만들어낸 신수원 감독이나, 박정숙 감독이나 다르지 않다. 박정숙 감독이 <동백꽃 아가씨>를 만든 것도 이제껏 한센인과 그들의 투쟁에 대해 몰랐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워서였다고 했다. 그 부끄러움 때문에 카메라를 들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꼭 하고싶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가슴에 품은, 꼭 하고 싶은 이야기” 때문에 카메라를 놓지 못하는 건 6년만에야 신작 <아이들>을 내놓을 수 있었던 류미례 감독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뜨문뜨문 작품들을 내놓는, 다른 여성감독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첫사랑 1989 - 수미다의 기억〉 중 한 장면(왼쪽)과 류미례 감독의 〈아이들〉 포스터.
내게 이 ‘아줌마 감독’들이 소중한 건, 무엇보다도 나 역시 나이를 먹으며 아줌마가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 경우는 아직 부양할 가족도, 키워야 할 아이들도 없어 요구받는 의무가 훨씬 적기에 그네들만큼 힘든 여건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 2010년대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아줌마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꾸는 꿈이 나의 꿈이기도 하고, 그들의 현재가 나의 현재이자 미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아줌마 감독들에게 내가 느끼는 동지감과 연대의식의 정체다. 그네들이 카메라를 든다면 나는 키보드를 두드린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게다가 그네들은 언제나 다양한 소외된 이들에게, 참 못나고 평범하고 스스로 세상의 먼지 한 조각처럼 느껴지는 바로 우리에게, 이 세상이 떠들썩하게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냥 감독이 아닌 ‘여성감독’으로서 연대의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슬픔, 외로움과 상처, 때로는 부끄러움과 수치까지도 정직하게 보여줬다. 많은 남자감독들도 그렇지만 여자감독들, 더 좁히면 아줌마 감독들, 더더욱 좁히면 독립영화를 만드는 아줌마 감독들이 더욱 그랬다.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고, 한 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한 번 더 부끄럽게 만드는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그래서 그저 한 명의 영화관객에 불과한 나는, 우리시대 여성 독립영화 감독들, 아줌마 감독들에게 내 진심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탈탈탈 끌어모아 이 연서를 쓸 수밖에 없다. 당신들이 아니면 접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 당신들이 아니면 절대로 보지 못했을 영화들 덕분에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세상을 좀더 맑은 눈으로 더 열심히 보고, 더 열심히 생각하며, 한 번 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고. 그러니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고 외롭겠지만, 참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부탁인 건 알지만, 제발 다른 감독들보다도 더욱 힘을 내서 계속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온 힘과 마음을 다해 그 영화들을 사랑하겠노라는 조금 민망하고 부끄러운 약속과 함께 말이다.
ps. 네오이마주에 '서독제 특집 1탄'으로 올라간 글. 원문은 여기.
ps2. 손발이 살짝 오글거리지만, '연서'는 원래 고백의 편지고, 고백에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ps3. 원래는 <레인보우> 리뷰로 시작했으나... 사전감독모임에서 박정숙 감독님 이야기가 인상깊게 남아서, 쓰다보니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글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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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좀 보자, 毒립영화! - 2010/11/29 01:24
올해도 드디어 서울독립영화제(서독제) 시즌이 돌아왔다. 올해 서독제는 12월 9일부터 17일까지 9일간 상암CGV에서 열린다. 상영작은 모두 64편. 이중 초청작 20편을 제외한 단편 33편, 장편이 11편이 경쟁부문에서 상영된다. 모두 631편의 공모작 중 사전예심을 거친 작품들이다.
올해 서독제의 달라진 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두 가지는 첫째, 장소가 달라졌다는 점, 그리고 예산이 확 줄었다는 점일 것이다. 작년까지는 명동에 있던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렸지만, 인디스페이스가 작년 말 문을 닫으면서 상영장을 잃어버린 서독제는 결국 상암으로 향해야 했다. 또한 그간 영진위(1억 4천)와 서울시(6천)로부터 받았던 지원금을 올해 받지 못하게 되면서 예년보다 훨씬 줄어든 규모로 치러지게 됐다. 그러나 18일 홍대거리의 한 호프집에서 열렸던 사전감독모임에서 조영각 집행위원장이 말했던 것처럼, “예산이 없어도 (감독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예산이 없어도 영화제는 치러진다.” 다들 속으로는 울컥하는 숨을 삼켰을 테지만, 조영각 집행위원장이 올해는 영진위와 함께 치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참석자들 일각에서 자그마한 ‘환호성’까지 일었다. 비록 사전감독모임에서조차 참석자들(주로 상영작들을 연출한 감독들)에게서 회비를 ‘각출’해야 했을 정도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형편이지만, ‘파트너’ 자리를 스스로 내팽개친 채 표류하는 영진위와 차라리 잘 갈라섰다는 좌절 반 격려 반의 의미리라. 복잡다단한 뉘앙스의 한숨과 포기가 함께 묻은 환호성이라, 함께 지르는 입도 듣는 귀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獨立’만으론 안 돼, 毒해야 돼
예산이 줄고 규모도 줄었지만, 독립영화의 매운 맛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하다. 이건 무엇보다도 올해 서독제의 슬로건과 포스터에서 잘 드러난다. “毒립영화 맛 좀 볼래!”라는 커다란 슬로건이 박힌 아래, 독이 뚝뚝 흐르는 사과를 번쩍 치켜든 손이 포스터의 메인 이미지다. “이런 시기에 독립영화는 ‘홀로서는’ 것으로도 부족하고, ‘독한 맛’까지 내뿜어야 한다”는 것이 조영각 집행위원장의 설명이다.
올해 서독제 포스터. '獨立'만으론 안 된다, 毒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 영화제의 ‘얼굴’을 대표하는 개막작과, 영화제의 의지가 온전히 드러나는 ‘특별초청’ 부문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으리라. 올해 개막작은 윤성호 감독의 따끈따끈한 신작인 <도약선생>이다. 서독제에서 처음으로 상영되는 이 영화는 엉뚱한 계기로 장대높이뛰기를 연습하게 된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윤성호 감독 특유의 포복절도할 유머와 날카롭게 반짝이는 풍자가 여전히 살아있는 작품일 것이라 기대된다. 영화가 처음 상영되는 개막식 당일날이 돼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특별초청 부문의 주제는, 바로 ‘4대강’, 아니 ‘死강사업’이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공사로 파헤쳐진 채 비명을 지르고 있는 강과 주변 생태계의 모습들을 담은 작품들이다. 공사장을 기습점거한 환경활동가들의 싸움을 담은 작품도 있다. 각각 7분에서 24분까지 짧은 단편들이지만, 짧지 않은 여운을 남길 작품들로 보인다. 이밖에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 등 2개부문에서 수상한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와 김대승, 신동일, 강이관, 부지영, 윤성현 감독이 참여한 인권위원회 제작의 <시선 너머>, 게이들의 삶을 담은 <종로의 기적>, 장률 감독의 신작 <두만강> 등도 초청작으로 상영된다.
용산, 소수자, 그리고 우리들 삶의 섬세한 단면
경쟁부문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장, 단편을 막론하고 소재며 장르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용산을다룬 영화들 중 단순히 소재를 넘어 옹골찬 성찰까지 담아낸 영화들을 선정하느라 고심했다는 예심위원들의 총평이 인상깊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광주의 5월을 담은 영화들, 각종 상처와 폭력을 통찰하는 영화들, 그리고 우리사회 다양한 소수자들의 삶을 다루는 영화들. 충무로에서 만들어지는 주류 상업영화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우리 삶과 사회의 다양한 면들을 비추고 때로 우리의 소박한 삶을, 때로 우리의 감추고싶은 부끄러움도 비추는 독립영화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들이다.
인디포럼도 그렇고 서독제 역시 그렇지만,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의 사전감독모임에서 볼 수 있는 얼굴들은 20대 초반에서 50대 후반까지, 이미 여러 작품들을 내놓은 중견감독들과 이제 막 첫 단편을 완성한 풋풋한 신인감독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경력을 자랑한다. 사실 영화감독들 중에는 ‘수줍은’ 성격의 소유자들이 많고, 카메라 뒤는 익숙해도 카메라 앞에선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이 술 한 잔씩 걸치고 조금씩 입을 열다보면, 어느새 열렬한 수다쟁이들이 돼 있다. 원래 수다스러워서가 아니라, 특별한 공감과 감정이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섹션에서 상영되는 다른 감독들의 이야기, 영화를 찍으면서 겪었던 온갖 ‘모험담’들. 그리고 지향하는 가치들의 공통분모들. 그 와중에도, 다른 독립영화 감독들보다도 더욱 힘들게 영화를 만들며 그렇게 어렵게 신작들을 내놓은 소위 ‘아줌마 감독’들, 남들이 굳이 외면하려 애쓰는 가치들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패기만만한 감독들, 그윽한 눈으로 말은 아끼되 평범한 우리들이 감히 보기 어려워하는 곳을 직시하는 용기있는 감독들이 우리 눈앞에 있다. 길거리에서 마주친다면 그 평범함에 쉽게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 속에 뜨거운 불꽃을 꽈악 잡고 있는 이 사람들. 그리고 웬만한 매체들의 기자들이 그냥 넘어가는 이 자리에 굳이 참석해 감독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수의 특별한 영화글쟁이들. 기자를 (타의로) 그만두고도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이 내게는 참 다행이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당신을 깨울, 약이 되는 독을 품은
모임에 참석한 감독들이 앞에 나와 하나같이 “상영할 기회가 없었는데 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있게 돼 기쁘다”는 말로 인사말을 전했다. 한 해만 해도 무수한 독립영화들이 만들어지지만, 극장개봉의 기회를 잡는 영화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 두어 번의 상영기회와 ‘관객과의 대화’를 갖는 영화제에서의 상영이, 지금 독립영화 감독들이 가장 지향하는 무대일 가능성이 크다. 상영기회가 흔치 않은 독립영화의 현실에서 서독제가 갖는 의미와 중요함이 그 어떤 말로도 충분히 설명되기 힘든 건 이런 데에서 드러난다. 그건 영화를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 앞에 평소 보기 힘든 무려 64편의 진수성찬이 차려진 영화 밥상이 놓였다. 어느 영화제가 안 그렇겠냐마는, 오늘(24일) 꽤 늦은 시간 한독협 사무실에 전화해보니 다들 영화제를 준비하느라 야근중이다. 독하디 독한 독립영화, 어쩌면 이전의 나를 쓰러뜨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강력한 독을 잔뜩 품고있는 이 영화들. 기꺼이 극장에 달려가 봐야 하는 이유는 내가 매조키스트여서가 아니다. 지극히 달달한 맛들로 마비된 감각을 깨워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만들, 약이 되는 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ps. 네오이마주에 송고한 글. (2010/11.24) 원문페이지는 여기. '에디터'로서 처음 쓴 글...일 게다. 그 직함 단 건 벌써 몇 달인데.
ps2. 사전감독모임(겸 기자회견, 18일)에 참석한 뒤 그 취재기로 써야했던 글인데 너무 늦게 올리는 바람에 '생생함'은 빠졌다. 대신 올해 서독제를 소개하고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는 차원으로.
ps3. 이 자리에서 <동백꽃 아가씨>의 박정숙 감독과 참 오래 이야기를 했다. (올해 서독제에서 박정숙 감독의 신작 <첫사랑 - 1989, 수미다의 기억>이 초청작으로 상영된다.) 박정숙 감독과 나눈 이야기는 곧 네오이마주에 실릴 <레인보우> 감상문의 일부로.
ps4. 프레시안 기자시절 썼던 무수한 영화제 소개글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이젠 '기사용', 그것도 근엄한(!) 종합일간지용 기사용이라고 잔뜩 힘줘서 쓸 필요가 없으니까. 소곤소곤하고 감상적인 물기가 아주 없어지진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미칠듯한 만연체와 복문'이라는 나쁜 버릇도 많이 줄어든 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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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리브스 | 렛 미 인 Let Me In (2010) - 2010/11/25 22:27
역시 한국포스터가 훨씬 낫다.
