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ubt

그러니까 영화의 줄거리가 아무리 소박해도, 불꽃튀는 배우 둘(... 셋이기도 하고...)을 붙여놓으면 이렇게까지 스펙!따!끌! 해질 수 있다는 거. 게다가 이 정도면 연출도 아주 좋고. 원래 연극인 작품, 꽤 훌륭하게 영화로 옮겨놓은 건데, 정말 배우들이 훌륭하시니 영화가 번쩍! 번쩍! 막 광채를 발한다. 오죽하면 영화 끝나고 우연히 만난 다른 매체 기자랑 같이 본 우리 객원기자랑 해서 한 시간이 넘게 수다를 떨고 앉았어, 영화 감탄하느라;;; 원래 메릴 스트립은 거의 매년 아카데미상에 그저 예의차 후보가 올려지는 편이었지만 이 작품에선 정말 고개가 절로 흔들릴 정도로 미친 연기를 선보이신다. 케이트 윈슬렛이 못 타도 앤 헤써웨이가 못 타도 메릴 스트립이 오스카 여우주연상 가져간다면 내 두말 못 하고 그냥 닥치고 박수칠 거다. 게다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앙앙앙 우리 곰돌이 아저씨 어쩜 여기서도 그렇게 연기를 잘 하시나효. 이 아저씨 아무리 표정은 순둥이에 이따만큼 배나오고 해도 걍 막 왕쎅시 왕귀염일 수밖에 없다능. 연기를 이렇게 잘 하시는데. 게다가 젊은 수녀 에이미 아담스도 참, 발군이더라. 거기에... 난 사실 밀러 군의 어머니가 짧게 한 씬에서 나오는데 길 걸으면서 메릴 스트립과 대화나눌 때 우와, 정말 뻑 갔다. 그러니까 진짜 타짜인 배우가 진짜 제대로인 연기를 선보일 때 가슴 한줄기에 서늘하게 바람이 부는 거, 이 영화에선 어째 한 씬 조연이 나올 때도 부냔 말이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게, 아마 이 아줌마도 골든글로브에선가 조연 후보에 올랐었지, 단 한 씬인데. 사람 눈이 다 거기서 거기구나 싶기도 하고. 한줄기 눈물 주룩 흘리면서 뭐라뭐라 말하는 그 장면 진짜, ...

영화 내용도 사실 상당히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그러니가 뭐야, 확신과 의심과 의지 사이에서 사람 일이란 게 이럴 수도 있구나 싶은 게. 난 이 영화가 끝내 바로 그때 그 사건을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게 탁월한 선택이었고, 실은 그거야말로 이 작품의 본질이었는데 영화로 매체가 옮겨지면서도 그 본질을 잘 지켜냈다고, 진짜 막 감탄하고 박수치고 싶다. 그래, 지 믿고싶은 대로 믿는 게 사람인기라. 난 여전히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메릴 스트립의 그 마지막 장면, 그 울음 터뜨리는 장면은 진짜...

아아 제발 두르두르들 보고들 배우셈. 이런 각본은 진짜 닥치고 배워야 한다. 고맙습니다, 여러분들, 이런 영화를 보여주셔서. 전 이 영화로 오늘 하루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ps. 김혜자 주연으로 국내에서도 막이 올려진 적이 있다. 확실히 마지막 장면에서 부감숏으로 그렇게 끝나는 건 연극 원작답더란.

2009/01/31 03:46 2009/01/31 03:46

대체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제발 이 따위 필름뭉치를 '영화'랍시고 만들지 말아달란 말입니다. 그건 영화에 대한 모독이라고요.

마린보이

가뜩이나 수면부족에 시달리는데 내 이 따위로 시간낭비해야 쓰겄나.


아니 뭐 처음 40분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 조금 껄렁할락 말락하는 김강우가 딱히 나쁜 것도 아니었고 참 필사적으로 이쁜 척한다 싶긴 했는데, 딱 박시연 등장하고서부터 어째 장면들이 죄다 헐리웃 누아르를 참 쉽게쉽게 그것도 참 쌈마이로 모방한다 싶었지만 그래도 아니 뭐 그래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싶었다. 근데 이건 뭐 가면 갈수록 대체 이런 괴상하기 짝이 없는 필름 뭉텅이를 진지하게 영화랍시고 만들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놀라움에 이 싸람들이 장난하나 허탈한 웃음까지. 조재현이 참 욕 봤다. 사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조재현이다, 아 그 절절한 순애보라니 ㅠ.ㅠ 이원종도 나쁘진 않았는데 절정에서 이원종이 우스워진 건 이원종의 연기가 아니라 연기 연출을 괴상하게 해댄 감독의 잘못이다. 야, 원래 광기에 찬 캐릭터라 배우는 광기에 차서 돌아가는데 그 순간에 코미디가 하고 싶냐? <하피>의 뒤를 이을 진정한 괴작이로구나. 민규동 감독님 미안해요, 아무리 애정어린 차원이었다곤 하나 <앤티크>를 괴작이라고 불렀던 건 제가 뭘 모르고 한 짓이었어요, 아니 전 정말 이런 수준의 영화가 나올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을 못했다니깐요.

장난하지 마라. 영화가 장난이가? 몇십억 들여 만들어 다시 몇십억 들여 홍보하는 상품이, 장난이가?

2009/01/31 03:32 2009/01/31 03:32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케마님 만세여요 ㅠ.


F. 스콧 핏제럴드와 데이빗 핀처라니 이게 대체 어떤 조합이야, 가능하기는 한 조합이냐, 이러면서 궁금해 죽을 지경으로 두근대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드디어 시사회를 가서 봤는데, 어머나, 전날 밤에 imdb 찾아보고 조금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원작에서 그냥 80세 노인의 몰골로 태어나 나이를 거꾸로 먹다가 갓난아기로 죽는 벤자민 버튼, 이라는 설정만 딱 가져오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다. 주요 기둥은 그가 데이지([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 이름이 바로 데이지다. 물론 영화에서의 성은 책과 달리 뷰캐넌이 아니라 풀러이지만)라는 여자와 평생에 걸쳐 나누는 사랑 이야기인 셈인데 이 사랑 이야기가 나는... 미칠 듯이 좋았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나 이런 데에서 그냥 피상적으로 다루는 일생의 단 한 명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사랑 운운이 아니라, 가장 완벽한 형태의, 서로 완전히 신뢰하고 아끼며 우정에 기반하면서도 불꽃을 가진 바로 그런 사랑이다. 그래서 이들이 사랑의 절정을 맞는 것도 20대가 아니라 40대가 되어서고. 하지만 뭐 어린 데이지가 침대 밑에서 노인 몰골의 어린 벤자민의 뺨을 만지던 그 짧은 순간도 무지 로맨틱하고 예뻤다. 늙은 데이지가 갓난아기 벤자민을 품에 안고 있는 장면도, 그 갓난아기 벤자민이 할머니 데이지 품에 안겨 생의 마지막 눈을 감는 장면도 눈물이 절로 나왔다.

이 영화의 색채는 사실 내가 핏제럴드의 소설들을 읽으며 느끼고 그렸던 색과는 많이 다른 편인데,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풍겨나오는 그 빛나는 로맨티시즘은 핏제럴드의 로맨티시즘에서 속물성과 시니컬함을 살짝 뺀 버전과 똑 닮았다. 그래서 더 빛나고, 아름답고, 황홀하다. 성인이 된 데이지가 처음 등장하는 데에서 데이지는 영락없이 [위대한 개츠비]의 그 속물적이고 얄팍한 데이지와 똑 닮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달라진다. 핏제랄드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묵직한 진지함이 벤자민과 데이지에게 스며든다.

