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데뷔작 <죽어도 좋아>에서부터 <너는 내 운명>과 <그놈 목소리>, 그리고 추석 시즌작으로 이번 주에 개봉하는 <내 사랑 내 곁에>까지, 박진표 감독은 이제껏 모두 다 징한 사랑 영화를 만들어왔다. 실제 유괴, 납치 사건을 다뤘던 <그놈 목소리>조차도 아이에 대한 절절한 부모의 사랑과 상실감을 중심에 놓는 영화다. 신작인 <내 사랑 내 곁에>에 대해 감독 스스로는 "이번에는 좀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하지만, 이 영화 역시 루게릭 병이라는 희귀 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장례지도사의 격정적인 사랑을 다룬다. 신파 멜로라고? 맞다. 하지만 박진표 감독의 영화가 신파 멜로가 아닌 적도 있었던가. 다만 우리가 흔히 비하적 뉘앙스를 덧붙여 말하는 그런 신파 멜로가 아닐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며 매번 눈물을 흘리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우리의 삶과 사랑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소재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가 그런 영화를 해온 이유가 뭘까. 왜 이토록 징글징글한 멜러만 만드는 것일까. <내 사랑 내 곁에>는 그의 이전 작품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내 사랑 내 곁에

왼쪽부터 김명민, 박진표 감독, 하지원. (홍보사로부터 제공받음.)

- 추석 시즌작으로 개봉하게 됐다. 기분이 어떤가.
그러게, 그렇게 됐네. 추석시즌 가족용 영화가 됐다. 등급도 좋게 나왔더라.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많이 두렵고 떨린다.

- 네 번째 영화인데 아직도 두렵고 떨리나.
당연히 그렇다. 갈수록 더하다.

- 전작 세 편이 두 실화 소재에 논쟁적인 영화였다. 이번 영화는 실화가 아닌가?
이번에는 실화 아니다.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관객들에게 본의 아니게 부담을 드렸고, 나 자신도 그간 부담이 컸다. 특히 전작에서는 이른바 '선동'까지 했지 않은가. 특별한 목적으로 강요도 했고. 이번에는 양적인 부담을 줄이고 편안하게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 그래서 정말로 편했는가.
그렇다. 아무래도 그런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경계를 잘 타야 하는 문제인데, 이번에는 더 자유로웠다.

- 왜 하필 루게릭 병인가? 특별한 개인적인 계기라도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병 자체가 워낙 잔인한 병인데도 사람들이 너무나 모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환우나 가족들이 겪는 소외감이 크다. 많이 알려져야 치료약 개발이나 요양소 건립같은 것도 될 텐데. 그게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아런 거다. 병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갔을 때 루게릭 병은 온몸이 근육이 빠져서 점점 마비가 되지만 정신은 또렷해서 자신이 죽어가는 걸 스스로 보게 되는 병이다. 대단히 영화적인 설정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주인공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며 진행이 되니까 앞과 뒤가 강렬하게 대비가 되고, 배우들도 있으니까. 그것을 통해 삶이나 죽음, 사랑에 대해 내가 하고싶었던 얘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처음으로 픽션이어서일까, 이전 영화들과 약간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전형적인 신파멜로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는 듯 보인다.
말랑말랑해졌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 지수가 '완전'이란 말을 많이 쓰던데.
내가 '완전'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완전', '절대' 이런 단어들. 결론을 지을 때 잘 쓰는 말이다.

- <내 사랑 내 곁에>로 오면, 종우(김명민 분)가 먼저 사귀자고 하는 장면부터 인상적이었다. 보통의 신파 멜로에서는 반대이지 않은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는 한사코 거부하고 다른 쪽은 순정적으로 설득하며 헌신하고.
일부러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런 식의 강박관념도 없고. 이야기를 구성하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됐을 뿐이다. 마지막에 보면 종우가 사귀자고 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나. 영화의 형식적인 구성에 대해서 고려했을 뿐이다. 다만 죽음을 다루는 여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을 가진 여자, 그러나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컴플렉스를 가진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남자의 마음은 뭘까, 그걸 생각했다. 이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에 이유가 드러나니까.

