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인 르노 카퓌송과 첼리스트인 고티에 카퓌송의 듀오 리사이틀이 최근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다. 76년생인 르노와 81년생인 고티에는 각자 내한을 한 적은 있지만 한국에서 한 무대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로 개성이 다르면서도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던 이 날의 연주는 지적이면서도 단단한 열정을 뿜어낸 명공연이었다.

애초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주곡이 별로 없기도 하지만, 이 날 프로그램은 일반적인 청중에게는 난해할 수밖에 없는 현대음악들로 구성됐다. 슐호프와 라벨, 그리고 코다이의 이중주 곡들이 그것이다. 불협화음의 충돌과 혼란 속에서도 은은한 열정을 감추고 있는 이 곡들은 클래식 매니아가 아닌 일반 청중들에겐 낯설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데다 정교한 테크닉을 요하는 작품들이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거의 대등하게 겨루는 슐호프의 작품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는 무림의 최고 고수 둘이 서로 대결을 하면서도 하나의 우아한 춤을 이루는 광경 같은 소리를 들려줬다. 첼로가 두드러지는 라벨의 곡은 원래 드뷔시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르노의 바이올린이 진중하고 이지적인 차분함으로 한발 물러선 듯했다면 고티에의 첼로는 마치 젊음의 격정으로 질주하는 듯했다. 만약 라벨의 곡만 들었다면 엄격한 절제미와 수줍음이 르노의 연주 스타일이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터미션 후 2부에서 코다이의 곡이 연주되자, 르노의 바이올린은 진중하게 받쳐주는 고티에의 첼로를 타고 마치 하늘을 나는 듯 우아한 열정을 뿜어냈다. 호흡과 조화는 완벽했고 끊어질 듯 말 듯 피아니시모로 악장을 마무리할 때마다 객석의 숨소리마저 쥐고 흔들었다.

Capuçon Duo

르노 카퓌송과 고티에 카퓌송의 리허설 모습.


하지만 이들의 연주가 무작정 격정을 터뜨리는 식은 아니다. 얼핏 듣기엔 엄격하고 정확한 테크닉에 타이트하고 차분한 절제미로 격정을 한 번 누르는 듯하다. 그러나 계속 듣다보면 그 밑에 마치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용암과 같은 열정이 느껴진다. 칼주름을 세운 하얀 와이셔츠에서 단추 둘만 푼 조각남을 볼 때 느껴질 법한 섹시함이 카퓌송 형제의 음악에 있다. 한 꺼풀 가려져 있기에 더욱 뜨겁게 느껴지는 열정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젊은 생동감과 경쾌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형인 르노는 좀더 이성적인 면모에 수줍으면서도 완숙한 열정의 스타일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면, 고티에는 젊음을 과시하듯 질주하면서도 이를 사려깊은 진중함으로 감싼 듯한 스타일로 첼로를 연주한다. 형이 차가운 불꽃이라면 동생은 뜨거운, 펄펄 끓는 얼음이다. 그렇게 다른 스타일이 완벽한 호흡으로 음을 주고받으며 연주하자 마치 하나의 악기가 동시에 두 가지 소리를 내는 듯한 음악이 된다. 이들의 연주는 노장의 깊이와 통찰을 갖추진 못했다 해도 젊은 연주자답지 않은 노련함을 패기와 함께 드러냈다.

객석은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고, 형제는 헨델-할보르센의 파사칼리아 사단조를 앵콜곡으로 연주했다. 본 프로그램의 연주가 숨겨진 열정에도 불구하고 지적인 면에 더 호소했다면, 앵콜연주는 여전한 절제미에도 불구하고 애절한 격정이 폭발했다. 그예 기립박수가 나왔다. 바로크 음악이나 낭만파의 곡 등 국내 청중들에게 좀 더 익숙한 곡을 이중주곡으로 편곡해 들려줬다면 과연 어떤 연주가 나왔을지, 이 앵콜곡 하나로 기대와 호기심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두 카퓌송의 듀오 연주는 이렇게 객석을 흥분과 열광으로 몰아넣은 채 막을 내렸다. 앞으로 듀오의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간절하게 기대하게 만든 공연이었다.


-프레시안 기사로 올라감

2008/12/19 12:08 2008/12/19 12:08

쌍화점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엇갈리는 사랑.

오랫동안 서로 사랑해 오던 남남커플 중 한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빠진다. 여자는 커플 중 다른 남자의 아내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그저 평범한 개인들이 아니라 한 나라의 왕과 왕후, 그리고 최고의 호위무사라는 점이다. 평범한 이들이라도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형성된 삼각관계가 주변에 온갖 평지풍파를 일으킬 가능성이 큰데, 이들의 관계에선 배신을 당한 자가 하필이면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다. 평지풍파의 규모와 차원이 달라진다. 원의 간섭과 지배를 받던 고려 말이라는 시대적 상황까지 더해지니 결국 나라가 결단이 나는 지경까지 이르고 만다.

