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 |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
애송이 올리, 폭풍처럼

보는 내내 든 생각 : 히야, 리들리 스콧 신나게 물량 때려부었군!

좋아하는 배우들이 무더기로 나와주시는 데다가 퍽 관심있는 중세, 게다가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한다고 해서 기대했다가, 어영부영하느라 놓쳤던 영화를. 어찌어찌 스크린으로 보았다. 보고난 후 느낌… 리들리 스콧은 이제 더 이상 나를 흥분시키지 못하는구나…

영화가 클래이맥스로 삼았던 장면은 물론 예루살렘성 방어전이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가 이루어진 이 시퀀스는 확실히 “흥,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따위에 질 수 없어!” 하는 야심이 묻어난다. 거대한 투석탑을 비롯해 스크린을 온통 꽉채웠던, 성벽에 연이어 쏟아지는 불대포들, 엑스트라의 숫자만 해도, 특수효과와 CG… <반지의 제왕>의 그 헬름협곡 전투씬을 ‘물량으로는’ 능가한다. 그런데.

많은 감독 / 프로듀서들이, 스페셜 이펙트 수퍼바이저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영화는 그럼에도 여전히 미장센과 편집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고대 전투씬의 최고봉으로 나는 언제나 케네스 브래너의 <헨리 5세>와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을 꼽는데, (아 미안하다, <코난 더 바바리안>은 보지 못했다.) <반지…>의 경우야 돈이 막대하게 들어갔다고 해도, ‘감독’ 케네스 브래너의 데뷔작인 <헨리 5세>의 그 전투씬은 돈으로 바르기는커녕 제작비를 아끼고 아껴 만든 씬임에도, 그 어떤 ‘돈으로 쳐바른’ 영화가 보여주지 못하는 전투씬을 보여준다. <글래디에이터>의 그 20분 전투씬이, 물량이 없어서 비평가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게 아니지 않는가. 물량으로 바르기만 한다고 훌륭한 시퀀스가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컷을 만들어 붙이느냐라는, 그리하여 흐름을 어떻게 만드느냐라는,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지점들이 훌륭한 시퀀스와 아닌 시퀀스를 가른다. 그리고 그 점에서, 이 예루살렘 전투씬은 실패다.

Kingdom of Heaven
예루살렘성 전투씬, 화려하다. 화려한데...

뭐, 당시 예루살렘 방어전에 쓰인 전술을 얼마나 충실히 복원을 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시나리오 상에서 공을 들인 흔적은 보인다. 훌륭한 ‘전략가’로서의 총사령관 발리안 경은 성벽에서 400미터 지점, 300미터 지점, 150미터 지점에 표시를 해놓고 적군이 그 지점을 통과할 때마다 미리 준비해놓은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며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하는 살라딘 군에게 타격을 입힌다. 예루살렘 성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그는, 성내에 남아있던 물적 자원과 인력자원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면서 지략가로서의 면모를 뽐낸다. 하지만 이것이 스크린에 보여지는 방식은,…

뭐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시시했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어차피 발리안 경이 실제 인물은 아닐 터이고, 당시 시대적 배경에는 가히 혁명적이다 싶을 정도로, ‘백성’을 아끼는 참된 영주 –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가진 귀족… 뭐 살아온 게 그랬다곤 해도 – 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도 오랜만에 본 것같고, ‘우아하고 품위있는 아랍군’의 모습은 말만 들었지 영상으로 보는 건 거의 처음이지 싶다. 야만인 타령을 해대는 중세 ‘꼴통’ 기사들의 편견과 달리 훨씬 더 깔끔하고, 과학적이고,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풍성해 보이는 모습. 그저 대장장이에만 불과했던 평민이 어느 날 영주의 사생아로 밝혀진 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존경받는 장군 및 영주’가 되어가는 과정도 뭐, 별 깊이는 없지만 나름 흥미롭고.

Kingdom of Heaven
위엄에 넘치는 마스크 뒤의 젊은 왕, 볼드윈.

게다가 그 훌륭한 배우들이라니. 비록 에드워드 노튼은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만, 리엄 니슨은 참 일찍도 화면에서 사라져 버리시지만, 그럼에도 나는 배우들이 참 좋았다. 에드워드 노튼, 하면 항상 ‘너무나 미국적인, 미국 남부 촌뜨기 출신’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가 볼드윈 왕을 연기한다고 했을 때 “과연 어울릴까” 했건만, 너무 잘 어울리는 건 기본이고 얼굴을 마스크로 감싸고 온몸을 옷으로 붕대로 둘둘 말았음에도 더할 나위 없는 품위와 존귀한 위엄과 지혜로운 카리스마를 온몸으로 발산한다. (흑… 새삼 버닝…) 언제나 그렇듯 제레미 아이언스와 리엄 니슨도 위엄 넘치고 품위있게 영화를 빛내주시고. 에바 그린은 참으로 매력있으며… – 아아, 완전히 평민이 되어 병사들을 치료해주는 여왕이라니! – 얼굴을 잠깐 보이긴 하지만 데이빗 듈리스도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캐릭터를 참 훌륭하게, 슬프게 보여주시고… 또 살라딘 왕도 멋있었고. 올리도, 이런 대작 영화에 게다가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조연으로 출연하는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조금 존재감이 부족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그 캐릭터를 잘 살린 것도 같고… (아악, 근데 러브러브씬이 왜 그리 짧은 거냐?!!)

