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16년이 지났다.

이것이 매우 감상적인 마스터베이션, 혹은 감상의 소비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지금 광장에 서야 시민이라는 누군가의 호소력 강한 설득을 보고 들으면서도, '노동자이자 시민'이 아닌 '노동자의 계급성이 거세된 시민'으로서 그 광장에 서고 싶지는 않다고 여전히 고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아프다.

다시는 시청광장서 눈물을 흘리지도,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던 다짐, 그 약속. 16년간 참으로 많은 이들이 참으로 꾸준히도 피눈물을 흘리고 경찰의 곤봉에 맞고 방패에 찍혀왔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오늘, 이제는 거리에 나올 일이 한번도 없었을, 저 16년간 방패에 찍히고 경찰의 곤봉에 맞는 사람을 과격하고 정신나간 사람들이라 생각했을 사람들마저 다시 물대포에 쓰러지고 군화발에 짓밟히고 있다.

이 나라 이제 그만 뜨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뜰 돈도 여유도 없으니 결국 죽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든다. 결국 빚을 지거나 남에게 사기를 쳐서라도 돈을 모아 이 나라를 떠야 하는 걸까, 아니면 신경정신과라도 찾아가 하다못해 플라시보 약이라도 처방받아야 하는 걸까. 살아남으려면, 차라리 죽고싶다는 생각을 떨치려면 대체 어째야 할까. 암만, 우울증은 사회적 질병이 맞다.


2008/06/30 12:05 2008/06/3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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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직접 영웅되다.

<아이언맨>이 처음 기자시사회를 갖고나서 프레시안무비에서 최광희 선배(여기(새 창으로 열기), 혹은 여기(새 창으로 열기))는 “정치적으론 별로, 블록버스터로서는 재미있다”라고 평했는데, 어째 나는 정반대였다. “정치적으로 진일보, 블록버스터로는 별로.” (세 번째 보러 갔을 땐 힘들더라, 결국 30분 가량 잤다.) 이후 나오는 대부분의 평에서도 아이언맨이 각성하는 척하지만 결국 미국식의 위선적인 영웅이라며 비판하는 글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 이건 원작이 있을 뿐 아니라, ‘블록버스터’다. 대체 블록버스터, 그것도 원작이 있는 블록버스터에서 신랄하고 예민한 정치적 감성을 기대하는 건 좀 과하지 않나? 게다가 실은 이 영화, 굉장히 신랄하고 예민한 정치적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게 한국 관객들이 바라는 측면에선 좀더 ‘은근하게’ 표현돼 있을 뿐.

물론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자신을 도와줬던 잉센의 고향 굴미라가 바로 자신이 개발한 무기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 걸 보고 분개하지만 그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라곤 자신이 개발한 미사일인 제리코를 폭파시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오버다이어(제프 브리지스)가 지적한 대로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이 사람이 하고 다니는 건 정말 영웅적 각성이라기보다 어째 ‘영웅놀이’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자신이 만든 무기들을 제거하고 다니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얘가 헛스러운 영웅놀이를 한다기보다 정말 뭔가에 책임지려는 태도로 보이지 않나? 게다가 아이언 맨 수트를 입은 토니 스타크는 그 누구도 아닌 미국 공군에 의해 쫓기고 공격을 당하며 적으로 규정된다. 오버다이어와 토니 스타크가 대결한 다음 토니 스타크의 군수공장 건물 지붕이 날아가 버리기까지 한다. 최종적으로 폭파되는 건 결국 차례대로 토니 스타크가 만든 무기들, 그리고 그 원자로와 건물이다. 이건 매우 상징적인 파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미국 군수산업에 대해 이렇게까지 공격을 들이대는 영화가 과연 있었던가. 더더욱 중요한 것. 이 영화가 줄곧 취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빈정대는 태도. 이게 정말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걸까?

토니 스타크의 외모가 참 비열하고 뻔뻔한 특유의 그 악당 수염을 고수하는 것도 그렇고(이는 심지어 수트를 입고 출동하는 토니의 얼굴을 극클로즈업하면서 함께 확대된다), 심지어 토니의 컴퓨터들마저 토니에 대해 사정없이 사카스틱한 비아냥을 날려댄다(예컨대 수트에 정열적인 빨간색을 칠하라고 하자 “주인님의 ‘은둔자적’ 성격을 잘 반영해 드리죠.”라며 대꾸하는 등.). 폼잡고 싸우던 토니 스타크의 ‘가오가 무너지는’ 유머 장면은 또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단순히 토니 스타크를 놀려먹는 것뿐 아니라, 영화 전체가 키들거리는 사카스틱한 농담의 자세를 계속 유지하면서 스스로 자조하는 듯한 유머가 무수히 많이 깔려있다. 나는 이것이, 블록버스터로서 정치적 감각이란 걸 대단히 제한된 형태로 가질 수밖에 없는 이 영화가 스스로의 처지와 한계에 대해 빈정거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이 영화 스스로가, 그런 미국식 위선적인 영웅심 자체를 비아냥대고 있다는 얘기다. 혹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힘과 능력과 재력이 있긴 있는데 토니 스타크 같은 막돼먹은(?) 인간이라며 자조하고 있거나. 이 정도까지 간다면, 이 영화의 정치적 감수성이란 실은 대단히 예민하고 신랄하며 유머감각까지 갖춘 것으로 인정해 줘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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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뻔뻔하고 웃긴 남자, 매력적이다.