- 두 사람은 결과를 알면서도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비극이 예정돼 있다고 하면 일단 피하지 않는가.
그것도 실은 편견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다만 내가 보고싶은 사랑이 그런 사랑이었던 것 같다. 사랑이란 감정은 때론 삶의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괴로움이 되기도 하고, 욕망이, 설레임이 되기도 하다. 다양하다. 내가 보기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단어에 불과한 것 같다. 여러 가지 감정을 포괄해서 써놓은 그냥 두 글자의 단어. 그래서 좀 뜬구름 같고, 속에 들어가 보면 굉장히 많은 감정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다 뭉뚱그려 사랑이라 부르는 것 같고. 그런 걸 그려보고 싶었다. 이 영화에서의 사랑에도 희생이나 지켜주고 싶은 마음, 설레임, 고통, 후회... 다 들어있지 않나. 결국 이 영화는 사랑이 삶이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사랑이란 것엔 해답이 없다.

-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사랑을 특별한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 수많은 감정들이 합쳐져서 그것이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걸 '사랑'이라 부르는 거지. 연애 초기의 설레임도 사랑이지만, 점차 지내면서 갖게 되는 애증이나 헤어지기 직전 갖게 되는 증오도 다 사랑에 속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도 사랑이고, 질투도 사랑이고...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 영화마다 '사랑'의 의미가 변화하고 확장되는 것 같다.
글쎄, 변화는 아닌데. <죽어도 좋아>가 설레임과 열정의 사랑을 담았다면 <너는 내 운명>은 상대를 지켜주고 이해하는 사랑을 담았다. 설레임도 있긴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거지. <그놈 목소리>는 좀 다른 부모와 자식 간에 있는 좀 다른 의미의 큰 사랑이고. <내 사랑 내 곁에>에서는 또 여러 형태의 사랑들이 있다. 그냥 다른 종류의 사랑들인 거지. 확장된다는 말은 맞는 것 같긴 한데.

- <내 사랑 내 곁에>가 <너는 내 운명>과 쌍둥이 같은 영화라는 생각도 들긴 한다. 외견상 비슷하긴 한데 성격은 정반대인 쌍둥이 말이다.
아무래도 순정적인 측면에서 곁에서 끝까지 지켜준다는 점 때문에 그렇겠지. "어떻게 저렇게 끝까지 지킬까, 나라면 과연 할 수 있을까, 너라면 과연 해줄 수 있니?" 마음 속에는 있으나 실행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인 셈이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얘기는 두 영화가 분명 다르다. 본질이나 질과 양이 다르다기보다는 그냥 종류가 다른 슬픔인 거다. 눈물이 나도 다른 눈물이 날 것이라고, 만들면서도 생각을 했다. 본 사람들도 다르단 얘길 하고. 똑같이 울어도 그 눈물과 이 눈물은 차이가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양은 잘 모르겠는걸. <너는 내 운명> 쪽이 더 많지 않을까 싶은데. (웃음)

- 사랑이란 것 자체에 이기적인 속성이 있지 않나. 치사하거나 비굴하거나 폭력적이기도 하고. 이 영화에선 그런 걸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내 버린다. 혹은 보통 다른 영화에서는 '눈빛만으로도 다 통한다'는 식의 설정을 쓰면서 낭만화하는데, <내 사랑 내 곁에>에서는 종우가 눈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됐을 때도 종우의 의도를 지수가 제대로 캐치 못하고 멋대로 해석하는 씬도 나온다. 그러고 보면 당신은 언제나 격정적인 사랑을 다루지만 실은 냉정하다는 느낌이 있다.
내가 냉정하다고? 그렇진 않은데 (웃음). 다만 사랑이란 것이 언제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니까. <너는 내 운명>에서의 커플은 그런 사랑이 가장 어울리는 사랑인 거고, 이 커플은 이 커플의 상황이 있으니 이런 사랑이 어울리는 거고.

- 영화를 보면 언제나 굉장한 격정을 담는데 정작 이를 그려내는 감독의 방식이나 시선은 냉철하고 건조하다는 느낌을 매번 받는다. 인물들의 끓어오르는 에너지와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이 충돌하면서 다시 에너지가 발생하기도 하고.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게 과연 뭘까? 당신은 왜 그런 것 같은가?

