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피에르 멜빌 | 맨하튼의 두 사람

Deux Hommes dans Manhattan
맨하탄에서의 하룻밤

<도박꾼 밥>에서 내레이션을 담당했던 걸 제외하면, <맨하튼의 두 사람>은 장-피에르 멜빌이 자신의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출연(주연)을 한 영화이다. UN본부의 회의장을 비추면서 프랑스 대사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이후 냉철하고 객관적인 모로 기자(장-피에르 멜빌이 직접 연기한다)와 망나니 사진기자 델마스(필립 그라세), 이 두 남자가 맨하탄 여기저기를 뒤지며 프랑스 대사의 행적을 추적하는 동선을 좇는다. 형식상으로는 분명 미스테리 추리물에 속하는데, 추리물이라 하기에는 좀 느슨하게 영화를 진행시키는 것을 보면, 멜빌이 정말 하고싶었던 건 맨하탄의 정경을 자기 식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느슨한 진행이라고 해서 이 영화 추리물로서 함량이 떨어지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만 장르영화라면 당연히 강조되고 부풀려 져야 할 사건 뒤에 숨겨진 비밀과 음모 따위를, 멜빌은 매우 심상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영화에서 강조되는 건 두 사람의 캐릭터의 대조이고, 재즈가 흘러나오는 뉴욕의 새벽 거리이다.

프랑스 대사의 실종이 여자와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한 두 남자는 델마스가 찍었던 프랑스 대사의 사진들 속에 있는 여자들을 차례로 찾아나간다. 브로드웨이의 여배우, 가수, 그리고 외교관만 상대한다는 고급 콜걸까지. 그 와중에 이들을 쫓는 수상한 차가 관객들의 눈에 보인다. 결국 그들은 대사의 행방을 밝혀내지만 그는 이미 죽은 상태. 하지만 이 사람의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델마스는 자극적인 사진을 찍기 위해 시체가 발견된 곳의 상황을 조작하여 사진을 찍고, 모로는 이에 반대한다. 대사의 가족들을 찾아가 이들을 찍고 재빨리 토껴버린 델마스의 뒤를, 이번에는 대사의 딸과 모로가 뒤쫓는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인물과 망나니 속물의 파트너쉽은 굉장히 궁합이 좋은 버디 구도이다. 두 사람의 가치관의 차이가 기본적인 영화의 주요 갈등축 옆에 소소한 다른 갈등축을 제시하면서 때로 영화의 몸통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기도, 완화시키기도 하기 마련이니까. 모로가 대단히 정의감 넘치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델마스는 인간적인 예의고 나발이고 돈이라면 환장하는 그런 캐릭터다. 자살시도를 한 뒤 병실에 누워있는 여자를 다그치면서 환자의 몸을 함부로 흔들어대고 그 와중에 사진까지 찍는 걸 보면서 거의 으악, 비명을 지를 뻔했는데, 이런 식의 묘사는 영화에서 꽤 성공적인 캐릭터 설명을 하고 있다. 이후 저 현장을 조작하는 장면에 이르면 거의 ‘주인공이 이래도 되는 거야?’ 싶은 현기증까지. 하지만 그렇게 속물의 막장까지 가버린 듯한 이 인간의 마지막 장면은 꽤나 처연하다. 그리고 뜻밖의 반전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고.

Deux Hommes dans Manhattan
성공적으로 특종 사진을 입수한 뒤 자축의 술을 마시고 뻗어있는 델마스.

뉴욕의 하수구는 결국 그 모든 더러운 욕망과 실날같은 희망을 모두 집어삼켜주는, 존재만으로도 고마운 배설구인 셈이다. 차갑고 깍쟁이 같지만 한편으론 대단히 너그러운 도시, 그토록 사람으로 넘쳐남에도 결국은 외로움을 뼛속까지 일깨워주는 도시, 그게 바로 멜빌이 본 뉴욕이 아닐까 싶다.

