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향한 야망과 명분 없는 야망에 대한 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던 맥베스의 등을 떠밀며 그의 악행을 격려했던 맥베스의 부인, 즉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의 악행에 강한 동기를 부여해주고 함께 뒤처리를 하는 중요한 공범이면서도, 정작 셰익스피어의 원작희곡 [맥베스]에서는 그 중요성만큼 복합성과 입체성을 부여받지는 못하는 캐릭터다. 그런데 <레이디 맥베스>는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맥베스가 아닌 레이디 맥베스가 주인공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지녔던 웅장한 비극적 인물의 광휘, 야망과 양심 사이의 격렬한 고뇌와 갈등은 이 연극에서 오롯이 레이디 맥베스의 몫이 된다. 맥베스는 그저 주인공의 남편으로서 부인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심약한 기질과 성품의 공처가로, 유약함과 우유부단으로 한껏 희화화된 채 표현된다. 심지어 연회 장면에서는 원작보다 더 나아가 만인 앞에서 옷에다 실례를 하기까지 한다.

한태숙이 창작하고 연출한 연극 <레이디 맥베스>가 1998년에 초연되었을 당시 얼마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이 연극이 "셰익스피어에 대한 모독 및 훼손"이라는 평을 받았다면, 이것은 정말 고전 중의 고전에 손을 댄 것에 대한 불편함보다는 여성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를 압도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원작들이야말로 대체로 여성 캐릭터들이 남성 캐릭터에게 종속되거나 주변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거부감이 꼭 남성우월적인 구시대의 유물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에 대한 모독 및 훼손'이라는 비판 역시 구차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톰 스토퍼드가 [햄릿]의 두 조연 캐릭터를 등장시켜 무려 '코미디'로 재창작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가 에딘버러에서 초연된 게 벌써 1966년이 아닌가. 1998년은 톰 스토퍼드가 각본에도 참여한 영화 <세익스피어 인 러브>가 개봉된 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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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번외작, 사실 좋은 공연이긴 한데 기대에 비해 실망이 컸다.

지난 4월 13일 막을 내린 2008 <레이디 맥베스>는 예술의 전당이 개관 20주년을 맞으면서 기획한 '최고의 연극' 시리즈 제1호 작품이다. 초연된 지 10년, 2002년 이후 오랜만에 재공연된 이 극은 초연 때처럼 서주희가 다시 레이디 맥베스를 맡았고, 실험 오브제극의 성격이 더해졌다. 진흙과 밀가루를 적절히 이용해 레이디 맥베스의 부서지고 공중에 휘날리는 심리와 덩컨 왕이 암살당하는 장면을 매우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무대 위 삼면에 객석이 설치되어 관객들은 중앙무대를 내려다보게 되고, 배우들은 객석 사이 통로들까지 적절하게 무대의 일부로 이용함으로써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관객은 이 연극을 관람하는 관중이자 동시에 레이디 맥베스가 보는 거대한 환영의 일부로 극의 일부가 된다. 타악기 위주의 효과음, 그리고 스산한 분위기를 한껏 강화하는 무시무시한 여인의 구음 역시 이 연극의 완성도를 더욱 높인다.

