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 Briefcase'에 해당되는 글 36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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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이언맨이 돌아온다! (3) 2009/12/10
  4. 강동원 흥행의 법칙 (4) 2009/12/10
  5. "그런 사랑 믿고싶어 영화만든다" 박진표 감독 인터뷰 (2009. 9. 23) (1)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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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존 키츠(John Keats) 잡담 (4) 2009/10/21
  8. 제인 캠피온 | 브라이트 스타 (2009) 단평 (4) 2009/10/10
  9. 이송희일 감독 인터뷰 (2008. 6. 9) 2009/10/01
  10.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감독 인터뷰 (2008. 5. 9) 2009/10/01
  11. 김응수 감독 인터뷰 (2008. 3. 27) (2) 2009/09/28
  12. 신동일 감독 인터뷰 (2008. 3. 24) (2) 2009/09/24
  13. 초대합니다! 인디포럼 채무변제 파티 - 그렇다면 십시일반 (1) 2009/09/07
  14. 안느 퐁텐 | 코코 샤넬 Coco avant Chanel (2009) (2) 2009/09/04
  15. 스티븐 소머즈 | 지 아이 조 : 전쟁의 서막 G.I.Joe : Rising of Cobra (2009) (4) 200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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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파브리스 뒤 웰즈 | 빈얀 Vinyan (2008) (1) 200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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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 대작들의 치열한 흥행접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가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첫 선을 보였다. <아바타>의 배급사인 20세기폭스는 11일 낮 2시 영등포CGV에서 언론시사를 갖고 전세계적인 관심과 기대를 불러모으고 있는 <아바타>를 드디어 국내에 공개했다. <아바타>는 <터미네이터> 1, 2와 <에일리언 2>, <트루 라이즈>의 흥행작들은 물론, 전세계 흥행 1위작인 <타이타닉>을 연출한 제임스 카메론이 12년만에 선을 보이는 영화라는 점에서 전세계 영화팬들의 기대를 모아왔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만을 위해 신기술을 전격 개발, 도입하여 구현한 영화의 장면 중 20분 가량의 동영상을 일찌감치 공개하면서 전세계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Avatar

드디어 베일을 벗은 <아바타>는 과연 모든 점에서 관객들을 놀래키며 새로운 레벨의 시각적 쾌감과 충격을 안겨줄 만하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자랑했던 이모션 캡처 및 가상 카메라의 위력은 놀라움을 넘어서 경이로운 수준이며, 전반적인 CG 기술 역시 놀랍다. (가상의) 판도라 행성을 수놓고 있는 자연과 기기괴괴한 생명체들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파란 피부에 긴 꼬리와 날카로운 귀를 가진 3미터 장신의 나비 종족 및 이들과 인간의 DNA로 만든 생명체인 아바타(그와 DNA가 맞는 인간이 의식으로 조종한다)의 동작과 표정도 매우 자연스럽게 구현됐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반(샘 워딩턴)의 아바타가 나비종족의 네이티리(조이 살다나)와 함께 거대한 새 이크란을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 숲에서 거대한 생명체에 쫓기는 장면 등도 박진감이 넘치거니와, <에일리언 2>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장면들을 뛰어넘는 전투씬들도 관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다. 2시간 42분의 다소 긴 러닝타임이지만 단 한 순간도 지루해할 틈이 없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벌이는 대규모 전투씬은 그 어떤 이전의 전쟁영화보다도 화려하고 큰 스케일을 자랑한다. 거기에 <타이타닉>에서 다소 실소를 자아냈던 로맨스도 이 영화에서는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러우며 설득력있다. 액션과 모험, 로맨스,그리고 전쟁영화 등 모든 장르가 한 영화 안에 들어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만족스럽다. 한마디로 <아바타>는 속이 꽉 찬 종합선물세트다.

그러나 <아바타>의 놀라움이 단순히 새로운 테크널러지나 화려한 볼거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바타>는 단순히 낯선 행성에서의 모험과 상투적인 두 문명의 충돌 및 전쟁만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인류가 '문명화, 근대화'의 이름으로 침략과 전쟁을 자행했던 이른바 '식민지 근대'의 역사를 혹독하게 비판하며 자연 속에서의 공존을 강조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판도라 행성 도처에 깔려있는 값비싼 언옵타늄이라는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판도라 행성에 기지를 설치하고 채굴을 하는 인간의 탐욕은 곧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남아메리카를 침략해 식민지화했던 근대 유럽의 식민전쟁을 연상시킨다.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어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며 살아가고,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며 죽은 동물들의 영혼을 존중하는 나바족들의 생활풍습은 우리가 흔히 '인디언'이라 불러왔던 아메리칸 네이티브들의 풍습과 닮았다. 쿼리치 대령의 지휘 하에 이들의 정착지가 무자비한 공중폭격을 당하는 장면은 곧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벌어졌던 네이티브 학살 및 착취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지옥의 묵시록>에서의 그 유명한 폭격 장면을 연상시키며 베트남 전의 이미지까지 끌어들인다. (이 장면에서 쿼리치 대령이 사용하는 작전 이름도 '발키리 1-6'이다.) 때문에 영화 중반, 나비 종족들의 거주지가 폭격당하는 장면은 그 엄청난 스케일과 스펙터클 때문에 더욱 참혹하고 경악스러운 학살과 파괴의 공포를 전달한다.

<타이타닉>에서도 제임스 카메론은 거대한 재난영화의 틀 안에 계급사회의 폭력과 휴머니즘을 담으려 시도한 바 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도 그는 일차적으로 눈을 유혹하는 뛰어난 시각효과와 놀라운 상상력 아래에 '기계조차도 배우게 되는' 휴머니즘을 심어놓았다. 하지만 전작들에서 카메론 감독이 시도했던 이러한 '메시지'들은 언제나 화려한 볼거리 앞에서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앙상하게 그 얕음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바타>는 공백의 12년 동안 카메론이 그저 영화의 테크놀로지만 고민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담아야 할 메시지와 철학을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바타>는 감히 '영상 혁명'을 자처하는 데에 토를 달고 싶지 않을 만큼 혁명적인 기술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카메론의 전작의 어떤 영화들도 도달하지 못했던 깊이있는 근대문명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수행한다.

<타이타닉>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제임스 카메론은 "나는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친 바 있다. <아바타>를 내놓은 뒤의 제임스 카메론은 "나는 영화의 신이다"라고 자처해도 그 누구도 감히 반박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될 듯하다. 아마도 <아바타>의 흥행 역시, 단순히 다른 영화들에 비해 얼마나 흥행할 것인가보다 이제 그 자신이 세운 <타이타닉>의 기록을 과연 깰 수 있을 것인가가 더욱 화제가 될 것이다.


ps1. 영화가 끝난 시간이 5시. 지하철 타고 사무실 오면서 지하철 안에서 쓴 기사(새 창으로 열기). 일단은 단평, 제대로 된 리뷰는 다시 쓸 예정. 어쩌면 두어 번 더 볼지도.

ps2.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 후반부의 전투씬들에 열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판도라 행성에서 제이크가 네이티리로부터 나비종족이 문화와 풍습을 익혀나가는 전반부가 훨씬 좋았다. 약육강식이 지배하고 있지만 '순리대로' 살아가며 균형을 지키는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나비족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후반부 전투씬은, 오히려 전투기가 불덩이가 돼서 떨어지며 나무들을 태울 때마다 보는 게 고통스럽더라. 내게는 '신나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씬'이 아니라 저 아름다운 곳이 다 망가지고 파괴되는 상실과 아픔의 전투씬이었다. 사실 그 전, 발키리 1.6 장면에서 아미 나비족의 거주지가 다 파괴돼버리는 바람에... 그 공중폭격씬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는.

ps3. 사실 한번도 제임스 카메론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여전히 리들리 스콧의 1편을 더 좋아하며, <터미네이터> 시리즈도 그렇게까지 열광하며 좋아하진 않았고, <타이타닉>은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바타>를 보고나서 든 생각은, "야 그냥 너 짱먹어라" 뭐 이런 느낌. 그리고 헐리웃에서 로버트 저멕키스와 함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기술오타쿠인 그의 그 집념의 장인정신은 인정해줄 만하다는 거.

2009/12/12 10:52 2009/12/12 10:52

어제(9일)자 보도메일로 받은 <아이언맨 2>의 티저 포스터입니다.

Iron Man 2

아아 저 보석같은 눈! 그 분이 돌아오십니다.

이제 좀 안정됐나 하면 또 마약으로 잡혀 들어가고, 잡혀 들어가고 하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일명 RDJ)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더니만 이렇게 즐거운 눈요기거리를 계속 던져주고 계십니다. 전 이 사람의 출세작인 <채플린>(... 그 전에 출연했던 청춘물들은 잠시 제껴놉시다. 아직 '배우'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보여주진 못했으니까)은 아직까지도 못 봤지만, 안토니오니 감독의 <구름 저 편에>의 한 에피소드에서 이렌느 야곱과 나왔을 때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우연히 처음 본 여자한테 작업을 거는 거리의 소매치기인 그는 너무나 맑은 눈에 순정과 진심을 가득 담고 있으면서 쉬이 상처받을 연약함을 내비치곤 했습니다. 하지만 경력을 좀 쌓아나간다 싶으면 마약, 나와서 좀 정신차리고 다시 경력 쌓나 하면 또 마약, 해서 어느새 관심 밖으로 밀쳐놨었지요. 지금 다시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이런, 전 RDJ와 헤더 그레이엄을 보겠다고 <인 드림즈>나 <투 가이즈 앤 어 걸> 같은 영화도 찾아본 주제에 <숏컷>이나 <사랑의 동반자>, <내츄럴 본 킬러>, <원 나잇 스탠드>, <진저브레드맨> 출연 때의 모습은 기억이 안 나는군요. 그나마 인상깊었다면 <원더보이스> 때 정도. <회색도시>는 케이블서 방영할 때 녹화도 떠놓고는 안보고 테입도 잃어버린 듯해요. 그 안타까움이 극에 달했던 건 아마도 TV시리즈 <앨리 맥빌> 때였을 겁니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시리즈 자체가 불안불안해진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그 시리즈를 구원하는 듯했지만, 웬걸, 또 마약으로 들어가더군요. 이쯤되면 거의 포기하라는 거죠.

그런데 그는 기적적으로 기사회생합니다. 단편영화 주연이나 장편의 조연으로 조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고 <퍼>와 <조디악>, <찰리 바틀렛> 같은 영화에 출연을 하죠. 특히나 <찰리 바틀렛>에는 마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맥스처럼 어린애 주제에 어른처럼 굴려는 찰리 바틀렛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본인은 알콜중독으로 몸을 휘청대는 교장선생님 역을 하면서, 마약으로 휘청대던 젊은날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해 보여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불행했던 시절을 소재로 멋진 유머로 소화해내는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리고 <아이언맨>으로 '스타'의 자리를 찾습니다.

사실 <아이언맨>에서 RDJ의 모습을 제대로 처음 본 젊은 관객들에게야 RDJ가 '새로운 발견'으로 보였겠으나, 저같은 사람들에겐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기적의 한 장면'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나이가 들고 폭풍같은 시기를 지낸 그는 여전히 선하고 순수한 눈에 '그윽한 깊이'를 함께 담고 있었지요. 혹자들은 <아이언맨>이 역시나 팍스아메리카나를 외친다며 고까워했지만, 저는 아이언맨을 연기하던 RDJ의 연기톤이 매우 특수한 '냉소'와 '자조'를 띄고 있던 걸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젊은 날을 스스로 개그의 소재로 삼듯, <아이언맨>에서의 RDJ는 자신의 캐릭터를 스스로 놀려먹는 듯한 뉘앙스를 띄면서도 그 캐릭터를 더없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진부한 팍스아메리카나 히어로에 미묘하게 다른 옷을 입히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트로픽 썬더>에서의 연기는, 아... 정말 말이 필요없지요.

내년 4월, RDJ는 아이언맨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 전에, 올 겨울엔 다소 다혈질에 사고뭉치인 셜록 홈즈를 연기할 예정이고요. 주먹질을 일삼고 자기과시와 허영기가 있으며 실수를 연발하고 왓슨의 뒤수습에 의존하는 셜록 홈즈라니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지만, 그걸 RDJ가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아마 셜록 홈즈를 광적으로 사랑하는 다수의 셜로키안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겠지만, RDJ라면 그런 셜로키안들조차 잠잠하게 만들 멋진 셜록 홈즈를 보여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한때 게이설이 돌았을 정도로 동료 남자배우와의 케미스트리가 좋은 만큼, 주드 로와의 궁합도 기대되는 요소입니다. 어쩐지 너무 일찍 힘이 빠져버린 듯한 가이 리치는 조금 염려스럽지만, 이참에 과거 <록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 시절의 명성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므로 통과.

<아이언 맨 2>는 속편답게 규모나 물량도 커지겠지만, 스칼렛 요한슨이 등장해 귀네스 펠트로와 신경전을 벌인다니 그것도 무척 기대됩니다. 그나저나 미국개봉은 5월 7일이라면서 국내개봉은 4월이라니, 이거 가능한 얘기인가요? 전세계 혹은 한미 동시개봉은 봤어도 이런 대작을 국내에서 먼저 개봉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혹시 이거 얘기 들으신 분?

2009/12/10 15:16 2009/12/10 15:16

전우치

아이고 저 표정 봐라, 우째 저래 이쁘노.

... 무조건 예쁘게 나오면 흥행 성공한다.

... 라고 강동원을 예뻐하는 사람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는 그래도 컬트팬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반면<M>이 그러지 못한 것은 <M>의 강동원의 모습에서 대머리 기가 보였기 때문... 이라고들 하죠. 물론 정말로 그에게서 대머리 기가 보인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짧은 M자 머리가 보기에 살짝 부담스러웠던 거겠죠. 아직 꽃다운 '소년'(잘해봤자 '청년')을 '어른 남자'로 그리는 것에 대한 반발감이라 해야 할까. 이 면에 대해선 이명세 감독님이 조금 "성격이 급하셨다"는 게 저의 해석입니다. 몇 년만 참으셔도 됐을 것을, 얜 아직 군대도 안 갔다왔다고요. 군대 갔다오기 전에 되도록 샤방하고 예쁜 모습을 많이, 라는 게 누나팬들의 공통된 심정이랄까.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난 듯, 어쨌든 공익 가기 전 마지막 작품이 될 <전우치>에선 강동원이 아주 예쁘게 나올 듯하니 다행입니다만. 다음 주 월요일 언론시사를 보고 나면 알게 되겠지요.

강동원이 예뻐서 <늑대의 유혹>도 앉은 자리에서 DVD 코멘터리로 보는 것 포함 두 번 정주행하고 장면 발췌보기로 또 돌려본 저라고는 하지만, 최동훈 감독이 처음에 강동원 데리고 <전우치> 찍겠다고 그랬을 땐 아니 감독님하 뭐 잘못 드셨나요, 라는 게 솔직한 제 심정이었습니다. 모델에서 배우로 전업한 또래들 중에선 그래도 강동원이 의외로 연기자로서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그녀를 믿지 마세요>같은 영화에선 굉장히 잘 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대작의 주연으로서는 아직 검증 안 된 것도 사실이죠. 거기에, 사실 최동훈 감독의 이전 두 작품도 보면 매우 능숙한 배우들에게 기댄 면이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나, 모두 제자리에서 제 몫 알아서 똑소리나게 해먹는 배우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지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박신양도 그랬고, 조승우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백윤식 선생이나 김윤석, 이문식, 천호진, 주진모...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에선 너무 잘하시는 백윤식의 연기를 오히려 살짝 눌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오히려 살짝 삑사리가 났다고 생각할 정도인데.

설상가상, 촬영이 끝난지 한참 지나서도 좀처럼 개봉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기자들 사이에서 영화가 영 안 나왔단 소문이 파다하기 돌았습니다. 물론 CG를 잔뜩 사용하는 영화들은 원래 후반작업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긴 합니다만, 대체로 후반작업이 길어지고 개봉이 늦춰지면 늦춰질수록 '본 촬영분이 나빠서 배급사에서 개봉을 미루며 덧손질을 많이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십상입니다. 이건 많은 영화들의 케이스에서 일정부분 사실이라고 증명되기도 했었으니, 100억이 넘게 들어갔다는 <전우치>에 대해 무성한 뒷말이 많았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제가 기대를 갖게 된 건 지난 번 제작발표회에 다녀와서(새 창으로 열기)입니다. 맛뵈기 동영상 속에서 강동원의 전우치는 매우 이쁠 뿐 아니라 발랄하고 유쾌했고, 임수정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뻤으며, 염정아는 얄팍해서 웃기지만 밉지는 않은, 오히려 귀여운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김윤석의 카리스마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감독이나 배우들의 자신감도 꽤 있어보였습니다. 최동훈 감독의 자신감은 봉준호 감독과는 또 다른 면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게 사실이에요. 봉오빠가 등장할 때 제가 같이 들떴던 게 "드디어 한국에서도 '영화를 갖고 노는' 감독이 나타났다"는 거였는데, 최오빠 역시 그렇습니다. 상영된 메이킹 장면들에서, 물론 힘들고 고민하거나 심지어 험악한 때도 많았겠고 그건 모두 잘라냈겠습니다만, 그래도 영화 만들면서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표정이 많이 보였습니다.  다만 조금 걱정되는 건 CG인데요. 맛뵈기 동영상에선 얼마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얼핏 보이는 CG의 수준이 약간 조잡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본편에서 색보정과 기타 다른 보정을 거치면 달라지겠으나, 예고편에서 드러나는 밤의 추격씬 화질도 다소 조악했고요. 물론 그런 거 보정하는 것도 후반작업 중 일부이고 제작발표 할 때에도 한참 CG 작업중이라고 했었으니, 본편에선 보다 나은 화면을 볼 수 있겠지요.

기사를 쓰기 위해 찾아본 전우치와 서화담의 기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전우치가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정사실인 것 같군요. 생몰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당대 여러 기록에서 전우치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고, 장난기와 유머가 가득한 선행의 기록도 있지만 치기와 악동의 기록도 꽤 됩니다. 남 골려주고 소소하게 복수해주고 상사병 걸린 친구 돕겠다며 정절 지키고 있던 과부 보쌈하는 행태까지... 전우치가 "발라버리겠다"고 자신만만 찾아갔으나 오히려 된통 깨지고 스승으로 모셨다는 서화담이, 우리가 황진이와의 에피소드로 알고 있는 그 화담 서경덕 선생이 맞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지요. '리'는 개무시하고 철저한 주기론을 펼쳤다는 이 양반이 한편으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많았고 토정 이지함의 스승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신비술이나 동양적인 은비학, 도술에 관심이 컸다는 얘기가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랬던 양반이 영화 <전우치>에선 악당으로 나온다니 기분이 좀 묘하기도 하네요.

어쨌거나 <전우치>가, <타짜>때 쩍 벌렸던 제 입을 두 배로 더 쩍 벌리게 해주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최동훈 화이팅!

2009/12/10 14:25 2009/12/10 14:25

장편 데뷔작 <죽어도 좋아>에서부터 <너는 내 운명>과 <그놈 목소리>, 그리고 추석 시즌작으로 이번 주에 개봉하는 <내 사랑 내 곁에>까지, 박진표 감독은 이제껏 모두 다 징한 사랑 영화를 만들어왔다. 실제 유괴, 납치 사건을 다뤘던 <그놈 목소리>조차도 아이에 대한 절절한 부모의 사랑과 상실감을 중심에 놓는 영화다. 신작인 <내 사랑 내 곁에>에 대해 감독 스스로는 "이번에는 좀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하지만, 이 영화 역시 루게릭 병이라는 희귀 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장례지도사의 격정적인 사랑을 다룬다. 신파 멜로라고? 맞다. 하지만 박진표 감독의 영화가 신파 멜로가 아닌 적도 있었던가. 다만 우리가 흔히 비하적 뉘앙스를 덧붙여 말하는 그런 신파 멜로가 아닐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며 매번 눈물을 흘리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우리의 삶과 사랑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소재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가 그런 영화를 해온 이유가 뭘까. 왜 이토록 징글징글한 멜러만 만드는 것일까. <내 사랑 내 곁에>는 그의 이전 작품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내 사랑 내 곁에

왼쪽부터 김명민, 박진표 감독, 하지원. (홍보사로부터 제공받음.)

- 추석 시즌작으로 개봉하게 됐다. 기분이 어떤가.
그러게, 그렇게 됐네. 추석시즌 가족용 영화가 됐다. 등급도 좋게 나왔더라.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많이 두렵고 떨린다.

- 네 번째 영화인데 아직도 두렵고 떨리나.
당연히 그렇다. 갈수록 더하다.

- 전작 세 편이 두 실화 소재에 논쟁적인 영화였다. 이번 영화는 실화가 아닌가?
이번에는 실화 아니다.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관객들에게 본의 아니게 부담을 드렸고, 나 자신도 그간 부담이 컸다. 특히 전작에서는 이른바 '선동'까지 했지 않은가. 특별한 목적으로 강요도 했고. 이번에는 양적인 부담을 줄이고 편안하게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 그래서 정말로 편했는가.
그렇다. 아무래도 그런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경계를 잘 타야 하는 문제인데, 이번에는 더 자유로웠다.

- 왜 하필 루게릭 병인가? 특별한 개인적인 계기라도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병 자체가 워낙 잔인한 병인데도 사람들이 너무나 모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환우나 가족들이 겪는 소외감이 크다. 많이 알려져야 치료약 개발이나 요양소 건립같은 것도 될 텐데. 그게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아런 거다. 병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갔을 때 루게릭 병은 온몸이 근육이 빠져서 점점 마비가 되지만 정신은 또렷해서 자신이 죽어가는 걸 스스로 보게 되는 병이다. 대단히 영화적인 설정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주인공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며 진행이 되니까 앞과 뒤가 강렬하게 대비가 되고, 배우들도 있으니까. 그것을 통해 삶이나 죽음, 사랑에 대해 내가 하고싶었던 얘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처음으로 픽션이어서일까, 이전 영화들과 약간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전형적인 신파멜로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는 듯 보인다.
말랑말랑해졌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 지수가 '완전'이란 말을 많이 쓰던데.
내가 '완전'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완전', '절대' 이런 단어들. 결론을 지을 때 잘 쓰는 말이다.

- <내 사랑 내 곁에>로 오면, 종우(김명민 분)가 먼저 사귀자고 하는 장면부터 인상적이었다. 보통의 신파 멜로에서는 반대이지 않은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는 한사코 거부하고 다른 쪽은 순정적으로 설득하며 헌신하고.
일부러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런 식의 강박관념도 없고. 이야기를 구성하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됐을 뿐이다. 마지막에 보면 종우가 사귀자고 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나. 영화의 형식적인 구성에 대해서 고려했을 뿐이다. 다만 죽음을 다루는 여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을 가진 여자, 그러나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컴플렉스를 가진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남자의 마음은 뭘까, 그걸 생각했다. 이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에 이유가 드러나니까.

- 두 사람은 결과를 알면서도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비극이 예정돼 있다고 하면 일단 피하지 않는가.
그것도 실은 편견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다만 내가 보고싶은 사랑이 그런 사랑이었던 것 같다. 사랑이란 감정은 때론 삶의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괴로움이 되기도 하고, 욕망이, 설레임이 되기도 하다. 다양하다. 내가 보기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단어에 불과한 것 같다. 여러 가지 감정을 포괄해서 써놓은 그냥 두 글자의 단어. 그래서 좀 뜬구름 같고, 속에 들어가 보면 굉장히 많은 감정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다 뭉뚱그려 사랑이라 부르는 것 같고. 그런 걸 그려보고 싶었다. 이 영화에서의 사랑에도 희생이나 지켜주고 싶은 마음, 설레임, 고통, 후회... 다 들어있지 않나. 결국 이 영화는 사랑이 삶이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사랑이란 것엔 해답이 없다.

-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사랑을 특별한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 수많은 감정들이 합쳐져서 그것이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걸 '사랑'이라 부르는 거지. 연애 초기의 설레임도 사랑이지만, 점차 지내면서 갖게 되는 애증이나 헤어지기 직전 갖게 되는 증오도 다 사랑에 속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도 사랑이고, 질투도 사랑이고...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 영화마다 '사랑'의 의미가 변화하고 확장되는 것 같다.
글쎄, 변화는 아닌데. <죽어도 좋아>가 설레임과 열정의 사랑을 담았다면 <너는 내 운명>은 상대를 지켜주고 이해하는 사랑을 담았다. 설레임도 있긴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거지. <그놈 목소리>는 좀 다른 부모와 자식 간에 있는 좀 다른 의미의 큰 사랑이고. <내 사랑 내 곁에>에서는 또 여러 형태의 사랑들이 있다. 그냥 다른 종류의 사랑들인 거지. 확장된다는 말은 맞는 것 같긴 한데.

- <내 사랑 내 곁에>가 <너는 내 운명>과 쌍둥이 같은 영화라는 생각도 들긴 한다. 외견상 비슷하긴 한데 성격은 정반대인 쌍둥이 말이다.
아무래도 순정적인 측면에서 곁에서 끝까지 지켜준다는 점 때문에 그렇겠지. "어떻게 저렇게 끝까지 지킬까, 나라면 과연 할 수 있을까, 너라면 과연 해줄 수 있니?" 마음 속에는 있으나 실행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인 셈이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얘기는 두 영화가 분명 다르다. 본질이나 질과 양이 다르다기보다는 그냥 종류가 다른 슬픔인 거다. 눈물이 나도 다른 눈물이 날 것이라고, 만들면서도 생각을 했다. 본 사람들도 다르단 얘길 하고. 똑같이 울어도 그 눈물과 이 눈물은 차이가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양은 잘 모르겠는걸. <너는 내 운명> 쪽이 더 많지 않을까 싶은데. (웃음)

- 사랑이란 것 자체에 이기적인 속성이 있지 않나. 치사하거나 비굴하거나 폭력적이기도 하고. 이 영화에선 그런 걸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내 버린다. 혹은 보통 다른 영화에서는 '눈빛만으로도 다 통한다'는 식의 설정을 쓰면서 낭만화하는데, <내 사랑 내 곁에>에서는 종우가 눈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됐을 때도 종우의 의도를 지수가 제대로 캐치 못하고 멋대로 해석하는 씬도 나온다. 그러고 보면 당신은 언제나 격정적인 사랑을 다루지만 실은 냉정하다는 느낌이 있다.
내가 냉정하다고? 그렇진 않은데 (웃음). 다만 사랑이란 것이 언제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니까. <너는 내 운명>에서의 커플은 그런 사랑이 가장 어울리는 사랑인 거고, 이 커플은 이 커플의 상황이 있으니 이런 사랑이 어울리는 거고.

- 영화를 보면 언제나 굉장한 격정을 담는데 정작 이를 그려내는 감독의 방식이나 시선은 냉철하고 건조하다는 느낌을 매번 받는다. 인물들의 끓어오르는 에너지와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이 충돌하면서 다시 에너지가 발생하기도 하고.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게 과연 뭘까? 당신은 왜 그런 것 같은가?

- 디테일한 부분에 강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랑찬가들이 생략하는 부분을 굳이 보여줘서인 것 같기도 하고, 글쎄, 나도 당신의 영화에서 왜 그런 느낌을 받는 건지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런 식의 영화들이 취하는 일반적인 영화적 장치나 방법을 쓰지 않고 과정을 솔직하게 그리니까 그런 것 아닐까? 당신처럼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 지나친 미화도 하지 않고 말이다.
더 영화적으로 할까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마지막에 둘이 여행을 간다는 설정을 하거나, 다른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 그러지 않은 것은 그럴 여유도 없을 뿐더러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 외출 정도라면 몰라도... 그것도 이 영화에선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여자가 남자를 끝까지 사랑하다 행복하게 보내주는 것이니까. 보내주는 것이 슬프고 가슴아플 수도 있지만 오히려 보내주는 사람도, 그 손을 통해 가는 사람도 행복할 수도 있다. 마지막 씬에서 보내줄 때 하지원 양에게 울지 말자, 잘 보내주자고 말했다. 종우도 행복하고 보내는 지수도 행복하게,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결국 죽음을 맞고 아파한다는 점에서 비극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통해 마지막을 정리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보내준다는 면에서 행복한 죽음이기도 하다.
어차피 종우는 처음의 소망대로 된 것이고, 난 작위적이라 해도 해피엔딩이 좋다. 누군가 죽었기 때문에 언해피한 건 아니지 않는가. 그게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난 이 영화가 비극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극이라고 한다면 통념을 따르는 사람이겠고, 비극이 아니라고 생각해준다면 나의 의도에 부합해주는 사람이겠지.

- 근데 영화 앞부분에서 서로 연애하는 장면은 조금 닭살이던데.
다들 그렇게 사랑하지 않나? 다만 우리가 들키고 싶지 않고 꺼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보통은 다들 처음에 그렇게 시작하고 절정에 이를 때도 마찬가지다. 다만 나는 그것을 솔직하게 보여줬을 뿐이다. 그걸 닭살스럽다, 유치하다고 하면, 일종의 부끄러운 감정 때문이 아닐까? 정작 연애를 하는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데 남들이 보면 그럴 수 있으니 보여주기가 싫은 거지. 난 그게 솔직한 연애라 생각한다.