사실 이 영화는 토니 스타크의 영웅적인 행적과 그의 놀라운 아이언 맨의 수트와 같은 전형적인 슈퍼히어로의 활동상보다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호감과 관심으로 지탱되는 영화다. 일단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당대 최고의 첨단 기술로 당대 최고의 무기를 만들어내 엄청난 수의 인명을 살상하고 이것을 직접 개발한 것이 토니 스타크이건 말건, 우리는 토니 스타크에게 직접 죄를 묻기가 힘들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그가 경영자가 아니라 그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과학자이자 엔지니어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가 책임감있고 성숙한 성인 남자라기보다 몸은 어른인지 몰라도 정신세계와 하는 짓은 딱 '철딱서니 없는 어린 남자애'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이런 토니 스타크의 캐릭터를 그려낼 배우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캐스팅한 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는데, 그는 매우 놀라운 균형 감각으로 토니 스타크를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자조하는 한편, 그럼에도 (주인공인 만큼) 엄청난 매력을 가진 인물로 그려내는 데에 성공한다. 나이도 있고 돈도 많으며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 성인남자의 매력과, 그럼에도 부잣집 도련님 출신으로 어쩔 수 없이 철없는 ‘애’의 모습을 가진 남자의 매력을 복합적으로 매우 잘 살려냈다.

먼저 이 영화는 맨하탄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오펜하이머와 그에 관한 세간의 논쟁을 노골적으로 가져오면서 이를 슬쩍 비틀어 토니와 그의 아버지에게 투사시킨다. 과연 과학자는 혹은 엔지니어의 윤리는 지금 눈앞의 신기술이 전세계에 미치는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정치, 외교적) 영향들을 고려하는 것까지 포함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는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던 맨해튼 프로젝트 당시 참가 제안을 받았던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였으며 종전 후 보다 폭넓은 사람들 사이에서 격렬하게 논쟁됐던 주제 중 하나다.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은 이들 과학자들에게도 윤리와 책임을 물으며 비판하지만, 세간의 우리들은 대체로 실험실 안에만 갇혀 연구만 일삼는 '순진한 천재들'이 정치적으로 무지할 수 있고 오히려 그들이 이용당한 면이 크다며 손쉽게 이해와 용서를 하는 편이다. 이는 '순진한 천재'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이 종종 천재들이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에서는 오히려 바보처럼 행동했다는 여러 우스개 에피소드들과 함께 퍼져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토니 스타크의 '천진난만하고 철없는 어린애다운' 모습도 바로 이런 환상에 기대고 있는 부분이 크다. 안 씻고 외모에 전혀 신경 안 쓰고 하는 것보다야 여자들과 노는 걸 좋아하는 게 훨씬 이해받기 쉽고 호감으로 전화되기 쉬우니까. 굴미라 마을을 공격한 용병들에게 무기를 제공해줬다는 오버다이어에게 쫓아가 '무력한 표정으로' 항의하는 토니 스타크의 모습이 바로 이런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결정적인 알리바이 장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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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 전 여자보다도 뚝딱거리는 조립놀이가 더 좋답니다.

놀기 좋아하는 어린애스러운 면이 있는 남자는 보통 바람둥이 남자를 매력적인 존재로 그리는 데에 가장 자주 동원되는 수법이다. 사실, 그렇게 천진난만한 어린애이기 때문에 '어른의 관계'에 대한 기대 없이 (여자들도 자발적으로 동의하며) 여러 여자를 전전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여자들에게 매력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뭐든 하나씩 흘리고 다치고 하는 저 남자를 챙겨주고 싶다는 식의 모성본능 포함). 첫 시작부터 영화는 토니 스타크를 여자와 술과 파티를 좋아하는 한량으로 그려내는데, 사실 토니 스타크가 여자보다도 좋아하는 건 ‘조립 놀이’이다. 다만 그가 워낙 돈이 많고 기계천재다 보니 뚝딱뚝딱 갖고 노는 게 첨단기술을 응용한 무기가 되는 것일 뿐. 사실 그가 갖춰놓은 지하의 ‘작업실’은 어릴 적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무선라디오를 만든 경험이 있는 거의 모든 남자아이들에겐 궁극의 로망일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토니 스타크의 '철없는 애스러운' 성격을 보여주는 정점이다. 보통의 다른 슈퍼히어로와 달리 자신이 바로 아이언맨임을 밝히는 이 영화의 마지막은, 사실 "나 이렇게 대단해, 봐줘 봐줘" 하는 어린애들의 과시욕과 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것이 토니 스타크의 매력이며, <아이언 맨>의 매력의 98%는 바로 토니 스타크라는 캐릭터의 매력이고, 이런 캐릭터를 '진상'이 아닌 '매력적인 남주'로 승화시킨 건 결국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이라 하겠다. 사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솔직함은 그 결과가 설사 어처구니 없는 것이라 해도 일단 호감을 가지게 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재력과 매력을 능력을 갖춘 남자라면, 웬만한 여자들의 눈에는 그런 애스러운 철딱서니없음도 또 하나의 매력이자 다른 매력들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곤 하니까. 하지만 <인크레더블 헐크> 말미에 잠깐 등장하는 토니 스타크는 <아이언 맨>의 토니 스타크와 달리 어딘가 악당 포스가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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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고철덩이로 둘러싸인 이런 랩에서 이런 옷을 입고 있어도 섹시하다.

나는 이 영화가 블록버스터로서 별로라고 했는데, 이건 보통 슈퍼히어로를 다룬 블록버스터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거는 기대와, 이 영화가 방점을 찍고 있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무슨무슨 맨 시리즈라 하면 당연하게도 화려한 액션과 활약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그 이전, 즉 아이언맨이 탄생하는 과정, 특히 그 수트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아이언맨의 활약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영화 전체가 다음 편을 위한 예고편 정도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테렌스 하워드나 기네스 펠트로 같은 배우들을 캐스팅해놓고도 그들이 연기하는 제임스 로드나 페퍼 포츠를 그런 식의 철저히 들러리로만 설정한 것도 이 영화가 실은 속편을 위한 거대한 떡밥에 불과하다는 인상과 실망감을 느끼는 것도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다. 다만 이 영화가 철저히 '아이언맨의 탄생'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긍해 버리고 나면, 뚝딱거리며 아이언맨 수트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거기에 토니 스타크라는 좀 철없으면서도 매력적인 왕자님이 보여주는 캐릭터 유머에서 잔재미들을 꽤 찾을 수 있고, 고백하자면 그 잔재미들은 꽤 흥미롭고 재미있다. 다만 속편을 너무 기대하게 만드는 게 문제라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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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력적인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ps. 4월 14일 월요일 2시, 용산 CGV, 기자시사 / 4월 30일 수요일 8:10pm, 대한극장 / 5월 9일 금요일 6:45pm, 대한극장

ps2. 각종 마약사건 때문에 재능에 비해 너무 묻혀있던 다우니 씨, 이제 제발 활활 날개를 펴삼.

ps3. 사실 다우니는 이런 블록버스터 주인공도 잘 하지만, 예컨대 <구름 저편에>에서 그 맑은 눈을 깜박이며 소녀에게 대쉬하던 역 같은 섬세한 연기가 정말 짱... 게다가 난 이 사람 목소리도, 발음도 너무 좋아.

