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와 뱀파이어물의 진화


이 글은 제가 2009년에 우연히 접했던 뱀파이어 로맨틱 탐정물 <문라이트>의 리뷰로 시작했다가, 곧 뱀파이어물 이것저것을 언급하면서 본격적인 ‘뱀파이어물에 대한 메타적인 분석글’을 지향하며 야심차게 전개하…다 흐지부지된 글입니다. 2009년 6월 22일 00시 17분에 이 블로그에 올려두었고, 처음부터 비공개 상태로 저장해 단 한 번도 외부에 공개한 적도, 이후 가필이나 수정 등의 손을 댄 적도 없습니다. 뱀파이어물의 장르적 특징이나 역사에 대해 좀더 보강을 해서 좀더 완성도 있는 형태로 글을 공개를 하자는 것이 당시 ‘공개 보류’의 이유였는데, 2년이 훌쩍 지나도록 이후 손을 거의 대질 못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이미 2년 전 글이라 시간적 한계가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럭저럭 재미있습니다. 제 글이 재미있다기보다는(뭐 저는 그렇다고도 생각합니다만), 뱀파이어물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 때문이겠죠. 한편으로는, 2000년대 초반과 중반의 획기적인 ‘뱀파이어물의 진화’의 양상은 다소 주춤한 대신, 그 진화를 시리즈물을 통해 ‘유지’하는 데에 더 주력하는 분위기인 듯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의 일부분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뒤늦게나마 공개합니다. 글의 내용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언급이 빠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대한 언급이나 그외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난 첨언 등은 각주로 처리했습니다. 중간제목 역시 조금 손을 보고 사진을 추가했습니다.


장르물에 지식이 일천한지라 곳곳에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선 댓글이나 트랙백으로 지적해 주시면 감사히 받고 수정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2011년, August 7, 22:30)


 


1. <문라이트 Moonlight>는 어떤 시리즈인가


<트와일라잇>이 ‘새로운 뱀파이어’ 얘기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현대 도시 안의 뱀파이어를 좀더 매력적이고 시크하게 표현한 걸로 미국 TV 시리즈 <문라이트>가 있다. 비록 쇼 러너가 넷이나 되는 바람에 그리 나쁘지 않은 시청율에도 시즌 1로 끝나버린 비운의 드라마긴 하지만.[footnote]<문라이트>는 2007년 9월 28일 CBS를 통해 첫 방송되었다.[/footnote] 호주 출신의 알렉스 오로클린(그러나 국내 인터넷에서는 ‘알렉스 오로린’으로 통용되는)과 영국 출신의 주목할 만한 젊은 연기파 배우 소피아 마일즈, 거기에 <기사 윌리엄>이나 <40 데이즈 40 나잇> 등에 나왔던 독특한 매력의 섀니언 소서몬이 주연을 맡았다. 사립탐정과 인터넷 기자가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명목상 탐정물. 그러나 실질적으론 간질간질하지만 지나치게 손발이 오그라들지는 않은, 꽤 괜찮은 로맨틱 뱀파이어물이다. 알렉스 오로클린과 소피아 마일즈가 워낙 괜찮은 배우들인데다 둘 사이 케미스트리도 썩 좋았다. 여직도 시즌 2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여성팬들이 전세계에 많은데, 알렉스 오로클린은 <쓰리 리버스>(대니얼 헤니가 주연 중 하나로 나온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바로 그 드라마)의 주연으로 이미 파일럿 촬영을 마쳤다. 이변이 없는 한 올가을 미국 CBS에서 전파를 탈 예정이니, <문라이트>의 2시즌 제작은 거의 물 건너간 셈이다.[footnote]<쓰리 리버스>는 대니얼 헤니의 캐스팅으로 국내에서도 관심을 모았으나 별 인기를 얻지 못한 채 1시즌으로 종영됐다. 이후 알렉스 오로클린은 7, 8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를 리메이크한 <하와이 파이브-오>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이 시리즈 역시 한국계 미국배우가 대거 출연하며 심지어 한국 로케이션도 이루어진 관계로 국내 관객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다행히 알렉스 오로클린의 ‘1시즌 땡 저주’를 벗어난 작품이 될듯, 올해 9월부터 2시즌이 방영될 예정이라 한다.[/footnote]


Moonlight
<문라이트>의 두 주인공, 알렉스 오로클린(오른쪽)과 소피아 마일즈.