<렛미인>은 헐리웃이 리메이크를 시도했다가 망쳐먹은 수많은 예와 달리, 드물게도 성공적인 작품에 속한다. 헐리웃 리메이크작 답게 특수효과가 눈에 띄고 조금 더 친절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친절함'이 기존의 실패작들과 달리 오히려 주요 이야기의 줄기를 풍성하게 해주는 컨텍스트의 구성 쪽으로 집중됐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원작(스웨덴 버전)보다 오히려 더 격렬하며 암울한 분위기를 띄며, 강한 정치-사회적 맥락의 의미를 갖는다.
<렛미인>의 기본 줄기는 원래 버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스웨덴 버전의 인상적인 장면들도 고스란히 반복하며, 마지막 엔딩 장면도 똑같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으로 1983년 3월, 뉴멕시코 주의 로스 앨러모스가 선택됐다는 건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아주 의미심장하다. 로스 앨러모스가 어떤 곳인가. 세계 최초로 원자력실험연구소가 설립된 곳, 그리하여 최초로 원자폭탄을 만들어낸 '맨해튼 프로젝트'의 중심지가 아니던가.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수소폭탄이 개발되고, 최근까지도 '원인이 확인되지 않은' 폭발사고가 종종 일어나는 '미국 핵실험의 중심지'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의하면, "'고립된 자연환경'으로 인해 이곳에 1942년 세계 최초로 원자력실험연구소가 설립됐다"고 한다.) 더욱이 1983년 3월은 레이건 대통령이 일명 '스타워즈 계획'이라 알려진 SDI(Stratagic Defense Initiative, 전략방위계획)를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영화에 잠깐 삽입되는 레이건 TV연설 장면은 바로 이 SDI를 발표하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장면의 자막 번역이 중략되는 건 매우 애석한 일이다.)
사실 미국은 70년대 후반부터 중, 남미에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좌파정권을 CIA를 앞세워 진복시키는 작전을 수행해왔고, 1983년 10월에는 소위 '미국민 안전보호'를 명목으로 중미의 작은 국가인 그레나다에 직접 침공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헐리웃 버전의 <렛미인>이 그저 스웨덴 버전의 <렛미인>을 리메이크한 버전이라고만 말하기 힘들어진다. 오히려 원작 소설 '렛미인'을 미국식 맥락에서 재해석한 버전의 전혀 다른 영화라고 칭해야 옳다. 그 결과 헐리웃 버전의 <렛미인>은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며 전시태세를 강화하던 당시의 미국-그리고 이 전통을 이어받은 부시의 미국-의 모순과 아이러니를 짚는 사려깊은 영화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더라도, 헐리웃 버전의 <렛미인>은 스웨덴 버전에서는 그저 희미하게만 처리됐던 뱀파이어 소녀와 남자 성인 보호자간의 관계가 좀더 섬세하고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영화를 차별화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는 이 영화가 배경으로 선택한 설정들과 맞물려, 영화의 정치-사회적 함의를 더욱 풍부하고 다층적으로 만든다. 스웨덴 버전에서는 존재감을 애써 희석시켰던 소녀의 소위 '아버지'(실제로는 일종의 '가디언')는 영화의 처음 시작에서부터 강조되어 '숨겨진 주인공'만큼의 막강한 존재감을 갖는다. 뱀파이어 소녀 애비(클로이 모레츠)와 이 가디언 사이에서 일종의 착취관계의 성격이 보다 분명히 제시되며, 그들간 관계의 성질을 비롯해 그들 사이 복잡다단한 감정의 교류를 공들여 보여주는 장면들이 삽입되기도 한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애비가 가디언의 뺨을 쓰다듬는 씬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애비에게 줄 피를 위해 동네를 옮겨다니며 연쇄살인을 해왔고, 마지막에는 그 자신의 피를 애비에게 준다. 그는 분명 애비와 처음 만났을 당시 영화의 주인공 소년 오웬(코디 스밋-맥피)과 마찬가지로 '소년'이었을 것이고, 영화의 마지막에 애비와 함께 떠나는 오웬의 미래 역시 그와 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커다란 여행가방에 애비를 숨겨 기차를 타고 함께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스웨덴 버전의 엔딩과 그림은 같되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으로 정체성을 부정당하거나, 스스로 부정하거나.
그러나 <렛미인>의 리메이크 성공에서 가장 큰 공은 세운 이는 무엇보다도 주인공을 맡은 어린 배우들인 클로이 모리츠와 코디 스밋-맥피라 할 수 있다. 외모에서부터 남들과 달랐던,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던 원작의 뱀파이어 소녀와 달리, 클로이 모리츠가 맡은 애비는 일견 미국의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평범해 보이는 소녀다. 반면 눈부신 실버 블론드를 자랑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스웨덴 버전의 소년과 달리, 코디 스밋-맥피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소년이다. (그는 <더 로드>에서 비고 모텐슨이 마지막까지 지켜주고자 한 아들을 연기한 바 있다.) 클로이 모리츠는 처연하고 격렬한 비밀을 안고있는 소녀의 복잡다단한 슬픔과 고통을 매우 능숙하게 연기해내며, 헐리웃판 <렛미인>을 스웨덴 버전과 전혀 다른 영화로 재창조한다. 스웨덴 버전이 더없이 신비로운 소녀와 이미 어린 나이에 삶의 지리한 고통과 외로움 알아버린 소년 사이의 교감을 강조했다면, 헐리웃 버전은 각자 고통과 비밀을 짊어지고 있는 소년과 소녀 사이의 연대적 교감을 강조하되, 이 관계가 역시나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과 착취를 전제한 비극적 관계가 될 것임을 강하게 예고하는 것이다. (이들이 다른 해결책을 찾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이들의 앞으로의 선택에 달렸다.)
이미 국내에서도 일정 정도의 성공을 거둔 영화의 헐리웃 버전이기에, 관객들의 호오는 심하게 엇갈릴 듯하다. 스웨덴 버전은 사실 어른들은 모르는 소년과 소녀 사이의 비밀스러운 우정과 사랑에 집중하면서 다른 콘텍스트를 최소화했고, 담백하고 소박한, 그리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영화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헐리웃 버전은 스웨덴 버전에서 희미해졌던 다른 서브텍스트들을 충실히 살렸고, 그 결과 훨씬 어둡고 격렬해졌다. 스웨덴 버전이 '하얗게 빛나는' 이미지라면, 헐리웃 버전은 '어둡고 격렬한' 이미지다. 스웨덴 버전의 아련한 신비로움에 매혹됐던 이라면, 헐리웃 버전의 '세속적'인 변화가 몹시 놀랍고도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헐리웃 버전이 취한 다층적인 서브텍스트들의 매력은, 굳이 안 넣어도 되었을 것 같은 특수효과 장면같은 단점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어느 버전을 선호하는가는 결국 관객의 몫이지만, 적어도 맷 리브스 감독과 배우들은 스웨덴 버전의 매력 못지 않는, 전혀 다른 매력이 숨쉬는 또 한 편의 <렛미인>을 탄생시켰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셈이다. 11월 18일 개봉, 15세 관람가.
ps. 2010/11/11(목) 프레시안에 기고. 원문 페이지는 여기
ps2. 이틀 전엔 화요일에 기고해놓고 11일 게재된다는 연락은 받았는데, 목요일 아침일찍 발행됐다가 다른 기사들에 묻혀서인지 나는 그 다음 주까지도 기사가 안 실린 줄로만 알고있었다. 그 상태에서 씨네21 보다가 거의 비슷한 내용의 리뷰가 실려서 낙담하고 글을 회수할까 했는데, 그 전 주에 이미 실렸더라.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ps3. 레이건 시대,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로스 앨러모스라는 사실은 워낙에 드러난 내용이라 다들 쉽게 지적하지만, 1983년 3월이 '스타워즈 계획' 발표가 있었던 달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알려져있지 않은듯. 나도 처음엔 생각을 못하다가, 리뷰를 쓰던 중 갑자기 생각나서 '스타워즈 계획'을 따로 찾아보고 나서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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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 | 스윗 앤 로다운 Sweet and Lowdown (1999) - 2010/08/31 03:18
으하하하 이 포스터!
우디 앨런 감독의 1999년작 <스윗 앤 로다운>은 가상의 천재 재즈 기타리스트 에밋 레이(션 펜)의 변덕스러운 삶을 그린다. 재즈 역사가는 물론, 재즈광으로 잘 알려진 우디 앨런 감독 자신까지 나서 그들의 인터뷰 증언장면과 일종의 '재현' 화면을 교차시켜 일종의 페이크 다큐 기법을 도입했다. 션 펜이 그려내는 에밋 레이는 자신이 세계최고라는 자부심, 그리하여 "예술가라면 응당 이래이래야 한다"는 허세의 자부심이 컸던 만큼, 당대 최고라 알려진 장고 라인하르트에 대해서는 끝없는 열등감과 경외를 가지며 이른바 '열폭'하곤 했다. 에밋 라이의 삶을 증언하는 이들에 의하면, 그는 파리에서 장고의 연주를 들으며 두 번이나 그만 기절을 해버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물론 천재 예술가들의 여자들과의 스캔들은 대중의 가장 큰 관심사일 터. 에밋 라이는 "나는 예술가니까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아, 자유로워야 하니 결혼은 안 해" 따위의 말들을 주절거리며 여자들과 연애는 하되 책임감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피했다. 즐기는 건 좋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라는 거다. 많은 여자들과 그런 식의 연애를 이어갔던 것으로 설정되지만,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해티(사만사 모튼) 및 블랜치(우마 서먼)와의 관계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블랜치는 한편으로 해티를 돋보이게 하는 한편, 레이가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기만을 깨닫게 하는 일종의 '계기'로 작용하는 좀더 기능적인 인물이다. 해티가 어릴 적부터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였던 반면 블랜치는 끊임없이 노트에 기록을 하는 작가지망생이다. 고아 출신으로 세탁부였던 해티와 달리 블랜치는 명성과 돈이 있던 가문의 여성이었던 점도, 해티가 레이를 숭배하며 그럴 어린아이같은 심성으로 사랑했던 것과 달리 블랜치가 매순간 레이를 분석하려 들며 그와 일종의 줄다리기 게임을 즐겼던 점도 해티와 블랜치가 얼마나 극명한 극을 이루는 사람들인지 잘 드러내는 특징들이라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해티는 변덕스러운 레이에게 하룻밤새 버림을 받지만 블랜치는 그 자신이 레이에게 배신을 때린다.
그러나 이런 식의 줄거리 요약이 <스윗 앤 로다운>의 아름다움과 근사함을 특징지어주는 요소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이 언제나 천착했던 남과 여의 관계, 또 한편으로는 예술가와 그의 팬의 관계를 버무리면서, 그 특유의 유머와 신랄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작품이다. 영화 전반을 통해 우리는 허세와 연약함, 자만심과 가련할 정도의 열등감과 자기 방어 기제, 빛나는 재능과 어이없을 정도의 어리석음을 함께 갖고 있던 '에밋 레이'라는 인물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디 앨런 특유의 신랄한 유머와 션 펜의 탁월한 연기 덕에, 관객의 입장에선 그를 한심스러워하며 조롱의 비웃음에 동참하게 되면서도 동시에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연민을 함께 품게되는 것이다. 그건 그가 언제나 무대 위 빛나는 별이 되고 싶었으되, 태생적으로 어둠과 진창에서 태어났고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심지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렇기에 그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에서만 투쟁적이었으며, 그럼에도 그런 투쟁의 삶은 언제나 너무나 쉽고도 허무하게 여자와 자고 싶다거나 차를 사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너무나 가볍게 바람에 흩어지곤 했다.
사만사 모튼과 션 펜.
