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아 브뤼니-테데시 | 여배우들

이 영화는 여주인공인 마르셀린(발레리아 브뤼니-테데시)의 엄마와 이모의 대화씬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의 대화에 언급되는 마르셀린은 콧대를 한껏 높이며 이 남자 저 남자 갈아치우고 변덕을 부리는 도도한 철부지 여배우로 제시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곧 화면에 첫 모습을 드러내는 마르셀린은 마치 마네킨처럼 너무나 가지런하게 빗어내려 가발처럼 보이는 단발 금발머리를 하고, 무표정 위에 진한 화장을 입고, 온몸을 가리는 빨간 롱코트를 입고 등장합니다. 그 무표정한 얼굴로 늦었다고 투덜거리며 엄마와 이모가 묻는 말에 무뚝뚝하게 대꾸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는, 차갑고 도도한 모습으로 곧 택시를 잡으러 뛰어가 버리죠. 하지만! 절대! 이런 모습에 속으면 안 됩니다. 사실 마르셀린은 ‘차갑고 도도한’ 것과는 삼만 광년은 멀리 떨어진 푼수 아가씨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셀린이 탄 택시가 도착한 곳은 극단 사무실이 있는 극장. 그녀는 택시에서 내리며 머리를 정리한다고 매만지는데, 이때 머리가 자연스럽게 헝클어지며 비로소 마네킨 가발 같은 머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머리가 됩니다. 이후로는 머리를 올리건 내리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가 되는데 마르셀린의 캐릭터 역시 솔직담백하게 묘사됩니다.

우리는 남자배우보다 여자배우들에 편견을 더 많이 갖고 있고, 이 편견들은 대단히 성차별적인 게 사실입니다. 일단 여배우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들을 좀 모아보죠. 온갖 예쁜 척은 다 하고 새침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고, 제멋대로에 도도하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써대는가 하면 죽 끓듯 변덕을 부리다가 다른 여배우한테 좋은 일 있으면 그거 질투하느라 정신 못 차리고 시샘하기 바쁘고 허영심은 하늘을 찌르며 어쩔 땐 과잉의 소녀적 감수성을 드러내며 떼를 써대고 작은 일에도 잘 삐지는 데다 히스테리는 겁나게 부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쁘고 새침한 그녀가 의외로 덤벙거리는 모습을 보이거나 망가질 때, 혹은 매우 지적인 면모를 보일 때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그녀에게 반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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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니 테데시와 루이 갸렐. 영화 속 연극 무대에서의 장면

재미있게도 <여배우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있는 이러한 여배우에 대한 편견들을 아주 영악하게 이용합니다. 왜 아니겠어요? 처음 시작부터 저런 식으로 관객들의 뒷통수를 치는데요. ^^ 그러나 주연이자 감독인 발레리아 브뤼니-테데시는, 여배우에 관한 세간의 온갖 편견을 모아 그대로 여주인공에게 투영하면서, 이것을 오히려 사랑스럽고 감성이 풍부한, 더욱이 ‘배우’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더욱 깊은 탐구를 행하고 있는 여성의 특징으로 멋지게 바꾸어 버리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우리가 여배우에게 갖는 편견과 그 편견을 깨는 배우에 대해 호감을 갖는 패턴 그 자체를 주인공에 대한 묘사 방식에 그대로 이용해 먹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르셀린이 그토록 변덕을 부리거나 갑자기 억지를 쓰거나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은, 원래 허영심 많고 제멋대로여서라기보다는, 마흔의 나이를 맞아 겪고 있는 극심한 혼란과 초조감 때문이죠.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아기’에 대한 집착으로 집약돼서 나타납니다. 미혼의 그녀는 아이가 너무 갖고 싶지만 남자가 없고, 산부인과 의사는 그녀에게 ‘남성 호르몬 수치가 높다’고 진단해 그녀를 절망에 빠뜨렸으며 병원 처방에 따라 먹는 호르몬 약은 어째 별 효과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새로 출연하게 된 연극은, 투르게네프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시골에서의 한 달>인데, 소위 ‘예술가적 자의식’이 너~무 강하신 제멋대로 독재자 연출가 나리는 그녀가 해석한 나탈리아 페트로브나와는 완전히 다른 페트로브나를 요구하며 강압적으로 굽니다. 또, 조연출은 누구냐면 왕년에 마르셀린의 친구이자 라이벌로 결혼과 함께 무대를 떠났다가 조연출로 복귀한 나탈리(네오미 르보브스키)인데, 이 친구는 연극배우로 성공한 마르셀린이 질투나서 죽을 지경인 반면 마르셀린은 그녀의 아이가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또 영화에 은근히 스릴을 더해주는 복선으로 깔립니다. 게다가 연극 속에서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젊은 가정교사 역을 맡은 배우 에릭(루이 갸렐)은 아무래도 배우와 캐릭터를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마르셀린은 그를 ‘에릭’이라고 부르지만, 에릭은 그녀를 ‘나탈리아’라고 캐릭터의 이름으로 부르면서 은근하게 마르셀린에게 작업 멘트를 던지거든요. 여기에 또 홀라당, 마르셀린은 가슴을 설레 하다가 키스도 하는데, 이들의 관계는 좀처럼 진척을 보진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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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니까 정말 못 생겼다'는 아버지 유령의 구박에 위로를 얻는 마르셀린

배우로서도, 가임기간이 다 돼어 가며 생물학적 시계가 초침을 무시무시하게 날려대는 걸 듣는 여성으로서도, 그녀는 혼란과 패닉에 빠져 허부적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우왕좌왕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강력한 코미디가 발생합니다. 감독으로서 테데치는 연극 준비가 진행되고, 드디어 막이 오르는 과정에서 각 캐릭터들을 매우 유머러스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애정이 충만하게 묘사해 가고, 이 과정을 중심으로 마르셀린의 심리를 매우 섬세하게, 그러면서도 매우 우스꽝스럽게 묘사해 갑니다. 한편 배우로서의 테데치는, 매우 난감하고 꼬인 상황에서 진지한 정극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보여주는 코미디 연기뿐 아니라 슬랩스틱 연기도 하고, 그 와중에도 마르셀린의 그 복잡미묘한 내면을 너무나 탁월하게 표현해 냅니다. <여배우들>은 진정 훌륭한 코미디 영화입니다.

