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모두 바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면 배창호 감독의 1984년작 <고래사냥>(새 창으로 열기) 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에 대한 오마쥬이기도 했다.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은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과 상당부분 통해있으며, 다시 이 노래는 <바보들의 행진>에 쓰였을 뿐 아니라 그 가사가 고스란히 주인공 중 하나인 영철의 대사로 뱉어진다. 게다가 <바보들의 행진>의 가장 중심적인 주인공은 <고래사냥>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병태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두 영화 모두 원작, 각본이 최인호다.) 하지만 <바보들의 행진>이 영향을 준 것은 비단 <고래사냥>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한동안 양산됐던 청춘영화는 이승현의 얄개 시리즈(어린 이승현이 <바보들의 행진>에 신문팔이 소년으로 잠깐 출연한다.)나 그 유사의 여학생 버전으로 임예진이 출연한 '좋아해' 시리즈 외에도, 순진한 남자주인공과 되바라진 여자주인공이 대학생 신분으로 공부는 않고 맨날 놀러다니며 술과 미팅과 (특히 여학생의 경우) 결혼에 열을 올리며 좌충우돌하다가 난데없이 어디론가 떠나거나 하는 식의 계보에 속한 영화들이 꽤 있다. 심지어 박중훈, 강수연 주연의 <철수와 미미의 청춘스케치>도 말하자면 그 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맨날 술만 마시고 공부는 않는 것은, 실은 그 시대가 뻑하면 휴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이를 영화에 담았을 때엔 얄짤없이 검열의 칼날이 휘둘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보들의 행진>의 이 계보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영화로 보인다.

동해바다에 고래를 잡으러 가겠다는 꿈은, 앞뒤옆위아래 꽉꽉 막힌 한국현실에서 젊음이 가질 수 있는 맨 마지막의 선택, 즉 '현실도피'를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낙관주의자인 배창호 감독은 <바보들의 행진>과 달리 <고래사냥>의 끝을 더없는 해피엔딩으로 수놓았지만, <바보들의 행진>은 신검 장면으로 시작해 결국 주인공 병태가 입영열차를 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맨날 콧대만 세우던 영자가 달려와 결국 울면서 이별의 키스까지 하는 이 장면이 결국 비극의 엔딩인 것은, 언제나 과도하게 깔깔깔 웃어제끼며 명랑하기 짝이 없었던, 도대체 병태에게 속을 보여주지 않았던 우리의 영자가 기어코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치기와 장난, 미팅과 술먹기 내기 등의 유희들이, 영화의 끝까지 이르고 나면, 비극의 끝을 이미 예정해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벌이는 처절한 유희처럼 보인다.

비록 데모하는 장면은 '체육전'을 하거나 축구를 하는 장면으로, 주인공이 교실 안에서 데모에 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는 장면이 그저 '인간의 신뢰'에 관한 한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갈등하는 것으로, 감독의 뜻과 무관하게 교체되고야 말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70년대 청춘들의 갈곳없는 막막함과 절망, 그 안에서의 무력감을 드러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정말로 원래 그 장면들이 원래 시대와 시위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들이었다면, 영철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시대는 그토록 순수한 영혼은 결국 견딜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의 순수는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떨어졌는데 심지어 군대까지 떨어진' 무능함으로만 치부될 뿐이다.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그곳, 군대에서조차 받아주지 않는 무능함을, 본래 그 이름대로 '순수'라 부를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흥청망청 노는 것이, 그리고 그깟 머리카락 안 자르겠다고 도망치다가 목숨을 걸고 육교에 매달리는 것이 '저항'이었던, 그런 시대였던 거다, 그때가. 그렇다면 결국 병태가 입영열차를 타는 것은 이 사회에 어쨌든 순응하겠다는 패배 선언으로도 읽힌다.

바보들의 행진

목욕하는 남자들.


이 영화에서 영자 역을 맡은 이영옥을 보고 상당히 놀란 게, 굉장히 현대적이다. 75년작인데도 이 배우는 90년대 말적인 미모라 해야 하나. 기본적인 이목구비가 일단 최정윤과 상당히 비슷하다. 거기에 옷을 쫄티에 나팔바지, 통굽구두를 신으니 도저히 75년 영화라곤 보이지 않더라. 다만 버스비가 25원, 짬뽕이 한 그릇에 100원이었다고 한다. 지금보다 약 1/40 수준의 물가였던 셈이다. 또한... 이 영화의 인물들은 대체로 집이 부유하고, 그래서 돈을 많이 쓴다. 미팅 참가비가 당시 돈으로 2천원일 걸 보고 조금 아찔... 했다. 물론 그때 2천원이 꼭 지금의 8만원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 초반 미팅을 하기로 하고 목욕탕에 가서 때빼고 광내는 장면을 보면서도 헉, 했는데, 남체를 그렇게 '탐스럽게 훑는 카메라'는 당시 한국영화로서는 거의 파격이었다고 할 만하겠다. 그리고 이 영화의 그 키스씬은... 아마 한국영화 역사상 길이 남는 키스씬이 될 듯. 어쩌다 보니 <소문난 칠공주> 같은 드라마에서조차 한번 베낀 적이 있다고 하더란 얘기까지 알게 됐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심지어 남녀가 반투명 유리문 하나를 두고 나란히 샤워를 하며 비누를 주고받고 하는데도 이상하게 성적인 느낌이 없다. 키쓰신도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유일하게 에로틱한 맛이 느껴지는 게 저 목욕탕에서 두 남자가 미팅 전 목욕하는 씬이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 중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으로 동성애를 묘사한 영화가 있다던데,...

바보들의 행진

무기력한 젊음, 과도한 명랑의 의지. 영철(맨 왼쪽)-순자, 병태-영자(맨 오른쪽) 커플.



ps1. 한국영상자료원 하길종 30주기 추모전 개막작, 2/26/2009

ps2. 영상자료원 조선희 원장의 말에 따르면, 이번 하길종 30주기 추모전에서 상영하는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 당시 삭제됐던 부분을 다시 삽입한 버전이라 한다. 일례로 저 목욕하는 장면, 영자의 룸메이트 순자가 담배 피우는 장면 등이 해당된다. 연고전/고연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체육전 장면과 축구경기 장면은 모두 원래 데모 장면이었던 것을 교체한 것. 고 하길종 감독의 부인인 전채린 교수(그 전채린이다, 전혜린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교실에 남은 병태가 고민하다가 떠올리는 '신문팔이 소년 에피소드'는 응원전에 나가냐 안 나가냐의 고민이 아니라, 데모에 나가냐 안 나가냐의 갈등 장면이었다고. 여기저기 편집이 튀고 결정적으로 막판에 가면 멀쩡하던 얼굴에 갑자기 핏자국 등의 싸운 티가 나는 것도 그 사이 씬이 통째로 검열돼 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부산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는 장면이었다고.

ps3. 개막식에서 하명중 감독 말하기를, "형이 그 젊은 나이로 간 건, 그 시대가 작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에이 이놈의 세상 그냥 미련없이 가자,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영원히 청년으로 봉인된 천재감독 하길종은 한국영화사에 있어 하나의 '섬'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한국의 영화풍경이 지금과 많이 바뀌었겠지 싶다. 단순히 그가 천재여서가 아니라, 그가 살았다면 펼쳤을 영화의 풍이 그의 제자나 후배에게 전수됐을 때, 특히 80년대의 영화풍경이 꽤 달라졌겠구나 싶어서다. 하길종은 당시의 '한국영화의 혁명'을 부르짖는 일종의 '신세대'였다. 그와 영화집단을 함께 했던 이가 대충 김호선, 이원세, 홍파 등의 감독과 평론가 변인식이라 한다. 이들 역시 지금의 감독들에겐 일찌감치부터 '극복해야 할 구세대'가 돼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독재정권에 분노하며 절망했던 하길종과 다른 길을 갔다. 불과 30년 사이에 한국영화 역사 역시 사회 전반 만큼이나 급변했다.

ps4. 이번 추모전 후원 단체 중 하나가 한국영화감독협회라고 한다. 여기 정인엽 이사장이 축사를 하러 왔다. "하길종 감독과는 영화관이 조금 달랐지만 친했다"라고 한다. 음... 뭔가 의미심장한 축사같은.

2009/02/28 01:41 2009/02/28 01:41

잭 스나이더, 만세!!!!!  (당신이 <300>(새 창으로 열기) 바로 다음 작품으로 사고 한 번 칠 거라고, 난 이미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규!)

2시간 41분. 길다 =.= 어쨌든 잭 스나이더는 드디어 <왓치맨>으로 자신의 정체 증명을 했다. 영화 <왓치맨>은 만화 원작에 매우, 매우, 매우 충실하게 만들어졌는데, 항간에 보니 제작사가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영화로 만들'자는 걸 잭 스나이더가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고 한다. 감독은 영화로 말하는 법이라는데, 나는 이 감독이 <300>에 쏟아졌던 그 온갖 오해에도 불구하고 뚝심있게 그저 다음 영화로 자신의 정체를, 존재를 증명해 버린 것에 대해 존경과 흠모를 바칠 뿐이다. <300>이 미 제국주의와 이라크 침공을 합리화하는 영화라고 굳게 믿으며 불편해하던 분들이 <왓치맨>을 보고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죽겠다. 이분들은 사실 <새벽의 저주>부터 다시 보며 잭 스나이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완전히 뒤집는 힘든 작업을 하셔야 할 듯? 하지만 이것은 <새벽의 저주>부터 그를 지지해온 나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왓치맨>을 계기로 그의 영화들은 다시 한번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왓치맨>을 본 후에도, "잭 스나이더를 알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제껏 그가 연출한 영화 세 편은 모두 원작이 있는 작품들이었고, 그는 자신의 세계관이나 가치를 그렇게 간접적으로만 드러내왔다. 거기에, 단 세 편이다. 다만 그 세 편이 모두 어느 한 쪽으로도 도저히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두 진영의 지옥같은 대립과 전쟁들을 다룬 영화들이라는 점을 조금 되새겨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Watchmen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나?'


아 그래서 <왓치맨>이 어떠냐고?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릴 것 같다. 나는 매우 좋아한 쪽이었다. 사람들이 슈퍼히어로물에서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이 영화는 주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슈퍼히어로물을 보면서 잊거나 숨기고자 했던 주제들을 눈앞에 까발려버린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보며 심지어는 '매우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슈퍼히어로들이 '작전'을 나가 사람들을 구하는 장면이, 소영웅주의에 입각한 '영웅놀이'처럼 보이는데다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짓이고, 나아가 감독이 그들을 놀리는 듯한 뉘앙스까지 깔려있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왜 여자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여자 슈퍼히로인이라고 해야 하려나)가 하위문화에서 포르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영화 초반에 여자 슈퍼히어로 포르노 만화에 대한 농담이 삽입돼 있기도 하다. (이것은 원작에서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영화가 함의하고 있는 사회, 정치적 맥락은 심지어 <엑스맨>에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정치하며 복잡하다. 이 감독, 실은 알고 보니 대단히 지적인 사람이었다 @.@!! 아무리 원작에서 이미 다 다뤘던 주제라곤 해도, 그에 대한 감독의 이해가 떨어진다면 영화에서 이 정도로까지 일관성있게, 체계있게 풀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원작을 안 봤지만 원작을 '아주 잘' 옮겼다는 건 알겠다. 원작이 있는 작품들 특유의, 어딘가 배분이 이상해지고 이야기가 비어있는 듯해 원작을 찾아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래서 러닝타임이 이렇게 길어진 것이겠지만.

영화 속에서 악당과 주인공들이 드디어 맞붙게 됐을 때, 악당은 "야... 내가 무슨 코믹북에서나 나오는 슈퍼악당인 줄 알아?"라는 대사를 친다. (번역자막으로는 아마 '내가 그렇게 시시한 악당이냐?' 정도로 나왔던 듯?) 굉장히 진지한 농담인 셈인데, 맞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대사를 통해 "야... 현실이 그렇게 만만하고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줄 알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영화 속에 깔린 그 정치적인 콘텍스트 - 단순히 닉슨이 3선에 성공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했다는 가상역사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 를 따지고 든다면, 영화의 본격적인 리뷰도 길어질 수밖에 없겠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슈퍼히어로는 본래 민주주의의 적이다. 영화가 까발리는 건 그거다. 거기에 그 슈퍼히어로가 스스로 법의 집행자를 자처하고 나설 때 정치는, 세계는 완전히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슈퍼히어로의 법 집행과 통치에 거기에 박수를 치는 건 파시즘에 대한 동조다. 우리가 허구화된 슈퍼히어로물을 즐기고 있기는 해도 이게 현실에서 절대로 슈퍼히어로를 중심으로 한 정치가 일어나선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이 영화는 설파한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의 슈퍼히어로는 노골적으로 '미 제국주의' 그 자체다. 이건 비유고 뭐고 할 필요없이 눈앞에 직접 보여준다. 그러니 경찰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완전히 풍자되고 야유를 받는 건 당연하다. (이건 감독이 <300>에서도 했던 짓이다. 미국인이 감정이입할 스파르타 놈들은 골빈 머슬에 야만인들이 아니었던가.) 일단 단평은 여기까지.

