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 | 네비게이터 The Navigators (2001)

* 이 글은 미디어스에 2014년 5월 28일 개제되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켄 로치 특별전을 한 게 5월. 

The Navigators
포스터 귀엽죠잉.

1996년의 어느 날, 켄 로치는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자신을 전직 철도 노동자라고 밝힌 롭 도버라는 남자가 보낸 이 편지에는 그가 18년간 일해 오면서 경험한 이야기들이 쓰여 있었다. 마가렛 대처의 시대에도 끝까지 민영화의 길을 면했던 영국 철도가 결국 민영화된 때였다. 롭 도버는 정리해고로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철도 노동자 중 한 명이었다. 다만 다른 철도 노동자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굳건한 신념을 소유한 사회주의자이자 노조 활동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바로 이 신념 때문에 철도 노동자의 길을 택했다. 

편지에 흥미를 느낀 켄 로치는 각본을 보고 싶다고 답장한다. 마침 모래언덕에서 떨어져 힘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일을 나갈 수가 없었던 그는 이참에 생애 최초로 ‘시나리오 쓰기’라는 과제에 도전해 보기로 한다. 그는 6주에 걸쳐 자신의 경험과 아이디어들을 정리해 초고를 완성했고, 이를 켄 로치에게 보냈다. 켄 로치는 초고를 본 소감을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그의 시나리오는 삶으로 충만했고 캐릭터와 이야기가 가득했다.”

영국 철도가 민영화된 직후의 스산한 풍경을 생생하게 담아낸 켄 로치 감독의 <네비게이터>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네비게이터>의 영화화 과정이 쉽게 진행된 건 아니었다. 구체적인 영화 제작의 준비가 갖춰지기까지는 이후로도 2년이 더 걸렸고, 마침내 1998년이 돼서야 롭 도버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정식으로 영화화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된다. 언제나 켄 로치와 함께 일해온 프로듀서 레베카 오브라이언, 촬영감독 배리 애크로이드, 편집자 조너선 모리스, 음악감독 조지 펜튼, 프로덕션 디자이너 마틴 존슨이 <네비게이터>를 위해 합류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계약하고 불과 1주일 후, 롭 도버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자신이 희귀 폐암의 일종인 중피종에 걸렸으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18년간 일했던 철도 작업장에서 계속 노출되었던 석면이 바로 발병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평생 고집스럽게 투쟁가의 삶을 살면서 언제나 낙천적이고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레 포기한 의사들을 보며 “당신들보다 더 오래 살겠다” 다짐하며 전세계로 치료법을 수소문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돕기 위한 펀드를 조직했고, 치료법을 찾고 지지를 받기 위한 인터넷 페이지도 열었다. 

한편 그는 민영화가 진행되는 와중 아직까지 남아있던 회사들을 대상으로 법적 투쟁을 시작한다. 자신의 병에 대한 책임을 공식적으로 묻는 소송이었다. 그 와중에 “석면의 위험성과 심각한 노출도를 회사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됐다. 회사 내부 메모에, 이 석면 지붕을 제거하는 데에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씌여 있었다. 

마침내 그는 법정에서 승소했고 완성된 영화를 미리 볼 수는 있었지만, 영화가 개봉하는 것까지 보지는 못했다. 10대 후반 사회주의자가 된 이래 평생을 노동자로, 또한 활동가로 살았던 그는 2001년 2월 20일 결국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영화는 그해 9월이 되어서야 토론토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를 통해 첫 선을 보였고, 영국에서는 12월에야 TV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가 죽은 지 사흘 후, 가디언 지에 켄 로치가 쓴 추모사가 실렸다. 켄 로치는 그 글을 “노동계급은 챔피언을 잃었다”고 끝맺었다(여기를 누르면 영어로 된 원문을 볼 수 있다). 그의 추모사를 통해, 그리고 10년 뒤 켄 로치 회고전에서도 여전히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객에게 환기시키는 영화 제작팀을 통해, 영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롭 도버의 이름과 삶을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게 되었다.

The Navigators

롭 도버의 경험과 삶, 나아가 생명과 죽음까지도 투영된 영화 <네비게이터>는, 그렇기 때문에 영국 철도의 민영화 이후 그 여파가 무엇이었는지 매우 구체적인 차원에서, 구체적인 인물들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경쟁’과 ‘효율’을 외치며 도입된 민영화였지만 이윤의 극대화를 목표로 한 회사의 정책 하에서 어리석고 비효율적이며 우스꽝스러운 일들까지 벌어진다. 

