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 | 지미스 홀 Jimmy’s Hall (2014)

*미디어스에 송고한 글. 먼저 여기서 보시고 댓글도 좀 달아주시라.

Jimmy's Hall
춤을 추면 표정이 저렇게 됩니다

고백하자면 처음 <지미스 홀>을 보고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작인 <엔젤스 셰어>보다 못하네”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박권일 선생이 ‘코뮤니즘’이라는 단어를 페이스북에서 쓴 것을 보고 영화를 다시 보기로 했다. 그렇게 이틀 후 두 번째 영화를 본 뒤, 감히 불경하게도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평가질’하려 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지미스 홀>은 <엔젤스 셰어>보다 못한 영화가 아니라, <엔젤스 셰어>와 다른 영화다. 영화의 결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진행되는 장면과 장면, 그 ‘과정’들이 중요하다. 두 번째로 보고서야 비로소 켄 로치 일당이 이 영화를 통해 하고자 했던 이야기에 가 닿았다. 마을회관을 구심점으로, 구성원들 모두가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배분하는” 코뮨을 건설하고자 했던 노력, 그 안에서 웃고 춤추고 노래하며 삶의 축배를 들고자 했던, 무엇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며 서로를 북돋고 다름을 인정하며 보완해 가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 다만 내가 이 영화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없었던 것은 이 영화의 아름다움이 덜해서가 아니라, 주요 무대가 되는 30년대 아일랜드의 정치적 환경이 한국의 근현대사와 꼭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의 등장을 뉴스로 접하며 이른바 ‘멘붕’에 빠졌던 게 불과 며칠 전이다.

말하자면 <지미스 홀>은 켄 로치의 2006년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10년 후쯤의 이야기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IRA가 영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치르는 과정뿐 아니라, 영국의 정전 협정을 수용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 사이의 내전까지 다루었다. 내전을 치르며 아일랜드인들이 거쳤던 동족상잔의 비극은 <보리밭의 흔드는 바람>의 마지막 씬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지미스 홀>은 그 상처가 여전히 진행 중인 상태에서 시작한다. 영국령 아래 그나마 자치정부와 자치법정을 세울 수 있다며 유지들과 타협하며 협정을 수용했던 이들과, 온전한 (사회주의) 독립국가를 꿈꾸었던 반대파들의 내전, 그로 인해 계속 불씨를 안고 있었던 갈등은 <지미스 홀>에서도 계속되고 심지어 격화된다. 다만 켄 로치 감독은 실존인물인 지미 그랄튼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 영화를 내전과 동족상잔의 직접적인 역사물로 만드는 대신, 그와 동지들이 작은 시골마을 리트림에서 꿈꾸고 시도했던 이상과 코뮨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간다. ‘피어스-코널리 홀’이란 이름을 가진 이 마을회관은 지미 그랄튼의 땅에 그가 번 돈을 들여 지어졌으나 지미 그랄튼 개인 소유의 건물이 아니다. 마을회관의 필요성을 절감한 모두의 노동으로 지어진, 마을사람 모두의 공공의 공간이다. 이는 영화 속 대사로도 직설법으로 강조된다.

Jimmy's Hall

그런데 이 마을회관은 어쩌다 ‘피어스-코널리 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일까. 수배령을 피해 미국 뉴욕에 있다가 대공황 직후,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정권이 바뀌면서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지미는 폐허가 된 마을회관에 들어가 먼지가 가득 앉은 책을 들춘다. ‘아일랜드 노동사(Labour in Ireland)’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의 저자가 바로 제임스 코널리다. 그의 이름은, “마을회관을 재건해 달라”던 아이들의 요청에 지미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지미를 비난하는 대목에서도 다시 한 번 나온다. “제임스 코널리가 지하에서 통곡하겠어요!” 아일랜드의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창립자 중 한 사람, 아일랜드 좌파의 영원한 영웅이며 사회주의자였던 코널리는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주모자 중 한 사람으로 총살당했다. 사실 제임스 코널리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다. 주인공 일당이 영국군에 잡혀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할 때, 주인공 데미언(킬리언 머피)은 동료와 코널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의 그 유명한 연설 문구를 인용한다.

