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안녕’이라 말할 수 없었던

* 이 글은 2014년 2월 2월 유명을 달리한 필립 시모어 호프먼을 기리며 이틀 후인 4일 미디어스에 게재되었다.

돌아보면 영화에 예전 같은 집착을 느끼지 않게 된 결정적 계기가 아마 한날 한시에 안토니오니와 베르이만이 가셨던 그 날이었던 것 같다. 모 매체의 영화 기자이던 그 무렵, 그날의 언론시사회 참석을 마치고 돌아와 울면서 부고 기사를 썼다. 드실 만큼 나이를 드시고 평생 내놓을 만큼 영화를 내놓으신 분들이셨지만 나는 그날, “영화의 세기가 정말 가버렸구나”라고 느꼈고 세계의 거대한 축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이후 내게는 영화가 실재가 아니라 어떤 유령처럼 느껴진다. 영화 속 장면들도 모두 유령의 환영처럼 느껴진다”고 누군가에게 고백했던 기억도 난다.

누군가에겐 저 세상에 가신 이런저런 다른 감독이었을 것이다. 다만 나한텐 안토니오니와 베르이만일 따름이다. 애도 끝에 받아들였다. 이런저런 감독이, 배우들이,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앞으로 더 많이 떠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실제로 무감각해졌다. 아직 젊다 못해 어린 배우가 뜻하지 않게 떠났을 때도 안타깝다, 고만 생각했다. 다른 거장들의 별세 소식엔 귀를 막았다. 그저 여전히 정정하게 활동하는 노감독들의 신작 소식에만 레이다를 집중시켰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정수리를 정통으로 휘갈겨 맞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비보 소식에는,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아마도 1997년 혹은 98년, 막 영화 번역자의 세계에 들어서던 내게 사수가 “길이도 길고 대사도 많고 포르노 얘기라서” 심드렁하게 초벌 번역을 넘겼던 영화가 있다. <부기나이트>였다. 번역자용 조악한 복사판 비디오에서 그를 처음 발견했다. 다른 조연보다도 비중이 적은 조연이었지만 그에게는 ‘더크 디글러(마크 월버그)에게 저도 모르게 사랑을 느낀다’는 설정이 있었다. 둔하고 커다란 몸집과 얼뜨기 같은 표정으로 마크 월버그에게 키스하던 장면은 영화의 흐름상 ‘코믹한’ 장면이 되기 쉬웠다. (실제로 작년에 우리 극장에서 이 영화를 상영했을 때도 그 장면에서 관객들은 폭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Boogie Nights

그러나 그 장면은 그저 코믹한 장면이 아니다. 그 옛날 그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 속에서, 마크 월버그의 반응에 곧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리고 혼자 차 안에서 처량한 울음을 토해내던 이 뚱땡이 배우는 어긋난 외사랑의 고독과 혼란을,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단체로 터진 관객들의 폭소는 어쩌면 ‘웃기고 코믹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날것의 속내를 맞닥뜨렸을 때 당황해서 터지는 히스테리컬한 반응의 한 형태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가 나만은 아니다. 여러 매체들이 꼽는 ‘호프먼 연기 베스트 X’ 따위 리스트에 언제나 올라가니까. 그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에서 나는 폴 토마스 앤더슨과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라는 두 명의 새로운 아티스트를 발견했고, 격하게 흥분했으며 그 행운에 감사했다. 영화가 몇 년이 지나서야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개봉한 탓에, 나의 발견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른 것이었고 나는 이를 행운의 특권으로 받아들였다. 과연 내가 알아본 대로 얼마 후 영화는 엄청난 주목과 찬사를 받았고 폴 토마스 앤더슨은 고작 두 번째 영화로 ‘우리 세대 가장 중요한 감독’으로 떠올랐다. 은밀하게 ‘나의 안목’에 의기양양하며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다소 유치하긴 하지만 이봐, 난 그때 20대였다고!)