장-피에르 멜빌 |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

Quand tu liras cette lettre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이 영화를 보면서 틀림없이 원작소설이 있고 그걸 각색한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imdb를 찾아보니 자크 드발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나옵니다.. 조금 놀랍군요. 뭔가 ‘문학적인’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고, 아주 살짝은 실망을 했고, 그럼에도 마지막 여운은 짠했던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림자 군단>을 보고 그 간결하면서 건조한 화면에 쇼크를 받으며 열광을 했더랬는데, 뭐랄까, 역시 인간의 심리를 복잡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내야 하는 영화는 멜빌과 안 어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멜빌전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을 이미 거진 다 보았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역시 최고는 <암흑가의 세 사람>이고, 섬세하고 서정적이어야 할 <바다의 침묵>(원작소설이 있는 작품이라고 합니다)은 다소 당황스러웠다고 하니까요. 만약 다른 감독이 만들었다면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는 꽤나 억장을 무너지게 할 슬픈 멜러영화가 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 그렇게 됐다면 이 영화가 더 좋은 영화가 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멜빌 버전은, 묘하게 사람 애잔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긴 해요.

수녀원에서 정식 수녀로 서원하기 일주일 전, 테레즈는 부모님의 급사 소식을 듣고 어린 여동생 드니즈를 보살피기 위해 수녀원을 나와 집으로 옵니다. 그녀는 부모님이 하시던 문구점을 드니즈와 함께 이어받고, 자신에게 대단히 의지하는 드니즈를 엄격한 규율과 따스한 애정으로 돌봅니다. 한편 천하의 몹쓸 바람둥이 막스는 이혼을 앞둔 부유한 여성인 이렌 포게레를 꼬셔 그녀에게 얹혀살다가 우연히 드니즈를 알게 되고, 마침 포게레 부인을 찾아온 드니즈를 호텔방에서 강간합니다. 드니즈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치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테레즈는 막스를 협박해 드니즈와 결혼을 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막스는 테레즈에게 한눈에 반했다며 그녀에게 구애를 합니다.

어느 해안가 장면 위에 오프닝 타이틀이 지나간 후, 영화의 본격적인 첫 장면은 수녀원을 찾아온 테레즈의 조부와 수녀원장의 씬입니다. 저는 조부가 수녀원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수녀원장이  테레즈를 불러오고, 조부가 전하는 소식에 충격을 받는 테레즈의 장면을 정말로 그렇게 다 보여줄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여기서 어? 하면서 살짝 실망을 했더랍니다. 물론 이 씬은 테레즈라는 인물과 그녀의 배경을 설명하는 씬입니다만, 필요이상으로 길어요. 심지어 수녀원장의 명을 받은 다른 수녀가 정원에서 일을 하고 있던 테레즈를 불러세우고, 이들이 수녀원장실로 향하는 장면까지 나오니까요. 수녀복을 입은 쥘리엣 그레코의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멋지긴 하지만, 미니멀리즘의 대가로 불리는 멜빌 치고는 첫 시작부터 쓸데없이 늘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테레즈와 드니즈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테레즈가 전반적으로 매우 검소하고 엄격한, 수녀원 출신다운 외모를 보여준다면, 드니즈는 훨씬 발랄하고 아름답습니다. 사실 외모부터도, 테레즈 역의 쥘리엣 그레코는 조금 딱딱하면서도 날카로운 외모에 거의 표정이 없는 얼굴이 하고 있습니다. 반면 드니즈는 대단히 풍성하게 아름답지요. 그렇기에 이 아가씨가 강간을 당한 뒤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은 매우 애처롭고 마음이 아픕니다. 다시 옷을 단정하게 입긴 하였으나(심지어 스타킹까지!) 머리는 살짝 흐트러져 있고, 완전히 멍한 상태로 길을 나서 배로 향합니다. 그녀의 자살은 그리 ‘충동적’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배의 갑판 문을 확인해 보고, 배를 타기 전 카페에서 작성한 유서를 가방에 놓는 침착하고도 주도면밀한 면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이 일어나는 게 거의 영화의 반이 지나서입니다. 사실 막스와 드니즈가 처음 만나는 장면 자체가 영화 시작하고 30분 정도 지점일 거예요. 앞부분이 좀, 많이 길죠. 왜 이렇게 느끼냐하면, 이 영화가 빛나는 지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드니즈가 자신에게 청혼한 막스가 잘해준다며 그저 좋아하고, 막스는 드니즈에게 친절하게 굴면서 공공연히 테레즈를 유혹하며 작업을 걸고, 이에 대해 테레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 그러나 그 뒤로 어딘가 흔들림이 느껴지는 얼굴로 – 단호한 자세를 취하는 일련의 대립과 비밀의 장면들이거든요. 발랄하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는 드니즈는 막스가 테레즈에게 던지고 있는 그 무수한 낚시와 추파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워낙 여자를 후리며 돈을 빼먹는 막스의 사기짓거리를 (멜빌이 영화 초장부터 자세히 보여준 덕에) 잘 알고 있기에 그가 테레즈에게 하는 고백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막스 트리베 역을 맡은 필립 르메르의 얼굴은 뺀질하고 비열해 보이면서도 매끈한 부분이 있어서, 그 고백들을 100% 거짓이라 단정하기도 힘이 듭니다. 저 노련한 뱀같은 말을 듣는 테레즈의 얼굴은 또 대단히 무표정해서, 그러나 그 얼굴이 한편으로는 어딘가 흔들리고 있는 듯해서, 여기에서 바로 긴장과 스릴이 발생합니다. 사실 저렇게까지 열렬하게 사랑 고백을 하면 믿고싶은 게 당연한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적어도 저는, 테레즈가 결코 막스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기를, 그러나 저 고백 자체는 사실이기를 바랐답니다. 막스의 진심이 뭔지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요.