“우리가 내일 당장 영국군을 쫓아내고 더블린 성에 녹색기를 꽂는다 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지 않는다면 헛된 노력이 될 것이다. 영국은 여전히 자본가들과 지주, 금융가, 그리고 이 나라에 그들이 이식해 놓고 우리 어머니들의 눈물과 순교자들의 피로 키워온 상업적, 개인적인 제도를 통해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If you remove the English army tomorrow and hoist the green flag over Dublin Castle, unless you set about the organization of the Socialist Republic your efforts would be in vain. England would still rule you. She would rule you through her capitalists, through her landlords, through her financiers, through the whole array of commercial and individualist institutions she has planted in this country and watered with the tears of our mothers and the blood of our martyrs.)” 

반면 피어스의 경우 영화를 통틀어 풀 네임이 언급되는 적이 없다(어쩌면 자막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구글링을 통해 피어스가 역시 코널리처럼 부활절 봉기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자 봉기 때 처형당한 패트릭 헨리 피어스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헌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매우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이다. 여러 모로 제임스 코널리와 대비되는 인물인 셈이지만, 마을회관을 만든 이들은 홀에 그의 이름을 또렷이 새겨 넣었고, 그럼으로써 서로 태어난 배경과 성품, 입장도 모두 달랐으되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 둘을 모두 기렸다.

헌데, 영화를 본 이들은 알겠지만 지미와 동지들, 그리고 춤을 추고자 하는 마을 젊은이들의 이 아름답고 이상적인 코뮨을 가장 적대하고 위협하는 세력에는 영국 자치령을 수용한 파시스트들뿐 아니라 카톨릭이 있다. 교구의 노사제 셰리단은 ‘신성한 카톨릭의 독점적 권한’인 ‘교육’이 이 마을회관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반대하며, 지미 그랄튼에 거의 ‘집착’하듯 그를 악마시한다. “이 마을에 빨갱이를 들일 수 없고, 그는 신념 있는 빨갱이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지미가 미국에서 배워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스윙댄스의 일종인 심샘(Shim Sham) 역시 우아하고 고상한 아일랜드 전통춤과 달리 쾌락을 좇는 타락한 춤이라며 비난한다. (그런데 이런 비난과 증오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셰리단은 영화에서 여러 차례 가족과 가족, 이웃과 이웃이 서로 피 흘리며 싸웠던 역사를 끝내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미와 동료들이 세운 마을회관의 이름이야말로 그러한 화합을 염원하고 소망하고 있지 않은가? 지미의 마을회관에서는 심샘뿐 아니라 아일랜드 전통 춤과 음악 역시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Jimmy's Hall
음악과 춤이 넘쳐나는 훈훈한 마을회관...이 빨갱이들 집결소라고 합니다.