이후 폴 토마스 앤더슨은 자신의 영화에 역할이 크든 작든 호프먼을 계속 기용했다. (호프먼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제외한 앤더슨의 모든 영화에 출연했다.) 앤더슨과 함께하며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주연만큼, 때로는 주연보다 더 큰 아우라를 뿜어내는 조연 배우가 되었고, 독립영화 감독들과 작가 감독들이 즐겨 찾는 배우가 된다. 앤더슨이 <부기 나이트> 2년 후에 내놓은, 비중이 훨씬 늘어난 <매그놀리아>에서 그가 흐느껴 울던 장면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간병을 맡게 된 필립 베이커 홀과 그 아들, 톰 크루즈 간 화해할 수 없는 반목과 상처와 슬픔이 안타까워 제 일처럼 아파하며 흐느껴 울던 간호사였다. 그 눈물엔 가식이나 위선 따위는 없었고 값싼 동정이나 연민과도 거리가 멀었다.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되는 저런 인류애적인 눈물이 정말로 가능하단 말이야? 머리로는 의심하면서도 결국 그에게 설득되었다.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 때문에 그는 내게 오랫동안 ‘인간 내면의 상처를 가장 연약한 형태로 가장 아프게 드러내는’ 연기로 각인됐다. 여전히 호프먼 했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도 바로 이 두 영화에서의 모습이다.

Magnolia

그런가 하면 <올모스트 페이머스>에서 ‘크림’지의 편집장으로 출연했던 모습은 또 다른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난사실 그때까지 그에게서 ‘지적인’ 면모를 볼 수 있을 거라곤 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단단한 방어벽 안에 감추어둔 약한 면을 드러내며 감정과 상처를 폭발시키는 캐릭터가 좀 더 익숙하면 익숙했지. 아마도 이를 극대화한 것이 <플로리스>의 트렌스젠더 역이었을 것이다. <올모스트 페이머스>에서 호프먼은 주인공 소년에게 “넌 시대를 늦게 태어났구나”라 말하며 안타까워하던, 그리고 주인공의 음악 사랑에 등불을 켜준 지적인 글쟁이였다.

어느 날 나는 이 영화를 DVD로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 문득 내가 눈과 손은 일에 쏠려 있어도 귀만은 DVD의 사운드에 쫑긋대며 리듬을 타고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에 수록된 온갖 명곡들과 ‘딱 내 취향’의 음악들이 아니라, 바로 호프먼이 대사를 뱉는 목소리에 취해 있었다. 그 전에도 이 영화를 몇 번 보았지만, 눈을 브라운관에서 떼고서야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음악적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여겨지는 목소리의 음색과 말하는 톤에서 이른바 “목소리만으로 황홀경에 빠지는” 경험을 이 영화를 통해서 했고, 이 배우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비장의 무기를 발견했다. 정작 그는 이 영화의 촬영 내내 지독한 독감에 걸려 있었다고 하지만.

Doubt

이후의 필모그래피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매그놀리아>에서 톰 크루즈와 함께 한 인연으로 <미션 임파서블 3>에서 메인 악당으로 출연하기도 했지만, 그는 대체로 큰 영화와 작은 영화를 오가며 든든한 조연을 맡았고 때때로 감독의 야심을 스크린에 120% 실현시키는 주연 배우로 활약했다. 2005년, 그가 트루먼 카포티로 출연하고서야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 배우에게 경의를 표했고, <다우트>(2008)에서 그가 자신의 롤모델로 꼽던 배우 중 하나인 메릴 스트립과 젊은 연기파 배우 에이미 아담즈와 함께 말 그대로 ‘불꽃 튀는’ 연기를 선보이며 새삼 격찬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찰리 카우프만이 창작자의 집착과 완벽주의를 블랙 코미디로 표현했던 <시네도키 뉴욕>이나, 시드니 루멧의 마지막 작품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그리고 앤더슨과 마지막 작업이 되어버린 <더 마스터> 같은 영화에서의 그의 모습 또한 기억한다. 화려한 ‘아카데미 버프’를 받았던 <카포티>나 <다우트>와 달리 <시네도키 뉴욕>이나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감독의 치열한 연출이나 그가 보여주는 최고의 연기에 걸맞는 관객의 주목과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근래에 개봉한 <마스터> 역시 극단적으로 변해버린 국내 극장 환경에서 생각만큼의 흥행을 거두진 못했다.

