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근간 가장 ‘괴작’을 뽑으라면 작년 하반기에 개봉한 <모던 보이>와 함께 <차우>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모던 보이>가 괴작인 건 너무 훌륭한 면과 너무 후진 면이 어이없이 섞여서인데, <차우>의 경우는 좀더 '괴작'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즉, 괴상한 영화라는 뜻이다. 언론시사로 처음 <차우>를 봤을 때 워낙 당황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이 영화의 유머를 꽤 즐기게 됐다. 시사 나와서는 모 평론가님과 인사를 하다가 “영화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영화의 지지자 쪽에 가깝다. 사실 <차우>는 개봉 직전까지도 <괴물> 이후 가능성이 보였으나 그만큼 위험도 여전히 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대괴수가 출현하는 재난영화’로,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서 포장돼왔다. 그런 만큼 관객의 입장에선 <괴물>의 완성도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그 2/3 정도는 되기를 기대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확인한 <차우>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대체로 괴수물이란 언제나 우리 세상 너머에 우리 힘으로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괴수의 존재, 우리가 평소 상상은 할지언정 현실에 존재한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존재가 봉인을 뚫고 나와 현실 세계를 위협할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고독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미지와 미래와의 대면을 은유를 읽어내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괴수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세계의 파괴를 쾌감의 코드로 목격하게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쾌감을 두 가지 층위로 즐길 수 있다. 우리 세계가 파괴를 당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며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 혹은 괴수에게 은밀한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얻는 사디즘적 쾌감. 그리고 그 사이, 순수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체가 우리 세계를 때려부술 때에 오는 ‘타격감’. 그러므로 괴수물의 당연한 공식에서 시선의 방향이란 안에서 밖을 향하는 것이 된다.

<차우>가 그런 괴수물이 아닌 것은,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차우>는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과 습격이 가해졌을 때 그 시선을 괴물이 있는 저 너머 바깥 어디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내부로 돌린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양상들을 양식화시켜 보여주고, 여기에 약간의 과장과 비틀기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코미디에 열중한다. 그 ‘외부의 충격’이 <차우>의 경우 식인 맷돼지의 습격인 것이지만, 이쯤 되면 사실 ‘차우’가 얼마나 이상한 변종이고 세고 크고 무섭고 포악한지 기타 등등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사실 맷돼지가 아니라 운석을 타고 떨어진 외계의 괴생명체라 한들 이 영화가 그리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진 않다. 맷돼지는 앞에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 계속 안 나와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일리언>을 모범적으로 베껴서 앞에 계속 나올 듯 말 듯 그림자로만 비추다가 맨 마지막에만 한 번 제대로 나오던가.

어쨌든 뭔가 무시무시한 놈이 잊을 만하면 마을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며 패닉을 가져온다. 절박함은 강도가 심할수록 우스꽝스러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박한 놈만 절박하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또 맷돼지가 공격을 해오거나 말거나, 마치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 약이라도 단체로 먹는 듯 허허실실 천하태평이다. 자기만 안 당하면 된다 이거다. 그러므로 대체로의 괴수물이 절박함에 방점을 찍고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괴수가 화면에 전면 등장하면서 다 때려부술 때의 타격감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맷돼지를 잡겠다며 차우와 대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비장함을 (자기가 당하지 않았다고) 별 거 아닌 것 취급하며 태평한 마을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도 튀어나온다. 맷돼지가 습격하거나 말거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을 활개치는 소위 ‘꽃 꽂은 분’이나 도시인들에게 장사를 해먹는 마을농장 관계자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나 꽃 꽂은 분은 애초에 맷돼지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내 맘대로 장르명을 작명한다면, ‘괴수물’보다는 오히려 ‘농촌소동극’ 정도가 될 듯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신정원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크고 무서운 맷돼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이 영화의 스타일대로라면, 차우가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수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차우

겉보기는 이렇게 멀쩡하고 폼나는데... 사실은 허당이다. 죄다.

농촌소동극으로서, 코미디로서 <차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신정원 감독의 유머감각이 소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굉장히 웃기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도 무지 웃었다. 맷돼지와 싸우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하나하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떨어진 면이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도 상황도 참 어이없이 웃기거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부분이 많다. 멀쩡하게 생긴 형사가 사람들이 안 볼 때면 음료수고 담배고 몰래 챙기고 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잘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 든다거나. 최고의 포수라는 이가 잘난 척 양키 포수들을 대동했지만 그들의 말을 실제론 알아듣지 못하고 선머슴같은 여자에게 가슴을 두근대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거나. 나름 비장한 얼굴로 생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감당하듯 보이던 서울내기 순경이 실제로 집안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신경질로 반응한다거나. 맷돼지에 대해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대포로 수색대를 따라나선 대학원생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꺼내들며 수색대에 ‘연출’을 하려들고 이들 수색대 역시 이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마을이 처한 대위기에 맞서 그 누구 하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폼은 그럴싸하나 알고보면 모조리 허당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편이, 실제 현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영화 속 세상뿐일 테니. 게다가 씨네21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차우의 수색에 나서는 건 죄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뒷짐지고 가만히 있는데 이들 외지인들이 차우를 잡겠다며 나서서 벌이는 소동들이,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문제는 예산이다. 식인 맷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공포와 고난과 분투를 그리는 영화로 선전되며 그 정도의 CG와 예산이 들어간 영화라는 건, 마치 연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길래 스테이크를 먹게 될 줄 알고 기대했더니 맛은 꽤 별미이나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비싼 떡볶이가 나온 형국이라 해야 할까.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새 창으로 열기) <차우>는 순제만 70억에 이른다. P&A 비용까지 합치면 총제작비는 100억원에 육박한다. 너무 비싼 떡볶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떡볶이를 무지 좋아하긴 한다.) 난 차라리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처럼 예산을 적게 들이되 맷돼지의 모습을 그림자나 정황으로만 제시하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우> 식의 코드라면 맷돼지가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의도적으로 조잡하거나 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유머가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 만들려다 안 될 게 너무 뻔해지니까 중간에 차라리 망치려면 제대로 망치자며 막 가는’ 코미디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엄태웅의 엉덩이가 노출되는 게 무슨 찐한 멜러 영화도 아닌 <차우>라는 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지만.

 

차우

큰 웃음 주신 신형사 역의 박혁권.