노조는 지원자에 한해 명예퇴직을 한다는 협상에 합의했지만 회사는 합의를 아무렇지 않게 뒤집고 전원 정리해고를 강제했다. 철도라는 복잡하고 유기적인 생명체의 전문가였던 철도 노동자들은 어제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인력파견업체에 소속되어 일당을 받는 일용 노동자가 된다. 이윤을 위하여 각종 안전 규칙은 무시되고 녹슨 선로는 방치된다. 롭 도버는 민영화 이후 노동자들의 삶이 파탄나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철도 안전 규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을 걱정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영화 직후 영국 철도는 매년 대형 인명 피해를 동반한 사고가 났고, 롭 도버가 눈을 감기 직전인 2000년 10월 햇필드에서 발생한 탈선 사고는 여전히 민영화의 폐해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그리고 먼저 언급되는 사고이다. 그리고 이윤을 위해 안전이 무시되는 상황은 <네비게이터>에서도 후반부 이야기를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이 된다. 노동자의 삶과 목숨, 그의 가정 모두 손쉽게 파괴되고, 이는 사람의 가치관과 내면까지도 하루아침에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엔딩은 켄 로치의 여타 90년대 영화들보다 훨씬 씁쓸하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되는 <네비게이터>는 2001년 노동영화제에서 상영된 후 13년 만에 다시 상영되는 것이다.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배급하는 비디오 외에, 상업적인 배급망을 통해서는 개봉은커녕 DVD도 출시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 영화가 이번에 큰 스크린에서 35mm 필름으로 상영되는 건 매우 드물고도 귀중한 기회이다. 더욱이 작년 수서발 KTX가 결국 민영화의 단계를 밟고 이후 착실하게 영국식 철도 민영화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 지금, 이윤을 위해 각종 안전 규칙들을 무시했다가 대형 참사가 나고, 그 구조마저 이미 민영화되어 있었다는 현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의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The Navigators

이 영화가 보여주는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싶다. 있어서는 안 될 대규모의 인명 피해 사고가 났을 때, 우리는 너무나 손쉽게 희생자들의 숫자를 떠들고 그들에 대해 서둘러 추모의 눈물을 흘린 뒤 곧 잊어버린다. 이번에는, 적어도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잊지 않겠다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도록 두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각자 답들을 찾고 있는 듯 보인다.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거기에, 나는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대규모의 어린 목숨들의 죽음 사이로, 보이지 않고 말해지지 않는 죽음들 역시 필사적으로 보고 찾아내고 말해야 한다고. 소위 ‘효율적 운영’에서 제일 먼저 인원이 감축되고 안전이 무시되는 상황은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이 노동자들의 과로와 희생이 다시 필연적으로 대규모 참사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늦은 뒤에야, 이미 보이지 않고 은폐되는 피해와 죽음들이 한참 진행된 뒤에야, 죄 없는 아이들이 그렇게나 속절없이, 그렇게나 많이 떠나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기 전에 분명히 있었을 어떤 죽음들, ‘은폐된’ 죽음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노동자의 상황은 언제나 가장 먼저 생략되고 지워진다. 그가 소위 ‘데모’나 하는 ‘사회 불순세력’에 속해 있었다면 더욱 그렇다. 이제 죽음조차 평등하지 않은 이 시대에, 죽음은 선별되고 서열화된다. 어떤 이는 응급실에 실려가는 것만으로 신문의 톱뉴스를 장식하지만 어떤 이들의 죽음은 그저 숫자로만 지칭되고, 어떤 이들의 죽음은 헐값에 넘어간다. 어떤 죽음은 심지어 의도적으로 지워진다.