2009/02/25 13:16 2009/02/25 13:16

발사진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조리개고 셔터스피드고 화밸이고 나발이고 걍 아무렇게나 셔터부터 눌러대는 버릇 때문에 저 모양 저 꼴이다. 뭐 못 찍으니까 강좌도 들으러 다니고 그러는 건데. 실내 시네토크 사진이 없는 건 한번도 참석을 못한 데다가, 안은 너무 어두워서 어차피 이것보다도 개판 오분전으로 나온다능. 아악 언제 돈 벌어서 밝은 렌즈랑 스트로보 사나효. ㅠ.ㅠ

2009/02/24 00:02 2009/02/24 00:02

2009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2009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기자회견


다음은 현재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의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운영하는 친구들영화제 웹데일리 블로그에서 최근 올라온 글로, 얼마 전 '영화의 고전과 미래의 시네마테크'라는 주제로 열린 포럼을 요약한 글이다. 시네마테크를 둘러싼 다양한 고민과 논란을 정리하는 데에 아주 유용한 자료가 될 듯. 총 2개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포스트에서는 해당 글의 링크만 제공한다. 그리 길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일독을 권한다.

포럼 1 : 또다른 친구와 시네마테크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며(새 창으로 열기)
포럼 2 : 시네마테크와 관련한 진전된 문화적 합의가 필요하다(새 창으로 열기)

혹시나 "난 모니터상에서 글 못 읽어요 징징징" 하실 딱 나같은 사람을 위하여 밑에 한글편집본을 걸어둔다. 이건 철저하게 내 취향대로 (폰트, 자간, 줄간, 기타 등등) 편집된 만큼, 불편하면 알아서 고치시든가 말든가...

이 글과 함께 읽으면(그리고 그 글 안에 링크된 글들과 함께 읽으면) 더욱 좋다. : 서울아트시네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새 창으로 열기) 고백하자면 이 글의 내용 구성에 있어 상당부분의 출처는... 말 안 하련다. 당사자분이 밝혀도 된다고 하시면 그때 밝히겠다.

2009/02/23 18:53 2009/02/23 18:53

케이트 윈슬렛이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드디어!

<레이첼 결혼하다>에서 놀라운 연기를 선보인 앤 헤서웨이나, 언제나 훌륭했지만 <다우트>에서 사람 정신을 멍하게 만들 정도로 특별히 훌륭했던 메릴 스트립이 있었지만, 사실 케이트의 수상은 올해 골든글로브에서 그녀에게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동시에 안길 때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는 했다. 골든글로브는 아카데미의 예고편 격으로 상을 주는 경우가 많고 아카데미 역시 골든글로브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올해 골든글로브에서 케이트 윈슬렛이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여우주연상을,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로 여우조연상을 동시에 수상했을 때 "아카데미도 올해는 드디어 케이트 윈슬렛에게 상을 주려는 것"이라는 예측을 알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해온 터였다.

'드디어'란 말이 어울릴 수밖에 없는 것이, 케이트는 그간 숱한 영화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면서도 상과는 도대체 인연이 없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가 더욱 그랬다. 그나마 그녀의 고국인 영국에서 주는 BAFTA상이나 영국 엠파이어 레코드지가 주는 상이나 좀 받았을까.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에서는 거의 같은 작품으로 후보에 올랐으나 매번 상을 수상하지 못 했다. <센스, 센서빌리티>(1995)로 여우조연상에 처음 후보에 오른 이래 <타이타닉>(1997), <아이리스>(2001), <이터널 선샤인>(2004), <리틀 칠드런>(2006)으로 2, 3년에 한번씩 노미네이트됐지만, 이번 2009년 6번째로 후보에 올라서야 비로소 수상을 했다. 사실 골든글로브에서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로 그녀를 여우주연상이 아닌 여우조연상에 올린 것도, 어쩌면 그녀에게 그간 주지 못했던 상을 한번에 몰아주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한 사람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이트가 <더 리더>에서 맡은 역은 사실상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골든글로브가 그녀에게 두 개의 상을 함께 안기는 걸 보며, 그간 케이트가 번번이 미끄러진 것에 조금은 안타까워하던 팬들도 이번에는 기대를 걸었던 터였다.

Kate Winslet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의 한 장면.


대체로 아카데미는 정말로 줘야 할 작품으로 상을 주기보다 번번이 '진짜 이 작품이다' 싶은 작품엔 안 주다가 나중에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작품에 공로상 격으로 던져주는(...) 예가 많았다. 최근 마틴 스코시즈가 <디파티드>로 감독상을 받은 것이 좋은 예다. 이번 케이트 윈슬렛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될 뻔했다. 무려 다섯 번을 물을 먹이고(그 사이 역시 훌륭한 연기를 펼쳤으나 후보에는 못 오른 작품들도 꽤 된다.) 여섯 번째에 상을 준 건데, 다행이도 이번 <더 리더>는 작품에 대한 호평과 함께 케이트가 '이번에도 역시 너무도 훌륭한 연기를 펼쳤다'는 평들이 들려온다. 다행한 일이다. 후보에는 못 올랐지만 이미 지난 주에 개봉한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도 그녀는 (디카프리오 팬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옆에서 혼신의 열연을 펼친 리어나도 디카프리오를 상대적으로 민망하게 만들 정도로 황홀한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 사실 지리멸렬하고 뻔하며 지루한 영화가 될 수도 있었던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그토록 빛나는 생기를 불어넣어준 것도 케이트의 깊이 있는 연기였다.

물론 상을 못 받는다고 진가를 인정 못 받는 것은 아니다. 최근 좋아하는 것을 넘어 '존경'까지 하게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감독으로서는 그렇게 숱한 걸작을 내놨음에도 아직 단 한 번도 아카데미를 수상한 적이 없다. 아카데미가 이제껏 상을 얼마나 안 주었건, 케이트의 팬들은 케이트의 그 똑소리나는 주관과 언제나 훌륭한 연기 때문에 그녀를 아껴왔다. 나는 그녀를 처음 봤던 <센스, 센서빌리티>에서부터 순전히 연기 때문에 반할 수밖에 없었고(영화에 그녀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나는 "저 이상하게 생긴 여자는 대체 뭐야?"라고 반응했었다. 그 영화가 끝나기 전에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심지어 나중에야 본 그녀의 데뷔작, <천상의 피조물>에서도 그녀는 훌륭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케이트의 연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오필리어의 고뇌와 고통을 몸과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녀가 하비 키틀과 주연을 맡은 <홀리 스모크>가 다소 상업성이 떨어지는데다 '전신 누드'씬, '걸으면서 오줌을 누는 정면씬'을 이유로 국내에 수입되지 못했을 때 분노했었으며, <쥬드>에서 전신누드를 보여준 덕분에 여배우들의 노출한 몸에 대한 공포를 극복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나이도 젊으면서, 그녀는 언제나 나의 영화생활에 풍요로운 즐거움을 더해주었던 고마운 배우였다. 그것도, 나와 동시대 동세대의 사람으로서.

Kate Winslet

<로맨틱 홀리데이>의 한 장면.


그렇기에 나는 케이트의 수상을 마음 깊이, 진심으로 축하하고, 그녀가 들을 수 있건 말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내 일처럼 기뻐하고 싶다. 전국의 수많은 케이트 팬들 여러분! 우리 케이트 양이 드디어 상을 탔어요우~~~~~~!!!!!!!

Kate Winslet

작년 베를린영화제에서 <더 리더> 기자회견 당시. 꺄악, 이마 주름 때문에 더욱 너무 지적이셈.


2009/02/23 18:05 2009/02/23 18:05

억울한 역사의 피해자가 있다. 그런데 그는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과 다르다. 불쌍한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아닌, 자기 인생의 주체로 오히려 다른 이들을 끌어나가는 대상이다. 그때의 한과 상처가 너무다 아파 가끔 눈물을 흘리기는 하지만, 그 과거에 종속돼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힘차게 살아나가는 사람, 그렇기에 더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인 사람을 볼 때 과연 당신의 반응이 어떨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가 차마 공론화되지 못했던 상처와 통한을 드러내며 기록하는 영화였다면,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공론화된 그 상처와 통한을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이 영화 속의 주인공 송선도 할머니는 투쟁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갈 뿐 아니라, 놀랍게도 그를 돕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아픔은 물론, 영화를 보고있는 불특정 다수의 상처까지 치유해준다. 이건 송 할머니가 부처님의 미소를 가진 천사표 성인군자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송 할머니가 말하자면 '욕쟁이 할머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제의 그 엄청난 상처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삶을 열심히, 그리고 충실히 살아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돕는 사람들에게 마냥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100% 헌신을 '요구'하는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죄의식에 송구스러워하는 빚진 자들이 아니라 비로소 당당한 '동지'가 된다. 또한 이를 지켜보는 우리 역사 과거 역사의 희생자들을 볼 때 느꼈던 마음의 답답함과 역사에 대한 부담감 대신, 함께 싸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것인지 새삼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는, 우리가 역사의 피해자라는 사람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생각할 때 흔히 생각하는 장면들, 그러니까 억울한 사정의 피해자가 통한을 쏟아내놓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 함께 비통한 마음이 되며 까닭모를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 장면이 없다.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송 할머니의 주장, "두 번 다시 전쟁은 안 된다"는 말이 얼마나 생생한 감동을 주는지, 이 상식적이고도 명료한 주장이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할머니야말로 그 주장의 가장 설득력있는 '산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제목이 진정 무슨 의미인지, 얼마나, 얼마나 감동스러운 문장인지 새삼 느끼실 수 있게 되실 것이다. 오늘은 '리뷰어'의 입장에서 한 발짝 살짝 나가서 기꺼이 이 영화를 위한 '삐끼'가 되겠다. 개인적으로는, <워낭소리>보다 훨씬 재밌고 즐겁고 감동적으로 본 다큐멘터리였다. (나 변태 아니라능. 정말로 영화가 재밌고 즐겁고 감동적이라능.) 꼭 한번 이 영화를 보시기를. 2월 26일 인디스페이스, 미로스페이스, 시네마상상마당 등에서 개봉.

2009/02/22 12:58 2009/02/22 12:58

애초 이 영화가 그토록 회자된 것도 대런 아르토프스키나 마리사 토메이나 내용이나 소재 기타 등등 모두 다 제낀 채 오로지 '미키 루크' 때문이었다. 그래서 딱 그걸로만 말하자면.

맙소사, 눈물이 난다. 미치도록 눈물난다.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이 무식하고 육중하고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경멸스러운 이 사내가, 미치도록 안쓰럽고 눈물난다. 그리고 거기에 실제 미키 루크의 삶이 겹친다. 그러다보니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결코 이해할 마음도 없었을 이 사내의 그 주름지고 얼룩덜룩한 인생에 다시 한번 눈이 가고, 마음이 간다. 나아가 그는 내가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종종 악몽 속에서 보았던 나의 루저로서의 미래를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내고 있었다. 머리에 뭐 좀 든 인간이라면 다들 암흑기로 기억할 레이건의 80년대를 그리워하고, 철지난 그 시대의 헤비메탈과 디스코를 틀어놓고 "이게 진짜 음악"이라고 중얼거리는 이 촌스런 사내, 그 몸 구석구석에 새겨진, 저마다의 사연과 인생을 기억하고 있을 상처가, 온몸으로 흘려대던 피가, 아무리 참고 또 참으려고 해도 누선을 쑤셔댄다.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딸래미조차 벌레보듯 하는 이 실패한 인생의 사내가, 결코 동정할 마음이 없는데도, 그 모든 게 자업자득이라는 걸 나도 알고 심지어 그 자신도 아는데도, 그런데도 아프고 안쓰럽다. 심지어 마지막 링 위에서의 그는 마치 제왕같다.

결코 그를 사랑하게 되었노라 말할 순 없지만, 실패로 얼룩져 과거의 영광만을 그리워하는 그의 삶이 결코 후지다고, 더럽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 모든 과거의 영광도, 지금의 오욕도, 모두 오롯이 그의 것. 이 세상 모든 루저와 실패자와 패배자들을 위한, 찬가도 아닌, 마지막 장송곡. 그게 바로 <더 레슬러>다. 그의 연기에 대한 그 모든 찬사에 그저 묵묵히 동의할 뿐이다. 그 모든 게 '진짜'임을, 분명히 알겠다.


ps. 2/21 4:24am 추가 : <록키 발보아>(새 창으로 열기)와 비교할 것.

2009/02/20 18:59 2009/02/20 18:59

Jodie Foster

스타에게 보내는 환호나 관심과는 별개로, 헐리웃은 특히 여배우에게 '배우'로서, '아티스트'로서 독립성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기보다는 '소비재'로 대하는 경향이 더 짙다. 프랑스에서는 웬만한 여배우들이 연출에도 한번씩은 손을 대는 것과 달리, 헐리웃에선 여배우 출신 감독의 숫자가 극히 드물다. 헐리웃의 남자배우들이 곧잘 감독으로 변신하는 것과도 퍽 대조되는 일이다. 그런 헐리웃에서 조디 포스터는 여러 젊은 여배우들의 우상이자 선각자였다. 그녀는 넘치는 재능과 빛나는 지성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천재소년 테이트>로 연출데뷔해 감독으로서도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다음 작품인 <홈 포 홀리데이>는 다소 주춤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배우 겸 감독으로서 멋지게 겸업을 해나갈 것이란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조디 포스터의 발목을 오랫동안 붙잡으며 '감독 조디 포스터'의 이름을 결국 희미하게 만들어버린 프로젝트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플로라 플럼 Flora Plum>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만약 내 기억이 맞다면 조디 포스터가 자신이 설립한 제작사 에그 픽쳐스에서 <플로라 플럼> 기획에 착수한 게 무려 1998년경의 일이다. 조디 포스터를 역할 모델로 삼으며 존경하고 있던, 당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조디 포스터를 본받아 예일에 진학했던 클레어 데인즈가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의 여주인공으로 낙점돼 있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캐스트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플로라 플럼>은 기타 캐스팅과 펀딩에서 삐걱댔고, 오랫동안, 정말 아주 오랫동안 '프리 프러덕션' 상태로 남았다가 결국 목록에서 사라지다가를 반복했다. 가까스로 어찌어찌 촬영에 들어는 갔으나 러셀 크로가 촬영 중 어깨를 다친 뒤 수술을 받으며 중단됐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지 못 했다.