그럼에도 이제 10년째인 만큼, 시대의 변화 앞에서 이 연극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들이 살짝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도 있는 장면들이 재해석되는 장면들은 여전히 매우 좋지만, 레이디 맥베스의 고통과 광기는 이제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세익스피어의 원래 대사와 새로 덧붙여진 전의-레이디 맥베스 사이의 대사가 그 밀도에 있어 도드라지게 차이가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에서 전의와 광대들의 존재가 실재가 아닌 환영이라는 사실이 폭로되고 전의가 직접 자신의 정체를 레이디 맥베스의 '검은 마음' 나아가 그녀의 '죄의식'으로 굳이 명시해 버리는 장면은, 앞에서 차근히 쌓아올린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최고조로 폭발시키지 못 하고 도리어 맥없이 주저앉혀 버린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관람한지라 배우들의 에너지가 많이 떨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레이디 맥베스의 내면의 갈등과 그 고통, 그리고 갈등이 지나치게 '피로감'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도 이 연극이 원래 지향하고자 했던 방향과 거리가 있는 듯하다. 오브제들이나 대사들은 피로감보다는 '격렬함'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레이디 맥베스가 지친 몸을 겨우 끌고 원래의 객석 위치에 마련된 길을 따라 걸어가는 엔딩 역시 그 의도와 근거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지나치게 노골적이다. 차라리 맬컴과 맥더프가 버냄의 숲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레이디 맥베스가 자살하기 직전의 긴박한 장면으로 마무리가 됐다면 어땠을까. 안 그래도 배우에게 육체적, 심리적으로 강도 높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이 연극이 '배우에게 더욱 가혹한' 극이 될까.

10년을 맞은 <레이디 맥베스>가 그간 쌓아온 명성에 충분히 어울리는 연극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과 그 10년간 사회가 너무 많이 변한 만큼, 그리고 이 극에 명성을 더해준 전통 - 여성의 입장에서 다시 쓰고 재해석하는 페미니즘 예술의 전통 - 이 이제 충분히 대중화된 만큼, 이 연극이 계속해서 명성을 이어가려면 다른 식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번 2008년의 공연은 이 작품이 어떤 기로에 서 있는지를 보다 명확히 밝혀주고 확인해 준 데에서 진짜 의미를 찾아야 할 듯싶다.




ps. 4/13 일, 3:00, 토월극장

ps2.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새 창으로 열기) 올라간 글

2008/04/23 01:22 2008/04/23 01:22

스포일러가 있어요. 아울러 아직 정리되지 않은 느낌들이라 좀 횡설수설입니다.





<추격자>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에는 많이들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전 서울의 강북, 그 중에서도 소위 '서민동네'라 할 수 있는 주택가들(아파트촌 말고요)의 그 특유의 미로같은 골목길들의 표정을 제대로 드러내는 영화를 이제서야 처음 본다며 감격했고, 김윤석의 연기에 감탄했으며, 하정우의 연기에 그저 놀라움을 느낄 뿐이었지만, 이 영화가 과연 좋은 영화인가, 그리고 이 감독에게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에는 계속 멈칫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의 폭력수위에 거부감을 느껴서는 아니에요. 전 사실 피가 튀거나 폭력 그 자체를 다루는 영화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보지도 못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공포를 느끼거나 구역질을 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퍽 담담하게 보고 나온 편이에요. 기자시사회 때 영화를 보고 왔으니 영화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꽤 일찌감치 영화를 본 셈인데, 영화 어떻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살인의 추억>만큼 좋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아주 잠시 멈칫거리다가 "영화 잘 나왔던데요"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멈칫거림의 정체가, 그리고 "영화 좋던데요"라고는 말을 하지 못한 이유가 과연 무얼까 생각했더랬지요.

솔직히 저는 이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잘 빠진 장르영화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보도자료에 맨 처음 써 있던 감독의 말, 그리고 이후 잡지 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본 감독의 말은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말이었는데, 전 그걸 보고 더 갸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경찰들, 우왕좌왕하면서 범인을 못 잡죠. 하지만 솔직히 김윤석이 수사를 가장 크게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영화에서 과연 시스템의 무능이, 그에 대한 분노가 적절하게 드러났는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저 대답은 감독이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의도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그리고 '급조된' 답이 아닐까란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서영희가 결국 죽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합니다. 저는... 뭐 글쎄요. 마지막에 김윤석과 하정우의 격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장면의 살인은 상당히 '양식적'으로 표현돼 있죠. 전 그녀가 죽는 게 크게 문제되진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까지 불쾌감을 느끼지도 않았지만, 이 장면에 대한 문제제기는, 실은 "대체 이 영화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영화일까"라는 저의 질문과 그리 다르지 않은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두 질문 모두, 실은 이 영화의 윤리성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쾌락을 위해서 이 영화가 살인의 스펙터클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는 게 과연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감독이 보여주는 대로 우리가 이렇게 소비를 해도 괜찮을 것일까, 에 대한.