- 디테일한 부분에 강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랑찬가들이 생략하는 부분을 굳이 보여줘서인 것 같기도 하고, 글쎄, 나도 당신의 영화에서 왜 그런 느낌을 받는 건지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런 식의 영화들이 취하는 일반적인 영화적 장치나 방법을 쓰지 않고 과정을 솔직하게 그리니까 그런 것 아닐까? 당신처럼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 지나친 미화도 하지 않고 말이다.
더 영화적으로 할까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마지막에 둘이 여행을 간다는 설정을 하거나, 다른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 그러지 않은 것은 그럴 여유도 없을 뿐더러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 외출 정도라면 몰라도... 그것도 이 영화에선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여자가 남자를 끝까지 사랑하다 행복하게 보내주는 것이니까. 보내주는 것이 슬프고 가슴아플 수도 있지만 오히려 보내주는 사람도, 그 손을 통해 가는 사람도 행복할 수도 있다. 마지막 씬에서 보내줄 때 하지원 양에게 울지 말자, 잘 보내주자고 말했다. 종우도 행복하고 보내는 지수도 행복하게,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결국 죽음을 맞고 아파한다는 점에서 비극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통해 마지막을 정리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보내준다는 면에서 행복한 죽음이기도 하다.
어차피 종우는 처음의 소망대로 된 것이고, 난 작위적이라 해도 해피엔딩이 좋다. 누군가 죽었기 때문에 언해피한 건 아니지 않는가. 그게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난 이 영화가 비극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극이라고 한다면 통념을 따르는 사람이겠고, 비극이 아니라고 생각해준다면 나의 의도에 부합해주는 사람이겠지.

- 근데 영화 앞부분에서 서로 연애하는 장면은 조금 닭살이던데.
다들 그렇게 사랑하지 않나? 다만 우리가 들키고 싶지 않고 꺼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보통은 다들 처음에 그렇게 시작하고 절정에 이를 때도 마찬가지다. 다만 나는 그것을 솔직하게 보여줬을 뿐이다. 그걸 닭살스럽다, 유치하다고 하면, 일종의 부끄러운 감정 때문이 아닐까? 정작 연애를 하는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데 남들이 보면 그럴 수 있으니 보여주기가 싫은 거지. 난 그게 솔직한 연애라 생각한다.

- 역시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이 너무 직설적이고 작위적이란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긴 한데, 나는 굉장히 좋은 매치라고 생각했다. 그 매치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극적 장치가 될 수도 있고, 죽음에 대해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길 담을 수도 있으니까. 행복하게 준비하는 죽음을 얘기하고 싶었다. 죽음엔 정말로 순서가 없고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죽는 순간 스스로도 저렇게 행복하게 준비하면 좋겠다 싶더라.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지수를 장례지도사로 설정한 건 일부러 그렇게 했다기보다, 말하자면 '우연히 했지만 결국 운명'이었던 결과다. 실제로 장례지도사를 만났다가 그 분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다. 물론 환자를 곁에서 끝까지 지켰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직업이 장례지도사이고 세상의 편견을 받는 분이었다. 가족 중 한분이 돌아가셨을 때 만났는데 실제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이 분이 영화 마지막의 자막에서 스페셜 땡스투에도 나간 분이다. 우리 영화에서 장례지도 자문도 해주셨다.

- 서양에선 삶과 죽음을 대척적인 것으로 보고 동양에서는 죽음을 삶 안에 있는 것으로 본다고 보통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실제 우리 삶에선 안 그런 것 같다. 영화 속 노인분들의 장면도 그렇고.
그런 행사를 하면 영화에서 나온 대로 정말로 노인들에게 두들겨 맞는 게 현실이다, 아이러닉하긴 하지만. 그래서 관념과 통념이 무서운 거다.

- 사실 당신의 영화들은 절절한 사랑을 다루고 순정을 중요한 키워드지만 네 편의 영화 모두에 죽음이 직접적으로 있거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죽음과 사랑 간의 관계를 동전의 양면으로 보는 건가?
그런 건 아닌데.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왜 그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 글쎄, 지금의 감정이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너는 내 운명>에서 "하루를 살아도 은하랑 살다 죽을래"라고 하는 것도 지금이 더 중요하단 얘기니까. 이번의 사랑도 그렇다. 오히려 지금의 삶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죽음이 드리워져 있을 순 있겠지만. 일부러 계산한 건 아닌데.

- 죽음이 앞에 있기에 더 처절한 사랑을 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네 편 다 그렇다.
그런가? 내가 어디 가겠는가, 박진표인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다.

