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 도청 The Convers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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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은 아닌 듯. 이렇게 세련됐을 리가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Blow up은 원래 ‘확대’란 뜻이지만 한국에서 이 영화는 ‘욕망’이란 제목으로 알려졌습니다.)에 오마주를 바치는 영화인 만큼 <도청>을 얘기하는 데에 있어 <욕망>을 언급 안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두 작품은 주제 면에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코폴라의 다른 영화에서는 그리 드러나지 않았던 주제들이기도 합니다. 제가 코폴라의 영화를 다 본 게 아니니 딱 잘라 단언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 유명한 <대부> 시리즈를 젖혀놓고 생각해봐도(<대부> 이전 로저 코먼 사단에서 만들었던 영화들은 제외합니다.), 다른 영화는 <도청>에 비하면 매우 전통적인 헐리웃의 영화의 소재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도청>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이질적이에요. 하지만 여기에선 <욕망> 얘기는 최소한으로만 하죠. 그건 다음에 감상문을 천천히 써볼 요량이에요.

스토리 라인은 꽤 단순합니다. 최고의 도청 전문가인 해리 콜(진 해크먼)이 의뢰를 받고 작업을 하다보니, 자신의 의뢰인이 웬 젊은 남녀 커플을 죽일 거 같거든요. 끊임없이 동료에게 “이건 일일 뿐이고 나는 프로페셔널이다!”를 외친다 한들, 그건 어찌 보면 그 일로 마음이 흔들리고 혼란을 겪는 자신에게 재차 다짐을 주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자신의 작업물을 의뢰인에게 넘기지 않으려 하니까요. 물론 그는 원치 않았던 방법으로 무사히(?) 작업물을 납품했고, 결과는… 자신이 도청한 커플이 아니라, 자신의 의뢰인이 죽습니다. 혼란에 빠진 해리 콜은 그 순간부터 편집증으로 미쳐가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비주얼은 대단히 강력합니다. 자신이 도청당하고 있다는 강박증과 편집증에 빠진 그는 도청장치를 찾기 위해 전화부터 해서, 결국 집안 전체를 모두 뜯어놓고는 (평소 취미처럼) 재즈 음악에 맞춰 색소폰을 불고 있습니다. 완전히 뜯겨나간 벽지와 마룻바닥, 그로 인해 엉망이 된 방안은 완전히 황폐해진 그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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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마지막 장면.

세 개의 도청기 채널에서 소음을 제거하고 음성을 합성해 마침내 만들어낸 ‘완벽한 결과물’을 두고 그가 자신에게 도청당한 커플이 죽을 거라 생각한 것은, 자신의 결과물이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담고 있기 때문일 거라 자연스럽게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종종 범하는 실수이지만, 어떤 말이나 이미지는 그것이 속한 전체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는 결코 의미가 완벽해질 수 없으며, 우리는 결코 전체의 맥락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맥락을 ‘추측할’ 따름이지요. 실제로 인간의 언어는 이러한 부족함 때문에 일어나는 미스-커뮤니케이션과 오해, 왜곡의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며, 인간의 ‘예술’, 특히 ‘언어’를 이용한 예술은 오히려 이러한 왜곡와 오해에서 오히려 풍성한 의미를 얻어내곤 합니다. ‘엿들은 말’을 가지고 오해를 하고 소문을 냈다가 이 오해에 기반해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꼬이고 하는 건 코미디 장르의 흔한 수법이기도 하잖습니까. 코폴라는 <도청>에서 이것을 안토니오니 식의 주제에 따라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개입할 수 없는 타인의 세계와, 그로 인해 고립되고 고독한 개인을 그리며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실 안토니오니가 <욕망>에서 했던 게 바로 그거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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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언급하는 호텔방 장면입니다.

