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말고 이 새벽에 편의점에 간식을 사러 갔다가, HIGH CUT이라는 제호의 새로운 신문/잡지를 봤다. <꽃남>의 구준표의 사진이 1면에 커다랗게 표지로 박혀있는데 종이질이나 사진, 편집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건... 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데? 매주 1, 3주 금요일 발행하는 격주간에 창간호라 한다. 가격은 무려 3백원. 어라, 모델로 삼아야지, 반가워하며 사왔다. 게다가 이 판형에 이런 형식은, 오늘 김성욱 프로그래머와 전화로 나눈 얘기도 있거니와, 오프라인 영화잡지가 가야할 더없이 적절한 대안으로 보였다.

오는 길에 신도 났고 기대도 컸다. 프레시안에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원고를 실으며(새 창으로 열기) 정작 글을 쓴 김 프로그래머는 아쉬움을 표하는데 내가 막 우쭐하고 뿌듯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영화 저널리즘에 대해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대에 차 있었다. 이번 주 내내 김 프로그래머와 통화를 하며 나눈 얘기도 그거였고. 거기에 어쩌면, (물론 준비 기간이 걸릴 테고 준비를 위한 기초 조사를 내가 해야 하는데 시작조차 못 하고 있지만) 오프라인 타블로이드 지를 만드는 계획에 대한 얘기가 모처에서 있기 때문에, 이 잡지가 비록 연예인 화보나 가십만을 다루고는 있지만, 이 형식을 빌어 좀더 고급스러운 글을 실은 매체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집에 와서 첫 면을 펼치고 에디터 페이지를 보는 순간... 참담했다. 발행인/대표이사 방성훈. 에디터 페이지 맨 밑에는 <HIGH CUT>은 <스포츠조선>과 함께 한다고 써 있다.

참, 역시 대단한 조선일보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조선일보는 언제나 매체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선도해 나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가 내가 지향하는 가치와 다른 가치를 지향해서 그렇지, 이들의 이런 능력은 질투가 날 정도로 뛰어나고 감각적이다. 좌파들이 이거 본받아야 한다니까... 그러나 문제는 역시, 자본일 터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판형에 이런 고급스러움으로 영화 매체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변함이 없다. 시장조사부터 슬슬 시작을 해야겠다.



ps. 여기(새 창으로 열기)를 누르면 이 잡지 1면 전체를 볼 수 있다.

2009/03/21 03:14 2009/03/21 03:14

프레시안 기사 : 올해 여성영화제, 첨예한 여성 정치성 전면에(새 창으로 열기)

누차 강조하지만, 일상에서 정치와 일상을, 혹은 정치와 문화를 무 자르듯 나누고 정치를 강조해 발언할수록 일상의 정치는 소외된다. 그것은 일상은 정치와 동떨어져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확산시키며, 이는 결국 여의도 정치에만 목을 매다는 결과로 나아가며, 이것은 곧 냉소와 정치 무관심,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직결된다.

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4월 9일 ~ 16일, 신촌 아트레온.

그런 의미에서 올해 여성영화제의 프로그램은, 여성영화제가 언제나 그랬지만서도 유난히 정치성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라할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프로그램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이 찔끔날 정도로 감동했다. 더욱이 홈에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여성노동자'로서 주체로 서는 과정으로 묘사한 영화, 사당동에서 철거된지 22년간 철거와 빈곤의 되물림을 3대에 걸쳐 조망하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 상영된다고 하는데이 어찌 흥분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여성노동과 빈곤이, 이번 여성영화제 특별전 두 개 중 하나의 주제다. 그래서 국제학술회의도 열린다. 게다가 고령 여성들의 성과 사랑은 물론, 자아 찾기 등을 다룬 영화들도 상영된다 한다. 이것이 다른 특별전 주제다. 이 두 섹션만 성실히 봐도 올해 여성영화제는 개개인에게 보석으로 남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10대 여성이 직접 찍은 영화 중, 자신을 스스로 비디오 액티비스트로 정체화한다거나, 혹은 로드스쿨러라 명명하는 영화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또 감동했다. 이주노동자 워크숍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사람 하나가 갑자기 애 낳으러 실려가느라 졸지에 그 남편은 출산기를 찍었다는 얘기도 반가웠다. 이렇게 삶과 영화와 정치는 하나이다.