<차우>를 보는데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계속 생각났다. 처음 맷돼지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 묘지 위 언덕에서 경관들이 차례로 관 앞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롱테이크 씬 역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풀숏으로 먼 거리에서 찍으면서 롱테이크로 가는데 둑방 위에서 누군가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두 영화의 그 장면들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씬으로, <차우>에서의 그 씬을 단순한 개그씬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역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되, 절박함 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봉준호 식 낯선 유머 코드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모두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능란하게 교차된다. 그렇기에 <차우>의 오히려 안으로 향하는 시선과 묘하게 상통하믄 부분이 있다. 이후 <마더>에서도 드러나듯 너무나 생생한, 한편으로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오히려 실은 판타지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한국적인 시골스러움’에 대한 묘사가 신정원 감독의 <차우>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이건 신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난 아직 <시실리 2km>를 보지 못했다.) 다만 <차우>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시도하지만 적절히 통제하는 어떤 코드의 유머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 <차우>를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 그 실소를 진심으로 즐기게 되는 것도, 그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 때문일 것이다.


ps. 지금 시간 23시 39분. 지금 읽어보니 어찌 이리 비문과 오문이 난무하고 글이 엉망진창 왔다갔다 하는지. 글을 조금 다듬었다.

2009/07/27 17:23 2009/07/27 17:23

Vinyan

엠마뉘엘 베아르 언니의 무시무시한 얼굴.

태국 푸켓에서 6개월 전 쓰나미로 어린 아들을 잃은 벨머 부부는 푸켓을 떠나지 못한 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자선파티에 참석한 도중 부부는 우연히 버마의 깊은 숲 속 바닷마을을 찍어온 영상에서 자신의 아이처럼 보이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아들을 찾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확신이 없는 남편 폴은 여행 내내 회의에 시달리지만, 아내의 믿음은 굳건하며, 이 여행을 계속 추동한다. 심지어는 남편을 속여 사기꾼에게 거액의 돈을 넘기면서까지 말이다. 이들의 여행길은 점차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버마의 원시림으로 향하고, 얀은 점차 집착과 광기로, 폴은 공포로 빠져든다.

영화는 오프닝 크레딧부터 매우 강렬하고 압도적인 비주얼과 사운드로 시작한다. 화면을 꽉 채우는 타이포그라피의 오픈 크레딧, 아마도 바닷속의, 수많은 물방울 기포 사이로 철렁대는 긴 머리카락, 점차 핏빛으로 변하는 물방울들, 그리고 처음엔 찰싹대는 잔잔한 파도소리에서 점차 소리가 커지며 불쾌하게 귀를 긁어대는 사운드까지. 마침내 도저히 이 소리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가 돼서야, 영화의 스탭롤이 끝나고 소리도 멈춘 뒤 본 화면으로 전환된다. 쉰이 다 돼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20대적 젊음과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엠마뉘엘 베아르의 비키니 수영복 씬이다.



(이하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Vinayn

종종 자연과 등치되는 모성애는 원래 무섭고 잔인하고 눈먼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이 중 하나로 조셉 콘라드를 꼽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나뭉님이 지적한 대로 <지옥의 묵시록>을 강하게 연상케 한다. (<지옥의 묵시록>은 조셉 콘라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일부 영화정보에서는 그래서 [암흑의 핵심]이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라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인물이 모종의 임무를 띄고 다른 인물들 혹은 사회와 동떨어진 곳, 즉 정글 속으로 여행하며 점차 광기에 물들어간다는 설정은, 확실히 <지옥의 묵시록>을 꼭 빼닮은 구석이 있다. 말론 브란도의 커츠 대령이 이미 그랬던 존재고, 그 뒤를 주인공인 마틴 쉰의 윌라드 대위가 쫓는 것이다. 윌라드 대위의 임무는 커츠 대령을 제거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 임무에 성공하지만, 한편으로 그 자신이 또 다른 면에서 커츠 대령을 닮아가며 광기의 중심으로 빠져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커츠와 달리 그 광기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게 차이점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 영화, <빈얀>도 그렇다.

<지옥의 묵시록>에서처럼 <빈얀>에서도 벨머 부부가 여행을 계속하면서 정글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자연은 인간이 잘 통제하고 다듬은, 인간을 위로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돼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을 압도하고 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잔혹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이 된다. 제멋대로 자란 무성한 나뭇가지들, 더럽고 탁한 강물과 발목까지 빠져 걸음을 어렵게 하는 진창, 거기에 쏟아지는 비까지. <지옥의 묵시록>에서처럼 <빈얀>의 공간은, 서구인들이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매혹과 공포를 함께 느끼는, 그들 입장에서 소위 ‘원시림’이라 여겨지는 동양의 깊은 밀림이다. 그런데 벨머 부부가 푸켓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빈얀>의 이런 밀림에 또 다른 의미 하나를 더 부여한다. 즉, 이들의 여행이 계속될수록 카메라에 잡히는 야생의 압도적인 자연의 풍경은, ‘여름 휴가를 온 백인들을 위해 아름답게 손질된 동양의 휴양지 해변’인 푸켓과 극명한 대비가 된다는 것이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는 휴양지에서 종종 마주치는, 잠시 지나는 상쾌한 스콜이 아니라, 마치 배우의 몸을 연달아 찌르기라도 하듯,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불쾌한 비다. (배우들이 정말 고생했겠더라.) 그렇다면 6개월 전 벨머 부부의 아이를 앗아간 쓰나미는, 말하자면 잘 통제된 인간의 영역과 야생의 자연이 인간을 압도하는 영역 사이의 어떤 틈새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을 ‘발견하고 탐험하며 지배하고 정복하기를’ 꿈꾸지만, 결코 인간에게 정복되지 않는 자연은 종종 틈새를 찢고 그 사이로 인간이 정복했다고 믿는 어떤 영역을 순식간에 덮치고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다.

Apocalypse Now

마침내 그에게 다가간다. 그를 죽이기 위하여.