그런데 ‘배우 출신의 감독’으로서 테데치의 야심은 이보다 조금 더 큽니다. 마르셀린은 마치 <앨리 맥빌>처럼 돌아가신 아버지와 죽은 전 애인의 유령을 보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심지어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인 나탈리아 페트로브나(발레리아 골리노)의 환영까지 보고는 내 연기 어떠냐며 그녀의 뒤를 쫓습니다. (불안한 그녀로서는 진짜 그녀로부터 반복적인 확인과 승인이 필요한 것이죠.) 여기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배우와 배역을 헷갈리는 에릭의 문제까지 해서, 테데치는 허구의 주인공이 다시 그 허구 속 허구의 인물과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을 통해 ‘배우’라는 존재의 본질을 깊숙이 탐구해 들어갑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마르셀린에게 상처를 받고 나가버린 에릭, 에릭의 뒤를 쫓는 나탈리아 페트로브나, 그런 나탈리아를 뒤쫓는 마리셀린의 구도는 그 자체로 매우 코믹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장면이 이 영화의 가장 핵심장면일 겁니다. 에릭이 매혹을 느낀 건 과연 배우인 마르셀린일까요, 자신의 캐릭터가 사랑하는, 마르셀린이 연기하는 나탈리아 페트로브나일까요? 에릭은 진짜 페트로브나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당연하죠, 이 환영은 철저히 마르셀린의 것이니까요.) 그런 에릭을 보며 마르셀린은, 페트로브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를 두고 자신이 맡은 배역과 경쟁해야 하는 배우, 혹은 자신을 그저 ‘흉내낼 뿐인’ 배우와 경쟁해야 하는 허구 속 인물의 3각관계 설정의 희비극성은, 배우라는 존재의 본원적인 아이러니를 표현해냅니다. 자신이 받는 사랑이 과연 자신에게 향한 것인지, 자신의 배역에게 향한 것인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 감정, 아울러 허구의 존재를 자신의 몸으로 육화해내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음에도 그 과정은 오히려 반대로 배우 자신의 개성을 온전히 지우는 과정일 수밖에 없는 배우라는 존재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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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시선이 어긋날 수밖에 없는 - 배우와 캐릭터, 혹은 현실과 허구

데뷔작이자 이전작이었던 <낙타에겐 쉬운 일>에서 그러했듯, 테데치는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여배우들>의 이야기를 구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여배우들>은 설사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보다 한발짝 물러서서, 여배우에겐 아마도 매우 보편적으로 보이는 분열을 섬세하게 묘사해내기 때문에, 그녀의 개인적 경험과는 별 상관없이 매우 객관적인 영화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녀 자신이 여배우일 뿐 아니라, 함께 각본을 쓴 네오미 르보브스키(이 영화에서 나탈리로 출연했죠.) 또한 여배우이자 감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쪽이 됐건, 테데치의 유쾌한 유머감각은 자신을 우스갯거리로 삼으면서도 여기에 생명력과 개성을 부여하고, 지나친 자의식의 포로가 되는 함정을 피하면서, 여기에 존재의 본질에 대한 유쾌하면서도 그리 가볍지 않은 문제의식을 녹여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여배우들>은 여배우이자 감독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여배우이자 감독이기에 취할 수 있는 시선으로 매우 훌륭하게 만들어낸 코미디이자, 연극과 영화에 대한 메타적인 영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ps1. 영화에서 마르셀린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마리사 보리니는 실제 브뤼니-테체스키의 어머니입니다. 이 모녀가 싸우는 장면, 정말 죽여주죠. ㅋㅋ

ps2. 마르셀린의 죽은 아버지로 등장하는 모리스 갸렐은 에릭 역을 맡은 루이 갸렐의 할아버지로, 이 집안이 또 프랑스의 영화 가문 중 하나입니다. 모리스 갸렐의 아들이자 루이 갸렐의 아버지인 필립 갸렐은 얼마 전 개봉했던 <와일드 이노선스>의 감독이고, 모리스 갸렐 역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우입니다.

ps3. 이 블로그의 프로필 사진에다도 올려놓은 주제에 전 처음에 루이 갸렐을 못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몽상가들>에선 걍 좀 신기하게 생겼네, 하고 말았는데(“저 뚱땡이 토미 그노시스!!” 이러면서 마구 미워하던 마이클 피트가 <몽상가들>에서 조금씩 귀엽게 보이는 것 때문에 당황하느라 정신 없었다죠.;;;), 영화 바깥에서 찍은 사진들은 왜 이리 색끼가 줄줄… 특히 경악한 사진은 바로 이것. 이 녀석 에바 그린 언니 허리에 팔 돌리고 상체 구부린 각도 좀 보라죠. 이것은 전형적인 선수의 그것… 순간 가슴이 철렁, 쿵쾅… (엄머 난 몰라~)  

ps3. 나탈리 페트로브나로 등장하는 발레리아 골레노, 오랜만에 보니 참 반갑네요. <못말리는 람보> 같은 영화의 장면으로 워낙 인상이 깊지만, 그녀는 원래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모델이자 여배우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신작에 출연할 예정이라는군요.