자신의 거울과도 같은 사람과의 연애와 상처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이미 너무 늦어버린 사람의 가치를 깨닫는 어리석은 남자의 이야기야 이 우주에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넘치도록 넘친다. 재능은 지녔으나 그 재능을 유지해줄 성실함은 없고 더욱이 자만과 허세가 하늘을 찌르던 예술가의 추락, 그것도 처음엔 서서히 진행되다 점점 가속도를 더해 막판엔 겉잡을 수 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그 자신은 너무 늦은 뒤에야 그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역시 세상에 흔하게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우디 앨런은 <스윗 앤 로다운>에서 옛날옛적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꾼들이 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도, 그 안에 자신만의 독특한 숨결을 불어넣는 데에 성공한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빛나는 듯하다 대공황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이 퇴색했던 미국의 그 20년대와 30년대를 그 빛나는 재즈 음악으로 한껏 되살려내고,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어리석은 한 남자를 통해 예술과 삶과, 사랑을 되짚는 것이다. 이후 2000년대의 우디 앨런의 영화들이 여전히 매력은 있지만 어딘가 예전의 우디 앨런답지 않은 맥빠진 면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에게 있어서도 가장 찬란히 빛난 뒤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든 그의 영화예술 세계의 가장 마지막으로 빛나는 정점에 있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ps 1. 이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의 2010 시네바캉스의 상영작으로 상영되었다. 99년경 헐리웃 리포터 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처음 접하고 수입개봉만을 기다렸으나, <브로드웨이를 쏴라> <마이티 아프로디테>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등이 개봉되고 있던 와중에도 이상하다시피 수입되지 않았던 걸작.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10년을 기다려 본 셈이 된다.
ps 2. 기타를 부숴버린 채 망연히 앉아있는 션 펜의 모습을 부감으로 잡은 거의 마지막 숏은 역시 명불허전, 백문이 불여일견.
ps 3. 당연한 얘기지만, 음악이 너무 좋다. 중간중간 같이 재즈 잼을 연주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역시나 너무 좋다.
ps 4. 션 펜 오빠 만세! 아울러, 역시 허세와 허영으로 가득찬 블랜치의 모습을 매우 매혹적으로 그려낸 우마 서먼도 뜻밖에 우디 앨런 영화에 아주 잘 어울리는 언니였다는.
ps 5. 2000년대에 우디 앨런이 함께 작업했던 주요 배우 중 그나마 우디 앨런 영화에 잘 어울렸던 이는 스칼렛 요한슨 한 명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니 우디 앨런도 요한슨과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함께 작업했던 거겠지만. 사실 이 영화의 사만사 모튼도 우디 앨런의 영화와는 묘하게 불균형을 이루는데, 사만사 모튼이 맡은 해티 역은 워낙에 그런 불균형이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경우라 해야 할듯. 사실 2000년대 우디 앨런 영화 중 최악의 미스캐스팅은 역시 <애니씽 엘즈>의 제이슨 빅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ps 6. 그러므로 결론은... 역시 션 펜 오빠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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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 그녀에게 (2010) - 2010/08/28 15:10
이 허한 포스터 감성 어쩔 거야;;
조너선 캐럴의 『웃음의 나라』는 마셜 프랜스라는 동화작가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한 남녀 한 쌍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던 작가가 평생을 보냈던 마을에 도착하지만, 곧 그 마을의 무서운 비밀을 알게 된다. 꽤나 충격적인 반전과 장면이 포함된 이 소설을 읽고, 허구의 창작이야말로 신의 천지창조를 흉내낸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창세기에서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따고 생령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모든 창작자들도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들의 소소한 설정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 환경, 그리고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에 반영하면서, 점차 보이지 않는, 그러나 우리의 물리적 세계를 꼭 닮은 허구의 세계가 형태를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떤 창작자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캐릭터를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끌고가지 못하게 된다. 대신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들이 스스로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행하는 선택들을 그저 뒤좇게 된다.
그러고 보면 바벨탑 이야기가 ‘언어’의 흩어짐으로 끝을 맺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후대의 신학자들은 바벨탑 이야기를 ‘신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들’에게 신이 내린 징벌로 해석한다. 그리고 테드 창 같은 작가는 오히려 “신을 경배하고자, 그래서 신을 닮고자 만든 것”이라는 전복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물론 나는 테드 창의 해석이 좀더 마음에 든다. 나아가 바벨탑이 그저 높이만 높은 탑일 뿐 아니라, 실은 소설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도서관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인간 복제나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보다도, 허구의 창작야말로 신의 영역을 넘보는 모방 행위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재능이 있든 없든, 사춘기 적 한번쯤은 소설 습작을 해보고, 고통과 무력의 시기에 한번쯤은 시나리오를 써볼 궁리를 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성호 감독의 영화 <그녀에게> 역시 허구를 창조하는 창작자의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배우 미팅을 위해 부산에 내려가는 한 영화감독과, 실명(失明)을 앞두고 오래 전 버린 딸을 찾아가는 중년의 사진가를 교차하며 시작한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를 고쳐쓰다 부산의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묘령의 신비로운 여자와 만나 그녀와 동행하게 된다. 한편 전화번호가 적힌 낡은 사진 한 장만을 들고 딸을 찾는 중년 남자는 필사적으로 딸의 행방을 좇지만 좀처럼 그녀를 만날 수 없다.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평행하게 달리며 서로 교차되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엮이기 시작한다.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여자가 들려주는 사연을 자신의 시나리오에 반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여자의 사연이 밝혀질수록, 초반에 제시됐던 영화감독의 사연이 하나씩 거짓으로 판명될수록, 영화 안에서 이야기와 현실, 실제와 허구가 뒤섞일 뿐 아니라 시간까지 뒤섞인다. 주인공인 영화감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섞인 채 한 영화 안에 여러 개의 이야기로서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러 개의 이야기가 다시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여배우가, 내가 좋아하는 서늘한 인상의 미녀다. 그러나 실제로 본 인상은 또 좀 다르더라는.
<그녀에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시나리오를 쓰던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여자를 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결국 창작자가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주인공을 붙잡는 장면으로 판명난다. 자신이 피조물에게 그런 고통과 상처를 주었고, 그 자신이 그녀가 사고를 당하도록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나 그녀가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 아니 그가 그 장면을 쓰던 그 순간, 그는 스스로 깜짝 놀라 키보드를 내던지고 이야기 속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는다. 이건 뒤집어 말하면, 결국 고통과 눈물의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의 상처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인 되는 셈이다. 어쩌면, 인간을 연민한다는 신의 마음이 저런 것일까. 제가 만들고 제가 안겨준 고통이면서, 막상 그 고통에 힘겨워하는 인간을 보면서 연민과 고통을 경험하는 것일까, 신이란 존재는.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신이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흩뜨려놓긴 했으나 문학을 포함해 허구 자체를, 나아가 예술 자체를 파괴하지 않은 이유가 무얼까에 생각이 미친다. 신을 닮고 싶어하는 인간의 그 가련한 욕망에 결국 연민을 품어버린 것일까. 이 세계를 창조한 자신들의 영광을 기리는 것이니 그냥 관대하게 굴자고 마음먹어서인 걸까. 혹은, 인간이 허구와 예술을 즐기다가 어느 순간 신을 이해하는,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의 순간을 맞기에 그냥 고이 내버려둔 것일까.
그런데 김성호 감독은 이 영화를, 애초에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로 일단 찍어놓고 나중에 편집을 통해 이야기를 짜맞췄다고 한다. 어쩌면 신도 이 세상을 만들 때 실은 아무 계획없이 창조의 욕구 때문에 무작정 만들고 본 게 아니었을까 싶다. 완벽한 조물주가 만들었다고 하기엔, 빈 틈이 너무 많은 우리 세상이 아닌가.
+ 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독립영화데이터베이스 페이지 중 '독립영화 초이스'에 기고한 글. (2010. 3. 10)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ps . 이 영화 역시 한국 주요도시 관광홍보 프로젝트인 '영화, 한국을 만나다'의 부산 편으로 제작된 영화다. 영화제 때문에 매년 내려가고 1년간 살기도 한 곳이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풍경들은 "부산에 정말 저런 이국적인 곳들이 있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생경하고 이국적이다. 이는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씨네21 김도훈 기자의 리뷰의 언급처럼 '그저 겉멋에 겨운 장소만 모은' 결과일 수도 있지만,... 매년 영화제 때문에 부산에 내려가는 서울 영화인구 반 이상이 부산을 아무리 익숙하게 여기고 안다고 착각한다 해도 실은 부산의 맨 얼굴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 그건 겨우 1년, 그것도 곧 떠날 이방인으로만, 게다가 해운대에서만 살아본 나 역시 마찬가지다 - 이 영화의 분위기가 부산과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물론 철저히 '서울내기' 입장의 폭력적 시선이기도 하다.
ps 2. 영화에서 주인공 영화감독 역을 맡은 이우성은 본업이 배우가 아니라 뮤지션이다. 그룹 코코어의 보컬. 김성호 감독과는 이전에 <판타스틱 자살소동>의 김성호 감독 연출 에피소드에서 협업한 바 있는데, 이 영화에선 그 '어설픈 연기'가 나름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반면 중년 포토그래퍼 역의 조성하는 연극판에서 뼈가 굵은 안정된 연기력의 배우.
ps 3. 글 말미에서 밝힌 대로 시나리오 없이 일단 무작정 찍고 편집실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낸 영화라고 하는데, 그런 영화치곤 아귀가 제법 잘 맞고 일관성도 또렷하다. 하지만 덕분에 전주영화제에서 첫 상영되기 직전까지도 편집이 이뤄지고 있었다나 어쨌다나. 이 영화의 일부 장면 역시 캐논 5D Mark II의 동영상 기능으로 촬영되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이우성의 차를 부감으로 따라가는 장면이 그 장면인데, 전주에서 상영 당시 이 장면은 화면 일부가 깨지며 픽셀 일부가 확대된 것같은 부분이 있어 아쉬웠다. 그나저나 이 장면은 헬리콥터...가 아니라 경비행기에 촬영감독이 타서 촬영한 장면이라는데, 촬영 직후 비행기가 추락;;;해 촬영감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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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수 | 뭘 또 그렇게까지 (2009) - 2010/08/28 00:26
포스터도 촌스럽지만, 저 70년대스러운 카피라니.
기차 안에서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을 읽고 있던 촉망받는 젊은 화가 조찬우(이동규)는 춘천에서 열리는 미술학회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는 중이다. "얼른 춘천역에 와서 치킨집 술자리에 합류하라"는 독촉전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동적으로 김유정 역에서 내린다. 그리고 역시 '김유정'이라는 이름을 지닌 젊은 미술학도 여성과 만난다. 젊고 예쁜 여자가 자신을 존경한다며 "선생님, 선생님"하며 졸졸 쫓아다니니, 우리의 속물 예술가 조찬우는 어깨에 힘을 좀 주며 그녀를 꼬시고 싶다. 조찬우의 눈에는 김유정 역시 그걸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영화가 흥미로운 반전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니체'를 권하며 잘난척을 하던 조찬우의 '권위'가, "실은 고등학생 때 니체는 다 읽었다"는 유정의 말에 순식간에 뒤집히는 것이다. 거기에 조찬우는 유정을 스토킹하던 젊은 감독지망생 민호에게 '쫓기며'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후 영화는 단순히 한 여자와 두 남자를 둘러싼 소동만으로 코미디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관계와 태도를 통해 '자연'과 '예술'에 대한 담론으로 비약한다. 민호가 찬우에게 술대결을 청하며 들려주는 유정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름 신빙성 있는 '근거'들을 지니고 있지만, 이야기 자체가 기괴한데다가 민호라는 인물도 부담스러울만치 과잉된 자의식으로 뜬금없는 행동을 일삼는 캐릭터다. 곧 우리는, 그녀가 유정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 역시 실은 민호가 제멋대로 구성해 믿고있는 이야기들일 수 있다고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진술이 자연과 예술에 대하여 찬우가 유정에게 흘리듯 던졌던 말들, 그리고 세미나에서 토했던 열변들이 유정에 대한 기괴한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유정이란 인물은 다층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녀는 찬우가 낯선 곳에서 만난 그저 신비한 여인일 수도 있다. 민호의 말대로 기괴한 믿음과 행동을 일삼는, '어른 남자 찜쩌먹는 무서운 어린 여자아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또한, 찬우가 '예술'과 '자연' 개념을 그대로 육화한 존재이기도 하다.
'예술가'로서 찬우에게 '유정'은 처음엔 손을 내밀면 닿을 것 같은 '예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가 감히 통제하기는커녕 어찌할 수도 없는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로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민호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영화 역시 유정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찬우는 홍상수 감독의 남자캐릭터들과 달리,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기보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그에 복종하는 인물인 것 같기는 하다. 빈 호텔방에서 잠을 못 이루던 찬우가 '유정이 즐겨 한다던' 백팔 번 절하기를 하는 코믹한 장면이 바로 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될 것이다.
