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 체인질링 Changeling (2008)

Changeling
재즈의 시대를 통과한 여성의 얼굴.


아이가 유괴됐다가 경찰에 의해 5개월 후 엄마의 품에 돌아온다. 그런데 엄마는 이 아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경찰은 그녀가 충격에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거나 아이를 유기하려는 목적으로 쇼를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1928년 미국 LA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 사건을, 여느 감독이라면 엄마가 정신이상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미스터리 스릴러로 만들거나, 진실을 파헤치는 제3자의 주인공을 내세운 서스펜스 스릴러로 만들었을 것이다. 혹은 부패하고 음울했던 당시 LA를 배경으로 히스테릭한 엄마를 돕는 고독한 사설탐정의 활약을 그린 누아르 영화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요정에 의해 바꿔치기 당한 아이’를 가리키는 원제의 느낌대로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물이 됐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 어떤 장르영화용으로도 매우 흥미진진한 아이템이 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누아르 장르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 이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20대 말에서 1930대 중반의 미국이란, 1차 세계대전 이후 번영과 풍요를 자랑했던 이른바 ‘재즈의 시대’이자 금주법의 시대가 막 종언을 고하고 대공황이 발생한 시기이다. 유수의 누아르 영화들이 즐겨 묘사하던 바로 그 시대인 데다, 영화의 중심 사건은 누아르 영화들이 즐겨 그리던 ‘경찰의 부패’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이미 만들어진 지금의 영화에 스릴러나 누아르의 특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이의 행방의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은 스릴러의 공식을 적절히 활용하며, 경찰의 부패 실상을 그리는 인서트 씬이나 존스 반장과 경찰청장이 사무실에서 만나는 씬 등은 전형적인 누아르의 화면을 선보인다. 즉, 빛을 최소화하고 강렬한 명암대비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거장의 범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한숨에는 그런 ‘기막힌’ 요소들이 속절없이 ‘낭비돼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가장 우직하고도 심심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가 전적으로 옳았다고 처음부터 전제하면서, 아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시스템에 맞서 싸우게 되는 한 인간의 휴먼 드라마로 만들었다.


물론 위대한 모성을 투쟁을 그린 영화는 흔하며, 힘없고 나약하며 무지한 한 개인이 시스템 전체와 맞서 싸우는 전사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도 100년이 넘는 영화사에 발에 채일 정도로 널려있다. 그런데 이스트우드 감독이 강조하는 모성은 남자 예술가들이 즐겨 묘사하는 전형적인 ‘위대한 모성 신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영화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운 길도 걷는 ‘엄마’보다는, 자신의 실존을 걸고 투쟁하는 ‘인간’이 모습에 집중한다. 모성은 말하자면 거대한 맥거핀으로, 그 투쟁에 강력한 동기와 추동력이 되었을 뿐이다. 대신 이스트우드 감독이 집중하는 것은 재즈의 시대를 통과하며 진취성을 갖게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시대적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는 여성, 그 여성이 ‘착한 남자들’의 적극적인 도움 하에 온 힘을 다해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이다.


시대가 타락하고 공권력이 부패하면 그 사회의 가장 약자들이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되는 법이다. 이스트우드 감독의 눈에, 부패가 극에 달했던 저 시대는 아이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데도 공권력이 이 아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아이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 하는 시대이자, 여성이 자신의 주장 한 마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대이다. 경찰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기는커녕 어이없는 말로 그녀의 말을 무시하다가 급기야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원에 쳐넣는다. 그녀를 돕는 착한 남자들 역시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녀의 말과 믿음을 그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상실감과 슬픔으로 인한 현실 회피로만 치부해 버린다. 그들이 그렇게 여길 여지가 충분했다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또 한 명의 주변인으로 소외시킨다. 존스 반장을 증언대에 올린 재판 장면이 단적인 예이다. 변호사는 유난히 독하고 센 어조로 그녀의 아들이 죽었음을 장엄하게 선언한다. 이 순간 이스트우드의 카메라는 크리스틴의 묘한 표정을 여러 번 인서트 씬으로 교차시킨다.


