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진 | 달리는 꿈의 상자, 모모 (2012)

2010년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야 이봉우 대표와 2008년 폐관한 명동의 CQN(씨네콰논) 극장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게 되었다. 일본의 뉴스를 전문으로 전달하는 포털사이트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지금의 한류를 있게 한 선구자이자 주역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에 좋은 일본영화를 계속해서 소개했고 나아가 한-일 간 주목할 만한 공동합작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그의 이름은, 일본영화에 관심이 없더라도 익숙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결국 명동 CQN극장을 철수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그가 소위 ‘이봉우 부활제’, 즉 ‘이화회’를 통해 재기를 선언하고 이동영화관의 구상을 내놓았다는 내용의 그 기사를 보며 그저 마음으로 응원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소식은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2012년 서독제에서 소개된 뒤 이후 간간이 한정된 기회를 통해서만 상영되었던 영화 <달리는 꿈의 상자, 모모>를 통해 그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화회 행사에서 발표했던 이동영화관의 꿈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는 중이었다. <달리는 꿈의 상자, 모모>는 이봉우 대표와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동료들이 어떻게 이동식 영화관, 즉 ‘모모’를 마침내 설립하였는지, 2011년 오프닝 행사와 제1회 토호쿠영화제를 개최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이봉우 대표의 약력과 과거를 간단하게 전달하되 그가 어떤 인물인지 소개하는 차원에서 그칠 뿐, 그가 한국에서 거머쥐었던 영광과 어이없게 고초를 겪으며 추락한 사연을 길게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마침내 ‘모모’를 선보이기까지 그의 정성, 그리고 이 ‘모모’를 통해 그가 도달하고 싶었던 꿈과 영화에의 신념을 보여준다. 이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나 “좋은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를 넘어서서, “좋은 영화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프랑스에서 10여 년 전 처음 이동식 영화관을 보며 느꼈던 그의 감회, 그리고 그가 달리는 영화관을 만들게 된 계기를 얘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영화’라는 것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탄생 때부터 영화는 ‘신기한 구경거리’이자 ‘놀라운 이야기를 담는 그릇’일 뿐 아니라, 다수의 사람이 한곳에 모여 함께 보는 미디어였다. ‘영화 보기’는 그렇기 때문에, 영화 초반 이봉우 대표가 지적하듯 소위 ‘예술성 있는’, 혹은 유수의 권위를 지닌 영화제에서 수상함으로써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영화들을 보며 개인의 교양과 안목을 함양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고 공감대를 나누며 서로에게 연대감과 소속감을 느낌으로써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누는 행위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칫 열혈 영화광과 예술영화 애호가들이 손쉽게 빠지기 쉬운 함정, 즉 개인으로 파편화되어 각자의 골방에 틀어박히는 ‘고독한 마니아’의 길이 아닌, 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 하는’ 행위로서의 영화 보기를 강조한다. 

그가 이런 신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영화가 가진 본질적인 힘을 믿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서 인터뷰 내내 “영화가 얼마나 사람들을 크게 위로할 수 있는지,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 강조한다. 또한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극한 상황에서도 빵뿐 아니라 ‘장미’를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는 산업 논리에 따라 오히려 극장이 없어지고 영화를 볼 수 없게 된 이들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권리, 그것도 좋은 시설이 갖춰진 극장에서 제대로 된 소스로 제대로 상영되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권리, 그리하여 영화가 공공성을 갖고 커뮤니티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역할을 증명하려 한다. 그 노력의 산물이 바로 ‘모모’다. 그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그래서, 3.11 지진 쓰나미로 폐허가 된 미쓰시마 현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매일 보고 즐기는 영화를 도무지 볼 수 없게 된 곳. 

