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 체인질링 Changeling (2008)

Changeling
재즈의 시대를 통과한 여성의 얼굴.


아이가 유괴됐다가 경찰에 의해 5개월 후 엄마의 품에 돌아온다. 그런데 엄마는 이 아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경찰은 그녀가 충격에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거나 아이를 유기하려는 목적으로 쇼를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1928년 미국 LA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 사건을, 여느 감독이라면 엄마가 정신이상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미스터리 스릴러로 만들거나, 진실을 파헤치는 제3자의 주인공을 내세운 서스펜스 스릴러로 만들었을 것이다. 혹은 부패하고 음울했던 당시 LA를 배경으로 히스테릭한 엄마를 돕는 고독한 사설탐정의 활약을 그린 누아르 영화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요정에 의해 바꿔치기 당한 아이’를 가리키는 원제의 느낌대로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물이 됐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 어떤 장르영화용으로도 매우 흥미진진한 아이템이 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누아르 장르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 이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20대 말에서 1930대 중반의 미국이란, 1차 세계대전 이후 번영과 풍요를 자랑했던 이른바 ‘재즈의 시대’이자 금주법의 시대가 막 종언을 고하고 대공황이 발생한 시기이다. 유수의 누아르 영화들이 즐겨 묘사하던 바로 그 시대인 데다, 영화의 중심 사건은 누아르 영화들이 즐겨 그리던 ‘경찰의 부패’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이미 만들어진 지금의 영화에 스릴러나 누아르의 특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이의 행방의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은 스릴러의 공식을 적절히 활용하며, 경찰의 부패 실상을 그리는 인서트 씬이나 존스 반장과 경찰청장이 사무실에서 만나는 씬 등은 전형적인 누아르의 화면을 선보인다. 즉, 빛을 최소화하고 강렬한 명암대비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거장의 범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한숨에는 그런 ‘기막힌’ 요소들이 속절없이 ‘낭비돼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가장 우직하고도 심심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가 전적으로 옳았다고 처음부터 전제하면서, 아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시스템에 맞서 싸우게 되는 한 인간의 휴먼 드라마로 만들었다.


물론 위대한 모성을 투쟁을 그린 영화는 흔하며, 힘없고 나약하며 무지한 한 개인이 시스템 전체와 맞서 싸우는 전사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도 100년이 넘는 영화사에 발에 채일 정도로 널려있다. 그런데 이스트우드 감독이 강조하는 모성은 남자 예술가들이 즐겨 묘사하는 전형적인 ‘위대한 모성 신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영화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운 길도 걷는 ‘엄마’보다는, 자신의 실존을 걸고 투쟁하는 ‘인간’이 모습에 집중한다. 모성은 말하자면 거대한 맥거핀으로, 그 투쟁에 강력한 동기와 추동력이 되었을 뿐이다. 대신 이스트우드 감독이 집중하는 것은 재즈의 시대를 통과하며 진취성을 갖게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시대적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는 여성, 그 여성이 ‘착한 남자들’의 적극적인 도움 하에 온 힘을 다해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이다.


시대가 타락하고 공권력이 부패하면 그 사회의 가장 약자들이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되는 법이다. 이스트우드 감독의 눈에, 부패가 극에 달했던 저 시대는 아이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데도 공권력이 이 아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아이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 하는 시대이자, 여성이 자신의 주장 한 마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대이다. 경찰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기는커녕 어이없는 말로 그녀의 말을 무시하다가 급기야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원에 쳐넣는다. 그녀를 돕는 착한 남자들 역시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녀의 말과 믿음을 그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상실감과 슬픔으로 인한 현실 회피로만 치부해 버린다. 그들이 그렇게 여길 여지가 충분했다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또 한 명의 주변인으로 소외시킨다. 존스 반장을 증언대에 올린 재판 장면이 단적인 예이다. 변호사는 유난히 독하고 센 어조로 그녀의 아들이 죽었음을 장엄하게 선언한다. 이 순간 이스트우드의 카메라는 크리스틴의 묘한 표정을 여러 번 인서트 씬으로 교차시킨다.