당연히도,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사랑만은 아니고, 실은 삶과 죽음의 교차이다. 원작과 전혀 달리 벤자민 버튼은 친부한테서 버려져 양로원에서 자라게 되는데, 이크 양로원이 어딘가.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곳 아니던가. 애초 영화의 시작부터 죽음을 눈앞에 둔 데이지의 회상으로 시작하면서 이 영화에는 끊임없이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죽음이 삶의 일부임을 조용히 웅변하고, 그리고 인생의 이런저런 순간들이 얼마나, 정말 얼마나 빛나는 순간들인지 절절하게 그려내는지라, 이 영화만한 '삶의 찬가'도 보기 힘들겠단 생각이 든다. 실제로 벤자민 버튼은 나이를 먹으며 점점 빛나는 젊음을 얻어가고 그간 인생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바탕삼아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낸다. 반면 데이지는 교통사고 이후 꿈을 접고, 한없이 빛나는 육체를 가진 벤자민 앞에서 자신의 늙은 육체를 부끄러워 하는데, 아이고, 그 절절함과 애잔함이 못내 마음 아프면서도, 원숙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데이지의 모습이 또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면서, 치매를 겪으며 '아이'가 된 벤자민을 거두는 그녀의 손길의 그 따뜻함이 스크린을 보는 나한테까지 온몸으로 전해지면서, ...

사실 나는 퀴니가 처음 등장해 벤자민을 향해 첫 대사를 칠 때부터 그냥 눈물 펑펑펑이었는데, 퀴니 역의 타라지 P. 헨슨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고 백배 동감을 했다. 그냥 퀴니 언니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완소 감동 대사들이라능. 2시간 46분, 꽤 긴 러닝타임에 중간에 살짝 지루한 부분도 없진 않지만, "내 인생은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말그대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그깟 세 시간에 보는 거면, 짧게 보는 거지. 그냥 이 영화는 논리적으로 어쩌고 저쩌고 떠들기보다 그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느끼는 수밖에 없는 듯. 큰일이다, 리뷰를 쓰려면 아무래도 개봉 전에 한 번 더 봐야겠다. 하여간에 결론은,

핀처행님 만세! 케마님 만세! 핀처행님 짱이에요 케마님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주시다니 엉엉엉

2009/01/31 03:13 2009/01/31 03:13

작전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들만큼 폼재며 살고 싶은데 가진 밑천이 너무 없을 때, 사람들은 종종 도박이나 복권의 유혹에 빠진다. 그 도박의 종목이 옛날엔 투전이었고, 고스톱이었고, 포커였고, 이젠 주식이 됐을 뿐이다. 아무런 생산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허수의 돈을 사고파는 주식시장, 그리고 그 바닥에서의 '타짜'를 다루는 영화. 그러니까 결국 <작전>은, 종목이 주식일 뿐인 도박 범죄영화다. 한 탕 크게 하기로 하고 작전을 세운 한 팀의 인물들이 각자 딴 궁리를 하며 제 주머니를 챙기려 하고, 그래서 배신과 배신의 틈바구니 와중에 목숨과 운명이 왔다갔다 하는. 일견 복잡해 보이는 대결구도도 결국 악당 박희순 대 우리편 박용하로 심플하게 정리된다. 그러니까 결국, 화투패 모른다고 <타짜> 못 보는 게 아니듯 주식 모른다고 <작전> 못 보는 건 아니라는 거. (나도 주식은 전혀 모른다.) 굳이 캐릭터에 억지로 힘을 주지도 않고 착한 척 포장하지도 않고 담백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간다. 악당이라고 그냥 평면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결국 주식시장에서 중요하기 짝이 없는 게 '타이밍'인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전형적인 장르영화의 플롯에 심플한 대결 구도 속에서 배신과 공격과 방어를 언제 하느냐, '타이밍'이 관건이 된다. <작전>은 신인감독치고는 무난하고 적절히 긴장을 잃지 않은 채 플롯을 풀어나간다. 때로 카메라가 답답한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큰 흠은 아니다. 최동훈 감독도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에서 신인감독다운 자잘한 실수를 했으니까. 뭐 이만하면 세련된 범죄영화고, 주목할 만한 데뷔작이다.

'껄렁한' 박용하가 의외로 잘 어울리고, 비열하고 경박하면서도 무서운 악당 박희순은 역시 기대대로 아주 좋다. 뮤지컬계에서 각광받다가 드라마 한 편(<일지매>)을 거쳐 영화에 입성한 '뺀질한' 김무열도 그만하면 데뷔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그런데 처음 티저 포스터 풀렸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박용하가 대체 언제부터 짝퉁 지현우가 됐나염.

2009/01/30 03:54 2009/01/30 03:54

Changeling

재즈의 시대를 통과한 여성의 얼굴.

아이가 유괴됐다가 경찰에 의해 5개월 후 엄마의 품에 돌아온다. 그런데 엄마는 이 아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경찰은 그녀가 충격에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거나 아이를 유기하려는 목적으로 쇼를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1928년 미국 LA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 사건을, 여느 감독이라면 엄마가 정신이상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미스터리 스릴러로 만들거나, 진실을 파헤치는 제3자의 주인공을 내세운 서스펜스 스릴러로 만들었을 것이다. 혹은 부패하고 음울했던 당시 LA를 배경으로 히스테릭한 엄마를 돕는 고독한 사설탐정의 활약을 그린 누아르 영화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요정에 의해 바꿔치기 당한 아이'를 가리키는 원제의 느낌대로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물이 됐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 어떤 장르영화용으로도 매우 흥미진진한 아이템이 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누아르 장르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 이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20대 말에서 1930대 중반의 미국이란, 1차 세계대전 이후 번영과 풍요를 자랑했던 이른바 '재즈의 시대'이자 금주법의 시대가 막 종언을 고하고 대공황이 발생한 시기이다. 유수의 누아르 영화들이 즐겨 묘사하던 바로 그 시대인 데다, 영화의 중심 사건은 누아르 영화들이 즐겨 그리던 '경찰의 부패'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이미 만들어진 지금의 영화에 스릴러나 누아르의 특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이의 행방의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은 스릴러의 공식을 적절히 활용하며, 경찰의 부패 실상을 그리는 인서트 씬이나 존스 반장과 경찰청장이 사무실에서 만나는 씬 등은 전형적인 누아르의 화면을 선보인다. 즉, 빛을 최소화하고 강렬한 명암대비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거장의 범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한숨에는 그런 '기막힌' 요소들이 속절없이 '낭비돼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가장 우직하고도 심심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가 전적으로 옳았다고 처음부터 전제하면서, 아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시스템에 맞서 싸우게 되는 한 인간의 휴먼 드라마로 만들었다.