현재 극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내겐 이 영화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처음 영화와 사랑에 빠졌을 때의 기억뿐 아니라,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기로 하면서, 더욱이 산업 현장이 아닌 보다 ‘활동’에 가까운 공간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품었던 꿈과 이상을 상당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현실의 장벽 앞에 주저앉아 한숨을 뿌리며 눈물을 훔치던 와중, 이 영화가 나직하게 어깨를 두드려주는 듯한 느낌이다. 

ps. 2013년 5월 28일, 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독립영화 쇼케이스’에서 상영된 영화의 자료로 쓴 리뷰. Dropbox 안에 둔 글을 무심코 발견…

프레드 진네만 |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 (1953)

데보라 카의 별명은 ‘영국장미’였다. 유럽 출신 여배우들이 각광받던 당시 데보라 카의 소위 ‘영국적인’ 특징은 기품있는
우아함 등으로 평가되기 마련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우아하다. 느끼한 양키 버트 랭커스터하고도 그림같이 잘 어울린다. 유약한 섬세남
몽고메리 클리프트에게는 살짝 야한 느낌이 있으면서도 남부 촌 출신의 건강한 말괄량이 아가씨 필이 나는 도나 리드가 확실히 잘 어울린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참전하는 계기가 된 진주만 공습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는 그 평화롭고 여유로운, 전쟁 따위 설마 나겠어 싶어 룰루랄라거리던 휴양지 섬에서 제대로 뒷통수 따악 맞고 패닉에 빠지던 당시 분위기를 매우 잘
묘사해낸 영화다. 워낙 군바리 체질에 요령좋고 능력도 좋아 징집병 출신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까지 올라갔지만 장교시험은
보고싶지 않은 일등상사 워든은 겉으로 보기엔 얼음공주 같지만 ‘놀 만큼 놀았다는’ 소문이 도는 대위 마누라 캐런과 연애를 하고,
중사인지 상사인지의 친구 빽 믿고 나팔도 제대로 못 부는 주제에 1등 나팔수 자리를 빼앗아버린 놈에게 열받아 상병에서 일병으로
강등되기를 마다않고 부대를 옮겨버린 한 성깔하는 프루잇은 사교클럽 아가씨 로린, 혹은 알마와 연애를 한다. 그까짓 권투 안 하겠다고 끝까지 고집부리다가
찍혀서 왕따 당하고 괴롭힘 당해도 “남자는 자기 갈 길 가야죠”라고 읊조리는 프루잇. 저런 꼴통새끼 같으니, 투덜거리고 괴롭히긴
해도 은근 맘써주는 츤데레 워든. 그리고 그들의 여자들과 동료들, 그리고 돼먹지 못한 상사들.

From Here To Eternity
버트 랭카스터는 상체에 비해 다리가 너무 얇지 말입니다. 영화사상 최고의 키스씬 중 하나.

영화가 끝나기
15분 전쯤인 어느 화창한 일요일 아침 8시 10분 전, 이들은 산 너머 저쪽 하늘에 잔뜩 뜬 폭격기들이 우다다다 폭탄을 쎄리붓는 데에 얼이
빠져 우왕좌왕한다. 장교도 자리를 비운 그때, 일등상사 워든은 부하들을 이끌고 반격를 하다가 죽고, 단 하나뿐이던 군대 내 동료를
죽게만든 영창 간수새끼를 찔러죽이고 탈영한 프루잇은 전쟁 났다니까 저도 군인이라며 부대로 복귀하다 자기 편 보초에게 총맞아 죽는다. 이런
개죽음이 있나. 그러나 그들의 청춘이 단지 ‘개죽음’이란 단어 하나로 멸시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도 사랑을 했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좋은 걸 주고싶어 했고, 그녀와의 키스에 시궁창 속에서도 장밋빛 꿈을 꿨다.

언제나 전쟁영화는
전쟁터를 최상의 낭만의 장소로 색칠하긴 했고, 그렇게 젊은 청춘들을 유혹하는 한편 그렇게 그들의 희생을 위로했다.
때로는 심하게 거짓말을 했고, 때로는 심하게 겁을 주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는 헐리웃에서 한동안 제작되었던 일련의
‘참전군인 위로영화’의 전통 안에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런 영화들이 갖기 마련인 어떤 특징들에선 살짝쿵 빗겨나 있기도 하다.
그들에게 스코필드 막사는 그저 직장이 다만 군대였을 뿐인 별별 청춘들의 지지고 볶는 일상이 있던 곳, 즉 낭만적인 연인을 만나게 해주기도, 그 낭만을 먹구름으로
뒤덮어버리기도 한 곳이었다. 민망한 군대찬양 대사도 종종 나오는 게 사실이지만, 이 영화의 감독 프레드 진네만이 진정 하고
싶었던 건 다른 데에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그런 찬양은 눈가림이에요, 저는 그저 직업이 군인일 뿐인 청춘들의 좌충우돌을 그리고
싶었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일 때문에 이 영화를 다시 봤다가 새삼 삼삼한 기분이 돼버린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그저 이런 것. 채 피기도 전에 져버린 모든 청춘들에게 애도와 명복을. 누군가에겐 단지 개죽음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녀에게 그의 생전의 삶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찬란한 빛이었기를. 2008 충무로영화제 공식상영작.