격정의 에로티시즘을 다루려던 <미인도>가 제대로 된 에로티시즘을 선사하는 데에 실패했던 것과 달리, <쌍화점>은 정념에 미쳐 날뛰는 인간들을 단순명쾌하게, 그러나 매우 섬세하게 그려내며 우직하게 결말로 달려간다. 평생을 궁에서 살며 정해진 운명을 살아야 했던 이들이 에로스의 세계를 경험하며 새로이 발견한 것은 위험한 자유와 열정이다.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며 온갖 격식을 차려야 하는 왕후와 왕의 명령에 죽고 살아야 하는 호위무사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징을 모두 벗고 본연의 자기자신이 되는 순간이기에, 그들은 그토록 서로의 몸을 탐닉하며 육체적 행위에 골몰한다. 금지된 열정과 행위를 반복해 나가며 갖게 되는 공범의식이야말로 이들의 사랑을 더욱 강렬하게 해주는 요소다. 한참 피가 뜨겁고 호르몬이 폭발할 나이의 청춘들에게, 위험한 사랑이야말로 억압된 삶에 대한 가장 강렬한 자극일 터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에로스는 죽음의 일면을 닮았다. 한편 이들의 섹스를 주선했던 왕은 이후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분노와 질투로 몸을 떤다. 그가 그토록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단순히 애인이 변심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자발적인 애정 없이 그저 권위와 명령에 복종한 것일 뿐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불신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둘러대는 거짓말 하나하나에 상처받으며 왕은 질투로 미쳐간다. 그의 분노와 질투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유하 감독은 세 남녀의 지독한 사랑과 얽힘을 통해 에로스와 죽음 사이의 상관관계라는 매우 고전적인 주제를 탐구하며, 매회 인물의 심리 변화가 섬세하게 드러나도록 설계된 정사씬을 통해 이를 표현해낸다. '쌍화점'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그리고 노출에 대한 광고로 화제를 모은 영화답게 과연 <쌍화점>은 수위가 높고 빈번한 성애 묘사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분명 상업적 고려를 포함한 것이지만, 두 남녀의 격정적인 사랑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실제로 두 남녀의 깊어가는 사랑의 양상을 적절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처음엔 지극히 어색한 손길을 주고받던 두 남녀는 횟수가 거듭되고 이들의 정이 깊어갈수록 더욱 농염하고 격렬한 적극성을 띄며 다양한 체위를 표현해낸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의를 품은 채 한때 연인이었던 남자를 찾아오는 장면은 설득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 하략)

쌍화점

<쌍화점>은 성이 대량으로 소비되며 상품화되지 않고도 찬란하게 에로스를 꽃피워낸 마지막 에로스의 시대를 애도하는 듯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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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16일 화요일 2시, 코엑스 메가박스, 기자시사

- 좀 길다. 조인성과 송지효 간 케미스트리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은 아쉽다. 주진모의 왕이야말로 내가 가장 감정이입한 대상. 조인성은 눈이 참 예쁘고 표현이 그윽한 배우로구나.

2008/12/17 20:33 2008/12/17 20:33

나의 친구, 그의 아내

2006년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주요 축을 이루는 세 인물은 노동자 부부와 지식인이라는 명확한 계급성을 드러낸다. 게다가 이들의 상호의존적이면서도 계급적대적인 관계가 지나치리만치 섬세한 디테일을 통해 선명하게 그려진다. 어떻게든 계급성을 지우고 탈정치적인 척을 하기 위해 지나치게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근래 대다수의 한국영화들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서울 명문대의 운동권 출신으로 현재 잘 나가는 외환딜러인 예준은 그 누구보다 자본주의의 적자생존과 경쟁의 법칙을 몸으로 완벽하게 체득했다. 한 마디로 '변절한 386'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직장동료 누구와도 원만하게 지내지 못하는 그는 재문-지숙 부부를 후원하고 그들 아이의 이름으로 '민혁'(민중혁명) 혹은 '예니'(칼 맑스의 아내)를 제시할 만큼 가깝게 지낸다. 그에게는 재문 부부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마지막 남은 양심 한 조각을 달래는 방편이다. 한편 재문(박희순)은 공항 레스토랑의 요리사로 일하고 지숙(홍소희)은 동네에서 작은 미용실을 운영한다. 지문은 군복무 시절 '나이도 같은데 너나 나는 평등하다'던 예준의 첫 말을 잊지 못해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지숙 역시 물심양면으로 자신의 가정을 보살펴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주는 예준이 고맙다. 이들의 관계는 영화의 첫머리, 재문과 지숙의 결혼식 장면에서부터 제시된다. 신랑 들러리였던 예준은 신랑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 서 있고, 카메라는 신랑 신부와 신랑 들러리였던 예준의 모습까지 함께 한 화면에 꽉 차게 담는다. 나중에 지숙이 재문에게 "나보다도 예준 씨와 더 꼭 붙어있더라"라고 투정부릴 정도다.

