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illowman Comes'에 해당되는 글 26건

  1. 리처드 용재 오닐 + AMK의 바로크 콘서트 <미스테리오소> (6) 2009/03/04
  2. 르노 & 고티에 카퓌송 듀오 리사이틀 2008/12/19
  3. 연극 <잘 자요, 엄마> 리뷰 2008/12/13
  4. 로버트 레빈 피아노 리사이틀 2008/11/28
  5. 뮤지컬 <쓰릴 미> - 사랑한다면, 나를 흥분시켜 줘! (7) 2008/08/15
  6. 뮤지컬 <컴퍼니> - 결혼,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4) 2008/07/17
  7. 연극 <썸걸(즈)> - 연애는 권력, 사랑은 환상 (3) 2008/07/08
  8. 김수철 - 나도야 간다 (2) 2008/07/03
  9. 정태춘, 박은옥 - 92년 장마, 종로에서 2008/06/30
  10. 연극 <레이디 맥베스 2008>, 변화의 기로에 서다 2008/04/23
  11. 뮤지컬 <이블데드> - 피범벅 세상, 피범벅 난장 공연으로 제껴라! 2008/04/07
  12. <쾌도 홍길동> 종방에 부쳐 (9) 2008/04/05
  13. 온에어 (1회 ~8회) (1) 2008/04/04
  14. <싱글파파는 연애중> (프리미어 드라마리뷰) (2) 2008/03/31
  15. 존 홀로웨이 바로크 바이올린 리사이틀 (7) 2008/03/21
  16. <천하일색 박정금> (프리미어 드라마리뷰) 2008/03/21
  17. <쾌도 홍길동> (프리미어 드라마리뷰) 2008/03/21
  18. <쾌도 홍길동>이 이토록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 (10) 2008/02/26
  19. Tom Waits - You Can Never Hold Back Spring (7) 2007/09/05
  20. Pearl Jam - Love, Reign o'er Me (6) 2007/08/21
  21. AT&T에 검열당한 Pearl Jam (9) 2007/08/12
  22. Patti Smith - Gloria 2007/06/07
  23. Betty - The L Word Theme (5) 2007/05/27
  24. Sonic Youth - Superstar (5) 2007/05/25
  25. [연극] 필로우맨 (4) 2007/05/22
  26. Rolling Stones - Sympathy for the Devil 1968 (4) 2007/05/21

현악기를 좋아하지만 비올라는 상당히 낯설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에서 비올라란 게 얼마나 치이는 악기입니까. 예술의전당의 장소 문제일 수도 있겠어요. 제 자리는 E열 사이드 쪽이었는데, 비올라 다감바나 비오른첼로 소리가 좀 뭉치긴 하더군요. 예당에서 하는 콘서트는 처음 간 거라... 리처드 용재 오닐의 연주를 CD로라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그저 저는 이토록 유명하고 인기를 끄는 사람이라면 연주도 기본은 하겠지라고 생각했죠. 요즘이야 클래식 계도 아이돌 스타 시스템이 안착되지 않았습니까? 전세계적으로 워낙 젊은 천재들이 쏟아져나오고 있고, 이들이 '천재' 소릴 듣는 데에야 이유가 있는 거죠. 저야 어차피 아직은 막귀인 데다 콘서트 자체를 그리 많이 다녀보지도 못했고요.

그런데 좀 많이 실망했습니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던 헨델-할보르센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할 때, 아이러니컬하게도 제 실망은 극에 달했습니다. 아마 이 곡 자체를 요 두어 달간 워낙 열심히 들어서기도 하겠죠. 주로는 카퓌송 형제의 바이올린-첼로로 들었고, 이자크 펄먼과 핀커스 주커만의 바이올린-비올라로도 들었어요. 리처드 용재 오닐은 AMK의 젊은 여자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틴 록스와 연주했는데, 일단 호흡도 미묘하게 어긋나고, 어설프게 들떠있는 느낌이었고, 특히나 아마도 비올라라는 악기의 특성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음과 음 사이 공백이 보이며 툭툭 끊어집디다. 거기에 그가 회심의 곡으로 준비한 듯한 마지막 곡 솔로, 비버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했을 때는 "... 지금 학예회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어버렸으니. 음, 저의 '기본'이라는 기준이 영 이상한 건가. 제 취향이 영 이 사람하곤 안 맞는 건가.