어쨌건 다 보고나서 든 생각.

1) 뭐, 그냥 볼 만했네. 사운드 좋고 화면 큰 극장에서 제대로 봤으면 훨씬 나았으려나.
2)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올리의 발리안 경이 아니라 에드워드의 볼드윈 왕이 아니었을까.
3) 이거, 영화를 만들다보니 부시 씹기가 된 게 아니라 부시 씹으려고 작정하고 찾아만든 영화 아닐까.

ps. 난 사실, 저 Kingdom of Heaven이란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든다. 그냥, 아주 개인적으로, 특별한 제목이다. … (땅이 아닌) 하늘의 왕국이여,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나타나는 아이리시 코드들

한국에서 나오는 민족주의 얘기, 별로 안 좋아라 한다. 아니 좀 싫어라 한다. 물론 나 역시 “다케시마는 우리 땅” 소리에 허걱 하고, 친일 잔재 청산 못한 채 오히려 일본 잔재를 기본 토대로 삼아버린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몰역사성에 분노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란 것이 언제나 우리와 다른 사람을 가르고, 우리 안에서 맹목적이면서 다른 사람을 배제해 버리기에, 아무리 ‘저항담론’으로 민족주의 얘기가 중요하다는 건 인정해도, 지금에 와서 무조건 민족주의 외쳐버리면 짜증난다. 한민족이 아니라서 이주노동자 착취해도 되고, 같은 민족 아니어서 길가는 일본 사람 테러해 버리는 건 나쁜 일 아닌가. 또, 같은 민족이라고 정주영을 영웅 취급하는 것도 짱나고 말이다. (정주영 죽을 때 한총련에서 추도사 성명 발표했었다.) ‘같은 민족’이라며 억지로 동류의식을 강요받는 순간, 그 안에서 예를 들어 성차별이나 계급차별 같은 건, 장애인차별과 성적소수자 차별 같은 문제는 지워져 버리고 만다. 민족주의자들이 성차별이나 장애인문제를 비롯한 각종 소수자 문제에 둔감을 넘어서 무지로 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온갖 인종과 민족들이 드글대며 살아가는 미국이란 나라에서, 또 자신을 분명하게 ‘미국인’이라고 정체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미국이란 나라에서, “나의 뿌리”를 확인해 가는 작업으로서의 민족주의란, 이 좁은 땅덩이 위에서 비슷한 사람만 봐온 한국이란 나라에서 말하는 민족주의하고는 다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 소수인종학을 가르치고 있는 일레인 김이라는 훌륭한 학자가 썼던 글이, 나의 뿌리,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 민족주의로 결론을 맺는 걸 보고 허걱!한 적이 있는데, 생각해 보라. 그 미국 땅에서 원래부터 기득권이었던 WASP (White Anglo-Saxon Protetant)는 굳이 민족의식, 자신의 뿌리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인종과 민족이 섞이고 여러 혈통이 섞인다 해도, 사람 사는 동네라는 게 대체적으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동네를 이루고 살다보면, 그 동네별 특성이란 게 나오는 법이다. 게다가 고난과 차별을 당하고, 한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 나라의 가장 밑바닥을 지탱하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긍지와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뿌리를 찾는 작업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신뢰와 사랑으로 뭉친 유사 가족이 피로 이어진 전통적인 가족을 대체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절망 속에서도 꿈을 찾는 사람들이 나누는 최고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도 하다. ‘여성 복싱’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를 진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플롯에서 풀어내지만, 매끈하게 잘 만든 영화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노인의 지혜와 따스한 사랑이 곳곳에 배어있을 뿐 아니라 이를 적절하게 표현해내는 훌륭한 테크닉까지. 하지만 이 영화는 미국 내,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그토록 오랜 고난과 한을 쌓아온 아일랜드계, 즉 아이리시들의 주체성이나 긍지 같은 걸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글은 이 영화에서 나오는 아이리시 코드를 살펴보고, 우리가 접해온 수많은 다른 영화들의 아이리시 코드를 잠깐 디벼보기 위해 쓰는 글이다.

