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와이즈 |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
아아아 ㅠ.ㅠ

고전 헐리웃 시스템에서 그 시스템 특유의 방식으로 제작된 대작영화로는 거의 마지막 시기에 속하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는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영화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 춤과 노래, 오해와 해소, 삼각관계와 마침내 행복한 결혼, 스릴 넘치는 위기와 탈출. 사랑과 음악과 종교와 애국심까지. 수녀가 되겠다는 못말리는 말괄량이 소녀가 맨날 사고만 치다가 사고만 치는 일곱 명의 아이가 있는 대저택의 가정교사가 되어 자유와 음악의 공기를 실어주고, 주인인 트랩대령과 사랑에 빠지고, 나치의 눈을 피해 스위스로 탈출하는 이 대작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80년대까지도 명절마다 TV에서 방영해주던 단골 영화였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적 음악교과서엔 ‘도레미송’이 우리말로 적당히 번안되어 실려있었는데 요즘도 그런가? 뮤지컬 영화의 음악이 당시 버젓이 교과서에 실리는 예도 생각해보면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하긴, <사운드 오브 뮤직>은 보수적인 군사독재 정부도 무척 좋아할 만한 매우 보수적인 영화이긴 하다. 보수적이거나 말거나 이 영화가 주는 영화적 쾌감, 특히 어릴 적, 혹은 나이가 좀 들었다 해도 영화란 매체를 처음 접하던 시기에 전해준 그 거대한 쾌감과 놀라움과 재미는 40년이 흘렀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충무로영화제에서 상영 당시 극장에 아이들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다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영화를 봤던 걸 보면, 이 영화가 가진 엄청난 힘을 새삼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90년대 중반즈음엔가 우리나라에서 한번 극장개봉을 한 적이 있다. 아마도 필름이 디지털 보정된 버전이었을텐데, 향주에 젖은 충무로의 옛 영화 수입업자가 마침 필름이 보정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문화회관 등에서 개봉했다가 어느 정도 주목을 받은 것에 고무돼서였을 것이다. 혹은 <사운드 오브 뮤직> 때문에 <바람과 함게 사라지다>가 개봉했었나? 어쨌건 이 두 영화는 90년대 중반에 다시 깜짝 개봉을 했었고 나는 포스터를 보며 입맛만 다셨던 걸로 기억한다. … (올해도 느닷없이 <벤허>가 개봉했던 걸 보면 이런 일이 아주 가끔씩 있다.) 하여간에.

<사운드 오브 뮤직>은 내가 영화적 쾌감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영화이고, 처음으로 반한 영화 캐릭터가 있는 영화고, 처음으로 OST란 물건을 샀던 영화이기도 하고, 처음으로, 말하자면 ‘스탕달 신드롬’ 비스무리한 것을 경험해본 영화이기도 하다. 고1 때 음악선생님이 TV에서 하는 걸 녹화해다가 음악시간마다 잘라서 보여주었는데, TV에서 그렇게 자주 했어도 한번 보지 못했다가 그렇게 토막쳐서, 그것도 앞에 시작 30분은 날려먹고 보면서 그만 폰 트랩 대령에게 반해 가슴을 두근두근했고, OST를 사다가 테입이 늘어지도록 들으면서 노래 가사를 외웠고, 어이없게도 ‘Lonely gotherd’를 듣던 어느 순간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이 그치지 않는 눈물과 울음을 쏟아내며 환희에 젖었던 것이다. 아아, 폰 트랩 대령, 아마 내 가슴이 덜컹했던 순간은 무도회 밤, 키작은 프레데릭과 낑낑대고 춤을  추며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모습을 본 폰 트랩 대령이 장갑을 끼던 순간이었다. 민요대회 무대에서 에델바이스를 부르다가, 북받치는 감정 탓에 노래를 잇지 못하던 그 장면은 또 얼마나 가슴에 불을 질렀던가. (철의 남자가 ‘그런 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원래 섹시한 법이다.)