ps4. 드니 역의 마티유 아말릭은, 낯이 굉장히 익은데 대체 어디서 본 배우인지 모르겠습니다. imdb 필모그래피를 보고 있어도 갸우뚱… 이 사람도 배우 겸 감독이군요. ^^

ps5. 뭐 사실 발레리아 브뤼니-테데치도 ‘낯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했던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군가를 굉장히 닮은 것 같은데,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계속 생각 중입니다. 아무래도 <티켓>과 <뮌헨>에서 본 것 때문에 그럴까요? 나타샤 레니에, 클로이 사비에, 뤼디빈 사니에 등과 어딘가 이미지가 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 세 배우도 최근 사진을 찾아보고는 ‘절대 아니다…’ 이랬다죠.;;;

(아주 사적인) 빈폴영화제 후기

기자회견장에서 처음 영화제 트레일러를 봤을 때도 어이가 없어 푸핫, 실소가 나왔지만, 영화제 기간 중에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가 스크린 가득 그 트레일러가 상영되는 걸 보고 – 물론 당연히 매 상영마다 나온다, 본상영 앞에 나오는 이걸 ‘리더필름’이라 한다 – 구역질이 나왔다. 어마어마한 거금을 쾌척해줬으니 보답으로 광고해 주는 건 좋은데, 영화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제 트레일러에서까지 노골적으로 광고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내가 갔다온 영화제는 부산영화제가 아니라 빈폴영화제였던 셈이다.


beyond frame
저 필름롤 자전거 그림이 행사장 여기저기에 마치 '영화제 로고'처럼 붙어있었다.


제대로 준비없이 부산에 간지라 이래저래 개인적으로 곡절이 많았다. 정식으로 프레스 아이디를 신청하지 못하고 영화제가 닥쳐서야 취재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무려 호텔에 여장을 풀었지만 숙소가 안정적이진 못했고, 데일리프레스로 취재를 하려다보니 제약이 많았다. 게다가 내가 데일리프레스로 더욱 취재를 잘 못했던 이유는, 프레스룸에서 데일리카드를 받을 때 응당 같이 받았어야 할 ‘프레스가이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일리카드 신청서를 작성할 때 프레스룸의 담당자(아마도 자원활동가)는 내게 명함은 요구했지만 당연히 줘야 할 프레스가이드를 주지 않았고, 나는 이걸 10일 아시안필름마켓이 개막했을 때 들른 마켓쪽 프레스룸에서야 받았다. 그것도, 행사표 같은 거 없냐고 하니까 당황하면서(설마 데일리카드 목에 달고 있으면서 그걸 못 받았냐?는 표정으로) 주더라. 프레스 스크리닝이 따로 잡혀있다는 것도 그 프레스가이드를 받고나서야 알았다. ‘뉴커런츠’ 기자회견은 결국 놓쳤고. 영화제 유일의 경쟁부문에 대한 기자회견을 놓친다는 게 말이 되나? 나도 븅신인 게, 하여간 부산영화제 ‘취재’차 간 건 처음이라 엄청 버벅댔다. 내년엔 꼭, 미리 프레스아이디 받고, 노트북 끼고 취재계획서를 쓰고서 오리라.


언제나 영화제가 열릴 때마다 일정 정도의 ‘말’은 따르기 마련이지만, 소위 ‘국제영화제’ 중에서 이번처럼 말 많은 영화제도 처음인 듯싶다. 웬 상영취소는 그리 많은지. 부득이하게 필름이 도착하지 못해 상영이 취소되는 일은 원래 영화제마다 꼭 있기 마련이지만, 이번은 유독 많았지 싶다. 하루에 한 작품씩은 취소가 된 거 같으니까. 자원활동가들이 제대로 훈련돼 있지 않다는 소리도 들었다. 경험상 자원활동가들의 미숙은 영화제 사무국 시스템의 불안정이 원인이다. 자원활동가들 탓할 것 없이, 사무국의 시스템이 너무 방만하며 의사소통이 안 되는 구조가 돼버린 건 아닌가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명박, 정동영, 권영길이 차례로 레드카펫 밟았다는 소리에 ‘미친넘들!’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이명박과 정동영이야 원래 무개념이라고 쳐, 영길이 형님까지 그 무개념 짓거리에 동참해야 했단 말인가? 그래, 엔니오 모리코네 영감님을 그렇게 쫓아내고 나니 기분이 좋으시던가?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영길이 형님이 영화제에서 주목을 끌고 박수를 받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예컨대 개막식 같은 행사엔 조용히 참석한 뒤 다음날 낮에 피프빌리지 앞에서 “스크린쿼터 원상복구! FTA 반대!”와 같은 현수막을 들고 1인시위를 했다면 관객들과 영화인들의 자발적인 박수와 환호성을 받았을 것이다. 나아가 “역시 민노당밖에 없구나”란 소릴 들었을지도 모른다.