1.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드러나는 아이리시 코드들

먼저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모태가 된 책, “불타는 로프(The Burning Roap)”를 쓴 F.X.툴은 아일랜드인이다. 당연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역할을 맡은 영화의 주인공 프랭키 던 역시 아일랜드 계통. 그는 스크랩(모건 프리먼)의 퉁박에도 불구하고 계속 게일어(아일랜드 전통어)를 들여다보고, 게일어로 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 예이츠의 시를 즐겨읽는다. 미국식으로 퓨전화된 레몬파이가 아니라, (정통 아일랜드 식의) ‘수제’ 레몬파이를 먹는 게 인생의 낙이었기도 하고. (매기와 함께 레몬파이를 먹고나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까지 말하는 건 먹는 것 갖고 오버한 거라기보다는 그런 향수를 표현한 것일 게다.) 그리고… 매기 역시 아이리시다. 미국인 이름들 중 ‘오하라 O’hara’나 ‘맥도날드 McDonald’, ’피츠제럴드 Fitzgerald’처럼 O’나 Mc, Fitz로 시작되는 라스트 네임은 그가 아일랜드 계통임을 보여주는 징표다. (원래 ~의 아들이란 뜻.)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다시피, 프랭키가 매기에게 선사하는 ‘모쿠슈라(Mo Cuishle)’라는 말은 게일어, 즉 아일랜드어인데, 이 이름이 새겨진 가운을 처음 입고 등장한 경기 장면에서, 그녀의 등판의 글자를 보고 관객들이 호들갑을 떨며 반응하던 것을 기억하는가? “등판에 글씨 봤어?” 사람들이 이렇게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지 신기하고 특이한 이름이어서가 아니다. 그 이름이 바로, “나는 자랑스러운 아일랜드인”이라는 선언문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녀가 처음 그 이름을 걸고 나선 그 경기가 바로 영국땅에서 벌어진 영국 챔피언과 싸우는 경기였기 때문에 아이리쉬 관중들에겐 더욱 특별한 의미가 됐던 것이다. 아일랜드인 소설 원작자가 굳이 모쿠슈라의 첫 경기장으로 영국을 택한 것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다른 유럽 원정경기를 생략한 채 이 장면을 스크린에 담은 것도,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모쿠슈라의 가운 색, 초록색은 아이리쉬의 최대 명절인 성 패트릭 데이의 상징색이라는 것을 아시는지?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이며, 그 날을 기념하는 성 패트릭 데이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초록색과 네잎 클로버이다. 그냥 초록색이면 우연한 선택일 수 있지만, 게일어로 된 별명이 새겨진 초록색 가운은, 그냥 초록 가운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이리시를 상징하는 가운인 것이다.

이후 경기장마다 모쿠슈라를 환호하는 사람들은, 그저 권투 잘 하는 선수 하나를 응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아이리쉬의 전통을 내걸고 아이리쉬의 긍지와 주체성을 전면에 표현한 자신들의 대표주자를 응원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헤비급이건 뭐건 미국에서 차례대로 선수들을 이기는 어떤 황인선수가 영어로 된 이름이나 단어가 아닌 한글로 “내 사랑”이라고 쓴, 청색과 붉은 색이 섞인 가운을 입고 매 경기에 출전한다면, 그리하여 첫회 KO승으로 연승을 거둔다면, 미국 내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밑바닥 한국 출신 미국인들에게 과연 어떤 긍지와 자부심을 줄지 말이다. 어쩌면 매기가 웰터급 타이틀전에서 다 이긴 게임에서 결국 상대의 반칙으로 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아일랜드라는 나라의 고단하고 한 많은 역사와 연결지어 생각해 본다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2. 다양한 영화들에서 드러나는 고난과 한의 이름, 아이리시

원래 영국 본토에서 살고 있던 토박이들은 켈트인(혹은 셀트인)들이다. 아이리시의 선조들. 하지만 이 땅에 앵글로-색슨 족이 들어오면서 땅을 두고 싸우게 되고, 결국 켈트인들은 계속해서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역사적 저항과 반발심이 만들어낸 켈트 영웅이 바로 아더왕이다. 작년에 개봉한 클라이브 오언의 <킹 아서>은 바로 이 시기를 신화나 전설이 아닌 역사적인 이야기로 구성해 보여주고 있다. 아더를 비롯해 갤러해드, 랜슬롯 등의 원탁의 기사들과 귀네비어가 모두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켈트인들, 그것도 여러 핏줄이 섞이기 이전의 켈트인들이기 때문이다.

영국 본토에서 주도권을 차지한 앵글로-색슨 족은 일찌감치 왕조를 열었고, 켈트인들은 잉글랜드로 흡수되거나 소규모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고 또 지금의 아일랜드 지역에 모여살게 되는데, 특히 지금의 아일랜드 지역은 지리적 특성상 자신들의 문화를 강하게 보존해오게 된다. 영국은 잉글랜드를 기반으로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까지 합병해 브리튼 제국을 경영하게 된다. 노르만인이 앵글로-색슨족을 접수한 이후에도, 아일랜드는 영국 왕에 따라 때로는 브리튼 왕의 간섭을 받는 자치 왕(종주왕) 하에 자치를 하기도, 영국 본토의 직접 통치를 받기도 했지만, 결코 독립을 위한 봉기를 멈춰본 적이 없다. 결정적으로, 영국 왕이 국교를 영국 국교로 전환하고 난 후에도 아일랜드인들은 카톨릭을 고수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인 대다수에겐 위대한 왕일지 모르지만,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착취와 차별과 직접통치, 그리고 개종을 강요한 왕인 것이다.