ps. 어릴 땐 예쁘고 섬세한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좋았는데, 오랜만에 다시 보니 역시 내 취향은 듬직하고 어깨 떡 벌어지고 팔 근육 지대로이신 버터 양키 버트 랭카스터. 다시 보니 클리프트 군은 왜 이리 찌질하신가효.

ps2. 이전에도 비스콘티 감독의 <레오파드>에서 쉰 살의 버트 랭카스터에게 반해서 “왕자님~” 이러며 정신 못 차리던 때가 있었지. <레오파드>를 찍을 당시 비스콘티 감독은 제작사의 강권에 “랭카스터같은 느끼한 양키 스타 따위~!!” 이러고 펄쩍 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용해서 처음엔 워낙 틱틱거렸는데, 랭카스터가 워낙 성실하게 연기를 하니 홀라당 반해서 나중에 다른 영화에서 다시 작업하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랭카스터는 비스콘티의 새까만 후배였던 베르톨루치 감독의 <1900>에도 출연한다.

ps3. 사실 랭카스터나 클리프트나 데보라 카나 내게는 몇 세대 이전의 옛날옛적 배우라는 느낌인데, 로버트 드니로나 제라르 드파르듀와 같이 작업한 적도 있다 생각하면 또 신기한 거다…

ps4. Private인 프루잇을 굳이 ‘일병’으로 번역한 것은, 당시엔 갈매기를 하나 단 일병이 졸병이었고 그 밑엔 무등병이었기 때문에. 미 육군에 이병 계급이 새로 생기고 일병이 Private the First Class, 이병이 Private이 된 것은 60년대에 들어서다. (아마 68년이었나.) 갈매기 하나에 Private이었던 제임스 라이언이 이병이 아닌 일병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라운드 미드나잇>에 대한 옛날 글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의 <라운드 미드나잇>에 대해, 2003년 11월 4일 새벽 1시 44분에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라운드 미드나잇>은 따베르니에 감독의 매우 ‘개인적인’ 영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찰리 파커의 이야기를 <버드>라는 영화를 통해 풀어내며 재즈에 대한 사랑을 과시했듯, 따베르니에 감독은 버드 파웰의 실화를 느슨하게 각색하여 <라운드 미드나잇>을 통해 재즈에 대한 열망을 담아낸다. 미국이 발명한 음악, ‘재즈’에 대한 프랑스인 감독의 사랑이 표현되는 이야기답게, 황혼기에 접어든 (한때) 위대한 재즈연주자와 어느 프랑스인 간의 우정.


나는 이 영화가 정말 좋다. 영화에서 표현된 두 남자의 우정도 정말 좋다. 이를테면, 그들이 만나는 장면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위대한 테너 색스폰 주자였지만 근래에 와서 왠지 ‘밀리는 듯한’ 데일 테너가 파리에 와서 ‘블루 노트’(재즈의 상징인 이 이름!)란 이름의 클럽에서 공연하는데, 그를 열렬히 숭배하고 있던 진정한 팬인 프란시스는 클럽에 들어갈 돈이 없어 클럽 하수구 창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음악을 듣는다. 프란시스가 문 바깥에서 쪼그리고 앉아 음악을 듣는 장면은 두 번인가 나오는데,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좋다. 여전히 연주는 잘 하지만, 알콜중독자라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 클럽에서도 술을 금지당한 데일은 어떻게든 술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그 알콜중독이 된 머리로 잔머리를 쓰다가, 클럽 앞에서 마주친 프란시스에게 ‘맥주 한 잔’을 구걸하면서 비로소 만남이 이루어진다. ‘데일의 친구’라는 직함으로 프란시스는 드디어 ‘공짜로’ 그 클럽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데일의 음악을 정말 황홀한 표정으로 듣는다. 아내도 없이, 단 하나뿐인 십대 초반의 딸래미가 아버지를 기다리며 무서워서 떠는데도 그 딸을 방에 팽개쳐둔 채. 그리고 프란시스는 이후 데일의 ‘가방모찌’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심지어는, 데일을 자기 집에 데려와 함께 살면서 보살피기 위해 헤어진 전 아내에게 손을 벌려 큰 집으로 이사한다.