영화의 클래이맥스를 이루는 공간은 젊은 예술가들의 축제가 열리는 공간이다. 애초 '춘천'이라는 도시를 알리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이 영화는 찬우와 유정의 동선 뒤로 춘천의 유명한 명소들을 배치해놓는 한편, 춘천을 대표하는 음식인 막국수와 닭갈비를 화면에 반복해서 등장시킨다. 그러나 <뭘 또 그렇게까지>가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춘천의 얼굴이라면, 서울과는 또 다른, 언제나 젊은 예술가들의 활기로 넘치는 '예술의 도시'로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영화와 음악, 춤, 판토마임, 행위예술, 그림 등 모든 장르의 예술이 어우러진 이 축제에서 찬우는 비로소 자신의 맨얼굴을 보게 될 뿐 아니라, 민호로 상징되고 있는 자신의 과거를 직시한다. (민호와 찬우는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이다.) 그리고 삐딱한 냉소와 비웃음이 몸에 배 있던 찬우는 비로소 이곳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고 겸허한 자세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후에 또 한 번의 반전을 준비한다. 찬우가 마침내 유정에게 다가갈 수 있겠다고 느꼈을 법한 순간, 유정은 다시 그의 이해와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예술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유정에게 짓는 찬우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인상적이다. 그 얼굴이야말로, 예술 언저리에서 밥을 먹으며 예술을 좀 아노라 하는 우리 모두가 가장 두려워할 순간의 얼굴일지 모른다. 우리가 원하고 희구하는 그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진실을 맞닥뜨리는 그런 순간이니까. 하지만 이 글을 유정이 읽는다면,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을 할 것 같다. "뭘 또 그렇게까지 이 영화를 보셨어요?"라고.
+ 프레시안에 기사로 올린 글. (2010. 4. 24)
ps 1. 캐논이 내놓은 DSLR 카메라인 OD 5D Mark II의 동영상 기능으로 완성된 전세계 최초의 영화. <하우스>의 몇 시즌이더라... 하여간 그 시즌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바로 같은 기종으로 전체가 촬영된 바 있다. 현장에서 제대로 모니터도 못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 초점이 빗나간 장면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기대 이상의 화질을 보여준다.
ps 2.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영화, 한국을 만나다'라는, 한국의 주요도시 다섯 곳에 대한 일종의 '관광홍보' 차원으로 기획된 시리즈 중 춘천 편이다. 부산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처음 상영됐을 때 보면서 관광홍보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영화 그 자체로 재미있으면서도 춘천의 명소와 춘천을 대표하는 키워드가 모조리 등장하는 것을 보며 감탄했던.
ps 3. 불쾌하기 짝이 없는 '90년대 홍상수 영화들'에 대한 아주 통쾌한 복수...라고 생각해서 이 영화를 더욱 좋아한다. 그러나 정작 전계수 감독은 이 영화가 "내 자식 같지 않다"고 한다. 전계수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이 이야기를 듣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란. 인터뷰를 보시려면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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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 - 2010/08/28 00:14
본 포스터보다 멋진 티저 포스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조선시대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하는 정여립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이후 그가 조직했던 대동계의 향방을 두고, 왜구의 침입이 가시화되고 있음에도 이에 전혀 대처할 수 없는 "썩어빠진 조정을 쓸어버리려는" 이몽학(차승원)과, "대동계를 이용해 자신이 왕이 되려는 이몽학을 저지"하기 위한 황정학(황정민)의 추격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한신균을 아버지로 두었으나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고 방황하던 견자(백성현)가 이몽학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난 뒤 복수를 위해 황정학과 동행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기축옥사를 일으켰던 당시 극심했던 동인과 서인 간 정쟁이 영화에서도 (그저 정여립의 죽음을 설명하는 기능적 측면을 넘어서서) 매우 코믹하지만 결정적인 몇 장면으로 묘사된다. 다만 실존인물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회원을 받고 정기적인 무술훈련도 병행했던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끌어오되, 실제로 정여립이나 대동계와는 별 관련이 없었던 이몽학을 정여립의 제자이자 대동계 회원으로 설정한 데에서 상상력이 발휘됐다. 이몽학이 정여립과 대동계로 연결되면서 이몽학의 난이 실제 역사보다 4년 정도 앞서서 임진왜란 직전에 일어난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영화를 이끄는 두 주인공인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비에 있다.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이몽학이 주로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절도있는 말과 동작을 보여주는 '직선의 미'라면, 남루한 행색으로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는 소경 검객인 황정학은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능청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일관하는 '곡선의 미'다. 맹인 검객이라는 면에서 얼핏 '자토이치'의 인상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영화 속 황정학은 오히려 <스타워즈>의 장난기 많은 괴짜노인 요다나 <취권>의 사부 쪽에 가까운 성격을 드러내 보인다. 이몽학과 황정학이 마침내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근래 액션영화들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정반대로 '슬로우 모션' 액션으로 표현돼 다른 종류의 시각적 쾌감을 준다. 길게 이은 중심컷을 슬로우로 표현하되 그 앞뒤에 짧고 빠른 연이은 컷들을 붙이는 식으로 동양 무협액션의 아름다운 곡선의 동선을 최대한 살리고 표현하는 것이다. 칼과 칼이 부딪히는 무협액션의 쾌감을 잘 살린 이 씬은 가히 영화의 클래이맥스라 할 만한 장면이다. 두 시간이 조금 안 되는 러닝타임 안에 사건과 이야기의 흐름을 안정적으로 쌓아가는 호흡 좋은 플롯 구성도 영화의 강점이다. 촬영과 편집, 연출의 호흡, 그리고 지나치게 과용하지 않으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있는 음악도 나무랄 데가 없다.
<황산벌>과 <왕의 남자>에서도 드러났듯,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도 이준익 감독은 '권력'에 대해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시선을 그대로 견지한 채, 권력다툼의 와중에 일어나는 '난'이 빚는 끔찍함과 허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이 가장 적극적으로 투영된 인물이 바로 황정학이다. 그는 권력이나 대동계가 가진 '힘'에 초연한 채 반 거지행색을 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생물학적 아버지를 잃은 견자에게는 이상적인 스승이자 실질적인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전 작품들과 달리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권력을 사유하는 인물, 혹은 권력의 유혹 앞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의치가 너무 부담스러웠던. 혁명가이자 야심가이기도 했던 이몽학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야심만 도드라진다.
임진왜란을 피해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가버린 후 텅텅 비어버린 궁에 도착한 견자는 근정전 안의 왕좌에 앉아본다. 이 순간 관객들은 영화 초반, 서자라는 이유로 반항을 일삼던 견자에게 한신균(견자의 아버지)가 던져줬던 "지금 이 나라 왕도 서자 출신"이란 말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에서는 별로 강조가 되지 않았으나 이몽학 역시 실제 서얼 출신이었고, 그는 영화의 초기부터 왕이 되려던 야심을 숨기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권력에의 의지를 드러내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 역시 '너무 쉽게 입성한' 한양의 텅 빈 궁에 도착한 뒤, 허탈한 표정으로 근정전 앞마당에서 칼을 끈다. 그리고 견자는 이몽학을 맞아 "겨우 여기 앉으려고 그 많은 피를 흘렸냐"고 비난을 함으로써, 자신이 이몽학이 아닌 황정학의 길을 선택했음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왕의 남자>의 연산군조차 자신의 의지보다는 주변에 떠밀린 채 현실도피를 하는 듯한 인물로 그려졌고, '권력의 맛'을 알게 된 공길도 견자만큼 '적극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은 아니었음을 떠올렸을 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의 인물들은 이전의 이준익 감독의 인물들과 일관되면서도 어딘가 달라진 면모가 있다.
아쉬운 것은, 그 '다른' 면모가 제대로 입체성을 갖고 영화에서 발휘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인물들은 매우 단선적이고, 이 때문에 각기 정해진 방향으로 앞만 보고 내달린다. 이몽학은 고뇌를 지닌 혁명가라기보다는 그저 야심에 날뛰는 악당으로만 보이고, 그런 이몽학과 대척점을 이루는 황정학은 '너무 당연하게 옳기에' 오히려 "이몽학을 견제하기 위해 어린 소년의 치기어린 복수심을 이용하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관객의 입장에서 가장 감정이입을 할 만한 인물이자 실질적인 화자는 응당 견자가 돼야겠지만,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립구도에 지나치게 눌리는 데다 무작정 분노와 반항기를 내보이며 '버럭대기만 하는'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이몽학과 견자의 연결점이 되는 인물인 백지 역시 존재감이 약한 편으로, 이몽학과 백지 사이의 멜로 역시 다소 성기게 표현된 편이다. 이 때문에 인물들이 전면적으로 충돌하는 영화의 말미는 아드레날린의 폭발은 있되 가슴벅찬 감동이나 카타르시스는 기대하기 어렵다.
멘토로서의 황정학은 황정민에 의해 아주 매력적으로 재현되기는 했으나, 정작 그의 명분과 철학엔 별 입체감도 깊이도 없다.
영화의 클래이맥스를 이루는 이몽학과 황정학의 칼싸움, 그리고 이것의 '변주'인 이몽학과 견자의 칼싸움은 서로 팽팽하게 대립했던 상대와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이자 동시에 그랬던 상대에 대한 이해와 인정, 그럼에도 각자의 '다른 선택'이 엇갈리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간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인물들이 비로소 상대를 거울삼아 자신의 맨얼굴을 보는 장면이기도 하고, 그들이 시종일관 숨겨왔던 번민과 의심, 회한과 아이러니와 연민이 비로고 균열의 얇은 틈을 뚫고 새어나오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들은 관객에게 채 도달할 새도 없이 곧바로 공중에 흩어져 버리고 만다. 각자 앞만 보고 달려온 인물들이 마침내 일생일대의 대결을 펼치며 장렬히 산화하는 동안, 관객들은 그저 이들의 싸움을 '구경'만 하는 입장이 되기 십상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모처럼 꽉 짜이고 안정적인 이야기와 구성과 화면으로 두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영화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의 전작들에서 언제나 이야기를 이기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사람'의 온기 - 그것이 다소 이상적인 방향으로 단순화된 면이 있었을지언정, 그리고 언제나 동의를 받지는 않았을지라도 - 가 이 영화에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은 언제나 특유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힘, 무엇보다도 '사람'의 온기로 이런저런 소소한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무수하고도 뛰어난 장점들 가운데 그리 많지 않은 단점이 유난히 도드라지게 눈에 와서 박힌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분명 긴장과 재미를 느꼈음에도 극장을 나오면서는 허탈감과 아쉬움, 답답함이 더 컸던 이유다.
+ 프레시안에 기사로 올렸던 글. (2010. 4. 20)
ps1. 원작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보면서도, 이 이야기는 틀림없이 견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배우며 그의 눈에 비친 이몽학과 황정학의 모습일 거라 짐작했고, 그게 맞게 이야기를 푸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립구도를 강조하다보니 견자를 어정쩡한 위치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안습이었던 주연급 인물은 아무래도 백지. 이준익 감독은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데에 여전히 서툰듯.
ps2. 조정의 신하들이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고 얄팍하게 희화화되는 걸 보면서 어이없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아주 소박하면서도 대중적인 이런 식의 냉소주의는 하나도 건강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솔직히 그 조정 신하들이 아니라 이 영화의 그런 태도야말로 가장 유치하고 우습게 느껴진다. 그런 태도는 내용없는 불신과 근거없는 무력감과 무관심만을 만들어낼 뿐, 정확한 비판이나 풍자나 조롱이 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순간적인 웃음에 머무를 뿐 진짜 쾌락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는 이처럼 깊이 없이 얄팍한 대중적 정서가 영화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잡고 앉아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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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비클바움, 마이클 버나노 | 예스맨 프로젝트 The Yes Men Fix The World (2009) - 2010/08/19 10:28
멀쩡하게 생긴 일련의 사람들이 WTO같은 세계적인 기구부터 엑손, 다우와 같은 글로벌기업, HUD(미국주택개발공사) 같은 국가 공기업의 대변인을 사칭하며 '사기를 치고 다닌'다. 공명심에 휩싸여 웬 이상한 걸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 경쟁하는 얼빠진 악동들일까? 방송에 이름이 나기만 한다면 무얼 해도 좋다는 괴짜들일까? 하지만 세계적인 대기업인 다우의 대변인을 사칭해 무려 영국 국영방송인 BBC 생방송에 출연해서 "인도 보팔 사태의 책임을 지고 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발언을 한 뒤 두 시간만에 들통이 났을 때, 그 장난의 주연이었던 앤디 비클바움은 자신을 찾아온 BBC의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거짓말은 불과 두 시간이었지만, 보팔을 방치하고 버려둔 다우의 거짓말은 20년을 끌었다."