그러나 예준과 이들 부부의 관계는 동등한 친구의 관계가 아니다. 재문은 부인과 사랑을 나누던 순간에도 예준의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있다는 포장마차로 나간다. 함께 술을 마시다가도 예준의 차를 빼달라고 전화가 오면 차 키를 들고 나가는 건 재문이다. 그리고 이들 부부의 아들은 예준이 지어준 이름대로 '민혁'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재문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예준을 무려 '존경'하는데, 이는 군대에서 처음 만나 말을 트고 친구가 되었을 때 예준이 재문에게 [철학에세이]를 줬기 때문이다. [철학에세이]는 90년대 초중반까지도 운동권 입문 학습서로 신입생들에게 널리 읽혔던 책이다. 그렇기에 영화에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후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그러니까 재문과 지숙의 관계가 깨지고 지숙을 둘러싼 두 남자의 삼각관계가 되는 것은 단순히 여자 하나를 둘러싼 치정게임이라기보다는 돈과 권력이 개입된 계급적대, 나아가 계급 전쟁에 가깝다. 그런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런 구도에서 보통은 철저하게 '대상'으로만 위치지어지는 여자가 오히려 관계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하략)

나의 친구, 그의 아내

<헨젤과 그레텔>, <세븐데이즈> 등에서 탁월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박희순이 주연을 맡았다. 장현성, 신인 홍소희의 연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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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시사로 다시 보니 흐름에 있어 살짝 덜컹거림이 느껴진다.

-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장면들은 세 인물들이 뒷모습을 보인 채 걸어가는 장면이다. 1)재문과 지숙이 다정하게 감싸안은 채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2) 재문이 혼자 장을 본 비닐을 든 채 터벅터벅 오르막 계단을 오른다. 3) 사고를 친 예준이 내리막길을 겁에 질려 뛰어내려간다. 4) 불에 타는 미용실을 버려둔 채로 지숙이 재문을 뿌리치고 신발마저 벗어던진 채 천천히 평지를 걸어간다. 오르막길이 앞으로의 시련을 예고한다면, 내리막길은 추락을 예시하는 듯하다. 마지막 장면에서야 홀로 평지를 걷는 지숙의 모습이 나온다. 

- 박희순은 보물. 장현성은 닳고 닳은 비열한 지식인 이미지에 딱. 홍소희는 앞으로가 기대된다. 실제로는 조근조근, 조용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살짝 4차원의 엉뚱한 답을 하는 재미있는 사람인 듯. 

2008/12/17 20:08 2008/12/17 20:08

Blindness

포스터의 디자인이 매우 마음에 든다.

주제 사라마구의 베스트셀러 원작 소설을 이미 읽어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원작에 상당히 충실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 충실함이 지나친 것이 영화가 망가진 원인이라고도 한다. 칸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을 당시부터 영화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아무래도 원작이 있는 작품들의 경우 그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는 게 인지상정이다. 대체로 원작만큼 훌륭하다거나, 원작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 건 그러니까 영화가 굉장히 뛰어나다는 소리다. 영화기자나 평론가란 사람들은 당연히 화제가 되는 소설은 그때그때 읽기 마련이기 때문에, 박한 평가를 받을 가능성은 더 커진다. 하지만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떨까.

영화에 뜬금없이 삽입되곤 하는 애꾸눈 노인의 내레이션은 이 작품이 '소설을 원작으로 두었다'는 사실을 결국 극복하지 못한 하나의 미봉책으로 보인다. 영화가 대체로 의사부인(줄리앤 무어)의 시선에서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끼어들곤 하는 그 내레이션은 영화의 시선을 교란하고 전체 구조를 어그러뜨리기까지 한다. 시력을 잃은 이들의 시야를 원작에서 제시된 대로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노출을 극도로 한 화이트아웃 장면을 종종 삽입한다. 이런 장면들은 인물들이 겪고 있는 상황과 그 고통을 매우 강렬하고 생생하게 대리체험을 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그러면서도 관객은 동시에, 그들이 결코 알지 못할, 그 더럽고 혼란스러운 아수라장의 광경들을 함께 본다. 혼자 눈뜬 자인 의사부인이 보는 광경을 한편으로 그대로 보게 되며 더욱 의사부인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에서 다소 자유자재로 화자와 시점을 옮겨갈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애꾸눈 노인의 내레이션이 더욱 이질적이고 불편하게 여겨진다. 다만 이 내레이션의 주인공이 더없이 믿음직한 대니 글로버인지라 그나마 덜 불편한 것일 뿐.