Changeling
여성인 그녀의 목소리는 반복해서 무시되거나, 지워지거나, 대체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 시대 그렇게 숨을 죽인 채 자신의 말조차 남자들의 입과 권위를 빌어야 했던, 그 와중에 자신의 의지가 다시 한번 굴절되어야 했던 여자들의 그간의 고통에 대한 다독거림으로 읽힌다. 브리그랩 목사(존 말코비치)나 변호사, 혹은 이들을 돕는 제3의 사설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이 영화는 미학적으로도 장르영화적으로도 훨씬 흥미진진한 영화가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크리스틴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녀를 돕는 이들 역시 조력자이자 조연의 위치로 한정시킨다. 아마도 이스트우드 그 자신이 브리그랩 역을 맡지 않은 것도, 영화적 기법이나 테크닉의 면에서 담백한 절제미를 유지한 것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온전히 크리스틴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쇄살인을 다루는 영화 속 또다른 기둥의 씬들이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것에서 이런 추측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연쇄살인 회고씬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하며, 우연히 그 사건을 맡은 형사는 존스 반장과 달리 어린아이의 증언에 오롯이 집중함으로써 사건의 본질에 도달한다.)


그렇게 그 시대가 외면했던 한 여인의 진실을, 이스트우드 감독은 오롯이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이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냄으로써 대신 사죄를 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태도에는, 크리스틴의 목소리를 옮기고 있는 자신 역시 남자 감독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겸손함과, 그렇기에 행여 그녀의 목소리가 또 다시 왜곡될까 두려워하는 신중함이 함께 녹아있다. 이 영화가 진정한 걸작인 이유도, 이스트우드 감독이 진정한 거장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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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실린 ‘관련 토크’ 보기.

체인질링 단평

Changeling

1. 1928년에서 1935년. F. 스콧 핏제럴드가 명명한, 1차 세계대전 이후 반짝 누렸던 번영과 풍요와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인  이른바 ‘재즈의 시대(Jazz Age)’가 종언을 고하고 뉴욕의 주식시세가 폭락하면서 대공황을 경험한 바로 그 때다. 안젤리나 졸리의 짙은 화장과 직장을 다니며 혼자 아이를 키우는 진취적인 여성의 특징은 재즈의 시대를 통과한 여성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2. 경찰을 묘사할 때마다 누아르적 화면이 등장한다. 특히 경찰청장이 존스 반장을 사무실에서 꾸짖는 장면은 강한 명암 대조를 이루며 특히 존스의 얼굴의 반 이상을 그림자로 채운다. 구스타프 목사(존 말코비치)가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에게 LA 경찰의 부패를 말해주는 장면에서 등장한 경찰들의 인써트 씬도 누아르 장르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사실 이 영화의 토대가 된 사건은 누아르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이야기이다.

3. 지혜로운 보수주의자 남성은 때로 진보를 자처하는 친페미니스트 남성보다 더욱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쉽다. 이 영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대체 아무리 크리스틴이 “얜 내 자식이 아니라”고 강변해도 경찰과 그 일당은 너무나 어이없는 말로 그녀의 말을 무시하는데, 후반부에서 크리스틴을 돕는 착한 남자들도 크리스틴의 말에 별로 귀를 안 기울이는 건 마찬가지다. 재판 장면은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씬이다. “당신같은 경찰들 때문에 저 여자의 아이가 죽었다!”고 강력하게 변호사가 선언할 때 크리스틴의 그 묘한 표정이라니. 여성을 억압하는 것도 가부장제 하 남성들이지만, 여성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도 결국 남자들의 말을 통해야만 할 수 있었던 시대에 대한 극단적인 고발. 이 영화에서 크리스틴을 제대로 존중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를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다. 감독은 크리스틴의 뜻과 의지를 고스란히 듣고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이스트우드 감독 역시 남자다. 이스트우드 감독도 분명 이를 통찰하고 있을 것이다.

4. 크리스틴의 말과 의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존중해준 사람이 클린트 한 명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체인질링>을 거장의 범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들은 대체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긴 한데, 그것은 바로 이스트우드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위해 포기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의 완성도를 일부 포기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의 의지를 전적으로 존중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체인질링>은 내게 진정한 의미의 진짜 걸작이다.

