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파파는 열애중>은 제목만 보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대디의 연애담을 다루는 로맨틱 코미디 같다. 물론 드라마의 시작도 그러하다. 너무 일찍 철이 든 아이를 키우는 철없는 아빠 강풍호(오지호)가 한국 드라마들 특유의 ‘우연에 우연이 겹친’ 사건들 덕에 지나치게 명랑하고 씩씩한 24살짜리 의대생 아가씨 전하리(허이재)와 엮인다. 둘은 애 딸린 홀아비와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가씨라는 점에서만 대립을 이루는 게 아니라 계급과 신분에서도 격차를 이루고 있고, 이들의 세계는 곧 이종격투기 vs. 피아노라는 세계의 대립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언제나 그렇듯 처음에는 티격태격하던 두 남녀는 곧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상대의 사정을 알고 인품을 좀 더 겪으면서 호감은 애정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잠깐, 여느 드라마와 달리 두 사람이 애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무척 빠르다. 총 16부작인데 벌써 4부에서 둘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고 알콩달콩 연애모드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의 연애는 시련도 보통 큰 시련 앞에 놓인 게 아니다. 하리의 예비 새엄마 윤소이(강성연)가 실은 풍도의 아들 산이의 친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둘 사이의 연애 전선은 뜨뜻미지근하기 그지없다. 윤소이가 하리의 새엄마가 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강풍호가 알게 되는 시점은 드라마에서도 꽤 이른 5회이다. 하리의 부친인 전기석 박사가 풍호가 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시점도 6회에서다. 풍호는 윤소이와 전기석의 사이를 알게 된 직후부터 하리에게 거리를 둔다. 하리에 비하면 나이도 많은 데다 애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너무나 솔직한 하리와 달리 풍호는 여러 모로 신중하고 어른스러울 수밖에 없다. 풍호가 거리를 둘수록 애가 타서 더욱 직접적이고 저돌적으로 풍호에게 구애하고, 풍호는 그럴수록 더욱 냉정하고 의연하게 하리를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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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애아빠와 20대 발랄처녀를 어떻게든 엮어주기 위한 몸부림.

그런데 이 드라마는 7회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방향을 틀면서 드라마의 진짜 정체가 드러난다. 풍호의 아이 산이가 뇌종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드라마는 한편으로는 가난한 싱글대디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의 의미를, 또 한편으로는 낳는 것만으로 무조건 성립되지는 않는 모정의 의미를 탐구한다. 어릴 적 양친을 모두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 혼자서 세상의 풍파를 헤쳐온 풍호에겐 어려울 때 손 벌릴 수 있는 가족이나 친척도 없다. 안 그래도 혼자 애를 키우는 게 시련일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아이가 아프기까지 하니, 사회안전망이 별로 갖춰지지 않은 데다 복지제도의 지원에 있어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남성 한부모 가정의 가장인 풍도의 시련은 이중삼중일 수밖에 없다. 한편 어릴 적 아이를 버리고 떠난 소이는 아이의 친모임에도 자신의 친권을 행사할 수 없는 반면, 엄마 노릇을 하기엔 너무 어린 하리는 아이에 대한 애정 하나로 아이의 병간호를 하면서 산이의 엄마의 빈자리를 조금씩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가부장제 사회 어디에서나 그토록 신성시되고 신화화된 모정이라는 것에 대해, 어머니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여성에게 얼마간은 선천적으로 잠재돼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것은 아이를 낳는 시점이 아니라 아이에게 애정을 갖고 아이와 시간을 함께하면서라는 사실을 이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알콩달콩 연애담을 기대하고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시청자들에게 드라마의 이런 방향은 일종의 ‘배신’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결혼이 당사자의 의사만큼이나 그 부모의 허락이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데다 한부모 가정이나 이혼 가정을 ‘결손가정’이라며 삐딱하게 보는 게 여전히 일반적인 한국사회에서, 애 딸린 홀아비 내지 이혼남이 미혼여성과 결혼을 하는 것은 처음부터 큰 시련을 예고할 수밖에 없다. 애초 이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 역시 그런 시련과 편견을 헤치고 결국 해피엔딩에 도달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문제는 그러한 배신이 아니다. 드라마를 통해서건 어떤 형태를 통해서건 대중매체에서 한번쯤은 반드시 다뤄져야 할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오히려 높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역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등장인물들의 행동 반경이 아이의 뇌종양 투병을 중심으로 재편성되면서 이야기가 다소 느슨해지고 지지부진해지는 바람에 드라마의 재미가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점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모정에 대해서 진일보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소이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신비화된 모정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한계가 보인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 자신이 낳은 아이를 버린 잔인한 모정에 대한 성토는 풍호와 그의 주변인물뿐만 아니라 심지어  풍호와 전혀 연관돼 있지 않은 조연들에 의해서도 계속 반복되지만, 정작 너무 어린 나이에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을 한 뒤 자신의 꿈과 재능을 아이 때문에 접어야 한다는 상황에서 패닉에 빠졌다가 잘못된 선택을 한 소이의 입장은 별로 성실히 다뤄지지 않는다. 그녀는 아이를 부담스러워하며 애를 팽개쳐놓고 피아노 앞에만 앉아 아이와 아이아빠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결국 혼자 우는 애를 방안에 내팽개쳐놓은 채 도망쳐버린 나쁜 엄마다. 그리고는 돈 많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나이든 남자를 만나 세계로 뻗어나가는 피아니스트가 되어 화려하게 돌아온 뒤 기석을 속이고 풍호와 하리의 사랑을 방해하며 아이를 위해 돈이나 내놓을 수밖에 없는 파렴치한 악역을 맡는다. 물론 뇌종양에 걸려 대수술을 받고 고통스럽게 항암치료를 받는 아이를 멀찍이서 지켜보며 눈물지을 수밖에 없고 엄마의 자리를 번번이 하리가 대신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녀의 모습은 꽤 비극적이고 연민이 가도록 묘사되지만, 그녀의 고통은 드라마에서 그저 기능적으로만 묘사되는 측면이 크다.