그리고 올해에도, 아녜스 바르다 할머니가 온다. 프랑스는 유난히 여성배우들과 여성감독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곳이지만, 역시 아녜스 바르다의 활동은 눈부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영화, <3시에서 5시 사이의 클레오>는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남편, 자크 드미 감독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영화는 보고 감동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남편의 영화 세계를 조망하는 다큐멘터리 한 편과, 자신이 헌신적으로 돌본 남편의 말년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찍은 터다. (나는 자크 드미의 아름다운 세계를 전적으로 아녜스를 통해, 그녀가 만든 <자크 드미의 세계>를 통해 입문했다.) 그리고 올해, 자신의 해변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아녜스의 해변>을 들고 서울을 찾는 것이다.

이밖에도 현재 한국 밖, 전세계를 돌며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있는 김소영 감독의 <나무 없는 산>과 이경숙 감독의 <어떤 개인 날>도 상영된다.

나는 언제나 매해 영화제 시즌의 맨 처음을 알리는 여성영화제가 올해, 예산도 줄고 상영작도 줄고 전체 규모가 준 가운데에서도 이토록 야심만만하게, 잘 벼리고 벼린 칼을 마침내 툭 내밀듯 자신만만하게 상영작들을 내세워준 것, 그리고 그 전면에 이토록 첨예한 정치를 툭 내밀어준 것에 너무 감사하다. 아울러 가슴이 너무 뛰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기대하고 있다. 작년 10주년을 지내고 11회를 맞으며 '처음부터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영화제를 하겠다는 여성영화제의 약속은 과언 허언이 아니었다. 한동안 오르가즘을 찾는 데에만 너무 골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짝 했었다. 이건 사실 몇 년간 여성영화제를 제대로 못간 나의 지독한 편견과 잘못된 생각일 가능성이 더 많지만... 단적으로 여성영화제에서는 마르가리타 폰 트로타 특별전을 한 적도 있으니까. 근데 올해는, 정말 멋진 여성영화제로 아주 단단히 심기일전을 한 듯하다.

2009/03/13 02:26 2009/03/13 02:26

Aprile

너무 귀여우신 난니 옵빠.

<4월>은 <나의 즐거운 일기> 속편쯤 되는 영화다. <나의 즐거운 일기>에서처럼 난니 모레티가 자기자신으로 등장해, 우파 정치인이자 방송국 세 개를 모두 소유한 미디어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그예 총리로 선출된 그 암울한 시기에 대한 사적인 영화일기를 찍는다. 물론 특유의 그 정신 산란한 수다 및 유머, 그리고 종종 그의 발이 돼주는 베스파 스쿠터와 함께다. 이 영화일기는 그가 자신의 제작사의 동료들과 함께 좌파와 우파 양쪽의 선거운동을 다큐멘터리로 찍는 과정을 종으로, 아들 피에트로를 낳아 기르는 과정을 횡으로 교차한다. 그래서 그 결과는? 트로츠키주의자인 요리사가 등장하는 뮤지컬을 찍는 현장에서 영화가 끝이 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 종과 횡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 존재이자, 다시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존재인 ‘미디어’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사실은 난니 모레티가 아니라, 난니 모레티룰 둘러싼 그 수많은 종류의 미디어들, 그리고 난니 모레티와 그 환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그의 카메라 자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이 영화에서 미디어는 ‘매개자’ 혹은 ‘매체’라는 그 단어 본래의 뜻 그대로 난니 모레티의 가족과, 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정치를 연결해주는 존재다. 애초 영화의 시작 장면부터가 TV에서 베를루스코니가 선거에 승리하는 것을 난니 모레티가 보는 장면이 아닌가. 그는 이 사태에 대해 속사포 같은 속도로 불만들을 쏟아내고 화를 내다가 급기야 “오랜만에 마리화나나 피워야겠어!”라고 외친다. 영화는 중간중간 그가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정보들을 모으는 과정, 특히 신문을 스크랩하고 잡지를 오리는 장면들을 자주 보여주는데, 그가 이렇게 스크랩한 신문조각을 퀼트로 잇자 다시 거대한 크기의 신문 더미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난니 모레티의 직업이 영화감독이라는 점, 그리고 그가 노상 카메라를 들고 그 과정들을 찍었으며 이것을 다시 촬영감독의 카메라를 통해 찍은 화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새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그는 찍는 주체인 동시에 찍히는 피사체로 카메라 안에 드러난다. 그가 온갖 미디어가 전해주는 정보에 노출돼 있으면서도, 그 자신이 미디어를 다루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 그는 미디어가 전해주는 이미지들을 수동적으로 그저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서, ‘작가의 주관이 개입한’ 또 하나의 2차 미디어로 만들려 한다. 더욱이 그는, '창작자'이자 '예술가'다. 그런데 그의 영화 만들기를 막는 외부의 힘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복잡한 정치상황, 그리고 또 하나는, 아들의 탄생. 애초 난니 모레티는 트로츠키주의자인 요리사가 등장하는 뮤지컬을 찍으려 했고, 캐스팅에 촬영 세팅도 끝내지만 그는 결국 영화를 진행시키지 못하고 엎어버린다. 그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몇 년간 다른 작품을 마다하고 춤도 따로 배웠다는 배우가 아무리 열을 받아 항의를 해도. 결국 그는 극영화보다 좀더 직접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려 하는데, 이 선거 기록 다큐멘터리가 졸지에 출산 및 육아 다큐멘터리가 되고 만 것이다. 아들이 태어나면서 난니의 모든 작업이 중단된다.