드니즈의 금을 훔친 막스가, 테레즈가 자신을 뒤따라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저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막스가 정말 진심인 건지, 아니면 바람둥이로서 너무 용의주도한 것인지 헷갈렸어요. 물론 막스는 그렇게까지 머리가 좋아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설마, 저게 진심이란 말이야? 싶었지만, 그가 워낙 악당이기에 쉽사리 그 마음을 믿을 순 없어요. 그리고 아마 테레즈의 마음도 딱 그랬을 겁니다. 사실 테레즈는 꽤 현명해서, 설사 막스가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남자와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녀는 끝까지 막스에게 단호하게 구니까요. 하지만 해변가에서 막스가 다시한번 구애를 하고 테레즈가 단호하게 구는 장면에서는, 테레즈의 차가운 말들과 달리 테레즈의 모습이 다소 흐트러져 있습니다. 영화 내내 그토록 단정하게 빗어올렸던 테레즈의 풍성한 머리가 풀려 바람에 마구 휘날리는 것도 이 장면이고,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하게 행동하던 그녀가 허둥대며 뛰어다니는 단 한 씬도 바로 이 장면입니다. 테레즈의 마음이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다소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던 장면들은 드니즈-막스-테레즈의 삼각 구도 이후부터 탄력을 받기 시작하고, 거침없이 엔딩을 향해 질주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은… 꽤 애잔함을 줍니다. 우리는 테레즈가 정말로 수녀원으로 가려고 했을 거라 믿을 수밖에 없지만(이후 그녀의 기도에서도 확인되기는 합니다), 그가 막스에게 갈까, 흔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합니다. 테레즈가 막스를 만나기로 한 곳은, 막스가 죽음을 맞이한 레자크 역이 아니라 마르세이유 역이었고, 영화는 마르세이유 역에 도착한 그녀가 곧바로 수녀원으로 향하는지 아니면 막스를 찾아 두리번거리는지는 보여주지 않으니까요. 아마 그녀 역시, 막스의 열렬한 구애에 조금은 마음이 흔들렸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히 ‘비밀’로 묻혔고, 오직 죽은 막스와 테레즈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완전히 묻혀버린 기억이 됩니다. 드니즈는 평생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약혼자가 뜻밖의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에만 슬퍼할 것이고요.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 타이틀 때처럼 다시 해안가를 비추면서 끝납니다. 처음과 끝이 동일한 이 장면은, 결국 모두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살아갈 것이고, 오로지 테레즈의 가슴 속에서만 폭풍이 몰아치고, 테레즈의 기억 속에서만 막스가 잠시쯤은 어떤 열정을 보여줬던, 그러나 그 열정도 실은 믿을 수 없는 그런 남자로 기억되겠죠.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진심의 사랑을 느꼈던 여인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남자란 굉장히 불쌍한 존재이긴 한데, 이 친구는 사실 워낙 저지른 죄가 많아서 그래도 싸다, 싶고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음에도, 그 마지막의 시체를 보니 연민이 눈곱만큼은 생기더군요. 사실 막스가 처음으로 사람다워 보이는 게 그가 시체가 됐을 때입니다. 도대체 이 인간은, 그 사랑이 나름 진심이긴 했구나 확인되는 순간에도 밉살스럽게 구니까요. 다만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드니즈와 막스를 위한 연민의 기도를 올리는 마지막의 ‘수녀’ 테레즈의 모습은, 영화의 전반적인 건조한 느낌 때문인지 더욱 짠합니다.