<빈얀>은 그러나, <지옥의 묵시록>과 다르다. <빈얀>의 벨머 부부는 커츠 대령이 아니라, 커츠 대령과 똑 닮은, 그러나 그런 식의 ‘절대적 아버지’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들을 죽이는’ 무수한 어린아이들을 만난다. 옷은 모두 팽개친 채 사타구니에 두건만 두르고 얼굴에 온통 허연 회칠을 하고 눈과 입 주위를 붉게 칠한 이 아이들은 처음엔 한둘, 그 다음엔 서넛, 그 다음엔 대여섯이 벨머 부부의 눈에 띄고, 그 때까지만 해도 부부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이 수백이 한꺼번에 모여들 때, 그것은 확실히 충격과 공포가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의 충격은 마치 <지옥의 묵시록>의 엔딩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양상이 된다. 아마도 식인을 하는 듯한, ‘원시인’이라는 다소 차별적인 말이 딱 떨어지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흉폭한 자연에 적응하고 그 일부가 돼버린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산 채로 귀신이 돼버린’ 존재들인지 모른다. 사회와 상징계를 떠나 그저 실재로만 존재하는 아이들이라니, 사실 이거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아닌가. 그러니 상징계에 속한 인간의 눈에는 이들이야말로 귀신이 아닌가.

아이들에게 남자 어른들이 차례로 죽음을 당할 때, 우리는 어쩐지 그 죽음에서 공포와 함께 일종의 경외감과 슬픔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나 그 아이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얀을 향해서는 끝없이 손을 내밀며 그녀의 몸을, 특히 가슴을 쓰다듬기에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 아이들이 여자를 살려두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다. (벨머 부부가 아이들과 처음 마주쳤을 때 아이들과 함께 있던 노부부는 둘 다 아이들 앞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겁에 질려있었고, 아이들은 노부부 중 남자 쪽을 죽인다.) 말하자면 아이들의 살인은, 인간의 ‘사회’의 룰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의 일부이면서,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한 존재들에 대한 응징과 처벌의 뉘앙스를 띄고, 상대적으로 자신을 돌보아줄 모성 – 자연은 종종 모성과 등치된다 – 에 경외와 복종을 바치는 것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아이들을 ‘착취’하며,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즉 자신의 피와 살을 이은 존재만을 중시했던 남자어른들은 (중간에 도망쳐 버린 선장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모두 죽음의 처단을 당한다. 

Vinyan

이 장면에서 아이들은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천진난만한, 유독 사운드로 강조되는 '깔깔깔' 웃는 소리는 충분히 소름끼쳤다.

다만 뭔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버마의 밀림 속 아이들이 원시림 속 야생적인 식인종 원시인으로 그려진 것, 그리고 절대적 공포의 공간이 푸켓에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간 버마의 깊은 산골짜기라는 것, 아마도 감독이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자기 생각에 ‘그저 먼 곳’이었을 뿐이 정치적 격변으로 몸살을 앓는 버마의 숲속이란 게, 차마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얄팍하고 오래된 오리엔탈리즘의 잔재를 보는 것 같다.

한 가지 더, ‘빈얀’이 정말로 태국의 귀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말인가 싶어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 영화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 보고 쓴 이들의 감상문을 대거 읽었다. 미안한데 이 영화는 그렇게 보면, 그 감상문들이 하나같이 전하는 대로 “대체 뭐하자는 영화인지 알 수 없는” 영화가 돼버린다. 이 영화에서 비주얼만큼이나 중요한 게 사운드다. 이 글 두 번째 문단에서도 묘사했지만, 종종 초현실적인 장면과 함께 귀에 거슬리며 불쾌감을 주도록 연출된 사운드가 영화의 공포와 긴장의 분위기를 쥐었다 놨다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파일로 집에서 싸구려 컴퓨터 스피커를 통해 듣는 사운드는 이 영화의 원래 의도된 분위기, 사운드의 강약과 리듬으로 전달되는 그 공포를 결코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한다.


ps 1. 부천영화제 상영작. 7/19 일요일 오후 5시, 부천시청.

2009/07/24 05:01 2009/07/24 05:01
7월에도 마지막 주 화요일에 어김없이 인디포럼 월례비행이 열립니다. 이번 월례비행에서는 '미디어'를 주제로 단편 세 편이 상영됩니다. 끝나고 나면 회비 1만원에 뒷풀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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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3 15:12 2009/07/23 15:12

<여고괴담 5 : 동반자살>(이하 ‘동반자살’)이 시리즈 중 최악의 작품이란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출도 이야기도 배우들의 연기도 가장 딸리고, 심지어는 배우들의 외모도 딸린다. 영화 얘기를 하며 배우의 외모를 트집잡는 짓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간 <여고괴담> 시리즈가 가능성있는 젊은 신인 여배우들을 발굴하는 장으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외모 트집잡기’는 그러니까, 또 하나의 강조법에 불과하다. 영화의 모든 게 최악이니 하다못해 배우의 외모라도 좋았다면 뭔가 변명해줄 거리라도 찾겠는데 그러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1편이야 원래 활동하고 있던 배우들을 캐스팅한 거였으니 넘어가고,) 2편에서 시크한 이영진과 귀엽고 깜찍한 공효진, 3편에서 인형같은 외모의 박한별과 묘하고 성숙한 분위기가 있는 송지효, 4편에서 정말 예쁘다 싶은 김옥빈과 서늘한 매력이 있는 차예련이 발굴됐다. 그렇다면 5편에서는?