Aprile

온갖 미디어와 메시지에 둘러싸여 있는 난니와 피에트로 부자.

그런데 잠깐, 아버지가 미디어를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 피에트로는 태어난 직후부터 미디어에 담기고, 미디어에 둘러싸인다. 갓난아기로 난니 모레티의 영화에 담기는 것은 물론이고, 난니 모레티가 스크랩하고 정리하는 잡지들의 이미지 사이에 둘러싸여있고, 난니 모레티가 틀어놓은 라디오의 음악을 함께 듣는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명실공히 미디어는 ‘환경’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그 ‘환경’에 있어, 좌파 아버지이자 그 환경의 일부를 만들고 있는 작금에 대한 난니 모레티의 대답과 선택은? 바로 ‘뮤지컬 만들기’!. 이미지와 노래, 춤, 거기에 메시지와 심지어 아버지 난니의 열정과 괴팍한 유머와 개성까지 들어간, 영화.

Aprile

또다른 포스터. 표정도 깜찍하시지 >.<

난니 모레티가 거대한 점처럼 보이도록 카메라를 극단적으로 뒤로 뺀 장면에서 끝날 줄 알았던 영화가 다음 장면, 난니 모레티가 영화를 찍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이다. 이 마지막 장면은 ‘사족’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난니 모레티가 이 거대한 미디어란 환경에 둘러싸인 아들에게 절박하게 주고싶은 ‘선물’인 셈이다. 아들은 그의 영화작업을 중단시킨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만들려다 결국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뮤지컬 만들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해준 창작의 원천이자 원동력이 된 셈이다.

이 촬영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난니 모레티는 우비를 쓰고 그가 애용하는 베스파 스쿠터용 헬멧을쓴 차림으로 손에 스피커를든채 희미하게 웃으며 노래의 박자에 맞춰서 춤을 추고 있다. 그러니 그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절박할수록, 우리는 여유를 갖고 웃으며 춤을 춰야 한다. 어두운 시기를 통과할 수 있는 힘은 웃음이고, 유머다.



ps. 이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 친구들영화제 2009에서 상영됐습니다. 물론 거기서 봤습니다!

ps2. 난니 모레티는... 굉장한 미남이지 않나요. 이제껏 난니 모레티를 본 게 그가 직접 연출한 영화 두 편, 그가 출연만 한 영화 한 편이이지만, 이 사람의 그 극강의 괴짜 유머감각이 더 웃긴 이유는 그가 상당히 잘 생긴 미남이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참 이태리 남자답게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말도 많고, 게다가 행동도 웃겨요, 표정도 웃겨요. 그런데 '우습지는' 않아요. (수줍게 고백하자면...) 사랑스럽습니다. 아이잉~

ps3. 친구들영화제에서 "적어도 딱 이것 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 회사 땡땡이치고 중요 약속을 다 뽀개더라도 - 본다" 리스트에 넣어뒀던 거의 유일한 영화. 이유는 오로지 '난니 모레티'라는 이름 다섯 자 때문. 근데 말이 씨가 됐는지, 이번 친구들영화제에서 본 영화가 다섯 손가락을 꼽는다능. 흑흑

2009/03/12 21:55 2009/03/12 21:55

The International

구겐하임 박물관 구조를 활용한 포스터.