약 15년만에 영화 전체를, 그것도 필름으로, 커다란 화면의 극장에서 본다고 했을 때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을지 충분히 아시리라. 전날 미리 표를 발권할 때도 떨렸고, 연일 밤을 새우며 일하다가 딱 두 시간 자고 토요일날 나가서 영화들을 보고 돌아와 완전히 뻗어있었던 주제에, 일요일 아침 잠 속에서 갑자기 “사운드 오브 뮤직 보러 가야 돼!”라고 외치자마자 잠이 번쩍 깨었던… (이러고서 한달간 밤새우며 찌든 피로를, 그 다음 월, 화 이틀 동안 완전히 뻗어있는 것으로 보충했다지.) 극장 안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데, 정말 어찌나 심장이 뛰던지 심장이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그러다 마침내 시작. 타이틀 자막과, 배우와 스탭들의 이름 자막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노래의 주제곡들이 편집된 메들리가 나오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고요한 알프스 산맥. 사운드 없이 광활한 산들을 카메라가 주욱 훑고 있고, 마치 새소리인 듯 시작하는 목관악기 소리는 점차 ‘음악소리’를 갖추어가다가, 어느 순간 저 멀리 작은 점만한 마리아를 비추고, 카메라는 점차 마리아에게 가까이 간다… 그리고 마리아가 부르는 첫 노래는, 바로 ‘Sound of Music’이다. 그리고 이쯤 되면 나는 저절로 두손을 모은 기도 자세를 한 채 눈물을 펑펑 흘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 거지. 물론 다른 사람한테 방해가 되니까, 소리는 안 내고 입만 벙긋벙긋.

The Sound of Music
민요대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폰트랩 대령 가족

영화를 보다가, 나의 지금의 영화 취향마저도 이 영화가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지 깨닫고 살짝 놀랐다. 물론 나는 어둡고 격렬한 영화들도, 지적인 영화들도 정치스릴러도 사회파 감독들의 영화들도 좋아하지만, 이런 편안하고 보수적인 내용에 극도의, 그러나 소박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해주는 영화에 한없이 약하다. 내가 고전 헐리웃 영화들에 그토록 애착과 천착을 가지는 건, 결국 내가 처음 영화적 쾌감을 경험한 영화가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기 때문이다.

ps. 영화를 다시 보다가, 폰트랩 대령과 첫째 딸 리즐 사이의 특별한 애착관계를 느낀 건 나뿐만일까? 영화 촬영 후 혹시 둘 사이 연애소문이 나진 않았을까 궁금해졌다는. 리즐은 항상 막내 그레틀을 챙기면서 폰트랩 대령 옆에 꼭 붙어있고(위 사진에서도 그러하다), 리즐이 대령 옆을 지나가다 눈이 마주치자 대령이 리즐의 뺨을 살짝 두드리는 장면도 있다. 리즐과 좋아했던 롤프가 수도원 뒷쪽에서 폰트랩 대령과 그런 식의 1 : 1 대면을 한 것 역시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싶다.

ps2. 이 영화엔 나치를 빼고 악당이 없다. 남작부인마저도 좀 얄밉긴 해도 가족용 대작영화답게 지독한 꼼수를 부리거나 하진 않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는 이런 영화였던 것이야… 흑.