홀에서 벌어진 토요일 밤의 흥겨운 무도회와, 다음 날 미사에서 셰리단 신부가 하는 설교가 계속 교차 편집되는 씬은 이 영화의 여러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다. 웃음과 행복과 사랑, 웃음과 춤이 넘쳐나는 홀의 모습과 증오와 엄숙함, 비난으로 가득한 설교 시간의 대조는, 셰리단 신부가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호명하는 데에서 정점을 찍는다. ‘명단 공개’, 이 역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행태이다. 몇몇 젊은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게 일견 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러한 키득거리는 반응이야말로 이 행태에 가장 적절하고도 어울리는 반응이기도 하다. 마을 어귀를 지키고 앉아 무도회로 향하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놨다가 미사 시간에 공개적으로 부른다는 행위는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매우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자비한 채찍질, 그리고 아이들과 여자들이 춤추고 연주하는 마을회관으로 퍼부어진 총알로 돌아온다. 마을회관을 좋아했던 아이들은 그저 “우리 제발 춤추게 해 주세요”라는 간절하고도 단순한 희망이 있었을 뿐이다. 이 소박한 한 마디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정치성을 가지는지, 이 영화처럼 잘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이제 그만 싸움을 끝내고 화합해야 할 때”라는 셰리단 신부의 말은, 지미 그랄튼의 극 중 연설대로 서로 계급이 다른 이들의 이해를 감추고 도리어 어느 한쪽의 희생과 침묵을 강요한다. 지주와 소작인의 이해가 같을 수 있는가? 사장과 노동자의 이해가 같을 수 있을까? 통합과 화합은 셰리단과 영국령 찬성론자들처럼, 혹은 민족주의자들처럼 “우리는 하나이니 화합해야 한다”는 구호에서 출발해 상대를 절멸시키려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을회관의 이름이 드러내는 것처럼, 그리고 지미의 연설이 강조하는 것처럼, “서로의 다름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그 간격을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비로소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아일랜드 역사상 유일하게 ‘불법 이민자’로 추방 당한 사람으로서 지미 그랄튼, 타지에서 죽음을 맞았고 그 유해조차 고국의 반대자들로 인해 돌아오지 못한 지미 그랄튼, 동지이자 오랜 시간 마음에 품고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인에게 빈 마을회관에서 함께 추는 춤으로, 그리고 “널 보면 숨이 멎는 것 같아”라는 뜨거운 고백으로밖에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지미 그랄튼(이 장면의 숨막히는 아름다움과 애절함은 굳이 말을 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지미 그랄튼 개인의 비극과 슬픔이 아니라, 지미와 그 동료들이 만들고 경험했던, 배우고 익히고 나누었던, 씨앗을 뿌리고 가꾸었던 코뮨과 코뮤니즘 때문에 빛나는 영화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떨리게 하고, 웃고 눈물 흘리게 하며 흥분시키며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씨앗이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울 것을, 또한 열매를 맺고 다시 씨가 뿌려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건 마을회관을 불태운다고, 지도자 한 사람을 추방한다고 지워질 수 없는 것이다. “마을회관이 불탔대도 네가 배운 것은 모두 네 안에 있어”라던 대사 그대로 말이다. 그렇기에 지미가 추방되는 그 와중에도 그들은 마치 내일 다시 만날 사람들처럼 웃으며 그를 배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자식에게, 또 손자에게 “지미 그랄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야…”라며 자신들의 경험과 마을회관의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또 전해줄 것이다. 그렇게 아일랜드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도 ‘영화’라는 형태를 통해 전해진 것이 바로 <지미스 홀>이다. 우리와 꼭 닮은 역사를 가진 저 먼 나라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며 우리가 슬픔과 냉소와 좌절 대신, 희망과 투지를 말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Jimmy's Hall
새삼 켄 로치가 멜로씬의 제왕이라 느끼게 한 장면. 그 흔한 키스 섹스 없이 춤만으로 아주 애절 터진다...

ps. 제임스 코널리의 연설에서 ‘녹색기’란 문맥상 추론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아일랜드 국기를 말하는데, 원래 녹색이 아일랜드를, 정확히 하자면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을 뜻하는 색.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대한 글에서도 썼지만, 그래서 그 영화의 여주인공의 복싱가운 색깔이 녹색이고 이때 아일랜드 관객들의 흥분이 들끓어오르는 것.

김한민 | 극락도 살인사건 (2007)

프레시안에 실었던 리뷰인데, 어쩐지 이 블로그에는 올려놓지 않고 있었던 걸 지금에야 발견하고 올려놓는다.2007년 4월 10일에 ‘찬반리뷰’ 기획으로, 오동진 편집장의 지지 리뷰와 나란히 실렸다. 원문은 여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83793 글을 다시 읽어보고 좀 놀란 게, 이 지나친 비아냥조의 문장 하며, 내가 이 영화를 정말 이렇게 안 좋게 봤던가… 기억 속 이 영화는 크게 좋아할 영화는 아니어도 이렇게까지 욕 먹을 영화도 아닌데 말이다. 설사 욕 먹을 만했다 해도, 이렇게까지 쓸 필요가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전형적인, 호러 모르고 쓴 글 싶다. 껄껄   

극락도 살인사건
청순한 해일 씨.