빈폴영화제에서 내가 본 영화는 <공포분자>, <그녀 이름은 사빈>, <여배우들>,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 <신세기 에반게리온 : 서> 이렇게 다섯 편이다. <중국영화의 어제와 오늘>은 표를 사놓고 늦어서 입장을 못 했다. 마스터클래스는 <클로드 를루슈> 편을 들었고, 에드워드 양 세미나와 독립영화전용관 세미나에 들어갔고, 중국과의 합작에 관한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스타서밋아시아 행사는… 취지엔 그럭저럭 공감하지만 참 생뚱맞은 행사들로 보이고. BIFCON(영화박람회) 쪽 전시장과 3D에 관한 컨퍼런스에 들어가지 못한 게 아쉽고, 폴커 쉴렌도르프와 피터 그리너웨이 마스터클래스를 놓친 게 안타깝다. 동아시아 영화 정체성 연구 세미나는, 전날 늦게까지 기사쓰느라 늦잠을 자는 바람에 못 갔다. 역시 매우 아쉬운 부분. 기자가 여럿이면 취재를 배분해서 이것저것 좀 욕심내서 하고픈 것들이 있었는데, 혼자 그것도 처음 영화제 취재를 하려니 영 힘들었다. 영화제와 마켓을 동시에 취재하는 건 더욱 어렵다. 그래도 에드워드 양 감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마켓에 대한 정보들을 모으고, ‘아시아 영화’라는 화두를 안고 돌아온 것, 그리고 ‘영화기자’로서 정체성을 좀더 깊게 고민하게 된 것은 수확이라 할 만하다. 클로드 를루슈를 통해 엄청난 위로를 받은 것도, 영상자료원 부스에 들렀다가 최근 출시한 한국고전 DVD를 얻고 명함을 나눈 것, 독립영화 전용관 분들과 명함을 나눈 것도 마찬가지. 왜 유독 프랑스에서 ‘감독이 된 여배우들’이 눈에 띄는가도 고민해 볼 만한 주제다. 헐리웃에서도 조디 포스터를 제외하면 드문 케이스이다. <여배우들>은 정말 멋진 코미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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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 좀 익다 싶은 프랑스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버라이어티에서 부산영화제에 대해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 기사를 인상깊게 읽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니들 아시아 프리미엄급이라면서, 유럽쪽 쫓아다니며 작년 영화들 받아오는 거보다 아시아 영화 발굴에 좀더 신경쓰는 게 어때?”라는 건데, 충분히 일리있는 지적이다. 버라이어티 기사에 의하면, 올해 뉴커런츠에 선정된 영화들은 퀄리티가 좀 들쑥날쑥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버라이어티나 헐리웃리포터에서 꼼꼼하게 아시아영화들을 보고 리뷰하는 걸 읽고 있노라면 기분이 묘할 뿐 아니라 무서운 느낌까지 든다. 씨네21 데일리에서도 대체로 유럽영화들에 눈을 더 주는 인상에 감독, 배우 인터뷰와 영화 리뷰 등에 페이지를 더 할애하고 산업관련 기사들은 짧게 스케치성으로 싣고 마는데, ‘미국 쇼비즈’ 잡지들이 그 누구보다 아시아 영화들을 꼼꼼히 챙겨보고 분석기사와 리뷰를 쓴다? 거기에 각종 마켓 관련 뉴스까지? (CJ가 <검은 집>, <리턴> 등 네 편을 패키지로 독일에 팔았다는 뉴스도 버라이어티를 보고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가 씨네21 데일리보다 버라이어티 데일리를 더 열심히 보고 있더라는.) 실제로 버라이어티는 아시아영화들을 취급하는 사이트를 따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경고! 속도가 좀 느리다.)


다만 부산영화제에서 그토록 유럽영화제들의 영화들을 기를 쓰고 받아오는 건 ‘흥행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느끼기론, 대체로 한국관객들은 한국영화들이 아시아 관객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지,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영화들을 수용할 준비는 안돼 있는 듯. 아시아 영화들에 가장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는 게 오히려 버라이어티나 헐리우드리포터 등의 미국쪽 쇼비즈 잡지 같더라는. 영화제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은 ‘아시아 영화’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이런저런 행사들, 예컨대 스타서밋아시아나 코프로덕션프로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마켓이 뭔 필요?’란 소릴 들어가면서 아시안필름마켓을 만들었는데, 정작 관객들은 아시아영화에 대해 아직은 관심이 부족한 듯. 이건 남 말할 처지도 아니다. 나야말로, 특히 동아시아 영화들에 대해선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인종주의적인 편견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영화들, 계속 눈여겨 봐야 한다. 한국영화들 만큼이나 비약적인 속도로 성취를 이루고 있다.


취재성 기사에 확실히 내가 좀, 약하더라. 독립영화전용관 세미나 기사도 그렇고, 스타서밋아시아 기사도 그렇고, 마무리를 어떡해야 할지 참 난감하더라. ‘산업’을 커버하는 기자가 되겠다면 당연히 취재능력이 좋아야 하는데, 난 취재능력도 사람 만나는 변죽도 그리 좋지 못하다. 인터뷰는 아직 무서워서 시도도 못해보고 있다. 하지만, 나같은 성격이야말로 기자일을 하기 좋은 사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그랜드호텔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했다. 일단 호기심이 있고, 관심 방향이 잡스럽고, 그러나 사람들과 쉽게 섞여들지 못하고 겉돌면서 경계에 서 있는. 기자라는 직위는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말을 먼저 붙이고, 소스를 요구할 수 있는 대단한 특권이기도 하다. (이 특권을 부적절한 금품향응을 요구하는 데에 쓰면 결코 안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자료’와 ‘소스’에 한한 얘기다, 이 특권은.) 이 특권을 제대로 누리고, 제대로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기자노릇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갈 길이 멀더라는.