인도 보팔 사태란, 보팔에 공장을 둔 세계적 화학기업 유니콘 케미컬의 공장이 폭발하면서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유니콘 케미컬은 폭발지역의 오염제거나 적절한 피해자 보상 등을 거의 하지 않은 채 보팔을 방치해뒀다. 유니콘이 '적절한 피해자 보상'을 딱 한 번 했던 것은, 미국 텍사스 주의 주민들이 집단 소송을 걸었을 때 뿐이었다. 폭발사고가 나고 17년 뒤 유니콘은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 다우에 의해 인수됐고, 다우 역시 보팔을 외면했다. 예스맨들은 다우가 유니콘을 인수한 3년 뒤, 영국 BBC 방송이 마련한 보팔사태 20주년 특별 생방송 중 프랑스 파리의 BBC 지부에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다우의 대변인'을 사칭해 "다우가 유니콘을 인수할 때부터 보팔에 대한 피해보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보팔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적절한 피해보상에 나서겠다"고 발표한다. 이 발표 직후 다우의 주가는 거의 20억 달러가 폭락하며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으나, 결국 이들의 '사기 사건'은 불과 두 시간 뒤에 들통이 났다.
예스맨들이 골탕먹인 회사는 다우만이 아니다.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가 담은 이들의 6개 활약상 중 첫머리를 장식할 뿐이다. 이들의 활동의 시작은 무려 WTO의 대변인을 자청하는 것이었고, 뒤이어 온갖 군수산업체와 글로벌 대기업, 심지어 미국주택개발공사(HUD)의 대변인을 자청하며 사기극을 벌인다. 방식도 웃기다. 예를 들어 석유에너지 회사들의 국제회의에서는 시치미 뚝 떼고 엑손의 대변인을 자청해서 사기를 쳤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인간의 사체를 제공받은 양초로 무공해 에너지원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군수업체의 심포지엄에서는 환경오염과 온난화로 전지구적 재난이 닥쳐올 것에 대비해 1인 구명장치를 발명했다며 코미디 SF에서나 나올 것 같은 기구를 선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을 더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이 시장만능주의자들의 논리를 차용한 가짜 연설이나 프레젠테이션이 결국 지독하게 비인간적인 방향의 결론으로 흘러가는데도, 컨퍼런스에 참석한 이들이 '매우 진지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위기관리 솔루션을 개발하는 회사의 대변인을 사칭해서는 "자본주의 시대에 위기관리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논리 하에 "나치한테서도 배울 건 배우자"는 결론을 내리며 자본주의 시대 비인간적 시스템을 조롱하는데도, 컨퍼런스나 심포지엄에 참석한 전세계 대기업 관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역겨움이나 도덕적 저항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참신한 사업적 아이디어"라며 이들을 찾아와 앞다투어 명함을 내밀거나, 오히려 "이런 구명장치는 대테러용으로 더 적합하지 않겠는가"는 사업적 조언까지 건넨다.
다우의 피해보상 발표가 거짓말이란 사실이 밝혀진 뒤 예스맨을 향한 보팔 주민들의 반응. 실은 '연출'된 장면으로, 실제로는 매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는 앤디 비클바움, 마이클 버나노 등 예스맨 프로젝트 활동의 주축이 되는 인물들의 활약상 중 6개를 추려 이들이 스스로 연출까지 손을 댄 기막히게 웃기는 다큐멘터리다. 이들이 대기업과 신자유주의 국제기구들을 골탕먹이는 방법들도 너무나 기상천외해서 웃기거니와, 이를 화면에 담고 영화를 진행시키는 방식 역시 지독하게 웃기고 유머러스하게 만들어졌다. 영화의 시작부터 앤디 비클바움과 마이클 버나노가 양복을 입은 채 수영장에 다이빙해 어설픈 포즈로 싱크로나이징을 하면서 자기들을 소개하는 식이다. "다음 타겟은 어디로 할까" 고민하는 장면에서는 폐가 공장 같은 곳에서 TV 한 대를 놓고 양복차림의 두 사람이 쭈그려 앉아있는 식으로 표현되고, 내레이션으로는 어느 기업을 고발하는 '문자'를 받았다면서 정작 화면으로는 쪽지를 붙인 돌이 창문을 깨고 날아오는 것으로 묘사하는 식이다. 거기에 화면에 종종 삽입되는 풍자적인 애니메이션 장면, 이들이 진지한 국제회의와 심포지엄에서 사용하는 프레젠테이션의 풍자적인 3D 자료화면도 배꼽을 잡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유머와 장난의 이면에는, 진지한 문제의식과 끝없는 열정이 있다. 물론 여전히 그들에게 호되게 당한 기업들은 이들을 '사악하고 심술궂으며 어이없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시민사회운동이라고 하면 의례히 거리에서의 격렬한 집회와 경찰들의 폭력, 각종 피켓과 격렬한 구호, 그리고 이면의 법정싸움과 기자회견 등 뭔가 '진지하고 비장한' 것을 떠올리기 마련인 우리들에게 '예스맨'들의 활동은 너무 장난질 같아 한심해 보이거나 당황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활약을 우스꽝스럽게 담은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와 마침 영화개봉과 때맞춰 발간된 동명의 책을 보고 나면, 이들의 활동이 실은 연기 아닌 연기를 하면서 미디어를 철저히 이용하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교묘한 미디어 운동이자 퍼포먼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결국 이것이다. "규제없는 자본주의란 결국 빈익빈 부익부를 가중화하며 소수의 부자들만 배불린 채 다수의 가난한 이들을 절망과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므로 적절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들이 벌이는 장난질은 한편으로 충격이고, 또 한편으로는 신기하다. "운동과 시위를 저런 식으로도 할 수 있다니."라는 놀라움도 준다. 하지만 이들의 유머는 배를 잡고 웃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혹은 변화시킬 게 너무 많은 우리의 현실을 상기시키며 묘한 슬픔과 눈물을 주기도 한다.
권위주의적인 독재정부를 가까스로 청산한지 불과 20년도 안 된 한국, 그 짧은 사이에 심지어 기업 하나가 법과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는 한국, 거기에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보다 신나는 운동'을 고민하면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이전 세대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에서, 어쩌면 이들의 활약은 지나치게 앞선 것이거나 여전히 생경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이것도 미국이니까 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섣부른 패배의식을 느끼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홍보차 직접 한국을 방문한 앤디 비클바움도 스스로 강조했듯, "변화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그토록 '즐겁게 투쟁하는' 앤디 비클바움도 국내 관객과의 대화와 책 <예스맨 프로젝트>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2003년 칸쿤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며 세계화에 저항한 故 이경해 씨를 언급하며 그의 저항에 경의를 바치기도 했다.
결국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란, 어제의 비장했던 투쟁 덕에 오늘의 즐거운 투쟁이 있을 수 있고, 이것들이 쌓이고 쌓여 내일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으로 2008년 11월 당시 예스맨들이 6개월 후의 날짜로 '행복한 뉴스만을 담은' 미래의 가짜 뉴욕타임즈 신문을 만들어 배포한 사건을 담은 것 역시, 그런 '내일에의 희망'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이 장면의 인터뷰에서 <샌프란시스코의 하룻밤>, <더 혼팅> 등에 출연했던 영화배우 릴리 테일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모처럼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강추'를 할 만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 프레시안무비 기사로 올린 글. (2010. 3. 31)
ps 1. 예스맨들의 활약을 담은 영화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댄 올먼, 새러 프라이스, 크리스 스미스 등 세 명이 연출을 맡은 가운데 마이크와 앤디의 활약을 주축으로 한 <예스맨 The Yes Men>이 완성돼 그 해 토론토영화제와 이듬해 선댄스영화제, 암스테르담영화제 등에서 상영되었고, 비록 한정적 규모나마 북미시장 내 극장개봉도 거친 바 있다. 2003년작 <예스맨 The Yes Men>에 대한 IMDB 페이지는 이곳이니 참조하시라. 2009년작인 <예스맨 프로젝트 The Yes Men Fix The World>는 <예스맨>의 두 주인공인 마이크와 앤디가 직접 연출과 제작까지 맡아 완성한 일종의 속편격인 영화다. 2009년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면서 미국개봉과 DVD 출시 등도 거쳤다.
ps 2. 실제로 만나본 앤디 비클바움은 영화 속에서처럼 유머감각이 뛰어나긴 하되, 훨씬 사람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유머감각과 함께 겸손한 진지함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몇몇 매체가 함께 한 라운드 인터뷰 자리에 참석했다가 완전 반해버렸다는. 당시 인터뷰는프레시안무비에 이 기사로 실었다.
ps 3. 예스맨들의 공식 홈페이지는 이곳 : http://theyesme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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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보다 재미가 덜한.
10년만에 나온 속편인 <주유소 습격사건 2>는 전편만큼 후련한 통쾌감이나 폭발적인 해방감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들에게도 공감을 크게 느끼기 어렵고, 네 명의 캐릭터나 존재감도 무척 약해보인다. 1편에서 노마크, 무대뽀, 딴따라, 뻬인트가 각각의 개성과 또렷한 존재감을 과시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물론 김상진 감독 특유의 액션-코미디 감각은 여전하구나 싶고, 전편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억눌린 괴로움을 풍자하며 웃음을 주기는 한다. 1편의 유머를 활용한 개그들도 그저 '반복'만은 아니어서 노력이 가상해 보인다. 그럼에도 활기와 해방감보다는 오히려 답답하고 어수선한 혼돈만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영화의 실패인가. 아니면 영화 속에 반영된 현실의 실패인가.
주유소와 아무 상관도 없던 노마크 일당이 느닷없이 주유소에 들이닥쳤던 것과는 달리, 이번 편은 주유소의 직원들이 내부에서 주유소를 접수해 버리는 것이 영화의 전제다. 그러니 정확히 하면 주유소를 '습격'한 것이 아니라, '점거'한 것이다. 이 전제에서부터, 그저 전편의 영광에 기댄 안이하고 게으른 속편으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결의가 읽힌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지금의 '비정규직, 혹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20대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보노라면, <주유소 습격사건 2>는 뜻밖에도 근래에 나온 영화들 중 가장 20대들의 처지를 깊숙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면서도, 이를 우울한 절망보다는 떠들썩한 소동극으로 그려내는 드문 영화다.
20대 필자로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확보해 나가고 있는 《뉴라이트 사용후기》의 저자 한윤형 씨는 지금의 20대들에 대해 "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낙오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라고 분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8, 90년대의 20대들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사회체제나 기성의 질서에 저항하는 '루저의 정서'를 지녔다면, IMF 이후의 20대들은 '잉여의 정서'를 지녔다고 지적한다. 이는 사회학자이자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의 저자 엄기호의 주제의식과도 맞닿는 부분이다.
<주유소 2>의 주인공들은 한윤형이나 엄기호가 지적한 바로 그 '20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녔다. 플래시백으로 삽입되는 이들의 과거를 보노라면, 이들은 사회적 모순에 반발심을 느끼고 부모와 기성세대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간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했다가 주저앉게 된 자신의 현실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관객들은 전편의 네 명과 달리 이번의 주인공들에게 크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좌충우돌과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는 20대들을 '단 한 번'의 실수로 영원히 탈락시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우리사회의 생존경쟁을 풍자하는 것이지 않는가. 네 명은 각자 나름의 능력과 장기를 지녔음에도, 주유소 아르바이트 직에 '면접까지 보면서' 응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정규직도 아니고, 심지어 비정규직도 못 되는 단기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전전해야 하는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이나 기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이런 이들이 주유소를 '점거'하는 것은, 박사장(박영규)의 상습적인 임금 체불과 인격모독 때문이다. 이후 이들의 행보는 매우 흥미롭다. 한 명이 그만두자 모두들 연쇄적으로 그만둔 뒤, '받아야 할 돈은 받아야 한다'는 말에 금세 뜻을 모은다. 이것은 전편에서 '그냥' 저질렀던 습격과 달리, 실은 '떼인 돈을 받기 위한' 자기구제이자 점거투쟁이 된다. 결국 '생존권 투쟁'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하룻밤 반값세일로 벌어야 하는 총 목표액을 이들이 각자 받아야할 노동의 댓가의 합으로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자 점거를 푼다. 그 와중 주유소 사무실에 '인질'로 잡혀있던 20대 내레이터 모델 여성들과도 연대를 이루는데, 이 여성들에게 반값세일 이벤트를 홍보하는 내레이터 모델로 협조를 요청한 뒤 그 노동의 댓가를 정확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니저가 아니라 그 여성들 각자에게 직접 돈봉투를 건넨다.