호프먼은 무수한 영화들에서 오랜 기간 조단역을 전전하는 시기를 거쳤지만, 많은 재능 넘치는 배우들이 흔히 밟는 전철, 즉 신체적 특징만이 강조되는 감초 연기로 소모되는 위험에서 다행히 벗어났다. 폭 넓고 다양한 영화들에서 그만큼 다양한 색색의 얼굴과 연기를 보여주었다. 종종 주인공을 압도했으며 광기를 발할 때는 물론 조용히 흐느낄 때조차 스크린을 폭발시킬 듯한 에너지를 관객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스크린에서 자연스러운 배경 중 일부처럼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한 모습으로 녹아 있다가, 어느 순간 감독의 카메라가, 그를 담아낸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이 너무 좁고 작게 보일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을 발휘하곤 했다. 평범하고 기능적인 캐릭터의 평범한 대사가 그의 몸을 통과하면 정말로 옆집 남자가, 같은 조직의 동료가 던질 법한 일상과 현실의 무게를 띄곤 했다.

그는 종종 비열하고 비겁하거나 처세술을 온몸에 철벽처럼 두른 흉물스러운 현대인들을 연기했으나 우리는 그를 미워할 수 없었고, 때론 더없이 선하고 부드러운 내면을 드러내며 웃기도 했으나 우리는 함께 웃는 대신 눈물을 흘렸으며, 다소 경박하고 코믹한 몸놀림을 할 때도 우리는 마음 편히 웃는 대신 세상살이의 페이소스를 맛보았다. 그가 진지하고 심각한 고뇌를 할 때 우리는 그의 깊은 내면 속 심연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는 ‘픽션에나 등장하는 단순하고 정형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없다.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치지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혹은 현실에서 마주칠 법하지 않음에도 어느 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복잡다단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의 속성을 다시금 사유하였다.

연기와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는, 한참 제3의 진보정당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들떠 미국의 대선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 팀 로빈스나 수잔 서랜든 등과 함께 할리우드에서 랠프 네이더를 지지했던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명으로도 기억에 남아 있다. 주어진 현실태 안에서 대안을 찾고 활발히 참여하며 활동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미국처럼 양당제가 확고히 뿌리를 내린 정치 지형에서 ‘다른 가능성’을 꿈꾸고 상상하는 사람 중에 내 우상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과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설사 랠프 네이더가 이상적인 대안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런 그가 동양의 달력으로 새해 둘째 날 죽었다 하고 사인은 ‘약물 과용’이라고 한다. 하루가 꼬박 지나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명복을 빌 마음의 준비가 되기는커녕 여전히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7년 전 안토니오니와 베르이만이 가셨을 때 나는 세계의 축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호프먼의 죽음으로, 그 무너진 세계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공기가 슈욱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우리에게 보여준 것보다는 아직 보여줄 것이 더 많이 있었다고 믿고 있다. 보지 못한 출연작도 많고 기대하고 있는 개봉 예정작도, 언젠가 그가 연기해 준다면 좋겠다 혼자 생각했던 역도 많은데. 노령으로 가신 이들의 죽음을 보며 ‘한 시대의 종말’을 느끼는 것과도, 아직 창창한 소년/청년의 뜻밖의 죽음을 보며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는 것과도 다른, 인생의 절정인 중장년기에 찾아온 때이른 죽음.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지만 아직은 늙지도 않아 무얼 어떡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내 세대에도 불현듯 죽음이 찾아올 수 있음을 예고하는 듯한.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의 그 처절하고 폭발적인 연기가 어쩌면 이제껏 약물에 의존해야 했을 정도의 깊은 고통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뒤늦은 추측이 든다.

Capote

관객으로서 나는 어쩌면 이제껏 그의 고통에 기생하여 쾌락을 누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수십 편의 영화에서 아름다운 연기를 남겨놓고 간 이 사람에게, 이제 나는 이 순전한 이기심을 내려두고 팬으로서 유일하게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어야 한다. 입에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을 그에게 해야 한다.

안녕, 이제 편히 쉬세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고 사랑할 거예요.