존 부어맨 | 엑스칼리버

Excalibur
엑스칼리버~!!!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워낙에 이야기로도 영화로도 버전이 많지만, 존 부어맨이 토마스 말로리의 ‘아서 왕의 죽음’을 바탕으로 만든 <엑스칼리버>에서는 심지어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도 조연에 불과하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제목이 보여주는 대로 바로 ‘엑스칼리버’라는 칼이다. 호반의 여신(부어맨의 딸 중 스탭으로 참가했던 텔체 부어맨이 연기한다)이 선물한, 진짜 왕을 위한 칼 엑스칼리버는 아서의 아버지 우터(가브리엘 번)의 손에 잠깐 머무른 뒤 오랫동안 바위에 꽂혀있었고, 아서의 손에 들어간 뒤에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 아서는 기사 중의 최고 기사 랜슬롯과의 결투 “때 이 칼을 한번 부러뜨려 먹는데, 호반의 여신은 그에게 다시 한 번 엑스칼리버를 선사하고(호반의 여신은 칼 수리 전문 대장장이?), 아서가 죽을 때 칼을 다시 회수해간다. 영화가 우터와 콘월의 전쟁으로 시작해 아서왕의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엑스칼리버가 어떻게 이 세상에 나왔고 어떻게 사라졌는지가 이 영화의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의 상당 부분이 아서를 중심으로 한다 해도, 결국 아서는 엑스칼리버라는 칼을 매개로 등장하는 존재인 것이다.


원래 켈트족의 신화였던 아서왕의 전설은 영국이 ‘왕국’으로 기틀을 다져가고, 신화와 전설의 시대에서 기독교로 통합되어 가는 그 과도기를 배경으로 한다. 아서와 귀네비어의 결혼은 기독교의 축복을 받았고 아서가 원탁의 기사들을 전세계에 보내 찾게 한 것은 성배, 즉 예수가 마지막 만찬 때 사용했던 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사 멀린과 모가나가 등장하며 멀린이 신화와 마법사의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것은 이 시대가 아직 기독교를 국교로 한 통합된 국가가 되기 전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신화의 시대가 역사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절대왕권의 강화는 신의 뜻이 아니라 국가와 법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는 것. 거웨인 경(새파란 시절의 리엄 니슨이 출연하지만 수염과 갑옷 탓에 얼굴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옆얼굴의 이마의 선이 젊은 날의 리엄 니슨의 모습을 추측하게 해줄 뿐.)이 귀네비어와 랜슬롯의 부정을 고발했을 때, 귀네비어가 섭섭함을 표함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아서왕조차 거웨인과 랜슬롯의 ‘결투’라는, 당시 국법에 따른 재판을 진행한 것은(그 법의 합리성은 차치하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81년작인 이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아는 아서왕의 전설, 예컨대 랜슬롯과 귀네비어 사이의 연애랄지 성배를 찾는 모험, 특히 그 성배를 찾아온 기사가 원래 랜슬롯의 몸종 출신으로 나중에 원탁의 기사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된 퍼시벌이라는 것 등의 이야기를 모두 포함하는 대하서사극이다. 칼 오프의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 그 중에서도 두 번째 곡인 ‘운명의 여신이여(O Fortuna)’가 주제가처럼 쓰이고, 이 곡은 원래 유명한 곡이었지만 <엑스칼리버>로 인해 더욱 대중적으로 익숙한 곡이 되어 온갖 CF 등에 쓰이게 된 까닭에, 원래 있던 곡이 <엑스칼리버>에 삽입된 곡이라기보다 마치 <엑스칼리버>에 처음 쓰여 대중화된 곡처럼, <엑스칼리버>를 대표하는 곡처럼 느껴질 정도다. 지금 보면 다소 조잡해 보이는 특수효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스펙터클을 한층 강화시켜 주는 것이 바로 이 ‘운명의 여신이여’를 비롯한 음악들. 성배의 물을 마신 후 건강을 되찾은 아서가 다시 모인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모드레드와 싸우기 위해 진군하는 장면은 매화꽃잎이 날리는 아래 기사들의 은빛 갑옷이 번쩍이고 특수효과들이 쓰인 것 외에도, 이 ‘운명의 여신이여’ 때문에 더욱 웅장하게 보인다. 황금빛 갑옷을 입은 모드레드가 결국 아서의 손에 죽는 것은 어찌 보면 아버지이자 형의 손에 죽을 수 밖에 없는 부정한 인간에게 예정된 비극적 말로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결국 국가의 기틀이 마련돼가는 와중에 ‘마법사’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퇴행적 역사에 대한 처단이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서는 왕이 된 후 멀린에게 그렇게 많이 의존하진 않는다.)


