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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맥카시 | 로드  -  2008/08/20 16:56

로드 The Road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

아무래도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여파 덕이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렇다. 일부 작가에 대한 심각한 편향이 존재하던 국내에서 폴 오스터를 제외하면 현대 미국작가가 이토록 주목을 끈 적이 거의 없다. 국내엔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던 코맥 맥카시의 작품 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소설이 영화 개봉과 함께 출간된 후, 퓰리처상 수상작이기도 한 2006년작 [로드]가 출간됐다. 출간 직후부터 현재 인터넷서점 알라딘이나 교보문고 종합집계에서도 외국문학 부문 베스트셀러 상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통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 덕에 책이 떴다고 말하기엔 작가에게 너무 미안해진다. 코맥 맥카시는 그저 '영화 덕을 본 작가'가 아니라, 오히려 '영화에 영감을 준 뛰어난 작가'라 불리어야 하기 때문이다.

[로드]가 단숨에 읽기에 결코 쉽지 않은 책인 건 사실이다.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가 결국 중간에 책장을 덮고 말았다는 독자들도 적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길을 걷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모습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남쪽의 바닷가 어딘가를 향해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길을 걷는 이들은 숲에서 추위에 떨며 잠이 들고 몇 날 몇 일을 굶은 채, 혹은 과일 통조림 하나로 겨우 끼니를 떼운 채 여행을 계속한다. 책에서 묘사되는 그들의 주변 풍경 역시 온통 잿빛이다. 하늘도 강도 길도, 심지어 방금 내려 쌓인 눈도 잿빛. 물론 이들이 입고 있는 옷도 오랫동안 먼지와 때를 뒤집어쓴 잿빛이고, 이들의 '떡진 머리'와 거의 목욕을 하지 못하는 몸 역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잿빛이다. 건물들은 버려져 있고 길은 폐허가 돼 있다. 곳곳에 역시 잿빛으로 변한 사람의 해골들이 늘어서 있다. 혹시나 다른 살아있는 사람의 흔적을 만나면 반가워하는 게 아니라 경계부터 하며 몸을 숨긴다. 아버지는 손에 권총을 단단히 쥔 채 아들을 다른 팔로 감싼다. 이 소설에서 색깔이 언급되는 장면은 부자가 어쩌다 코카콜라를 발견하는 장면, 그리고 아버지의 꿈에 대한 묘사 장면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거리는 이토록 황량하고 이들은 이토록 고통스럽게 여행을 계속하는 걸까. 아버지와 아들의 시점을 오가는 이 소설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직설법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꿈에 대한 묘사를 통해, 그리고 부자간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종류가 됐건 대재앙이 지구를 휩쓸고 간 자리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빈 집에 남은 감춰진 통조림을 챙기거나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으며 살고있다. 문명이 사라진지는 오래됐다. 이들은 문명의 흔적만을 뒤쫓고 추억할 뿐이다. 편안한 수면과 풍족한 식사마저 그저 과거의 추억이 돼 버린 세상. 미래에 대한 꿈도 희망도 없이, 오늘 이렇게 끈질기게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와 목적도, 동기도 사라진 세상. 사람을 발견하면 일단 죽이거나 도망치고 봐야 내가 죽지 않는다는 공포가 당연한 세상. 끊임없이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라 말하지만, 정작 내가 죽지 않기 위해 우연히 마주친 어린아이가 굶어 죽어가는 것을, 혹은 간난아이가 다른 어른들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고, 이것을 '생존 기술'로 소년에게 가르쳐야 하는 세상.

남자의 아내는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오래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자에게 남은 유일한 삶의 목적은 어린 아들이다. 그렇기에 만약 자신이, 혹은 아들이 죽게 될 상황을 대비해 둘이 함께 죽을 수 있도록 마지막 총알을 권총에 남겨둔 상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면이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는 소설 속 세상은 그저 '절망'이라는 말로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코맥 맥카시는 이런 절망의 풍경을 두 사람이 여정 중 겪게 되는 일들과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려낸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절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묵직한 말이었는지, 아니, 일상에서 우리가 이 무시무시한 '절망'이란 단어를 얼마나 남용하고 있는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The Road

영화로 제작중인 <로드>. 딱 내가 생각한 비주얼.

고작 두 사람이 길을 걷는 게 내용의 전부인데도,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긴장과 숨가쁜 호흡, 그리고 심장의 두근거림이 계속된다. 아마도 단문으로 툭툭 끊어지는 건조한 문장들 덕이기도 할 것이다. 마치 눈앞에 그들의 모습이 당장에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묘사가 생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고 모텐센 주연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 생생함이 더할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이 잿빛 세상 속에서 그래도 오늘의 삶을 끈질기게 계속하는 두 사람의 서로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의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낭비되는 말이 없는 지극히 간결한 토막 대화들 속에서, 우리는 부자관계를 넘어서서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동지이자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 상대에게 얼마나 절박하게 의지하고 있는지 새삼 확인한다. 코코아 한 잔을 상대에게 챙겨주는 사소한 행위가 이 소설 안에서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이 된다. 소설 속 세상은 다른 이에게 코코아 한 잔을 권하거나, 상대를 위해 통조림의 과일 한 조각을 남겨두는 것은 불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책의 광고가 강조하고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의 정체는 다 읽고 보면 별 것 아닐 수 있다. 실제로 그 광고문구 때문에 마지막 장면을 기대하고 있다가 '겨우...?'라고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난데없이 뺨을 흐르는 이 눈물은 무엇이며, 시간이 지나도록 가슴을 먹먹하게, 눈을 뜨겁게 만드는 이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저 초라한 장면이 이토록 깊고 촉촉한 잔향을 남기는 이유는. 평소라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그것이, 너무나 깊은 절망 끝에 비로소 찾아온 것이기 때문일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 시대에 새로운 걸작이 나왔다.


사진 더 보기


ps.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라감

이 작가는 누구일까  -  2008/07/13 01:31

(와, 이 폴더에 글 올려보는 게 대체 몇만 년 만인지.)

간만에 뉴욕타임즈 북섹션에서 날아온 RSS 목록을 보다가, 대사 한 마디 말 한 마디 없이 그림으로만 이루어졌다는 Suzy Lee의 새 그림책 [Wave]에 대한 서평에 꽂혔다. 페이지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이 그림 때문이다.


Suzy Lee, Wave

이 그림의 저작권은 당연히 Suzy Lee 씨에게 있습니다. 소개를 하자니 어쩔 수 없이 저작권 침해를...;;

그림 자체도 멋지고 색감도 너무 좋아서 첫눈에 와, 했는데, 또 저 여자아이의 저 조만한 옆모습 표정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순간 반하고 말았다. 살짝 까진 엉덩이도. 한국에서 태어나 싱가포르에 살고 있다는 저자, Suzy Lee에 대해 아는 것은 전혀 없다. 다만 나는 RSS로 들어온 글을 무심코 클릭해다가, 저 그림을 보고 한순간에 반한 것뿐이다. 뉴욕타임즈에 호평이 실린 한국 출신 작가, 라는 참 웃기지도 않은 것에 나 역시 혹한 게 사실이다. 어쨌든, 저 그림은,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서평에서 추측되는 책의 줄거리도 궁금증 가득 자극하는 게 사실이고.

Suzy Lee, 과연 당신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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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박권일 | 88만원 세대 - 잡생각 (1)  -  2007/12/17 01:09

88만원 세대

감상문이라기보단 잡상이에용

인문학 도서가 판매량이 1,000권이 넘으면 대박을 친 것인데, 이 책은 만 부를 넘겼고, 사회에 조그마한 파장을 일으켰고,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통용되게 만들었다. 책이 나오기도 전부터 기대를 했던 이유는 세 가지다. 일단 두 저자, 박권일 씨와 우석훈 선생의 블로그를 드나들며 그간 책의 밑작업이 돼가는 것을 지켜봐왔고, ‘세대론’으로서 접근을 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내 분야는 영화인만큼, 몇 년 전부터 한국영화에 있어 또렷하게 드러나는 386세대의 어떤 특성(나는 386 남성 감독들이 ‘아버지’를 필사적으로 찾아다니고 있다고 보고, 그것의 정점이 <괴물>이었다고 본다.)을 흥미롭게 봐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로서, 내가, 그리고 내 주변 (여자)친구들이 대부분 88만원 세대로 이미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생년과 나이상 나는 소위 ‘X세대’에 속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저자들의 세대 구분은 남성들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만큼, 나이로는 X세대인 내가 실질적으로 88만원 세대에 속하면서도 88만원 세대와 또 다른 특징을 드러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 터이다. 원래 세대론이라는 건 매우 ‘일반적’인 큰 틀의 얘기인지라 구체적인 개인으로 들어가면 제각각 얘기들이 달라지고, 꼭 나이만으로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읽는 사람들이 이 점을 기억하고 읽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세대론 이야기로 논점이 전개되다 보면 읽는 사람도 어느 순간 세대론에 내 상황을 끼워맞추며 읽게 되는 단점이 있다. 이건 저자들의 잘못은 아니고, 읽는 사람만의 잘못도 아니다. 하여간에.