그간 조디 포스터는 출산기를 제외하고 거의 쉼없이 일을 해왔다. 최근 4, 5년간도 그녀가 출연한 영화가 일 년에 한 편씩 꾸준히 개봉했을 정도다. 2002년경에도, 2005년경에도 <플로라 플럼>은 다시 회자됐다 사라졌고, 작년경부터 다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소식은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고, 현재 imdb에는 2010년을 목표로 이 영화가 여전히 프리 프러덕션 단계라고 나와있다(새 창으로 열기). 물론 imdb에도 허위정보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영화가 언급되는 게 비단 imdb만은 아니라는 게 문제다. 그렇게 오래 전 제작과 중단이 오가며 10년간 이름만 떠돌았던 프로젝트가 그래도 여전히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은,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제작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조디 포스터 필생의 역작이 될 가능성도 크다. 물론, 그 사이 나이를 먹어 더 이상 '소녀'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클레어 데인즈가 떠났고, 러셀 크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며, 이후 다시 섭외된 메릴 스트립과 유언 맥그리거도 다시 떠났지만 말이다.

사실 클레어 데인즈는 오랫동안 <플로라 플럼>이 곧 촬영을 시작할 것이라 여기고 한동안 수많은 프로젝트를 거절했다. 물론 이 시기는 그녀가 예일을 다니고 있던 시기와도 겹친다. 그녀로서는 일단 공부에 매진하면서 <플로라 플럼>의 제작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니 크게 손해본 것도 없겠지만, 그러나 이 영화가 엎어진 이 시기를 경유하고 그녀의 필모그래피가 조금 얇아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그녀는 무수히 많은 작품들에 출연했지만, 인기 청소년 탤런트 출신에 무려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영화에 데뷔하여 "자기 또래에서의 메릴 스트립"이란 격찬까지 들었던 배우치고는 작품운이나 비중이 그리 좋거나 크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지금도 여전히, 말이다.

<플로라 플럼>이 과연 어떤 모습을 띄게 될지, 과연 제작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인터넷에서는 이 작품의 진척사항이 도대체 어떻게 되고있는지, 최근 소식을 알 수 있는 곳이 없다. 추측하기로는 아직 구체적으로 현실화되지는 못했으나 조디 포스터 자신이 미련을 놓지 못해 계속 떡밥을 던지고, 그때마다 언론에 언급되는 게 아닐까 싶다. (작년 3월경에도 조디 포스터는 EW와 인터뷰 도중 <플로라 플럼>에 대한 의욕을 말하며 떡밥을 던졌다(새 창으로 열기). EW만이 아니라 MTV하고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듯, MTV 블로그에 올라온 글(새 창으로 열기)은 조금 더 자세하다.) 아무리 유명 감독이나 배우가 붙었다가도 충무로에서만큼이나 헐리웃에서도 영화가 엎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최근 개봉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10년을 넘게 시나리오가 떠돌다가 마침내 영화화되는 경우도 그리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플로라 플럼>이 그 오랜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극장에 걸리게 될 가능성도 완전히 무시할 순 없다. 되도록이면 너무 늦지 않게, 감독 조디 포스터의 세 번째 연출작 <플로라 플럼>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이 작품뿐 아니라 조디 포스터의 다른 연출작 역시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는 바다. 그녀는 미국의 여배우들뿐 아니라 한국의 수많은 평범한 30대 여성들에게도 역할모델이다.



ps. 이곳(새 창으로 열기)에 가면 스티브 로저스가 쓴 시나리오에 대해 다윈 메이플라워라는 이가 작성한 리뷰를 읽을 수 있다.

2009/02/20 01:43 2009/02/20 01:43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박용우는 자신이 맡은 역에 대해 '감정노동자'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도시에서 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정노동자가 아닐까, 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감정노동자에 해당하는 바로 그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도시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직군이 낮고 밑바닥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하고 싶다. 그렇게 본다면 '장르영화적 재미'를 기대하고 본 관객에겐 썰렁하고 낯선 이 영화, 실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계급전쟁에 대한 영화라 할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 그랬던 것처럼.) 연예인이라는 자산을 (일시적으로나마) 소유한 소자본가와, 가진 건 몸뚱이에 심지어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최소한으로나마 존중받을 권리마저 임노동에 저당잡혀버린, 우리 시대 새로운 최하층 노동자인 서비스업 종사자의 극대극 대결. 게다가 이들을 둘러싼 각종 첨단 통신기기들, 특히 '핸드폰'의 주요기능과 부기능이 개발해준 일련의 새로운 환경들은, 천박한 자본주의적 욕망이 꾸물대는 이 서울, 멀쩡한 사람들마저 분노 발작으로 또라이와 미친년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는 이 서울이라는 저주받을 도시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어떤 다른 영화들도 감히 따라오지 못할 만큼 생생하게 까발리고 있는 셈이다. 혹자들은 이 영화의 '지나친 PPL'에 눈쌀을 찌푸리기도 하지만, 글쎄, E마트야말로 대형화, 기업화가 가속화되고, 유통이 콘텐츠의 질마저 결정해버리는 이 기형적인 자본주의의 심장 서울을 드러내는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상징적이고,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 아닌가. E마트야 이 영화에 자기네 이름을 대거 노출시키게 됐다고 좋아했겠지만, 감독은 이 E마트야말로 우리의 더러운 욕망의 집합체이자 이것이 체계적으로 어떻게 착취되고 관리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시스템의 대표명사로 사용해 버렸다. (자본주의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일반적이면서도 꽤나 영리하고 효과도 높은 방식이라 해야 할까.) 그리고 이 공간의 '고객관리팀'에 일하는 감정노동자야말로, 그 시스템 안에서 이미 분노 바이러스에 단단히 감염된 좀비들의 분노 배설구로서 좀비 흉내조차 내지 못 하고 다른 좀비들에게조차 착취되는 최하층 좀비들인 셈이다. 그러니까 박용우가 우는 장면에서 실소를 터뜨린 관객들이라면, 대체로 조직 내에서의 밥벌이의 더러움과 서러움, 특히 3D나 비정규직, 혹은 알바인생의 피맺힌 한을 아직 채 못 겪었을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난 도저히 못 웃겠던데... 오히려 눈물이 나던데.


그렇다면 김한민 감독은 이런 사회고발적 성격을 애초에 의도하고 영화에 공을 들여 집어넣은 걸까, 그저 이야기에 치중하다 보니 소 뒷걸음치다 쥐잡은 격일까. 나는 전자라고 생각한다. 전작 <극락도 살인사건>에서도 그는 거대 제약기업(우리 실제 현실에서 이는 대부분 재벌에 속해있다)의 탐욕에 의한 착취라는 코드를 슬쩍 집어넣은 바 있다. 다만 <극락도 살인사건>이 장르영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충실하며 그 코드를 감추려 애썼다면, 그 영화에서의 성공에 자신감이 붙어서인지 <핸드폰>에선 좀더 노골적으로, 때로는 촌스럽게 직접 드러내는 부분이 많아졌다는 것인데, 영화의 아쉬운 부분은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직설법으로 소통의 도구는 발달했으나 정작 소통의 방식은 후퇴한 아이러니나 감정노동자가 당하는 착취의 부분을 고발하면서도 이에 대한 내용은 다소 붕뜬 면이 있으며, 이것이 다시 장르영화로서의 미덕과 살짝 겉도는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극락도 살인사건>에서도 그랬지만 인간에 대해 애초 전제돼버린 냉소, 그로 인한 무자비한 피범벅의 역겨움이 여전히 매니악하게 드러나 버린다. (님하 호러 코드는 그리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게 아니라능. 그런데 두 영화 다 스릴러로 시작해 호러로 맺다니, 댁도 고집 좀 센 사람이겠다능.)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2시간 20분이나 된다는 걸 극장에서 나와 시계를 보고서야 알았고, 이 정도면 사회고발 영화로서 충분히 점수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좀더 지적인 내공이 있었다면 영화도 한결 세련돼지면서 더욱 엣지해졌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지만은... 뭐 아직 젊은 감독이니까... 평자들 사이에서 평이 엇갈리는 것도 바로 이 지점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영화를 '읽는' 사람들이 이 부분을 충분히 제시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ps. 그런데... 이런 영화를 보고나오는 와중에 사람이 너무 많아 정체되는 걸 '빨리 가라고' 밀치는 간이 배밖에 나온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겁이 없는 작자들인지 모르겠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그렇게 밀침을 당하고 넘어질 뻔하는 와중 새치기까지 당한 뒤에, 새삼스레 엄태웅에게 잔혹하게 복수하는 박용우로 나도 변신할 뻔했다능. 가뜩이나 분노 바이러스를 잔뜩 자극받고, 그럼에도 그거 함부로 분출하면 안 되겠다 교훈을 얻고 나온 직후에...

ps2. 제일 놀란 건 역시 박용우였는데, 이 사람... 어째 주연급 된지 오래인데도 본인이 조연급 캐릭터에 더 만족하는 것 같아. <원스 어폰 어 타임> 때도 '자뻑 장면'에서 영 스스로 민망해하는 것 같더니만. 하여간 이 사람의 필모그래피를 보다보니, 참 재밌는 행보를 가고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ps3. 2월 19일 목요일 오후 3시, 추가 : 이 영화에서 영상통화니 녹음이니 하는 핸드폰의 각종 부가기능들을 척척 사용하는 주인공들이 조금 경이로웠고, 20대 때만 해도 새로운 기계들의 기본적인 기능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어른들을 살짝 비웃은 적도 있었는데,... 방금, 30분간에 걸친 중요 통화를 하면서 그 전에 녹음 기능을 분명 확인했음에도, 통화 끊고 보니 전혀 녹음이 안 된 것을 발견... 나 녹음되는 거 믿고 메모도 안 했단 말이다! ㅠ.ㅠ

2009/02/18 23:57 2009/02/18 23:57

(* 스포일러를 다량 포함하고 있습니다.)

Doubt

2008 가장 용감한 포스터

<다우트>는 보수주의자인 수녀와 자유주의적인 신부의 대립을 다루며, 결국 수녀의 신부에 대한 축출로 결말을 맺는다. 영화의 초반, 알로이시스는 학생들에게 교칙과 처벌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하는 권위주의적 면모를 가진 어두운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플린 신부는 학생들에게 다정하고 자애로우며 농담도 잘 하는 밝은 인물이다. 순진무구하고 젊은 제임스 수녀는 이들에 대해 갖게 될 관객의 감정을 그대로 대변한다. 우리는 제임스 수녀처럼 플린 신부에 대해서는 호감을, 알로이시스 수녀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선입관으로 갖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이야기는 무고한 신부를 음흉한 수녀가 쫓아낸 얘기에 불과한 걸까? 혹은 두 사람의 신분의 배경이 되는 '신앙'과 그들의 대립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의심에 대한 이야기?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알로이시스가 플린 신부를 추궁하고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나 결국 축출에 성공하는 것은 모두 '정황'만 가지고서다. 그녀는 아이의 음주를 목격했다는 정원사나 당사자인 아이에게 직접 사건에 대해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플린을 단죄한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플린의 해명과 반박은 알로이시스의 귓등에조차 도달하지 못 한다. 그런데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나면, 우리는 플린이 비밀을 안고 있다는 강한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알로이시스의 '공갈'에 직면한 플린이 그녀의 요구를 결국 순순히 받아들인 탓이다. 과연 이것은 그가 정말로 잘못을 저질러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에게 공개되기를 꺼리는 다른 비밀이 있어서일까? 혹은 이 일이 공론화되는 것이 밀러에게 위험하기에 자신이 물러나자는 '도덕적인 결단'에 의한 것일까?

플린 신부는 당시로서는 매우 선도적으로 흑인 학생인 도널드 밀러를 학교에 받아들였고, 그가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남달리 챙긴다. 두 사람이 과거 계속 대립해온 것으로 보이는 이상, 알로이시스 수녀가 인종차별적인 시선에서 밀러를 못마땅해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알로이시스 수녀가 밀러를 차별적인 시선으로 대하는 장면은 딱히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밀러의 어머니를 대할 때의 태도 역시 그리 적대적이지 않다. 그런데 제임스 수녀가 플린 신부의 결백을 확신하는 것에도 또렷한 증거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플린에게 죄가 있다는 알로이시스의 확신만큼이나 그의 결백에 대한 제임스 수녀의 확신도 평소 플린에 대한 호감과 개인적인 믿음에 기반해 있다. 그러나 만약 알로이시스의 의심이 사실이라면...?