<문라이트> 시리즈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뱀파이어물에 그 분장이 꽤 요란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설정들은 제법 쿨하다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역시 뱀파이어 탐정물인 <블러드 타이즈>가 각종 악마와 저주와 주문 등등을 요란하게 다루는 것과 달리, <문라이트>에서는 초현실적 존재로 오직 뱀파이어만이 등장하고, 뱀파이어도 감각 예민하고 일반 인간들 기준으로는 괴력과 초능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도시 정도라면 햇볕 아래에서도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footnote]’충분히’라는 건 좀 과장이긴 한데, <트루 블러드>의 뱀파이어들이 여전히 낮에는 관 속에서 자고 잠을 자지 않으면 눈과 귀와 코로 피를 흘리며 햇빛에 타죽는다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문라이트>의 뱀파이어는 선글라스를 끼고 낮에도 차 안이나 그늘만 골라가며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별로 요란한 과장은 아니라 할 수 있다.[/footnote] 뱀파이어를 죽이는 전통적인 방법 중 하나로 알려진 ‘심장에 말뚝박기’도 이 시리즈에서는 ‘뱀파이어를 마비만 시킬 뿐 죽일 수는 없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2. 넘쳐나는 새로운 뱀파이어물


그러고 보면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만들었다는 게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 요 몇 년간 서양은 확실히 이런 새로운 뱀파이어 바람이 꽤 심하게 불고 있는 중이다. <트루 블러드>는 올해 그래미상에서 안나 파퀸에게 TV시리즈 여우주연상을 안겼고 14일부터 2시즌 방영에 들어간 상태다.[footnote]<트루 블러드<는 이후 소박했던 1시즌의 분위기를 벗어나 광기와 에로티시즘으로 '막나가'면서 엄청난 팬층과 시청율을 확보한다. (원작과 TV 시리즈 모두 그러한데, TV시리즈는 원작에 느슨하게만 기대있을 뿐 상당히 내용을 달리 한다.) 3시즌까지 시청율 고공행진을 기록하며 미국 내 가장 인기있는 미드 시리즈 중 하나로 떠올랐다. 현재 4시즌 방영 중이며 5시즌 제작이 준비되고 있는 중이다. [/footnote] 올 가을 CBS에서는 <뱀파이어 일기>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론칭할 예정이다.[footnote]이 시리즈도 미국에서는 십대와 2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나름 인기를 끌고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 9월부터 3시즌 방영 예정.[/footnote] 물론 위에서 언급했던 <문라이트>도, 캐나다에서 제작된 <블러드타이즈>도 모두 근간에 제작된 새로운 뱀파이어물로, 국내에도 케이블을 통해 소개되었다. 영화 쪽으로 가면 물론 <트와일라잇>이 있고, 이것의 속편 <뉴문>은 벌서 티저 트레일러가 인터넷에 유포되고 있는 상태. 작년엔 <렛미인>도 있었다.[footnote]<뉴문>에 이은 3편 <이클립스>도 작년에 개봉해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올해 12월 <브레이킹 던 1부>가 개봉할 예정이다. <렛미인>은 스웨덴의 오리지널 버저니 2008년 국내에도 개봉돼 큰 인기를 끌었으며, 맷 리브스 감독에 의해 미국에서 리메이크 된 버전 역시 2010년 국내에도 개봉했다. 이 버전 역시 고른 호평과 지지를 받았다.[/footnote]


불과 15년 전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뱀파이어를 처단할 존재로 전제하고 영혼을 가진 뱀파이어 ‘엔젤’을 저주에 걸린 예외의 타자로 상정했던 것과 달리, 근간의 뱀파이어물은 보다 적극적으로 뱀파이어를 매력적인 이존재로, 도시에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존자’로 그린다. 또한 전통적으로 알려진 뱀파이어에 관한 여러 가지 신화들을 오히려 ‘뱀파이어들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퍼뜨린 루머’로 역이용하는 재치도 보인다. 단적으로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십자가를 무서워한다’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최근의 여러 뱀파이어물은 공통적으로, 이것들이 뱀파이어들이 일반사람인 척하기 위해 일부러 뿌린 잘못된 루머라고 주장한다. 마늘도 취향의 문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다른 신화들에 대해서는 시리즈마다 이견이 있다. <문라이트>에서 뱀파이어들이 햇빛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않는 걸로 표현하고 있지만 <트루 블러드>나 <블러드 타이즈>는 여전히 햇빛이 뱀파이어에 치명적이라 주장한다. 다만 <트루 블러드>의 경우 과거만큼 심하지는 않아서, 스티브 모이어가 연기하는 주인공 뱀파이어 빌 콤튼은 1시즌 마지막회에서 연인인 수키(안나 파퀸)를 구하기 위해 대낮에 나왔다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쓰러지기는 하지만 목숨은 부지한다.