25년이 지난 후의 관객에게는, 이 영화가 뿜어내는 장엄함, 특히 헬렌 미렌이 맡은 모가나의 카리스마가 주는 압도적인 힘에 대한 공감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은 곳에서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마법사 멀린이야 원래 의도에서부터 약간의 코믹한 면을 가진 존재(마치 <반지의 제왕> 1부에서의 갠달프처럼)로 해석되었지만, 아서왕이 얼마나 품격있고 자비로운, 존경받을 만한 왕인지를 설득하기 위해 제시된 장면들, 예컨대 방금 전까지 대적했던 유리엔스에게 엑스칼리버를 내주며 자신을 기사로 임명해달라는 장면이랄지, 랜슬롯과 처음 마주쳤을 때 엑스칼리버의 신령한 힘을 사용해 그를 작살내 놓고는 금방 후회하는 장면, 성배의 물을 마신 아서가 기력을 되찾는 장면 등은 충무로영화제에서 상영 당시 관객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는데, 이것은 장면 전환의 시간적 격차가 원인인 것 같다. 만약 그 장면에서 아서가 갈등하는 장면의 시간이 1초만 길었어도, 관객들이 웃지 않았을 것 같다. 15년 전과 지금에 있어 관객들이 화면에 반응하는 속도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점이지 싶다.


몇 년 전 DVD로 보면서 워낙 그 작은 TV화면에도 불구하고 황홀경을 느꼈던 까닭에 이번에 충무로영화제에서 상영한단 얘길 처음 들었을 때 “내 생전 <엑스칼리버>를 극장에서 보게 되다니!”라며 흥분했건만, <THX 1138>도 그랬지만 상영시 쓰인 필름이 낡아서, 기스가 문제가 아니라 색이 날아가 버린 것 때문에 대한극장의 큰 화면으로 본 것으로 그리 만족스럽지가 못 했다. 그냥 칼 오르프의 음반이나 사서 ‘카르미나 부라나’ 전곡을 제대로 들어보자는 결심을 한 정도.




ps1. 텔체 부어맨 외에도, 부어맨의 (당시) 어린 아들이 어린 모드레드로, 딸 카트린 부어맨이 이그레인 역으로 출연한다. 거웨인 경으로 리엄 니슨이 나오는 것 외에도, 엑스칼리버를 바위에서 뽑은 아서에게 가장 먼저 충성을 다짐하는 리언데그란스 경으로 나오는 이가 바로 재비어 교수, 패트릭 스튜어트이다.


ps2. 귀네비어가 청순가련형이 아닌 말괄량이형으로 묘사된 것이 흥미롭다.,


ps3. 브레송의 <호수의 랜슬롯>을 보고싶다는 ‘자극’을 준.


ps4. 국내에 출시된 DVD는 화질이 사후에 보정된, 매우 깨끗한 색감을 보여준다.

질리언 암스트롱 | 나의 화려한 인생

My Brilliant Career
주디 데이비스와 샘 닐의 멋진 연기와 화학반응.

호주의 유명 여성작가 사라 마일즈 프랭클린의 사랑받는 원작소설, [나의 화려한 인생]은,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께, 이것은 모두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라는 서문으로 시작한다. 19살 소녀가 친구들과 돌려가며 읽을 목적으로 썼다는 이 책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로 넘어가는 지점을 배경으로 한다. 영국의 귀족제도 따위를 그대로 들고 온 사람도 있었지만, “(원주민들을 내쫓거나 죽이고) 저 너른 호주 땅을 개간하느라” 여성의 노동력도 필요로 했고, 그러한 개간을 통해 열심히 일한 사람은 쉽게 부자가 되기도 하였고, 혹은 영국 본국에선 신분이 높았건 말건 이곳에서 황무지에서 뒹굴며 일하는 소위 ‘개척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황무지에서 외롭게 자라던 소녀가 또래의 몇 안 되는 여자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쓴 로맨틱한, 그러나 로맨틱하지 않은 엔딩으로 끝나는 소녀소설이 바로 [나의 화려한 인생]이었다. 이 책은, 1903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출판된 뒤 큰 인기를 끌었고, 사라 마일즈 프랭클린은 ‘마일즈 프랭클린’이라는 필명으로 그 뒤 두어 권의 소설을 더 썼다.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다시 시골로 돌아갔다가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아는데, 하여간 호주의 권위있는 문학상 하나가 그녀의 이름을 따 ‘마일즈 프랭클린 상’이라는 걸 보면, 호주에서 마일즈 프랭클린이 받는 사랑이 매우 크단 걸 알 수 있다. 질리언 암스트롱의 데뷔작은 바로 호주의 이 대표적인 소설, [나의 화려한 인생]을 원작으로 한다.  