Changeling
여성인 그녀의 목소리는 반복해서 무시되거나, 지워지거나, 대체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 시대 그렇게 숨을 죽인 채 자신의 말조차 남자들의 입과 권위를 빌어야 했던, 그 와중에 자신의 의지가 다시 한번 굴절되어야 했던 여자들의 그간의 고통에 대한 다독거림으로 읽힌다. 브리그랩 목사(존 말코비치)나 변호사, 혹은 이들을 돕는 제3의 사설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이 영화는 미학적으로도 장르영화적으로도 훨씬 흥미진진한 영화가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크리스틴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녀를 돕는 이들 역시 조력자이자 조연의 위치로 한정시킨다. 아마도 이스트우드 그 자신이 브리그랩 역을 맡지 않은 것도, 영화적 기법이나 테크닉의 면에서 담백한 절제미를 유지한 것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온전히 크리스틴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쇄살인을 다루는 영화 속 또다른 기둥의 씬들이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것에서 이런 추측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연쇄살인 회고씬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하며, 우연히 그 사건을 맡은 형사는 존스 반장과 달리 어린아이의 증언에 오롯이 집중함으로써 사건의 본질에 도달한다.)


그렇게 그 시대가 외면했던 한 여인의 진실을, 이스트우드 감독은 오롯이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이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냄으로써 대신 사죄를 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태도에는, 크리스틴의 목소리를 옮기고 있는 자신 역시 남자 감독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겸손함과, 그렇기에 행여 그녀의 목소리가 또 다시 왜곡될까 두려워하는 신중함이 함께 녹아있다. 이 영화가 진정한 걸작인 이유도, 이스트우드 감독이 진정한 거장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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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실린 ‘관련 토크’ 보기.

체인질링 단평

Changeling

1. 1928년에서 1935년. F. 스콧 핏제럴드가 명명한, 1차 세계대전 이후 반짝 누렸던 번영과 풍요와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인  이른바 ‘재즈의 시대(Jazz Age)’가 종언을 고하고 뉴욕의 주식시세가 폭락하면서 대공황을 경험한 바로 그 때다. 안젤리나 졸리의 짙은 화장과 직장을 다니며 혼자 아이를 키우는 진취적인 여성의 특징은 재즈의 시대를 통과한 여성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2. 경찰을 묘사할 때마다 누아르적 화면이 등장한다. 특히 경찰청장이 존스 반장을 사무실에서 꾸짖는 장면은 강한 명암 대조를 이루며 특히 존스의 얼굴의 반 이상을 그림자로 채운다. 구스타프 목사(존 말코비치)가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에게 LA 경찰의 부패를 말해주는 장면에서 등장한 경찰들의 인써트 씬도 누아르 장르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사실 이 영화의 토대가 된 사건은 누아르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이야기이다.

3. 지혜로운 보수주의자 남성은 때로 진보를 자처하는 친페미니스트 남성보다 더욱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쉽다. 이 영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대체 아무리 크리스틴이 “얜 내 자식이 아니라”고 강변해도 경찰과 그 일당은 너무나 어이없는 말로 그녀의 말을 무시하는데, 후반부에서 크리스틴을 돕는 착한 남자들도 크리스틴의 말에 별로 귀를 안 기울이는 건 마찬가지다. 재판 장면은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씬이다. “당신같은 경찰들 때문에 저 여자의 아이가 죽었다!”고 강력하게 변호사가 선언할 때 크리스틴의 그 묘한 표정이라니. 여성을 억압하는 것도 가부장제 하 남성들이지만, 여성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도 결국 남자들의 말을 통해야만 할 수 있었던 시대에 대한 극단적인 고발. 이 영화에서 크리스틴을 제대로 존중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를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다. 감독은 크리스틴의 뜻과 의지를 고스란히 듣고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이스트우드 감독 역시 남자다. 이스트우드 감독도 분명 이를 통찰하고 있을 것이다.