네 명의 캐릭터가 균형을 이루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현선과 지현우에 포커스가 더 맞춰져 있다.
더욱이 이들의 관계는 전편보다 오히려 '민주적으로' 발달한 양태를 보인다. 전편에서는 노마크가 리더쉽을 독점하고 딴따라가 이를 보좌하며, 무대뽀는 딴따라에게 툭하면 "꼴통같은 새끼"같은 말을 들으며 일당 내에서도 은근한 무시를 받았다. 뻬인트는 이들 모두와 떨어져서 '혼자 노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2편에서는 이런 수직적인 서열 대신 보다 수평적인 '네트워크'로서의 관계가 관찰된다. 원펀치와 하이킥(조한선)이 보다 전면으로 나서기는 하지만, 이들 네 명은 대체적으로 성격도 장기도 다른 만큼 각자 자신의 영역을 독립적으로 관할하며 수평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에필로그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하룻밤의 소동 이후 전편에서의 네 명이 각자 흩어진 채 미진하나마 나름의 방식으로 꿈을 이루거나 한을 풀었다면, 이번 편에서의 네 명은 어느 영화촬영 현장에 '함께 모여' 단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나마도 짤린 뒤에는 "이제는 뭐할까" 고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도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함께이다. 각자 성격도 장기도 다르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신들이 '뭉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나면 원펀치가 내세우는 "재미있잖아"라는 말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사실 1편에서 노마크의 "그냥"이라는 말은, 구구절절한 사회의 모순과 이들의 억울함과 한을 그저 쿨하게 압축시킨 한 단어였다. 2편의 "재미있잖아"는 그저 단순하고 순간적인 쾌락을 가리키기보다는, 꿈 없는 현실을 버티기 위한 단 하나의 수단이자, 그러한 현실의 '희생자'가 아닌,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초월하는 자'의 덕목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재미'를 일정한 과정을 통해 승화시킨 결과물을 보통 '예술'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결국 주유소를 나온 뒤 다른 곳이 아닌 영화촬영 현장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다 말이 되는 셈이다. 특히 대중문화/예술이 소위 순수 예술을 상당 부분 압도해버린 지금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유소 2>는 20대들의 이상한 생존권 투쟁과 연대를 다루는 소동극이 된다. 그 와중 주유소를 들르는 '손님'으로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술에 취해 억지를 부리는 조중일보의 기자, 어린 여자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허세만 부리는 중년의 소위 '매니저', 인근 주유소의 다른 사장, 법무부 직원으로 변장한 탈주범들(정확히 하자면 본질은 깡패이나 국가권력의 제복을 입고는 이상한 애국심을 강요하는 현재의 국가질서)이다. 전편에서의 풍자대상이 '천민 자본주의' 하의 부르주아 및 그들의 자식들이었다면, 이번 편의 풍자대상은 오히려 국가와 언론 권력과 20대를 착취하는 기성세대다. 퇴행이 아니냐고? 그렇긴 하지만, 이 역시 영화의 퇴행이 아니라 현실의 퇴행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주유소 2>가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영화가 풍자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재미없고 암담하기 때문이다. 웃음이 그나마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 있었던 시대도 못된 채, 웃음으로도 달랠 수 없는 공허감이 지배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과연 영화의 실패라 말할 것인가. 오히려 <주유소 2>는 지금의 현실을 보다 세밀하고 정밀하게 영화 안에 담고자 그 어떤 영화보다도 치열하게 노력한다.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 적자생존을 펼쳐야 하는 20대들을 향해 '88만원 세대'라고 협박하거나 '희망이 없다'며 무시하는 대신, 20대들의 현실을 애정으로 들여다보고 "너희 잘못이 아니야"라고 토닥인다. 이들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한편 이들의 현실을 만들어낸 '기성세대의 책임감'을 통렬하게 풍자하는 것이다. 이런 영화를 어찌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렸던 글 (2010. 2. 6)
ps 1. <주유소 1>을 만들었을 당시 김상진 감독에게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이 선행했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유소 2>에서는 분명히 보인다. 설사 그것이 어떤 학적인, 일관된 구조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그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주유소 2>에서는 그가 지금의 20대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매우 강력한 일관성 하에 매우 윤리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 어쩌면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실패의 원인일 거라고도 짐작한다. 그러나 영화에 분명하게 일관성을 이루며 드러나고 있는 감독의 이 시선을 읽어주는 게, 영화글 쓰는 이의 나름의 예의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ps 2. 물론 동의하지 못하거나, "해석에 영화를 뜯어맞췄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이런 비난을 굳이 부정하거나 수용하지 못할 바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유소 2>에 대한 반응을 보려고 검색하다가, 듀나 게시판에 누군가 이 글을 링크해놓고 반응을 묻자 또 다른 누군가가 댓글에 "맙소사, 기자가 너무 이빨을 깠어요"라고 써놓은 것을 보니 이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더라. 차라리 내 글이 후지다거나 글을 못 썼다고 비난했다면 이렇게 거슬리지는 않았을텐데, 이런 멘트는 '글쓰기의 윤리'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으로 느껴져 모욕감까지 느껴지더란. 내게는 "너 글 좆같애"보단 저런 게 더 '저질 악플'로 느껴진다. 이빨을 까다니, 사람을 무슨 홍보 알바로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ps 3. 그래도 조한선은 영화에서 안성기와 투톱을 해본 적도 있는 배우인데, TV에서 주로 활동했던 지현우가 비중이 더 큰 캐릭터를 맡았다는 게 살짝 의외였다. 그리고 비록 연기 테크닉은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지현우에게 쇼맨십이나 스타로서의 아우라가 보이는 것도 조금 놀라웠고. 지현우가 그리 뛰어난 가창력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뮤지컬 <그리스>의 대니 역으로 데뷔하게 된 것도 워낙 오디션 장에서부터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스타로서의 자질'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이 영화를 보니 그 에피소드가 대충 수긍이 가더라. (난 한번도 지현우한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골드미스 다이어리>에서도 별 깊은 인상은 못 받았었는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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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리치 | 셜록 홈즈 Sherlock Holmes (2009) - 2010/08/05 15:51
역사상 가장 '팬시'한 홈즈가 아닐까 싶다.
가이 리치 감독이 돌아왔다.
데뷔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를 내놓을 당시 '새로운 천재의 등장'이라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스내치>만 해도 호평을 받았지만, 당시 부인이었던 마돈나를 주연으로 만든 <스웹트 어웨이> 이후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팽겨쳤던 그다. 심지어 <스웹트 어웨이>는 한 해 최악의 영화에 상을 안기는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감독상을 받을 정도로 조롱을 당했다. 이후 비교적 저예산으로 <리볼버>, <록큰롤라>와 같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한번 돌아선 관객과 평단의 마음을 되돌리기란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이 영화들은 국내에는 수입조차 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셜록 홈즈>를 만든다면서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주먹질에 육탄전을 즐기는 '액션 영웅'으로서의 셜록을 그린다고 했을 때, 기대보다 우려가 컸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반짝하고 등장했으나 금방 시들어버린 감독이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 거기에 마구잡이 헐리웃식 액션영웅으로 변모할 것 같은 셜록 홈즈. 그럼에도 기대를 버리지 못한 것은, 역시나 그가 <록 스탁...>과 <스내치>를 내놓았던 감독이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셜록을 연기할 거란 점 때문이었다. 뻔한 슈퍼히어로 영웅의 운명을 지녔던 <아이언맨>에 독특한 뉘앙스를 덧입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면, 셜록 홈즈를 그저 빤한 액션영웅으로 그리진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분명 있었다. 거기에 그저 홈즈의 조수가 아닌 동등한 협력자로서의 왓슨 캐릭터를 주드 로가 출연하며, 그 콧대높은 남성우월주의자 셜록 홈즈가 유일하게 무릎을 꿇은 여성 아이린 애들러가 적지 않은 비중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 역시 기대감을 높이는 데에 일조했다.
마침내 베일을 벗은 <셜록 홈즈>는 '절반의 성공'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충분히 즐겁고 매력적이지만, 가이 리치에 건 일말의 기대는 결국 배반을 당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근육과 주먹질 자랑에 여념이 없으신 RDJ 버전의 홈즈. 낯설지만 익숙하다...
가이 리치가 야심차게 내놓은 이 영화는 기존에 우리가 머리에 그리고 있던 셜록 홈즈와는 사뭇 다른 성격의 셜록 홈즈를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새로운 셜록 홈즈의 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작에서 제시됐던 요소들을 재해석하고 복원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훌륭하게 그려낸 새로운 셜록 홈즈는 우리가 익히 하는 그 사냥캡에 체크무늬 상의를 절대로 입지 않는다. 파이프 담배를 물기는 하지만 삽화 속 셜록 홈즈의 그것보다 단순한 직선형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상대의 급소를 어떻게 내리쳐야 그가 제압될지 잘 아는 무술의 달인이다. 특히 상대의 급소를 연달아 가격하는 장면에서의 고속 촬영 카메라 촬영은 홈즈의 정확한 계산과 판단을 그대로 드러내는 한편, 타격에 반응하는 신체의 움직임을 세세히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며 쾌감을 선사한다. '너무 빠른' 액션에서 오히려 시각적 쾌감을 놓칠 수 있는 점을 배려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셜록 홈즈>가 묘사하는 홈즈의 일상적인 생활과 취미는 원작에서 제공한 것을 크게 거스르는 것이 없다. 일이 없을 때의 홈즈가 대단히 게으르다는 사실은 이미 원작에서 제시된 것이고, 잘난 척의 거만한 독설은 사실은 사회성과 사교성이 부족한 성격을 가리는 방어기제일지 모른다는 것 역시 셜록의 팬들이 어느 정도 짐작했던 사실이다. 나아가 원작에서의 홈즈 역시 수준급의 권투실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던 만큼, 영화가 제시하는 액티브한 성격의 홈즈 역시 충분히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하다. 한마디로 원작의 정수를 크게 훼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가이 리치의 새로운 <셜록 홈즈>는 원작에서 분명 제시됐으나 그간 무시돼온 '액티브한' 셜록 홈즈를 그려낸다. 어찌 보면 이는 원래의 셜록 홈즈를 재해석하고 복원한 것에 가깝다.
주드 로가 그려낸 왓슨 역시 기존의 홈즈 영화에서와는 달리 홈즈 못지않은 무게감과 존재감을 갖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실 왓슨은 그간 홈즈의 믿음직한 파트너라기보다 홈즈의 천재성을 돋보이게 해주기 위해 어수룩하고 때로는 맹하기까지 한 인물로 격하되는 경향이 종종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왓슨은 원작에서도 군인 출신으로 반듯하고 정돈된 생활을 하며, 발이 묶인 홈즈 대신 활약을 하기도 하는 등 홈즈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존재다. 영화는 특히나 결혼을 앞둔 왓슨에 대해 불평을 하는 홈즈의 에피소드를 충실히 살려낸다. 홈즈는 영화 내내 왓슨의 결혼을 못마땅해 하며 훼방을 놓지 못해 안달한다. 홈즈 팬들 사이에서 기정사실화 되다시피 한 홈즈와 왓슨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의심을 영화 내내 살려놓고 있는 것. 여기서 발생하는 두 사람의 투닥거림이 영화에 큰 활력을 주는 코미디로 작용한다.