버드 보티커 특별전 상영작 8편에 대한 메모 @서울아트시네마

Budd Boetticher Special @ Seoul Art Cinema

폴 슈레이더가 ‘시네마’ 지에 게재한 버드 보티커에 대한 비평 연구 글, 「비평에서의 사례 연구 : 버드 보티커의 경우 Budd Boetticher: A Case Study in Criticism」의 번역문은 4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된 버드 보티커 특별전와 관련하여 서울아트시네마가 발행하는 소식지인 CINEMATHEQUE 2014년 4월호에 실렸고 이후 서울아트시네마 공식블로그에도 실렸다. 이곳을 누르면 새창에서 그 글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이곳에 다시 옮겨오지는 않는다. 최대한 한글로 쭉쭉 읽히는 번역을 지향했지만, 한정된 시간 내에 번역하면서 글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을 미리 보지 못한 까닭에 특정 장면의 묘사나 대사의 인용을 번역한 데서 오류가 발생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은 버드 보티커의 영화를 탐험하는 데에 좋은 가이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폴 슈레이더의 관점이 버드 보티커의 영화를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풍부한 하나의 관점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주의와는 반대의 관점에서, 폴 슈레이더는 버드 보티커의 ‘원형’해석으로 접근할 때 더 풍부해진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더불어, 적어도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버드 보티커 특별전에서 상영된 영화 8편에 대해서만큼은, 적어도 버드 보티커가 그리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심층적 분석 없이 그 영화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보티커의 서부극에서 여성은 기존의 서부극들에서의 여성의 기능을 외양상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남성들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투쟁해야 할 계기를 제공하거나, 혹은 그 투쟁으로 이뤄낸 성과, 즉 트로피로 보이는 면이 있다. 그러나 나는 보티커 영화의 여성들이 여기에서 더 나간다고 생각한다. 즉, 오히려, 보티커의 여성들이야말로 남성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내야 할 목적 그자체이며, 최종심급이다. 보티커의 여성들은 그저 그 남자 주인공들의 보호의 대상, 혹은 그들을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랜돌프의 보호를 받되 랜돌프의 선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주며, 나아가 그의 가치를 온당하게 드러내고 평가해주는 이들이다. 악당들은 이 여성들의 평가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혹은, 보티커의 여성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서 남성을 구원해 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나는, 보티커의 영화들에서 남자 주인공이 폴 슈레이더가 해석한 바 ‘원형’이라면, 여성 캐릭터들은 그 원형을 원형으로 만들어 주는 ‘신’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이것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선다운의 결전>이다. 이 영화는 랜돌프 스콧과 보티커 콤비의 일련의 서부극에서도 아주 이상하고 예외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즉, 랜돌프 스콧이 목적을 달성하고 표표히 떠나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에서 그의 목적은 좌절될 뿐 아니라 그는 추락한 상태로 떠난다.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 랜돌프의 ‘선함’을 입증해 주는 존재로서 카렌 스틸이 큰 역할을 한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결혼식을 중단할 뿐 아니라, 진실을 알기 위해 제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랜돌프를 찾아간다. 그런데 최종 장면에서 랜돌프 스콧의 복수에 ‘난입’하여 그 복수를 중단시키고 상황을 끝내버리는 것은 이 영화의 다른 여주인공, 즉 발레리 프렌치이다. 언제나 랜돌프의 선함을 증명하며 그의 편에 서주었던 신이, 이 영화에서만큼은 랜돌프의 복수의 대상, 악당인 존 캐럴을 선택하고 구원한다. 랜돌프가 신으로부터 당한 ‘배반’은 그러므로,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그런가 하면 <코만치 스테이션>은 랜돌프 스콧이 한 여인을 구하여 남편에게 데려다 주는 과정에서 겪는 일종의 ‘시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주인공, 낸시 게이츠는 영화 내내 평범한 서부극들의 여주인공처럼 보인다. 그녀는 랜돌프 스콧에게 가까스로 구출되어 그의 보호 하에 집으로 향하게 된다. 영화는 낸시 게이츠에게 걸려 있던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탐내며 이들의 여정에 함께하게 된 클로드 애킨스가 영화 내내 낸시 게이츠를 시험에 들게 하며 랜돌프 스콧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간 이 영화의 모든 의미를 완전히 뒤바꾸어버리는 엄청난 반전이 된다. 사실은 낸시 게이츠야말로 랜돌프 스콧을 시험하는 신의 위치였던 것이며, 최종적으로 그의 선함과 순수함을 승인해 주는 존재가 된다. 