물론 위대한 모성을 투쟁을 그린 영화는 흔하며, 힘없고 나약하며 무지한 한 개인이 시스템 전체와 맞서 싸우는 전사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도 100년이 넘는 영화사에 발에 채일 정도로 널려있다. 그런데 이스트우드 감독이 강조하는 모성은 남자 예술가들이 즐겨 묘사하는 전형적인 '위대한 모성 신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영화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운 길도 걷는 '엄마'보다는, 자신의 실존을 걸고 투쟁하는 '인간'이 모습에 집중한다. 모성은 말하자면 거대한 맥거핀으로, 그 투쟁에 강력한 동기와 추동력이 되었을 뿐이다. 대신 이스트우드 감독이 집중하는 것은 재즈의 시대를 통과하며 진취성을 갖게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시대적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는 여성, 그 여성이 '착한 남자들'의 적극적인 도움 하에 온 힘을 다해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이다.

시대가 타락하고 공권력이 부패하면 그 사회의 가장 약자들이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되는 법이다. 이스트우드 감독의 눈에, 부패가 극에 달했던 저 시대는 아이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데도 공권력이 이 아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아이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 하는 시대이자, 여성이 자신의 주장 한 마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대이다. 경찰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기는커녕 어이없는 말로 그녀의 말을 무시하다가 급기야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원에 쳐넣는다. 그녀를 돕는 착한 남자들 역시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녀의 말과 믿음을 그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상실감과 슬픔으로 인한 현실 회피로만 치부해 버린다. 그들이 그렇게 여길 여지가 충분했다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또 한 명의 주변인으로 소외시킨다. 존스 반장을 증언대에 올린 재판 장면이 단적인 예이다. 변호사는 유난히 독하고 센 어조로 그녀의 아들이 죽었음을 장엄하게 선언한다. 이 순간 이스트우드의 카메라는 크리스틴의 묘한 표정을 여러 번 인서트 씬으로 교차시킨다.

Changeling

여성인 그녀의 목소리는 반복해서 무시되거나, 지워지거나, 대체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 시대 그렇게 숨을 죽인 채 자신의 말조차 남자들의 입과 권위를 빌어야 했던, 그 와중에 자신의 의지가 다시 한번 굴절되어야 했던 여자들의 그간의 고통에 대한 다독거림으로 읽힌다. 브리그랩 목사(존 말코비치)나 변호사, 혹은 이들을 돕는 제3의 사설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이 영화는 미학적으로도 장르영화적으로도 훨씬 흥미진진한 영화가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크리스틴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녀를 돕는 이들 역시 조력자이자 조연의 위치로 한정시킨다. 아마도 이스트우드 그 자신이 브리그랩 역을 맡지 않은 것도, 영화적 기법이나 테크닉의 면에서 담백한 절제미를 유지한 것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온전히 크리스틴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쇄살인을 다루는 영화 속 또다른 기둥의 씬들이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것에서 이런 추측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연쇄살인 회고씬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하며, 우연히 그 사건을 맡은 형사는 존스 반장과 달리 어린아이의 증언에 오롯이 집중함으로써 사건의 본질에 도달한다.)

그렇게 그 시대가 외면했던 한 여인의 진실을, 이스트우드 감독은 오롯이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이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냄으로써 대신 사죄를 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태도에는, 크리스틴의 목소리를 옮기고 있는 자신 역시 남자 감독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겸손함과, 그렇기에 행여 그녀의 목소리가 또 다시 왜곡될까 두려워하는 신중함이 함께 녹아있다. 이 영화가 진정한 걸작인 이유도, 이스트우드 감독이 진정한 거장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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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실린 '관련 토크' (새 창으로 열기)보기.

2009/01/30 01:19 2009/01/30 01:19

東京マ-ブルチョコレ-ト

하나의 사건을 그 남자의 관점, 그 여자의 관점으로 다시 풀어주는 게 언제적 유행인데 이걸 또... 귀에 적당히 달달한 J-Pop에, 알콩달콩하면서도 수줍고 소심한 자신감 없음을 표하는 캐릭터들에, 별 사건 없이 그런 식의 소소한 감성을 그렇게 일일이 세밀하게 그러나 상당히 순정만화스러운 터치로 그려내는 방식까지, 확실히 '감수성 예민하다'고 자처하는 십대들이 좋아할 만하겠다 싶다. 내게는 그냥 거대한 뮤직비디오로 보였다. 뮤직비디오, 좋지, 짧은 건. 장편 애니메이션치곤 짧은 55분이지만, 뮤직비디오로는 끔찍하게 길다. 결정적으로 노래들도 내 취향이 아니다. 딱, 포스터에 나온 공중부양 그림만큼은 참 예쁘더라만. 숨겨놓은 나의 1인치 소녀감성이 오늘 이 영화엔 반응하지 않았다.

2009/01/16 16:49 2009/01/16 16:49

<베토벤 바이러스> 강마에 (김명민)

강마에는 2008년 드라마들에 나왔던 캐릭터 중 가장 엽기스러운 인물이다. 그의 독설은 듣는 사람이 기어이 울면서 뛰쳐나가게 만들고, 안하무인과 독선과 거만함은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도 그의 막가는 말은 무지막지한 설득력을 주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새 절대적인 충성과 애정을 자발적으로 바치게 만든다. 급기야는 드라마가 덜컹거리고 주변 캐릭터들이 다 망가지는 와중에도 드라마 전체를 구원해 버린다. 이건 모두 김명민 때문이다. 김명민 덕에 강마에는 사악하고 교활한 악당으로 등장한 뒤 혐오 대신 환호를 받았다. 결국은 속 모르고 어리석은 주변 중생들의 부당한 비난과 배신을 묵묵히 감수하고 홀로 십자가를 지며 중생을 구원하는 예수가 됐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의 마력에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그렇게 뛰어난 미남은 아니다''라고 애써 강변하며 그를 깎아 내리려 해봤자 소용없다. 그는 손 한 번 잡는 것으로도 처녀를 잉태하게 만들만한 남자다.

<달콤한 나의 도시> 오은수 (최강희)

베스트셀러였던 정이현의 동명소설이 드라마화 되면서 주인공으로 최강희가 낙점 됐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의 우려는 그녀가 너무 예쁘다는 거였다. 털털하고 엉뚱한 개구쟁이 소년과 더없이 귀엽고 낭만적인 소녀의 이미지를 함께 가진 그녀의 독특한 매력은 30대에 진입해도 철이 없다거나 주책으로 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에선 어른으로 대접과 기대를 받지만 자신은 스스로를 여전히 10대의 ‘애’처럼 여기는 30대 여자들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심리를 가장 적절하게 드러낼 수 있는 특징이 된다. 과연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오은수가 된 최강희는 지금의 30대를 사는 여자들의 가족과 일, 사랑에 대한 고민을 대변해줬다. 이선균과 지현우를 오가며 30대 여자들의 연애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대신 충족시켜 줬고, 성격이 극단적으로 다른 친구들인 진재영과 문정희 사이를 적절히 조율하며 ‘여자들의 우정’에서 의리의 축을 받쳤다. 그러면서도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 참 사랑스러운 그녀다.