영화의 제목,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 쯤이면…”은, 모두 편지를 쓴 이가 ‘미래’를 가정하고 쓰는 구절입니다. 영화에서 두 번이 나오는데, 한 번은 드니즈의 유서의 첫 시작 내용이고, 두 번째는 막스가 비케에게 보낸 편지지요. 드니즈의 구절이 결국 ‘삶’으로 연결됐다면, 막스의 구절은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연결됐다는 점이 또한 아이러니한 매력이겠죠. 이 구절은 원래 막스 오퓔스 감독의 영화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의 그 편지 첫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라 합니다.

ps. 쥘리엣 그레코는 우리에게 이브 몽탕과 함께 부른 ‘고엽’으로 너무나 유명한 샹송가수죠. 그녀가 부른 ‘La Mer’ 같은 곡들을 어렸을 적 꽤 자주 들었구나 싶기도 한데… (불과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만 해도 라디오에서 샹송이 심심찮게 나왔답니다..) 재미있게도 그녀는 무대에서 검은 옷을 즐겨 입었죠. 이 영화에서 계속 검은 원피스를 입고 나오는 그녀의 모습과 겹칩니다. 참, 그녀는 파리에서 활동할 당시의 마일스 데이비스와 연인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지난 제천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유로피안 재즈의 모든 것>에 모습을 잠깐 드러내는 것 같군요.

ps2. 이 영화는 멜빌 감독이 처음으로 자신의 각본이 아닌 남의 시나리오로 연출한 영화입니다. 아마도 스토리와 스타일이 서로 어긋나는 듯한, 좀 안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장르도 장르지만 그 이유가 큰 걸까요? 멜빌의 다른 영화들을 보지 못해서, 다른 영화들 중에도 이런 어긋남이 보이는 게 있는지 모르겠네요. 멜빌전이 다 끝나기 전에 확인해 봐야 할텐데… 멜빌 전은 벌써 중반을 달리고 있고, 전 이제 이 영화 한 편만 본 상태랍니다. 제발, 다음 주엔 영화들을 볼 시간이 나야 할 텐데 말이죠.