1800년에 아일랜드가 법적으로 대영제국에 통합된 이후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은 더욱 거세졌으며, 결국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이루어내어 아일랜드 공화국(그 이전은 에이레, 수도는 더블린)을 성립하긴 하지만, 이것은 아일랜드 섬의 일부일 뿐이다. 영국이 영국 잉글랜드의 본토인들을 역사적으로 계속 이주시켜 잉글랜드인과 아일랜드인들이 혼재된 북 아일랜드는 여러 모로 민족 분쟁이 끊이지 않는데, 여기에서 남-북 아일랜드 통일을 주장하는 무장단체 IRA와 잉글랜드인들 사이의 반목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일랜드 분쟁’의 배경인 것이다. 우리가 ‘피의 일요일’이라 알고 있는 사건 – 영화 <블러디 선데이>, U2의 노래 “Sunday Bloody Sunday” 등 – 역시,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아일랜드인들을 향해 영국이 무기로 진압한 사건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더 복서> 등을 감독한 짐 쉐리단의 일련의 작품들이나 테리 조지 감독의 <어느 어머니의 아들>은, 바로 이러한 바로 이러한 긴장 속에서 아이리시들이 부당하게 받은 탄압을 고발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형편이니 과연 아일랜드 사람들의 박탈감이 어떻겠는가. 영국 본토에 의해 계속 착취당하고 억압받고, 계속 독립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더욱 영국 본토에서 아무리 개발과 발전이 이루어진다 한들 아일랜드는 여전히 못 사는 동네에 불과할 뿐이다. 영국 내에서도 변방에 변방일 수밖에 없는. 알란 파커 감독의 전설적인 음악영화 <코미트먼트>에서 “아일랜드인은 유럽의 흑인이다”라는 대사까지 나오는 건 이유가 있는 것이다. IRA, 즉 북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무장단체가 무장 투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의외로 IRA가 등장하는 굉장히 많은 영화를 보아왔다. 존 부어맨 감독의 <제너럴>은 배경이 더블린이다. 바로 아일린드 공화국의 수도. <제너럴>의 영어가 도통 알아먹기 힘든 영어인 것은, 아이리시의 ‘사투리 영어’이기 때문이다. ‘장군’이라 불리던 도둑왕 마틴 카힐이 총을 맞는 것은 IRA한테서인데, 그가 아일랜드의 보물격인 명화들을 바로 왕당파 – 즉 영국 본토의 왕을 지지하는 – 에게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닐 조단 감독의 경우,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헌신한 아이리시 영웅 마이클 콜린즈에 관해 만든 영화가 바로 리암 니슨이 열연한 <마이클 콜린즈>. <크라잉 게임>은 좀 별난 로맨스가 아니라, 사실 매우 정치적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 영화다. 우리의 주인공 스테판 리가 바로 IRA의 일원이며, 그가 억류했던 영국인 병사인 포레스트 휘태커는, 정통 앵글로-색슨인이 아니라 흑인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만나게 되는 제이드 데이비슨은 흑인 혼혈에 트랜스젠더. 이쯤 되면 이 영화는 결국 소수자들끼리 싸우고 죽이고 죽일 수밖에 없는 모순을 사랑을 통해 화해를 시도하는 영화가 아닌가 해석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돌아와 보면, 매기가 아버지와 갔던 곳이라며 프랭키를 데려가는 파이집 이름이 바로 IRA ROADSIDE DINER이다. IRA는 ‘아이라’라는 여성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IRA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미국으로 가보자. 아일랜드인들이 대거 미국땅에 발을 딛는 건 19세기 발생한 감자기근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아일랜드인들은 미국행을 택하기도, 영국행을 택하기도 했지만, 영국으로 갔던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정부에 의해 미국행을 강요받았다. 이 결과 이 시기에 대규모 아이리시의 미국 이민이 이루어진다. 고국에서 재산깨나 가지고 있었던 이들이야 새로운 신천지 미국땅에서 새로운 농장을 일구며 부를 축적하지만, 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건 당연한 일. 아마도 아일랜드 이민사에 대해서는 톰 크루즈 주연의 <파 앤 어웨이>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리시들은 미국에 막 이민왔던 당시 ‘흑인 금지’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인 금지’ 팻말의 차별을 당했다고 한다. 인종차별은 언제나 가난과 함께 심화되는 법. 그렇기에 그런 삶은 소방관이나 경찰처럼 말급의 공무원 진출이나 적극적인 정계진출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암흑의 세계에도 빠르게 진출한다. 지금이야 미국 갱영화 하면 <대부>를 비롯한 이탈리아 계통의 마피아를 떠올리지만, <대부>의 알 카포네가 자기 권력을 확립하면서 축출해낸 이전 갱이 바로 아이리시 갱 두목인 오배니언이었다. 코엔 형제의 누아르 걸작 <밀러스 크로싱>은 바로 아이리시 갱들 사이 세력다툼을 그린 영화다. 갱과 노동조합의 결탁을 고발했던 영화들, 예컨대 <워터프론트> 같은 영화는 바로 아이리시 갱과 아이리시 노동조합의 결탁을 고발하는 영화들이다.