액션 어드벤처 영화로서 <셜록 홈즈>는 분명 아주 새롭지는 않아도 적지 않은 즐거움과 쾌감을 제공하는 영화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홈즈와 주드 로의 왓슨 콤비는 분명 '올해 최고의 커플' 순위에 올릴 만하며, 은비학과 마법의 트릭 때문에 길을 잃을 뻔한 셜록이 결국 과학적 논리와 추리로 사건을 풀어나가며 활약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다. 풍성한 드레스와 남성용 정장을 오가며 기계에도 능하고, 그 대단한 홈즈마저도 어린아이처럼 갖고 노는 아이린 애들러도 영화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홈즈의 숙적인 모리아티 교수가 짧게 등장하며 속편을 예고하는 것 역시 기대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속편에서는 홈즈의 형인 마이크로프트 경도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품게 될 정도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록스탁...>과 <스내치>에서 보여줬던 가이 리치의 독특한 매력이 <셜록 홈즈>에선 별로 보이지 않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순해졌고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며 스토리 역시 단선적이다. 전세계 만인이 즐길 수 있는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변화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배트맨> 프렌차이즈 안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자신의 족적을 선명히 새겨놨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가이 리치가 <셜록 홈즈>를 통해 증명한 것은 결국 그가 대형 상업영화를 매끈하게 잘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의 의미는 자명하다. 가이 리치 감독의 앞으로의 경력은 별 막힘없이 순탄하게 풀릴 것이며 앞으로도 여러 편의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초기작들을 사랑했던 관객들은 결국 '블록버스터를 무난하게 만드는 평범한 감독'을 얻는 대신 걸출하고 독창적인 영화 악동을 영영 잃어버린 셈이 됐다. 결국 가이 리치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아니었던 셈이다.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렸던 글. (2009. 12. 23)
ps 1. 개봉 직후부터 당연히 모라이어티 교수가 등장하는 속편 얘기로 분분했는데, 영화 나온 직후만 해도 브래드 피트가 관심있다는 소문이더니 요즘은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대세인 듯. 몇몇 해외 매체에서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캐스팅 확정됐다고 보도도 나왔으나, 8월 2일자 다른 뉴스에서는 대니얼의 매니저가 사실이 아니라며 부인했다는 설도 있다. (IMDB의 관련페이지를 참조하시라.) 브래드 피트의 모라이어티라니 좀 뜨악스러웠는데, 정말 대니얼 데이 루이스라면 좋겠다. 문제는 대니얼 님이 해주시느냐 마느냐... 어쨌든 <셜록 홈즈 2>는 이미 내년 12월로 개봉일도 정해진 모양이다. 촬영은 올해 가을부터 들어간다고. 감독은 여전히 가이 리치.
ps2. 근데 사회성 제로 잘난척쟁이 홈즈도 꼼짝 못하는 막강 카리스마 미중년 마이크로프트 경이 속편에 등장해주시길 바라는 건 저 뿐인가요.
ps3. 영화를 처음 보고 이 글을 썼던 당시를 회상해보니, RDJ가 셜록 홈즈로 딱이었다기보다는(그게 기존 이미지와 다른 셜록이라 하더라도), '고전적인' 영국풍의 액션활극의 주인공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이다. 말하자면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가 19세기 런던에서 탐정질로 놀고먹었던 '전생' 버전을 즐기는 기분이었던. 블록버스터의 당의정으로 어느 정도 중화된 느낌은 있지만 역시 <셜록 홈즈>는 괴작이었다는 결론. 상당히 즐거운 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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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찬 | 나는 행복합니다 (2008) - 2010/08/04 18:53
포스터는 많이 사기라능.
부스스한 머리를 고무줄로 묶는 한 여자의 뒷모습. 발을 겨우 끌듯 걷는 그녀의 걸음은 느리고 위태롭다. 약간 비틀대듯 걸어가던 그녀의 앞모습을 카메라가 비추자, 무릎까지 내려올 듯 무거운 눈가의 다크서클과 터진 입술이 눈에 띈다.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얼굴과 몸 전체를 가득 짓누르고 있는 피로감과 무기력감만 봐도, 그녀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정신병원의 간호사인 그녀, 수경(이보영)이 새로이 맞게 된 환자는 부스스한 머리와 역시 터진 입술을 한 조만수(현빈)이다. 가족친지가 아무도 없어 마을 이장의 손에 이끌려온 그는 의사와의 첫 면담에서, 종이를 꺼내 볼펜으로 '자기가 발행한' 수표를 써주며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도박빚에 미친 형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다 정신이 나가버렸다는 환자다. 영화는 이때부터 병원에서 생활하는 만수의 사연과 정신과 수간호사인 수경의 사연을 교차한다. 만수의 사연은 명백히 입원하기 전 있었던 '과거'의 일이지만, 수경의 사연은 현재진행형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너무나 큰 고통을 받았거나 받고 있으며, 그 사연이란 특정한 개인에게만 일어나거나 혹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흔한 보는 희귀하고 특별한 사연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익히 듣고 보았음직한 흔하고 일상적인 사연이라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자식도 못 알아보고 어쩌다 집밖을 나가면 길을 헤매기 일쑤다. 정비소를 함께 운영하던 건실한 형은 도박에 미친 후 돈을 내놓으라며, 그리고 이제는 정비소 계약문서를 내놓으라며 만수를 괴롭힌다. 심지어 한밤중에 만수의 목을 조르기까지 한다. 서울에 올라간 뒤 연락이 끊긴 연인은 어느 날 그를 찾아와 새 사람을 만났다며 이별을 고한다. 수경의 사연도 다를 바 없다. 암 말기인 홀아버지 때문에 재산을 모두 날린 그녀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면 아버지의 병실에서 간병을 하며 만성적인 피로와 불면증에 시달린다. 몰래 데이트하던 같은 병동 의사는 그녀를 멀리하고 새 연애를 하면서 그녀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나날이 쌓여만 가는 빚독촉 고지서와 전화 역시 잠시도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흔하고도 익숙한 사건들과 고통들.
그와 그녀가 착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은 배가 된다. 만수는 목을 조르는 형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노래방에서조차 큰소리를 내지 못한 채 겨우 뒷모습만 보이며 어깨만 가늘게 들썩인다. 수경은 한번쯤 도달할 곳 없는 원망 한 번 입밖에 내놓을 법한데도, 마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가 마지막 희망이기라도 한 듯 아버지의 병간호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세상은 착한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하고, 착한 사람들은 같은 불행이라도 착하지 못한 우리들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는다. 만수가 병원에 와서야 (가짜라고는 해도) 비로소 행복을 찾았듯, 어쩌면 지금 만수의 저 미쳐버린 모습은 수경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형에게 반항 한 번 않은 채, 노래방에서 혼자 노래하며 슬픔을 달래던 만수. 현빈의 도약.
시간차를 두고 고통을 겪었던/겪고 있는 두 남녀는 비록 환자와 간호사의 관계지만, 서로의 고통을 '인지'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지적 관계다. 과대망상 속에서 행복을 찾은 만수는 고통에 대한 위로를 다른 환자가 아닌 '간호사'인 수경에게 건넴으로써 수경을 환자의 커뮤니티 안으로 끌어들인다. 수경은 특별히 간호사와 환자의 관계를 파기하지는 않지만, 다른 환자한테와는 다소 다른 톤으로 만수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그들은 환자와 간호사 이상의 관계로 다가서진 않으며, 특별히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희미한 연대의 순간, 혹은 찰나의 고통의 접점. 그 드물고 귀한 순간, 그들은 상대에게 '당신의 고통을 감지했다'는 희미한 싸인만을 보낼 뿐이다. 서로에게 어깨를 빌려주기엔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자신의 짐의 무게가 너무나도 크다. 그 희미한 순간이 과연 그들에겐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지독한 고통 속에서 과연 '행복'의 순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이 영화가 진정으로 다루는 것은 '고통'이다. 주인공들의 지독한 불행과 고통은, 현실의 갑남을녀가 겪는 일반적인 불행들과 너무 닮아있다. 그런 현실을 직접 겪거나 간접적으로 주변에서 노상 보고듣는 관객들의 입장에선 선뜻 이들의 불행과 행복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들어서기가 힘들다. 실제로는 매우 화사한 외모를 갖고 있는 두 배우가 단순히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추레한 옷차림을 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으며 어디에도 구원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영화의 엔딩에서도 예정된 것이다.
이청준의 원작소설이 끔찍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 것과 달리, 영화는 그 에피소드를 생략한 채 '완치되어 퇴원한' 만수가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달리는 장면으로 끝을 낸다. 오토바이에 달린 희미한 헤드라이트가 간신히 비추는 어두컴컴한 밤길,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다. 수경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수경은 비로소 병원(그가 근무하는 곳과 간병을 하던 곳, 둘 다)을 벗어나 혼자만의 여행을 간다. 그러나 그렇게 절박하게 수경을 땅 위로, 맨정신으로 붙잡아매던 아버지가 죽은 뒤 홀로남은 그 삶을, 과연 그녀는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영화의 보도자료는 그 엔딩이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끝도 없이 이어진, 오토바이의 가느다란 헤드라이트만 켜진 그 어둡고 긴 길을 보며 희망을 느낄 관객들이 얼마나 있을까. 수경과 만수에게 놓인 앞으로의 삶의 시간을 예고하는 그 길엔 여분의 빛도 동반자도 없다. 원작의 드라마틱한 엔딩이 거세된 채 남은 영화의 엔딩은, 오히려 너무 끔찍하게 현실을 닮아있다. 너무 끔찍해서 도저히 불행하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는, 차라리 지독한 역설로서의 행복을 말하며 그 불행을 눈앞에 정면으로 들이미는 이 영화, 참으로 지독하다.
모습 전체에 '지치고 피곤한 삶'이라고 대놓고 써 있었던 이보영의 모습이 참 인상깊었었는데.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실었던 글. (2009. 12. 7)
ps. 우울한 내용 때문에 흥행이 안 되는 건 이미 예상됐던 것이지만, '너무 조용히' 지나가서 참으로 의아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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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컨 존스 | 더 문 Moon (2009) - 2010/08/03 00:34
원제는 그냥 '문'이다
황홀하고 화려한 CG와 극적인 액션, 긴박한 스릴의 상황이 동원되는 SF(혹은 SF를 표방한 액션 활극)가 워낙 많이 나오고기 때문에, <더 문>은 일견 지루하고 초라한 SF로 보일 수 있다. 허허벌판 달 표면 위에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기지의 외관과 실내의 풍경은 물론이고, 주연배우도 달랑 샘 록웰과 케빈 스페이시 두 명이다. 게다가 케빈 스페이시는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그는 인공지능 컴퓨터 '거티'의 목소리를 맡았다.) 샘 록웰의 아내나 딸, 혹은 이 우주기지를 건설한 글로벌 기업의 중역은 거의 단역으로나 등장하는 정도다. 이 정도 되면 거의 배우 한 명의 '모노드라마'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더 문>은 역으로, 돈을 별로 들이지 않아도 훌륭한 연기와 연출만으로도 흥미진진한 SF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영화다. 신인감독인 던컨 존스가 이 영화에 들인 제작비는 총 5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50억 남짓하는 돈이다. 그러나 샘 록웰의 황홀한 1인 2역 연기에 영화 자체가 던지는 묵직한 주제의식이 더해지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수작'이 됐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샘 벨(샘 록웰)은 달에 우주기지를 세운 한-미 합작 글로벌 회사에 3년 계약을 맺고 달 기지에서 외로이 근무하고 있는 남자다. 그의 임무는 달 표면에 쌓여있는 헬륨3를 지구에 정기적으로 송출하는 것. 전세계가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경험한 뒤 달 표면의 헬륨3를 무공해 청정원료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정된 근미래가 배경이다. 그리고 영화의 공간은 철저하게 달 표면 위에 세워진 '사랑' 기지에 한정되며, 그나마도 기지 안 세트가 주요 공간이다. 지구와 실시간 통신은 끊어진지 오래고, 샘은 목성을 통해 전송된 영상 메시지만으로 지구 위의 가족과 연락을 취할 수 있을 뿐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정해진 일을 하며, 남는 시간을 모형 조립과 흘러간 옛 TV쇼를 보는 걸로 떼우는 매우 외롭고 단조로운 일과다.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은 그가 계약만료 2주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지구로의 귀환을 고대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내던 그는 이상한 환각을 보기 시작하고, 원료 채취 임무에 나섰다가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어떻게 구조됐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이 기지 안 의료실에서 깨어난다. 영화의 진짜 미스테리와 사건은 이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 이후부터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경이로운 샘 록웰.