꼭 유영철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도 이제 연쇄살인이 분명 사회적 이슈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하정우에게 특히 공포를 느꼈던 여성관객들의 경우, 사실 이 영화가 (벽화 그리는 내용만 뺀다면) 프로파일러들이 말하는 연쇄살인범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묘사했고, 그걸 또 하정우가 고스란히 재현해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바로 이 면에서 하정우에게 상당히 놀랐던 거거든요. 대다수에게 그저 '대상'으로만 비춰질 뿐인 대상을 정말로 '대상'으로 그려버리는 예가 이제껏 한국영화에선 그리 흔치 않았고(어떤 식으로든 관객의 '이해'를 요구하죠), 그런 걸 연기하는 배우는 더더욱 흔치 않았으니까요. 이제껏 영화 속에서 그려진 연쇄살인범들이 이 영화의 하정우처럼 그런 식으로 그려진 예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아요. 우리가 연쇄살인범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체로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들이죠. 이건 프로파일러들의 실제 분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이라는 설정은, 영화가 실은 연쇄살인이 아닌 도시사회의 계급을 그리는 비유이며, 그 장르의 영화가 성립시켜 놓은 일종의 공식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공식과 '장르문법의 활용'은, 영화를 일정정도 실제 현실과 거리가 있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거리감은, 예술, 특히 '픽션'에선 상당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저는 이 영화에서 소위 '리얼리티'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체 왜?

창작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겉의 이야기 안에 속의 이야기와 주제를 감추고 있죠. (이 '주제'라는 걸 꼭 '교훈'과 등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나아가 사실 주제라는 거 없어도 좋을 거라 생각해요. 하나의 장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형식을 실험해보고, 그 형식에 대항하기도 하고, 그 형식을 갖고 장난을 치는 것 역시 분명 예술의 범위일 테니까요. 그런데 <추격자>의 경우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겉의 번드르르한 이야기 속에 정작 주제라 할 만한 것, 속의 이야기는 없는 텅빈 공갈빵처럼 느껴져요. 그렇다면 이 영화가 형식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가? 다시 이어진 어떤 인터뷰에선 '탈장르 영화' 운운하고 있더군요. 전 그 탈장르 운운하는 얘기 역시 감독 자신도 대답 못 하는 어떤 의문에 또다시 끌어댄 임시방편격 대답이라는 의심이 들더군요.

한 친구와 이런 얘기를 하다가, 분명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사건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화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반론을 하더군요. 하지만... 이건 감독의 대답이 아닙니다. 만약 감독이 이렇게 대답했다면 전 곧바로 수긍해버렸을 거예요. 이건 현실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당하고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한 재현의 의지, 라는 너무나 명확한 작품의 주제와 이유를 포함하고 있는 답변이니 말이에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화라는 건 굳이 촬영 시 앵글과 컷과 편집뿐 아니라,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에서부터 '선택'의 예술이지 않던가요. 그리고 그건 영화뿐만이 아니고요. 우리 현실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거대한 덩어리처럼 서로 얽히고 또 얽혀 있는데, 그 중 어떤 한 부분을 꺼내서 어떤 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는 무수한 선택으로 이뤄져 있고요. 영화뿐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다는 그 모든 창작은 현실의 재구성이기도 합니다. 그 현실이 우리의 실제 리얼라이프이건 환상이건 꿈이건 이상이건 공포건요.