집단실명이 가져온 사상 최대의 비극이 관객에게 보다 생생하게 전달되려면, 영화라는 매체는 관객의 시각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호소하는 영상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 이 영화의 태생적인 아이러니이다. 눈먼 자들의 고통과 절망에 보다 가까이 가려면, 그것을 보다 강렬하고 생생하게 느끼려면, 관객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보통 때보다도 더욱 예민하게 시각이란 감각을 움직여야 한다. 감독은 다른 영화보다도 더욱 비주얼에 특별한 고려를 하며 시각을 자극해야 한다. 주제 사마라구가 한사코 영화화를 반대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Blindness

지도자를 따라, 드디어 저항에 나선다. 싸우는 자들은 아름답다.

눈먼 자들이 모인 폐쇄된 병동 안에서도 계급이 발생하고, 포악한 착취자가 등장한다. (위험하고 치명적인 매력을 내뿜는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위험함을 내뿜으며 흥미로운 악당 연기를 선보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이 새로운 폭력적인 질서에 별다른 저항 한 번 해볼 틈 없이 순응한다. 심지어 악당이 죽었을 때도, "우리 안의 살인자를 색출해 갖다 바치고 용서를 구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계급이 발생하고 가장 일차로 무기가 되는 것은 식량이며, 가장 먼저 희생을 요구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것은 여자들이다. 이것은 사회의 성립과 특히 계급의 출현이라는 인류의 초기 역사에 대한 지독한 은유로 읽힌다. 공산주의자라는 원작자의 이력에 어울리는 통찰인 셈이다. 이 과정 자체가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지극히 괴롭고 고통스럽다.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고통의 정점을 찍으며 가장 보기 괴롭게 만드는 장면은 바로 3병동 남자들에게 1병동 여자들이 집단강간을 당하는 장면이다. 다만 감독은 이 장면을 매우 거친 입자의 흔들리는 화면으로, 인물들의 몸은 드러내지 않은 채 얼굴만을 극클로즈업해서 찍었다. 강간이 지극히 함축적으로 보여진 셈이다. 물론 이런 식의 '보여주지 않는', 그러나 비명과 통곡의 사운드가 강조된 화면이 더욱 공포스러운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씬이 촬영된 방식은 최대한 여성의 신체에 예의를 갖추려는 모습, 영화가 여체를 착취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죽은 이에 대한 존중의 의지와 함께 신중한 배려가 함께 있는 듯 느껴진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죽은 여인을 다른 여인 모두가 함께 운반해 침대에 뉘이고 씻기는 씬이 더욱 파워풀해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공포의 순간이 지난 뒤 찾아온 깊은 슬픔과 그나마 위안이 되는 자매애를 동시에 보여주며 신성한 감동을 선사하는 장면이 된다. 비록 심장이 아리는 고통이 공존하기는 하지만.

Blindness

일본자본(가가픽쳐스)이 참여한 이유도 있지만, 이 그룹의 인종 비율은 꽤 세심하게 배려된 측면이 있다.

사실 이 영화는 그 지독한 고통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처음 설정부터 희망을 내포한다. 그것은 원작의 가장 기본적인 설정, 이 이야기 자체가 가능해진 가장 기초적인 설정에서부터 기인한다. 총을 한 자루 가졌고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와 팀을 이루었다는 이유로(갑자기 맹인이 된 이들보다 날 때부터 맹인인 자가 맹인생활에 더 익숙하고 다른 감각도 예민할 테니까) 바텐더는 병동의 왕으로 스스로 즉위하며 폭력적인 위계질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우리에겐, 모두가 눈이 먼 상황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인다는 그 어마어마한 권력과 기득권에도 불구하고, 군림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에 헌신하는 주인공이 있다. 영화의 초반, 어딘가 나사 하나쯤 풀린 사람처럼 보였던 이 여자는 병동에 들어온 이후부터 한편으론 더없이 강해지고 지도자로 부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갖게 된 권력을 오로지 병동의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돕는 데에,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된 포식자를 응징하는 데에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 사회에서의 질서는 재편된다. 인텔리 남성은 점점 힘을 잃고 약해지며, 누군가의 부인으로만 지칭되던 여자가 지도자가 된다. 그녀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정사를 벌이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그것을 이해할 정도의 너그러움을 가진 '진정으로 강한' 자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애초부터 고통과 절망이 아닌 희망에 관한 이야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고통스럽고 극도로 절망스러운 사건들이 연이어 전개되는 데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을 맞아야만 한다. 그리고 실제로 원작과 영화 역시 기적의 해피엔딩을 맞는다.