미국영화에서 또 재미있는 건 경찰과 소방관들이 대강 아이리시인으로 표현된다는 사실. 지금도 미국 전체 경찰의 1% 이상이 아이리시라 한다.<분노의 역류>에서 소방관들의 장례식에 백파이프가 동원되는 건, 미국의 소방관들의 꽤 많은 퍼센테이지가 아이리시이기 때문이다. (‘백파이프’하면 바로 생각나시리라.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가 푸른 곰과 싸우는 웰터급 타이틀 매치를 할 때 프랭키가 “밴드도 불렀다”며 백파이프 연주자들의 뒤를 따라 경기장으로 입장하는 장면을.) 이는 가난하고 전문기술이 없는 밑바닥 사람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기 위해 선택한 직업들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리고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서부극에서 유난히 아이리시들이 많이 활약하는 현상도 이해가 된다. 대거 이민 당시 벌어진 남북전쟁에 아이리시들이 참전을 많이 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이 서부를 떠돌게 된 것. 존 포드 감독의 서부극의 영웅 존 웨인이 바로 아이리시다. 존 포드의 또다른 영화 <분노의 포도>에서 극단의 빈곤으로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이들 역시 아이리시 가정들이다.

원래 아일랜드 공화국에서도 90% 이상이 카톨릭을 믿는다. 주로 미국에서 터를 잡은 대다수의 아일랜드 출신들은 미국에서도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백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백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생활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닌 성당인 것.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도 ‘교회’가 아닌 ‘성당’이, 목사가 아닌 ‘신부’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리시 계통이기 때문이다.

3. 소중한, 나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렇게 아이리시 코드들을 살펴보면, 이 영화에서 프랭키가 매기를 향해 모쿠슈라, 즉 “내 소중한 나의 혈육”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조금 더 다면적으로 다가오고, 또한 사람들이 그토록 ‘모쿠슈라’를 연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조금더 짠하게 다가온다. 혹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매기가 경기를 벌이는 경기장 안에서 그녀를 응원하는 관중들은 심지어 아일랜드 국기를 들고 있기까지 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보수성이 더욱 드러난다.

실제 자신의 피를 나눈 딸과 소식이 끊겨버린 그에게 ‘의붓딸’과도 같은 매기는, 아이리시들 특유의 문화습성을 가지고 있긴 해도 특별히 자기 뿌리에 대한 열망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팬들이 주로 아이리시라는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고, 병상에 누워서는 프랭키에게 “또 그놈의 잘난 게일 책 봐요?”라고 묻는다. 게일어 책을 노상 들여다보고 예이츠의 시에 심취한 프랭키와는 완전히 다르다. (예이츠의 시는 아일랜드의 전통문화유산을 영국의 문학 전통에서 새로이 정립하고자 했던 흐름에 서 있다.) 이들이 유사 부녀간의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보수적인 사람으로 하여간 아들래미가 아닌 새로운 딸래미를 훈련시키고, 또 안락사하게 하는 정이란, 시대의 변화를 맞이한 진정한 보수주의자이기에 오히려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엔 아주 흐릿하게, 아이리시로서의 정체성이 놓여있고.

원래 민족주의란 보수적인 것이다. 우리 가족, 우리 민족, ‘우리’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우리’를 만들어가는 테두리를 어떻게 놓을 것이냐에 따라, 유연성있는 보수와 꼴통 보수가 갈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에겐, 제대로된 보수주의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립다. 똥배짱 부리면서 자식들을 쥐어패는 보수주의자 아버지가 아니라, 자식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접고서 자식이 가장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보수주의자 아버지. 또한 다른 이를 기꺼이, 자신의 가족으로, 혈육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보수주의자 아버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의 보수주의가 놀라운 건, 원래 제대로된 보수주의가 그래야 하듯 넓디넓은 포용력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에 어느 한 구석은 찜찜한 느낌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의 전작인 <미스틱 리버>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나는 두 번 전율했는데, 한 번은 이 영화가 너무나 완성도 높은 걸작이기 때문이었고, 또 한 번은 가족주의와 가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4. 사족

미국이란 나라는 내가 어느 민족 출신이냐보다 내가 어느 국적의 사람이냐가 더 중요한 나라다. 워낙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살려면 그건 당연할 수밖에 없다. 흔히 재미교포 2세, 3세가 한국어도 못한다고 욕하는 한국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그것이 온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의 뿌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하며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으로 가족나무를 그려나간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다양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미덕, 그것이 특히 눈으로 척 보기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살 수 있는 미국이란 나라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미덕이다. 다양한 문화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특유한 문화습성을 서로 알고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공존’해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 살펴본 아이리시 코드는 영화 전체를 관통해서 일관되게 나타나긴 하지만, 아이리쉬가 아닌 이들을 배척한다거나 미국 내 소 아일랜드를 세우자는 시도로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함께 사는 와중에 자신의 뿌리라는 걸 조금 더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막말로 아이리시가 아니라고 해서 매기의 팬이 못되는 것도,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며 감동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 글은, 어차피 한국에서만 살 사람이라면 별로 읽을 필요도 없지만, 미국영화를 조금 더 재미있게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며 쓴 글이다. 이런 사족을 덧붙이는 것은 딴 게 아니라, 이 글에서 짚어본 아이리시 코드를 과도하게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이끌어가는 사람이 나올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서적 : 빅자향, [영국사 – 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오치 미치오 외, [마이너리티의 헐리웃]
그 외에, 최초의 글쓸 의욕의 자극이 된 엽기민원의 한 마디, 성 패트릭 데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시고 이 글의 기획에 확신을 주신 마야님께 감사를.