- 역시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이 너무 직설적이고 작위적이란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긴 한데, 나는 굉장히 좋은 매치라고 생각했다. 그 매치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극적 장치가 될 수도 있고, 죽음에 대해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길 담을 수도 있으니까. 행복하게 준비하는 죽음을 얘기하고 싶었다. 죽음엔 정말로 순서가 없고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죽는 순간 스스로도 저렇게 행복하게 준비하면 좋겠다 싶더라.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지수를 장례지도사로 설정한 건 일부러 그렇게 했다기보다, 말하자면 '우연히 했지만 결국 운명'이었던 결과다. 실제로 장례지도사를 만났다가 그 분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다. 물론 환자를 곁에서 끝까지 지켰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직업이 장례지도사이고 세상의 편견을 받는 분이었다. 가족 중 한분이 돌아가셨을 때 만났는데 실제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이 분이 영화 마지막의 자막에서 스페셜 땡스투에도 나간 분이다. 우리 영화에서 장례지도 자문도 해주셨다.

- 서양에선 삶과 죽음을 대척적인 것으로 보고 동양에서는 죽음을 삶 안에 있는 것으로 본다고 보통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실제 우리 삶에선 안 그런 것 같다. 영화 속 노인분들의 장면도 그렇고.
그런 행사를 하면 영화에서 나온 대로 정말로 노인들에게 두들겨 맞는 게 현실이다, 아이러닉하긴 하지만. 그래서 관념과 통념이 무서운 거다.

- 사실 당신의 영화들은 절절한 사랑을 다루고 순정을 중요한 키워드지만 네 편의 영화 모두에 죽음이 직접적으로 있거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죽음과 사랑 간의 관계를 동전의 양면으로 보는 건가?
그런 건 아닌데.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왜 그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 글쎄, 지금의 감정이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너는 내 운명>에서 "하루를 살아도 은하랑 살다 죽을래"라고 하는 것도 지금이 더 중요하단 얘기니까. 이번의 사랑도 그렇다. 오히려 지금의 삶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죽음이 드리워져 있을 순 있겠지만. 일부러 계산한 건 아닌데.

- 죽음이 앞에 있기에 더 처절한 사랑을 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네 편 다 그렇다.
그런가? 내가 어디 가겠는가, 박진표인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다.

- 사실 어제 <그놈 목소리>를 다시 봤다.
보는 게 부담스러웠을 거다. 그런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부담스러우면 그건 행복하지 않은 것이니까. 그나마 공소시효가 늘어나서 기쁜 마음은 있다. 물론 내 영화 때문은 아니고, 계속 움직임이 있었던 거지만, 어쨌든 <살인의 추억> 때부터 촉발돼서 끝마무리 되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에선 좋더라. 아마 10년이 늘어나서 25년이 됐지? 물론 소급은 안 됐지만. 공소시효나 그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도 신도 아닌데 누가 누구를 벌할 것이며 기간을 얼마나 어떻게 할 것인가를 어떻게 정하는가.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소위 사회의 통념을 이끄는 사람들, 규칙을 만드는 사람은 사회의 소수이다. 이게 참 말이 안 되는 거라 생각한다. 그 아픔을 피해자가 용서 안 했는데 법이, 나라가 어떻게 용서하는가? 여기서 신까지 간 것이 <밀양>일 것이다. 희생정신, 용서, 이런 게 신의 뜻이기도 하지만... 난 모르겠다, 우린 인간인데, 어떡해야 할지. 그런 답답함이 있다. 난 학문적, 철학적으로 정립이 안 된 인간이라 적확한 단어로 구사할 수 없지만, 상식의 수준에서 말했을 때 그런 식의 답답함이 있다.

- 다시 <내 사랑 내 곁에>로 돌아와서, 주인공은 종우와 지수지만 병실의 다른 환자들의 사연도 비중있게 다룬다.
애초에 구상의 시작이 병실이었다. 그 중 메인을 이끌어가는 사람들로 커플을 설정하고 옆에 나머지 사람들의 사연을 배치한 거지. 그 커플뿐 아니라 다들 나름대로의 사랑과 희생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곁에서 지켜주는 게 얼마나 힘든가, 곁에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 숨쉬고 살아있단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그게 잘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는데, 종우와 지수 위주로 볼 때에는 그 장면들이 감정이입에 방해가 된다고도 하더라. 어떤 것을 기대하고 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텐데 나에겐 병실 사람들이 다 소중한 존재들이다.

- 병실 자체가 죽음과 삶이 사이좋게 공존해있는 공간의 느낌이었다.
병실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면 내가 굳이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죽음과 사랑 외에도 유머가 있지 않나. 웃기려고 집어넣었다기보다 그런 처지나 상황에 놓여있어도 '사는 건 사는 거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밥도 먹고 웃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좌충우돌도 하는 거지. 이런 것들은 그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들한테도 특별한 거다. 보여주기에 급급하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지만, 보여주고 열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도 상당히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 보통의 신파 멜로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이와 사랑에 빠지는 상대들은 아무리 그것이 숭고한 희생이나 사랑으로 포장된다고 해도 다소 피학적이거나 자기연민으로 치닫는 듯한 느낌을 주곤 한다. 그런데 지수는 오히려 남들이 두려워 외면하는 것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고 대면하는 인물로 보였다.
그런 직업을 가졌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봐왔고. 고인들을 자신의 손으로 천국으로 보내드리는 직업을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런 양면을 가진 인물이다.

- 직업이 그런 거랑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런 상황인 건 다른 문제 아닌가?
그러니까 중간에 갈등하는 거지. 지수를 단순한 한 명의 여자로 보자. 그녀의 여자로서의 가장 큰 약점은 뭘까? 손일 것이다. 결국 이것도 편견의 결과물이지만. 그런데 가장 콤플렉스인 손을 가장 예쁘다고 말해주는 남자를 만난 거다. 여자로서의 지수만 보면, 그게 가능할 것 같다. 아무리 얼마 안 있어 죽는 남자일지라도. 그게 무리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천사가 어딨냐"고 반응할 텐데, 그런 사람에겐 이 영화가 판타지가 될 것이고, 나같은 사람에겐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거겠지.

-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오히려 닥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란 생각도 든다. 사실 기존의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교육받은 바로는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먼저 보내줘야 할 것 같고, 영화에서 종우도 그러지 않나. 그런데 만약 내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지금 날 버리면 넌 정말 나쁜 놈이다"라고 협박꺼지 해가면서 매달리고 싶을 것도 같다. 옳은 것과 하고 싶은 건 서로 다른 거니까.
그래서 그게 다 마음속에 있는 거라는 대사도 있다. "가장 먹기 힘든 게 마음이고 가장 버리기 힘든 게 욕심이다."라고 하잖아. 진짜 마음속에 들어가 보면 어떨까? 삶에 정답은 없는 거다. 만약 마음의 끝까지 가보면 어떨까, 과연 한 마음만 있을까?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이 공존할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마음 속 끝까지 들어가서 토해내는 영화. 내공이 쌓이면 나중에 할 수 있지 않을까.

- 당신이 말하는 '끝까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사랑 내 곁에>도 다른 영화들이 미처 가지 않은 단계까진 간 거 같은데. 지수를 대하는 종우의 태도도, 이기적이라곤 하지만 난 그래서 더 좋았다.
옥연 할머니가 남편의 따귀를 때린달지 하는 장면은 비교적 끝까지 간 거긴 하다. 그런 마음에 의문이 들기도 하고 알고 싶기도 하다. 어쨌든 사람의 마음이니까. 우리는 심지어 사람의 사람까지도 좋게 말하면 상식, 아니면 통념이라고 할 만한 것들에 자꾸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너 그렇게 살지 마" "그건 옳은 생각이 아니야" 등등. 그게 맞는 경우도 있고, 아닌데 통념인 경우도 있겠지. 죽을 날을 받아놨다고 해서 프로포즈를 못할까? 저게 말이 되느냐 싶은 거라면, 결국 그런 통념에 맞춘 생각이겠지. 난 그냥 만약 그렇게 프로포즈한다면 어떨까 싶었다.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분명한 이유가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면 이유가 충분히 있다.

- 한쪽이 신체적으로 불행을 당하거나 했을 때 곁을 지키는 것을 두고 보통 '숭고한 희생'이라고 찬사를 바치는데, 그런 찬사가 약간 껄끄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렇지. 영화 속에서건 실제에서건, 그런 사람들이 찬사를 받자고 그런 것도 아닐 텐데. 그게 꼭 자기는 싫지만 순전히 상대방을 위해서만 하는 그런 것만도 아니다. 자기가 싫으면 하겠는가. 자기도 좋으니까 하는 거지. 그것을 판타지라고만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스스로를 가두는 게 아닐까.

- 지나친 찬사가 오히려 그런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 사랑 내 곁에> 같은 순애보가 영화 속에서만 있을 일이라고 하면 정말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게 돼버릴 것 같아서.
맞다. 물론 사람들이 보기에 집착, 욕망, 승부욕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 당신이 앞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그런 집착이나 욕망, 승부욕도 결국 사랑의 한 얼굴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 남녀가 만나서 에로스적인 사랑을 할 때 보면 승부욕도 분명 사랑의 모습이다. 자기만족도 분명히 있고. "너 아프지 마, 너 아프면 내가 아프잖아."란 말도 따지고 보면 자기 마음 괴롭지 말자는 얘기가 되기도 하잖아. 사랑이란 걸 계속해서 해석해보면 결국 자기만족적인 부분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사랑이 변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거고. 그런 사람들한테는 사랑의 대상이 그 누구여도 상관없겠지. 그 사람도 자기가 그렇다는 걸 스스로 잘 모른다. 상대를 사랑하는 건지 사랑을 사랑하는 건지. 아무래도 나중에 "사랑을 사랑하다" 같은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 보다.

- 그런 말씀을 하시니 사랑에 대해 시니컬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 아닌가.
맞다, 나 시니컬하다. 맹목적이지 않고 사랑을 믿지 않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속마음으로 들어가면, 내가 그리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고 만나고 싶고 듣고 싶다. 그런 사랑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마음 속에는 그런 게 있다, 나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거지.

- 사랑을 쉽게 믿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인가.
판타지지 뭐. 만들고 있는 나도 그런데. 사랑을 관통하고 있는 것을 끝까지 가보면 결국 그런 거 아닐까 싶다. 영화를 만들다 보니 계속 연애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더라. 이런 감정은 뭘까, 저런 감정은 뭘까, 여기 연기는 어떻게 할까, 이후 감정은 어떻게 될까 등등. 그러다 보니 마치 잘 아는 듯 얘기할 뿐인데 사실 내가 뭘 알겠는가.

- 영화로 표현할 뿐 사랑에 대한 철학자가 아닌가.
철학은 좀 갖고 싶다. 학문이나 지식, 철학하곤 거리가 먼 사람이라서.

- 이전에 했던 어떤 인터뷰를 보니, <죽어도 좋아>는 영화감독이 되도록 해준 작품이고 <너는 내 운명>은 상업영화 감독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 없는 게 가늠하게 해준 작품, <그놈 목소리>는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게 해준 작품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내 사랑 내 곁에>는 어떤 의미가 되는 영화인가?
아무래도 <그놈 목소리> 개봉 때라 그 영화 위주로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사람들의 투사라고 생각해 완곡하게 한 대답들이지. 거기서 '상업'이란 말을 빼도 되겠다. 그래서 이번 영화가 어떤 의미냐... 영화를 오래 만들고 싶어서 좀 유해지려고 생각했고 만든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이거 참 어려운 질문이네.

- 꾸준히 만드시지 않았나.
이제 고작 네 편이다. 10편은 넘게 만들어야 그런 표현이 어울리는 거지. 우리나라에서 패턴이나 유행이 짧아서 빨리 하고 빨리 없어지고 이러니까, 그러지 않고 오래 하고 싶은 욕망을 담은 영화다.

- 타협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타협 맞다, 타협하고 싶다. 타협해야 대화도 되고 소통도 되는 거지, 타협 않고 나 혼자 달려가면 결국 외면받지 않을까? 영화를 통해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은 건데. 괜찮다, 타협이라 비난해도. 하도 많은 얘길 들어서. 타협은 중요하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ps. 프레시안무비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실림 (2009.9.23)

2009/11/20 14:20 2009/11/20 14:20

Planet B-Boy

전세계 비보이들, 모이시지?

<플래닛 비보이>는 제목 그대로 전세계 비보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처음에는 뉴욕에서의 비보잉의 태동을 간략하게 다룬 뒤, 곧바로 2005년 전세계의 비보잉 팀들을 만난다. 90년대에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비보잉을 2000년대에 여전히 하고 있는 이들, 심지어 탄생지인 미국의 뉴욕, 브루클린보다 더한 열정과 기교를 보여주는 해외팀들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한다. 주로는 매년 독일에서 열리는 비보잉계의 권위적인 대회인 '배틀 오브 더 이어'와 관련, 2005년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다섯 팀(한국의 '갬블러즈'와 '라스트 포 원', 일본의 '이치가케', 프랑스의 '페이스-T', 미국의 '너클헤드 주')의 뒤를 좇는다. 이중 미국의 너클헤드 주 팀도 전통적인 브루클린의 팀이 아닌, 라스베가스 출신의 팀이다. 그렇기에 <플래닛 비보이>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춤'으로 소통되는 전세계 20대 젊은이들의 열정과 에너지다. 그저 대회에 출전한 팀들의 실력이나 기교뿐 아니라, 팀에 속해있는 멤버들의 고민들에까지 카메라를 들이댄다. 구체적인 고민의 내용은 다르지만, 이들이 청춘을 불사르며 춤을 통해 자신의 꿈과 열정을 시험하고 물아지경의 황홀경에 한발짝씩 가까이 간다는 점만은 똑같다. 사막 위에서 춤을 추든,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 앞에서 춤을 추든, 아니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세트)에서 춤을 추든 말이다.

벤슨 리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선 비보이들, 특히 초창기 비보이 문화를 이끌었던 선구자들은 하나같이 비보이는 랩과 상관이 없으며, 특히 폭력적인 갱스터 랩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임을 강조한다. 이들은 술이나 담배도 별로 하지 않으며, 마약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감독 역시 비보이의 예술성을 강조하며, 흔히 제니퍼 빌즈의 아름다운 몸매와 춤으로만 기억되는 <플래시댄스>의 인상적인 길거리 춤 장면을 인용한다. 비보이들에게는 <플래시 댄스>의 주인공이 제이퍼 빌즈가 아니라 바로 그 장면에서 춤을 추던 전설적인 브레이크 댄서, 크레이지 레그스(Crazy Legs)였다. 사실 <플래시댄스>의 그 장면이야말로 80년대를 지배하던 디스코 열풍을 한순간에 브레이크댄스 열풍으로 뒤바꾼 역사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벤슨 리 감독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고자 하는 것은 전세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그 열정과 에너지다. 배틀오브더이어 대회의 장면들은 감각적인 앵글과 빠른 편집으로 박진감을 더해주는가 하면, 이들이 자신들의 고민과 꿈을 카메라에 대고 털어놓는 장면에서는 마치 카메라로 이들을 다독이는 듯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사이에는 간간이 유머가 배어있다.

Flachdance

영화 <플래시댄스>에서 크레이지 레그스(Crazy Legs)가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장면.

하지만 <플래닛 비보이>란 영화 자체가 주는 매력 이상으로, 이 영화가 영화 밖 현실과 만나는 접점 역시 흥미로운 고찰을 제공한다. 모든 하류문화란 처음부터 그것이 의도했던 아니던 주류의 가치와 문화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대체로 하류문화란 그것을 생산하고 즐기는 이들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건, 이런저런 폄하를 비롯해 심한 경우 모욕과 왜곡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비보잉'만 해도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같은 연극이나 숙명여대 가야금 연주단과 함께 한 광고로 알려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전, 소위 가출한 '불량' 청소년들이 새벽의 지하철 역에서 몰입해 추는 괴상한 춤이 '비보잉'에 대해 사람들이 알게 된 첫 이미지였다. 비보잉은 말하자면 신문에서 문화나 예술 면이 아닌, 사회 면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놀이문화나 놀이공간은 거의 없다시피한 채 아이들을 획일적인 교육제도 하에 내몰고 약육강식과 경쟁을 어릴 적부터 체화하게 만드는 사회현실은, 슬쩍 지워지거나 마지못해 동정적 시선과 함께 '구색'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이 추는 춤과 누리는 문화는 손쉽게 '불량'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의 춤과 문화라기보다는 '미국 슬럼가 흑인들의 불량한 몸짓을 흉내내는 것'으로 폄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류문화들의 아이러니한 점은, 그것이 '인정'받기 시작할 때 더 이상 하류문화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모욕과 가치폄하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고유의 예술성을 인정받기 위해 초기 거장들의 노력이 계속되면서, 하류문화는 하나의 예술로, 분야로 고유의 독립성과 가치를 인정받으며 주류에 편입한다. 대신 애초 가졌던 가치전복적 저항성은 탈색되기 마련이다. 사실 그렇기에 '하류'문화이기도 하다.

Planet B-Boy

<플래닛 비보이>의 한 장면. 전해 '배틀오브더이어' 대회의 우승자 자격으로 2005년 출전했던 한국의 갬블러즈(Gamblerz) 팀의 연습장면.

80년대에 뉴욕 브록클린에서 퍼져나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렸고 90년대 국내에 도입된 비보잉은 사실 태생부터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의 문화이긴 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처음 비보잉을 했던 이들 역시 사회와 학교로부터 소외된 청소년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회가 강요하는 주류 이데올로기에서 소외되거나 이를 거부한 청소년들이었다. 그리고 비보잉이 마침내 주류에 편입한 순간은, 한국 팀이 종주국(!)인 미국과 예술의 나라 프랑스, 심지어 집착적인 경쟁의 대상인 일본의 팀마저 제치고 우승을 거머쥔 순간이다. 이제 비보잉은 한국에서 전세계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문화제를 열 정도로 인정받는 예술이 됐다. 하지만 이것은 하류문화가 특히 한국이란 공간에서 주류에 편입하는 과정을 매우 상징적으로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여전히 그들은 좋아하는 춤을 추되 군대와 생계를 걱정하며, 그렇기에 이들의 춤은 예술보다도 '상품'으로만 포지셔닝되는 경향이 짙다. 감독이 영화의 기획 당시부터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었겠지만, 이 영화의 대회(2005년)에서 우승을 거머쥔 '라스트 포 원' 팀이 1년 뒤 숙명여대 가야금 팀과 함께 CF를 촬영했다는 에필로그에서도 확인되는 대목이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자란 이들이 전세계 보편적으로 '비보잉'을 통해 꿈과 도전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담은 <플래닛 비보이>는, 역설적으로 과거 한국에서 하류문화였던 비보잉이 어떻게 주류에 안착하고 마침내 독립된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딜레마와 아이러니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는가를 포착한 흔치 않은 다큐멘터리가 됐다. 영화가 끝을 맺은 그 다음의 이야기야말로, <플래닛 비보이>가 문화상품 소비자인 우리에게든 비보이들에게든 정말로 던져준 숙제가 되는 셈이다.

ps. 10월 20일(2009년) 프레시안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나간 글.

ps2. 미국의 소니에서 이 영화의 판권을 사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로 리메이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감독은 벤슨 리, 하지만 아직 프리-프리덕션 단계라는 듯.

2009/11/15 00:51 2009/11/15 00:51

부산에 초청된 제인 캠피온의 신작 <브라이트 스타>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실화를 토대로 한다. 25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그는 생전에 딱히 그 위대한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지는 못했다. 어릴 적 천애고아가 되고 생계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어찌어찌 의대를 졸업해 의사 자격증을 3년만에 땄다는데, 그가 의학엔 별 관심이 없고 시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었던 것을 아는 가까운 친구들, 특히 시인 / 시인 지망생 친구들은 그가 3년만에 의사자격증을 딴 것에 대단한 질투와 허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키츠는 패니 브론과의 절절한 연애로도 유명한데, 패니가 말하자면, [오만과 편견]으로 쳤을 때 미스터 다아시 같은 남자 하나 낚으려고 사교계에서 좀 나대는, 엘리자베스 베넷 정도 가문의 여자였던 모양이다. 리즈 베넷이야 지성미와 유머가 풍부한 여인이었지만 패니는 또 그런 타입은 아니었던 듯, 영화 <브라이트 스타>에서도 키츠를 후원하는 그의 작가 친구 찰스 브라운은 패니를 너무나 못마땅해 해서, 그녀를 "남자나 꼬시려고 사교계에서 꼬리 흔들고 다니는 무식하고 허영심만 센 여자" 취급을 한다. 하지만 패니를 그리는 제인 캠피온의 시선은 그닥 삐뚜름하거나 시니컬하지 않다. 영화의 초반, 키츠를 처음 사교파티에서 만난 뒤 패니가 키츠의 시를 그 앞에서 읊으면서 작업 한번 들어간 뒤, 그녀는 "시를 공부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며 다시 키츠를 찾아간다. 물론 이 역시 삐뚜름하게 보자면 '작업의 2차 작전'으로 보일 수 있고 제인 캠피온 역시 그렇게 보일 수 있음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찰스에게 패니의 얄팍함이 폭로당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제인 캠피온은 패니의 이런 에피소드를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다른 방향에서 패니의 진정성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시켜 버린다. 영화가 끝나고 기억되는 것도 그녀가 찰스에게 봉변을 당하며 그 얄팍한 허영심이 폭로당한 것보다는, 키츠에게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갔을 때 그 반짝이던 눈빛, 그 눈 안에 담겼던 동경과 열망이다. 나처럼 시에 문외한인 사람에겐 그 장면이 더욱 크게 남는다. 나 역시 영화가 끝난 뒤 "키츠의 시를 알고 싶다, 이해하고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들었으니까. 하여간 <브라이트 스타>에 대한 리뷰는 이미 여기에 쓴 바 있고.

Bright Star

존 키츠, 혹은 존 키츠로 분장한 벤 위쇼의 고혹적인 눈. (<브라이트 스타>)

며칠 전 모 극장을 갔다가 바로 옆 서점에서 민음사에서 출간한 김우창 번역의 키츠의 시선집 [가을에 부쳐]를 샀다. 이후 웹 검색을 해보니 그 외에 키츠에 대한 다른 책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오래 전에 대학출판부 같은 데에서 나왔다가 절판, 절판, 품절.) 이 기회에 영국 낭만파 시인들에 대해 동냥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낭만주의 문학'같은 키워드로 돌려봤지만 역시 헛수고다. 사실 또 다른 방식의 치열한 시대정신이었던 낭만주의가 국내에서는 현실도피용으로 포장되고, 그에 따라 리얼리즘이나 자연주의를 신봉한 이들에겐 또 다시 부당하게 폄하되는, 그런 식의 분위기가 없었던 것 같지 않다. 결국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형식의 외피와 감정적 나르시시즘에만 집착하고 과장한 것 정도로 오해된 분위기가 있달까. 아니 근데 센티멘털리즘과 로맨티시즘이 동의어는 아니잖아, 그게 문학이든, 회화든. 영화쪽으로만 보자면, 근래 들어 국내에서도 조금씩 낭만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엔 최근 허진호가 내놓은 <호우시절>이야말로, 제대로 된 낭만주의의 본격적인 부활의 바람의 서두에 놓아야 할 것같다. "허진호가 변했다"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흥미롭기는 하지만.

외서 쪽을 돌려보니,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문고판으로 그의 주요 시와 편지 일부를 편집해놓은 책이 보인다. 랜덤하우스에서는 그의 시 전체를 모아놓은 책도 내놓고 있는 상태다. 오디오북으로는, 새뮤얼 웨스트와 마이클 쉰이 낭송한 CD도 보이고. 마이클 쉰이, 그러니까 <더 퀸>의 토니 블레어와 <프로스트 vs. 닉슨>의 프로스트로 나왔던 배우인 그 마이클 쉰이 맞나 싶어 찾아보니... 허허, 맞네! 새뮤얼 웨스트는 좀 낯선 이름이라 찾아봤더니 <반 헬싱>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출연했다는데 필모그래피가 어째 다 단역 및 조연. 그... 근데, 잘 생겼다? 허걱, <하워즈 엔드>에 조연으로 출연해 BAFTA상 남우조연 부문 후보로 올랐었어? 뭐, 옥스포드 출신? 런던드라마평론가협회 세익스피어상 수상... 엄훠 나 이거 사야 하는 거 맞는 거? 뭣보다 잘생긴 것에 침 주르릅... 아니, 잘생기기도 잘생겼지만 딱 목소리 멋있게 생겼단 말이야! 예컨대 케네스 브래너의 목소리로 세익스피어 낭독을 듣는다고 쳐봐, 그게 그냥 목소리인가? 주르르 몸이 녹아내려 황홀경에 빠뜨릴 천상의 음악이지!

<브라이트 스타>의 말미에도, 그러니까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 영화에서 키츠로 출연한 벤 위쇼가 나지막하게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를 낭송한다. 정확히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 나오기 시작해, 마지막 카피라이트 표시와 제작사 로고가 끝날 때 낭송도 끝이 난다. 벤 위쇼의 나직하면서도 팬시하고 발음 좋은 목소리와 키츠의 시가 어우러져, 비록 눈은 자막을 뒤쫓느라 정신없었긴 해도, 도저히 그냥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게 나만 그런 건 아닌 게, 대체로 아무리 영화제라고 해도 엔딩타이틀 올라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대면서 일어날 듯 말 듯하며 짐을 챙기지만 이 영화의 자막 땐 아무도 그러지 않더라. 만약 영화가 국내에서도 정식으로 개봉한다면, 그 시의 낭송을 꼭 즐기시기 바란다.



[부록] John Keats, 'Bright Star, Would I were Steadfast As Thou Art


ps1. 온라인에서 이런 페이지도 발견. 참고하시라.

ps2. 듣자하니 벤 위쇼는 영화 찍기 전엔 키츠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잘 몰랐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인 캠피온의 벤 위쇼 칭찬은 정말... 으하하하! 처음 만나자마자 느낀 것이 "세상에, 당신 정말 아름다운 피조물이잖아!"였다니, 난 캠피온 언니의 취향이 듬직한 돌쇠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출처는 여기(새 창으로 열기).

2009/10/21 02:17 2009/10/21 02:17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던 제인 캠피온의 신작 <브라이트 스타>는 놀랍게도 실화다. 영국의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실제 사랑을 극화한 이 영화는 다소 실망스러웠던 <인더컷>을 제외하면 1999년작 <홀리 스모크> 이후 별다른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던 제인 캠피온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역작이다. (그나마 그 <홀리 스모크>도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지만.)

25살에 폐병으로 요절한 존 키츠는 죽기 몇 년 전 바느질과 패션에 두각을 나타냈던 패니 브론과 만나고, 그녀가 바로 옆집으로 이사온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3년간 계속된 이 사랑은 존 키츠의 시의 세계를 더욱 깊고 심원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키츠는 시인으로서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호된 악평에 시달렸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읜 뒤 만성적인 가난 때문에 의사 자격증을 따야 했던 그는, 시에 전념하기 위해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찰스 브라운의 재정적 도움에 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었다. 찰스 브라운은 패니 브론을 "남자나 꼬시려 들며 시는 전혀 모른다"며 경멸했고, 심지어 그녀와의 사랑이 키츠의 시 세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겨 이들의 사랑을 번번이 훼방놓았다. 특히 키츠가 폐병에 걸린 이후에는 더욱, 그녀와의 사랑이 키츠의 병세를 오히려 악화시킬 것이라 여겨 번번이 그녀와의 사랑을 방해한다.

키츠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찰스 브라운의 반대뿐 아니라, 가진 것 하나 없었던 키츠에 대한 주변의 우려와 반대 역시 이들의 사랑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낭만적인 사랑이란 극렬한 반대와 억압 앞에서 오히려 더욱 찬란하게 불을 태우는 법이다. 가난 때문에 머뭇거리던 키츠도, 남자들의 구애가 장난이었던 브론도 점차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브라이트 스타>가 내뿜는 아름다움은 일견 상호 모순적으로 보일 듯한 요소들이 서로 상충하면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있다. 이들은 서로를 끝까지 '미스터 키츠'와 '미스 브론'으로 칭할 만큼 당시 격식과 예법을 충실히 따른다. 브론의 동생들이 언제나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한 만큼 단둘이 은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힘들었다. 서로 시구를 주고받으며, 가고 오는 데에만 며칠이 걸리는 편지로 서로의 연정을 확인하고 주고받는 만큼 지금 현대인의 눈에는 지나칠 정도로 억압적이고 답답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과 손을 맞대고 상대가 창밖에서 거니는 모습을 보며, 상대가 내는 자그마한 기척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이런 와중에 상대가 보낸 편지가 너무 짧다고 자해 소동을 벌이거나, "나비가 되어 함께 날아다녔으면 좋겠다"는 연인의 편지에 온 방안을 나비로 채우는 천진한 열정이 영화의 온도를 그 어느 다른 멜로영화보다도 뜨겁게 올린다. 이들의 '억압 속에 꽃피우는 열정'을, 제인 캠피오는 매우 치밀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내며 보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이 영화를 먼저 접한 해외의 평들이 한결같이 "순결한 금욕주의 속에 빛나는 열정적 에로스"를 지적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측면에서다. 노골적으로 야한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지만, 서로 깍지를 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거나, 시구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선 에너제틱한 정서적 흥분과 에로스가 흘러넘친다. 이런 '은밀한 에로스'는 엔딩 타이틀이 흐르는 동안에도 계속된다. 엔딩 타이틀의 마지막 카피라잇 로고가 나올 때까지 벤 위쇼가 나지막히 낭송해주는 키츠의 시를 듣고 (자막으로) 보노라면, 시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사람조차 곧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존 키츠의 시집을 사고싶을 정도다. 혹은 영화 초반에 시를 이해하고 배우고 싶다며 키츠를 찾아가 시 수업을 듣는 패니 브론의 장면이 새삼 환기되며 그 마음이, 그 심정이 새삼 다시 절절하게 다가오거나.