Doubt

모두에게 선망과 존경을 받는 플린 신부. 우왕 귀여운 섹시 곰돌이 필립 세이무어 아자씨!

영화는 플린이 정말로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닌지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 역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의심과 갈등을 그대로 경험하며 믿음의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한다. 우리는 과연 알로이시스와 플린 중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존하는 의심에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의심'을 내세우고 있고,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미사장면에서 플린 신부의 강론 역시 '의심'을 주제로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정작 '무엇을 믿을 것인가'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의심은 신앙이나 신념에 균열을 내기도 하지만, 그것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과정의 시험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매순간, 불완전한 정보에 근거해 선택을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비록 나를, 혹은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선택 뒤에도 남는 의심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당시 시대상에 대한 정치적 은유?

이 영화가 케네디가 암살당한 이듬해인 1964년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영화가 격동하던 미국의 60년대의 변화를 '근심하며 경계하려는' 이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는' 이의 대립을 은유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으로 대변되는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그때, 자유주의적 진보의 상징이었던 케네디가 암살자의 총에 의해 쓰러진 사건은 진보의 굴절과 패배를 예고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케네디가 정말로 진보였냐는 별개의 얘기지만. 그런 상황에서 알로이시스와 플린의 대립은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자유주의자)의 대립으로 보이기도 한다. 공익과 도덕을 위한다는 확고한 신념과 그에 대한 실천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도덕을 해치는 과정을 통해 발현이 됐을 때 과연 보수주의자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진보주의자가 자신의 실천에 치명적인 도덕적 스캔들이 붙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인가.

Doubt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는 매번 기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서로를 경계하지만, 이 관계에서 약자는 알로이시스 수녀다.

그러나 알로이시스가 보수적인 기득권의 전형적인 상징이라 보기도 어렵다는 데에 이 영화의 복잡한 성질이 드러난다.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에 의해 잠깐 묘사되는 바, 카톨릭의 위계질서 안에서 상대적인 기득권을 가진 것은 오히려 플린 신부쪽이다. 단적으로 플린은 알로이시스의 교장실에 들어와서도 손님 자리가 아니라 상석인 주인 자리에 앉으며, 알로이시스는 그런 플린을 불편해하고 경계한다. 한 교구 한 조직에서 일하는 데에도 이들의 식탁은 따로 차려지며, 알로이시스는 시력을 잃고 자리에서도 쫓길 처지에 놓인 노수녀를 책임지고 보살펴야 한다. 반면 플린을 포함한 '남자들'인 신부는 그들의 식탁에서 여성의 몸을 도마에 올리며 농담을 나눈다.

그렇기에 이 영화 속의 대립은 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과 닮은 면을 내비치기도 한다. '근거없는 모략'의 대명사가 된 '매카시즘'의 주인공,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소위 '빨갱이 사냥'을 일으키며 미국 전역을 레드 컴플렉스로 물들인 배경에는, 명문가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 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 출신에 엘리트 코스를 이수한 소위 '빨갱이' 고위 정치인들과 달리 그가 가난한 농부 출신의 카톨릭 아일랜드인이자 만학으로 로스쿨을 졸업한 '상대적 약자'라는 점도 작용하지 않았던가. 즉, 그는 그가 공격했던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의 포지션에 있었고, 결국 그 때문에 공화당에 노동자 계층의 지지표를 몰아준 장본인이기도 한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행동과 신념에 한 치의 후회도 없었던 매카시나,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확신한다는 알로이시스나 그리 달리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스가 흘리는 눈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명배우들의 연기의 향연

Doubt

바이올라 데이비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다우트>는 표면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눈이 즐거운' 영화다. 예쁘고 아름다운 스타들도, 화려한 특수효과도 없는 데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이 소박하고 단촐한 영화가 이토록 빛이 나는 것은 이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의 열연 때문이다. 이 영화에 출연한 네 명의 배우 모두 이번 아카데미상 남녀 주연/조연상에 후보로 올라 이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메릴 스트립이나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야 이미 아카데미상으로 공인받은 연기파 배우들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무시무시한 대결은 그저 두 인물의 심적 갈등을 제대로 다루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얼마나 스펙타클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스크린에 스파크를 일으킬 수 있는지 새삼 확인해준다. 거기에 떠오르는 젊은 배우 에이미 아담스도 두 '어른'들의 대립에서 갈등하고 신념에 상처를 받는 여린 제임스 수녀를 제대로 표현해낸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단 한 씬에 등장해 약 10분간 영화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밀러 부인의 역을 맡은 바이올라 데이비스다. 그녀가 딱 한 줄기의 눈물을 흘리며 알로이시스에게 모종의 비밀을 고백하는 순간이야말로, '연기가 빚어내는 반전'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다. 오래 전 <톰 행크스의 볼케이노> 한 편만 연출한 채 주로 연극무대에서 활약해온 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은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은 채 공인된 연극 원작에 충실한 채 자기 배우들의 연기를 무한한 신뢰를 담아 우직하게 스크린에 담음으로써, 도리어 걸작 영화 <다우트>를 완성했다.



- 프레시안 기사 본문(새 창으로 열기)으로 가기

2009/02/18 19:10 2009/02/18 19:10

각종 매체들 중 이 문제를 제일 먼저 보도한 건 프레시안. 물론 이런 걸로는 절대로 특종하고 싶지 않다. 지난 주 들었던 가장 암울한 소식 중 하나. 고작해야 지원사업 하나를 공모제로 전환한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공적자금을 들이는 사업인데 공모제가 맞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사업이 영진위 거여서 사업비고 인건비고 다 영진위에서 나가는 사업이었다면 공모제가 맞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게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

애초에 시네마테크 사업은 영진위가 주도해온 사업이 아니라, 철저히 민간에서 운동으로 시작해 해온 사업이다. 다양한 시네마테크들이 전용관을 세우고 여기서 안정적인 프로그램을 돌릴 필요성을 느껴 연합체를 만들고 탄생시킨 공간이 바로 서울아트시네마다. 이 공간의 공공성에 동의한 영진위가 위탁의 형태로 이제껏 전체 예산의 고작 30% 정도를 지원해준 것에 불과하다. 그런 상황에서 시네마테크 전용관 지원사업을 공모제로 하겠다고 나서는 건, 이 사업을 영진위 주체로 가져가면서 그간 이 활동을 해온 주체들을 공공기관의 하위로 두겠다는 말이기도 하고, 국가의 돈으로 이 사업 자체를 좌지우지하겠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제껏 전액을 지원해오며 사업을 주도해 왔다면 다른 문제겠지만, 사업 자체가 영진위 사업이 아니었던 데다 고작 30%를 지원해온 상황이라면 부당할 수밖에 없는 처사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건물 임대료 조금 보태주던 사람이 내 사업을 통으로 먹겠다고 건물주인 행세를 하며 나서는 꼴이라 해야 할까.

거기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덧붙여 질문할 수 있다. 과연 시네마테크 사업에 공모제가 어울리는가 하는 것이다. 시네마테크 사업이란 게 그저 때 되면 대충 영화 몇 편 모아서 트는 걸로 보이시는가? 시네마테크를 '영화의 도서관'이라고 말들을 한다. 가장 중요한 기능이 교육적 기능이고, 그렇기에 '비영리 공공성'으로 운영되는 거다. 기본적으로 자료를 수집, 분류하고 보관하며, 보수하면서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선을 보일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야 하며, 그러러면 계속해서 약 2주에서 3주 간격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의 기획전을 1년 내내 계속 돌릴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이를 통해 부가적으로 지역 주민과의 소통과 공공 문화사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걸 할 수 있는 역량이란 이벤트성으로 어쩌다 한번 기획전 하는 정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매우 특수하고 전문적인 분야의 일이고 규모도 방대하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는, 프로그래밍에 있어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관의 간섭을 받지 않을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정부가 정작 규제가 필요한 대기업 독점 사업들에는 각종 특혜와 규제 완화를 베풀어주면서 정작 민간의 자율에 맡겨야 할 사업에는 공공기관이 개입해서 날로 먹어 좌지우지하려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작 공공화를 지켜야 할 수도, 가스, 전기, 철도에 대해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민영화(라고 쓰고 '사영화'로 읽어야 한다) 얘기를 던지면서, 민간에서 멀쩡하게 잘 해오고 있던 사업을 이런 식으로 관이 개입하고 간섭하려 하는 것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시네마테크에 대한 논쟁과 토론을 보다 한 차원 끌어올려 진행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문제의 발언을 쏟아낸 그 세미나 자리에서, 강한섭 위원장은 "과거를 철저히 단절시킨 채 뿌리도 없이 아무 기반과 맥락도 없이 무작정 미래의 상을 끌어와 현실에 접목시키려 했다"며 과거 영진위 구성원들을 비판한 바 있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일정부분 동의하는 부분이 있고, 그래서 고쳐져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랬던 강한섭 위원장이 정작 시네마테크를 만들어온 사람들의 10년 노력은 깡그리 무시한 채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허허벌판에서 대단히 새로운 걸 시작하는 양 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는 또 어떻게 봐야 할까. 설사 공모제가 '일단' 철회된다 하더라도, 안심하지 말고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깊게 고민하고 논의가 오가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공공성과 민간의 자율성, 그리고 공적 지금 자원이라는 것이 복잡하게 얽힌 이상,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관의 일방적인 통고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논의와 토론이 필요하다. 우리가 계속 시네마테크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ps. 한겨레 기사의 문제 : '다양성  영화'라는 말을 사용한 건 지금 영진위가 아니라 이전 영진위에 의해서다. 이전 영진위는 '다양성 영화'와 '독립영화'란 말을 동시에 사용했으며 전자를 후자의 상위 개념으로 사용했다. 현재 영진위가 '독립영화'란 말을 없애려는 건 독립영화 제작지원 제도라는 멍칭을 '단편, 중편, 다큐멘터리 제작지원 제도'로 바꾸면서 독립장편 영화를 '한국영화 제작지원' 제도에 편입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ps2. 아울러 여러 기사들에서 쓴 바, 올해 들어 폐지됐다는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내지 '독립영화 개봉지원' 제도의 원래 정식 명칭은 '아트플러스 시네마네트워크 개봉지원' 제도다. 2006년에 '다양성영화 개봉지원'에서 '아트플러스 시네마네트워크 개봉지원' 제도로 정식 명칭이 바뀌었다. 독립영화계에서 이전의 습관에 따라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독립영화 개봉지원'이라 말한 것을 기자들이 그대로 받아쓴 듯하다.

2009/02/17 18:29 2009/02/17 18:29

<프로스트 vs. 닉슨> 글을 쓰던 와중 우연히 샘 록웰의 필모를 보다가 척 팔라닉의 소설 <질식>이 작년에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을 발견. (알라딘 책 소개 페이지(새 창으로 열기) 참조, 관련 imdb 페이지(새 창으로 열기) 참조.) 척 팔라닉은 데이빗 핀처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인 <파이트 클럽>의 원작소설을 쓴 작가다. 감독은 클락 그렉, <아이언맨>의 콜슨 요원을 비롯해 다양한 TV물 및 영화에서 조, 단역으로 출연했던 배우로, <질식>이 연출 데뷔작이라고 한다. 작년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된 뒤 각종 영화제를 전전하다가 9월쯤 뉴욕과 LA에서 한정개봉된 모양인데, imdb 평점이 비록 5천 명 가량만 투표한 것이긴 하지만 꽤 높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영화의 주연을 샘 록웰이 맡았다는 것. 샘 록웰! 샘 록웰!

Choke

깔끔한 포스터.

배우들도 감독도 별로 유명하지 않으니 국내에 들어올 리는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어떤 미친 영화사가 이 영화를 수입해 준다면 반드시 장문의 리뷰를 써바치겠다. 물론 글쟁이의 양심상 칭찬만으로 도배하리라는 약속은 못 하겠고, 영화가 영 거지같다면 욕과 악담으로 점철되더라도 반드시 장문의 리뷰 자체는 쓰겠다는 얘기인데, 영화제를 그리 전전한 데다 작년 선댄스영화제에서 무려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면 영화가 엉망일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을까. 영화가 남들 보기에 영 괴악한 정서를 담고 있다 해도, 그건 원작 자체가 그래서일 테고, 내가 척 팔라닉을 좋아하는 것에는 그 괴악한 정서에 대한 이해와 호감이 포함되는 것이니... 정 수입이 안 된다면 해외 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아마존에서 주문을 하더라도 DVD로 볼 궁리를 하겠지만, 기왕이면 국내에서 자막을 입힌/쏘는 필름으로 정식 극장에서 보고 싶은 게 영화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인지라. (아니면 영화제에서라도.) 근데 이런 스펙의 영화면 부천이나 전주영화제 같은 데에서도 충분히 틀 만한데, 올해 전주에 기대를 좀 걸어볼까. (참고로 네이버 영화페이지에서는 <초크>라는 제목으로 소개(새 창으로 열기)하고 있다.) 영화사든 영화제든, 제발 굽신굽신...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 목에 걸려 다 죽어가는 척을 하면 반드시 나타나곤 하는 익명의 불특정한 은인들에게 빌붙여 살아가는 사기꾼 섹스중독자의 이야기, 라고, 책 소개 페이지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읽은지 오래돼서인지 척 팔라닉 소설들을 한번에 몰아서 읽어서였는지, 도무지 내용이 기억이 안 나네.) <파이트 클럽> 덕에 국내에도 나름 인지도를 얻은 덕에 척 팔라닉의 소설(새 창으로 열기)은 [파이트 클럽]은 물론 [서바이버], [인비저블 몬스터], [질식], [자장가], [다이어리]까지 소설이 출간됐으나 판매가 영 부진해서인지 이후 작품들은 모조리 미출간 상태다. 책세상의 메피스토 시리즈에 감사한 건 다분히 척 팔라닉 소설을 계속 내준다는 것 때문이었는데... ㅠ.ㅠ (아니 근데 [파이트 클럽]은 판권이 언제 책세상에서 랜덤하우스로 갔담? 설마 랜덤하우스에서 척 팔라닉 소설 전권을 다시 내준다는 건 아닐 테고...? 번역자는 여전히 최필원 씨다...?)