뱀파이어물이 이토록 급증하고 더욱이 과거와 달리 뱀파이어를 매혹적인 이방인 정도로 그려내며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인종, 다문화 사회가 일반화되면서 그로 인한 사회적, 문화적 충격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과거 뱀파이어물이 시골에서 폐쇄적 생활을 하는 지주, 유지로 설정되며 근대 이전의 귀족을 상징했다면, 이후 불야성의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도시물이 활기를 띄었다가 지금은 도시물과 시골물이 공존하는 듯한 모양새다. 그러나 현대의 뱀파이어물은 아무래도 도시가 어울린다. 도시야말로 바로 옆동네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모르는 데다가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는 올빼미족들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시골물은 과거 시골에 은둔하는 지주나 지방 유지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골에 새로이 보금자리를 틀러 온 타지 출신 정도로 묘사된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깡촌, 그러니까 촌스러운 시골 백인들을 가리키는 ‘힐빌리’ 혹은 ‘레드넥’들만 살던 동네에도 이젠 유색인종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게다. <트와일라잇>만 해도 배경은 분명 워싱턴 주의 시골 깡촌인데 인종 분포는 LA의 웬만한 동네 못지 않을 정도로 다채롭다. 전형적인 북구 미남들부터 네이티브 어메리칸은 물론, 심지어 동양인들까지. <트루 블러드>의 배경도 루이지애나 주의 깡촌 시골이다. 그러니까 봉건시대의 잔재에 대한 더없이 적절한 비유였던 뱀파이어가 21세기 현대 자본주의에 와서는 도시의 여피를 상징하거나, 시골로 낙향한 부유한 도시 출신 백인, 혹은 미국 정착에 성공한 흑인 외 다종다양한 유색인종들의 비유로 그려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저 할리퀸 로맨스 수준이었던 원작소설과 달리 <아메리칸 뷰티>의 작가 앨런 볼의 손을 거친 <트루 블러드>가 종교적 광기와 이종존재간 문화충돌, 카트리나 이후의 미국 남부의 트라우마를 다루며 6, 70년대 반문화적 성격까지 차용해와 복잡한 문화지도를 그리고 있는 것은 너무나 상징적이다. [자본론]에 등장하는 마르크스의 훌륭한 통찰과 비유도 이제는 시대적 효력을 살짝 상실했다는 얘기다.


Buffy The Vampire Slayer

3. 앤 라이스와 버피와 엔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뱀파이어물’을 어제 오늘 갑자기 튀어나온 것으로 얘기하긴 힘들다. 분명 과거의 뱀파이어물과 오늘의 뱀파이어물은 성격이 상당히 다르지만, 그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작품들로 한편으로는 앤 라이스의 전설적인 뱀파이어 연대기(와 이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들)를, 또 한편으로는 무려 7시즌까지 갔던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이는 5시즌짜리 스핀오프 <엔젤>을 낳기도 했다.)를 언급해야만 한다. 사악한 공포의 존재로만 여겨졌던 뱀파이어가 매혹적일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한 게 바로 앤 라이스 연대기에 등장하는 레스타드일 것이다. 그러나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들은 매혹적이고 유혹적인 악으로서 고딕세계에 갇혀있다는 차이점이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기보다는 이전의 시기의 마지막 뱀파이어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람들이 레스타드에게 열광한 것은 그의 ‘귀족적인’ 자태, 그러니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유산처럼 간직해온 그의 귀족의 분위기와 전통 때문이다.[footnote]여기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1992년작 <드라큘라>에 대한 언급을 생략했는데, 이 영화가 한편으로 뱀파이어란 존재의 에로티시즘을 강조하며 게리 올드만의 드라큘라를 연민이 가는 존재로 새로이 창조하긴 했으되, ” 브람 스토커의 원작에 충실했다”는 모토대로 매우 전통적인 특징들을 함께 가진 드라큘라를 그리기 때문이다.[/footnote] 지금의 뱀파이어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리즈는 결국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된다. 여전히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뱀파이어를 과거의 사악한 악마로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예외적 존재로 설정된 엔젤을 통해 ‘유혹적인 악’으로보다는 ‘공존이 가능한 존재’로서의 매혹적인 뱀파이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스핀오프 시리즈인 <엔젤>은 그런 뱀파이어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사람들을 돕는, 그러니까 도시의 밤에 더없이 잘 섞여 살아가는 뱀파이어를 다루며 뱀파이어 탐정물의 시작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뱀파이어의 세계와 인간 세계에 그어주는 구분선으로 <버피와 뱀파이어>가 제시한 깜찍한 트릭이 의외로 긴 수명으로 다른 시리즈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뱀파이어가 보통 인간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집의 거주자가 공식적으로 ‘초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 <버피와 뱀파이어>에서 처음 선보인 이 설정은 <트루 블러드>에서는 물론 북구에서 날아온 영화 <렛미인>에도 고스란히 사용된다. 과거 뱀파이어물이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조차 나를 공격할 수 있는 괴물로 변할 수 있다’ 혹은 ‘원치 않음에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집중했던 시기에 이런 설정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상조차 못할 설정이었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인간들과 섞여 살아가고 있다는 보다 잠재되고 은밀한 공포를 다루거나, 이존재와의 소통과 교감을 다루는 보다 로맨틱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일종의 ‘안전지대’를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고, 그 결과 ‘초대’와 관련한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footnote]’초대의 신화’에 대한 이 부분의 언급은 정확하지 않다. 코폴라의 <드라큘라>에서만도 초대의 신화는 전혀 보이지 않고, 어릴 적 TV로 드문드문 봤던 뱀파이어물도 마찬가지. 그러나 <버피와 뱀파이어>가 이 설정을 도입한 최초의 시리즈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버피 이전에도 이 설정이 사용된 드라마나 영화가 있다면 제보 바란다.[/footnote] 이는 ‘대중 속 고독’으로 대표되는 소외현상을 심화시키는 도시 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과거에는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을 공동체에 속해있는 구성원으로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지금 도시의 성원들은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여기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 괴물이나 이존재 중에서도 뱀파이어는 가장 감정이입하기 쉽거나 매혹을 주는 대상으로 떠올랐다는 얘기다.