사실 <도청>은 꽤 좋은 코미디이기도 합니다. 특히 진 해크먼이 살인을 막아보겠다며 허둥지둥 호텔에 가면서부터 영화는 시침 뚝 떼고 꽤 그로테스크한 코미디 이미지들을 연이어 선사해요. 위에서 묘사한 마지막 장면도 그렇지만, 도청 작업물에서 지시된 호텔방의 바로 옆방에 투숙해 옆방에서 오가는 얘기를 도청하기 위해 욕실 구석에 몸을 구겨놓고 도청 장치를 귀에 꽂고 있는 이미지도 괴괴한 코믹 센스를 안겨주기에 충분합니다. 또한 이 지점부터 영화는 환상과 현실을 고의적으로 오가고 있죠. 결국 호텔의 옆 방, 즉 문제의 그 방에 침입해 변기에서 역류해 욕실 바닥을 가득 채우는 피의 이미지만 해도 환상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니까요. 사실 이 영화가 후반부에 성취하고 있는 코믹 센스 자체가 이러한 환상과 현실에 대한 모호한 처리에서 기인하고 있기도 하고요. 저 마지막 장면은 마치 현실 세계에서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 같기도 하니까요. 많은 영화들에서 진 해크먼은 이런 식의 코믹 연기에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었죠. 이 영화에서 정말 너무나 진지하게 패닉에 빠져 결과적으로 코미디를 꺼내는 진 해크먼의 연기는 아주 사랑스럽(?!)습니다. (네… 말해놓고 나니 이런 걸 ‘사랑스럽다’고 하는 제 센스가 뭔가 좀 괴이하단 생각이 스스로 들기도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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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영화 초반엔 이렇게 '폼나게' 나왔습니다

도청은 일방적인 엿듣기이고 이 영화에선 인물들이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합니다만 – 타인과의 단절과 불완전한 소통, 고립된 개인이 주제라고 했죠 –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영화의 원제는 ‘대화(The Conversation)’입니다. 주제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제목 센스라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저는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내는 ‘단절’과 ‘고독’의 정서보다는, 그 단절의 틈새에서 발현되는 의미의 풍부한 창조성들을 더 즐기는 편이긴 합니다. 인간의 언어와 소통은 불완전하기 마련이고, 말은 말을 낳죠.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상당수의 것들을 우리는 ‘예술’이라 부릅니다. 외롭다고 너무 의기소침하지 마시란 얘기입니다. 아 물론 농담이죠.

ps. 이 영화 역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아메리칸 뉴 시네마 특별전에서 상영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 여행자

Profession: Reporter 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처음, 아프리카 어떤 나라에서 기자인 데이빗 로크(잭 니콜슨)가 반군 게릴라를 찾아 헤매는 걸 보고 아니, 안토니오니가 설마 정치 스릴러를 찍었나?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제가 본 안토니오니 영화는 (고작 16mm로) <정사>와 <밤> 정도에 국한됩니다만, 그럼에도 안토니오니가 천착하는 주제가 공허하고 외로운 현대인들 특유의 정서라는 건 저 두 편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언젠가 안토니오니의 대표작들을 한번 제대로 좌라락 훑고 싶다는 욕심은 아주 간절합니다. 하이퍼텍나다에서 안토니오니 전을 한번 했다는 거 같은데, 제가 이 감독, 특히 이 감독이 ‘공간’을 표현하는 방식에 반한 게 불과 3년 전이고 그 전엔 딱 잘라 ‘수면제 감독’이라고만 생각했었으니, 놓친 게 당연한 걸지도요. 어쩌면 당분간 이런 기회를 만나지 못할 것같습니다.) 역시나, 이 영화는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그는 호텔에서 만나 몇 마디 나눈 다른 백인 투숙객, 데이빗 로버슨이 죽어있는 걸 발견하고, 그의 여권 사진과 자신의 여권 사진이 비슷해 보인다는 점에 착안, 거의 충동적으로 여권사진을 바꿔치기함으로써 데이빗 로버슨 행세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로버슨의 수첩에 따라, 그의 집과 약속 장소의 일정을 따라가지요. 그럼으로써 이 영화의 로케이션은 처음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 런던, 뮌헨, 그리고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그 주변 근교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냥 사업가라고 밝힌 로버슨의 진짜 직업도 예사롭지 않습니다만, 로크가 로버슨 행세를 시작한 뒤 바르셀로나에서 만나 동행하게 되는 미스테리한 젊은 여자 – 그녀의 이름은 끝내 영화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마리아 슈나이버가 맡았죠 – 와 함께 하는 모험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로버슨의 메모에 스케줄을 따라 이동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그는 로버슨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누구인지 “도대체 왜 그와 동행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 속으로 파고들고 성찰하는 타입”이던 그가 정반대의 방식, 즉 로버슨이 자신의 삶의 방식이라며 소개한 “닥치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삶을 이어가는 방식”을 취하면서, 그는 물론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관객들도 바로 앞에 어떤 일이 닥치게 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다는 데에서 이 영화의 서스펜스가 발생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를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레이첼 로크(데이빗 로크의 부인, 제니 루나커)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새삼 그를 ‘낯선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거의 마지막 장면에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보며 “나는 그를 안 적이 없다.”고 말을 하죠.