2003년작인 [다이어리]가 국내에선 2005년에야 출간된 예가 있기도 하지만, <파이트 클럽>도 척 팔라닉도 이제 슬슬 이름이 잊혀져가는 분위기인지라 (20대 초중반 중 <파이트 클럽> 본 사람?? 이 영화는 일단 보면 열광하게 돼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도 열광을 안 한다면 나와 친구될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일 수도?), [Haunted]와 [Rant], [Snuff]가 국내에 출간될 가능성은 예전보다 확실히 적어진 듯하다. 미국에선 지금 올해 4월쯤 나올 예정이라는 [Pygmy]의 예약판매에 들어간 것 같던데... 하긴 후반으로 갈수록 척 팔라닉의 소설이 다분히 선정적인 소재주의로 가는 듯한 느낌이 있긴 했다. 그럼에도 [다이어리]는 매너리즘에서 한결 벗어난 작품으로 보였고. (아니면, 혹시 매너리즘의 끝장을 본 책일수도? 이건 [Haunted]를 봐야 답이 나올 듯.)

영화 스틸들을 본다.

2009/02/17 14:44 2009/02/17 14:44

'혁명으로 건설된' 나라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미국(미국의 독립전쟁은 영어로 The Revolutionary War라 표기된다)의 정치 역사상 가장 절망적이었던 때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던 때가 아니라 닉슨이 사임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대체로 미국민들은 자기들의 자랑스런 정치 역사에 '쪽팔린 순간'이 추가되는 걸 극도로 꺼리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부시가 당선됐던 바로 그 대통령 선거 때도 고어는 '미국 역사에 쪽팔린 순간'을 공식적으로 하나 더 추가하지 않기 위해 패배를 수긍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그렇게 사임한 닉슨을 두고 영국 출신의 예능계 MC인 데이빗 프로스트(우리나라로 치면 야망에 불타는 김구라 버전이라 해야 할까)가 출세욕과 시청율 욕심에 불타 닉슨을 인터뷰할 계획을 세운다. 당연히 닉슨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그 완숙한 정치인의 능구렁이 기질로 별것도 아닌 만만한 놈 하나 놀려먹으며 50만 달러나 되는 거액의 출연료를 챙길 생각으로 이 인터뷰에 응한다. 그리고 결과는? 역사에 공식 기록된 대로, 그리고 사람들이 알고있는 대로다.

론 하워드 감독은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이 드라마를 매우 경쾌한 코미디를 섞어 '못난 놈이 유능한 놈 엎어메치는' 1:1 스포츠영화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상업적 영화에 매우 능한 솜씨를 부리는 감독인 만큼, <프로스트 vs. 닉슨>은 매우 흥미진진한 극적인 게임을 보는 듯 재미가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평생 닉슨 연구를 하며 저술을 한 지식인이나 정치와 시사에 능한 일급 지적인 방송인이 아니라, 예능계를 떠돌며 예컨대 '달인을 소개하고 연예인 가쉽을 다루던' 바람둥이 연예인(인터뷰어나 저널리스트가 아니다)이다. 그들은 철저히 프로스트를 빛내주기 위해, 그러니까 프로스트가 닉슨을 제대로 공격할 수 있도록 각종 자료조사와 예상질문과 가상 인터뷰 훈련을 도와주는 조력자들로 등장한다. 사임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거나 사과하지 않은 뻔뻔한, 그러나 심리게임과 정치싸움에 매우 능한 거대한 산 하나를, 그런 연예인 하나가 어느 한 순간 클로즈업 하나로 패배를 시켜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호동이나 유재석이나 김구라 같은 이가 전세계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전두환을 무장해제버린 사건이라 해야 할까. 그러니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지 않을 수 있을까.

Frost/Nixon

하지만 론 하워드는, 애초 프로스트가 이 거대한 싸움에 도전한 동기와 과정인 '시청율 만능주의'과 '선정적인 돈 잔치 미디어 전쟁'에 대해선 어물쩍 넘어간다. 프로스트의 조력자였던 저술가이자 지식인인 짐 레스터의 입을 빌려 미디어의 클로즈업이라는 것이 어느 한 인물의 인생 전체를 단지 하나의 컷으로 압축시켜 버린다는 것을 언급하면서도 이것의 놀라운 힘에 그쳐 경탄을 바치고 있을 뿐, 성찰이나 경계 같은 걸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천하의 그 닉슨을 한순간에 무릎꿇린 바로 그때 그 사건의 승리감에 너무 도취돼 있는 듯 보인달까, 그래서 그 수단의 위험성이나 껄끄러움 따위는 성공이라는 결과 밑에 그저 자연스럽게 묻어버려도 된다 여기는 듯 보인달까. 나를 포함해 미디어를 다루는 이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영상 미디어를 다루는 이들이 언제나 자신의 무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며 성찰해야 하는 미덕과 윤리라는 게 있는 법인데,  이 영화에선 그게 잠시 잊혀진 듯하다. 하긴, 이 영화는 미디어의 바로 그 순간을 통해 승리를 쟁취한 순간, 그걸 그리고자 했던 영화니까, 하긴 그러니까 론 하워드지, 싶기도 하지만. (거기에, 론 하워드답게 '감동의 화해' 사족까지.)

캐스팅이 매우 화려하다. 일단 닉슨으로 나온 프랭크 란젤라는 온갖 영화들에서 주로 뚱하고 무서운 아저씨로 나왔던 바로 그 아저씨로, 오랜만에 영화의 주인공을 맡아서인지 신나서 날아다니신다. 닉슨의 무섭고 육중한 그 무게감을,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 그 클로즈업의 그 표정을 제대로 구현해주고 계신다. 프로스트로 출연한 이는 <더 퀸>에서 토니 블레어로 출연했던, 얄쌍하게 생긴 바로 그 아저씨. 짐 레스터로 출연하는 샘 록웰은 여전히 그 반짝반짝거리는 섹시한 눈으로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들어 주셨고, 프로스트의 친구이자 PD로는 새로운 미스터 다아시 매튜 맥페이든이 아주 '귀엽게' 출연해주고 계시고, 역시 프로스트 팀에서 함께 조사를 했던 ABC사의 방송인으로 올리버 플랫 출연. (이 아저씨 진짜 오랜만에 얼굴 보네.) 그리고 레베카 홀... 아니 이 언니는 대체 그간 어디서 뭐하고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비추싱겨? 30대가 되더니 아주 완숙하고 섹시해지셨군. (역시 30대에 더 빛을 발할 외모일 줄 알았다.)

Frost/Nixon

이 아저씨 볼 때마다 너무 이쁘고 섹시한 거, 내 눈에만 그런 거야?

2009/02/17 12:42 2009/02/17 12:42

Zerkalo

<거울>의 러시아 비디오판 커버.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은 비선형적인 시간 편집과 혼란스러운 이미지들 때문에 일반적인 영화들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선형적인 시간 순서에 맞게 혹은 인과적인 논리 순서에 맞게 필사적으로 영화를 재조립하려는노력 대신 그저 이미지가 흘러나오는 대로 보고 있다 보면, 영화가 끝난 후 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질 뿐 아니라, 그런 식의 '혼란' 자체가 타르코프스키의 원래 의도였겠구나 싶은 부분들이 보인다.

영화에서는 컬러와 흑백 장면이 교차하지만 이것이 눈에 보이는 명백한 기준을 갖고 나뉘는 것도 아니다. 그 와중에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에 관한 뉴스릴이 다수 삽입돼 들어간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영화의 화자인 알로샤(혹은 알렉세이)의 어린 시절(과거)와 현재가 마구 혼란스럽게 교차한다. 과거에서 주로 드러나는 것은 알로샤와 어머니의 관계, 그리고 유년시절의 기억이고, 현재에서는 성인이 된 알로샤가 어머니를 꼭 닮은 전 부인 나탈리아와 그 사이 낳은 아들 이그넷과의 관계가 주축을 이룬다. 그런데 과거에서 어머니를 연기한 마르가리타 체레코바가 현재에서 나탈리아를, 과거에서 어린 알로샤를 연기한 이그넷 다닐체프가 현재에서 어린 이그넷을 동시에 연기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같은 배우가 1인 2역을 맡음으로서 과거와 현재의 교차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그렇다면 타르코프스키가 배우를 이렇게 캐스팅함으로써 의도적으로 혼란을 가중시킨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물리적으로 다른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은 얼마나 비슷한지, 그러니까 과거의 관계가 현재의 관계에서도 어떻게 '반복'이 되고 있는지, 나아가 과거가 그저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까지 어떻게 이어지며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엄마와 아들이 유난히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면서 '애증'이 쌓이고 복잡화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부재가 불러오는 결핍성, 이라는 특징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서도 알로샤에게 고스란히 반복된다. 알로샤가 느꼈던 그 애증과 결핍은 알로샤가 의도한 건 아니었으되 그의 아들인 이그넷에게 고스란히 세습되면서, 알로샤는 결핍과 부재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자리를 옮겨가며 비로소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일관되게 표현하려는 듯, 영화에서 성인이 된 알로샤는 스크린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아가 이 영화는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데, 영화의 제목이 '어머니'가 아니라 '거울'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 제목이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가로서 예민한 통찰력을 드러내준다는 생각이 든다. 거울은 실제를 실제처럼 비추지만 실제가 아니며 그 상은 어떤 식으로든 왜곡을 거친 것이다. 좌우가 바뀌는 건 기본이고, 거울이 약간 오목하냐 볼록하냐에 따라 왜곡은 더 심해진다. 우리의 기억, 혹은 회고란 것도 그렇다. 기억은 과거 실제 있었던 일에 대한 흔적이지만 기억이 과거의 실제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억은 파편적이며, 때로 실제보다 과장되고, 실제 있지 않았던 일조차 실제처럼 상을 형성한다. 그리고 당시 그를 가장 강력하게 압도하던 '꿈'의 기억이 실제 있었던 경험의 기억을 대체하기도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어린 시절, 특히 전쟁이 있었고, 어머니는 고통스러웠으며 아버지는 부재했던 그 시절 어머니와의 특별한 유대관계에 관한 '기억'과 '회고'의 영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거울'이 그렇듯, 우리의 실제 모습을 비추면서도 실제와는 차이를 내보일 수밖에 없다.

Zerkalo

먼곳을 응시한 채 '슬픈 눈을 하고있는' 어머니.

그렇기에 이 <거울>에서의 어머니는 화자의 기억의 파편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이에 따라 어머니에게 주인공이 갖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종류의 감정이 영화와 함께 흘러나온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연약하고 외롭고 슬픔이 눈에 배어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까다롭고 신경질적이기도 하며, 알로샤와 더없이 가까웠다가도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죄책감과 연민이 함께 느껴지는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인 한편 심지어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영화 초반에 집에 없던 아버지가 갑자기 눈앞에서 어머니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녀는 대야에 잠겨있던 그 긴 머리를 그대로 얼굴 앞으로 드리운 채 일어서서 걷는다. 이 장면은 흑백에 사방 벽으로 온통 물이 흘러내리는 이미지와 함께 제시되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마치 처녀귀신과 같아 꽤나 섬뜩하고 오싹하다. (사실 수직으로 하강하는 물의 이미지는 여자의 몸이 공중으로 뜨는 이미지와 함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마다 반복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어렸을 적 잠을 자다 깨어 본 이 광경은 직접 봤다기보다 꿈에서 본 장면이거나 실제 이미지와 상상이 덧붙여진 왜곡된 기억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현재로 오면 알로샤의 아들 이그낫 역시 호러틱한 경험을 하는데, 아버지의 집의 티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낯선 여인의 부탁에 따라 푸시킨의 편지 책을 읽어주던 이그낫은 잘못 찾아온 아주머니 때문에 현관에 갔다 온 사이 낯선 여인이 사라진 것을 알고 당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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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영화 저리가라인 바로 그 장면.