True Blood
<트루 블러드>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


이후 만들어진 뱀파이어 시리즈들, 그러니까 <블레이드> 시리즈나 <언더월드> 시리즈 같은 것은 버피가 제시한 혁명적 전환의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변화를 작게든 크게든 반영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인다. <블레이드> 시리즈는 반인 반뱀파이어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이 역시 뱀파이어는 죽어 마땅한 사악한 존재로 전제한다. 당장 주인공의 직업부터가 뱀파이어 슬레이어다. 다만 뱀파이어보다 더 악한 리퍼들이 등장할 때 일시적으로 휴전과 동맹의 대상이 되기는 한다. <블레이드> 시리즈보다는 <언더월드> 시리즈가 좀더 새로운 뱀파이어물에 한 발 가까이 가있다. 이 시리즈는 적어도 도시 속에 인간들 모르게 살고 있는 뱀파이어의 존재라는 사실을 잘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더월드>의 세계는 21세기에 여전히 살아 존재하는 뱀파이어를 다루며 주인공 역시 뱀파이어인 여전사로 설정돼 있긴 하되, 일반 인간들의 세계와는 유리된, 자신들만의 지하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물론 이 시리즈가 <트와일라잇>에 미친 영향을 언급할 수 있다. 늑대인간과 뱀파이어의 전쟁이라는 테마야말로, <트와일라잇>의 속편 <뉴 문>이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뱀파이어들’의 출현은 2000년대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의 뱀파이어물들은, 말하자면 과도기의 것이었다. 2000년에 나온 <드라큐라 2000>과 2002년에 나온 <퀸 오브 뱀파이어>가, 그리고 2004년에 나온 <반 헬싱>이 일견 촌스러워 보이는 것도, 뱀파이어 장르에 밀어닥치고 있는 일련의 변화를 별로 반영하지 못한 탓일 게다. 하긴 <퀸 오브 뱀파이어>는 앤 라이스의 원작을 뒤늦게 영화한 버전이었고, <반 헬싱>은 본격적으로 뱀파이어를 다룬다기보다 유니버설이 판권을 갖고 있던 온갖 괴물류를 한 화면에 등장시킨다는 야심이 더 컸던 영화이긴 했다. 그보다 살짝 이전, 1998년에 나온 <슬레이어>는 정통적인 뱀파이어 슬레이어물로서 사악한 뱀파이어들을 다 때려잡는 화끈한 슬래셔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새로이 보이는 지점이 있다.

4. 다시, <문라이트>로


다시 <문라이트>로 돌아와서, <문라이트>의 믹 세인트 존이 특별한 것은, 저 엔젤을 적통으로 이은 거의 유일한 존재라는 것. 캐나다산 시리즈인 <블러드타이즈>만 해도 뱀파이어인 헨리 피츠로이를 매개하는 여자주인공으로 비키가 등장한다. 시리즈의 진짜 주인공 역시 비키라는, 시력을 잃어가는 형사 출신 탐정이고, 헨리는 관객에게 그녀의 유혹자로서, 그녀의 타자로서 비키의 매개를 통해서 제시되는 것. <트루 블러드> 역시 ‘수키’라는 여주인공을 통해 뱀파이어 존이 제시되며, <트와일라잇> 역시 여주인공 벨라를 통해 컬렌 가문의 뱀파이어들이 비로소 소개된다.  뱀파이어에게 매혹된 여성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서만이 타자로서 뱀파이어 주인공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Moonlight
<문라이트>의 주요 출연진. 나쁘지 않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1시즌 15화로 종방된 비운의 시리즈.