 19세기의 사람들이 그대로 호주로 이주한 만큼 그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얼핏 제인 오스틴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독립심이 강해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제도가 정착되지 않고 그 모든 제도보다 ‘개척’이 먼저였던 호주라는 환경 때문이리라. 제인 오스틴의 여주인공들이 모두 돈많고 잘난 남자와 결혼을 통해 해피엔딩을 맞는 반면, 시빌라는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 대신, 그리고 목장과 황무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땅을 개간하는 개척자 여성이 되는 대신 작가가 되는 길을 택한다. 가난과 고난을 무릅쓰고 자신을 실현하기 위한 길을 택하는 시빌라의 선택은, 그녀가 거부했던 소위 ‘호주의 개척자 농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오래 전 이미 나이가 든 주디 데이비스의 영화 한 편을 보고 그녀에게 반한 적이 있었는데(<사랑의 금고털이>라는 소품에서 조연이었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한국에서 내가 볼 수 있음직한 다른 영화가 보이지 않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녀의 젊고 어린 시절의 영화를 이런 식(영화제에서 ‘보는’ 것뿐 아니라, 번역작업을 한 인연…)으로 접하게 되다니. 게다가 내겐 <피아노>에서 사이코틱하고 약간 배나온 아저씨로 처음 만나 그대로 각인돼 버린(나이 드실수록 웬지 얼굴에 심술보가 붙어있는 것 같은 인상…) 샘 닐이 이토록 매력적이고 단아한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조금 쇼킹했고.  하여간 둘의 화학반응이 매우 좋아서, 시빌라가 나무 위에서 꽃을 따다가 처음 해리 비첨(샘 닐)과 만나는 장면에서 뒤로 넘어가게 웃었고, ‘격한’ 베개 싸움을 포함, 서로 감정이 오고가는 장면들을 매우 즐겁게 웃으며 보고 작업했다. 매력적이고 활달하고 젊은, 주디 데이비스가 열연하는 빨강 머리의 아가씨 시빌라의 모습은 빨간머리 앤과 모습이 겹치기도 한다. 거씨 대고모님의 말대로, 시빌라 때문에 다른 양가집 규수들이 모두 ‘핏기없은 나무토막’으로 보이니. 여염집 처녀가 사다리를 타고 나무 위에 올라가 꽃을 따고, 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와삭 베어무는 것도 어쩜 꼭 닮았다. 제인 오스틴과 빨간머리 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

조지 루카스 | THX 1138

THX 1138
"미래가 여기있다"

