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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 | 부운 浮雲 Floating Clouds (1955) - 2011/08/09 04:49
구글신이 찾아주심
이 남자가 얼마나 한심하냐 하면, 아내를 놔두고 전쟁 중 파견지에서 젊은 여자랑 바람피운 주제에, 패전 후 집에 돌아와서는 마누라 눈치는 더럽게 보면서 여자를 내팽개친다. 아니 좋아, 그래도 조강지처 버리는 건 아니지. 문제는 그래놓고 잊을 만하면 찾아와서 자자고 하거나 돈을 꿔달라고 한다는 것. 나타나는 횟수가 반복될수록 행색은 점점 더 남루해지고 곤궁하기 짝이 없고, 추측컨대 돈도 여자가 다 쓰는 것 같다. (여자는 남자와 가정을 꾸릴 꿈이 깨진 후 미군현지처 노릇... 같은 걸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면서도 심지어 이 여자와 같이 여행을 가서는 여자가 보는 눈앞에서 여관집 주인 아내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고는 여행에서 돌아와 소식을 딱 끊어버린다. 나중에 찾아가보니 그 여관집 여자와 살림까지 차렸다. (아니 마누라 버릴 수 없어서 이혼/결혼 못 한다며!) 무능하기 짝이 없는 주제에 또 '남자'라는 가오는 잡고싶...은 건가 하면, 글쎄 또 이 여자한테 와서 돈 어쩌고 하는 걸 보노라면 아주 그냥 콱. 심지어 제 마누라 죽었는데 장례비가 없다며 돈을 꾸러오는데, 그래도 죽어도 이 여자와 결혼하겠단 소리는 안 하고 잊어버리라는 둥, 각자 제 갈 길 가자는 둥, 그래놓고 또 저 아쉬우면 찾아오는 거다.
그런데 이 여자는 번번이 이 남자 때문에 울고 상처받고 심지어 이 남자가 얼마나 찌질하고 한심한지 충분히 알고 그래서 앞에선 피식, 조소와 비웃음을 날리면서도, 그러면서도 결국은, 또 번번이,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리며 질질 끌려가는 거다. 더 화나는 건 이 여자를 연기하는 게 무려! 우리의! 다카미네 히데코 언니라는 거. 정말 이 상황은 한 마디로밖에 표현이 안 된다: “아샹~”
거의 거지꼴 행색이 되어 길을 떠나는 두 사람. 남자놈 뒷통수를 빠악 치고싶은 마음과 별개로, 애틋하다.
그런데, 이 커플에 이렇게 짜증을 내며 진저리를 치면서도 극장을 박차고 나오지 못하고 그들의 여정에서 연민에 찬 눈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일단 영화가 너무나 아름다워서다. 나루세 미키오가 영화에서 인물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인물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은 다분히 기능적으로 인물들을 ‘처리’하는 근래의 무수한 장르영화들과 달리 대단히 섬세하다. 나루세의 인물들은 영화 속 허구의 인물인데도 마치 내가 실제로 아는 사람마냥 독특한 개성과 존재감을 가질 수 있고, 그 안에서 문학적, 혹은 영화적 미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그려낸다.
또한 이 커플이 시간을 버텨내면서 지나가는 모습에 당시 일본사회의 변화상이 겹쳐 흐르면서, 우리는 이들의 ‘사적인 연애사’가 실은 당시 일본사회의 변화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서로 상응하는지 지켜볼 수 있다. 인도차이나에서 돌아온 유키코가 남자의 결별선언을 들은 이후, 아무데도 기댈 수 없고 취직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미군과 고정적인 연애(!)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데, 당시 연고 없는 도시 처녀가 - 그리고 전쟁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된 상황에서 그나마 돈을 벌러 도시로 흘러들어간 젊은 여성들이 - 어떤 식으로 자기 생계와 가족 부양을 책임졌는지 유추할 수 있다. 사실 나루세 미키오가 연출한 많은 ‘여성영화들’, 특히나 하야시 후미코의 원작을 영화화한 경우 이런 젊은 여성들은 부지기수로 나온다. 오히려 <부운>의 유키코는 다른 나루세의 여인들보다 훨씬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편이다.
사실 <부운>의 인물들은 나루세 미키오의 다른 영화들 - 이번에 본 영화는 <부운>을 제외하면 네 편에 불과하지만 - 의 인물들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껴진다. 나루세 영화의 남자들이 하나같이 한심한 민폐에 기생충 캐릭터라곤 해도 <부운>의 도미오카는 유독 그 정도가 심하다. 유키코 역시 다른 여성들처럼 진취적으로 자기 생을 꾸려나가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미군 장사를 접은 후엔 자신을 성폭행했던 사촌오빠가 창시한 사이비종교에의 교당에서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여전히 도미오카와의 관계를 이어가는데, 나루세 영화 중 이렇게 ‘남자한테 의존하는’ 캐릭터가 또 있을까 싶다. 그녀가 도미오카에게 집요하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 역시 그녀의 주체적인 의지라기보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인간의 맹목적 집착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인물이 공히 유지하고 있는 특별한 태도가 바로 ‘무기력’인데, 이는 분명 나루세 영화의 다른 남녀 등장인물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 무기력과 뿌리깊은 좌절감은 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걸까. 나는 이 영화가, 패전과 동시에 영혼이 죽어버린 일본인들의 피폐한 정신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키코의 도미오카에 대한 집착이, 한편으로는 전세가 기울기 전 대동아전쟁이 막 시작되며 풍요를 경험했던 짧은 시절을 ‘좋았던 시절’로 향수하며 회고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기는커녕 받아들이고 인정하지도 못한 채 과거에 매달리고 집착하며 어떻게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인간의 절망적인 몸짓. 도미오카에 대한 지속적인 구애와 실패가, 매번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다 매번 좌절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지젝에 의해 소개된 라캉식 용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익숙한 단어들 몇 개를 떠올리겠지만, 나는 라캉 잘 모르므로 패스.)
여행 가서 함께 목욕하는 씬. 이 씬 바로 뒤에, 남자놈이 여관집 주인여자 꼬셔서 똑같은 씬을 연출한다. 나쁜노무시키...
반면 도미오카의 무기력은 조금 달리 보이는 측면이 있는데, 나는 도미오카의 모습이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이의 ‘시체로서의 삶’을 견디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유키코가 전쟁이 끝났고 화려한 과거 역시 끝났다는 사실을 아예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면, 도미오카는 이를 잘 알고 인지하며 과거에의 절연을 소망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의 모습에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전쟁에 복무했으나 그 전쟁이 끝난 뒤, 더욱이 원자폭탄과 함께 ‘패전’으로 끝난 뒤 방향을 잃은, 다시 일어서서 살아갈 의지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전형적인 인텔리의 무기력을 본다. 두 사람 모두 농림성 직원이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대동아전쟁 당시 전쟁에 복무했던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에서 더욱. 영화의 초반, 유키코의 회상에 등장하는 전쟁 당시 인도차이나에 처음 온 유키코에게 “여긴 말그대로 낙원”이라 소개하던 도미오카의 동료의 대사도 의미심장하지만, 당시 유키코와 도미오카가 근무하던 인도차이나의 본부가 더없이 화려한 유럽풍의 대저택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던 것도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어쩌면 해외에서 이 <부운>에 그토록 열광했던 것 역시, 유럽인들이 산업혁명 직후 전쟁 발발 전 짧았던 황금시대를, 혹은 미국인들이 그 화려했던 재즈시대를 향수 속에서 그리워하던 그 정서와 기묘할 정도로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두 사람의 여정은 의사도 전기도 없는 섬마을 야쿠시마에 이르러서야 끝이 난다. (이곳은 하야시 후미코가 3년간 머물며 원작소설 <부운>을 집필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야쿠시마로 향하는 배 안에서야 도미오카는 그간 그토록 밀쳐냈던 유키코를 비로소 받아들이는데, 유키코는 이미 병색이 완연해 죽음을 앞에 둔 상태다. 어떤 굴욕과 모멸 하에서도 삶을 간신히 이어가던 유키코를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그녀에게 죽음이 깃들기 시작하고서야 그녀를 받아들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이 돈도 역사도 사회적인 그 무엇과도 다 상관없게 된, 현대의 문명과 동떨어진 곳을 향하는 길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뒤늦은 회환과 슬픔의 눈물이, 유키코의 시신 앞에서 떨어진다. 그리고서야 이 영화(및 원작소설)의 제목, ‘부운’이란 단어의 의미가 또렷해진다. 현실에 발을 붙이지도, 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채 떠도는 인생들을 많은 작가들은 ‘부초’로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땅도 물도 아닌 저 하늘 위를 떠돌며 또렷한 물질적 형상도 가질 수 없었던, 풀도 되지 못한 뜬구름과 같은 것이었다.
ps. 서울아트시네마,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2011. 7. 15- 7. 24)에서, 2011년 7월 22일(금) 17:00에 보다.
ps2. 도미오카 역으로 출연해 이 글에서만도 나한테 줄창 욕을 먹는 모리 마사유키는 나루세 미키오의 다른 영화,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에서도 다카미네 히데코를 '갖고 노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남자로 나온다...만,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서 줄창 주연을 맡으신 엄청난 배우이심. 어딘가 우리나라 배우 정성모와 비슷한 느낌이 좀 있다. (사실 정성모도 참 좋은 배우인데 어째 주로 야비하고 비열한 역을 많이 맡으셔서...)
ps3. 다카미네 히데코가 첫 등장하는 씬이, 필리핀에서 돌아오는 배에서 내리는 씬. 몸에 큰 남자 군복을 대충 입은 모양새인데, 그래도 멋이 나더란...
ps4. 극 중 유키코는 처음 농림성에 취직하게 위해 도쿄에 올라왔다가 사촌오빠한테 강간을 당한다. 영화에서 이 씬은 짧게 휙 묘사되고 마는데, 아마도 소설에서는 그 사건이 두고두고 유키코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에 그 사촌오빠놈(...)이 바로 사이비종교 교주가 되고 유키코가 몸을 의탁하게 되는 그놈인데, 유키코더러 교단에 오라고 하면서 "너한테 나는 첫 남자잖아" 따위의 정말 뺨을 연타로 갈겨주고 싶은 대사를 우리 다카미네 언니한테 날린다. 써글넘 같으니.
ps5. 근데 정말,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왜 이리 하나같이 못돼처먹었거나 비열하거나 무능력하거나 찌질하거나 그 모두 다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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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 | 흐트러지다 乱れる Yearning (1964) - 2011/08/04 02:46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62년작 <흐트러지다>는 형수와 시동생 간 연정이라는, 다소 센세이셔널한 소재를 다룬다. 물론 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1960년대 - 전쟁의 상처는 가셨으되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있는 - 일본에서 이러한 사랑은 상대에게 고백하고 서로 나누기는커녕, 제 감정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조차 버거운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 영화에서 다루는 것은 결국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정념과 애정만이 아니다.
상처한 형수 혼자 가게를 이끌어가든 말든, 대학까지 졸업해 25살이나 되고도 매일 술집에 마작에, 빠찡코나 하고 다니던 시동생이 어느 날 사랑을 고백해온다. 그가 그렇게 방탕하게 지내는 것은 실은 말로 고백할 수도 없었던 사랑, 바로 당신 때문이라고. 여자가 무너지는 건 그 순간이다. <흐트러지다>의 이 장면은 충격을 받아 놀란 표정의 여자, 레이코(다카미네 히데코)의 얼굴에 집중한다. 영화 내내 단정하고 조용한 말씨와 표정과 행동을 보여주던 단아한 그녀는 이 장면에서 격동하는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낸다.
다마키네 히데코의 경이로운 얼굴
레이코가 속해있는 가족 역시, 결혼 반년 만에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 남편은 태평양전쟁에 나가 외지에서 전사했다 - 레이코가 잿더미 위에서 행상을 해가며 시어머니와 시누이 둘, 그리고 어린 시동생을 부양해온 것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술을 파는 이 가게 역시 서서히 위기를 겪는다.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그녀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한편 이 표현의 일환으로 재혼을 위한 맞선을 주선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향하는 가족들의 호의와 고마움의 표현이 실은 그녀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배제의 결과이자, 그러한 배제를 계속 시동케 하는 힘으로 드러난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고마움의 표현은 그녀의 이 집안에서의 위치 - 실질적인 가장 - 를 껄끄러워 하는 대사와 언제나 쌍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녀가 ‘이루어지지 못할 관계’의 남자에게서 고백을 받고 충격을 받는 장면은, 18년간 어떻게든 이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몸부림쳤던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 그리고 가족에 대한 헌신을 통해 가까스로 형성해온 자신의 인생과 정체성이 회복 불가능하도록 완전히 박살나며 무너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이 그토록 파워풀한 힘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파괴가 가족의 일원 중 그녀에게 가장 절대적 신뢰와 지지를 보여주던 시동생 - 더욱이 이 가정의 유일한 ‘남자’, 즉 이 가정의 일원들이 모두 가부장으로서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존재 - 의 애정 고백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나는 절대로 재혼하지 않고 이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그녀의 선언에 재혼을 주선하던 시누이들이 번번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록 마지못한 것일지라도) 그녀의 위치를 재차 수긍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러한 ‘파괴’와 ‘흐트러뜨림’의 순간 이후, 봉합될 수 없었던 그와 그녀의 사이는 결국 그녀의 친정으로 향하는 여정의 길에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가 싶더니 결국 주저앉고 만다. 둘은 낯선 역에 함께 내려 시동생과 형수가 아닌 비로소 남자와 여자로 만나지만, 그녀는 자신 역시 그의 고백에 가슴이 떨렸다고 고백하면서도 결국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결말이 혹여 ‘가부장제의 한계와 억압을 뛰어넘지 못한’ 것으로 읽힐까 우려스럽다. 오히려, 일견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그녀가 실은 자신의 확고한 의지와 욕망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해 왔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해 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역시, 그녀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되(그녀는 그의 키스를 뿌리친 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이러한 자신 스스로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의지에 기반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나는 그의 고백 장면이 실은 그저 애정고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정체성과 기반을 위협하고 결국 그것을 성공적으로(!) 파괴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헌신에 감사를 표하는 가족들에게 그녀가 여러 차례에 걸쳐 “내 스스로 선택한 삶, 당연한 행동”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대사를 한번 하는 것은 그녀가 가부장제를 몸으로 체화한 순종적인 여성, 너무나 착한 여성의 겸손의 표현일 수 있지만, 두번, 세번 반복되는 것은 그저 겸손의 착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헌신을 ‘희생’으로 규정하는 시선과 ‘(가장이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주장 사이에서, 우리는 표면적인 감사 대 겸손과 순종의 입장을 넘어서서, 그녀를 배제하려는 혈연에 기반한 가족관 대 그녀가 '만들어온' 가족관, 나아가 스스로의 위치를 정하고 그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온 그녀의 주체성의 대립을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 결과 그녀가 이 가족 안에서 유지했던 것은 ‘실질적 가장’의 위치였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는 이 실질적 가장의 위치를 안정적으로 보장받지 못한다. 그런 위치에서, 그녀의 헌신이 오히려 안정적 제 위치를 향한 맹렬한 투쟁으로 읽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그와 함께 역에서 내린 뒤 가장 먼저 하는 대사는 “나도 여자랍니다. 당신의 고백을 받고 실은 가슴이 설레었어요”라는 고백이다. 이 고백은 물론 오랫동안 자신을 마음에 둔 남자에게 비로소 화답하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좀더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만약 그녀의 헌신이 정말로 희생이 아닌 그녀의 주체적 선택의 결과였고, 그의 고백이 그녀의 이 선택을 뒤흔들고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이 장면은 흔히 해석되기 쉬운 ‘가부장제적 윤리 대한 도전’보다 오히려 전통적으로 요구된 - 종종 강요된 - 여성의 성역할을 받아들이며 순응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 낯선 곳에서 그에게 자신의 ‘여성’을 선언하고 함께 여관에 들었으면서도 결국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도 충분히 납득된다. 그녀에게 어느 날 찾아온 로맨스는 그녀의 여성성을 복원해주되 대신 자신이 오랫동안 스스로 만들어온 가족 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잃게 만드는 것, 그러므로 결국 자신의 존재를 건 투쟁을 촉발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검을 향해 쓰러질듯 뛰어가던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와 감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표정이 오랫동안 잔상을 남기며 끝없는 상념을 일으키는 가운데,문득 그의 죽음은 그녀에게 파탄을 안겨준 이에게 운명이 내리는 벌, 혹은 그녀를 향한 운명의 '다른 방식의 사랑'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은 결코 그녀가 원치 않았던 복수를, 결코 그녀가 원치 않았던 방식으로 그에게 해준 셈이다. 운명, 혹은 신의 사랑은 인간의 이해, 혹은 인간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고 표현된다. 그녀가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은 바로 이런 점에서다.
ps. 서울아트시네마에서 2011. 7.15-7.24 간 열린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에서, 7/17 19:30에 보다.
ps2. 그 유명한 기차씬은 새삼 언급하지 않겠다. 이 장면은 정말 기차 안 풍경(정확히 하면 그녀를 향한 그의 시선, 그리고 그와 그녀 사이의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와 기차 밖 풍경을 번갈아 병치하는 편집으로 엄청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그 어떤 스릴러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수준의 어마어마한 서스펜스. 덕분에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 과연 '시선의 내러티브'의 거장다운...
ps3. 필름 소유자인 시네마테크부산으로부터 1962년작이라고 소개받았는데 영어자료뿐 아니라 일본 위키 등의 자료에도1964년 1월에 개봉한 1964년작이라고 표기돼 있다. 다시 확인해 보니 내 오류. 1964년작이 맞다.
ps4. 마지막 장면, 레이코의 얼굴 클로즈업을 잠깐 비추다가 더 끌지 않고 그냥 확 끝내버리는 걸 보고 경악을 했었다. 사실 이번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에서 맨 처음 본 게 이 <흐트러지다>였고, 이 영화가 준 충격 덕에 주말도 그대로 반납하고 나루세 미키오 영화들을 계속 챙겨봤다는.
ps5. 그래서 내게 이 <흐트러지다>는 나루세 미키오의 가장 유명한 영화 <부운>보다도 훨씬 더 좋았던, 이번에 본 다섯 편 중 단연 최고.
ps6. 이런 식의 분석이 오히려 영화에의 흥미를 더 떨어뜨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얼굴 *발그레*해지는 형수와 시동생 간 러브스토리로만 봐도 절절하긴 마찬가지. 그런데 저 단아하면서도 단호하기 짝이 없는 다카미네 히데코의 얼굴이, 계속해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언젠가 다시 상영된다면 꼭 다시 보고 싶다.
ps7. 이 영화에선 이토록 청초하고 단아하던 다카미네 히데코가 <방랑기>에선 스스럼없이 '망가지는' 연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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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크레이븐 | 나이트 플라이트 Red Eye - 2011/07/19 01:42
호러영화는 원래부터가 여성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고 스릴 혹은 샤커(shocker)를 주무기로 삼는다. 호러에서도 슬래셔라는 서브 장르는, 가장 약해보이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온갖 갖은 고생을 시키면서, 역으로는 감독의 역량에 따라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여성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억압받고 소외된 결과물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또다시 혐오와 공포를 강화시키는지) 그 어느 장르보다도 더욱 섬세하게 드러내는 장르이기도 하다.
<스크림>. 호러 컨벤션이 여기서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졌었지... 스킷 울리치 오랜만이군
영화에서 섹스를 한 여자주인공이 가장 먼저, 그것도 가장 잔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언제나 10대의 성에 대한 경고라는, 지극히 꼰대적인 가치관에서 비롯한다. <스크림>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보여준 것은 이제껏 공고하게 쌓아올려진 호러장르의 가장 전통적인 장르 컨벤션을 정확히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었고, 내 눈에 가장 강하게 띈 것은 역시나 여주인공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옆집 여동생같은 여린 소녀(니브 캠벨이 TV 시리즈 <파티 파이브>를 통해 스타가 된 배우임을 상기하라.)는 단적으로 섹스를 하고도 살아남는다. 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듬직하고 믿음직한 남자주인공의 노력과 보호를 착취하다가 막판에서야 뭔가 시늉을 하고 살아남는 여자 캐릭터가 아니라, 철녀도 아닌 주제에 갖은 고생을 하며 오히려 옆집 오빠(데이빗 아퀘트)를 구해내고, 당연히 그녀를 지켜주다가 장렬히 죽을 것같았던 남자친구가 오히려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므로 스크림 2, 3는 1에서 오히려 퇴행한 결과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몸은 젊은이라고, 또한 진보라고 떠들어대는 숱한 젊은 (남자) 호러감독들이 하지 못했던 것(혹은 하기 싫어했던 것을 오히려 웨스 크레이븐이 '아버지의 권위로' 해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스크림> 시리즈가 가진 맹점은, 기존의 호러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었다는, 바로 그 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여전히 기존의 호러 컨벤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브장르가 바뀌긴 했지만(<나이트 플라이트>는 슬래셔가 아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 결과, 그러나 아직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 영화가 바로 <나이트 플라이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90분도 채 안 되는 이 짧은 영화가 맥빠지고 심심한 영화로 느껴지는 것은 비행기가 도착한 후부터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기 때문이다.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면서 안타까움과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절대적인 공포의 담지자일 것만 같았던 '그'는 알고보니 허풍쟁이 삼류에 어설픈 마초근성을 드러내다가 망신을 산다. 마초의 법칙은 대놓고 비웃음을 당한다. '상황논리에 맞게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숫컷의 법칙을 따르라' 블라블라는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받는 것이다.
아 그러게 폼만 그럴 듯하면 뭐하냐고... (그래도 넘 예뻐, 킬리안! ㅠ.ㅠ)
'그녀'가 눈부신 방어자이자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폭력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폭력의 희생자와 다른 점은, 그녀가 단지 폭력의 '희생자'(Victim)가 아니라 '생존자'(Survivor)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존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 폭력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다시는 희생자가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것이, 그녀가 다시 닥친 일생 최대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고 다른 이의 목숨까지도 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참으로 눈부시게, 킬러가 초라해보일 정도로, 고난을 이겨낸다. 너무 쉽다 싶을 정도로.)
여기서 또다시 재미있는 것은 딸을 욕망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욕망을 느끼는 딸의 관계, 이른바 프로이트적인 아버지-딸의 고착은 스크린 안과 밖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호러영화의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고 새로운 여성성을 부여해준 존재가 B급 호러 영화의 대부, 즉 '아버지의 권위를 가진 자'인 웨스 크레이븐이다. 스크린 안에서, 다 큰 딸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은 '포악한 아버지'(브라이언 콕스, <트로이>에서 아가멤논을 연기한 바 있는 그는 이제껏 너무나 자주 '포악한 아버지'를 연기해왔다)가 아니라 그녀 또래의 미성숙한 젊은 남자 잭슨(킬리언 머피, 뭇 젊은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게스모델 출신의 '예쁜' 남자배우)이다. 이 영화의 갈등구도는 마치, 딸이 데려온 남자친구를 번번이 트집잡아 싫어하다가 딸이 마침 남자친구와 문제가 생기자 '거봐, 내가 뭐랬냐'라고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하며 딸을 위로하는 아버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그녀 주변인물들은 이러한 딸에 대한 아버지의 욕망을 온통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뿐이다. 딸보다 어린 남자는 '연필을 잃어버리고 당황하는' 바보일 뿐이고, 딸의 친모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그 친모의 친모는 막 죽었으며(그녀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딸의 어머니 세대의 다른 여성은 그녀의 호의를 입었으면서도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희망도 되지 못하고 실망만 끼친다. (그녀의 호의로 전달된 '책'은, 나중에 그녀의 SOS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매개가 됨에도 부주의하게 분실되어 악당의 손으로 들어간다.) 반면 여전히 사회적인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자신의 가족을 단단히 보호하는 것은 아버지 또래의 남자, 키프 의원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딸은 아버지를 구하고 아버지는 딸을 구한다. 딸에 대해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여전히 고착된 딸의 이상한 근친관계가 더욱 강화된다. 그들 부녀 사이에 이제는 아무도 (아무것도) 쉽게 끼어들 수 없다.
유사) 아버지와 딸 - 아버지의 새로운 후계자이긴 한데... 실은 영화 속 아저씨는 웨스 크레이븐 감독.
아버지는 비리비리한 아들 - 여전히 남성적 권위를 지탱해주는 사회 제도와 법에 기대어 정작 그 자신의 주체는 나약할 대로 나약해져버린 아들 - 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게임을 치르고 그 누구도 돕지도 돌봐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살아남아 자기 혼자 훌쩍 선택해버린 딸을 선택했다. 이는 어쩌면 앞으로의 세상이 아들이 아닌 딸들의 것이 될 것이라 예감한 아버지의 '약삭빠른' 지분거림일 수도 있고,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폐기당한 것은 아닌 아버지의 권위로 승인한 것일 수도 있다. <나이트 플라이트>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갖는 의미는 이것이다: 아버지는 호기롭게 딸을 승인한다. 딸을 통해 구원받은 아버지의 보상은 자랑스러운 딸에 대한 인정과 승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부와 키프 의원, 둘 다에게서 인정을 받는다.)
기존의 신화구조에서 언제나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만 했다. 새로운 세대는 아버지 세대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딸 역시, 아들과 방식은 다를지라도,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자신을 살해하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아들이 두려워 후계자를 필요로 하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되도록 오래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는 존재로서 딸을 선택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받은 딸에게 굳이 아들처럼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 단계가 필요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또다른 방식으로든 뭐든 아버지를 극복해야만 하는 단계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 한 딸은 아버지 권력의 대리자, 즉 아버지를 제몸에 승화시킴으로서 구세대적 - 낡은 권력을 되도록 오래 지탱해주는 새로운 지지대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승인과 인정은, 아들이 아닌 딸의 가능성과 딸의 주체성을 인정한다는 '한 발 나아간' 진보에도 불구하고, 단지 아들이 아닌 딸을 자신의 '후계자'로 승인했을 뿐 여전히 자식에 대한 소유권과 그 자신의 권위를 과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굳건한 아버지의 권위'를 고수하며 자식에게 '아버지 살해'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앙시엥 레짐이다. (브루주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에게 추파를 보내는 귀족?) 여전히 이것이 웨스 크레이븐이 가진 (어쩌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그리고 이미 '아버지'가 된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ps. 2005년에 이런 글을 썼었다. 저 웨스 크레이븐과 레이첼 맥애덤즈 사진을 찾다가 오래 전에 쓴 이 글을 찾아냈는데, 논점은 그럭저럭 흥미롭게 잡아냈지만 도저히 손발 오글거려서 못 읽겠다. 하긴, 저 글 쓸 땐 나름 자뻑 상태였으니까 지금 손발이 오글거린다는 건 적어도 지금은 그때보다 나아졌다는 얘기겠지. 그러니 부끄럽지만, 새로이 갱신해 올려둔다. (원래 발행했던 날짜는 2005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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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현 | 파수꾼 (2010) - 2011/07/18 02:02
Bleak Night. 영어제목도 맘에 든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을수록 시간이 더욱 쏜살같이 간다. 어릴 땐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른들이 “나이 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년씩 지나있다.”라고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몸과 마음과 환경을 옥죄는 감옥과 족쇄가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하루는 너무 길었다. 왜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은 많은지. 무엇을 하라는 명령엔 그저 ‘공부 열심히 하라.’ 정도나 있었나, 대체로 ‘하지 마라.’라는 금지의 연속. 그러니 1년이란 길지 않은 시간이 <파수꾼>의 세 주인공 소년들에겐 긴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토록 서로 붙어 지내며 제일 친했던 친구들이 그렇게 갈가리 찢겨나가고 서로에게 최악의 상처들을 주고받은 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는 건 그 어떤 신파 이별 영화를 보는 것보다 슬프고 아팠다. 균열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했고 작은 오해와 작은 거짓말들이 이 균열을 걷잡을 수 없을 정도까지 키웠다.
<파수꾼>은 소년들의 성장기와 우정을 다루는 영화들이 으레 묘사하고 따르는 ‘남자들만의 질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힘과 주먹을 향한 동경을 강조하거나, 남자아이들끼리 모여 포르노를 보면서 우의를 다지고 서로 일탈 행위의 ‘공범자’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집단을 공고히 하거나, ‘남자들만의 의리’가 가장 끈끈하고 강한 것인 양 허풍을 떨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존에 답습돼 온 소년 성장물의 공식을 아무렇지 않게 날려버리거나 비튼다. 영화가 오히려 집중하는 것이 이 소년들의 관계가 어떻게 작은 거짓말과 순간의 욱하는 마음으로 그토록 쉽게 어그러지는가이다.
학교의 ‘짱’인 기태는 주먹과 힘, 권력에 대한 동경보다는 ‘누구에게나 주목받고 관심 받는’ 데에 대한 갈망이 더 커 보인다. 베키에게 주먹질을 행사하는 것에도 응징과 보복의 의미보다는 ‘그렇게라도 말을 걸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 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척하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베키가 유일하게 그에게 ‘반응’을 보일 때가 기태가 주먹을 날리고 괴롭혔을 때이기 때문이다. 반면 매번 기태에게 맞기만 하고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으며 괴롭힘을 당하는 베키, 혹은 희준(박정민)에게는 피해자 특유의 움츠러듦이나 공포, 무력감보다는 오히려 고행을 적극적으로 감내하려는 수도자들 특유의 굳건한 의지가 보인다.