소재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고생들의 ‘우정’(굳이 따옴표를 친 이유는 이 ‘우정’이 종종 ‘사랑’의 다른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이 실제로 그런지 안 그런지는 차치하고, <여고괴담> 시리즈는 한국에서 ‘여고’라는 신비화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여고생’이라는 신비화된 존재들에 대한 이런저런 신비한 이야기들, 종종 끔찍한 결말과 비극을 맞고 마는 이야기들을 다뤄왔다. 부모나 선생, 기타 다른 어른들보다도 또래의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나아가 아직 불안정한 상태로 형성 중인 각자의 정체성마저도 함께 공유하려 들고, 그래서 심지어 “화장실도 같이 들어간다는” 여고생이다. 그러니 ‘죽음도 함께 맞자’는 약속을 우직하게 실행해 버리는 여고생의 이야기란, 여고괴담 시리즈의 소재로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그런데 이야기가 풀리는 방식이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동반자살’은 그 자체로 이야기 하나를 다 풀 만한 소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더 깊은 얘기를 하기 위한 표면적 ‘가이드’로서의 소재로 가치가 있다. 아이들이 굳이 ‘동반자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굳이 이유랄 건 없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나이 또래에는 사회적이고 현명한 해결방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회피책일 수도 있고, 죽음, 나아가 자살로서의 죽음 자체가 낭만적으로 미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동반자살>에서 다뤄지는 자살, 특히나 동반자살은 매우 나이브하다. 이것은 <여고괴담> 시리즈를 형식적으로 잇기 위해 별 고민없이 대충, 선택된 감이 있다. 그 결과 첫 오프닝에서의 죽음 뒤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지지부진하다. 미학적인 측면으로도 <동반자살>은 별 매력이 없다. 게다가 영화는 종종 지루하다. 시리즈 고어 중 장면이 가장 세고 많다는데도, 영화는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리고 이 ‘무서움’과 ‘슬픔’이야말로 <여고괴담> 시리즈의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여고생에 대해서도, <여고괴담> 시리즈의 매력에 대해서도 하나도 모르고 있구나,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단순하고 고지식한 캐릭터들이라니, 땅이 꺼져라 한숨이 나올 정도다. 여고생의 특징이라고 보통 얘기되는 불안감과 모호함 따위, 이 영화엔 없다. 소이(손은서)가 느끼는 죄책감도 평면적이고, 유진(오연서)의 탐욕이나 집착 역시 일차원적일 뿐 모종의 절실함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각 캐릭터들은 한 줄 짜리 ‘설정’만 받았을 뿐, 디테일한 캐릭터의 다면성을 부여받지는 못했다. 단서 하나를 알려주는 데에 오만 년, 다음 단서까지 또 오만 년, 그렇게 지리하게 질질끌며 가다가, 알고 보니 (스포일러라서 가린다) 동생에게 빙의해 있던 언니란다. 지루함을 겨우 견디며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어이가 없어서 실소도 나오지 않는 수밖에. 절절한 연인들의 흉내를 내면서도 굳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노라, 강조하는 폼새도 좀 우습다. 언주와 소이 사이에는 어떠한 텐션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고괴담 5 : 동반자살

애틋함도 섹슈얼한 텐션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여고괴담>이 시작돼 그토록 큰 인기를 누리며 5편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를 거칠게 요약해 보자면, 한국이란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가부장적 억압, 그 중에서도 여고생들에게 가하는 이중적이고 더욱 특별한 방식으로 가하는 억압 및 통제와, 사회의 주류인 남성 성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여고생들 특유의 불안과 들끓는 에너지가 충돌하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 파장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이를 더욱 첨예하고 강렬하게 만드는 건 입시지옥과 성에 대한 이중잣대가 은밀히 감춰진, 그리고 이 사회의 주류의 가치관과는 살짝 빗겨나 있는 특유의 룰이 존재하는 여고라는 특유의 공간배경이다. 그런데 이제껏 <여고괴담>을 만들어온 주체들은 대부분 성인 남자들이다. 그들은 <여고괴담>에 등장하는 여고생들을 어떻게든 본인들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있을 법한’ 존재들로 만드는 데에 주력하면서도, 특정한 부분은 ‘더욱 이해 못할 부분’으로 남겨두며 신비화 해왔다. 관객들 역시 (그들 자신이 여고생이건 아니건간에) <여고괴담> 시리즈의 여고생들을 타자로 보는 데에 익숙하다. 그 결과 <여고괴담> 시리즈의 인물들은 언제나 매혹적인, 절대적인 ‘타자’로서, 그리고 ‘거울’과 같은 존재로 스크린을 누볐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식의 ‘노력과 결과의 엇나감’이 오히려 <여고괴담>의 인물들을 더욱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앞서 <여고괴담> 시리즈의 생명력의 원천으로 지목한 ‘무서움’과 ‘슬픔’이 발생하는 지점, 나아가 시리즈 중 일부 작품이 기적+적으로 성취해낸 ‘시적인 아름다움’의 근원도 바로 이 지점이다.

<여고괴담> 시리즈가 나온 지 벌써 10년, 그 10년간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위상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성년’의 기간을 보내는 여고의 공간의 특성이 많이 변한 만큼, 이제 어떻게든 그런 현실상의 변화와 그로 인한 시리즈의 변화도 반영해야 했던 게 사실이다. 앞선 이야기들 역시 언제나 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여고괴담>의 세계를 진화시켰던 게 사실이다. 1편에서 ‘어떻게든 여고라는 지긋지긋한 공간을 빨리 떠나는 게’ 아이들의 목적으로 보인다면(그래서 귀신은 학교에 계속 남는다), 3편인 <여우계단>에선 ‘예고’라는 공간이 주는 특혜와 이점을 그 누구보다 잘 이용하려는, 사회적으로 크게 진출하려는 예술가 지망생들이 등장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그간 <고사 : 피의 중간고사>처럼 <여고괴담> 시리즈의 영향을 분명히 받고 차용했으나 <여고괴담>의 직계는 될 수 없었던 영화들도 등장했다.

감독이나 제작자가 이 점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동반자살>에서 시리즈 내 최초의 ‘순수한 악당’ 캐릭터가 등장한다거나 미국 틴에이저 영화에서 주로 등장했던 ‘여왕과 시녀’로 구성된 패거리가 나오고, 심지어 남학생과의 교제와 임신 문제까지 다루는 걸 보면, 새로운 변화에의 강박이 꽤 컸던 듯하다. 그럼에도 <동반자살>의 감독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여고괴담>의 여고생들에게 매혹되는지, 왜 이 시리즈를 그토록 좋아했는지는 감도 잡지 못한 것같다. 전편들에서 각각 인기있었던 설정을 하나씩 따와 잡탕을 만들어 버리지만, 그 설정들이 왜 그 편에서 그토록 인기였는지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듯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 시리즈의 질긴 목숨을 꼭 유지해야만 하나, <동반자살>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고괴담> 시리즈는 여전히 매력있고 할 얘기도 많은 시리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매력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는, 나쁘지 않은 시리즈다. 이전에 눈앞에 너무나 명백하게 보였던 억압이 덜해졌을 뿐, 우리의 10대 여성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더 은밀해진 억압과 통제과 경쟁에의 강요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반자살>의 애초의 운명은, 앞엣 시리즈를 정리하고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시리즈로 도약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에 불과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성공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실패함으로써 강력한 변명과 근거를 제공해준 듯하여 보는 기분이 그닥 좋지 않다.