장-피에르 멜빌 | 그림자 군단


Sabbath님이 열정적으로 보고싶다는 소망을 피력하셨던 바 있는 장-피에르 멜빌의 영화 <그림자 군단> 완전판이 마침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의 친구들영화제에서 상영된지라, 일종의 뽐뿌를 받아 상영 당시 보러 갔다. 워낙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영화가 재밌다는 얘길 많이 들은지라 조금 기대를 하면서도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관한 영화라 내 취향에 맞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게 웬걸. 이 영화는 매우 절제되고 건조한 이야기 진행에 매우 서정적인 음악이 기묘하게 충돌하는, 아니 그리하여 한차원 더 높은 멜랑꼴리를 만들어내는 그런 영화였다. (매우 취향이라는 얘기다.) 음악 얘길 꺼낸 김에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음악 외에도 전반적인 사운드 효과가 아주 인상깊었다. 특히 비시정권 본부로 호송된 제르니에가 탈출하는 장면에서, 빈 골목에 가득 울리는 제르니에의 발자국 소리와 헉헉대는 숨소리가 갖는 일정한 리듬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리노 벤추라와 장-피에르 카셀(뱅상 카셀의 아버지인 프랑스의 명배우), 시몬 시뇨레 등 한때 스크린을 풍미했던 위대한 배우들이 줄줄이 출연하는 이 영화는 레지스탕스를 그린 영화들의 흔한 상투성을 반복하지 않는다. 모두들 언급하는 대로, 고독하고 과도한 비장미를 풍겨대는 후까시 고뇌의 영웅들이 아니라 은신과 도망, 그리고 싸움과 엄격함과 금욕이 피로한 일상이 되어버린, 그러나 그 일상을 매우 성실하게 영위해내는 ‘보통사람들’로서의 레지스탕스를 그린다.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 청년. “조국을 너무나 사랑해서”와 같은 낯뜨거운, 그러나 대단히 선동적인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그저, “해야 할 일이니까” 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화면은 과장된 어리광의 비장미 대신, 절제된 슬픔과 인간 본연의 고독이 가득하다. 혹독한 조건 위에서 묵묵히 손에 피를 묻힌다. 총에 맞는 순간, 마틸드는 어쩔 수 없이 살고싶다는 욕망과 동지들에 대한 원망 사이에서도 차라리 동지들 손에 죽는 것이 행복하다는 상반된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들소’처럼 우리 역시, 마틸드를 죽여야 한다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강경한 제르니에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질리고 거부할지언정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게 스러져간 목숨들이다. 딸의 불행 앞에서 이성을 잃는 어머니, 왜소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40대 중년의 남자, 연이은 고문을 받아 피떡이 된, 더없이 허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노인.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은은한 빛이 난다. 첫 임무를 배신자 처단으로 받아 패닉 상태에 빠졌던 ‘마스크’ 클로드가 영화 말미에서 더없이 침착한 태도를 보이듯, 어느덧 살인과 처단에 익숙해지는 자신들을 보며 그들 스스로도 자괴감을 느끼지 않았으랴. 그러나 그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 모두 체포돼 죽음을 맞고 만다. 그들은 진정 그림자로 존재하던 군대였고, 그림자의 운명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아무런 영광도 기쁨도 없이, 보상도 없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


아마도 이런 ‘건조한’ 터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멜빌의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첫 개봉 당시 비시정권에 우호적이라는 오해를 받았던 모양인데, 아마도 장 웬 감독의 <귀신이 온다>가 중국인에게서 ‘일본에 우호적’이라 평가받은 것은 물론 한국의 영화평론가한테까지 ‘허허실실의 역사인식'(심영섭)이란 오해를 받은 것과 비슷한 궤일 것이다.

ps 1. 멜빌 영화들을 쭈욱 보고싶은 욕심은, 작년엔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특별전을 한번 했었기 때문에 당분간 이뤄지기 어려울 듯. 그러나 올해엔 장 르노아르 특별전이 있다!


ps 2. 내가 본 버전은 완전판, 복원판 등으로 불리는데, 애초 개봉되었을 당시 잘려나간 10분을 복원했을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카날플러스에서 완전히 새로운 프린트로 복원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1969년 영화를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프린트로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도 부러운 일인지. 이번 친구들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김기영 감독의 <고려장>이 프린트 2권이 분실된데다 비내리는 화면(이나마도 영상자료원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프린트 세척과 복원을 하고 빠진 부분 줄거리를 자막으로 삽입한 버전)으로 본 것을 생각해보면, “진정한 영화강국” 프랑스가 부럽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그러나 워낙 열정적인 사람들이 제도권 안팎에서 노력하고 있으니, 우리 역시 그 빛을 분명 조만간에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