<향수>로 주목받은 벤 위쇼는 섬약한 외모 속에서 격정을 뿜어내는 존 키츠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게 연기하고 있고, <엘리자베스타운>, <골든에이지>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던 애비 코니쉬가 패니 브론 역을 맡아 사랑에 들떠 폴짝거리는 소녀와 현명하고 듬직한 반려자를 섬세하게 연기해 낸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리암 니슨의 아들로 출연했던 꼬맹이 토마스 생스터가 패니 브론의 남동생 사무엘로 출연해 어느 새 훌쩍 자란 모습을 보여준다. <내 책상 위의 천사>와 <쉘로우 그레이브>에서 주연을 맡았던 케리 폭스도 출연해 패니 브론의 어머니 역으로 듬직하게 패니의 어깨를 감싸준다. 영화제 중 상영이 아직 두 번(12일 및 15일) 남아있다.

ps. 프레시안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린 글

ps2.  급하게 쓰느라 이 모양... 영화 보자마자 한 시간만에 휘갈겨썼으니. 그러니 어쩌면 이 ps2.야말로 진짜인데요.

'격정적인 사랑' 하니까 뭔가 대단히 규격화된 어른의 사랑 같은데다 자고 일어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어쩐지 영화에 대해 제대로 쓴 리뷰 같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이들의 사랑은 딱 사춘기 "소년, 소녀를 만나다"로 요약될 수 있거든요. 귀여워요. 너무 귀여워요. 사실 둘은 한번도 섹스를 안 하거든요. 자고싶다 어쩐다 하는 장면도 여자가 "널 위해 뭐든 할 거야"라고 은근한 암시를 건네자 남자가 "나도 양심이 있지"라며 정식으로 결혼한 뒤를 기약할 정도. 자해소동이니 뭐니 하는 것도 그러니까 딱 10대 중학생 소녀가 울며불며 난리치다가 팔에 1센티짜리 상처내는 것쯤으로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하긴 이들 나이가 20대 초중반이었단 말이죠. 제인 캠피온이 참 대단한 것도, 지금은 '대시인'으로 추앙받는 키츠의 이름에 너무 짓눌리지 않고 그 사람과 패니의 그 '소년, 소녀스러움'을 제대로 살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만큼 생동감이 넘쳐요. 오죽하면 이들의 철없고 귀여운 모습에 몇몇 장면에선 웃음이 막 터집니다. 그러면서 격식을 차린 옷과 대화, 동네에 퍼질 소문을 의식해야 하며 주변의 감시(!)를 받는 연애같지 않은 연애를 하면서 자기들끼리는 너무나 심각하고 진정이 넘치기 때문에 이상한 에로스가 넘치는 거지요. 뭐 뻔하고 통속적인 내용이라며 별로 안 좋아할 분들이 더 많아보이긴 하지만, 영문학에 조예가 깊거나 그쪽 빠거나 혹은 빠도 못 되고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동경하는 저같은 사람들에겐 우왕ㅋ굳ㅋ@.@하며 눈물 뚝뚝 흘릴 영화 되겠습니다. 영화가 개봉되면 필히 다시 제대로 된 리뷰를 써야 할 영화.

ps3. 주인공 역을 맡은 애비 코니쉬는 "등발 좋고 덜 날카로운 니콜 키드먼"으로 보이는 면이 있어요. 까만 머리긴 해도 얼굴이 많이 바뀐 지금이 아닌 예전의 니콜 키드먼의 얼굴과 닮은 부분이 있어요. 다만 니콜 키드먼보다는 좀더 무던하고 둥글둥글하달까.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어쩐지 이런저런 면에서 <여인의 초상>의 예술적 실패 지점을 만회하려는 야심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ps4. 벤 위쇼와 애비 코니쉬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이들을 감시(!)하는 애비 코니쉬의 어린 여동생의 모습을 보자니 <피아노>에서 엄마 뒤를 쫄쫄 쫓아다니며 엄마의 사랑을 감시(?)하던 안나 파퀸이 살짝 겹치기도. 하지만 이 소녀는 안나 파귄보다는 어쩐지 살짝 통통한 니콜 키드먼 아역으로 보여요. 얼굴은 안 닮았지만 무엇보다 창백한 피부에 빨간 곱슬머리 때문에.

ps5. 근데 제인 캠피온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대체로 나이가 좀 있는 듬직한 스타일이었는데. (뭐 돌쇠 스타일도 가끔.) 그들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벤 위쇼는 제인 캠피온 영화치고는 약간 낯선 팬시함을 영화에 불어넣어 주고 있기도 해요. 이 영화에선 그게 매우 성공적이기도. 그러고보니 벤 위쇼는 살짝 고전적이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퇴폐미가 항상 있었던 듯.

2009/10/10 07:47 2009/10/10 07:47

이송희일 감독과 처음 알게 된 것은 감독과 기자, 혹은 감독과 영화팬으로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후 감독과 영화팬의 관계가 되었고, 다시 감독과 기자 사이가 되었다. 요즘은 감독과 기자 외에도 인디포럼 상임작가회의에 함께 속해있는 관계, 이기도 하다. (그는 인디포럼 상임작가회의 의장이다.) 이 인터뷰는 지금만큼 친해지기 전, 서로 예의를 지키며 조금 어려워하던 그런 때인데, <디워> 파동이 나고, 그가 말도 안 되는 왜곡 발췌 기사로 어마어마한 오해와 오독 사이에서 악명(?)을 떨치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촛불이 한참 시작되던 딱 그 때였다. 딱히 새 작품이 공개된 시점이 아니라 하더라도 <디워> 파동 때부터 그를 꼭 인터뷰하고 싶었다. 벌써 시간이 훌쩍 흘러, 당시 프리 프로덕션이 한창이었던 그의 두 번째 영화 <탈주>가 곧 열리는 부산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대체로 많은 감독들이 서퍼모어 콤플렉스를 겪는다. 하지만 훌륭한 예외도 많았다. 최동훈 감독의 경우 <범죄의 재구성>이 지나치게 평가절상되었다고 생각했지만 <타짜>에 대해서는 입을 떡 벌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탈주>도 그런 작품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근데 말이다. 이 기사를 쓸 때만 해도 내가 그 다음 해 인디포럼의 프로그래머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냔 말이다. 흐흐.) 이 기사는 처음 프레시안의 이 페이지(새 창으로 열기)에 게재되었다.



지난 6월 5일 폐막한 인디포럼의 상임작가의장이기도 한 이송희일 감독은 장편 데뷔작 <후회하지 않아>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인감독이다. 불과 1억 원의 예산으로 찍은 영화 <후회하지 않아>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독립영화로서는 기적이라 할 무려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바 있다. 한국영화 위기설이 더 이상 '설'이 아니라 현실이 돼버린지 오래인 지금, 첫 영화에 이어 신작인 <탈주> 역시 저예산으로 준비하고 있는 이송희일 감독은 과연 독립영화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탈주>의 제작상황은 어떻게 돼가고 있을까? 촬영준비로 여념이 없는 이송희일 감독을 <탈주> 제작사무실 한 켠에서 만났다.

- <탈주>의 예산 및 진행상황은 어떤가?

영화진흥위원회 HD지원작에 뽑힌 영화라 4억이 확보됐고 여기에 2, 3억 가량이 더 필요하다. 이 부분 투자가 안 돼서 제작사인 청년필름에서도 고민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경우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일단 찍고 그간 촬영한 분량을 일종의 데모 테입처럼 만들어 중간이라도 투자를 받는 방법은 어떨까 궁리하고 있다. 전체 순제작비를 6억에서 7억 가량 잡고 있는 셈인데, HD 지원작은 마케팅비를 포함해 10억을 넘기면 지원받은 4억을 고스란히 토해내야 하기 때문에 마케팅비까지 10억 안으로 끊어야 한다. 영화는 6월 9일 크랭크인해서 약 30회차에 걸쳐 촬영할 예정인데(편집자 주 - 인터뷰 이후 크랭크인 날짜가 한 주 연기되었다.), 기술 스탭들이 다들 미쳤다고 난리다. 서울에서 첫 촬영을 하고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찍은 후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가, 마지막 장면은 다시 지방에서 찍고 싶다. 워낙 돌아다니는 곳이 많기 때문에 스케줄이 좀 빡빡하게 될 듯하다. 마지막 장면은 촬영 맨 마지막에 지방에서 찍었으면 하는 욕심을 내고 있고, 총이라던가 하는 것도 욕심을 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게 저예산 규모에 맞는 영화인가 싶기도 하지만.

- <용서받지 못한 자>의 경우 국방부의 지원을 받지 않았나?

국방부가 원래 좀 예민해서, 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굴었다고 들었다. 우리 경우 나중에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방부의 지원에 대해서는 '원천적 포기'의 입장이다. 탈영병이 무장 탈영하는 얘기는 사실 세지 않나.

이송희일 감독

직접 찍은 (발)사진이라능.

- 처음부터 끝까지 쫓는 자와 도망치는 자의 '달리는' 이야기라고 들었다.

한 마디로 '멈추면 죽는다'는 거다. 마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 풍경과 비슷하다. 엊그제 집회를 갔는데 안 잡히려고 계속 도망 다니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 '멈추면 잡힙니다!'라고 소리치는 걸 들었다. 마치 우리 영화와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예전부터 탈영병 이야기를 꼭 해보고 싶었다. 예전에 혼자 습작해본 소설도 탈영병에 관한 얘기였고. 다만 머릿속에 그렸던 건 좀 올드해서 현대적으로 각색하는 데에 힘이 들었다. 예전에 단편이나 <후회하지 않아>의 작업을 할 때는 혼자 콘티도 없이 현장에서 배우와 스탭들의 의견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연출부들과 함께 각색했다. 처음 시나리오엔 주인공들이 은행도 털고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과연 그게 맞나 생각이 들어서 결국 뺐다. 주인공 세 명이 탈영하게 된 계기는 모두 실제 사건에서 따온 것이다. 이 영화도 그렇고 다음 영화들도, 장르가 호러가 됐든 아니든 당분간은 쫓기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찍을 것 같다. 세상이 별로 안 좋으니까. 사르트르 시절에 활약했던 보리스 비앙이라는 가수가 부른 '탈영병'이라는 샹송이 있는데 가사가 너무 좋다. 군대 가지 말자고, 죄없는 사람들에게 총을 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원래 가사는 '쫓으려면 얼마든지 쫓으세요, 내겐 총이 있으니까'라는 내용이었지만 가사가 검열되면서 '쫓으려면 쫓으세요, 제겐 총이 없습니다'로 바뀌었다. 프랑스에서는 우리의 '임을 위한 행진곡'만큼이나 유명한 노래다. 그 노래의 정서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 로드무비라 할 수도 있겠다. 쫓는 사냥꾼들의 모습도 넣지 않을 거라고 밝혔는데.

처음부터 쫓는 이의 장면을 넣지 말자고 했던 건 사실 돈이 없어서다. 탈영병의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캐릭터가 부딪히는 가운데 나오는 스릴을 그리려는 것도 아니고. 사실 나는 장르영화를 매우 좋아하고 이 영화 역시 그런 장르문법을 어느 정도 차용했다. 그러나 한국영화엔 그런 게 별로 없다보니 투자를 위해 시나리오를 받아본 사람들이 많이 당황하더라. 내겐 너무나 친숙한 장르인데 사람들은 많이 낯설어하곤 한다. 군대 내부는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처음부터 탈영병들이 하는 영화는 처음이니까. 굳이 비슷한 영화를 꼽자면 세 사람이 계속 도망친다는 점에서 <세상 밖으로> 정도? 단편들의 경우 군대 내 폭력에 대한 내용을 다룬 영화들이나 탈영병에 대한 이야기도 점점 등장하는 것 같다. 다만 아직 장르화되지 않고 장르의 옷을 입은 예가 별로 없어서 그런가 싶긴 하다.

- 헐리웃 영화들에는 원래 그런 장르의 영화가 많지 않나?

원래 <병사의 시>라는 휴가병에 관한 영화를 보다가 내가 만들고 싶었던 탈영병 영화를 여기에 섞자는 생각이 들었고, 여기에 장르의 옷을 입히는 것이 관건인데, 결국 많이 참조한 게 갱스터 로브무비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나 니콜레스 레이 감독의 영화들 말이다. 전적으로 장르영화에 붙지는 않아서 애매하긴 하지만... 한국적인 내용도 들어가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군대를 막 비판하고 그러는 영화는 아니다.

-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영화를 준비하다가 엎었다.

1억짜리 영화를 찍던 사람이 갑자기 50억짜리 영화를 찍는 게 스스로 맞지 않은 옷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또 하나는 한국영화판이 요 몇 년 안에 바닥을 칠 것 같은데 이런 듣보잡 감독에게 누가 50억이나 투자를 할 것이며, 내 성향이 원래 사회비판적이라 내용도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액션영화로 포장한들 누가 투자를 하겠는가 싶더라.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려본 거지. 50억을 갖고 하려던 영화 역시 실은 다소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었다. 그 소재는 언젠가 꼭 한번 영화화하고 싶다.

- 하지만 많이들 단편 몇 편 찍다가 바로 웬만한 예산이 들어간 장편들을 찍지 않나.

신인감독을 소비하는 현상 아닐까. 2000년대 초반쯤 한창 거품이 일 때 영상원이나 영화 아카데미 출신의 감독들을 '젊은 천재 감독'이라 포장하며 데려와 눈먼 돈을 끌어들여 영화들을 찍어댔지만 대부분 결과가 안 좋았다. 트레이닝도 제대로 안 돼 있고 탄탄한 기획 마인드로 접근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결과가 안 좋았던 감독들 대부분이 사라졌다. 일종의 소모품으로 쓰고 버려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신인감독 역시 모두 경쟁을 해야 하는 입장이고, 모두가 나홍진 감독처럼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 독립영화라는 게 개념이 좀 애매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독립영화는 무엇인가?

독립영화란 굳이 얘기하면 1920년대 지하영화들부터 개념이 시작되고, 한국에서 인디영화는 유럽보다는 미국의 개념을 직수입한 면이 크다. 6, 70년대 미국 스튜디오 바깥에서 찍은 영화들 말이다. 인디포럼 행사의 일환으로 독립영화워크숍을 하는데 거기에 가서 '독립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할 때 한 얘기기도 하지만, 고전적인 의미에서 한국 독립영화는 이제 사전적인 의미만 남아있는, 화석화된 개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래 독립영화의 사전적 의미가 자본과 검열로부터의 독립인데,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추격자>가 90년대에 나왔다면 검열 대상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카트린 브레이야 감독의 영화 같은 경우 제한상영가 받긴 하지만 일부의 현상이고. 오히려 이런 검열은 영화보다 방송이 더 심하다. 내 영화는 공중파에서 튼 적이 없다. 공중파에서 내 영화가 상영되면 사회가 그만큼 좋아진 것 아니냐, 하는 좀 건방진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젠 표현수위 때문에 제한을 받는다 아니다는 좀 무의미해진 측면이 있다. 오히려 독립영화들이 훨씬 개인적이면서 멜랑콜리한 감성을 가진 경우가 많다. 반면 상업영화들은 장르 안에서 표현 수위 등을 고민하고 있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면도 그렇다. 요즘은 거의 국가기관에서 지원받아서 영화를 만든다. 이건 물론 비영리를 목적으로 영화를 공공재로 인식하면서 국가에서 출자하는 돈이긴 하지만, 예컨대 1억, 혹은 4억짜리 영화들을 그런 돈으로 만들었다고 했을 때, 과연 무엇이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인가의 문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영진위로부터 돈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극장에서 개봉하면 그 순간부터 '상품'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 아닌가. 엄격하게 기준을 들이대는 순간 모든 게 애매해진다. 그렇다면 독립영화의 정의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건 시스템과 관련한 것이다. 스탭을 어떻게 구성할 것이고 배우 역시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해 감독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과연 얼마만큼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물론 이 역시 애매한 문제이긴 하지만, 단순히 돈의 문제로만 얘기하기도 힘든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신동일 감독의 영화를 보자. 그가 만든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LJ 필름이 제작사긴 하지만 분명 독립영화의 마인드로 만든 영화가 아닌가. 그래서 이번에 인디포럼에서 신동일 감독의 영화를 상영하고, 신동일 감독 역시 자신을 독립영화 감독으로 포지셔닝하며 이번 인디포럼의 트레일러도 제작했다.

- 배급사가 메이저인 프라임인데도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2년 이상 개봉 못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일까.

그렇다. 애매하니까. 사실 청년필름도 상업영화사가 아닌가. <후회하지 않아>도 케이블 판권을 먼저 판 돈으로 제작했고 나중에야 영진위 독립영화 지원책의 일환으로 마케팅비를 2천만원 받았다. 사실 <후회하지 않아> 때문에 독립영화 지원책이 만들어진 면이 있다. 그러니까 1억짜리 영화도 흥행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며 생색내기용으로 만든 제도인데, 이게 살 깎아먹는 역효과가 날 거란 예상이 점점 들어맞고 있다. 1억으로 영화를 찍으려면 스탭 인건비도 그렇게 한계가 너무 명확한데, '1억짜리도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횡행한다. KT&G에서도 1억원 지원책을 내놓고 있긴 하지만, 지금 대부분의 독립영화들은 영진위의 지원금으로 영화를 찍는다. 그래서 독립영화 감독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영진위 영화사의 직원들'이라는 농담이 돌기도 한다. 그렇기에 인디영화란 제작 시스템이란 측면에서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전권을 부여받은 소수의 스타 흥행감독들의 영화도 독립영화로 불러야 하는가?

감독의 자율권 그 자체가 아니라, 감독의 자율권이 작동될 수 있는 전체 제작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저예산 영화도 스탭들은 계약을 다 한다. 계약을 먼저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많은 것이 갈리기 때문이다. 이건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말이 되려면 스탭 노동에 대해 프랑스의 예술노조처럼 다른 방식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예컨대 프랑스 예술노조에 소속된 스탭들은 5개월간 촬영을 했다고 하면 나머지 기간 동안은 최저생계비에 해당하는 실업수당을 받는다.

저예산영화에서의 계약 역시 상업영화에서의 계약을 재현한다. 그렇다면 독립영화는 무엇이 다른가? 독립영화의 전제는 아무래도 독립영화를 한다는 '공동체'의 측면일 것이다. 예컨대 어떤 영화들은 분명 저예산에 게릴라 방식으로 찍었음에도 왜 독립영화라 칭하지 않는가? 왜 누구는 독립영화 감독이라는 레테르를 붙이게 되는가? 이건 감독이 독립영화를 호출하는 방식, 특히 자신을 포지셔닝하면서 독립영화를 지향하느냐, 독립영화 감독의 공동체에 접속하느냐에 따라 배제의 작동 원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배제의 논리보다는 긍정과 포용의 논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다소 선언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독립영화란, 독립영화 공동체 안에서 지향하는 바를 얼마나 자신이 지향하는가이며, 장기적으로는 제작 시스템과 관련된 문제다. 미국도 선댄스영화제가 있기 때문에 저예산 영화는 다 독립영화라 지칭하는 그런 시스템이 존재한다. 저예산 영화가 곧 독립영화라는 공식이 만들어진 게 결정적으로 선댄스 때문이 아닌가. 유럽은 인디영화란 표현 잘 안 쓴다. 오히려 예술영화냐 아니냐로 구분하다. 전세계마다 다 다른 듯하고, 한국에서도 기자들은 물론 내부에서도 이론이 분분하다. 단편영화만 찍으면 구분이 오히려 쉽지만, 장편 3억짜리를 찍고 나면 스스로도 혼란을 느낀다. 그런 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는 한독협이 요즘은 국가의 돈을 지원받아 집행하는 관료 집단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좀 있기도 하고.

- 장편 독립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의 숫자가 적다.

장편영화를 만드는 인디감독 중 내가 제일 나이 많다. 내겐 롤 모델이 없다. 모두들 상업영화 씬으로 달려가거나 그나마도 결과가 안 좋아 사라져 버렸다. 홍기선 감독님의 경우 <선택> 이후 별다른 작품이 없고, <선택>도 애매한 경우다. 사실 독립영화 진영에서 장편 극영화는 이제 2, 3년 정도밖에 안 됐다. 이것도 디지털이 보급되면서 제작비가 줄어서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 맹아 수준이고, 관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영화의 숫자도 한정돼 있다. 하지만 인디영화의 시장 자체는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상영공간의 숫자가 좀더 확보가 됐으면 좋겠지만.

-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스탭들의 인건비라는 측면은 영화노조와 부딪히는 면이 꽤 있을 것 같다.

사실 독립영화에서 스탭들을 그렇게 쓰는 게 또 다른 착취, 또 다른 도제 시스템인 측면이 분명 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 그 자체와 영화의 공공성 부분을 사유하자는 것이다. 영화 스탭들과 관련해 진보신당에서 굉장히 좋은 공약들을 내놓았는데, 이런 것들을 '귀찮게 괴롭히면서' 연대할 마음도 있다. 사실 청년필름에서 저예산영화를 제작하는 방식도 답이 하나밖에 없다. 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예산을 미리 공개하는 대신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다.

- 올해 영화노조에서는 제협 측에 제작비 10억 미만의 저예산 영화에 대해 흥행 개런티 지불을 교섭안 중 하나로 요구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건 충무로의 자충수라고밖에 할 수 없다. 노조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가장 첫 단계인 셈인데, 작년 제협과 교섭안 타결 때 저예산 영화의 부분을 그냥 제끼고 갔다. 그런데 요즘 충무로의 일반 평균 예산이 8억이라고 하더라. 충무로 일반 영화의 예산이 8억이 되면서 작년엔 생략했던 부분에 대해 그런 식의 요구를 하게 된 거겠지. 영화노조와도 잘 연대했으면 좋겠지만, 아직까지는 서로 입장이 겹치는 부분이 적다.

- 헬리캠 후원단을 모집하고 있던데, 그건 뭔가.

탈영병에 관한 영화인 만큼 헬리캠을 사용할 계획인데, 이게 1회 대여비가 상당히 비싸서 후원단을 모집하고 있다. 영화라는 게 한번 보면 끝나는 7,000원짜리 상품이라기보다는, 관객들이 놀이의 일환으로 함께 참여하는 무언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편집자 주 - 이송희일 감독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임시로 만들어놓은 영화 소개 페이지(http://gondola21.com/run/escape2.htm(새 창으로 열기))에서 헬리캠 후원단의 일원이 될 수 있다.

2009/10/01 22:22 2009/10/01 22:22

2008년 전주영화제가 '디지털 삼인삼색'을 위해 고른 감독은 우리에게는 낯선 영화대륙, 아프리카 출신의 감독들이다. 혹자들은 아프리카에서도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소하지만, 아프리카 역시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거장들을 두루 배출해냈다. 2008년의 전주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은 바로 그 아프리카가 배출한 감독들 중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부르키나 파소), 마하마트 살레-하룬(차드), 나세르 하미르(이집트) 감독을 선정했다. 이중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감독은 아프리카가 배출한 거장 중 거장이지만 국내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이름이다. 감독은 다른 감독들보다 더 늦게 한국에 도착해 핸드프리팅과 기자회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나는 자료들을 찾다가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감독이 우리가 몰랐을 뿐 전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은 감독인 걸 알고 깜짝 놀랐고, 기자회견에서 빠진 만큼 따로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위해 준비를 하면서, 심지어 그의 영화는 국내에서 정식 개봉을 한 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한 번 놀라기도 했다. (백두대간이 씨네큐브를 처음 개관하면서 선택한 개관작이 바로 우에드라오고 감독의 <야바>였다. 이 영화는 당시에 비디오로도 정식 출시된 바 있다.) 마침 내가 당시 전주영화제에서 번역한 영화 역시 우에드라오고 감독의 <키니와 아담스>였다.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던 셈이다. 인터뷰를 하고 나서 나는 그 감독이 풍기는 아우라에 한동안 뻑갔(...)고, 아프리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그가 이끌고 있는 아프리카 최대의 영화제, 페스파코를 꼭 방문하고 싶다. 그리고 아프리카 영화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고 싶다. 이 인터뷰는 원래 프레시안의 이 페이지(새 창으로 열기)에 실렸다.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감독인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감독은 우리에겐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베니스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는가 하면 미국의 9.11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 <2001년 9월 11일>에도 참여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쌓고 있는 거장이다. 부르키나 파소 태생인 우에드라오고 감독은 1989년작 <야바>로 칸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이듬해 <틸라이>로 같은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는 <삼바 트라오레(Samba Traore)>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부르키나 파소에서 개최되는 아프리카 최대의 영화제로서 '제3세계의 칸영화제'라 불리는 페스파코(FESPACO : Festival of Pan-African Cinema in Ouagadougou)를 이끌고 있다.

올해 전주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2008 - 귀향>에 <생일>로 참가한 우에드라오고 감독은 동 섹션에서 상영될 자신의 장편영화로 97년작인 <키니와 아담스>를 선택했으며, 이 영화는 2일날 상영된 바 있다. 비행 일정 때문에 기자회견과 핸드프린팅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한 그를 프레시안이 따로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디지털 삼인삼색>에 참여한 만큼 우에드라오고 감독과의 대화는 '디지털'에 관한 것으로 시작됐고 그는 아주 열정적으로 질문에 답했다. 우에드라오고 감독은 폐쇄 직전의 극장 5곳의 운영권을 부르키나 파소 정부로부터 얻은 뒤 이 극장에서 상영할 영화들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은 물론 후배들과 주로 디지털로 작업을 했기 때문에 디지털 작업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이런 경험 때문에 디지털에 대한 견해가 매우 뚜렷했다.

- 필름 작업과 비교했을 때 디지털 매체가 가지는 장단점은 무엇인가?

필름과 디지털은 종류가 아주 다른 매체이기 때문에 비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차에 비유하자면 메르세데스와 벤츠는 기능과 가격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지 않은가. 다만 디지털이 필름에 비해 여전히 공간의 깊이감을 표현해내지 못한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기술적으로 아직 해결이 안 된 것 같다. 그렇기에 디지털이 가진 고유 특성에 대해 주로 얘기해 보자면, 디지털은 매우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장치이다. 또한 필름 작업이 10배에서 20배의 제작비가 들고 조명과 배경 등 꾸며야 할 것이 많은 반면 디지털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필름과 디지털은 광학적인 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단순 비교를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디지털이란 매체가 가진 고유의 속성을 어떻게 더 발전시킬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디지털이 필름에 비해 공간적 깊이감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디지털 작업을 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사실 카메라나 필름 혹은 디지털도 모두 유럽의 발명품이 아닌가? 아프리카처럼 햇빛이 강한 곳에서는 하얀 것은 모든 것을 반사하고 검은 것은 모든 것을 흡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디지털로 영화를 찍으면 이렇게 강한 햇빛 하에서는 배경색이 거의 하얗게 뭉개져버리기 때문에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아침에 해가 뜨기 전 혹은 햇빛이 강해지기 전 오전에만 찍을 수밖에 없으며, 햇빛을 차단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해야만 한다. 아프리카에서 아주 좋은 디지털 영화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그러나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이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게 사실이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올 때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결국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되지 않았는가?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오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모든 기술적 혁신에는 언제나 제약과 반발,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다.

디지털 매체가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질이 아니라 시간의 지속성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건 필름보다 훨씬 자유롭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진 민주적인 매체라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이야기, 남의 눈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할 수 있는 기회를 디지털이 조금 더 쉽게 열어줬다. 앞으로 5년에서 10년 후면 기술이 더욱 발전해서 지금의 제약도 줄어들 것이다.

결국 최종적인 건 같다. 어떤 매체를 사용하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과 같은 인간의 감정이 아닌가. 물론 이것은 이미지를 통해 구현되지만. 디지털이든 필름이든 영화는 이미지다. 다만 도구가 달라지면 제약도 달라지며 작업 도중 얻게 되는 즐거움도 달라진다."