10회 마지막에서 소이와 풍호 사이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하리가 눈치챈 만큼, 그리고 기석이 순수한 애정과 호의에서 소이의 아이(소이는 자신이 버림을 받고 애까지 뺏겼다고 기석을 속인 상태다)를 찾고 있는 만큼, 소이의 정체와 비밀이 드러나는 게 머지않았다. 문제는 그 이후다. 과연 사실의 전말을 알고도 하리가 풍호와 산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니면 해피엔딩을 위해 소이의 비밀이 영원히 비밀로 봉인될지, 비밀로 봉인된다 하더라도 과연 풍호가 하리와 커플을 이룰 수 있게 될지, 어느 쪽이든 시청자 입장에서는 꺼림칙한 찝찝함이 남을 수밖에 없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기막힌 해결책을 과연 이 드라마가 제시해줄 수 있을까? 그 누구보다 드라마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산이의 행복을 위해서, 드라마의 작가가 반드시 그런 해결책을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프리미어 169호.

ps. 바로 뒷 회에서 풍도와 소이의 관계가 폭로되고, 이 드라마는 뻔한 신파의 멜러를 향해 그대로 달려나간다. 프리미어에 줬던 별점의 5점 만점 중 2점도 아까워지는 게, 이거 연출과 편집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ps2. 난 도저히, 허이재가 이쁘게 봐지지가 않아. 싫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리고 허이재뿐만 아니라 요즘 '귀여움'을 무기로 내걸고 나오는 배우/탤런트들 거의 대부분 그 억지 맑은 척을 도저히 못 견디겠다. 원래 이 과는 그저 보는 사람 그 누구든 저 맑음을 지켜주고 싶다, 는 마음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건데... 연기 테크니컬한 면에서 그런 맑음과 대치되는 면이 분명 있긴 있고, 그래서 오히려 이런 과들이 연기를 정말 잘 하면 경이로운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런 건가? 그렇게 보면 <리틀빅맨>의 더스틴 호프먼이나, 오드리 헵번 같은 배우는 정말 경지의 배우인 거구나 싶기도 하고, 그런 배우들에게 지금 탤런트를 견주는 것 자체가 양쪽은 물론 영화관객/시청자에게 실례인 것 같기도 하고.

ps3. 오지호 처음 <미인>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고놈 참 잘생겼네, 했다. 한동안 참 방향 못 잡더니 <환상의 커플>에서나 여기에서나, 드디어 자기한테 딱 맞는 이미지를 찾은 듯. 얘는 그저 막노동계급의 좀 우악스럽지만 내심 착한 그런 마초가 딱이다. 정말로 내가 느끼과를 좋아하긴 하나 봐.

2008/03/31 21:25 2008/03/3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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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영혼의 상징.

이런 류의 인간승리 드라마가 지치지도 않고 만들어지고 사람들을 모으는 데에는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그럼에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확인하는 데에서 안도와 자극을 받으려는, 분명 음험하고 고약한 이기적 심리가 큰 몫을 하기 때문일 거다. 물론 그건 별로 우아하지도 기품있지도 않지만, 어쩌랴, 그게 인간의 본능이기도 한 것을.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유,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힘을 추스르는 데에, 나보다 더 불행한 상황에 빠져있는 사람(물론 이건 철저히 보는 사람 입장 기준이다)이 그럼에도 생을 낙관하고 끝까지 삶에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을 목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한 방도 없다. 물론 이 약효는 매우 단기적 처방이지만, 어차피 이 한 방을 원하는 사람들 역시 다른 식의 기쁘고 좋은 일을 맞아 어둡고 씁씁한 기억 따위 금방 지워버릴 수 있는, 단지 그 짧은 기간동안 약효가 지속될 만한 한 방을 원해서 이런 얘기를 탐하는 거니까. 그렇기에 이런 이야기들은 반드시 '실화'여만 한다. 이런 식의 글이 매우 냉소적으로 보일 것이라는 건 잘 알고있지만, 나는 여기에 어떤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는 것도, 그걸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장-도 보비의 유족들이 그의 책이 영화화되는 것을 허락했을 때도 바로 그런 식으로 그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가장 컸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꿔 말하면, 자기 인생에 대략적으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이런 이야기 한 방으로 도저히 구제되지 않을 장기적인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에겐 이런 식의 이야기가 그닥 약효를 발휘하지 못할 수 있다. 나 역시 이런 부류인데('대체로 만족'과 '장기우울증' 중 어느 쪽인지는 묻지 말 것), 대신 내가 감동을 받은 것은, 한쪽 눈꺼풀을 제외하고 온몸의 신경이 마비된 장-도가 세상을 보고 느꼈던 방식을 어떻게든 함께 경험해보고자,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다른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카메라였다. 사람의 눈과 마음은 그렇게까지 다르지는 않은 법이라, 아마도 깐느영화제가 이 영화에게 다른 상이 아닌 감독상과 기술상(촬영을 맡은 야누스 카민스키가 수상했다)을 주었던 것도, 아카데미상이 외국어영화인 이 영화를 촬영상 후보에 올려놓은 것도, 그래놓고 다른 데에서 외면한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챙겨준답시고 냉큼 촬영상을 줘버렸을 때 많은 이들이 불평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진정으로 좋은 영화인 것은, 사지가 마비된 채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던 장-도를 그저 감독 마음대로 대상화하고 착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장-도를 최대한 이해하고 그의 눈이 보는 방식대로 세상을 보고자 했던 노력,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보는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그 노력이 화면에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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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복 안에 갇힌 나비.