다양한 반응들을 체크하는 게 꽤 재미있지만, 그 와중에도 참 복잡한 감정들과 복잡한 생각들이 든다. 예를 들어 “경쟁에 유리하도록 나의 스펙을 높이겠다.”는 결론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죄수의 딜레마라는 상황은 충분히 파악하고 있지만 뇌관을 건드리는 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도 얼마든지 납득할 만한, 솔직한 반응이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데 남, 내 세대 전체, 대한민국, 세계평화를 상상하는 건 무책임하게 오지랖만 넓은 것일 수도... 있다. 책에 대한 까칠한 몇몇 반응을 봤는데, 난 그 반응들이, 내가 가끔 소위 ‘리얼리즘 영화’에다 대고 내놓는 반응과 비슷한 심리가 아닐까, 란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세상 살기 퍽퍽한데 아무렴 그걸 모를까 봐 영화로 굳이 세상 이렇다고 보여주나, 싶은. 많은 이들이 모범답안처럼 ‘우리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들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글쎄... 우리가 은밀히 원하는 건, 단 한 시간 반이라도 지금 현실의 퍽퍽함을 잊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마취제인 경우가 많다. 뭔가 희망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면, 오히려 내 현실에 대한 정확한 (남의) 분석은, 아픈 가시라서 오히려 버럭 화를 내게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까칠한 반응들이, 가슴이 좀 아프다. (하지만, 나이 서른이 넘고도 그렇게 찡찡대는 거라면 똥구멍으로 처먹은 자신의 나이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그 책에서 주목한 건... 글쓴이가 매우 심상한 듯 슬쩍 던지고 지나가는, ‘스타벅스 대신 20대 사장이 경영하는 구멍가게 커피숍을 가는 것’이, 의외로 강력한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대기업과 공기업에 보란 듯이 취직해 연봉 몇 천을 받고말고 하는 건 소수이고, 우리 부모님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 그러니까 대학 나와서 동네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것(품목이 식료품이 됐건, 고급 이탈리아 요리가 됐건)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대안으로 가슴에 묻어두다가 구멍가게들 작살나는 것보고 그마저도 꿈꿀 수 없게 된 것이긴 하다. 우석훈 박사는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에서 동네 미용실의 숫자의 변화의 추이가 FTA의 영향 결과를 나타낼 것이라 했는데, 당장 그 책을 읽을 때엔 어머나? 했지만 지금에서야 이해가 가는 건, 동네 미용실이라는 게 결국 자기 가게를 가진 자영업자의 한 예라는 사실이다. 시내에 나가면 열 걸음마다 스타벅스, 커피빈, 파스구치 등의 대형 체인망이 있고, 특히 강남대로의 경우 스타벅스가 ‘지들끼리 경쟁하느라 장사 안 될 것 같다’ 싶을 정도로 지천에 깔려있는데, 이런 거 말고 커피맛으로 승부를 내버리는, 자기 이름 내세운 동네 작은 커피숍들의 존재, 나아가 대형마트가 아니라 재래시장에서 그간의 신용으로 장사를 하는 작은 가게의 아줌마, 아저씨들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사실이다.

이건 의외로 소비 패턴의 꽤 큰 변화를 함축하고 있고, 그리 쉽지도 않은 일이다. 우리의 소비 패턴은, 종목이 뭐가 됐든 대형 체인망으로 수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맥도널드, 버거킹, 롯데리아, 시즐러, 베니건스, 세븐스프링스, 스파게티아, 소렌토, 별다방, 콩다방, 투썸플레이스, 뚤레주르, 크라운베이커리, 이마트, 카르푸, 피자헛, 도미노 피자, 이화주막, 그리고 각종 편의점들. 하다못해 1,500원짜리 토스트를 먹을 때에도 이름 없는 집보다는 이삭토스트로 가서 줄을 서는 게 대부분의 심리이다. 이건, 편리함 때문이다. 우리가 대형 체인망을 이용하는 건, 어디를 가나 내가 예상한 바로 그 수준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서비스를 받으면 기분이 물론 좋지만, 예상 이하의 서비스로 화가 나는 상황을 막고자 하는, 일종의 ‘모험으로 인한 발견보다는 그냥 평범한 수준의 안전’을 선택하는 셈이다. 동네 작은 밥집은, 모르는 동네의 모르는 가게의 경우 대실패도 각오를 해야 하지만, 예컨대 패스트푸드 체인망이라면 그런 도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 뛰어나진 않더라도 내가 예상한 딱 그만큼의 서비스를 받을 테니까.

그런데 특히 그 대형 체인망들이 여성 고객을 주요 타겟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곳들이 일종의 ‘익명성’을 통한 자유로움을 보장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대형 매장이 보장해 주는 게 그런 익명성인데, 특히 사회에 진출해 자기가 번 돈을 자기를 위해 쓰기 시작한 거의 첫 세대인 지금의 젊은 여성들(높게 잡아봤자 30대 중반이다)에게는, 그렇게 여성들에게 특히 배려를 해주면서 익명성을 보장해줄, 그리고 그 익명성을 통해 남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내 소비를 즐길 수 있는 소비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소위 ‘된장녀’ 운운 소리를 듣게 되는, 그런 소비가 이루어지는 공간들은, 사실 남성 위주의 소비 공간에서 모종의 위협감이나 불편감을 느끼는 여성들이 모여들게 되는 곳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동네의 작은 가게들을 이용하는 것은, 그러므로 은근한 부지런함과 정보력, 모험심과 위험부담을 요구한다. 어느 곳이건 동네의 작은 가게나 재래시장을 이용한다는 건 한 번의 대실패에, 동선이 무척 길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소심한 현대인들로서는, 저 주인장이 내 얼굴을 기억할지 안 할지, 나름 반갑게 인사를 하며 친한 척을 해야 할지 아닐지, 그랬다가 꽤 민망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 아닐지, 걱정해야 한다. 이러느니 결국 대형 매장, 대형 체인망으로 가지, 싶게 되는 건데. 살가운 친절이 어느 순간 위협으로 변할 가능성에 막연한 공포를 느끼는 여성들, 혹은 가벼운 거리를 허용했다가 그것이 ‘flurting으로 오해될 경우’에 대한 경계를 갖고 있는 여성이라면 더욱, 그저 어딜 가도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편의점과 대형 마트와 대형 체인가게를 더 애용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 책에서 지나가듯 제시한 하나의 작은 대안은, 실은 그리 ‘작은’ 대안이 아닐 수도 있다.


아 근데 얘기가 어째 산으로 산으로 가는 듯해. 끄응.






ps. 그러고보니 책 감상문은 도대체 얼마만에 올리는 건지, 원.

ps2. 하고픈 얘기가 더 생각나면 잡생각 (2), (3)... 등으로 이어질 거예요. 사실은 디게 많았는데 쓰다가 까먹었음. =.=

독서문답  -  2007/05/18 23:25

미샤님솔밤님께서 꽤 오래 전에 트랙백을 넘겨주셨는데 죄송하게도 이제서야... ㅠ.ㅠ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바쁜 일도, 심란한 일도 제법 있었네요. 블로그 업데 빈도와 날짜가 보여주듯... (이제서야 쓰는 것에 대한 비굴한 변명!) 5년간 써온 컴퓨터가 얼마 전 사망하시는 바람에 패닉상태였다가 오늘에서야 업글 완료하고서 좀 편해졌습니다. 아직 프로그램 깔 게 남긴 했지만...

독서 좋아하시는지요?
네, 뭐, 좋아하는 편이지요.

그 이유를 물어보아도 되겠지요?
재밌으니까요.

한 달에 책을 얼마나 읽나요?
많을 땐 다섯 권, 보통은 2, 3권 수준.

주로 읽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소설이죠. 전 서사 중독자거든요.

당신은 책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다른 세계로 가는 관문.

당신은 독서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모험이지요.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게 되는.

한국의 독서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남녀노소 불문하고 참 피곤하게 살아야 하는 곳이니까요. 노동강도 높고 야근이 당연하고, 중학생 때부터 입시와 직업을 고민해야 하는 나라에서 책은 부담스럽고 피곤한 취미가 될 수밖에 없죠. 안타깝게 생각하고, 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책을 하나만 추천하시죠?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그 책을 추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평범한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정말로 믿었고, 그 믿음에 의해 정말로 계급없이, 직업이 뭐건 자신의 품위와 자긍심을 발견하고 이를 당당히 드러낼 수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평등하게 연대했던, 믿기 어려운 시대가 짧으나마 정말로 존재했고,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죠.

만화책도 책이라 여기시나요?
형태론 책이고, 종류별로는 '예술'이겠지요?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아니면 비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압도적으로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

판타지와 무협지는 "소비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르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장르를 그토록 소모적으로 유통시키는 자들(여기엔 작가와 독자가 포함이 될수도, 안 될수도 있습니다만)의 문제가 아닐까요. 소위 '순문학'이라 깝쭉대는 책들 군에서도 쓰레기는 넘쳐나고, 판타지와 무협지뿐 아니라 추리, 호러, SF 등등을 포함한 소위 하위장르에서도 걸작은 넘쳐납니다. 셰익스피어도 당대는 베스트셀러 판타지 작가였어요!

당신은 한 번이라도 책의 작가가 되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직은.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떻던가요?
아직은 모르겠네요. 만약 앞으로 된다면, 서점에서 몰래 숨어 그 책을 사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하루종일 구경할 거 같아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좋아한다기보단, 관심있는 작가들은 많죠. 원체 게을러서 관심있는 작가들 책도 다 못 읽으니까요. 커트 보네것, 마크 트웨인, 존 어빙, 스티븐 킹, 조지 오웰, E.M. 포스터, 보르헤스, ... 최근엔 조너선 캐럴도 추가됐네요. 이밖에도 당장 생각 안 나지만 무지 많아요. 전 누구한테 반하는 데에 선수거든요.

좋아하는 작가에게 한 말씀 하시죠?
고맙습니다.

이제 이 문답의 바톤을 넘기실 분들을 선택하세요. 5명 이상, 단 "아무나"는 안됩니다.

박노인, 다크맨님, ozzyz님, sabbath님, sang님.

신간 메모  -  2007/03/25 14:08

<평전 분야>

존 리드 평전
로버트 A. 로젠스톤 | 정병선 옮김 |아고라 | 2007.3

[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그 존 리드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7.3
마르케스 자서전

셰익스피어, 그리고 그가 남긴 모든 것
스탠리 웰스 | 이종인 옮김 | 이끌리오
알라딘 판매가 43,200원, 조낸 비싸구만.

다이앤 아버스
퍼스티라 보스워스 | 김현경 옮김 | 세미콜론
허걱 이 책이! 니콜 키드먼 주연의 아버스에 관한 영화의 원작이자 아버스 평전의 지존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와 사상
고범서 | 대화문화아카데미

카뮈, 지상의 인간
허버트 R. 로트먼 | 한기찬 옮김 | 한길사
새삼 카뮈를 좋아했던 그녀가 떠오른다

내 안의 빨강머리 앤
루시 M. 몽고메리 | 황의웅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원제는 이게 아닐 성 싶은데... 빨강머리 앤 팬들은 꼼짝없이 낚일 수밖에

미완의 시대
에릭 홉스봄 | 이희재 옮김 | 민음사

가고싶은 고향을 내 발로 걸어 못가고
안이정선 | 아름다운사람들
위안부 조윤옥 할머니 일대기

스탈린, 강철 권력
로버트 서비스 | 윤길순 옮김 | 교양인
지피지기

인간 루쉰
린시엔즈 | 김진공 옮김 | 사회평론
2권 세트, 루쉰이다!