클라이브 오언에 나오미 와츠라니, 포스터 이미지에서 그 둘의 사진이 따로 있었음에도 처음 본 순간부터 "그 엄청난 화학반응" 때문에 무지 기대를 했던 터였다. 게다가 두 배우 모두 내가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둘 다 연기도 잘 하고 이미지도 근사하지만 무엇보다도 외모들이 다 내 이상형이라는. (게다가 난 그 둘의 목소리와 액센트도 굉장히 좋아한다!) 그러나 얼마나 기대를 했겠는가. 그런데 언론시사회는 어처구나 없이 놓쳐버리고는, 일반시사회는 딱 한 번 있는데 하필 내가 도저히 볼 수 없는 시간대에 한다고 하지, 그래서 개봉하면 봐야지 이러고 있다가, 영화가 의외로 평이 안 좋은 걸 보고 갸웃하다가, 어느 평일 회사 퇴근 직후와 9시에 잡혀있던 시사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그다지 멀지 않은 극장에 상영시간대가 있는 거 보고 회사 퇴근 후 전속력 질주해서 영화 봄. (참고로 끝나고 다시 시사회장으로 전속력 질주.) 그리고 감상은...

재밌두만. 아 최고였어~~~ 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그 정도면 꽤, 꽤 맘에 들었다고 할 수 있어. 평이 안 좋은 이유도 이해는 가. 아마 이 장르들 특유의 조미료들이 별로 안 들어가서였겠지. 서브 플롯이랄 거 하나 없이 그냥 목적지를 향해 외길로 쭈욱 가버리는 플롯이잖아? 설탕은 싹 빼고 아주 담백한 맛의 음식을 먹는 듯했어. 심지어 이런 남녀 주인공 스릴러라면 의례 있을 '주인공끼리 붙어먹기'도 없으니. 역으로 난 그런 담백함이 마음에 들었어. 게다가 사람들은 엔딩에서 많이 깬 듯한데, 난 그 엔딩 맘에 들두만. 물론 "난 헐리우드 식의 그딴 엔딩 안 한다능, 우리 유럽인들은 좀 지적이라능" 식의 잘난척이 보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엔딩이고.

개인적으론 난 둘이 안 붙어먹어서 훨씬 좋았지만. 왜냐면... 그게 더 섹시했거든. 물론 <X 파일> 시리즈에서 멀더와 스컬리가 연애하지 않는 관계가 성공을 거두면서 그런 식의 관계가 그리 드물지 않은 것이 된 건 사실이다. <콘스탄틴>에서도 키애누 리브스와 레이첼 바이스는 서로 키스를 하려다 말지 아마? 그런데 <X파일>의 그 '서로 호감과 신뢰와 애정이 있지만 그것이 애정으로 발전하지 않는/못하는 관계'의 정석이라는 걸 가장 잘 재현해낸 게 <인터내셔널> 같아. 이 영화에서 둘은 동지의식에 기반한 애정과 신뢰도 있지만, 실은 '채 애정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애정'이 분명 보이기도 하거든. 루이 살린저 요원(클라이브 오언)이 엘레노어 휘트먼 검사보(나오미 와츠)한테서 단 한 시도 눈을 안/못 뗀달지, 엘레노어가 택시에서 타고 내릴 때, 건물을 들어가고 나올 때 루이가 언제나 먼저 문을 열어준 뒤 나중에 문을 닫고 들어가는 철저한 기사도 매너랄지. 난 매번 그렇게 문 열고 닫아주는 클라이브 오언 보고 혼자 킥킥댔다고. 결정적으로 루이가 구겐하임 박물관에서 나온 뒤 건물 사무실 안에 혼자 쳐박혀 있을 때 엘레노어가 찾아왔다가 클라이브 손을 한번 잡잖아. 그때 손을 어찌나 애절하게 잡는지, 그 손 잡는 것도 그렇지만 그런 나오미를 그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클라이브가 보는 장면도 그렇고, 섹슈얼한 텐션이 차고 넘치는데 내가 가슴이 다 콩당콩당하더라고. 둘이 은근히 시선이 얽히다 엇갈리다 하는 장면들이 꽤 있어. 아웅, 정말 섹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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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린저 요원, 자꾸 엘레노어 쳐다볼 거야? ㅋㅋ 엘레노어도 웃잖아.