술 때문에 망가져가는 데일이 너무나 안타까운 프란시스는, 세상에, 밤에 혼자 훌쩍이면서 ‘운다’. 데일은 이 ‘진정한 팬’, 그리고 ‘친구’를 위해, 세상에 다음날 프란시스의 침대에 아침을 차려다 갖다주며 ‘금주’를 선언한다. 얼마 후에 돈 좀 빌려달라는 데일에게 지폐를 내주고는, 몰래 술을 사마실까봐 도저히 불안해하던 프란시스는 데일을 미행한다. 그리고 그가 카페에서 그저 오렌지 쥬스와 담배를 주문하는 것을 보고 아이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오마이갓.


다소 비아냥조로 글을 썼지만, 나는 앞에서도 밝혔듯 두 사람의 우정이 너무 좋다. 그리고 둘을 비웃을 생각이 없다. 나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누군가의 팬 노릇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만이 프란시스를, 데일을 비웃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비웃는 그 사람들을 비웃을 것이다. 내가 오히려 조마조마했던 건, 저 순전하고, 저 열정적인 ‘팬’인 프란시스가 데일의 무심함에 상처받으면 어쩌나였다. 스타가 무심한 건 그가 배려심이 없다거나 성질이 못돼먹어서는 아니다. 그들은 ‘팬’이란 이름의 존재가 스타가 한번 진 신세를 빌미로 지나치게 달려들기 시작해 자신의 사생활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에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고, 혹은 그에게 순간의 좋은 기분으로 ‘친구’의 자리를 하사했다 하더라도 무심하게 굴 수밖에 없다. 프란시스의 저 뻘쭘한 순간들. 연주가 끝난 뒤 자기의 동료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스타를 보며, 그 무리에 끼지 못하고 뒤에서 뻘쭘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긴급한 소식을 알려주려고 ‘친구로 인정해준’ 그의 아파트에 갔더니 그와 그의 동료들이 파티중일 때, 그리고 파티 손님 중 하나가 “냄새도 잘 맡네”라며 지딴엔 별 악의를 담지 않은, 그러나 듣는 이에겐 지독하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기분이 얼마나 뻘쭘하고 민망할지, 겪어보지 않았어도 나는 안다. 그런데 데일은 프란시스에게 지나치게 가식적인 친절을 보이지도 않고, 그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프란시스의 호의를 깨끗하게 받아들이고 적절하게 반응한다. 프란시스는 자신의 우상이 망가지는 것이 너무 속상해서 한밤중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자신의 열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눈물을 우연히 본 데일은, 자신의 ‘친구’를 위해 난생처음으로 ‘금주’를 선언하고, 정말로 실천에 옮긴다…


프란시스는 그렇게, 데일의 친구의 자리를 확실하게 잡아간다. 그저 자신의 위대한 우상이기에, 데일에게 좋은 식사와 좋은 잠자리와 좋은 집을 제공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방모찌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그가 연주의 댓가를 직접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이전에는 알콜중독으로 계약서에 서명조차 못할 정도의 그를 ‘보살펴’주면서 적절히 이용도 하는 버터컵이라는 흑인 여인에게 돈이 지불됐다.) 데일은 프란시스와 그의 딸 블랑제에게 좋은 친구의 역할을 하고, 무엇보다도 지독히 아름다운 음악들을 선사한다. 작곡도 다시 하고, 연주에도 힘이 붙는다… 프란시스는 프란시스대로,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대박을 날리며 안정세를 잡아간다.