영화를 보면서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데이빗 린치의 다수의 영화들을 떠올렸다. 영화의 초반, 한 공간에 여러 명의 어머니가 존재하며 동시에 거울 속에서 나이든 자신의 모습을 보는 장면은,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고 동시에 평행하게 여러 차원이 존재하는 것을 묘사한 장면과 닮아있다. 한편 '사건'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매개로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나열되는 것은 데이빗 린치가 즐겨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과 상당히 닮았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가 제작년도에 있어 훨씬 앞서는 만큼 큐브릭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타르코프스키가 큐브릭의 영화를 보고 장면을 구상했을 가능성도 적어보인다. 실제로 평자들이 두 사람을 비교할 때 타르코프스키가 상당히 화를 냈다고도 한다. (반편 큐브릭은 상당히 재미있어 했다고.) 하지만 데이빗 린치가 <이레이저 헤드>를 만들기 전 타르코프스키의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정말로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는지으 여부는 나 역시 상당히 궁금하고 확인해보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나면 이 영화의 오프닝, 그러니까 유리 자라라는 말더듬이 청년이 최면요법을 받는 장면은 과연 영화 전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아마도 영화 전체를 상징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 여긴다면, 영화란 결국 최면술사의 최면요법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가 된다. 말 더듬기라는 것이 결국 파편화된 말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최면을 통해서야 그가 또렷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듯, 평소 파편화된 기억 조각들만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영화란, 혹은 그 모든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허구'의 창작이란, 결국 최면 요법처럼 우리의 무의식으로 가라앉은 꿈과 기억을 환기시키고 그것을 내적 일관성에 의거한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것이 될 것이다. 비록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근거는 또렷한 내러티브가 아니라 의식의 흐름에 기반한, 보다 간접적이고 내밀한 일관성이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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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 몸이 뜬 여인의 이미지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숭고한 '절대적 예술의 경험'을 선사하곤 한다.

+ 영화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들

1. 영화의 초반, 어머니와 헤어진 의사가 다시 길을 가다 멈춰서서 머뭇거리며 어머니 쪽을 돌아볼 때, 거대한 바람이 불면서 벌판 전체가 화면 후경에서 전경 쪽으로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풀이 흔들린다. 이것이 두 차례 반복되는 걸 볼 때 누구나 또렷한 이유없이,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 채 "아...!"하고 짧은 탄성을 내지르게 될지 모른다. 별다른 이유없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참 이상한 장면. imdb의 trivia 페이지(새 창으로 열기)를 보면 두 대의 헬리콥터를 카메라 뒤에 착륙시켜 스위치를 눌렀다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2. 공중부양 : 위에서도 말했듯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는 공중에 몸이 뜨는 여인의 이미지가 자주 나온다. 홀로 누워서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사랑을 말하는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에밀 쿠스트리차 역시 '공중부양하는 여인'의 이미지를 자신의 영화에서 종종 써먹는다.

3. 영화 속 전쟁의 포화와 폭격은 모두 흑백장면인 반면, 주인공이 1935년 목격한 옆집 창고의 화재는 매번 칼라 화면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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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샤(알렉세이)의 기억 속에 매우 강력하게 각인된 화재에 대한 기억.

4. 위에서도 말했듯 수직으로 물이 낙하하는 이미지 역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매번 등장하는 이미지인데, 이 영화에서 그 장면은 어머니의 긴 머리카락 때문에 상당히 무섭다. 웬만한 귀신영화보다 훨씬 무섭다.

5. 마르가리타 체레코바는 어머니 역을 할 때는 머리를 올리고, 나탈리아 연기를 할 때는 머리를 풀어내렸다. 머리를 푼 채 어머니를 연기하는 장면은 저 처녀귀신 장면 단 하나뿐이다.

6. 내레이션으로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는 타르코프스키의 실제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목소리이다. 영화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타르코프스키의 실제 어머니이다.

7. 영화의 상당히 후반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정겨운 한때가 묘사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 역시 어머니가 미래를 마치 비전으로 보는 듯한 장면으로 구성돼 있다.

8. 5살의 알로샤로 나왔던 배우와 아버지로 나온 배우는 실제로 부자간이다.

9. 푸시킨을 청했던 티테이블의 낯선 여인. 그때 알로샤는 이웃집 여인이 현관문을 두드려 나갔다 오는데, 티테이블의 여인과 이웃집 여인은 둘 다 같은 배우가 연기했다. 그래서 더 미스테리어스 / 호러틱한 장면이기도 하다.

2009/02/16 21:55 2009/02/16 21:55

조나단 드미가 이런 식으로 귀환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살짝 충격이었다. 90년대 뉴욕 독립영화 스타일이잖아. 그때 뉴욕 독립영화들의 스타일이란 것도 꽤나 다양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꽤 전형적이다. 좀 거칠고 투박하고, 일부러 헨드헬드 카메라 많이 써서 많이 흔들리고 그래서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고, 심지어 음악도 따로 밖에서 입힌 거 없이 다 화면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연주할 때 나오는 곡들 뿐이고, 화면 입자도 좀 거친 것 같은, 대신 주인공한테 카메라가 아주 가까이 밀착해 들어가며 극클로즈업 화면도 많은, 그리고 이야기 규모는 가족, 혹은 딱 몇 명으로 한정된 아주 작은 영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낡았다는 건 아니고, 영화는 꽤 감동적이었다.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이가 또한 그 가족의 일부라면, 그 봉인된 과거를 과연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 그를 향한 애증의 울타리 사이에서 대체 어떡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또 상처를 가한 이는 그 치명적인 죄책감과, 그럼에도, 가족에게서까지 미움받고 내쳐지지고 싶지는 않아 절박하게 매달리는 심정, 사이에서 헤매게 되고, 또 그런 이들이 가족 경사를 맞아 잠시나마 함께 지내며 서로 애정을 표하면서도 또 부딪히고, 상처주고 상처받고, 또 죄책감을 느끼고, 하는 그 세세한 과정들을... 조나단 드미는 카메라를 매우 가까이 배우들에게 가져다 대면서도, 정작 감독 자신은 그들에게 섣불리 개입하지 않은 채 그들 내면의 그 심리를 누구에게도 치우침없이 조근조근 풀어낸다.

대체 얼마나 잘했나 궁금증을 일으킬 정도로 미국에선 앤 헤서웨이의 연기에 대해 호들갑을 떨어댔는데, 보고나니 그럴 만했구나 싶다. 잘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틴에이지용 로맨틱 코미디로 시작해 20대용 로맨틱 코미디를 하던 예쁘장하고 팬시한 여배우가 다른 연기도 곧잘 한다는 걸 증명했을 때 격려하는 차원에서 더 박수를 보내는, 그런 종류의 찬사도 덧붙여진 듯. 언제나 이 배우 얼굴이 참 재미있게 생겼다고 생각했고, 그 지나치게 큰 눈 때문에 팬시한 로맨틱 코미디 여주인공 외에 다른 역을 맡는 게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잘해내더라. 그럼에도 역시 인형 같은 분위기가 나는 건 사실이기도 하고. 극중에서 "재활원에서 살이 쪘다"는 대사를 다섯 번 정도는 하는 것 같던데, 그래서 일부러 살을 찌운 것도 같고, 또 원래 기자와 평론가들이란 배우가 일부러 살을 찌우거나 빼거나 혹은 다른 식으로 외모에 소위 손상을 가하거나 하면 급 호감을 나타내며 또 가산점을 주는 버릇들이 있기 때문에. 앤 헤서웨이의 언니로 나온 로즈마리 드윗과 아버지 역으로 나온 빌 어윈 연기도 좋았고, 오랜만에 얼굴을 본 데보라 윙어도 무지 반가웠다. 이제 많이 늙긴 했지만 아이고 그래도 여전히 고우시더란.

Rachel Getting Married

2009/02/14 00:57 2009/02/14 00:57

한줄평 : 베티 프리단의 역저 [여성의 신비(새 창으로 열기)]가 나온 배경을 생생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중산층'이란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단순히 사회계층을 지칭하는 것 이상이다. 포디즘(포드주의)이 정점을 찍으면서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소비의 증가를 통해 노동자들이 중산층으로 안정을 누렸던 시기는 포디즘이 처음 등장한 1910년대가 아니라 1950년대에서 60년대였다. 그러나 이 때가 과연 행복한 시대였냐 하면, 그건 아니다. 재즈의 시대(Jazz Age : 1920년에서 1929년까지, 혹은 세계1차 대전 직후부터 뉴욕 증시 폭락까지)에 반짝 등장했다가 대공황과 전쟁으로 잠시 유예됐던 물질주의와 소비 향락 속에서 중산층은 안정과 함께 권태와 무력감을, 그리고 지리멸렬한 자기혐오 등을 경험하게 된다. 자본과 물질과 소비에 대한 정신의 패배, 라고 해야 할까. 이를 풍자한 조지 로메로 감독의 좀비 3부작, 그러니까 <리빙 데드> 혹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X> 시리즈의 첫 작품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처음 나온 게 바로 이 영화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해로부터 13년 후인 1968년이다. 참고로 미국의 50년대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고르라면 '매카시즘'이 될 것이다. 매카시 광풍은, 또 한편으로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 중산층 혹은 그 위로 계급이동을 하기 위해 소위 애국심을 무기로 기존의 기득권자들에게 도전했고 이를 일정 정도 성취했다는 측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특히 이 시기는 소위 '현모양처'로서 가정에만 충실하던, 그러나 제대로 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수많은 중산층의 여성들이 이유없는 무력감과 우울증, 히스테리를 호소하던 때였다. 물론 당시는 이것이 그저 개인의 특성처럼 치부되었지만, 이 현상을 연구하던 한 심리학자는 이것이 그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중산층 여성 일반에게 나타나는 대단히 공통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임을 밝혀내는데, 그 학자가 바로 베티 프리단이고 그 연구의 결과서가 바로 미국에서 제2의 페미니즘 운동을 일으켰다고 평가받는 [여성의 신비]다. 그리고 이 시기의 불안하고 어두운 면들을 속속들이 잡아내고 묘사해낸 영화가 바로 <레볼루셔너리 로드>다. 영화 안에서 이 작품의 배경이 1955년이라고 명시되고 있기도 하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사랑에 빠져 결혼한 프랭크(리어나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이 교외에서 살며 지리멸렬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둘이 처음 만나던 순간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만남과 사랑, 결혼 등에 관해 별다른 시간 할애 없이 곧장 아이 둘 낳고 살고 있는 7년 후를 보여주며, 이들의 과거는 간간히, 극히 짧은 대사나 플래시백으로만 제시될 뿐이다. 적당히 바람을 피우거나 성질을 내며 싸우는 이 부부가 연애 시절의 불꽃을 되찾는 것은 파리행을 결심하고서다. 에이프릴의 열정적인 제안에 설득당한 프랭크는 에이프릴과 함께 잠시잠깐의 행복과 혼연일체감을 느끼는데, 이들의 짧은 행복은 승진을 제안받은 프랭크의 망설임과 에이프릴의 임신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프랭크는 에이프릴의 임신을 '무기'로 사용하며 파리행을 포기할 것을 에이프릴에게 설득하고, 심지어 에이프릴을 비난하며, 그들이 함께 꾸었던 꿈을 삽시간에 짓밟는다. 낙태를 고려하는 그녀를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모는 심중엔, 정말로 생명에 대한 배려가 있다기보다는 물질적 성공과 사회적 출세에 대한 욕망과, 그녀를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모든 윤리적, 도덕적 판단과 그에 대한 책임까지도 에이프릴에게 미루는 비겁한 면모를 보이면서까지 그가 지키고 싶었던 자존심과 권위란,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당시에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이었을 것이다.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란, 남자들에겐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지켜야 할 신성한 무엇이다. 여자가 아름다움과 사랑받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든다면, 남자는 가족을 부양하는 경제력과 가장으로서의 권위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그것이, 오랫동안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통제되던 사회에서 일반적인 남녀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몇 가지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아내를 사랑하는 좋은 남편이라 스스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시하는 에이프릴에게서 정말로 상처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지금의 눈으로 프랭크를 일방적으로 손쉽게 비난하기보다, 당시의 기준을 고려해 프랭크의 심리를 추측해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프랭크는 여전히 속물적이고 비겁하고 나쁜 놈이긴 하지만.

Revolutionary Road

지나치게 과시적이라 짧게 끝날 수밖에 없는 부부간 행복과 일체감.

중산층의 이런 신기루같은 일상은 두 부부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건 아니다. 다른 이에게 호들갑스럽게 친절하고 소위 교양있는 젊은 부부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내며 남편을 휘두르는 헬렌(캐시 베이츠의 놀라운 연기!)은 실제로 남편에게 무시를 받으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병 때문에 '현모양처로서의 실패감'을 컴플렉스로 안고 살아간다. 프랭크-에이프릴 부부와 친구로 나오는 셰프-밀리 부부 역시 겉으로 금슬좋고 평화롭지만 공허한 가족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건 마찬가지. 밀리는 남편도 자유를 꿈꾸며 자신을 낯선 세계로 데려가려 할까 봐 겁을 내고, 그러면서도 남편의 눈치를 보기에 바쁘고, 셰프는 자신의 꿈과 소망을 속으로만 은밀히 판타지로 남겨둔다.

아마도 영화를 보는 이의 성별에 따라 아마도 감정이입의 대상이 다를 것이다. 샘 멘데스 감독은 프랭크(리어나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 둘의 꿈과 사랑과 갈등과 대립을 묘사해 내는 듯하다. (남자 관객의 반응을 듣고 싶다.) 여자 관객인데다 삼십대 중반이 되도록 여전히 소위 '철없이' 살고있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에이프릴에 전적으로 감정이입해서 보았고, 에이프릴의 꿈과 희망이 다소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은 십분 인정하더라도, 그녀에게 파리가 구체적인 지명이라기보다는 중산층의 현모양처라는, 그 보이지 않는 유리벽의 갑갑한 굴레를 벗어나 도달하고픈 곳의 일종의 '상징'이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 직설법 대사로도 드러나 버리기는 하지만. 이후 그녀를 집에 잡아두려는 프랭크의 설득과 위협이 과연 어떻게 에이프릴을 '정신병자'로 만드는가. 그 패턴은, 베티 프리단이 연구했던 주제를 그대로 눈앞에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결국 에이프릴이 선택한 위험한 행동 역시,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격렬하게 외쳤던 권리와도 명백한 연관이 있다. 