서로 짐짓 여유를 가장하고, 상대를 탐색하며, 잽을 날린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런 면에서 주먹질을 행사하며 패거리를 불러모아 베키를 괴롭히는 기태만큼이나, 기태를 대하는 베키의 태도에서 더 무섭고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한 구석이 있다. 마음을 닫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주먹질의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이 아이러니. 하지만 이것은 물리적 폭력에도 이유가 있다는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손쉽게 물리적 폭력을 쓰는 것이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은지를 드러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 기태는 참 나쁘고 한심하면서도, 불쌍하고 안쓰럽다. 기태의 어리석음이 심지어 자신을 유일하게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친구 동준을 향해서도 발휘될 때도, 그리하여 결국 동준까지도 기태에게 등을 돌릴 때도, 기태가 더없이 한심하게 여겨지면서도 기태의 그 상실감과 절망에 오롯이 감정 이입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 친구의 우정이 유지됐던 것도 철없고 어리석은 기태에 대해 베키와 동준이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딱 그 한도까지였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쩐지 이런 풍경이, 낯설지가 않다. 그렇게 서로 깊이 신뢰하고 우정을 나눴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쉽게 오해하고 마음을 져버리나, 싶었지만 돌아보면 나도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누군가를 내치기도, 의절하기도 했다.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뒷담화를 하고, 누군가랑 감정의 날을 세우면서 일부러 그가 가장 상처받을 만한 말을 골라서 하고(가까운 사이일수록 그가 무엇에 가장 상처받을지 잘 알고 있다!), 때로는 거짓말로 상대의 속을 긁는 ‘공작정치’를 하고.... 학창시절은 물론 사회에 나와서도, 피해자로서뿐 아니라 가해자로서도. 다만 나이를 먹으면 이런 걸 ‘기술적으로 조금 더 세련된 형태로’ 하게 될 뿐이다. 매 순간 누구에게 상처를 입고 누구에게 상처를 주면서, 대체로 자신을 이유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피해자로만 여기거나 정의를 행하는 공정한 심판관으로 착각하기 마련이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며 다른 이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상처를 주고 있으면서도 그게 상처주는 행위인지 폭력은 아닌지 성찰도, 인식도 못 하는 게 일반적이기도 하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이렇게 영화를 통해 보기만 해도 모든 것의 양면이 보다 넓게 눈에 들어오는데, 정작 자신의 일이 되면 제대로 보질 못하는 게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리고는 상처받고 울고, 분하고 억울하다고 울고, 죄책감과 고통에 운다.
이랬던 아이들인데...
영화 속의 아이들이 아직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아이들’이지만, 스크린 밖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는 내가 그들보다 정말 어른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만약 내가 기태의 상황이었다면 과연 베키의 마음을 돌릴 다른 방법을 제대로 찾아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베키를 잃고 그냥 “나도 너 싫어”라며 등을 돌렸을까. 내가 기태였다면 과연 베키에 대한 내 진심을 제대로 전할 수 있었을까. 극장을 나오면서 이 아이들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무너져 내리는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 어쩐지 부끄러웠던 이유다.
ps. 이 글은 지난 3/21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내 독립영화kmdb 페이지 독립영화 초이스 란에 실렸다. 원문은 여기.
ps2. 요즘 떠오르는 섹시 미중년 조성하 님하가 나온다. 이분은 극에서 맡은 캐릭터에 따라 미친 존재감을 마구 드러내실 때도 있지만 <파수꾼>에선 말하자면 세 친구의 사연으로 관객을 안내하는 '가이드'이자 죽은 아이의 아버지기 때문에 세 젊은 배우 뒷편으로 조금 물러나 이 캐릭터들의 불안하고 방방 뛰는 혈기를 밑에서 쫘악 안정적으로 잡아주신다. 난 사실 이분과 같이 술도 마신 적이 있다, 작년 전주영화제 <그녀에게> 상영 뒷풀이장소에서. 화면과 별 다를 바 없으시다. 잘생기셨고 인상도 좋으시고 목소리도 좋고 진지하시다. 다만 눈빛은 조금 무서웠다. 마치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빛, 그래서 괜히 움찔하게 되는 눈빛이어서. <그녀에게> 리뷰는 여기.
ps3. 여기저기 이제훈 찬양이 넘쳐나더라. 확실히 이제훈은 차세대 '스타'감으로서의 아우라가 있다. 그래서 <고지전>도 기대. 하지만 서준영과 박정민도 꽤 좋다. 사실 <파수꾼>에서 나는 서준영의 연기가 제일 좋았다. 제일 뭐랄까, 자연스럽고 능글맞아서. 앞으로도 스타쪽보다는 어느 캐릭터든 다른 배우들과 잘 어우러지며 케미스트리를 잘 만들어내는, 무슨 장르의 영화에 출연해도 다 일정 이상 해내는 재주꾼 배우가 될 것 같다. 박정민은 정말 일생일대 캐릭터 하나 잘 맡으면 그걸로 연기파로 바로 굳어질 것 같은 느낌. <파수꾼>에선 좀 뻣뻣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신인이니까.
ps4. 박정민 글솜씨가 굉장히 좋다. 읽다보면 빵빵 터진다. <파수꾼> 블로그의 '귀여운 베키의 일기' 코너는 맛뵈기. 내가 이 친구 블로그를 찾았었는데 주소를 어디 뒀더라...
ps5. 6월 하순에 2만명 돌파했다. 장하다. 하지만 난 사실 10만명은 들 줄 알았...던 건 아니고. 그렇게 들기를 바랐다. 사실 옛날 같으면 들 수도 있었을텐데 요즘 시절이 하 수상해서 사람들이 영화를 안 보니까.
ps6. 감독님 인터뷰 하는 날 영화를 두 번째로 봤었는데, 그러느라 서교동으로 옮긴 이후의 필름포럼을 처음으로 가봤다. 뭔가 좀 대형 비디오방 같은 느낌;;;이었지만 교통편도 좋고 하니 앞으로도 자주 가게 되지 않을까. 우리집에서 버스로 한번에 20분이면 간다. 인터뷰 했던 거는 조만간 여기에 올릴 예정. 그리고... 오랜만에 영화 한 번 더 보고프다.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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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테일러 우드 | 존 레논 비긴즈 - 노웨어 보이 Nowhere Boy (2009) - 2010/12/10 20:48
존과 미미의 관계가 전형적인 '반항하는 아들-엄격한 어머니'의 관계로 그려진다면, 존과 생모였던 줄리아의 관계는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하고 있듯 거의 준-연인처럼 보인다. 영화에 다소 뜬금없이 삽입됐던 여자친구와의 섹스씬도 실은 어머니에 대한 존의 강렬한 욕망을 설명하는 씬처럼 삽입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이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니 넘어가기로 하자. 사실 존 레넌의 어린 시절에 대해 자세히 알려지기 전에도, 혹은 청소년 시절의 존에 대한 전기작가들의 책이나 이런저런 증언들이 다소 엇갈리는 와중에도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지적됐던 것은, 생모인 줄리아의 죽음이 당시 17세였던 존 레넌에 얼마나 큰 충격을 끼쳤느냐 하는 것이다. 존은 엄마의 죽음 이후 더욱 '삐뚤어'졌다고 하며, 성인이 된 이후에도 어머니에 관한 곡을 여러 곡 작곡했다. 자신의 큰 딸에게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 '줄리아'라는 이름을 주기도 했다. 5살 이후 떨어져 살며 항상 그리워했던 엄마, 자신을 버린 후 남편과 아이들과 잘 살고 있던 엄마, 그리고 자신을 버리게 된 이유를 알게 된 후 실컷 미워할 새도 없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애증과 욕망이 존 레넌의 정신세계와 음악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게, 이 영화의 주장이기도 한 셈이다.
기실 이 영화는 존의 이부동생(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동생)인 줄리아 베어드가 존 레넌에 대해 쓴 책에 기반하고 있는 만큼, 존의 어머니 줄리아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생생하다. 게다가 줄리아를 연기한 앤-마리 더프(제임스 맥어보이의 부인이기도 한)의 연기가 너무도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워서, 영화의 주인공인 존 레넌보다도 줄리아 레넌에게 더 시선이 쏠릴 정도. 사실 부모가 헤어져 친척 손에서 자라며 사무치도록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존의 성장환경이란 게 평범하다곤 할 수 없지만 그렇게까지 드문 일도 아닌 만큼, 소년 존이 아무리 어머니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해도 이것이 그렇게까지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줄리아의 인생은 영화에서 대체로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제시되기 때문에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오히려 이렇게 간접적으로 드러난 줄리아의 인생이 존의 결핍된 성장시절보다 훨씬 비극적으로 느껴지며 강렬한 관심을 끈다.
영화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그녀는 모든 뮤지션과 모든 노래를 알았고(당시 영국에는 제대로 소개되지도 않았던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조차도), 그 어떤 젊은 아들 또래의 아이들보다도 열정적으로 로큰롤과 춤을 즐겼으며, 자유분방하고 삶의 유머와 즐거움을 사랑하는 낙천적이고 쾌활하며 사랑스러운 매력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다. 게다가 밴조도 잘 연주했고(존은 엄마에게서 밴조를 배웠다) 노래 솜씨도 뛰어나서, 존의 천재적인 음악성은 바로 줄리아의 유전자로부터 비롯됐다고 여겨질 정도다. 그러나 자유분방하면서도 언제나 사랑에 목말랐고, 그래이 대중적인 스타 뮤지션이 되었다면 차라리 행복했을 그녀는 자신의 음악적인 재능을 펼칠 기회를 갖지는 거의 못했던 것 같다. 매사 단정하고 엄격하며 고상한 미미와 그런 미미를 대하는 줄리아의 모습을 볼 때, 어릴 적부터 언니에게 위축감을 느꼈으며 언니에게 주로 가는 부모의 관심을 붙잡기 위해 끝없이 재롱을 떨거나 사고를 치는 캐릭터였을 거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영화에선 그녀가 종종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암시되는데, 아마도 음악적 재능과 함께 자유분방하고 쾌활하며 열정적인 성격 양쪽이 모두 심각하게 억압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생기발랄하고 쾌활하며 남의 눈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모습과, 그 뒤로 얼핏얼핏 비치는 어두움이라는 양면성, 그 양면성을 매우 흥미롭고도 매력적으로 그려낸 앤-마리 더프의 연기 덕에 사춘기를 통과하며 마음고생하는 존 레넌보다 줄리아 레넌이 훨씬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러한 그녀가 음주운전 중이었던 비번 순경의 차에 치여 때이르게 세상을 떠났던 건 그 자신에게나 평생의 결핍감을 안겨받게 될 존 레넌에게나 공히 불행한 일이다. 다만 다행인 건, 죽기 전 그녀가 결국 엄격하고 그녀에 대해 '우월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던 미미의 사과를 받고 화해를 했다는 것 정도.
전세계에 '비틀즈식 헤어스타일과 패션'을 전파했던 이 비틀즈 우두머리의 리더인 존 레넌이 '앨비스 프레슬리식 머리와 버디 홀리식 안경'을 하고 아직 소년과 청년의 과도기를 헤매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전설'로 남은 천재 뮤지션이 아직은 어리고 연약하며 미숙하고 반항하는 평범한 10대 청소년의 모습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참으로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이 영화에서 얻은 가장 큰 즐거움과 감동은, 세상에 그 천재 뮤지션을 내보낸 너무나 매력적인 여자, 어쩌면 존 레넌보다도 더 천재였을지 모르나 제대로 기회를 받지는 못한 채 평생 굴절된 삶을 살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줄리아 레넌과, 이름조차 변변히 알려지지 않았던 그녀에게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어 비로소 '줄리아 레넌'이라는 인물로 존재하게 만든 앤-마리 더프라는 탁월하고도 매력적인 배우의 발견이다. 따라서 내게는 이 영화가 원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노웨어 보이'가 아닌 '노웨어 걸'에 대한 영화로 남게 될 것 같다.
ps. 앤-마리 더프는 제임스 맥어보이의 9살 연상 부인. 맥어보이는 인터뷰에서 "배역 선택에 있어 아내가 항상 큰 도움을 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제임스 맥어보이의 영리하면서도 인상적인 캐릭터 선택의 많은 부분이 앤-마리 더프의 식견으로 보인다. 곧 개봉할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 매우 기대되는 건, 이 매력적이고 연기 잘 하는 부부가 나란히 동반출연하는 첫 영화이기 때문.
ps2. <킥애스> 때만 해도 어벙하고 귀여운 소년이었던 아론 존슨이 이 영화에선 장성한 청년이 됐다. 외모나 연기나 매력은 분명 있는데, 캐릭터 자체가 아직은 미숙하고 어린 청소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옆에 앤-마리 더프나 크리스틴 스콧-토마스 같은 후덜덜한 연기를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좀 짜쳐 보인다. 하여간 이 영화를 만들면서 아론 존슨은 23살 연상의 감독과 눈이 맞고...
ps3. 솔직히 영화가 그렇게 맘에 든 건 아니었다. 뭐 그 정도 굴절된 사춘기와 성장환경이야 세상에 쎄고 쎈 사연인데, 그 사연을 엮는 영화의 방식이란 게 좀 나이브하다. 게다가 줄리아 레넌이 저렇게 부각됐다는 건, 워낙 앤-마리 더프가 잘해서이기도 하지만 감독이 영화의 방향을 뚝심있게 끌고가지 못했다는 얘기기도 하다. 존 레논의 성장시절과 줄리아 레넌의 숨겨진 역사가 다소 따로 노는 느낌.
ps4. 그러나 역시, 귀는 즐겁다. 50년대 로큰롤 명곡들이 줄줄이, 배경음악으로 혹은 존과 그 무리들이 카피하는 연주곡으로 나온다.
ps5. 레코드 가게에서 훔쳐온 음반들이 다 재즈라고 강바닥에 버리는 장면을 보며 "아니 이것들이? -_-+"라며 쌍심지를 키우려던 찰나, 지나가던 미국인 단역의 주옥같은 말씀에 마음이 풀어졌다. "어떤 음악이든지 강바닥에 버려지기에 마땅한 레코드는 없다." 하긴 존 레넌에게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의 음악을 알려준 귀인이 아닌가. 이 사람도 알고보면 유명한 사람이라던가... 아니면 감독의 친한 배우 누가 카메오를 해줬다던가... 하는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은데.
ps6. 10대 폴 매카트니로 토마스 생스터가 나온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꼬마 천사였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다니... 왜 이런 모습으로 컸다니...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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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숙 | 첫사랑 - 1989, 수미다의 기억 - 2010/12/07 07:53
<첫사랑– 1989, 수미다의 기억>은 1989년 이른바 ‘수미다 투쟁’을 소재로 한다. 일본에 본사를 둔 수미다전기는 70년대 마산 수출자유지역에 공장을 설립하고 한국수미다전기를 운영했으나, 1989년 10월 14일 일방적이고 기습적으로 공장 도산 및 노동자 전원 일괄 해고를 통보한다. 그것도 고작 네다섯 줄이 적힌 팩스 한 장으로 말이다. 450명의 수미다 노동자들은 곧바로 농성을 시작했고, 노조대표 네 명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에 있는 본사 앞 길바닥에서 투쟁을 벌인다. 이 싸움은 238일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때 어떤 사건이 있어 왜 싸우게 됐는지, 그 결과 어떻게 되고 무얼 얻었는지 기록하는 데에 전력하는 영화는 아니다. 사건을 모르기 십상인 지금의 젊은 관객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으니 기억하라”고 강요하거나 당시 그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요란하게 찬양하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은 당시 싸웠던 이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현재’의 문제다. 이들은 그때의 경험으로 어떻게 바뀌었는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래서 이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20년 전 원정투쟁 당시의 모습을 담은 영상과 이들의 현재의 모습이 계속 교차하면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진정한 승리란 과연 무엇인가”이다. 물론 수미다 투쟁은 (지금까지도) 드물게 외자기업 본사와의 합의에 도달한 ‘승리한 투쟁’으로 기록된다. 일본의 통상적인 쟁의 관례를 깨고 처음으로 합의문에 사측의 공식적인 사죄가 기록됐으며, 10월 14일의 해고통보가 무효화되면서 교섭 타결 바로 전달(1990년 5월)까지의 임금과 퇴직금, 퇴직위로금 등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한 언론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승리 거둔 처녀 노동자들”이라는 헤드카피를 뽑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성과’만으로 진정 승리했다 말할 수 있을까? 결국 공장은 결국 문을 닫았고 수미다 노동자들은 대책없는 일자리 찾기를 위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는데 말이다. 원정투쟁을 갔던 네 명은 이후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곳에 취직하기도 어려웠다. 일부는 전업활동가가 됐고 또 일부는 전업주부가 되거나 보험설계사가 됐다.
수미다 투쟁이 진정 ‘승리’로 기록될 수 있는 이유, 투쟁이란 이미 시작한 그 자체만으로 성공인 이유가 바로 이 영화 안에 있다. 수미다 투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 싸움을 계기로 스스로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싸우던, 혹은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까지 변화시켰다. 영화는 수미다 원정투쟁을 갔던 네 명 외에도, 그 싸움에 함께 하고 지지연대를 했던 일본인 활동가들에게 상당한 비중을 할애한다. 수미다 동지들이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민중가요와 투쟁가를 부르며 그에 맞춰 율동을 하는 모습에 매혹된 이들 일본인 활동가들은 수미다 투쟁이 끝난 후 변화를 겪었고 또한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 모습이 고스란히 이 영화에 담겨있다. 투쟁승리집회에서 한 일본인 활동가가 “’축하한다’는 말 대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머리를 숙여 “아리가토 고자이마스”라고 인사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숱한 ‘감동적인 장면’ 중에서도 최고다.
발레오공조 노동자들이 4차에 이르는 프랑스 원정투쟁을 비롯해 1년 넘게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현재, 이 영화가 더욱 소중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다. 어쩌면 지금 당장은 죽도록 힘들고 결국 '패배'할지는 몰라도, 그 투쟁은 결코 실패도 패배가 아닐 거라는 나직한 위안과 격려가, 이제는 40대 아줌마이자 엄마가 된 '수미다 언니'들의 호탕한 웃음 안에 있다. 한 알의 밀알은 단지 뿌린 한 곳에서만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다른 여러 곳에서도 동시에 싹을 틔우고 잎을 낸다는 사실을 생생히 증언하는 영화가 바로 <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이다.
다만 한 가지,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슬프고도 무서운 점이 하나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수미다 때처럼 똑 같은 이유로 고통당하며 싸워야 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거? 나아가 필리핀 필스전 사건에서도 드러나듯 한국의 기업들 역시 지금 필리핀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곳곳에서 과거 일본 수미다가 저질렀던 것보다 더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거? 아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ps. 서울독립영화제2011 프리뷰 - 네오이마주 송고. 원문은 여기.
ps2. 이 영화는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극장개봉 여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니 모두들 일단 서독제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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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한국포스터가 훨씬 낫다.
<렛미인>은 헐리웃이 리메이크를 시도했다가 망쳐먹은 수많은 예와 달리, 드물게도 성공적인 작품에 속한다. 헐리웃 리메이크작 답게 특수효과가 눈에 띄고 조금 더 친절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친절함'이 기존의 실패작들과 달리 오히려 주요 이야기의 줄기를 풍성하게 해주는 컨텍스트의 구성 쪽으로 집중됐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원작(스웨덴 버전)보다 오히려 더 격렬하며 암울한 분위기를 띄며, 강한 정치-사회적 맥락의 의미를 갖는다.
<렛미인>의 기본 줄기는 원래 버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스웨덴 버전의 인상적인 장면들도 고스란히 반복하며, 마지막 엔딩 장면도 똑같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으로 1983년 3월, 뉴멕시코 주의 로스 앨러모스가 선택됐다는 건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아주 의미심장하다. 로스 앨러모스가 어떤 곳인가. 세계 최초로 원자력실험연구소가 설립된 곳, 그리하여 최초로 원자폭탄을 만들어낸 '맨해튼 프로젝트'의 중심지가 아니던가.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수소폭탄이 개발되고, 최근까지도 '원인이 확인되지 않은' 폭발사고가 종종 일어나는 '미국 핵실험의 중심지'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의하면, "'고립된 자연환경'으로 인해 이곳에 1942년 세계 최초로 원자력실험연구소가 설립됐다"고 한다.) 더욱이 1983년 3월은 레이건 대통령이 일명 '스타워즈 계획'이라 알려진 SDI(Stratagic Defense Initiative, 전략방위계획)를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영화에 잠깐 삽입되는 레이건 TV연설 장면은 바로 이 SDI를 발표하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장면의 자막 번역이 중략되는 건 매우 애석한 일이다.)
사실 미국은 70년대 후반부터 중, 남미에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좌파정권을 CIA를 앞세워 진복시키는 작전을 수행해왔고, 1983년 10월에는 소위 '미국민 안전보호'를 명목으로 중미의 작은 국가인 그레나다에 직접 침공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헐리웃 버전의 <렛미인>이 그저 스웨덴 버전의 <렛미인>을 리메이크한 버전이라고만 말하기 힘들어진다. 오히려 원작 소설 '렛미인'을 미국식 맥락에서 재해석한 버전의 전혀 다른 영화라고 칭해야 옳다. 그 결과 헐리웃 버전의 <렛미인>은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며 전시태세를 강화하던 당시의 미국-그리고 이 전통을 이어받은 부시의 미국-의 모순과 아이러니를 짚는 사려깊은 영화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더라도, 헐리웃 버전의 <렛미인>은 스웨덴 버전에서는 그저 희미하게만 처리됐던 뱀파이어 소녀와 남자 성인 보호자간의 관계가 좀더 섬세하고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영화를 차별화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는 이 영화가 배경으로 선택한 설정들과 맞물려, 영화의 정치-사회적 함의를 더욱 풍부하고 다층적으로 만든다. 스웨덴 버전에서는 존재감을 애써 희석시켰던 소녀의 소위 '아버지'(실제로는 일종의 '가디언')는 영화의 처음 시작에서부터 강조되어 '숨겨진 주인공'만큼의 막강한 존재감을 갖는다. 뱀파이어 소녀 애비(클로이 모레츠)와 이 가디언 사이에서 일종의 착취관계의 성격이 보다 분명히 제시되며, 그들간 관계의 성질을 비롯해 그들 사이 복잡다단한 감정의 교류를 공들여 보여주는 장면들이 삽입되기도 한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애비가 가디언의 뺨을 쓰다듬는 씬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애비에게 줄 피를 위해 동네를 옮겨다니며 연쇄살인을 해왔고, 마지막에는 그 자신의 피를 애비에게 준다. 그는 분명 애비와 처음 만났을 당시 영화의 주인공 소년 오웬(코디 스밋-맥피)과 마찬가지로 '소년'이었을 것이고, 영화의 마지막에 애비와 함께 떠나는 오웬의 미래 역시 그와 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커다란 여행가방에 애비를 숨겨 기차를 타고 함께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스웨덴 버전의 엔딩과 그림은 같되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으로 정체성을 부정당하거나, 스스로 부정하거나.
그러나 <렛미인>의 리메이크 성공에서 가장 큰 공은 세운 이는 무엇보다도 주인공을 맡은 어린 배우들인 클로이 모리츠와 코디 스밋-맥피라 할 수 있다. 외모에서부터 남들과 달랐던,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던 원작의 뱀파이어 소녀와 달리, 클로이 모리츠가 맡은 애비는 일견 미국의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평범해 보이는 소녀다. 반면 눈부신 실버 블론드를 자랑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스웨덴 버전의 소년과 달리, 코디 스밋-맥피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소년이다. (그는 <더 로드>에서 비고 모텐슨이 마지막까지 지켜주고자 한 아들을 연기한 바 있다.) 클로이 모리츠는 처연하고 격렬한 비밀을 안고있는 소녀의 복잡다단한 슬픔과 고통을 매우 능숙하게 연기해내며, 헐리웃판 <렛미인>을 스웨덴 버전과 전혀 다른 영화로 재창조한다. 스웨덴 버전이 더없이 신비로운 소녀와 이미 어린 나이에 삶의 지리한 고통과 외로움 알아버린 소년 사이의 교감을 강조했다면, 헐리웃 버전은 각자 고통과 비밀을 짊어지고 있는 소년과 소녀 사이의 연대적 교감을 강조하되, 이 관계가 역시나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과 착취를 전제한 비극적 관계가 될 것임을 강하게 예고하는 것이다. (이들이 다른 해결책을 찾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이들의 앞으로의 선택에 달렸다.)
이미 국내에서도 일정 정도의 성공을 거둔 영화의 헐리웃 버전이기에, 관객들의 호오는 심하게 엇갈릴 듯하다. 스웨덴 버전은 사실 어른들은 모르는 소년과 소녀 사이의 비밀스러운 우정과 사랑에 집중하면서 다른 콘텍스트를 최소화했고, 담백하고 소박한, 그리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영화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헐리웃 버전은 스웨덴 버전에서 희미해졌던 다른 서브텍스트들을 충실히 살렸고, 그 결과 훨씬 어둡고 격렬해졌다. 스웨덴 버전이 '하얗게 빛나는' 이미지라면, 헐리웃 버전은 '어둡고 격렬한' 이미지다. 스웨덴 버전의 아련한 신비로움에 매혹됐던 이라면, 헐리웃 버전의 '세속적'인 변화가 몹시 놀랍고도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헐리웃 버전이 취한 다층적인 서브텍스트들의 매력은, 굳이 안 넣어도 되었을 것 같은 특수효과 장면같은 단점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어느 버전을 선호하는가는 결국 관객의 몫이지만, 적어도 맷 리브스 감독과 배우들은 스웨덴 버전의 매력 못지 않는, 전혀 다른 매력이 숨쉬는 또 한 편의 <렛미인>을 탄생시켰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셈이다. 11월 18일 개봉, 15세 관람가.
ps. 2010/11/11(목) 프레시안에 기고. 원문 페이지는 여기
ps2. 이틀 전엔 화요일에 기고해놓고 11일 게재된다는 연락은 받았는데, 목요일 아침일찍 발행됐다가 다른 기사들에 묻혀서인지 나는 그 다음 주까지도 기사가 안 실린 줄로만 알고있었다. 그 상태에서 씨네21 보다가 거의 비슷한 내용의 리뷰가 실려서 낙담하고 글을 회수할까 했는데, 그 전 주에 이미 실렸더라.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ps3. 레이건 시대,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로스 앨러모스라는 사실은 워낙에 드러난 내용이라 다들 쉽게 지적하지만, 1983년 3월이 '스타워즈 계획' 발표가 있었던 달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알려져있지 않은듯. 나도 처음엔 생각을 못하다가, 리뷰를 쓰던 중 갑자기 생각나서 '스타워즈 계획'을 따로 찾아보고 나서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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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하하하 이 포스터!
우디 앨런 감독의 1999년작 <스윗 앤 로다운>은 가상의 천재 재즈 기타리스트 에밋 레이(션 펜)의 변덕스러운 삶을 그린다. 재즈 역사가는 물론, 재즈광으로 잘 알려진 우디 앨런 감독 자신까지 나서 그들의 인터뷰 증언장면과 일종의 '재현' 화면을 교차시켜 일종의 페이크 다큐 기법을 도입했다. 션 펜이 그려내는 에밋 레이는 자신이 세계최고라는 자부심, 그리하여 "예술가라면 응당 이래이래야 한다"는 허세의 자부심이 컸던 만큼, 당대 최고라 알려진 장고 라인하르트에 대해서는 끝없는 열등감과 경외를 가지며 이른바 '열폭'하곤 했다. 에밋 라이의 삶을 증언하는 이들에 의하면, 그는 파리에서 장고의 연주를 들으며 두 번이나 그만 기절을 해버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물론 천재 예술가들의 여자들과의 스캔들은 대중의 가장 큰 관심사일 터. 에밋 라이는 "나는 예술가니까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아, 자유로워야 하니 결혼은 안 해" 따위의 말들을 주절거리며 여자들과 연애는 하되 책임감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피했다. 즐기는 건 좋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라는 거다. 많은 여자들과 그런 식의 연애를 이어갔던 것으로 설정되지만,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해티(사만사 모튼) 및 블랜치(우마 서먼)와의 관계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블랜치는 한편으로 해티를 돋보이게 하는 한편, 레이가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기만을 깨닫게 하는 일종의 '계기'로 작용하는 좀더 기능적인 인물이다. 해티가 어릴 적부터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였던 반면 블랜치는 끊임없이 노트에 기록을 하는 작가지망생이다. 고아 출신으로 세탁부였던 해티와 달리 블랜치는 명성과 돈이 있던 가문의 여성이었던 점도, 해티가 레이를 숭배하며 그럴 어린아이같은 심성으로 사랑했던 것과 달리 블랜치가 매순간 레이를 분석하려 들며 그와 일종의 줄다리기 게임을 즐겼던 점도 해티와 블랜치가 얼마나 극명한 극을 이루는 사람들인지 잘 드러내는 특징들이라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해티는 변덕스러운 레이에게 하룻밤새 버림을 받지만 블랜치는 그 자신이 레이에게 배신을 때린다.