마이클 만 | 콜래트럴 Collateral

인간이 도시의 부수물로 전락한다는 것.


톰 크루즈가 처음으로 악당 역할을 맡았다고 해서 화제가 된 영화 <콜래트럴>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반백의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고급 수트를 입은 쿨한 살인 청부업자 톰 크루즈도, 약간의 결벽증을 가진 성실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소중히 간직하고(만) 있는 택시기사 제이미 폭스도 아니다. 그것은, 인구 삼백만이 넘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LA 그 자체이다. 톰 크루즈의 냉소적인 대사에 의하면 LA는 지하철 역에 사람이 죽어도 6시간이나 방치가 되어서야 발견이 되는 도시다. 옆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모르는 비정한 도시고, 총을 맞아 죽어도 여간해선 범인을 잡을 수 없다. 검찰청 건물은 심지어 옆에 있는 철제 쓰레기통을 집어던져도 깨지지 않은 강화유리로 문을 달아놓았고, 거대하게 위로 솟은 건물 사이의 인간은 그저 개미 한 마리 정도로만 보인다. 그러니 살인 청부업자가 유유히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인 건 당연한 일이다.


언제나 도시들의 공통된 특성이긴 하지만 LA는 특히나 이민자들이 많은 도시다. 서유럽계 백인들마저 실은 이민자(혹은 침략자)들의 후손이니, 이탈리아계(같은 백인임에도!)나 멕시코 및 중남미계와 아시아인들만을 이민자 혹은 이민자의 후손으로 부르는 것은 언어도단이긴 하지만, 서유럽 출신의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40%가 채 안 되는, 그런 도시다. 이제껏 LA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다수의 백인과 끼워주기 식의 (주로 악당 전문) 히스패닉 혹은 이탈리아 계열, 그리고 가뭄에 콩 날 정도로 아시아인을 등장시켰던 건, 그러니까 몽땅 구라인 셈이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서유럽계 백인으로 ‘거의 유일하게’ 톰 크루즈가 등장하는 것이, 실제 LA의 현실에 가깝다. 특히 한국 관객들을 웃게 만든, 영화 곳곳의 한글 간판들은, 사실은 이제까지 LA를 배경으로 한 백인 감독들의 영화가 인종적 편견에서 의도적/무의도적으로 무시해온, LA의 확실한 구성 요소이다.


정말이지, 이 영화의 LA가 보여주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흑인이거나, 이탈리아 계 혹은 히스패닉계이다. 첫 등장 순간 양아치일 거라고 대부분의 관객의 오해를 받는 패닝 형사는 상징적인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이제껏 범죄물에서 취해온 형식, 그러니까 백인 남녀 커플 주인공과 흑인의 침입자, 다수의 백인 주변인물이라는 구도를, 이 영화는 정확히 반대로 뒤집고 있다. 톰 크루즈야말로 이 도시에 흘러들어온 낯선 침입자이자 도저히 LA라는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며,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주목을 받는 거의 유일한 서유럽계 백인이다. 그렇기에 그는 택시에 가방을 두고 내리고, 택시기사의 삶에 간섭을 하고(심지어 문병을 간다), 가방을 병실 바닥에 내려놓은 채 움직이는 안이함을 보이며, 직업적 살인 청부업자이면서도 아무리 사고 직후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노트북과 메모리 자료를 사고차량 안에 그대로 놓은 채 자취를 감춘다.


환락과 타락의 도시, 살인과 강도와 각종 범죄와, 토박이보다 뜨내기와 밖에서 유입된 유동인구가 훨씬 많은 도시 LA. 뉴욕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라 하더라도, 뉴욕과 LA에 대한 미국 바깥 사람들의 이미지가 극과 극을 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간 I Love NY을 외치는 수많은 영화들을 봐왔고, 정말 아무 특징 없이 시끄럽기만 한 도시인 LA 영화를 많이 봐왔지만, 조금 더 속살을 드러낸 LA를 그리는 이 영화가 처음인 듯. 영화 내내, 톰 크루즈는 제이미 폭스에게 다음 목적지를 (당연하지만, 구체적인 거리와 장소의 이름까지) 일러주고 제이미 폭스의 택시(와 영화제작진의 카메라)가 그곳을 향해 가면서, 우리는 일반적인 관광안내 엽서가 보여주는 LA의 광경이 아닌, 뒷골목과 좀더 현실적인 장소들로 이루어진 조금 특이한 아이템으로 구성된 LA 관광을 하게 된다.