2008/06/30 11:53 2008/06/30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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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튼의 헐크, 잘 어울린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이안 감독의 2003년작 <헐크>의 속편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오프닝 크레딧이 흐를 동안 2003년작 <헐크>의 줄거리를 매우 빠른 컷들을 통해 제시하지만, 이 컷들에서 보이는 브루스 배너와 베티 로스는 에릭 바나와 제니퍼 코넬리가 아닌 에드워드 노튼과 리브 타일러다. 오프닝 크레딧이 끝나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공간적 배경은 <헐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가 머물고 있던 곳, 브라질이지만 이후 영화의 성격은 <헐크>와 다른 길을 간다. 분명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가 가지 않았던 길을 향해 가는 블록버스터이다. 그러나 <헐크>가 이전에 쌓아놓았던 성과를 굳이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않은 채 심지어 일정 부분을 계승하기까지 한다.

2003년 개봉했을 당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다소 유보적인 평가를 받았고 일각에서는 저주에 가까운 혹평을 들었던 <헐크>에 대한 논의를 되짚어보면, 블록버스터라는 장르(블록버스터를 ‘장르’라 부를 수 있다면)가 새삼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확인할 수 있다. 저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말은 참 복잡한 여러 가지 뜻을 전제하고 있다. 다른 지점에서 성취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진지한 평론가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블록버스터에 대해 내용이 없다는 둥 플롯이 단순하다는 둥 의례히 회의적인 태도를 갖기 마련한 사람들도 정작 복잡하고 진지한 내용이 담긴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다른 기준을 갖다댄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는 다소 단순하고 쉬우며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과연 당시 <헐크>에 대한 평을 보면 미국사회에 대한 은유라는 둥, 고전적인 희랍비극의 틀을 가져온다는 등의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블록버스터들, 특히 슈퍼히어로나 안티히어로의 이야기 중 신화적 요소가 없는 작품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체로 모든 블록버스터들은 평범한 / 유약하던 주인공이 힘을 갖게 되거나 뜻밖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권위있는’ 악당과 싸우게 되는데, 저 권위있는 악당이란 곧 ‘아버지 세대’ 혹은 기득권의 비유가 아니던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외디푸스의 신화는 변용되기 마련이고, <헐크>는 그걸 좀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뿐이다. 브루스 배너의 적은 자신의 아버지(‘매드 사이언티스트’ 타입)일 뿐만 아니라 베티의 아버지, 즉 썬더볼트 장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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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섬세하고 감성적인 브루스 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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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지적이고 불쌍한 브루스 배너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극단적 인격이라는 측면에서 보통 ‘지킬과 하이드’ 모티브로 주로 해석되는 헐크의 이야기에, 이안이 강력하게 가미한 것은 ‘미녀와 야수’ 모티브이며, 소위 ‘문명화’라는 과정을 통해 야수성을 억압 혹은 거세당한 현대 남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네바다 사막에서 탱크와 장갑차와 헬기를 장난감처럼 때려부수던 헐크는 베티 로스에게 향하는 먼 길을 돌아오면서 그녀 앞에서 비로소 진정을 찾고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 이안 감독은 DVD 코멘터리를 통해 “누가 뭐래도 이 영화는 사랑 영화죠.”라며 능청을 떤다. 이것이 비극적인 것은 가정으로의 귀환 본능, 혹은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를 브루스 배너가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그는 그녀와(혹은 그 누구와도) 결코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는, 레이건 시대의 강력하고 권위적인 우파 아버지 세대로부터 억압당한 클린턴 시대의 유약한 그러나 더 능력있는 리버럴한 젊은 세대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이안 감독은 그가 헐리웃에서 영화를 만들 때 견지하는 예의 그 태도, 즉 ‘카메라를 든 인류학자’로서 꼼꼼하게 인간과 사회의 본성을 통찰하고 기록하는 태도를 이 영화에서도 드러낸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실은 철저하게 미국 안으로 들어갔던 다른 블록버스터와 달리 이 영화가 오히려 미국 바깥에서 마치 지구인을 관찰하는 화성인 과학자처럼 코믹스 문화와 슈퍼히어로를 대하는 미국 대중들의 관심과 호감을 문화인류학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는 태도가 헐크라는 안티 히어로와 충돌하는 지점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충돌이 과연 ‘서로 융합되지 못한 채 따로 노는’ 어색함일까?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매우 ‘생산적인 균열’인 것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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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한 번 하지 않는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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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하는 커플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를 계승하는 지점은 역시 미녀와 야수 모티브를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줬다는 것, 그래서 심지어 <킹콩>을 닮은 장면마저 등장한다는 점이다. 억눌린 현대 남성의 폭발이라는 측면은 오히려 <헐크>의 근육질 에릭 바나보다 <인크레더블 헐크>의 비쩍 마른 에드워드 노튼에게 더 잘 어울린다. 안 그래도 얼굴이 날카롭고 턱이 뾰족해 어딘가 불쌍해 보이는 노튼이다. 노튼이 각본을 매만진 <인크레더블 헐크>는 노튼의 이 왜소한 몸매를 이용한 유머가 여러 번 등장한다.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 뒤 늘어나고 찢어진 바지 허리춤을 붙잡고 다 찢어진 엉덩이와 허벅지를 노출하며 그토록 불쌍한 거지꼴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장면은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브루스가 헐크가 됐을 때 벌이는 파괴는 <헐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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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크와 에밀 블론스키(어보미네이션), 두 번째 대결 (<인크레더블 헐크>)