<그들이 사는 세상> 정지오 (현빈)

현빈은 여느 귀공자 타입의 미남들과 달리 이상스러운 현실감이 있다. 그렇기에 브라운관이 됐든 스크린이 됐든 언제나, 반쯤은 허구와 판타지의 세계에, 반쯤은 현실 세계에 어정쩡하게 발을 걸친 듯 불안해 보였다. 여자들의 욕망과 환상을 체현해 주는 비현실적인 기표로 소비되는 와중에도 다른 뉘앙스를 만들어내곤 했다. 단순히 ‘대상’으로만 남는 걸 완강히 거부하는 듯한 고집스러운 면모를 종종 내보였다. 게다가 타고난 목소리와 또렷한 발성 덕에, 입만 열면 ‘깨는’ 다른 젊은 배우들과 더욱 달랐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야 현빈은 마침내 현실에 착지해 땅에 굳게 발을 붙이고 섰다. ‘주준영(송혜교)의 성장담’이기도 한 이 드라마에서 현빈이 연기한 정진오정지오는 준영의 ‘롤 모델’로서 여전히 ‘대상’이자 기표로 존재하면서도, 이상적인 면모들 속에 지극히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를 함께 가진, 정말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배우 현민’의 앞으로의 모습이 더욱 기대가 되는 건 이 때문이다.

http://premiere.elle.co.kr


1. 작년 드라마 결산 최고의 캐릭터/배우에 대한 글 중 내가 쓴 것들. 어쩌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쏙쏙 골라 쓰게 됐다.

2. <그들이 사는 세상>의 현빈 캐릭터 이름이 '정진오'라 돼 있는 건 아무래도 편집상의 실수... 인 줄 알았는데 보낸 원고 확인해보니 어머나! 오타 낸 게 그대로 실렸어! 이런 민망할 데가!! '정진오'가 아니라 '정지오'가 맞다. ㅠ.ㅠ

3. <베토벤 바이러스>가 탄탄한 작품성을 자랑하는 드라마라는 데에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달콤한 나의 도시>는 충분히 사랑스러웠고 <그들이 사는 세상>은 (아마 가장 최근 방영됐단 이유가 크긴 하겠지만) 작년 드라마 중 나의 베스트이기도 하다. 노희경 식 내레이션은 이제 너무 넘친다 싶어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생생하게 손에 잡힐 듯한, 정말 내 옆에 살고있는 사람들인 것만 같은 그 진한 사람냄새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울고 웃었다. 그래, 모름지기 드라마란, 이래야 한다.

4. 김명민 글 마지막 문장에 대해 디씨 김명민 갤 사람들 일부가 열광적으로 반응해줬는데, 사실 강마에가 두루미의 손을 잡았던 그 씬에 대한 나름의 오마쥬이다. 물론 팬들이 그걸 모를 리는 없을 거고, 그 반응들 보니 너무 재밌고 즐겁더란.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공식 매체에서 칭찬이나 찬사를 듣는 걸 싫어할 팬이 어디 있으랴.

5. 수많은 배우님들, 올해도 수많은 작품들로 우리를 웃기고 울려주세요.

2009/01/15 17:50 2009/01/15 17:50

오른쪽  사이드바 메뉴 중 Entry Hit Chart는 이 블로그에서 1년간 쓴 글 중 가장 높은 히트수를 차지한 글 순서대로 나오는 순위이다. 기간은 정확히 오늘부터 365일 전까지, 자동으로 1년간을 기준으로 삼도록 설정돼 있다. 얼마 전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에 대한 리뷰글이 대망의 1위에 올랐는데, 검색봇의 클릭 등을 제외한 순 클릭수가 현재 4,165이다. 이 블로그에 있는 글 전체를 통틀어도 3위다. (1위는 <타짜> 리뷰, 2위는 <캐리비언의 해적 2 : 망자의 함> 리뷰이다.)

어쨌든 이 포스트는 <황진이> 글이 대망의 1등을 먹은 것에 대한 자축글이다. 이 블로그가 이제껏 견지해온 방향은 그저 엔터테인먼트로서 최신 영화에 대한 정보 제공이 아니라, 시대와 국적을 막론하고 대중'예술'이기도 한 영화들에 대한 좀더 진지한 접근을 하는 쪽으로 방점을 찍어왔기 때문이다. <황진이> 1등은 이 방향이 잘 지켜져왔다고, 이 블로그가 그런 입장을 공유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 내지 신뢰를 주고 있다고, 그렇게 '자뻑'해도 된다고 확인 도장을 받은 듯한 기분이다. 나는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이 블로그에서 무려 11편이나 다루고 있는 배창호 감독의 영화글 중 하나가 가장 사랑받기를 원했다.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게다가 배창호 감독의 다른 영화인 <기쁜 우리 젊은 날>에 대한 글도 10위에 올라있다.

순위에 올라있는 글들 중엔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 노래를 담은 글도 있다. 이 글은 얼마 전 <황진이> 리뷰 글이 1등을 먹기까지 계속 1위였다. 나도 가슴이 답답해서 올린 노래인데, 영화 관련한 포스트도 아닌 이 글이 계속 1위였다는 건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재미없고 우울한 시대인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더욱 속이 상한다.

프레드 진네만의 <지상에서 영원으로> 리뷰 글도 꽤 높은 등수에 랭크돼 있다. 현재 힛수는 3,917. 이 블로그에서 가장 단기간 내 가장 많은 클릭수를 낳았던 <다크 나이트> 리뷰는 6위다. 그땐 하루에 몇천 명도 들어왔는데(현재 평균 하루 600여 명), 등수는 아직 그렇다. 현재 힛수는 3,372. <황진이>나 <지상에서 영원으로>보다 관심을 덜 받는 <다크 나이트>라, 아마 이 블로그에서나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블로그가 뿌듯하다.

2009/01/15 17:48 2009/01/15 17:48

Changeling

1. 1928년에서 1935년. F. 스콧 핏제럴드가 명명한, 1차 세계대전 이후 반짝 누렸던 번영과 풍요와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인  이른바 '재즈의 시대(Jazz Age)'가 종언을 고하고 뉴욕의 주식시세가 폭락하면서 대공황을 경험한 바로 그 때다. 안젤리나 졸리의 짙은 화장과 직장을 다니며 혼자 아이를 키우는 진취적인 여성의 특징은 재즈의 시대를 통과한 여성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2. 경찰을 묘사할 때마다 누아르적 화면이 등장한다. 특히 경찰청장이 존스 반장을 사무실에서 꾸짖는 장면은 강한 명암 대조를 이루며 특히 존스의 얼굴의 반 이상을 그림자로 채운다. 구스타프 목사(존 말코비치)가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에게 LA 경찰의 부패를 말해주는 장면에서 등장한 경찰들의 인써트 씬도 누아르 장르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사실 이 영화의 토대가 된 사건은 누아르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이야기이다.

3. 지혜로운 보수주의자 남성은 때로 진보를 자처하는 친페미니스트 남성보다 더욱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쉽다. 이 영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대체 아무리 크리스틴이 "얜 내 자식이 아니라"고 강변해도 경찰과 그 일당은 너무나 어이없는 말로 그녀의 말을 무시하는데, 후반부에서 크리스틴을 돕는 착한 남자들도 크리스틴의 말에 별로 귀를 안 기울이는 건 마찬가지다. 재판 장면은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씬이다. "당신같은 경찰들 때문에 저 여자의 아이가 죽었다!"고 강력하게 변호사가 선언할 때 크리스틴의 그 묘한 표정이라니. 여성을 억압하는 것도 가부장제 하 남성들이지만, 여성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도 결국 남자들의 말을 통해야만 할 수 있었던 시대에 대한 극단적인 고발. 이 영화에서 크리스틴을 제대로 존중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를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다. 감독은 크리스틴의 뜻과 의지를 고스란히 듣고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이스트우드 감독 역시 남자다. 이스트우드 감독도 분명 이를 통찰하고 있을 것이다.