그러나 <문라이트>의 믹 세인트 존은 엄연히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보통 인간인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인간이던 시절을 잊고싶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만 있다면 다시 인간이 되기를 소망하는 그는 그럼에도 뱀파이어로서 자신의 능력과 성격을 최대한 활용하며, 괴물/야수로서의 성격도 서슴없이 드러낸다. (다소 ‘불쌍하게’ 생긴 알렉스 오로린이 가장 섹시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뱀파이어로서 난폭하게 날뛰는 장면들에서다.)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믹 세인트 존은 뱀파이어로서의 욕망에 충실한 다른 뱀파이어들(그를 뱀파이어로 만든 코럴린(섀넌 소서몬)과 조셉(제임스 도어링))과, 그에게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일반 인간 베스(소피아 마일즈) 사이를 잇는 중간자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와 사랑에 빠지는 베스보다 오히려 더욱, 뱀파이어에 대한 매혹과 공포의 상반된 이중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도 바로 믹 세인트 존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믹 세인트 존은 코럴린을 통해 임시방편적이기는 하지만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얻고, 단 며칠 인간으로 살며 베스와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베스가 다른 뱀파이어 조직에 납치돼 위기에 닥친 순간, 그는 조셉의 도움을 빌어 다시 뱀파이어로 돌아간다. 뱀파이어들과 싸워 베스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가 뱀파이어 시절에 가졌던 괴력과 초능력이 필요했던 탓이다. 시리즈의 외형상, 이는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로맨틱한 희생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뱀파이어 시절 그가 가지고 누렸던 뱀파이어의 초능력은, 그가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던 또 다른 형태의 일종의 기득권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5. 덧붙여


앞으로 뱀파이어물이 어떤 형태로 더 진화해갈지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당장 앞으로 나올 뱀파이어물들은 지금 제시된 이 다양한 버전의 ‘보다 느슨해진’ 신화들과 탐미적이고 로맨틱한 특징들을 철저히 우려먹을 것으로 보인다.국내에서는 올해 가을 개봉한다는 <원더월드 3 : 라이칸의 반란>은 여전히 그 세계에서의 뱀파이어와 늑대인간들의 전투를 계속할 것 같다. <뉴 문>과 이후 만들어질 <이클립스(월식)>, <브레이킹 던(여명의 새벽)>이야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터인데, 1편에서 제시된 쇼킹한 설정에서 새로운 것이 나올 거란 기대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벨라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약간의 파장을 가져온다면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음습한 암흑과 음모의 세계로 들어갈 것 같은 <트루 블러드>의 경우 조금 기대가 크다. 원작의 나이브한 한계가 있고 앨런 볼의 시도가 아직은 위태로워 보인다는 점에서 조금 불안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앨런 볼이 시도하고 있는 보이는 복잡한 문화지도 그리기가 성공할 경우 새로운 전환을 제시해주는 걸작으로 남게될 가능성도 크다. 다만 이야기를 사정없이 벌리고 수습하지 못할 경우, 거기에 원작의 원래의 허술한 기둥이 이런 서브텍스트와 잘 어우러지지 못한 경우 오히려 거대한 재난이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사실 1시즌 피날레가 참… 거시기 했다.) 이 시리즈가 제발 제대로 풍성한 서브텍스트를 발전시키며 나아갈 수 있기를. 또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문라이트>에서 제시된 가능성을 어떤 시리즈든 어떤 식으로든 이어줬으면 하는 것. 이존재가 매혹적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했음에도, 이 쇼가 삼각관계 연애놀음에서 지지부진했던 것, 나아가 좀 엄한 이유로 중단된 것은 여러 모로 아쉽기 그지 없다. (2009/06/22 00:17)


 


 

리처드 용재 오닐 + AMK의 바로크 콘서트 <미스테리오소>

현악기를 좋아하지만 비올라는 상당히 낯설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에서 비올라란 게 얼마나 치이는 악기입니까. 예술의전당의 장소 문제일 수도 있겠어요. 제 자리는 E열 사이드 쪽이었는데, 비올라 다감바나 비오른첼로 소리가 좀 뭉치긴 하더군요. 예당에서 하는 콘서트는 처음 간 거라… 리처드 용재 오닐의 연주를 CD로라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그저 저는 이토록 유명하고 인기를 끄는 사람이라면 연주도 기본은 하겠지라고 생각했죠. 요즘이야 클래식 계도 아이돌 스타 시스템이 안착되지 않았습니까? 전세계적으로 워낙 젊은 천재들이 쏟아져나오고 있고, 이들이 ‘천재’ 소릴 듣는 데에야 이유가 있는 거죠. 저야 어차피 아직은 막귀인 데다 콘서트 자체를 그리 많이 다녀보지도 못했고요.