- 사실 어제 <그놈 목소리>를 다시 봤다.
보는 게 부담스러웠을 거다. 그런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부담스러우면 그건 행복하지 않은 것이니까. 그나마 공소시효가 늘어나서 기쁜 마음은 있다. 물론 내 영화 때문은 아니고, 계속 움직임이 있었던 거지만, 어쨌든 <살인의 추억> 때부터 촉발돼서 끝마무리 되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에선 좋더라. 아마 10년이 늘어나서 25년이 됐지? 물론 소급은 안 됐지만. 공소시효나 그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도 신도 아닌데 누가 누구를 벌할 것이며 기간을 얼마나 어떻게 할 것인가를 어떻게 정하는가.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소위 사회의 통념을 이끄는 사람들, 규칙을 만드는 사람은 사회의 소수이다. 이게 참 말이 안 되는 거라 생각한다. 그 아픔을 피해자가 용서 안 했는데 법이, 나라가 어떻게 용서하는가? 여기서 신까지 간 것이 <밀양>일 것이다. 희생정신, 용서, 이런 게 신의 뜻이기도 하지만... 난 모르겠다, 우린 인간인데, 어떡해야 할지. 그런 답답함이 있다. 난 학문적, 철학적으로 정립이 안 된 인간이라 적확한 단어로 구사할 수 없지만, 상식의 수준에서 말했을 때 그런 식의 답답함이 있다.

- 다시 <내 사랑 내 곁에>로 돌아와서, 주인공은 종우와 지수지만 병실의 다른 환자들의 사연도 비중있게 다룬다.
애초에 구상의 시작이 병실이었다. 그 중 메인을 이끌어가는 사람들로 커플을 설정하고 옆에 나머지 사람들의 사연을 배치한 거지. 그 커플뿐 아니라 다들 나름대로의 사랑과 희생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곁에서 지켜주는 게 얼마나 힘든가, 곁에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 숨쉬고 살아있단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그게 잘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는데, 종우와 지수 위주로 볼 때에는 그 장면들이 감정이입에 방해가 된다고도 하더라. 어떤 것을 기대하고 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텐데 나에겐 병실 사람들이 다 소중한 존재들이다.

- 병실 자체가 죽음과 삶이 사이좋게 공존해있는 공간의 느낌이었다.
병실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면 내가 굳이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죽음과 사랑 외에도 유머가 있지 않나. 웃기려고 집어넣었다기보다 그런 처지나 상황에 놓여있어도 '사는 건 사는 거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밥도 먹고 웃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좌충우돌도 하는 거지. 이런 것들은 그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들한테도 특별한 거다. 보여주기에 급급하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지만, 보여주고 열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도 상당히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 보통의 신파 멜로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이와 사랑에 빠지는 상대들은 아무리 그것이 숭고한 희생이나 사랑으로 포장된다고 해도 다소 피학적이거나 자기연민으로 치닫는 듯한 느낌을 주곤 한다. 그런데 지수는 오히려 남들이 두려워 외면하는 것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고 대면하는 인물로 보였다.
그런 직업을 가졌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봐왔고. 고인들을 자신의 손으로 천국으로 보내드리는 직업을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런 양면을 가진 인물이다.

- 직업이 그런 거랑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런 상황인 건 다른 문제 아닌가?
그러니까 중간에 갈등하는 거지. 지수를 단순한 한 명의 여자로 보자. 그녀의 여자로서의 가장 큰 약점은 뭘까? 손일 것이다. 결국 이것도 편견의 결과물이지만. 그런데 가장 콤플렉스인 손을 가장 예쁘다고 말해주는 남자를 만난 거다. 여자로서의 지수만 보면, 그게 가능할 것 같다. 아무리 얼마 안 있어 죽는 남자일지라도. 그게 무리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천사가 어딨냐"고 반응할 텐데, 그런 사람에겐 이 영화가 판타지가 될 것이고, 나같은 사람에겐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거겠지.

-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오히려 닥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란 생각도 든다. 사실 기존의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교육받은 바로는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먼저 보내줘야 할 것 같고, 영화에서 종우도 그러지 않나. 그런데 만약 내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지금 날 버리면 넌 정말 나쁜 놈이다"라고 협박꺼지 해가면서 매달리고 싶을 것도 같다. 옳은 것과 하고 싶은 건 서로 다른 거니까.
그래서 그게 다 마음속에 있는 거라는 대사도 있다. "가장 먹기 힘든 게 마음이고 가장 버리기 힘든 게 욕심이다."라고 하잖아. 진짜 마음속에 들어가 보면 어떨까? 삶에 정답은 없는 거다. 만약 마음의 끝까지 가보면 어떨까, 과연 한 마음만 있을까?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이 공존할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마음 속 끝까지 들어가서 토해내는 영화. 내공이 쌓이면 나중에 할 수 있지 않을까.