그 거대한 과잉인구의 도시에서, 소외되고 고독한 현대인이라는 모티브가 상반된 직업과 배경을 가진 두 남자의 ‘적과의 동침’ 모드의 플롯을 통해 “심리적 대결”이라는 스토리를 취하며 갈등이 증폭된다. 현란한 비주얼과 액션의 ‘보이는 스펙터클’ 대신, 캐릭터 간 대결과 변화라는 ‘보이지 않는 스펙터클’을 취한 이 영화는 그래서, 영화 중간중간 코믹한 지점들마저 웃음과 함께 묘한 무게를 얻으며, 지구 반대편 인구 천만의 도시에 살고 있는 동양인에게도 정서적 동질감을 얻어낸다. 범죄물 중에서도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이런 타입의 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인 캐릭터의 확실한 구축과 캐릭터 간 갈등과 변화의 완급과 조절을, 마이클 만은 매우 능숙하게 다루면서 정확한 포인트를 집어내어 증폭시키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매우 훌륭하다. 톰 크루즈는 충분히 수긍 가는 살인 청부업자이며, 매우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제이미 폭스 역시 신뢰감을 준다.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음악도 매우 좋다. 각본가이기도 했던 마이클 만 감독과 그는 LA를 상징하는 음악으로 ‘재즈’를 설정했고, 이는 한인타운의 피버 클럽 씬을 제외한 영화 전반을 관통한다. 톰 크루즈의 재즈에 대한 취향은 일종의 조크인 듯. 흑인들의 음악이 어느새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이 되고, 그 이후엔 흑인들보다 백인들에게 주로 소비되는 사회적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역시나 외부의 이방인으로서, “LA에서는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재즈에 대한 취향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씬은 그 자체로 충분히 유머러스하기 때문에.


Oct. 18, 2004



(Otc. 28 추가) ps. 실은 서유럽계 백인, 이라는 말 대신 WASP라고 쓰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WASP들의 공포를 얼핏 드러내는 이 영화의 백인 톰 크루즈는 아일랜드계다.

김동원 | 송환

로버트 플래허티, <북국의 나누크>


자주, 다양하게 접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다큐멘터리는 무지막지한 오해의 대상이다. 일부는 엄정한 객관성의 산물이라 생각하고, 일부는 그것이 사회고발과 비판의 도구이자 결과물로 주로 사고한다. 그리고 일부는, 다큐멘터리 감독들까지 포함하여,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도구로 오해된다.


첫번째 오해는 다양한 견해와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충돌을 경험해보지 못한 미숙한 사회에서의 미숙한 오해에서 기반한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객관이란 인간 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올바른 의미에서의 객관도 아니며, 말하자면 ‘기계적 중립’이란 말이 그나마 가장 가깝다. 기계적 중립이 올바른 객관을 담보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기계적 중립이란 실질적 편들기이다. 형식적 평등이 실질적 평등을 담보하지 못하고, 도리어 실질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처럼. 다큐멘터리가 객관물의 산물이라 할 때에는, 다큐 감독이 어느 한 편을 들지 말아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자기가 지지하는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그리고 피사체의 이면의 진실을 보다 깊게, 다각도로 파헤쳐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영화이긴 하지만 <데드맨워킹>은 사형제도를 반대하면서도 지극히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독재정치를 막 지나쳐온 한국역사에서의 특수한 – 그러나 비슷한 역사를 가진 공동체들이 비슷하게 겪고 있는 – 결과이다. 거대한 적이 눈앞에 있을 때, 그리하여 우회적 비판과 풍자가 무기력할 때, 특히나 ‘영화’처럼 주류 필드에서 선수로 뛰려면 대규모 자본이 모여야 가능할 때(이것은 곧 권력의 통제권 하로 더 많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과 권력의 손이 덜 미치는 인디매체는 보다 직설법을 택하기 마련이고, 한국의 영화학도들은 ‘사회를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 카메라를 들었고, 사적이고 예쁜 이야기에도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다는 사실은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옳은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그러지 않는 게 더 좋은 주제에도 ‘소통’이 아닌 ‘설교’를 목적으로 삼는 우를 범하는 많은 경우들을 태동하고, 이것이 세번째 오해가 된다. (나는 ‘일방적’인 정보전달과 계몽의 다큐멘터리의 필요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이런 다큐멘터리가 많이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러지 않는 게 더 좋은’ 곳에도 이런 잘못을 한다는 데에 있다.) 이 경우 심할 때에는 피사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한다는 1차적 기본전제도 건너뛰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마이클 무어, <로저와 나>


<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 <그들만의 월드컵> 등을 연출한 최진성 감독, 그리고 <로저와 나>와 <볼링 포 콜럼바인> 등을 연출한 마이클 무어를 비난하는 일각의 목소리는 주로 첫번째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그들만의 월드컵> 상영장에서 영화 상영 이후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어느 관객이 ‘객관성을 전제해야 할 다큐멘터리에서 일부 피사체를 희화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여전히 첫번째 오해가 지독히 넓게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최진성 감독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이라면 오히려 세번째 오해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가 최진성 감독에게 던졌던 ‘영화를, 너무 쉽게 – 성의없이 – 만든다’는 비판은, 다큐멘터리가 다루고자 하는 대상, 즉 피사체에 대해 더 깊게 파헤치고자 하는 노력이 부재한 가운데 감독이 (객관적이 아닌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생각만을 밀어부쳤던 흔적에 대한 정당한, 그리고 다소 모호하게 표현된 비판이다.