그러나 이런 식의 줄거리 요약이 <스윗 앤 로다운>의 아름다움과 근사함을 특징지어주는 요소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이 언제나 천착했던 남과 여의 관계, 또 한편으로는 예술가와 그의 팬의 관계를 버무리면서, 그 특유의 유머와 신랄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작품이다. 영화 전반을 통해 우리는 허세와 연약함, 자만심과 가련할 정도의 열등감과 자기 방어 기제, 빛나는 재능과 어이없을 정도의 어리석음을 함께 갖고 있던 '에밋 레이'라는 인물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디 앨런 특유의 신랄한 유머와 션 펜의 탁월한 연기 덕에, 관객의 입장에선 그를 한심스러워하며 조롱의 비웃음에 동참하게 되면서도 동시에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연민을 함께 품게되는 것이다. 그건 그가 언제나 무대 위 빛나는 별이 되고 싶었으되, 태생적으로 어둠과 진창에서 태어났고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심지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렇기에 그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에서만 투쟁적이었으며, 그럼에도 그런 투쟁의 삶은 언제나 너무나 쉽고도 허무하게 여자와 자고 싶다거나 차를 사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너무나 가볍게 바람에 흩어지곤 했다.
사만사 모튼과 션 펜.
자신의 거울과도 같은 사람과의 연애와 상처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이미 너무 늦어버린 사람의 가치를 깨닫는 어리석은 남자의 이야기야 이 우주에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넘치도록 넘친다. 재능은 지녔으나 그 재능을 유지해줄 성실함은 없고 더욱이 자만과 허세가 하늘을 찌르던 예술가의 추락, 그것도 처음엔 서서히 진행되다 점점 가속도를 더해 막판엔 겉잡을 수 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그 자신은 너무 늦은 뒤에야 그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역시 세상에 흔하게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우디 앨런은 <스윗 앤 로다운>에서 옛날옛적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꾼들이 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도, 그 안에 자신만의 독특한 숨결을 불어넣는 데에 성공한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빛나는 듯하다 대공황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이 퇴색했던 미국의 그 20년대와 30년대를 그 빛나는 재즈 음악으로 한껏 되살려내고,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어리석은 한 남자를 통해 예술과 삶과, 사랑을 되짚는 것이다. 이후 2000년대의 우디 앨런의 영화들이 여전히 매력은 있지만 어딘가 예전의 우디 앨런답지 않은 맥빠진 면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에게 있어서도 가장 찬란히 빛난 뒤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든 그의 영화예술 세계의 가장 마지막으로 빛나는 정점에 있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ps 1. 이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의 2010 시네바캉스의 상영작으로 상영되었다. 99년경 헐리웃 리포터 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처음 접하고 수입개봉만을 기다렸으나, <브로드웨이를 쏴라> <마이티 아프로디테>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등이 개봉되고 있던 와중에도 이상하다시피 수입되지 않았던 걸작.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10년을 기다려 본 셈이 된다.
ps 2. 기타를 부숴버린 채 망연히 앉아있는 션 펜의 모습을 부감으로 잡은 거의 마지막 숏은 역시 명불허전, 백문이 불여일견.
ps 3. 당연한 얘기지만, 음악이 너무 좋다. 중간중간 같이 재즈 잼을 연주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역시나 너무 좋다.
ps 4. 션 펜 오빠 만세! 아울러, 역시 허세와 허영으로 가득찬 블랜치의 모습을 매우 매혹적으로 그려낸 우마 서먼도 뜻밖에 우디 앨런 영화에 아주 잘 어울리는 언니였다는.
ps 5. 2000년대에 우디 앨런이 함께 작업했던 주요 배우 중 그나마 우디 앨런 영화에 잘 어울렸던 이는 스칼렛 요한슨 한 명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니 우디 앨런도 요한슨과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함께 작업했던 거겠지만. 사실 이 영화의 사만사 모튼도 우디 앨런의 영화와는 묘하게 불균형을 이루는데, 사만사 모튼이 맡은 해티 역은 워낙에 그런 불균형이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경우라 해야 할듯. 사실 2000년대 우디 앨런 영화 중 최악의 미스캐스팅은 역시 <애니씽 엘즈>의 제이슨 빅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ps 6. 그러므로 결론은... 역시 션 펜 오빠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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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허한 포스터 감성 어쩔 거야;;
조너선 캐럴의 『웃음의 나라』는 마셜 프랜스라는 동화작가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한 남녀 한 쌍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던 작가가 평생을 보냈던 마을에 도착하지만, 곧 그 마을의 무서운 비밀을 알게 된다. 꽤나 충격적인 반전과 장면이 포함된 이 소설을 읽고, 허구의 창작이야말로 신의 천지창조를 흉내낸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창세기에서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따고 생령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모든 창작자들도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들의 소소한 설정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 환경, 그리고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에 반영하면서, 점차 보이지 않는, 그러나 우리의 물리적 세계를 꼭 닮은 허구의 세계가 형태를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떤 창작자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캐릭터를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끌고가지 못하게 된다. 대신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들이 스스로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행하는 선택들을 그저 뒤좇게 된다.
그러고 보면 바벨탑 이야기가 ‘언어’의 흩어짐으로 끝을 맺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후대의 신학자들은 바벨탑 이야기를 ‘신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들’에게 신이 내린 징벌로 해석한다. 그리고 테드 창 같은 작가는 오히려 “신을 경배하고자, 그래서 신을 닮고자 만든 것”이라는 전복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물론 나는 테드 창의 해석이 좀더 마음에 든다. 나아가 바벨탑이 그저 높이만 높은 탑일 뿐 아니라, 실은 소설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도서관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인간 복제나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보다도, 허구의 창작야말로 신의 영역을 넘보는 모방 행위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재능이 있든 없든, 사춘기 적 한번쯤은 소설 습작을 해보고, 고통과 무력의 시기에 한번쯤은 시나리오를 써볼 궁리를 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성호 감독의 영화 <그녀에게> 역시 허구를 창조하는 창작자의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배우 미팅을 위해 부산에 내려가는 한 영화감독과, 실명(失明)을 앞두고 오래 전 버린 딸을 찾아가는 중년의 사진가를 교차하며 시작한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를 고쳐쓰다 부산의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묘령의 신비로운 여자와 만나 그녀와 동행하게 된다. 한편 전화번호가 적힌 낡은 사진 한 장만을 들고 딸을 찾는 중년 남자는 필사적으로 딸의 행방을 좇지만 좀처럼 그녀를 만날 수 없다.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평행하게 달리며 서로 교차되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엮이기 시작한다.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여자가 들려주는 사연을 자신의 시나리오에 반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여자의 사연이 밝혀질수록, 초반에 제시됐던 영화감독의 사연이 하나씩 거짓으로 판명될수록, 영화 안에서 이야기와 현실, 실제와 허구가 뒤섞일 뿐 아니라 시간까지 뒤섞인다. 주인공인 영화감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섞인 채 한 영화 안에 여러 개의 이야기로서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러 개의 이야기가 다시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여배우가, 내가 좋아하는 서늘한 인상의 미녀다. 그러나 실제로 본 인상은 또 좀 다르더라는.
<그녀에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시나리오를 쓰던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여자를 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결국 창작자가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주인공을 붙잡는 장면으로 판명난다. 자신이 피조물에게 그런 고통과 상처를 주었고, 그 자신이 그녀가 사고를 당하도록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나 그녀가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 아니 그가 그 장면을 쓰던 그 순간, 그는 스스로 깜짝 놀라 키보드를 내던지고 이야기 속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는다. 이건 뒤집어 말하면, 결국 고통과 눈물의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의 상처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인 되는 셈이다. 어쩌면, 인간을 연민한다는 신의 마음이 저런 것일까. 제가 만들고 제가 안겨준 고통이면서, 막상 그 고통에 힘겨워하는 인간을 보면서 연민과 고통을 경험하는 것일까, 신이란 존재는.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신이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흩뜨려놓긴 했으나 문학을 포함해 허구 자체를, 나아가 예술 자체를 파괴하지 않은 이유가 무얼까에 생각이 미친다. 신을 닮고 싶어하는 인간의 그 가련한 욕망에 결국 연민을 품어버린 것일까. 이 세계를 창조한 자신들의 영광을 기리는 것이니 그냥 관대하게 굴자고 마음먹어서인 걸까. 혹은, 인간이 허구와 예술을 즐기다가 어느 순간 신을 이해하는,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의 순간을 맞기에 그냥 고이 내버려둔 것일까.
그런데 김성호 감독은 이 영화를, 애초에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로 일단 찍어놓고 나중에 편집을 통해 이야기를 짜맞췄다고 한다. 어쩌면 신도 이 세상을 만들 때 실은 아무 계획없이 창조의 욕구 때문에 무작정 만들고 본 게 아니었을까 싶다. 완벽한 조물주가 만들었다고 하기엔, 빈 틈이 너무 많은 우리 세상이 아닌가.
+ 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독립영화데이터베이스 페이지 중 '독립영화 초이스'에 기고한 글. (2010. 3. 10)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ps . 이 영화 역시 한국 주요도시 관광홍보 프로젝트인 '영화, 한국을 만나다'의 부산 편으로 제작된 영화다. 영화제 때문에 매년 내려가고 1년간 살기도 한 곳이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풍경들은 "부산에 정말 저런 이국적인 곳들이 있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생경하고 이국적이다. 이는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씨네21 김도훈 기자의 리뷰의 언급처럼 '그저 겉멋에 겨운 장소만 모은' 결과일 수도 있지만,... 매년 영화제 때문에 부산에 내려가는 서울 영화인구 반 이상이 부산을 아무리 익숙하게 여기고 안다고 착각한다 해도 실은 부산의 맨 얼굴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 그건 겨우 1년, 그것도 곧 떠날 이방인으로만, 게다가 해운대에서만 살아본 나 역시 마찬가지다 - 이 영화의 분위기가 부산과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물론 철저히 '서울내기' 입장의 폭력적 시선이기도 하다.
ps 2. 영화에서 주인공 영화감독 역을 맡은 이우성은 본업이 배우가 아니라 뮤지션이다. 그룹 코코어의 보컬. 김성호 감독과는 이전에 <판타스틱 자살소동>의 김성호 감독 연출 에피소드에서 협업한 바 있는데, 이 영화에선 그 '어설픈 연기'가 나름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반면 중년 포토그래퍼 역의 조성하는 연극판에서 뼈가 굵은 안정된 연기력의 배우.
ps 3. 글 말미에서 밝힌 대로 시나리오 없이 일단 무작정 찍고 편집실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낸 영화라고 하는데, 그런 영화치곤 아귀가 제법 잘 맞고 일관성도 또렷하다. 하지만 덕분에 전주영화제에서 첫 상영되기 직전까지도 편집이 이뤄지고 있었다나 어쨌다나. 이 영화의 일부 장면 역시 캐논 5D Mark II의 동영상 기능으로 촬영되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이우성의 차를 부감으로 따라가는 장면이 그 장면인데, 전주에서 상영 당시 이 장면은 화면 일부가 깨지며 픽셀 일부가 확대된 것같은 부분이 있어 아쉬웠다. 그나저나 이 장면은 헬리콥터...가 아니라 경비행기에 촬영감독이 타서 촬영한 장면이라는데, 촬영 직후 비행기가 추락;;;해 촬영감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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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수 | 뭘 또 그렇게까지 (2009) - 2010/08/28 00:26
포스터도 촌스럽지만, 저 70년대스러운 카피라니.
기차 안에서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을 읽고 있던 촉망받는 젊은 화가 조찬우(이동규)는 춘천에서 열리는 미술학회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는 중이다. "얼른 춘천역에 와서 치킨집 술자리에 합류하라"는 독촉전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동적으로 김유정 역에서 내린다. 그리고 역시 '김유정'이라는 이름을 지닌 젊은 미술학도 여성과 만난다. 젊고 예쁜 여자가 자신을 존경한다며 "선생님, 선생님"하며 졸졸 쫓아다니니, 우리의 속물 예술가 조찬우는 어깨에 힘을 좀 주며 그녀를 꼬시고 싶다. 조찬우의 눈에는 김유정 역시 그걸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영화가 흥미로운 반전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니체'를 권하며 잘난척을 하던 조찬우의 '권위'가, "실은 고등학생 때 니체는 다 읽었다"는 유정의 말에 순식간에 뒤집히는 것이다. 거기에 조찬우는 유정을 스토킹하던 젊은 감독지망생 민호에게 '쫓기며'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후 영화는 단순히 한 여자와 두 남자를 둘러싼 소동만으로 코미디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관계와 태도를 통해 '자연'과 '예술'에 대한 담론으로 비약한다. 민호가 찬우에게 술대결을 청하며 들려주는 유정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름 신빙성 있는 '근거'들을 지니고 있지만, 이야기 자체가 기괴한데다가 민호라는 인물도 부담스러울만치 과잉된 자의식으로 뜬금없는 행동을 일삼는 캐릭터다. 곧 우리는, 그녀가 유정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 역시 실은 민호가 제멋대로 구성해 믿고있는 이야기들일 수 있다고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진술이 자연과 예술에 대하여 찬우가 유정에게 흘리듯 던졌던 말들, 그리고 세미나에서 토했던 열변들이 유정에 대한 기괴한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유정이란 인물은 다층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녀는 찬우가 낯선 곳에서 만난 그저 신비한 여인일 수도 있다. 민호의 말대로 기괴한 믿음과 행동을 일삼는, '어른 남자 찜쩌먹는 무서운 어린 여자아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또한, 찬우가 '예술'과 '자연' 개념을 그대로 육화한 존재이기도 하다.
'예술가'로서 찬우에게 '유정'은 처음엔 손을 내밀면 닿을 것 같은 '예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가 감히 통제하기는커녕 어찌할 수도 없는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로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민호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영화 역시 유정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찬우는 홍상수 감독의 남자캐릭터들과 달리,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기보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그에 복종하는 인물인 것 같기는 하다. 빈 호텔방에서 잠을 못 이루던 찬우가 '유정이 즐겨 한다던' 백팔 번 절하기를 하는 코믹한 장면이 바로 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될 것이다.
영화의 클래이맥스를 이루는 공간은 젊은 예술가들의 축제가 열리는 공간이다. 애초 '춘천'이라는 도시를 알리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이 영화는 찬우와 유정의 동선 뒤로 춘천의 유명한 명소들을 배치해놓는 한편, 춘천을 대표하는 음식인 막국수와 닭갈비를 화면에 반복해서 등장시킨다. 그러나 <뭘 또 그렇게까지>가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춘천의 얼굴이라면, 서울과는 또 다른, 언제나 젊은 예술가들의 활기로 넘치는 '예술의 도시'로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영화와 음악, 춤, 판토마임, 행위예술, 그림 등 모든 장르의 예술이 어우러진 이 축제에서 찬우는 비로소 자신의 맨얼굴을 보게 될 뿐 아니라, 민호로 상징되고 있는 자신의 과거를 직시한다. (민호와 찬우는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이다.) 그리고 삐딱한 냉소와 비웃음이 몸에 배 있던 찬우는 비로소 이곳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고 겸허한 자세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후에 또 한 번의 반전을 준비한다. 찬우가 마침내 유정에게 다가갈 수 있겠다고 느꼈을 법한 순간, 유정은 다시 그의 이해와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예술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유정에게 짓는 찬우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인상적이다. 그 얼굴이야말로, 예술 언저리에서 밥을 먹으며 예술을 좀 아노라 하는 우리 모두가 가장 두려워할 순간의 얼굴일지 모른다. 우리가 원하고 희구하는 그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진실을 맞닥뜨리는 그런 순간이니까. 하지만 이 글을 유정이 읽는다면,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을 할 것 같다. "뭘 또 그렇게까지 이 영화를 보셨어요?"라고.
+ 프레시안에 기사로 올린 글. (2010. 4. 24)
ps 1. 캐논이 내놓은 DSLR 카메라인 OD 5D Mark II의 동영상 기능으로 완성된 전세계 최초의 영화. <하우스>의 몇 시즌이더라... 하여간 그 시즌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바로 같은 기종으로 전체가 촬영된 바 있다. 현장에서 제대로 모니터도 못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 초점이 빗나간 장면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기대 이상의 화질을 보여준다.
ps 2.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영화, 한국을 만나다'라는, 한국의 주요도시 다섯 곳에 대한 일종의 '관광홍보' 차원으로 기획된 시리즈 중 춘천 편이다. 부산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처음 상영됐을 때 보면서 관광홍보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영화 그 자체로 재미있으면서도 춘천의 명소와 춘천을 대표하는 키워드가 모조리 등장하는 것을 보며 감탄했던.
ps 3. 불쾌하기 짝이 없는 '90년대 홍상수 영화들'에 대한 아주 통쾌한 복수...라고 생각해서 이 영화를 더욱 좋아한다. 그러나 정작 전계수 감독은 이 영화가 "내 자식 같지 않다"고 한다. 전계수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이 이야기를 듣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란. 인터뷰를 보시려면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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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 - 2010/08/28 00:14
본 포스터보다 멋진 티저 포스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조선시대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하는 정여립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이후 그가 조직했던 대동계의 향방을 두고, 왜구의 침입이 가시화되고 있음에도 이에 전혀 대처할 수 없는 "썩어빠진 조정을 쓸어버리려는" 이몽학(차승원)과, "대동계를 이용해 자신이 왕이 되려는 이몽학을 저지"하기 위한 황정학(황정민)의 추격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한신균을 아버지로 두었으나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고 방황하던 견자(백성현)가 이몽학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난 뒤 복수를 위해 황정학과 동행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기축옥사를 일으켰던 당시 극심했던 동인과 서인 간 정쟁이 영화에서도 (그저 정여립의 죽음을 설명하는 기능적 측면을 넘어서서) 매우 코믹하지만 결정적인 몇 장면으로 묘사된다. 다만 실존인물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의 제약 없이 회원을 받고 정기적인 무술훈련도 병행했던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끌어오되, 실제로 정여립이나 대동계와는 별 관련이 없었던 이몽학을 정여립의 제자이자 대동계 회원으로 설정한 데에서 상상력이 발휘됐다. 이몽학이 정여립과 대동계로 연결되면서 이몽학의 난이 실제 역사보다 4년 정도 앞서서 임진왜란 직전에 일어난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영화를 이끄는 두 주인공인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비에 있다.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이몽학이 주로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절도있는 말과 동작을 보여주는 '직선의 미'라면, 남루한 행색으로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는 소경 검객인 황정학은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능청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일관하는 '곡선의 미'다. 맹인 검객이라는 면에서 얼핏 '자토이치'의 인상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영화 속 황정학은 오히려 <스타워즈>의 장난기 많은 괴짜노인 요다나 <취권>의 사부 쪽에 가까운 성격을 드러내 보인다. 이몽학과 황정학이 마침내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근래 액션영화들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정반대로 '슬로우 모션' 액션으로 표현돼 다른 종류의 시각적 쾌감을 준다. 길게 이은 중심컷을 슬로우로 표현하되 그 앞뒤에 짧고 빠른 연이은 컷들을 붙이는 식으로 동양 무협액션의 아름다운 곡선의 동선을 최대한 살리고 표현하는 것이다. 칼과 칼이 부딪히는 무협액션의 쾌감을 잘 살린 이 씬은 가히 영화의 클래이맥스라 할 만한 장면이다. 두 시간이 조금 안 되는 러닝타임 안에 사건과 이야기의 흐름을 안정적으로 쌓아가는 호흡 좋은 플롯 구성도 영화의 강점이다. 촬영과 편집, 연출의 호흡, 그리고 지나치게 과용하지 않으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있는 음악도 나무랄 데가 없다.
<황산벌>과 <왕의 남자>에서도 드러났듯,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도 이준익 감독은 '권력'에 대해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시선을 그대로 견지한 채, 권력다툼의 와중에 일어나는 '난'이 빚는 끔찍함과 허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이 가장 적극적으로 투영된 인물이 바로 황정학이다. 그는 권력이나 대동계가 가진 '힘'에 초연한 채 반 거지행색을 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생물학적 아버지를 잃은 견자에게는 이상적인 스승이자 실질적인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전 작품들과 달리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권력을 사유하는 인물, 혹은 권력의 유혹 앞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의치가 너무 부담스러웠던. 혁명가이자 야심가이기도 했던 이몽학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야심만 도드라진다.
임진왜란을 피해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가버린 후 텅텅 비어버린 궁에 도착한 견자는 근정전 안의 왕좌에 앉아본다. 이 순간 관객들은 영화 초반, 서자라는 이유로 반항을 일삼던 견자에게 한신균(견자의 아버지)가 던져줬던 "지금 이 나라 왕도 서자 출신"이란 말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에서는 별로 강조가 되지 않았으나 이몽학 역시 실제 서얼 출신이었고, 그는 영화의 초기부터 왕이 되려던 야심을 숨기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권력에의 의지를 드러내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 역시 '너무 쉽게 입성한' 한양의 텅 빈 궁에 도착한 뒤, 허탈한 표정으로 근정전 앞마당에서 칼을 끈다. 그리고 견자는 이몽학을 맞아 "겨우 여기 앉으려고 그 많은 피를 흘렸냐"고 비난을 함으로써, 자신이 이몽학이 아닌 황정학의 길을 선택했음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왕의 남자>의 연산군조차 자신의 의지보다는 주변에 떠밀린 채 현실도피를 하는 듯한 인물로 그려졌고, '권력의 맛'을 알게 된 공길도 견자만큼 '적극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은 아니었음을 떠올렸을 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의 인물들은 이전의 이준익 감독의 인물들과 일관되면서도 어딘가 달라진 면모가 있다.
아쉬운 것은, 그 '다른' 면모가 제대로 입체성을 갖고 영화에서 발휘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인물들은 매우 단선적이고, 이 때문에 각기 정해진 방향으로 앞만 보고 내달린다. 이몽학은 고뇌를 지닌 혁명가라기보다는 그저 야심에 날뛰는 악당으로만 보이고, 그런 이몽학과 대척점을 이루는 황정학은 '너무 당연하게 옳기에' 오히려 "이몽학을 견제하기 위해 어린 소년의 치기어린 복수심을 이용하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관객의 입장에서 가장 감정이입을 할 만한 인물이자 실질적인 화자는 응당 견자가 돼야겠지만,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립구도에 지나치게 눌리는 데다 무작정 분노와 반항기를 내보이며 '버럭대기만 하는'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이몽학과 견자의 연결점이 되는 인물인 백지 역시 존재감이 약한 편으로, 이몽학과 백지 사이의 멜로 역시 다소 성기게 표현된 편이다. 이 때문에 인물들이 전면적으로 충돌하는 영화의 말미는 아드레날린의 폭발은 있되 가슴벅찬 감동이나 카타르시스는 기대하기 어렵다.
멘토로서의 황정학은 황정민에 의해 아주 매력적으로 재현되기는 했으나, 정작 그의 명분과 철학엔 별 입체감도 깊이도 없다.
영화의 클래이맥스를 이루는 이몽학과 황정학의 칼싸움, 그리고 이것의 '변주'인 이몽학과 견자의 칼싸움은 서로 팽팽하게 대립했던 상대와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이자 동시에 그랬던 상대에 대한 이해와 인정, 그럼에도 각자의 '다른 선택'이 엇갈리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간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인물들이 비로소 상대를 거울삼아 자신의 맨얼굴을 보는 장면이기도 하고, 그들이 시종일관 숨겨왔던 번민과 의심, 회한과 아이러니와 연민이 비로고 균열의 얇은 틈을 뚫고 새어나오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들은 관객에게 채 도달할 새도 없이 곧바로 공중에 흩어져 버리고 만다. 각자 앞만 보고 달려온 인물들이 마침내 일생일대의 대결을 펼치며 장렬히 산화하는 동안, 관객들은 그저 이들의 싸움을 '구경'만 하는 입장이 되기 십상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모처럼 꽉 짜이고 안정적인 이야기와 구성과 화면으로 두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영화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의 전작들에서 언제나 이야기를 이기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사람'의 온기 - 그것이 다소 이상적인 방향으로 단순화된 면이 있었을지언정, 그리고 언제나 동의를 받지는 않았을지라도 - 가 이 영화에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은 언제나 특유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힘, 무엇보다도 '사람'의 온기로 이런저런 소소한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무수하고도 뛰어난 장점들 가운데 그리 많지 않은 단점이 유난히 도드라지게 눈에 와서 박힌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분명 긴장과 재미를 느꼈음에도 극장을 나오면서는 허탈감과 아쉬움, 답답함이 더 컸던 이유다.
+ 프레시안에 기사로 올렸던 글. (2010. 4. 20)
ps1. 원작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보면서도, 이 이야기는 틀림없이 견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배우며 그의 눈에 비친 이몽학과 황정학의 모습일 거라 짐작했고, 그게 맞게 이야기를 푸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립구도를 강조하다보니 견자를 어정쩡한 위치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안습이었던 주연급 인물은 아무래도 백지. 이준익 감독은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데에 여전히 서툰듯.
ps2. 조정의 신하들이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고 얄팍하게 희화화되는 걸 보면서 어이없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아주 소박하면서도 대중적인 이런 식의 냉소주의는 하나도 건강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솔직히 그 조정 신하들이 아니라 이 영화의 그런 태도야말로 가장 유치하고 우습게 느껴진다. 그런 태도는 내용없는 불신과 근거없는 무력감과 무관심만을 만들어낼 뿐, 정확한 비판이나 풍자나 조롱이 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순간적인 웃음에 머무를 뿐 진짜 쾌락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는 이처럼 깊이 없이 얄팍한 대중적 정서가 영화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잡고 앉아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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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하게 생긴 일련의 사람들이 WTO같은 세계적인 기구부터 엑손, 다우와 같은 글로벌기업, HUD(미국주택개발공사) 같은 국가 공기업의 대변인을 사칭하며 '사기를 치고 다닌'다. 공명심에 휩싸여 웬 이상한 걸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 경쟁하는 얼빠진 악동들일까? 방송에 이름이 나기만 한다면 무얼 해도 좋다는 괴짜들일까? 하지만 세계적인 대기업인 다우의 대변인을 사칭해 무려 영국 국영방송인 BBC 생방송에 출연해서 "인도 보팔 사태의 책임을 지고 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발언을 한 뒤 두 시간만에 들통이 났을 때, 그 장난의 주연이었던 앤디 비클바움은 자신을 찾아온 BBC의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거짓말은 불과 두 시간이었지만, 보팔을 방치하고 버려둔 다우의 거짓말은 20년을 끌었다."
인도 보팔 사태란, 보팔에 공장을 둔 세계적 화학기업 유니콘 케미컬의 공장이 폭발하면서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유니콘 케미컬은 폭발지역의 오염제거나 적절한 피해자 보상 등을 거의 하지 않은 채 보팔을 방치해뒀다. 유니콘이 '적절한 피해자 보상'을 딱 한 번 했던 것은, 미국 텍사스 주의 주민들이 집단 소송을 걸었을 때 뿐이었다. 폭발사고가 나고 17년 뒤 유니콘은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 다우에 의해 인수됐고, 다우 역시 보팔을 외면했다. 예스맨들은 다우가 유니콘을 인수한 3년 뒤, 영국 BBC 방송이 마련한 보팔사태 20주년 특별 생방송 중 프랑스 파리의 BBC 지부에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다우의 대변인'을 사칭해 "다우가 유니콘을 인수할 때부터 보팔에 대한 피해보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보팔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적절한 피해보상에 나서겠다"고 발표한다. 이 발표 직후 다우의 주가는 거의 20억 달러가 폭락하며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으나, 결국 이들의 '사기 사건'은 불과 두 시간 뒤에 들통이 났다.
예스맨들이 골탕먹인 회사는 다우만이 아니다.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가 담은 이들의 6개 활약상 중 첫머리를 장식할 뿐이다. 이들의 활동의 시작은 무려 WTO의 대변인을 자청하는 것이었고, 뒤이어 온갖 군수산업체와 글로벌 대기업, 심지어 미국주택개발공사(HUD)의 대변인을 자청하며 사기극을 벌인다. 방식도 웃기다. 예를 들어 석유에너지 회사들의 국제회의에서는 시치미 뚝 떼고 엑손의 대변인을 자청해서 사기를 쳤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인간의 사체를 제공받은 양초로 무공해 에너지원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군수업체의 심포지엄에서는 환경오염과 온난화로 전지구적 재난이 닥쳐올 것에 대비해 1인 구명장치를 발명했다며 코미디 SF에서나 나올 것 같은 기구를 선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을 더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이 시장만능주의자들의 논리를 차용한 가짜 연설이나 프레젠테이션이 결국 지독하게 비인간적인 방향의 결론으로 흘러가는데도, 컨퍼런스에 참석한 이들이 '매우 진지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위기관리 솔루션을 개발하는 회사의 대변인을 사칭해서는 "자본주의 시대에 위기관리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논리 하에 "나치한테서도 배울 건 배우자"는 결론을 내리며 자본주의 시대 비인간적 시스템을 조롱하는데도, 컨퍼런스나 심포지엄에 참석한 전세계 대기업 관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역겨움이나 도덕적 저항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참신한 사업적 아이디어"라며 이들을 찾아와 앞다투어 명함을 내밀거나, 오히려 "이런 구명장치는 대테러용으로 더 적합하지 않겠는가"는 사업적 조언까지 건넨다.