나는 이안의 <헐크>를 매우 좋아하지만(나중에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DVD를 비싼 값을 주고 샀을 정도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 식의 장중하고 품위있는 이야기의 무게를 뺀 대신 <헐크>에서 약했던 쾌감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유머와 타격감이다. 우리가 ‘헐크’라는 녹색괴물을 둘러싸고 종종 킬킬대며 주고받는 농담이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아주 유효적절하게 들어가 있다. 아무리 해도 찢어지지 않는 헐크의 바지는 <헐크>에서도 농담거리이긴 했지만,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좀더 노골적인 농담으로 여러 번 드러난다. 브루스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허리가 늘어나는 바지를 선호하며 심지어 뚱뚱한 아주머니의 널찍한 엉덩이에 바지를 대보기까지 한다. 고무줄 몬뻬 ‘보라색’ 바지에 대한 농담은 또 어떤가. 심지어 헐크를 둘러싸고 차마 대놓고 하지 못했던 성적인 농담마저도 영화에서 유머로 등장한다. 그토록 사랑하지만 베티와 브루스가 섹스할 수 없는 이유를 대놓고 묘사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게다가 타격감. 헐크가 어보미네이션과 싸우는 장면뿐만이 아니라, 그가 경찰차를 둘러 찢어 무기처럼 사용한달지 하는 장면에서 주는 타격감과 파괴감의 쾌감이 아주 크다. 건물을 부수고 도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장면들이 <헐크>에선 다소 만화처럼 가벼운 무게감으로 묘사된 반면,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육중한 무게감과 둔한 타격감을 자랑하며 파괴의 쾌감이 더 크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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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면 역시 '그림'스럽다. (이안의 <헐크>)

무엇보다도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보다 뒤에 나왔기에 유리한 점은 바로 그 사이에도 눈부시게 발전한 CG의 덕을 톡톡히 봤다는 것.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는 브루스 배너가 헐크로 변하는 그 과정, 혹은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오는 과정의 신체적 변화를 바로 눈앞에서 재현시켜 준다. 이는 스턴스 박사를 찾아간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고소영, 정우성이 주연했던 <구미호>에서 “앞으로 CG 기술이 발전하면 묘사될 수 있는 장면”이라 상상되었던 바로 그 몰핑 기법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근육 하나하나, 힘줄 하나하나가 변화는 그 과정을 보는 건 매우 경이롭다. 대낮의 컬버대학 교정에서 장갑차와 헐크가 싸우는 장면은 어떤가. 비록 피부 표현에서 여전히 CG 티가 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빛의 방향과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명암의 변화가 아주 자신만만하게 눈앞에 표현된다. 정점은 바로 <킹콩>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밤에 번개가 치고 비가 퍼붓는 장면에서의 헐크가 묘사된 것이다. 비록 여기에서 킹콩의 피부는 시종일관 회색으로 표현되어 역시 그림같다는 느낌을 여전히 주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피부결이나 번개가 칠 때마다 근육질이 움직이는 방향이 매우 세심하게 표현된다.

역시 이야기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인크레더블 헐크>보다 <헐크>에서 좀더 은근하고 깊은 재미를 느끼는 게 사실이지만, <인크레더블 헐크>가 주는 말초적인 감각의 쾌락 역시 쉽게 폄하하지 못할 요소이다. <헐크>와는 다른 노튼 식의 유머 역시 점수를 높게 줄 수 있는 부분. 노튼 옵빠가 블록버스터에서 낭비될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브루스 배너에 이 정도의 멋진 숨결과 개성을 불어넣은 건 역시 노튼이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나는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 역시 좋아하지만, 역시 노튼의 브루스 배너가 한 수 위였음은 부정할 수가 없겠다. 문제는 역시 연출인 게지. (이안 만세!)


ps. 6월 4일 수요일 2:00pm, 용산 CGV,  기자시사 / 6월 25일 수요일 6:10pm, 대한극장

ps2. 마지막 장면에서 녹색눈으로 씨익 웃는 노튼 오빠의 압도적인 표정. 꺄악~!

ps3. 팀 로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아저씨가 서른 아홉이란 건 좀 사기...

ps4. 컬버대학 교정에서 싸울 때 헬기에서 박격포를 쏘자 헐크가 자신의 온몸으로 베티를 화염으로부터 막아내는 장면, 이 장면은 두 번째 볼 때도 참 짠하면서 애절하더라.

ps5. 대놓고 레슬링 흉내라니. "Hulk Smashhhhhhh~!!"에서는 정말 눈앞에 만화 말풍선이 튀어나오는 듯했다. 게다가 역시 헐크는 미녀 앞에서 무지하고 순진한 바보 머슬이었... (귀여워!!)

ps5. 마지막에 깜짝 등장하는 토니 스타크는 어쩐지 <아이언맨> 때보다 더 사악한 악당으로 보인다.

2008/06/28 23:40 2008/06/28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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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눈부신 연기를 보여준다.