<극락도 살인사건>은 고립된 장소에서 한정된 인원 사이에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루는 수많은 추리극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설정으로 시작되지만, 계획적으로 살인을 모의하고 주도하는 범인은 없다. 우발적 상황을 계속 겹쳐놓음으로써 주민 모두가 서로 죽이고 죽는 학살극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면서 ‘범인’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스릴러의 외피 속에 호러의 요소를 차용해 인간의 집단 광기의 공포를 표현하려던 감독의 시도는 꽤 야심만만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어정쩡하고 방만한데다 매우 무책임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112분 동안 16명을 죽이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은 일일 텐데, 춘배(성지루)나 태기(이다윗 – 보건소장을 따르는 남자아이)의 사연, 우성(박해일)과 귀남(박솔미)의 관계, 거기에 고립된 섬에 하나씩 꼭 있을 법한 귀신 얘기까지, 이 모든 것을 미스터리 추리극의 형태에 녹여내려던 욕심 많은 감독이 얼마나 바빴을지는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집단 몸싸움을 벌여 두셋씩 한꺼번에 ‘우발적으로’ 죽여버리는 설정을 반복함으로써 등장인물의 반을 허겁지겁 처치하는 건 너무 안이하지 않는가? 저마다 사연과 설정을 가지고 있었을 각각의 인물들이 이 ‘우발적인’ 상황의 반복을 통해 천편일률적으로 ‘극단적 공격성’이라는 성격 하나만 또렷이 드러내는 좀비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여기에 맥거핀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중이 큰 귀신의 존재는 영화의 흐름을 산만하게 만든다. 귀신이 인간의 신체를 취하는 장면은 (장면 자체는 꽤 큰 공포를 선사하긴 했지만) 도대체 왜 클로즈업으로까지 삽입되어야 했던 걸까? 춘배의 광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너무 넘치는 설명이 아닌가? 사실 ‘귀신’은 초자연적 존재를 긍정하는 전제를 깔고 있지 않는 한, 대체로 인물의 죄책감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중 아무도 죄책감을 느끼는 이는 없다. 마을에서 귀신을 보는 것은 춘배와 용봉거사 두 사람뿐이고 그나마 귀신에게 공포를 느끼는 건 춘배뿐인데, 춘배는 죄책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인물이다. (춘배가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감정은 ‘호기심’이다.) 그런데 영화의 엔딩에 이르면, 영화의 치명적 결함이라 불릴 만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의도적인 것이었단다. 과연 엔딩에서 밝혀지는 ‘비밀’은 영화의 앞뒤 맥락을 지나치게 이가 딱딱 들어맞도록 해준다. 저 평면적이고도 표피적인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도, 춘배의 광기도, 귀신도, 태기가 보는 아버지의 환영도, 갑자기 앓아누운 여자아이도, 우성과 귀남만 이성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한 큐에 다 해결이 돼버린다. 게다가 이 비극의 진짜 원인은 인간을 수단화한, 도시에 있는 자본의 탐욕이었다며 짐짓 엄숙한 얼굴로 설교까지 하려 한다. 영리한 각본의 승리일까? 아니, 이건 매우 무책임한 ‘데우스 마키나’의 변형판이다. 이야기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도저히 수습이 안 될 때 전지전능한 신이 내려와 ‘말씀으로’ 모든 상황을 일거에 정리해버리는 바로 그 ‘데우스 마키나’ 말이다. 허겁지겁 수습하느라 바쁜 막판의 설명조 화면이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최대한의 선의로 이 영화를 이해하려는 이들은 예컨대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1986년)을 주목하여 마을 주민들이 군사독재 하의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기를 강요받았던) 민중들을 상징하는, 시대적 비극을 은유한 사회적 영화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정말 감독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1986년이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거의 보이지 않고, 무전기 외에는 통신수단이 없고 그마저도 고장났다는 설정은 완벽한 고립상황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더 크므로, 그러한 해석은 지나친 아전인수가 될 것이다. 이 영화에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비록 우발적이고 공포에 질린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손에 피를 묻힌 그 누구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은 전혀 없이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고 탓할 뿐이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각본을 직접 쓴 감독부터가 데우스 마키나 설정을 끌어들여 모든 것을 ‘그것’ 탓이라 무책임하게 변명해 버렸는데 캐릭터들이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사랑에 빠진 것처럼 Like Some in Love (2012)

Like someone in love
포스터는 화장발.