이는 단순히 한쪽 눈을 꼬매버릴 때 카메라가 취한 트릭이나 영화의 전반부 반을 흐릿한 초점과 카메라의 상후좌우 화각을 제한해버린 트릭, 혹은 단순히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가 들고 있었던 물리적 의미의 그 카메라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이런 영화를 찾는 사람들의 기대를 정면에서 배신한다. 불행한 상황에 빠진 인간의 실화를 보러 눈물을 흘릴 만반의 준비를 한 채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뜻밖에 이 영화가 그 장르 영화들이 흔히 취하는 방식의 대상화가 아닌, 영화라는 2차원 그림 매체가 취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최대한 장-도와의 동일시를 시도하는 영화의 방식에 일단 당황하게 된다. 또한 한없이 불쌍하고 연민이 가는 초라한 사내가 아닌, 자신의 사고를 놓고도 농담따먹기를 하며 잔뜩 긴장해 있는 의사나 다른 간호사를 놀려먹는 낙천적인 유머쟁이 남자에게 또다시 당황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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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몸 안에 갇힌 보비에게 유일한 세상과의 통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 쓰인 내레이션들이다. 대체로 내레이션은 영화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요소들 중 가장 비-영화적인 것(혹자들에겐 반-영화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 내레이션은 주인공의 외모와 심리를 정면으로 충돌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게 영화적인 역할을 한다. 화면 안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아무 말도, 표정도 제스추어도 취할 수 없는, 그저 한쪽 눈꺼풀만 꿈뻑대는 한 사내의 모습이다. 그나마도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동안은 그가 보는 세상만 따라가는 카메라 덕에 우리는 그의 모습을 영화가 시작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확인할 수 있다. 잠수복 안에 갇힌 꼼짝 못하는 몸과 사람 사이를, 병원 곳곳을 가볍게 날아다니는 영혼(나비)의 대조는 이렇게 화면과 사운드의 대조로 형상화된다. 장-도가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키는 장면은 영화의 처음이 아니라 맨 마지막에 배치됨으로써, 우리는 실상 잠수복 속의 몸보다는 그의 가벼운 영혼을 훨씬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신파의 감동에 눈물 흘리는 대신 그 자유로움에 대한 경외, 그럼에도 그 자유로움을 붙잡는 육체의 한계를 함께 느끼며 답답해하는 것. 그럼에도 잡지 편집장답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내려 하고, 이를 위해 마지막 투쟁을 벌이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 아마도 줄리앙 슈나벨 감독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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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비의 아버지로 출연한 막스 폰 시도우. 나이가 드셔도 섹시하시다... ㅠ.


ps. 프랑스 원제의 '잠수복'이 어쩌다가 영어제목, 한글제목에서 '잠수종'이 된 것일까.

ps2. 큐피트의 부인인 프시케(psyche, 영어권에서는 사이키라 발음하기도)의 이름은 '영혼'을 뜻하기도 하지만 '나비'의 어원이기도 하다. 나비가 영혼을 상징하는 건 아주 오래된 얘기. 참고로 심리학과 관련된 무수한 용어들(psycho-로 시작하는) 역시 모두 프시케에서 유래한 것.

ps3. 요즘 내가 보는 프랑스 영화에는 거의 마티유 아말릭이 나오는 듯. 그만큼 국내에 프랑스 영화가 안 들어온다는 얘기...? 엠마뉘엘 세이녀, 오랜만에 보니 반갑구려.

ps4. 줄리앙 슈나벨도 그러고보면 엄청 과작 감독이라는. 대체 <바스키아>가 언제적 영화인데... <비포 나잇 폴스>도 2000년작 아닌가. (이 영화는 결국 놓쳤다. 조니 뎁이! 여장을 하고 나오는데!!)

ps5. 위에서도 썼듯 장-도 보비의 아버지로 나오는 배우는 막스 폰 시도우, 그리고 루시앙 신부로 나오는 잘 생긴 할아버지는 바로 작년에 타계한 장-피에르 카셀이다. 뱅상 카셀의 아버지이자, 내게는 1969년작인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그림자 군단>에서 한눈에 꽃미남 포스로 넉다운을 안겨주신 분. 정확히 말하자면 '뱅상 카셀이 장-피에르 카셀의 아들'이라고 해야 할 거다.

2008/03/24 03:06 2008/03/24 03:06

3월 21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에서 1회에 한해 열린 존 홀로웨이 바로크 바이올린 리사이틀은 클래식 음악, 그 중에서도 특히 고음악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었을 듯도 싶다. 솔직히 클래식 잘 모르고, 바로크 바이올린이 현대 바이올린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는 나같은 문외한들은 그저 좋은 공연을 싼값에 볼 수 있다는 소리에 존 홀로웨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달려갔지만. 독주회인 만큼 존 홀로웨이 씨는 캐주얼한 차림으로 무대에 나와 편안하게 공연을 했는데, 인상 좋고 푸근해 보이는 저 아저씨의 이력을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허걱, 맘 푸근하고 그냥 편하게 영감님, 부를 수 있는 옆집 할아버지가 결코 아니었어... 1948년생에 8살 때 첫 콘서트 무대에 올랐고 1970년대부터 바로크 바이올린을 잡았으며 최근엔 지휘자로도 명성이 높은 한 마디로 대단한 양반이더라는.