나도 불만이 없진 않아. 적어도 남녀 주인공에 나오미 와츠급 배우가 여주인공으로 나온다면 클라이브 오언과 나오미 와츠간 활약의 균형이 잘 맞아야 했는데, 이 영화에선 나오미 와츠를 주연으로 등장시켜선 조연으로 활용해 버리고 말아. <21그램>이나 <킹콩>에서도 이미 충분히 확인됐지만, 나오미는 섹스씬이든 액션씬이든 코미디든, 몸을 사리는 배우가 아니야. 게다가 몸을 굉장히 유연하게 사용할 줄 아는 배우라고.  섬세한 심리 묘사는 어떻고? 그런데 어버버버하다가 차에 치이는 걸로 액션을 뗌빵하고 캐릭터는 그냥 단순하고 말잖아. 아니 이게 말이 되냔 말이지. 그마저도 영화 막판에 가면 나오미는 그냥 사라져 버리지. 이건 범죄 수준의 낭비야. 아니, 나오미 와츠 같은 훌륭한 배우를 데려다가 이게 뭐하는 짓이냔 말야~~~!!!!!

영화를 보면서 남녀 커플의 스릴러/액션이라는 점 때문에 아무래도 조지 클루니 - 니콜 키드먼의 <피스메이커>가 떠올랐는데, <피스메이커>가 재미있었던 건 남녀 주인공의 균형도 잘 맞았지만 두뇌-여자와 몸빵-남자 구도인데 경험은 남자쪽이 많고 정작 계급은 여자쪽이 더 높은 데에서 오는 그 불균형을 아주 섹시한 매력으로 잘 살렸다는 데에 있었지. 니콜 키드먼은 그런 고위 작전에 처음 투입된 좀 매뉴얼 타입의 초짜 장교요 클루니는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고 느물느물하고 유들유들한 만년장교라는 차이가 있는데, 문제는 키드먼 쪽이 계급이 더 높았다는 거야. 그래서 자신없어하는 키드먼한테 클루니가 이래저래 조언도 주고 알아서 키드먼을 리드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의 판단은 결국 키드먼의 몫이 되고 말지. 그렇게 키드먼이 확고한 확신으로 명령 내리면 클루니도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거든. 이게 우리나라에선 번역이 경악스럽게도 키드먼이 클루니한테 존대말을 하는 어이없는 설정으로 소개돼 버렸지만 말야. <인터내셔널>에서 엘레노어와 루이는 사실 계급상으로 누가 더 위거나 아래는 아니야, 소속도 국적도 다르니까. 루이는 인터폴 소속이고 엘레노어는 미국 맨해튼의 검사보니까. 하지만 이 커플도 분명 두뇌-여자와 몸빵-남자의 구도를 따르고 있지. 그런데 루이가 뉴욕에 왔을 때 엘레노어가 능숙하게 경찰들 배치하고 업무 분담해주고 지시하고 하는 것에서 카리스마를 드러내긴 하지만 딱 그 장면빼고는 딱히 '활약'이라고 할 만한 뭔가를 보여주진 않아. 차에 치이는 것도 어버버하다가 치어버리잖아. 그게 무슨 짓이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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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초췌한 몰골에 노타이와 구겨진 와이셔츠와 구겨진 코트 차림이 오히려 섹시한 남자도 드물지.