그런데 좀 많이 실망했습니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던 헨델-할보르센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할 때, 아이러니컬하게도 제 실망은 극에 달했습니다. 아마 이 곡 자체를 요 두어 달간 워낙 열심히 들어서기도 하겠죠. 주로는 카퓌송 형제의 바이올린-첼로로 들었고, 이자크 펄먼과 핀커스 주커만의 바이올린-비올라로도 들었어요. 리처드 용재 오닐은 AMK의 젊은 여자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틴 록스와 연주했는데, 일단 호흡도 미묘하게 어긋나고, 어설프게 들떠있는 느낌이었고, 특히나 아마도 비올라라는 악기의 특성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음과 음 사이 공백이 보이며 툭툭 끊어집디다. 거기에 그가 회심의 곡으로 준비한 듯한 마지막 곡 솔로, 비버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했을 때는 “… 지금 학예회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어버렸으니. 음, 저의 ‘기본’이라는 기준이 영 이상한 건가. 제 취향이 영 이 사람하곤 안 맞는 건가.

동행한 분은 “이자크 펄먼과 핀커스 주커만을 줄창 듣고 있었다면 만족 못 할 만하도 하죠.”라고 하셨습니다만. 역시 오닐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펄먼-주커스와는 다른 스타일로 카퓌송 형제가 연주했을 때도 전 극도로 흥분해서 눈물을 쏟아내며 어쩔 줄 몰라했었는걸요. 이 곡 자체가 사람을 업시키는 면이 있고, 워낙 한국사람들 감성에도 잘 맞고, 펄먼-주커만 같은 슈퍼스타의 엄청난 듀엣 연주도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러니 한편으론 만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까다로웠을텐데, 글쎄요. 전 예당을 가득 메운 팬들의 그 열혈한 팬심엔 도저히 감정이입을 못 하겠더군요. 제 귀엔 연주가 영 만족스럽지 않았으니까. 텔레만의 곡 중 비올라협주곡 G장조의 경우 1, 2악장에선 좋아서 눈물이 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3악장에선 그 눈물이 급짜게 식더군요. 2부는 헨델 신포니아에서 비탈리 샤콘느로 넘어가는 때에는 그냥 자버렸고.

얼마 전 출시된, 이날 연주한 레퍼토리가 들어가 있는 바로크 CD를 미리 들었다면 과연 이날의 이 재난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까요. 실황과 CD는 느낌이 매우 다르니까, 아마 꼭 그렇진 않았을 거예요. 안타깝게도 오닐은 전혀 제 취향쪽이 아니었네요. 게다가 바로크에 대한 도전은… “아가, 욕심이 너무 과했구나”라고밖에 못 하겠다능. 사실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에서 치이는 비올라라는 악기의 솔로악기로서의 가능성을 계속 모색하고 확장하고 있는 오닐이니만큼, 아마도 익숙하고 친숙한 완숙함보다는 낯선 신선과 모험심, 그리고 치기 쪽을 더 고려해야 할 거고, 그게 오닐의 매력이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애초에 오닐의 유명세보다는 ‘바로크래…’라며 끌렸던 건데, 일단 제 귀는 툭툭이 끊어지는 그 음 사이 공백들에 너무 민감하게 굴어서 말이죠. 사실 원래의 제 취향으로 하면, 찢어지고 가는 바이올린보다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비올라 소리를 더 좋아하는 게 맞거든요. AMK 멤버들의 소리가 훨씬 더 좋기도 했고요. 하긴, 젊은 연주자들의 경우엔 뭐 완벽한 연주를 기대하기보다 같이 응원하고 같이 커가고 같이 모험하는 맛 쪽이 더 방점일 거예요. 그러니 팬심 가득한 팬들이 객석을 채워야 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전 장소를 잘못 찾아간 셈이겠죠. 

르노 & 고티에 카퓌송 듀오 리사이틀

바이올리니스트인 르노 카퓌송과 첼리스트인 고티에 카퓌송의 듀오 리사이틀이 최근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다. 76년생인 르노와 81년생인 고티에는 각자 내한을 한 적은 있지만 한국에서 한 무대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로 개성이 다르면서도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던 이 날의 연주는 지적이면서도 단단한 열정을 뿜어낸 명공연이었다.