4. 크리스틴의 말과 의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존중해준 사람이 클린트 한 명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체인질링>을 거장의 범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들은 대체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긴 한데, 그것은 바로 이스트우드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위해 포기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의 완성도를 일부 포기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의 의지를 전적으로 존중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체인질링>은 내게 진정한 의미의 진짜 걸작이다.

5. 솔직히 이 영화, 쉽지 않다. 보고 나면 진이 빠진다. 그런데 7, 8천원 내고 별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를 보거나 별 감동적이지도 않은 영화를 보며 기분 상하느니 이 영화를 보고 제대로 진을 빼는 편이 훨씬 낫다. 세상에, 이런 걸작을 보는 데에 7, 8천원밖에 안 내도 된다는 건 이 '대량복제 시대가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스트우드 감독이 최근 10년간 내놓은 영화들 중엔 걸작 아닌 영화가 없다. 범작이라도 웬만한 감독의 잘 찍은 영화 이상은 된다. 하나씩 다 찾아볼 것을 권한다. (누가 어디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회고전 좀 해줬으면.)

6. 그러니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 부디 계속 건강하시어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많이도 안 바라고 그냥 1년에 영화 한 편씩. <그랜 토리노> 벌써부터 기대 만빵입니다.

7. 정식 리뷰를 쓰고 있는 중, 아마도 이번 주 내에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2009/01/15 15:09 2009/01/15 15:09

허균의 텍스트에 나오는 홍길동과 이 텍스트가 오랜 시간을 통과하며 고전이 되는 와중 새로 의미가 덧붙여지고 해석이 풍부해지는 가운데 수정 보완된 홍길동, 아울러 이의 일환으로 결정적으로 작년 초 방영됐던 드라마 <쾌도 홍길동>의 결을 통과한 뒤의 홍길동은 좀 다르다. <쾌도 홍길동>에서의 홍길동은 처음에 본인이 대중의 영웅, 인민의 영웅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행했던 어떤 일들이 민중들에게 의적행위로 '오해'를 받았고, 그 와중에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점차 사회에 눈을 뜬다. 그는 대중의 '호출'과 '요청'에 따라 점차 영웅이 되어갔고, 그는 그런 영웅이 될 만한 충분한 노력과 스스로의 존재증명을 하며 정말 영웅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지지한 이가 왕이 된 뒤에도(그를 왕으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아예 왕정 자체를 비판하며 계속 싸우고자 한다.

일지매

드라마 <일지매>의 일지매에 투영된 작가들의 민중영웅관은, 좀 많이 허걱스러웠다.

이건 이준기가 나왔던 드라마 <일지매>와도 대조가 되는 설정이다. 이준기의 <일지매>에서 일지매는 순전히 개인적 필요에 의해 일련의 행동을 하면서 의적으로 오해받자 그 오해를 고스란히 자신의 명예로 취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사적인 복수에만 집착한다. 당시 벌어지고 있던 촛불집회의 이미지까지 끌어들인 항의집회에서 그는 민중들의 분노와 저항을 졸지의 자신의 영웅놀음으로 탈바꿈시키고 집회에 참여한 이들을 순식간에 영웅에 환호하는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는 놀라운 뻔뻔함을 과시하기까지 한다. 내가 배우들에게 느낀 호감과 별개로 이 드라마에 분노를 느꼈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반면 <쾌도 홍길동>에서의 홍길동은 자신의 사적인 일련의 행동들이 의적의 정의로운 것으로 허구화되는 와중에도 무심하다가 각성을 거치면서 정말로 민중의 요구와 희망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왕의 위협에 겁을 먹은 민중들에게 얻어터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자신과 동지들이 건설한 꼬뮨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죽는다. 나는 여전히 홍자매가 만들고 강지환이 그려내 준 <쾌도 홍길동>의 홍길동이 진정한 의미의 모범적인 민중영웅이라 생각한다. 이는 심지어 원작의 홍길동의 한계까지 전복시킨 것이다. 원작에서의 홍길동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율도국을 건설한 뒤(홍길동이 실존했으며 율도국의 지리적 위치가 일본이라는 설이 있다) 거기서 왕이 되지 않았는가. 극본을 썼던 홍자매의 지적대로, 신분제에 저항한다면서 또 다른 신분제에서 자신이 왕 자리를 먹은 홍길동이라는 건 역시 양반 출신인 허균의 한계다. 결과적으로는 민중을 팔아먹고는 이씨가 아닌 자신이 왕이 된 것이니.

<쾌도 홍길동>에서 드라마 말미에 가면, 홍길동은 죽었지만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언제 어느 시대에나 홍길동은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영원히 죽지않고 계속 되돌아오는 민중영웅’을 직설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그 드라마에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들이 건설한 꼬뮨(=산채)에서 관군의 불화살에 육체적 목숨을 바친 홍길동도 진짜 영웅이지만, 활빈당 식구들 모두가 멋진 영웅들이었다. 홍길동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며 가장 나이어린 곰이를 굳이 밖으로 내보내는데, 연씨는 곰이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 허이녹은 왕의 아내가 될 수 있었음에도 홍길동 곁에서 함께 싸우기를 ‘스스로 선택’한다. 이들은 모두가 산채를 끝까지 지키며 죽음을 맞지만, 그 죽음은 비참하고 아픈 죽음이 아니라 관군의 불화살을 밤하늘에 가득 핀 불꽃으로 치환시키면서 기쁨과 설레임으로 가득한 또다른 시작이자 꼬뮨의 완성으로 묘사된다.

쾌도 홍길동

마지막을 맞는 활빈당 식구들. 하늘에 가득 쏟아지는 관군의 불화살을 불꽃놀이 보듯 하고 있다.


애초 미네르바는 sonnet님이 지적한 바로 그 이유(새 창으로 열기), 그리고 2071님이 언급하셨던 비슷한 이유(새 창으로 열기)로 나의 영웅이 아니었기에 별 관심도 없었고 잡힌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관심이 없지만, 직업상 대중문화/대중예술이라 할 만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데다 누구의 말을 빌면 사회학적 더듬이와 상상력이 발달해있는 편인 나한테 흥미로운 건 이런 물음들이다 : 왜 사람들은 미네르바를 이토록 숭앙하고, 잡힌 그를 보며 가짜라고 확신하는가. 여기에서 감지되는 대중들의 욕망은 무엇이며 이 현상에서 정작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반-이명박 전선으로 대동단결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모두가 말하는 근래, 사람들은 경제에 대해 특히 이명박 반대의 입장에서 뭔가 그럴 듯해 보이는 글을 연거푸 쓰는 몇몇 사람을 스타로 만들었고, 그들이 자신들이 바란 욕망을 대변해주는 영웅이 되길 바란 듯 보인다. 그 중 미네르바는 심지어 ‘인터넷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렸다는데, 결국 주식과 재테크로 요약되는 글을 써온 그가 대중들의 영웅이 된 데에서 그 욕망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대한민국은 전통적인 부자가 아니라 졸지에 부자가 된 사람들 천지인데, 일확천금을 꿈꾸는 게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닌 시대가 된 건가? 그런데 그가 잡혔고, 신상이 공개된다. 음모론이 만개한다. 그 와중에 우석훈은 미네르바를 홍길동이라 추켜세운다(새 창으로 열기). 다만 우석훈의 홍길동은 율도국에서 스스로 왕이 된 홍길동이다.