- 영화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국가들도 있는 아프리카에서 디지털이 영화의 발전과 보급에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은 시장의 논리를 고려해야 한다. 디지털로 많은 작업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작을 해도 배급이 안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이지리아와 같은 큰 나라를 제외하면 아프리카에는 작은 규모의 국가들이 매우 많은데 이런 나라들은 인구수도 1,000만에서 1,500만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 중 8, 90%에 해당하는 인구가 극장이 하나도 없는 외지나 시골에서 산다. 디지털로 쉽게 찍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 극장이 없어 배급이 안 되는 것이 더 문제다. 영화는 예술적 산물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산업적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시아는 시장이 있기 때문에 계속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우리는 8,90%의 인구가 영화를 볼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다.

거기에, 세계적으로 봐도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계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그리 열려있는 사회가 아니다. 과연 한국에서 아프리카 영화가 얼마나 상영되는가? 이것이 오히려 더욱 본질적인 문제이다. 디지털로 아무리 영화를 찍어도 시장이 없고 극장이 없기 때문에 결국 TV에서 방영할 수밖에 없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 <야바>가 한국에서 개봉 및 비디오 출시를 거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Idrissa Ouedraogo

별도의 핸드프린팅 장에서. (JIFF제공)

- 당신이 이끌고 있는 아프리카 최대 영화제인 페스파코에 대해 설명해 달라.

부르키나 파소의 수도인 와가두구에서 열리는 경쟁영화제로, 아프리카 사람들이 만든 영화들만 상영한다. 여기에는 디아스포라(해외에 흩어져있는 아프리카인들)들의 영화도 포함된다. 물론 관객들은 해외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영화제로 규모가 아주 크다. 전주영화제는 페스파코에 비하면 '아가'에 불과하다. 영화제 기간 전체가 축제다.

-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아프리카에서 페스파코의 역할 혹은 취지와 의미를 설명해 달라.

7일에서 10일 정도의 단기적인 축제라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극장이 없는 곳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오히려 텔레비전이 영화를 만나는 데에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페스파코는 원래 처음에는 영화제 형태가 아니었고, 흩어져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그들이 각자 겪었던 제작과 배급에 관한 문제들을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단순한 만남에서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도 시장이나 배급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영화를 만들기 힘들지만 감독의 수도 계속 증가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영화제라는 축제 형태가 된 것이다.

처음에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영화가 아프리카의 문제를 아프리카 사람의 눈으로 다룰 수 있는 우리의 무기로 삼을 수 있을 거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러나 그런 이상은 곧바로 현실적인 논리 앞에서 깨져버렸다. 영화가 창조적인 예술인 건 사실이지만 자본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 오히려 그 어떤 다른 매체보다 더욱 자본의 구속을 크게 받는 매체라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곧바로 인식 전환이 왔다. 사실 아프리카는 작은 국가들이 많은데 그런 나라들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며 아프리카의 영화들은 90%가 해외의 지원을 받으며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외부의 지원을 받으며 영화를 만들 수만은 없지 않은가? 내부적 기반이 만들어져야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직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치품이다.

-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작품은 <야바>와 <틸라이>인데 굳이 <키니와 아담스>를 전주영화제 상영작으로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

<야바>와 <틸라이>는 아프리카의 자연과 인간, 그리고 아프리카 내부의 고유의 문제를 성찰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인 반면 <키니와 아담스>는 짐바브웨라는 또 다른 아프리카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것은 실제 아프리카의 또 다른 모습이다. 끊임없이 부자가 되려하고 이것을 '차'라는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를 통해 추구하는 것이다. 사실 서양인들은 아프리카에 대해 보는 눈이나 요구하는 것이 항상 똑같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으며, 아프리카인들 역시 외관상 문화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이라는 본질적 모습은 서양인이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 서양인이 요구하는 한 가지 모습이란 어떤 걸 가리키는가?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식민지 경험을 했고 그 때문에 다른 언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프랑스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고유의 문화가 있으면서 제국주의의 시대에 다른 문화를 타의에 의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두 개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식민지 경험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두 문화가 대화를 하고 내가 다른 문화와 민족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 문화밖에 모른다. 자기의 시선만을 가진 채 다른 이로부터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매우 어리석은 시선이다.

영화 역시 문화적인 산물인데 다양한 교류를 통해 서로 배우려는 노력이 유럽인들에겐 없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문제다. 그러나 다행이고 긍정적인 것은 아프리카의 많은 젊은이들이 유럽과 미국에서 많이 유학을 하면서 이것이 서로 다른 시각과 사고를 교환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식민지 경험을 한 국가의 출신으로 제국인 프랑스에서 유학한 최고의 지식인이자 예술가인 만큼 당신은 프란츠 파농을 연상시킨다.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프리카에 대해 당신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

식민지 시대는 이미 끝났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식민지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을 알아가며 서로 교류하는 것이다. 식민지 경험은 나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통해 다른 문화를 접하고 배울 수 있었으므로 오히려 내가 가진 힘이다. 독립은 1960년대에 됐는데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는가? 아니다, 지금은 옛날의 노예문제보다 더 해결하기 힘든 세계화라는 싸움의 대상이 있지 않은가. 이제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문제가 아니라 세계화라는 현존하는 괴물이 더욱 문제이며 이것은 훨씬 복잡하고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석유값은 나날이 폭등하고 아프리카가 아무리 빈곤에 허덕이고 있어도 아시아는 쌀 생산을 무기로 수출을 안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문제이지, 식민지는 문제가 안 된다. 나는 내 몸 안에서 두 문화를 하나로 만들 수 있으며, 이를 배워 힘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실 식민지 시대에도 아프리카의 많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파리에서 공부했다. 레오폴드 생고르와 에메 세제르가 죽었을 때엔 프랑스에서 대통령이 헌사를 하기도 했다. (편집자 주 - 레오폴드 세다르 생고르와 에메 세제르는 모두 아프리카인으로서 프랑스에서 공부했으며 유명한 시인이자 동시에 정치가이다. 둘 다 흑인정체성 회복운동인 네그리튀드를 이끌었다. 레오폴드 세다르 생고르는 프랑스령이었던 세네갈이 독립하자 최초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36년에 이 유학생들은 프랑스에서 '흑인학생들'이라는 잡지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 서문은 "우리들은 자본주의 부르주아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 가서 느꼈던 지적인 갈증은 바로 자유롭고자 하는 갈증이었다. 이는 단순히 자기가 흑인이고 식민지 출신이니 쟁취해야 하는 그런 1차적인 자유가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자유를 뜻한다. 그러니 식민지 출신 지식인의 정체성 같은 건 내 관심사가 아니며, 그런 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

중요한 것은 타 존재가 있고 그와 교류하고 무언가를 배우며 경험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고 울 수 있다는 건 배우고 경험하면서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경험과 배워서 아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아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나는 아프리카 사람이며 부르키나 파소 사람이다. 내가 한국에서 생활한다면 또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 <키니와 아담스>로 다시 돌아가서, 이 영화를 영어 영화로 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새로운 것에 언제나 관심이 많으며, 다른 언어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사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같은 아프리카에 있음에도 서부 아프리카와는 또 다른, 잘 알지 못하는 아프리카다. 남아공화국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영화 자본이나 시장을 가질 만한 잠재력을 품고 있다. 그런 걸 고려하면서 나도 잘 몰랐던, 서부 아프리카인들이 잘 몰랐던 또 다른 아프리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영화가 두 아프리카 사이의 통로와 교각의 의미가 되기를 기대한다.

- <키니와 아담스>에서 도시를 동경하던 두 남자가 결국 관계의 파국을 맞는데 이는 결국 자본주의와 물질 때문인데, 이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무엇인가? 아프리카를 잠식해가는 자본주의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무엇인가?

자본주의가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들, 예컨대 의료나 교육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소수의 몇몇에 의해 자본의 투기화가 진행돼가고 있다. 이것이 전 지구를 미친 자본주의로 몰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을 '야만적 자본주의'라 부른다. 아프리카가 가난한 건 사실이지만 의료나 가난, 빈곤 등의 문제는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유한 나라에도 그 내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가?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래적으로 추구하려던 것들, 예컨대 사랑이나 연대 같은 것을 언젠가는 다시 찾으려고 들 거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될 순간이 오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때엔 굶어죽나 아파서 죽나 총 맞아 죽나 어차피 상관없는 때가 되기 때문에 결국 반란이나 혁명까지도 일어나게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아프리카가 됐건 어디가 됐든 똑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이 미친 자본주의는 어떤 방식으로든 조절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하게 될 것이다.

- <키니와 아담스>에서 두 사람의 우정 관계에서는 아담스가 키니를 동경하고 질투하는 것뿐 아니라 동성애적인 집착도 보이는 듯하다. 감독의 의도인가?

동성애적인 사랑을 의도한 건 아니다. 우정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건 플라토닉한 정신적인 사랑이다. 아담스는 떠나려 하지만 결국 떠날 수 없게 되자 자살하고 만다. 우정이 너무 강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 당신은 어떤 감독들을 좋아하며 누구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는가?

너무 많아서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오손 웰즈, 빔 벤더스 등을 들 수 있겠다.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영화이다. 스필버그의 <칼라 퍼플>도 무척 좋아한다. 사실 나는 휴머니티나 사랑, 즐거움 등 인간에 대한 얘기를 하는 영화들을 두루 좋아한다. 때문에 어떤 특정한 영화를 꼽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2009/10/01 08:03 2009/10/01 08:03

내 생애 첫 단독인터뷰의 대상은 신동일 감독이었지만, 실은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개봉할 당시 김응수 감독이 나의 첫 인터뷰이가 될 뻔했다. 인터뷰 때문에 김응수 감독을 만나러 가던 길에 자그마한 소동을 겪었고, 그 때문에 약속을 취소했다가 나중에야 다시 만났다. 사람 만나는 것도, 인터뷰란 작업 자체도 무서워서 망설이고 있던 당시, 언론시사로 본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여러 모로 충격적이었다. 시사가 끝난 뒤 몇 명 남지 않은 기자간담회에서 처음으로 질문을 했었고, 그걸로 성에 차지 않아 비로소 인터뷰라는 걸 해볼 욕심이 생겼다. 영화를 이미 봤음에도, 영화사로부터 스크리너를 받아 다시 한 번 꼼꼼이 보며 인터뷰 질문들을 정리했던 게 기억난다.

기사가 나간 뒤, '길고 재미없다'고 데스크에 또 혼이 났다. 사실 이것도 많이 줄이고 잘라낸 것인데. 하지만 그 이상 그의 말을 잘라내고 싶지 않았다. 감독이 자신의 의지를 매우 또렷하게 영화에 반영했다면, 그리고 그 의지를 인터뷰를 하러 갔다면, 되도록 그의 말을 충실히 싣는 게 좋지 않은가. 많이 배웠던 인터뷰였다.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하고싶고 지향하는 인터뷰란 게, 결국은 이런 식인 것 같다. 일간지 포맷에는 다소 맞지 않는, 인터넷 매체에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길고 지루한. 이 기사는 프레시안의 이 페이지(새 창으로 열기)에 실렸던 것이다.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죽음을 기리는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기존의 추모 다큐멘터리의 형식 대신 인터뷰만으로 일관하는, 형식의 파괴가 돋보이는 다큐멘터리다. 그들이 죽고 22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망각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고자 치열한 노력을 카메라에 담으며 '망각에 대한 투쟁'을 펼친 김응수 감독을 프레시안이 만났다.

- 김세진 이재호 기념사업회에서 영화를 제작했는데 주변의 반응은 어떤가?

기존에 역사를 바라보며 추모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하다못해 영정이나 추모식 사진 같은 것도 나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를 내 의도대로 봐주는 사람들도 많다. 과거를 기억하고 망각에 대한 투쟁을 벌이는 게 이 영화의 주가 되는데 사실 그런 식의 구체적인 비주얼을 삽입해 버리면 힘이 빠지지 않는가. 투쟁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 같고, 겨우 저걸 기억하려고 힘들게 저럴까 싶을 거다. 기억이 어떤 식으로 남아있든, 단편적이든 사실과 조금 다르든 시점이 어긋나든,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망각 속에서 기억 속으로 복원시켜야 한다는 걸 다룬 영화니까. 전형적인 추모 다큐멘터리처럼 몇월 몇일에 태어나 어디에서 살았고 학교는 어땠으며... 이런 식의 방식을 취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이고 힘이다.

 - 사실 그런 식으로 구성하면 김세진, 이재호 씨가 영웅으로 신비화되긴 한다.

그것도 우려가 됐다. 영화에서 나는 '열사'라는 표현을 절대 쓰지 않았고, '분신' 대신 그냥 '죽음'이라고만 표현했다. 각자가 그들의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판단하고 정리하는 거지 한 집단이 의미를 규정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 가치를 강요해선 안 된다. 그들은 물론 엄청난 일을 하긴 했지만 그 이전에 우리와 함께 살던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다. 여자친구도 있고 데이트도 했고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과 얘기할 때 나는 그들을 세진이 형, 재호 형이라고 호칭한다. 그런 삶의 호흡 속에서 그들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그게 우리는 왜 불가능할까, 의문이기도 했고.

추모비 뒤에 고은 시인의 추모시가 있다. 아주 시적인 표현들인데 난 그것도 보기가 힘들고 부담스럽다. 그거야말로 한순간의 느낌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상화시켜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 그런데 예전에 한 친구한테 그런 얘기를 하자 그 친구가 그러면 문제가 생길 거라고 하더라. 안에서 서로 간 싸움도 생길 거고 밖에선 또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하기 쉽다고. 우리의 마음이 어떻고의 차원이 아니라, 이게 사회의 역관계 속에 있고 현재진행형인 만큼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라. 그 말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과거와의 투쟁 아닌가. 대략적으로 역사가 정리가 되지 않고 여전히 혼란한 상태여서 그렇다.

- 20대들은 주로 낯설고 불편하다고 반응하는 듯하다.

낯설다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가고, 불편하다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반응 같다. 편하게 볼 영화라면 박물관에서 흔히 전시물 틀어놓은 거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거다. 그저 수동적으로 별 고민 없이 그냥 보고 받아들이고 곧 잊어버리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서적 작용이 있었다면 그건 좋은 거지. 지난번에 이 영화를 봤다는 어떤 20대 여성은 그냥 멍했다고 반응을 보내왔더라. 20대인 자신에게 역사는 뭔지 과거는 뭔지, 선배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 멍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 그런 반응도 나쁘지 않은 듯하다. 액션이 있다는 거니까.

- 영화의 총예산은 어떻게 되나?

김세진 이재호 기념사업회에서 5천 5백만원,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서 받은 지원금 1천 4백만원, 해서 총 7천만원 정도로 찍었다. 기획서에서 어떤 영화를 찍을 것인지 자세히 밝혔는데, 김세진 이재호가 죽었을 때만도 반미는 사형을 각오하고서 외치는 거였지만 이제는 국가의 단체에서 자금을 지원해주다니 세상 참 많이 변했구나 느꼈다.

- 총 제작에 걸린 시간은?

1년 6개월이다. 제작 의뢰를 받고 고민한 기간만 4, 5개월 된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것인가, 어떤 형식으로 영화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다. 기존의 80년대를 다룬 추모 다큐멘터리 형태로 가는 건 내가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기록물이 전혀 없어서 가능하지도 않았다. 80년대 전반에 관한 기록은 있어도 그들의 죽음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 다큐멘터리를 처음 하다 보니 다른 다큐멘터리를 보면 공부를 했는데, 유태인 학살을 다룬 <쇼아>에서 큰 힌트를 얻었다. <쇼아>를 보면서 증언과 인터뷰만으로도 보는 사람들이 그 형상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쇼아>를 보면 가스실이나 수용소에 대한 공포가 직접 그 건물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드러난다. 관객에게 수동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그 이미지를 스스로 머릿속에 쌓아올리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건의 경우 3일 내내 그들과 같이 있으면서 그 과정 모두를 목격한 사람은 없다. 누구는 한 시간 동안 만났고 누구는 직후에 봤고... 이걸 조합해 보자 생각했다. 사람마다 그들을 목격하거나 함께한 시간과 공간은 다 다르지만 그걸 모으다 보면 맞춰지겠지 생각했다. 다행히 성공적이었던 건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 윤곽을 잡아내더란 점이다. 3일의 기간 동안 누구는 어디에 앉아있고 누구는 옥상에 올라가고, 일관적인 흐름이 있는 그림이 잡혔다. 그것만으로 성공했다 생각했다. 형상을 그려냈으니까. 그렇다면 굳이 사진이 없더라도 이것으로 기록이 되지 않겠는가.

찍는 과정에서는 인터뷰이를 섭외하는 과정이 오래 걸렸다. 못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솔직히 누가 그걸 다시 대면하고 싶겠는가. 섭외가 됐다 해도 막상 찍으려고 하니 시간을 맞추는 것도 어렵더라. 모두들 각자 생활인이다 보니 일요일밖에 시간이 안 되는데 주말마다 개인적인 사정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렇게 촬영을 드문드문 하느라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찍고 나서 후반작업도 공들여서 했다.

김응수 감독

"다큐멘터리는 단순한 '사실'이 아닌 '진실'을 담아야 하며, 그 진실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제공 _ KT&G 상상마당)

- 인터뷰이 중에 이정승 씨는 이전에 한겨레21에도 증언을 하신 적이 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이전에 공식적인 증언을 했던 사람은 이정승 선배뿐인 것 같다. 인문대 학생회장이라는 공식적 활동을 했던 사람이고 김세진 형과 친구처럼 지낸 사이니까. 도의적으로 친구의 기억을 위해 자신이 안 하면 안 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영화에 싣지 못한 에피소드들도 많다. 여자친구 얘기도 그렇고. 아버님도 그 여자친구를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가능한 일이 아니기도 하고. 그러나 영화가 긴 기간에 걸쳐 들쭉날쭉하면 내가 감당을 못 하니까, 결국 3일간 팩트 중심의 이야기로 좁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 증언을 하신 분 중 녹취를 하신 분은 왜 목소리만 제공하신 건가? 얼굴 공개를 거부한 건가?

그런 건 아니다. 그 사람은 원래는 인터뷰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자료 수집 와중에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만년필과 안경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그 사람이 듣고 있다가 자신이 만년필과 안경이 챙겼다는 얘기를 하는 거다. 알고 보니 그가 분신 때 옥상에 올라갔던 사람이었다. 인터뷰 대상으로 결정했던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얼굴을 보여주려고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가장 적당한 건 녹취구나 판단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녹취를 땄다. 녹취를 듣고 보니 상황이 얼추 아귀도 맞고. 다만 그 사람은 용우한테 줬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재식에게 받았다고 하고, 그 사이에 간격이 좀 차이가 난다. 아마도 그 사람이 용우에게 주고 용우가 재식에게 준 것 같다.

어쨌든 전날 의대(연건동 서울대 의대)가지 갔다가 학교(신림동 본교)에 돌아와서 하룻밤 자고 신림사거리에 가서, 옥상 밑에 있다가 옥상에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고 안경과 만년필을 주고... 3일의 사건을 하나로 관통하는 인물이다. 옥상에 올라간 사람은 그 사람 하나니까, 그 사람의 녹취를 영화 전체의 중심으로 놓고 다른 인터뷰들을 맥락이 비슷한 위치에 배치했다. 예를 들면 여자애들이 울고 있는데 사회학과 아이였던 것 같다는 증언 뒤에 여자의 인터뷰를 넣었고. 꼭 그 사람은 아니지만 대략의 연관성을 가지도록 구성을 했다.

- 인터뷰에서 굳이 정면샷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카메라가 바라보는 관객이고 세상이라 한다면, 인터뷰이들이 이를 정면으로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사람을 참 힘들게 하는 게 사실이다. 보통의 다큐멘터리들은 인터뷰이가 편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눈을 보지 않은 채 그냥 옆에서 찍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일부러 카메라를 완전 정면으로 향하도록 했다. 인터뷰어인 나와 그들이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이자, 그들과 관객, 그들과 세상이 서로 정면 대면하는 것이다. 그럴 때 관객에게 보이는 그 사람의 얼굴, 그 얼굴이 말해주는 것들, 이런 걸 찍기를 원했다.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해야 인터뷰가 단순하면서도 힘이 느껴질 거라 생각했다.

- 얘기가 진행될수록 카메라가 인터뷰이에게 접근하여 얼굴 클로즈업으로 간다. 이것 역시 의도된 것인가?

그렇다. 설정한 것이다. 찍기 전에 대강 이런 얘기를 이런 흐름으로 갈 것이라고 의논을 했고, 카메라를 찍는 사람은 이를 숙지하고 있었다. 이건 사실 '감'이다. 이런 얘기 즈음에서 앞으로 가고, 다시 앞으로 가고. 물론 편집에서 달라질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의 감을 가지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계속 밀착해 들어가는 거다.

- 그런데 이정승 씨 인터뷰 때만 유일하게 카메라가 픽스된 채 이동이 없다.

그건 의도라기보다는 인터뷰가 너무 짧았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정신없이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서인데 듣고 보니 이상하긴 하다. 이정승 씨가 얘기한 부분이 일종의 클라이막스인데, 오히려 그 부분이 객관적으로 찍힌 것 같다. 카메라맨이 놓친 것이거나 편집에서 잘린 걸 수도 있겠다.

- 이재호 아버님의 인터뷰가 끝난 후 갑자기 크레딧이 삽입되면서 이를 계기로 영화가 둘로 나뉘는 느낌이다.

아버님이 나오고 비오는 대문이 보이는 것이 관객에게 감정이입을 너무 강요하는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자막을 넣었다. 감정을 기대하지 말라, 당신이 감동한다거나 슬퍼한다고 해서 이게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라는 게 내 의도니까. 이 영화가 그렇게 감동적이거나 몰입시켜서 눈물을 짜게 만드는 영화는 아니지 않는가. 영화라는 걸 상기시켜 주면서 분위기를 깨줄 필요가 있었다. 또한 2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도 있었다. 영화를 딱히 2부로 나눈 건 아니지만 그 뒤부터 영화가 새로운 방향으로 가지 않는가. 공간도 하늘이나 바다로 가버린달지. 그래서 필요한 것 같았다.

- 서울대 내에서의 인터뷰가 이어지다가 밖으로 나가는 것도 그 중간자막으로 구분이 되는 건가?

그렇다. 계속 학교 내부에서 찍은 후 아버님을 찍고 아버님 뒷모습이 나온 뒤 대문이 나오지 않는가. 그러면서 바깥으로 나가는 거다. 계속 안에 있다가 바깥을 향해 나가는 느낌인 거지. 그래서 변산으로 간 거고. 다큐멘터리에서 굳이 그런 식으로 외부 공간을 선택하는 건 사실 드문 일이다. 대개는 그냥 일반 삶 속에서 찍지. 이건 꽤 모험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뭔가 구름 속에서 형상을 찾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안개 속의 풍경 같기도 하고. 바다도 쨍한 바다가 아니라 안개가 낀 것 같이 안개가 피어오르고 멀리 뒤로 섬도 보이고 등대도 있고... 게다가 어쩐지 물에 그렇게 집착이 가더라. 비도 그렇고. 물로 뜨거운 걸 꺼주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하늘이 주는 허허롭고 공허한 허공의 이미지, 그리고 뜨거운 걸 꺼야 할 것 같은 물의 느낌 같은 걸 살리고 싶었다. 그건 만드는 사람의 마음인 거고 영화에서 중요한 상징이나 의미인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상징을 찾더라.

- 폐쇄적인 상아탑의 공간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도 맞는 느낌일 수 있는데, 그건 보는 사람의 주관에 달린 문제인 것같다. 내가 나름 설정한 마음의 흐름이 있다고 해서 보는 사람에게 그렇게 보라고 강요할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는 당신처럼 볼 수 있고 누군가는 물의 이미지가 불의 이미지와 부딪히면서 강렬한 걸 느꼈다고 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멍하니 보면서 구체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파도소리가 총소리처럼 들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

- 나 역시 마지막 파도소리를 총성인 듯 들었다. 의도한 것인 줄 알았는데.

연상을 하게 하는 건 사운드든 공간이든 다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연상은 각자 자기 경험 속에서 자기 주관성과 만나는 것이다. 대체로 20대들은 당신처럼 느끼지 않는다. 안개 속의 풍경처럼 잘 모르겠는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파도소리는 총소리보다는 물이 딱딱한 바위를 부서져라 치면서 깨려는 듯한 느낌을 의도한 거다. 사운드 믹싱을 하는 엔지니어에게도 무조건 세게 넣어달라고 했다.

- 마지막으로 감독이 인터뷰이가 되는데, 감독이 카메라 뒤에서 굳이 앞으로 나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영화가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망각에 대한 투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카메라 앞에 불러내 투쟁을 시키고 있으면서 정작 나는 그들 앞에서 심문관으로 서 있다. 과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심문관 역할을 하는가? 그들은 나에게 왜 당해야 하는가? 그건 윤리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내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세의 문제이기도 한 거다. 나도 같이 당해야 한다. 내 인터뷰 장면 때문에 다른 인터뷰이들도 다 수긍을 하고 영화가 끝났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다들 나중에 자기 거는 빼달라고 했을 거다. 할 때야 큰 생각 없이 하는데 찍힌 거 보면 쑥스러울 테니까. 그런데 내 인터뷰 장면을 보고 말들이 없더라고. 그래서 영화가 정리가 된 거다.

- 영화라는 게 감독의 것인 것만큼 그 목소리를 감독의 시선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아니, 내가 통합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심문관의 자격이 있는가? 라는 소박한 생각으로 참여했을 뿐이다.

- 3일에 집중하겠다고 했는데 감독이 증언한 인터뷰에서만 짐을 들어주겠다고 나섰다가 나중에 군대에 끌려간 다른 사람 얘기가 끼어든다.

그것도 3일에 관련된 얘기다. 김세진, 이재호가 주도한 의대 점거농성 투쟁과 관련된 얘기니까. 오히려 그 전에 3월 18일 반전반핵 평화투위가 뜨던 날 이재호를 만난 얘기, 그리고 학생회비 걷어서 김세진 선배를 찾아간 얘기가 3일과 관련없는 얘기이다. 이건 일부러 넣었다. 두 사람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이 너무 없기에 형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난 두 사람을 원래 알았던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까 이후에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 기억이 난 거다. 자연대 학생회실에 갔다가 김세진을 만났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그때도 이상하게는 느꼈다. 이 사람이 학생회장이라고? 머리도 길고 미소년 타입에 예쁘게 생긴 데다 딱 부잣집 아들 티가 났다. 이재호 선배는 계속 몸을 부들부들 떨었던 게 기억난다. 그땐 반미 얘기는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얘기였으니까. 난 주체가 아니었으니 그런 절대절명의 기분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면 그 날 시위도 좀 달랐다. 예상되지 않은 상황에서 반전반핵 외치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에너지가 달랐고 목소리도 똘똘 뭉쳐 있었으며 불안과 함성 같은 게 다른 때와 차원이 달랐다. 그 느낌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구호 자체가, 참여 자체가 공포스러웠기에 집회도 오래 할 수 없었는데, 도서관 통로 지나갈 때 구호 때문에 통로가 막 울렸던 것도 기억나고.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사형을 각오하고 외친 반미 구호였으니 이 중에 누구는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던 게 기억날 정도다.

- 오늘날에 외치는 반미 구호는 그 의미가 어떻게 다를까?

그때 문제제기가 됐기에 오늘날 우리가 미국이 옳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평화협정 문제도 초보적이긴 하지만 얘기가 오갔고. 그때는 그런 식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휴전협정의 주체가 미국과 북한인데 주체가 빠지면 누가 얘길 하나? 논의 주체에 3자, 미국이 있다는 게 그 사건으로 분명해진 거지. 남한-북한, 북한-미국, 남한-미국 간 얘기가 따로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아직도 미국과의 관계 문제가 북한 문제가 항상 가운데에 있으니까 여러 가지로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걸 영화에서 얘기할 순 없었고... 모든 문제가 같이 풀려야겠지. 통일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기타 등등. 북한 문제가 풀려야 우리 문제도 풀리는 것 아닌가.

- <과거는 낯선 나라다>의 가치에 대해 특히 영화미학적 측면에서 어떻게 자평하는가?

인터뷰라는 건 단순히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사람의 현재의 존재 자체를 찍는 것이다. 얼굴에 드러나는 현재의 상태,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감정까지 찍어야 인터뷰의 힘이 발휘된다. 이걸 보여줬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는데, 이건 이제까지의 인터뷰가 잘못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의 힘에 대해 하나의 지점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80년대에는 폭로나 고발이 다큐메터리가 가진 힘으로 여겨졌다. 탄압의 시대였으니까. 90년대는 주로 회고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이제 이런 게 너무 많아졌고 사람들도 많이 지쳐버렸다.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한번 얘기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얼마나 많았나? 그렇다면 2000년대엔 어떻게 역사를 복원하고 기억할 것인가?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키고 현재 속으로 과거를 불러와야 한다. 과거가 저기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있는 현재의 공기 안에 같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내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제기했다고 본다.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역사를 다루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더 이상 회고하지 말고 신비화하지도 말자는 거다. 우리의 현재에 과거가 어떻게 남아있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보듬어 가자고 문제제기를 한 게 이 다큐멘터리가 가진 가장 큰 의의라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더라. 물론 이것은 내 의도이기도 하다.

- 이재호 아버님의 장면에서, 찍을 때 대답을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대답을 못 하셨던 장면을 넣은 건 다큐멘터리의 윤리성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가? 연출자가 지나치게 개입해서 조작한 것은 아닌가?