창작자는 그저 '그냥 그 얘기가 하고싶어서'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답 안에는 사실 그저 감독의 순수한 욕망 외에 상당히 많은 것들이 들어있기 마련이죠. 감독 자신이 언어로 세련되게 설명하지는 못할지라도, 분명 어떤 필요성과 이유를 가지고 있기에 욕망을 느낀 것이고, 이것은 창작자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속해있는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마련이며, 이는 곧 작품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고, 때때로 비평가들은 감독 자신조차 의식의 차원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일관성있는 필요성과 이유를 끄집어 내기도 하죠. (사실 그게 비평가들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추격자>는?

전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감독이 '그냥 이 얘기가 하고 싶었다'라던가, '굉장히 센, 사실적인 연쇄살인범 얘길 해보고 싶었다'라고 대답했다면 차라리 너무 쉽게 수긍해 버렸을지 몰라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식의 대답은 하고있지는 않지요. 어떻게든 사회적인, 좀 나쁘게 말하면 '있어보이는' 대답을 하고 있는데 그 대답들은 제게는 하나같이 상당히 공허하고, 아전인수격으로 끌어온 답변들처럼 여겨집니다. 제가 이 영화에 과연 윤리성이 있는가, 라고 느꼈던 것은, 영화가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마구 허물면서, 그 사실과 그가 유래할 파장 같은 것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고 있지 않는 듯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폭력을 스펙터클화해서 소비하는 방식에는 분명 '공식화'와 '장르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은 폭력을 소비함에 있어 현실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폭력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그 폭력을 '허구화한' 즉 '허구화된 폭력'을 즐기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고, 이것은 다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짓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나, 싶은데요. 영화 속에서 어마어마한 폭력을 구현해놨던 무수한 감독들의 무수한 영화들은 실은 그 폭력을 현실에서의 폭력과 상당히 구분하고 있고, 양식화 시켜놓고 있습니다. 샘 페킨파가 됐던 타란티노가 됐던, 영화 안에서 폭력 묘사가 강해질수록 이 폭력을 둘러싼 '영화'라는 경계, 현실에서 분리된 '허구'라는 경계가 그만큼 강해지는 거거든요. 하지만 <추격자>는 그렇지가 않죠. 저는 이 영화가 그 부분에 대해 아예 아무런 생각도 배려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든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겠다, 잘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모든 창작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민을 해야 하는 어떤 경계를 아무 생각없이 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사실 저도 제가 느끼는 이 덩어리진 느낌들을 어떻게 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속시원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길게 쓴 글이 제 생각을 제대로 전달을 한 건지 어쩐지도...  조금 더 정리가 됐을 때 쓰는 게 좋겠지만, 그러다가 오히려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냥 지나가 버리게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제 글에 마구 반론을 해서 제가 막혀있는 부분에 돌파구를 마련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뭐, 그렇다고요.

2008/04/10 03:48 2008/04/10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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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향연을 즐겨라!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샘 레이미 감독의 저예산 호러영화 <이블데드> 시리즈가 뮤지컬로 거듭났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2003년 초연되어 매진행렬을 기록했던 이 뮤지컬이 2006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 무대를 거쳐 드디어 한국에도 라이선스 뮤지컬로 상륙한 것.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들, 이른바 '무비컬'들이 근래에 점차 숫자가 늘어가고 있다고는 해도 원체 피 튀기는 좀비 스플래터 영화가 원작이었던 만큼 뮤지컬 <이블데드>가 끄는 호기심과 관심은 일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국내 버전 <이블데드> 시리즈가 다시 한 번 눈길을 모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본토 공연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무대 바로 앞에 스플래터 존을 마련해서, 극 중 좀비로 변한 배우들이 스플래터 존 관객석으로 난입해 관객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며 관객의 옷에 피를 뿌리고 발라준다. 당초 극단측은 한국적 정서에 맞지 않을 것을 우려해 스플래터 존의 좌석을 적게 배정했지만 이 좌석은 3차에 걸친 티켓오픈 때마다 오픈과 동시에 매진될 정도로 치열한 예매 경쟁이 벌어져 현재 마지막 공연날까지 모두 매진된 상태다.