애초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주곡이 별로 없기도 하지만, 이 날 프로그램은 일반적인 청중에게는 난해할 수밖에 없는 현대음악들로 구성됐다. 슐호프와 라벨, 그리고 코다이의 이중주 곡들이 그것이다. 불협화음의 충돌과 혼란 속에서도 은은한 열정을 감추고 있는 이 곡들은 클래식 매니아가 아닌 일반 청중들에겐 낯설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데다 정교한 테크닉을 요하는 작품들이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거의 대등하게 겨루는 슐호프의 작품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는 무림의 최고 고수 둘이 서로 대결을 하면서도 하나의 우아한 춤을 이루는 광경 같은 소리를 들려줬다. 첼로가 두드러지는 라벨의 곡은 원래 드뷔시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르노의 바이올린이 진중하고 이지적인 차분함으로 한발 물러선 듯했다면 고티에의 첼로는 마치 젊음의 격정으로 질주하는 듯했다. 만약 라벨의 곡만 들었다면 엄격한 절제미와 수줍음이 르노의 연주 스타일이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터미션 후 2부에서 코다이의 곡이 연주되자, 르노의 바이올린은 진중하게 받쳐주는 고티에의 첼로를 타고 마치 하늘을 나는 듯 우아한 열정을 뿜어냈다. 호흡과 조화는 완벽했고 끊어질 듯 말 듯 피아니시모로 악장을 마무리할 때마다 객석의 숨소리마저 쥐고 흔들었다.

Capuçon Duo
르노 카퓌송과 고티에 카퓌송의 리허설 모습.

하지만 이들의 연주가 무작정 격정을 터뜨리는 식은 아니다. 얼핏 듣기엔 엄격하고 정확한 테크닉에 타이트하고 차분한 절제미로 격정을 한 번 누르는 듯하다. 그러나 계속 듣다보면 그 밑에 마치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용암과 같은 열정이 느껴진다. 칼주름을 세운 하얀 와이셔츠에서 단추 둘만 푼 조각남을 볼 때 느껴질 법한 섹시함이 카퓌송 형제의 음악에 있다. 한 꺼풀 가려져 있기에 더욱 뜨겁게 느껴지는 열정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젊은 생동감과 경쾌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형인 르노는 좀더 이성적인 면모에 수줍으면서도 완숙한 열정의 스타일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면, 고티에는 젊음을 과시하듯 질주하면서도 이를 사려깊은 진중함으로 감싼 듯한 스타일로 첼로를 연주한다. 형이 차가운 불꽃이라면 동생은 뜨거운, 펄펄 끓는 얼음이다. 그렇게 다른 스타일이 완벽한 호흡으로 음을 주고받으며 연주하자 마치 하나의 악기가 동시에 두 가지 소리를 내는 듯한 음악이 된다. 이들의 연주는 노장의 깊이와 통찰을 갖추진 못했다 해도 젊은 연주자답지 않은 노련함을 패기와 함께 드러냈다.

객석은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고, 형제는 헨델-할보르센의 파사칼리아 사단조를 앵콜곡으로 연주했다. 본 프로그램의 연주가 숨겨진 열정에도 불구하고 지적인 면에 더 호소했다면, 앵콜연주는 여전한 절제미에도 불구하고 애절한 격정이 폭발했다. 그예 기립박수가 나왔다. 바로크 음악이나 낭만파의 곡 등 국내 청중들에게 좀 더 익숙한 곡을 이중주곡으로 편곡해 들려줬다면 과연 어떤 연주가 나왔을지, 이 앵콜곡 하나로 기대와 호기심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두 카퓌송의 듀오 연주는 이렇게 객석을 흥분과 열광으로 몰아넣은 채 막을 내렸다. 앞으로 듀오의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간절하게 기대하게 만든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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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잘 자요, 엄마> 리뷰

잘자요, 엄마
1월 초까지 연장공연 중.

“엄마, 나 오늘밤 자살할 거예요.”

어디 여행이라도 갈 것처럼 부산하게 집안을 정리하던 딸의 입에서 문득 이 말이 떨어졌을 때 가슴이 무너지지 않는 엄마가 있을까.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나, 현실감 없이 느껴져 웃으며 면박을 줬다가, 그것이 진심임을 알고는 화를 내고, 설득도 했다가, 울며 매달리고, 비난도 해보고,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그 와중에도 딸을 안쓰러워하는 어미의 심정을. 하지만 그 자신도 자식을 키우는 엄마로 그 심정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세상을 등지고자 결심했던 그녀는 또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던 걸까.

‘제시’는 오랫동안 간질을 앓았고 남편과는 헤어졌으며 하나뿐인 말썽꾼 아들도 가출하고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노모인 ‘델마’와 단둘이 살면서, 그녀는 자신의 우울한 기운 때문에 엄마의 친구가 집에 놀러오기 꺼려하는 것도, 남편이 결국 자신을 떠난 것도 그저 담담히 받아들인 상태다. 그녀에겐 더 이상 삶을 지속해야 할 논리적인 이유도, 생존 의지도 없다. 삶이 살아지는 대로 그냥 견디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녹슨 총을 찾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날, 홀로 남아 자신의 시체를 치워야 할 엄마가 걱정돼 그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고 만다. 세상 어느 엄마가 “오냐 그래라” 할 리가 없다. 두 모녀의 격한 대화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과 숨기고 있던 비밀들이 드러난다.