2009/07/23 06:03 2009/07/23 06:03

trailer-lesbian-vampire-killers 여자친구에게 7번째 차인 쑥맥 지미와 사회부적응자에 여자만 보면 화색이 도는 플레치가 영국의 시골 중에서도 시골 크랙위치로 하이킹을 떠난다. 그런데 이 곳은 오래 전 강력한 레즈비언 뱀파이어 퀸인 카밀라가 죽으면서 저주를 내렸던 곳. 그래서 마을 처녀들은 18세가 되면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변해버린다. 카밀라는 맥클라렌 남작의 성검에 죽음을 맞으면서 맥클라렌의 마지막 후손의 피가 숫처녀의 피와 섞이면 자신이 더욱 강력한 힘을 갖고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크랙위치에서 지미와 플레치 일행은 우연히 만난 네 명의 미녀와 산장에서 묵게 되고, 곧 자신을 공격해 오는 여자 뱀파이어들에 맞서 악몽같은 하룻밤을 지내야만 한다. 어벙하고 쪼잔한 지미는 마침내 이곳에서 자신의 혈통과 운명을 알게 된다.

필 클레이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LVK>에서 LVK는 Lesbian Vampire Killers, 즉 ‘레즈비언 뱀파이어 킬러’의 약어다. ‘레즈비언 뱀파이어’란 말이 들어간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온갖 B급 유머와 음담패설로 무장한 뱀파이어물 코미디로, 영화제 측의 소개에 의하면 이번 영화제 상영작 중 가장 재미있는 영화 중 한 편이다. B급 호러치고는 컴퓨터 그래픽이 꽤 사용되기는 했지만,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조잡해보이는 CG의 질마저도 영화의 흥겨운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데 일조한다. 감독 스스로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이들은 딱 15살 남자아이들의 정신연령을 가졌다”고 GV에서 언급할 정도로, 이 영화가 구사하는 농담과 유머, 그리고 전제하고 있는 가치들은 정치적 공정함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애저녁에 은하계 저 편으로 날려버렸다. 플레이보이 모델풍으로 생긴 화려한 여자들이 아찔한 차림으로 울타리를 넘는 모습을 앙각으로 카메라를 잡아 슬로우 모션으로 비춘다거나, 주인공들이 그들이 한껏 몸매를 과시하며 춤을 추는 걸 침을 잔뜩 흘리며 쳐다보는가 하면, 그런 예쁜 여자들이 뱀파이어 퀸의 저주에 따라 18세만 되면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에 통탄하며 툭하면 남자의 성기나 여자의 가슴, 혹은 게이에 관한 질 낮은 농담을 내뱉는 식이다. 심지어 말뚝을 박거나 성수를 뿌리면 뱀파이어들이 거품을 부글대며 정액을 연상시키는(!) 우윳빛 피를 분출하며 죽을 정도다. 뱀파이어가 된 여성들이 벌이는 진한 키스씬도 이성애자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단단히 고려하고 만든 장면들이다.

단순히 장면만 그런 게 아니다. 뱀파이어는 원래 관능적인 존재로, 18세의 성인이 된 여자들이 모두 레즈비언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은 스트레이트 남성들에겐 악몽일지 몰라도 ‘여성의 힘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보여주는 클리셰에 가깝다. 뱀파이어 퀸의 저주에 걸려 모두 레즈비언이 되고 뱀파이어들을 신나게 쳐부수는 이 영화야말로, 얼핏 보면 더없이 편견에 가득한 동성애 및 여성 혐오 영화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미, 플레치, 마을의 목사님과 함께 뱀파이어 사냥에 나서는 로티는 가장 노출이 적은 탓에 유일한 생존자가 되고, 안경을 걸쳤다는 것으로 미모는 물론 지성까지 갖춘 존재로 상정되며, 무려 숫처녀에다 저 바보같고 소심한 지미를 좋아하기까지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지미를 구해주기도 여러 번이다. 이렇게 완벽한 여자가 지미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데다 레즈비언 뱀파이어 사냥에 나서는 충실한 이성애 신봉자이기까지 하니, 15살 정신연령의 남자들에게 로티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인 셈이다. 결국 가부장적 권위의 화신이나 다를 바 없는 목사와 이들에 기생해 사는 찌질한 남자들, 그리고 여성적 힘으로 뭉친 여자들과 적대하며 남자들 편에 선 여자가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고 연대한 여성들을 잡아 죽이는 형국이 된다.

Best_Lesbian Vampire Killers_Still (1)

그런데도 이 영화는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낄낄대거나 폭소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길티 플레저’로서의 웃음을 제대로 선사하며 흥겹고 캠피한 매력을 전한다. 의도적으로 옛 ‘싼 영화’를 흉내낸 자막과 화면들, 다소 과장된 여자 캐릭터들의 연기, 없이 얄팍하고 뻔뻔한 플레치와 소심하고 어벙한 지미 콤비의 궁합, 그리고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장면들이 주는 유쾌한 에너지까지. 지미를 괴롭히던 못된 여자친구가 뱀파이어가 된 채 찾아왔다가 지미와 플레치에게 처참하게 처리되는 장면에선 박수와 폭소가 저절로 터져나올 정도다. 게다가 이 영화의  아무리 게이와 여성, 특히 레즈비언 여성들에 대한 음담패설과 성적 대상화 농담이 난무한다고는 해도, 주인공인 지미와 플레치가 워낙 얼뻥하고 찌질한 캐릭터들인 까닭에 초반에 느껴지는 여러 불편한 감정들이 쉽게 웃음으로 전환된다. 게다가 뱀파이어들과의 싸움이 본격화되면서 영화에서 가장 저질 농담을 많이 구사하는 플레치는 뱀파이어들이 내뿜는 정액같은 피를 번번이 뒤집어쓰며 보는 관객에게 묘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과거 뱀파이어들의 전통을 충실히 클리셰로 활용한 덕에 그 영화들에 전제돼있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까지 덩달아 불려나오기는 했지만, 이 영화는 묘한 지점에서 그것을 스스로 비트는 영악함을 과시하며 다시 한 번 관객들을 웃기고 있는 셈이다.

<LVK>는 본국인 영국에서는 15세 관람가로 개봉되어 일정한 흥행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농산물 회사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제작비를 모으던 감독에게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차기작 제작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과연 국내에서도 개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설사 수입이 된다 해도 근엄하고 유머감각 없는 영등위 위원들의 ‘허락’을 통과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만큼, 이 영화를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즐길 기회는 이번 부천영화제가 거의 마지막일 듯하다.