사실 이 세 가지 오해는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근본적 원인도 비슷비슷하다. 우리는 다큐멘터리의 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경험해 보지 못했고, 나아가서는 사회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을 축적하지 못했다. 고발과 비판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던 시대의 흔적은, 이제 한 편의 다큐멘터리의 특징이나 완성도에 대한 논의는 침묵한 채 그 다큐멘터리의 소재에만 집중하는 버릇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물론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다큐멘터리의 교과서


<송환>을 보며 감동한 것은, 이 다큐멘터리가 감독의 고뇌를 솔직하게 그대로 드러내며, 피사체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송환>은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오해를 가볍게 뛰어넘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의 송환’이라는 정치적 주제를 다루면서, 김동원 감독은 지극히 성실한 소통과 관용, 그리고 다큐멘터리스트에게 요구되는 올바른 의미의 객관성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다.


<송환>의 카메라는 다른 다큐멘터리보다 훨씬 빈번하게 클로즈업을 사용한다. 피사체의 삶과 일상 속에 깊이 들어간 탓이다. 지독하게 성실하고, 지독하게 정직하다. 피사체뿐 아니라 관객과도, 그리고 다큐멘터리스트 그 자신과도 소통을 계속한다. 이 소통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더욱 넓고, 깊어진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러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한다. 첫 만남에서 시작해 해가 가고, 그들과 교류가 깊어질수록, 영화가 계속될수록, 우리는 감독의 눈을 통해 보이는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에게 카메라의 안내를 따라 점점 다가간다. 그리고 감독이 건네는 문제제기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들의 공존과 충돌을 생생히 목격하고, 이에 반응할 것을, 생각할 것을 요구받는다. 대부분 <송환>을 기꺼이 보러 간 사람들은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당연히’ 송환되어야 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겠지만, 이들은 이전에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납북자 가족의 문제, (그저 비웃을 수만은 없는) 반공주의자들의 송환 반대에 대해서도 들끓는 단순한 감정이 아닌 차분한 이성의 문제로 바라볼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새삼,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순과 그 복잡함,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의식적 / 무의식적 ‘상처’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민족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 운동을 함에 있어서의 몇 가지 힌트들.


나의 대학생활은 워낙 NL의 아성이었던 곳에 적을 둔 덕에 ‘반미 (반제) 반핵, 양키 고홈’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반미도 중요하지만 본질은 반자본이어야 한다는 쪽으로 옮겨갔다. ‘민족은 허상’이라는 급진적인 친구들의 영향도 분명 지속적으로 존재하지만, 나는 민족문제 역시 아무리 허상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정치적인 / 사회적인) 삶을 조직하는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마치, 수학에서 ‘허수’의 존재와 비슷하단 느낌이 든달까. 반자본이라는 틀에서, 미국의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생각. 하지만 ‘하나의 민족, 하나의 조국’ 따위의 슬로건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 내가 지금 꿈꾸는 건, ‘조국’ 따위의 말이 필요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강조할 때, ‘우리’가 될 수 없는 수많은, 배제되는 사람들, 의 존재 역시 나에겐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우리의 사회적인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모순으로서 민족문제가 존재할 때, 나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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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그 자체가 상처가 되고 만 모자(母子), 마침내 상봉하다.


또 하나,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을 반대하는 이들의 패턴. 그들은 ‘비전향’이 아닌 ‘미전향 장기수’가 맞는 말이라 주장하며(‘미전향’은 아직 전향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이는 ‘전향을 해야 한다’는 가치를 전제한다, 반면 ‘비전향은 가치중립적인 말이다.), 그들의 송환을 반대하는 중요한 가치로 ‘상호주의’를 들었다. 이주노동자 문제에 있어 그들에게 적대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외국인 노동자’라는 용어를 고집하며, ‘미등록 이주노동자’ 대신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라는 용어를 고집한다. 또한 역시나, ‘상호주의’를 내세운다. 참 놀랍도록 닮았다. 송환 반대와 불체자 반대의 슬로건의 본질은 같다. 그렇다면 이 본질의 문제점은? 나는 아직, ‘제도와 법 위에 사람이 있다’는 가치 하에서의 답밖에 못 찾았다. 이것보다 더욱 본질적인 대답이, 내가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송환>은 영화적 측면에서는 다큐멘터리가 지향하고, 진화해야 할 가치에 대한 방향은 무엇인가, 내용적 측면에서는 위에 열거한 저런 문제점들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라는 숙제를 내게 남겼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계속 ‘활동’이란 걸 한다면 어떤 마음자세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아픈 반성의 기회까지. 기분좋고 유용하며 소중한 문제 제기. 그래서 감독에게 감사한다.


Dec. 27, 2006에 다시 정리한 포스트스크립트
1. 마이클 무어 감독의 <로저와 나>는 노동자 뉴스제작단에서 비디오테입을 판매하고 있다. 여기에 작품소개가 있다.
2. 놀랍게도 <송환>의 홈페이지가 아직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