각자의 본래적인 일상생활을 위해 데일의 프랑스 체류를 끝내고 난 뒤, 데일은 오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악몽에서 깨어나 잠을 이루지 못하던 프란시스는, 아침 일찍 전보를 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둘은 ‘정말로’ 이별을 맞는다.


돈이 없어 연주클럽 바깥에서 연주를 듣던 관객과 재즈 뮤지션 간의 우정이라는 모티브는, 버드 파웰의 에피소드에서 빌어온 것이다. 이것을 느슨하게 기반으로 하여 픽션으로 바꾸었다. 데일 터너 역할은 실제 위대한 테너 색스폰 연주가인 덱스터 고든이 맡았는데, 특유의 그 느릿느릿하고 정말 알콜중독자 같은 어투로 푸근한 감동을 준다. 프란시스 역을 맡은 프랑수아 끌뤼제는, 알고보니 <올리비에 올리비에>에서 아버지로 나왔던 바로 그 배우였다. 프랑스에선 아주 유명하지만 한국에는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배우. 영화 전체의 뮤직디렉터는 허비 행콕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를 제치고 이 영화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허비 행콕은 직접 출연까지 한다.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의 깜짝 출연! 대사도 많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정말 많은 말을 쏟아내는 수선스러운 속물 클럽주인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영화 내내, 아주 금싸라기 같은 비밥재즈 음악들이 계속 흘러넘치는데, 이것은 허비 행콕과 덱스터 고든이 직접 연주한 곡들이다. 이러니,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나는 사실 두 남자의 우정을 저런 식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저 위의 표현들은, 그저 줄거리의 나열일 뿐이다. 그리고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묘사했을 뿐이다. 데일이 죽은 후에도, 데일의 모습을 찍어놓은 필름을 영사기로 돌려보며 그를 그리워하는 프란시스의 모습이 얼마나 마음 짠한데. 둘의 그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그러면서 지독하게 정직하고 순전한 우정이 얼마나 감동적인데. 내 언어는 저 따위로밖에 표현하지 못 한다. 그래서… 슬프다.

사이드 무나 | 21세기

사이드 무나 감독

동지이자 친구였던 ‘이주노동자 자히드’가 ‘다큐멘터리 감독 사이드 무나’가 되어 돌아왔다. 이주노동영화제에서 상도 탔다는 그의 영화 <21세기>를, 나는 어제 후원의 밤에 가서야 봤다. 현재 방글라데시에 큰 이익을 안겨주고 있다는 의류산업의 장에서, 전체의 약 80%인 여성노동자들은 한달 겨우 1,000 ~ 1,500 다카(약 2만원)를 받고 일한다. 1인당 최저생활비가 3,000다카는 필요한 상황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2시, 어떨 땐 새벽 2, 3시까지 일을 하고 돌아와, 새벽 4시부터 화장실에 줄을 서서 물을 받아 식사준비를 하거나 씻고서 출근하고, 시간 외 수당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하는 동안 문을 밖에서 잠그기도 하고,  중간 관리직인 남성 노동자들과 고용주에게 일상적으로 성폭력에 노출돼 있는 아주 열악한 상황. 그 안에서 방글라데시의 의류노동자들은, 스스로 모여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에 나섰다. <21세기>는 감독의 개입이 전혀 없이(그 흔한 내레이션이 한 줄도 없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쌩으로’ 그대로 전하며 이들의 상황을, 그리고 고조되는 투쟁에의 의지를 ‘스스로 카메라에 대고 고발 / 고백’하게 하는 데에 그 진짜 미덕이 있다. 비록 짧은 러닝타임과 조금은 서툰 구성일지라도, 그 구체적인 지리적 장소가 방글라데시의 의류산업 공장이었을 뿐, 한 나라의 중추적 산업에 있어 정부-자본의 합동작전 하에 육체노동을 담당하는 여성 노동자가 처하게 되는 상황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건 어느 나라, 어느 산업에서도 같다. 우리나라에선 바로 6, 70년대 청계천으로 대변되는 의류산업이 그랬고, 이젠 서비스산업으로 옮겨갔을 뿐, 그리고 민주화 투쟁을 통해 착취/억압의 방식이 조금 더 세련돼졌을 뿐.