다우의 피해보상 발표가 거짓말이란 사실이 밝혀진 뒤 예스맨을 향한 보팔 주민들의 반응. 실은 '연출'된 장면으로, 실제로는 매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는 앤디 비클바움, 마이클 버나노 등 예스맨 프로젝트 활동의 주축이 되는 인물들의 활약상 중 6개를 추려 이들이 스스로 연출까지 손을 댄 기막히게 웃기는 다큐멘터리다. 이들이 대기업과 신자유주의 국제기구들을 골탕먹이는 방법들도 너무나 기상천외해서 웃기거니와, 이를 화면에 담고 영화를 진행시키는 방식 역시 지독하게 웃기고 유머러스하게 만들어졌다. 영화의 시작부터 앤디 비클바움과 마이클 버나노가 양복을 입은 채 수영장에 다이빙해 어설픈 포즈로 싱크로나이징을 하면서 자기들을 소개하는 식이다. "다음 타겟은 어디로 할까" 고민하는 장면에서는 폐가 공장 같은 곳에서 TV 한 대를 놓고 양복차림의 두 사람이 쭈그려 앉아있는 식으로 표현되고, 내레이션으로는 어느 기업을 고발하는 '문자'를 받았다면서 정작 화면으로는 쪽지를 붙인 돌이 창문을 깨고 날아오는 것으로 묘사하는 식이다. 거기에 화면에 종종 삽입되는 풍자적인 애니메이션 장면, 이들이 진지한 국제회의와 심포지엄에서 사용하는 프레젠테이션의 풍자적인 3D 자료화면도 배꼽을 잡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유머와 장난의 이면에는, 진지한 문제의식과 끝없는 열정이 있다. 물론 여전히 그들에게 호되게 당한 기업들은 이들을 '사악하고 심술궂으며 어이없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시민사회운동이라고 하면 의례히 거리에서의 격렬한 집회와 경찰들의 폭력, 각종 피켓과 격렬한 구호, 그리고 이면의 법정싸움과 기자회견 등 뭔가 '진지하고 비장한' 것을 떠올리기 마련인 우리들에게 '예스맨'들의 활동은 너무 장난질 같아 한심해 보이거나 당황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활약을 우스꽝스럽게 담은 영화 <예스맨 프로젝트>와 마침 영화개봉과 때맞춰 발간된 동명의 책을 보고 나면, 이들의 활동이 실은 연기 아닌 연기를 하면서 미디어를 철저히 이용하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교묘한 미디어 운동이자 퍼포먼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결국 이것이다. "규제없는 자본주의란 결국 빈익빈 부익부를 가중화하며 소수의 부자들만 배불린 채 다수의 가난한 이들을 절망과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므로 적절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들이 벌이는 장난질은 한편으로 충격이고, 또 한편으로는 신기하다. "운동과 시위를 저런 식으로도 할 수 있다니."라는 놀라움도 준다. 하지만 이들의 유머는 배를 잡고 웃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혹은 변화시킬 게 너무 많은 우리의 현실을 상기시키며 묘한 슬픔과 눈물을 주기도 한다.
권위주의적인 독재정부를 가까스로 청산한지 불과 20년도 안 된 한국, 그 짧은 사이에 심지어 기업 하나가 법과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는 한국, 거기에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보다 신나는 운동'을 고민하면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이전 세대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에서, 어쩌면 이들의 활약은 지나치게 앞선 것이거나 여전히 생경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이것도 미국이니까 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섣부른 패배의식을 느끼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홍보차 직접 한국을 방문한 앤디 비클바움도 스스로 강조했듯, "변화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그토록 '즐겁게 투쟁하는' 앤디 비클바움도 국내 관객과의 대화와 책 <예스맨 프로젝트>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2003년 칸쿤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며 세계화에 저항한 故 이경해 씨를 언급하며 그의 저항에 경의를 바치기도 했다.
결국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란, 어제의 비장했던 투쟁 덕에 오늘의 즐거운 투쟁이 있을 수 있고, 이것들이 쌓이고 쌓여 내일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으로 2008년 11월 당시 예스맨들이 6개월 후의 날짜로 '행복한 뉴스만을 담은' 미래의 가짜 뉴욕타임즈 신문을 만들어 배포한 사건을 담은 것 역시, 그런 '내일에의 희망'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이 장면의 인터뷰에서 <샌프란시스코의 하룻밤>, <더 혼팅> 등에 출연했던 영화배우 릴리 테일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모처럼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강추'를 할 만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 프레시안무비 기사로 올린 글. (2010. 3. 31)
ps 1. 예스맨들의 활약을 담은 영화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댄 올먼, 새러 프라이스, 크리스 스미스 등 세 명이 연출을 맡은 가운데 마이크와 앤디의 활약을 주축으로 한 <예스맨 The Yes Men>이 완성돼 그 해 토론토영화제와 이듬해 선댄스영화제, 암스테르담영화제 등에서 상영되었고, 비록 한정적 규모나마 북미시장 내 극장개봉도 거친 바 있다. 2003년작 <예스맨 The Yes Men>에 대한 IMDB 페이지는 이곳이니 참조하시라. 2009년작인 <예스맨 프로젝트 The Yes Men Fix The World>는 <예스맨>의 두 주인공인 마이크와 앤디가 직접 연출과 제작까지 맡아 완성한 일종의 속편격인 영화다. 2009년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면서 미국개봉과 DVD 출시 등도 거쳤다.
ps 2. 실제로 만나본 앤디 비클바움은 영화 속에서처럼 유머감각이 뛰어나긴 하되, 훨씬 사람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유머감각과 함께 겸손한 진지함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몇몇 매체가 함께 한 라운드 인터뷰 자리에 참석했다가 완전 반해버렸다는. 당시 인터뷰는프레시안무비에 이 기사로 실었다.
ps 3. 예스맨들의 공식 홈페이지는 이곳 : http://theyesme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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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보다 재미가 덜한.
10년만에 나온 속편인 <주유소 습격사건 2>는 전편만큼 후련한 통쾌감이나 폭발적인 해방감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들에게도 공감을 크게 느끼기 어렵고, 네 명의 캐릭터나 존재감도 무척 약해보인다. 1편에서 노마크, 무대뽀, 딴따라, 뻬인트가 각각의 개성과 또렷한 존재감을 과시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물론 김상진 감독 특유의 액션-코미디 감각은 여전하구나 싶고, 전편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억눌린 괴로움을 풍자하며 웃음을 주기는 한다. 1편의 유머를 활용한 개그들도 그저 '반복'만은 아니어서 노력이 가상해 보인다. 그럼에도 활기와 해방감보다는 오히려 답답하고 어수선한 혼돈만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영화의 실패인가. 아니면 영화 속에 반영된 현실의 실패인가.
주유소와 아무 상관도 없던 노마크 일당이 느닷없이 주유소에 들이닥쳤던 것과는 달리, 이번 편은 주유소의 직원들이 내부에서 주유소를 접수해 버리는 것이 영화의 전제다. 그러니 정확히 하면 주유소를 '습격'한 것이 아니라, '점거'한 것이다. 이 전제에서부터, 그저 전편의 영광에 기댄 안이하고 게으른 속편으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결의가 읽힌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지금의 '비정규직, 혹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20대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보노라면, <주유소 습격사건 2>는 뜻밖에도 근래에 나온 영화들 중 가장 20대들의 처지를 깊숙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면서도, 이를 우울한 절망보다는 떠들썩한 소동극으로 그려내는 드문 영화다.
20대 필자로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확보해 나가고 있는 《뉴라이트 사용후기》의 저자 한윤형 씨는 지금의 20대들에 대해 "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낙오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라고 분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8, 90년대의 20대들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사회체제나 기성의 질서에 저항하는 '루저의 정서'를 지녔다면, IMF 이후의 20대들은 '잉여의 정서'를 지녔다고 지적한다. 이는 사회학자이자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의 저자 엄기호의 주제의식과도 맞닿는 부분이다.
<주유소 2>의 주인공들은 한윤형이나 엄기호가 지적한 바로 그 '20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녔다. 플래시백으로 삽입되는 이들의 과거를 보노라면, 이들은 사회적 모순에 반발심을 느끼고 부모와 기성세대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간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했다가 주저앉게 된 자신의 현실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관객들은 전편의 네 명과 달리 이번의 주인공들에게 크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좌충우돌과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는 20대들을 '단 한 번'의 실수로 영원히 탈락시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우리사회의 생존경쟁을 풍자하는 것이지 않는가. 네 명은 각자 나름의 능력과 장기를 지녔음에도, 주유소 아르바이트 직에 '면접까지 보면서' 응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정규직도 아니고, 심지어 비정규직도 못 되는 단기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전전해야 하는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이나 기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이런 이들이 주유소를 '점거'하는 것은, 박사장(박영규)의 상습적인 임금 체불과 인격모독 때문이다. 이후 이들의 행보는 매우 흥미롭다. 한 명이 그만두자 모두들 연쇄적으로 그만둔 뒤, '받아야 할 돈은 받아야 한다'는 말에 금세 뜻을 모은다. 이것은 전편에서 '그냥' 저질렀던 습격과 달리, 실은 '떼인 돈을 받기 위한' 자기구제이자 점거투쟁이 된다. 결국 '생존권 투쟁'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하룻밤 반값세일로 벌어야 하는 총 목표액을 이들이 각자 받아야할 노동의 댓가의 합으로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자 점거를 푼다. 그 와중 주유소 사무실에 '인질'로 잡혀있던 20대 내레이터 모델 여성들과도 연대를 이루는데, 이 여성들에게 반값세일 이벤트를 홍보하는 내레이터 모델로 협조를 요청한 뒤 그 노동의 댓가를 정확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니저가 아니라 그 여성들 각자에게 직접 돈봉투를 건넨다.
네 명의 캐릭터가 균형을 이루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현선과 지현우에 포커스가 더 맞춰져 있다.
더욱이 이들의 관계는 전편보다 오히려 '민주적으로' 발달한 양태를 보인다. 전편에서는 노마크가 리더쉽을 독점하고 딴따라가 이를 보좌하며, 무대뽀는 딴따라에게 툭하면 "꼴통같은 새끼"같은 말을 들으며 일당 내에서도 은근한 무시를 받았다. 뻬인트는 이들 모두와 떨어져서 '혼자 노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2편에서는 이런 수직적인 서열 대신 보다 수평적인 '네트워크'로서의 관계가 관찰된다. 원펀치와 하이킥(조한선)이 보다 전면으로 나서기는 하지만, 이들 네 명은 대체적으로 성격도 장기도 다른 만큼 각자 자신의 영역을 독립적으로 관할하며 수평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에필로그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하룻밤의 소동 이후 전편에서의 네 명이 각자 흩어진 채 미진하나마 나름의 방식으로 꿈을 이루거나 한을 풀었다면, 이번 편에서의 네 명은 어느 영화촬영 현장에 '함께 모여' 단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나마도 짤린 뒤에는 "이제는 뭐할까" 고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도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함께이다. 각자 성격도 장기도 다르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신들이 '뭉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나면 원펀치가 내세우는 "재미있잖아"라는 말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사실 1편에서 노마크의 "그냥"이라는 말은, 구구절절한 사회의 모순과 이들의 억울함과 한을 그저 쿨하게 압축시킨 한 단어였다. 2편의 "재미있잖아"는 그저 단순하고 순간적인 쾌락을 가리키기보다는, 꿈 없는 현실을 버티기 위한 단 하나의 수단이자, 그러한 현실의 '희생자'가 아닌,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초월하는 자'의 덕목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재미'를 일정한 과정을 통해 승화시킨 결과물을 보통 '예술'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결국 주유소를 나온 뒤 다른 곳이 아닌 영화촬영 현장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다 말이 되는 셈이다. 특히 대중문화/예술이 소위 순수 예술을 상당 부분 압도해버린 지금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유소 2>는 20대들의 이상한 생존권 투쟁과 연대를 다루는 소동극이 된다. 그 와중 주유소를 들르는 '손님'으로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술에 취해 억지를 부리는 조중일보의 기자, 어린 여자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허세만 부리는 중년의 소위 '매니저', 인근 주유소의 다른 사장, 법무부 직원으로 변장한 탈주범들(정확히 하자면 본질은 깡패이나 국가권력의 제복을 입고는 이상한 애국심을 강요하는 현재의 국가질서)이다. 전편에서의 풍자대상이 '천민 자본주의' 하의 부르주아 및 그들의 자식들이었다면, 이번 편의 풍자대상은 오히려 국가와 언론 권력과 20대를 착취하는 기성세대다. 퇴행이 아니냐고? 그렇긴 하지만, 이 역시 영화의 퇴행이 아니라 현실의 퇴행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주유소 2>가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영화가 풍자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재미없고 암담하기 때문이다. 웃음이 그나마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 있었던 시대도 못된 채, 웃음으로도 달랠 수 없는 공허감이 지배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과연 영화의 실패라 말할 것인가. 오히려 <주유소 2>는 지금의 현실을 보다 세밀하고 정밀하게 영화 안에 담고자 그 어떤 영화보다도 치열하게 노력한다.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 적자생존을 펼쳐야 하는 20대들을 향해 '88만원 세대'라고 협박하거나 '희망이 없다'며 무시하는 대신, 20대들의 현실을 애정으로 들여다보고 "너희 잘못이 아니야"라고 토닥인다. 이들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한편 이들의 현실을 만들어낸 '기성세대의 책임감'을 통렬하게 풍자하는 것이다. 이런 영화를 어찌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렸던 글 (2010. 2. 6)
ps 1. <주유소 1>을 만들었을 당시 김상진 감독에게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이 선행했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유소 2>에서는 분명히 보인다. 설사 그것이 어떤 학적인, 일관된 구조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그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주유소 2>에서는 그가 지금의 20대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매우 강력한 일관성 하에 매우 윤리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 어쩌면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실패의 원인일 거라고도 짐작한다. 그러나 영화에 분명하게 일관성을 이루며 드러나고 있는 감독의 이 시선을 읽어주는 게, 영화글 쓰는 이의 나름의 예의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ps 2. 물론 동의하지 못하거나, "해석에 영화를 뜯어맞췄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이런 비난을 굳이 부정하거나 수용하지 못할 바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유소 2>에 대한 반응을 보려고 검색하다가, 듀나 게시판에 누군가 이 글을 링크해놓고 반응을 묻자 또 다른 누군가가 댓글에 "맙소사, 기자가 너무 이빨을 깠어요"라고 써놓은 것을 보니 이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더라. 차라리 내 글이 후지다거나 글을 못 썼다고 비난했다면 이렇게 거슬리지는 않았을텐데, 이런 멘트는 '글쓰기의 윤리'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으로 느껴져 모욕감까지 느껴지더란. 내게는 "너 글 좆같애"보단 저런 게 더 '저질 악플'로 느껴진다. 이빨을 까다니, 사람을 무슨 홍보 알바로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ps 3. 그래도 조한선은 영화에서 안성기와 투톱을 해본 적도 있는 배우인데, TV에서 주로 활동했던 지현우가 비중이 더 큰 캐릭터를 맡았다는 게 살짝 의외였다. 그리고 비록 연기 테크닉은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지현우에게 쇼맨십이나 스타로서의 아우라가 보이는 것도 조금 놀라웠고. 지현우가 그리 뛰어난 가창력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뮤지컬 <그리스>의 대니 역으로 데뷔하게 된 것도 워낙 오디션 장에서부터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스타로서의 자질'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이 영화를 보니 그 에피소드가 대충 수긍이 가더라. (난 한번도 지현우한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골드미스 다이어리>에서도 별 깊은 인상은 못 받았었는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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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리치 | 셜록 홈즈 Sherlock Holmes (2009) - 2010/08/05 15:51
역사상 가장 '팬시'한 홈즈가 아닐까 싶다.
가이 리치 감독이 돌아왔다.
데뷔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를 내놓을 당시 '새로운 천재의 등장'이라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스내치>만 해도 호평을 받았지만, 당시 부인이었던 마돈나를 주연으로 만든 <스웹트 어웨이> 이후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팽겨쳤던 그다. 심지어 <스웹트 어웨이>는 한 해 최악의 영화에 상을 안기는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감독상을 받을 정도로 조롱을 당했다. 이후 비교적 저예산으로 <리볼버>, <록큰롤라>와 같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한번 돌아선 관객과 평단의 마음을 되돌리기란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이 영화들은 국내에는 수입조차 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셜록 홈즈>를 만든다면서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주먹질에 육탄전을 즐기는 '액션 영웅'으로서의 셜록을 그린다고 했을 때, 기대보다 우려가 컸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반짝하고 등장했으나 금방 시들어버린 감독이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 거기에 마구잡이 헐리웃식 액션영웅으로 변모할 것 같은 셜록 홈즈. 그럼에도 기대를 버리지 못한 것은, 역시나 그가 <록 스탁...>과 <스내치>를 내놓았던 감독이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셜록을 연기할 거란 점 때문이었다. 뻔한 슈퍼히어로 영웅의 운명을 지녔던 <아이언맨>에 독특한 뉘앙스를 덧입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면, 셜록 홈즈를 그저 빤한 액션영웅으로 그리진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분명 있었다. 거기에 그저 홈즈의 조수가 아닌 동등한 협력자로서의 왓슨 캐릭터를 주드 로가 출연하며, 그 콧대높은 남성우월주의자 셜록 홈즈가 유일하게 무릎을 꿇은 여성 아이린 애들러가 적지 않은 비중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 역시 기대감을 높이는 데에 일조했다.
마침내 베일을 벗은 <셜록 홈즈>는 '절반의 성공'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충분히 즐겁고 매력적이지만, 가이 리치에 건 일말의 기대는 결국 배반을 당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근육과 주먹질 자랑에 여념이 없으신 RDJ 버전의 홈즈. 낯설지만 익숙하다...
가이 리치가 야심차게 내놓은 이 영화는 기존에 우리가 머리에 그리고 있던 셜록 홈즈와는 사뭇 다른 성격의 셜록 홈즈를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새로운 셜록 홈즈의 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작에서 제시됐던 요소들을 재해석하고 복원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훌륭하게 그려낸 새로운 셜록 홈즈는 우리가 익히 하는 그 사냥캡에 체크무늬 상의를 절대로 입지 않는다. 파이프 담배를 물기는 하지만 삽화 속 셜록 홈즈의 그것보다 단순한 직선형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상대의 급소를 어떻게 내리쳐야 그가 제압될지 잘 아는 무술의 달인이다. 특히 상대의 급소를 연달아 가격하는 장면에서의 고속 촬영 카메라 촬영은 홈즈의 정확한 계산과 판단을 그대로 드러내는 한편, 타격에 반응하는 신체의 움직임을 세세히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며 쾌감을 선사한다. '너무 빠른' 액션에서 오히려 시각적 쾌감을 놓칠 수 있는 점을 배려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셜록 홈즈>가 묘사하는 홈즈의 일상적인 생활과 취미는 원작에서 제공한 것을 크게 거스르는 것이 없다. 일이 없을 때의 홈즈가 대단히 게으르다는 사실은 이미 원작에서 제시된 것이고, 잘난 척의 거만한 독설은 사실은 사회성과 사교성이 부족한 성격을 가리는 방어기제일지 모른다는 것 역시 셜록의 팬들이 어느 정도 짐작했던 사실이다. 나아가 원작에서의 홈즈 역시 수준급의 권투실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던 만큼, 영화가 제시하는 액티브한 성격의 홈즈 역시 충분히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하다. 한마디로 원작의 정수를 크게 훼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가이 리치의 새로운 <셜록 홈즈>는 원작에서 분명 제시됐으나 그간 무시돼온 '액티브한' 셜록 홈즈를 그려낸다. 어찌 보면 이는 원래의 셜록 홈즈를 재해석하고 복원한 것에 가깝다.
주드 로가 그려낸 왓슨 역시 기존의 홈즈 영화에서와는 달리 홈즈 못지않은 무게감과 존재감을 갖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실 왓슨은 그간 홈즈의 믿음직한 파트너라기보다 홈즈의 천재성을 돋보이게 해주기 위해 어수룩하고 때로는 맹하기까지 한 인물로 격하되는 경향이 종종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왓슨은 원작에서도 군인 출신으로 반듯하고 정돈된 생활을 하며, 발이 묶인 홈즈 대신 활약을 하기도 하는 등 홈즈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존재다. 영화는 특히나 결혼을 앞둔 왓슨에 대해 불평을 하는 홈즈의 에피소드를 충실히 살려낸다. 홈즈는 영화 내내 왓슨의 결혼을 못마땅해 하며 훼방을 놓지 못해 안달한다. 홈즈 팬들 사이에서 기정사실화 되다시피 한 홈즈와 왓슨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의심을 영화 내내 살려놓고 있는 것. 여기서 발생하는 두 사람의 투닥거림이 영화에 큰 활력을 주는 코미디로 작용한다.
액션 어드벤처 영화로서 <셜록 홈즈>는 분명 아주 새롭지는 않아도 적지 않은 즐거움과 쾌감을 제공하는 영화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홈즈와 주드 로의 왓슨 콤비는 분명 '올해 최고의 커플' 순위에 올릴 만하며, 은비학과 마법의 트릭 때문에 길을 잃을 뻔한 셜록이 결국 과학적 논리와 추리로 사건을 풀어나가며 활약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다. 풍성한 드레스와 남성용 정장을 오가며 기계에도 능하고, 그 대단한 홈즈마저도 어린아이처럼 갖고 노는 아이린 애들러도 영화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홈즈의 숙적인 모리아티 교수가 짧게 등장하며 속편을 예고하는 것 역시 기대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속편에서는 홈즈의 형인 마이크로프트 경도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품게 될 정도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록스탁...>과 <스내치>에서 보여줬던 가이 리치의 독특한 매력이 <셜록 홈즈>에선 별로 보이지 않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순해졌고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며 스토리 역시 단선적이다. 전세계 만인이 즐길 수 있는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변화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배트맨> 프렌차이즈 안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자신의 족적을 선명히 새겨놨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가이 리치가 <셜록 홈즈>를 통해 증명한 것은 결국 그가 대형 상업영화를 매끈하게 잘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의 의미는 자명하다. 가이 리치 감독의 앞으로의 경력은 별 막힘없이 순탄하게 풀릴 것이며 앞으로도 여러 편의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초기작들을 사랑했던 관객들은 결국 '블록버스터를 무난하게 만드는 평범한 감독'을 얻는 대신 걸출하고 독창적인 영화 악동을 영영 잃어버린 셈이 됐다. 결국 가이 리치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아니었던 셈이다.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렸던 글. (2009. 12. 23)
ps 1. 개봉 직후부터 당연히 모라이어티 교수가 등장하는 속편 얘기로 분분했는데, 영화 나온 직후만 해도 브래드 피트가 관심있다는 소문이더니 요즘은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대세인 듯. 몇몇 해외 매체에서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캐스팅 확정됐다고 보도도 나왔으나, 8월 2일자 다른 뉴스에서는 대니얼의 매니저가 사실이 아니라며 부인했다는 설도 있다. (IMDB의 관련페이지를 참조하시라.) 브래드 피트의 모라이어티라니 좀 뜨악스러웠는데, 정말 대니얼 데이 루이스라면 좋겠다. 문제는 대니얼 님이 해주시느냐 마느냐... 어쨌든 <셜록 홈즈 2>는 이미 내년 12월로 개봉일도 정해진 모양이다. 촬영은 올해 가을부터 들어간다고. 감독은 여전히 가이 리치.
ps2. 근데 사회성 제로 잘난척쟁이 홈즈도 꼼짝 못하는 막강 카리스마 미중년 마이크로프트 경이 속편에 등장해주시길 바라는 건 저 뿐인가요.
ps3. 영화를 처음 보고 이 글을 썼던 당시를 회상해보니, RDJ가 셜록 홈즈로 딱이었다기보다는(그게 기존 이미지와 다른 셜록이라 하더라도), '고전적인' 영국풍의 액션활극의 주인공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이다. 말하자면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가 19세기 런던에서 탐정질로 놀고먹었던 '전생' 버전을 즐기는 기분이었던. 블록버스터의 당의정으로 어느 정도 중화된 느낌은 있지만 역시 <셜록 홈즈>는 괴작이었다는 결론. 상당히 즐거운 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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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찬 | 나는 행복합니다 (2008) - 2010/08/04 18:53
포스터는 많이 사기라능.
부스스한 머리를 고무줄로 묶는 한 여자의 뒷모습. 발을 겨우 끌듯 걷는 그녀의 걸음은 느리고 위태롭다. 약간 비틀대듯 걸어가던 그녀의 앞모습을 카메라가 비추자, 무릎까지 내려올 듯 무거운 눈가의 다크서클과 터진 입술이 눈에 띈다.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얼굴과 몸 전체를 가득 짓누르고 있는 피로감과 무기력감만 봐도, 그녀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정신병원의 간호사인 그녀, 수경(이보영)이 새로이 맞게 된 환자는 부스스한 머리와 역시 터진 입술을 한 조만수(현빈)이다. 가족친지가 아무도 없어 마을 이장의 손에 이끌려온 그는 의사와의 첫 면담에서, 종이를 꺼내 볼펜으로 '자기가 발행한' 수표를 써주며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도박빚에 미친 형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다 정신이 나가버렸다는 환자다. 영화는 이때부터 병원에서 생활하는 만수의 사연과 정신과 수간호사인 수경의 사연을 교차한다. 만수의 사연은 명백히 입원하기 전 있었던 '과거'의 일이지만, 수경의 사연은 현재진행형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너무나 큰 고통을 받았거나 받고 있으며, 그 사연이란 특정한 개인에게만 일어나거나 혹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흔한 보는 희귀하고 특별한 사연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익히 듣고 보았음직한 흔하고 일상적인 사연이라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자식도 못 알아보고 어쩌다 집밖을 나가면 길을 헤매기 일쑤다. 정비소를 함께 운영하던 건실한 형은 도박에 미친 후 돈을 내놓으라며, 그리고 이제는 정비소 계약문서를 내놓으라며 만수를 괴롭힌다. 심지어 한밤중에 만수의 목을 조르기까지 한다. 서울에 올라간 뒤 연락이 끊긴 연인은 어느 날 그를 찾아와 새 사람을 만났다며 이별을 고한다. 수경의 사연도 다를 바 없다. 암 말기인 홀아버지 때문에 재산을 모두 날린 그녀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면 아버지의 병실에서 간병을 하며 만성적인 피로와 불면증에 시달린다. 몰래 데이트하던 같은 병동 의사는 그녀를 멀리하고 새 연애를 하면서 그녀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나날이 쌓여만 가는 빚독촉 고지서와 전화 역시 잠시도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흔하고도 익숙한 사건들과 고통들.
그와 그녀가 착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은 배가 된다. 만수는 목을 조르는 형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노래방에서조차 큰소리를 내지 못한 채 겨우 뒷모습만 보이며 어깨만 가늘게 들썩인다. 수경은 한번쯤 도달할 곳 없는 원망 한 번 입밖에 내놓을 법한데도, 마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가 마지막 희망이기라도 한 듯 아버지의 병간호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세상은 착한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하고, 착한 사람들은 같은 불행이라도 착하지 못한 우리들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는다. 만수가 병원에 와서야 (가짜라고는 해도) 비로소 행복을 찾았듯, 어쩌면 지금 만수의 저 미쳐버린 모습은 수경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형에게 반항 한 번 않은 채, 노래방에서 혼자 노래하며 슬픔을 달래던 만수. 현빈의 도약.
시간차를 두고 고통을 겪었던/겪고 있는 두 남녀는 비록 환자와 간호사의 관계지만, 서로의 고통을 '인지'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지적 관계다. 과대망상 속에서 행복을 찾은 만수는 고통에 대한 위로를 다른 환자가 아닌 '간호사'인 수경에게 건넴으로써 수경을 환자의 커뮤니티 안으로 끌어들인다. 수경은 특별히 간호사와 환자의 관계를 파기하지는 않지만, 다른 환자한테와는 다소 다른 톤으로 만수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그들은 환자와 간호사 이상의 관계로 다가서진 않으며, 특별히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희미한 연대의 순간, 혹은 찰나의 고통의 접점. 그 드물고 귀한 순간, 그들은 상대에게 '당신의 고통을 감지했다'는 희미한 싸인만을 보낼 뿐이다. 서로에게 어깨를 빌려주기엔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자신의 짐의 무게가 너무나도 크다. 그 희미한 순간이 과연 그들에겐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지독한 고통 속에서 과연 '행복'의 순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이 영화가 진정으로 다루는 것은 '고통'이다. 주인공들의 지독한 불행과 고통은, 현실의 갑남을녀가 겪는 일반적인 불행들과 너무 닮아있다. 그런 현실을 직접 겪거나 간접적으로 주변에서 노상 보고듣는 관객들의 입장에선 선뜻 이들의 불행과 행복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들어서기가 힘들다. 실제로는 매우 화사한 외모를 갖고 있는 두 배우가 단순히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추레한 옷차림을 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으며 어디에도 구원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영화의 엔딩에서도 예정된 것이다.
이청준의 원작소설이 끔찍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 것과 달리, 영화는 그 에피소드를 생략한 채 '완치되어 퇴원한' 만수가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달리는 장면으로 끝을 낸다. 오토바이에 달린 희미한 헤드라이트가 간신히 비추는 어두컴컴한 밤길,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다. 수경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수경은 비로소 병원(그가 근무하는 곳과 간병을 하던 곳, 둘 다)을 벗어나 혼자만의 여행을 간다. 그러나 그렇게 절박하게 수경을 땅 위로, 맨정신으로 붙잡아매던 아버지가 죽은 뒤 홀로남은 그 삶을, 과연 그녀는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영화의 보도자료는 그 엔딩이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끝도 없이 이어진, 오토바이의 가느다란 헤드라이트만 켜진 그 어둡고 긴 길을 보며 희망을 느낄 관객들이 얼마나 있을까. 수경과 만수에게 놓인 앞으로의 삶의 시간을 예고하는 그 길엔 여분의 빛도 동반자도 없다. 원작의 드라마틱한 엔딩이 거세된 채 남은 영화의 엔딩은, 오히려 너무 끔찍하게 현실을 닮아있다. 너무 끔찍해서 도저히 불행하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는, 차라리 지독한 역설로서의 행복을 말하며 그 불행을 눈앞에 정면으로 들이미는 이 영화, 참으로 지독하다.