그래도... 확실히 두 배우는 매력이 철철 넘쳤어. 클라이브 오언은 말끔하게 수트를 차려입었을 때도 멋지지만, 며칠 낮 며칠 밤을 자지도 먹지도 않은 초췌한 얼굴에 피로를 가득 담고는 눈에 핏발이 잔뜩 서서 노타이에 구겨진 와이셔츠와 코트 차림으로 나다닐 때도 멋지고, 더욱이 그 한 손에 총을 들었을 땐 그 장면이 지나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극강의 매력을 발산하지. 나오미 와츠는... 아마 긴 생머리를 늘어뜨려도 지적이고, 그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어도 품위있고 우아하게 아름다운 매력을 발산할 줄 아는 사람이고. 다른 금발의 예쁜 여배우가 검사보나 경찰이거나 하면 "저런 여자가 뭐한다고 저런 데에 있겠어?" 싶지만 나오미 와츠라면 웬지 그런 데에도 나름의 이유로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엄청난 지적인 면모와 고집스러움이 보인달까. 그러면서도 언제 봐도 아름답고 말이지. 다만... 이 감독은 나오미 와츠의 매력이 정말로 어떤 것인지는 잘 몰랐던 듯해. 내가 감독이었다면 원래 각본을 고쳐서라도 나오미 역을 더 키워줬을 것 같아. 오히려 극을 클라이브가 아닌 나오미가 끌고가는 형세가 됐어도 재미있었을 거야. 클라이브는 충분히 선이 굵은 배우기 때문에 오히려 그랬을 때 나오미와 균형이 잘 맞춰졌을 거 같은데... 톰 티크베어 감독은 그런 식의 '언발란스한 섹시미'와 '섹슈얼 텐션'에 대해선 좀 둔한 듯?

The International

물론 이런 모습도 섹시하지. 안경마저도 섹시하다...

그렇다고 티크베어 감독이 영 싫었다는 건 아냐. 영화가 처음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파트너가 쓰러지는 걸 보고 건너편에 있던 클라이브가 놀라서 달려가다가 결국 차와 부딪히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헉'하고 감탄을 내뱉을 정도로, 그 장면은 멋졌어. 거기서 일단 뿅 갔기 때문에 영화 끝까지 그래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이고 말야. 하여간 프랑스 리용부터 독일 베를린, 터키 이스탄불, 미국 뉴욕 맨해튼,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정신없이 오가느라 고생은 꽤 했겠어. 그리고 누구나 얘기하는 그 구겐하임 총격씬은 당근 멋지고 말야.

근데... 쓰다보니까 역시 아쉬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걸. 나쁜 놈 쳐넣겠다던 인터폴 요원이 어느 순간 법 위에 서게 될 결심을 하게 되는 그 심리적 갈등이란 게 너무 급작스럽게 휙 지나가 버려서, 후반 이후로부터 기계적으로 보인다 싶긴 하더라. 그렇게 집요한 강박으로 조나스 스카센을 쫓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가 됐는데 말야, 그래도... 에잉, 아무래도 <피스메이커>나 다시 봐야 할까? 어쨌든 가능하면, 내일 - 그러니까 오늘, 일요일 J.와 다시 한 번 볼 수 있기를 빌고 있다능.

2009/03/08 04:07 2009/03/08 04:07

현악기를 좋아하지만 비올라는 상당히 낯설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에서 비올라란 게 얼마나 치이는 악기입니까. 예술의전당의 장소 문제일 수도 있겠어요. 제 자리는 E열 사이드 쪽이었는데, 비올라 다감바나 비오른첼로 소리가 좀 뭉치긴 하더군요. 예당에서 하는 콘서트는 처음 간 거라... 리처드 용재 오닐의 연주를 CD로라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그저 저는 이토록 유명하고 인기를 끄는 사람이라면 연주도 기본은 하겠지라고 생각했죠. 요즘이야 클래식 계도 아이돌 스타 시스템이 안착되지 않았습니까? 전세계적으로 워낙 젊은 천재들이 쏟아져나오고 있고, 이들이 '천재' 소릴 듣는 데에야 이유가 있는 거죠. 저야 어차피 아직은 막귀인 데다 콘서트 자체를 그리 많이 다녀보지도 못했고요.