[#M_ 여기를 누르면 영화 상영 후 감독-관객 간 대화 내용을 볼 수 있다.| |

Q. 방글라데시에서 실제 노동자들의 경제적 사정이 어떤가?

A. 1971년부터 2001년까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은 960다카였다. 한국 돈으로 1만원 가량 된다. 한국에서 현재 한 끼를 밖에서 먹을 때 드는 밥값이 4~5,000원 정도라 할 때, 그 상당의 식사를 하려면 70다카가 든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60다카 정도 하는 도시락을 먹곤 한다. 이 노동자들의 집을 가 보면, 가구가 밥통, 물통, 그리고 그 사이에 매달아놓은 끈이 전부다. 그 끈에다 옷을 건다. 바닥도 거의 맨바닥. 서울역 등에서 노숙자들이 박스를 깔고 덮고 자곤 하는데, 거의 그렇게 생활한다고 보면 된다.

영화에서 인터뷰에 응한 노동자는 1,500다카를 받는다고 하는데, 그 사람 정도면 아주 잘 받는 축에 속한다. 의류공장의 노동자는 80%가 여성이며, 이들은 주로 시골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왔고 집이 없으므로 당연히 밀집지역에 방을 구할 수밖에 없는데, 미혼 여성들은 방을 얻기가 힘들다. 지역 깡패들이 여성들을 괴롭히고, 방주인들은 이런 복잡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미혼 여성들에게 방을 내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여성들은 회사에서 20%를 차지하고 있는 중간관리직 남성 노동자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중간 관리 노동자들이 여성들에게 성 상납 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공장 내에서도 협박과 성폭력은 아주 일상화되어 있다. 중간관리직 남성 노동자는 물론이고, 고용주가 심지어 자기 친구들까지 동원해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성희롱을 일삼는다. 고용된 여성 노동자가 예쁠 경우 야간 작업조로만 돌리고는 밤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식이다. 귀가 길에서도 문제다. 지역 깡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경찰한테도 고초를 당하게 되는데,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여성들에게 이들은 자신이 성매매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출퇴근 카드에는 실제로 밤늦게까지 일을 했음에도 7시에 퇴근한 것으로 돼 있어 괴로움이 많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어렵다. 잠깐 미싱 앞을 떠나 있는 게 관리직 눈에 띄면 200다카를 벌금조로 월급에서 제해버리곤 한다. 일하는 동안 감금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이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일년에 몇 차례씩 의류공장에서 대형화재가 나곤 하는데, 이렇게 감금돼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명피해도 그만큼 높다. 공장 내엔 비상계단이 없거나 있어도 매우 좁고 위험해서, 화재가 나면 대피하는 와중에 부상을 당하는 일도 많다. 심지어는, 화재가 나면 혼란 와중에 회사 재산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오히려 문을 닫아버려 인명피해가 더 증가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도 치타칸이라는 지역에서 실제로 화재가 났는데, 정부와 언론에서는 사망자의 숫자가 약 400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과 노동자들이 파악한 숫자는 무려 1,400명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았냐 하면, 그날 공장으로 배달된 도시락인 1,400개였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서 노동자가 다 죽었고 그 숫자는 1,400명이었다. 이런 일이 1년에 몇번씩 발생한다.

영화 속의 투쟁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의류노동자들이 30년을 그렇게 살다가, 인터뷰에서도 말을 했던 분이 가먼트 포럼(Garment Forum)을 조직을 했다. 노동조합은 아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을 하는 단체다. 가지푸르에서 5개 공장을 중심으로 파업을 주도했는데, 가지푸르 사거리에서 경찰 폭력 때문에 2명이 사망했다. 그 다음날, 50여 개의 공장에서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했고, 이 날도 2명이 죽었다. 그러자 그 다음엔 전국에서 300만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 조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때 거의 1주일 동안 전쟁 분위기였다. 공장에 불을 지르기도 하면서 투쟁이 계속되자 정부가 나서서 사장들의 단체와 함께 협상을 중재했다. 노동자들의 8개 요구안을 수용하기로 약속하고 투쟁이 멈추었는데, 2달 후 정부는 1인당 최소 생활비가 3,000다카는 필요한데 최저임금을 1,100다카로 올렸고, (노조는 아니라도) 노동자 단체를 만들어도 된다는 허가를 내줬다. 그래서 지금 노조를 만들려는 작업이 한참 진행중이다.