 

ps 1. 부천영화제 월드판타스틱시네마 섹션 상영작. GV는 나뭉님(새 창으로 열기)이 진행하심.

ps 2. 프레시안 20일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림

ps 3. 로티 역을 맡은 배우 마이애나 버닝(이름도 참… MyAnna Burning이란다. 나의 애나가 불타고 있다?)은 미셸 파이퍼를 닮았다. 아니나 다를까 imdb에 들어갔더니 아예 대놓고 가장 닮은 사진들이 프로필 사진으로 올라(새 창으로 열기) 있다. 필모그래피를 보고야 알았네, 세상에 닐 마셜 감독의 <디센트>와 <둠즈데이>에 출연했었다고 한다.

ps 4. 사실 영화가 지미와 플레치와 심지어 로티마저 내내 놀리는 분위기가 있고 여자 뱀파이어들이 굉장히 매혹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어쩌면 이 영화야말로 오히려 역설적인 의미에서 게이-뱀파이어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긴 한다. 생각해 보면 영화의 2/3 내내 플레치에게 뱀파이어 피를 뒤집어 씌운 것도 그렇고, 막판가면 피가 말라붙어서 꼴불견이 되는 데다, 사실 게이 농담이 그렇게까지 많이 나오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에게 다시 한 번 죽는 카밀라란, 어쩌면 분명 역사상 ‘자연스럽게’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나 이성애 이데올로기에 억지로 질식당하고 압사당하는 동성애의 운명을 자조적인 역설로 그려낸 것인지도 모른다.

2009/07/20 19:18 2009/07/20 19:18

신동일 감독은 참 운이 없다. 데뷔작을 포함해 그의 첫 두 영화는 모두 투자사와 배급사간 ‘자본’끼리의 이런저런 갈등과 사정 때문에 영화를 다 만들어놓고도 개봉이 한정없이 미뤄졌다가 가까스로 뒤늦게 소규모로 개봉했다. 제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방식을 택함으로써 자본의 문제를 해결해 세 번째 영화를 찍어놨더니, 이제는 정치의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청소년 모방 위험’을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아 개봉 전부터 영화 외적인 것으로 스캔들의 주인공이 돼버린 것이다. 영화를 지지하든 안 하든, 10대를 위해 만든 영화가 도리어 10대들이 볼 수 없도록 금지를 당했다.

딱히 눈에 띌 만한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없는데도 이러한 등급을 받은 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가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얼마나 ‘불온한’ 영화인지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우려된 ‘청소년 모방 위험’의 타겟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하나는 모두가 짐작하는 바로 그 이유, 그러니까 현직 대통령을 향한 직설적인 조롱과 비난, 그리고 또 하나는 이주노동자와의 연애, 그것도 ‘까만 피부’를 지닌 이주노동자와 ‘성적인 텐션이 분명히 존재하는’ 연애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정으로 불온한 것은 바로 후자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온함은 다시, 한국사회의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고스란히 폭로한다.

재미있는 것은 감독이 이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이미 영화 내에서 그대로 까발렸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민서(백진희)가 자신의 담임 선생님과 딱 마주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방문자>의 주연 김재록이 이 난감한 담임 선생님을 참 애처롭게 연기한다. 너무나 애처로워서 더욱 코믹하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위력적인 장면이자, 남자어른들에게 가장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10대의 성을 끝없이 터부시하면서 특히 10대 여성에게 ‘순결하고도 무성적인 존재’로 있을 것을 강요하지만, 정작 막 10대를 벗어난 가장 젊은 여성들의 성을 가장 더럽고 치졸한 방식으로 착취하는 경향이 있다. 10대 청소년들이 성매매 시장으로 유입되는 것도 바로 이 틈새다. 게다가 그들은 ‘어리다고’ 각광을 받으면서도 ‘불법’이라는 이유로 착취를 당하는 이중적 모순에 놓이곤 한다.) 담임 선생님 씬이 그토록 위력적이고 코믹한 것도 바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현실이 고스란히 폭로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소위 ‘통제되어야 할’ 여성의 성이 ‘민족의 범위를 벗어난’ 남자들, 특히 가난한 외국 출신 남자들과 엮일 때 한국 남성들의 분노는 폭발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이 영화를 공격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공격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영화는 민서와 카림(마붑 알엄) 사이의 성적인 텐션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민서는 카림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한국사회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방식, 즉 ‘(여성 착취적인) 봉사의 의미의’ 성적인 접촉을 시도한다. 이 영화가 다른 의미에서 ‘선정적인’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이 영화가 선정적이라면 그것은 성을 다루거나 묘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성, 특히 10대 여성의 성을 다루는 방식의 위선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인 남성들이 가장 터부시하고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에서 건드려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외피를 두른 채. 이것의 결과가 바로 현실 층위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셈이다. 영화의 허구적 층위에서 이미 고발된 아이러니와 모순이 현실의 층위에서 고스란히 반복을 통해 재현된다.

반두비

본국의 어린 여성과 이주노동자 유부남 남성의 자연스러운 신체접촉은 한국의 남자어른들에겐 불편한 악몽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저 성적인 접촉의 장면이 여성, 특히 주인공인 10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이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고 보기에도 모호한 지점이 있다. 영화 전체적으로 민서를 생동감있게 해주는 것은 그녀가 어떤 일관된 사고나 가치관에 따라 숙고하고 행동한다기보다 거의 즉물적인 욕구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라는 바로 그 지점에 있지만, 이 특징은 민서라는 캐릭터를 ‘알 거 다 아는 척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모순의 존재로 묶어둔다. 그녀는 유사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며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 잘 알고있는 듯 말하고 행동하지만 오히려 성에 대해 무지한 어린아이같은 존재다. 그녀가 카림에게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어떤 ‘난감한 천진함’이 포착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성적인 행위의 생물학적인 ‘조건반사’ 과정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그 행위가 지닌 다층적 층위에서의 사적, 사회적,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단적인 근거가 어머니의 남자친구인 기홍(박혁권)에 대한 무조건적 적대다. 그녀는 어머니와 기홍 사이를 전적으로 ‘동물적인 성적 행위만 존재하는 관계’로 여기며 혐오감만 드러낼 뿐, 그 관계에 있을 다른 정서적 교감이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결코 이해는커녕 짐작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장면에서 민서의 행위는 오히려 사회가 여성의 성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에 대해 그 외형을 그저 흉내내는 것일 뿐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녀가 그 의미들을 (새삼) 깨닫고 자신의 주체성 하에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은 영화 막바지에나 나오는 키스씬이다.