5. 솔직히 이 영화, 쉽지 않다. 보고 나면 진이 빠진다. 그런데 7, 8천원 내고 별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를 보거나 별 감동적이지도 않은 영화를 보며 기분 상하느니 이 영화를 보고 제대로 진을 빼는 편이 훨씬 낫다. 세상에, 이런 걸작을 보는 데에 7, 8천원밖에 안 내도 된다는 건 이 ‘대량복제 시대가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스트우드 감독이 최근 10년간 내놓은 영화들 중엔 걸작 아닌 영화가 없다. 범작이라도 웬만한 감독의 잘 찍은 영화 이상은 된다. 하나씩 다 찾아볼 것을 권한다. (누가 어디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회고전 좀 해줬으면.)

6. 그러니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 부디 계속 건강하시어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많이도 안 바라고 그냥 1년에 영화 한 편씩. <그랜 토리노> 벌써부터 기대 만빵입니다.

7. 정식 리뷰를 쓰고 있는 중, 아마도 이번 주 내에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로버트 저메키스 | 베오울프 – 최첨단 테크널러지 속에 담은 위트있는 비극적 영웅담

영웅들에 대한 삐딱한 시선

Beowulf
추락하는 영웅에 대한

최첨단 CG기술로 그려낸 ‘애니메이션’ <베오울프>는 영웅의 화려한 모험담보다 영웅의 ‘비극’에 좀더 방점을 찍으면서, 한편으로는 인류 역사에 전해진 신화와 영웅담이 기록되고 작동하는 어떤 ‘방식’에 대해 위트있는 발언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영웅담들과 달리, 마치 WWF 프로레슬링 선수를 그려내듯 영웅들을 묘사하는 이 영화는, 허세와 자아도취에 빠진 영웅이 스스로 자초한 비극을 좀더 인간적인 면에서 고찰하며, 아울러 ‘신화’와 ‘역사’가 서술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코멘트를 더한다.

일단 영화의 시작이 흐로스가의 용 처치를 기념하는 연회장면에서인데, 웬쏘 왕비는 흐로스가의 모습에 노골적인 경멸과 혐오감을 표현하며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왕에게 침을 뱉기까지 한다. 흐로스가 왕은 만취상태에서 왕으로서의 품위는커녕 옷은 제대로 걸치는 둥 마는 둥 한 채 술과 자기 자랑에 취해 추태를 부린다. 이런 웬쏘가 새로 나타난 젊고 용맹하고 패기있는 베오울프에게 살짝 마음이 동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영화는 웬쏘왕비와 베오울프 사이에 오가는 묘한 시선을 통해 이들이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을 느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베오울프도 웬쏘의 기대와는 다른 인물이고, 전통적인 영웅담에서 그리는 영웅과는 역시 다른 방식으로 묘사된다. 수영시합에서 진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 영화가 영웅에 대해 갖는 태도가 또렷이 드러난다. 베오울프는 자신이 처치한 바다괴물의 수를 뻥튀기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괴물에게 홀려 그녀와 동침하느라 시합을 팽개친 사실은 감춘 채 자신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괴물들을 처치했는지 과장해서 늘어놓으며 거짓말을 한다. 결국 그 베오울프는 더 젊다는 사실, 더 싸움을 잘한다는 사실만 빼면 흐로스가와 별다르지 않다. 그 역시 흐로스가처럼 그렌델의 어미 괴물의 달콤한 유혹을 받아들이고 그녀와 계약을 맺는다. 게다가, 베오울프가 그리 지적인 인물이 아닌 것은 특유의 맹한 발음과 대사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단적으로, 그가 사용하는 감탄 어휘는 오로지 하나, ‘beautiful’ 뿐이다. 왕비에 대해서도, 왕비의 노래에 대해서도, 황금 술잔에 대해서도, 젊은 연인 어슐러에 대해서도.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단무지 머슬이란 얘기.)