4. 크리스틴의 말과 의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존중해준 사람이 클린트 한 명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체인질링>을 거장의 범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들은 대체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긴 한데, 그것은 바로 이스트우드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위해 포기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의 완성도를 일부 포기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의 의지를 전적으로 존중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체인질링>은 내게 진정한 의미의 진짜 걸작이다.

5. 솔직히 이 영화, 쉽지 않다. 보고 나면 진이 빠진다. 그런데 7, 8천원 내고 별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를 보거나 별 감동적이지도 않은 영화를 보며 기분 상하느니 이 영화를 보고 제대로 진을 빼는 편이 훨씬 낫다. 세상에, 이런 걸작을 보는 데에 7, 8천원밖에 안 내도 된다는 건 이 ‘대량복제 시대가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스트우드 감독이 최근 10년간 내놓은 영화들 중엔 걸작 아닌 영화가 없다. 범작이라도 웬만한 감독의 잘 찍은 영화 이상은 된다. 하나씩 다 찾아볼 것을 권한다. (누가 어디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회고전 좀 해줬으면.)

6. 그러니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 부디 계속 건강하시어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많이도 안 바라고 그냥 1년에 영화 한 편씩. <그랜 토리노> 벌써부터 기대 만빵입니다.

7. 정식 리뷰를 쓰고 있는 중, 아마도 이번 주 내에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클린트 이스트우드 | 아버지의 깃발


한 장의 사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미국으로서는 진주만을 기습당한 이상 전쟁에 개입하지 않기가 어려웠겠지만, 일단 한번 개입한 이상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 건 정책결정자가 아니라, 자신의 꿈을 위해 한발짝씩 준비하던 어린 소년들이었다. 전쟁은 언제나, 그 사회에서 “가장 어린 성인들”의 목숨을, 그리고 그외 다른이들의 사회적 목숨을 대규모로 담보로 잡는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전쟁회의론이 확산되던 시점, 막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오지마에서 날아온 조 로젠탈의 사진 한 장은, AP통신을 타고 전세계에 퍼져나갔고, 꺼져가던 전쟁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붙였다. 사진 속 인물들 – ‘우리의 살아돌아온 아들들’ – 이 본토로 송환되어 전쟁기금 모금 캠페인에 동원됐고, 사람들은 타지에서 죽어나간 자신의 아들을 눈물 속에 묻으며 다시 한번 지갑을 열어 전쟁기금을 낸다. (그러고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은 일본에 원폭을 투하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소문난 공화당 골수 지지자이자 보수주의자. 그러나 이제껏 이스트우드가 걸어온 길은 우리가 보통 ‘공화당 골수 지지자’라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배반한다. 그는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가정을 보듬어 안으며, 젊고 어린 생명들을 염려한다. 이스트우드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깃발은, 젊은 아이들의 존경과 관심을 억지로 뺏고 아이들을 협박하기 위해 호화롭게 채색되어 있지 않다. 그가 창고의 상자 구석에서 주섬주섬 꺼내 내미는 깃발은 세월의 먼지와 그간의 상처의 더께가 얹고 여기저기 닳아빠진, 초라하고 더러우며 색이 바랜 빛깔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별로 높지 않은 목소리로, 그 깃발에 있는 얼룩과 더께와 먼지의 사연을 조용히 들려준다. 그리하여 원색의 황홀한 색감과 막 찍어낸 석유냄새가 진동하는 새 깃발이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과 먼지의 때로 찌든 낡은 깃발을 그대로 드러내고, 이것의 아름다움, 즉 진실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전쟁의 참혹상은 단지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머리가 떨어져나가는 참혹한 상륙 전투에 대한 묘사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영화를 제작한 이가 스필버그여서인지 많은 평론가들은 이 상륙작전 씬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빚지고 있다고 너무 쉽게 쓰고 있지만, 글쎄올씨다다. 상륙작전을 마스타샷으로 보여주고 팔다리 머리 떨어져나가는 걸 묘사하면 다 스필버그란 말인가. 무엇보다도 나는 두 화면의 정조가 매우 달랐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액션 영화고, <아버지의 깃발>은 전쟁드라마이며, 두 상륙작전은 각 장르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찍혔다(고 생각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주 정조가 긴박감과 어떤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잔혹한 통과단계와 같은 느낌이었다면,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철모르는 아이들이 별 대비없이 공포의 세계와 마주친 느낌과 같은. 비슷하면서도 꽤 다르다. 그 장면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 때문이기도 하고, 접근 방식 자체가 조금 달랐다는 느낌도 든다. 오히려, 찍힌 방식 자체가 현격히 달라도 <아버지의 깃발>에서의 상륙작전은 <씬 레드라인>에서의 전투씬과 더 비교할 만하다.