동행한 분은 "이자크 펄먼과 핀커스 주커만을 줄창 듣고 있었다면 만족 못 할 만하도 하죠."라고 하셨습니다만. 역시 오닐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펄먼-주커스와는 다른 스타일로 카퓌송 형제가 연주했을 때도 전 극도로 흥분해서 눈물을 쏟아내며 어쩔 줄 몰라했었는걸요. 이 곡 자체가 사람을 업시키는 면이 있고, 워낙 한국사람들 감성에도 잘 맞고, 펄먼-주커만 같은 슈퍼스타의 엄청난 듀엣 연주도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러니 한편으론 만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까다로웠을텐데, 글쎄요. 전 예당을 가득 메운 팬들의 그 열혈한 팬심엔 도저히 감정이입을 못 하겠더군요. 제 귀엔 연주가 영 만족스럽지 않았으니까. 텔레만의 곡 중 비올라협주곡 G장조의 경우 1, 2악장에선 좋아서 눈물이 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3악장에선 그 눈물이 급짜게 식더군요. 2부는 헨델 신포니아에서 비탈리 샤콘느로 넘어가는 때에는 그냥 자버렸고.

얼마 전 출시된, 이날 연주한 레퍼토리가 들어가 있는 바로크 CD를 미리 들었다면 과연 이날의 이 재난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까요. 실황과 CD는 느낌이 매우 다르니까, 아마 꼭 그렇진 않았을 거예요. 안타깝게도 오닐은 전혀 제 취향쪽이 아니었네요. 게다가 바로크에 대한 도전은... "아가, 욕심이 너무 과했구나"라고밖에 못 하겠다능. 사실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에서 치이는 비올라라는 악기의 솔로악기로서의 가능성을 계속 모색하고 확장하고 있는 오닐이니만큼, 아마도 익숙하고 친숙한 완숙함보다는 낯선 신선과 모험심, 그리고 치기 쪽을 더 고려해야 할 거고, 그게 오닐의 매력이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애초에 오닐의 유명세보다는 '바로크래...'라며 끌렸던 건데, 일단 제 귀는 툭툭이 끊어지는 그 음 사이 공백들에 너무 민감하게 굴어서 말이죠. 사실 원래의 제 취향으로 하면, 찢어지고 가는 바이올린보다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비올라 소리를 더 좋아하는 게 맞거든요. AMK 멤버들의 소리가 훨씬 더 좋기도 했고요. 하긴, 젊은 연주자들의 경우엔 뭐 완벽한 연주를 기대하기보다 같이 응원하고 같이 커가고 같이 모험하는 맛 쪽이 더 방점일 거예요. 그러니 팬심 가득한 팬들이 객석을 채워야 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전 장소를 잘못 찾아간 셈이겠죠. 

2009/03/04 13:11 2009/03/04 13:11

바이올리니스트인 르노 카퓌송과 첼리스트인 고티에 카퓌송의 듀오 리사이틀이 최근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다. 76년생인 르노와 81년생인 고티에는 각자 내한을 한 적은 있지만 한국에서 한 무대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로 개성이 다르면서도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던 이 날의 연주는 지적이면서도 단단한 열정을 뿜어낸 명공연이었다.

애초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주곡이 별로 없기도 하지만, 이 날 프로그램은 일반적인 청중에게는 난해할 수밖에 없는 현대음악들로 구성됐다. 슐호프와 라벨, 그리고 코다이의 이중주 곡들이 그것이다. 불협화음의 충돌과 혼란 속에서도 은은한 열정을 감추고 있는 이 곡들은 클래식 매니아가 아닌 일반 청중들에겐 낯설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데다 정교한 테크닉을 요하는 작품들이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거의 대등하게 겨루는 슐호프의 작품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는 무림의 최고 고수 둘이 서로 대결을 하면서도 하나의 우아한 춤을 이루는 광경 같은 소리를 들려줬다. 첼로가 두드러지는 라벨의 곡은 원래 드뷔시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르노의 바이올린이 진중하고 이지적인 차분함으로 한발 물러선 듯했다면 고티에의 첼로는 마치 젊음의 격정으로 질주하는 듯했다. 만약 라벨의 곡만 들었다면 엄격한 절제미와 수줍음이 르노의 연주 스타일이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터미션 후 2부에서 코다이의 곡이 연주되자, 르노의 바이올린은 진중하게 받쳐주는 고티에의 첼로를 타고 마치 하늘을 나는 듯 우아한 열정을 뿜어냈다. 호흡과 조화는 완벽했고 끊어질 듯 말 듯 피아니시모로 악장을 마무리할 때마다 객석의 숨소리마저 쥐고 흔들었다.