나는 진실의 문제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버님이나 어머님은 이미 학습화된, 준비해놓은 대답을 하셨고 그건 진실의 대답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갖고 계시고 아들이 죽었으니 이렇게 얘기해야 부모의 도리겠지 싶은 것들, 아들 친구가 왔는데 뭐라도 대접해줘야겠다는 마음, 동네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 같은 걸 고려해 생각해놓은 답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진실일까? 할 얘기가 없으면 안 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찍었다. 조감독에게도 어떤 게 진실이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조감독 역시 대답을 못 하셨을 때가 진실이라고 하더라. 사실 예민한 문제가 아닌가? 아들 친구들에 대한 솔직한 마음보다는 그저 다들 행복하고 잘 살기 바란다는 예의상의 말씀을 하시기 마련이다. 말하고 행동하는 걸 그대로 찍는 건 사실을 찍는 거지만,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아닌 것들은 들어보면 생명력이 없기 마련이다. 이건 아니다. 사실과 진실을 혼동하면 안 된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이 아닌 진실을 찍는 거라 생각한다.

- 관객은 그 장면에서 강한 정서적 울림을 받게 된다. 장면을 두고 선택을 한다는 건 감정의 조작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어떤 장면을 넣을 것인가는 내 선택이고, 그런 식으로 보면 영화의 모든 장면이 다 선택의 영역이다. 한 시간 인터뷰해서 모든 걸 다 집어넣을 수 없으며, 그 중 일부분을 내가 선택하는 것 아닌가. 무얼 말하고 행동하는가, 그 사실의 영역을 찍은 후 그 사실 덩어리 속에서 어떤 걸 취할 것인가, 이 사람의 말 중 어느 것이 사실의 진수인가를 선택하는 건 감독인 내 몫이다. 세진 형의 부모님도 증언을 하셨었고, 병원에서의 상황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 증언 역시 사실이고 본인들도 우실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들도 울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것을 고려하면 그 장면들은 아깝더라도 버릴 수밖에 없다. 그런 게 바로 진실이다. 어쩔 수 없는 거다, 선택을 해야 하니까.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찍는 거라 얘기하지만 사실을 얘기해서 과연 뭘 할 건데? 그 뒤에 있는 진실을 봐야 하지 않나? 그런 식으로 보면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사실에서 어긋난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각각의 증언에서 아귀가 서로 안 맞는 부분들도 있지 않는가? 누구는 8시라 하고 누구는 9시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인위적으로 맞추지 않고 그냥 그대로 넣었다. 그렇게 기억하는 것 자체가 진실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차원에서의 그런 소소한 어긋남은 핵심이 아니다.

-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여기는 건가?

우리나라에서 이제껏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들의 함정이기도 하다. 그냥 그렇게 찍는 것. 그 많은 에피소드나 사실 중 내가 보는 진실은 뭔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냥 쭈욱 사실을 찍는답시고 찍는다. 자신의 진실의 관점대로 장면을 선택하고 그걸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거다. 사실만 나열한다면 받을 비판도 없겠지.

- 결국 카메라를 잡은 사람이 보는 진실이란 얘기인가?

그렇다. 각자가 보는 진실인 셈이다. 저것은 거짓이고 저것은 참이다라는 걸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같은 소재에 대해 찍는다면 다른 진실이 나올 것이다. 역사는 완전히 절대적으로 객관화될 수는 없다. 세상을, 사건을 바라볼 때 확실히 진실을 바라보는 다양한 단면들이 합쳐져야 그것이 전체가 된다. 다양하고 다른, 상반된 관점들이 여럿이 있어야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는 거다.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 아닌가? 광주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들면 광주 영화도 다를 거다. 다 뒤집을지도 모르지.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네마네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 관점을 제시하며 이렇게 했다, 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화려한 휴가>는 과연 누구의 관점으로 만든 영화인가? 누군가에겐 광주의 정신에 근접도 못한 채 권력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라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의 근현대사도 마찬가지고 민주화 운동도 지금 누구의 관점대로 서술된 것인가? 민청학련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죄 같은 건 과연 누구의 어떤 관점으로 정리돼 버렸을까? 다른 사람 눈엔 전혀 어이가 없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간 내가 보는 관점은 그렇다. 어떤 사람들에겐 90년대에 일반화돼 있던 광주 다큐멘터리 같은 게 객관적인 거라 여겨지겠지. 아무 비판도 있을 수 없는, 그냥 짜깁기된 화면들 말이다. 과거에 이랬고 이런 사건이 이랬고 우린 지금 민주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식의. 과연 그게 지금도 유효할까? 그런 건 객관적인 게 아니라 아예 시점이 없는 것이다.

- 다음 작품으로 어떤 영화를 구상중인가?

시각장애인과 카메라와의 관계를 다룰 예정이다. 극영화를 하면서는 그런 고민을 많이 하지 못했는데,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만들면서 찍는 카메라와 찍히는 대상에 대한 상호관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카메라가 내가 가진 눈이 되는 것 같고, 인터뷰이와 세상을 연결하는 창 같기도 하더라. 그런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시각장애인을 등장하는 영화들은 의례 항상 지팡이를 들고 불쌍한 모습으로 훌쩍대다 우리도 인간답게 살고싶다고 한탄하고, 그러면 사람들은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며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이라며 추켜세우는 식의 영화들이다. 왜 이렇게 비장애인의 시선으로만 봐야 하나. 그들도 엄연히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데. 나름대로 즐겁게 살고 있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사랑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죽네사네 하면서 산다. 그리고 이미 시각을 잃어버렸는데 그냥 그 안에서 살아야지 자꾸 완전한 세계가 여기 있고 당신들은 불완전하다는 식으로 보는 게 무슨 도움이 되나. 우리야 그 사람들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시스템을 만들면 되는 것뿐인데, 그걸 못 하면서 동정만 하고 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발언하는지 찍고 싶다.

내가 카메라로 찍을 때 이 사람들 역시 정면으로 응시하며 찍을 수 있을까? 못 찍을 거다. 그건 폭력이 된다.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찍는다 해도 이미 그건 우리의 고착화된 시선이다. 동정과 연민을 느끼며 찍게 된다. 그들의 눈 자체가 이상하고 불완전하다 생각하며 어색해하는 거다. 그렇기에 내가 이번에 만드려는 영화는 그들을 존중하며 어떻게 찍을 수 있을지, 이들은 어떻게 어떤 감각으로 세상을 볼지를 탐구하는 영화다.

- 영화는 시각에 많이 의존하는 매체인데 시각장애인의 이야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찍기가 힘들다. 처음엔 이 시각장애인이 보는 걸 카메라가 찍을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못 찍을 거라는 게 지금의 내 결론이다. 문제해결 지점을 찾는 게 아니라 그가 보는 걸 내가 찍지 못한다는 것을 상호간에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 역시 '나는 본다'고 표현하며 경계를 넘으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보지 못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겠지. 경계 내에서 그냥 인정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영화란 생각을 지금은 한다. 경계를 넘어서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인정하는 거다. 넘어선다는 건 힘든 욕망 아닌가. 하지만 경계를 정리한다는 건 그만의 성찰이고 성장이다. 그러니까 이건 다큐멘터리보단 극영화에 더 어울린다. 경계를 인정하고 그저 자신 안에서 살 뿐이라는 것, 카메라는 그 사람의 바깥에 있다는 것, 그걸 보여주는 영화가 될 것이다.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상호 그걸 인정하는 게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다큐멘터리를 다시 찍고 싶은 생각은 없나? 꼭 만들어보고 싶은 다큐멘터리가 있다면?

찍고싶다고 자주 생각하지만 역시 펀딩의 문제 아니겠는가. 예전엔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는 게 편했는데 요새는 아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젊었을 땐 사회적 문제에 관심 많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적인 문제나 철학, 실존의 문제에 천착하게 되는데 나는 반대다. 내 영화를 봐도 알겠지만 오히려 확장되고 넓어진다.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싶다. 거기에 영화의 힘이 있다. 개인에 파묻혀 있어 거기에 대단한 게 있는 듯 치장하는 것, 사회를 보는 건 촌스러운 거라는 식의 생각이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말 하고 싶은 다큐멘터리가 있다면 역시 광주다. 총체적 시선으로 광주항쟁을 정리하고 완벽하게 재현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그러던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부족함이 많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시점으로 기록이 남는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완벽하게 다루는 건 하느님만 하는 거지. 나는 나의 진실이 담긴 광주를 그리고 싶다. 누군가는 그의 진실대로 또 다른 광주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 그런 게 쌓이면 사람들이 이것저것 보면서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겠지. 물론 이상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누구 한 사람이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단 하면 될 텐데 왜들 안 할까? 나보다 돈있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하면 좋을 텐데.

- 섣불리 건드리기 힘든 상처라서 그런 것 아닐까?

그거야말로 오만 아닐까. 자신을 낮추면 된다. 자신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이 시대에 호흡하고 있기 때문에 쟈신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과 영역 속에서 하면 되는 거다. 뭘 두려워하나? 각자는 그냥 한 인간일 뿐인데 뭘 다 정리를 하나? 투쟁도 자기가 호흡하는 인간으로서 하는 거지, 자기로 인해 세상이 변하고 뭐 대단한 걸 이루고 그런 걸 기대하면 안 된다.

- 기록이란 게 한번 남으면 계속 남는 건데, 그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대한 노력하면 되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리서치 하고 사람을 만나보고 어떤 시점이 좋을지 고민하고, 이게 정수다 생각되면 밀고 나가면 되고. 그럼 누구는 너무 투쟁적이다, 너무 시적이다 욕하려나.

-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예전엔 거장 감독들의 후기작들을 좋아했다. 미장센이 잘 돼 있고 형식적으로 잘 짜여져 있는 영화들, 예를 들면 파졸리니의 후기작, 피터 그리너웨이의 장중한 영국식 작품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란>과 같은 후기작들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요즘엔 초기작들과 다큐멘터리들이 좋아진다. 그 안에서 진실들이 느껴지는 영화들 말이다.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다. 멋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어떻게 접근하느냐, 진실을 어떻게 담을 것이냐가 더욱 중요해진다.

또한 요즘 내 고민은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것이다. '나는 본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대체 내게 카메라는 뭔가. 예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 했던 장-뤽 고다르의 영화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요즘엔 마음에 와닿는다. 그의 영화들 보면 유럽의 실존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뒤로 가면서 굉장히 넓어진다. <아워 뮤직> 같은 영화를 보라. 사회, 인류, 이런 거에 대해 너무나 고집스럽고 맑은 느낌이 느껴진다. 저 사람은 저렇게 안 해도 사적으로 멋을 부릴 수 있고 더 멋지게 나갈 수 있는데 왜 저렇게 투박스럽게 자꾸 고민할까, 나이가 들었는데도 투쟁의 끈을 놓지 않는구나, 그런 부분들에서 감동을 느낀다. 영화 매체의 실험도 계속하면서 주제나 소재 면에서 자기가 무엇을 다뤄야 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주제넘은 말이지만, 나도 한 측면으로는 화가가 그림 그리듯 이미지라는 게 뭘까 뭘 재현할까, 카메라는 뭘까, 이런 문제가 많이 고민되고, 주제 면에서는 좀 더 예전보다 넓어지고 있구나 여겨진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자신이 생겨서 그런 건 아니고,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인가보다. 예전엔 남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남이 요구하는 대로 가야 성공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나이 들면서 그런 데에서 많이 자유로워진 듯하다. 이런 변화, 스스로 마음에 든다.

2009/09/28 12:41 2009/09/28 12:41

2008년 3월이니 벌써 일 년 반 전이다. 내 생애 처음으로, 신동일 감독을 만나 단독 인터뷰란 걸 했다. 그간 누군가의 인터뷰에 따라가거나 한 적은 있었어도, 내가 내 이름을 걸고 혼자 인터뷰를 해서 기사를 쓴 건 처음이다. 무척 많이 떨렸고 긴장했다. 인터뷰는 두 시간이 넘게 진행됐고, 그걸 풀어서 기사로 쓰는 데만도 몇 일이 걸렸다. 그나마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1/3 가량이 잘렸다. 제목도 내가 아닌 데스크에서 붙인 것. 당시 신동일 감독은 두 번째 영화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만들어놓고 1년이 지나도록 개봉 날짜를 못 잡고 있었다. 우연히 모니터링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후 만나서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반 년도 더 지나서야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잠깐 극장에 걸리는 둥 마는 둥한 모습으로 개봉했다. 그리고 신동일 감독은 세 번째 영화 <반두비>를 내놓았다. 약간 다른 이유, 좀 슬픈 이유로 화제작이 됐지만 흥행에선 여전히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만든 영화 세 편이 모두 우여곡절을 겪었고 고난의 시간은 길었다. 그러나 나는 이 고난들이 감독에게 오히려 큰 자산이 될 거라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그 사이 신동일 감독은 스스로 '독립영화 감독'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갖고 사회적 사안들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그가 차기 한국영화가 가장 주목해야 할 감독 중 하나라고 믿는다.

이 기사가 실린 프레시안 페이지는 여기다.


 2005년 첫 데뷔작 <방문자>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뒤 영화계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던 신동일 감독은 2006년 두 번째 영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내놓았다. 이 영화는 2006년에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돼 극찬을 받았고 크고작은 해외 영화제에 연달아 초청됐다. 그러나 <방문자>는 관객들의 자발적인 DVD 출시 청원운동이 벌어졌음에도 아직까지 출시되지 못했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개봉날짜를 잡지 못한 채 1년이 넘도록 표류하고 있다.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잃어버린 1년'이 지나고도 구체적인 개봉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 다만 지난 2월말 서울 시내 한 극장에서 한정된 관객들을 대상으로 모니터 시사회가 열렸을 뿐이다. 평단과 영화제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음에도 극장 개봉이 이토록 어렵고 DVD 출시조차 용이하지 않은 바로 이 현실이야말로 '한국영화 위기론'의 진정한 본질이 아닐까.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모니터 시사회장에 참석했던 프레시안이 신동일 감독을 따로 만나 비교적 긴 대화를 나눈 이유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어떤 영화?

명문대를 졸업하고 잘나가는 펀드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예준은 군대 시절 알게 된 재문과 그의 미용사 아내 지숙의 뒤를 봐주고 있다. 이들 부부는 예준의 도움을 받아 미국 취업이민을 준비하지만 재문이 삼촌에게 맡겨둔 이민비용을 날리게 되면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한편 지숙이 미용박람회 때문에 파리에 가 있는 동안 예준의 실수로 재문과 지숙의 갓난아이가 죽고 만다. 지숙에겐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모든 죄를 덮어쓴 재문은 아이의 죽음과 사체 유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옥살이를 하게 되고, 지숙은 예준의 후원 하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마침내 재문이 출소하고 지숙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이들의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향해 치닫게 된다. <헨젤과 그레텔>, <세븐 데이즈> 등에 출연해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준 박희순이 재문 역을, 최근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뉴하트>에 출연한 장현성이 예준 역을 맡았고, <메디컬 기방 영화관>으로 주목받은 홍소희가 지숙 역을 맡았다. 2006년 제작되어 그 해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고, 이후 홍콩영화제와 카를로비바리영화제 등 해외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됐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정식 개봉을 하지 못한 상태다.



- 영화 개봉이 왜 미뤄지고 있는가?
이 영화의 배급사인 프라임엔터테인먼트에서 작년에 투자 혹은 배급한 영화들 성적이 신통치가 않아서 내 작품을 비장의 무기로 너무 아끼는 것 같다.(웃음) 하지만 최근 <세븐 데이즈>와 <더 게임>의 성적이 괜찮았으니 상반기 개봉이 가능하지 않을까. 어쨌든 한국 영화계 사정이 그만큼 안좋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 이미 해외에서는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안다.
2006년 부산영화제 이후 홍콩영화제를 비롯해 체코 카를로비바리영화제, 미국 시애틀과 시카고, 호주 멜버른 영화제 등에 초청됐다. 프랑스에는 판권도 팔린 상태다. 하지만 프랑스보다 국내에서 먼저 개봉됐으면 좋겠다.

- 2006년에 개봉됐던 <방문자>의 경우엔 DVD 출시가 늦고 있다. 못 본 사람이 적지 않다.
일본에 수출돼 아마도 국내보다 일본에서 먼저 출시가 될 것 같은데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에선 판권을 갖고 있는 회사의 여러 사정들이 얽혀 있는 것 같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 관객보다 DVD로 볼 관객들이 더 많을 것 같기에 빨리 출시됐으면 하고 있지만 상황이 풀리지 않고 있다. 아마도 늦어도 5월 초에는 나오지 않을까 싶다.

- <방문자>처럼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저예산 비상업영화 계열의 작품인가.
꼭 그렇지 않다. 제작비를 굳이 밝힌다면 정확히 11억 2천만원이 들었다. 다른 상업영화의 1/3 수준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는 그만큼의 영화적 비주얼을 만들어 냈다고 자부한다. (내 영화로서는 드물게) CG까지 사용한 영화다. 어쨌든 <방문자>의 예산이 1억 3천이었는데,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10배로 오른 셈이다.

- 영화가 상당히 '386스럽다.' 주인공들이 386세대여서 그런가? 궁극적으로 386세대의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가?
영화속 주인공들은 사실 386이라기보다는 그 바로 다음 세대(X세대라 할지 N세대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에 해당하는 나이다. 하지만 굳이 386뿐 아니라 더 젊은 관객들, 그리고 결혼을 했거나 아이를 낳아본 부부 관객들 역시 이 영화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 영화속에 <철학에세이>같은 책을 굳이 보여준 것은 뭣때문인가?
이 작품을 구상한 게 97년말 IMF가 터진 직후 모티브를 얻은 것이고, 한국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던 그 때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더욱더 공공연하게 신자유주의화된 세상이지 않는가. 주인공 예준이가 예전에 운동권이었다는 사실이 키워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랬던 인물이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가치에 종속되는 상징성으로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묘사들은 전적으로 386들이 가지고 있던 정서와 특징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볼 관객들의 연령층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이 영화에 설정된 맥락을 그렇게 볼 관객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떠나 친구관계나 가족관계, 부부관계 부분을 유념해서 볼 관객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고, 다층적인 해석이 존재할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꼭 그런 틀로만 이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 당신은 영화들이 386 영화로 굳어지는 것을 경계하지만, 전작부터 이번 영화까지 모두 386 먹물 지식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대립구도가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감독이 계속 붙잡고 있는 주제인 셈인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길 나도 바란다. 내 자신도 386, 먹물이다 보니 내 나이 또래나 비슷한 세대의 디테일을 묘사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내가 천착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지금, 여기'에 관한 이야기다. <방문자>는 바로 현재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나치게 홀대받고 억눌리고 있는 상황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영화였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역시 예준보다는 재문과 지숙 커플, 즉 민초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고, 여기엔 나를 비롯한 지식인에 대한 자기비판의 성격이 담겨져 있다.

- 인물들마다에 계급성을 부각시켰다.
그렇다. 일단 예준은 그 가족을 위해 보상을 하는 방법이라고는 금전적인 것밖에 모르는 냉혈한이다. 예준이 건네준 통장에 과연 얼마가 들어있었는지는 감독인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지숙은 사정을 모른 채 예준이 준 돈을 기반으로 성공적인 비즈니스 우먼이 됐다. 미용실 계단에서 지숙과 공사하러 온 한국인 노동자, 이주노동자가 나란히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지숙이 과거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는 일종의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지숙이 한국인 인부나 이주노동자와 일종의 동질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주노동자의 경우 역을 맡은 배우가 이전에 연기 경험이 없는 분이라 결국 한 컷을 뺐기 때문에 약간 비약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약간 묘하면서 느낌이 있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 전작과 이번 작품 모두에서 칼 맑스가 언급된다. 칼 맑스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내 단편영화인 <신성가족>도 맑스와 엥겔스의 논문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대학 들어가고 나서 대부분이 그렇듯 광주 학살 등에 대해 알게 되면서 맑스를 접하게 됐는데, 맑스는 내가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된 데에 지적, 정서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워낙 매도도 많이 당하긴 했지만 아주 인간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아이가 둘이나 굶어죽는 등 비극적인 개인사를 갖고 있기에 존경심뿐 아니라 연민이 함께 있다. 얼마 전 영국에서 한 여론조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맑스가 꼽히기도 했지만, 맑스가 던졌던 문제의식은 요즘에 와서 더 유효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모두들 한물 갔다고, 철지난 이야기라고 얘기하지만 오히려 그 정신, 다르게 보는 시선은 여전히 필요하고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넣은 건 아닌데 하다보니 맑스에 대한 언급이 계속 들어간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나더러 빨갱이라 할 사람들도 있겠기에 조금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인터뷰에서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2018년에 <칼>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 200주년이니 의미가 있지 않을까. 국제적인 프로젝트로 해서 한 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때까지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이다. (웃음) 인물 감정이입이나 어떤 이익을 배제하고 일방적인 미화를 하기보다는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맑스의 인간적인 결함이나 희극성 같은 걸 다루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각각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 특별히 중점을 두었던 점들은 무엇인가.
영어로 표현을 해보자면 예준이가 changed, 즉 변질된 인물이라면 재문이는 not-changing한 인물, 즉 일관되고 우직하며 안전 지향적인 인물이고, 지숙이는 changing, 스스로 변화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런 식으로 범주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대사회의 정치와도 관련되지 않나. 재문은 현상유지파고 예준은 타락한 인물이라면 지숙은 이런 걸 깨려는 인물이다.

- 화면에 불러오는 인물은 과거의 인물이지만 사건이 벌어지는 건 현재이면서 항상 아이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미래가 함께 있다.
아무래도 에필로그에서 지숙이 임신하고 있는 장면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진정 인간다운 사회가 도래하는 건 우리 세대에는 불가능하다 해도 다음 세대에서는 이뤄야 한다는 염원을 갖고 있다. 나도 한때 80년대 후반 학번으로서 이상을 외치기도 했지만 그것이 불과 몇 년 새에 이루어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람시가 얘기했듯 "지성으로는 비관적이지만 의지로 낙관하는" 것이 중요하고, 바로 이것이 내 작품세계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한국 감독들 중에서 나만의 차별성이기도 하고.

- 굳이 아이가 죽는다는 설정을 넣은 이유는 뭔가?
그냥 그런 상상을 했다. 잔혹한 상상인 것도 사실이고 약간 변태적이라 할 수도 있고. 나도 우디 앨런처럼 일 주일에 한번씩 정신분석을 받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웃음) 97년말에서 98년에 그 작품을 처음 구상할 때 이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다 싶어 2, 3년 그냥 묵혔던 아이디어다. 언제나 현실이 가장 센 것이고 현실은 상상을 압도하는 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에 다시 그 아이디어를 꺼내면서 영화에 사용했다.

- 노골적인 출산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기술적으로 편집 등을 이용해서 컷을 나누거나 해서 속이지 않나. 그런 식으로 눈속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숙이 출산하는 장면이 있어야 이후에 드라마 전개나 인물의 심리 등이 설득력있게 다가올 거라 여겼다. 다소 비호감스러운 장면이긴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데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촬영하기도 힘들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지숙이 애를 잃고 나서야 아픔 등이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을 테니까. 이 영화가 상당히 관찰자적 시선을 갖고있기 때문에 일반 관객에게 불친절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데, 초현실적인 장면들도 있기는 하지만 출산 장면에서 사실적이었으면 했다. 실제로 내 딸이 태어났을 때 내가 직접 아이의 탯줄을 잘랐다. 출산 장면이나 목욕 장면, 모두 내 실제 경험에서 나온 디테일들이다. 솔직히 아내가 출산하는 순간 자궁을 직접 보진 못했다, 무서웠으니까.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찍어버렸다.

- 배우들의 연기에 어느 정도 만족을 하는가?
박희순의 경우 내가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의 거의 전부를 표현해 내더라.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내가 손쉽게 오케이를 할 수 있었고, 내가 다른 걸 주문하면 그걸 그대로 해보이는 매우 흡수력이 강한 배우였다. 홍소희는 연기 경험과 절대적인 인생 경험이 적은 신인이라 촬영하기 전부터 처음부터 많은 대화를 했는데 그럼에도 매우 헌신적으로 열심히 해주어 좋은 결과를 보여줬다. 개인적으로 <방문자>로 강지환을 발굴한 것처럼 <나의 친구, 그의 아내>로 홍소희를 발굴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장현성의 경우는 처음에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 연기 톤이 많이 달라 당황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하다보니 장현성의 연기가 예준을 훨씬 더 인간적인 결점이 있는, 더욱 인간적인 캐릭터로 만들더라. 결국 장현성이 만드는 예준에 내가 수긍하게 됐다.

- 무명 내지 조연이었던 강지환과 박희순, 장현성, 홍소희 모두 주연급으로 성장하고 유명해졌다. 배우 발굴에 비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비법이 있다기보다는,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나한테 그런 안목이 좀 있는 것 같다. 이창동 감독님도 송강호나 설경구, 문소리 같은 배우들을 발굴하지 않았는가. 나 역시 앞으로 적어도 주인공 중 한 명은 반드시 신인으로 가겠다는 원칙을 지키고 싶다. 스타배우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신인 중에 좋은 배우를 발굴하는 것 역시 감독인 나의 책임 내지 의무라 생각한다.

- 당신 영화는 규정하기 어렵다. 어떤 장르, 어떤 스타일의 영화인가?
<방문자>에 코미디적 요소가 있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는 스릴러 혹은 누아르적 요소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내가 그걸 풀어나가는 방식은 다 일상적인 드라마 형식이다. 인생 자체가 하루는 코미디 같기도 하고, 하루는 신파 드라마 같고 하루는 미스테리하지 않은가. 인생 자체가 장르를 벗어나는데 하나의 장르로 승부를 보는 건 좀 아니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것도 너무 경직된 사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번쯤은 장르영화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제 두 작품을 했으니 좀 더 다양하게 해보고 싶은 게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스케일이 크건 작건 내 작품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존중해줄 수 있는 든든한 제작자와 지속적인 파트너쉽을 맺는 것이다. 이안 감독이 그렇게 성장한 것도 데뷔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예산이 어떻게 되든 책임져주는 제임스 샤무스라는 프로듀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 그 이안 감독이야말로 대중에게 친절한 장르영화의 틀을 사용한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나도 장르에 대해 생각이 많은데... 다만 내가 장르영화를 만든다 해도 내 색깔은 충분히 묻어날 것 같다. "신동일은 어떤 장르를 만들든 고유의 색깔이 있고, 이슈 지향적인 소재를 다루더라도 캐릭터 중심적으로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나가는 재능이 있다."는 얘기를 다른 평론가가 해준 적이 있다. 나만의 전복적인 시선이나 특유의 꼬기 같은 걸 보장해 준다면 얼마든지 상업적인 장르영화를 만들어 볼 의향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 중 코엔형제는 장르를 잘 활용하면서도 장르를 뛰어넘고 장르의 법칙을 변형시킨다. 그런 식이라면 나 역시 장르영화를 해보고 싶다. 문제는 내게 제임스 샤무스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이지만.

- 요즘과 같은 시대에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참 본질적이라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글쎄? 영화는 나한테 애증의 대상이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학교 졸업하자마자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영화를 시작했는가 하면 영화 때문에 인생에 환멸을 느껴서 영화를 포기한 적도 있다. 애증의 대상이고 극복대상이자 위기의 대상이고, 내가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파고들고 싶은 존재다. 아직, 잘 모르겠다.

2009/09/24 22:38 2009/09/24 22:38

프레시안 관련기사 : 어렵고 힘들어? 그럼 십시일반 해야지! - 인디포럼이 채무변제 파티를 여는 이유(새 창으로 열기)

기자이면서 인디포럼 상임작가회의에 속해있어 저 기사를 쓰는 데에 좀 애를 먹었습니다. 기자의 양심이란 건, 대체로 자신이 설사 적극 지지하고 있는 대상이라 해도 어느 정도 거리를 취할 때 건사하기가 쉬우니까요. 그래서 웬만하면 어느 단체에 안 속해있는 게 좋은데... 여전히 고민중입니다. 그러나 제가 인디포럼 상임작가회의에 여전히 속해있는 이유는, 한편으로 다른 생각도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저의 양심을 걸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디포럼을 비판해야 할 때가 온다면, 그 누구보다도 매섭고 통렬하게 비판하겠다는 의지를 전제하는, 양심을 건 지지란 뜻입니다. 만약 제 양심과 위치가 충돌할 때가 온다면, 그땐 또 그때 가서 가장 현명하고 ‘옳은’ 판단과 실천을 해야겠지요.