오늘의 프로그램은 텔레만의 바이올린을 위한 환상곡 1번 B플랫 장조(TWV 40:14), 바흐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1번 G장조(BWV 1001), 비버의 파사칼리아 '미스터리 소나타', 그리고 인터미션 후 다시 텔레만의 바이올린을 위한 환상곡 10번 D장조(TWV 40:23)과 바흐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2번 D단조(BWV 1004), 이렇게다. 마지막에 연주된 저 파르티타가 그 유명한 사라방드와 샤콘느가 있는 바로 그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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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상당히 섬세하고 고우면서 부드럽고, 마치 유리공예품을 만지듯 아주 수줍은 듯하면서도 매우 여유있는 소릴 들려주더라. 푸근하고 안정되고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달콤하지만 지나치게 달달하지는 않은 꿈을 꾸는 듯한 소박한 연주였다, 전반적으로. 비록 후반으로 갈수록 소리에 약간 노이즈가 끼었고 심지어 마지막 샤콘느 연주 때는 삑싸리까지 났지만(!), 그래도 좋았다. 특히 비버를 연주할 땐 정말 너무나 섬세하고 곱고 마음까지 차분해지고 행복감까지 느껴지는 것이, 듣다가 눈물이 다 나더라. 비버 연주할 때가 가장 좋았고, 탈레만 연주도 너무 좋았던 반면, 상대적으로 바흐 쪽은 약간 불만족스러웠다. 그게 내가 이제껏 들었던 바흐가 지나치게 명암을 대조하며 형식미를 강조하는 연주여서였는지, 이 사람이 원래 바흐보다 탈레만 해석에 훨씬 더 뛰어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터미션 직후 연주한 탈레만의 바이올린 환상곡 10번은 아융... 어찌나 경쾌하고 가벼우면서도 예쁘던지.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데 숨이 다 멎었다가 연주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숨을 내쉬었다는.

하지만 연주들이 마냥 곱기만 했다는 건 아니다. 아마도 이것이 이 양반의 내공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은데, 상당히 라이트하고 산뜻하며 고우면서도 '곱기만 한' 연주와는 상당히 달랐다. 가볍지만 촐싹대거나 얄팍하지 않고, 고난과 고통이 다 지난 후 관조와 여유가 깃들여 있는 연주라 해야 하나. 대체로 나는 불같은 열정과 폭풍치는 고뇌를 담은 연주를 좋아해 왔지만, 이 사람의 연주는 원래 내 취향이 아님에도 '이렇게 연주할 수도 있구나' '이런 것도 꽤 좋구나' 싶은 생각을 들게 해줬달까. 아마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바이올린이란 악기 자체가 원래 상당히 신경질적이고, 그래서 사람 신경을 참 곤두서게 하는 악기라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곱고 부드러운 바이올린 연주라니 상당히 놀랐다. 이것이 J언니 말대로 원래 바로크 바이올린의 특성인지, 아니면 이 연주자의 연주 스타일 때문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ps. 객석에서 박찬욱 감독을 봤다능.

ps2. 20대 초반에 영화나 보러 갔던 호암아트홀, 정말 오랜만에 간 셈인데 '어머나, 호암아트홀이 이렇게 작았었나' 싶더라. 하지만 소규모 공연장으로는 딱 좋더라는.

ps3. 자리가 예술이었다. 그야말로 정중앙. 가운뎃줄 정 가운데자리. 좋은 공연을 좋은 자리에서 싸게 볼 수 있게 해준 J언니에게 감사.

ps4. 어쩐지... 이 아저씨 비버 연주로 대박 성공하고 명성을 휘날린 사람이었어! 역시 좋더라니. 이 아저씨의 홈페이지 : http://johnholloway.com

2008/03/21 23:39 2008/03/21 23:39

버버리 코트를 휘날리는 멋진 형사가 아니라 생활형 아줌마 형사다. <천하일색 박정금>(이하 ‘<박정금>’)은 가족시청자 대상의 주말드라마답게 문제 많은 가족이 등장하지만 시종일관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혼당한 어머니와 살고 있는 정금(배종옥)은 그 자신 역시 남편에게 이혼당했고, 그 와중에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여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경찰계에 투신해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고등학생인 둘째 아들과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매일 “벌어먹고 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투덜거리고 때로 칼을 맞으면서도 형사일을 그만두지 못 한다. 어머니를 내쫓고 안방을 차지한 청주댁(이혜숙)과 그녀의 딸 유라(한고은)는 정금과 원수지간이고, 간간이 나오는 대사들을 통해 유라가 정금의 아픈 과거에 대단히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들을 둘러싼 두 남자, 즉 용준(손창민)과 경수(김민종)는 정금을 둘러싸고 삼각관계를 만들어갈 예정이다.

경수의 말을 빌면 ‘얼굴이 다 구겨질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사는 정금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일과 생활에 대단히 충실한 여자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어떤 억울한 일에도 그저 착하게 참고 사는 캔디형 여자는 아니다. 성격도 급하고 새어머니에게는 꼬박꼬박 청주댁이라 부르며 목소리를 높이며, 심지어 새어머니의 얼굴에 봉투를 던질 정도로 성격이 괄괄하다. 하지만 그녀는 성년도 안 된 아이가 소매치기 초범으로 붙잡힌 뒤 겁에 질려 떨자 놔줘버리고, 폭력행위를 고발한 남자가 오히려 뻔뻔스러운 파렴치범임을 알자 고발당한 남자를 동정하며 고발한 이에게 린치를 해버리는 따뜻한 면을 가지고 있다.