물론 이 영화가 원작에 너무나 압도된 나머지, 영화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원래의 이야기가 전해야만 햇던 모든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했다. 그것도 단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적인 화면들을 통해, 매우 강렬하게 말이다.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게 영화화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콘스탄트 가드너>는 보지 못했으니 언급할 수 없지만, 적어도 데뷔작이었던 <시티 오브 갓>을 생각해 보자면 그 작품이 결코 떨어지는 작품이 아니었음에도 감독의 영화적 역량은 더욱 성숙해졌고 통찰력도 깊어졌다. 내가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지지하는 이유다.


- 2008년 11월 6일 2시, 용산CGV, 기자시사

ps. 소설은 '눈먼 자들의 도시'로 발간됐는데 영화제목은 왜 '눈먼자들의 도시'인지. (띄어쓰기 말이다.)

2008/12/14 03:53 2008/12/14 03:53

잘자요, 엄마

1월 초까지 연장공연 중.

"엄마, 나 오늘밤 자살할 거예요."

어디 여행이라도 갈 것처럼 부산하게 집안을 정리하던 딸의 입에서 문득 이 말이 떨어졌을 때 가슴이 무너지지 않는 엄마가 있을까.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나, 현실감 없이 느껴져 웃으며 면박을 줬다가, 그것이 진심임을 알고는 화를 내고, 설득도 했다가, 울며 매달리고, 비난도 해보고,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그 와중에도 딸을 안쓰러워하는 어미의 심정을. 하지만 그 자신도 자식을 키우는 엄마로 그 심정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세상을 등지고자 결심했던 그녀는 또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던 걸까.

'제시'는 오랫동안 간질을 앓았고 남편과는 헤어졌으며 하나뿐인 말썽꾼 아들도 가출하고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노모인 '델마'와 단둘이 살면서, 그녀는 자신의 우울한 기운 때문에 엄마의 친구가 집에 놀러오기 꺼려하는 것도, 남편이 결국 자신을 떠난 것도 그저 담담히 받아들인 상태다. 그녀에겐 더 이상 삶을 지속해야 할 논리적인 이유도, 생존 의지도 없다. 삶이 살아지는 대로 그냥 견디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녹슨 총을 찾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날, 홀로 남아 자신의 시체를 치워야 할 엄마가 걱정돼 그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고 만다. 세상 어느 엄마가 "오냐 그래라" 할 리가 없다. 두 모녀의 격한 대화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과 숨기고 있던 비밀들이 드러난다.

모자관계나 부자관계와는 또 다른 모녀관계는 대체로 격렬한 애증과 서로에 대한 연민이 병행되는 경우가 많다. 딸들의 고달픈 삶은 언제나 세상 모든 모녀관계의 단골 레퍼토리인 '엄마처럼 살기 싫었어'와 '이제야 엄마 마음을 알겠어'를 단계적으로 반복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언제까지나 아버지인 것과 달리, 어머니는 딸에게, 혹은 딸에게 어머니는 어느 순간 '친구'가 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딸은, 결국 상대가 자신을, 자신이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원래 친구란 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가장 좋은 친구 관계란, 서로 다르다는 것, 어느 부분에 있어 서로 타인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함께 가며 지지하는 관계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서로 타인일 수밖에 없는 부분에서 절망하고 주저앉곤 한다. 아마도 남자관객이나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하는 여성관객의 눈에 이 연극이 영 낯설게 느껴진 부분이 있다면, 그건 제시가 결국 엄마 앞에서 자살을 행해서라기보다는 애초 수직적 혈연관계였던 모녀가 나이가 들면서 수평적인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 하략)

잘자요, 엄마

모녀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애증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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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9월 추석연휴,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빨간그림자님과 함께

- 내가 본 것은 손숙X황정민. 나문희의 델마가 매우 궁금하긴 한데, 연장공연에서는 빠지셨다. 서주희의 경우 궁금하기는 하지만 <레이디 맥베스> 때의 연기 스타일로 보건데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로 연기를 하실 듯. 손숙의 델마와 황정민의 제시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마 나문희의 델마는 좀더 세속적이고 좀더 낮은 계급의 아줌마를 보여주셨을 것 같다. 이미 연극을 본 사람들의 말로는 나문희와 황정민의 궁합이 더 좋았다곤 하는데... 손숙의 델마는 별로 안 그런데 우아한 척하는 속물적 이미지가 보여서 나름 설득력이 있었고, 황정민의 제시는... 정말 제시가 실존인물이라면 바로 저렇게 생기고 저렇게 말을 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태석의) 극단 목화의 간판배우이자 연극계에선 이미 베테랑으로 소문난 배우이지만 그녀의 연극 연기는 처음이었는데, 말그대로 감동했고, 반했다.