그런데 좀 많이 실망했습니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던 헨델-할보르센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할 때, 아이러니컬하게도 제 실망은 극에 달했습니다. 아마 이 곡 자체를 요 두어 달간 워낙 열심히 들어서기도 하겠죠. 주로는 카퓌송 형제의 바이올린-첼로로 들었고, 이자크 펄먼과 핀커스 주커만의 바이올린-비올라로도 들었어요. 리처드 용재 오닐은 AMK의 젊은 여자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틴 록스와 연주했는데, 일단 호흡도 미묘하게 어긋나고, 어설프게 들떠있는 느낌이었고, 특히나 아마도 비올라라는 악기의 특성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음과 음 사이 공백이 보이며 툭툭 끊어집디다. 거기에 그가 회심의 곡으로 준비한 듯한 마지막 곡 솔로, 비버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했을 때는 "... 지금 학예회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어버렸으니. 음, 저의 '기본'이라는 기준이 영 이상한 건가. 제 취향이 영 이 사람하곤 안 맞는 건가.

동행한 분은 "이자크 펄먼과 핀커스 주커만을 줄창 듣고 있었다면 만족 못 할 만하도 하죠."라고 하셨습니다만. 역시 오닐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펄먼-주커스와는 다른 스타일로 카퓌송 형제가 연주했을 때도 전 극도로 흥분해서 눈물을 쏟아내며 어쩔 줄 몰라했었는걸요. 이 곡 자체가 사람을 업시키는 면이 있고, 워낙 한국사람들 감성에도 잘 맞고, 펄먼-주커만 같은 슈퍼스타의 엄청난 듀엣 연주도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러니 한편으론 만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까다로웠을텐데, 글쎄요. 전 예당을 가득 메운 팬들의 그 열혈한 팬심엔 도저히 감정이입을 못 하겠더군요. 제 귀엔 연주가 영 만족스럽지 않았으니까. 텔레만의 곡 중 비올라협주곡 G장조의 경우 1, 2악장에선 좋아서 눈물이 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3악장에선 그 눈물이 급짜게 식더군요. 2부는 헨델 신포니아에서 비탈리 샤콘느로 넘어가는 때에는 그냥 자버렸고.

얼마 전 출시된, 이날 연주한 레퍼토리가 들어가 있는 바로크 CD를 미리 들었다면 과연 이날의 이 재난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까요. 실황과 CD는 느낌이 매우 다르니까, 아마 꼭 그렇진 않았을 거예요. 안타깝게도 오닐은 전혀 제 취향쪽이 아니었네요. 게다가 바로크에 대한 도전은... "아가, 욕심이 너무 과했구나"라고밖에 못 하겠다능. 사실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에서 치이는 비올라라는 악기의 솔로악기로서의 가능성을 계속 모색하고 확장하고 있는 오닐이니만큼, 아마도 익숙하고 친숙한 완숙함보다는 낯선 신선과 모험심, 그리고 치기 쪽을 더 고려해야 할 거고, 그게 오닐의 매력이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애초에 오닐의 유명세보다는 '바로크래...'라며 끌렸던 건데, 일단 제 귀는 툭툭이 끊어지는 그 음 사이 공백들에 너무 민감하게 굴어서 말이죠. 사실 원래의 제 취향으로 하면, 찢어지고 가는 바이올린보다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비올라 소리를 더 좋아하는 게 맞거든요. AMK 멤버들의 소리가 훨씬 더 좋기도 했고요. 하긴, 젊은 연주자들의 경우엔 뭐 완벽한 연주를 기대하기보다 같이 응원하고 같이 커가고 같이 모험하는 맛 쪽이 더 방점일 거예요. 그러니 팬심 가득한 팬들이 객석을 채워야 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전 장소를 잘못 찾아간 셈이겠죠. 

2009/03/04 13:11 2009/03/04 13:11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패배의 순간? 승리의 순간!