둘이 직접 맞붙어 (원래대로라면) 불꽃같은 전쟁을 벌이는 장면도 나오는데, 케이트 윈슬렛의 포스에 못 미치는 리어나도 디카프리오 연기가 좀 안타깝다. 케이트 윈슬렛은 역시, 가슴 속에 불꽃을 안고 살아가며 시대와, 혹은 주변과 불화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 가장 빛나고 에너제틱하다. 사실 데뷔작 <천상의 피조물들>부터 그녀가 맡았던 역은 거의 언제나 그랬다. 심지어 <센스, 센서빌리티>에서도 그녀의 마리앤은 '여염집 규수'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조신한 행동거지 대신, 사랑하고 느끼는 대로 거침없이 행동하는 캐릭터이지 않는가. 겉모습은 단아한 옷차림의 중산층 주부지만 가슴 속에 천불을 안고 사는 열정적인 에이프릴은 케이트 윈슬렛에게 그야말로 적역의 캐릭터다. 반면 '두 딸을 거느린 아버지' 리어나도 디카프리오는 어쩐지... 좀...

샘 멘데스의 연출은, 아무래도 그가 연극연출가로서 더 명망이 높다는 사실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장면 장면이 어쩐지 대단히 연극적으로 보인다. 심지어 거실과 식당을 유려하고 요란하게(...) 그리고 컷 없이 오가는 카메라 워킹에서도, 나는 어쩐지 프로시니엄 아치를 벗어나지 못 하는 갑갑함을 많이 느꼈다. 이건 한편으로는, '중산층의 집' 안에 갇힌 주인공들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더없이 어울리는 연출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영화로서의 미덕이나 장점이 상당 부분 무시되는 듯한 느낌이기도 해서 뒷맛이 개운하지도 못 하다. 연극을 그대로 영화로 옮겨온 듯한 느낌이 드는 수많은 영화들, 예컨대 최근에 본 <다우트>의 경우에도 그런 연극적인 특징들이 개운치 못 하다거나 답답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느껴지진 않았는데, <아메리칸 뷰티>에서도 그랬지만 샘 멘데스의 연출엔 어딘가 모르게 사람 참 깝깝하게 만드는, 그리고 인공적으로 갈등이 압축된 듯한 느낌이 좀 있다. 하지만 이건 <로드 투 퍼디션>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지어 말하기에는 좀 위험한 점이긴 하고...

그런데 이 영화가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에 대한 굉장한 해설서 기능을 하기는 하지만, 역시 만든 이가 남자라는 점은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에이프릴의 열정을 이해하거나 존중하는 사람들은 어째 모두 남자들뿐이란 게, 내게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만든 감독 입장에서는 전혀 어색하거나 걸리는 점이 없었을 듯.

(근데 무슨 단평이 이리 기냐능? ㅋㅋ)

2009/02/13 03:26 2009/02/13 03:26

정치, 사회적 빈곤함이 문화적 빈곤함을 확대시키고 있는 와중에, 이 기사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새 창으로 열기)는 그저 신호탄에 불과하다. 그저 영화 한 분야를 다루고 있을 뿐, 이미 다른 영역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 한 편이 개봉됐을 때 과연 그 영화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게 반영돼 있는지, 그 가치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 그 영화의 흥행수익이 자동차 몇 대, 컴퓨터 몇 대를 판 것과 같냐를 따지는 세상이 된지는 오래됐다. 지금 문화관광부에서도, 심지어 청와대에서도 <워낭소리> 보고 싶다고 프로듀서에게 전화가 오는 상황이지만, 과연 <워낭소리>가 30만 흥행을 하고 그렇게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이 그런 영화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이나 썼을까? 제작비 대비 얼마를 뽑았다더라, 하는 얘기는 영화도 산업인 이상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 경우 산업계에서 종사를 했던 만큼 산업적 부분을 신경쓰지 않는 소위 '예술지상주의자'들을 한심하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영화는, 산업인 동시에 문화다. 문화란 눈에 보이는 숫자의 성과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가 무엇인지 함께 고려해야 할 영역이다.

지금 충무로의 수많은 제작자와 감독들이 과거 독립영화를 만들었다. 지금의 독립영화 감독이 내일의 최고의 감독, 제작자가 될 수 있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더라도, 독립영화는 독립영화로서 이미 그 가치를 가진다. 남들이 듣고싶어하는 얘기만이 아니라, 남들이 모르거나 듣고싶지 않아 했던 이야기마저 용감하게 할 수 있는 게 바로 독립영화다. 그런 만큼 독립영화는 충무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나 헐리웃을 통해 한국에 들어오는 수많은 외화들보다도 오히려 중요하다. 그 중요한 영화들의 발판이 지금 위험에 빠져있다.

기사가 무지 길다. 영화 '정책'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재미있는 기사도 아니다. 일반관객들이 즐겨찾는 흥행영화가 아니라 독립영화에 관한 이야기라 더하다. 하지만 최근 내가 쓴 영화기사 중 가장 중요한 기사가 아닌가 싶다. 꼭 읽어주시기 바란다. 후속기사도 기획중이다.

2009/02/12 16:14 2009/02/12 16:14

사랑에 빠져 결혼한 신혼부부가 우연히 개를 키우게 된다. 그런데 이 개가 또 유독 지독스럽게 말썽과 사고만 치는 개다. 도저히 적응 안 되는 이 개한테 그래도 정 붙인답시고 온갖 고생을 다 하는 와중에 부부는 수많은 일을 겪는다. 아이를 사산하기도 하고, 진로를 바꾸고, 직장을 옮기고, 임신에 성공해 아이를 낳고, 또 낳고, 실수로 하나를 더 낳고, 이사도 한다. 그렇게 서로 나이를 먹어가며 '가정'을 이루고, 함께 살아가고,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이야기. 그리고 사람보다 빨리 늙는 개를 보내며, 죽음도 함께 하는 가족의 이야기다. 

<말리와 나>는 그렇게 제니와 존 부부가 세 아이를 낳고 기르고 나이가 들어가는 아웅다웅 살아가는 일상을 '개 키우기'라는 소재를 통해 펼쳐놓는 얘기다. 말썽쟁이 개 때문에 벌어지는 코믹한 에피소드는 주로 영화의 전반부에 포진돼 있고, 그 사이사이 부부의 일상사가 끼어들더니, 어느새 부부의 가족 이야기가 전부를 차지한다. 하긴, 그게 맞을 것이다. 이들의 말썽쟁이 개, 말리는 그저 개가 아니라 함께 지낸 시간이 쌓일수록 점차 이들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어가니까 말이다. 때로 힘들고 어려워 화를 내고 싸우고 울고 하더라도, 이들은 '가족'이기에 어려운 시간을 함께 도우며 헤쳐나간다. 그래, 결국 '가족' 이야기고,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이다. 다만 유머감각과 글줄 쓰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손에 의해 맛깔나는 이야기로 씌여졌다가, 솜씨 좋은 감독의 손에서 다채로운 희로애락의 삶의 빛깔을 가진, 재미있고 웃기며 찡한 '영화'가 됐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함께 시간을 견디어 가며 나이를 먹고 서로 성숙해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그것이, 여신보다는 이웃집 소녀 같았던, 그리고 이제 우리처럼 얼굴에 주름살을 하나둘 새긴 제니퍼 애니스톤과, 불미스런 사건 이후 한결 순하고 차분해진 표정으로 돌아온 오언 윌슨의 모습이어서 더욱. 그들을 개인적으로 아는 게 아닌데도, 어쩐지 역경과 시련을 헤치고 함께 시간을 지나온, 함께 나이를 먹고있는 동지와 같은 느낌이 든달까. 영화의 마지막 엔딩에서 동물을 전혀 키워본 적이 없는 나도 눈물이 찔끔, 났다. 아마도 동물을 키워봤고, 특히 죽음을 겪었던 이들이라면 이 영화가 더욱 남다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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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동물을 키워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길에서 유기견이나 유기묘를 봤을 때 반응이 다르다. 예컨대, 몇 년 전에 알던 어떤 사람은 자기 아파트 근처에서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해 며칠 음식을 챙겨 갖다주더니, 그예 새끼묘 한 마리는 집에 가져가고, 자기 직장 동료들에게 말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 사람들에게 나머지 새끼묘들을 키우도록 나눠주었다. 그는 이미 당시에 한국에도 출판된 [말리와 나]를 읽으며 펑펑 울곤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우연히 길에서 상처입은 유기견을 발견하곤 일단 병원에 데려가 치료부터 받게 한 후 집으로 데려갔다. 자신이 키울 처지는 아니었기에, 열심히 주변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개를 맡아줄 사람을 찾아냈다. 내게는 그런 감정이나 행동이 경이로운 종류의 것이다. 만약 내가 조그마한 아이들이 꼬물락대는 걸 봤다면 안됐다 여기기는 해도 음식을 챙겨다 줄 생각까지는 아예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런 불쌍한 동물 자체가 내 눈엔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저 지인들의 행동을 목격한 이후 동물에게 관심을 아주 조금 갖게 된 게 변화라면 변화일까. 결국 그런 감정도 '학습'을 통해 배우고 고양이 가능한 듯하다. 물론 확실히 배우기 위해서는 결정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이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싸이코패스라 부르는 사람들 중 일부도 실은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감정을 배울 기회가 아예 없었던 건지도, 어쩌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2009/02/11 10:28 2009/02/11 10:28

<문 프린세스 : 문에이커의 비밀>은 여러 모로 <판의 미로>와 닮은 구석이 있다. 어린 소녀가 부모 중 한쪽 혹은 양쪽을 잃고 새로운 환경으로 이사하여 부적응의 기간을 갖는다. 우연히 낯선 이의 '미션'을 받고 그녀는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곧 그 미션의 모험에 임하게 되며, 결국 자신을 희생해 미션을 수행하며 다른 이의 목숨을, 혹은 세계를 구한다. 특히 이들은 '달'의 정기를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달 부분을 제외하고 이는 실은 훝한 영웅신화 및 이의 변용인 판타지 소설들의 모범 플롯이기도 한데, 우리나라 바리데기 설화에서도 드러나듯 주인공이 소녀인 경우 '희생'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문 프린세스 : 문에이커의 비밀>이 <판의 미로>를 닮았다기보다는, 두 작품 모두 전통적인 판타지 플롯(이것은 다시 영웅신화의 플롯의 변형이다)을 따르는 데에서 공통점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 1947년 영국에서 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를 만들었던 가버 추보가 연출을 맡았는데, 극장에 걸리는 둥 마는 둥 하고 사라졌던 이 영화는 뒤늦게 작품을 본 팬들에 의해 양 엄지 모두 치켜올린 평을 받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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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 프린세스 : 문에이커의 비밀>은 다소 실망스럽다. <황금나침반>에서도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소녀를 연기했던 다코타 블루 리처즈는 이 영화에서 단조롭고 뻣뻣하기 짝이 없는 연기를 보여주며, 영화의 리듬은 종종 길을 잃은 채 툭툭 끊긴다. 소녀가 마침내 문에이커 영지의 비밀을 알아내기까지, 영화의 전반부가 너무 길고 지루한 반면, 나머지 시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별 성의없이 건성으로 비약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볼 만한 것이라면 주인공 마리아 역을 맡은 다코타 블루 리처즈가 입고 나오는 고전미 가득한 의상과, 오랜만에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나타샤 멕켈흔 정도. 물에 빠진 다코타 양을 업은 유니콘들이 바다에서 유니콘들이 파도를 타고 떼로 달려오는 장면은 이 영화가 야심차게 준비한 '스펙터클 볼거리'겠지만 이야기가 이렇게 툭툭 끊기는 영화에선 오히려 실소를 자아낼 정도. 아쉽다, 소녀가 주인공인 탄탄한 판타지는 과연 언제쯤 나오려나. 개중 <잉크하트>가 그나마 나았던 듯(하지만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소녀보단 그녀의 아버지 브렌든 프레이저가 주인공.)

2009/02/10 12:38 2009/02/10 12:38

설 연휴적 인터뷰한 걸 거의 열흘간에 걸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회사엔 지각출근을 일삼으며 낑낑댄 끝에 드디어 기사 완성. 이 인터뷰는 영화비평웹진 네오이마쥬의 백건영 편집장과 함께 진행한 것으로, 네오이마쥬 버전은 여기(새 창으로 열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날 인터뷰는 다소 어두운 분위기에서 전개됐다. 아무래도 인터뷰를 한 장소가 조명이 적어 어둑해서였을까, 아니면 워낙 몸과 마음이 춥고 고통스러운 시대여서였을까. 그래서 나오는 이야기들도 대체로는, (직접적으로 명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명박 정부와 보다 엄혹해진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해 더욱 암울해진 영화풍경을 주제로 한다.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영화는 사회적 산물이고 영화를 상영하고 보는 행위 역시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고전영화/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고 본다는 것이 '스노브하고 우아한 척하는 사람들'의 행위로 오인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그 어느 곳보다도 사회 현실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곳 중 하나가 이곳, 서울아트시네마이기도 하다. 문화적 빈곤함은 곧 사회적, 정치적 빈곤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서울아트시네마

워낙 광량이 적어 셔터스피드가 긴 바람에 살짝 초점이 나갔다. 결코 좋은 사진이 아니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없어서.