3 Boetticher films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 , .

<투우사와 숙녀>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를 끌어가는 주인공은 당연히 투우에 매력을 느끼고 투우사가 되려 하는 로버트 스택이고, 그가 사랑에 빠지는 조이 페이지는 무수한 남성-영화들의 흔한 ‘그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스승인 마놀로, 즉 길버트 롤랜드를 자신의 잘못으로 잃은 뒤 그녀를 멀리하고, 굳은 표정으로 ‘죽음을 향해’ 마놀로의 분신이 되기를 준비하는 과정은 “그가 투우를 위해 사랑조차 접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 과연 그러한가? 애초 87분의 개봉판에서 124분으로 복원된 감독판은 “주로 멕시코 문화를 드러내는 부분들”이 복원됐다고 평가됐지만, 사실은 그에 못지 않게 로버트 스택과 조이 페이지 간 멜로가 더 촘촘해지도록 복원됐다. 이 영화에서 조이 페이지는 로버트 스택이 투우와 멕시코의 습성에 대한 존중을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때 그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외면하며, 로버트 스택이 마침내 ‘진정한 투우사’로 거듭났을 때 이를 최종 승인해 주는 존재이다. 그리고 로버트 스택이 마놀로의 진정한 적자임을 공개적으로 승인받는 것 역시, 마놀로의 부인인 첼로, 즉 케이티 주라도의 몸짓을 통해서다.

나는 앞으로 틈틈이 쓸 상영작 8편에 대한 감상문을 주로 이 관점에서 기록할 것이다. 내게 보티커는 서부극이라는 남성 장르, 특히나 여성 캐릭터가 그저 트로피로 존재하기 쉬운 이 장르에서 여성 캐릭터들에게 ‘존중심’을 가지고 접근한 감독이며, 주체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상을 넘어서 신의 위치에 여성을 아로새긴 감독이다. 그게, 이번 버드 보티커 특별전에서 8편을 모두 챙겨 보며 이 감독에게 가장 놀랍고도 흥미로웠던 점이다.

스즈키 세이준의 남자들

<야수의 청춘> 보다. 어제 트위터에 “나는 시시도 조보다는 고바야시 아키라”라고 썼는데 그 말 취소해야겠다. 물론 시시도 조의 매력을 제대로 본 건 한 편뿐이지만 반대로 단지 한 편만으로 불과 어제 뱉은 말을 취소한다면 게임 끝이지 뭐. 아니 그렇다고 고바야시 아키라가 싫어졌다는 건 아니고…


고바야시 아키라가 무겁고 진중하다면 시시도 조는 뭐랄까, 가볍다기보다,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다. 고바야시 아키라가 야쿠자의 과거로부터 도망치거나 현재 아쿠자임을 가족에게도 숨긴 채 괴로워한다면, 시시도 조는 친구의 죽음을 캐기 위해 적극적으로 과거로 돌아가 의도적으로 신분을 숨기고 위장해 적진에 잠입한다. 고바야시 아키라가 그런 회의에도 불구하고 가족 혹은 조직, 동료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고 적진 한가운데에 우직하게 돌진해 들어간다면, 시시도 조는 진짜 얼굴을 감춘 채 비밀을 캐내거나 적들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간계를 구사한다. 그리하여 고바야시 아키라가 끝내 그를 배신할 여자를 위해 오른쪽 뺨에 기다란 칼자국 흉터를 얻을 때, 시시도 조는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멋지게 속여넘긴다. 고바야시 아키라가 고지식하고 답답한 느낌인 반면, 시시도 조는 유들유들하고 능수능란한 타입. 평생을 순하고 모범생으로 살아온 나 같은 재미없는 인간은 당연히도 고바야시 아키라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시시도 조를 동경할 수밖에 없다.


 


에서의 고바야시 아키라.


 


에서의 시시도 조.



스무 살 시절 출연한 <푸른 유방>과 <돌아오지 않는 봄>에서 고바야시 아키라가 제멋대로 반항하는 청소년이었던 건 그래서 유난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의 반항은 소년과 청년 사이에 걸쳐진 이들의 흔한 방황 정도가 아니라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의 목을 졸라 소년원에 갔다 오는가 하면 새어머니가 과거 강간을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빌미로 갱과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개망나니의 수준이다. 20대 후반 ‘남자 어른’이 되어 야쿠자로서의 과거 혹은 현재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고바야시 아키라의 모습은 마치 스무 살 적 망나니짓에 대한 후회이자 참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두 남자의 나이가 든 모습은… 아아 고바야시 아키라는 찾아보지 말 걸 그랬다. 예상은 했지만 살이 붙고 느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저씨의 모습. (엉엉 세월아…) 요즘은 종종 TV 예능에 나이든 게스트로 나와 폼을 잡으시는 것 같고… 젊었을 적에도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화의 주제곡을 간간이 불렀던 모양이지만 나이가 좀 더 들고 나서는 배우보다도 엔카 가수로 더 유명한 것 같다. 포털 아무데에서나 고바야시 아키라를 돌려보면 그의 노래를 올려놓은 블로그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반면 시시도 조의 모습은 오, 카리스마 넘치고 멋지심… 젊을 적 너무 잘생긴 얼굴이 평범해 보여 개성을 부여하고자 양 볼에 실리콘을 집어넣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처음 봤을 때 저 배우는 볼에 웬 심술살이 저렇게 많냐고 킬킬댔는데) 더욱 그의 연기 스타일이나 미간의 주름 같은 걸 더 들여다 보게 된다. 고바야시 아키라가 듬직한 스타일에 이목구비가 큰 데도 어딘가 고운 선을 갖고 있다면 시시도 조는 전형적인 ‘숫컷’의 모습. 게다가 <육체의 문>에서는 전형적으로 조또 아무것도 없고 빌붙어사는 주제에 가오 잡고 큰소리나 내며 꼰대질하는 전형적인 재수똥 남자…이지만 몸은 좋다! (으잉?)