이러한 시선은 위대한 근육질 사내들의 위대한 모험담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통적인 영웅전설들과, 근육보다는 기지와 재치를 선호하는 요즘 관객들의 트렌드와의 거리를 해소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전통적인 영웅들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거부감을 영리하게 ‘조롱의 재미’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한편 그러면서도 영웅의 품위를 다른 방식으로 지켜줌으로써, 이러한 영웅전설에 대한 전설을 쉽게 만드는 일종의 ‘가교’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어리석은 젊은 남자의 욕망이 부른 자기파멸극

나이가 든 베오울프의 모습은 젊은 시절 패기에 차 허풍과 자기자랑을 일삼던 ‘바보 머슬’의 모습은 더 이상 아니다. 그는 그렇게 욕망하다 결국 결혼에 이른 웬쏘 왕비와 독설어린 사랑의 대화가 아닌 비아냥의 대화를 주고받고, 어린 연인을 두었으며,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대한 회의로 번민한다. 그 모든 권세와 부를 손에 넣었지만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흐로스가도 그러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토록 술을 탐하고 만취상태를 유지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노왕 베오울프의 모습은, 노왕 흐로스가보다는 좀더 품격이 있고 엄격하다. 배가 나오고 몸이 망가졌던 흐로스가와 달리, 여전히 젊었을 적의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베오울프는 쾌락에 정신을 놓기보다는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아도 계속 몸을 단련해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계속해서 몸을 단련하는 자는, 계속하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단련하는 자이기도 하다.

Beowulf
인과응보, 혹은 다시 찾아온 악몽

노왕이 된 베오울프는 위글라프에게 “이제 영웅의 시대는 끝났다. 저 기독교라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나약한 순교자들만 길러낸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 다양한 괴물과 마법사와 영웅이 존재하던 시절에서 기독교로 대표되는, 소위 문명의 시대로 전환하는 시대의 전환기에 대한 베오울프 식의 해석인 셈이다. 각종 용 및 괴물과 전투를 하며 인간의 영토를 넓혀가고, 그 선두에 서서 최고 전사임을 증명해 보였던 이들이 왕이 되었던 시절이 바로 베오울프가 그리워한 영웅의 시대였다면, 그 용과 괴물들이 전멸한 후의 시대, 즉 최고 전사임을 인정받고 싶어도 싸울 상대가 없는 시대에는, 용과 괴물들을 물리친 인간/영웅이 싸움의 대상이 된다. 베오울프는 자신에게 전쟁을 걸어오는 이웃의 남자들에 대해 “이건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다.”라고 말하며, “이제 인간이 괴물이 되었다.”라고 덧붙인다. 인간이 인간들을 서로 죽이는 것에 대한 통렬한 코멘트이기도 하겠지만, 인간이 죽여야 할 상대가 더 이상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 대사에서, 그는 애초에 그란델의 어미 괴물이 자신에게 했던 말, 즉 “그대는 인간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본질은 괴물이다.”라는 말을 수긍하고 인정하는 듯하다. 결국 지배자, 왕은 살육자요 착취자이다. 용이나 기타 이계 세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괴물’에 불과하다. 그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베오울프에게 어미 괴물의 계약은 마치 구약성경에서 선악과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즉, 외부의 존재가 던진 유혹에 넘어가는 사건이 바로 타락의 시초이며, 이것 때문에 인간은 번민과 근심을 갖게 됐다는 것. 그러나 ‘번민’은 인간에게 지혜와 문명을 가져다주는 자극제이기도 하다. 또한 이 계약은 실상은 ‘저주’이다. 부와 권세, 더욱이 색의 유혹이 실제 갖는 의미는, 멸족한 뒤 혼자남은 용이 계속 자손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자, 자신의 아들과의 대결 –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제손으로 죽여야 하는 아비의 비극을 예정한다. ‘아들’이란, 결극 아비의 분신이며 얼터-에고이다. 물속에 비친 베오울프의 모습이 곧 그대로 갑옷을 입은 황금 용의 얼굴로 변하는 장면을 기억해보라. 나중에 용과 베오울프의 마지막 장면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얼굴을 향한 채 팔을 크로스한 자세이다. 거울 속의 자신과 악수라도 하듯 말이다.