GV 시간에 이 영화를 소개한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와 연관성 있는 영화로 플롯과 설정 등의 유사성을 들어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언급했는데, 전 아무래도 마리아 슈나이더의 존재 때문인지 그녀의 출세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안다 / 모른다, 라는 것이 혹은 이 사실을 공식적인 ‘말’로 선언하는 것이 새삼 얼마나 다양한 결의 의미를 갖고 있는지요.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발견을 통해 현대인들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외롭고 고독해하며 고통을 받습니다. 물론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나 <여행자>뿐은 아니며, 소위 ‘현대영화’가 공통적으로 다루는 꽤나 일반적인 주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정체성’을 바꾼 남자의 모험이란 측면에서, 이 영화는 현대인의 정체성이 내포한 의미, 그리고 인간 본연의 고독, 타인과 나와의 거리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탐구하고 있는 게 사실이죠. 함께 여행을 하며 심지어 몸을 섞기도 하는 여자(마리아 슈나이더)에게, 로크는 두 번이나 “당신 도대체 여기서 나랑 뭘 하는 거지?” 라고 묻습니다.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고,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 우리는 그 정도의 정보를 갖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만, 실상 그가, 그리고 관객인 우리가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영화에 한번도 안 나온 그녀의 이름을 안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죠. 도대체 왜 그녀는 런던에 있었던 걸까요? 로크의 부탁을 받고 호텔로 로크의 짐을 가지러 간 그녀는 프론트에서 왜 스페인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물어볼까요? (분명 그녀는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여성이고, 그 호텔 역시 바르셀로나에 있지 않던가요.) 도대체 그녀는 왜 낯선 남자를 따라나서서는 그의 모험을 함께 하고 있는 걸까요? 심지어 탠지어의 글로리아 호텔까지 로버슨부인이라고 하면서 따라와서 말입니다.


마리아 슈나이더의 얼굴은 '아이'와 같아서 대단한 미녀가 아님에도 묘한 매력을 주죠.


이것은 로크나 로버슨,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로크는 자신의 ‘현재’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입니다. 자신의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그저 여권 사진을 바꿔치기하는 것으로 너무나 쉽게 해결됩니다. 로버슨의 비행기 표를 이용하고, 로버슨의 여권을 사용하는 것으로, 데이빗 로크라는 인물은 공식적으로 ‘사망자’가 됩니다.모두들 그를 기리겠다고, TV 프로에 출연해 그를 회고하고 심지어 그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난리를 치죠. 하지만 그 부인조차, 자신은 로크를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마틴 나이트가 로크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저 그가 영국 출신이고 미국에서 교육받았다는 것, 그래서 편견이 덜하고 관찰력이 뛰어났다는 정도입니다. 오히려 로크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캐치하는 이는, 로크가 인터뷰하려 했던 어떤 아프리카 부족의 주술사입니다. 그는 로크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로크에 대한 많은 것을 읽어냈다고 말하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거리, 그로 인한 고독, 그리고 사회적인 누군가를 규정하는 조건들, 인간의 고독, 이런 질문들은 제가 봤던 안토니오니의 다른 두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행자>에서는 그것이 잭 니콜슨이라는 보다 익숙한 미국배우와 마리아 슈나이더, 그리고 컬러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공간도 바르셀로나 근교의 공간도, 허허롭고 텅 비어있긴 마찬가지에요. 사람들이 북적이는 바르셀로나 시내 장면은 영화에서 아주 조금 나올 뿐, 로크가 마리아 슈나이버를 초반에 주로 만나는 곳들도 “숨어있기 좋”다는 가우디의 건물들이죠. 잠깐 나오는 뮌헨공항과 런던의 풍경 역시 한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뮌헨공항에서 로버슨이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는 오로지 티켓팅 직원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교회당에서 아체베와 누군가를 만난 것 외에, 아무도 만나지 못합니다. 마틴 나이트와 자신의 부인은 자기가 피해다녔다곤 해도, 정작 그가 만나야 할 누군가들 – 마리온, 데이지, 또 누구, 모두 여자의 이름을 가진 – 은 결코 만나지 못하죠. 아마도 이런 것들이 이 영화의 쓸쓸한 정서를 더해주는 것같습니다. 누군가 이 영화를 보며 스스로도 당황하며 눈물을 흘린다 해도, 그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안토니오니 화면의 '깊은' 공간감이 잘 살아있는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