정금이라는 캐릭터를 한층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건 바로 배종옥의 존재다. 언제나 똑 부러지고 당당한 캐릭터를 연기해온 배종옥은 불과 2002년 출연했던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만 해도 문성근과 박해일을 동시에 휘어잡은 싱글여성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억척스러운 ‘아줌마’ 역할로 연기폭을 넓혀왔다. 그런데 <박정금>에서의 배종옥은 여전히 억척스러운 아줌마이면서도, 기존의 아줌마 역할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대체로 아줌마 역할을 하면서도 언제나 똑부러진 이혼녀 역할이 대부분이었던 배종옥은 <박정금>에서 무려 고등학생을 둔 엄마이고 똑부러진다기보다는 털털한 면이 더욱 많이 드러나며, 위장 근무를 흔히 하는 형사라는 직업상 갖가지 위장과 변신의 모습을 선보인다. 배종옥의 팬들이라면 매회 범인을 잡기 위해 전력질주하고, 다소 어설픈 면이 있긴 하지만 범인과 싸우는 액션연기를 선보이며 때때로 갖가지 변신과 위장을 하는 배종옥을 보는 재미만으로도 주말을 손꼽아 기다릴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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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이자 생활형 형사, 박정금 여사는 오늘도 달린다, 범인 잡으러!


하지만 이 드라마가 갖는 매력은 단순히 배종옥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니다. 회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약혼자인 경수를 사이에 두고 정금과 신경전을 벌이며 제대로 악녀의 역할을 해주는 유라(한고은)에게도 그만큼의 관심과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이에게 독하고 막돼먹게 대하며 심지어 친어머니에게서도 ‘미친년’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막 가는 유라는 청주댁과 함께 정금의 인생에 가장 큰 굴곡과 고통을 주는 인물이지만, 유라 역시 청주댁의 비뚤어진 모성의 직접적인 피해자로 정금 못지않은 상처를 지고 있기도 하다. 씩씩하게 고통을 이겨내며 생활을 영위하는 정금과 달리, 유라의 막돼먹은 성격은 죄책감과 모멸감으로 인한 강력한 방어벽이자 자기파괴적인 위장이다.

그간에 해온 수많은 악행과 모진 말버릇과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실은 어머니의 악행의 뒷수습을 하며 원치 않게 공범자 역할을 강요받으며 분열한다. 7회에 이르러 정금이 잃어버린 아들 지훈과 자신의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된 유라는 아들을 잃은 어미의 고통 못지않게 어미의 죄짐을 그대로 지고 가야 하는 자식의 고통과 오열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금에게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달려갔던 그녀가 결국 입을 다무는 것 역시, 그녀 입장에서는 정금의 이기주의로밖에 볼 수밖에 없는 일련의 행동들로 받은 상처 때문이다. 경수의 말대로, 유라는 어느 면에서는 그 어떤 인물보다 순수함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더욱 고통스럽게 자기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 와중에 정략결혼으로 약혼한 경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리고 경수가 정금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을 보면서 유라는 더욱 ‘준비된 악녀’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사실 유라의 캐릭터야말로 주말드라마로서는 파격적인 인물이며, <박정금>을 다른 여타의 주말드라마와 차별화해주는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다. <경성스캔들>에 이어 완숙한 퇴폐미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는 한고은의 연기 역시 배종옥만큼이나 드라마에 강력한 무게를 제공한다.

변호사인 경수와 의사인 용준, 두 남자가 정금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며 삼각관계로 치닫게 되는 것은, 그간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온 정금의 인생에 일종의 보답으로 주어진 상황일 것이다. 두 남자의 직업이 남편감의 직업으로는 최고라 여겨지는 변호사와 의사라는 설정, 과연 주말드라마다운 통속성과 속물스러움을 적당히 보여주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러한 통속성이야말로 우리가 주말드라마를 보는 이유 아니겠는가. 처음엔 동병상련과 연민에서 시작했던 경수와 정금 사이의 감정은 점차 중요한 시간들을 함께 나누며 서로 호감을 품지만, 매우 더딘 속도로 서로 감정이 발전해가면서도 이 감정은 유라와의 관계 때문에 번번이 자체 검열과 자기 금지의 길로 들어서며 정체를 맞곤 한다. 한편 아파트 사기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정금네 가족과 한집에서 살게 된 용두, 용준 형제의 경우 처음엔 마치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대지만, 용준이 정금의 초등학교 짝꿍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껏 밝고 유쾌한 분위기로 진전된다. 정금의 고통을 함께 나눠주는 이가 경수라면, 정금의 일상에서 즐거움과 씩씩함을 한껏 배가해주고 정금에게 힘을 주는 이가 용준인 셈이다.

<박정금>을 보면서 가장 감동을 하게 되는 장면들은 재미있게도, 정금이 범인의 뒤를 쫓아 질주하고 있는 장면들이다. 그 ‘달리는’ 장면들이야말로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정금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들일 터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속물적이며,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전력을 다해 즐거워하고 열심히 사는 정금의 모습, 그리고 그런 정금에게 무한한 자격지심과 죄책감을 느끼고 그 때문에 더욱 망가져가며 고통을 받는 유라,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을, <박정금>은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그려내고 있다.



ps. [프리미어] 168호.