- 마샤 노먼의 작품들은 종종 페미니즘 희곡이라 분류되곤 하지만 정작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마샤 노먼의 작품들, 특히 이 작품을 페미니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긴 여자 작가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모두 페미니즘은 아니긴 한데, 딱히 왜 그런 것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찾아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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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3 16:12 2008/12/13 16:12

Eastern Promises

포스터부터 포스가 남다르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현재 러시아 및 유럽 전역에서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마피아('오르가니자치야'라고 불린다) 중 최대 조직인 보리 V 자콘 파를 소재로 한다. 자료들에 의하면 보리파는 구소련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세력을 키웠고, 구소련이 해체된 후 옛 소련땅은 물론 유럽 전체에서 급부상했다. 러시아 마피아 중 보리파가 아닌 신흥조직들도 대체로 보리파의 영향을 받았다. 영화에서 묘사된 대로 복역한 죄와 수용소 및 감옥에서 겪은 경험을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 아마도 <대부>가 미국에서 마피아의 존재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확인하게 해준 영화였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유럽 전역에서의 오르가니자치야의 존재를 처음으로 공식화한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와 마찬가지로, <이스턴 프라미스> 역시 실제 범죄조직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런던에 자리잡은 이민자 사회의 착취자이기도, 보호자이기도 한 범죄조직을 통해 인간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대부>가 폭력으로 점철된 미국 역사 및 사회구성에 대한 분석에 가까웠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좀더 실존적이다.

이 과정에서 <이스턴 프라미스>가 취하는 방식이 재미있다. 영화는 범죄조직에 공통적인 '신고식' 살인으로 시작한다. 조직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주로 미성년자나 젊은 청년)에게 살인을 사주하는 것이다. 이후 장면은 출산이 임박한 채 하혈을 하는 어린 소녀, 타냐로 전환된다. 소녀는 결국 아이를 낳고 죽는다. <대부>에서도 아기의 세례식과 정적 숙청 장면이 교차편집되고 있고 콜레오네 '가족'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이스턴 프라미스>는 아예 영화의 중심축이 삶과 죽음의 명확한 대비이다. 이 과정에서 소가 낳은 아기, 크리스틴은 영화의 중심 키가 된다. 아기를 죽이려는 이들과 아기를 지키려는 이들 사이에 무시무시한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세묜은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니콜라이를 적의 손에 넘겨주었으면서도 크리스틴을 죽이려 든다. 아버지에 대한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던 키릴은 차마 갓난아이를 죽이지 못한다. 안나는 그녀를 자신의 딸로 받아들인다. (... 하략)

Eastern Promises

이들은 유사가족을 이루는 듯하지만 결국 악의 세계에 떨어진 남자는 가족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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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1월 26일, 오후 2시 용산CGV, 기자시사

- 뱅상 카셀이 그리고 있는 키릴은 따로 언급하면 글 하나 나올 분량의 독특한 서브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죽여야 할 갓난아기를 안고 우는 키릴의 모습이야말로 여느 갱스터 영화에서 쉽게 보기 힘든 모습일 터인데, 이 장면으로 이 캐릭터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가 마침내 완성된다. 니콜라이에게 동성애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그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 누구보다 '호모'라는 욕을 많이 사용하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니콜라이에게 섹스를 강요하기까지 한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그저 놀기 좋아하고 가끔 소소한 사고나 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그는 하필이면 범죄조직 보스의 아들로 태어나 후계자로서 응당 요구되는 마피아적 자질, 즉 냉혹한 잔인함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계속 자기 파멸을 겪는 인물이다. 내게는 그가 알콜중독인 이유조차 결국 그의 선한 기질이 그의 마피아 조직의 후계자라는 조건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은 니콜라이보다도 더 많이 내 눈을 끈 캐릭터인데, 뱅상 카셀이 이 캐릭터를 '그저 찌찔하기만 한 놈'이 아닌 연민과 이해가 가는 놈으로 그려줘서이기도 하다. 뱅상이는 역시 살짝 미친놈으로 나와줘야 예쁜데, 최근의 그는 너무 얌전한(!) 역으로만 출연했다.

- 북유럽적 외모를 가진 비고 모텐슨이나 창백한 금발미녀로 어찌 보면 슬라브적 피가 좀 있는 것도 같은 나오미 와츠가 러시아 인으로 나오는 건 그럭저럭 어울리는 편이긴 한데, 전형적인 골족으로 생긴 뱅상이가 러시아 인을 연기하는 건 좀...

- 나오미 여신님! 나오미 여신님! 여기선 또 어쩜 그리 런던 사투리를 그렇게 똑 떨어지게 하시나요. 감독의 국적 때문에 이 영화가 막연히 캐나다의 어딘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액센트를 들으면서야 배경이 런던임을 깨달았다는. 지명이나 지역 지표가 없어도 액센트 하나만으로 공간 배경이 어딘지 알려주시는 그대는 진정... 여신님... ㅠ.ㅠ

- 아민 뮐러-슈탈은 인자한 표정 뒤의 강압적이고 잔혹한 아버지 역할 전문배우이신 건가요. 이 배우의 존재와 이름을 처음 인지한 게 <샤인>이었는데, 거기서도 딱 그런 아버지 역이었지 아마.