빈폴영화제를 총평하기에는 내가 자격이 좀 없다. 매년 온 것도 아니고, 와도 깊이있게 영화제 전체를 들여다보지 못했고. 다만 영화제가 앞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조금 감이 잡히는 것 같은데, 독립영화전용관 세미나 때 BALCON의 오석근 대표가 얼핏 드러낸 바 있지만, 이래저래 자조적인 냉소가 있는 듯. 성공적인 영화제로 부쩍 자랐지만, 부산영화제의 야심에 발목을 잡는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서울공화국 현상’인 것 같다. 1, 2년 내로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 더욱 심각한 문제다. 영화도시로서의 부산이 아무리 근사한 하드웨어와 인프라를 갖춘다 한들, 문화 생산의 중심이 무조건 서울이라면 그 간극은 과연 어떤 식으로 메워질 것인가. 서울이 지나치게 해쳐먹고 있다는 비난, 이것은 향후 30년까지도 유효한 비난이 될 터이다.

부산에서 만난 클로드 를루슈 감독

이번에 부산 가서 취재를 하면서 느낀 사실인데, 나는 영화에 반하는 횟수보다는 영화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 ‘애정’에 반하는 횟수가 더 많다. 마스터클래스에서 열렬하게 ‘삶’과 ‘사랑’을 예찬하고, 삶에 대한 사랑과 영화에 대한 사랑을 열정적으로 드러내는 클로드 를루슈 감독에게 반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위로를 받았고, 그래서 도중에 혼자 눈물을 찔끔거렸다. 내가 눈물을 흘렸던 결정적인 말은, “삶은 잔인하지만 우린 삶에 관대할 필요가, 삶을 용서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이다.


사랑이나 증오는 쉽게 전염되기 마련이어서, 클선생의 저 열렬한 삶에 대한 사랑은 금방 객석으로 전염됐고, 객석의 인간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예의바르게, 다소 형식적으로 나왔던 질문은 곧 열정적인 질문공세로 바뀌었다. 사랑이 워낙 넘쳐서 이제껏 다섯 여자와 살고 일곱 아이를 낳으셨다는데, 앞으로도 계속 사랑을 하고싶다는 말에 객석 완전 뒤집어지고. 두 시간이 넘게 계속된 저 마스터클래스는, 워낙 그 열기 탓에 완전히 진을 빼놓았지만 참 기분좋은 피로감이었고, 그렇게 진이 빠지고 피로한데도 시간이 다 되어 끝내게 되었을 때 아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노감독을 붙잡고 밤새 술을 마시며 삶과 영화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이것은 분명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아쉬웠던 관객들은 당연히 를루슈 감독 주변에 몰려들어 싸인을 받았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다. 굉장히 피로하실 텐데도 그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웃어주며 싸인을 해주는 노감독님을 보며 또 눈물 찔끔하고. 사실 사람들 모두, 싸인을 받고 싶어 몰려들었다기보다는,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워서 그 양반 곁에 좀더 머물기 위해 몰려들어 싸인을 받았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싸인
물론 나도 받았다.


반면 피터 그리너웨이의 마스터클래스에선 영화에 대한 극단적인 선언들과 논란이 될 만한 이야기가 오고간 모양이다. 버라이어티 데일리에서 자세한 기사가 실렸는데, 읽는 내내 나는 저 피터 그리너웨이라는 깐깐한 – 그리고 결코 좋아할 수 없는 – 인간의 ‘천재성’을 감지하고 피식, 웃곤 했다. (그에 의하면,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는 영화가 아니라 그림책이란다.) 아무렴, 피터 그리너웨이는 분명 천재일 것이다. 다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천재 아버지보다는 삶에 대해 푸근한 위로를 줄 수 있는 아버지인 것이다. 그래도 버라이어티의 기사가 너무 재미있어서, 가봤으면 좋았을걸, 후회했다는.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영화는 본 게 별로 없고 그나마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어서 가지 않은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영화를 많이 봤냐면, 그건 또 아니다. <남과 여> 딱 한 편, 게다가 마스터클래스 전날, <역의 로망>을 상영했건만 이것도 여차저차 하다가 놓쳤다. 마스터 클래스 들으며 엄청 후회했다는.


어쨌건, 그날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프레시안에 올린 이 기사를 보면 아시리라. 문자로 접하면 별 인상 없을 수도 있는데 그 날 그 분위기는 분명 온몸이 달아오를 정도로 뜨겁고 황홀했다. 웹에서 절대 하면 안 되는 게 ‘기사 길게쓰기’인데, 저 날의 저 황홀함이 너무나 커서 그냥 올려버렸다는. 기사 밑에 달린 리플 보고, 무리해서 다 올리길 잘했다고 생각했고, 기자노릇 하는 것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관객을 영화에 대한 연애에 빠뜨리는 중매쟁이 노릇에 감사를 받았을 때가 아니겠는가.


Claude Lelouch
프레시안무비에 올라간 이 사진은 내가 직접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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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를 보았는데 거기에 등장한 인물들이 실제 인물들을 바탕으로 했다고 들었다. 이것이 사실인가? 그토록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그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실제 존재했고 실제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인물들이며, 이 모든 것은 내 기억에 바탕하여 만들어졌다. 나는 언제나 여러 다양한 인물들을 섞는 것을 좋아한다. 내 영화의 특징 자체가 여러 장르가 혼성되는 것인데, 우리의 삶 자체가 다양한 장르의 혼성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침에 일어나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면 그건 경찰영화가 될 것이고, 그러다 낮에 카페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웃는다면 사랑영화가 될 것이며, 저녁이 되어 그가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거닌다면 뮤지컬이 되지 않겠는가. 장르의 혼성이 내 영화의 특징이다. 또한 나는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스타일이라 생각한다.
 
  – 당신의 영화는 이야기와 장면도 오래 남지만 특히 ‘음악’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영화음악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음악감독과 소통은 어떻게 하며, 이를 위한 당신의 노하우는 무엇인가?
 