또 한편으로, 그 계약은 결국 이 덴마크 왕국의 왕권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영웅의 의지와 활약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암컷용의 ‘승인’을 받는 형태로 이어져온 게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결국 왕권 자체가 타락한 피의 권좌인 셈인데, 새로 왕좌를 넘겨받은 위글라프 앞에 괴물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이 추측에 무게를 실어준다. 과연 위글라프는 괴물의 유혹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역사시대를 열어갈 것인가? 그것은 위글라프의 선택에 달렸다. (별로 좋은 선택을 할 것같진 않다. 그랬다면 지금의 인류 역사가 요 모양 요 꼴이겠는가.)

Beowulf
누구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존재이기도 한. 크리스핀 글로버의 표정을 묘하게 잘 반영한.

그럼에도 베오울프가 ‘영웅’인 이유

평생 빛의 그녀를 열망했던 베오울프는, 결국 어둠의 그녀의 품에 안긴다… 이것이 또한, 베오울프가 겪어야 했던 가장 아픈 비극일 것이다.  그러나 웬쏘에 대한 욕망을 순순히 포기하고자 했고, 괴물의 유혹을 받기 전까지 물리적 힘을 동원하여 왕권을 차지하려 하지는 않았던 베오울프가 괴물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애초에 흐로스가가 아내가 있으면서 괴물에 넋이 나갔던 것과는 살짝 뉘앙스가 다르다. 베오울프에겐 괴물의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탐욕과 자격없는 과도한 욕심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 자신을 인정해주는 이에 대한 복종의 의미가 더 짙다. 결국 이러한 ‘인격’의 차이는 왕이 된 후 그녀와의 동침이 ‘저주’임을 알게 된 후 서로 다른 처신으로 나타나는데, 흐로스가가 쾌락에 탐닉하며 술 속에서 저주의 공포를 잊고자 했다면 베오울프는 철학자가 된다. 절대적으로 베오울프가 흐로스가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각각의 아들(이자 그들의 분신)의 존재이다. 그렌델이 용이 되다 만 괴물인 반면, 베오울프의 아들은 어미괴물이 그토록 바랐던 가장 완벽한 형태의 황금 용이다.

그러나 베오울프가 진정 영웅인 것은, 흐로스가가 자신에게 닥친 저주와 비극을 ‘황금을 내걸고 다른 용사에게 떠넘기려 했던’ 것과 달리, 그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직접 해결에 나서서 그 저주의 의미를 달게 치르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국 지켜냈다는 것이다. (그렌델의 왼쪽 팔을 잘랐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 자신 스스로 자신의 왼쪽 팔을 자른다.) 그는 마지막 순간, 웬쏘 왕비에게 용서를 빌고 사랑을 고백하며,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 부족함 그대로 기억해주기를, 즉 신화화된 영웅 / 왕이 아닌 고독하고도 나약한 개인으로서 ‘진실’을 기억해주기를 청원했다는 점이다. 모래사장 위로 추락한 베오울프가 흘리는 한 줄기 눈물은, 참으로 복잡다단한 인생의 의미를 내보인다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러나 세상이 원하는 영웅담은 물론 ‘비극’이 아니다. 진실이 어떠했건, 결극 신화시대의 영웅은 ‘괴물들을 모두 죽이고 올바른 선택을 한’ 모범적 인간으로 박제되고 남을 것이며, 그의 희망과 상관없이 그렇게 거짓의 역사로 남을 것이다. 그가 웬쏘에게 한 청원은 바로 이런 면에서 어떤 절박성을 띈다. 어쩌면 베오울프의 ‘마지막’ 비극은 바로 이것, 즉 사람들이 원하는 영웅의 방식에 자신이 뜯어맞춰지는 이것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s1. 흐로스가 왕의 캐릭터가 원래 빙충맞긴 해도, 안소니 홉킨스의 포스와 눈빛이 살아있어 그런지 때때로 고단한 현자의 모습이 보인다.

ps2. 사실 모든 ‘젊은이’는 어리석다. 당연한 것 아닌가. 베오울프의 자기파멸은, 어느 정도 예정돼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ps3. 사실 노왕 베오울프의 모습은 심하게 내 취향. (… 나이를 안 가리고 미인에게 올인하는 일관성)

ps4. 아이맥스 관람 쪽을 추천. 아이맥스 상영을 고려한 카메라 앵글과 샷이 무지 많은데 일반상영에선 그 효과가 다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