그러나 숫자로만 지칭되는 죽음을 적극적으로 기억하겠다 다짐할 때, 또한 고의적으로 지워진 죽음을 복원하려 할 때 ‘정치적’이라는 모함이 뒤따른다. ‘종북 선동세력’을 운운하던 이들의 헛소리가 아닌, 거리로 나와 ‘국가의 제 역할’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정치적으로 악용한다’는 비난이 덧씌워진다. 그러나 우리는 모함을,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더욱 더 적극적으로 기억해야 하고, 기록해야 한다. 지워지는 죽음일수록 더욱 필사적으로 찾아내고 기록해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영화의 전반부가 민영화 이후 철도 노동자들이 처한 참담한 현실의 과정을 차근히 다룬다면, 후반부는 이윤을 앞세워 안전 규정들이 차례로 무시되는 상황을 다룬다. 정리해고 이후 인력파견업체에 속해 그날 그날 일을 받던 믹은 어느 날 현장에 나갔다가 영국 철도의 안전 규정이 싸그리 무시된 채 작업을 요구받고 이에 항의한다. 8명이 한 조로 일해야 하는 작업을 고작 4명이서 해야 하는 데다, ‘열차 감시자’를 세우고 신호수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의 기본 절차조차 생략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요주의 인물로 찍혀 블랙리스트에 오른 뒤 6주간 동전 한 푼조차 벌 수 없는 실업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후 그는 끔찍한 선택을, 자발적으로 하게 된다. 생계가 직접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스스로 인간다움과 노동자성을 포기한, 과거 노동자-인간이었던 존재들의 모습.

그런데 이 영화의 첫 상영 이후, 인터넷 뉴스에서 접한 어느 철도 노동자의 죽음이 나를 더욱 참담하게 한다. 원래대로라면 ‘열차 감시자’가 있어야 하는 작업에서 그는 열차 감시자도 동료도 없이 혼자 일하다 죽었고, 심지어 26시간째 일하던 상태였다. 2001년에 1995년을 배경으로 영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막 보고난 후 그 영화의 한 장면이 2014년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실제로 일어나는 이 현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화와 현실의 거리가 왜 이다지도 가까운가. 더욱이 그 영화를 본 직후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나는 그 철도 노동자의 죽음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네비게이터> 뿐만이 아니다. “가난한 애들이 수학여행은 불국사로나 가지…”라는 어느 목사의 발언을 접한 직후 거의 10년 만에 다시 본 <레이닝 스톤>에는 “아이 평생 단 한 번의 성찬식이니 예쁜 새 성찬식 드레스를 입히고야 말겠다”며 고군분투하는 가난한 실업자 빚쟁이 아버지가 나온다. <하층민들>의 상영이 끝난 토요일 주말 저녁 극장에서 나오니 바로 앞 보신각에서는 송경동 시인이 연행되고 있다. 카메라와 스크린이라는 매개와 어느 정도의 시간을 통과해 우리의 민낯의 현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게 해주는 영화라는 매체가, 현실과 더없이 밀착돼 있는 이 상황이 안겨주는 현기증. 더욱이, 20년 전 먼 영국땅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말이다. 대체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켄 로치의 영화들이 던져대는 질문들이, 너무나 무겁다.

The Navigators
철도 노동자 작업복을 입고 촬영 중인 켄 로치 옹과 그 일당들.

켄 로치 | 지미스 홀 Jimmy’s Hall (2014)

*미디어스에 송고한 글. 먼저 여기서 보시고 댓글도 좀 달아주시라.

Jimmy's Hall
춤을 추면 표정이 저렇게 됩니다

고백하자면 처음 <지미스 홀>을 보고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작인 <엔젤스 셰어>보다 못하네”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박권일 선생이 ‘코뮤니즘’이라는 단어를 페이스북에서 쓴 것을 보고 영화를 다시 보기로 했다. 그렇게 이틀 후 두 번째 영화를 본 뒤, 감히 불경하게도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평가질’하려 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지미스 홀>은 <엔젤스 셰어>보다 못한 영화가 아니라, <엔젤스 셰어>와 다른 영화다. 영화의 결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진행되는 장면과 장면, 그 ‘과정’들이 중요하다. 두 번째로 보고서야 비로소 켄 로치 일당이 이 영화를 통해 하고자 했던 이야기에 가 닿았다. 마을회관을 구심점으로, 구성원들 모두가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배분하는” 코뮨을 건설하고자 했던 노력, 그 안에서 웃고 춤추고 노래하며 삶의 축배를 들고자 했던, 무엇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며 서로를 북돋고 다름을 인정하며 보완해 가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 다만 내가 이 영화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없었던 것은 이 영화의 아름다움이 덜해서가 아니라, 주요 무대가 되는 30년대 아일랜드의 정치적 환경이 한국의 근현대사와 꼭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의 등장을 뉴스로 접하며 이른바 ‘멘붕’에 빠졌던 게 불과 며칠 전이다.