- 당신이 말하는 '끝까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사랑 내 곁에>도 다른 영화들이 미처 가지 않은 단계까진 간 거 같은데. 지수를 대하는 종우의 태도도, 이기적이라곤 하지만 난 그래서 더 좋았다.
옥연 할머니가 남편의 따귀를 때린달지 하는 장면은 비교적 끝까지 간 거긴 하다. 그런 마음에 의문이 들기도 하고 알고 싶기도 하다. 어쨌든 사람의 마음이니까. 우리는 심지어 사람의 사람까지도 좋게 말하면 상식, 아니면 통념이라고 할 만한 것들에 자꾸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너 그렇게 살지 마" "그건 옳은 생각이 아니야" 등등. 그게 맞는 경우도 있고, 아닌데 통념인 경우도 있겠지. 죽을 날을 받아놨다고 해서 프로포즈를 못할까? 저게 말이 되느냐 싶은 거라면, 결국 그런 통념에 맞춘 생각이겠지. 난 그냥 만약 그렇게 프로포즈한다면 어떨까 싶었다.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분명한 이유가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면 이유가 충분히 있다.

- 한쪽이 신체적으로 불행을 당하거나 했을 때 곁을 지키는 것을 두고 보통 '숭고한 희생'이라고 찬사를 바치는데, 그런 찬사가 약간 껄끄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렇지. 영화 속에서건 실제에서건, 그런 사람들이 찬사를 받자고 그런 것도 아닐 텐데. 그게 꼭 자기는 싫지만 순전히 상대방을 위해서만 하는 그런 것만도 아니다. 자기가 싫으면 하겠는가. 자기도 좋으니까 하는 거지. 그것을 판타지라고만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스스로를 가두는 게 아닐까.

- 지나친 찬사가 오히려 그런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 사랑 내 곁에> 같은 순애보가 영화 속에서만 있을 일이라고 하면 정말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게 돼버릴 것 같아서.
맞다. 물론 사람들이 보기에 집착, 욕망, 승부욕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 당신이 앞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그런 집착이나 욕망, 승부욕도 결국 사랑의 한 얼굴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 남녀가 만나서 에로스적인 사랑을 할 때 보면 승부욕도 분명 사랑의 모습이다. 자기만족도 분명히 있고. "너 아프지 마, 너 아프면 내가 아프잖아."란 말도 따지고 보면 자기 마음 괴롭지 말자는 얘기가 되기도 하잖아. 사랑이란 걸 계속해서 해석해보면 결국 자기만족적인 부분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사랑이 변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거고. 그런 사람들한테는 사랑의 대상이 그 누구여도 상관없겠지. 그 사람도 자기가 그렇다는 걸 스스로 잘 모른다. 상대를 사랑하는 건지 사랑을 사랑하는 건지. 아무래도 나중에 "사랑을 사랑하다" 같은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 보다.

- 그런 말씀을 하시니 사랑에 대해 시니컬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 아닌가.
맞다, 나 시니컬하다. 맹목적이지 않고 사랑을 믿지 않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속마음으로 들어가면, 내가 그리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고 만나고 싶고 듣고 싶다. 그런 사랑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마음 속에는 그런 게 있다, 나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거지.

- 사랑을 쉽게 믿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인가.
판타지지 뭐. 만들고 있는 나도 그런데. 사랑을 관통하고 있는 것을 끝까지 가보면 결국 그런 거 아닐까 싶다. 영화를 만들다 보니 계속 연애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더라. 이런 감정은 뭘까, 저런 감정은 뭘까, 여기 연기는 어떻게 할까, 이후 감정은 어떻게 될까 등등. 그러다 보니 마치 잘 아는 듯 얘기할 뿐인데 사실 내가 뭘 알겠는가.

- 영화로 표현할 뿐 사랑에 대한 철학자가 아닌가.
철학은 좀 갖고 싶다. 학문이나 지식, 철학하곤 거리가 먼 사람이라서.