뮤지컬 <이블 데드>가 눈길을 모은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배우들 때문. 소극장 공연임에도 현재 국내 뮤지컬계에서 티켓파워가 가장 높은 배우에 속하는 류정한과 조정석이 주인공 애쉬 역에 나란히 더블 캐스팅된 것. 특히 <오페라의 유령>부터 시작해 국내에 굵직한 라이선스 대작 뮤지컬들의 주연을 도맡아온 류정한이 이런 작은 공연, 특히 코믹극의 주연으로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캐스팅 초기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애쉬뿐만 아니라 셸리와 애니의 1인 2역을 하고 있는 백민정, 셰릴 역의 최혁주, 정상훈과 더블 캐스팅인 스콧 역의 김재만, 제이크 역의 양준모 역시 다른 뮤지컬들에서 주연급으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이다. 더블 캐스트 중 기자가 관람했던 조정석 - 김재만의 공연의 경우, 역시 차세대 뮤지컬 스타답게 조정석은 시종일관 발랄한 연기 가운데에서도 탁월한 가창력을 보여주며, 가장 먼저 좀비가 되어 계속 애쉬를 좀비의 세계로 회유하는 셰릴 역의 최혁주는 작은 체구가 무색하게 무대 전체를 장악하는 놀라운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1인 2역을 하고 있는 백민정 역시 백치미의 금발미인 셸리와 지적이지만 허영기도 엿보이는 검은머리 미녀 애니 역을 완전히 상반되게 연기하고 있어 사전에 1인 2역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관객들은 이것을 공연 마지막이 돼서야 알아차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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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 역의 카리스마 최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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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 역으로 열연 중인 류정한과 좀비들.

뮤지컬 <이블데드>는 영화 <이블데드> 1, 2편을 적절히 섞으면서도 1편이 코미디보다는 호러에 치중했던 것과 달리 뮤지컬은 처음부터 끝까지 코믹한 웃음을 선사한다. 라이선스 공연들이 의례 보이는 번역투의 어색한 가사는 다른 뮤지컬들보다는 그래도 적은 편. 오히려 'What the Fuck Was That' 같은 곡은 우리말로 '조낸 황당해'로 옮겨졌을 만큼 비속어도 섞여 있다. B급 정서를 전면에 표방한 만큼 비속어뿐 아니라 인터넷식 용어와 성적 농담도 다수 등장하지만 그 수준은 '귀엽게' 마무리되는 편. 배우들의 에너지도 매우 발랄하고 생기가 넘친다. 대학생 다섯 명이 산 속 오두막으로 여행을 가는 설정인 만큼, 배우들의 젊은 열기가 무대를 꽉 채우고 있고, 반복 관람하고 있는 배우팬 관객들의 열띤 호응도 극의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 데에 일조한다. 스플래터 존 좌석의 관객에게 일부러 나눠주는 우비 대신 일부러 흰옷을 입고 와서 배우들이 뿌리는 피를 기꺼이, 그리고 반복적으로 하사(!)받는 관객의 수도 많고, 이들은 매 노래마다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보내며 흥겨운 분위기를 이끈다. 왼손을 잘라낸 애쉬가 전기톱을 비로소 손에 장착하는 장면은 객석에서 터지는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장면이다. 배우들 역시 A열 관객석의 일부부터 스플래터 존과 R석 맨 앞줄 사이의 통로까지 적절히 무대의 일부로 활용해 더욱 관객들의 열띤 반응을 이끌어낸다. 인터미션 15분을 포함해 총 2시간의 공연 시간 동안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다. 공연 마지막엔 배우들이 각자 등장해 다른 배우의 곡들을 부르고 장기를 보여주는 보너스도 추가된다.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랙에서 6월 15일까지 공연될 예정.