말하자면 <지미스 홀>은 켄 로치의 2006년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10년 후쯤의 이야기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IRA가 영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치르는 과정뿐 아니라, 영국의 정전 협정을 수용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 사이의 내전까지 다루었다. 내전을 치르며 아일랜드인들이 거쳤던 동족상잔의 비극은 <보리밭의 흔드는 바람>의 마지막 씬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지미스 홀>은 그 상처가 여전히 진행 중인 상태에서 시작한다. 영국령 아래 그나마 자치정부와 자치법정을 세울 수 있다며 유지들과 타협하며 협정을 수용했던 이들과, 온전한 (사회주의) 독립국가를 꿈꾸었던 반대파들의 내전, 그로 인해 계속 불씨를 안고 있었던 갈등은 <지미스 홀>에서도 계속되고 심지어 격화된다. 다만 켄 로치 감독은 실존인물인 지미 그랄튼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 영화를 내전과 동족상잔의 직접적인 역사물로 만드는 대신, 그와 동지들이 작은 시골마을 리트림에서 꿈꾸고 시도했던 이상과 코뮨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간다. ‘피어스-코널리 홀’이란 이름을 가진 이 마을회관은 지미 그랄튼의 땅에 그가 번 돈을 들여 지어졌으나 지미 그랄튼 개인 소유의 건물이 아니다. 마을회관의 필요성을 절감한 모두의 노동으로 지어진, 마을사람 모두의 공공의 공간이다. 이는 영화 속 대사로도 직설법으로 강조된다.

Jimmy's Hall

그런데 이 마을회관은 어쩌다 ‘피어스-코널리 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일까. 수배령을 피해 미국 뉴욕에 있다가 대공황 직후,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정권이 바뀌면서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지미는 폐허가 된 마을회관에 들어가 먼지가 가득 앉은 책을 들춘다. ‘아일랜드 노동사(Labour in Ireland)’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의 저자가 바로 제임스 코널리다. 그의 이름은, “마을회관을 재건해 달라”던 아이들의 요청에 지미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지미를 비난하는 대목에서도 다시 한 번 나온다. “제임스 코널리가 지하에서 통곡하겠어요!” 아일랜드의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창립자 중 한 사람, 아일랜드 좌파의 영원한 영웅이며 사회주의자였던 코널리는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주모자 중 한 사람으로 총살당했다. 사실 제임스 코널리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다. 주인공 일당이 영국군에 잡혀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할 때, 주인공 데미언(킬리언 머피)은 동료와 코널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의 그 유명한 연설 문구를 인용한다.

“우리가 내일 당장 영국군을 쫓아내고 더블린 성에 녹색기를 꽂는다 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지 않는다면 헛된 노력이 될 것이다. 영국은 여전히 자본가들과 지주, 금융가, 그리고 이 나라에 그들이 이식해 놓고 우리 어머니들의 눈물과 순교자들의 피로 키워온 상업적, 개인적인 제도를 통해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If you remove the English army tomorrow and hoist the green flag over Dublin Castle, unless you set about the organization of the Socialist Republic your efforts would be in vain. England would still rule you. She would rule you through her capitalists, through her landlords, through her financiers, through the whole array of commercial and individualist institutions she has planted in this country and watered with the tears of our mothers and the blood of our martyrs.)” 

반면 피어스의 경우 영화를 통틀어 풀 네임이 언급되는 적이 없다(어쩌면 자막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구글링을 통해 피어스가 역시 코널리처럼 부활절 봉기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자 봉기 때 처형당한 패트릭 헨리 피어스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헌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매우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이다. 여러 모로 제임스 코널리와 대비되는 인물인 셈이지만, 마을회관을 만든 이들은 홀에 그의 이름을 또렷이 새겨 넣었고, 그럼으로써 서로 태어난 배경과 성품, 입장도 모두 달랐으되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 둘을 모두 기렸다.