- 이전에 했던 어떤 인터뷰를 보니, <죽어도 좋아>는 영화감독이 되도록 해준 작품이고 <너는 내 운명>은 상업영화 감독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 없는 게 가늠하게 해준 작품, <그놈 목소리>는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게 해준 작품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내 사랑 내 곁에>는 어떤 의미가 되는 영화인가?
아무래도 <그놈 목소리> 개봉 때라 그 영화 위주로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사람들의 투사라고 생각해 완곡하게 한 대답들이지. 거기서 '상업'이란 말을 빼도 되겠다. 그래서 이번 영화가 어떤 의미냐... 영화를 오래 만들고 싶어서 좀 유해지려고 생각했고 만든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이거 참 어려운 질문이네.

- 꾸준히 만드시지 않았나.
이제 고작 네 편이다. 10편은 넘게 만들어야 그런 표현이 어울리는 거지. 우리나라에서 패턴이나 유행이 짧아서 빨리 하고 빨리 없어지고 이러니까, 그러지 않고 오래 하고 싶은 욕망을 담은 영화다.

- 타협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타협 맞다, 타협하고 싶다. 타협해야 대화도 되고 소통도 되는 거지, 타협 않고 나 혼자 달려가면 결국 외면받지 않을까? 영화를 통해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은 건데. 괜찮다, 타협이라 비난해도. 하도 많은 얘길 들어서. 타협은 중요하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ps. 프레시안무비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실림 (2009.9.23)

2009/11/20 14:20 2009/11/20 14:20

Planet B-Boy

전세계 비보이들, 모이시지?

<플래닛 비보이>는 제목 그대로 전세계 비보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처음에는 뉴욕에서의 비보잉의 태동을 간략하게 다룬 뒤, 곧바로 2005년 전세계의 비보잉 팀들을 만난다. 90년대에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비보잉을 2000년대에 여전히 하고 있는 이들, 심지어 탄생지인 미국의 뉴욕, 브루클린보다 더한 열정과 기교를 보여주는 해외팀들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한다. 주로는 매년 독일에서 열리는 비보잉계의 권위적인 대회인 '배틀 오브 더 이어'와 관련, 2005년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다섯 팀(한국의 '갬블러즈'와 '라스트 포 원', 일본의 '이치가케', 프랑스의 '페이스-T', 미국의 '너클헤드 주')의 뒤를 좇는다. 이중 미국의 너클헤드 주 팀도 전통적인 브루클린의 팀이 아닌, 라스베가스 출신의 팀이다. 그렇기에 <플래닛 비보이>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춤'으로 소통되는 전세계 20대 젊은이들의 열정과 에너지다. 그저 대회에 출전한 팀들의 실력이나 기교뿐 아니라, 팀에 속해있는 멤버들의 고민들에까지 카메라를 들이댄다. 구체적인 고민의 내용은 다르지만, 이들이 청춘을 불사르며 춤을 통해 자신의 꿈과 열정을 시험하고 물아지경의 황홀경에 한발짝씩 가까이 간다는 점만은 똑같다. 사막 위에서 춤을 추든,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 앞에서 춤을 추든, 아니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세트)에서 춤을 추든 말이다.

벤슨 리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선 비보이들, 특히 초창기 비보이 문화를 이끌었던 선구자들은 하나같이 비보이는 랩과 상관이 없으며, 특히 폭력적인 갱스터 랩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임을 강조한다. 이들은 술이나 담배도 별로 하지 않으며, 마약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감독 역시 비보이의 예술성을 강조하며, 흔히 제니퍼 빌즈의 아름다운 몸매와 춤으로만 기억되는 <플래시댄스>의 인상적인 길거리 춤 장면을 인용한다. 비보이들에게는 <플래시 댄스>의 주인공이 제이퍼 빌즈가 아니라 바로 그 장면에서 춤을 추던 전설적인 브레이크 댄서, 크레이지 레그스(Crazy Legs)였다. 사실 <플래시댄스>의 그 장면이야말로 80년대를 지배하던 디스코 열풍을 한순간에 브레이크댄스 열풍으로 뒤바꾼 역사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벤슨 리 감독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고자 하는 것은 전세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그 열정과 에너지다. 배틀오브더이어 대회의 장면들은 감각적인 앵글과 빠른 편집으로 박진감을 더해주는가 하면, 이들이 자신들의 고민과 꿈을 카메라에 대고 털어놓는 장면에서는 마치 카메라로 이들을 다독이는 듯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사이에는 간간이 유머가 배어있다.