ps.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라간 글

2008/04/07 18:21 2008/04/07 18:21
공수창 | GP 506
from Eyes Wide Open 2008/04/0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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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아버지와 죽음의 위기에 몰린 아이들.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경계초소인 GP 506에 전 소대 몰살사건이 벌어진다. 진상을 조사할 노수사관(천호진)을 위시해 수색대가 들어가서 목격한 것은 내무반 내에 널부러진 피투성이 시체들과,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광기의 눈을 번득이며 도끼를 들고있는 강진원 상병(이영훈)의 모습. 노수사관은 곧 수사를 시작하고 총 20구여야 할 시체가 19구밖에 되지 않음을 알아채는데, 수색대원들은 뜻밖에 패닉 상태에 빠진 채 생존해있는 GP장 유중위(조현재)를 발견한다. 계속해서 초소 밖을 나가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유중위는 도무지 입을 열 생각을 안 하고, 용의자인 강상병은 의식불명 상태다. 폭우 때문에 길이 막혀 수색대원들마저 경계초소 안에 고립된 와중 이들은 괴이한 사건들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군대 안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미스터리 형식으로 시작해 호러영화의 문법을 차용한다는 점뿐 아니라, 영화 안에서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영화가 위치하고 있는 외적 맥락 때문에 결국 사회적, 정치적 의미로 해석되는 메시지를 담고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GP 506>은 <알포인트>보다 호러의 외양은 더 많이 내되(피와 시체들의 향연!) 호러로서의 구성은 느슨하며, 그렇다고 미스터리 스릴러로서 꽉 짜인 플롯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대신 이 영화는 '군대'를 둘러싼 보다 비극적인 정조를 강화한다.

대체로 평가가 높았던 <알포인트>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이 있는데, <GP 506>을 통해 조금 더 확인한 부분이 있다면 공수창 감독이 호러장르의 문법을 사용하는 방식은 호러 본연의 코드를 익숙하게 사용한다기보다 저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위한 비유의 차원에서 호러의 공식을 이식해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호러영화들이 그 어떤 다른 장르의 영화들보다 당대 대중들의 무의식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통찰해볼 수 있는 텍스트를 제공하는 게 사실이지만, 장르영화 안에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사회적 의미를 담는 것과 특정한 사회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장르의 공식을 가져가는 건 영화제작의 방향이 정반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포인트> 역시 분명 후자였음에도 미스터리 - 호러의 측면에서 구조가 탄탄했기에 전자로 오인되었다. 그러나 <GP 506>은 명백히 후자이고, 감독은 굳이 호러의 장르문법에 그렇게 얽매여있지도 않다. 호러영화의 팬들에서 이 영화에 대해 악평이 나오는 건 당연한 것이, 감독이 '그 설정'을 사용하는 방식은 이야기를 위해 억지로 끌어온 듯한, 낭비되고 있는 듯한 측면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다른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굳이 호러영화의 틀에서 이 영화를 형편없다고 평하는 것 역시 핀트가 살짝 어긋났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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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호진 님이 주인공으로 나오셨어!!!! 꺄악!!!!