모습 전체에 '지치고 피곤한 삶'이라고 대놓고 써 있었던 이보영의 모습이 참 인상깊었었는데.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실었던 글. (2009. 12. 7)
ps. 우울한 내용 때문에 흥행이 안 되는 건 이미 예상됐던 것이지만, '너무 조용히' 지나가서 참으로 의아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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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그냥 '문'이다
황홀하고 화려한 CG와 극적인 액션, 긴박한 스릴의 상황이 동원되는 SF(혹은 SF를 표방한 액션 활극)가 워낙 많이 나오고기 때문에, <더 문>은 일견 지루하고 초라한 SF로 보일 수 있다. 허허벌판 달 표면 위에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기지의 외관과 실내의 풍경은 물론이고, 주연배우도 달랑 샘 록웰과 케빈 스페이시 두 명이다. 게다가 케빈 스페이시는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그는 인공지능 컴퓨터 '거티'의 목소리를 맡았다.) 샘 록웰의 아내나 딸, 혹은 이 우주기지를 건설한 글로벌 기업의 중역은 거의 단역으로나 등장하는 정도다. 이 정도 되면 거의 배우 한 명의 '모노드라마'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더 문>은 역으로, 돈을 별로 들이지 않아도 훌륭한 연기와 연출만으로도 흥미진진한 SF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영화다. 신인감독인 던컨 존스가 이 영화에 들인 제작비는 총 5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50억 남짓하는 돈이다. 그러나 샘 록웰의 황홀한 1인 2역 연기에 영화 자체가 던지는 묵직한 주제의식이 더해지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수작'이 됐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샘 벨(샘 록웰)은 달에 우주기지를 세운 한-미 합작 글로벌 회사에 3년 계약을 맺고 달 기지에서 외로이 근무하고 있는 남자다. 그의 임무는 달 표면에 쌓여있는 헬륨3를 지구에 정기적으로 송출하는 것. 전세계가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경험한 뒤 달 표면의 헬륨3를 무공해 청정원료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정된 근미래가 배경이다. 그리고 영화의 공간은 철저하게 달 표면 위에 세워진 '사랑' 기지에 한정되며, 그나마도 기지 안 세트가 주요 공간이다. 지구와 실시간 통신은 끊어진지 오래고, 샘은 목성을 통해 전송된 영상 메시지만으로 지구 위의 가족과 연락을 취할 수 있을 뿐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정해진 일을 하며, 남는 시간을 모형 조립과 흘러간 옛 TV쇼를 보는 걸로 떼우는 매우 외롭고 단조로운 일과다.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은 그가 계약만료 2주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지구로의 귀환을 고대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내던 그는 이상한 환각을 보기 시작하고, 원료 채취 임무에 나섰다가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어떻게 구조됐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이 기지 안 의료실에서 깨어난다. 영화의 진짜 미스테리와 사건은 이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 이후부터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경이로운 샘 록웰.
<더 문>은 SF장르에서는 매우 익숙한 설정인 '복제인간'을 소재로 한다. 기지 안 금지된 구역 안에는 똑같은 외모로 잠들어있는 무수한 샘 벨이 즐비하고, 3년의 시한부 목숨을 가진 이 복제인간들은 자신이 클론임을 모른 채 그저 조작, 주입된 기억만을 가지고 '계약 초기 사고로' 깨어났다가 3년을 채운 뒤 죽는다. 기한이 만료되거나 극한 부상을 당한 클론은 폐기되며, 살아 생전,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클론임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진짜 사건은, 절대로 서로의 존재를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두 클론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셈이다. 하지만 익숙한 설정과 장르문법을 사용하면서도, <더 문>은 매우 새롭고 참신하며 흥미롭다.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 아니 의심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가 실은 클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격일 터이다. 영화는 '이전의 샘'이 '새로운 샘'을 만난 뒤 비밀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혼란과 충격뿐 아니라, 그로 인한 정서적 파장과 고통을 매우 절절하게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복제인간 설정의 영화가 일반적인 '도플갱어 공식'(자신의 도플갱어를 본 이는 반드시 죽는다, 혹은 한쪽이 다른 쪽을 죽이려 든다)을 따르는 것과는 달리, 두 클론이 서로 유대감을 느끼며 서로 협조하고, 궁극에는 다른 이를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들이 특별히 착하고 희생적이어서라기보다는, 극도의 고립감과 고독, 혹은 서로에 대한 동질감과 연민이 충격과 혼란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서로 성격이 다른 두 샘(이전의 샘은 보다 온화한 성격에 다소 무기력한 면이 보이는 반면, 새로운 샘은 좀더 다혈질에 에너제틱하고 급한 성격이다)은 서로 몸싸움을 벌일 정도로 격한 대결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들을 착취한 거대기업의 음모에 맞서는 한편 예정된 운명을 거스르고 지구로의 귀환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영화는 흔하디 흔한 '클론 설정'의 영화가 손쉽게 드러내는 주제인 '정체성'을 보다 심도있게 다루는 동시에, 이 한계를 넘어 도약한다. 한국의 관객 입장에서는 클론들의 운명을 보며 1회용으로 소모되고 버려지는 일반적인 비정규직의 현실을 겹쳐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감독이 이를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애초에 7, 80년대에 나온 무수한 '낡은 SF영화들' 스타일의 SF영화를 기획하면서 주인공으로 '일하는 노동자'를 설정한 것은 이러한 해석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첫 샘과 두 번째 샘을 연기할 때의 샘 록웰은 확연히 다르다. 외모뿐 아니라 성격, 말투, 표정까지도. 위대한 샘 록웰.
두 명의 샘 벨(정확히 하자면 세 명)을 연기해 내는 샘 록웰의 연기는 한마디로 '환상적'이다. 두 클론의 서로 다른 성격을 묘사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비밀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나 고독, 단조로운 일과에서의 무기력감 등 복합적인 감정들을 절절히 표현해낸다. 굳이 SF의 팬이 아니어도, 샘 록웰의 연기만으로도 황홀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사실 이 영화는 애초에 샘 록웰의 팬이었던 감독이 자신의 차기작 <뮤트>(리들리 스콧이 제작을 맡았다)의 캐스팅 과정에서 샘 록웰과 의견차가 생기자 '오로지 샘 록웰과 작업하기 위해' 쓴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사실 샘 록웰은 국내에 '스타급 배우'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연기에 반한 조지 클루니가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웰컴 투 콜린우드>를 위해 조연을 자처하고 제작까지 맡은 건 이제 유명한 일화가 됐다. 이후 조지 클루니는 자신의 연출 데뷔작 <컨페션>에서 샘 록웰을 주연으로 기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샘 록웰의 연기에만 전적으로 기대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다소 소박한 스토리라인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서 스릴을 만들며 긴장과 공포, 충격을 만들어내는 솜씨와, 샘 록웰의 연기를 적절하게 조율하고 대립시키는 던컨 존스의 연출 솜씨는 신인감독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고 솜씨있다. 리들리 스콧이 자신의 후계자로 던컨 존스를 지목한 것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던컨 존스가 위대한 뮤지션 데이빗 보위의 하나뿐인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기지 이름이 '사랑'(한글로도 또렷이 표기된다)인 것은, 감독이 워낙 한국에 관심이 많은 데에다 시나리오를 쓸 당시 박찬욱의 <올드보이>를 보며 오마주를 바치고 싶어했기 때문. 감독이 굳이 한국 개봉에 맞춰 내한해 기자간담회 등을 진행한 것도 이같은 한국에 대한 관심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실린 글 (2009. 11. 16)
ps1. 이 훌륭한 영화가 작년과 올해 초 미국의 각종 시상식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시상식 시즌이 되면 각 배급사들은 자신들의 영화 중 후보가 될 만한 영화들을 뽑아 DVD 패키지를 만들어 심사위원들에게 뿌리며 캠페인을 벌이는데, 던컨 존스 감독이 자신의 트위터(@ManMadeMoon)에서 밝혀 나중에 헐리우드리포터 등에 기사화된 바에 따르면, 미국 배급사인 소니 측에서 "이런 저예산영화는 패키지에 찍을 워터마크 비용이 더 든다"면서 <더 문>을 빼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언맨>의 감독 존 파브로는 이 사실을 알고 소니에 굉장히 화를 내었으며, <스타더스트> <베오울프> 등의 작가 닐 게이먼은 던컨 존스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어쨌든 이 영화는 던컨 존스의 고향인 영국에서는 BAFTA (영국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ps2. 한편 던컨 존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위대한 연기를 보여준 샘 록웰 만큼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야 한다"며 자신의 블로그에서 "샘 록웰을 아카데미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올해 <크레이지 하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제프 브리지스는 충분히 상을 받을 만한 연기를 펼쳐보였을 것이다. (미안, 영화를 못 봤다.) 그러나 샘 록웰이야말로, 작년 모든 영화들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위대한 남자배우였다. 물론 그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훌륭한 연기를 보여줄 것이다.
ps3. 그러므로 결론은, 샘 록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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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 손예진, 고수 주연의 영화 <백야행>이 10일 오후 2시 언론, 배급시사를 갖고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백야행>은 국내에도 탄탄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원작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신인감독 박신우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다.
영화 <백야행>은 유미호(손예진)의 섹스씬과 김요한(고수)의 살인씬이 교차되면서 시작한다. 피해자는 14년 전 벌어진 살인사건에서 용의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다. 그리고 유미호와 김요한은 각각 14년 전 살인사건의 용의자의 딸과 피살자의 아들이다. 영화는 이들 둘 각자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이들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듯 만 듯한 관계를 파고들어간다.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유미호의 뒷조사를 하던 약혼자의 비서실장 이시영(이민정)과 14년 전 사건의 담당형사였던 한동수(한석규)의 눈을 통해서다. 과연 14년 전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 14년간, 이들은 대체 어떤 관계를 맺어온 것일까?
연쇄살인, 피해자와 가해자 유족의 한 공간에서의 공존, 그리고 근친살해와 유아강간까지. 영화는 온통 자극적인 설정과 사건으로 넘쳐난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유미호와 김요한의 사연과 비밀은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이으면서 조금씩, 천천히 밝혀진다. 그리고 마침내 14년 전의 비밀이 밝혀졌을 때, 관객의 입장에선 이들을 쉽게 단죄하기도, 그렇다고 동정하기도 어려운 심적 갈등에 놓인 채 그들에게 압도되고 만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마도 이것이 원작이 가졌던 가장 큰 매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가져온 14년간의 관계야말로 이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했을 때 기획자들의 주목을 가장 끌었던 요소였을 것이다.
총 세 권 및 20여 년에 달하는 원작의 시간과 분량의 무게 때문인지, 안타깝게도 영화는 조금 줄이거나 쳐냈으면 좋았을 곁가지들이 많아 산만한 편이다. 다소 아귀가 안 맞더라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묵직한 힘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영화는 소소한 부분까지 아귀를 챙기면서도 정작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일관된 힘이 없이 사건을 계속 나열하는 식이다. 각 캐릭터와 이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 역시 거대한 미스테리가 한 조각 한 조각 맞춰져 간다는 쾌감을 주기보다 끝까지 이질적으로 따로 논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다. 한석규나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한 차화연, 정인기, 임지규 같은 좋은 배우들이 나오는데도 그렇다.
사실 이 영화 자체가 거대한 미스테리이기도 하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점들로 가득차 있는 까닭이다. 단역에 불과한 형사들 하나하나를 굳이 클로즈업으로 잡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관객을 억지로 밀착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한동수의 사연은 어떠한가. 과연 어느 누가 그런 현장에 자기 아들을 데려가 그런 부탁을 한단 말인가. 민경호나 호스트바의 '약통' 캐릭터가 굳이 화면에 나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영화를 만든 이들이 유미호와 김요한을 너무 연민하고 동정한 까닭에, 이들의 잔인무도한 악행이나 괴물성은 '절절한 사랑이야기' 뒤로 너무 쉽게 면죄부를 부여받는다. 원작에서는 전후 일본의 재건과 자본주의화에 있어 암흑의 역사를 통렬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라던 두 사람은 영화 버전에서는 어찌 그리 '가여운 피해자'로만 그려지며 모든 책임이 당연히 부모 세대에만 돌려지는지 모르겠다. 필요없는 '어린 피해자'를 만든 건 분명 유미호인데,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그를 '외면'을 하는 것이 마치 그 피해자를 지키기 위한 결단인 양 화면을 처리한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왜 인물들에게 변명을 자꾸 보태주는 것일까. 그냥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인물들로 그려졌어도 비극은 충분하지 않은가. 혹은 한 인간에 저질러진 죄악에 대한 '대속'의 과정이 더 큰 악행이 되는 그 아이러니만 잘 표현해냈어도 반은 성공하지 않았을까.
영화 속 모든 주요 캐릭터들과 감독이 이들 남녀를 너무 잘 이해하고 보듬어 안고 알아서 변명까지 해주는데 굳이 관객까지 그래야 할까 싶다. 온갖 악행들이 저질러지지만 아무도 속죄하는 이는 없다. 그나마 한 사람을 향한 속죄는 더 많은 사람들을 향한 악행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연민은 넘쳐난다. 원작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했던, 관객의 어깨에 응당 지워줬어야 할 '선/악의 무게'의 균형점을 잃었거나, 이들의 악화일로의 선택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채 '변명'만 늘어놨거나. 이야기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차라리 일찌감치 니들끼리 도망가 살지 그랬니." 같은 반응이 더 당연해 보인다. 아니, 어쩌면 이런 식의 책임전가와 자기연민이야말로 지금 한국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정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그것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인 건지도 모른다.
+ 프레시안에 올라갔던 기사 (2009. 11. 10)
ps1. <백야행>이 언론시사를 한 뒤, 리뷰기사로는 아마 프레시안의 이 글이 처음이었던듯. 그래서인지 별로 좋지 않은 평에 당장 영화홍보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받지 않아서 다행, 만약 내가 받았다면 영화사와 싸웠을지도.
ps2. 손예진은 <작업의 정석>에 나왔을 때가 가장 잘 어울렸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난 이 아가씨가 진지한 척, 비밀이 있는 척, 혹은 카리스마 있는 척 무게잡는 걸 보면 적응이 좀 안 된다. 배우에 대한 선호도의 문제가 아니라, 손예진은 살짝 얄팍하고 가벼운 역을 라이트하고 사랑스럽게 - 애교를 섞어 - 연기하는 게 가장 잘 어울리는데, 의외로 글래머 몸매인 것 때문에 종종 '섹시한 척'하는 역을 맡는다. 보는 나는 심하게 민망한 게 사실인데, 남자관객들은 의견이 좀 다른 것도 같고...
ps3.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씬은, 한석규와 차화연이 그 낡은 차화연의 바에 앉아 대화하던 씬. 그저 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포스가 넘쳤는데, 고수-손예진이 차지하는 다소 가벼운 느낌의 씬(뭘해도 어쩐지 가볍게 느껴지더란)과 엮이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들어 안타까웠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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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단평 - 2009/12/12 10:52
올 겨울 대작들의 치열한 흥행접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가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첫 선을 보였다. <아바타>의 배급사인 20세기폭스는 11일 낮 2시 영등포CGV에서 언론시사를 갖고 전세계적인 관심과 기대를 불러모으고 있는 <아바타>를 드디어 국내에 공개했다. <아바타>는 <터미네이터> 1, 2와 <에일리언 2>, <트루 라이즈>의 흥행작들은 물론, 전세계 흥행 1위작인 <타이타닉>을 연출한 제임스 카메론이 12년만에 선을 보이는 영화라는 점에서 전세계 영화팬들의 기대를 모아왔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만을 위해 신기술을 전격 개발, 도입하여 구현한 영화의 장면 중 20분 가량의 동영상을 일찌감치 공개하면서 전세계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드디어 베일을 벗은 <아바타>는 과연 모든 점에서 관객들을 놀래키며 새로운 레벨의 시각적 쾌감과 충격을 안겨줄 만하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자랑했던 이모션 캡처 및 가상 카메라의 위력은 놀라움을 넘어서 경이로운 수준이며, 전반적인 CG 기술 역시 놀랍다. (가상의) 판도라 행성을 수놓고 있는 자연과 기기괴괴한 생명체들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파란 피부에 긴 꼬리와 날카로운 귀를 가진 3미터 장신의 나비 종족 및 이들과 인간의 DNA로 만든 생명체인 아바타(그와 DNA가 맞는 인간이 의식으로 조종한다)의 동작과 표정도 매우 자연스럽게 구현됐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반(샘 워딩턴)의 아바타가 나비종족의 네이티리(조이 살다나)와 함께 거대한 새 이크란을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 숲에서 거대한 생명체에 쫓기는 장면 등도 박진감이 넘치거니와, <에일리언 2>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장면들을 뛰어넘는 전투씬들도 관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다. 2시간 42분의 다소 긴 러닝타임이지만 단 한 순간도 지루해할 틈이 없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벌이는 대규모 전투씬은 그 어떤 이전의 전쟁영화보다도 화려하고 큰 스케일을 자랑한다. 거기에 <타이타닉>에서 다소 실소를 자아냈던 로맨스도 이 영화에서는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러우며 설득력있다. 액션과 모험, 로맨스,그리고 전쟁영화 등 모든 장르가 한 영화 안에 들어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만족스럽다. 한마디로 <아바타>는 속이 꽉 찬 종합선물세트다.
그러나 <아바타>의 놀라움이 단순히 새로운 테크널러지나 화려한 볼거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바타>는 단순히 낯선 행성에서의 모험과 상투적인 두 문명의 충돌 및 전쟁만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인류가 '문명화, 근대화'의 이름으로 침략과 전쟁을 자행했던 이른바 '식민지 근대'의 역사를 혹독하게 비판하며 자연 속에서의 공존을 강조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판도라 행성 도처에 깔려있는 값비싼 언옵타늄이라는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판도라 행성에 기지를 설치하고 채굴을 하는 인간의 탐욕은 곧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남아메리카를 침략해 식민지화했던 근대 유럽의 식민전쟁을 연상시킨다.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어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며 살아가고,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며 죽은 동물들의 영혼을 존중하는 나바족들의 생활풍습은 우리가 흔히 '인디언'이라 불러왔던 아메리칸 네이티브들의 풍습과 닮았다. 쿼리치 대령의 지휘 하에 이들의 정착지가 무자비한 공중폭격을 당하는 장면은 곧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벌어졌던 네이티브 학살 및 착취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지옥의 묵시록>에서의 그 유명한 폭격 장면을 연상시키며 베트남 전의 이미지까지 끌어들인다. (이 장면에서 쿼리치 대령이 사용하는 작전 이름도 '발키리 1-6'이다.) 때문에 영화 중반, 나비 종족들의 거주지가 폭격당하는 장면은 그 엄청난 스케일과 스펙터클 때문에 더욱 참혹하고 경악스러운 학살과 파괴의 공포를 전달한다.
<타이타닉>에서도 제임스 카메론은 거대한 재난영화의 틀 안에 계급사회의 폭력과 휴머니즘을 담으려 시도한 바 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도 그는 일차적으로 눈을 유혹하는 뛰어난 시각효과와 놀라운 상상력 아래에 '기계조차도 배우게 되는' 휴머니즘을 심어놓았다. 하지만 전작들에서 카메론 감독이 시도했던 이러한 '메시지'들은 언제나 화려한 볼거리 앞에서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앙상하게 그 얕음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바타>는 공백의 12년 동안 카메론이 그저 영화의 테크놀로지만 고민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담아야 할 메시지와 철학을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바타>는 감히 '영상 혁명'을 자처하는 데에 토를 달고 싶지 않을 만큼 혁명적인 기술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카메론의 전작의 어떤 영화들도 도달하지 못했던 깊이있는 근대문명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수행한다.
<타이타닉>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제임스 카메론은 "나는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친 바 있다. <아바타>를 내놓은 뒤의 제임스 카메론은 "나는 영화의 신이다"라고 자처해도 그 누구도 감히 반박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될 듯하다. 아마도 <아바타>의 흥행 역시, 단순히 다른 영화들에 비해 얼마나 흥행할 것인가보다 이제 그 자신이 세운 <타이타닉>의 기록을 과연 깰 수 있을 것인가가 더욱 화제가 될 것이다.
ps1. 영화가 끝난 시간이 5시. 지하철 타고 사무실 오면서 지하철 안에서 쓴 기사. 일단은 단평, 제대로 된 리뷰는 다시 쓸 예정. 어쩌면 두어 번 더 볼지도.
ps2.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 후반부의 전투씬들에 열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판도라 행성에서 제이크가 네이티리로부터 나비종족이 문화와 풍습을 익혀나가는 전반부가 훨씬 좋았다. 약육강식이 지배하고 있지만 '순리대로' 살아가며 균형을 지키는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나비족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후반부 전투씬은, 오히려 전투기가 불덩이가 돼서 떨어지며 나무들을 태울 때마다 보는 게 고통스럽더라. 내게는 '신나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씬'이 아니라 저 아름다운 곳이 다 망가지고 파괴되는 상실과 아픔의 전투씬이었다. 사실 그 전, 발키리 1.6 장면에서 아미 나비족의 거주지가 다 파괴돼버리는 바람에... 그 공중폭격씬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는.
ps3. 사실 한번도 제임스 카메론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여전히 리들리 스콧의 1편을 더 좋아하며, <터미네이터> 시리즈도 그렇게까지 열광하며 좋아하진 않았고, <타이타닉>은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바타>를 보고나서 든 생각은, "야 그냥 너 짱먹어라" 뭐 이런 느낌. 그리고 헐리웃에서 로버트 저멕키스와 함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기술오타쿠인 그의 그 집념의 장인정신은 인정해줄 만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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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슨 리 | 플래닛 비보이 Planet B-Boy (2007) - 2009/11/15 00:51
전세계 비보이들, 모이시지?
<플래닛 비보이>는 제목 그대로 전세계 비보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처음에는 뉴욕에서의 비보잉의 태동을 간략하게 다룬 뒤, 곧바로 2005년 전세계의 비보잉 팀들을 만난다. 90년대에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비보잉을 2000년대에 여전히 하고 있는 이들, 심지어 탄생지인 미국의 뉴욕, 브루클린보다 더한 열정과 기교를 보여주는 해외팀들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한다. 주로는 매년 독일에서 열리는 비보잉계의 권위적인 대회인 '배틀 오브 더 이어'와 관련, 2005년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다섯 팀(한국의 '갬블러즈'와 '라스트 포 원', 일본의 '이치가케', 프랑스의 '페이스-T', 미국의 '너클헤드 주')의 뒤를 좇는다. 이중 미국의 너클헤드 주 팀도 전통적인 브루클린의 팀이 아닌, 라스베가스 출신의 팀이다. 그렇기에 <플래닛 비보이>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춤'으로 소통되는 전세계 20대 젊은이들의 열정과 에너지다. 그저 대회에 출전한 팀들의 실력이나 기교뿐 아니라, 팀에 속해있는 멤버들의 고민들에까지 카메라를 들이댄다. 구체적인 고민의 내용은 다르지만, 이들이 청춘을 불사르며 춤을 통해 자신의 꿈과 열정을 시험하고 물아지경의 황홀경에 한발짝씩 가까이 간다는 점만은 똑같다. 사막 위에서 춤을 추든,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 앞에서 춤을 추든, 아니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세트)에서 춤을 추든 말이다.
벤슨 리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선 비보이들, 특히 초창기 비보이 문화를 이끌었던 선구자들은 하나같이 비보이는 랩과 상관이 없으며, 특히 폭력적인 갱스터 랩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임을 강조한다. 이들은 술이나 담배도 별로 하지 않으며, 마약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감독 역시 비보이의 예술성을 강조하며, 흔히 제니퍼 빌즈의 아름다운 몸매와 춤으로만 기억되는 <플래시댄스>의 인상적인 길거리 춤 장면을 인용한다. 비보이들에게는 <플래시 댄스>의 주인공이 제이퍼 빌즈가 아니라 바로 그 장면에서 춤을 추던 전설적인 브레이크 댄서, 크레이지 레그스(Crazy Legs)였다. 사실 <플래시댄스>의 그 장면이야말로 80년대를 지배하던 디스코 열풍을 한순간에 브레이크댄스 열풍으로 뒤바꾼 역사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벤슨 리 감독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고자 하는 것은 전세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그 열정과 에너지다. 배틀오브더이어 대회의 장면들은 감각적인 앵글과 빠른 편집으로 박진감을 더해주는가 하면, 이들이 자신들의 고민과 꿈을 카메라에 대고 털어놓는 장면에서는 마치 카메라로 이들을 다독이는 듯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사이에는 간간이 유머가 배어있다.
영화 <플래시댄스>에서 크레이지 레그스(Crazy Legs)가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장면.
하지만 <플래닛 비보이>란 영화 자체가 주는 매력 이상으로, 이 영화가 영화 밖 현실과 만나는 접점 역시 흥미로운 고찰을 제공한다. 모든 하류문화란 처음부터 그것이 의도했던 아니던 주류의 가치와 문화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대체로 하류문화란 그것을 생산하고 즐기는 이들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건, 이런저런 폄하를 비롯해 심한 경우 모욕과 왜곡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비보잉'만 해도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같은 연극이나 숙명여대 가야금 연주단과 함께 한 광고로 알려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전, 소위 가출한 '불량' 청소년들이 새벽의 지하철 역에서 몰입해 추는 괴상한 춤이 '비보잉'에 대해 사람들이 알게 된 첫 이미지였다. 비보잉은 말하자면 신문에서 문화나 예술 면이 아닌, 사회 면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놀이문화나 놀이공간은 거의 없다시피한 채 아이들을 획일적인 교육제도 하에 내몰고 약육강식과 경쟁을 어릴 적부터 체화하게 만드는 사회현실은, 슬쩍 지워지거나 마지못해 동정적 시선과 함께 '구색'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이 추는 춤과 누리는 문화는 손쉽게 '불량'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의 춤과 문화라기보다는 '미국 슬럼가 흑인들의 불량한 몸짓을 흉내내는 것'으로 폄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류문화들의 아이러니한 점은, 그것이 '인정'받기 시작할 때 더 이상 하류문화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모욕과 가치폄하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고유의 예술성을 인정받기 위해 초기 거장들의 노력이 계속되면서, 하류문화는 하나의 예술로, 분야로 고유의 독립성과 가치를 인정받으며 주류에 편입한다. 대신 애초 가졌던 가치전복적 저항성은 탈색되기 마련이다. 사실 그렇기에 '하류'문화이기도 하다.
<플래닛 비보이>의 한 장면. 전해 '배틀오브더이어' 대회의 우승자 자격으로 2005년 출전했던 한국의 갬블러즈(Gamblerz) 팀의 연습장면.
80년대에 뉴욕 브록클린에서 퍼져나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렸고 90년대 국내에 도입된 비보잉은 사실 태생부터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의 문화이긴 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처음 비보잉을 했던 이들 역시 사회와 학교로부터 소외된 청소년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회가 강요하는 주류 이데올로기에서 소외되거나 이를 거부한 청소년들이었다. 그리고 비보잉이 마침내 주류에 편입한 순간은, 한국 팀이 종주국(!)인 미국과 예술의 나라 프랑스, 심지어 집착적인 경쟁의 대상인 일본의 팀마저 제치고 우승을 거머쥔 순간이다. 이제 비보잉은 한국에서 전세계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문화제를 열 정도로 인정받는 예술이 됐다. 하지만 이것은 하류문화가 특히 한국이란 공간에서 주류에 편입하는 과정을 매우 상징적으로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여전히 그들은 좋아하는 춤을 추되 군대와 생계를 걱정하며, 그렇기에 이들의 춤은 예술보다도 '상품'으로만 포지셔닝되는 경향이 짙다. 감독이 영화의 기획 당시부터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었겠지만, 이 영화의 대회(2005년)에서 우승을 거머쥔 '라스트 포 원' 팀이 1년 뒤 숙명여대 가야금 팀과 함께 CF를 촬영했다는 에필로그에서도 확인되는 대목이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자란 이들이 전세계 보편적으로 '비보잉'을 통해 꿈과 도전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담은 <플래닛 비보이>는, 역설적으로 과거 한국에서 하류문화였던 비보잉이 어떻게 주류에 안착하고 마침내 독립된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딜레마와 아이러니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는가를 포착한 흔치 않은 다큐멘터리가 됐다. 영화가 끝을 맺은 그 다음의 이야기야말로, <플래닛 비보이>가 문화상품 소비자인 우리에게든 비보이들에게든 정말로 던져준 숙제가 되는 셈이다.
ps. 10월 20일(2009년) 프레시안 기사로 나간 글.
ps2. 미국의 소니에서 이 영화의 판권을 사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로 리메이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감독은 벤슨 리, 하지만 아직 프리-프리덕션 단계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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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캠피온 | 브라이트 스타 (2009) 단평 - 2009/10/10 07:47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던 제인 캠피온의 신작 <브라이트 스타>는 놀랍게도 실화다. 영국의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실제 사랑을 극화한 이 영화는 다소 실망스러웠던 <인더컷>을 제외하면 1999년작 <홀리 스모크> 이후 별다른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던 제인 캠피온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역작이다. (그나마 그 <홀리 스모크>도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지만.)