비극적인 역사의 진실이 마침내 폭로되는 순간은 우리에게 놀람과 충격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죄책감을 선사한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는 자책과,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 그럼에도 이런 죄책감은 당치도 않을 '피로감'을 선사하는 게 사실이다. "...또야?" 또긴, 고작 몇 편이나 나왔다고, 뻔한 삼각관계 연애물은 평생에 걸쳐 몇백 편이고 보면서. 차라리 모르는 게 속 편할 뻔했다는 비겁함, 피해 당사자의 상처와 고통에는 근처도 가지 못하는데도 그 역사를 알았을 때의 고통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무력감과 좌절감 탓일 것이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가 일본에 살고있는 종군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라는 소리에, 많은 이들에게 제일 먼저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들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스스로 죄책감을 얼마나 가질지도. 그런데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참 신기한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보기도 전부터 지레 가졌던 피로감과 부담감과 죄책감이 영화를 보면서 모두 사라진다. 거기다 놀랍게도, 관객이 영화의 주인공인 할머니로부터 오히려 위로와 치유를 받고 극장 문을 나서게 된다. 대체 어떻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거나 섣불리 상상하는, '역사적 비극의 희생자'의 전형적인 모습과 거리가 멀다. 거칠고 까칠하기 짝이 없는 성격의 송신도 할머니는 거침없는 욕쟁이 할머니다. 오죽하면 일본에서 그녀의 재판을 도왔던 지원모임의 자원활동가들이 송할머니와 처음 만났던 순간에 대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다"거나 "과연 내가 이 할머니와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고 두려웠다"고 회상할까. 보상 따윈 필요없고 일본정부의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재판을 시작하면서, 할머니는 지원모임 활동가들과 함께 일본 전역을 돌며 증언 집회를 가진다. 지방법원과 중앙법원의 기각을 거쳐 최고재판소에 상고하기까지, 무려 10년에 걸친 시간 동안 이들은 함께 울고 웃었다. 이 와중에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그녀의 상처와 투쟁의 고단함과 패배의 무력감이 아니다. 함께 울고 웃으며 보듬고 다독이는 연대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는 할머니의 삶에 대한 증언 이외에도, 할머니와 증언을 듣는 이들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비롯해 송할머니가 커다란 함박웃음을 짓거나 춤을 추는 장면이 많다. 더욱이 할머니는 그들에게 그저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며 울지 않는다. "자기 일처럼 100% 헌신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 할머니의 이런 태도 때문에, 연대하는 이들을 그저 '돕는 이들'이 아니라 '동지'가 된다.

과거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가 거둔 성취와 한계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보다는 시대적 상황이나 미디어의 본질적 성격 자체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침묵을 강요당한 진실에 목소리를 돌려주어 폭로하고 기록을 만들어내는 성취를 이루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유독 여성의 성에 있어서만큼은 가해자가 아니라 도리어 피해자를 탓하는 게 일반적이었던 만큼, 할머니들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어 증언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큰일이었다. 이를 기록하는 것 역시 그랬다. 하지만 필름에 할머니들의 증언이 기록으로 남아 관객에게 전시되는 순간, 할머니들은 또다시 동정과 연민과 죄책감이 투영되는 '대상으로 타자화되는' 딜레마에 갇힌다. 미디어가 관객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한계인 셈이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증언' 이후의 목소리가 갇힌 한계를 뚫고 우리가 어떻게 '그들'이 아닌 '우리'의 목소리로 껴안고 나갈 것인가에 대해 하나의 답을 제시하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연대투쟁은 어떻게 당사자와 다른 이들을 치유하는가.

애초 10년 투쟁의 기록영상물 더미를 국장 상영용의 다큐멘터리로 재구성하면서, 안해룡 감독은 최대한 뒤로 빠지는 대신 할머니와 자원활동가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들은 다큐멘터리 감독의 의도에 짜맞춰지는 '대상'이 아니라 카메라를 압도하는 주체로 자리를 잡는다. 분노와 슬픔과 회한의 순간도 있지만, 과거의 상처에 종속당하기보다는 '오늘'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할머니의 모습이 이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10년 싸움과 연대의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 집중하면서, 할머니와 자원활동가들 모두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에는 졌지만 "내 마음은 결코 지지 않았다"는 할머니의 선언과 웃음은, 패배의 순간을 오히려 승리의 역사로 바꾸어버리는 놀라운 전복이 된다. 나아가 매 증언집회마다 송할머니가 반복해서 당부하는 "절대로 전쟁은 다시는 안 된다"는 메시지는 더욱 특별한 울림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말하자면 할머니는 '절대로 다시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되는' 살아있는 이유이자 증거인 셈이다. 그런 할머니가 개인의 아픔을 넘어서서, 조선인과 일본인 할 것 없이 후대의 모든 이들에게 진심어린 염려와 걱정을 전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음을 터뜨리고, 오히려 관객이 할머니에게 위로를 받고 나올 수 있는 진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픔의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껴안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지만, 이 영화는 그걸 조금은 수월하게 해준다. 다큐멘터리의 진짜 힘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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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11:48 2009/03/02 1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