사족 같지만 전혀 다른 배우 한 명을 짧게 얘기해 보자면, <관동무숙>에서 오른쪽 상처에 칼자국을 하고 나오는 가와지 다미오는, 거기에서의 모습만 그랬는지 어쩐 건지 대체로는 유약하고 섬세한 청년 역할들을 맡았던 것 같다. 같이 영화를 본 이들이 ‘상당히 현대적인 얼굴’이라 평했는데, 나는 옆으로 늘린 김주혁 같다고 느꼈다. <야수의 청춘>에서 노모토파 두목의 동생으로 평소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이나 꼭지 돌면 면도칼로 얼굴을 회 뜨는 살벌한 청년)으로 나온다. <하이틴 야쿠자>, <모두가 미쳤어> 같은 청춘물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이가 이후 고바야시 아키라와 시시도 조, 노가와 유미코 옆에서 조연으로 나오는데(그래서 블로그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그를 ‘조연급 스타’라 호칭), 아직 못 본 스즈키 세이준 영화에 그의 출연작이 꽤 많은 듯하여 또 다른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려는 중이다.


 


ps.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오전 7:41에 페북에 쓴 글을 옮기다.



좀비의 정치학 : 2000년대에 좀비영화는 어떻게 부활했는가

2002년 대니 보일이 <28일 후>를 내놓았을 때만 해도 21세기의 첫 10년이 좀비영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2년 후 잭 스나이더가 데뷔작으로 <새벽의 저주>를 내놓았을 때 판도는 바뀌었다. 조지 A. 로메로의 시체 3부작 중 동명의 두 번째 영화를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28일 후>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질주하는’ 좀비가 등장하는 액션물이었고, 곧 ‘좀비가 빨라도 되느냐’를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영화가 그저 어쩌다 나온 예외적인 좀비영화가 아니라 이후 좀비영화의 붐의 선봉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해 영국에서 날아온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정통 좀비영화 계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로 팬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다. ‘빠른 좀비’의 등장에 격분했던 ‘좀비영화의 제왕’ 조지 A. 로메로의 귀환도 이듬해 이루어졌다. 좀비와 인간의 갈등을 계급 갈등으로 치환하며 좀비의 각성까지 담은 <랜드 오브 데드>를 내놓은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가 개봉한 2007년은 여러 모로 좀비영화의 붐에 정점을 찍은 해로 기억할 만하다. 이때를 전후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좀비물들은 국적과 형식, 내용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해졌고 ‘로컬화’됐다. <28일 후>의 속편 <28주 후>를 비롯해 로메로 감독의 <시체들의 일기>와 <시체들의 생존>, 스페인에서 날아온 <REC>, 미국산에 해당할 <좀비랜드>와 <아메리칸 좀비>, 캐나다의 <폰티풀>, 그리고 국내 독립영화 진영에서 만들어진 <이웃집 좀비>까지 다양한 좀비영화들이 국내 극장에서도 개봉했다. 물론 <워킹데드>나 <데드셋> 같은 TV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본격 좀비영화는 아닌 영화들도 좀비영화의 이미지나 플롯을 상당 부분 차용한 흔적을 보이곤 했다. 예컨대 <디센트>의 괴물도 근래 좀비들의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 반면 좀비가 현실세계의 여러 치명적인 전염병을 은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좀비영화와는 거리가 먼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도 플롯의 형식만으로는 좀비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바깥을 벗어나면 좀비를 다룬 컨텐츠들의 양은 더욱 방대해진다. 원래 고정적인 컬트팬들에게나 어필하던 하위장르였고 국내에서는 더욱 그랬던 좀비물이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장르가 됐을까? 게다가 이 기간 동안 좀비영화만이 흥한 것이 아니었다. 매혹적인 로맨스의 대상이든 좀비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 끔찍한 공포의 주체든, 뱀파이어 영화들 역시 함께 대중을 유혹했다. 그리고 올해 개봉 예정이라는 영화들의 리스트를 보건대 이런 현상은 한동안은 더 지속될 듯하다.