단란하고 화목해보이던 중산층 가정이 낯선 이방인 한 명의 출현으로 산산이 깨져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들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대체로 그 이방인은 누구나 혹할 만큼 치명적인 매력을 뿜기 마련이고, 중산층 가정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적 이데올로기와 억압을 청교도적 가치로 은폐하는 가장 작은 규모의 장이기 때문이다. 가정의 균열은 낯선 이방인의 등장으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본질적으로 내재돼 있던 것이 작은 계기를 만나 폭발하는 것일 뿐. 그 과정에서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가 신봉하는 가치들이 실은 얼마나 추악한 위선과 협잡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폭로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더 킹> 역시 바로 그런 영화에 속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낯선 이방인에 의한 가정의 파괴'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다루는 다른 영화와 가장 다른 점은 이 영화가 파괴자의 시선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해병대에서 갓 전역한 젊은 청년이 생면부지의 친부를 찾아 텍사스 주에 온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목사로 신앙심 돈독한 아내와 딸, 아들을 거느린 가장이 돼있는 아버지로부터 외면과 냉대를 받은 이 청년, 그 순한 눈에 잔뜩 서러운 상처를 담은 채 아버지로부터 등을 돌린다. 하지만 그는 마을을 떠나는 대신, 아버지의 딸을 유혹하고, 아들을 죽이며, 마침내 아버지의 아들 자리를 되찾는다. 아버지를 향한 이 지독한 갈구의 과정에서 엘비스에게 자신의 이복동생들이 받는 지독한 상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모든 비밀이 폭로되는데도, 마침내 공식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아들'의 호칭을 얻게 된 그의 얼굴은 천진난만한 기쁨으로 빛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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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으로 건국되고 유지되어온 미국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이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건 일차적으로 엘비스의 아버지가 새로 일구었던 가정이 그토록 절대적으로 신봉했던 기독교적 가치의 위선과 황량함이다. 카인과 아벨의 모티브와 근친상간은 기독교가 가장 두려워하는 금기들이기도 하며, 이로 인해 현대 미국의 기독교가 그토록 강조하는 가족의 가치가 연쇄적으로 깨져나간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남편에 대한 신뢰를 잃고 신앙에 대한 시험대 위에 서며, 새로운 양아들에 대한 애착은 한편으로는 성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듯도 보인다. 목사인 아버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는 듯 보이지만,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 그가 처한 상황은 그의 인생을 통털어 가장 힘겹고 풀기 어려운 모순적 질문과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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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자 여동생의 충격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의 '승인'을 그저 기뻐할 뿐인 천진난만한 엘비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갈등과 이를 통해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은 종교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사회문화적 맥락에까지 적용되는 대단히 중첩된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라티노 여성을 어머니로 둔 엘비스는 이름만은 미국인들의 영웅 엘비스 프레슬리에서 따왔지만(영화의 제목인 'the king'은 지금도 여전히 미국의 대표적 아이콘인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붙었던 애칭이기도 하다), "히스패닉이 미국을 좀먹고 있다"는 히스테리에 사로잡혀 있는 백인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온, 미국의 전통적인 기득권 층) 가정의 악몽을 눈앞에 재현시켜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과연 이는 미국인이 아닌 멕시코 출신의 배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 의해 그려진다. '옴므 파탈(Homme Fatal)'로서 손색없는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그 수줍은 표정과 맑은 눈동자, 그리고 섬세한 연기력을 한껏 이용해 엘비스를 연기한다. 그의 눈이 아버지의 냉대 앞에서 촉촉해지는 순간 이미 정서적으로 그에게 몰입해버린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가 여동생을 유혹해도, 남동생을 불시에 때려죽여도 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며, 이를 접한 미국 관객들의 반응은 고뇌와 갈등을 넘어서 공포에 가까울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도발하고 있는 대상이 철저히 미국적인 가치인 만큼,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그 정도로 강한 울림을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ps. 2008년 5월 26일 월요일 오후 2시, 용산CGV, 기자시사회

ps2.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라간 글.

ps3. 사실 '충격적'인 걸로 치자면야, 낯선 이방인이 한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하녀와 모두 동침하고 가정을 풍비박산 내놓는 파졸리니의 <테오라마>가 훨씬 더 하지 싶다. 기왕에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처럼 양성적 매력이 물씬한 배우를 캐스팅했다면, 그를 통해 폴 다노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설정이 추가됐다면 훨씬 재밌어졌을 거라 생각한다.

2008/06/26 00:27 2008/06/26 00:27
배창호 | 정 (1999)
from Eyes Wide Open 2008/06/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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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이미지는 초반에 등장하는 아역배우.

아마도 스폰지 배급라인을 타고 개봉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개봉 당시에 저 영화를 보러 가지 않은 이유는 또 한 편의 '한많은 여인네의 청승맞은 한풀이 영화'가 나온 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자감독이다. 대체로 한국의 남자 예술가들은, 고난의 세월 속에서 특히 소위 일제 혹은 전후 시기, 격동의 가부장제 근대화 사회의 그 끔찍한 폭력을 온몸으로 당해온 자신의 어머니가 그럼에도 얼마나 곱고 반듯하며 특히 아들인 자신을 얼마나 끔찍히 위해주는 '착한 여자'였는지 신화화하곤 한다. 그 신화화가 자신의 어머니인 여성에게 그 끔찍한 폭력을 휘두른 가부장제의 또다른 얼굴임을, 그리고 그를 통해 장래 자기 자식의 어머니가 될 혹은 자신의 딸이 될 여성에게 또다시 폭력을 계승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아들에게 저토록 천사요 성녀인 어머니가 딸에게도 똑같이 그랬을지 아닐지는 아웃 오브 안중이며, 이에 대해 말을 꺼내는 여성들은 그저 어머니의 희생을 이해 못하는 철없고 이기적이며 싸가지없는 현대 여성들이라 매도하는 게 다반사다. 그래, <정> 역시 그 정도까진 아니라도, 그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진 못한 영화일 거라고 너무 선뜻 편견을 가졌다.