그 이오지마에서, 적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던 아이들은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조차 못한 채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영화에서 일본군의 복장과 헬멧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아군과 별 구분 없이 그려진다. 우리는 닥이 죽인 공격자가 흑인인 미군임을 어렴풋하게 알아챌 수 있고, 아이라가, 또다른 미군들이 죽인 이가 정말 몰래 살금살금 다가온 일본군인지 적과 아군이 구분 못한 채 패닉 상태에서 총칼을 휘두르는 아군-미군인지 확신할 수 없다. 살떨리는 전투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최고의 해병’ 마이크마저도 아군 폭격기에 죽는다.  위생병! 위생병!을 부르는 소리는 노년이 되어서도 닥의 귓가를 맴돈다. 영광과 영웅담의 배경이 아닌, 잔혹하고 처참한 전쟁터. 가까스로 세운 승리의 성조기를 과시하기 좋아하는 장관이 가져가자, 병사들은 깃발을 다시 세우란 명령을 그저 로봇처럼 그대로 수행할 수밖에 없고, 이 장면을 찍은 사진은 영광과 감격의 승리의 장면으로 기록된다. 이들의 사진은 계속 형태를 달리해 재현되어 영웅신화가 만들어지고, 평범한 아이들에 불과했던 그들은 자신에 부여된 호칭 ‘영웅’이 사기극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고(혹은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누구도 의도치 않았겠지만 그렇게 캠페인은 ‘사기극’이 된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있다.


비극은 그것이다. 일개 병사의 입장에서, 이미 달리고 있는 전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다는 것. 알면서 동원되고, 알면서도 사기극을 함께 진행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캠페인에 알면서도, 속으면서도 지갑을 여는 것. 그것은 영광의 행동이 아니다. 모두가 치는 박수와 환호 소리에 잠깐 그 순간은 웃으며 영웅의 포즈를 취해주더라도, 그들에게 그 경험은 영원한 상처로 남는다. 그것이 전쟁. 그리고 사회가 전쟁을 받아들이는 방식. 그러나 원작자 존 브래들리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말한다. 진짜 영웅을 기리는 방식은, 그런 식의 신화화가 아니라 오히려 신화를 해체하고 그 안에서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간’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이것이, 보통 권위와 신화화의 방식에 기대어 젊은 세대를 협박하고 속이는 기성세대에 속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젊은 아이들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일 때, 그 진정성과 감동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임종을 앞에 두고 아들을 향해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고,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아버지 앞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고, 당신이 나의 최고의 아버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난 존경으로 권위를 얻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진정 좋은 아버지인 것이다.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나와, 일단 발생한 전쟁에 대해서 자기가 할 일은 할 수밖에 없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정치적 입장은 현격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아버지라면, 믿고 존경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식 세대들의 ‘전쟁 반대’에 대한 소신과 활동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지켜보고 도와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버지일 테니까.

ps1.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또 깊어진다. 우리같은 젊은 세대들은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그 깊이. 그러나, 노인이 되었다고 모두가 그 깊이를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터이다. 이 이상 걸작을 만들어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 때, 그 정정한 노인네가 들고 오는 다음 영화는 거기에서 더 나아간 걸작을 가지고 다시 내 곁을 찾아온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ps2. 워너 코리아여, 제발제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단 한 관만이라도 개봉해 주세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