<더 문>은 SF장르에서는 매우 익숙한 설정인 '복제인간'을 소재로 한다. 기지 안 금지된 구역 안에는 똑같은 외모로 잠들어있는 무수한 샘 벨이 즐비하고, 3년의 시한부 목숨을 가진 이 복제인간들은 자신이 클론임을 모른 채 그저 조작, 주입된 기억만을 가지고 '계약 초기 사고로' 깨어났다가 3년을 채운 뒤 죽는다. 기한이 만료되거나 극한 부상을 당한 클론은 폐기되며, 살아 생전,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클론임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진짜 사건은, 절대로 서로의 존재를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두 클론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셈이다. 하지만 익숙한 설정과 장르문법을 사용하면서도, <더 문>은 매우 새롭고 참신하며 흥미롭다.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 아니 의심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가 실은 클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격일 터이다. 영화는 '이전의 샘'이 '새로운 샘'을 만난 뒤 비밀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혼란과 충격뿐 아니라, 그로 인한 정서적 파장과 고통을 매우 절절하게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복제인간 설정의 영화가 일반적인 '도플갱어 공식'(자신의 도플갱어를 본 이는 반드시 죽는다, 혹은 한쪽이 다른 쪽을 죽이려 든다)을 따르는 것과는 달리, 두 클론이 서로 유대감을 느끼며 서로 협조하고, 궁극에는 다른 이를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들이 특별히 착하고 희생적이어서라기보다는, 극도의 고립감과 고독, 혹은 서로에 대한 동질감과 연민이 충격과 혼란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서로 성격이 다른 두 샘(이전의 샘은 보다 온화한 성격에 다소 무기력한 면이 보이는 반면, 새로운 샘은 좀더 다혈질에 에너제틱하고 급한 성격이다)은 서로 몸싸움을 벌일 정도로 격한 대결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들을 착취한 거대기업의 음모에 맞서는 한편 예정된 운명을 거스르고 지구로의 귀환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영화는 흔하디 흔한 '클론 설정'의 영화가 손쉽게 드러내는 주제인 '정체성'을 보다 심도있게 다루는 동시에, 이 한계를 넘어 도약한다. 한국의 관객 입장에서는 클론들의 운명을 보며 1회용으로 소모되고 버려지는 일반적인 비정규직의 현실을 겹쳐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감독이 이를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애초에 7, 80년대에 나온 무수한 '낡은 SF영화들' 스타일의 SF영화를 기획하면서 주인공으로 '일하는 노동자'를 설정한 것은 이러한 해석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첫 샘과 두 번째 샘을 연기할 때의 샘 록웰은 확연히 다르다. 외모뿐 아니라 성격, 말투, 표정까지도. 위대한 샘 록웰.
두 명의 샘 벨(정확히 하자면 세 명)을 연기해 내는 샘 록웰의 연기는 한마디로 '환상적'이다. 두 클론의 서로 다른 성격을 묘사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비밀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나 고독, 단조로운 일과에서의 무기력감 등 복합적인 감정들을 절절히 표현해낸다. 굳이 SF의 팬이 아니어도, 샘 록웰의 연기만으로도 황홀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사실 이 영화는 애초에 샘 록웰의 팬이었던 감독이 자신의 차기작 <뮤트>(리들리 스콧이 제작을 맡았다)의 캐스팅 과정에서 샘 록웰과 의견차가 생기자 '오로지 샘 록웰과 작업하기 위해' 쓴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사실 샘 록웰은 국내에 '스타급 배우'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연기에 반한 조지 클루니가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웰컴 투 콜린우드>를 위해 조연을 자처하고 제작까지 맡은 건 이제 유명한 일화가 됐다. 이후 조지 클루니는 자신의 연출 데뷔작 <컨페션>에서 샘 록웰을 주연으로 기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샘 록웰의 연기에만 전적으로 기대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다소 소박한 스토리라인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서 스릴을 만들며 긴장과 공포, 충격을 만들어내는 솜씨와, 샘 록웰의 연기를 적절하게 조율하고 대립시키는 던컨 존스의 연출 솜씨는 신인감독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고 솜씨있다. 리들리 스콧이 자신의 후계자로 던컨 존스를 지목한 것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던컨 존스가 위대한 뮤지션 데이빗 보위의 하나뿐인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기지 이름이 '사랑'(한글로도 또렷이 표기된다)인 것은, 감독이 워낙 한국에 관심이 많은 데에다 시나리오를 쓸 당시 박찬욱의 <올드보이>를 보며 오마주를 바치고 싶어했기 때문. 감독이 굳이 한국 개봉에 맞춰 내한해 기자간담회 등을 진행한 것도 이같은 한국에 대한 관심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실린 글 (2009. 11. 16)
ps1. 이 훌륭한 영화가 작년과 올해 초 미국의 각종 시상식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시상식 시즌이 되면 각 배급사들은 자신들의 영화 중 후보가 될 만한 영화들을 뽑아 DVD 패키지를 만들어 심사위원들에게 뿌리며 캠페인을 벌이는데, 던컨 존스 감독이 자신의 트위터(@ManMadeMoon)에서 밝혀 나중에 헐리우드리포터 등에 기사화된 바에 따르면, 미국 배급사인 소니 측에서 "이런 저예산영화는 패키지에 찍을 워터마크 비용이 더 든다"면서 <더 문>을 빼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언맨>의 감독 존 파브로는 이 사실을 알고 소니에 굉장히 화를 내었으며, <스타더스트> <베오울프> 등의 작가 닐 게이먼은 던컨 존스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어쨌든 이 영화는 던컨 존스의 고향인 영국에서는 BAFTA (영국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ps2. 한편 던컨 존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위대한 연기를 보여준 샘 록웰 만큼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야 한다"며 자신의 블로그에서 "샘 록웰을 아카데미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올해 <크레이지 하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제프 브리지스는 충분히 상을 받을 만한 연기를 펼쳐보였을 것이다. (미안, 영화를 못 봤다.) 그러나 샘 록웰이야말로, 작년 모든 영화들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위대한 남자배우였다. 물론 그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훌륭한 연기를 보여줄 것이다.
ps3. 그러므로 결론은, 샘 록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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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 손예진, 고수 주연의 영화 <백야행>이 10일 오후 2시 언론, 배급시사를 갖고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백야행>은 국내에도 탄탄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원작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신인감독 박신우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다.
영화 <백야행>은 유미호(손예진)의 섹스씬과 김요한(고수)의 살인씬이 교차되면서 시작한다. 피해자는 14년 전 벌어진 살인사건에서 용의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다. 그리고 유미호와 김요한은 각각 14년 전 살인사건의 용의자의 딸과 피살자의 아들이다. 영화는 이들 둘 각자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이들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듯 만 듯한 관계를 파고들어간다.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유미호의 뒷조사를 하던 약혼자의 비서실장 이시영(이민정)과 14년 전 사건의 담당형사였던 한동수(한석규)의 눈을 통해서다. 과연 14년 전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 14년간, 이들은 대체 어떤 관계를 맺어온 것일까?
연쇄살인, 피해자와 가해자 유족의 한 공간에서의 공존, 그리고 근친살해와 유아강간까지. 영화는 온통 자극적인 설정과 사건으로 넘쳐난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유미호와 김요한의 사연과 비밀은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이으면서 조금씩, 천천히 밝혀진다. 그리고 마침내 14년 전의 비밀이 밝혀졌을 때, 관객의 입장에선 이들을 쉽게 단죄하기도, 그렇다고 동정하기도 어려운 심적 갈등에 놓인 채 그들에게 압도되고 만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마도 이것이 원작이 가졌던 가장 큰 매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가져온 14년간의 관계야말로 이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했을 때 기획자들의 주목을 가장 끌었던 요소였을 것이다.
총 세 권 및 20여 년에 달하는 원작의 시간과 분량의 무게 때문인지, 안타깝게도 영화는 조금 줄이거나 쳐냈으면 좋았을 곁가지들이 많아 산만한 편이다. 다소 아귀가 안 맞더라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묵직한 힘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영화는 소소한 부분까지 아귀를 챙기면서도 정작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일관된 힘이 없이 사건을 계속 나열하는 식이다. 각 캐릭터와 이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 역시 거대한 미스테리가 한 조각 한 조각 맞춰져 간다는 쾌감을 주기보다 끝까지 이질적으로 따로 논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다. 한석규나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한 차화연, 정인기, 임지규 같은 좋은 배우들이 나오는데도 그렇다.
사실 이 영화 자체가 거대한 미스테리이기도 하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점들로 가득차 있는 까닭이다. 단역에 불과한 형사들 하나하나를 굳이 클로즈업으로 잡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관객을 억지로 밀착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한동수의 사연은 어떠한가. 과연 어느 누가 그런 현장에 자기 아들을 데려가 그런 부탁을 한단 말인가. 민경호나 호스트바의 '약통' 캐릭터가 굳이 화면에 나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영화를 만든 이들이 유미호와 김요한을 너무 연민하고 동정한 까닭에, 이들의 잔인무도한 악행이나 괴물성은 '절절한 사랑이야기' 뒤로 너무 쉽게 면죄부를 부여받는다. 원작에서는 전후 일본의 재건과 자본주의화에 있어 암흑의 역사를 통렬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라던 두 사람은 영화 버전에서는 어찌 그리 '가여운 피해자'로만 그려지며 모든 책임이 당연히 부모 세대에만 돌려지는지 모르겠다. 필요없는 '어린 피해자'를 만든 건 분명 유미호인데,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그를 '외면'을 하는 것이 마치 그 피해자를 지키기 위한 결단인 양 화면을 처리한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왜 인물들에게 변명을 자꾸 보태주는 것일까. 그냥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인물들로 그려졌어도 비극은 충분하지 않은가. 혹은 한 인간에 저질러진 죄악에 대한 '대속'의 과정이 더 큰 악행이 되는 그 아이러니만 잘 표현해냈어도 반은 성공하지 않았을까.
영화 속 모든 주요 캐릭터들과 감독이 이들 남녀를 너무 잘 이해하고 보듬어 안고 알아서 변명까지 해주는데 굳이 관객까지 그래야 할까 싶다. 온갖 악행들이 저질러지지만 아무도 속죄하는 이는 없다. 그나마 한 사람을 향한 속죄는 더 많은 사람들을 향한 악행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연민은 넘쳐난다. 원작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했던, 관객의 어깨에 응당 지워줬어야 할 '선/악의 무게'의 균형점을 잃었거나, 이들의 악화일로의 선택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채 '변명'만 늘어놨거나. 이야기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차라리 일찌감치 니들끼리 도망가 살지 그랬니." 같은 반응이 더 당연해 보인다. 아니, 어쩌면 이런 식의 책임전가와 자기연민이야말로 지금 한국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정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그것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인 건지도 모른다.
+ 프레시안에 올라갔던 기사 (2009. 11. 10)
ps1. <백야행>이 언론시사를 한 뒤, 리뷰기사로는 아마 프레시안의 이 글이 처음이었던듯. 그래서인지 별로 좋지 않은 평에 당장 영화홍보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받지 않아서 다행, 만약 내가 받았다면 영화사와 싸웠을지도.
ps2. 손예진은 <작업의 정석>에 나왔을 때가 가장 잘 어울렸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난 이 아가씨가 진지한 척, 비밀이 있는 척, 혹은 카리스마 있는 척 무게잡는 걸 보면 적응이 좀 안 된다. 배우에 대한 선호도의 문제가 아니라, 손예진은 살짝 얄팍하고 가벼운 역을 라이트하고 사랑스럽게 - 애교를 섞어 - 연기하는 게 가장 잘 어울리는데, 의외로 글래머 몸매인 것 때문에 종종 '섹시한 척'하는 역을 맡는다. 보는 나는 심하게 민망한 게 사실인데, 남자관객들은 의견이 좀 다른 것도 같고...
ps3.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씬은, 한석규와 차화연이 그 낡은 차화연의 바에 앉아 대화하던 씬. 그저 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포스가 넘쳤는데, 고수-손예진이 차지하는 다소 가벼운 느낌의 씬(뭘해도 어쩐지 가볍게 느껴지더란)과 엮이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들어 안타까웠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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