- 크로넨버그의 영화답게(!) 잔혹 엽기 장면이 포함돼 있다. 시체의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 그 단면을 보여주는 컷, 그리고 면도칼로 목을 따고서 피가 철철 솟는 장면의 정면 샷 두어 컷. 이 모든 장면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장면들 때문에 마지막 장면이 주는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 보리파에 대한 얘기를 좀더 덧붙이자면, 보리 V 자코네는 '법을 지키는 도적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의 내부 규율 중엔 국가의 의무징집 등에 따르지 않는 조항이 있는데, 2차대전 당시 스탈린이 "참전하면 죄 없애준다"고 꼬드겨서 다수가 입대를 하고, 이로인해 정통파와 입대파, 소위 배신자들 사이에 꽤나 큰 내부 분쟁이 생겼다고 한다. 워낙 '배신자들' 숫자가 적지 않았던 터라 이 규정은 좀 완화가 됐다는데, 정작 스탈린이 뒷통수를 때렸다는 거.

- <이스턴 프라미스> 때문에 본 책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스턴 프라미스>를 보고 이 리뷰를 쓰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준 책에 대해 곧 프레시안에 리뷰기사를 올릴 예정이다.

2008/12/13 15:48 2008/12/13 15:48

<과속스캔들>을 보며 내 눈을 잡아끌었던 부분이 있다. 차태현이 분한 남현수가 자신의 딸인 정남(황정남)과 함께 집안일을 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넓디넓고 먼지 한 톨 없는 데다 완벽하게 정리가 된 집안에서 현수가 스스로 아침밥을 해먹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요일별로 라벨이 붙어있는 락앤락에 식재료가 정리돼 있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정리된 냉장고에서 요일에 해당하는 락앤락 통을 꺼내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다. 솔직히 그 장면을 보며 저 넓은 집을 어떻게 저렇게 관리하누, 부터 냉장고는 누가 정리해줬나, 했다. 그러다 라디오의 청취자 사연을 빌어 정남이 아버지한테 뭘 해줄까, 하는 장면에서 "밥 한 끼 해드리라" 조언할 땐 역시 한국남자구나, 했었다. 아침밥을 차려놓은 정남에게 툴툴대며 반찬투정을 할 때, 그리고 집안 청소를 하는 정남을 옆에 두고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는 현수를 보면서는 "그럼 그렇지" 했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고 현수와 정남과 정남의 아들 기동이 다 함께 사는 게 익숙해지면서, 현수는 정남과 함께 아침밥을 차리고, 함께 집안 청소를 한다. 놀랐다. 정말로 놀랐다. 그러니까 현수는 특유의 깔끔한 성격으로 그 넓디넓은 집안을 이제껏 스스로 열심히 청소하고 관리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뭐 가끔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기도 했겠지만.) 그리고 22살이 되어 찾아온 딸과 그녀의 6살난 아들, 즉 현수의 손자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 그는 집안일을 딸에게만 미루는 것이 아니라 딸과 분담을 한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대형TV를 열심히 닦는 차태현의 모습처럼 멋진 모습이 없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이 모두 성숙한 반면 남자들은 현수의 친구 창훈(성지루)만 빼면 모두 무책임하고 어리석고 찌질하다는 데에 있다. 물론 36살 화려한 싱글생활에 갑자기 찾아온 딸과 무려 손자의 존재는 심하게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다. 심지어 유전자 검사까지 강행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아빠되기라는 것도 부단한 노력과 학습의 결과인데, 이 집의 딸은 창훈의 적절한 지적대로 "길러주지도 않았는데 지들이 알아서 커서" 찾아왔다. 그러니 그의 아빠 노릇이, 할아버지 노릇이 영 신통치 않을 수 있다는 것도, 무조건 그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어하는 것도, 아빠 노릇이라는 걸 '비싼 옷 안겨서 신데렐라로 변신시켜주기' 같은 자기과시용으로 착각하는 것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그의 뺀질함은 역시나 심하다. 자기가 위기에 몰렸다고, 화가 난다고 정남에게 해대는 소리들도 너무 심했고, 그걸 "화나니까 그냥 해본 소리"로 슬쩍 넘어가려 드는 것도 참 뻔뻔하다. 정남과 다시 재회한 그녀의 첫사랑 상윤(임지규)은 어떠한가. 처음엔 왕자님처럼 나타났다. 어리버리해서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 거야 귀엽다고 해줄 수 있고 정남 앞에서 쭈뼛거리고 수줍어하는 것도 그렇게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치곤 꽤 순박한지라 호감도 팍팍 간다. 현수와 함께 있는 정남을 보고 오해한 것까지도 그럴 수 있다 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하는 그의 행동이 중요한 것 아닌가. 어쩜 그렇게 찌질한 남자의 전형적인 못난 짓은 다 골라가면서 할 수 있는지. 게다가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까지 더 하면, 아이고야,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할 수 있나, 못나도 이렇게 못날 수가 있나.

