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새로운 영화적 판타지의 공간
영화계에 불고있는 '경성 트렌드' 집중분석

'경성 트렌드'가 불고 있다

일제시대의 경성은 잔혹한 일본군의 통치하에 어둡고 숨막히는 억압의 도시, 혹은 비장한 독립운동가의 결연한 의지와 천박한 친일파의 탐욕이 극명하게 선악의 대립을 이루는 도시로만 존재했던 곳이다. 조금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우리영화에 있어 경성을 그리는 방식은 그저 <장군의 아들>의 방식만이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수탈과 저항이라는 이항대립으로만 존재하는 시대였다. 그랬던 경성이 이제 영화계에서 중요한 화두를 차지하고 있다. 작년에 개봉했던 <기담>을 비롯해 현재 상영중인 <원스 어폰 어 타임>, <라듸오 데이즈>은 본격적으로 일제시대의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며, <모던 보이>는 올 4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밖에 김지운 감독의 신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으로 표기)은 경성은 아니지만 일제시대 치열한 무장독립투쟁의 장이었던 만주를 배경으로 한다. 도대체 영화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왜 이제껏 그토록 기피하던 일제시대, 그것도 경성이 갑자기 이토록 각광받는 영화의 배경으로 떠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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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이미 공중파에서 드라마 <경성 스캔들>이 방영되어 화제를 모았고 이 드라마가 경성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소설 [경성애사]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영화계에서 경성을 주목하는 건 오히려 매우 뒤늦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평균 제작기간이 2년 이상 걸리는 영화라는 매체 특유의 특성 때문이기는 하지만, 대규모 자본이 집약되는 가장 대중적인 예술장르로서 그만큼 일제시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제작하기가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출판계에서는 이미 앞서 말한 [경성애사]나 [경성 트로이카], [경성기담], [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처럼 소설 혹은 교양인문서적의 형태로 경성을 그리는 책들이 스테디셀러에 오른 지 오래이며, 이런 책들에 일종의 선구자격 노릇을 했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가 이미 1999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10년 가까이 경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조금씩 축적되어 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왜 경성인가?

분명 일제시대는 피식민지의 시대로 우리 역사의 크나큰 상처로 자리잡고 있는 역사이지만, 서양문물이 봇물처럼 밀려들어오면서 국적을 불문한 다양한 문화들이 적극 수용되어 혼재하며 영향을 끼치고 있던 시대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위 '신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던 이 당시는 소위 신여성, 모던보이로 칭해지는 '근대인'의 등장을 알린 중요한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기는 그렇기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인의 연원과도 같은 시기이다. 이러한 '근대성의 시발점'으로서의 일제시대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경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성은 3, 40년대의 상하이와 같은 곳이었으며, 상류층을 중심으로 퇴폐적 낭만주의가 극단까지 퍼져있었던 곳인 것이다. 파리의 물랑루즈가 우리 식으로 존재했던 도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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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듸오 데이즈

이제껏 지독한 '상처'였기에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시대였던 일제시대는, 광복 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나름 비판적으로 직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시간이 지났고, 민주화 이후 우리의 뿌리를 재확인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로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학계에서도 동아시아학술원의 윤해동 교수를 비롯한 일군의 소장학자들이 과거의 '식민지 수탈론'(수탈-저항)과 '식민지 근대화론'(수탈-개발)의 오래된 대결구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식민지 근대론'의 형태로 일제시대를 재구성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윤해동 교수에 따르면,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은 둘 다 민족주의와 근대화론 공동으로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이론이다. 전세계 모든 근대국가가 식민지를 경영했거나 식민지였던 만큼 "모든 근대는 식민지 근대"이며, 피식민지 역시 다른 식민지에게는 제국의 일환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 단적으로 싱가포르나 태국에게 조선은 '같은 피해국'이라기보다는 '제국의 연장선상'에 있는 국가로 받아들여졌으며, 따라서 전후 전범재판에서 처형된 이들 중 조선인이 껴 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명확한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만큼 민족주의에 기반한 '반일감정'으로만 사고할 수 있었던 일제시대를 보다 다양한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경성이 특히 매력적인 이유