사실 <쾌도 홍길동>의 홍길동의 경우는 대중이 영웅을 호출해내고 거기에 욕망을 투영한 뒤 거기에 선택된 이가 대중의 호출과 욕망에 걸맞게, 그리고 영웅의 이름에 걸맞게 성장한 아주 해피한 케이스에 속한다. 현실 속에서 그런 해피한 케이스는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대중/민중의 영웅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과정은, 그가 워낙 대단하고 뛰어난 영웅이기에 대중이 그를 영웅으로 인정하고 떠받들게 되기보다는, 대중들이 끝없이 영웅을 갈망하고 호출하고 있으며 그렇게 호출된 '가상의 영웅'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키고, 거기에 일견 조건이 맞아들어가는 것 같은 후보를 골라 그 후보가 자신들이 바라는 바로 그 영웅이 되기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지금의 이 난리법석은, 대중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허상의 영웅 미네르바와 검찰에 잡혔다는 사람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일 터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결국 지금 잡힌 미네르바는 아무리 진짜라도 당연히 가짜일 수밖에 없고(아니 가짜여야만 하고), 앞으로 그 어떤 누가 진짜 미네르바라 나오거나 잡힌들 진짜가 될 수 없다. 결국 모든 미네르바는 가짜일 수밖에 없으며, 뒤집어 말하면, 진짜 미네르바는 없다.

그렇다면 더욱 중요한 건, 결국 미네르바를 통해 대중들이 이루고 싶어했던 그 욕망이 무엇인가, 가 아닐까. 그리고 왜 미네르바 현상이 발생했는가, 가 아닐까. 사실 '미네르바 현상'은 이름과 인물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 근래들어 계속 반복해 일어나고 있다. 황우석, 심형래, 신정아, 미네르바를 가로지르는 공통점은 그들이 실제 권위에서 출발했건 허상의 권위에서 출발했건, 사람들의 영웅 취급을 받았으며 그 뒤 그들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노력과 경력과 성과를 통해 권위를 부여받고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날조한 권위를 스스로에게 덧칠하는 형식으로 이들은 점차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만들어나갔고, 어느 순간 그 거품이 터지자 대중의 격렬한 반감과 지지/연민의 충돌점 한가운데에 놓이게 됐다. 날조와 기반의 바탕 위에서 진짜 경력을 만들었거나 만들려다 실패한 이들을 영웅으로 만든 대중의 욕망은 왜곡된 영웅에 대한 욕망, 현실을 도피하려는 욕망이며, 대단히 잘난 누군가가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기를, 그리하여 그 떡고물이 나한테도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욕망이기도 하다. 좀더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주로 백인들의 나라인 세계 선진국들로부터 별로 꿀리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빳빳이 세울 수 있는 나라에서 어깨에 힘줄 수 있는 정도의 돈벼락을 어느 날 맞게 되는 것. 이를 위해 잘난 누군가가 내게 그 정보를 아무 조건없이 그냥 풀어주는 것.

신정아는 실패했지만 나머지 셋은 강한 권력자로부터 핍박받는 순교자, 그럼에도 불의의 권력에 항거하는 투쟁자의 이미지를 지닌다. PD수첩이라는 언론권력과 나아가 제국인 미국, 돈 많은 유태인 지배자들으로부터 핍박받고 협박당한 황우석. 영화권력 충무로로부터 왕따당한 심형래. 그리고 극악한 독재정부로부터 탄압당하는 미네르바. 나는 미네르바가 긴급체포가 된 것에도, 구속영장이 떨어진 것에도 매우 비판적이긴 하지만, 미네르바로 상징되는,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것 같은 어떤 일정한 경향이 더욱 우려스럽다. 단적으로 말해, 파시즘보다도 포퓰리즘의 위험이 더 커보이고 무섭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택광도 히틀러가 등장할 만한 시기로 지적(새 창으로 열기)하고 있고, 나는 미네르바 현상에서도 그 흔적을 본다. 쟁가님 역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새 창으로 열기)해 주고 있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면, 시청율에 있어 <쾌도 홍길동>은 <일지매>의 적수가 못 됐다. 물론 드라마의 시청율을 좌우하는 것은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한국의 대중들에겐 쾌도 홍길동보다는 용이 일지매가 훨씬 더 친숙한 영웅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 영웅은 철저히 사적인 복수만을 진행시키는 가운데 가끔 떡고물로 돈을 던져주고, 민중 앞에서 쇼를 하며 환호를 챙긴다. 그래도 영웅이라는데. 자기 복수만이 관심사이건 말건 어쨌건 우리한테 가끔 돈을 던져주는데, 정부에 저항하는 것 같은데. 바야흐로 사짜가 횡행하는 세상, 그리고 그 사짜가 정말 사짜가 아닐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과 기대가 정부에 항거하는 민주주의 투쟁으로 둔갑하는 시대가 왔다. 이는 앞으로 더해질 것이다. 향후 10년간, 사짜들이 더욱 횡행할 것이라는 게 내 예상이다. 그럴 수밖에. 지금의 대한민국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기는커녕 다 날리고, 아예 20대가 열심히 일해서 일관된 자기 경력 하나 만들기가 대단히 어려운 시대가 됐으니까. 사짜 경력 만들고 가짜 권위를 만들기라도 해야 사람들이 비로소 눈 한 번이라도 봐주는 시대인데, 재주 좀 있는 놈들이 그런 식으로 가짜 권위를 만들어내려 하는 것도 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이건 벌써 일부 20대들도 재빨리 받아들여 활용하고 있는 처세술이기도 하다.

애초 글을 시작했던 며칠 전의 의도와 달리 글이 지나치게 시니컬하게 돼버렸는데, 이렇게까지 깝친다 해도 아마 단 한 마디 문장만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무수한 미네르바 지지자들로부터 이 글이 돌 맞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마지막 문장이란 이거다.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


ps. 미네르바 잡혔단 얘기에 가짜란 소리까지 돌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결국 다 지난 떡밥이 됐다. 뒷북글을 굳이 올린 건, 쓴 게 아까워서.

2009/01/14 13:37 2009/01/14 13:37

 

Valkyrie

오리지널 포스터 포스가 쩌는군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전작들, 그러니까 <엑스맨> 두 편과 <슈퍼맨 리턴즈>의 화려하고 스타일리쉬한 비주얼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작전명 발키리>는 다소 당황스러운 영화다. 2차대전 배경의 전쟁영화다운 볼거리는 영화 초반 주인공 슈타펜버그 대령(톰 크루즈)이 튀니지에 있다가 연합군의 공습을 당하는 장면 단 하나뿐, 그가 베를린으로 전출된 뒤 이어지는 사건들은 오롯이 은밀하고 치밀한 음모를 계획하고 구성하는 데에 치중한다. 폭탄이 터지는 장면도 단 한 장면, 거기에 총이 화면 정면에 제대로 등장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카메라워킹과 편집은 건조하고 브라이언 싱어 식의 재치있는 농담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주인공의 갈등이나 고뇌 같은 것도 없다. 영화의 첫머리에서부터 히틀러의 악행은 독일을 배신한 것이라는 슈타펜버그의 확고한 판단과 가치판단이 내레이션으로 제시된다. 그에겐 함께 행동할 사람인가, 아닌가의 판단만 남는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마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나 고뇌 역시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슈타펜버그가 아내와 함께 하는 씬은 오로지 세 씬이며, 그마저 대사가 거의 없이 눈빛과 표정으로 감정을 교류할 뿐이다. 그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건 단 한 씬, 그나마도 가족과 오랜만의 상봉을 축하하거나 석별의 정을 나누는 정서적인 장치는 극히 최소한으로만 삽입돼 있다.