25살에 폐병으로 요절한 존 키츠는 죽기 몇 년 전 바느질과 패션에 두각을 나타냈던 패니 브론과 만나고, 그녀가 바로 옆집으로 이사온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3년간 계속된 이 사랑은 존 키츠의 시의 세계를 더욱 깊고 심원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키츠는 시인으로서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호된 악평에 시달렸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읜 뒤 만성적인 가난 때문에 의사 자격증을 따야 했던 그는, 시에 전념하기 위해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찰스 브라운의 재정적 도움에 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었다. 찰스 브라운은 패니 브론을 "남자나 꼬시려 들며 시는 전혀 모른다"며 경멸했고, 심지어 그녀와의 사랑이 키츠의 시 세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겨 이들의 사랑을 번번이 훼방놓았다. 특히 키츠가 폐병에 걸린 이후에는 더욱, 그녀와의 사랑이 키츠의 병세를 오히려 악화시킬 것이라 여겨 번번이 그녀와의 사랑을 방해한다.
키츠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찰스 브라운의 반대뿐 아니라, 가진 것 하나 없었던 키츠에 대한 주변의 우려와 반대 역시 이들의 사랑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낭만적인 사랑이란 극렬한 반대와 억압 앞에서 오히려 더욱 찬란하게 불을 태우는 법이다. 가난 때문에 머뭇거리던 키츠도, 남자들의 구애가 장난이었던 브론도 점차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브라이트 스타>가 내뿜는 아름다움은 일견 상호 모순적으로 보일 듯한 요소들이 서로 상충하면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있다. 이들은 서로를 끝까지 '미스터 키츠'와 '미스 브론'으로 칭할 만큼 당시 격식과 예법을 충실히 따른다. 브론의 동생들이 언제나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한 만큼 단둘이 은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힘들었다. 서로 시구를 주고받으며, 가고 오는 데에만 며칠이 걸리는 편지로 서로의 연정을 확인하고 주고받는 만큼 지금 현대인의 눈에는 지나칠 정도로 억압적이고 답답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과 손을 맞대고 상대가 창밖에서 거니는 모습을 보며, 상대가 내는 자그마한 기척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이런 와중에 상대가 보낸 편지가 너무 짧다고 자해 소동을 벌이거나, "나비가 되어 함께 날아다녔으면 좋겠다"는 연인의 편지에 온 방안을 나비로 채우는 천진한 열정이 영화의 온도를 그 어느 다른 멜로영화보다도 뜨겁게 올린다. 이들의 '억압 속에 꽃피우는 열정'을, 제인 캠피오는 매우 치밀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내며 보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이 영화를 먼저 접한 해외의 평들이 한결같이 "순결한 금욕주의 속에 빛나는 열정적 에로스"를 지적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측면에서다. 노골적으로 야한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지만, 서로 깍지를 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거나, 시구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선 에너제틱한 정서적 흥분과 에로스가 흘러넘친다. 이런 '은밀한 에로스'는 엔딩 타이틀이 흐르는 동안에도 계속된다. 엔딩 타이틀의 마지막 카피라잇 로고가 나올 때까지 벤 위쇼가 나지막히 낭송해주는 키츠의 시를 듣고 (자막으로) 보노라면, 시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사람조차 곧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존 키츠의 시집을 사고싶을 정도다. 혹은 영화 초반에 시를 이해하고 배우고 싶다며 키츠를 찾아가 시 수업을 듣는 패니 브론의 장면이 새삼 환기되며 그 마음이, 그 심정이 새삼 다시 절절하게 다가오거나.
<향수>로 주목받은 벤 위쇼는 섬약한 외모 속에서 격정을 뿜어내는 존 키츠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게 연기하고 있고, <엘리자베스타운>, <골든에이지>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던 애비 코니쉬가 패니 브론 역을 맡아 사랑에 들떠 폴짝거리는 소녀와 현명하고 듬직한 반려자를 섬세하게 연기해 낸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리암 니슨의 아들로 출연했던 꼬맹이 토마스 생스터가 패니 브론의 남동생 사무엘로 출연해 어느 새 훌쩍 자란 모습을 보여준다. <내 책상 위의 천사>와 <쉘로우 그레이브>에서 주연을 맡았던 케리 폭스도 출연해 패니 브론의 어머니 역으로 듬직하게 패니의 어깨를 감싸준다. 영화제 중 상영이 아직 두 번(12일 및 15일) 남아있다.
ps. 프레시안에 기사로 올린 글
ps2. 급하게 쓰느라 이 모양... 영화 보자마자 한 시간만에 휘갈겨썼으니. 그러니 어쩌면 이 ps2.야말로 진짜인데요.
'격정적인 사랑' 하니까 뭔가 대단히 규격화된 어른의 사랑 같은데다 자고 일어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어쩐지 영화에 대해 제대로 쓴 리뷰 같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이들의 사랑은 딱 사춘기 "소년, 소녀를 만나다"로 요약될 수 있거든요. 귀여워요. 너무 귀여워요. 사실 둘은 한번도 섹스를 안 하거든요. 자고싶다 어쩐다 하는 장면도 여자가 "널 위해 뭐든 할 거야"라고 은근한 암시를 건네자 남자가 "나도 양심이 있지"라며 정식으로 결혼한 뒤를 기약할 정도. 자해소동이니 뭐니 하는 것도 그러니까 딱 10대 중학생 소녀가 울며불며 난리치다가 팔에 1센티짜리 상처내는 것쯤으로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하긴 이들 나이가 20대 초중반이었단 말이죠. 제인 캠피온이 참 대단한 것도, 지금은 '대시인'으로 추앙받는 키츠의 이름에 너무 짓눌리지 않고 그 사람과 패니의 그 '소년, 소녀스러움'을 제대로 살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만큼 생동감이 넘쳐요. 오죽하면 이들의 철없고 귀여운 모습에 몇몇 장면에선 웃음이 막 터집니다. 그러면서 격식을 차린 옷과 대화, 동네에 퍼질 소문을 의식해야 하며 주변의 감시(!)를 받는 연애같지 않은 연애를 하면서 자기들끼리는 너무나 심각하고 진정이 넘치기 때문에 이상한 에로스가 넘치는 거지요. 뭐 뻔하고 통속적인 내용이라며 별로 안 좋아할 분들이 더 많아보이긴 하지만, 영문학에 조예가 깊거나 그쪽 빠거나 혹은 빠도 못 되고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동경하는 저같은 사람들에겐 우왕ㅋ굳ㅋ@.@하며 눈물 뚝뚝 흘릴 영화 되겠습니다. 영화가 개봉되면 필히 다시 제대로 된 리뷰를 써야 할 영화.
ps3. 주인공 역을 맡은 애비 코니쉬는 "등발 좋고 덜 날카로운 니콜 키드먼"으로 보이는 면이 있어요. 까만 머리긴 해도 얼굴이 많이 바뀐 지금이 아닌 예전의 니콜 키드먼의 얼굴과 닮은 부분이 있어요. 다만 니콜 키드먼보다는 좀더 무던하고 둥글둥글하달까.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어쩐지 이런저런 면에서 <여인의 초상>의 예술적 실패 지점을 만회하려는 야심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ps4. 벤 위쇼와 애비 코니쉬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이들을 감시(!)하는 애비 코니쉬의 어린 여동생의 모습을 보자니 <피아노>에서 엄마 뒤를 쫄쫄 쫓아다니며 엄마의 사랑을 감시(?)하던 안나 파퀸이 살짝 겹치기도. 하지만 이 소녀는 안나 파귄보다는 어쩐지 살짝 통통한 니콜 키드먼 아역으로 보여요. 얼굴은 안 닮았지만 무엇보다 창백한 피부에 빨간 곱슬머리 때문에.
ps5. 근데 제인 캠피온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대체로 나이가 좀 있는 듬직한 스타일이었는데. (뭐 돌쇠 스타일도 가끔.) 그들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벤 위쇼는 제인 캠피온 영화치고는 약간 낯선 팬시함을 영화에 불어넣어 주고 있기도 해요. 이 영화에선 그게 매우 성공적이기도. 그러고보니 벤 위쇼는 살짝 고전적이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퇴폐미가 항상 있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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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 퐁텐 | 코코 샤넬 Coco avant Chanel (2009) - 2009/09/04 16:08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보석과 옷으로 치장한 귀부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그녀는 남자 승마복을 개조한 바지정장에 납작하고 심플한 모자를 쓴 차림이다. 에티엔의 초대손님인 귀부인들이 대놓고 '미소년'이라고 부를 정도다. 파리 근교 시골에서 낮에는 재봉사로, 밤에는 싸구려 가수로 일하던 가브리엘 샤넬이 '성공'을 하겠다며 문을 두드린 곳은 자신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남작 에티엔의 대저택이었다. 정부라고는 하나 하녀들과 식사를 하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단기용 섹스상대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 뒤 그녀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용을 쓰는 모습이 너무 처절하고 눈물겹다. 소위 '잘난 남자에게 빌붙어 연명하는' 여자들에게 흔히 가질 법한 거부감, 나아가 경멸이 단번에 안쓰러움으로 바뀔 정도다.
'샤넬 이전의 코코.' 국내에서 최근 개봉한 <코코 샤넬>의 원제는 이렇다. 사람들이 샤넬을 다룬 영화에 흔히 가질 법한 기대를 처음부터 차단하고 있는 제목이다. <코코 샤넬>은 고아원 출신의 가난한 재봉사가 어떻게 패션 제국의 수장이 되었는가, 그 고단한 여정과 치열한 싸움을 치르는 코코 샤넬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 미숙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그녀가 귀족의 잠자리 상대에서 영국의 사업가 아서 '보이' 카펠의 정부로 옮아가는 과정을 그리며 참 처절하고 구차한 젊은 시절의 가브리엘의 삶을 스크린에 펼쳐놓는다. 젊은 여자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접근을 했다가도, 가브리엘의 그 구차한 여정에 불쾌감을 느끼며 한 발짝 물러서게 만드는 것이다. <코코 샤넬>을 만든 감독이 배우 출신의 여자 감독 안 퐁텐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역시 여자감독이라 로맨스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라는 선입견을 갖기 쉽다. 하지만 이보다는, "역시 여자감독이라 구차한 여자의 인생의 치부를 제대로 까발렸다"는 선입견을 갖는 게 이 영화를 보는 데에 훨씬 이로울 것이다. 갈 데가 없어 어떻게든 쫓겨나지 않기 위해 에티엔의 저택에 붙어있는 과정도 처절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든 사랑을 위해서든 어느 쪽에서도 그녀가 머문 곳은 '정부'의 자리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만든 결혼 따위의 제도, 흥!"이라고 외치는 급진적인 자유연애론자 여성에게도 정부, 특히 유부남의 정부의 자리는 껄끄럽다. 내가 사랑을 주도하며 적극적으로 기성의 권위와 제도를 부정하는 자리이기보다는,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단물쓴물 다 빨리면서도 제멋에 취한 허세의 자리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른 여성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자리가 되기 쉽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결혼이나 연애와 달리, 부르주아들이란 대체로 결혼은 정략적으로, 연애는 정부와 하면서 실질적으로 다부다처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성공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과 '그렇게 해서라도 성공하고 싶다'는 야망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다. 언제나 후자를 선택한 이들은 손쉽게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전자를 고수하는 사람들 역시 그 유혹에 시달린다. 혹은 가끔은, 후자를 선택하는 여자들이 흔히 자산으로 삼는 미모와 젊음을 질투한다. 젊고 미숙한 여성이 후자의 길을 가면서 혹여 상대를 살짝 잘못 짚고 서투르게 간을 보았다가는 무지막지한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사실 홍상수 감독의 초기 작품들도 대체로 그런 젊은 여자들을 비웃는 영화가 주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이런 식의 갈등과 야심 사이를 적절히 타협하고 봉합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은 결혼'에 대한 환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전자의 여성들이 후자의 여성들에게 갖는 경계와 경멸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다른 여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의 '가상의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경계와 경멸은 어느 순간 매우 손쉽게 연민과 이해로 전화되곤 한다. 그러고 보면 <코코 샤넬>을 만든 안느 퐁텐 감독의 시선은 가브리엘 샤넬에 대한 이 양면의 시선을 고루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이미 전작 <프라이스리스>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샤넬로 몸을 휘감은 전력이 있던 오두리 토투가 출연한다는 사실도 퐁텐 감독의 의도를 한층 강하게 설득한다. <프라이스리스>에서 오두리 토투가 맡았던 캐릭터의 진짜 정체는 '꽃뱀'이었다.
영화의 말미에 비로소 제시되는 "코코 샤넬은 일을 하지 않는 일요일을 가장 싫어했다"는 자막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짐작하게 된다. 샤넬을 진정으로 구원한 것은 상류사회에서의 더부살이도 연애도 아닌, 일, 그러니까 '노동'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그러므로, 샤넬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 결국 '노동의 자격',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신의 노동물에서 소외되는 일반적인 임노동자가 아닌, 장인으로서 노동하는 자가 되는 자격과 여건을 갖추는 과정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셈이다. 남자옷을 입은 채 귀족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샤넬의 모습에서 온몸으로 사회와 부딪치고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샤넬이 결국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남자옷을 입고 다니긴 하되 지배계급 남자들의 지위를 정말로 위협하지는 않아서였을 것이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서 힐러리 스웽크가 잔혹하게 살해된 것은 그녀가 '감히 남자들의 영역을 침범한' 데에 대한 보복과 응징이 아니었던가. 그에 비하면 샤넬의 남자옷 차림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페미닌한 옷을 입지 않는다고 그에게 툴툴대는 에티엔의 태도가 딱 그것을 증명한다. 그녀는 새로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아내와 딸들에게 기꺼이 사줄 만한 옷을 만들어 제공한 셈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샤넬의 성공은 어쩌면 귀족 시대에서 부르주아 시대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간 유럽에서 복장과 표식, 그로 인한 '인간의 몸에 두른 상징'의 표준을 귀족의 것에서 부르주아의 것으로 바꾸는, 시대적 전환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공로의 결과라 할 수도 있다. 바닷가의 억센 어부 노동자들의 작업복에서, 고아원에서 살던 시절 제복에서 영감을 받은 그녀의 소위 '심플한' 옷은, 귀족의 아내보다는 부르주아의 아내와 딸들에게 일차적으로 어필하는 옷이었다. 지금도 샤넬을 선호하는 이들은 전문직 커리어 여성 혹은 소위 '비즈니스 우먼'이다. 샤넬의 옷은, 페미니즘 이전의 시대에도 남자 노동자와 다르지 않게 땀을 흘리며 육체노동을 해야했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평상시 즐겨입을 만한 옷도 아니었다.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샤넬에 대한 칭찬이 지칭하는 '여성'에 과연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얼마나 고려되었겠는가. 언제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패션 거장들이 만들어 트렌드를 일으킨 명품 디자인이 세상을 몇 바퀴나 한참 돈 끝에 세속적으로 한참 하락한 버전의 옷을 입는다. 적어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의 대사에 의하면 그렇다.
재클린 케네디 오아시스가 즐겨 입었고 심지어 케네디가 죽었을 당시 입었다는 옷,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서 소위 '청담동 며느리룩'이라 통칭되는 옷이 바로 샤넬 트위드 정장이라는 사실이 뜻하는 것. 그리고 오두리 토투가 젊은 시절의 샤넬을 연기할 배우로 낙점을 받았다는 것. (물론 샤넬의 현재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오두리 토투 대신 페넬로페 크루즈를 원했다지만.) 이 모든 것이 '샤넬'이라는 대명사가 드러내는 복잡미묘한 빛깔들과 연결된다. 적극 지지하고 존경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은근하고 뒤틀린 호감을 갖게 되는 대상. 그렇기에 매 상품마다 붙어있는 그 비싼 가격에 아이러니를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 샤넬은 그런 사람이다. <코코 샤넬>이 새삼 상기시키는 것 역시 바로 그런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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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소머즈 | 지 아이 조 : 전쟁의 서막 G.I.Joe : Rising of Cobra (2009) - 2009/08/12 10:11
병헌 리는 어디에?
최근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인 김성욱 영화평론가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대한 글에서, 이 시리즈가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하드한 바디'에 대한 열광을 언급하면서 최근 일련의 헐리웃 블록버스터들이 주로 전쟁영화의 양상을 띄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 글에서 그는 <터미네이터 4>와 <스타트렉 : 더 비기닝>, <트랜스포머 2>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이 변형된 밀리터리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드러낸다. 그리고 막 개봉한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 역시 그가 지적한 바로 그 점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이 일련의 선상에 놓을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애초 제목부터 미군 병사를 뜻하는 이 영화는 나토 산하의 최첨단 비밀 군대인 '지.아이.조' 부대가 최첨단 무기를 노리는 '코브라' 군단과 맞서싸우는 액션을 골격으로 한다. 일반 군인이었던 듀크(채닝 테이텀)와 립코드(말론 웨이언즈)가 부대에 새로 합류하면서 그들의 시점으로 지.아이.조 부대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시작한 뒤, 지.아이.조의 일원으로 코브라의 음모에 맞서는 주축이 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무기들을 사용하는 두 집단의 싸움은 한편으로 판타지의 성격을 띄기도 하고 영원한 맞수인 스톰 섀도우와 스네이크 아이즈의 대결은 검술 액션 및 동양 무술(이라 고 사람들에게 여겨지는 것)에 크게 의지하기는 하지만, 지.아이.조 부대나 코브라 군단 공히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군대들이다. 이들의 싸움에 큰 비중을 할애하는 영화는 결국 전쟁영화로, 그리고 변형된 밀리터리물로 기능한다. 이것은 김성욱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낙관적인 과거로의 회귀와 향수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손상된 미국의 가치와 미국민의 정체성의 회복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아이.조 피겨들이야말로 오히려 일본이 원산지인 트랜스포머 완구들보다도 더욱 미국적인 장난감들이 아닌가.
하스브로 사가 1964년에 처음 내놓은 액션 피겨와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코믹스에 근거하는 <지.아이.조>는, 장난감 완구를 가지고 하드한 액션영화를 만들며 소년관객층 및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자란 남자 어른들을 집중공략한다는 점에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여러 모로 닮은 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하스브로 사는 사실 지.아이.조의 액션 피겨뿐 아니라 트랜스포머 완구를 만든 회사이기도 하다. 그간 트랜스포머와 지.아이.조 피겨들을 바탕으로 TV물과 비디오게임의 제작에 몰두했던 것을 넘어서서, 하스브로 사는 영화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3부작으로 기획된 <지 아이 조> 시리즈의 공동제작사로도 이름을 올리며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하스브로 사는 크레딧에만 간신히 이름을 올렸던 것과 달리, <지.아이.조>에서는 영화의 맨 처음 시작, 그러니까 파라마운트 사의 로고보다도 먼저 자사의 로고를 올림으로써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보다 한결 높아진 '공동제작사'로서의 위상을 자랑한다.
게다가 두 영화에 공통으로 프로듀서로서 이름을 올린 이는 다름아닌 로렌조 디 보나벤추라다. 워너 사에서 해외제작 파트 사장을 역임하며 <매트릭스> 시리즈와 <해리 포터> 시리즈를 발굴해 제작총지휘를 담당했던 디 보나벤추라는 워너에서 독립해 자신의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파라마운트 사와 퍼스트룩 계약을 맺으면서 <콘스탄틴>, <둠> 등을 만든다. 그러다 손을 댄 것이 바로 <트랜스포머> 시리즈이고, 이 시리즈의 성공으로 비로소 <지 아이 조> 시리즈의 제작에 착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오 이 늠름한 어뤼지날 어메뤼칸 솔져를 보라!
마이클 베이의 <트 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로봇들의 변신을 표현하는 비주얼은 10대 이하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다소 과한 면이 있다. 주인공 역시 고등학생(1편) 및 대학 신입생(2편)으로 설정하면서 비슷한 나이 혹은 그보다 살짝 아래의 청소년들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것이다. 미카엘라 역을 맡은 메건 폭스의 몸을 강조하는 비주얼 역시 성인 남성관객과 함께 사춘기 소년관객들의 리비도를 직접적으로 공략한다. 그에 반해 스티븐 소머즈의 <지.아이.조>는 보다 어린 아동들을 타겟으로 하는 아동물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얼개나 구조가 <트랜스포머> 시리즈보다도 훨씬 단순할 뿐 아니라,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 캐릭터들간 갈등을 구축하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유치하다'고 평해버릴 문제는 아닌 것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10세 ~ 12세 아동의 눈높이에 맞췄다는 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아이.조 부대원 중 하나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듀크와 베로니스(시에나 밀러) 간의 애증의 관계 역시 소년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선에서 단순하게 정리돼 있다. 물론 <지.아이.조>의 액션 장면도 <트랜스포머> 못지않게 굉장히 하드한 데다 물량을 대거 투입하기는 했지만, 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 온 부모들을 배려하는 면이 짙다. 오히려 아동물을 이 정도로 하드하고 공들여서 만들었다는 점이 더 놀랍게 여겨진다. 단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공을 들여 표현하는 액션씬 중 하나인 파리 시내 씬에서, 채닝 테이텀의 듀크과 말론 웨이언즈의 립코드는 '증강수트'를 입기는 했으나 수트가 주는 능력을 감당하지 못해 씬 내내 뒤뚱대며 파리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 이 장면은 일차적으로 지.아이.조 부대의 놀라운 무기와 장비들에 대해 두 '신입' 주인공을 통해 관객들에게 경이로운 감탄과 액션의 쾌감에 웃음을 섞어주기 위한 장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자기 능력에 부치는 힘을 갑자기 갖게 된, 몸은 어른이되 정신은 아직 아이인 어린아이들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여기에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지.아이.조> 시리즈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기도 한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말그대로 변신하는 '로봇'이 중점이라면, <지.아이.조>는 아무리 강력한 능력을 자랑한다 해도 '사람'이 중심이 된다. <트랜스포머>에서 전면에 나서는 기계들이 하드한 바디 안에 주체적인 목적과 인격을 지닌 독립적 존재인 것과 달리, <지.아이.조>에 등장하는 기계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연성 육체를 중심으로 신체의 능력을 증강시켜주는 다양한 보조물과 도구에 해당한다. 이는 <트랜스포머>보다 오히려 '전통적인' 관점을 채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남의 나라 국보는 왜 부수고 길거리는 왜 난장판으로 만드는지...
나아가 로렌조 디 보나벤추라가 자신의 제작사에서 직접 제작을 한 첫 작품이 코믹스 원작인 <콘스탄틴>이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트랜스포머>와 <지.아이.조>의 제작이 가시화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90년대 말에서 최근까지 풍미한 코믹스 출판사들의 영화계 진출 덕이라 할 수 있다. 한동안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톰 클랜시 등의 대중소설들을 블럭버스터의 원천으로 삼아왔던 헐리웃에서 마블과 DC의 주인공들이 스크린을 누비게 되면서 두 출판사가 모두 직접 제작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전히 더 많은 코믹스와 그래픽노블의 주인공들이 스크린에서 실사의 옷을 입기 위해 대기중이기는 하지만, 헐리웃의 제작자들은 코믹스와 소설뿐 아니라 이제는 완구들에 눈을 돌렸고, 하스브로 사 역시 아직은 공동제작의 수준이긴 해도 영화제작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수순은 당연히 게임회사들이다. 그간 영화사에 판권을 파는 것으로 만족했던 게임회사들 역시 직접 영화제작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블리자드는 오랫동안 '디아블로'의 영화화에 공을 들이며 '디아블로'라는 제목을 다른 영화가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어해왔고, 최근에는 '워 크래프트'의 영화제작을 선언하며 샘 레이미와 감독 계약을 맺었다는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그간 시도는 무수했으되 하나같이 실패로 끝을 맺었지만, 완구와 코믹스, 그리고 비디오 게임을 모두 거친 소스들을 영화화한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지.아이.조> 시리즈의 성공은 이러한 양상에 변화를 줄 것으로 보인다. 이미 CG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블록버스터들에 전방위적으로 사용되면서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가능하며 심지어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완숙한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작품들이 바로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트로이>라 할 수 있다. 헐리웃의 블록버스터의 전략변화 그래프에서 하나의 거대한 변곡점을 찍어준 작품들이 케케묵은 고전(!) 문자 텍스트를 원작으로 삼았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어쩌면 이 두 작품이야말로 문자 텍스트를 원작으로 삼은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다. 문자 텍스트와 그림을 결합한 코믹스와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가 두 작품 이전부터 활발하게 영화화되고 있었으며, 지금은 또 다른 매체의 '움직이는 동영상'을 원작으로 한 영화화가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으니 말이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지.아이.조> 시리즈는 말하자면 그 과도기에 있는 영화들이라 할 수 있으며, 변곡점을 지난 직후 첫 시기에 해당하는 변화들을 표현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두 시리즈야말로 이후 헐리웃 블록버스터들이 향하게 될 방향을 예측하게 해주는 등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ps1. 프레시안 기사. 뭔가 리뷰처럼 시작해서 산업기사가 된 듯한, 하여간 스스로 요즘 지지리도 글 못 쓰는구나 싶었던 기사. "영화는 정말 재미있더라... 초딩물이라 생각하면." 이라 말할 때의 그 복잡(...)한 뉘앙스를 살리고 싶었는데, 진지하게 쓰다보니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시니컬한 뉘앙스를 넣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여간 마지막 액션씬은 영화가 가장 공들인 비장의 장면이었는데... 잤다능. 역시 초딩물은 내 취향 아니라능. 나한텐 지.아이.유격대 액션피겨 갖고 논 유년기의 경험 따위가 없기 때문에...
ps2. 은근히 출연진이 화려하다. 채닝테이텀과 시에나 밀러는 원래 아웃 오브 안중이었는데, 영화가 시작하자 거대 기업 회장님으로 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이!! 거기에 미국 대통령이 조너선 프라이스, 지.아이.조. 부대 장군이 데니스 퀘이드, 시에나 밀러의 오빠가 조셉 고든-레빗, 립코드는 말론 웨이언즈라니, 허허. 근데 조셉이가 시에나의 오빠라는 게 말이 되냐능? 조셉이가 훨씬 앳돼보이지 않냐능? 아이고 조셉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
이 분 나오는 거 보고 깜놀... 아니 옵빠 여기서 뭐하고 계신가요. (라곤 하나 역시 포스가 넘치심)
ps3. 7월 말쯤 봤는데, 보기 전에 이병헌 헐리웃 진출 어쩌고 하는 얘기를 또 하나의 과장의 수사여구로만 치부하고 뭐 조금 나오다 죽겠네 했는데 웬걸, 주인공이랍시고 나오는 애들보다 훨 나은데다 정말 비중이 높아서 또 깜놀했다. 그러고 보면 헐리웃 진출 시도했던 배우들 중에선 가장 알차고 실속있는 결과를 챙긴 듯. 영화야 초딩물이지만 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 같은 분도 나오신단 말이다!! 근데 이병헌은 언제 그리 영어발음도 다듬고 액션도 배웠대? 칼놀림이 무난하두만. 뭐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액션 전문배우가 아닌데 무난하게 해냈으면 굉장히 잘한 거 아니냐능. 하여간 영화에서 제대로 자기 몫 똑 따먹은 듯하여 기특하심. 이 사람은 역시 약아빠진 여우 같음. (이거 칭찬임)
ps4. "얼굴이 나와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었는지 국내에서는 캐릭터 포스터를 다 새로 만들었더라. 사실 미국에서 캐릭터 포스터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병헌이 얼굴 어디갔어, 두건으로 다 가렸구나"라며 말이 많았는데, 영화 홍보하는 입장에선 얼굴 나오는 거로 다시 만드는 게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솔직히 왼쪽 것이 더 간지나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게다가 미국의 캐릭터 포스터들은 다른 애들도 다 얼굴이 잘렸던데.
스톰섀도우 오오오 젤 멋지더라 | 이건 악당같지 않아! 무슨 은빛 성기사냐능. |
ps5. 스티븐 소머즈의 영화를 모조리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다가 들었다. 그러니까 스티븐 소머즈는 이제까지 쭈욱 일관되게 아동물을 만들어온 감독이구나, 싶더라. 10살 미만의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 가서 두 시간 정도 애들 조용히 시킬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미이라>는 물론이고 심지어 <반헬싱>도 아동물이었어! 라는 깨달음이 문득.
ps 6. 그러고보니 귀염두이 브렌든 프레이저가 카메오로 출연했었다. 보다가 미친 듯이 웃었음.
ps 7. 올블로그에 이병헌 인터뷰가 떴길래 봤는데 재밌네. 역시 이 사람은 여우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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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근간 가장 ‘괴작’을 뽑으라면 작년 하반기에 개봉한 <모던 보이>와 함께 <차우>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모던 보이>가 괴작인 건 너무 훌륭한 면과 너무 후진 면이 어이없이 섞여서인데, <차우>의 경우는 좀더 '괴작'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즉, 괴상한 영화라는 뜻이다. 언론시사로 처음 <차우>를 봤을 때 워낙 당황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이 영화의 유머를 꽤 즐기게 됐다. 시사 나와서는 모 평론가님과 인사를 하다가 “영화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영화의 지지자 쪽에 가깝다. 사실 <차우>는 개봉 직전까지도 <괴물> 이후 가능성이 보였으나 그만큼 위험도 여전히 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대괴수가 출현하는 재난영화’로,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서 포장돼왔다. 그런 만큼 관객의 입장에선 <괴물>의 완성도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그 2/3 정도는 되기를 기대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확인한 <차우>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대체로 괴수물이란 언제나 우리 세상 너머에 우리 힘으로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괴수의 존재, 우리가 평소 상상은 할지언정 현실에 존재한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존재가 봉인을 뚫고 나와 현실 세계를 위협할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고독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미지와 미래와의 대면을 은유를 읽어내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괴수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세계의 파괴를 쾌감의 코드로 목격하게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쾌감을 두 가지 층위로 즐길 수 있다. 우리 세계가 파괴를 당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며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 혹은 괴수에게 은밀한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얻는 사디즘적 쾌감. 그리고 그 사이, 순수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체가 우리 세계를 때려부술 때에 오는 ‘타격감’. 그러므로 괴수물의 당연한 공식에서 시선의 방향이란 안에서 밖을 향하는 것이 된다.