조지 루카스의 전설적인 데뷔작 <THX 1138>은 루카스 자신이 밝혀놓고 있듯,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영화에 ‘스튜디오’가 돈줄을 대줬던 거의 마지막 시대의 거의 마지막 영화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1971년. 아무도 성공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영화들이 줄줄이 성공했던 때였다. 일단의 젊은 감독들이 기존의 체제에, 기존의 시스템에 도전하며 기존 영화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돈으로 자기들 멋대로 찍어온 영화가 대박을 치고, 이들이 ‘이지 라이더 세대’라고 불리었던 이른바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아이들이 대거 등장한 시대 말이다. 아메리칸 조에트로프를 설립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이 영화의 총괄 제작자가 되어 워너브라더스의 간부들을 구워삶은 것도 바로 그런 말들이었다. “<이지 라이더> 같은 대박작이 될 수 있다니까요!” (완성된 영화를 본 워너브라더스 간부들에게 코폴라는 ‘사기꾼’ 소리를 들어야 했다. “돈 되는 영화 만들어온다며!!”) <스타워즈>의 세계가 워낙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고 조지 루카스가 미국 헐리웃 내에서 손꼽히는 억만장자가 돼버린 모습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화청년’  조지 루카스(뿐만 아니라 ‘영화청년’ 코폴라)의 모습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영화가 <THX 1138>이다. <스타워즈>로 하룻밤 사이에 억만장자가 된 조지 루카스는 자기 돈을 들여 ILM을 설립했고, 이 ILM의 역사가 바로 헐리웃 CG 역사의 기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특수효과를 발전시켰는다. 조지 루카스는 작년에 자신의 모교(USC) 영화과에 억대의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저 억대는 원화 기준이 아니라 달러 기준이다.) 툭하면 조지 루카스와 스필버그 이름을 팔아먹는 누구와 참 대조되는 행보가 되겠다. 하여간에.

감독이 구축해 놓은 이 세계가, 참 재미있다. 억압과 통제와 감시의 사회가 등장하니까 사람들이 그냥 쉽게 ‘오웰적 세계’란 말을 많이 하지만, 이 세계는 모니터로 모든 것이 서로 감시/통제된다는 점을 빼면 그닥 오웰스럽지 않다. . ‘중앙’의 절대 권력인 Big Brother가 없을 뿐 아니라, 소위 ‘상부’ 내지 ‘권력층’이라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약물로 통제되는 사회여서만이 아니라, 결국 이 세계는, 오히려 인간의 철저한 이성과 정확함을 추구하며 공공의,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이 평등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서로를 통제하고 감시하며, 스스로 억압에 동참하고 이를 재생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의무적으로 복용하는 약은 진정제이며, 이를 통해 이들은 극단의 침착함과 이성적 사고를 유지하고 작업에서의 정확성을 높인다. 이는 근대적 특성을 극단으로 밀어부친 결과일 터. 이들의 감옥은 심지어 철창도 없고 감시하는 자도 없다. 오히려 넓게 활짝 열린 공간. 다만, 아무것도 노동할 것이 없다는 점, ‘사회’에 공헌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인물들을 미칠 듯한 상태로 몰고 간다. (SEN은 “우리를 일할 수 있는 조직(working unit)으로 바꿀 아이디어를 찾아오겠다”고 외치지 않는가.) 친구가 지적해준 바에 의하면 <THX 1138>의 세계는 오웰보다 오히려 헉슬리적 세계에 더 가깝다. (그러나 [훌륭한 신세계]를 읽은지 워낙 오래 돼서,  헉슬리의 세계가 이토록 이성 중심적인 세계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긴 주인공이 탈출해서 만나는 게 소위 원시적 종교제례였지, 아마.)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에 대해 기존 평론가의 말을 그대로 반복해 ‘디스토피아를 그렸다’고 말하며 이 영화의 세계를 손쉽게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가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하는지 묻고싶은 충동이 인다.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야말로, 정체도 불분명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의 선과 이익과 영광을 위해, 또 한편으로는 취향과 능력까지도 하향평준화된 수준을 지향하도록 각자가 자발적으로 다른 개인을 감시하고 억압하며 이를 재생산하는 사회이자, 능력을 넘어선 소비를 부추키며 수시로 지름신을 맞고 이를 자랑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THX 1138>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보다 더 합리적으로 평화롭게 보이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이들은 누군가를 처벌할 때도 철저하게 규정에 따른 처벌을 하고 재판을 하며, 대중의 이익,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구현하고자 강제와 억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노력한다. 죄인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조차 철저하게 (숫자로) 법제화된 과정을 따른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천재들이 통찰해줬듯, 유토피아가 바로 디스토피아이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매일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매일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향수를 뿌리고 액세서리로 장식을 하는 것은 그리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다. [섹스북]의 저자마저도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체취’에 대한 공포와 ‘청결’에 대한 강박증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머리카락을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모두 밀어버리고 하얀 옷을 입으며 청결에 힘쓰는 THX가 사는 세계의 가치관이, 그들의 사는 모습이, 과연 우리와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묻고 싶다. 우리가 사용하는 체크카드와 신용카드 등으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어느 경로로 언제 어디를 가서 무엇을 했는지 얼마든지 기록이 가능하다. 기록이 가능하단 얘기는 누구든 필요할 때 열람할 수 있다는 얘기기도 하다.