그런데 우리는 브라이언 싱어가 슈퍼히어로물 이전에 <유주얼 서스펙트>와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과 같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화려한 CG나 다종다양한 트릭으로 감각적인 화면을 만드는 것 외에도, 고전적인 영화 문법을 활용해 스릴러를 만드는 데에도 아주 능숙한 감독이다. 그리고 매우 경제적인 몇 컷으로도 인물들의 감정을 매우 효율적으로 드러내며, 캐릭터들 역시 복잡하든 다소 단순하든 신뢰감이 가는 인물들로 그려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단적으로 그의 아내와 함께 등장하는 단 세 씬만으로, 우리는 그와 아내가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이들 부부가 얼마나 서로를 신뢰하며 사랑하는가, 그리고 아내가 그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가 확인할 수 있다.

아이들이 등장하는 씬도 마찬가지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슈타펜버그와 아내의 미세한 표정 변화, 그리고 귀를 울리는 바그너의 음악 발키리, 곧이어 시작되는 공습의 소음과 약해지는 거실 샹들리에의 불빛, 어두운 방공호 안에서 아이를 응시하는 그의 표정 등 이 씬은 짧은 컷들 몇 개로 구성돼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와 가족관계에 대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그가 히틀러를 암살할 묘안을 착상하는 계기가 되는 씬으로도 기능한다. 매우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씬이면서도 정서적인 부분에 대해 놓치는 것이 없다. (폴 버호벤 감독의 <블랙북>에서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카리스 반 후텐이 슈타펜버그의 아내로 출연해 비중은 작지만 강렬하고 설득력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Valkyrie

어쩐지 이 여배우 눈빛과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블랙북>의 그 배우였네요.

실화에 바탕한 영화답게,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작전의 전개와 실행에 집중해 깔끔하고 속도감있게 이야기를 진행하는 한편, 카메라 워킹이나 조명, 색채, 음악에서 분별있게 절제하는 대신 편집에 공을 들임으로써 영화의 품격을 높였다. 감독의 야심은 이른바 발키리 작전을 얼마나 화려하게 재현하느냐보다는, 독일 내에도 분명히 존재했던 레지스탕스의 주역들을 널리 알리고 대중적인 차원에서 복권하고 기리는 데에 있는 듯 보인다. 사실 <작전명 발키리>는 슈타펜버그 한 명의 개인 영웅담이 아니라, 트레스코프와 올브리히, 벡, 괴들러, 펠기벨, 비츠레벤, 크뷔른하임, 해프텐 등 주요 이 작전에 참여한 핵심멤버들의 고독한 결단과 실천을 골고루 부각시키는 영화다. 또한 히틀러는 물론 그의 편에 서는 프롬, 레메, 브란트와 같은 인물들 역시 명확하게 그 존재감을 그려내며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를 위해 빌 나이히부터 케네스 브래너, 에디 이저드, 테렌스 스탬프, 톰 윌킨슨 같은 관록있는 배우들과 톰 홀랜더, 제이미 파커 같은 유망한 젊은 배우들이 크고 작은 역을 맡아 제몫을 해낸다. 영화 속 인물들은 우직하게 단순한 면은 있어도 결코 평면적이거나 몰개성적이지 않다.


마저 보려면 : 프레시안 기사 본문으로 가기(새 창으로 열기), 혹은


여기를 누르기

 

- 2009년 1월 6일 2시, CGV용산, 기자시사

- 실은 볼드체 처리한 저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지 말입니다... (수줍)

- [안네의 일기]에서 이 작전에 대해 언급된 부분을 포스팅한 블로그(새 창으로 열기)를 찾았습니다. 확실히, 영화에서도 조금 미묘한 부분이 있긴 했습니다. 특히 슈타펜버그가 처음 비밀모임에 갔다가 작전 참여자들이 논쟁하는 걸 보는 장면. 히틀러가 아니더라도 '대제국 독일'을 꿈꾸었던 군 엘리트들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거긴 하죠.  

2009/01/08 16:46 2009/01/08 16:46
원래 이 글의 95% 이상이 <이리>의 언론시사가 끝난 후, 정식 개봉을 하기 전에 쓰여졌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영화 중 <경계>와 <이리>만 보았고, 이 글 역시 <이리>의 반쪽이라(고 감독이 주장하)는 <중경>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반쪽의 평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당시의 계획은 <중경>을 본 후 글을 마저 완성하자는 것이었지만 결국 이는 이뤄지지 못 했고, 이 글도 결국 매체에 발표되지 못한 채 메모리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 글을 꺼내도록 (네오이마쥬(새 창으로 열기)의) 백건영 편집장이 용기를 주셨다. 그 점을 고려하고 읽어주시기 바란다.

이리

장률 감독의 본격 한국영화, 그러나...

지금은 ‘익산’이라 불리는 옛 ‘이리’역에서는 30여 년 전인 1977년, 40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화차가 폭발하는 대형사고가 났다. 보도자료가 제공해주는 정보에 따르면 이 사고로 59명이 사망하고 1,316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영화는 2007년을 배경으로, 이리역 폭발사고 30주년을 추모하는 행사를 취재하는 리포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윽고 카메라에는 사고 당시 엄마 뱃속에서 진동을 받고 이듬해에 태어났다는 진서(윤진서)의 모습이 담긴다. 예쁘고 고운 그녀가 마을 사람들에게 일종의 백치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녀가 어떤 폭력을 당하더라도 분노하거나 저항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진서는 마을의 불특정한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과 유산을 반복적으로 겪는다. 영화 초반, 역시나 유산으로 쓰러진 진서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오빠 태웅(엄태웅)의 무덤덤한 태도는 이런 일이 진서에게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의사는 그녀가 ‘습관성 유산증’이라 하고, 태웅은 오죽하면 의사에게 “그냥 불임수술을 해버리면 안 되나요?”라고 묻는다.

영화는 두 남매와 그 주변의 지리멸렬한 삶을 느릿하게 카메라에 담는다. 사실 진서가 그렇게 불행한 건 아니다. 중국어를 좋아하는 그녀는 동네 자그마한 중국어학원에서 청소를 비롯한 잡일을 해주고, 불법체류를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한 명에게 기꺼이 빨래를 해주며, 과일가게의 꼬마 예진이와 친구로 지내고, 마을 경로당 한구석에서 오빠와 살면서 경로당의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사이좋게 지낸다. 중국어학원에 강사로 있는, 조선족 혹은 중국인 이주노동자와 언니-동생하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매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지나치는 사람들도 많다. 어차피 그녀는 자신이 당하는 폭력들을 그저 감내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라 여긴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녀는 “나는 술을 마시면 똑똑해져요.”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진서를 보는 태웅의 삶은 지옥에 가깝다. 원래 백치 본인 자신은 괴롭지 않다, 지켜보는 사람이 미칠 뿐. 택시기사로 일하며 진서를 부양하는 태웅은 꼭 필요한 말 외엔 입을 닫고 살며, 이 지옥의 삶을 여가시간에 도시 모형을 만드는 것으로 묵묵히 견딘다. 그러다 진서가 마을 다방 레지의 부탁을 받고 해병대 전우회 사무실에 대신 커피 배달을 갔다가 윤간을 당하자 그곳의 남자들과 레지에게 폭력으로 응징한다. 익산이 아닌 이리의 삶은 이토록 좌절과 공포, 분노와 폭력으로 얼룩진 곳이다. 더없이 적막한 이곳은 정작 사람들이 조용한 침묵을 필요로 할 때면 매번 느닷없는 소음이 공기를 찢곤 한다.