본회퍼의 삶과 신학
마크 디바인 | 정은영 옮김 | 한스컨텐츠
나치 치하의 독일로 돌아가 저항운동을 한 정통 복음주의 신학자

스파르타쿠스
M.J.트로우 | 진성록 옮김 | 부글북스
신화 속에 재구성된 스파르타쿠스

신념과 비전의 정치가 글래드스턴
김기순 | 한울
아일랜드 자치 법안의 아버지




<문학 분야>

시핑 뉴스
애니 프루 | 민승남 옮김 | Media2.0
이게 애니 프루였구나

보이지 않는 도시
이탈로 칼비노 | 이현경 옮김 | 민음사
칼비노다 칼비노!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 | 김종건 옮김 | 생각의나무
언젠가 한번은 읽어야 한다만

티가나
가이 가브리엘 케이 | 이수경 옮김 | 황금가지
캐나다 작가의 판타지, 정치적 은유를 담은

평범한 커플
이자벨 미니에르 |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페피타 히메네스
후안 발레라 | 박종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19세기 스페인 작가의 소설이라는데

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 정영목 옮김 | 해냄

천일일화
프랑수아 페티 드 라 크루아 | 강주헌, 유정애 옮김 | 서교출판사
사랑을 믿지 않는 공주를 설득하기 위한 책이라던데

로큰롤 보이즈
미카엘 니에미 |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줄거리도 맘에 들고 출판사 이름도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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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매콜 스미스 | 미인의 가면  -  2006/12/30 04:14

알렉산더 매콜 스미스,
미인의 가면
이나경 옮김, 북앳북스, 2006

무려 2년만에야 출간된,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 시리즈의 3권. 2권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넘어왔기 때문에 단번에 읽을 수 있었다. 이제 음마 라모츠웨는 정부 관료 - 이자 대추장의 친척 - 가 찾아와서 일을 의뢰하는 유명한 탐정이 되었다. 조수 탐정 마쿠치 부인은 2권에서 유망주로서의 기대를 품게 하더니 3권에 오면 음마 라모츠웨와는 또다른 능력으로 라모츠웨만큼이나 카리스마를 가진 또다른 여자주인공이 된다. 오죽하면, 이 세번째 권이 취하고 있는 제목은 음마 라모츠웨가 아니라 마쿠치 부인이 해결한 사건이다. 게다가 그녀는 매 권마다 엄청난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데, 1권에서는 그저 비서에 불과했다면, 2권에서 조수 탐정으로서 초짜 탐정일을 시작하고, 3권에서는 유능한 중간관리자로 변신을 한다. 마테코니 씨가 잘 다루지 못하던 날라리 수습공 둘을 어떤 방법으로인지는 몰라도 꽉 잡고 열심히 일하는 애들로 바꿔놓다니. 게다가 마테코니 씨가 직접 맡아서 할 때보다 정비소 운영도 더 잘 되지 않는가. 그러면서 탐정으로서도 일취월장한 실력을 보여준다.

1권과 2권에서 대형사건 하나가 중심 줄기를 이루고 다른 소소한 사건들이 가지를 이루었던 것과 달리, 3권에서는 중심을 잡아주는 두꺼운 줄기 사건이 없다. 각각 음마 라모츠웨가 맡은 '독살미수 의혹'과 마쿠치 부인이 맡은 '미인대회 후보 뒷조사'를 꼽는다고 해도, 딱히 이 두 사건이 중심 줄기를 이룬다고 보긴 어려우며, 이 두 사건만큼은 아니어도 야생소년의 미스터리는 가지 사건으로 보기엔 좀 굵다. 게다가 이 에피소드는 부분과 부분이 앞과 뒤에 너무 벌어져 있고. 게다가 어쩌면 4권에 가서는 주인공이 역전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워낙에 마쿠치 부인의 활약이 두드러지는지라 책이 좀 많이 산만하다.

그런데 내가 재미있었던 건, 오히려 3권에서의 중심은 의뢰받은 사건이 아니라, 1권과 2권에서는 부수적인 서브 플롯으로만 기능했던, 음마 라모츠웨와 마테코니 씨 사이의 관계의 진행이라는 점이다. 마테코니 씨가 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어쩌면 이 시리즈가 영국에서 그토록 사랑받은 이유는, 뭔가 심각한 게 나올 듯 나올 듯하다가 안 나와버리는 데에서 느껴지는 허탈감 그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난 정말로 마테코니 씨한테 무슨 숨겨진 비밀(...)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로 우울증이었다니. 아아, 이 책의 앞 두 권을 읽고도 또 속다니, 하며 허탈감을 느꼈다. (2권에서 가정부가 범행을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잡혀들어갔을 때 얼마나 허탈했는지를 그새 잊어먹었단 말이냐!) 그런데 그 허탈감이, 싫지가 않다. 뭐랄까, 어쩌면 내가 너무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것들에 익숙해져 있지 않는가, 내가 너무 어둡고 부정적인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오히려 들 정도였다.

그런데 마테코니 씨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설정이 중요한 이유, 그리고 이들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오히려 3권의 중심이라고 한 진짜 이유는, 두 사람의 관계가 연애의 권태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음마 라모츠웨와 마테코니 씨의 연애를 중심으로 1권부터 다시 생각해 보면, 이들의 관계에 대한 묘사는 연애의 일반적인 과정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1권 대쉬 및 커플주아 탄생, 2권 연애 초기의 닭살 염장기, 3권 중고 커플의 권태기. 마테코니 씨의 우울증을 핑계로 묘사되는 음마 라모츠웨와 마테코니 씨 사이의 관계에서 두 사람의 행동을 자세히 보라. 매일 같이 먹던 저녁식사도 각자 해결해, 만나는 횟수도 줄어, 뭔 말을 해도 무덤덤하고 무관심해, 전화를 해도 시큰둥해, 애정표현도 별로 없어, 출장갔다가 돌아와서도 자기 볼일 다 본 다음에야 만나러 가... 이 커플, 정말 결혼을 하긴 하게 되는 걸까? 막 연애 초기라 그토록 열정적이고 호들갑스럽게 애정표현이 연발되던 2권과 정말 비교된다.

권태기를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이들의 관계가 유지되느냐 깨지느냐가 귀로에 설 텐데, 맨 마지막, 자신의 '다른 일'을 찾으며 조금씩 우울증에서 헤어나오고 있는 마테코니 씨, 그리고 그를 억지로 끌어 산에 함께 올라 서로 미소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면, 이들은 어쨌건 첫번째 위기는 무사히 넘긴 것같다. 그러나 서로 대판 싸우고 토라졌다가 화해한 거라면 몰라도, 이런 식의 위기는 두번째 위기를 불러온다는 게, 별로 많지도 않은 연애 경험상의 내 결론이다. 아니, 이들이 오히려 '비 온 뒤 땅 굳어진다'는 속담처럼 더욱 내밀하고 가까워진다면, 나는 오히려 사랑에 희망을 가질 테다. (... 연애 무능력자 티는 다 내고 있다;;)

3권이 2년만에 나왔으니 4권은 2008년에야 나오려나? 과연 마쿠치 부인의 능력은 어디까지일지, 그 수습공들은 어찌 될지, 음마 라모츠웨와 마테코니 씨는 어떻게 될지, 그리고 이들이 2권에서 입양해서 키우기 시작한 남매는 또 어찌될지 참 궁금한데, 도대체 4권이 언제 나올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이래서 시리즈물은 완결된 다음에 한꺼번에 사서 한번에 읽어치워야 하는데, 4, 5권 나오길 응원하겠다고 덥썩 1~3권을 사버렸으니, 독자로서는 사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서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구도다. 부디 북앳북스에서 4, 5권을 마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내 주시길 바란다.

 

ps. 근데... 2권에선 마테코니 씨가 상의없이 아이들을 데려오더니, 3권에선 음마 라모츠웨가 상의없이 마테코니 씨 정비소로 사무실을 들여가고, 마쿠치 부인을 승진시킨다.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이게 문제가 되진 않겠지. 작가의 '실수'일까, 아니면 그게 아프리카 식인 걸까?

알렉산더 매콜 스미스 | 기린의 눈물  -  2006/12/30 01:22

알렉산더 매콜 스미스,
기린의 눈물
이나경 옮김, 북앳북스, 2004

음마 라모츠웨가 활약하는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 시리즈의 두번째 권. 음마 라모츠웨의 어린 시절과 20대 시절, 그리고 탐정사무소를 열게 된 과정과 초짜 탐정으로서 그녀가 자리를 잡아가는 게 1권의 내용이었다면, 2권인 [기린의 눈물]은 그녀가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며 '보츠와나에서 명성높은 탐정'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비서인 마쿠치 부인이 '조수 탐정'으로 승진해 나름의 활약을 펼치기도 한다. 한편 1권 말미에서 라모츠웨가 마테코니 씨의 두번째 청혼을 받아들인 뒤, 여기에서는 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교감과 잔잔한 '일상의 데이트'가 그려지기도 한다. 2권에서 중심이 되는 대형사건은 10년 전 실종된, 커틴 부인의 아들의 사연을 조사하는 일이다.

1의 팬들 중 일부가 2권에 대해 다소 산만하다고 평했던 반면, 나는 2권이 더 좋았다. 아마도 1에 비해 이 시리즈의 스타일과 인물들에 익숙해져서이기도 하겠지만, 사건을 펼치고 닫고 토막내서 배치하고, 캐릭터를 드러내고 묘사하는 방식이 전 권에 비해 훨씬 더 유려하고 여유로워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음마 라모츠웨가 얼마나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성인지를 강조하는 방식이 1서 독자들에게 계속 직설적으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방식이었다면, 2에서는 에피소드를 통해, 그리고 좀더 우회적인 방식의 내면 묘사를 통해 좀더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아마도 낯선 주인공을 어떻게든 관객에게 어필시켜야 하는 동시에 사건을 끌어가야 하는 부담감이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는 음마 라모츠웨의 특성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고 해석하는 시각도 등장하는데, 나름 악당이라면 악당이랄 수 있는 이 인물은 사건의 '플롯'에 긴장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음마 라모츠웨라는 '캐릭터 내부'에, 그리고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바라보는 독자의 시선 '사이'에 긴장을 일으킨다. 바로 이런 기능이, 이 인물이 별다른 악당짓도 못해보고(!!) 그만 들통나서 수감되는 바람에 좀 심심함을 안겨줌에도 불구하고, 소위 '코지 미스터리' 중에서도 캐릭터 중심인 이 시리즈에서는 더없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1권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이었던 마쿠치 부인과 마테코니 씨의 캐릭터 비중이 늘어났는데, 워낙 라모츠웨가 중심을 잘 잡고있다 보니 자연스럽고 여유롭게 확장을 해간다.