 
어제 <역의 로망>의 GV에서도 말했지만(주 – 그 전날인 9일 저녁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2006년작 <역의 로망>이 상영되었고 이후 GV에 를루슈 감독이 참석했다.), 나는 음악이 인물만큼이나 영화의 중요한 캐릭터라 생각한다. 음악은 말없이 연기하는 또다른 배우이다. 음악은 인간의 비합리적인 면을 드러내주고 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해 준다.
 
  인간은 뇌와 심장, 두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뇌가 지성을 나타낸다면 심장은 마음과 감정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뇌는 물질적이고 계산적이지만, 마음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면을 드러낸다. 사랑 역시 뇌가 아니라 심장으로 하는 것 아닌가. 음악은 이러한 마음과 무의식의 가장 좋은 동반자이다. 예컨대 뇌는 인간을 유한한 존재로 여기고,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장은 인간의 존재의 영원성을 믿고, 인간의 근원과 방향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한 심장 때문에 우리가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기도 하다. 뇌는 효율적이고 아끼는 습성이 있지만, 심장은 폭발적이다.
 
  이 둘은 평생 대립하는 싸움을 벌이고, 이 둘의 대립이 바로 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연 뇌를 믿을 것인가, 심장을 믿을 것인가? 이 둘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배우지만, 나는 심장에게 우선권을 주겠다. 예술은 바로 심장을 움직이는 존재이다. 내가 배우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영화 음악에 대하여, 나는 촬영 전에 음악을 미리 끝낸다. 그래서 배우들에게 연기지도를 할 때 그 음악을 듣게 한다. 지성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성은 한계가 있다. 세상의 모든 학교는 지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어지지만 마음이나 무의식을 위한 학교는 없는 듯하다. 이런 학교야말로 정말 필요하다고 믿는다.
 
  – 어제 열린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마스터 클래스를 들었는데 그와 당신은 사운드, 음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비슷한데, 목적은 같지만 과정은 굉장히 다른 것 같다. 그리너웨이 감독은 “리얼리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나.”라고 말했는데, 당신은 리얼리즘을 더 중시하는 것 같다. 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영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여러 형태의 다양한 영화가 있어야 관객들도 자신이 원하는 영화들을 고를 수 있겠지. 장-뤽 고다르나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감독의 존재도 나와 다르다 해도 매우 중요하다. 나는 그들과 내가 다르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들의 작업은 그들의 작업대로 존중한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삶을 더욱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힘든 인생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영화’이고, 그렇기에 영화는 비타민이자 ‘약’과 같은 존재이다.
 
  내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남이 만든 영화들에서 더 이상 약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기 전 2만 편의 영화를 보았고, 그렇게 보고 나니 한계점을 맞게 됐고, 그래서 영화감독이 되었다. 아마도 다른 많은 영화감독들 역시 다른 감독의 영화에서 더 이상 힘을 얻을 수 없었기에 자신이 직접 감독으로 나서게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 속 이야기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영화에서 삶의 해결책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너웨이에게는 그런 식의 ‘믿음’이 꼭 필요하진 않은 영화를 만들 것이다. 그것은 그의 영화고 나는 그것대로 존중한다. 다만 나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삶을 사랑하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이란 것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 자신이 이제껏 배운 모든 것은 영화를 통해서였으니까. 내게는 영화가 진정한 ‘부모’인 셈이4다.
 
  – 아누크 매메라는 배우와 많은 작업을 같이 했다. 그녀와 작업을 한 이유는? (주 – 아누크 애메는 를루슈의 <남과 여>, <두번째 기회>, <비바! 인생>, <남과 여 20년 후> 등에 출연했으며 90년대 이후로는 그의 영화에 카메오로 많이 출연했지만 를루슈가 그녀와만 유난히 많은 작업을 한 것은 아니다.)
 
 
일단 40년 전 그녀가 나의 이상형이었고, 지금도 몽마르트르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녀와 작업할 때마다 그녀와 러브스토리를 만들게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남자의 인생은 길고, 여러 개의 러브 스토리를 만들게 되길 바라는 법인데, 매번 이상형은 바뀔 수밖에 없다. 스무 살 때, 서른 살 때, 마흔 살 때의 이상형은 다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리고 그렇게 매번 바뀐 이상형에 따라 캐스팅을 한다. 내 영화에는 그때그때의 여성에 대한 나의 시각이 반영돼 있다. 최근작인 <역의 로망>에서의 오드레 다나(Audrey dana)(주 – <역의 로망>에서 위게트 역을 맡은 배우)가 거의 현재의 내 이상형이라 할 수 있겠다.
 
  나이 때마다 이상형이 바뀌었지만 그들의 공통점이 있긴 하다. 그들과 사랑에 빠졌을 때, 보면 그들은 언제나 인생을,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 당신에게는 영화가 곧 당신의 삶이라는 느낌이다. 만약 41편의 영화와 당신의 삶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 영화는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극단으로 갈린다. 나는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한다. 호기심이 강해서 남자고 여자고, 노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궁금해하고 좋아하며, 그림도 음악도 좋아하고, 먹는 것도 좋아하고, 아, 사랑을 하는 것도 좋아한다. 내 영화에서는 말하자면 내 자신이 주인공이며, 그렇기에 나는 영화의 희생양이 되는 셈이다. 내면으로 겪은 모든 것이 영화에 드러나게 되니까. 나는 이제껏 다섯 여자와 살며 일곱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사랑을 하면 할수록 영화도 많이 만들게 된다. 사랑과 증오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곧 70세가 되는 마당에 이제 와서 인생을 바꾸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다만 앞으로도 더 많이 사랑을 하고 싶고, 그래서 더 많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관객들 폭소, 박수)
 
  – 어제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를 보고 마스터클래스에 왔다가 엄청나게 상처를 받았는데, 밤에 당신의 영화 <역의 로망>을 보고 오늘 마스터클래스에 와서 완전히 치유를 받았다. <역의 로망>을 보며 당신이 비로소 ‘청년 감독’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느꼈는데, 앞으로 어떤 영화를 찍을 예정인가? 그리고 당신이 아까 말한 ‘삶의 사용법’에 대해 자세히 말해달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머’라고 생각한다. 또한 남의 잘못을 비웃기 전에 먼저 자신의 단점에 대해서도 웃을 줄 아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이며, ‘도전’할 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서 결실과 살아갈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에서도 일에서도 이러한 도전은 매우 중요하다. 도전하지 않은 삶은 불행한 삶이다.
 