반면 박보영이 연기하는 정남/재인을 보라. 처음 그녀가 관객에게 어필하는 매력은 촌스러운 외모와 저돌적인 당돌함, 그리고 그 무표정하고 뚱한 얼굴에 있다. 다짜고짜 아버지 집에 자기 아들 손을 붙잡고 쳐들어간 거야 영화의 첫 '해프닝'을 만들기 위해 그런 거고, 이후 그녀가 현수에게 하는 말들을 가만 들어보면 틀린 말이 하나 없다. 그녀도 꽤 많은 고민 끝에 찾아갔고, 그녀가 내세운 뻔뻔함은 뻔뻔함 축에도 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22년간 보지 못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그로 인한 상처를 달래기 위한 자기방어 기제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자신을 딸로 인정해주기만을 바랐고, 그조차 젊디젊은 아버지에게 그리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이해한다. 그래도 자기 꿈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아버지 집을 나와서는 식당에서 먹고자고 일을 하는데, 그 바쁘고 힘든 점심시간 일크리에서도 그렇게 열심인 데다 친절할 수가 없다. 항상 방실방실 웃으며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총알처럼 튀어다닌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그녀가 차태현과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유머와 개그가 거의 대부분 그 뚱하고 무표정한 얼굴과 말투에서 나왔다는 걸 상기해본다면, 식당에서 정남이 그렇게 웃으며 일하는 장면은 이 캐릭터의 건강함을 그대로 증명해주는 것이자, 보는 관객에겐 힘들어서 눈물짓는 장면보다 더 안쓰러움을 선사한다. 현수가 들이대는, 기동이가 다녔던 유치원의 원장님(황우슬혜)은 또 어떠한가. 현수가 알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기동이의 고민과 천부적인 피아노 재능을 발굴해준 게 바로 그녀다. 현수에게 먼저 저녁을 먹자고 제안하고, 현수가 할아버지란 게 다 밝혀지고 나서 그녀가 보여주는 반응도 걸작이다.

과속스캔들

이 영화에서 세 사람의 유머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컷.

포스터와 소개글만 보면, <과속스캔들>은 황당한 설정으로 시작해 어이없는 억지 설정과 웃기지도 않는 엉터리 말장난으로 대충 뭉개면서 시간이나 끌다가 막판에 감동의 눈물 한 번 찍 주려고 작정한 영화처럼 보인다. 제목부터 그런 뉘앙스를 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그렇지가 않다. 감독은 영화에 차용한 코믹한 요소들을 절대로 유통시한을 넘겨가면서까지 사용하지 않는다. 일회용은 일회용으로, 두 번 쓸 것은 두 번 쓸 것으로 깔끔하게 끝내버린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지루해 하품을 하는데 감독과 배우들만 웃기다고 우기는 코미디를 반복하는 일은 없다. 참 뻔한 설정으로 시작해 뻔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데도, 그 과정들은 믿음직한 사건들과 디테일에 충분히 웃기는 유머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연출의 리듬감도 아주 좋다. 씬마다, 씨퀀스마다 마무리가 아주 깔끔하고 다음 장면으로 부드럽게 넘어갈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가 적절한 타이밍에 제대로 리듬감을 탄다. 액션과 리액션의 감각이 상당히 좋다. 게다가 정남이가 얼굴에 마스카라 범벅이 된 채 무대에 있는 현수에게 올라가 통곡하는 장면이 주는 파워가 대단하다. 어찌 저 어린 배우가 저런 감정을 토해낼 수 있나, 참 놀랐다. '애를 잃어버리고 정신줄을 놔버린 엄마'의 모습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내다니, 고백하자면 나도 이 장면에서 펑펑 울었다. 후반에 가서 '훈훈한 가족간 감동'이 강조되면서 살짝 늘어지는 감이 있지만, 영화가 내내 주었던 웃음과 재미에 비하면 그 정도 흠결이야.

"나도 몰랐는데 아빠가 돼 있었다네" 설정의 코미디의 거의 끝물에 나온 <과속스캔들>은, 이 부류의 영화 중 가장 웃기고,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비록 장르영화로서 틀에 딱 맞춘 일정한 공식 때문에 다소 식상한 감은 있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장르영화를 보는 이유도 바로 그 이유 아닌가. 그 한도 내에서 이 영화는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차기작이 매우 기대되는 신인감독이 다시 나왔다.

2008/12/06 22:48 2008/12/06 2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