1권에서 내가 다소 수상쩍어하며 물음표를 던지고 있었던 몇몇 지점들이 2권에서는 어느 정도 풀린 듯한 기분. 작가와 음마가 분리돼 있는 듯 느꼈던 1권과 달리, 2권은 같은 전지적 작가 시점인데도 훨씬 더 음마에게 밀착되어 있고 좀더 음마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유럽 백인이 아프리카 흑인 주인공을 내세워서 착한 척하기보다는, 정말로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백인 작가의 애정, 혹은 정말 아프리카의 정신을 가진 화자처럼 느껴진다. 2권 덕에 3권을 훨씬 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라모츠웨에게 풍덩 빠지는 대신, 서서히 물들면서 애정을 갖는 계기가 되어 준 권이다.

뉴욕타임즈 북리뷰 중 눈이 가는 책  -  2006/12/25 02:40

Leonard Wolfe: A Biography
by Victoria Glendinning / reviewed by Claire Messud, updated on Dec. 9

페미니스트들에게 종종 '이상적인 남편'으로 거론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인 리너드 울프에 대한 평전. 자살한 여성 작가/예술가들의 남편은 종종 페미니스트들의 공격 표적이 되었고 그 남편들이 제아무리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해도 그 공격은 대부분은 유효했지만, 리너드 울프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이다. 이것은 그가 버지니아를 열심히 뒷바라지했고, 버지니아 역시 유서에서조차 그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미권 고전의 기반이 유난히 약한 한국에서 버지니아 울프 역시 작품보다 작가가 더 관심을 받는 케이스고, 작품이 읽히기보다는 그녀의 우울증과 자살이 더 많이 언급되는 경우이기 때문에 이 책이 만약 번역출간된다면 꽤 관심을 받으며 회자될 듯. 그러나 역시, "읽고 싶은데 선뜻 손은 안 가는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버지니아 울프 외에도 당시 블룸즈베리 멤버들의 훌륭한 서포터였던 그의 활약상이 한국 독자들에겐 낯설기 그지 없을 터.


The Architecture of Happiness
by Alain de Botton / reviewed by Jim Holt, updated on Dec. 9

알랭 드 보통의 신작. "고전적인 질서"라고 하는, 기존의 '건축의 미학'이 시대적 변화와 기술의 발달, 새로운 소재의 발견 등을 통해 변화했는데, 이러한 변화를 아우르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즉, 건물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 혹은, 당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에 따라 건축가들이 지은 건물에서, 표현되는 가장 궁극적인 추상적 가치는 무엇인가 - 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이 제시한 답은 '행복'이라고, 리뷰어 짐 홀트는 쓰고 있다. 국내에서 알랭 드 보통은 인기있는 작가있고, 유명한 건물들의 예를 들어 예의 그 유머러스하고 철학적인 - 젠체하는? - 문체로 행복론을 펼친다면 분명 호기심을 일으킬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이 인용하는 건물들의 도판이 삽입되면 더욱 훌륭할 것이다.


The Audacity of Hope
by Barack Obama / reviewed by Gary Hart, updated on Dec. 24

미국 일리노이주 출신의 주니어 상원의원인 '바락 오바마'라는, 우리에게 낯선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이 사람의 책이 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이유에는, 분명 현재 공화당 정치에 대한 대안을 요구하는 미국 내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람이 현재 그토록 '뜨고있는' 이유에는, 이 사람의 복잡하게 얽힌 혈통과 문화적 배경이라는 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소수인종 출신으로 보수적인 미국 정계에서 젊은 나이에 일정한 성공을 거둔 사람인 만큼, 롤 모델로서의 기대감이 반영되어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잘 생겼다.) 어머니는 캔사스주 출신이지만 아버지는 케냐 사람, 의붓아버지는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유년기 중 일부를 완전히 이질적인 인도네시아와 하와이에서 자랐다. 빈민구제, 소수인종 지원 등에 있어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그는 당연히 민주당 소속으로, 사회복지 제도의 민간화를 반대하며 클린턴 부부의 정치적 후계자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듯. 리뷰어 게리 하트가 리뷰기사에 붙인 제목이 이 책을 한 마디로 가장 잘 표현해 줄 것이다 - American Idol. 현재 뉴욕타임즈 하드커퍼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1위로 올라있다. 한국에선 그닥 출판 메리트가 없어보이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해둘 필요는 있을 듯하다. 아마존에 간단한 인터뷰가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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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매콜 스미스 |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  -  2006/12/24 03:51

"키보다는 허리둘레에 축복을 받은" 보츠와나 공화국 최초의 여자탐정, 음마 라모츠웨의 이야기. 현재 영국에서 총 5권이 나왔다는 시리즈 중 첫째 권으로, 한국에서는 앞엣 두 권이 2004년 6월에, 3권이 올해 6월에 나온 상태다. 항간에는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던 영국에서와 달리 판매율이 너무 부진해서 두 권으로 시리즈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출판사인 북앳북스에서 최근 5권까지 완간을 약속했다고 한다. 다만 3권이 무려 2년만에 나온 걸로 봐서 나머지 권들이 언제 나올지가 문제겠다. 이왕 나온 거니 5권까지 다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서, 책의 존재는 첫 권이 나올 때 알았지만 최근에야 세 권을 한꺼번에 질렀다.

알렉산더 매컬 스미스,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
이나경 옮김, 북앳북스, 2004

이 책은 라모츠웨의 아버지 오베드, 그녀의 어린 시절과 20살 때의 실패한 결혼, 탐정사무소를 열게 되는 과정 등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물론 탐정 사무실을 연 뒤 그녀가 맡게 된 소소한 사건들도 등장하고, 책 전체에 중심을 잡아주는 중대한 사건, 즉 부적을 위한 아동 유괴/살해사건이 등장하지만, 대체로는 초짜탐정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다. 거기에 미스테리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며 스릴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평화로운 조국 보츠와나를 아끼며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이해하고 아끼는 라모츠웨의 캐릭터에 집중한다. 여유롭고, 자신감 있으며, 삶을 낙관하고 긍정하고, 다른 이들의 불행이나 고민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일단 하기로 한 일에 성실하고 책임을 지며, 부드럽게 웃을 줄 아는 라모츠웨. 미스터리 중에서도 이런 서브장르를 이 장르 팬들은 코지물(Cozy Mystery)이라고 하던가. 코지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라모츠웨 시리즈가 꼽히는 건 아마 이 책이 배경으로 하는 곳이 아프리카의 보츠와나 공화국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칼리하리 사막이 인접해 있고, 다이아몬드 생산으로 경제가 안정돼 있고 일찌감치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었으며, 서구식 사고방식과 문화가 소위 '신식방식'이라 하여 널리 퍼지며 기존 전통관념과 충돌하며 공존한다. 영국에서 그토록 인기를 모은 것은, 아마도 제국주의 시절의 향수 탓이 아닐까, 짐작한다. 경제적 안정을 이루고 있는 탓에 영국에 칼을 들이댈 리 없으니 더욱. 하지만 한국에서 라모츠웨 여사와 사랑에 빠진 독자들은? 솔직히 사람들의 그 환성어린 탄사에 큰 기대를 했는데 기대에 못 미쳤다. 2, 3권까지 읽고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1권만으로는, 라모츠웨 여사에게 남들이 말하듯 그렇게 확 빠지지는 못하였다.

내가 기대한 것은, 겉으로 보기엔 빈틈많고 호들갑스러우며 수다스럽고 아주 웃기는 유머를 구사하는 '아줌마'인 듯하지만 필요할 때엔 속에 감추어놨던 통찰력을 반짝 빛을 냈다가 그것을 다시 저 수다쟁이 아줌마 스타일로 능숙하게 가리는 스타일의 탐정이었다. (그러니까... 취권 고수같은?). 알라딘의 마이리뷰들을 읽고 그런 탐정인 듯하여 크게 기대를 했다가 실망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건 라모츠웨가 이런 사람이 아니어서라기보다는 - 아니, 오히려 사려깊고 진중한 스타일인 걸 빼면, 겉으로 보기엔 푸근하고 평범해 보이는 '아줌마' 스타일이다 - 작가의 서술방식 탓인 것같다. 아무리 이게 코지물이라곤 해도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은 미스터리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 아니면 그 불균형이 주는 통쾌감이 사람들에게 어필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책이 내세우는 어떤 '소박함'이 매력을 주는 것일까? 하지만 그 소박함은 내게는 살짝 불편한 감을 주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백인이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또다른 전형적인 '대상화시키는 시선'처럼 느껴져서 말이다. 인간 아래로 보지 않는 대신 무조건 미화하는.

어쨌건, 1권은 오랫동안 음마 라모츠웨를 사모해왔던 엔지니어 마테코니 씨의 청혼을 라모츠웨가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난다.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갓난아기를 잃는 슬픔을 겪고 더이상 결혼이, 섹스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던 라모츠웨, 더욱이 마테코니의 청혼을 한번 거절한 전력이 있는 그녀가 두번째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 그리고 그 이후가 좀, 궁금하긴 하다. 그래서 현재 2권, [기린의 눈물]을 읽고 있는 중.

조너선 캐럴 | 웃음의 나라  -  2006/12/22 09:46


조너선 캐럴, 웃음의 나라
최내현 옮김, 북스피어, 2006

오래된 논쟁거리 몇 개를 잠깐 다시 생각해 보자.

논쟁 하나.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대체로 우리는 서사를 통해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인간과 사회와 우주의 본질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의 본질을 빌려 그 중의적이고 모호한 세계를 역시 중의적이고 모호한 방식으로 재생하려는 행위로 보기도 하고, 허구의 인물을 통해 현실의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로서 문학을 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질문을 잠깐 틀어보면, 그렇다면 소설가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러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사람? 이야깃꾼? 삶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짓말을 사용하는 사람? 여기에서 잠깐 성경으로 생각을 돌려보면, 기독교에서 이 세상은 신의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 하고, 특히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원래는 logos - 이성)이 있었고 말씀이 곧 신이며 말씀에 의해 천지가 지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설가의 행위는 또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주의 행위를 모방하고 본뜬 행위도 되지 않을까?