재미있는 게, 물론 방글라데시에서도 정부, 사장들의 편을 드는 나쁜 지식인들이 있다. 그 중 아주 보수적인 지식인이 책을 하나 썼는데, 거기에 “노조는 필요하다, 지난 번 그 전국적인 파업은 노조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썼다. 정부와 사장들의 단체가 이것을 받아들여 노조를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기 전에 사장 단체가 자기들 말을 잘 듣는 노조, 일명 어용노조를 결성을 하려고 하고 있다. 복수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 1개 회사에 1개의 노조를 허락하는 조항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저 투쟁을 이끌었던 가먼트 포럼이 노동자들에게 신뢰를 받게 됐다는 것이다. 이제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찾아와 스스로를 조직화하려 애쓰고 있으며, 가먼트 포럼의 지부를 신청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미 만들어진 노조들은 대부분이 아직 어용노조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조직화하자 경찰이 지도부를 연행해 갔다. 다음 날 또 조직을 만들자 이번에는 조직의 새 리더들이 실종되었다. 이들은 공장에도 집에도 안 돌아왔고 간 곳을 아무도 모르기에 우리는 납치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음 날 또 조직을 만들자 결국 사장 단체가 방글라데시 내에 이름이 좀 알려진 다른 조직의 노동자 리더 8명을 데려와 협상에 임했다. 그런데 협상에도 불구하고 그곳 노동자들은 더욱 투쟁을 했고, 이에 대한 이유를 묻자 투쟁하던 노동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8명은 우리 조직의 리더도 지도부도 아니다. 그 8명은 오히려 우리를, 노동자들을 팔아먹었다. 일을 조금 시키는 대신 보너스를 25%에서 15%로 삭감하는 협상에 서명했다.”

Q. 언론의 반응은 어떤가?

언론도 사업체일 뿐이다. 다들 커머설(Commercial – 상업적) 미디어들인 것이다.

Q. 정부는 이 상황을 모두 알고도 묵인하는 것인가?

A. 그렇다. 사장들의 단체가 정부를 움직인다. 방글라데시에서 의류산업은 아주 크고 중요한 산업이다. 사장들의 단체는 여당이고 야당이고 할 것없이 정치자금을 제공하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어도 노동자들의 편을 드는 정치가는 없다.모두 사장들의 편을 든다.

Q. 내가 아는 사이드 무나는 이주노동자 조합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미디어 감독이 되어 나타나서 개인적으로 참 놀랐다. 어떻게 미디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가?

A. 내 20대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내며 이주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배웠다. 방글라데시에 돌아간 후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입만 열면 한국 얘기라고 친구들이 구박할 정도였다. 그런데 방글라데시에서 보니, 한국에서의 내 생활은 너무 편한 거였다. 생활은 (방글라데시의 노동자보다) 훨씬 편한데 투쟁은 훨씬 더 치열하게, 무섭게 했다. 방글라데시에서 노동자들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하다. 그런데 나는 사실 학교에 다닐 적 학생운동을 했다. 인터뷰에도 나온, 가먼트 포럼을 만든 분이 내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선배였다. 그 선배를 찾아가 내가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물었더니 당장 자기 단쳉 들어와 일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난 그게 좀 아닌 것같았다. 내가 의류노동자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그냥, 연대할 다른 방법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노동자들을 만나보면, 사람들이 너무 착하다. 한국에는 방글라데시가 못사는 데도 행복지수가 높다는 말이 떠돌고 있는데, 그건 결국 바보라서 그런다. 그렇게 착취당하고도 행복하다고 말하고, 밤새 남편에게 맞아도 다음날 아침에 행복하다고 말하다. 바보라서 착한 거다. 가먼트 포럼 사무실에 나가 그냥 이일 저일 조금씩 도와주면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친해지고, 그분들 집에 찾아가 그 열악한 상황을 보면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치가들을 만나거나 하면, 처음에 혼자라고 무시를 많이 당했다. 거의 쟨 뭐냐, 분위기. 후배 학생들을 만나러 가면, 얘네들은 “우리도 다 알지만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우린 안 돼”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거다. 그때, 카메라를 떠올렸다. 한국에서 명동성당 천막농성을 할 당시, 사실 카메라가 천막 안에 들어오거나 인터뷰를 하자고 하거나 하면 솔직히 귀찮기도 하고 신경질도 나기도 했는데, 그 카메라가 떠오른 거다. 카메라로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려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ETV에 들어갔다. 여기는 그나마 약간은 진보적인 방송국이었고, 결국은 정부의 탄압을 받고 문을 닫아야 한 이후 지역 미디어 교육 등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만난 친구들, 여자 넷, 다른 남자 동지 둘과 팀을 꾸렸다.