2008/03/21 22:53 2008/03/21 22:53

24부작으로 기획되어 현재 14회분까지 방영된 KBS의 <쾌도 홍길동>은 ‘퓨전사극’을 표방하는 드라마답게 파격적일 정도로 현대적인 감각을 많이 집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허균의 원작소설을 토대로 알고 있는 일반적인 홍길동의 이미지에도 상당 부분 변형을 시도한다. 역사적 고증과는 거리가 먼 머리모양과 선글래스까지는 그렇다 쳐도, 비보잉과 테크노댄스까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인물과 갈등의 기본 세팅이 끝난 3회부터는 빠른 속도로 스토리가 전개돼 나가는 한편, 배꼽춤과 춤추는 코브라, 중국 무협영화식 의상, 격구(골프) 등마저도 ‘원래 저 시대엔 저렇지 않았을까’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자연스럽게 화면에 녹아들어간다. 그런데 <쾌도 홍길동>이 눈길을 끄는 건 이러한 비주얼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홍길동의 이야기를 현대에 맞게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영웅신화의 모티브를 느슨하게 변용하여, 기성세대의 질서를 강요받고 있던 젊은이들이 각성하게 되면서 기존의 ‘아버지들의 질서’에 정면으로 맞대결하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는 일종의 성장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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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로이 옷을 입은 홍길동과 활빈당.

본래 영웅신화에서 영웅은 동굴 혹은 고래 뱃속 등 좁고 어두운 곳(자궁)에 갇혔다가 물(양수)을 통해 세상으로 다시 나오는 과정을 겪게 되고, 이는 ‘죽음과 부활’ 혹은 거듭남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인 영웅은 모험을 떠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나 괴물로 형상화되는 ‘권위를 가진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殺父) 의식을 치름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왕이 된다. <쾌도 홍길동>에서도 이 모티브는 홍길동의 궤적을 통해 그대로 나타난다. 세상사와 담을 쌓고 살았던 길동은 억울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로 한 뒤 8회에서 관군의 화살을 맞아 강으로 떨어졌다가 도적패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렇게 상징적인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친 홍길동은 당대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던 자신의 아버지 이조판서 홍서영 대감(이하 ‘이판’)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며, 이 가운데 자신의 운명의 주인 혹은 영웅이 된다. 원작소설에서는 길동이 아버지보다 형인 홍인형과 대결하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길동과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는 창휘에게서도 이런 영웅신화 모티브의 흔적이 발견된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그의 대사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듯, 그는 과거 화재사건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죽어있는’ 상태이다.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요구를 당연하게 내면화하고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던 그는 ‘배를 타고’ 돌아온 조선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나고, 특히 길동의 직접적인 질문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던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창휘는 길동과는 약간 다른 처지에 속해있다. 길동이 철저하게 아버지의 세계 안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창휘는 아버지의 질서를 체화한 강력한 (유사)-어머니, 즉 노객주의 세계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창휘가 앞으로 싸워야 할 상대에는 아버지의 세계뿐 아니라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강력한 문지기, 즉 가부장제의 어머니도 추가돼 있다. 영웅으로서의 거듭남에 있어 창휘가 실패하거나 타락할 가능성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쾌도 홍길동>에서 정말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드라마가 영웅신화의 모티브를 차용하고 있으면서도, 1인 영웅 혹은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영웅신화의 한계를 돌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쾌도 홍길동>은 ‘거듭남’의 경험을 홍길동이라는 영웅 한 사람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확산시켜 민중의 집단적 각성의 과정까지도 묘사하고 있다. 단적으로 9회부터 12회에 걸쳐 삽입된 심청전의 변주를 살펴보자. 여기에서 길동은 고리대금 빚 때문에 딸을 넘긴 무수한 힘없는 약자들을 일련의 작전에 직접 참여하게 만드는데, 이들이 취한 방법은 바로 ‘물에 뛰어들어’ 배에 구멍을 냄으로써 배의 출발을 연기시키는 것이었다. 딸들을 구하는 일에 스스로의 힘을 보탬으로써, 이들은 주어진 비극적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로서 거듭나게 된다. <쾌도 홍길동>의 민중은 단순히 홍길동의 영웅적인 활약에 도움을 받거나 은혜를 입는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자신의 뜻을 표출하는 매우 적극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홍길동이 각성하기 전 그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했던 일들을 ‘의협의 활약’으로 각색하는 동시에, 이름 없던 홍길동 무리에게 비로소 ‘활빈당’이라는 이름을 선사하며, 공개처형 위기에 처한 활빈당에게 시위를 통해 지지와 위로를 표현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쾌도 홍길동>이 기존 영웅신화의 모티브를 느슨하게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픽션화’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영웅신화를 해체하고 있는 재미있는 현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9회는 아주 흥미로운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우리는 허이녹을 키워준 허노인이 ‘신화화한’ 길동의 이야기를 하며 약을 파는 장면에서 사실이 픽션화되면서 허구가 진실을 대체하는 과정, 혹은 영웅이 신격화를 거치며 영웅신화가 탄생화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허노인의 이야기 속 길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홍길동의 외모, 즉 패랭이를 쓰고 파란 답호를 걸친 차림이며, 허균의 소설의 설정 그대로 용꿈으로 잉태됐고 축지법과 분신술 등을 쓸 줄 아는 비범한 영웅으로 표현된다. 이는 드라마 자체가 홍길동을 해명스님으로부터 무술을 전수받긴 했으나 주로 저자거리에서 싸움질을 통해 단련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인물, 게다가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며 다소 철이 없는 한량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홍길동이 실제 인물이었다는 설도 계속 제기되고 있는 만큼, 이는 말하자면 허균의 소설이 일반인을 신격화시켰으며, 드라마가 다시 신격화 해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장면만이 아니다. 앞서 지적했듯 홍길동은 의협이 되고자 해서 의협이 된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민중에 의해 ‘각색’되는 경험을 겪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실이 픽션화되며 민중전설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단적인 묘사이다. 이들이 ‘활빈당’이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 활빈당은 스스로 활빈당을 조직한 뒤에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저 느슨한 도적패였던 이들은 우연히 엮인 사건을 해결하고 민중들에게서 ‘활빈당’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바꿔 말하면 활빈당이 조직된 것은 이들을 민중이 ‘호명’했기에 가능해진 것이었다. 활빈당으로 불리는 이들은 각각 구체적인 정체성을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게 되는데, 이 역시 민중에 의해 민간전설이 먼저 만들어진 뒤에 그 전설의 내용이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허구가 실재를 창조하는(혹은 신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신비가 구체적으로 재현되는 순간인 것이다.