논쟁 둘. 본격적으로 기독교로 들어가서, 특히 기독교의 칼뱅의 예정설에 따르면 신에게 구원을 받을 인간들은 애초부터 예정되어 있으며 이들의 길 역시 신에 의해 미리 예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혹은 꼭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신년초마다 보는 사주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운명이 세세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대강의 틀거리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믿음이 우리 인식계에서, 꼭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부정되지도 않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 운명을 알고 있다면?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언제 죽는지 안다면 어떨까? 우린 삶에 적극적으로, 지금을 더욱 행복하게 향유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에 지금을 즐겨야 하는 걸까? 만약 내가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임을 판정받는다면, 그것은 나름 복인 걸까 더할 수 없는 불행인 걸까. 내가 점을 믿지 않고 점집에 거의 가지 않으면서도 그 언젠가 보았던 점괘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기억하며 되새기고 의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땐 아주 밝고 달달한 판타지 계열인 줄 알았다. 비교적 초반부에서 이 제목이 소설 속에 주인공이 좋아하던 책 이름이라는 걸 알았을 땐 그런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워낙에 첫인상이 그랬고 그게 강했던... 게다가, 어릴 적 좋아하던 동화작가를 찾아간다니, 이건 사실 굉장히 문학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설정 아닌가. 하지만 결론적으로 딱 집어 표현하자면, 이 책은 요 몇 년 간 읽은 책들 중 H.P. 러브크래프트의 [공포의 계곡] 이후 처음으로 마지막 문장에서 소름끼치는 '악!'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책이다. 물론 그 이유는, 뜬금없이 이 글을 시작한 저 논쟁거리들과 관련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이제껏 소설이라는 것을, 작가가 제시해 주는 그 세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세계를 즐길 줄만 알았지 작가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스티븐 킹이니 존 어빙이니 제인 오스틴이니 브론테 자매니 빅토르 위고니 하는 작가의 이름을 들먹일 때조차도, 그들을 그저 나를 재미있게 해주는 말하자면 이야기 서비스 제공자라 느끼며 그저 즐거이 소비를 하거나, 상상력이 혹은 이야기를 만들고 구성하는 능력이 풍부하다며 감탄하거나, 작품 속에 드러난 그의 성정과 성격이 참 어떻다거나 혹은 그 자신의 인생, 혹은 당시 사회적 배경이 작가에게 어떤어떤 영향을 주었나 보다, 식으로만 생각했지, 그 소설을 창조주의 창조행위와 연결시켜 본 적은 없다. 오히려 나는, 자신의 목표와 필요를 위해 캐릭터를 말도 안 되게 굴리거나 작가의 억지를 캐릭터에 투영시키는 그런 작가들을 '이야기 구성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인물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증오했다. 나는 그들을 한번도 내 세계 위에 군림하는 어떤 특별한 존재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은, 소설가란 그럴 수도 있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초반부는 비교적 나른한 분위기로 흘러간다. 삶에 별로 재미가 없는 고등학교 영어교사 토머스 애비가, 따분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휴가를 받기로 하고, 그동안 자기가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동화작가인 마셜 프랜스의 자서전이나 한번 써볼까 궁리한다. 우연히 서점에서 자기만큼이나 그 작가를 좋아하던 여자인 색스니 가너를 만나고, 그걸 핑계삼아 이 소설의 원천적인 존재로 설정된 마셜 프랜스가 소개되고, 둘은 어찌어찌 엮어지고...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소설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건, 이들이 마셜 프랜스의 고향인 게일런으로 향하는 2부에서부터다.

2부에서도, 뭐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색스니의 조사 결과에 근거해 마셜 프랜스가 젊은 시절 잠깐 일했다는 장의사가 들려주는 얘기도, 이들이 도착한 촌구석 마을 게일런에서의 첫 대면도, 그저 마셜 프랜스가 좀 괴짜였고, 게일런은 어쩔 수 없이 시골이구나, 정도를 전해줄 뿐이다. 마셜 프랜스가 괴짜인 거야 소설 처음부터 누누히 강조되던 거고. (마셜 프랜스는 평생 게일런에서만 살았고, 그 딸은 전기작가들을 증오하며 편집자에게도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마셜 프랜스의 딸인 안나 프랜스를 제외하고는 마을 사람들도 촌스럽고 수선스럽고, 도시내기인 우리들이 '시골 사람들'이라 할 때 떠올리는 그런 종류의 낯선 느낌만 던져줄 뿐이다. 책 뒷표지에서는 '위대한 작가의 딸을 만난 두 사람은 흥분과 기대감에 부풀어 마을에 머물지만, 하나둘씩 기묘하고 이상한 일들과 맞닥뜨리게 되는데...'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2부가 다 지나도록 뭐 기묘하고 이상한 사건이 어딨지, 싶다. 2부 끝머리에 가서야 으음...? 하게 되는 정도. 그럼에도, 책이 지루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굉장히 가볍고 경쾌한 필치로 토머스 애비와 색스니 가너의 모험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3부에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사건들이 펼쳐진다. 그러다 보면 책장 넘기는 속도가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빨라지는데, 그러다보면 1부와 2부의 그 일상적이고 평화로우며 별달라 보이지 않았던 설정들, 그 안에서 일어났던 작은 언급들이 실은 별다른 것, 게일런의 비밀과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것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역시나 도시내기들이 시골마을에 대해 갖는 편견을 박살내는 것. 하나둘 빠르게 폭로되는 게일런의 비밀은, 대단히 독창적이고 기발하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대단히 문학적인 물음들과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져주기 때문에 충격적이다. 이 작가는 이런 판타지스러운 설정, 그럼에도 '어릴 적 내 세계를 지배한 내 영웅의 과거를 짚어간다'는 지극히 미국문학 내의 전통적 행위를 통해 지금 창조주를 얘기하고 있잖아. 해서 내 눈과 손가락은 빠르게 책장을 넘기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계속 분주했다.

소설의 엔딩 장면은 대단히 비주얼하면서도 인상깊다. 마셜 프랜스가 좋아했던 기차역을 그런 식으로 쓰다니! 영화로 만든다면 엄청난 스펙터클의 장면이 될 터이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기차역으로 몰려가고, 축제를 벌이고, 불꽃이 터진다. 하지만 정말로 헉!하는 느낌을 준 건 이 장면이 아니라 엔딩 뒤에 붙은 에필로그, 말그대로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생각들이, 그 맨 마지막 문장을 통해 머릿속에서 불꽃놀이를 하듯 연속적으로 터지며,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계속 머릿속에 폭죽을 울려대는 느낌. 그럼에도 어딘가 참 슬픈 느낌. 그런 것들. 사실 우리의 주인공 토머스 애비는 어딘가 부족하고 찌질하고 애처로운 면을 갖고 있어서(소설 처음부터, 사회성 제로에 여자엔 젬병이란 사실이 드러나고, 유명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존재감이 묽게 희석된 존재로 설정돼 있다.), 그런 인간이 겪은 충격적인 사건과 모험, 상실을 통해 결국 아버지의 소환으로 가는 것은, 몰릴 대로 몰릴 인간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귀환으로도 느껴진다. 사실 유명인인 친부가 아닌 마셜 프랜스야말로 토머스 애비에겐 정신적인 아버지였을 것이다. 결국 그 아버지를 떠나, 오래 전 죽은 아버지의 손에 안착하는 것. 어쩌면, 먼 곳을 부유하던 영혼이 집, 자기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혹은 운명으로 지워진 자기 인생의 짐을 수긍하는 것.

그러고보면 토머스 애비의 취미와 색스니의 취미(이자 생계수단)은 참 단적인 상징이다. 다른 사람들이 토머스의 존재를 지운 채 계속 불러대는 아버지 때문에 고통받는(소위 '유명인사 자녀 컴플렉스) 토머스는, 아버지의 오라가 아닌 바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지만, 그에게 확고한 자아라는 것이 있을 리가. 그가 마셜 프랜스의 전기작가로 선택되는 것도 결국은 그런, '비어있는' 에고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이가 천착하는 수집 대상은 마스크이다. 그는 말하자면, 아버지의 오라 위에 자기 자신의 얼굴을 한 마스크를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반면 남자친구의 집필에 헬퍼로서, 배타와 배제의 대상이 되는 색스니, 그러나 말하자면 신의 인간 창조에 '생령'의 역할을 한 그 색스니는 인형을 창조해내는 작은 창조주이다. 물론 소설의 엔딩에서 그녀가 맞게 되는 일은, 아마도 바로 그 이유 - 사람이 아닌, 인형의 창조주 - 이기 때문이겠지만.

그리하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 책을 어떤 장르로 구분하는지 모르겠지만, 내멋대로의 기준을 적용시켜도 좋다고 한다면, 난 이 책을 결국 공포소설로 정의할 것같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밀란 쿤데라 | 농담  -  2006/12/06 01:14


밀란 쿤데라, 농담
방미경 역, 민음사, 1999

밀란 쿤데라에 대해 내가 가지고있던 뿌리깊은 오해와 편견은, 그러니까 소련 해체 이후 그가 마치 '사회주의의 실패'의 증인인양 내세워졌던 대한민국의 후진 정치적 환경에서 그렇게 무식하게 후진 개념을 갖고 살았던 데에서 비롯했다. 실제 정치적 이념이 어떻건, 소련에 저항하고 봄 기운을 탄 동구권에서 소위 반체제 인사 - 반 스탈린 - 라 불리었던 사람들은 모두 한두릅으로 "콩사탕은 실패했어요"의 증인인 양 내세워졌던 슬픈 코미디. 사회주의자이면서 스탈린과 소련을 비판하는 것이 상상 불가능한 대한민국의 그 무지막지한 '콩사탕 아니면 우리 편' 구도에서, 그게 코미디인 줄 모른 채 역시나 무식했던 나는 그 주제에 또 '손바닥 뒤집듯 입장 바꾸어서 어제 동지라 부르던 사람을 적극적으로 욕하고 다니는 이들은 경박하다'고 싫어하는 경향 탓에, 쿤데라도 솔제니친도 별로 안 좋아했다. 이들이 실제 지향과 상관없이 그렇게 '선전됐'고 내가 오해했다는 걸, 또 그 오해 역시 뿌리깊은 무지에서 비롯했다는 걸 명확히 깨달은 건, 부끄럽게도 요 며칠간 이 책을 읽고나서다.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은 스탈린을 비판했다고 조지오웰도 반공작가로 둔갑시킨 나라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밀란 쿤데라의 가장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있어보이는 척하기 딱 좋은 제목! (내가 또 이런 거에 거부감이 있다.) 밀란 쿤데라가 유행한지 언제인제 이제사 첫 만남인 이유는 그래서다.