영화의 첫 장면부터 매우 당황했다. 고전적인 유럽 비스타비전의 화면비, 즉 1.66:1의 프레임 안에 디지털 특유의 지나치게 쨍하고 선명한 질감의 그림이 만들어내는 이질적인 충돌의 느낌 때문이다. 영화는 좁은 카페 안에서 시작하고 카메라는 거의 한곳에 고정되어 시끌벅적한 카페 안 풍경을 비추는데, 이 기나긴 고정 화면에서 이질적인 느낌은 다시 강화된다. 화면의 전경에 위치하고 있던, 그러니까 주인공인 것처럼 보였던 젊은 여자와, 계속 들리는 여자의 전화 통화 목소리가 또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의처증 심한 남자친구의 집요한 의심의 질문을 받고 있는 듯, 전화받는 여자의 목소리에서 점점 짜증이 높아간다. 화면과 상관 없는 보이스오버인가, 빨리 다음 장면으로 커트되지? 싶을 무렵 비로소 카메라는 아키코를 비춘다. 그러니까 이 카메라의 위치가 실은 아키코의 시선이었던 셈이다. 좀 전에 주인공인 듯 화면을 차지했던 나기사와 반대되는 스타일의, 다소 수수한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한 앳된 아키코가 바로 주인공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편보다는 단편에 어울릴 만한 별 스토리 없는 이야기와 제한된 인물로 일관한다. 헌데 이 영화가 무려 2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이 단순한 이야기에서 끝없이 긴장이 조성된다. 앞서 말한 식의 충돌도 그러하거니와, 아키코가 남자친구와 하는 전화 통화나 이후 히로시와 대화하는 내용도 그렇다. 도무지 평온하고 정상적인 대화가 아니다. 친구와 함께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심지어 그 친구를 바꿔주기까지 해도 전화기 너머 남자친구는 아키코를 계속 의심하고 급기야는 화장실에 가보라고까지 주문한다. 어제도 거의 밤을 샜고 오늘도 시험 공부를 하고 게다가 시골에서 할머니가 올라오셨다는데도, 히로시는 이 모든 이유들을 곧 변명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며 끝까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킨다. 아키코는 이들에게 짜증을 내지만 짜증은 ‘짜증’일 뿐이다. 남자친구의 태도나 히로시의 요구를 바꾸지 못하며 자신의 처지를 설득시키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제 공간을 옮겨 와타나베 교수의 집으로 가면, 우리는 이제 잠시도 이 노교수를 가만 놔두지 않는 전화벨 소리에 시달려야 한다. 안 그래도 노구의 느릿한 노교수는 이 전화벨 소리 때문에 허둥지둥 방 안을 몇 번이고 오간다. 집안에 들어온 아키코와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못한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와타나베 교수의 집 장면이 나오는 씬이 얼마 되지 않는데 영화 내내 이 전화벨 소리를 서른 번 가까이 들은 것 같다. 그리고 중반이 지나 아키코의 남자친구 노리아키까지 등장하고 나면, 이제까지 조용한 가운데 거슬리는 침입과 충돌이 만들어 낸 발 밑의 ‘은밀한’ 긴장들이 표면 위로 부상한다. 이 긴장은 점점 부피와 밀도를 더하며 폭발 직전까지 가며 관객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데, 결국 영화는 기어이 ‘폭발’과 함께 급작스러운 엔딩을 맞는다. 듀나가 이 영화를 ‘스릴러’라 했던 건 바로 아키코의 ‘비밀’을 기반으로 이렇게 긴장을 쌓아가는 과정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우정과 진실된 관계’가 아니라, 아키코가 매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그녀의 ‘비밀’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영화에서 내내 애틋하게 다가왔던 건 인물과 인물 간 거리였다. 초반에 아키코의 ‘핑계’로서 등장했던 할머니는 그녀와 피를 나눈 혈육이지만 그녀와 가깝고도 먼 관계로 제시된다. 할머니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어렵게, 다른 사람을 통해서야 알아낼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도쿄 역 근방에서 그녀에게 7통의 메시지를 남기고, 애틋한 메시지를 전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메시지가 손녀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채 밤 늦도록 그녀를 기다리기만 한다. 그녀는 할머니의 메시지를 모두 수신하고 심지어 할머니의 앞을 스쳐지나가지만, 택시를 타고 도쿄역을 몇 바퀴를 돌면서 할머니를 먼 발치에서만 볼 뿐 할머니에게 다다가지 못한다. 물론 할머니는 아키코의 비밀을 알지 못하지만, 도쿄역에서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 – 그러나 확신하지도, 믿지도 못하는 – 상태가 된다. 헌데 그녀의 부모는 영화 속 어디에서도 흔적조차 감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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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잤습니다. 할아버지는 소파에서 잤죠. 근데 영화 내내 이 할아버지가 순진한 척하는 것도 웃기다능.