원작소설과 다른 새로운 이야기와 뉘앙스가 많이 가미되어 있는 만큼, 이제 반을 넘긴 <쾌도 홍길동>이 앞으로 과연 어떤 이야기로 전개될지는 알 수 없다. 과연 창휘는 반정에 성공하여 새로운 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길동은 원작소설대로 율도국을 건설할까? 길동과 이녹, 이녹과 창휘, 은혜와 길동의 연애라인은 과연 어떤 식으로 정리될 것인가? 이녹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과연 얼마나 영향을 미칠 것인가? 자신의 서자는 방치하면서도 서자 출신의 왕에게는 끔찍하게 충성을 바치는 모순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이판은 과연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는 세 주인공이 자신들의 현실과 상황을 외면하고 도피하거나 아무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 채 순응하며 살고 있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스스로 모색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상태라는 것을 이미 목격한 상태다. 스스로 선택하고 이것에 대한 통제권을 쟁취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어른으로서 세상을 사는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의 주인공들이 깨달은 이상, 시청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들이 제발 옳은 선택을 하며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기를 기원하며 지켜보는 것뿐이다.




ps. 영화잡지 [프리미어] 167호.

ps2. 영화잡지 [프리미어]의 2008년 3/1일자(통권 167호)부터 드라마 리뷰를 싣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잡지가 나간 후 일주일쯤 후에 원고를 이곳에다 (기록 및 보존 차원에서) 올려놓겠습니다. 'The Pillowman Comes' 카테고리에 올릴 예정이며, 프리미어 원고가 아니더라도 지나간 드라마들에 대한 리뷰도 가끔씩 올릴 예정입니다.

ps3. 이 리뷰는 14회까지 본 뒤 작성되었습니다.

2008/03/21 22:45 2008/03/21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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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청춘들, 일생일대의 사건을 맞다

미국에서도 다소 민감한 소재로 받아들여지는 청소년 임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주노>는 청소년의 성이 금기시되고 있는 한국에서는 더욱 쇼킹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쿨한 소녀의 아기낳기 프로젝트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한국의 모든 관객들에게 훌륭하고도 재미있는 성교육 영화가 될 수 있다. 친구와 아이 아빠인 블리커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가족에게 도움을 구하며 열 달 동안 가족들의 지지에 힘입어 무사히 아이를 낳는 주노의 모습, 그리고 아이를 낳는 날 병원까지 뛰어와 주노를 꼬옥 안아주는 블리커의 모습이야말로 어른들의 백 마디 잔소리보다 훨씬 효과적인 매뉴얼을 제공해줄 터이다. 부모의 입장에선 어떤가? 임신한 딸의 비타민부터 챙기고, 세상의 편견에 든든한 방패막이가 돼주며, 딸의 선택을 지지해주고 전적인 도움을 주는 주노의 부모의 모습은 이상적인 부모의 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어린 딸을 키우고 있거나 이제 막 부모가 되려는 이들에게, 주노 부모의 모습은 본받아야 할 귀감의 대상이다.

일부 관객들에게 이런 점들 때문에 이 영화가 현실과 전혀 상관없이 그저 판타지일 뿐이라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심지어 다큐멘터리도 감독이 선택한 앵글과 화면에 의해 이야기로 구성되는 법이며, 그것이 바로 '영화'가 아니던가. 영화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할 이상을 제시하고 현실을 견인하기도 한다. 물론 임신을 한 상황에서 무조건 낳는 것만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뜻은 아니다. 화장실에서 혼자 출산한 채 아기를 유기한 십대 출산모에 관한 뉴스가 종종 보도되는 한국에서라면, 차라리 친구들에게 돈을 꿔서 낙태하러 병원으로 향하는 십대가 더 현명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원이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인 은효로 출연했던 <색즉시공>에서의 상황은 다소 도식화돼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노>의 유쾌한 질주는 오히려 더 빛을 발하게 된다. 어떤 상황에 처했던 당당하고 자신을 믿는 주노의 태도가 오히려 주변 사람들과 심지어 관객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설득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기 때문이다.

<주노>가 미국에서 그토록 어필한 데에는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듬직하게 주노의 성장과 아픔을 묘사해가는 연출,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연을 맡은 엘렌 페이지의 호연과 매력 덕분이지만, <주노>가 제시해준 일종의 '모범 가이드라인'에 대한 지지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없이 쿨한 주노의 태도는 원치 않은 임신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젊은 여성들에겐 열광적인 역할모델의 대상일 것이며, 그 어떤 부모라도 당황하고 충격적일 '미성년자 딸의 임신'이라는 상황에서 부모로서 가장 바람직한 반응이 어떤 것인지 친절히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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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가족들의 지지를 먼저 확보하라.