굳이 GP 506 초소가 아니더라도, '군대'라는 것이 한창 호르몬 왕성하고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야 할 청춘들을 세상과 고립시킨 채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이는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군대라는 집단의 그 폐쇄성과 배타성은 굳이 GP 506 초소가 아니더라도 외박과 휴가가 자주 보장되는 부대라 해도 지워지지 않는 특성이다. 이것을 좀더 강조하고자 선택된 공간이 GP 506이라는 초소인 셈인데, 이곳에서 비록 군 장성의 아들로 어릴 적부터 군인의 정서로 자라왔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린 청춘에 불과한 유중위의 손에 다른 20명의 운명이 맡겨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인지, 어른들이 지고 어른들이 해결해야 할 짐이 어린 청년의 어깨에 얼마나 과도한 무게로 억지로 지어져 있는 것인지가 영화 속에 명확히 드러난다. 아울러 이 모든 사태를 결국 자기희생이라는 방식을 통해 해결하려 한 강진원 상병의 해법 역시 아이가 지고가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자 너무나 안쓰러운 결단이다. 잘못된 역사를 끊어내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기에 강진원 상병은 너무 젊고 앳되며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훨씬 더 많이 남아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사건을 수사하러 온 노수사관이 결국 그런 식의 엔딩을 내는 것을, 나는 어른 세대가 자신들 세대에서 발생한 비극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읽었다. 그가 이미 죽어 나자빠진 아이들, 지금은 살아있으나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할 아이들, 그리고 그 무거운 짐을 혼자 감당하려 한 강진원 상병에게 느꼈을 슬픔과 고통과 죄책감이 어떤 것이었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울러 기자시사 후 간담회에서 천호진 씨가 '웃음소리'가 나는 객석을 향해 왜 그리 날카롭게 반응했는지도.) 지나간 역사에 대해 자기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책임을 지려는 어른이 등장하는 흔치 않은 한국영화가 또 한 편 추가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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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긴 하지만 어딘가 좀 뻣뻣한.

그럼에도 이 영화의 엔딩은 석연치 않은 찜찜한 뒷맛을 남긴다. 괴질은 손쉽게 전염되고 이곳은 외따로 고립된 곳이지만 과연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병의 전염만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 책임을 지려는 어른이 등장한 것은 너무나 소중하지만,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과연 그런 '자폭'만이 유일한 해결방식이었는가에 대해선 의문의 소지가 있다. 내게는 이 엔딩이 한편으로는 책임을 지는 것인 반면, 또 한편으로는 지독한 자포자기와 패배주의의 방식으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 다 죽어버리자"라는 건 오히려 가장 손쉬운 해법이기도 하지 않는가. 강진원의 입장에선 젊은 혈기에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게 어쩌면 당연했겠지만, 노수사관의 입장에서 그런 결론을 내리는 건 군당국과 고위 장성들, 나아가 그들이 속한 이 사회 시스템 전체에 대한 처절한 불신이 먼저 읽히고, 어쩌면 바깥세상에서 괴질의 연구에 뒤따른 치료의 기회가 있을 수도 있었던 다른 아이들에 대해 애초부터 기회를 차단하며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읽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그토록 필사적으로 굴었던 의무병이나 다른 수색대원들의 행동들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기적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할 수 없고, 당해서도 안 된다.

또한 이 영화가 요구하는 '어른이 책임을 지고 과거의, 역사의 과오를 끊어내야 한다'는 명제의 그 '어른'이, 공수창 감독이 속한 세대가 아닌 그 윗세대라는 점도 찜찜한 맛을 더한다. 이 사회에서 일반적인 386 세대들이 전형적으로 보이는 태도 중 하나가 자신의 윗세대에겐 책임을 요구하고 불평하며 아랫세대에겐 희생을 강요하는 것 아니었던가. 바로 이 한계가, 영화를 보고 한편으로 젊은 아이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가는 것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눈물의 뒷맛이 그닥 개운치 않았던 이유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고 있는 에너지, 그리고 이 영화가 어쨌든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억지로 청춘시기에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아이들의 비극의 묘사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홀대받거나 함부로 폄훼당할 만한 영화는 분명 아니다. 전작인 <알포인트>에서보다 더 직설적이어서 재미없어진 면과 장르영화의 공식이 잘못 사용된 면이 분명 있지만, <GP 506>은 <알포인트>보다 전반적으로 세련되었으며 또 한편으로 상업영화의 틀 속에서 사람들이 입밖에 내기 꺼려하는 문제를 과감하게 지적하고 비판한 용기, 나아가 이를 '그림'의 측면에서 꽤 인상적으로 펼쳐놓은 미학적 성취가 분명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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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않아>에 이어 메이저 영화로도 진출한 이영훈.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

2008/04/06 13:25 2008/04/06 1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