총 7장에 걸쳐, 챕터마다 1인칭 화자가 변하는 이 소설은, 고향 모라비아를 오랜만에 방문한 루드빅이 중심이 되어 그가 벌이는 복수극과, 복수의 이유가 된 젊은 날의 사건에 대한 회상이 주를 이룬다. 챕터마다 변하는 화자 때문에, 루드빅의 입장에서 단 한 줄로 표현된 동작이 예컨대 야로슬라브의 입장에선 큰 의미를 가진 상징적 사건이 되어 수 장에 걸쳐 묘사되기도 하고, 루드빅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남아있던 추억이 다른 화자를 통해 '폭력'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서술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여러 개의 진실을 다루며 여러 시각으로 하나의 사건을 들여다보게 한다. 루드빅의 입장에서 그의 처지를 동정하다가, 정반대에 놓인 다른 사람의 생각과 처지에 또 그만큼 감정이입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곤 하면서, 결국 진실은 '해석'에 불과한 게 아닐까, 란 생각을 다시 하곤 했다. 이론영역에서는 이런 서술방식은 이른바 '근대적 양식'이라 부르는 모양인데, 이론을 잘 모르는 나는 이쯤에서 패스~ 다만, 이 설정은 대단히 매력적이어서, 나는 뒷부분을 읽다가 종종 앞으로 다시 건너가 책장을 뒤적이곤 했다.

고작 세 줄짜리 엽서가 발단이 되어 열렬히 믿고 신봉하던 삶의 중심체로부터 완전히 배제당하고, 이후 삶이 완전히 꼬여버린 씁쓸하고 비극적인 경험의 바탕에 있는 것은,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된 사회 체제다. 하지만 그 사회체제를 쿤데라가 '그러므로 자유가 억압된, 지양해야 할 체제'로 묘사했던가? 아니, 나는 오히려 그 시대의 체제를 '역사의 진보를 긍정하며 활기에 차있던' 때로 묘사를 하는 쿤데라를 보며 살짝 감명을 받았다. 추악함과 아름다움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임을 소설 전체에서 보여주고 있는 쿤데라는, 역사의 아픔의 시대를 그리면서도 추악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그려낸다. 루드빅의 복수심은 코스트카의 다소 경건하고 종교적인 시각에 의해 비판되며, 심지어 루드빅의 '농담' 역시 자유의 이름으로 무조건 옹호되지도 않는다. (코스트카의 경건함이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지점도 분명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만.) 오히려, 학생위원회 위원장이었다가 바뀐 시대에 재빨리 영합한 파벨이야말로 역겨운 속물-광대로 그려진다. 그런가 하면, 평생을 민속음악의 연구에 바친 야로슬로브의 몰락을 그려내는 시선은 연민에 가득 차 있다. 소박한 신념을 지키며 그 신념의 존중을 바랐던 헬레나는, 우스꽝스럽긴 해도 절대로 비웃을 수 없는 슬픔으로 그려진다. - 과연 맨 마지막 장, 그녀가 화장실에서 끙끙대고 있는 장면이 웃긴가? 나는 절대로 웃을 수 없었다. 루드빅 역시 그것이 헬레나의 잘못과 상관없는, 그녀에게 부과된 지나친 굴욕임을 인정한다.

책을 읽으며 내가 정말 좋아했던 건, 쿤데라의 살짝 냉소적이면서도 애정과 연민이 가득한 시선이다. 서른여섯살에 써낸 이 처녀작에서, 그는 삼십대 중반이 고통과 상처를 통해 가까스로 얻어낸, 인생에 대한 씁쓸한 통찰력을 풀어놓고 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어린아이 주제에 어른의 흉내를 내었던 체제 속 아이들이 결국 그 상처에 고착되어 나이를 먹어도 성장할 줄 모르는 비극,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복수를 한답시고 고작 남의 마누라를 꼬실 생각이나 하는 루드빅이나, 삼십대 중반이 되도록 나이브한 어리석음으로 누굴 향한지도 모르는 사랑 비스무리한 감정에 자신을 속이는 헬레나나, 앞에 나서서 주목받는 것에 모든 인생의 목표가 집중돼 있는 파벨이나, 아무리 나이를 먹은들 하는 짓은 애에 불과하다. 더한 비극은, 이들이 스스로를 어른이라 생각하는 데에 있고, 이들이 소위 '어른'으로서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들은, 책임을 질 줄 모르기 때문이다. 15년의 간극을 두고 스무 살의 인물들과 서른 다섯살의 인물들은 사는 모습은 각각 다 달라도, 유치함의 측면에서 별반 나아진 것도 차이나는 점도 없다. 루드빅이 인드라를 보며 그토록 '어린아이적 특성'에 증오를 표현하는 것의 정체는 실은 자기혐오인 것이다.

그래서 결론? 별 기대 없었다가 대박 건진 느낌. 이 인간, 인생과 인간이란 걸 쫌 아는 사람이구나, 싶은데다, 엄청 재미있게 쓰잖아! 오죽하면 작가의 이름을 '태그'로 올렸겠는가.

미야베 미유키 | 마술은 속삭인다  -  2006/12/04 01:36


미야베 미유키, 마술은 속삭인다
김소연 역, 북스피어

신문기사 인용문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과 사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던져준다. 물론 이들의 관계와 연관성은 책장을 펼칠수록 촘촘하게 직교하고 마침내 강력한 중앙으로 모이며 미스테리는 밝혀진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만약 전형적인 추리/미스테리 소설의 구조만 갖고 있었다면, 아무리 지인이 편집해낸 책이라 해도 내 관심을 그렇게 끌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사건이 주어지고 그 안에서 캐릭터들이 그저 작가의 장기판 말로만 존재하는 추리소설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추리소설계의 여왕인 애거서 크리스티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도, 하필 내가 사춘기에 접한 두어 권의 책이 딱 그랬기 때문이다. 그저 게임만 존재하는. 사건의 범인만 지목하면 끝인. 하지만 추리소설은 언제나 범죄를 다루기 마련이고, 범죄란 인간의 왜곡된 소망과 욕망, 갈등과 불안과 공포와 애증이 서로 꽈리를 틀며 얽혀있다. 내가 좋아한 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것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 '상처'라는 것은 좀더 나이가 들고서야 깨닫게 됐지만. 사건의 핵심에 다가가는 고등학생인 주인공뿐 아니라,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의 상처와 깨달음과 아픔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작가의 손길, 그리하여 범인의 지목이 아니라 주인공이 직면하게 된 상처의 뒷수습과 선택의 기로가 소설의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이루는 걸 보면서, 나는 이 책을 출판한 북스피어에서 준비하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소설에도 큰 기대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읽으면 절대 안 된다. 뒷부분을 지하철에서 읽고 있던 나는, 워낙 책에 푹 빠져 있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서 내렸고, 다시 반대편에서 타면서 또 순간적으로 책에 빠져들어 버리는 바람에 이번에는 반대 방향에서 또다시 역을 지나쳐 버렸다. 시간이 남아도는 백수인지라 두 시간이나 일찍 집에서 나서지 않았다면 분명 약속시간에 한참 늦어서 약속 상대를 당황케 했을 만한 사건이다. 이 소설은 확실히, 중반부에 접어들면 책장이 언제 넘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푹 빠지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장까지 넘기고 나면, 그제서야 아니 이 책을 내가 언제 다 읽었나, 하면서 깜짝 놀라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한번 빠른 속도로 읽고 말 책은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단순히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푸는 게임만 담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인물들의 내면을, 그 공포와 두려움과 용기와 슬픔을, 나아가 인간의 본성을, 좀더 찬찬히 음미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누가 봐도 자살인 사건들이 사실은 타살이라는 사실 뒤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사실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그 비밀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물들의 동기와 내면이기 때문이다.

자물쇠를 딸 수 있는 능력은, 자물쇠를 보았을 때 따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결단력과 올곧은 도덕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으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것, 그리고 아는 대로 행동하는 것. 그게 중요하다. 그렇지 않았을 때, 그 능력은 남을, 그리고 자신을 파괴시킨다. 그리고는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남을 원망하게 된다. 혹은 '사실은 내 잘못이 아니라...'라며 변명을 하게 된다. 최악은 다른 사람을 파괴시키면서도 그게 죄인지 잘못인지 깨닫지조차 못하는 것. 모자장수님이 언제나 강조하시고 나 역시 동의하는 대로, 결국 멍청함은 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악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인간이기도 한 것을...

조지 오웰 | 카탈로니아 찬가  -  2006/11/27 12:05


카탈로니아 찬가
조지 오웰, 정영목 역, 민음사

아주 오래 전, 이 책을 읽고 감격에 겨워 감상문을 알라딘에 썼던 거 같은데 찾을 수가 없다. 감격에 겨워하다 결국 안 썼나?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을 보고, 뭔가 써보고 싶다며 끄적이다가 지우다를 반복하다가, 책장을 뒤져 이 책을 찾아내 다시 읽었다. 역시나 감동, 새삼 오웰에게 버닝, 기타 등등은 예전 읽었을 때와 같지만, 세월이 흐른 탓에 달라진 것들은... 결국 책은 그대로이니, 내가 변했다는 얘기일 터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당시, 난 스페인 내전에 대해 잘 몰랐다. 아니, 스페인 내전에 대해 뭔가 조금 알게 된 게 이 책을 통해서였다. 그때도 <랜드 앤 프리덤>을 본 뒤 막연하게 스토리의 얼개만 겨우 따라잡은 상태였고, 정치적 노선 따위는 내 알 게 뭐냐! 수준이었다. 전선에서의 생활 묘사 부분은 오히려 좀 지루해 했던 것같고, 오웰의 문체는 참 건조하구나, 하면서 별 감흥없이 넘어갔던 것같다. 다같이 좋은 뜻으로 일어났으면서 왜 내분으로 치달을까,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내분으로 망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보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같다. 물론 혁명이 감돌고 있는 바르셀로나에서, 의용군의 장교와 사병은 있어도 이들의 계급적 차별은 철폐되어 오히려 존대에 장교가 당황해한달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손님들에게 '당당'한 그 분위기의 묘사를 보고 이게 실제로 가능하구나, 흥분했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러나 그간 나는 소위 정치와, 이념에 대해 좀더 많은 걸 알게 되었고, 흔히 좌파라 불리는 무리의 가치관을 조금 갖게 되었고, 그럼에도 점점 밥벌어먹고 생계를 이어가는 데에 대한 걱정을 키워가며 자본주의에 순응해 가고 있는 중이다. 오웰의 책을 좀더 아프게 받아들인 것도, 내전에 함께 한 세력들이 각자 정치적 입장 차이 때문에 갈라지고 또 한쪽이 탄압당하는 것도, '정치적 역학 관계'에 대한 이해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정치적 노선과 단체의 이름들 - 조지 오웰이 "무슨 못쓸 머릿글자 전염병이라도 휩쓴 줄 알았다"고 묘사한 - 의 이름도 별 어렵지 않게 구분하게 된 것도, 이전처럼 흥분에 휩싸여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희열을 맛보지는 않게 된 것도, 조지 오웰의 문체에 감탄하며 종종 살짝 드러나는 그의 유머감각을 캐치하며 간간이 웃음을 터뜨린 것도, 그간 나의 변화 때문이리라.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그리고 똑같은 사물을 다른 것으로 보게도 만든다.