<차우>가 그런 괴수물이 아닌 것은,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차우>는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과 습격이 가해졌을 때 그 시선을 괴물이 있는 저 너머 바깥 어디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내부로 돌린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양상들을 양식화시켜 보여주고, 여기에 약간의 과장과 비틀기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코미디에 열중한다. 그 ‘외부의 충격’이 <차우>의 경우 식인 맷돼지의 습격인 것이지만, 이쯤 되면 사실 ‘차우’가 얼마나 이상한 변종이고 세고 크고 무섭고 포악한지 기타 등등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사실 맷돼지가 아니라 운석을 타고 떨어진 외계의 괴생명체라 한들 이 영화가 그리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진 않다. 맷돼지는 앞에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 계속 안 나와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일리언>을 모범적으로 베껴서 앞에 계속 나올 듯 말 듯 그림자로만 비추다가 맨 마지막에만 한 번 제대로 나오던가.
어쨌든 뭔가 무시무시한 놈이 잊을 만하면 마을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며 패닉을 가져온다. 절박함은 강도가 심할수록 우스꽝스러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박한 놈만 절박하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또 맷돼지가 공격을 해오거나 말거나, 마치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 약이라도 단체로 먹는 듯 허허실실 천하태평이다. 자기만 안 당하면 된다 이거다. 그러므로 대체로의 괴수물이 절박함에 방점을 찍고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괴수가 화면에 전면 등장하면서 다 때려부술 때의 타격감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맷돼지를 잡겠다며 차우와 대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비장함을 (자기가 당하지 않았다고) 별 거 아닌 것 취급하며 태평한 마을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도 튀어나온다. 맷돼지가 습격하거나 말거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을 활개치는 소위 ‘꽃 꽂은 분’이나 도시인들에게 장사를 해먹는 마을농장 관계자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나 꽃 꽂은 분은 애초에 맷돼지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내 맘대로 장르명을 작명한다면, ‘괴수물’보다는 오히려 ‘농촌소동극’ 정도가 될 듯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신정원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크고 무서운 맷돼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이 영화의 스타일대로라면, 차우가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수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겉보기는 이렇게 멀쩡하고 폼나는데... 사실은 허당이다. 죄다.
농촌소동극으로서, 코미디로서 <차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신정원 감독의 유머감각이 소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굉장히 웃기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도 무지 웃었다. 맷돼지와 싸우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하나하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떨어진 면이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도 상황도 참 어이없이 웃기거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부분이 많다. 멀쩡하게 생긴 형사가 사람들이 안 볼 때면 음료수고 담배고 몰래 챙기고 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잘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 든다거나. 최고의 포수라는 이가 잘난 척 양키 포수들을 대동했지만 그들의 말을 실제론 알아듣지 못하고 선머슴같은 여자에게 가슴을 두근대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거나. 나름 비장한 얼굴로 생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감당하듯 보이던 서울내기 순경이 실제로 집안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신경질로 반응한다거나. 맷돼지에 대해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대포로 수색대를 따라나선 대학원생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꺼내들며 수색대에 ‘연출’을 하려들고 이들 수색대 역시 이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마을이 처한 대위기에 맞서 그 누구 하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폼은 그럴싸하나 알고보면 모조리 허당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편이, 실제 현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영화 속 세상뿐일 테니. 게다가 씨네21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차우의 수색에 나서는 건 죄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뒷짐지고 가만히 있는데 이들 외지인들이 차우를 잡겠다며 나서서 벌이는 소동들이,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문제는 예산이다. 식인 맷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공포와 고난과 분투를 그리는 영화로 선전되며 그 정도의 CG와 예산이 들어간 영화라는 건, 마치 연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길래 스테이크를 먹게 될 줄 알고 기대했더니 맛은 꽤 별미이나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비싼 떡볶이가 나온 형국이라 해야 할까.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차우>는 순제만 70억에 이른다. P&A 비용까지 합치면 총제작비는 100억원에 육박한다. 너무 비싼 떡볶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떡볶이를 무지 좋아하긴 한다.) 난 차라리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처럼 예산을 적게 들이되 맷돼지의 모습을 그림자나 정황으로만 제시하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우> 식의 코드라면 맷돼지가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의도적으로 조잡하거나 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유머가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 만들려다 안 될 게 너무 뻔해지니까 중간에 차라리 망치려면 제대로 망치자며 막 가는’ 코미디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엄태웅의 엉덩이가 노출되는 게 무슨 찐한 멜러 영화도 아닌 <차우>라는 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지만.
큰 웃음 주신 신형사 역의 박혁권.
<차우>를 보는데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계속 생각났다. 처음 맷돼지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 묘지 위 언덕에서 경관들이 차례로 관 앞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롱테이크 씬 역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풀숏으로 먼 거리에서 찍으면서 롱테이크로 가는데 둑방 위에서 누군가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두 영화의 그 장면들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씬으로, <차우>에서의 그 씬을 단순한 개그씬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역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되, 절박함 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봉준호 식 낯선 유머 코드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모두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능란하게 교차된다. 그렇기에 <차우>의 오히려 안으로 향하는 시선과 묘하게 상통하믄 부분이 있다. 이후 <마더>에서도 드러나듯 너무나 생생한, 한편으로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오히려 실은 판타지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한국적인 시골스러움’에 대한 묘사가 신정원 감독의 <차우>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이건 신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난 아직 <시실리 2km>를 보지 못했다.) 다만 <차우>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시도하지만 적절히 통제하는 어떤 코드의 유머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 <차우>를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 그 실소를 진심으로 즐기게 되는 것도, 그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 때문일 것이다.
ps. 지금 시간 23시 39분. 지금 읽어보니 어찌 이리 비문과 오문이 난무하고 글이 엉망진창 왔다갔다 하는지. 글을 조금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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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뉘엘 베아르 언니의 무시무시한 얼굴.
태국 푸켓에서 6개월 전 쓰나미로 어린 아들을 잃은 벨머 부부는 푸켓을 떠나지 못한 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자선파티에 참석한 도중 부부는 우연히 버마의 깊은 숲 속 바닷마을을 찍어온 영상에서 자신의 아이처럼 보이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아들을 찾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확신이 없는 남편 폴은 여행 내내 회의에 시달리지만, 아내의 믿음은 굳건하며, 이 여행을 계속 추동한다. 심지어는 남편을 속여 사기꾼에게 거액의 돈을 넘기면서까지 말이다. 이들의 여행길은 점차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버마의 원시림으로 향하고, 얀은 점차 집착과 광기로, 폴은 공포로 빠져든다.
영화는 오프닝 크레딧부터 매우 강렬하고 압도적인 비주얼과 사운드로 시작한다. 화면을 꽉 채우는 타이포그라피의 오픈 크레딧, 아마도 바닷속의, 수많은 물방울 기포 사이로 철렁대는 긴 머리카락, 점차 핏빛으로 변하는 물방울들, 그리고 처음엔 찰싹대는 잔잔한 파도소리에서 점차 소리가 커지며 불쾌하게 귀를 긁어대는 사운드까지. 마침내 도저히 이 소리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가 돼서야, 영화의 스탭롤이 끝나고 소리도 멈춘 뒤 본 화면으로 전환된다. 쉰이 다 돼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20대적 젊음과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엠마뉘엘 베아르의 비키니 수영복 씬이다.
(이하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종종 자연과 등치되는 모성애는 원래 무섭고 잔인하고 눈먼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이 중 하나로 조셉 콘라드를 꼽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나뭉님이 지적한 대로 <지옥의 묵시록>을 강하게 연상케 한다. (<지옥의 묵시록>은 조셉 콘라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일부 영화정보에서는 그래서 [암흑의 핵심]이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라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인물이 모종의 임무를 띄고 다른 인물들 혹은 사회와 동떨어진 곳, 즉 정글 속으로 여행하며 점차 광기에 물들어간다는 설정은, 확실히 <지옥의 묵시록>을 꼭 빼닮은 구석이 있다. 말론 브란도의 커츠 대령이 이미 그랬던 존재고, 그 뒤를 주인공인 마틴 쉰의 윌라드 대위가 쫓는 것이다. 윌라드 대위의 임무는 커츠 대령을 제거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 임무에 성공하지만, 한편으로 그 자신이 또 다른 면에서 커츠 대령을 닮아가며 광기의 중심으로 빠져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커츠와 달리 그 광기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게 차이점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 영화, <빈얀>도 그렇다.
<지옥의 묵시록>에서처럼 <빈얀>에서도 벨머 부부가 여행을 계속하면서 정글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자연은 인간이 잘 통제하고 다듬은, 인간을 위로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돼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을 압도하고 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잔혹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이 된다. 제멋대로 자란 무성한 나뭇가지들, 더럽고 탁한 강물과 발목까지 빠져 걸음을 어렵게 하는 진창, 거기에 쏟아지는 비까지. <지옥의 묵시록>에서처럼 <빈얀>의 공간은, 서구인들이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매혹과 공포를 함께 느끼는, 그들 입장에서 소위 ‘원시림’이라 여겨지는 동양의 깊은 밀림이다. 그런데 벨머 부부가 푸켓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빈얀>의 이런 밀림에 또 다른 의미 하나를 더 부여한다. 즉, 이들의 여행이 계속될수록 카메라에 잡히는 야생의 압도적인 자연의 풍경은, ‘여름 휴가를 온 백인들을 위해 아름답게 손질된 동양의 휴양지 해변’인 푸켓과 극명한 대비가 된다는 것이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는 휴양지에서 종종 마주치는, 잠시 지나는 상쾌한 스콜이 아니라, 마치 배우의 몸을 연달아 찌르기라도 하듯,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불쾌한 비다. (배우들이 정말 고생했겠더라.) 그렇다면 6개월 전 벨머 부부의 아이를 앗아간 쓰나미는, 말하자면 잘 통제된 인간의 영역과 야생의 자연이 인간을 압도하는 영역 사이의 어떤 틈새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을 ‘발견하고 탐험하며 지배하고 정복하기를’ 꿈꾸지만, 결코 인간에게 정복되지 않는 자연은 종종 틈새를 찢고 그 사이로 인간이 정복했다고 믿는 어떤 영역을 순식간에 덮치고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다.
마침내 그에게 다가간다. 그를 죽이기 위하여.
<빈얀>은 그러나, <지옥의 묵시록>과 다르다. <빈얀>의 벨머 부부는 커츠 대령이 아니라, 커츠 대령과 똑 닮은, 그러나 그런 식의 ‘절대적 아버지’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들을 죽이는’ 무수한 어린아이들을 만난다. 옷은 모두 팽개친 채 사타구니에 두건만 두르고 얼굴에 온통 허연 회칠을 하고 눈과 입 주위를 붉게 칠한 이 아이들은 처음엔 한둘, 그 다음엔 서넛, 그 다음엔 대여섯이 벨머 부부의 눈에 띄고, 그 때까지만 해도 부부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이 수백이 한꺼번에 모여들 때, 그것은 확실히 충격과 공포가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의 충격은 마치 <지옥의 묵시록>의 엔딩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양상이 된다. 아마도 식인을 하는 듯한, ‘원시인’이라는 다소 차별적인 말이 딱 떨어지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흉폭한 자연에 적응하고 그 일부가 돼버린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산 채로 귀신이 돼버린’ 존재들인지 모른다. 사회와 상징계를 떠나 그저 실재로만 존재하는 아이들이라니, 사실 이거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아닌가. 그러니 상징계에 속한 인간의 눈에는 이들이야말로 귀신이 아닌가.
아이들에게 남자 어른들이 차례로 죽음을 당할 때, 우리는 어쩐지 그 죽음에서 공포와 함께 일종의 경외감과 슬픔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나 그 아이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얀을 향해서는 끝없이 손을 내밀며 그녀의 몸을, 특히 가슴을 쓰다듬기에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 아이들이 여자를 살려두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다. (벨머 부부가 아이들과 처음 마주쳤을 때 아이들과 함께 있던 노부부는 둘 다 아이들 앞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겁에 질려있었고, 아이들은 노부부 중 남자 쪽을 죽인다.) 말하자면 아이들의 살인은, 인간의 ‘사회’의 룰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의 일부이면서,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한 존재들에 대한 응징과 처벌의 뉘앙스를 띄고, 상대적으로 자신을 돌보아줄 모성 – 자연은 종종 모성과 등치된다 – 에 경외와 복종을 바치는 것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아이들을 ‘착취’하며,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즉 자신의 피와 살을 이은 존재만을 중시했던 남자어른들은 (중간에 도망쳐 버린 선장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모두 죽음의 처단을 당한다.
이 장면에서 아이들은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천진난만한, 유독 사운드로 강조되는 '깔깔깔' 웃는 소리는 충분히 소름끼쳤다.
다만 뭔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버마의 밀림 속 아이들이 원시림 속 야생적인 식인종 원시인으로 그려진 것, 그리고 절대적 공포의 공간이 푸켓에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간 버마의 깊은 산골짜기라는 것, 아마도 감독이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자기 생각에 ‘그저 먼 곳’이었을 뿐이 정치적 격변으로 몸살을 앓는 버마의 숲속이란 게, 차마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얄팍하고 오래된 오리엔탈리즘의 잔재를 보는 것 같다.
한 가지 더, ‘빈얀’이 정말로 태국의 귀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말인가 싶어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 영화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 보고 쓴 이들의 감상문을 대거 읽었다. 미안한데 이 영화는 그렇게 보면, 그 감상문들이 하나같이 전하는 대로 “대체 뭐하자는 영화인지 알 수 없는” 영화가 돼버린다. 이 영화에서 비주얼만큼이나 중요한 게 사운드다. 이 글 두 번째 문단에서도 묘사했지만, 종종 초현실적인 장면과 함께 귀에 거슬리며 불쾌감을 주도록 연출된 사운드가 영화의 공포와 긴장의 분위기를 쥐었다 놨다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파일로 집에서 싸구려 컴퓨터 스피커를 통해 듣는 사운드는 이 영화의 원래 의도된 분위기, 사운드의 강약과 리듬으로 전달되는 그 공포를 결코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한다.
ps 1. 부천영화제 상영작. 7/19 일요일 오후 5시, 부천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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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5 : 동반자살>(이하 ‘동반자살’)이 시리즈 중 최악의 작품이란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출도 이야기도 배우들의 연기도 가장 딸리고, 심지어는 배우들의 외모도 딸린다. 영화 얘기를 하며 배우의 외모를 트집잡는 짓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간 <여고괴담> 시리즈가 가능성있는 젊은 신인 여배우들을 발굴하는 장으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외모 트집잡기’는 그러니까, 또 하나의 강조법에 불과하다. 영화의 모든 게 최악이니 하다못해 배우의 외모라도 좋았다면 뭔가 변명해줄 거리라도 찾겠는데 그러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1편이야 원래 활동하고 있던 배우들을 캐스팅한 거였으니 넘어가고,) 2편에서 시크한 이영진과 귀엽고 깜찍한 공효진, 3편에서 인형같은 외모의 박한별과 묘하고 성숙한 분위기가 있는 송지효, 4편에서 정말 예쁘다 싶은 김옥빈과 서늘한 매력이 있는 차예련이 발굴됐다. 그렇다면 5편에서는?
소재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고생들의 ‘우정’(굳이 따옴표를 친 이유는 이 ‘우정’이 종종 ‘사랑’의 다른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이 실제로 그런지 안 그런지는 차치하고, <여고괴담> 시리즈는 한국에서 ‘여고’라는 신비화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여고생’이라는 신비화된 존재들에 대한 이런저런 신비한 이야기들, 종종 끔찍한 결말과 비극을 맞고 마는 이야기들을 다뤄왔다. 부모나 선생, 기타 다른 어른들보다도 또래의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나아가 아직 불안정한 상태로 형성 중인 각자의 정체성마저도 함께 공유하려 들고, 그래서 심지어 “화장실도 같이 들어간다는” 여고생이다. 그러니 ‘죽음도 함께 맞자’는 약속을 우직하게 실행해 버리는 여고생의 이야기란, 여고괴담 시리즈의 소재로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그런데 이야기가 풀리는 방식이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동반자살’은 그 자체로 이야기 하나를 다 풀 만한 소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더 깊은 얘기를 하기 위한 표면적 ‘가이드’로서의 소재로 가치가 있다. 아이들이 굳이 ‘동반자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굳이 이유랄 건 없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나이 또래에는 사회적이고 현명한 해결방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회피책일 수도 있고, 죽음, 나아가 자살로서의 죽음 자체가 낭만적으로 미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동반자살>에서 다뤄지는 자살, 특히나 동반자살은 매우 나이브하다. 이것은 <여고괴담> 시리즈를 형식적으로 잇기 위해 별 고민없이 대충, 선택된 감이 있다. 그 결과 첫 오프닝에서의 죽음 뒤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지지부진하다. 미학적인 측면으로도 <동반자살>은 별 매력이 없다. 게다가 영화는 종종 지루하다. 시리즈 고어 중 장면이 가장 세고 많다는데도, 영화는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리고 이 ‘무서움’과 ‘슬픔’이야말로 <여고괴담> 시리즈의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여고생에 대해서도, <여고괴담> 시리즈의 매력에 대해서도 하나도 모르고 있구나,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단순하고 고지식한 캐릭터들이라니, 땅이 꺼져라 한숨이 나올 정도다. 여고생의 특징이라고 보통 얘기되는 불안감과 모호함 따위, 이 영화엔 없다. 소이(손은서)가 느끼는 죄책감도 평면적이고, 유진(오연서)의 탐욕이나 집착 역시 일차원적일 뿐 모종의 절실함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각 캐릭터들은 한 줄 짜리 ‘설정’만 받았을 뿐, 디테일한 캐릭터의 다면성을 부여받지는 못했다. 단서 하나를 알려주는 데에 오만 년, 다음 단서까지 또 오만 년, 그렇게 지리하게 질질끌며 가다가, 알고 보니 (스포일러라서 가린다) 동생에게 빙의해 있던 언니란다. 지루함을 겨우 견디며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어이가 없어서 실소도 나오지 않는 수밖에. 절절한 연인들의 흉내를 내면서도 굳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노라, 강조하는 폼새도 좀 우습다. 언주와 소이 사이에는 어떠한 텐션도 느껴지지 않는다.
애틋함도 섹슈얼한 텐션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여고괴담>이 시작돼 그토록 큰 인기를 누리며 5편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를 거칠게 요약해 보자면, 한국이란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가부장적 억압, 그 중에서도 여고생들에게 가하는 이중적이고 더욱 특별한 방식으로 가하는 억압 및 통제와, 사회의 주류인 남성 성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여고생들 특유의 불안과 들끓는 에너지가 충돌하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 파장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이를 더욱 첨예하고 강렬하게 만드는 건 입시지옥과 성에 대한 이중잣대가 은밀히 감춰진, 그리고 이 사회의 주류의 가치관과는 살짝 빗겨나 있는 특유의 룰이 존재하는 여고라는 특유의 공간배경이다. 그런데 이제껏 <여고괴담>을 만들어온 주체들은 대부분 성인 남자들이다. 그들은 <여고괴담>에 등장하는 여고생들을 어떻게든 본인들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있을 법한’ 존재들로 만드는 데에 주력하면서도, 특정한 부분은 ‘더욱 이해 못할 부분’으로 남겨두며 신비화 해왔다. 관객들 역시 (그들 자신이 여고생이건 아니건간에) <여고괴담> 시리즈의 여고생들을 타자로 보는 데에 익숙하다. 그 결과 <여고괴담> 시리즈의 인물들은 언제나 매혹적인, 절대적인 ‘타자’로서, 그리고 ‘거울’과 같은 존재로 스크린을 누볐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식의 ‘노력과 결과의 엇나감’이 오히려 <여고괴담>의 인물들을 더욱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앞서 <여고괴담> 시리즈의 생명력의 원천으로 지목한 ‘무서움’과 ‘슬픔’이 발생하는 지점, 나아가 시리즈 중 일부 작품이 기적+적으로 성취해낸 ‘시적인 아름다움’의 근원도 바로 이 지점이다.
<여고괴담> 시리즈가 나온 지 벌써 10년, 그 10년간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위상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성년’의 기간을 보내는 여고의 공간의 특성이 많이 변한 만큼, 이제 어떻게든 그런 현실상의 변화와 그로 인한 시리즈의 변화도 반영해야 했던 게 사실이다. 앞선 이야기들 역시 언제나 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여고괴담>의 세계를 진화시켰던 게 사실이다. 1편에서 ‘어떻게든 여고라는 지긋지긋한 공간을 빨리 떠나는 게’ 아이들의 목적으로 보인다면(그래서 귀신은 학교에 계속 남는다), 3편인 <여우계단>에선 ‘예고’라는 공간이 주는 특혜와 이점을 그 누구보다 잘 이용하려는, 사회적으로 크게 진출하려는 예술가 지망생들이 등장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그간 <고사 : 피의 중간고사>처럼 <여고괴담> 시리즈의 영향을 분명히 받고 차용했으나 <여고괴담>의 직계는 될 수 없었던 영화들도 등장했다.
감독이나 제작자가 이 점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동반자살>에서 시리즈 내 최초의 ‘순수한 악당’ 캐릭터가 등장한다거나 미국 틴에이저 영화에서 주로 등장했던 ‘여왕과 시녀’로 구성된 패거리가 나오고, 심지어 남학생과의 교제와 임신 문제까지 다루는 걸 보면, 새로운 변화에의 강박이 꽤 컸던 듯하다. 그럼에도 <동반자살>의 감독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여고괴담>의 여고생들에게 매혹되는지, 왜 이 시리즈를 그토록 좋아했는지는 감도 잡지 못한 것같다. 전편들에서 각각 인기있었던 설정을 하나씩 따와 잡탕을 만들어 버리지만, 그 설정들이 왜 그 편에서 그토록 인기였는지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듯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 시리즈의 질긴 목숨을 꼭 유지해야만 하나, <동반자살>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고괴담> 시리즈는 여전히 매력있고 할 얘기도 많은 시리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매력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는, 나쁘지 않은 시리즈다. 이전에 눈앞에 너무나 명백하게 보였던 억압이 덜해졌을 뿐, 우리의 10대 여성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더 은밀해진 억압과 통제과 경쟁에의 강요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반자살>의 애초의 운명은, 앞엣 시리즈를 정리하고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시리즈로 도약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에 불과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성공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실패함으로써 강력한 변명과 근거를 제공해준 듯하여 보는 기분이 그닥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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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에게 7번째 차인 쑥맥 지미와 사회부적응자에 여자만 보면 화색이 도는 플레치가 영국의 시골 중에서도 시골 크랙위치로 하이킹을 떠난다. 그런데 이 곳은 오래 전 강력한 레즈비언 뱀파이어 퀸인 카밀라가 죽으면서 저주를 내렸던 곳. 그래서 마을 처녀들은 18세가 되면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변해버린다. 카밀라는 맥클라렌 남작의 성검에 죽음을 맞으면서 맥클라렌의 마지막 후손의 피가 숫처녀의 피와 섞이면 자신이 더욱 강력한 힘을 갖고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크랙위치에서 지미와 플레치 일행은 우연히 만난 네 명의 미녀와 산장에서 묵게 되고, 곧 자신을 공격해 오는 여자 뱀파이어들에 맞서 악몽같은 하룻밤을 지내야만 한다. 어벙하고 쪼잔한 지미는 마침내 이곳에서 자신의 혈통과 운명을 알게 된다.
필 클레이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LVK>에서 LVK는 Lesbian Vampire Killers, 즉 ‘레즈비언 뱀파이어 킬러’의 약어다. ‘레즈비언 뱀파이어’란 말이 들어간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온갖 B급 유머와 음담패설로 무장한 뱀파이어물 코미디로, 영화제 측의 소개에 의하면 이번 영화제 상영작 중 가장 재미있는 영화 중 한 편이다. B급 호러치고는 컴퓨터 그래픽이 꽤 사용되기는 했지만,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조잡해보이는 CG의 질마저도 영화의 흥겨운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데 일조한다. 감독 스스로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이들은 딱 15살 남자아이들의 정신연령을 가졌다”고 GV에서 언급할 정도로, 이 영화가 구사하는 농담과 유머, 그리고 전제하고 있는 가치들은 정치적 공정함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애저녁에 은하계 저 편으로 날려버렸다. 플레이보이 모델풍으로 생긴 화려한 여자들이 아찔한 차림으로 울타리를 넘는 모습을 앙각으로 카메라를 잡아 슬로우 모션으로 비춘다거나, 주인공들이 그들이 한껏 몸매를 과시하며 춤을 추는 걸 침을 잔뜩 흘리며 쳐다보는가 하면, 그런 예쁜 여자들이 뱀파이어 퀸의 저주에 따라 18세만 되면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에 통탄하며 툭하면 남자의 성기나 여자의 가슴, 혹은 게이에 관한 질 낮은 농담을 내뱉는 식이다. 심지어 말뚝을 박거나 성수를 뿌리면 뱀파이어들이 거품을 부글대며 정액을 연상시키는(!) 우윳빛 피를 분출하며 죽을 정도다. 뱀파이어가 된 여성들이 벌이는 진한 키스씬도 이성애자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단단히 고려하고 만든 장면들이다.
단순히 장면만 그런 게 아니다. 뱀파이어는 원래 관능적인 존재로, 18세의 성인이 된 여자들이 모두 레즈비언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은 스트레이트 남성들에겐 악몽일지 몰라도 ‘여성의 힘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보여주는 클리셰에 가깝다. 뱀파이어 퀸의 저주에 걸려 모두 레즈비언이 되고 뱀파이어들을 신나게 쳐부수는 이 영화야말로, 얼핏 보면 더없이 편견에 가득한 동성애 및 여성 혐오 영화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미, 플레치, 마을의 목사님과 함께 뱀파이어 사냥에 나서는 로티는 가장 노출이 적은 탓에 유일한 생존자가 되고, 안경을 걸쳤다는 것으로 미모는 물론 지성까지 갖춘 존재로 상정되며, 무려 숫처녀에다 저 바보같고 소심한 지미를 좋아하기까지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지미를 구해주기도 여러 번이다. 이렇게 완벽한 여자가 지미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데다 레즈비언 뱀파이어 사냥에 나서는 충실한 이성애 신봉자이기까지 하니, 15살 정신연령의 남자들에게 로티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인 셈이다. 결국 가부장적 권위의 화신이나 다를 바 없는 목사와 이들에 기생해 사는 찌질한 남자들, 그리고 여성적 힘으로 뭉친 여자들과 적대하며 남자들 편에 선 여자가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고 연대한 여성들을 잡아 죽이는 형국이 된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낄낄대거나 폭소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길티 플레저’로서의 웃음을 제대로 선사하며 흥겹고 캠피한 매력을 전한다. 의도적으로 옛 ‘싼 영화’를 흉내낸 자막과 화면들, 다소 과장된 여자 캐릭터들의 연기, 없이 얄팍하고 뻔뻔한 플레치와 소심하고 어벙한 지미 콤비의 궁합, 그리고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장면들이 주는 유쾌한 에너지까지. 지미를 괴롭히던 못된 여자친구가 뱀파이어가 된 채 찾아왔다가 지미와 플레치에게 처참하게 처리되는 장면에선 박수와 폭소가 저절로 터져나올 정도다. 게다가 이 영화의 아무리 게이와 여성, 특히 레즈비언 여성들에 대한 음담패설과 성적 대상화 농담이 난무한다고는 해도, 주인공인 지미와 플레치가 워낙 얼뻥하고 찌질한 캐릭터들인 까닭에 초반에 느껴지는 여러 불편한 감정들이 쉽게 웃음으로 전환된다. 게다가 뱀파이어들과의 싸움이 본격화되면서 영화에서 가장 저질 농담을 많이 구사하는 플레치는 뱀파이어들이 내뿜는 정액같은 피를 번번이 뒤집어쓰며 보는 관객에게 묘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과거 뱀파이어들의 전통을 충실히 클리셰로 활용한 덕에 그 영화들에 전제돼있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까지 덩달아 불려나오기는 했지만, 이 영화는 묘한 지점에서 그것을 스스로 비트는 영악함을 과시하며 다시 한 번 관객들을 웃기고 있는 셈이다.