하지만 만들어진지 9년, 2008년 배창호 특별전에서 드디어 만난 <정>은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정>은,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물론 영화의 줄거리를 '글'로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흔하디 흔한 '여인수난사'의 다른 영화들과 별다른 점이 없어 보이긴 한다. 꽃다운 10대 나이에 꼬마신랑에게 시집가서 성격 꼬일 대로 꼬인 엄한 시어머니 밑에서 호되게 시집살이를 하며 살다보니 성인이 된 남편은 냉큼 바람이 나버리고, 그래 집을 나와 혼자 살다 따뜻하고 헌신적인 성격의 홀애비와 부부를 이루고 좀 행복하게 사나 했더니 냉큼 그 남자 죽어버린다. 그래 또 혼자 살다가 이번엔 못된 남편한테서 도망친 애딸린 여자와 한 지붕 밑에서 아기를 함께 기르게 살게 되는데, 이제야 평화를 좀 누리나 했더니 이번엔 그 여자를 쫓아온 못된 남편이 그 여자를 끌고간다. 그리고 그녀에게 남은 삶은 아들에 대한 헌신. 반듯하게 자란 아들에게 효도받으며 비로소 평온한 노년을 보낸다. 그나마 다른 흔한 여인수난사 영화보단 그래도 좀 무난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 영화들은 또 키워놓은 아들이 데모 하다가 죽어버리거나, 며느리 데려와서 대판 싸우게 되거나일 텐데, 그래도 공부 열심히 하고 반듯한 대학생이 된 걸로 영화가 끝나니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렇게 멋없이 글로 요약해 놓은 줄거리가 아니라, 순이의 나름 곡절 많고 사연많은 삶을 과연 "어떻게" 보여주는가다. 사실 <정>이 그렇고 그런 한풀이 영화와 다르게 진행될 것이라는 것은 영화의 초반에 이미 제시된다. 가부장의 권위주의만 흉내낼 줄 아는 철딱서니 없는 꼬마신랑이 '엄마한테 이른다'며 순이를 협박할 때, 순이는 꼬마신랑의 입을 틀어막으며 '역'협박을 하는 것이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반전'이라 할 만한 이 장면이 영화 조장부터 제시된 후, 영화는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된 시련과 역경으로 점철되며 기막힌 운명을 점지받았는가가 아니라, 삶의 구비마다 이 여자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며 어떻게 헤쳐나가는가를 중심으로 진행돼 나간다. 그렇기에 한많은 여성의 한풀이를 해준다며 고난을 강조할수록 여성을 둘러싼 폭력이 오히려 강조되며 여성은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객체로 떨어져 버리는, 그 사이를 남자 예술가의 목소리가 치고 올라와 영화 전체를 압도해 버리는 기존의 이런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나 소설과 달리, 이 영화는 얼마나 고난이 거세고 격동의 세월이었건 간에 결국 주체는 순이가 되며, 영화 역시 순이의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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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쌈을 '당한' 순이가 오히려 우위에 서서 이후 부부관계를 주도해나간다.

사랑하는 다른 여자를 데려온 남편을 두고 자신이 떠나는 설정을 생각해 보자. 기존의 이야기에서라면 그건 명백히 '본처가 첩한테 밀려나는' 것이었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이의 주체적인 결단일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혼인이라는 것이 직접적인 피해자인 자신은 물론, 그것의 혜택을 받고 있다 여겨지는 남성과 그의 다른 여성 역시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것을 깨닫고 그 악순환을 가장 직접적이고 큰 피해자인 순이 자신이 스스로 끊어버리는 순간인 것이다. 밤에 몰래 집을 나서는 여자의 뒤를 따라나선 순이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 새벽녘의 들판에서 남편과 여자가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본다. 이 순간 순이의 내레이션이 삽입되는데, 순이는 그걸 보고 화가 나고 억장이 무너지기보다 그들의 사랑이 너무 간절하고 안쓰러워 보였다고 서술한다. 이것이 가능할까? 가능할 것 같다. 그건 순이가 특별히 너무나 착하고 바보같은 여자여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삶을 추동하는 가장 큰 힘인 에로티시즘의 강력한 힘을 목격하고, 그것에 매혹돼 버리고,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싶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그 힘을, 순순히 인정하고 순리에 따르는 결정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

배창호 감독은 흔히 한국인의 정서라 얘기되는 '한'에 대해, "그것은 오히려 일본의 정서다. 한국인의 정서는 한이 아니라 '정'이다"라고 말하며 이 영화의 변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에서 또 하나의 특징, 즉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기고 그에 따르는' 삶의 양태를 목격한다. 이것은 삶이 살아지는 대로, 상황이 펼쳐지는 대로 그것에 수동적으로 따라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 순이는 그 누구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악한 힘에 대해서 거칠 것 없이 싸운다. ("난 원래 밥은 굶어도 구두는 여러 채 신고 사요!"라는 명대사를 날리며.) 옹기쟁이 남편을 단단히 단도리 시키고, 심지어 '세일즈 비결'을 가르쳐 주는 것도 순이다. 그런데 순이의 삶은 악다구니 투쟁이라기보다, 그것을 넘어서는 '순리에 따르는' 삶의 양식이 보인다. 억지로 되돌리려 하지 않고, 억지로 막아서지 않는 그녀의 삶이, 소위 그 '순리를 따르는' 삶이, 결코 수동적으로 다른 이에게 결정을 떠맡기는 것도, 그렇다고 투쟁하지 않는 삶도 아닌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 바로 그것이 '정'이라고, 배창호 감독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배창호 감독이 말하는 '정'은, 삶의 순간순간을 빛나게 하는 기지와 재치(좀더 익숙한 말로 표현한다면 '유머감각')를 당연히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순이의 소박한 기지와 재치가 빛날 때마다 여지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순이의 기지와 소박한 유머감각도 더욱 늘어나서, 사실 이 영화, 굉장히 웃기다! 뒤로 갈수록 더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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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간의 아름다운 '연대'로 삶이 지속된다.