실천적/참여적 지식인이었던 조지 오웰의 존재 자체가 빛나는 것도, 사실은 이 책 때문이다. 그는 그저 먼 곳에서 신문이 찍어내는 거짓말과 추측에 의존해 다른 사람들의 죽음과 상처를 하룻밤 조금 고민해 문자로 바꿔놓고는 거들먹거리는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 사실 조지 오웰은 삶과 작품들 자체가 반성과 성찰과 실천의 일관성을 이루고 있다.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하다 "제국주의의 개"라는 자신의 신분에 환멸을 느끼고 사직한 결정은 [코끼리를 쏘다]의 1부(원래 이 책은 오웰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출판된 산문 모음집이다)와 [제국은 없다 (원제는 버마의 나날들 Bermese Days, 현재 품절)]로 이어졌고, 유럽에 돌아와 파리와 런던에서 하층민 생활을 한 경험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로 이어진다. 물론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국에선 한때 '반공우화'로 잘못 선전됐던 [동물농장]과 자본주의 - 파시즘 체제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1984] 등이긴 하다. 또한 [1984년]은 '디스토피아를 그린 미래소설'이라는 점만 가지고 올더스 헉슬리의 [훌륭한 신세계]에는 떨어진다며 (부당하게) 수직 비교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올더스 헉슬리와 조지 오웰은 정치적 노선이 다르며, 조지 오웰의 책은 그 책을 읽은 '반공사회'의 '중학생'마저 공산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도 Big Brother가 존재할 수 있음을(아니, 파시즘 체제는 오히려 자본주의에서 더 잘 나타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줄 정도로 훌륭하다. 스페인 내전이 벌어졌을 때, 조지 오웰은 스페인으로 건너와 의용군으로서 직접 전선에 참가했고, 아내와 무사히 스페인을 탈출한 뒤 6개월 후 통일노동자당 소속 의용군에 대한 부당한 모함에 분노하며 [카탈로니아 찬가]를 써내려갔다. 이 책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어가 스스로 총을 잡은 사람의 기록이다. 비록 그의 본분은 소설가, 평론가, 에세이스트, 저널리스트이지만, [카탈로니아 찬가]는 '글쟁이'로서의 관찰이 아닌, 그 자신 혁명에 참여한 경험을 마침 그가 글쟁이기에 더욱 생생히 풀어놓은 책이란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박홍규 교수의 조지 오웰 평전
역시 탄생 100주년 기념출판작

사실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으며 느꼈던 감동과 흥분은,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에 대한 흥분과 떼어놓을 수 없고, 그래서 저 감상문을 쓰면서 이미 다 말해버린 것같다. 오웰 같은 사람 앞에서 나는 그저 머리를 숙이고 내 자신을 반성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의 비겁함과 나약함에 쪽팔림과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새삼 그의 겸손함과 진실한 인물됨에 반할 수 없다. [카탈로니아 찬가]에는 허위와 자기포장, 자기연민 같은 게 없다. 꾸밈없는 솔직함, 건조한 영국식 유머, 날카로운 통찰력, 빛나는 겸손함, 그리고 뜨거운 분노. 아내를 고향에 둔 채 - 그녀는 나중에 바르셀로나로 와서 조지 오웰을 '보좌'한다 - 직접 총을 들기로 결심한 사람이 스페인 내전의 성격, 정치적 노선 등에 대해 "전혀 모르기도 했고 관심도 없었"을 리가 없다. 나중에 비해 좀 나이브하게 생각했던 건 사실이겠지만. 또한 그는 어떤 글이든 어떤 사람이든 하나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으며, 최대한 사실대로 쓰겠지만 자신 역시 하나의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하여 자신의 글이 '편향될 수 있'고 또한 무의식적으로 왜곡이나 기타 잘못이 있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객관성이라 생각하는데 - 자신이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이라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대체로 강자의 편에 이미 붙어있는 것이다 - , 아마도 순수문학 타령을 너무나 좋아하는 한국에서 조지 오웰의 진가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 건 오웰의 이런 태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의 역사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었던 혁명의 실패는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사건이다. 그러나 혹자들은 이 책이나 켄 로치의 영화를 보며 혁명의 타락이니 권력싸움의 허망함이니 같은 말들을 하지만, 난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이 '그러므로 혁명은 허망한 것이다'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썼을 리도 만무하지 않는가. 오히려 나는, 혁명을 향한, 그리고 자신을 역사의 '주체'로 자각하며 스스로 일어나 앞을 향해 싸워나가는, 인간의 고귀함을 본다. 물론 품에 대한 왜곡과 모함, 그리고 품을 포함한 모든 진영의 그 거짓말과 근거없는 공격에는 분노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역사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달려가며 그 과정에서 싸우고 타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비록 스페인 혁명은 실패했지만, 그 기록은 실패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언제까지고 반복될 혁명과 이상을 향한 인간의 꿈과 도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이상과 신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스러져간 선배들의 희생은 고맙고 귀한 것이다. 비록 내가 그런 희생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Hunter S. Thompson |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  -  2006/11/23 03:40


Hunter S. Thompson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
영화의 한 장면을 표지로 이 책이 국내에 출판될 거란 광고를 분명 어디선가 몇 년 전에 본 것같은데, 아무리 온라인 서점들을 뒤져도 책의 존재는 없다. 영화 개봉이 무산되면서 책도 결국 엎어진 건가. 하여간, 새삼 Thompson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원서로 이 책을 사서 읽었고, 벌써 두어 달이 지났다. 약에 취해 취재를 하고는 나중에 편집자와 방에 틀어박혀 녹음기를 재생시켜 녹취하는 게 커다란 일이었다는 톰슨답게, 이 책은 라스 베가스로 오토바이 경주 취재를 가서는 정작 취재는 뒷전인 채 각종 약에 신나게 취해서 벌이는 소동과 모험을 담고 있다.  (사실 이 일행의 관심이란 새끈한 차 - 빨간 컨버터블 -, 약, 그리고 여자이다.)

미국의 드럭컬처를 모른다면 이 책을 이해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 M.군은 이 책의 가장 인상깊은 장면으로 주인공의 '사모아인 변호사' - 영화에선 일부러 18킬로를 찌운 베네치오 델 토로가 맡아 열연했다고 하는 - 가 약에 취해 욕조에 누워서 카세트로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White Rabbit"을 반복해서 듣는 장면을 꼽았는데, 그러니까 이 노래란... 약으로 high한 상태에서 들어야 제맛인 그런 노래라는 것이다. 내가 해본 중독성 약물이래봐야 알콜과 담배가 고작인데, 이 노래가 확실히 좀 싸이키델릭하고, 몽롱하긴 하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런 깊은 뜻이 있을 줄이야. 설명을 듣는다고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기도 힘들다. 욕조에 뜨거운 물 받아놓고는 맥주를 두 병 원샷하고 들어앉아 곡을 들으면 좀 감이 오려나. 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영어의 장벽보다, 드럭컬처에 대한 몰이해의 장벽이 훨씬 더 높았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과 음악과 영화로 접한 '상상의 정서'에 불과하니. (그런데 나는 왜 미국의 6, 70년대에 그토록 매혹되어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이 책이 주는 재미에 대해 언급을 해보자면, 그러니까 라울 듀크(이 책의 화자)와 그의 변호사가 라스베가스를 횡단하면서 벌이는 모험이란 게 결국, 당시 풍요와 문화적 절정이라 사람들이 얘기했던 미국의 풍경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자들의 패닉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굉장히 신랄하고 흥미진진한 톰슨의 문체로 그려지는 라스베가스의 모습은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의 극단적 면을 한눈에 보는 축약도이며, 물질적 풍요 앞에서 정신적 공황을 겪는 미국인들이 '아메리카 드림'을 자축하며 애써 그 정신적 공황을 잊고자 하는 필사의 몸부림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그가 벌이는 소동을 킬킬거리며 읽으면서도, 그 가운데에 드러나는 톰슨의 날카로운 견해와 이에 대한 매우 절제된 - 그러나 강력한 - 표현들은 서늘한 쾌감을 준다. 또한 어느 순간 찾아오는, 길 잃은 자 특유의 먹먹하고 막막한 무력감까지도.

한국에 출판되기에 분명 애로점이 많은 책임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톰슨이라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이 사람이 주는 그 삐딱한 매력은 꽤 강력한 편. 국내엔 톰슨의 책이 소개된 게 거의 없으니, 관심이 있으나 영어원서를 읽는 데에 장벽을 느끼시는 분들은 케이블에서 가끔 방영해 준다는 영화 버전 <라스베가스에서의 공포와 혐오>(조니 뎁이 톰슨과 장기간 생활을 같이 하며 그의 행동과 말투를 거의 완벽하게 모사해 낸다고 한다)를 보거나 현재 영화화 소식이 있는 <럼 다이어리>(역시 조니 뎁이 제작총지휘에 나섰고 출연도 할 예정)를 기대해 보시는 게 좋을 듯하다.

로버트 실버버그 | 두개골의 서  -  2006/08/16 01:11

죽음을 대가로 영생을 얻으리라.

해설자와 온갖 SF 전문가들이 이 책 [두개골의 서]를 위해 해놓은 말에 의하면, '영생'은 SF의 고전적인 주제라 한다. 그래서 과연 이 소설이 SF냐 아니냐를 갖고 말이 많았던 모양이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시작하기 앞서 붙어 있는 저자의 말에도 이러한 논쟁의 그림자가 소개되어 있다만, 장르 구분에 티미한 나서는 그저 재미있는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만족.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네 명의 영생지원자가 '두개골의 서'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영생을 얻기 위해 이 책과 관련된 일종의 신비주의 집단을 찾아간다는 내용. 이 책의 비의 중 핵심은 무엇보다도 아홉 번째, 영생을 얻기 위해 사각형을 이룬 네 명 중 한 명은 스스로, 한 명은 동료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둘만 영생을 얻는다고 되어있다. 출신 성분도 가치관도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네 명이 한 팀이 되어 떠나면서 이 넷을 각각의 화자로 번갈아 가며 내레이션을 하는 것으로 장이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구성을 통해 네 명의 차이가 또렷이 드러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작가는 네 명을 번갈아 가며 1인칭 화자로 서술하는 어려운 과업을 아주 훌륭하고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는 얘기기도 하다.