헌데, 영화를 본 이들은 알겠지만 지미와 동지들, 그리고 춤을 추고자 하는 마을 젊은이들의 이 아름답고 이상적인 코뮨을 가장 적대하고 위협하는 세력에는 영국 자치령을 수용한 파시스트들뿐 아니라 카톨릭이 있다. 교구의 노사제 셰리단은 ‘신성한 카톨릭의 독점적 권한’인 ‘교육’이 이 마을회관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반대하며, 지미 그랄튼에 거의 ‘집착’하듯 그를 악마시한다. “이 마을에 빨갱이를 들일 수 없고, 그는 신념 있는 빨갱이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지미가 미국에서 배워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스윙댄스의 일종인 심샘(Shim Sham) 역시 우아하고 고상한 아일랜드 전통춤과 달리 쾌락을 좇는 타락한 춤이라며 비난한다. (그런데 이런 비난과 증오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셰리단은 영화에서 여러 차례 가족과 가족, 이웃과 이웃이 서로 피 흘리며 싸웠던 역사를 끝내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미와 동료들이 세운 마을회관의 이름이야말로 그러한 화합을 염원하고 소망하고 있지 않은가? 지미의 마을회관에서는 심샘뿐 아니라 아일랜드 전통 춤과 음악 역시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Jimmy's Hall
음악과 춤이 넘쳐나는 훈훈한 마을회관...이 빨갱이들 집결소라고 합니다.

홀에서 벌어진 토요일 밤의 흥겨운 무도회와, 다음 날 미사에서 셰리단 신부가 하는 설교가 계속 교차 편집되는 씬은 이 영화의 여러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다. 웃음과 행복과 사랑, 웃음과 춤이 넘쳐나는 홀의 모습과 증오와 엄숙함, 비난으로 가득한 설교 시간의 대조는, 셰리단 신부가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호명하는 데에서 정점을 찍는다. ‘명단 공개’, 이 역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행태이다. 몇몇 젊은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게 일견 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러한 키득거리는 반응이야말로 이 행태에 가장 적절하고도 어울리는 반응이기도 하다. 마을 어귀를 지키고 앉아 무도회로 향하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놨다가 미사 시간에 공개적으로 부른다는 행위는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매우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자비한 채찍질, 그리고 아이들과 여자들이 춤추고 연주하는 마을회관으로 퍼부어진 총알로 돌아온다. 마을회관을 좋아했던 아이들은 그저 “우리 제발 춤추게 해 주세요”라는 간절하고도 단순한 희망이 있었을 뿐이다. 이 소박한 한 마디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정치성을 가지는지, 이 영화처럼 잘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이제 그만 싸움을 끝내고 화합해야 할 때”라는 셰리단 신부의 말은, 지미 그랄튼의 극 중 연설대로 서로 계급이 다른 이들의 이해를 감추고 도리어 어느 한쪽의 희생과 침묵을 강요한다. 지주와 소작인의 이해가 같을 수 있는가? 사장과 노동자의 이해가 같을 수 있을까? 통합과 화합은 셰리단과 영국령 찬성론자들처럼, 혹은 민족주의자들처럼 “우리는 하나이니 화합해야 한다”는 구호에서 출발해 상대를 절멸시키려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을회관의 이름이 드러내는 것처럼, 그리고 지미의 연설이 강조하는 것처럼, “서로의 다름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그 간격을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비로소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아일랜드 역사상 유일하게 ‘불법 이민자’로 추방 당한 사람으로서 지미 그랄튼, 타지에서 죽음을 맞았고 그 유해조차 고국의 반대자들로 인해 돌아오지 못한 지미 그랄튼, 동지이자 오랜 시간 마음에 품고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인에게 빈 마을회관에서 함께 추는 춤으로, 그리고 “널 보면 숨이 멎는 것 같아”라는 뜨거운 고백으로밖에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지미 그랄튼(이 장면의 숨막히는 아름다움과 애절함은 굳이 말을 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지미 그랄튼 개인의 비극과 슬픔이 아니라, 지미와 그 동료들이 만들고 경험했던, 배우고 익히고 나누었던, 씨앗을 뿌리고 가꾸었던 코뮨과 코뮤니즘 때문에 빛나는 영화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떨리게 하고, 웃고 눈물 흘리게 하며 흥분시키며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씨앗이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울 것을, 또한 열매를 맺고 다시 씨가 뿌려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건 마을회관을 불태운다고, 지도자 한 사람을 추방한다고 지워질 수 없는 것이다. “마을회관이 불탔대도 네가 배운 것은 모두 네 안에 있어”라던 대사 그대로 말이다. 그렇기에 지미가 추방되는 그 와중에도 그들은 마치 내일 다시 만날 사람들처럼 웃으며 그를 배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자식에게, 또 손자에게 “지미 그랄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야…”라며 자신들의 경험과 마을회관의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또 전해줄 것이다. 그렇게 아일랜드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도 ‘영화’라는 형태를 통해 전해진 것이 바로 <지미스 홀>이다. 우리와 꼭 닮은 역사를 가진 저 먼 나라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며 우리가 슬픔과 냉소와 좌절 대신, 희망과 투지를 말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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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켄 로치가 멜로씬의 제왕이라 느끼게 한 장면. 그 흔한 키스 섹스 없이 춤만으로 아주 애절 터진다...