한국에서 투쟁하면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가사가 있는 노동가도 부르고 했는데, 방글라데시에서는 정말,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많다. 인간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운동을 직접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디어 운동도 굉장히 중요하다. 학생단체들은 자기네들도 다 안다고 하지만 실제론 잘 모른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게 됐다.

Q. 노동운동과 미디어운동이 마치 양립할 수 없는, 분리된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데, 그것도 반-자본주의라는 하나의 큰 틀로 같이 볼 수 있지 않을까? 방글라데시에서 지금의 투쟁이, 나에게는 반독재투쟁과 반자본주의 투쟁이 섞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상황이 어떤가?

A. 노동운동과 미디어운동이 양립할 수 없다거나 분리돼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제까지 내가 받은 질문들 중엔, 노동운동을 해야지 왜 미디어를 하고 있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을 한 거다. 반자본주의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내와 국외를 막론하고 단결과 연대가 필수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미디어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방글라데시에서는 ‘연대’라는 말 자체가, ‘단결’이란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단결과 연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동운동을 직접 하는 것보다도 미디어운동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Q. <21세기>는 한국에서만 상영된 것인가?

A. 그렇지 않다. 일단 국내에서 상영을 했고, 내가 개인적으로 한국에 추억이 많기 때문에, 특히 한국에서 꼭 상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한국에서 상영을 한 거다. 현재 21세기는 터키의 노동영화제와 캐나다의 토론토인권영화제에 가 있다.

Q. 많은 사람들이 21세기를 봤으면 좋겠는데, 유투브와 같은 온라인 상영도 했으면 좋겠다. 계획이 있는가?

A. 생각은 하고 있는데, 우리 그룹 멤버들 중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뿐이다. 우린 편집을 할 수 있는 컴퓨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방글라데시에서 인터넷 속도는 매우, 매우 느리다. 사실 미디어 운동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얼마 전에도 (독립 다큐멘터리를 찍는 문성준 감독을 가리키며) 잡혀갔다 풀려났는데, 방글라데시에서는 잡혀가고 풀려나고, 이런 거 없다. 그냥 죽을 거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경찰이나 군인 등이 갖고 있는 합법적인 총의 4배가 넘는 불법 총이 풀려있고, 이것은 깡패들이나 정치인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거나 암살할 때 쓰인다. 우리도 이런 미디어를 찍는 게 그냥 잡혀가고 풀려가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길가다가 그냥 죽을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사람을 참 쉽게 죽일 수 있다. 20만원만 준다고 하면 누구나 청부살인을 해달라는 요청에 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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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자히드 씨가 긴급히 16일 귀국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와의 만남은 어제가 당분간 마지막이 되었다.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그가 눈물을 흘렸다. 그가 한국에서 추방되었을 때와 달리 나는 울지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때의 그는 언제나 어딘가 불안하고 지친 모습이었지만, 미디어 활동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지금의 사이드 무나는 자신감 있고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것으로 좋다. Take yourself, comrade.

ps 2. 사이나 무나가 속한 미디어 집단 “Break Through”는 현재 편집 컴퓨터는커녕 카메라도 없어 활동이 힘든 상황이다. 이 상황에 연대하기 위해(까놓고 말하면 카메라를 비롯한 영상장비 조달을 위해) 팀이 꾸려졌다. 자세한 내용은 브레이크 쓰루 블로그를 참조하시라.(후원금 내시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