거기에, 주노의 캐릭터와 이를 연기하는 엘렌 페이지의 매력은 성인 남성 관객들에게 한국식으로 하자면 '국민 여동생'과 비슷한 어필을 한다. 마크와 주노의 교감만 하더라도, 외면적으로는 무성적이고 순수해 보이지만 둘 사이에서 좀더 '은밀한 방식으로 억압된' 성적 긴장감과 함께 묘사된다. 이것은 이 영화를 보는 2, 30대, 나아가 그 이상 나이의 성인 남성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어필하는 매력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성격, 아이의 친아빠에게 매달리는 대신 자신의 몸과 아이에 대한 완벽한 선택권을 행사하는 주체성과 당당함,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대하는 친근감, 쉽사리 성적인 분위기로 전화될 수 있는 순간에 오히려 무심하게 반응함으로써 유지되는 순결함, 그리고 호러영화와 하드코어 펑크를 좋아하고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는 취향까지, 주노는 한편으로 롤리타적 매력을 강하게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버전의 롤리타는 남성들을 타락시키며 여성 간 관계를 교란하는 대신 다른 여성과의 연대를 성사시킨다.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은 주노의 캐릭터를 이처럼 매력적이고도 복합적으로 그려냄과 동시에, 어른들은 절대로 접근할 수 없었던 소녀들만의 세계에서 점차 삶과 세계에 대해 눈을 떠가며 성숙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러나 매우 설득력있게 묘사해낸다. '완벽한 가정'에 대한 주노의 이상은 결국 깨졌지만 그녀는 그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해줄 수 있는 바네사에게 아이를 주고, 블리커와 제대로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다시 평화를 되찾은 주노의 일상은 이제 블리커와 함께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블리커와 함께 기타를 연주하는 주노의 모습에서 새삼 봄볕이 얼마나 따사롭고 봄날의 바람냄새가 얼마나 달콤한지, 그리고 청춘이 얼마나 아름다운 빛을 내는지, 우리는 흐뭇한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


ps.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라간 글.

2008/03/03 17:15 2008/03/0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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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과 이재호. 지금의 20대들에겐 영 낯설기만 한 이름일지 모르겠지만 80년대 중, 후반에 대학을 다니고 있던 이들, 그리고 이들을 선배로 두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후배들에게는 깊은 상처로 각인된 이름이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6년 후인 1986년 4월 28일, 23살의 꽃다운 청년이었던 이들은 신림사거리에서 전방입소 반대 시위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반전반핵 양키고홈’, ‘북미 평화협정 체결’, ‘미 제국주의 축출’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한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몸에 신너를 뿌리고 분신했다. 이제 22년이 지난 현재,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을 담은 영화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제작되어 개봉한다.

<천상고원>, <달려라 장미>,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등 극영화만 찍어왔던 김응수 감독은 당시 이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함께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던 만큼 그들의 분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과거를 가진 감독이다. 김세진, 이재호 기념사업회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의뢰해 왔을 때 오랜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김응수 감독은 기존의 다큐멘터리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방식, 즉 영정사진과 당시 자료화면 등을 비추며 비장한 음악소리 위에 내래이션을 읊는 방식과 정반대로 나아간다.

영화는 김세진, 이재호 열사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고 그 시위에 연관되어 있었던 사람들의 인터뷰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메라는 인터뷰 대상자들의 정면에서 고정돼 있고, 마치 취조라도 하는 듯 냉정하게 그 날 자신의 행적을 자세히 묻는 카메라 바깥의 목소리에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한다. 그 날 입었던 옷, 날씨, 그 전 날 갔던 곳, 함께 있었던 사람, 했던 농담들, 그리고 도착한 시간, 타고 간 교통수단, 버스번호.... 대부분의 인터뷰이들은 어떤 것들은 마치 눈앞에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듯 세세하게 묘사해 내지만, 어떤 것들은 아예 기억 속에서 통째로 지워져 버린 양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하거나 확신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두 열사의 분신 당시를 묻는 질문에는 어김없이 눈물을 터뜨리며 목소리가 잠기고 만다. 이재호 열사의 아버지는 결국 카메라에서 눈을 피한 채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영화라는 것이 시각에 특히 많이 의존하는 매체인 만큼, 관객은 시종일관 인터뷰이의 얼굴과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보여주는 고정된 카메라가 답답할 뿐만 아니라 적당한 편집을 통해 카메라 뒤에서 질문을 하는 사람의 모습, 혹은 당시의 자료화면 같은 것들이 끼어들어와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날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언어화하는 이들의 절박한 노력들, 그 노력이 그대로 나타나는 이들의 얼굴들이고, 우리는 이들이 증언을 마치기 전까지는 이들의 얼굴을 계속 똑바로 쳐다볼 수밖에 없다. 이 순간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그저 남일 뿐인 어떤 사람들의 기억이나 상처가 아니라, 그간 내가 무관심하게 외면해왔던,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의 일부에 축적되어 나의 기억과 감성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고통이다. 우리는 그들의 기억이 단지 그들만의 상처가 아님을, 그럼에도 그것이 여전히 손에 명확히 잡히지 않은 ‘낯선 나라’ 저 편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당황한다.

김응수 감독은 이러한 형식을 통해 단지 과거가 저 뒤에 묻혀있는 것이 아닌, 바로 ‘현재’에 언제든지 틈입해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시도는 과연 효과적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