할머니와의 스침을 지나 아키코가 만나게 되는 이는 와타나베 다카시다. 그는 이 여자와 처음 만났지만 그녀의 ‘손님’이기에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고, 그들은 어색하지만 서로에게 친절하게 구는 시간을 보낸다. 반면 영화의 후반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노리아키는 그녀와 가까운 사이이지만 그녀의 비밀을 모르는, 아니, 끝까지 몰라야 하는 남자다. 그는 (영화의 첫 장면 전화상에서도 그랬지만) 화면에 처음 등장하는 그 순간부터 공격적이고 위협적이다. 그녀에게 하룻밤 손님에 불과했던 와타나베는 그림 ‘교무’에 대한 인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거나 그녀가 와타나베의 가족과 닮아서, 혹은 하룻밤을 한공간에서 보내서가 아니라, 노리아키가 등장하고서야, 노리아키의 존재 때문에 아키코와 가까워진다. 노리아키는 모르는 비밀을 그가 알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다. 반면 누구보다 아키코와 가까운, 혹은 가까워야 할 노리아키는, 그녀와 결혼을 고려하고 있음에도 아키코가 끝까지 비밀을 숨겨야 하는 사람이라는 바로 그 이유, 바로 그 비밀 때문에 그녀에게 타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와 노리아키의 관계는 비밀 때문에 타인이며, 비밀이 탄로난 순간 노리아키와의 관계가 위기에 처할 것이기 때문에 또한 타인이다. 

영화는 외견상 온화하고 점잖은 남녀와 적대적이고 공격적이며 위협적인 젊은 남자의 대결구도처럼 흘러가지만, 이 대결구도의 기반도 결국은 아키코의 ‘비밀’에서 연유한다. 와타나베와 노리아키의 권력관계를 보다 명백히 하는 것도, 이를 위협하는 것도, 일거에 뒤집는 것도 결국 아키코의 ‘비밀’이다. 우리는 와타나베의 점잖음과 친절함, 그리고 와타나베와 아키코 간 상대적으로 더 가까워 보이는 거리와 친밀감 때문에 이 성난 젊은 남자의 분노를 낯설고 무언가 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게다가 영화는 의도적으로 노리아키에 대한 관객의 반감을 부추킨다. 그러나 노리아키의 분노가 과연 그렇게 부당한 것일까? 영화가 한참 진행된 이후, 우리는 노리아키가 아키코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이 그가 원래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모종의 제보를 통해 아키코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니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아키코에게 직접 물으며 아키코의 비밀을 직접 대면하는 대신 이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며 그녀가 ‘고백’하기를 종용하는 한편으로 그 비밀의 폭로의 순간을 지연시킨다. (왜 그는 아키코에게 직접 묻는 대신 자신에게 제보가 들어온 상황을 와타나베에게 말하며 이를 부정하려 하는가?) 그런 노리아키가 결국 비밀을 알게 된 뒤 폭발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거기에는, 노리아키 자신이 감지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하는 ‘아키코와의 거리’가 존재할 뿐이다. 