ps. 제임스 코널리의 연설에서 ‘녹색기’란 문맥상 추론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아일랜드 국기를 말하는데, 원래 녹색이 아일랜드를, 정확히 하자면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을 뜻하는 색.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대한 글에서도 썼지만, 그래서 그 영화의 여주인공의 복싱가운 색깔이 녹색이고 이때 아일랜드 관객들의 흥분이 들끓어오르는 것.

버드 보티커 특별전 상영작 8편에 대한 메모 @서울아트시네마

Budd Boetticher Special @ Seoul Art Cinema

폴 슈레이더가 ‘시네마’ 지에 게재한 버드 보티커에 대한 비평 연구 글, 「비평에서의 사례 연구 : 버드 보티커의 경우 Budd Boetticher: A Case Study in Criticism」의 번역문은 4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된 버드 보티커 특별전와 관련하여 서울아트시네마가 발행하는 소식지인 CINEMATHEQUE 2014년 4월호에 실렸고 이후 서울아트시네마 공식블로그에도 실렸다. 이곳을 누르면 새창에서 그 글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이곳에 다시 옮겨오지는 않는다. 최대한 한글로 쭉쭉 읽히는 번역을 지향했지만, 한정된 시간 내에 번역하면서 글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을 미리 보지 못한 까닭에 특정 장면의 묘사나 대사의 인용을 번역한 데서 오류가 발생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은 버드 보티커의 영화를 탐험하는 데에 좋은 가이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폴 슈레이더의 관점이 버드 보티커의 영화를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풍부한 하나의 관점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주의와는 반대의 관점에서, 폴 슈레이더는 버드 보티커의 ‘원형’해석으로 접근할 때 더 풍부해진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더불어, 적어도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버드 보티커 특별전에서 상영된 영화 8편에 대해서만큼은, 적어도 버드 보티커가 그리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심층적 분석 없이 그 영화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보티커의 서부극에서 여성은 기존의 서부극들에서의 여성의 기능을 외양상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남성들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투쟁해야 할 계기를 제공하거나, 혹은 그 투쟁으로 이뤄낸 성과, 즉 트로피로 보이는 면이 있다. 그러나 나는 보티커 영화의 여성들이 여기에서 더 나간다고 생각한다. 즉, 오히려, 보티커의 여성들이야말로 남성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내야 할 목적 그자체이며, 최종심급이다. 보티커의 여성들은 그저 그 남자 주인공들의 보호의 대상, 혹은 그들을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랜돌프의 보호를 받되 랜돌프의 선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주며, 나아가 그의 가치를 온당하게 드러내고 평가해주는 이들이다. 악당들은 이 여성들의 평가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혹은, 보티커의 여성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서 남성을 구원해 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나는, 보티커의 영화들에서 남자 주인공이 폴 슈레이더가 해석한 바 ‘원형’이라면, 여성 캐릭터들은 그 원형을 원형으로 만들어 주는 ‘신’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이것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선다운의 결전>이다. 이 영화는 랜돌프 스콧과 보티커 콤비의 일련의 서부극에서도 아주 이상하고 예외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즉, 랜돌프 스콧이 목적을 달성하고 표표히 떠나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에서 그의 목적은 좌절될 뿐 아니라 그는 추락한 상태로 떠난다.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 랜돌프의 ‘선함’을 입증해 주는 존재로서 카렌 스틸이 큰 역할을 한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결혼식을 중단할 뿐 아니라, 진실을 알기 위해 제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랜돌프를 찾아간다. 그런데 최종 장면에서 랜돌프 스콧의 복수에 ‘난입’하여 그 복수를 중단시키고 상황을 끝내버리는 것은 이 영화의 다른 여주인공, 즉 발레리 프렌치이다. 언제나 랜돌프의 선함을 증명하며 그의 편에 서주었던 신이, 이 영화에서만큼은 랜돌프의 복수의 대상, 악당인 존 캐럴을 선택하고 구원한다. 랜돌프가 신으로부터 당한 ‘배반’은 그러므로,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그런가 하면 <코만치 스테이션>은 랜돌프 스콧이 한 여인을 구하여 남편에게 데려다 주는 과정에서 겪는 일종의 ‘시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주인공, 낸시 게이츠는 영화 내내 평범한 서부극들의 여주인공처럼 보인다. 그녀는 랜돌프 스콧에게 가까스로 구출되어 그의 보호 하에 집으로 향하게 된다. 영화는 낸시 게이츠에게 걸려 있던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탐내며 이들의 여정에 함께하게 된 클로드 애킨스가 영화 내내 낸시 게이츠를 시험에 들게 하며 랜돌프 스콧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간 이 영화의 모든 의미를 완전히 뒤바꾸어버리는 엄청난 반전이 된다. 사실은 낸시 게이츠야말로 랜돌프 스콧을 시험하는 신의 위치였던 것이며, 최종적으로 그의 선함과 순수함을 승인해 주는 존재가 된다. 