개인적으로 이 인터뷰 기사는 내가 썼던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자랑스러워할 만한 기사들 목록에 포함시킬 수 있다. 물론 나와 백건영 편집장님이 워낙 인터뷰 진행을 잘 해서...는 아니고, 영화가 사회의 산물임을 명확하게 전제하고 있는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폭넓은 식견과 통찰력으로 오히려 인터뷰를 주도해갔기 때문이다. 평소 그렇게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고, 오히려 조용한 목소리로 필요한 말만 해서 씨네토크 같은 데에서 감독들의 놀림을 받기도 했던 그를 이토록 말을 쏟아내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행복'을 말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 인터뷰에 이 답이 있다고 믿는다.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는 불행의 시대를 헤쳐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방점을 '불행'이 아니라 '헤쳐나가'는 데에 찍어야 한다.) 시네마테크 전용관이 백지화돼서 불행한 게 아니라, 불행한 시대이기에 전용관이 백지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터뷰 말대로라면, 우리는 섣불리 절망할 필요도 없고, 절망해서도 안 된다. "영화는 언제나 패배해왔다."는 말이 패배주의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럼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도 들린다. 혹자들은 그의 말에서 '영화' 대신 '민중' 혹은 '노동자'를 넣어도 통하는 말임을 눈치챌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주장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은 처음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글과 모든 일상과 모든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정치 따로, 문화 따로 말을 하는 순간 '일상의 정치'는 사라진 채, 저 견고한 벽 너머 '그들만의 정치'와 그들에게 꼭둑각시가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일상'이 분리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오늘, 이 글을 이렇게 쓴 것은, 저 인터뷰가 혹여 나의 부족한 정리 때문에  오해될까 하는 염려에서다. 혹은 고전영화나 예술영화를 보는 행위 역시 매우 정치적인 행위일 수 있음을 한번쯤은 직설법으로 전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정리된 기사를 읽다보니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당연히 저 인터뷰에서 전제되고 있었던 정치성이 좀더 모호하게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다 내 인터뷰 정리 능력이 떨어져서다. 네오이마쥬 버전과 비교해서 읽으면 그런 면이 보완될 것이라 믿는다.

2009/02/06 19:08 2009/02/06 19:08

어제월요일 밤에 <타이드랜드> 일반시사회에 참석을 하기는 했는데, 일단 시작을 놓쳤고, 앉은 자리가 스피커 때문에 화면이 가려져서, 자포자기하고 그냥 자버렸다. 하여 리뷰도 단평도 아직은 쓰기 어렵고, 그저 반쪽자리 수다나 떨어볼까 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게 화요일이라 요일 표기에 문제가 있었다.)

1. 적어도 내가 확인한 장면들에만 의한다면 <타이드랜드>를 표현할 한 단어는 바로 이것이다, 밑을 긁어보시라.

똘.끼.충.만

도중에 사람들이 나가버리고, 끝나고나서도 여기저기서 한숨과 원망의 짜증이 들린 게 당연했다. 판타지인 줄 알고 애를 데리고 온 부모나 월요일부터 회사에서 퇴근하고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와 피로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자 했던 직장인들에게 이 영화는 거의 악몽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12 몽키스>의 브래드 피트나 <브라질>의 조너선 프라이스한테서 엿보이듯 원래 테리 길리엄 감독한테 똘끼가 좀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작정하고 똘끼를 끝까지 밀어부쳤다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아빠가 애 앞에서 버젓이 마약주사를 준비하고, 그걸 열두어 살짜리 애가 '숙달된 조교'의 손놀림으로 아빠 팔뚝에 놔준다고 생각해보라. 심지어 그애는 편하게 취해있으라고 아버지 팔도 머리 위로 올려주고 옆에 거슬리는 물건도 치워주고 다리도 의자 위로 펴준다. 기겁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정신지체인 성인 남성과 어린 여자아이 사이에 성적인 코드가 묘사된다고 할 때 그걸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애가 보는 앞에서 사람 시체, 그것도 애 아버지의 시체를 박제로 만들기 위해 배에 칼을 꽂는 건?  이 정도면 법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거의 아동학대 수준이지 싶다.

2. 그래서 이 영화가 완성도가 이상한 졸작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과잉'의 측면이 없지 않지만, 내용 자체가 애의 기괴한 현실과 더 기괴한 판타지가 섞여들어가는 내용이고 그걸 표현해내는 수단으로 '과잉의 비주얼'을 선택한 거라면, 그 선택은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이 스타일에는 나름의 일관성과 원칙이 보이고, 보기에 따라서 사람 억장을 무너뜨리게 만들 수도 있다. 반토막만 보고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내가 본 부분들은 이 아이가 아무리 끔찍한 상황에 처했다 한들 그것을 아이다운 천진난만함과 상상력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겐 악몽일지 몰라도 제대로 보살핌받지 못한 데다 사회로부터 격리돼 있는 이 아이에겐 총천연색의 천진난만한 꿈의 세계이자 현실인 셈이다. 이 아이의 현실과 꿈을 우리가 '악몽'으로만 인지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또 다른 편협함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악몽'으로 느낄 수밖에 없으며 이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편협함이야말로 테리 길리엄이 그토록 드러내고자 한 대상, 목적하고자 한 대상일 수도 있다.

Tideland

3.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 성적코드에 대해 말하자면, 이건 정신지체인을 등장시키고 성을 다루는 텍스트들이 응당 주기 마련인 익숙한 그 혐오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그 혐오감을 떠올리며 몸을 떠는 관객들을 멋적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유는 주인공인 여자아이 질라이자 로즈와 정신지체인 딕킨스, 두 당사자들은 너무나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순수하게 발현되는 형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되지않게 어른의 세계로 아이의 세계를 억지 흉내를 내는 형태도 아니다. 이들은 분명 자기 인생의 어른들의 행위를 모방하고는 있지만, 그 행위는 채 사회화된 방식(그러니까 관습을 인지하고 그것을 좇는 방식)이 되지 않은 형태로 자신들의 진심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어린아이의 (덜 억압된) 무의식적 성의 측면과, 성인이지만 정신지체를 겪는 억압된 성의 측면이 충돌하여 어느 한 지점으로 수렴된 형태,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은 형태로 드러나는 측면이 있다.

4. 영화의 분위기가 급반전되는 건 영화의 말미, 기차사고가 나서다. 처음으로 소위 '정상적인' 어른이 등장하면서, 아이의 몸을 한 여신은 비로소 아이로 돌아간다. 여기서 '정상적인 어른'이라 함은, 아이를 보았을 때 당연히 그 아이를 걱정하고 보살필 줄 아는 어른을 말한다. 이 아주머니는 손지갑에서 귤을 꺼내 그냥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까서 건네준다. 아이는 아주머니의 품에 안겨 귤을 먹으면서, 대규모 기차사고로 탈선이 된 그 지옥의 현장에서 비로소 평안을 찾는다. 물론 그래서 앞으로 그 아이의 삶이 비로소 제 궤도를 찾을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5. 제니퍼 틸리와 제프 브릿지스가 각각 아이의 부모로 짧게 출연한다. 주인공을 맡은 조델 펄랜드는 <사일런트 힐>에 나왔던 지금 15살의 소녀인데 연기가 아주 섬뜩할 정도다. 아이의 외모에 아이와 어른의 분위기가 같이 있으면서 너무나 아이스러운 천진함을 그대로 표출하는, 아주 신기한 아이다. 다코타 패닝이나 엘 패닝이 '더없이 사랑스럽고 깜찍한' 분위기로 천재 소리를 들었다면, 이 아이는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외모 안에 그로테스크하고 미스테리한 매력으로 천재 소리를 충분히 들을 만하다.

결론 : 영화 개봉하면 반드시 제대로 다시 보자.

기타 : 미치 컬린의 원작소설(새 창으로 열기)이 국내에 출간돼 있다. 참고로 이 작가는, 홈즈 트리뷰트 소설로 늙고 연약한 홈즈를 등장시켜 홈즈 팬들로부터 어마어마하게 욕을 들어먹은 [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새 창으로 열기)]을 쓴 바로 그 사람이다.

2009/02/05 20:04 2009/02/05 20:04

Highschool Musical 3 - Senior Year

고교 농구챔피언쉽 대회의 결승전 시합, 시즌 마지막 경기 16분을 남겨두고 우리의 주인공 팀은 무려 20점 가까이 뒤져있는 상태다. 잠시 작전타임이 있은 뒤 주인공과 농구팀원들은 뮤지컬 씬을 선보인다. 그런데 이 씬이 재미있다. 이 씬의 안무는 인위적인 춤들이 아니라, 철저하게 농구 시합 와중 선수의 움직임이 음악과 노래에 맞춰 짜여졌다. 소리를 죽인 채 설렁대며 보면 이 씬이 노래부르며 춤추는 씬이라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이들의 움직임은 자연스럽다. 고작해야 마지막 골의 순간, 우리의 주인공을 향해 응원과 다짐을 주고받는 남녀 주인공의 짤막한 이중창이 있을 뿐. 이 장면은 곧 손에 땀을 쥐는 역전극으로 이어진다. 시작부터 사람 눈과 귀를 확 휘어잡는 안무와 노래와 카메라다.

내용이야 미국 고3들의 관심사, 그러니까 졸업파티와 진로와 연애가 다인데, 이걸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엔터테이닝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재주고, 원래 시리즈의 3편임에도 1, 2편(이 두 편은 TV용 영화로 공개됐고, 3편만 극장판이다.)을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도 재주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한동안 면면이 이어지다가 <브링 잇 온> 이후로 맥이 끊기다시피 한 명랑발랄한 틴에이저물의 계보를 아주 상큼하게 다시 이으면서 동시에 "틴에이지물의 진화"라고까지 부를 수 있을 만큼 형식의 면에서 한 단계 도약했다. 일단 오리지널 영화용 뮤지컬이라는 것도 신선할 뿐만 아니라, 쇼 뮤지컬의 전통을 가져오기 위해 극 중 극, 정확히 말하면 영화 속 무대 뮤지컬의 형식을 가져가면서 극 중 인물의 현실 이야기가 극 중 극의 이야기가 되는 만큼 영화와 무대를 자유자재로 교차시키는데, 이는 단순히 영화와 무대를 결합하거나 단순히 병치한 것이 아니라 이 둘의 변증법적 '합'의 형태를 도출해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뮤지컬 공연 / 영화의 오래된 관습, 그러니까 갑자기 멀쩡히 잘 있던 주인공한테 스폿라이트가 비춰지며 말로 해도 되는 걸 굳이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것을 극 중 공연의 장면으로 한정시킨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런 관습을 극 중 극의 형태에는 수용하되 이 영화 자체에선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들은 모두 이들의 공연 '연습' 장면으로 화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뮤지컬 관습에 대한 재미있는 농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일정 정도 메타-뮤지컬의 성격까지도 드러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애초 이 배우들이 1편에 캐스팅될 때는 대부분 10대들이었다는데, 고작 그 나이의 아이들이 그런 예쁜 외모들을 가진 주제에 심지어 이 정도의 쇼맨쉽과 노래, 춤, 연기를 소화할 수 있다는 것도 쇼 엔터테인먼트가 상당한 정도로 숙성한 문화에서만 나올 수 있는 상당한 공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브로드웨이의 전통을 적극 수용한 헐리웃에서만 나올 수 있는 고도의 엔터테이닝 쇼인 셈이다. 배우들 하나하나가 나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어린 나이에 너무 뛰어나다. 특히 주인공 트로이 역의 잭 에프런, 요놈 아주 물건이다. 이쁘고 잘생기고 몸매좋은 놈이 노래도 춤도 잘 하고 연기까지 잘 하면 대체. <헤어스프레이>에서 링크 역으로 나왔던 그 예쁜 놈인데, 이제보니 링크 역은 <하이스쿨 뮤지컬> 시리즈의 트로이의 인기와 후광에 덧댄 배역이지 싶다. 이 녀석과 여자친구 가브리엘라 역의 바네사 앤 허진스가 함께 듀엣을 하는 장면이 많은데, 그때마다 청춘의 첫사랑을 진하게 앓는 녀석들 특유의 반짝반짝한 빛과 수줍고 달뜬 열정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눈이 아주 반짝반짝 빛나며 진짜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과 웃음과 표정이 나온다. 그래서 더욱 영화가 예쁘다. 아니나 다를까, 둘은 실제로도 사귀는 사이란다. 사라 미셀 겔러(버피!)를 살짝 닮은 샤페이 역의 애쉴리 티스데일은 고난도의 완숙미를 선보여야 하는 쇼 뮤지컬 장면을 그만하면 썩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컬킨 가 아이들을 살짝 닮은 라이언 역의 루카스 그래빌도 살짝 게이삘을 내보이며 훌륭한 쇼맨쉽을 펼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강추! 결론은 쇼 머스트 고 온!

2009/02/02 23:41 2009/02/02 2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