  가장 큰 행복을 느낄 때가 불행에서 막 벗어난 다음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위험을, 도전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아까도 말했듯 뇌보다는 심장, 마음이다. 이를 위해서 사랑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니며 여행도 많이 하고, 많은 것을 100% 즐기기 바란다. 또 하나,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한다. 죽음은 삶에 대한 또 하나의 보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 작품은 뮤지컬이고, 1920년대에서부터 현대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음악을 집어넣을 참이고, 삶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물론 내 아이들에게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삶에 대한 일종의 금기도 집어넣을 생각이다.
 
  – 이제껏 많은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투자자와 제작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노하우를 소개해 달라.
 
 
이것 참 어려운 질문이다. 나 역시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 제작자를 못 구했고, 그래서 내 자신이 직접 제작자가 되었다. 19살 때였는데, 내 영화를 제작해줄 제작자를 찾았지만 하나같이 퇴짜를 맞았다. 이런 바보같은 제작자들에게 내 영화를 맡기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제작자들은 대부분 독재적이고 영화를 심하게 오염시키기 마련이다. 물론 안 그런 제작자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이제껏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제작자가 됐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제작자로서보다는 감독으로서 일하는 게 훨씬 즐겁긴 하지만.
 
  영화를 기대하고 영화에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제작자들이 아니라 바로 ‘관객’이다. 결국 내가 이제껏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관객의 덕인 셈이다. 어찌어찌 첫 작품을 했다 해도 성공을 하지 못하면 다음 영화를 만들기가 어렵다. 나 역시 많은 실패 역시 겪었다. 그러나 실패작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모든 일에 성공이 있으면 실패도 있어야 인생이 지루하지 않은 법이다.
  
  – 당신의 경험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한국에 와서 당신이 본 장면들 역시 영화의 한 장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부산영화제에서 당신이 본 장면들은 어떤 영화적 장면이 될까? 또한 재미있게 본 한국영화가 있다면 말해달라.
 
 
부산에 와서 놀란 것은 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를 다 떠나서 내 작품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부산은 만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인데, 이렇게 먼 곳에서도 프랑스인들 특유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 이해된다는 것이 놀랍다. 결국 보편적인 것은 통한다는 얘기겠지. 이곳에서 본 것을 영화로 한다면 결국 보편적인 소재를 택할 거고, 결국 러브 스토리가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보편적이니까. 이 자리에서도 ‘산이 좋은가, 바다가 좋은가’라고 물어보면 대답이 갈리겠지만, ‘사랑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엔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랑에 성공해야 다른 일도 성공할 수 있는 s법이다. 사랑은 우리 인생에서 마법의 약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열심히 자신의 반쪽을 찾으시기 바란다.
 
  한국영화는 여러 영화제를 다니면서 거기에 출품된 영화들을 보긴 했는데 미안하지만 제목이나 감독 등은 기억을 잘 못하겠고, 충분히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못 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곤란할 것 같다. 다만, 아시아의 요즘 영화들은 매우 훌륭하고 잠재성도 크다. 영화의 미래는 이제 국가별로 논의될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논해져야 할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손쉽게 휴대하기 편한 도구들, 예컨대 HD 카메라 등으로 많은 도전을 감수하면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되기도 했고. 여기 여러분들도 많이들 영화를 찍어보시기 바란다.
 
  – 당신의 뇌와 심장에 대한 얘기에 매우 공감했다. 당신은 배우들에게 연기지도를 어떻게 하는가? 특히 <여정>에서 리샤르 앙코니나가 보인 연기가 내겐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촬영 전단계에서는 시나리오 쓰는 일을 빼면 연기 지도가 가장 재미있고도 어렵다. 배우는 매우 연약한 사람들이고 대배우일수록 굉장히 소심하고 연약하며 여러 가지 것들을 조화시키기 힘들어하는 사람ㄷ믈이다. 그렇기에 텍스트 뒤로 숨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며, 자신의 일생에서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물론 안 그런 배우들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은 대배우가 아닌 것 같다. (웃음) 신경이 매우 곤두서있고 불안한 이 사람들에게 감독은 일종의 약을 처방해주는 사람과 같다. 지성보다 무의식과 인간적인 측면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대해 예측하기도, 알기도 어려운데, 시나리오를 다 보고 나면 그저 그런 배우가 돼버린다. 그래서 나는 배우들에게 절대로 시나리오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 영화의 배우들은 배우로서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그 ‘인간’이 되어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촬영을 하면서 그들은 그 사람을 직접 살아야 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결 생동감 있고 활기있는 연기를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로 ‘신뢰’가 만들엉진다.
 