그렇다면 유독 영화에서 이토록 경성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전에, 우리는 이미 개봉한 영화들이나 앞으로 만들어질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철저하게 '장르영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미 개봉한 <기담>, <원스 어폰 어 타임>, 그리고 <라듸오 데이즈>와 경성의 관계를 잠깐 짚어보기로 하자. 영화 <기담>은 경성에 세워진 당시 최첨단 서양식 병원을 배경으로 기이한 이야기 세 편을 풀어내는 호러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양복을 한껏 차려입은 신사 옆에 기모노를 입은 여성, 그리고 그 옆에 한복 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나란히 서있어도 전혀 낯설지 않다는 사실, 혹은 우리의 전통적인 처녀귀신이 기모노를 입고 등장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바 있다. 온갖 국적의 문화들이 혼재하고 있던 일제시대의 경성은, 이렇게 신문화의 폭발을 경험하던 이른바 '문화의 무국적화'가 실현됐던 공간이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새로이 밀려드는 문물 앞에서 한껏 호기심을 느끼며 그것에 우리 식대로 적응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경성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을 배경으로 하는 <라듸오 데이즈>가 묘사하는 것은 이러한 문화충돌을 다루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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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의 경우는 좀더 흥미로운 케이스이다. 헐리웃 고전영화들의 각 장르의 문법들을 멋대로 가져와 섞어놓고 있는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스팅>과 같은 사기영화와 서부영화, 버스터 키튼 혹은 성룡 식의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한' 액션 코미디, 거기에 심지어 2인 만담과 홍콩 누아르의 장르문법까지 끌어들여 '영화적 판타지'의 모든 것을 실험한다. 이러한 실험을 가능케 하는 공간으로서 호출되는 공간이 바로 '경성'이다.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상황이었지만 문화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문화들이 밀려들어오고 있던 바로 그 '경성'이야말로, 영화적 판타지를 그대로 현실화시켜주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영화 속 경성이 갖는 의미

기존의 시선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시선으로 경성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대중예술인 '영화'에서 시도되고 있다는 것은 여러 모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판의 미로 : 오필리어와 세 개의 열쇠>가 스페인에서 실패한 혁명의 역사를 판타지라는 장르를 통해 오히려 민중의 승리의 역사로 바꿔놓았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 철저히 장르영화의 문법과 서사를 통해 상처의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국가 혹은 민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고통을 직시하고 치유할 수 있는 유효적절한 기회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경성에 대한 탐구는 우리의 근대성의 연원을 찾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고, 이러한 연원 탐구는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모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과거와 단절된 채 뿌리 없이 부유하는 현대인의 방황만을 피상적으로 그리곤 했던 한국영화는, 이제야 비로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통시성을 획득하고 그 의미를 탐구하는 첫발을 내딛고 있다.


ps. 프레시안무비 기사로 올라간 글

2008/02/12 09:39 2008/02/1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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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표정도 좀 유재석과 닮은 듯...

보는 와중 무한공포를 느끼면서 나한테 애가 있다면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을 애니메이션이라 생각했다. 애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로테스크하고 어두운 화면의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영화와 <꿀벌대소동> 중 고르라고 해도 차라리 전자를 골랐을 것이다. 영화에서의 노골적인 폭력은, 차라리 현실에서 억압된 것들이 예술에서 일종의 판타지로서 허용되는 것으로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은폐된 폭력을 영화가 왜곡하고 있을 때, 그리하여 영화가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뻔뻔한 수준으로 저지르고 있을 때, 나는 과연 아이에게 뭐라 설명을 해야 하나? 이 순간 내가 애엄마가 아닌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아마도 내가 애엄마였다면, 이 영화를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 또다시 ‘이건 부모로서 애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게 아닐까’ 따위의 고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의 이런 반응은 매우 과민한 것이며, 지나친 상상 혹은 오버 해석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영화가 제국의 제3세계 노동착취에 대해 뻔뻔한 변명과 합리화를 늘어놓는 영화라 생각한다. 이걸 의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배리가 인간들의 양봉장을 발견하는 장면(제3세계에서의 비인간적인 노동 착취를 너무나 노골적으로 연상시키는) 때문이고, 바로 그 순간 배리가 ‘꿀벌’, 즉 ‘검은 줄무늬와 노란 줄무늬를 가진’ (아프리카인과 동양인?)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배리(제리 사인필드 / 유재석)가 바깥세상에 구경을 나갔다가 ‘인간’인 바네사(르네 젤위거 / ?)와 친구가 되고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까지는, ‘이거 얘기가 이상하게 풀려나가고 있는데, 억지로 쥐어짜는 느낌인데’ 싶었지만 그래도 그런가보다 했다. 그가 양봉장을 발견하는 장면까지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배리는 전체 꿀벌을 대표하여 인간의 꿀 착취를 하필 ‘미국의 연방대법원’에 가져가고(미국의 연방대법원이 인류를 대표하는가? 그래, 이건 미국영화니까 이해해줄 수 있다 치자.), 인간 vs. 꿀벌의 재판을 일으키며, 여기에서 승소하여 인간에게서 모든 꿀을 빼앗는다. 그 결과 전례 없는 풍요를 만끽하게 된 꿀벌들은 노동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고, 꿀벌이 게을러진 바람에 생태계 전체가 망가진단다.