다소 코믹하게 그려진 SEN 5241,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인 THX 1138은 루카스가 감독 코멘터리에서 밝힌 대로 한 사회 내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그리고 다소 ‘자뻑’에 취해있는 사람)과 실천으로 ‘혁명’을 해버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린다. 나중에 옴에게 가서 기도하는 SEN은, “단지 조금만 조정해도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고, 나는 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기도한다. 반면 어쩌다 원치않게 이 사회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룰을 어기고 사회의 범법자가 돼버린 THX는(그가 약을 끊은 건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 사랑하던 LUH마저 잃은 뒤 이 사회를 완전히 탈출한다. 이것은 한 개인이, 자신이 아무런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는 자신의 현실의 사회에서 벗어나 다른 현실로 탈출하는 과정인 셈이고, <THX 1138>에게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 그래서 공동체 묘사가 비슷하고 심지어 의복도 거의 흡사한 – <아일랜드>보다는 주제적인 면에서 오히려 <매트릭스>가 루카스의 세계를 더 충실히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안드로이드 경관이 경고한 대로, THX는 지하도시의 세계를 벗어나 저 바깥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지 모른다. 인간이 그렇게 지하로 숨어들어가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감시와 통제체제를 이룩한 것, 그리고 그토록 청결에 신경을 쓰며 사회의 주요 동력을 핵 에너지에 의존하되 그 사용에 있어 그토록 조심스러운 것도, 지상에서 핵전쟁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 ‘태양’ – 인간이 절대 볼 수 없는 ‘원지식’이자 ‘근원자’를 은유하는 – 앞에 선 THX의 존재는 장엄하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목적은 ‘장엄한 죽음’을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충무로영화제에서 상영된 버전은, DVD로 출시된 감독특별판과 버전이 살짝 다르다. 71년 당시 개봉판하고는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는데, 최첨단 특수효과가 입혀지지 않은 상태이고 편집도 살짝 다르며 새로 추가되거나 빠진 대사들도 있다. (덕분에 이 영화의 번역자인 나는 영화 상영 11시간 전 – 새벽 세 시 반 – 까지 번역을 다시 만져야 했다.) 번역자로서, 기본적으로 이 영화가 그리는 사회가 자본주의/소비사회가 극단화된 형태이고, 모든 것이 오히려 국가주의자에겐 유토피아처럼 보일 정도로 까다롭게 법제화되고 서로 평등한 –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인간성을 상실한, 물화된 존재로서이긴 하지만 – 체계인데다, 안드로이드가 결코 인간을 능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을 명령에 따라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공식적인 언어는 경어를 쓰고 사적인 언어는 반말을 하는 쪽으로 갔고, SEN은 그의 다소 권위적이며 잘난 체하는 성격 때문에 THX에게 보자마자 반말을 하는 쪽으로 설정했다. (LUH 의 대사에 의하면 그는 G34인데, G34가 무언지 모르겠지만 저 사회에선 뭔가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는 특수부서의 사람이라 추측할 순 있다.) 굉장히 힘들게 번역했고, 어제 첫 상영시 극장서 확인을 했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서 오역이 많을까봐 지금도 덜덜 떨고 있는 중이다.


Youtube에서 이런 걸 찾았다. Bjork vs. THX 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