Flachdance

영화 <플래시댄스>에서 크레이지 레그스(Crazy Legs)가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장면.

하지만 <플래닛 비보이>란 영화 자체가 주는 매력 이상으로, 이 영화가 영화 밖 현실과 만나는 접점 역시 흥미로운 고찰을 제공한다. 모든 하류문화란 처음부터 그것이 의도했던 아니던 주류의 가치와 문화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대체로 하류문화란 그것을 생산하고 즐기는 이들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건, 이런저런 폄하를 비롯해 심한 경우 모욕과 왜곡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비보잉'만 해도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같은 연극이나 숙명여대 가야금 연주단과 함께 한 광고로 알려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전, 소위 가출한 '불량' 청소년들이 새벽의 지하철 역에서 몰입해 추는 괴상한 춤이 '비보잉'에 대해 사람들이 알게 된 첫 이미지였다. 비보잉은 말하자면 신문에서 문화나 예술 면이 아닌, 사회 면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놀이문화나 놀이공간은 거의 없다시피한 채 아이들을 획일적인 교육제도 하에 내몰고 약육강식과 경쟁을 어릴 적부터 체화하게 만드는 사회현실은, 슬쩍 지워지거나 마지못해 동정적 시선과 함께 '구색'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이 추는 춤과 누리는 문화는 손쉽게 '불량'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의 춤과 문화라기보다는 '미국 슬럼가 흑인들의 불량한 몸짓을 흉내내는 것'으로 폄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류문화들의 아이러니한 점은, 그것이 '인정'받기 시작할 때 더 이상 하류문화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모욕과 가치폄하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고유의 예술성을 인정받기 위해 초기 거장들의 노력이 계속되면서, 하류문화는 하나의 예술로, 분야로 고유의 독립성과 가치를 인정받으며 주류에 편입한다. 대신 애초 가졌던 가치전복적 저항성은 탈색되기 마련이다. 사실 그렇기에 '하류'문화이기도 하다.

Planet B-Boy

<플래닛 비보이>의 한 장면. 전해 '배틀오브더이어' 대회의 우승자 자격으로 2005년 출전했던 한국의 갬블러즈(Gamblerz) 팀의 연습장면.

80년대에 뉴욕 브록클린에서 퍼져나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렸고 90년대 국내에 도입된 비보잉은 사실 태생부터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의 문화이긴 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처음 비보잉을 했던 이들 역시 사회와 학교로부터 소외된 청소년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회가 강요하는 주류 이데올로기에서 소외되거나 이를 거부한 청소년들이었다. 그리고 비보잉이 마침내 주류에 편입한 순간은, 한국 팀이 종주국(!)인 미국과 예술의 나라 프랑스, 심지어 집착적인 경쟁의 대상인 일본의 팀마저 제치고 우승을 거머쥔 순간이다. 이제 비보잉은 한국에서 전세계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문화제를 열 정도로 인정받는 예술이 됐다. 하지만 이것은 하류문화가 특히 한국이란 공간에서 주류에 편입하는 과정을 매우 상징적으로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여전히 그들은 좋아하는 춤을 추되 군대와 생계를 걱정하며, 그렇기에 이들의 춤은 예술보다도 '상품'으로만 포지셔닝되는 경향이 짙다. 감독이 영화의 기획 당시부터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었겠지만, 이 영화의 대회(2005년)에서 우승을 거머쥔 '라스트 포 원' 팀이 1년 뒤 숙명여대 가야금 팀과 함께 CF를 촬영했다는 에필로그에서도 확인되는 대목이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자란 이들이 전세계 보편적으로 '비보잉'을 통해 꿈과 도전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담은 <플래닛 비보이>는, 역설적으로 과거 한국에서 하류문화였던 비보잉이 어떻게 주류에 안착하고 마침내 독립된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딜레마와 아이러니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는가를 포착한 흔치 않은 다큐멘터리가 됐다. 영화가 끝을 맺은 그 다음의 이야기야말로, <플래닛 비보이>가 문화상품 소비자인 우리에게든 비보이들에게든 정말로 던져준 숙제가 되는 셈이다.

ps. 10월 20일(2009년) 프레시안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나간 글.

ps2. 미국의 소니에서 이 영화의 판권을 사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로 리메이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감독은 벤슨 리, 하지만 아직 프리-프리덕션 단계라는 듯.

2009/11/15 00:51 2009/11/15 0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