이 영화의 수상하고 기묘한 모순도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나는 <반두비>의 민서 캐릭터가 살아 생동하는 10대 여성을 그렸다기보다는, 386 지식인 남성이 ‘촛불소녀’에게 투영한 이상형을 그려낸 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허남웅 기자가 지적한 대로(새 창으로 열기), ‘감독의 이상을 뻣뻣하게 구현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모범생 로봇이라는 것이다. 사실 ‘촛불소녀’에 대한 386들의 기대가 과연 무엇인지 이 영화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도 또 없다. 카림의 월급을 떼어먹은 사장의 집에서 민서가 난동을 벌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말하자면 386 남성 지식인들이 ‘어른’이기에 대놓고 하지 못하는 일련의 체면구길 제멋대로의 행동과 거침없는 말들을 ‘어린 여자’라는 방패 하나로 대신 질러줄 수 있는 존재다. 혹은 동년배들의 혐오어린 시선이나 비난엔 끄떡도 않을 남성 어른의 위선을 대신 콕 찝어 폭로하고 수치를 안겨주어 윤리적 각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이거나. 민서가 남성의 욕망을 잘 알면서도 완전히 무지한 모순을 갖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감독이 민서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그녀는 매혹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구체적인 성적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 읽힌다. 바라보는 자가 자신과 다른 이의 시선 모두를 애초부터 억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적으로 완전히 무지한 천진한 존재고, 그러면서도 남성의 욕망을 꿰뚫어본다고 가정된 존재다. 어쩌면 이와 같은 메커니즘은 소위 ‘국민여동생’ 문근영을 향한 팬덤이 보여준 어떤 현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녀는 성적으로 매력이 있으되 결코 그녀 자신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알아선 안 된다. 그녀를 보는 ‘나’는 그녀에게 성적인 매혹을 느끼되 그것을 성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통하는 건 절대로 안 된다. ‘내’가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건 죄다. 그러므로 그녀는 순결한 누이가 되어야 한다. 그녀와 성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건 외부의 타자뿐이거나 이 모든 소소한 서민들을 뛰어넘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자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매혹은 사라지거나, 여전히 원존재의 상태로 봉인될 것이다…

반두비

식사장면의 중요성

 

나아가 내가 우려하는 것은, 신동일 감독 영화의 캐릭터들은 갈수록 어려지지만, 한편으로 갈수록 생동감과 자연스러움도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개연성을 해치며 ‘아귀가 안 맞는’ 어색함과 작위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 짐장에는 아무래도 신동일 감독의 주인공 캐릭터들이 나이가 많건 어리건 우리가 소위 ‘386’이라 부르는 특정 세대의 특정한 정서와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일관되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감독 자신이 가장 많이 반영되어 있던 데뷔작 <방문자>의 김재록 캐릭터는 실제 386 출신 지식인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그 나이 또래 아저씨’의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로 오면, 인물들은 포스트-386에 속하는 지금의 30대들로 설정돼 있으면서도 이들 캐릭터의 사적 역사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기억과 재료 부분은 일관되게 386의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 즉,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극중 나이에 어울릴 만한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거나, 90년대에 30대 초중반을 지나고 있던 인물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2000년대로 불러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번 <반두비>에서의 민서 캐릭터 역시 계속해서 어딘가 어색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지금의 10대를 반영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라기보다는 감독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386 여성 친구/동지들이 10대이던 무렵의 소녀를 ‘이상화’로 덧씌운 뒤 억지로 타임머신에 태워 2009년을 살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차피 허구의 창작물에서 인물들은 실제 그 나이대의 동시대 인물들보다는 감독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리자이기 마련이고 그 자체만으로 흠이 되는 건 아니지만, 신동일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적 배경 하에 특정한 시대를 특정한 나이로 거친 특정한 인간을 매우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간을 달리는 캐릭터’들은 관객들에게 어떤 면에서 상당히 경직성을 보여주며 예기치 않은 곳에 공감대를 흩뜨려버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민서는 종종 너무 제멋대로에 생각이 없어보이거나 즉물적이고, 카림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착하다. 나는 과연 10대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아, 우리 얘기다”라고 반응할지 아닐지 상당히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면 내 짐작은 다소 부정적이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나는 영화에서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직설화법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자의식이 부담스럽다. 소신이 너무 명확해서 그 소신의 이론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잡히지 않는 현실의 모든 면까지도 이론으로 제어하려는 듯한 답답함이 종종 보인다. 나아가 이것이 지나치게 우직하고 직설법으로 드러나는 것도. 사실 <반두비>는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 상당히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다.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도 상당하다. 그런데 여기에 지나친 정치적 자의식이 끼어들면서 매력을 깎아먹고 있는 것 같다. 정치적 메시지와 주제가 왜 매력을 오히려 돋우지는 못할망정, 지지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부담을 먼저 안겨주며 종종 민망함을 느껴야 하는가. 세련된 위트와 재치, 혹은 함축과 비유가 아쉽다. 특히나 이런 ‘장르영화’적 외피를 빌어온 영화에 그런 식의 날 것의 정치적 자의식을 부딪히게 하는 건 종종 덜컹거리며 영화의 전체적 균형감을 망치는 결과가 되기 쉽다. 극소수의 대가들이 충돌을 통해 오히려 시너지를 내는 방식으로 그려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내공이 아닌 것이다.


ps 1. 신동일 감독의 영화엔 그만의 반복되는 몇 가지 코드들이 있다. 신감독의 따님의 캐스팅도 그 중 하나인데, 이 영화에선 실물로도 이름으로도 등장하지 않았던 듯. 다만 신감독은 이번 영화에도 카메오 출연을 했다. 무려 1인 2역이다. 마르크스의 사진도 어딘가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점 씬이 아니었을까 싶다.)

ps 2. 민서의 기원이 지금의 10대보다 오히려 386인 여자의 어린시절에 대한 ‘상상’일 거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 하나. 민서는 ‘오늘의 책’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의 알바생이란 2009년엔 거의 사라진 희귀한 존재다.

2009/07/14 07:18 2009/07/14 07:18

약탈자들

정식 개봉 전 임시포스터.