누가 죽고 누가 살 것인지는 앞부분을 조금 읽다 보면 감이 온다. 물질적 풍요 때문에 영혼의 문제가 그닥 중요하지 않은, 처음부터 별로 진지하지 않았던 이는 제일 먼저 죽을 수밖에 없으며, 누구보다 ‘의식’의 차원에서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 또한 ‘의식’의 차원에서 모든 의심을 의도적으로 거세해 버린 - 이가 또한 의외의 희생자가 되지 않겠는가. 언제나 승리와 영광은, 믿음과 회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그 회의와 의심의 과정 덕에 더욱 굳건하고 더욱 ‘자기 자신의 것’인 믿음을 가진 자의 몫일 터이다. 그러나 누가 죽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왜 죽느냐는 것. 죽임을 당하는 쪽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지만, 자살하는 이가 그 이유일 거라곤 생각 못 했다. 하긴, 난 그리 눈썰미 좋은 독자는 되지 못한다. 어찌됐건 비의는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도 공간도 다른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 네 명의 인물형의 고독과 상처와 비밀과 사고관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말하자면 나는 일라이의 출신성분 - 도시 빈민가에서 자란 자수성가한 유태인의 후손 - 에서 동질감을 느끼는가 하면, 네드의 호들갑스러운 미의식과 극단적 이중성 및 나르시시즘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넷 사이에서 흐르는 갈등과 감정적, 공감적 방향을 보는 것 역시 재미있다. 티모시와 올리버, 네드와 일라이가 특히 친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듯 보인다. 네드가 올리버를 좋아하는 것 역시. 아마도 이들 넷의 정서적, 지적, 환경적 요소들이 이토록 친밀한 건, 모든 기존의 가치가 부정되던 당시 미국의 70년대와, 전통 가치는 부정된 채 새로운 대안을 찾지 못한 가치부재 시대의 2006년 대한민국의 상황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다 읽고서, 아홉번째 비의가 말하는 바, 극단적 자기부정과 배제가 실현되는 방식이 너무 직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으로까지 드러나는 자살뿐 아니라, 나는 이미 네 명 중 한명이 자신의 학문적 기반의 공허함을 밝힐 때 이미 자기부정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부정할 자기조차 갖고있지 못한 것인가. 그럼에도 '자기부정'과 '배제'를 뜻하는 죽음은, 물리적인 형태로, 비의가 글자그대로 실현된다. 하긴, 이들이 사원을 찾아가고, 마침내 사원에서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는 것자체가 거대한 신화적 메타포를 그대로 실현해놓은 것이니, 어쩌면 그런 물리적 죽음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자면, 자기 부정과 배제 역시 결국은 한 인간이 영생을 얻기 위한, 즉 성장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인 건지도 모른다. 결국 영생을 얻는 쪽인 둘은 자기 부정과 배제의 과정을 훌륭히 통과했기에 살아남은 건지도 모른다. (한 명은 자기 학문, 존재성의 기반 자체의 부정을 인정했고, 성욕 통제라는 관문에서 좌절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배제를 겪는다. 또 한 명은 성적 정체성 자체 때문에 외부로부터 계속 부정과 배제를 당해 왔으며,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이성애적 어떤 과정을 거침으로써 자기 부정을 훌륭히 수행해낸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영생이란 과연, 물리적인 차이를 뺀다면 죽음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들의 삶은 결코 이전과 같아질 수 없으며, 그들이 얻은 영생의 삶은 이전에 그들이 살고 있던, 앞으로 살게 될 것이라 생각했던 속세의 일상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바로 그 이유로, 죽음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끝' 혹은 '소멸'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 혹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속세의 삶 이면에 그대로 평행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영생과 죽음은 사실 이음동의어가 아닐까, 라는.


편집 때문에 책이 두꺼워지고 부피가 다소 커보일 가능성이 있다. 얘기 자체는 단순하고 짧으며, 네 명이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해 가면서 대체적으로 시간순서로 흘러가는 소설의 구성방식은 매우 매력적이다. 실버버그의 또다른 [다잉 인사이드]도 이미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에도 부쩍 관심이 간다.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영화화 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아직 배우 캐스팅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 <엑소시스트>와 <프렌치 커넥션>을 무척 좋아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후져지는 프리드킨인지라 기대보다 우려가 먼저 드는 게 사실. 누가 캐스팅되려나.

리처드 매드슨 | 나는 전설이다  -  2006/07/16 04:44

되돌아오신 잭 스패로우님 때문에 간만에 IMDB에서 조니 뎁의 필모를 뒤적거리다가 알게 된 <나는 전설이다>의 영화화 소식. 조니 뎁, 윌 스미스, 거기에 <콘스탄틴>의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 얼기설기하고 어설픈 연출 사이사이에서도 캠피하고 발랄하던 매력이 배어나오던 <콘스탄틴>을 생각해보면 일견 <나는 전설이다>와 어울릴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고. 각색자 크레딧 중엔 어느 정도 안정적인 필모를 쌓아온 아키바 골즈먼(의뢰인, 뷰티풀 마인드, 신데렐라맨 등)이 껴있다. 그러나... 어쨌건 대단히 기묘한 조합.


새로운 인류는 이전 인류를 어떻게 대체하는가?

리처드 매드슨의 원작 [나는 전설이다]는 올해 4월쯤 읽은 듯. 1954년작인 이 책은 (그냥 일반적인 기대만 갖는다면) 당연히 지루하고 식상하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좀비상을 가지고 있고, 이 책은 그 모든 좀비 이미지의 원류이니까.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온갖 HR 공식에 익숙해진 현대 관객들에게 식상해 보이듯, 그러나 또다른 의미로 재발견되고 재해석되듯, [나는 전설이다]가 출판 당대에 좀비라는 새로운 존재 - 이물적 존재이면서도 모태는 인간인 - 의 매혹으로 어필했다면, 현대독자인 나는 이 소설의 엔딩의 혁명성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분투하는 존재임은 수가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이나 새로이 급증하고 있는 좀비나 마찬가지. 여기엔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생존투쟁의 승리만이 유일한 선이 된다. 인간과 좀비 간 전쟁에서 마침내 좀비가 사회를 구성하고 살 방법을 찾기 시작했을 때 최후의 인간 생존자는 죽어서 전설의 영역으로 입장해야 할 운명만이 남는다.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방식으로 살아남았을진데, 호모 좀비쿠스 같은 이름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호모 사피엔스를 대체한들. 그러고 보면 수많은 호러영화들이 당연한 듯 인간의 승리로 막을 내렸던 것은 그 모든 좀비물의 조상인 이 소설에 대한 반역적인 퇴행, 혹은 퇴행적 반역인 건지도 모른다. 많은 인간들이 자본주의적 인간을 중세적 인간보다, 혹은 자본주의적 냉혈인간을 온정주의적/윤리적 인간보다 진화한 것으로 믿고 있는 세상에서, 평균수명을 늘린 대신 면역결핍과 신종질병에 시달리는 현대 인류가 과거 인류보다 진화한 것이라면, 좀비가 인간보다 ‘진화한’ 존재라고 말한들 과연 언어도단이 될까. 아니, 우리들 중 대부분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새에 이미 좀비가 됐는지도 모르는데. (이게 인간 특유의 자기합리화 방식 아니었던가.)


[나는 전설이다]의 엔딩은, 가상역사에서의 미래이자, 우리의 과거이기도 하다. 제우스가 새로운 신의 계보를 시작하며 신중의 신의 자리로 등극한 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속한 타이탄 족을 멸망시킨 이후이다. [나는 전설이다]의 주인공 네빌은 결국 또다른 크로노스(제우스의 아버지, 타이탄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 인간'으로서 전설의 주인공이 될 존재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이송희일님, 나는 전설이다
IMDB 페이지 : http://imdb.com/title/tt0480249/

박현욱 | 아내가 결혼했다  -  2006/06/08 02:03

읽다가 절망한 것은, 저 폴리아모리를 실천하고 쟁취하는 저 여자가 너무나 수퍼우먼이기 때문에. (그래, 다처든 다부든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그녀도 남편이 사귄 여자친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소설이 남자주인공이 화자여선지 그녀는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그저 대상으로서의 그녀이며,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기계적이고 별로 사람 냄새가 안 난다.


결국 그녀의 ‘뻔뻔한’ 태도 역시 실은 속 좋고 착한 남편의 묵인과 허용 하에서 가능한 듯 보이는 데다, 그녀는 일도 잘 하고 섹스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고 시부모님께 예쁨받으며 심지어, 축구팬이다. 두집 살림을 강행하는 그녀에게 집안일을 손가락 하나 안 대는 걸로 반항하는 남자와, 군말없이 주말마다 집안을 번쩍번쩍 광내놓고 냉장고를 채워놓고 가는 여자라니, 폴리아모리가 분명 사회적으로 아직 합의가 안 되는 사랑방식임은 분명하지만, 모노가미가 인류의 원래 성질에 반한다 해놓고 그것을 실현하는 여성은 지나치게 수퍼우먼인 것도  모순이라는 느낌이 든다.


거기에, 축구. 우리 사회에서 여자들이,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분야의 한 가지를 잘 알고 있을 때 느끼는 뿌듯함과 안심, 뭐 이런 콤플렉스를 적절하게 건드리고 있달까. 자신이 ‘전통적으로 얘기되는 여성상’과 어긋난다 얘기하는 많은 여성들이, 일견 걱정스러운 말투 속에 얼마나 많은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을 섞는가. 이는 또한 많은 남성들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판타지는 더 있다. 폴리아모리를 주장하면서 상대를 상처입히는 것은 통상적으로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그에 관한 죄책감을 여성주인공에 투과시킨 남성 작가는, 남성들이 도통 점하지 못하는 피해자의 위치를 점한다.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은 그대로 가져간 채. 그로인해 우리의 여자주인공에게 현실의 여성이라면 결코 수용하지 않을 어떤 여성상의 미덕을 관철시킨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은 결국은, 남성 ‘작가’(화자가 아닌)의 주장과 판타지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정작 남성 그 자신은 죄책감마저 떠넘긴 채 속 넓고 관용적인 - 아마도 현대의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 - 남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건, 정말이지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특권이고, 작가는 이 특권을 꽤나 약삭빠르고 똘똘하게 누릴 줄 안다. 부러운 점이다. (좋은 소설가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ps. 대한민국은 확실히 좁다. 나는 작년에 모모한 일로 이 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 어쩌면, 앞으로 한번 더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ps2. 이번 소설은 꼭 영화화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