3 Boetticher films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 , .

<투우사와 숙녀>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를 끌어가는 주인공은 당연히 투우에 매력을 느끼고 투우사가 되려 하는 로버트 스택이고, 그가 사랑에 빠지는 조이 페이지는 무수한 남성-영화들의 흔한 ‘그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스승인 마놀로, 즉 길버트 롤랜드를 자신의 잘못으로 잃은 뒤 그녀를 멀리하고, 굳은 표정으로 ‘죽음을 향해’ 마놀로의 분신이 되기를 준비하는 과정은 “그가 투우를 위해 사랑조차 접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 과연 그러한가? 애초 87분의 개봉판에서 124분으로 복원된 감독판은 “주로 멕시코 문화를 드러내는 부분들”이 복원됐다고 평가됐지만, 사실은 그에 못지 않게 로버트 스택과 조이 페이지 간 멜로가 더 촘촘해지도록 복원됐다. 이 영화에서 조이 페이지는 로버트 스택이 투우와 멕시코의 습성에 대한 존중을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때 그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외면하며, 로버트 스택이 마침내 ‘진정한 투우사’로 거듭났을 때 이를 최종 승인해 주는 존재이다. 그리고 로버트 스택이 마놀로의 진정한 적자임을 공개적으로 승인받는 것 역시, 마놀로의 부인인 첼로, 즉 케이티 주라도의 몸짓을 통해서다.

나는 앞으로 틈틈이 쓸 상영작 8편에 대한 감상문을 주로 이 관점에서 기록할 것이다. 내게 보티커는 서부극이라는 남성 장르, 특히나 여성 캐릭터가 그저 트로피로 존재하기 쉬운 이 장르에서 여성 캐릭터들에게 ‘존중심’을 가지고 접근한 감독이며, 주체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상을 넘어서 신의 위치에 여성을 아로새긴 감독이다. 그게, 이번 버드 보티커 특별전에서 8편을 모두 챙겨 보며 이 감독에게 가장 놀랍고도 흥미로웠던 점이다.

김한민 | 극락도 살인사건 (2007)

프레시안에 실었던 리뷰인데, 어쩐지 이 블로그에는 올려놓지 않고 있었던 걸 지금에야 발견하고 올려놓는다.2007년 4월 10일에 ‘찬반리뷰’ 기획으로, 오동진 편집장의 지지 리뷰와 나란히 실렸다. 원문은 여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83793 글을 다시 읽어보고 좀 놀란 게, 이 지나친 비아냥조의 문장 하며, 내가 이 영화를 정말 이렇게 안 좋게 봤던가… 기억 속 이 영화는 크게 좋아할 영화는 아니어도 이렇게까지 욕 먹을 영화도 아닌데 말이다. 설사 욕 먹을 만했다 해도, 이렇게까지 쓸 필요가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전형적인, 호러 모르고 쓴 글 싶다. 껄껄   

극락도 살인사건
청순한 해일 씨.