처음 노리아키가 와타나베의 차 안에 ‘침입’하여 와타나베의 정체를 물을 때, 그는 와타나베가 별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아키코의 할아버지라고 ‘적극적으로 오해’한다. 디제님의 지적대로 차 안에서 이들의 권력관계는 절대적으로 와타나베의 우위로 드러나고 이들의 계급적 격차가 명확하게 드러나며, 이 권력관계는 노리아키의 정비공장에서 완전히 역전된다. 그러나 노리아키가 와타나베의 차 안에서 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고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은 와타나베의 외모와 차에서 드러나는 나이와 사회적 지위, 계급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와타나베를 아키코의 할아버지라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제는 믿음이나 확신이 아니라 “당신이 아키코의 할아버지라 치고…”라는 가정에 가깝다. 그의 도전적이고 불안한 태도는 와타나베가 아키코의 할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당신이 아키코의 할아버지가 아니라면 언제든 치받을 준비가 돼 있다”는 경고 신호가 그의 태도에서 계속 발신된다. 그리고 마침내 노리아키가 와타나베의 차를 자신의 ‘왕국’ – 정비공장 – 으로 인도했을 때,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자신의 의심이 맞을 경우 와타나베의 나이나 사회적 지위, 계급적 우위 등 모든 통상적이고 사회적인 기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절대적 우위에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강조하는 듯하다. 감독은 이 정비공장 씬에서 노리아키를 연기한 가세 료에게 “와타나베의 차에 계속 한 손을 대고 있을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Like someone in love

마침내 비밀을 확실히 알게 된 노리아키가 어떤 식으로든 보복과 분풀이를 할 것이라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그의 보복이 아키코뿐 아니라 와타나베에게도 가해질 것이라는 사실 역시 앞에 제시됐던 노리아키의 성격을 봤을 때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 와타나베의 창에 날아든 돌덩이와 창문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는 모든 관객들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놀란 가슴을 미처 진정시킬 새도 없이 영화의 제목이 된 엘라 핏제럴드의 노래, “Like Someone in Love”가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평화롭게 흘러나올 때, 우리는 방금 전의 놀라움과 충격과 이 노래의 급작스러운 평온함 사이에서 일종의 당황스러운 쾌감을 느끼게 된다. (씨네21의 정한석 기자는 이를 ‘이상한 해방감’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시작부터 내내 상호 이질적인 것들을 병렬 배치하면서 계속해서 갈등과 긴장감을 고조시키다가, 이를 극대화하여 마지막 순간 가장 큰 폭발과 충돌이 벌어지고 나서야 오는 쾌감, 혹은 해방감. 이는 단순히 마침내 비밀이 벗겨졌다는 차원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화 초반, 아키코가 할머니와 차마 대면하지 못하고 할머니가 서 있는 도쿄역 근방을 몇 번이고 맴돌다가 결국 ‘도망쳤’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충돌을 두려워하며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문제를 대면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방식이라면, 이 영화의 엔딩은 타협 없이 이 갈등을 밀어부친 끝에 다가오는 파열이 두려운 것이긴 하되 그 이면에 어떤 쾌감을 안겨 주는지 드러낸다. 

영화가 끝나고도, 또 며칠이 지나고도 오래도록 남았던 이 마지막 장면,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으로 인해 다시 의미를 부여하게 된 앞엣 장면들을 생각하며, 나는 뜬금없이 우리가 두려워하고 피하려 하는 세계의 종말, 혹은 ‘혁명’이란 게 이런 걸까, 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뜬금없는 게 사실이지만, 근간 우리가 봐왔던 “모두 망해버려라!”라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들, 특히나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보다도, 모두가 망하는 순간이 어떤 것인지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엔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박명진 | 달리는 꿈의 상자, 모모 (2012)