인디포럼에서 채무변제 파티를 엽니다. 시절은 수상하고, 들려오는 소식들은 어이가 없거나 암울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잘 먹고 잘 자며 잘 놀고 잘 웃으며 힘을 내야 합니다. 말만 ‘초대’지, 실은 오셔서 돈 좀 쓰시란 자리입니다. 하지만 같은 만 원이라도, 좀더 보람차게 먹고 마시며 노는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인디포럼 채무편제 파티가 바로 그런 자리가 될 것입니다. 밑에 붙이는 웹자보를 참조하시고, 기왕이면 웹자보에 안내돼 있는 계좌로 미리 티켓값을 송금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살포시 제 블로그에 비밀댓글을 달아주시면, 파티장 당일 현장에서 티켓을 드리겠습니다. 이 티켓은 액면가 만 원 상당의 술과 안주를 드실 수 있는 티켓입니다. 오셔서 노바리를 찾으셔도 되고 N.을 찾으셔도 됩니다.

indieforumparty_re

2009/09/07 18:54 2009/09/07 18:54

Coco avant Chanel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보석과 옷으로 치장한 귀부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그녀는 남자 승마복을 개조한 바지정장에 납작하고 심플한 모자를 쓴 차림이다. 에티엔의 초대손님인 귀부인들이 대놓고 '미소년'이라고 부를 정도다. 파리 근교 시골에서 낮에는 재봉사로, 밤에는 싸구려 가수로 일하던 가브리엘 샤넬이 '성공'을 하겠다며 문을 두드린 곳은 자신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남작 에티엔의 대저택이었다. 정부라고는 하나 하녀들과 식사를 하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단기용 섹스상대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 뒤 그녀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용을 쓰는 모습이 너무 처절하고 눈물겹다. 소위 '잘난 남자에게 빌붙어 연명하는' 여자들에게 흔히 가질 법한 거부감, 나아가 경멸이 단번에 안쓰러움으로 바뀔 정도다.

'샤넬 이전의 코코.' 국내에서 최근 개봉한 <코코 샤넬>의 원제는 이렇다. 사람들이 샤넬을 다룬 영화에 흔히 가질 법한 기대를 처음부터 차단하고 있는 제목이다. <코코 샤넬>은 고아원 출신의 가난한 재봉사가 어떻게 패션 제국의 수장이 되었는가, 그 고단한 여정과 치열한 싸움을 치르는 코코 샤넬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 미숙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그녀가 귀족의 잠자리 상대에서 영국의 사업가 아서 '보이' 카펠의 정부로 옮아가는 과정을 그리며 참 처절하고 구차한 젊은 시절의 가브리엘의 삶을 스크린에 펼쳐놓는다. 젊은 여자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접근을 했다가도, 가브리엘의 그 구차한 여정에 불쾌감을 느끼며 한 발짝 물러서게 만드는 것이다. <코코 샤넬>을 만든 감독이 배우 출신의 여자 감독 안 퐁텐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역시 여자감독이라 로맨스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라는 선입견을 갖기 쉽다. 하지만 이보다는, "역시 여자감독이라 구차한 여자의 인생의 치부를 제대로 까발렸다"는 선입견을 갖는 게 이 영화를 보는 데에 훨씬 이로울 것이다. 갈 데가 없어 어떻게든 쫓겨나지 않기 위해 에티엔의 저택에 붙어있는 과정도 처절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든 사랑을 위해서든 어느 쪽에서도 그녀가 머문 곳은 '정부'의 자리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만든 결혼 따위의 제도, 흥!"이라고 외치는 급진적인 자유연애론자 여성에게도 정부, 특히 유부남의 정부의 자리는 껄끄럽다. 내가 사랑을 주도하며 적극적으로 기성의 권위와 제도를 부정하는 자리이기보다는,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단물쓴물 다 빨리면서도 제멋에 취한 허세의 자리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른 여성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자리가 되기 쉽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결혼이나 연애와 달리, 부르주아들이란 대체로 결혼은 정략적으로, 연애는 정부와 하면서 실질적으로 다부다처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성공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과 '그렇게 해서라도 성공하고 싶다'는 야망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다. 언제나 후자를 선택한 이들은 손쉽게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전자를 고수하는 사람들 역시 그 유혹에 시달린다. 혹은 가끔은, 후자를 선택하는 여자들이 흔히 자산으로 삼는 미모와 젊음을 질투한다. 젊고 미숙한 여성이 후자의 길을 가면서 혹여 상대를 살짝 잘못 짚고 서투르게 간을 보았다가는 무지막지한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사실 홍상수 감독의 초기 작품들도 대체로 그런 젊은 여자들을 비웃는 영화가 주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이런 식의 갈등과 야심 사이를 적절히 타협하고 봉합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은 결혼'에 대한 환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전자의 여성들이 후자의 여성들에게 갖는 경계와 경멸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다른 여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의 '가상의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경계와 경멸은 어느 순간 매우 손쉽게 연민과 이해로 전화되곤 한다. 그러고 보면 <코코 샤넬>을 만든 안느 퐁텐 감독의 시선은 가브리엘 샤넬에 대한 이 양면의 시선을 고루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이미 전작 <프라이스리스>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샤넬로 몸을 휘감은 전력이 있던 오두리 토투가 출연한다는 사실도 퐁텐 감독의 의도를 한층 강하게 설득한다. <프라이스리스>에서 오두리 토투가 맡았던 캐릭터의 진짜 정체는 '꽃뱀'이었다.

Coco avant Chanel

영화의 말미에 비로소 제시되는 "코코 샤넬은 일을 하지 않는 일요일을 가장 싫어했다"는 자막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짐작하게 된다. 샤넬을 진정으로 구원한 것은 상류사회에서의 더부살이도 연애도 아닌, 일, 그러니까 '노동'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그러므로, 샤넬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 결국 '노동의 자격',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신의 노동물에서 소외되는 일반적인 임노동자가 아닌, 장인으로서 노동하는 자가 되는 자격과 여건을 갖추는 과정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셈이다. 남자옷을 입은 채 귀족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샤넬의 모습에서 온몸으로 사회와 부딪치고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샤넬이 결국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남자옷을 입고 다니긴 하되 지배계급 남자들의 지위를 정말로 위협하지는 않아서였을 것이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서 힐러리 스웽크가 잔혹하게 살해된 것은 그녀가 '감히 남자들의 영역을 침범한' 데에 대한 보복과 응징이 아니었던가. 그에 비하면 샤넬의 남자옷 차림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페미닌한 옷을 입지 않는다고 그에게 툴툴대는 에티엔의 태도가 딱 그것을 증명한다. 그녀는 새로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아내와 딸들에게 기꺼이 사줄 만한 옷을 만들어 제공한 셈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샤넬의 성공은 어쩌면 귀족 시대에서 부르주아 시대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간 유럽에서 복장과 표식, 그로 인한 '인간의 몸에 두른 상징'의 표준을 귀족의 것에서 부르주아의 것으로 바꾸는, 시대적 전환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공로의 결과라 할 수도 있다. 바닷가의 억센 어부 노동자들의 작업복에서, 고아원에서 살던 시절 제복에서 영감을 받은 그녀의 소위 '심플한' 옷은, 귀족의 아내보다는 부르주아의 아내와 딸들에게 일차적으로 어필하는 옷이었다. 지금도 샤넬을 선호하는 이들은 전문직 커리어 여성 혹은 소위 '비즈니스 우먼'이다. 샤넬의 옷은, 페미니즘 이전의 시대에도 남자 노동자와 다르지 않게 땀을 흘리며 육체노동을 해야했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평상시 즐겨입을 만한 옷도 아니었다.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샤넬에 대한 칭찬이 지칭하는 '여성'에 과연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얼마나 고려되었겠는가. 언제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패션 거장들이 만들어 트렌드를 일으킨 명품 디자인이 세상을 몇 바퀴나 한참 돈 끝에 세속적으로 한참 하락한 버전의 옷을 입는다. 적어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의 대사에 의하면 그렇다.

재클린 케네디 오아시스가 즐겨 입었고 심지어 케네디가 죽었을 당시 입었다는 옷,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서 소위 '청담동 며느리룩'이라 통칭되는 옷이 바로 샤넬 트위드 정장이라는 사실이 뜻하는 것. 그리고 오두리 토투가 젊은 시절의 샤넬을 연기할 배우로 낙점을 받았다는 것. (물론 샤넬의 현재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오두리 토투 대신 페넬로페 크루즈를 원했다지만.) 이 모든 것이 '샤넬'이라는 대명사가 드러내는 복잡미묘한 빛깔들과 연결된다. 적극 지지하고 존경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은근하고 뒤틀린 호감을 갖게 되는 대상. 그렇기에 매 상품마다 붙어있는 그 비싼 가격에 아이러니를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 샤넬은 그런 사람이다. <코코 샤넬>이 새삼 상기시키는 것 역시 바로 그런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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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4 16:08 2009/09/04 16:08

G.I.Joe

병헌 리는 어디에?

최근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인 김성욱 영화평론가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대한 글에서, 이 시리즈가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하드한 바디'에 대한 열광을 언급하면서 최근 일련의 헐리웃 블록버스터들이 주로 전쟁영화의 양상을 띄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새 창으로 열기)그 글에서 그는 <터미네이터 4>와 <스타트렉 : 더 비기닝>, <트랜스포머 2>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이 변형된 밀리터리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드러낸다. 그리고 막 개봉한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 역시 그가 지적한 바로 그 점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이 일련의 선상에 놓을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애초 제목부터 미군 병사를 뜻하는 이 영화는 나토 산하의 최첨단 비밀 군대인 '지.아이.조' 부대가 최첨단 무기를 노리는 '코브라' 군단과 맞서싸우는 액션을 골격으로 한다. 일반 군인이었던 듀크(채닝 테이텀)와 립코드(말론 웨이언즈)가 부대에 새로 합류하면서 그들의 시점으로 지.아이.조 부대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시작한 뒤, 지.아이.조의 일원으로 코브라의 음모에 맞서는 주축이 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무기들을 사용하는 두 집단의 싸움은 한편으로 판타지의 성격을 띄기도 하고 영원한 맞수인 스톰 섀도우와 스네이크 아이즈의 대결은 검술 액션 및 동양 무술(이라 고 사람들에게 여겨지는 것)에 크게 의지하기는 하지만, 지.아이.조 부대나 코브라 군단 공히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군대들이다. 이들의 싸움에 큰 비중을 할애하는 영화는 결국 전쟁영화로, 그리고 변형된 밀리터리물로 기능한다. 이것은 김성욱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낙관적인 과거로의 회귀와 향수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손상된 미국의 가치와 미국민의 정체성의 회복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아이.조 피겨들이야말로 오히려 일본이 원산지인 트랜스포머 완구들보다도 더욱 미국적인 장난감들이 아닌가.

하스브로 사가 1964년에 처음 내놓은 액션 피겨와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코믹스에 근거하는 <지.아이.조>는, 장난감 완구를 가지고 하드한 액션영화를 만들며 소년관객층 및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자란 남자 어른들을 집중공략한다는 점에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여러 모로 닮은 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하스브로 사는 사실 지.아이.조의 액션 피겨뿐 아니라 트랜스포머 완구를 만든 회사이기도 하다. 그간 트랜스포머와 지.아이.조 피겨들을 바탕으로 TV물과 비디오게임의 제작에 몰두했던 것을 넘어서서, 하스브로 사는 영화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3부작으로 기획된 <지 아이 조> 시리즈의 공동제작사로도 이름을 올리며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하스브로 사는 크레딧에만 간신히 이름을 올렸던 것과 달리, <지.아이.조>에서는 영화의 맨 처음 시작, 그러니까 파라마운트 사의 로고보다도 먼저 자사의 로고를 올림으로써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보다 한결 높아진 '공동제작사'로서의 위상을 자랑한다.

게다가 두 영화에 공통으로 프로듀서로서 이름을 올린 이는 다름아닌 로렌조 디 보나벤추라다. 워너 사에서 해외제작 파트 사장을 역임하며 <매트릭스> 시리즈와 <해리 포터> 시리즈를 발굴해 제작총지휘를 담당했던 디 보나벤추라는 워너에서 독립해 자신의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파라마운트 사와 퍼스트룩 계약을 맺으면서 <콘스탄틴>, <둠> 등을 만든다. 그러다 손을 댄 것이 바로 <트랜스포머> 시리즈이고, 이 시리즈의 성공으로 비로소 <지 아이 조> 시리즈의 제작에 착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G.I.Joe

오오 이 늠름한 어뤼지날 어메뤼칸 솔져를 보라!

마이클 베이의 <트 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로봇들의 변신을 표현하는 비주얼은 10대 이하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다소 과한 면이 있다. 주인공 역시 고등학생(1편) 및 대학 신입생(2편)으로 설정하면서 비슷한 나이 혹은 그보다 살짝 아래의 청소년들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것이다. 미카엘라 역을 맡은 메건 폭스의 몸을 강조하는 비주얼 역시 성인 남성관객과 함께 사춘기 소년관객들의 리비도를 직접적으로 공략한다. 그에 반해 스티븐 소머즈의 <지.아이.조>는 보다 어린 아동들을 타겟으로 하는 아동물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얼개나 구조가 <트랜스포머> 시리즈보다도 훨씬 단순할 뿐 아니라,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 캐릭터들간 갈등을 구축하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유치하다'고 평해버릴 문제는 아닌 것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10세 ~ 12세 아동의 눈높이에 맞췄다는 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아이.조 부대원 중 하나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듀크와 베로니스(시에나 밀러) 간의 애증의 관계 역시 소년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선에서 단순하게 정리돼 있다. 물론 <지.아이.조>의 액션 장면도 <트랜스포머> 못지않게 굉장히 하드한 데다 물량을 대거 투입하기는 했지만, 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 온 부모들을 배려하는 면이 짙다. 오히려 아동물을 이 정도로 하드하고 공들여서 만들었다는 점이 더 놀랍게 여겨진다. 단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공을 들여 표현하는 액션씬 중 하나인 파리 시내 씬에서, 채닝 테이텀의 듀크과 말론 웨이언즈의 립코드는 '증강수트'를 입기는 했으나 수트가 주는 능력을 감당하지 못해 씬 내내 뒤뚱대며 파리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 이 장면은 일차적으로 지.아이.조 부대의 놀라운 무기와 장비들에 대해 두 '신입' 주인공을 통해 관객들에게 경이로운 감탄과 액션의 쾌감에 웃음을 섞어주기 위한 장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자기 능력에 부치는 힘을 갑자기 갖게 된, 몸은 어른이되 정신은 아직 아이인 어린아이들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여기에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지.아이.조> 시리즈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기도 한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말그대로 변신하는 '로봇'이 중점이라면, <지.아이.조>는 아무리 강력한 능력을 자랑한다 해도 '사람'이 중심이 된다. <트랜스포머>에서 전면에 나서는 기계들이 하드한 바디 안에 주체적인 목적과 인격을 지닌 독립적 존재인 것과 달리, <지.아이.조>에 등장하는 기계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연성 육체를 중심으로 신체의 능력을 증강시켜주는 다양한 보조물과 도구에 해당한다. 이는 <트랜스포머>보다 오히려 '전통적인' 관점을 채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G.I.Joe

남의 나라 국보는 왜 부수고 길거리는 왜 난장판으로 만드는지...

 

나아가 로렌조 디 보나벤추라가 자신의 제작사에서 직접 제작을 한 첫 작품이 코믹스 원작인 <콘스탄틴>이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트랜스포머>와 <지.아이.조>의 제작이 가시화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90년대 말에서 최근까지 풍미한 코믹스 출판사들의 영화계 진출 덕이라 할 수 있다. 한동안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톰 클랜시 등의 대중소설들을 블럭버스터의 원천으로 삼아왔던 헐리웃에서 마블과 DC의 주인공들이 스크린을 누비게 되면서 두 출판사가 모두 직접 제작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전히 더 많은 코믹스와 그래픽노블의 주인공들이 스크린에서 실사의 옷을 입기 위해 대기중이기는 하지만, 헐리웃의 제작자들은 코믹스와 소설뿐 아니라 이제는 완구들에 눈을 돌렸고, 하스브로 사 역시 아직은 공동제작의 수준이긴 해도 영화제작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수순은 당연히 게임회사들이다. 그간 영화사에 판권을 파는 것으로 만족했던 게임회사들 역시 직접 영화제작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블리자드는 오랫동안 '디아블로'의 영화화에 공을 들이며 '디아블로'라는 제목을 다른 영화가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어해왔고, 최근에는 '워 크래프트'의 영화제작을 선언하며 샘 레이미와 감독 계약을 맺었다는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그간 시도는 무수했으되 하나같이 실패로 끝을 맺었지만, 완구와 코믹스, 그리고 비디오 게임을 모두 거친 소스들을 영화화한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지.아이.조> 시리즈의 성공은 이러한 양상에 변화를 줄 것으로 보인다. 이미 CG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블록버스터들에 전방위적으로 사용되면서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가능하며 심지어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완숙한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작품들이 바로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트로이>라 할 수 있다. 헐리웃의 블록버스터의 전략변화 그래프에서 하나의 거대한 변곡점을 찍어준 작품들이 케케묵은 고전(!) 문자 텍스트를 원작으로 삼았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어쩌면 이 두 작품이야말로 문자 텍스트를 원작으로 삼은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다. 문자 텍스트와 그림을 결합한 코믹스와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가 두 작품 이전부터 활발하게 영화화되고 있었으며, 지금은 또 다른 매체의 '움직이는 동영상'을 원작으로 한 영화화가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으니 말이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지.아이.조> 시리즈는 말하자면 그 과도기에 있는 영화들이라 할 수 있으며, 변곡점을 지난 직후 첫 시기에 해당하는 변화들을 표현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두 시리즈야말로 이후 헐리웃 블록버스터들이 향하게 될 방향을 예측하게 해주는 등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ps1. 프레시안 기사(새 창으로 열기). 뭔가 리뷰처럼 시작해서 산업기사가 된 듯한, 하여간 스스로 요즘 지지리도 글 못 쓰는구나 싶었던 기사. "영화는 정말 재미있더라... 초딩물이라 생각하면." 이라 말할 때의 그 복잡(...)한 뉘앙스를 살리고 싶었는데, 진지하게 쓰다보니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시니컬한 뉘앙스를 넣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여간 마지막 액션씬은 영화가 가장 공들인 비장의 장면이었는데... 잤다능. 역시 초딩물은 내 취향 아니라능. 나한텐 지.아이.유격대 액션피겨  갖고 논 유년기의 경험 따위가 없기 때문에...

ps2. 은근히 출연진이 화려하다. 채닝테이텀과 시에나 밀러는 원래 아웃 오브 안중이었는데, 영화가 시작하자 거대 기업 회장님으로 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이!! 거기에 미국 대통령이 조너선 프라이스, 지.아이.조. 부대 장군이 데니스 퀘이드, 시에나 밀러의 오빠가 조셉 고든-레빗, 립코드는 말론 웨이언즈라니, 허허. 근데 조셉이가 시에나의 오빠라는 게 말이 되냐능?  조셉이가 훨씬 앳돼보이지 않냐능? 아이고 조셉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

G.I.Joe

이 분 나오는 거 보고 깜놀... 아니 옵빠 여기서 뭐하고 계신가요. (라곤 하나 역시 포스가 넘치심)

 

ps3. 7월 말쯤 봤는데, 보기 전에 이병헌 헐리웃 진출 어쩌고 하는 얘기를 또 하나의 과장의 수사여구로만 치부하고 뭐 조금 나오다 죽겠네 했는데 웬걸, 주인공이랍시고 나오는 애들보다 훨 나은데다 정말 비중이 높아서 또 깜놀했다. 그러고 보면 헐리웃 진출 시도했던 배우들 중에선 가장 알차고 실속있는 결과를 챙긴 듯. 영화야 초딩물이지만 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 같은 분도 나오신단 말이다!! 근데 이병헌은 언제 그리 영어발음도 다듬고 액션도 배웠대? 칼놀림이 무난하두만. 뭐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액션 전문배우가 아닌데 무난하게 해냈으면 굉장히 잘한 거 아니냐능. 하여간 영화에서 제대로 자기 몫 똑 따먹은 듯하여 기특하심. 이 사람은 역시 약아빠진 여우 같음. (이거 칭찬임)

ps4. "얼굴이 나와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었는지 국내에서는 캐릭터 포스터를 다 새로 만들었더라. 사실 미국에서 캐릭터 포스터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병헌이 얼굴 어디갔어, 두건으로 다 가렸구나"라며 말이 많았는데, 영화 홍보하는 입장에선 얼굴 나오는 거로 다시 만드는 게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솔직히 왼쪽 것이 더 간지나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게다가 미국의 캐릭터 포스터들은 다른 애들도 다 얼굴이 잘렸던데.

G.I.Joe

스톰섀도우 오오오 젤 멋지더라

G.I.Joe

이건 악당같지 않아! 무슨 은빛 성기사냐능.

ps5. 스티븐 소머즈의 영화를 모조리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다가 들었다. 그러니까 스티븐 소머즈는 이제까지 쭈욱 일관되게 아동물을 만들어온 감독이구나, 싶더라. 10살 미만의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 가서 두 시간 정도 애들 조용히 시킬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미이라>는 물론이고 심지어 <반헬싱>도 아동물이었어! 라는 깨달음이 문득.

ps 6. 그러고보니 귀염두이 브렌든 프레이저가 카메오로 출연했었다. 보다가 미친 듯이 웃었음.

ps 7. 올블로그에 이병헌 인터뷰(새 창으로 열기)가 떴길래 봤는데 재밌네. 역시 이 사람은 여우다 싶다.

2009/08/12 10:11 2009/08/12 10:11

아마도 근간 가장 ‘괴작’을 뽑으라면 작년 하반기에 개봉한 <모던 보이>와 함께 <차우>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모던 보이>가 괴작인 건 너무 훌륭한 면과 너무 후진 면이 어이없이 섞여서인데, <차우>의 경우는 좀더 '괴작'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즉, 괴상한 영화라는 뜻이다. 언론시사로 처음 <차우>를 봤을 때 워낙 당황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이 영화의 유머를 꽤 즐기게 됐다. 시사 나와서는 모 평론가님과 인사를 하다가 “영화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영화의 지지자 쪽에 가깝다. 사실 <차우>는 개봉 직전까지도 <괴물> 이후 가능성이 보였으나 그만큼 위험도 여전히 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대괴수가 출현하는 재난영화’로,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서 포장돼왔다. 그런 만큼 관객의 입장에선 <괴물>의 완성도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그 2/3 정도는 되기를 기대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확인한 <차우>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대체로 괴수물이란 언제나 우리 세상 너머에 우리 힘으로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괴수의 존재, 우리가 평소 상상은 할지언정 현실에 존재한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존재가 봉인을 뚫고 나와 현실 세계를 위협할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고독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미지와 미래와의 대면을 은유를 읽어내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괴수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세계의 파괴를 쾌감의 코드로 목격하게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쾌감을 두 가지 층위로 즐길 수 있다. 우리 세계가 파괴를 당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며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 혹은 괴수에게 은밀한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얻는 사디즘적 쾌감. 그리고 그 사이, 순수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체가 우리 세계를 때려부술 때에 오는 ‘타격감’. 그러므로 괴수물의 당연한 공식에서 시선의 방향이란 안에서 밖을 향하는 것이 된다.

<차우>가 그런 괴수물이 아닌 것은,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차우>는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과 습격이 가해졌을 때 그 시선을 괴물이 있는 저 너머 바깥 어디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내부로 돌린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양상들을 양식화시켜 보여주고, 여기에 약간의 과장과 비틀기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코미디에 열중한다. 그 ‘외부의 충격’이 <차우>의 경우 식인 맷돼지의 습격인 것이지만, 이쯤 되면 사실 ‘차우’가 얼마나 이상한 변종이고 세고 크고 무섭고 포악한지 기타 등등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사실 맷돼지가 아니라 운석을 타고 떨어진 외계의 괴생명체라 한들 이 영화가 그리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진 않다. 맷돼지는 앞에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 계속 안 나와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일리언>을 모범적으로 베껴서 앞에 계속 나올 듯 말 듯 그림자로만 비추다가 맨 마지막에만 한 번 제대로 나오던가.

어쨌든 뭔가 무시무시한 놈이 잊을 만하면 마을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며 패닉을 가져온다. 절박함은 강도가 심할수록 우스꽝스러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박한 놈만 절박하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또 맷돼지가 공격을 해오거나 말거나, 마치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 약이라도 단체로 먹는 듯 허허실실 천하태평이다. 자기만 안 당하면 된다 이거다. 그러므로 대체로의 괴수물이 절박함에 방점을 찍고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괴수가 화면에 전면 등장하면서 다 때려부술 때의 타격감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맷돼지를 잡겠다며 차우와 대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비장함을 (자기가 당하지 않았다고) 별 거 아닌 것 취급하며 태평한 마을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도 튀어나온다. 맷돼지가 습격하거나 말거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을 활개치는 소위 ‘꽃 꽂은 분’이나 도시인들에게 장사를 해먹는 마을농장 관계자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나 꽃 꽂은 분은 애초에 맷돼지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내 맘대로 장르명을 작명한다면, ‘괴수물’보다는 오히려 ‘농촌소동극’ 정도가 될 듯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신정원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크고 무서운 맷돼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이 영화의 스타일대로라면, 차우가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수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차우

겉보기는 이렇게 멀쩡하고 폼나는데... 사실은 허당이다. 죄다.

농촌소동극으로서, 코미디로서 <차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신정원 감독의 유머감각이 소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굉장히 웃기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도 무지 웃었다. 맷돼지와 싸우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하나하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떨어진 면이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도 상황도 참 어이없이 웃기거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부분이 많다. 멀쩡하게 생긴 형사가 사람들이 안 볼 때면 음료수고 담배고 몰래 챙기고 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잘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 든다거나. 최고의 포수라는 이가 잘난 척 양키 포수들을 대동했지만 그들의 말을 실제론 알아듣지 못하고 선머슴같은 여자에게 가슴을 두근대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거나. 나름 비장한 얼굴로 생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감당하듯 보이던 서울내기 순경이 실제로 집안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신경질로 반응한다거나. 맷돼지에 대해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대포로 수색대를 따라나선 대학원생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꺼내들며 수색대에 ‘연출’을 하려들고 이들 수색대 역시 이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마을이 처한 대위기에 맞서 그 누구 하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폼은 그럴싸하나 알고보면 모조리 허당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편이, 실제 현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영화 속 세상뿐일 테니. 게다가 씨네21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차우의 수색에 나서는 건 죄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뒷짐지고 가만히 있는데 이들 외지인들이 차우를 잡겠다며 나서서 벌이는 소동들이,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문제는 예산이다. 식인 맷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공포와 고난과 분투를 그리는 영화로 선전되며 그 정도의 CG와 예산이 들어간 영화라는 건, 마치 연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길래 스테이크를 먹게 될 줄 알고 기대했더니 맛은 꽤 별미이나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비싼 떡볶이가 나온 형국이라 해야 할까.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새 창으로 열기) <차우>는 순제만 70억에 이른다. P&A 비용까지 합치면 총제작비는 100억원에 육박한다. 너무 비싼 떡볶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떡볶이를 무지 좋아하긴 한다.) 난 차라리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처럼 예산을 적게 들이되 맷돼지의 모습을 그림자나 정황으로만 제시하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우> 식의 코드라면 맷돼지가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의도적으로 조잡하거나 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유머가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 만들려다 안 될 게 너무 뻔해지니까 중간에 차라리 망치려면 제대로 망치자며 막 가는’ 코미디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엄태웅의 엉덩이가 노출되는 게 무슨 찐한 멜러 영화도 아닌 <차우>라는 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지만.

 

차우

큰 웃음 주신 신형사 역의 박혁권.

<차우>를 보는데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계속 생각났다. 처음 맷돼지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 묘지 위 언덕에서 경관들이 차례로 관 앞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롱테이크 씬 역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풀숏으로 먼 거리에서 찍으면서 롱테이크로 가는데 둑방 위에서 누군가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두 영화의 그 장면들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씬으로, <차우>에서의 그 씬을 단순한 개그씬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역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되, 절박함 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봉준호 식 낯선 유머 코드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모두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능란하게 교차된다. 그렇기에 <차우>의 오히려 안으로 향하는 시선과 묘하게 상통하믄 부분이 있다. 이후 <마더>에서도 드러나듯 너무나 생생한, 한편으로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오히려 실은 판타지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한국적인 시골스러움’에 대한 묘사가 신정원 감독의 <차우>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이건 신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난 아직 <시실리 2km>를 보지 못했다.) 다만 <차우>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시도하지만 적절히 통제하는 어떤 코드의 유머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 <차우>를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 그 실소를 진심으로 즐기게 되는 것도, 그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 때문일 것이다.


ps. 지금 시간 23시 39분. 지금 읽어보니 어찌 이리 비문과 오문이 난무하고 글이 엉망진창 왔다갔다 하는지. 글을 조금 다듬었다.

2009/07/27 17:23 2009/07/27 17:23

Vinyan

엠마뉘엘 베아르 언니의 무시무시한 얼굴.

태국 푸켓에서 6개월 전 쓰나미로 어린 아들을 잃은 벨머 부부는 푸켓을 떠나지 못한 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자선파티에 참석한 도중 부부는 우연히 버마의 깊은 숲 속 바닷마을을 찍어온 영상에서 자신의 아이처럼 보이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아들을 찾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확신이 없는 남편 폴은 여행 내내 회의에 시달리지만, 아내의 믿음은 굳건하며, 이 여행을 계속 추동한다. 심지어는 남편을 속여 사기꾼에게 거액의 돈을 넘기면서까지 말이다. 이들의 여행길은 점차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버마의 원시림으로 향하고, 얀은 점차 집착과 광기로, 폴은 공포로 빠져든다.