영화의 장면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영화가 잡아낸 풍광과 그 안에 어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 그 미장센도 그러하지만, 카메라가 움직이고 컷이 나뉘고, 이것이 연결되는 장면들 하나하나, 그리고 그것이 기반해 있는 호흡 하나하나가 문자 그대로 '유려한 장인의 솜씨'다. 배창호 감독은 <황진이>와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극도의 롱테이크를 실험하고 난 이후, 이제는롱테이크로 길게 가는 컷과 짧게 끊어서 가는 컷들을 영화에서 자신이 이끌고자 하는 호흡에 딱 맞게 황홀할 지경으로 유기적으로 배합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저 그저 이 능수능란한 예술가가 이끄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된다. 보따리짐 하나만 가지고 길을 나서는 순이의 이미지는 영화 속에서 두 번 나오는데, <황진이>에서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길을 걷는 진이보다도 훨씬 더 구도자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삶 자체가 끝없는 구도의 과정이고, 윤회와 환생이 이 구도의 길을 계속 걷는 것이라는 불교식 가르침은 이 영화에서 순이의 삶과 정확히 겹쳐지는 듯하다. 그렇게 '순리'대로 맡기며 열심히 일하고 먹고 오순도순 알콩달콩 살면서 길가던 배고픈 여자에게 죽을 주고, 아이를 입히고, 자신을 보쌈한 순박한 남정네와 살을 섞고 밥을 해먹으며 살고,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도를 향해 가는 것이라는 것... 그렇게 나이가 들고, 자식에게 한없는 사랑을 주면서 그렇게 사는 것, 그렇기에 일상에서의 희극과 비극은 언제나 같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삶이라고, 그리고 그게 구도라고, 영화가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정>을 통해서 배창호 감독은 비로소 자신이 이제 더이상 그저 흥행감독도 그저 중견감독에 불과한 것도 아닌 경지에 오른 '예술가'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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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회자되는 메밀밭 장면.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다. 해외에 수출될 때 포스터 이미지로 쓰이기도.

ps1. 5월 29일 목요일 저녁 7:30, 서울아트시네마

ps2. 영화 상영 전 영화소개를 했던 <원스 어폰 어 타임>의 정용기 감독, 알고보니 <정>에서 연출부 막내 출신이었다는.

ps3. <젊은 남자>를 비롯해 배창호 감독의 '근래 영화들'을 다 봐야겠다 결심하게 만든 게 <정>인데, 결국 특별전 마지막 날 <길>을 놓친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ps4. 참 길게길게 썼지만 사실 다 필요없고 <정> 정말 짱이다. 사람이 이런 영화를 보며 살아야 한다.

2008/06/24 07:30 2008/06/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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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표정이 너무 귀여우셈.

배창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결국 '사랑'에 관한 영화요 자신의 영화적 주제 역시 영원히 '사랑'이라고 누차 강조해왔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영화는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부터 가난한 꼬방동네를 배경으로 한 삼각 멜러물이었으며, 이후 영화들 역시 그 방향이 왜곡됐건 아니면 지고지순한 일편단심이건, 계속해서 사랑을 다루고 있는 게 사실이다. 원래 배창호 프로덕션의 창립작품이 될 뻔했으나 <젊은 남자>에 이어 두 번째 제작영화가 된 <러브스토리>는 그 제목부터 아예 대놓고 사랑 이야기다. 배창호 감독과 그 부인 김유미 씨가 자신들의 실제 경험을 녹여넣되 상당히 픽션화한 이 영화는, 각본부터 두 사람이 함께 썼고, 심지어 주연배우로도 두 사람이 직접 등장한다. 그런 이 영화, 정말이지 너무 웃기고 사랑스러우며 따뜻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사랑'에 관한 영화, 게다가 그것이 '코미디' 색채가 상당히 가미되면 다소 평가절하하는 습성이 있고, 따라서 <러브스토리> 역시 배창호 감독의 소품 정도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러브스토리>가 배창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영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단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이 연인과의 사랑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둘러싼 사랑이기도 하고, 주인공 성우(배창호)의 노총각의 신분과 최근의 지지부진한 영화경력이라는 현실에서 '사랑'이 이중적으로 발화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영화감독들이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과 아울러 영화 자체에 대해, 혹은 영화만들기에 대해 자기 반영적인 영화를 만들며 감독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재정비하는 영화들을 필모그래피 중간에 만들곤 하는데, 이 영화 역시 그런 영화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주인공의 직업을 영화감독으로 설정하면서, 결국 철저하게 그냥 '연애 이야기'로도 완결적인 해석이 가능하게끔 느슨하게 장르영화의 틀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부분들 뿐만 아니라, 영화의 내용과 맞물려 구체적인 형식과 스타일의 차이에서도 매우 중대한 변화를 보인다.

이전 작품들 대부분, 심지어 전편인 <젊은 남자>까지만 해도 지극히 장르의 '양식적인' 측면에 기대며 인물들을 다소 거리를 둔 채 건조하게 그려왔던 배창호 감독은 <러브스토리>에서부터 인물에 보다 가까이 접근해 그 인물과 적극적으로 교감하는 듯한 화면을 선사한다. 물론 그는 이후 <흑수선> 같은 영화에서 다시 양식적인 상업영화를 만들긴 했지만, <정>의 경우에서도 이런 따뜻하고 보다 가까운 거리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이것이 <러브스토리>에서의 일회적인 특징이라기보다 배창호 감독의 '스타일'의 면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물론 <길>까지 봤다면 좀더 확신을 갖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길>을 놓쳤다.) 이전의 영화에서 감독의 인물에 대한 애정이 약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었다면, <러브스토리>에서부터는 보다 구체적이고 내밀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앞서 만들었던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이 감독의 실제 내력을 반영하면서도 인물과의 거리는 여전히 '먼 관찰자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러브스토리>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인물 옆에 밀착해서 가장 구체적인 일상과 생생한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바꿔 말하면,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러브스토리> 이후 감독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영화'의 시초 혹은 원형을 간직한 영화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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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감독님 표정이 하이라이트.