2010년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야 이봉우 대표와 2008년 폐관한 명동의 CQN(씨네콰논) 극장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게 되었다. 일본의 뉴스를 전문으로 전달하는 포털사이트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지금의 한류를 있게 한 선구자이자 주역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에 좋은 일본영화를 계속해서 소개했고 나아가 한-일 간 주목할 만한 공동합작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그의 이름은, 일본영화에 관심이 없더라도 익숙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결국 명동 CQN극장을 철수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그가 소위 ‘이봉우 부활제’, 즉 ‘이화회’를 통해 재기를 선언하고 이동영화관의 구상을 내놓았다는 내용의 그 기사를 보며 그저 마음으로 응원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소식은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2012년 서독제에서 소개된 뒤 이후 간간이 한정된 기회를 통해서만 상영되었던 영화 <달리는 꿈의 상자, 모모>를 통해 그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화회 행사에서 발표했던 이동영화관의 꿈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는 중이었다. <달리는 꿈의 상자, 모모>는 이봉우 대표와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동료들이 어떻게 이동식 영화관, 즉 ‘모모’를 마침내 설립하였는지, 2011년 오프닝 행사와 제1회 토호쿠영화제를 개최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이봉우 대표의 약력과 과거를 간단하게 전달하되 그가 어떤 인물인지 소개하는 차원에서 그칠 뿐, 그가 한국에서 거머쥐었던 영광과 어이없게 고초를 겪으며 추락한 사연을 길게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마침내 ‘모모’를 선보이기까지 그의 정성, 그리고 이 ‘모모’를 통해 그가 도달하고 싶었던 꿈과 영화에의 신념을 보여준다. 이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나 “좋은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를 넘어서서, “좋은 영화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프랑스에서 10여 년 전 처음 이동식 영화관을 보며 느꼈던 그의 감회, 그리고 그가 달리는 영화관을 만들게 된 계기를 얘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영화’라는 것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탄생 때부터 영화는 ‘신기한 구경거리’이자 ‘놀라운 이야기를 담는 그릇’일 뿐 아니라, 다수의 사람이 한곳에 모여 함께 보는 미디어였다. ‘영화 보기’는 그렇기 때문에, 영화 초반 이봉우 대표가 지적하듯 소위 ‘예술성 있는’, 혹은 유수의 권위를 지닌 영화제에서 수상함으로써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영화들을 보며 개인의 교양과 안목을 함양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고 공감대를 나누며 서로에게 연대감과 소속감을 느낌으로써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누는 행위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칫 열혈 영화광과 예술영화 애호가들이 손쉽게 빠지기 쉬운 함정, 즉 개인으로 파편화되어 각자의 골방에 틀어박히는 ‘고독한 마니아’의 길이 아닌, 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 하는’ 행위로서의 영화 보기를 강조한다. 

그가 이런 신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영화가 가진 본질적인 힘을 믿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서 인터뷰 내내 “영화가 얼마나 사람들을 크게 위로할 수 있는지,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 강조한다. 또한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극한 상황에서도 빵뿐 아니라 ‘장미’를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는 산업 논리에 따라 오히려 극장이 없어지고 영화를 볼 수 없게 된 이들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권리, 그것도 좋은 시설이 갖춰진 극장에서 제대로 된 소스로 제대로 상영되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권리, 그리하여 영화가 공공성을 갖고 커뮤니티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역할을 증명하려 한다. 그 노력의 산물이 바로 ‘모모’다. 그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그래서, 3.11 지진 쓰나미로 폐허가 된 미쓰시마 현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매일 보고 즐기는 영화를 도무지 볼 수 없게 된 곳. 

현재 극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내겐 이 영화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처음 영화와 사랑에 빠졌을 때의 기억뿐 아니라,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기로 하면서, 더욱이 산업 현장이 아닌 보다 ‘활동’에 가까운 공간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품었던 꿈과 이상을 상당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현실의 장벽 앞에 주저앉아 한숨을 뿌리며 눈물을 훔치던 와중, 이 영화가 나직하게 어깨를 두드려주는 듯한 느낌이다. 

ps. 2013년 5월 28일, 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독립영화 쇼케이스’에서 상영된 영화의 자료로 쓴 리뷰. Dropbox 안에 둔 글을 무심코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