모자관계나 부자관계와는 또 다른 모녀관계는 대체로 격렬한 애증과 서로에 대한 연민이 병행되는 경우가 많다. 딸들의 고달픈 삶은 언제나 세상 모든 모녀관계의 단골 레퍼토리인 ‘엄마처럼 살기 싫었어’와 ‘이제야 엄마 마음을 알겠어’를 단계적으로 반복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언제까지나 아버지인 것과 달리, 어머니는 딸에게, 혹은 딸에게 어머니는 어느 순간 ‘친구’가 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딸은, 결국 상대가 자신을, 자신이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원래 친구란 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가장 좋은 친구 관계란, 서로 다르다는 것, 어느 부분에 있어 서로 타인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함께 가며 지지하는 관계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서로 타인일 수밖에 없는 부분에서 절망하고 주저앉곤 한다. 아마도 남자관객이나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하는 여성관객의 눈에 이 연극이 영 낯설게 느껴진 부분이 있다면, 그건 제시가 결국 엄마 앞에서 자살을 행해서라기보다는 애초 수직적 혈연관계였던 모녀가 나이가 들면서 수평적인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 하략)

잘자요, 엄마
모녀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애증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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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가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엇갈릴 수는 있겠지만, 이 연극이 보여주는 것은 아무리 피를 섞은 가족이라 한들 결국 타인일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가족이란 언제나 그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안다고 여겨지고 실제로 심지어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부분, 혹은 숨기는 부분이 더 많은 관계다. 그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고독감이, 그리고 평생에 걸쳐 병과 상실감이 주었던 고통이 제시에게 너무나 강하게 드러난다. “그래도 살고 봐야 한다”는 델마의 설득이 당연히 옳다고 여겨지면서도, 제시에겐 그 말이 공허한 메아리일 수밖에 없음을 동시에 이해하게 된다. 그 아픔 때문에 연극을 보는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도, 결국 제시를 설득할 더 좋은 말을 찾을 수가 없어 더욱 눈물을 흘리게 된다. 제시의 총구가 소리를 울리는 순간, 결국 ‘아!’ 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10년 전 델마 역을 연기한 뒤 한동안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이 작품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던 손숙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갈 것같다.

퓰리처 수상작이기도 한 마샤 노먼의 희곡 <잘 자요, 엄마>는 1982년 미국에서 초연된 뒤 국내에서는 85년 처음 막을 올렸고, 이후 꾸준히 공연되어 오다 이번 ‘연극열전 2’의 8번째 작품으로 다시 선택됐다. 마샤 노먼의 처녀작 <Getting Out>을 무대에 올린 바 있는 연출가 문삼화가 연출을 맡아 8월 29일부터 11월 2일까지 상연됐다가 현재 연장공연에 들어간 상태다. 배우 둘이서 작품 전체를 끌고 나가야 하는 작품으로, 델마 역에 손숙과 나문희 및 연장공연부터 새로 합류한 예수정, 제시 역에 서주희와 황정민이 교차출연하여 하나같이 완숙하고 노련한 연기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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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9월 추석연휴,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빨간그림자님과 함께

– 내가 본 것은 손숙X황정민. 나문희의 델마가 매우 궁금하긴 한데, 연장공연에서는 빠지셨다. 서주희의 경우 궁금하기는 하지만 <레이디 맥베스> 때의 연기 스타일로 보건데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로 연기를 하실 듯. 손숙의 델마와 황정민의 제시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마 나문희의 델마는 좀더 세속적이고 좀더 낮은 계급의 아줌마를 보여주셨을 것 같다. 이미 연극을 본 사람들의 말로는 나문희와 황정민의 궁합이 더 좋았다곤 하는데… 손숙의 델마는 별로 안 그런데 우아한 척하는 속물적 이미지가 보여서 나름 설득력이 있었고, 황정민의 제시는… 정말 제시가 실존인물이라면 바로 저렇게 생기고 저렇게 말을 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태석의) 극단 목화의 간판배우이자 연극계에선 이미 베테랑으로 소문난 배우이지만 그녀의 연극 연기는 처음이었는데, 말그대로 감동했고, 반했다.

– 마샤 노먼의 작품들은 종종 페미니즘 희곡이라 분류되곤 하지만 정작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마샤 노먼의 작품들, 특히 이 작품을 페미니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긴 여자 작가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모두 페미니즘은 아니긴 한데, 딱히 왜 그런 것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찾아봐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