사실 배창호 감독은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범상치 않은 로맨틱 코미디에도 재능이 있음을 슬쩍 내비치기는 했지만, 이는 <러브스토리>에 와서 비로소 활짝 핀다. 영화 속 양식화된 인물들이 아닌 평범한 '일상형 인물들'이 지지고 볶고 알콩달콩한 그 과정을 지극히 능숙한 솜씨로 장르의 법칙을 잘 활용해 전개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배창호 감독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의 법칙을 크게 고려하는 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고 뛰어넘음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있어 가장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물론 처음 두 사람이 만나 서로 호감을 느끼고 데이트를 하고, 점점 가까워지지만 다툼과 갈등을 겪고 헤어질 뻔하다가 다시 만나 행복해진다는 일반적인 플롯은 여느 로맨틱 코미디들과 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디테일들이다. 첫 데이트를 하러 나가기 전 미리 드라이클리닝을 맡겨둔 옷을 입을 뿐 아니라 '콧털 소제'한다거나, 전화기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고, 때마침 자기 앞에 찾아와 인사하는 영화과 학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나 이런 사람이에요"를 자연스럽게 과시할 수 있어 뿌듯해하는 게 뒷어깨로도 다 드러나고, 다소 둔한 눈치로 쩝쩝대며 음식을 먹고 어느 동네에 어느 맛집이 있는지 줄줄 꿰고, 구체적인 동네와 장소가 거론되고, 구체적인 영화가 거론된다. 수인도 그렇다. 알람이 울리기 직전 스스로 일어나는 것부터 먼지 하나 머리카락 하나 참지 못하는 습관, 바늘이 떨어졌을 때 서랍에 넣어둔 자석을 꺼내 찾고(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팁!), 침대보는 사방 똑바른 직선으로 접혀있어야 하며 옷도 종류별로 똑같이 가지런히 정돈해야 하는 그녀는 심지어 성우와 함께 치른 첫날밤에서도 자신과 성우의 옷을 얌전하게 게켜 한쪽에 반듯하게 놓아둔다.


습관도 사고방식도 이러헥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상대를 알아가는 이것은 막상 둘이 헤어졌을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자는 남자와 이야기했던 영화의 음악과 그의 말을 흉내내고("컷, 컷, 컷!"), 남자는 그녀가 없는 빈 자리와 그로 인해 다시 얻게 된 어두운 지하방의 우울한 공기에 둘러싸여 괴로워한다. 그리고 마침내 화해. 그리고 요란한 이벤트식 '연애놀이'가 아닌, 함께 밥을 지어먹고 편안히 서로에게 기댄 채 시간을 공유하는 그 일상적이고 편안한 모습. 이같은 방식은 영화나 소설들이 장르 관습을 빌어 자행하게 되는 소위 '낭만적인' 과장을 제거해버림으로써, 오히려 속으로 더 뜨거운 열렬함과 낭만적인 사랑 예찬의 성질을 강화한다.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빠져 정작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가 돼도 상관없다는 식의 자기애가 아닌, 진정으로 다른 이와 만나 소통하고 서로 새로운 세계를 접하며 자신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마음을 주고받는 과정이 유기적으로 묘사해나간다. 그리고 이는 다시 영화감독으로서 영화를 둘러싸고 관객과의 진정한 소통과 애정에 관한 문제와 중첩된다. 영화 속에서 수인은 직접적으로 영화를 '러브레터'에 비유한다. 또한 그가 영화에 대해 묘사한 말, 즉 '어두운 밤길을 비추는 작은 불빛'이라는 말은 다시 개인의 삶에 있어 사랑이 갖는 의미로서도 매우 적절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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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실연을 하면 왜 항상 머리를 자를까.

그런데 이 영화가 역시 시대보다 많이 빨랐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적어도 영화 세상에서는 마치 20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사랑과 연애의 주인공들이 30대 소위 '노처녀'와 갓 마흔이 된 '노총각'이라는 점이다. 서른 넘은 여자의 연애가 상업영화 씬에서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활발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96년에 이미 이를 다루며 꼭 결혼을 향해 달려가는 숨가쁜 경주가 아닌, 그러나 20대의 전유물도 아닌 사랑과 연애를 이토록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는 건 매우 놀랍다. 12년이 지난 지금 봐도 이 영화를 보며 마치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듯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절절이 공감되는 것은, 시대가 바뀌며 겉 모양새는 바뀌되 본질은 바뀌지 않는 그 '사랑'의 정수에 이 영화가 곧장 걸어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배창호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영화이자, 영화에 대한 메타영화이기도 한 이 영화는 배창호 감독의 영화 세계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가장 유쾌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아주 매력적인 작품이자, 사랑과 인생과 영화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함께 섞여 있는 아름다운 영화다.



ps. May 28, 2008 수요일 저녁 7시, 서울아트시네마

ps2. 김유미 씨의 배우 데뷔작인 셈인데, 발성이나 다른 기술적인 면에서 어색함이 느껴지긴 해도 그 '능글맞음'과 남자주인공과의 케미스트리만큼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ps3. ' 배우' 배창호의 연기는 언제나 놀랍다.

ps3. 신촌역 카페에서의 첫 데이트에서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의 영민의 대사가 인용된다. 혜린에게 다짜고짜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해서 혜린의 깔깔대는 반응을 얻었던 영민의 그 서투른 고백이, 이 영화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당황스러운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배우에게 연기지도를 할 때의 시범 대사로 다시 활용된다.

ps4. 읽어볼 만한 리뷰 : Chulgoo, 러브스토리 - 명불허전, 노장은 죽지 않는다

ps5. 역시나 360도 회전이동 씬 : 성우가 처음 공중전화에서 수인에게 전화를 걸 때. '공중전화 박스'라는 점에서 <깊고 푸른 밤>과 같다.

ps6. "영화는 어두운 밤길에서 빛나는 작은 등불"이라는 말은 많은 영화감독들이 사용하는 영화에 대한 비유이고, 그 중엔 잉그마르 베르히만도 있다. 베르히만의 자서전부터 재목이 'Magic Lantern'이다. 국내에는 [마법의 등불]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있다.

2008/06/17 06:03 2008/06/17 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