<LVK>는 본국인 영국에서는 15세 관람가로 개봉되어 일정한 흥행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농산물 회사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제작비를 모으던 감독에게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차기작 제작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과연 국내에서도 개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설사 수입이 된다 해도 근엄하고 유머감각 없는 영등위 위원들의 ‘허락’을 통과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만큼, 이 영화를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즐길 기회는 이번 부천영화제가 거의 마지막일 듯하다.
ps 1. 부천영화제 월드판타스틱시네마 섹션 상영작. GV는 나뭉님이 진행하심.
ps 2. 프레시안 20일자 기사로 올림
ps 3. 로티 역을 맡은 배우 마이애나 버닝(이름도 참… MyAnna Burning이란다. 나의 애나가 불타고 있다?)은 미셸 파이퍼를 닮았다. 아니나 다를까 imdb에 들어갔더니 아예 대놓고 가장 닮은 사진들이 프로필 사진으로 올라 있다. 필모그래피를 보고야 알았네, 세상에 닐 마셜 감독의 <디센트>와 <둠즈데이>에 출연했었다고 한다.
ps 4. 사실 영화가 지미와 플레치와 심지어 로티마저 내내 놀리는 분위기가 있고 여자 뱀파이어들이 굉장히 매혹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어쩌면 이 영화야말로 오히려 역설적인 의미에서 게이-뱀파이어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긴 한다. 생각해 보면 영화의 2/3 내내 플레치에게 뱀파이어 피를 뒤집어 씌운 것도 그렇고, 막판가면 피가 말라붙어서 꼴불견이 되는 데다, 사실 게이 농담이 그렇게까지 많이 나오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에게 다시 한 번 죽는 카밀라란, 어쩌면 분명 역사상 ‘자연스럽게’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나 이성애 이데올로기에 억지로 질식당하고 압사당하는 동성애의 운명을 자조적인 역설로 그려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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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일 감독은 참 운이 없다. 데뷔작을 포함해 그의 첫 두 영화는 모두 투자사와 배급사간 ‘자본’끼리의 이런저런 갈등과 사정 때문에 영화를 다 만들어놓고도 개봉이 한정없이 미뤄졌다가 가까스로 뒤늦게 소규모로 개봉했다. 제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방식을 택함으로써 자본의 문제를 해결해 세 번째 영화를 찍어놨더니, 이제는 정치의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청소년 모방 위험’을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아 개봉 전부터 영화 외적인 것으로 스캔들의 주인공이 돼버린 것이다. 영화를 지지하든 안 하든, 10대를 위해 만든 영화가 도리어 10대들이 볼 수 없도록 금지를 당했다.
딱히 눈에 띌 만한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없는데도 이러한 등급을 받은 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가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얼마나 ‘불온한’ 영화인지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우려된 ‘청소년 모방 위험’의 타겟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하나는 모두가 짐작하는 바로 그 이유, 그러니까 현직 대통령을 향한 직설적인 조롱과 비난, 그리고 또 하나는 이주노동자와의 연애, 그것도 ‘까만 피부’를 지닌 이주노동자와 ‘성적인 텐션이 분명히 존재하는’ 연애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정으로 불온한 것은 바로 후자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온함은 다시, 한국사회의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고스란히 폭로한다.
재미있는 것은 감독이 이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이미 영화 내에서 그대로 까발렸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민서(백진희)가 자신의 담임 선생님과 딱 마주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방문자>의 주연 김재록이 이 난감한 담임 선생님을 참 애처롭게 연기한다. 너무나 애처로워서 더욱 코믹하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위력적인 장면이자, 남자어른들에게 가장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10대의 성을 끝없이 터부시하면서 특히 10대 여성에게 ‘순결하고도 무성적인 존재’로 있을 것을 강요하지만, 정작 막 10대를 벗어난 가장 젊은 여성들의 성을 가장 더럽고 치졸한 방식으로 착취하는 경향이 있다. 10대 청소년들이 성매매 시장으로 유입되는 것도 바로 이 틈새다. 게다가 그들은 ‘어리다고’ 각광을 받으면서도 ‘불법’이라는 이유로 착취를 당하는 이중적 모순에 놓이곤 한다.) 담임 선생님 씬이 그토록 위력적이고 코믹한 것도 바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현실이 고스란히 폭로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소위 ‘통제되어야 할’ 여성의 성이 ‘민족의 범위를 벗어난’ 남자들, 특히 가난한 외국 출신 남자들과 엮일 때 한국 남성들의 분노는 폭발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이 영화를 공격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공격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영화는 민서와 카림(마붑 알엄) 사이의 성적인 텐션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민서는 카림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한국사회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방식, 즉 ‘(여성 착취적인) 봉사의 의미의’ 성적인 접촉을 시도한다. 이 영화가 다른 의미에서 ‘선정적인’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이 영화가 선정적이라면 그것은 성을 다루거나 묘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성, 특히 10대 여성의 성을 다루는 방식의 위선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인 남성들이 가장 터부시하고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에서 건드려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외피를 두른 채. 이것의 결과가 바로 현실 층위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셈이다. 영화의 허구적 층위에서 이미 고발된 아이러니와 모순이 현실의 층위에서 고스란히 반복을 통해 재현된다.
본국의 어린 여성과 이주노동자 유부남 남성의 자연스러운 신체접촉은 한국의 남자어른들에겐 불편한 악몽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저 성적인 접촉의 장면이 여성, 특히 주인공인 10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이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고 보기에도 모호한 지점이 있다. 영화 전체적으로 민서를 생동감있게 해주는 것은 그녀가 어떤 일관된 사고나 가치관에 따라 숙고하고 행동한다기보다 거의 즉물적인 욕구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라는 바로 그 지점에 있지만, 이 특징은 민서라는 캐릭터를 ‘알 거 다 아는 척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모순의 존재로 묶어둔다. 그녀는 유사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며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 잘 알고있는 듯 말하고 행동하지만 오히려 성에 대해 무지한 어린아이같은 존재다. 그녀가 카림에게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어떤 ‘난감한 천진함’이 포착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성적인 행위의 생물학적인 ‘조건반사’ 과정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그 행위가 지닌 다층적 층위에서의 사적, 사회적,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단적인 근거가 어머니의 남자친구인 기홍(박혁권)에 대한 무조건적 적대다. 그녀는 어머니와 기홍 사이를 전적으로 ‘동물적인 성적 행위만 존재하는 관계’로 여기며 혐오감만 드러낼 뿐, 그 관계에 있을 다른 정서적 교감이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결코 이해는커녕 짐작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장면에서 민서의 행위는 오히려 사회가 여성의 성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에 대해 그 외형을 그저 흉내내는 것일 뿐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녀가 그 의미들을 (새삼) 깨닫고 자신의 주체성 하에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은 영화 막바지에나 나오는 키스씬이다.
이 영화의 수상하고 기묘한 모순도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나는 <반두비>의 민서 캐릭터가 살아 생동하는 10대 여성을 그렸다기보다는, 386 지식인 남성이 ‘촛불소녀’에게 투영한 이상형을 그려낸 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허남웅 기자가 지적한 대로, ‘감독의 이상을 뻣뻣하게 구현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모범생 로봇이라는 것이다. 사실 ‘촛불소녀’에 대한 386들의 기대가 과연 무엇인지 이 영화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도 또 없다. 카림의 월급을 떼어먹은 사장의 집에서 민서가 난동을 벌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말하자면 386 남성 지식인들이 ‘어른’이기에 대놓고 하지 못하는 일련의 체면구길 제멋대로의 행동과 거침없는 말들을 ‘어린 여자’라는 방패 하나로 대신 질러줄 수 있는 존재다. 혹은 동년배들의 혐오어린 시선이나 비난엔 끄떡도 않을 남성 어른의 위선을 대신 콕 찝어 폭로하고 수치를 안겨주어 윤리적 각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이거나. 민서가 남성의 욕망을 잘 알면서도 완전히 무지한 모순을 갖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감독이 민서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그녀는 매혹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구체적인 성적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 읽힌다. 바라보는 자가 자신과 다른 이의 시선 모두를 애초부터 억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적으로 완전히 무지한 천진한 존재고, 그러면서도 남성의 욕망을 꿰뚫어본다고 가정된 존재다. 어쩌면 이와 같은 메커니즘은 소위 ‘국민여동생’ 문근영을 향한 팬덤이 보여준 어떤 현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녀는 성적으로 매력이 있으되 결코 그녀 자신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알아선 안 된다. 그녀를 보는 ‘나’는 그녀에게 성적인 매혹을 느끼되 그것을 성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통하는 건 절대로 안 된다. ‘내’가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건 죄다. 그러므로 그녀는 순결한 누이가 되어야 한다. 그녀와 성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건 외부의 타자뿐이거나 이 모든 소소한 서민들을 뛰어넘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자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매혹은 사라지거나, 여전히 원존재의 상태로 봉인될 것이다…
식사장면의 중요성
나아가 내가 우려하는 것은, 신동일 감독 영화의 캐릭터들은 갈수록 어려지지만, 한편으로 갈수록 생동감과 자연스러움도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개연성을 해치며 ‘아귀가 안 맞는’ 어색함과 작위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 짐장에는 아무래도 신동일 감독의 주인공 캐릭터들이 나이가 많건 어리건 우리가 소위 ‘386’이라 부르는 특정 세대의 특정한 정서와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일관되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감독 자신이 가장 많이 반영되어 있던 데뷔작 <방문자>의 김재록 캐릭터는 실제 386 출신 지식인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그 나이 또래 아저씨’의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로 오면, 인물들은 포스트-386에 속하는 지금의 30대들로 설정돼 있으면서도 이들 캐릭터의 사적 역사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기억과 재료 부분은 일관되게 386의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 즉,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극중 나이에 어울릴 만한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거나, 90년대에 30대 초중반을 지나고 있던 인물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2000년대로 불러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번 <반두비>에서의 민서 캐릭터 역시 계속해서 어딘가 어색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지금의 10대를 반영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라기보다는 감독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386 여성 친구/동지들이 10대이던 무렵의 소녀를 ‘이상화’로 덧씌운 뒤 억지로 타임머신에 태워 2009년을 살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차피 허구의 창작물에서 인물들은 실제 그 나이대의 동시대 인물들보다는 감독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리자이기 마련이고 그 자체만으로 흠이 되는 건 아니지만, 신동일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적 배경 하에 특정한 시대를 특정한 나이로 거친 특정한 인간을 매우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간을 달리는 캐릭터’들은 관객들에게 어떤 면에서 상당히 경직성을 보여주며 예기치 않은 곳에 공감대를 흩뜨려버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민서는 종종 너무 제멋대로에 생각이 없어보이거나 즉물적이고, 카림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착하다. 나는 과연 10대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아, 우리 얘기다”라고 반응할지 아닐지 상당히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면 내 짐작은 다소 부정적이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나는 영화에서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직설화법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자의식이 부담스럽다. 소신이 너무 명확해서 그 소신의 이론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잡히지 않는 현실의 모든 면까지도 이론으로 제어하려는 듯한 답답함이 종종 보인다. 나아가 이것이 지나치게 우직하고 직설법으로 드러나는 것도. 사실 <반두비>는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 상당히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다.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도 상당하다. 그런데 여기에 지나친 정치적 자의식이 끼어들면서 매력을 깎아먹고 있는 것 같다. 정치적 메시지와 주제가 왜 매력을 오히려 돋우지는 못할망정, 지지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부담을 먼저 안겨주며 종종 민망함을 느껴야 하는가. 세련된 위트와 재치, 혹은 함축과 비유가 아쉽다. 특히나 이런 ‘장르영화’적 외피를 빌어온 영화에 그런 식의 날 것의 정치적 자의식을 부딪히게 하는 건 종종 덜컹거리며 영화의 전체적 균형감을 망치는 결과가 되기 쉽다. 극소수의 대가들이 충돌을 통해 오히려 시너지를 내는 방식으로 그려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내공이 아닌 것이다.
ps 1. 신동일 감독의 영화엔 그만의 반복되는 몇 가지 코드들이 있다. 신감독의 따님의 캐스팅도 그 중 하나인데, 이 영화에선 실물로도 이름으로도 등장하지 않았던 듯. 다만 신감독은 이번 영화에도 카메오 출연을 했다. 무려 1인 2역이다. 마르크스의 사진도 어딘가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점 씬이 아니었을까 싶다.)
ps 2. 민서의 기원이 지금의 10대보다 오히려 386인 여자의 어린시절에 대한 ‘상상’일 거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 하나. 민서는 ‘오늘의 책’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의 알바생이란 2009년엔 거의 사라진 희귀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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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성 | 약탈자들 (2009) - 2009/07/08 21:51
정식 개봉 전 임시포스터.
손영성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약탈자들>은 코미디다. 그것도 아주 웃기는 코미디다. 장례식장에 모인 친구들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인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뒷담화'를 통해 쏟아낸다. 이렇게 각자 이야기 속의 '대상'으로 재구성되는 '상태'라는 인물의 면면은 괴이쩍고 이중적이며 허세에 가득찬 속물이다. 언제나 거대한 명분을 둘러대며 고뇌에 찬 지식인인 척하지만 실상은 여자한테 추근대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헛소리나 일삼으며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이유나 대는 것이다. (이런저런 단편과 독립영화에 출연했던 김태훈이 상태 역을 맡아 신인답지 않은 안정적이고 흥미로운 연기를 선보인다. 김태훈은 배우 김태우의 동생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 과정에서 코미디가 발생한다. 상태의 친구들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 상태를 붙잡아 둠으로써 그보다 권력의 우위에 서지만,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폭로되는 건 화자들 각자의 속물적 욕망과 찌질함이다. 말하자면 상태는 화자들 각자가 자신의 약점과 수치를 투영시킨 인물인 것이다. 우리는 친구들이 전하는 상태라는 인물을 보며 킥킥대다가, 어느새 상태를 통해 드러나는 그들 각자의 찌질함을 보며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각종 장르적 특징이 혼성되면서 오는 쾌감이 덧붙여진다. 사실 이 영화는 살인사건과 얽힌 상태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추적하는 일종의 스릴러적 성격을 영화 전면에 깔고 있다. 상태의 스승인 '달인'과 연쇄살인범 택시기사의 에피소드가 삽입되면서 영화는 판타지와 무협의 성격까지 슬쩍 띄게 된다.
하지만 <약탈자들>은 그리 쉽지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난해해서라기보다는,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특유의 서사방식 때문이다. 일반적인 영화들이 그러하듯 절대적 객관자로서의 감독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영화 속 인물들이 들려주는 에피소드를 나열해 퍼즐 맞추기 식으로 서사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 인물이 '상태'라는 인물과 맺은 관계나 그들의 시점, 기억, 평가 등에 따라 그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정보들을 듣게 되고, 이를 열심히 꿰어 맞추어야 그나마 진실에 가깝게 도달하게 된다. 거기에, 소심하고 찌질한 등장인물들 간 코믹한 사적인 관계가 진지하고 무거운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중첩된다.
영화의 '현재 시제'의 대부분의 공간은 장례식장이지만,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이 바로 금정굴 일대이다. 영화의 첫 장면 역시 상태와 상태의 친구 성익이 금정굴을 찾아갔다가 쓰러져 있는 묘령의 여인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실 금정굴은 한국 근대사의 비극 중 하나인 6.25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대표적인 곳이다. '금정굴'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 금정굴이 어떤 곳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관객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 금정굴이 갖는 지나치게 묵직한 무게가 영화의 재기발랄한 분위기와 섞이지 못한 채 다소 따로 노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의 코미디 역시 다소 비틀린 방식으로 억압되는 측면이 있다.
개봉 당시 정식 포스터에 사용된 김태훈의 이미지. 여기서도 잘했지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그저 속물적인 지식인 개인에 대한 코미디 차원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일반에 대한 지적인 블랙코미디로 비약한다. 곰곰 생각해 보면, 사회 전체의 역사란 것 역시 한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엇갈리는 증언과 기록의 종합이자 정리이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역사를 배우며 우리는 마치 이것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팩트인 것처럼 인식하기 마련이지만, '역사'라는 것도 온통 엇갈리는 증언과 기록을 연구를 통해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한때 중요한 역사서였던 것이 얼마쯤 지나 위서논쟁에 시달리거나 신빙성 논란이 일어나는 것도 역사학계에선 흔한 일이다. 게다가 언제나 피해자와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살아있는 자의 귀에 가닿을 수 없다. 병태의 장례식에 참석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병태를 죽인 상태'에 대한 온갖 뒷담화들을 자신의 기억과 관점을 한껏 투영시켜 쏟아낸다. 그러나 정작 병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병태가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가에 대한 진실은 그 누구의 귀에도 가 닿을 수 없다. 애초에 친구들이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병태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진실이 저 바깥에 명백하게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그 진실에 가닿는 것은 언제나 요원하다. 닿는다 하더라도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것도 대체로는 진실의 핵심이 아니라 그 언저리가 될 뿐이다. 누군가는 그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괴로워하고, 누군가는 진실에 기생해 있는 수많은 괴담과 흥미거리의 이야기를 퍼뜨린다. 그렇다면, 어쩌면 진실이란 이런 식의 괴담과 흥밋거리같은 부연물조차 포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역사를 안다는 것, 혹은 역사에 근거해 서사나 허구를 만드는 작업(그것이 소설이 됐든 영화가 됐든)의 본질이란, 그런 식으로 '진실을 약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영성 감독 역시 "만약 부제를 붙인다면 '에피스테메란 무엇인가. 바로 약탈이다'라고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영민한 신인감독의 나름 야심찬 대답이 이 영화에 들어있다.
ps 1. 프레시안에 7월 1일자 기사로 올렸다.
ps 2. 언론시사회에서 한 번 보고, 관객과의 대화가 있던 CGV 특별 유료시사회에서 다시 봤다. 확실히 이 영화는 두 번째 볼 때 훨씬 더 재미있다. 세 번째 보면 더 재미있을 거 같다. 요즘 시사회를 포함해 영화를 많이 못 보고 있어서 그렇지. 볼수록 참 지적인 영화인데, 소위 지적인 사람들의 젠체하는 유머코드도 제대로 그려져 있어 더 웃기다. 확실히 그런 부분은 홍상수 감독의 영향이 물씬 느껴지기도 하지만,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의식 따위 흥, 하는 홍상수 감독과는 태도가 180% 반대다.
ps 3. 인디포럼 개막식 뒷풀이 자리에서 김태훈과 인사와 악수를 나눈 적이 있다. 훤칠하고 잘생겼고 분위기도 좋고, 연기도 곧잘 해서 무척 기대가 된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배우가 이제 막 자리를 잡으려는 걸 보니, 뭔가 동지애를 느끼며 응원하고픈 마음이… (아아 나는야 사심 빼면 시체인, 질 나쁜 기자.) 이 영화 찍고서 소속사와 계약을 했다고 한다.
ps 4. 손영성 감독 인터뷰를 했는데 3주가 지나도록 기사로 풀지 못하고 있다. 속이 쓰리고 감독에게 죽도록 미안하다. 변명을 하자면, 요즘 욕심을 내고 의욕을 낼수록 글이 더 안 써지고, 인터뷰는 특히 그렇다. 별 욕심없이 설렁하게 한 취재나 인터뷰는 금방 뚝딱 기사로 써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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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터뷰 대상을 10년, 20년 이상 지켜보며 이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로 응축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비록 최근 들어와 서브장르가 세분화, 다양화하고는 있지만,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는 주로 참담한 현실을 폭로하고 목소리를 거세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해왔다. 대체로 하나의 작품이 급박한 시간 안에 만들어져 공개되고, 그 안에 담기는 시간도 몇 개월에서 길어봤자 2, 3년에 걸친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86년부터 2008년까지 22년간 한 일가를 추적하고 관찰한 결과물인 <사당동 더하기 22>의 존재는 놀랍기만 하다. 이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영화가 애초에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찍은 게 아니라 학술연구의 기록 자료가 쌓이면서 나중에 영화화된 것이라 가능해진 것이다. 사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위안부 출신의 송신도 할머니와 그녀를 지지하는 연대모임의 투쟁을 담은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가 10년의 세월을 담을 수 있었던 것도 비슷한 경로를 거쳐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치르면서 당시 최대의 달동네 중 하나였던 사당동은 86년에서 88년에 걸쳐 무자비한 철거를 당한다. 이곳에 살고 있던 이들 중 임대주택으로 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구, 바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정금선 씨 일가뿐이었다. 현장연구원 한 명이 정할머니 일가와 같은 집에 세들어 8개월을 살면서, 현장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조은 교수와 일행은 이 가족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98년부터는 방송 카메라를 이용해 이들과의 만남을 동영상으로 담게 된다. 그 22년간 촬영기사만 10명이 바뀌었으며, 정할머니의 어린 꼬마 손주들은 이제 30대 초중반의 장년이 됐다. 아픈 몸을 이끌고 쓰레기를 줍는 공공근로로 생계비를 보탰던 정할머니는 그 사이 세상을 떠났다. 큰손주 영주 씨는 최근 필리핀 여성과 결혼했으며 둘째인 손녀 은주 씨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막내 덕주 씨는 방황과 일탈의 기간을 거쳐 헬스클럽에서 트레이너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장년이 된 정할머니의 손주들의 가난은 여전하다는 것.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같이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살 만하다, 행복하다"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을 수놓는 것도 영주 씨가 드디어 아빠가 되는 순간이다. 온 가족이 작은 생명을 둘러싸고 앉아 만면에 행복의 미소를 띈 채 새로운 작은 생명에 경이의 축복을 보낸다.
도시의 그늘에서만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그 가운데에서도 기쁨과 희망의 순간을 누리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사회는 빈곤을 방치하고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더욱 심각한 빈곤으로 내몰고 있다. 오늘도 서울 곳곳에서는 '재개발 공사'가 이뤄지고 있고, 하루가 다르게 으리으리한 빌딩과 아파트가 솟아나고 분수가 설치되고 공원이 생기지만, 그곳에서 원래 살던 이들은 밖으로, 밖으로 내몰린 채 '이주'와 '이산'의 역사를 반복한다. 그런가 하면 베트남과 연변, 필리핀 출신의 가난한 여성들은 이곳을 '좋은 곳(a nice place,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기도 하다)'이라 부르며 몰려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몇몇은 운좋게 뿌리를 내리기도 하지만, 다수는 표류를 거듭하다 더 나쁜 상태로 내몰린다. 그리고 이 가운데 빈곤은 세습되고 재생산된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종종 마치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 잊혀지기 일쑤다. 혹은 가장 극적이고 나쁜 사례들만 미디어에 포획된 가운데 어정쩡하게 지워져 버리거나, 더이상 사회적인 문제가 아닌 개인의 동정과 자선의 대상으로 묶여버리곤 한다.
<사당동 더하기 22>는 굳이 감독이 큰 목소리를 내어 강렬한 주장을 하고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거나 굳이 외면해 버렸던 우리 안의 어떤 삶을 조근조근 펼쳐내 보임으로써, 우리 사회의 한 면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영화의 말미에 붙는 자막대로, 이 영화는 한 가족의 22년을 다루기는 하지만 단지 한 가족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차라리 이 영화는 우리가 발딛고 선 땅의 이면을 들추며 사회가 광범위하게 지워버렸던 존재들의 삶을 복원하고자 하는 작은 시도 중 하나이다. 이번 여성영화제의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던 작품으로, 이미 영화제에서의 상영은 끝났지만 다른 다양한 영화제들을 통해 계속해서 소개되고 상영되어야만 하는 소중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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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니 모레티 | 4월 Aprile (1997) - 2009/03/12 21:55
너무 귀여우신 난니 옵빠.
<4월>은 <나의 즐거운 일기> 속편쯤 되는 영화다. <나의 즐거운 일기>에서처럼 난니 모레티가 자기자신으로 등장해, 우파 정치인이자 방송국 세 개를 모두 소유한 미디어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그예 총리로 선출된 그 암울한 시기에 대한 사적인 영화일기를 찍는다. 물론 특유의 그 정신 산란한 수다 및 유머, 그리고 종종 그의 발이 돼주는 베스파 스쿠터와 함께다. 이 영화일기는 그가 자신의 제작사의 동료들과 함께 좌파와 우파 양쪽의 선거운동을 다큐멘터리로 찍는 과정을 종으로, 아들 피에트로를 낳아 기르는 과정을 횡으로 교차한다. 그래서 그 결과는? 트로츠키주의자인 요리사가 등장하는 뮤지컬을 찍는 현장에서 영화가 끝이 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 종과 횡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 존재이자, 다시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존재인 ‘미디어’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사실은 난니 모레티가 아니라, 난니 모레티룰 둘러싼 그 수많은 종류의 미디어들, 그리고 난니 모레티와 그 환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그의 카메라 자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이 영화에서 미디어는 ‘매개자’ 혹은 ‘매체’라는 그 단어 본래의 뜻 그대로 난니 모레티의 가족과, 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정치를 연결해주는 존재다. 애초 영화의 시작 장면부터가 TV에서 베를루스코니가 선거에 승리하는 것을 난니 모레티가 보는 장면이 아닌가. 그는 이 사태에 대해 속사포 같은 속도로 불만들을 쏟아내고 화를 내다가 급기야 “오랜만에 마리화나나 피워야겠어!”라고 외친다. 영화는 중간중간 그가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정보들을 모으는 과정, 특히 신문을 스크랩하고 잡지를 오리는 장면들을 자주 보여주는데, 그가 이렇게 스크랩한 신문조각을 퀼트로 잇자 다시 거대한 크기의 신문 더미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난니 모레티의 직업이 영화감독이라는 점, 그리고 그가 노상 카메라를 들고 그 과정들을 찍었으며 이것을 다시 촬영감독의 카메라를 통해 찍은 화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새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그는 찍는 주체인 동시에 찍히는 피사체로 카메라 안에 드러난다. 그가 온갖 미디어가 전해주는 정보에 노출돼 있으면서도, 그 자신이 미디어를 다루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 그는 미디어가 전해주는 이미지들을 수동적으로 그저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서, ‘작가의 주관이 개입한’ 또 하나의 2차 미디어로 만들려 한다. 더욱이 그는, '창작자'이자 '예술가'다. 그런데 그의 영화 만들기를 막는 외부의 힘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복잡한 정치상황, 그리고 또 하나는, 아들의 탄생. 애초 난니 모레티는 트로츠키주의자인 요리사가 등장하는 뮤지컬을 찍으려 했고, 캐스팅에 촬영 세팅도 끝내지만 그는 결국 영화를 진행시키지 못하고 엎어버린다. 그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몇 년간 다른 작품을 마다하고 춤도 따로 배웠다는 배우가 아무리 열을 받아 항의를 해도. 결국 그는 극영화보다 좀더 직접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려 하는데, 이 선거 기록 다큐멘터리가 졸지에 출산 및 육아 다큐멘터리가 되고 만 것이다. 아들이 태어나면서 난니의 모든 작업이 중단된다.
온갖 미디어와 메시지에 둘러싸여 있는 난니와 피에트로 부자.
그런데 잠깐, 아버지가 미디어를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 피에트로는 태어난 직후부터 미디어에 담기고, 미디어에 둘러싸인다. 갓난아기로 난니 모레티의 영화에 담기는 것은 물론이고, 난니 모레티가 스크랩하고 정리하는 잡지들의 이미지 사이에 둘러싸여있고, 난니 모레티가 틀어놓은 라디오의 음악을 함께 듣는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명실공히 미디어는 ‘환경’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그 ‘환경’에 있어, 좌파 아버지이자 그 환경의 일부를 만들고 있는 작금에 대한 난니 모레티의 대답과 선택은? 바로 ‘뮤지컬 만들기’!. 이미지와 노래, 춤, 거기에 메시지와 심지어 아버지 난니의 열정과 괴팍한 유머와 개성까지 들어간, 영화.
또다른 포스터. 표정도 깜찍하시지 >.<
난니 모레티가 거대한 점처럼 보이도록 카메라를 극단적으로 뒤로 뺀 장면에서 끝날 줄 알았던 영화가 다음 장면, 난니 모레티가 영화를 찍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이다. 이 마지막 장면은 ‘사족’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난니 모레티가 이 거대한 미디어란 환경에 둘러싸인 아들에게 절박하게 주고싶은 ‘선물’인 셈이다. 아들은 그의 영화작업을 중단시킨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만들려다 결국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뮤지컬 만들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해준 창작의 원천이자 원동력이 된 셈이다.
이 촬영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난니 모레티는 우비를 쓰고 그가 애용하는 베스파 스쿠터용 헬멧을쓴 차림으로 손에 스피커를든채 희미하게 웃으며 노래의 박자에 맞춰서 춤을 추고 있다. 그러니 그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절박할수록, 우리는 여유를 갖고 웃으며 춤을 춰야 한다. 어두운 시기를 통과할 수 있는 힘은 웃음이고, 유머다.
ps. 이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 친구들영화제 2009에서 상영됐습니다. 물론 거기서 봤습니다!
ps2. 난니 모레티는... 굉장한 미남이지 않나요. 이제껏 난니 모레티를 본 게 그가 직접 연출한 영화 두 편, 그가 출연만 한 영화 한 편이이지만, 이 사람의 그 극강의 괴짜 유머감각이 더 웃긴 이유는 그가 상당히 잘 생긴 미남이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참 이태리 남자답게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말도 많고, 게다가 행동도 웃겨요, 표정도 웃겨요. 그런데 '우습지는' 않아요. (수줍게 고백하자면...) 사랑스럽습니다. 아이잉~
ps3. 친구들영화제에서 "적어도 딱 이것 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 회사 땡땡이치고 중요 약속을 다 뽀개더라도 - 본다" 리스트에 넣어뒀던 거의 유일한 영화. 이유는 오로지 '난니 모레티'라는 이름 다섯 자 때문. 근데 말이 씨가 됐는지, 이번 친구들영화제에서 본 영화가 다섯 손가락을 꼽는다능.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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