<극락도 살인사건>은 고립된 장소에서 한정된 인원 사이에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루는 수많은 추리극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설정으로 시작되지만, 계획적으로 살인을 모의하고 주도하는 범인은 없다. 우발적 상황을 계속 겹쳐놓음으로써 주민 모두가 서로 죽이고 죽는 학살극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면서 ‘범인’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스릴러의 외피 속에 호러의 요소를 차용해 인간의 집단 광기의 공포를 표현하려던 감독의 시도는 꽤 야심만만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어정쩡하고 방만한데다 매우 무책임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112분 동안 16명을 죽이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은 일일 텐데, 춘배(성지루)나 태기(이다윗 – 보건소장을 따르는 남자아이)의 사연, 우성(박해일)과 귀남(박솔미)의 관계, 거기에 고립된 섬에 하나씩 꼭 있을 법한 귀신 얘기까지, 이 모든 것을 미스터리 추리극의 형태에 녹여내려던 욕심 많은 감독이 얼마나 바빴을지는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집단 몸싸움을 벌여 두셋씩 한꺼번에 ‘우발적으로’ 죽여버리는 설정을 반복함으로써 등장인물의 반을 허겁지겁 처치하는 건 너무 안이하지 않는가? 저마다 사연과 설정을 가지고 있었을 각각의 인물들이 이 ‘우발적인’ 상황의 반복을 통해 천편일률적으로 ‘극단적 공격성’이라는 성격 하나만 또렷이 드러내는 좀비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여기에 맥거핀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중이 큰 귀신의 존재는 영화의 흐름을 산만하게 만든다. 귀신이 인간의 신체를 취하는 장면은 (장면 자체는 꽤 큰 공포를 선사하긴 했지만) 도대체 왜 클로즈업으로까지 삽입되어야 했던 걸까? 춘배의 광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너무 넘치는 설명이 아닌가? 사실 ‘귀신’은 초자연적 존재를 긍정하는 전제를 깔고 있지 않는 한, 대체로 인물의 죄책감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중 아무도 죄책감을 느끼는 이는 없다. 마을에서 귀신을 보는 것은 춘배와 용봉거사 두 사람뿐이고 그나마 귀신에게 공포를 느끼는 건 춘배뿐인데, 춘배는 죄책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인물이다. (춘배가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감정은 ‘호기심’이다.) 그런데 영화의 엔딩에 이르면, 영화의 치명적 결함이라 불릴 만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의도적인 것이었단다. 과연 엔딩에서 밝혀지는 ‘비밀’은 영화의 앞뒤 맥락을 지나치게 이가 딱딱 들어맞도록 해준다. 저 평면적이고도 표피적인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도, 춘배의 광기도, 귀신도, 태기가 보는 아버지의 환영도, 갑자기 앓아누운 여자아이도, 우성과 귀남만 이성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한 큐에 다 해결이 돼버린다. 게다가 이 비극의 진짜 원인은 인간을 수단화한, 도시에 있는 자본의 탐욕이었다며 짐짓 엄숙한 얼굴로 설교까지 하려 한다. 영리한 각본의 승리일까? 아니, 이건 매우 무책임한 ‘데우스 마키나’의 변형판이다. 이야기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도저히 수습이 안 될 때 전지전능한 신이 내려와 ‘말씀으로’ 모든 상황을 일거에 정리해버리는 바로 그 ‘데우스 마키나’ 말이다. 허겁지겁 수습하느라 바쁜 막판의 설명조 화면이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최대한의 선의로 이 영화를 이해하려는 이들은 예컨대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1986년)을 주목하여 마을 주민들이 군사독재 하의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기를 강요받았던) 민중들을 상징하는, 시대적 비극을 은유한 사회적 영화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정말 감독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1986년이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거의 보이지 않고, 무전기 외에는 통신수단이 없고 그마저도 고장났다는 설정은 완벽한 고립상황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더 크므로, 그러한 해석은 지나친 아전인수가 될 것이다. 이 영화에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비록 우발적이고 공포에 질린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손에 피를 묻힌 그 누구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은 전혀 없이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고 탓할 뿐이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각본을 직접 쓴 감독부터가 데우스 마키나 설정을 끌어들여 모든 것을 ‘그것’ 탓이라 무책임하게 변명해 버렸는데 캐릭터들이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