손영성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약탈자들>은 코미디다. 그것도 아주 웃기는 코미디다. 장례식장에 모인 친구들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인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뒷담화'를 통해 쏟아낸다. 이렇게 각자 이야기 속의 '대상'으로 재구성되는 '상태'라는 인물의 면면은 괴이쩍고 이중적이며 허세에 가득찬 속물이다. 언제나 거대한 명분을 둘러대며 고뇌에 찬 지식인인 척하지만 실상은 여자한테 추근대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헛소리나 일삼으며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이유나 대는 것이다. (이런저런 단편과 독립영화에 출연했던 김태훈이 상태 역을 맡아 신인답지 않은 안정적이고 흥미로운 연기를 선보인다. 김태훈은 배우 김태우의 동생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 과정에서 코미디가 발생한다. 상태의 친구들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 상태를 붙잡아 둠으로써 그보다 권력의 우위에 서지만,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폭로되는 건 화자들 각자의 속물적 욕망과 찌질함이다. 말하자면 상태는 화자들 각자가 자신의 약점과 수치를 투영시킨 인물인 것이다. 우리는 친구들이 전하는 상태라는 인물을 보며 킥킥대다가, 어느새 상태를 통해 드러나는 그들 각자의 찌질함을 보며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각종 장르적 특징이 혼성되면서 오는 쾌감이 덧붙여진다. 사실 이 영화는 살인사건과 얽힌 상태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추적하는 일종의 스릴러적 성격을 영화 전면에 깔고 있다. 상태의 스승인 '달인'과 연쇄살인범 택시기사의 에피소드가 삽입되면서 영화는 판타지와 무협의 성격까지 슬쩍 띄게 된다.

하지만 <약탈자들>은 그리 쉽지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난해해서라기보다는,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특유의 서사방식 때문이다. 일반적인 영화들이 그러하듯 절대적 객관자로서의 감독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영화 속 인물들이 들려주는 에피소드를 나열해 퍼즐 맞추기 식으로 서사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 인물이 '상태'라는 인물과 맺은 관계나 그들의 시점, 기억, 평가 등에 따라 그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정보들을 듣게 되고, 이를 열심히 꿰어 맞추어야 그나마 진실에 가깝게 도달하게 된다. 거기에, 소심하고 찌질한 등장인물들 간 코믹한 사적인 관계가 진지하고 무거운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중첩된다.

영화의 '현재 시제'의 대부분의 공간은 장례식장이지만,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이 바로 금정굴 일대이다. 영화의 첫 장면 역시 상태와 상태의 친구 성익이 금정굴을 찾아갔다가 쓰러져 있는 묘령의 여인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실 금정굴은 한국 근대사의 비극 중 하나인 6.25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대표적인 곳이다. '금정굴'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 금정굴이 어떤 곳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관객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 금정굴이 갖는 지나치게 묵직한 무게가 영화의 재기발랄한 분위기와 섞이지 못한 채 다소 따로 노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의 코미디 역시 다소 비틀린 방식으로 억압되는 측면이 있다.

약탈자들

개봉 당시 정식 포스터에 사용된 김태훈의 이미지. 여기서도 잘했지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그저 속물적인 지식인 개인에 대한 코미디 차원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일반에 대한 지적인 블랙코미디로 비약한다. 곰곰 생각해 보면, 사회 전체의 역사란 것 역시 한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엇갈리는 증언과 기록의 종합이자 정리이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역사를 배우며 우리는 마치 이것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팩트인 것처럼 인식하기 마련이지만, '역사'라는 것도 온통 엇갈리는 증언과 기록을 연구를 통해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한때 중요한 역사서였던 것이 얼마쯤 지나 위서논쟁에 시달리거나 신빙성 논란이 일어나는 것도 역사학계에선 흔한 일이다. 게다가 언제나 피해자와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살아있는 자의 귀에 가닿을 수 없다. 병태의 장례식에 참석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병태를 죽인 상태'에 대한 온갖 뒷담화들을 자신의 기억과 관점을 한껏 투영시켜 쏟아낸다. 그러나 정작 병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병태가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가에 대한 진실은 그 누구의 귀에도 가 닿을 수 없다. 애초에 친구들이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병태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진실이 저 바깥에 명백하게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그 진실에 가닿는 것은 언제나 요원하다. 닿는다 하더라도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것도 대체로는 진실의 핵심이 아니라 그 언저리가 될 뿐이다. 누군가는 그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괴로워하고, 누군가는 진실에 기생해 있는 수많은 괴담과 흥미거리의 이야기를 퍼뜨린다. 그렇다면, 어쩌면 진실이란 이런 식의 괴담과 흥밋거리같은 부연물조차 포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역사를 안다는 것, 혹은 역사에 근거해 서사나 허구를 만드는 작업(그것이 소설이 됐든 영화가 됐든)의 본질이란, 그런 식으로 '진실을 약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영성 감독 역시 "만약 부제를 붙인다면 '에피스테메란 무엇인가. 바로 약탈이다'라고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영민한 신인감독의 나름 야심찬 대답이 이 영화에 들어있다.


ps 1. 프레시안에 7월 1일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렸다.

ps 2. 언론시사회에서 한 번 보고, 관객과의 대화가 있던 CGV 특별 유료시사회에서 다시 봤다. 확실히 이 영화는 두 번째 볼 때 훨씬 더 재미있다. 세 번째 보면 더 재미있을 거 같다. 요즘 시사회를 포함해 영화를 많이 못 보고 있어서 그렇지. 볼수록 참 지적인 영화인데, 소위 지적인 사람들의 젠체하는 유머코드도 제대로 그려져 있어 더 웃기다. 확실히 그런 부분은 홍상수 감독의 영향이 물씬 느껴지기도 하지만,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의식 따위 흥, 하는 홍상수 감독과는 태도가 180% 반대다.

ps 3. 인디포럼 개막식 뒷풀이 자리에서 김태훈과 인사와 악수를 나눈 적이 있다. 훤칠하고 잘생겼고 분위기도 좋고, 연기도 곧잘 해서 무척 기대가 된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배우가 이제 막 자리를 잡으려는 걸 보니, 뭔가 동지애를 느끼며 응원하고픈 마음이… (아아 나는야 사심 빼면 시체인, 질 나쁜 기자.) 이 영화 찍고서 소속사와 계약을 했다고 한다.

ps 4. 손영성 감독 인터뷰를 했는데 3주가 지나도록 기사로 풀지 못하고 있다. 속이 쓰리고 감독에게 죽도록 미안하다. 변명을 하자면, 요즘 욕심을 내고 의욕을 낼수록 글이 더 안 써지고, 인터뷰는 특히 그렇다. 별 욕심없이 설렁하게 한 취재나 인터뷰는 금방 뚝딱 기사로 써내는데… 

2009/07/08 21:51 2009/07/08 2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