지상 최후의 사나이 The Last Man on Earth

동유럽에서 온 신비로운 귀족 혹은 구 유럽 앙시에레짐의 유물을 은유하는 뱀파이어와 달리, 좀비는 부두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아프리카에서 납치돼 강제이주를 당한 흑인노예들이 식민 지배를 받으며 발전시킨 종교가 바로 부두교다. 결국 좀비는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의 그늘 속 존재이자, 피식민지의 착취계층에서부터 퍼져나와 백인들을 잠식한 존재인 셈이다. 일반인으로 위장이 가능한 뱀파이어가 한때 에이즈와 동성애, 혹은 정체를 감춘 채 암약하는 공산주의와 간첩의 은유로 각광받았다면, 망가진 신체로 외형부터 식별 가능한 좀비는 보다 명백하고 또렷이 눈에 띄는 억압 기제를 은유하기 쉽다. 젠더, 인종, 이주노동자, 노숙인… 여기에 빠른 확산을 가속화하는 미디어의 존재. 이것들이 영화 속 뱀파이어와 좀비의 사회적 맥락의 의미를 풍성하게 해주는 키워드들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2000년대에 좀비물과 뱀파이어물이 동시에 부흥기를 맞았다는 점이 의미심장해진다. 사회계층의 양극화를 반영하는 두 얼굴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뱀파이어와 좀비는 전혀 다른 근원을 가졌음에도 미국 대중문화에서는 한때 거의 구별이 되지 않게 그려지곤 했다. 이는 ‘나는 전설이다’에서부터 이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지상 최후의 사나이>에서도 공히 확인되는 사실이다. 마늘과 거울을 싫어하고 밤에만 활동하는 좀비라니? 그러나 2000년대 뱀파이어와 좀비는 너무도 또렷이 구분된다. 뱀파이어는 아름답고 부자이며 우월하고 여러 초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좀비는 떼를 지어 다니며 힘만 셀 뿐 끔찍하고 잔인하고 멍청한 물이다.

애초 조지 A.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좀비영화의 근대의 원형을 제시했을 때, 혹은 소설 ‘나는 전설이다’가 아메리칸 좀비 컬쳐의 효시가 되었을 때, 느릿느릿 걸으며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좀비는 ‘풍요로운 미국 자본주의 하에서 향락적인 소비지상주의에 푹 젖은 중산층’을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랬던 좀비가 2000년대 들어 무섭게 질주하는 좀비로 변한 건 미국 역시 70년대부터 신자유주의를 거치며 중산층이 서서히 붕괴한 사회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좀비영화의 르네상스를 목격한 이 기간이 미국식 금융자본주의가 막장을 향해 치달았던 바로 그 기간과 정확히 겹친다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가 개봉한 2007년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진 해이기도 하고, 이 파국이 차곡차곡 준비돼온 것은 9.11과 이라크 전쟁 이후, 바로 2000년대 초부터였다. 급기야 작년 뉴욕 월가에서 점령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 불안, 즉 ‘어쩌면 자본주의가 정말로 망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혁명분자들의 허랑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의 공포로 전세계의 공기 속에 퍼져있다. 여기에서, 좀비가 은유한다는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대중(mass)’으로 바꿔보자. 그 편이 애초 좀비의 이미지에 더 잘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중산층이 붕괴된 상황에서는 더욱 정확한 기표이기도 하다.