영화는 오프닝 크레딧부터 매우 강렬하고 압도적인 비주얼과 사운드로 시작한다. 화면을 꽉 채우는 타이포그라피의 오픈 크레딧, 아마도 바닷속의, 수많은 물방울 기포 사이로 철렁대는 긴 머리카락, 점차 핏빛으로 변하는 물방울들, 그리고 처음엔 찰싹대는 잔잔한 파도소리에서 점차 소리가 커지며 불쾌하게 귀를 긁어대는 사운드까지. 마침내 도저히 이 소리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가 돼서야, 영화의 스탭롤이 끝나고 소리도 멈춘 뒤 본 화면으로 전환된다. 쉰이 다 돼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20대적 젊음과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엠마뉘엘 베아르의 비키니 수영복 씬이다.



(이하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Vinayn

종종 자연과 등치되는 모성애는 원래 무섭고 잔인하고 눈먼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이 중 하나로 조셉 콘라드를 꼽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나뭉님이 지적한 대로 <지옥의 묵시록>을 강하게 연상케 한다. (<지옥의 묵시록>은 조셉 콘라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일부 영화정보에서는 그래서 [암흑의 핵심]이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라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인물이 모종의 임무를 띄고 다른 인물들 혹은 사회와 동떨어진 곳, 즉 정글 속으로 여행하며 점차 광기에 물들어간다는 설정은, 확실히 <지옥의 묵시록>을 꼭 빼닮은 구석이 있다. 말론 브란도의 커츠 대령이 이미 그랬던 존재고, 그 뒤를 주인공인 마틴 쉰의 윌라드 대위가 쫓는 것이다. 윌라드 대위의 임무는 커츠 대령을 제거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 임무에 성공하지만, 한편으로 그 자신이 또 다른 면에서 커츠 대령을 닮아가며 광기의 중심으로 빠져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커츠와 달리 그 광기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게 차이점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 영화, <빈얀>도 그렇다.

<지옥의 묵시록>에서처럼 <빈얀>에서도 벨머 부부가 여행을 계속하면서 정글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자연은 인간이 잘 통제하고 다듬은, 인간을 위로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돼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을 압도하고 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잔혹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이 된다. 제멋대로 자란 무성한 나뭇가지들, 더럽고 탁한 강물과 발목까지 빠져 걸음을 어렵게 하는 진창, 거기에 쏟아지는 비까지. <지옥의 묵시록>에서처럼 <빈얀>의 공간은, 서구인들이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매혹과 공포를 함께 느끼는, 그들 입장에서 소위 ‘원시림’이라 여겨지는 동양의 깊은 밀림이다. 그런데 벨머 부부가 푸켓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빈얀>의 이런 밀림에 또 다른 의미 하나를 더 부여한다. 즉, 이들의 여행이 계속될수록 카메라에 잡히는 야생의 압도적인 자연의 풍경은, ‘여름 휴가를 온 백인들을 위해 아름답게 손질된 동양의 휴양지 해변’인 푸켓과 극명한 대비가 된다는 것이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는 휴양지에서 종종 마주치는, 잠시 지나는 상쾌한 스콜이 아니라, 마치 배우의 몸을 연달아 찌르기라도 하듯,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불쾌한 비다. (배우들이 정말 고생했겠더라.) 그렇다면 6개월 전 벨머 부부의 아이를 앗아간 쓰나미는, 말하자면 잘 통제된 인간의 영역과 야생의 자연이 인간을 압도하는 영역 사이의 어떤 틈새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을 ‘발견하고 탐험하며 지배하고 정복하기를’ 꿈꾸지만, 결코 인간에게 정복되지 않는 자연은 종종 틈새를 찢고 그 사이로 인간이 정복했다고 믿는 어떤 영역을 순식간에 덮치고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다.

Apocalypse Now

마침내 그에게 다가간다. 그를 죽이기 위하여.

<빈얀>은 그러나, <지옥의 묵시록>과 다르다. <빈얀>의 벨머 부부는 커츠 대령이 아니라, 커츠 대령과 똑 닮은, 그러나 그런 식의 ‘절대적 아버지’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들을 죽이는’ 무수한 어린아이들을 만난다. 옷은 모두 팽개친 채 사타구니에 두건만 두르고 얼굴에 온통 허연 회칠을 하고 눈과 입 주위를 붉게 칠한 이 아이들은 처음엔 한둘, 그 다음엔 서넛, 그 다음엔 대여섯이 벨머 부부의 눈에 띄고, 그 때까지만 해도 부부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이 수백이 한꺼번에 모여들 때, 그것은 확실히 충격과 공포가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의 충격은 마치 <지옥의 묵시록>의 엔딩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양상이 된다. 아마도 식인을 하는 듯한, ‘원시인’이라는 다소 차별적인 말이 딱 떨어지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흉폭한 자연에 적응하고 그 일부가 돼버린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산 채로 귀신이 돼버린’ 존재들인지 모른다. 사회와 상징계를 떠나 그저 실재로만 존재하는 아이들이라니, 사실 이거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아닌가. 그러니 상징계에 속한 인간의 눈에는 이들이야말로 귀신이 아닌가.

아이들에게 남자 어른들이 차례로 죽음을 당할 때, 우리는 어쩐지 그 죽음에서 공포와 함께 일종의 경외감과 슬픔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나 그 아이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얀을 향해서는 끝없이 손을 내밀며 그녀의 몸을, 특히 가슴을 쓰다듬기에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 아이들이 여자를 살려두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다. (벨머 부부가 아이들과 처음 마주쳤을 때 아이들과 함께 있던 노부부는 둘 다 아이들 앞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겁에 질려있었고, 아이들은 노부부 중 남자 쪽을 죽인다.) 말하자면 아이들의 살인은, 인간의 ‘사회’의 룰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의 일부이면서,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한 존재들에 대한 응징과 처벌의 뉘앙스를 띄고, 상대적으로 자신을 돌보아줄 모성 – 자연은 종종 모성과 등치된다 – 에 경외와 복종을 바치는 것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아이들을 ‘착취’하며,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즉 자신의 피와 살을 이은 존재만을 중시했던 남자어른들은 (중간에 도망쳐 버린 선장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모두 죽음의 처단을 당한다. 

Vinyan

이 장면에서 아이들은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천진난만한, 유독 사운드로 강조되는 '깔깔깔' 웃는 소리는 충분히 소름끼쳤다.

다만 뭔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버마의 밀림 속 아이들이 원시림 속 야생적인 식인종 원시인으로 그려진 것, 그리고 절대적 공포의 공간이 푸켓에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간 버마의 깊은 산골짜기라는 것, 아마도 감독이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자기 생각에 ‘그저 먼 곳’이었을 뿐이 정치적 격변으로 몸살을 앓는 버마의 숲속이란 게, 차마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얄팍하고 오래된 오리엔탈리즘의 잔재를 보는 것 같다.

한 가지 더, ‘빈얀’이 정말로 태국의 귀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말인가 싶어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 영화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 보고 쓴 이들의 감상문을 대거 읽었다. 미안한데 이 영화는 그렇게 보면, 그 감상문들이 하나같이 전하는 대로 “대체 뭐하자는 영화인지 알 수 없는” 영화가 돼버린다. 이 영화에서 비주얼만큼이나 중요한 게 사운드다. 이 글 두 번째 문단에서도 묘사했지만, 종종 초현실적인 장면과 함께 귀에 거슬리며 불쾌감을 주도록 연출된 사운드가 영화의 공포와 긴장의 분위기를 쥐었다 놨다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파일로 집에서 싸구려 컴퓨터 스피커를 통해 듣는 사운드는 이 영화의 원래 의도된 분위기, 사운드의 강약과 리듬으로 전달되는 그 공포를 결코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한다.


ps 1. 부천영화제 상영작. 7/19 일요일 오후 5시, 부천시청.

2009/07/24 05:01 2009/07/24 05:01
7월에도 마지막 주 화요일에 어김없이 인디포럼 월례비행이 열립니다. 이번 월례비행에서는 '미디어'를 주제로 단편 세 편이 상영됩니다. 끝나고 나면 회비 1만원에 뒷풀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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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3 15:12 2009/07/23 15:12

<여고괴담 5 : 동반자살>(이하 ‘동반자살’)이 시리즈 중 최악의 작품이란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출도 이야기도 배우들의 연기도 가장 딸리고, 심지어는 배우들의 외모도 딸린다. 영화 얘기를 하며 배우의 외모를 트집잡는 짓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간 <여고괴담> 시리즈가 가능성있는 젊은 신인 여배우들을 발굴하는 장으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외모 트집잡기’는 그러니까, 또 하나의 강조법에 불과하다. 영화의 모든 게 최악이니 하다못해 배우의 외모라도 좋았다면 뭔가 변명해줄 거리라도 찾겠는데 그러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1편이야 원래 활동하고 있던 배우들을 캐스팅한 거였으니 넘어가고,) 2편에서 시크한 이영진과 귀엽고 깜찍한 공효진, 3편에서 인형같은 외모의 박한별과 묘하고 성숙한 분위기가 있는 송지효, 4편에서 정말 예쁘다 싶은 김옥빈과 서늘한 매력이 있는 차예련이 발굴됐다. 그렇다면 5편에서는?

소재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고생들의 ‘우정’(굳이 따옴표를 친 이유는 이 ‘우정’이 종종 ‘사랑’의 다른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이 실제로 그런지 안 그런지는 차치하고, <여고괴담> 시리즈는 한국에서 ‘여고’라는 신비화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여고생’이라는 신비화된 존재들에 대한 이런저런 신비한 이야기들, 종종 끔찍한 결말과 비극을 맞고 마는 이야기들을 다뤄왔다. 부모나 선생, 기타 다른 어른들보다도 또래의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나아가 아직 불안정한 상태로 형성 중인 각자의 정체성마저도 함께 공유하려 들고, 그래서 심지어 “화장실도 같이 들어간다는” 여고생이다. 그러니 ‘죽음도 함께 맞자’는 약속을 우직하게 실행해 버리는 여고생의 이야기란, 여고괴담 시리즈의 소재로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그런데 이야기가 풀리는 방식이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동반자살’은 그 자체로 이야기 하나를 다 풀 만한 소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더 깊은 얘기를 하기 위한 표면적 ‘가이드’로서의 소재로 가치가 있다. 아이들이 굳이 ‘동반자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굳이 이유랄 건 없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나이 또래에는 사회적이고 현명한 해결방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회피책일 수도 있고, 죽음, 나아가 자살로서의 죽음 자체가 낭만적으로 미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동반자살>에서 다뤄지는 자살, 특히나 동반자살은 매우 나이브하다. 이것은 <여고괴담> 시리즈를 형식적으로 잇기 위해 별 고민없이 대충, 선택된 감이 있다. 그 결과 첫 오프닝에서의 죽음 뒤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지지부진하다. 미학적인 측면으로도 <동반자살>은 별 매력이 없다. 게다가 영화는 종종 지루하다. 시리즈 고어 중 장면이 가장 세고 많다는데도, 영화는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리고 이 ‘무서움’과 ‘슬픔’이야말로 <여고괴담> 시리즈의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여고생에 대해서도, <여고괴담> 시리즈의 매력에 대해서도 하나도 모르고 있구나,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단순하고 고지식한 캐릭터들이라니, 땅이 꺼져라 한숨이 나올 정도다. 여고생의 특징이라고 보통 얘기되는 불안감과 모호함 따위, 이 영화엔 없다. 소이(손은서)가 느끼는 죄책감도 평면적이고, 유진(오연서)의 탐욕이나 집착 역시 일차원적일 뿐 모종의 절실함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각 캐릭터들은 한 줄 짜리 ‘설정’만 받았을 뿐, 디테일한 캐릭터의 다면성을 부여받지는 못했다. 단서 하나를 알려주는 데에 오만 년, 다음 단서까지 또 오만 년, 그렇게 지리하게 질질끌며 가다가, 알고 보니 (스포일러라서 가린다) 동생에게 빙의해 있던 언니란다. 지루함을 겨우 견디며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어이가 없어서 실소도 나오지 않는 수밖에. 절절한 연인들의 흉내를 내면서도 굳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노라, 강조하는 폼새도 좀 우습다. 언주와 소이 사이에는 어떠한 텐션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고괴담 5 : 동반자살

애틋함도 섹슈얼한 텐션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여고괴담>이 시작돼 그토록 큰 인기를 누리며 5편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를 거칠게 요약해 보자면, 한국이란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가부장적 억압, 그 중에서도 여고생들에게 가하는 이중적이고 더욱 특별한 방식으로 가하는 억압 및 통제와, 사회의 주류인 남성 성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여고생들 특유의 불안과 들끓는 에너지가 충돌하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 파장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이를 더욱 첨예하고 강렬하게 만드는 건 입시지옥과 성에 대한 이중잣대가 은밀히 감춰진, 그리고 이 사회의 주류의 가치관과는 살짝 빗겨나 있는 특유의 룰이 존재하는 여고라는 특유의 공간배경이다. 그런데 이제껏 <여고괴담>을 만들어온 주체들은 대부분 성인 남자들이다. 그들은 <여고괴담>에 등장하는 여고생들을 어떻게든 본인들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있을 법한’ 존재들로 만드는 데에 주력하면서도, 특정한 부분은 ‘더욱 이해 못할 부분’으로 남겨두며 신비화 해왔다. 관객들 역시 (그들 자신이 여고생이건 아니건간에) <여고괴담> 시리즈의 여고생들을 타자로 보는 데에 익숙하다. 그 결과 <여고괴담> 시리즈의 인물들은 언제나 매혹적인, 절대적인 ‘타자’로서, 그리고 ‘거울’과 같은 존재로 스크린을 누볐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식의 ‘노력과 결과의 엇나감’이 오히려 <여고괴담>의 인물들을 더욱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앞서 <여고괴담> 시리즈의 생명력의 원천으로 지목한 ‘무서움’과 ‘슬픔’이 발생하는 지점, 나아가 시리즈 중 일부 작품이 기적+적으로 성취해낸 ‘시적인 아름다움’의 근원도 바로 이 지점이다.

<여고괴담> 시리즈가 나온 지 벌써 10년, 그 10년간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위상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성년’의 기간을 보내는 여고의 공간의 특성이 많이 변한 만큼, 이제 어떻게든 그런 현실상의 변화와 그로 인한 시리즈의 변화도 반영해야 했던 게 사실이다. 앞선 이야기들 역시 언제나 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여고괴담>의 세계를 진화시켰던 게 사실이다. 1편에서 ‘어떻게든 여고라는 지긋지긋한 공간을 빨리 떠나는 게’ 아이들의 목적으로 보인다면(그래서 귀신은 학교에 계속 남는다), 3편인 <여우계단>에선 ‘예고’라는 공간이 주는 특혜와 이점을 그 누구보다 잘 이용하려는, 사회적으로 크게 진출하려는 예술가 지망생들이 등장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그간 <고사 : 피의 중간고사>처럼 <여고괴담> 시리즈의 영향을 분명히 받고 차용했으나 <여고괴담>의 직계는 될 수 없었던 영화들도 등장했다.

감독이나 제작자가 이 점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동반자살>에서 시리즈 내 최초의 ‘순수한 악당’ 캐릭터가 등장한다거나 미국 틴에이저 영화에서 주로 등장했던 ‘여왕과 시녀’로 구성된 패거리가 나오고, 심지어 남학생과의 교제와 임신 문제까지 다루는 걸 보면, 새로운 변화에의 강박이 꽤 컸던 듯하다. 그럼에도 <동반자살>의 감독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여고괴담>의 여고생들에게 매혹되는지, 왜 이 시리즈를 그토록 좋아했는지는 감도 잡지 못한 것같다. 전편들에서 각각 인기있었던 설정을 하나씩 따와 잡탕을 만들어 버리지만, 그 설정들이 왜 그 편에서 그토록 인기였는지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듯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 시리즈의 질긴 목숨을 꼭 유지해야만 하나, <동반자살>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고괴담> 시리즈는 여전히 매력있고 할 얘기도 많은 시리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매력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는, 나쁘지 않은 시리즈다. 이전에 눈앞에 너무나 명백하게 보였던 억압이 덜해졌을 뿐, 우리의 10대 여성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더 은밀해진 억압과 통제과 경쟁에의 강요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반자살>의 애초의 운명은, 앞엣 시리즈를 정리하고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시리즈로 도약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에 불과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성공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실패함으로써 강력한 변명과 근거를 제공해준 듯하여 보는 기분이 그닥 좋지 않다.

2009/07/23 06:03 2009/07/23 06:03

trailer-lesbian-vampire-killers 여자친구에게 7번째 차인 쑥맥 지미와 사회부적응자에 여자만 보면 화색이 도는 플레치가 영국의 시골 중에서도 시골 크랙위치로 하이킹을 떠난다. 그런데 이 곳은 오래 전 강력한 레즈비언 뱀파이어 퀸인 카밀라가 죽으면서 저주를 내렸던 곳. 그래서 마을 처녀들은 18세가 되면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변해버린다. 카밀라는 맥클라렌 남작의 성검에 죽음을 맞으면서 맥클라렌의 마지막 후손의 피가 숫처녀의 피와 섞이면 자신이 더욱 강력한 힘을 갖고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크랙위치에서 지미와 플레치 일행은 우연히 만난 네 명의 미녀와 산장에서 묵게 되고, 곧 자신을 공격해 오는 여자 뱀파이어들에 맞서 악몽같은 하룻밤을 지내야만 한다. 어벙하고 쪼잔한 지미는 마침내 이곳에서 자신의 혈통과 운명을 알게 된다.

필 클레이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LVK>에서 LVK는 Lesbian Vampire Killers, 즉 ‘레즈비언 뱀파이어 킬러’의 약어다. ‘레즈비언 뱀파이어’란 말이 들어간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온갖 B급 유머와 음담패설로 무장한 뱀파이어물 코미디로, 영화제 측의 소개에 의하면 이번 영화제 상영작 중 가장 재미있는 영화 중 한 편이다. B급 호러치고는 컴퓨터 그래픽이 꽤 사용되기는 했지만,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조잡해보이는 CG의 질마저도 영화의 흥겨운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데 일조한다. 감독 스스로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이들은 딱 15살 남자아이들의 정신연령을 가졌다”고 GV에서 언급할 정도로, 이 영화가 구사하는 농담과 유머, 그리고 전제하고 있는 가치들은 정치적 공정함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애저녁에 은하계 저 편으로 날려버렸다. 플레이보이 모델풍으로 생긴 화려한 여자들이 아찔한 차림으로 울타리를 넘는 모습을 앙각으로 카메라를 잡아 슬로우 모션으로 비춘다거나, 주인공들이 그들이 한껏 몸매를 과시하며 춤을 추는 걸 침을 잔뜩 흘리며 쳐다보는가 하면, 그런 예쁜 여자들이 뱀파이어 퀸의 저주에 따라 18세만 되면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에 통탄하며 툭하면 남자의 성기나 여자의 가슴, 혹은 게이에 관한 질 낮은 농담을 내뱉는 식이다. 심지어 말뚝을 박거나 성수를 뿌리면 뱀파이어들이 거품을 부글대며 정액을 연상시키는(!) 우윳빛 피를 분출하며 죽을 정도다. 뱀파이어가 된 여성들이 벌이는 진한 키스씬도 이성애자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단단히 고려하고 만든 장면들이다.

단순히 장면만 그런 게 아니다. 뱀파이어는 원래 관능적인 존재로, 18세의 성인이 된 여자들이 모두 레즈비언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은 스트레이트 남성들에겐 악몽일지 몰라도 ‘여성의 힘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보여주는 클리셰에 가깝다. 뱀파이어 퀸의 저주에 걸려 모두 레즈비언이 되고 뱀파이어들을 신나게 쳐부수는 이 영화야말로, 얼핏 보면 더없이 편견에 가득한 동성애 및 여성 혐오 영화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미, 플레치, 마을의 목사님과 함께 뱀파이어 사냥에 나서는 로티는 가장 노출이 적은 탓에 유일한 생존자가 되고, 안경을 걸쳤다는 것으로 미모는 물론 지성까지 갖춘 존재로 상정되며, 무려 숫처녀에다 저 바보같고 소심한 지미를 좋아하기까지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지미를 구해주기도 여러 번이다. 이렇게 완벽한 여자가 지미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데다 레즈비언 뱀파이어 사냥에 나서는 충실한 이성애 신봉자이기까지 하니, 15살 정신연령의 남자들에게 로티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인 셈이다. 결국 가부장적 권위의 화신이나 다를 바 없는 목사와 이들에 기생해 사는 찌질한 남자들, 그리고 여성적 힘으로 뭉친 여자들과 적대하며 남자들 편에 선 여자가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고 연대한 여성들을 잡아 죽이는 형국이 된다.

Best_Lesbian Vampire Killers_Still (1)

그런데도 이 영화는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낄낄대거나 폭소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길티 플레저’로서의 웃음을 제대로 선사하며 흥겹고 캠피한 매력을 전한다. 의도적으로 옛 ‘싼 영화’를 흉내낸 자막과 화면들, 다소 과장된 여자 캐릭터들의 연기, 없이 얄팍하고 뻔뻔한 플레치와 소심하고 어벙한 지미 콤비의 궁합, 그리고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장면들이 주는 유쾌한 에너지까지. 지미를 괴롭히던 못된 여자친구가 뱀파이어가 된 채 찾아왔다가 지미와 플레치에게 처참하게 처리되는 장면에선 박수와 폭소가 저절로 터져나올 정도다. 게다가 이 영화의  아무리 게이와 여성, 특히 레즈비언 여성들에 대한 음담패설과 성적 대상화 농담이 난무한다고는 해도, 주인공인 지미와 플레치가 워낙 얼뻥하고 찌질한 캐릭터들인 까닭에 초반에 느껴지는 여러 불편한 감정들이 쉽게 웃음으로 전환된다. 게다가 뱀파이어들과의 싸움이 본격화되면서 영화에서 가장 저질 농담을 많이 구사하는 플레치는 뱀파이어들이 내뿜는 정액같은 피를 번번이 뒤집어쓰며 보는 관객에게 묘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과거 뱀파이어들의 전통을 충실히 클리셰로 활용한 덕에 그 영화들에 전제돼있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까지 덩달아 불려나오기는 했지만, 이 영화는 묘한 지점에서 그것을 스스로 비트는 영악함을 과시하며 다시 한 번 관객들을 웃기고 있는 셈이다.

<LVK>는 본국인 영국에서는 15세 관람가로 개봉되어 일정한 흥행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농산물 회사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제작비를 모으던 감독에게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차기작 제작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과연 국내에서도 개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설사 수입이 된다 해도 근엄하고 유머감각 없는 영등위 위원들의 ‘허락’을 통과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만큼, 이 영화를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즐길 기회는 이번 부천영화제가 거의 마지막일 듯하다.

 

ps 1. 부천영화제 월드판타스틱시네마 섹션 상영작. GV는 나뭉님(새 창으로 열기)이 진행하심.

ps 2. 프레시안 20일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림

ps 3. 로티 역을 맡은 배우 마이애나 버닝(이름도 참… MyAnna Burning이란다. 나의 애나가 불타고 있다?)은 미셸 파이퍼를 닮았다. 아니나 다를까 imdb에 들어갔더니 아예 대놓고 가장 닮은 사진들이 프로필 사진으로 올라(새 창으로 열기) 있다. 필모그래피를 보고야 알았네, 세상에 닐 마셜 감독의 <디센트>와 <둠즈데이>에 출연했었다고 한다.

ps 4. 사실 영화가 지미와 플레치와 심지어 로티마저 내내 놀리는 분위기가 있고 여자 뱀파이어들이 굉장히 매혹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어쩌면 이 영화야말로 오히려 역설적인 의미에서 게이-뱀파이어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긴 한다. 생각해 보면 영화의 2/3 내내 플레치에게 뱀파이어 피를 뒤집어 씌운 것도 그렇고, 막판가면 피가 말라붙어서 꼴불견이 되는 데다, 사실 게이 농담이 그렇게까지 많이 나오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에게 다시 한 번 죽는 카밀라란, 어쩌면 분명 역사상 ‘자연스럽게’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나 이성애 이데올로기에 억지로 질식당하고 압사당하는 동성애의 운명을 자조적인 역설로 그려낸 것인지도 모른다.

2009/07/20 19:18 2009/07/20 19:18

신동일 감독은 참 운이 없다. 데뷔작을 포함해 그의 첫 두 영화는 모두 투자사와 배급사간 ‘자본’끼리의 이런저런 갈등과 사정 때문에 영화를 다 만들어놓고도 개봉이 한정없이 미뤄졌다가 가까스로 뒤늦게 소규모로 개봉했다. 제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방식을 택함으로써 자본의 문제를 해결해 세 번째 영화를 찍어놨더니, 이제는 정치의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청소년 모방 위험’을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아 개봉 전부터 영화 외적인 것으로 스캔들의 주인공이 돼버린 것이다. 영화를 지지하든 안 하든, 10대를 위해 만든 영화가 도리어 10대들이 볼 수 없도록 금지를 당했다.

딱히 눈에 띌 만한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없는데도 이러한 등급을 받은 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가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얼마나 ‘불온한’ 영화인지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우려된 ‘청소년 모방 위험’의 타겟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하나는 모두가 짐작하는 바로 그 이유, 그러니까 현직 대통령을 향한 직설적인 조롱과 비난, 그리고 또 하나는 이주노동자와의 연애, 그것도 ‘까만 피부’를 지닌 이주노동자와 ‘성적인 텐션이 분명히 존재하는’ 연애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정으로 불온한 것은 바로 후자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온함은 다시, 한국사회의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고스란히 폭로한다.

재미있는 것은 감독이 이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이미 영화 내에서 그대로 까발렸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민서(백진희)가 자신의 담임 선생님과 딱 마주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방문자>의 주연 김재록이 이 난감한 담임 선생님을 참 애처롭게 연기한다. 너무나 애처로워서 더욱 코믹하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위력적인 장면이자, 남자어른들에게 가장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10대의 성을 끝없이 터부시하면서 특히 10대 여성에게 ‘순결하고도 무성적인 존재’로 있을 것을 강요하지만, 정작 막 10대를 벗어난 가장 젊은 여성들의 성을 가장 더럽고 치졸한 방식으로 착취하는 경향이 있다. 10대 청소년들이 성매매 시장으로 유입되는 것도 바로 이 틈새다. 게다가 그들은 ‘어리다고’ 각광을 받으면서도 ‘불법’이라는 이유로 착취를 당하는 이중적 모순에 놓이곤 한다.) 담임 선생님 씬이 그토록 위력적이고 코믹한 것도 바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현실이 고스란히 폭로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소위 ‘통제되어야 할’ 여성의 성이 ‘민족의 범위를 벗어난’ 남자들, 특히 가난한 외국 출신 남자들과 엮일 때 한국 남성들의 분노는 폭발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이 영화를 공격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공격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영화는 민서와 카림(마붑 알엄) 사이의 성적인 텐션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민서는 카림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한국사회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방식, 즉 ‘(여성 착취적인) 봉사의 의미의’ 성적인 접촉을 시도한다. 이 영화가 다른 의미에서 ‘선정적인’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이 영화가 선정적이라면 그것은 성을 다루거나 묘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성, 특히 10대 여성의 성을 다루는 방식의 위선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인 남성들이 가장 터부시하고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에서 건드려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외피를 두른 채. 이것의 결과가 바로 현실 층위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셈이다. 영화의 허구적 층위에서 이미 고발된 아이러니와 모순이 현실의 층위에서 고스란히 반복을 통해 재현된다.

반두비

본국의 어린 여성과 이주노동자 유부남 남성의 자연스러운 신체접촉은 한국의 남자어른들에겐 불편한 악몽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저 성적인 접촉의 장면이 여성, 특히 주인공인 10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이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고 보기에도 모호한 지점이 있다. 영화 전체적으로 민서를 생동감있게 해주는 것은 그녀가 어떤 일관된 사고나 가치관에 따라 숙고하고 행동한다기보다 거의 즉물적인 욕구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라는 바로 그 지점에 있지만, 이 특징은 민서라는 캐릭터를 ‘알 거 다 아는 척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모순의 존재로 묶어둔다. 그녀는 유사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며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 잘 알고있는 듯 말하고 행동하지만 오히려 성에 대해 무지한 어린아이같은 존재다. 그녀가 카림에게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어떤 ‘난감한 천진함’이 포착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성적인 행위의 생물학적인 ‘조건반사’ 과정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그 행위가 지닌 다층적 층위에서의 사적, 사회적,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단적인 근거가 어머니의 남자친구인 기홍(박혁권)에 대한 무조건적 적대다. 그녀는 어머니와 기홍 사이를 전적으로 ‘동물적인 성적 행위만 존재하는 관계’로 여기며 혐오감만 드러낼 뿐, 그 관계에 있을 다른 정서적 교감이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결코 이해는커녕 짐작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장면에서 민서의 행위는 오히려 사회가 여성의 성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에 대해 그 외형을 그저 흉내내는 것일 뿐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녀가 그 의미들을 (새삼) 깨닫고 자신의 주체성 하에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은 영화 막바지에나 나오는 키스씬이다.