멀리서 찍은 롱샷을 주로 배치하며 한사코 인물에게 다가가기를, 혹은 관객을 인물 가까이 데려가기를 거부했던 장률 감독은 <이리>에서 보다 인물에 가깝게 밀착한 카메라로 자주 패닝을 이용해 관객을 적극적으로 인물에 접근시키고,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게 만든다. 심지어 카메라는 태웅의 좁디좁은 택시 안을 자주 비추면서 좁고 꽉 찬 화면을 선사하기도 한다. 도저히 언제 끝날지 모를 정도로 지루하게 이어졌던 <경계>의 씬들에 비하면 <이리>에서는 씬의 호흡도 퍽 짧아졌다. 분명 <이리>는 장률 감독의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훨씬 친절하고 편해진 감이 있다. 그러나 관객은 여전히 진서나 태웅의 심리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들은 종종 거대한 풍경의 하나 혹은 미장센의 일부로 배치되어 있을 뿐이고, 그 어떤 폭력에도 거부의 몸짓을 보이지 않는 진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불가해한 대상으로 남는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그녀에게서 ‘천사’의 이미지를 읽어내기도 하지만, 죽여도 죽지 않고 돌아와 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모습은 차라리 아무리 지우고 잊으려 노력해도 어김없이 다시 찾아와 더욱 괴로운 ‘악몽’과 같다.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어른의 작정하고 덤비는 악의적인 행동보다 해맑은 어린아이가 아무 가책 없이 잔인한 행동을 하면서 짓는 환한 웃음이 더욱 무서운 것처럼. 많은 이들이 희망을 보았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내게는 오히려 무시무시한 공포와 절망으로 다가왔던 이유다.

이리

때로는 당사자보다 지켜보는 자가 더 지옥일 수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진서뿐 아니라 장률 감독의 카메라 역시 여전히 불가해하고, 심지어 장률 감독의 전작들과 그에 쏟아진 찬사들마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대체로는 예산의 문제 때문이겠지만) 장률 감독은 이제껏 비전문 배우들을 캐스팅해 그들의 소위 ‘양식화되지 않은 연기’를 카메라에 담아왔다. 몽골어나 중국어, 내지 조선족의 억양이 심한 한국어로 대사가 발화됐을 때는 그런 연기의 어색함이 별로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한국말, 특히 서울말로 대사가 발화되는 <이리>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종종 우리는 비전문배우들의 소위 ‘연기 아닌 연기’에서 지대한 감동을 받곤 하지만, 장률 감독의 영화에서는 오히려 어색함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경계>에서의 서정도 이번 <이리>에서의 윤진서도 그렇고, 전문배우마저 비전문배우의 어색함을 흉내내고 있는 듯 보인다. 장률 감독의 카메라에 담긴 인물들이 진솔함을 지나 가식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생겼다는 얘기다.

사실 장률 감독의 영화는 일반적인 상업영화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양식화돼 있는 측면이 있지만, <이리>에서는 장르영화들의 해묵은 클리셰가 고스란히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격렬한 상처와 전쟁의 대리 전장터로 여성의 몸을 전방에 제시하며 여성이 당하는 강간을 거대한 폭력의 은유로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백치 같은 여주인공을 폭력의 희생물로 내세우면서도 그녀가 폭력을 폭력이라 인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감내함으로써 폭력을 더 이상 폭력이 아니게 하는 것, 나아가 모두를 구원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것 역시 무수히 많은 다른 영화들에서 익히 봐왔던 설정이다. 주인공들의 삶을 스쳐지나가는 낯선 이방인들의 사연을 에피소드로 삽입하고 이들에게 지극히 어색한 대사를 주면서 ‘픽션이 아닌 실제의 인간의 모습’이라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주로 이리를 방문하는 타지의 사람들의 에피소드로 구성되며 이것도 노신사의 옛사랑 찾기, 낯선 여인의 성적인 접촉 시도 등 구태의연한 설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충격적인 사건 직후 의외의 뜬금없는, 그러나 짐작이 충분히 가능한 씬을 바로 붙여 그저 관성적으로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그런 와중에 지나치게 노골적인 장면들이 간간이 튀어나온다. 예컨대 태웅이 레지를 불러낸 방에서 흐르고 있던 포르노 영화라던지, 목을 멘 노인의 벗은 알몸을 정면으로 비추는 장면이랄지. 이를 담는 화면과 잇고 끊는 편집은 종종 조잡하고 어색하며 덜컹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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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아니, 죽여도 죽지 않고 다시 목을 죄어오는 악몽, 혹은 트라우마.

혹자들은 그럼에도 그 안에서 발산되는 장률영화의 힘에 감동하고 그에게 지지를 보내며 그의 영화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고 한다. 이러한 장점들이 장률영화의 무수한 단점을 모두 초월해버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는 장률감독의 영화가 흡사 말더듬이의 발화처럼 여겨진다. 말을 더듬건 아니건 이야기에 힘과 재미와 진실이 있다면 말을 더듬는 게 무슨 상관이겠으며, 오히려 말을 더듬는 행위가 이야기에 오히려 긴박감을 부여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지만, 불행히도 장률 감독의 경우 더 이상 그게 아니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말하는 이가 이제 충분히 말을 배웠고 말더듬는 버릇을 뗄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말을 더듬거나 혀 짧은 소리를 낸다면, 혹은 말을 더듬는 와중에 전달하는 이야기가 지극히 상투적인 비유와 상징으로만 일관하고 있다면, 그가 자신의 재미없는 이야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더듬기를 유지하고 있다고 의심된다면, 그의 소위 ‘진정성’에 대해서도 더 이상 신뢰하기가 힘들다. 

나아가 그를 향해 쏟아지는 칭찬이 혹 그의 말더듬이 버릇에만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그를 차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사실 말더듬이의 발화에서는 그의 이야기 자체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청자 각각의 정서와 의도’가 이야기를 압도하는 경향이 더 크다. 심지어는 그저 말을 더듬을 뿐인 발화자를 ‘정신지체인’ 취급을 하면서 그에 걸맞는 기대를 했다가, 비장애인 수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지나친 상찬을 바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드러나고 강조되는 건 발화자, 혹은 발화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관용과 배려를 갖춘 청자’가 되기 쉽다. 이것은 오히려 발화자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언론시사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장률 감독은 윤진서, 엄태웅과 같은 나름 인정받은 배우들을 기용하면서 “내가 정말 감독이구나” 느꼈다고 했는데, 윤진서와 엄태웅을 기용하기 이전에도 장률 감독은 감독이었고 그것도 이런저런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지속적으로 차기작의 제작지원을 받는 감독이었다. 이제는 혀 짧은 소리를 그만 낼 때도 되었다.

+ 네오이마쥬 기고글(새 창으로 열기)

2009/01/02 15:35 2009/01/02 1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