좀비영화가 그려내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그 안에서 강화되는 ‘대중’ 현상이 단지 미국 내의 일만인 것도 아니다. 전세계가 ‘비슷한 시간대’를 경험하는 현재, 미국의 경제 위기의 여파로 타격을 받은 데다 정치적 불안기를 함께 겪고 있는 한국에서도 다를 건 없다. 광장에는 항상 사람이 모였고 함께 버스를 탔으며 미국 월가 점령시위를 인터넷을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들을 기존의 계급 혹은 계층의 언어로 통칭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게다가 불특정한 익명의 무책임한 거대한 군중인 ‘대중’은 이제 끔찍한 매카시즘의 구호를 아무렇지도 않게 외칠 뿐 아니라, 흔히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가치의 구호도 내뱉는다. ‘한국식 로컬화된 좀비물’이 자체 생산되기 시작한 분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 많은 호러영화의 괴물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좀비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가족과 친구였던 이가 순식간에 때려죽여야 할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 나의 생존을 위해 가족과 친구도 죽이고 짓밟아야 하는 현대인의 삶을, 좀비물 만큼 잘 드러내는 장르도 없지 않을까? 따라서 저 무시무시한 좀비에 치를 떠는 나야말로 실은 진짜 좀비일지 모른다. 또한 오늘의 사건사고에 손쉽게 남을 손가락질하고 함부로 인터넷에서 말을 나르면서도 별다른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나, 우리 개인 각자야말로 진짜로 이미 좀비가 되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평론가 이명석은 올해의 사회 키워드로 ‘좀비’를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와 생각이 다른 모든 집단의 움직임은 좀비의 습격이 된다. 공감을 잃어버린 우리에겐 두 개의 선택지밖에 없다. 좀비, 혹은 좀비를 죽이는 대량학살자.(<한겨레> 2012년 1월 3일자)”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The Night of the Living Dead

2012 시네바캉스 서울의 ‘좀비 섹션’은 바로 이런 고민들에서 시작해 이 장르의 시작을 소박하게 보여주는 영화들로 구성됐다. 조지 A. 로메로의 오리지널 3부작이나 새로운 3부작, 혹은 이 6편 전체를 상영하는 것도 고려했으나 결국 로메로의 전설적인 시체 시리즈의 시작, 또한 좀비영화의 원형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중심으로 놓고 계보를 그리고자 하였다. 설명이 더 필요 없는 이 영화가 국내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것은 이번 시네바캉스가 처음이다. 그러한 조지 로메로가 (오리지널) ‘좀비 3부작’을 위해 청사진으로 삼았던 작품이 바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보다 4년 먼저 공개됐던 <지상 최후의 사나이>다.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긴 버전으로, 리처드 매디슨은 이 소설의 각색에도 직접 참여했다. “어쩌면 나야말로 진짜 좀비, 진짜 괴물일지도 모른다”라는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담아내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빈센트 프라이스의 탄생 100주년이었던 작년, 미국 곳곳에서 이 영화가 특별상영작으로 새삼 다시 불려나오기도 했다.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리메이크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90>은 탁월한 특수분장가로 호러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군림하고 있는 톰 새비니가 1990년 로메로의 도움을 받아 연출한 작품이다. (톰 새비니는 로베르토 로드리게즈의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섹스머신 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칼라영화에 여주인공이 거의 여전사로 변모한 데서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엔딩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좀비에게 잔혹성을 드러내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2000년대 로메로의 새로운 3부작의 전조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댄 오배넌의 <바탈리언>(혹은 ‘시체들의 귀환’)과 함께 로메로의 팬들에게 시체 3부작을 제대로 계승한 비공식 속편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폰티풀>은 2008년 부천영화제 상영작이자 작년에 국내 개봉을 짧게 거쳤던 캐나다산 좀비영화로, 이번 좀비섹션 준비에 큰 도움을 준 영화평론가 허지웅의 강력 추천작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통해 로메로의 시체 3부작으로부터 시작된 좀비영화의 정치학이 현재 어디까지 확장돼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미디어 그 자체가 권력이자 다국적 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는 현재, ‘언어’로 전파되는 좀비현상을 통해 때로 진실을 밝히는 힘이 되기도, 때로 사회의 암을 급속도로 전파시키기도 하는 미디어의 속성과 힘을 드러내는 우화라 할 수 있다.
저술가 박권일의 말을 빌면 “정치에 대한 축제적 열정과 탈진과 냉소가 반복되는” 현재다. 이 네 편의 좀비영화가 현재의 우리를 다시 성찰하고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장르영화, 특히 이 장르의 전설적인 고전들이 주는 말초적 즐거움과 쾌감을 새삼 다시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욱 좋겠다.

ps. 서울아트시네마 소식지 ‘시네마테크’ 7/8월 여름 합본호에 실린, 2012 시네바캉스 상영작 중 ‘좀비 섹션’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