이 영화의 수상하고 기묘한 모순도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나는 <반두비>의 민서 캐릭터가 살아 생동하는 10대 여성을 그렸다기보다는, 386 지식인 남성이 ‘촛불소녀’에게 투영한 이상형을 그려낸 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허남웅 기자가 지적한 대로(새 창으로 열기), ‘감독의 이상을 뻣뻣하게 구현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모범생 로봇이라는 것이다. 사실 ‘촛불소녀’에 대한 386들의 기대가 과연 무엇인지 이 영화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도 또 없다. 카림의 월급을 떼어먹은 사장의 집에서 민서가 난동을 벌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말하자면 386 남성 지식인들이 ‘어른’이기에 대놓고 하지 못하는 일련의 체면구길 제멋대로의 행동과 거침없는 말들을 ‘어린 여자’라는 방패 하나로 대신 질러줄 수 있는 존재다. 혹은 동년배들의 혐오어린 시선이나 비난엔 끄떡도 않을 남성 어른의 위선을 대신 콕 찝어 폭로하고 수치를 안겨주어 윤리적 각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이거나. 민서가 남성의 욕망을 잘 알면서도 완전히 무지한 모순을 갖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감독이 민서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그녀는 매혹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구체적인 성적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 읽힌다. 바라보는 자가 자신과 다른 이의 시선 모두를 애초부터 억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적으로 완전히 무지한 천진한 존재고, 그러면서도 남성의 욕망을 꿰뚫어본다고 가정된 존재다. 어쩌면 이와 같은 메커니즘은 소위 ‘국민여동생’ 문근영을 향한 팬덤이 보여준 어떤 현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녀는 성적으로 매력이 있으되 결코 그녀 자신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알아선 안 된다. 그녀를 보는 ‘나’는 그녀에게 성적인 매혹을 느끼되 그것을 성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통하는 건 절대로 안 된다. ‘내’가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건 죄다. 그러므로 그녀는 순결한 누이가 되어야 한다. 그녀와 성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건 외부의 타자뿐이거나 이 모든 소소한 서민들을 뛰어넘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자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매혹은 사라지거나, 여전히 원존재의 상태로 봉인될 것이다…

반두비

식사장면의 중요성

 

나아가 내가 우려하는 것은, 신동일 감독 영화의 캐릭터들은 갈수록 어려지지만, 한편으로 갈수록 생동감과 자연스러움도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개연성을 해치며 ‘아귀가 안 맞는’ 어색함과 작위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 짐장에는 아무래도 신동일 감독의 주인공 캐릭터들이 나이가 많건 어리건 우리가 소위 ‘386’이라 부르는 특정 세대의 특정한 정서와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일관되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감독 자신이 가장 많이 반영되어 있던 데뷔작 <방문자>의 김재록 캐릭터는 실제 386 출신 지식인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그 나이 또래 아저씨’의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로 오면, 인물들은 포스트-386에 속하는 지금의 30대들로 설정돼 있으면서도 이들 캐릭터의 사적 역사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기억과 재료 부분은 일관되게 386의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 즉,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극중 나이에 어울릴 만한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거나, 90년대에 30대 초중반을 지나고 있던 인물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2000년대로 불러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번 <반두비>에서의 민서 캐릭터 역시 계속해서 어딘가 어색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지금의 10대를 반영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라기보다는 감독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386 여성 친구/동지들이 10대이던 무렵의 소녀를 ‘이상화’로 덧씌운 뒤 억지로 타임머신에 태워 2009년을 살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차피 허구의 창작물에서 인물들은 실제 그 나이대의 동시대 인물들보다는 감독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리자이기 마련이고 그 자체만으로 흠이 되는 건 아니지만, 신동일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적 배경 하에 특정한 시대를 특정한 나이로 거친 특정한 인간을 매우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간을 달리는 캐릭터’들은 관객들에게 어떤 면에서 상당히 경직성을 보여주며 예기치 않은 곳에 공감대를 흩뜨려버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민서는 종종 너무 제멋대로에 생각이 없어보이거나 즉물적이고, 카림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착하다. 나는 과연 10대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아, 우리 얘기다”라고 반응할지 아닐지 상당히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면 내 짐작은 다소 부정적이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나는 영화에서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직설화법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자의식이 부담스럽다. 소신이 너무 명확해서 그 소신의 이론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잡히지 않는 현실의 모든 면까지도 이론으로 제어하려는 듯한 답답함이 종종 보인다. 나아가 이것이 지나치게 우직하고 직설법으로 드러나는 것도. 사실 <반두비>는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 상당히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다.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도 상당하다. 그런데 여기에 지나친 정치적 자의식이 끼어들면서 매력을 깎아먹고 있는 것 같다. 정치적 메시지와 주제가 왜 매력을 오히려 돋우지는 못할망정, 지지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부담을 먼저 안겨주며 종종 민망함을 느껴야 하는가. 세련된 위트와 재치, 혹은 함축과 비유가 아쉽다. 특히나 이런 ‘장르영화’적 외피를 빌어온 영화에 그런 식의 날 것의 정치적 자의식을 부딪히게 하는 건 종종 덜컹거리며 영화의 전체적 균형감을 망치는 결과가 되기 쉽다. 극소수의 대가들이 충돌을 통해 오히려 시너지를 내는 방식으로 그려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내공이 아닌 것이다.


ps 1. 신동일 감독의 영화엔 그만의 반복되는 몇 가지 코드들이 있다. 신감독의 따님의 캐스팅도 그 중 하나인데, 이 영화에선 실물로도 이름으로도 등장하지 않았던 듯. 다만 신감독은 이번 영화에도 카메오 출연을 했다. 무려 1인 2역이다. 마르크스의 사진도 어딘가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점 씬이 아니었을까 싶다.)

ps 2. 민서의 기원이 지금의 10대보다 오히려 386인 여자의 어린시절에 대한 ‘상상’일 거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 하나. 민서는 ‘오늘의 책’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의 알바생이란 2009년엔 거의 사라진 희귀한 존재다.

2009/07/14 07:18 2009/07/14 07:18

약탈자들

정식 개봉 전 임시포스터.

손영성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약탈자들>은 코미디다. 그것도 아주 웃기는 코미디다. 장례식장에 모인 친구들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인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뒷담화'를 통해 쏟아낸다. 이렇게 각자 이야기 속의 '대상'으로 재구성되는 '상태'라는 인물의 면면은 괴이쩍고 이중적이며 허세에 가득찬 속물이다. 언제나 거대한 명분을 둘러대며 고뇌에 찬 지식인인 척하지만 실상은 여자한테 추근대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헛소리나 일삼으며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이유나 대는 것이다. (이런저런 단편과 독립영화에 출연했던 김태훈이 상태 역을 맡아 신인답지 않은 안정적이고 흥미로운 연기를 선보인다. 김태훈은 배우 김태우의 동생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 과정에서 코미디가 발생한다. 상태의 친구들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 상태를 붙잡아 둠으로써 그보다 권력의 우위에 서지만,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폭로되는 건 화자들 각자의 속물적 욕망과 찌질함이다. 말하자면 상태는 화자들 각자가 자신의 약점과 수치를 투영시킨 인물인 것이다. 우리는 친구들이 전하는 상태라는 인물을 보며 킥킥대다가, 어느새 상태를 통해 드러나는 그들 각자의 찌질함을 보며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각종 장르적 특징이 혼성되면서 오는 쾌감이 덧붙여진다. 사실 이 영화는 살인사건과 얽힌 상태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추적하는 일종의 스릴러적 성격을 영화 전면에 깔고 있다. 상태의 스승인 '달인'과 연쇄살인범 택시기사의 에피소드가 삽입되면서 영화는 판타지와 무협의 성격까지 슬쩍 띄게 된다.

하지만 <약탈자들>은 그리 쉽지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난해해서라기보다는,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특유의 서사방식 때문이다. 일반적인 영화들이 그러하듯 절대적 객관자로서의 감독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영화 속 인물들이 들려주는 에피소드를 나열해 퍼즐 맞추기 식으로 서사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 인물이 '상태'라는 인물과 맺은 관계나 그들의 시점, 기억, 평가 등에 따라 그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정보들을 듣게 되고, 이를 열심히 꿰어 맞추어야 그나마 진실에 가깝게 도달하게 된다. 거기에, 소심하고 찌질한 등장인물들 간 코믹한 사적인 관계가 진지하고 무거운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중첩된다.

영화의 '현재 시제'의 대부분의 공간은 장례식장이지만,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이 바로 금정굴 일대이다. 영화의 첫 장면 역시 상태와 상태의 친구 성익이 금정굴을 찾아갔다가 쓰러져 있는 묘령의 여인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실 금정굴은 한국 근대사의 비극 중 하나인 6.25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대표적인 곳이다. '금정굴'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 금정굴이 어떤 곳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관객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 금정굴이 갖는 지나치게 묵직한 무게가 영화의 재기발랄한 분위기와 섞이지 못한 채 다소 따로 노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의 코미디 역시 다소 비틀린 방식으로 억압되는 측면이 있다.

약탈자들

개봉 당시 정식 포스터에 사용된 김태훈의 이미지. 여기서도 잘했지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그저 속물적인 지식인 개인에 대한 코미디 차원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일반에 대한 지적인 블랙코미디로 비약한다. 곰곰 생각해 보면, 사회 전체의 역사란 것 역시 한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엇갈리는 증언과 기록의 종합이자 정리이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역사를 배우며 우리는 마치 이것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팩트인 것처럼 인식하기 마련이지만, '역사'라는 것도 온통 엇갈리는 증언과 기록을 연구를 통해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한때 중요한 역사서였던 것이 얼마쯤 지나 위서논쟁에 시달리거나 신빙성 논란이 일어나는 것도 역사학계에선 흔한 일이다. 게다가 언제나 피해자와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살아있는 자의 귀에 가닿을 수 없다. 병태의 장례식에 참석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병태를 죽인 상태'에 대한 온갖 뒷담화들을 자신의 기억과 관점을 한껏 투영시켜 쏟아낸다. 그러나 정작 병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병태가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가에 대한 진실은 그 누구의 귀에도 가 닿을 수 없다. 애초에 친구들이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병태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진실이 저 바깥에 명백하게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그 진실에 가닿는 것은 언제나 요원하다. 닿는다 하더라도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것도 대체로는 진실의 핵심이 아니라 그 언저리가 될 뿐이다. 누군가는 그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괴로워하고, 누군가는 진실에 기생해 있는 수많은 괴담과 흥미거리의 이야기를 퍼뜨린다. 그렇다면, 어쩌면 진실이란 이런 식의 괴담과 흥밋거리같은 부연물조차 포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역사를 안다는 것, 혹은 역사에 근거해 서사나 허구를 만드는 작업(그것이 소설이 됐든 영화가 됐든)의 본질이란, 그런 식으로 '진실을 약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영성 감독 역시 "만약 부제를 붙인다면 '에피스테메란 무엇인가. 바로 약탈이다'라고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영민한 신인감독의 나름 야심찬 대답이 이 영화에 들어있다.


ps 1. 프레시안에 7월 1일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렸다.

ps 2. 언론시사회에서 한 번 보고, 관객과의 대화가 있던 CGV 특별 유료시사회에서 다시 봤다. 확실히 이 영화는 두 번째 볼 때 훨씬 더 재미있다. 세 번째 보면 더 재미있을 거 같다. 요즘 시사회를 포함해 영화를 많이 못 보고 있어서 그렇지. 볼수록 참 지적인 영화인데, 소위 지적인 사람들의 젠체하는 유머코드도 제대로 그려져 있어 더 웃기다. 확실히 그런 부분은 홍상수 감독의 영향이 물씬 느껴지기도 하지만,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의식 따위 흥, 하는 홍상수 감독과는 태도가 180% 반대다.

ps 3. 인디포럼 개막식 뒷풀이 자리에서 김태훈과 인사와 악수를 나눈 적이 있다. 훤칠하고 잘생겼고 분위기도 좋고, 연기도 곧잘 해서 무척 기대가 된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배우가 이제 막 자리를 잡으려는 걸 보니, 뭔가 동지애를 느끼며 응원하고픈 마음이… (아아 나는야 사심 빼면 시체인, 질 나쁜 기자.) 이 영화 찍고서 소속사와 계약을 했다고 한다.

ps 4. 손영성 감독 인터뷰를 했는데 3주가 지나도록 기사로 풀지 못하고 있다. 속이 쓰리고 감독에게 죽도록 미안하다. 변명을 하자면, 요즘 욕심을 내고 의욕을 낼수록 글이 더 안 써지고, 인터뷰는 특히 그렇다. 별 욕심없이 설렁하게 한 취재나 인터뷰는 금방 뚝딱 기사로 써내는데… 

2009/07/08 21:51 2009/07/08 21:51

<마더>는 아직 국내에서 상영된 적은 없다. 공식 언론시사는 내일이고 아마도 매체마다 기자들이 미어터져 나올 것 같다.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지는 가운데 현재 칸영화제에 가 있는 듯한 씨네21 김도훈 기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간략한 소개글을 올렸다.(새 창으로 열기) 벌써 어제 얘기다.

일련의 386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에서 그 기저에 공통적으로 "애타게 아버지를 찾고 있다"고 일전에 이곳 어느 글에 쓴 적이 있다. (찾아보니 최양일 감독의 <수> 리뷰 본문과 댓글(새 창으로 열기)에 주루룩 있다. <괴물> 간단 감상문(새 창으로 열기)에도.) <괴물>은 그 정점이었다. 나아가 나는 그 괴물이 <괴물> 속 가정에 결여되어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라 보았다. 사실 이건 너무나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 가족에 어머니는 없고, 괴물의 입속에서 끈끈한 점액질의 타액으로 뒤덮여 있던 아이들을 송강호가 끌어내는 장면은 딱 자궁에서 아이를 끄집어내는 이미지이지 않는가. 거기서 폭압적이고 강한 어머니 / 여성에 대한 공포를 읽었다. <괴물>의 가족에 만약 어머니가 존재한다면, 서울을 풍비박산내는 괴물의 이야기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봉준호는 <괴물>을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 성장하는 - 영화로 만들어야 했고, 괴물과 대적하는 것 역시 그런 덜떨어진 아들이자 아버지, 즉 송강호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어머니를 등장시킨다면 바로 그 어머니가 아들/아버지의 자리를 대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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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여성의 성기 상징인 동굴과 아이들.

봉준호가 그려내는 (성인)여성들은 대체로 남자들보다 강하다. 육체적으로 강한 것이 아니라 그냥 우월한 존재,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서의 존재다. 그런데 내게는 봉준호의 그런 강한 여성에 대한 편애와 더불어 공포가 강력하게 읽힌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이성재를 언제나 주눅들게 만드는 잘나가는 아내도 그렇고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의 귀를 파주며 마을의 야매 의사 노릇을 하던 송강호 아내 전미선도 대체로 주인공 남자보다 우위에 서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지만, <괴물>에서 '괴물'은 아무리 봐도 암컷이자 어머니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괴물>은 아들이 아버지로 성장하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자신을 폭압하는 어머니에 대적하는 영화가 된다. 이는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어머니는 자식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다 아들의 칼을 맞는 거라면, 살부(殺父) 의식 및 아들의 아버지 권력 탈취라는 전형적인 신화 모티브에서 부모의 성을 역전시킨 것이라 더욱 흥미롭기도 하다. 대체로 강한 아버지와 여기에서 이도저도 못한 채 자식을 아버지로부터 적절히 보호해주지 못하거나 아버지의 폭력의 희생자로 존재하는 어머니, 라는 게 훨씬 전형적이고 공식적인 틀 아닌가. (근데... 나는 왜 이런 이야기를 여기에다가는 쓴 적이 없더라? 아, 생각났다. 나는 이런 내용으로 당시 씨네21 평론가 공모에 응모하려고 했다. 그리고 결국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 헐...)

그런데 <괴물>이 상영될 당시에 그 영화를 그런 식으로 읽는 평이 별로 없어서 좀 놀랐다. (그랬으니 평론가 공모에 그런 내용으로 응모하려 했던 거지만.) 심지어 내가 그 얘기를 당연한 듯 했을 때 두 사람으로부터 "그것 참 놀랍고 참신한 해석"이라는 경탄까지 들었다. (반면 전현직 기자인 한 명은 "그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라고 반응했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 작품으로 <마더>가 제작될 것이란 소식을 들었으니, 내가 얼마나 더 놀랐겠는가. <괴물>에선 빠져있던, 오히려 '괴물'로 표현되었던 어머니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라. 나는 봉준호가 과연 어떤 식으로 <마더>를 만들지 궁금해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괴물>을 그리 읽은 결과에 의하면, <마더>는 '무시무시하고 무서운 어머니'에 대한 얘기여야 했다. 사실 <마더>의 시놉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나왔을 때 <괴물>에 대한 내 독해가 완전히 허방다리를 짚은 것 아닌가, 싶어 불안하기도 쪽팔려하기도 했다. 언론이 전하는 '이런 내용이라 카더라' 통신은 주로 눈물겨운 모성애 쪽에 맞춰져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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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서 영화를 본 듯한 김도훈의 글을 보노라니, 내가 생각했던 방향이 맞는 거 같아 또 다시 살짝 놀랍다. 역시, 그런 거였군. 그러고나니 이제 궁금해지는 건, 과연 <마더>가 봉준호의 이력에 어떤 터닝포인트가 될까, 하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극히 절제돼 있거나 억누르고 있던 봉준호 특유의 썰렁한 블랙유머 코드가 <괴물>엔 다소 이질적으로 여기저기서 스멀대며 나오고 있는 걸 보면서, 그리고 <괴물>이 대중적이고 전형적인 장르영화로서의 괴수영화의 문법을 상당히 비트는 것을 보며 예상한 바가 있다. 아마도 다음 작품에선 자신의 본색을 완전히 드러낼 것이며, 그 작품은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만큼 흥행하진 못할 것이라고. 나아가 자칫하면 논란만 불러일으키다 완전히 쫄딱 망할 수도 있겠다고. (사실 나는 자기 색을 살짝 입힌 장르영화를 장르적으로 잘 만드는 사람이 그걸 포기하고 자꾸 예술하려 드는 것은 좀 못마땅하다. 봉준호 감독도 자기 색깔을 적절한 선에서 좀 조절하고 절제하면서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싶은데, <괴물>에서 이미 선을 조금 넘었기 때문에...)

<마더>의 경우 칸영화제 초청이라는 변수 때문에 한껏 주목과 기대를 받고 있는 상태니 흥행도 <살인의 추억>만큼은 되거나 그렇지 않다 해도 그보다 그저 조금 못한 수준일 것이다. <괴물> 같은 흥행은 힘들 듯. 그러나 감독의 영화적 경력과 미학적 프레임에서는 충분한 터닝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모처에서 진행하고 있는 밀착취재 건을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내일 꼭 <마더> 시사회를 가야겠다. <박쥐>처럼 개봉 전 일반시사는 거의 없을 듯하니.



ps. J.는 방금 <마더>에 있다는 반전에 대해 좀 놀라운 추측을 했는데, 나는 그 추측이 거의 맞겠구나 싶다. 그게 뭐냐면... 직접적으로 쓰진 않겠고, 다만 그 추측이 맞다고 생각한 이유를 밝혀보려 한다. 다만 정말 맞을 경우 원치않은 스포일링, 게다가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스포일링이 될 수 있으므로 이 뒷부분을 화이트로 가려놓겠다. 궁금하면 긁어보시라. 위에 <괴물> 사진에서 보면 아이들이 괴물을 피해 동굴에 숨어있는데, 캡션에도 썼지만 동굴 역시 여성의 자궁과 질을 상징한다. 자궁의 이미지는 양면적이다. 더없이 안전한 공간, 더없는 보호를 제공해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미끼로, 그러니까 어머니가 보호욕을 내세우며 이미 세상에 나온 자식을 자신의 자궁으로 넣으려 하는 순간 그곳은 더없이 폭압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 <괴물>을 보며 내가 추측한 봉준호의 어머니에 대한 근원적 공포란 결국, 자식을 제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폭압적이고 권위적이며 강력한 어머니인데... 그렇다면 '지능이 모자란 아들'이란 설정은 실은 아들이 정신적으로 미발달한 것이고, 이는 어쩌면 어머니의 권위적인 과보호와 소유욕, 그러니까 아들을 제 자궁에 여전히 (안전하게) 가둬놓고 싶은 어머니의 양육의 결과일지도. 그렇다면... ^^ 그런 엄마들은 자신이 얼마나 헌신적이고 좋은 엄마인지 증명하지 못해 안달이므로... 게다가 다른 여자에게 수작질을 걸었다면 더욱...

2009/05/19 20:58 2009/05/19 20:58

아무리 힘들고 바쁘게 살아도 우리에겐 빵뿐 아니라 장미도 필요합니다. 그 어떤 장미보다도 아름다운 장미가 될 음악회가 이번 주에 열리기에 또 다시 번개를 쳐봅니다. 함께 모여 음악도 듣고 술도 한 잔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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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비 있습니다. 일단 입장료 만원 + 뒷풀이비용 알아서. 학생의 경우 제맘대로 뒷풀이비용을 막 깎아드리겠습니다. 오실 수 있는 분들, 일단 7시에서 7시 10분 사이에 장천아트홀 바로 앞에서 뵙지요. 전 7시까지 가있겠습니다. 오실 분들, (비밀)댓글로 이멜주소 알려주시면 제 폰번호 쏘겠습니다. 자, 그럼 금요일 저녁 때 뵈어요!

2009/05/12 17:00 2009/05/12 17:00

인디포럼 올해의 상영작이 지난 월요일 발표(새 창으로 열기)됐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나는 인디포럼의 신작전 섹션에서 총 505편의 출품작 중 저 상영작 55편을 선정하는 프로그래머 네 명 중 한 명이었다. 5월말 열리는 인디포럼을 위해 앞으로도 이런저런 것들, 예컨대 카탈로그에 들어가는 프로그램 노트 쓰기라던가 시간표 짜기 같은 일정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가장 크고 어려운 산은 일단 넘은 셈이다. 한 달 남짓 기간 동안 장, 단편 포함해 280편 가량의 영화를 봤다. 지난 한 달 간 글이 거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막판에는 회사에서 일은 때려치운 채 낮에도 영화를 봤고, 밤에는 진한 커피와 박카스와 비타민씨를 먹어가며 거의 매일 밤을 새며 영화를 봤다.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고 특히 내 일정 때문에 프로그램팀의 다른 멤버들을 힘들게도 했지만, 사실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기도 했다. 특히나 몇몇 작품들은 보면서 엉엉 울다가 웃다가, 이 좋은 작품들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보고 발굴하는 데에 내가 일조를 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닌데도 괜히 내가 다 뿌듯했고, 몇몇 작품들은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을 정도다. 단편이긴 해도 이건 그대로 극장에 개봉해도 되겠다 싶은 작품도 있었고, 다소 서툴지만 열정과 진심이 느껴지는 작품도 많았다. 찬찬히 그와 그녀의 슬픔과 절망을 들여다보는 작품들, 그리고 어떻게든 어깨를 토닥토닥하고 싶은 감독의 진심도 느껴졌다. 잘찍고 못찍고를 떠나 모든 작품들이 참 소중하고 예뻤다. 오히려 어렵고 힘들었던 건 영화를 줄기장창 보는 게 아니라, 50여 편을 골라내는 거였다. 아깝게 탈락한 작품들이 너무 많다. 영화제 기간만 더 길고 상영관이 더 있었다면 얼마든지 틀었을 작품들. 하지만 인디포럼에선 상영이 안 됐더라도, 다른 영화제에서나마 상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보는 순간 반해버린 데다, 보는 내내 가슴을 부여잡으며 엉엉 울었던 영화가 있다. 다른 훌륭한 작품들도 너무나 많았지만, 280여 편 중 내게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그 작품은 결국 올해 인디포럼의 폐막작이 됐다. (올해 인권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하다.) 워낙 이 영화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터라 폐막작에 대한 소개글을 내가 쓰게 됐는데,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보는데도 여전히 눈물이 펑펑 솟는다. 특히 맨 마지막에 박힌, '고 이근재 님께...'라는 자막을 보고선 더 그러하다.

수많은 죽음들이 너무 쉽게 잊혀진다. 그렇게 잊혀진 수많은 죽음 중 하나를, 이 영화가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그걸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 새삼, 영화기자가 되기를 너무 잘했다, 생각한다.

올해 인디포럼은 5월 29일부터 6월 5일까지 열린다. 홈페이지는 여기(새 창으로 열기)다.

2009/04/24 02:04 2009/04/24 02:04

한 인터뷰 대상을 10년, 20년 이상 지켜보며 이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로 응축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비록 최근 들어와 서브장르가 세분화, 다양화하고는 있지만,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는 주로 참담한 현실을 폭로하고 목소리를 거세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해왔다. 대체로 하나의 작품이 급박한 시간 안에 만들어져 공개되고, 그 안에 담기는 시간도 몇 개월에서 길어봤자 2, 3년에 걸친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86년부터 2008년까지 22년간 한 일가를 추적하고 관찰한 결과물인 <사당동 더하기 22>의 존재는 놀랍기만 하다. 이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영화가 애초에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찍은 게 아니라 학술연구의 기록 자료가 쌓이면서 나중에 영화화된 것이라 가능해진 것이다. 사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위안부 출신의 송신도 할머니와 그녀를 지지하는 연대모임의 투쟁을 담은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가 10년의 세월을 담을 수 있었던 것도 비슷한 경로를 거쳐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사당동 더하기 22

서울에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치르면서 당시 최대의 달동네 중 하나였던 사당동은 86년에서 88년에 걸쳐 무자비한 철거를 당한다. 이곳에 살고 있던 이들 중 임대주택으로 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구, 바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정금선 씨 일가뿐이었다. 현장연구원 한 명이 정할머니 일가와 같은 집에 세들어 8개월을 살면서, 현장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조은 교수와 일행은 이 가족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98년부터는 방송 카메라를 이용해 이들과의 만남을 동영상으로 담게 된다. 그 22년간 촬영기사만 10명이 바뀌었으며, 정할머니의 어린 꼬마 손주들은 이제 30대 초중반의 장년이 됐다. 아픈 몸을 이끌고 쓰레기를 줍는 공공근로로 생계비를 보탰던 정할머니는 그 사이 세상을 떠났다. 큰손주 영주 씨는 최근 필리핀 여성과 결혼했으며 둘째인 손녀 은주 씨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막내 덕주 씨는 방황과 일탈의 기간을 거쳐 헬스클럽에서 트레이너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장년이 된 정할머니의 손주들의 가난은 여전하다는 것.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같이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살 만하다, 행복하다"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을 수놓는 것도 영주 씨가 드디어 아빠가 되는 순간이다. 온 가족이 작은 생명을 둘러싸고 앉아 만면에 행복의 미소를 띈 채 새로운 작은 생명에 경이의 축복을 보낸다.

도시의 그늘에서만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그 가운데에서도 기쁨과 희망의 순간을 누리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사회는 빈곤을 방치하고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더욱 심각한 빈곤으로 내몰고 있다. 오늘도 서울 곳곳에서는 '재개발 공사'가 이뤄지고 있고, 하루가 다르게 으리으리한 빌딩과 아파트가 솟아나고 분수가 설치되고 공원이 생기지만, 그곳에서 원래 살던 이들은 밖으로, 밖으로 내몰린 채 '이주'와 '이산'의 역사를 반복한다. 그런가 하면 베트남과 연변, 필리핀 출신의 가난한 여성들은 이곳을 '좋은 곳(a nice place,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기도 하다)'이라 부르며 몰려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몇몇은 운좋게 뿌리를 내리기도 하지만, 다수는 표류를 거듭하다 더 나쁜 상태로 내몰린다. 그리고 이 가운데 빈곤은 세습되고 재생산된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종종 마치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 잊혀지기 일쑤다. 혹은 가장 극적이고 나쁜 사례들만 미디어에 포획된 가운데 어정쩡하게 지워져 버리거나, 더이상 사회적인 문제가 아닌 개인의 동정과 자선의 대상으로 묶여버리곤 한다.

<사당동 더하기 22>는 굳이 감독이 큰 목소리를 내어 강렬한 주장을 하고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거나 굳이 외면해 버렸던 우리 안의 어떤 삶을 조근조근 펼쳐내 보임으로써, 우리 사회의 한 면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영화의 말미에 붙는 자막대로, 이 영화는 한 가족의 22년을 다루기는 하지만 단지 한 가족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차라리 이 영화는 우리가 발딛고 선 땅의 이면을 들추며 사회가 광범위하게 지워버렸던 존재들의 삶을 복원하고자 하는 작은 시도 중 하나이다. 이번 여성영화제의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던 작품으로, 이미 영화제에서의 상영은 끝났지만 다른 다양한 영화제들을 통해 계속해서 소개되고 상영되어야만 하는 소중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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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영화제(WFFIS2009) 상영작, 4/14 20:30 깜짝상영작

2009/04/16 00:05 2009/04/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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