  이 때문에 영화 중간에 주연과 조연이 바뀌기도 한다. 아무래도 감독에게는 더 좋아하는 배우와 덜 좋아하는 배우, 더 재능있는 배우와 그렇지 않은 배우가 갈리기 마련이고, 감독이 더 좋아하고 재능이 더 많은 배우가 점점 더 역할이 많아지는 게 사실이다. 나는 배우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의 소심함과 연약함을 사랑한다. 감독과 캐릭터는 이렇게 상보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로 아무나 캐스팅해선 안 된다. 배우들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고 배우마다 맞춤형의 연기 지도를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가장 좋은 연기지도는 아무 지도를 하지 않는 것이라는 얘기가 됐는데, 감독으로서는 배우를 최대한 이야기 속으로 몰입시키다 보면 배우가 바로 그 인물이 되어 ‘그 순간’을 경험하는 때가 온다. 그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순간이다. 창작은 바로 이러한 순간을 계속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나는 배우와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을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라 여긴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며 열심히 일하다 보면 서로가 서로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이게 최고의 연기 지도인 것 같다.
 
  – 당신에게도 슬럼프나 권태기가 있었는가?
 
 
사실 항상 어렵다고 느낀다. <남과 여>가 성공하기 전 6편의 작은 작품에서 실패를 겪었고, 그 뒤로도 성공한 작품들이 있지만 실패한 작품들도 많아서, 결과적은 반은 성공, 반은 실패한 셈이 되는데, 실패했을 때에는 마치 사막을 걷듯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그러나 죽고싶다 느끼고 자살하고 싶은 순간이야말로 가장 왕성하게 창작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행복엔 쉽게 길들여지기 마련이지만, 실패를 겪고 힘든 순간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창작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영화를 계속 만드려면 역시 미친 듯이 영화를 좋아해야 한다. 잔인한 이 세계에서는 ‘실패의 학교’에서 가장 많은 걸 배우는 법이다. 단,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아까도 말 했지만 절대 남 탓을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여겨야 한다. 이를 위해서 바로 유머 감각과 내 단점에도 웃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닌 관객에게는 인생과 영화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일상에서 현실적인 삶을 영위하다 보면 영화를 보는 두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힘을 얻기 보다 더 우울해지곤 하기 때문에, 예전엔 영화를 많이 봤지만 최근 들어서는 영화를 좀 멀리하고 있고,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 또 앉아있다. 영화를 그저 수용하는 입장에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영화에서뿐 아니라 이것은 다른 삶에서도 통하는 얘기이다. 삶은 언제나 복잡하고 어렵기 마련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랑에 성공을 해야 다른 일에서도 성공할 수 있기에 열심히 동반자를 찾아야 한다. 다만, 어떤 동반자는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반면 어떤 동반자는 삶을 자꾸 저지하고 가로막는다.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동반자를 찾아야 하고 그러려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이 사랑해 봐야 한다.
 
  인생 자체는 매우 불공평하고 부당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생에 관대하고, 인생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행복과 불행의 책임은 자기자신이 온전히 질 수박에 없다. 내 아이들도 언제나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아무리 힘들고 설사 누가 괴롭힌다 해도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아름답게 잘 해나면 반드시 보상이 따를 것이라 말해주곤 한다. 물론 누가 어떤 식으로 보상해 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게 애야 내 운명을 내 자신이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극장엔 계속 가시라. 대신 좋은 영화들을 보시라. 좋은 영화들은 인생에 약이 되고 힘이 된다. 주어진 위치에서 주어진 일을 아름답게 제대로 하시라. 물러서는 게 바로 불행의 시작이다. 이 문제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내 대답이 물론 정답도 아니고 그 누구도 정확한 대답을 줄 수는 없을 것이긴 하지만.
 
  – 당신의 화면 구성(앵글과 사이즈 등)에 어떤 철학과 미학을 갖고 있는가? 시나리오가 도중에 많이 바뀌기도 한다면, 처음 시나리오와 다른 영화가 나왔을 때 그에 대한 당신의 감정은 어떤가?
 
 
내게 있어 촬영은 말하자면 인생의 여러 경험에서 예를 추출하는 것과 같다. 삶은 내 영화의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이번 달 말에 내가 일흔 살이 되는데, 인생이라는 영화는 매번, 매 순간 시나리오가 바뀌는 것이지 않나. 내 영화의 시나리오오도 그렇게 계속 바뀌고 처음 시나리오와 만들어놓은 겨로가물이 다른 경우도 많다. 결과물이 더욱 힘있는 경우들이 많지만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많다. 촬영을 만든다는 것은 추상을 구체적인 현실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인생이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추상과 상상의 것이라면 촬영은 구체적인 경험인 셈이다.
 
  나는 매일 낮에는 촬영하고 밤에 집에 돌아와 시나리오를 다시 쓴다. 이제까지 매일 그래왔다. 인생도 그렇다. 매일, 언제나 앞일을 모른 채 즉흥적일 반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실제 인생은 내 상상보다 더 강하더라. 아마도 피터 그리너웨이는 처음 쓴 시나리오 그대로 영화를 찍을 것 같다. 그 방식은 그 방식대로 존중한다. 다만 내 영화는 인생의 변수에 대한 ‘적응’의 과정을 담고 있는 셈이다.
 
  나는 촬영할 때 절대 일기예보를 미리 보지 않는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그날 그날의 상황에 따라 찍는다. <남과 여>에서 비가 내리는 것도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비오는 날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나도 무척 즐거웠다. 이 시간은 나 역시 여러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다. 삶은 전쟁이고, 우리는 이 전쟁에서 싸울 힘을 얻어야 한다. 영화에서 그 힘을 얻기 바란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역시 그 이유 때문이다. 책을, 음악을, 그림을, 그밖에 많은 예술들을 많이 접하고 많이 즐기며,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기 바란다. 정치가보다 예술가를 만나는 게 여러분들의 인생에 훨씬 더 도움이 되고 더 즐거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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