이런 우라질, 그러니까, 착취당하던 꿀벌들이 그 사실을 고발하는 것에서 갑자기 노동의 산물을 독차지하며 자원을 무기화하는 결과로 나가버리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노동자가 부유하게 되면 당연히 게을러지는 거야? 그래서 노동자는 노동해야 한다고? (자본가는 그냥 착취하고?) 이런 억지와 왜곡과 모함이 어디 있어? 필요 이상으로 자연을 학대하고 낭비하면서 그렇게 산출한 산물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은 채 지구 반대편에서는 사람이 굶어죽어 가는데 지들은 남은 음식 열심히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에 대해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이건 자본주의가 애초에 시작됐던 지점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조차 왜곡하잖아? 이런 애니메이션을 애들한테 과연 보여줘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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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의 아이디어는 꽤 신선했고 이 시퀀스에서 벌 시점의 화면도 꽤 박진감을 주긴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선, 몇 가지 흥미로운 점들이 보이긴 한다. 예컨대 벌들이 빠르게 비행을 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벌의 시점으로 주변의 환경이 휙휙 변하는 걸 보여주는 장면들 같은 것. 실사영화였다면 헬리콥터 씬이 될 그 장면들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해 내는 건 분명 기술적인 완성도와 어마어마한 작화 인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과연 이 장면들은 실사영화에서도 종종 실패하는 박진감을 놀랍도록 성공적으로 제공하고는 있다. 더빙판에서 유재석은 그래도 꽤 안정적인 목소리 연기를 선보이고 있기도 하고. (나는 이 목소리가 정말 유재석 맞나? 싶은 순간들을 많이 맞이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이 애니메이션, 정말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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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바네사와 벌 배리와의 우정... 여기서부터 엇박자.

내가 너무 정치 과잉이 아닌가, 혹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들이대며 억지 해석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많이 생각해 봤다. 그런데 그런 정치적인 해석을 빼고 나면, 도대체 왜 법정소송까지 벌이면서 배리가 그런 식의 모험을 하는지, 그 이후 스토리가 왜 그 따위로 전개가 되는지, 마지막에 왜 동물들을 대신하는 변호사가 되는 건지, 거기에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는 건지, 나로서는 이 애니메이션의 스토리 전개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도 않고 수긍이 가지도 않는다.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너무 억지 춘향이잖아, 억지로 쥐어짜고 있잖아.


나도 미국 법정물들 꽤 좋아하고, 법 공부하는 남자친구를 둔 덕택에 사법제도에 대해 관심도 많고, 한국의 사법제도와 미국의 사법제도의 차이점 같은 것들에 대해 남자친구가 해주는 얘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이 미국의 사법제도에 대한 교육용 목적을 갖고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결국 ‘배리가 법을 남용했다’로 가고 있고, 사실 본격적인 법정물도 아니고, 생태계가 망가진 것이 모두 꿀벌의 게으름 탓이라는 그 이야기 전개에 정말 기가 질려서, 끝까지 영화를 참고 보는 게 무척 힘이 들었다. 영화의 사카스틱한 농담을 내가 놓치고 있나, 내가 바보인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 근데 그건 아닌 거 같고,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분들에게 진심으로 진지하게, 왜 재미있는지 묻고싶을 정도. 하지만 이 영화는 국내에서도 그리 나쁘지 않은 흥행성적을 거두었고, 이 영화를 좋아한 사람들은 정말 재미있다'고 말한다. 이럴 때마다 나는 나의 안목이 매우 의심스러워질 뿐만 아니라 나의 정치적 성향이 영화를 심각하게 왜곡시킬 정도로 강한가 자책감을 갖게 된다. 어쩌자고 나는 남들은 마음 편하고 재미있게 본 영화에서 제3세계 노동착취 같은 민감한 사안을 떠올려버린 것일까? 내가 잘못된 걸까, 영화가 이상한 걸까?



ps. 유재석의 목소리 연기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고 느끼긴 했지만, 르네 젤위거, 캐시 베이츠, 매튜 브로데릭, 크리스 록 등의 배우들과 심지어 배리 레빈슨 감독까지 참여한 목소리 연기를 듣고 싶었다. <엘라의 모험> 때도 그랬지만, 별로 검증 안 된 사람들을 캐스팅해 더빙을 하고선 기자시사회 때에도 더빙판을 틀어버리는 건 쫌...

ps2. 다 써놓고 보니 이 영화 무려 작년 12월에 본 거였...



+ Dec. 14, 2007, 2시, 대한극장, 기자시사회

2008/02/12 09:01 2008/02/12 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