Capuçon Duo

르노 카퓌송과 고티에 카퓌송의 리허설 모습.


하지만 이들의 연주가 무작정 격정을 터뜨리는 식은 아니다. 얼핏 듣기엔 엄격하고 정확한 테크닉에 타이트하고 차분한 절제미로 격정을 한 번 누르는 듯하다. 그러나 계속 듣다보면 그 밑에 마치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용암과 같은 열정이 느껴진다. 칼주름을 세운 하얀 와이셔츠에서 단추 둘만 푼 조각남을 볼 때 느껴질 법한 섹시함이 카퓌송 형제의 음악에 있다. 한 꺼풀 가려져 있기에 더욱 뜨겁게 느껴지는 열정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젊은 생동감과 경쾌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형인 르노는 좀더 이성적인 면모에 수줍으면서도 완숙한 열정의 스타일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면, 고티에는 젊음을 과시하듯 질주하면서도 이를 사려깊은 진중함으로 감싼 듯한 스타일로 첼로를 연주한다. 형이 차가운 불꽃이라면 동생은 뜨거운, 펄펄 끓는 얼음이다. 그렇게 다른 스타일이 완벽한 호흡으로 음을 주고받으며 연주하자 마치 하나의 악기가 동시에 두 가지 소리를 내는 듯한 음악이 된다. 이들의 연주는 노장의 깊이와 통찰을 갖추진 못했다 해도 젊은 연주자답지 않은 노련함을 패기와 함께 드러냈다.

객석은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고, 형제는 헨델-할보르센의 파사칼리아 사단조를 앵콜곡으로 연주했다. 본 프로그램의 연주가 숨겨진 열정에도 불구하고 지적인 면에 더 호소했다면, 앵콜연주는 여전한 절제미에도 불구하고 애절한 격정이 폭발했다. 그예 기립박수가 나왔다. 바로크 음악이나 낭만파의 곡 등 국내 청중들에게 좀 더 익숙한 곡을 이중주곡으로 편곡해 들려줬다면 과연 어떤 연주가 나왔을지, 이 앵콜곡 하나로 기대와 호기심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두 카퓌송의 듀오 연주는 이렇게 객석을 흥분과 열광으로 몰아넣은 채 막을 내렸다. 앞으로 듀오의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간절하게 기대하게 만든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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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9 12:08 2008/12/19 12:08

잘자요, 엄마

1월 초까지 연장공연 중.

"엄마, 나 오늘밤 자살할 거예요."

어디 여행이라도 갈 것처럼 부산하게 집안을 정리하던 딸의 입에서 문득 이 말이 떨어졌을 때 가슴이 무너지지 않는 엄마가 있을까.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나, 현실감 없이 느껴져 웃으며 면박을 줬다가, 그것이 진심임을 알고는 화를 내고, 설득도 했다가, 울며 매달리고, 비난도 해보고,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그 와중에도 딸을 안쓰러워하는 어미의 심정을. 하지만 그 자신도 자식을 키우는 엄마로 그 심정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세상을 등지고자 결심했던 그녀는 또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던 걸까.

'제시'는 오랫동안 간질을 앓았고 남편과는 헤어졌으며 하나뿐인 말썽꾼 아들도 가출하고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노모인 '델마'와 단둘이 살면서, 그녀는 자신의 우울한 기운 때문에 엄마의 친구가 집에 놀러오기 꺼려하는 것도, 남편이 결국 자신을 떠난 것도 그저 담담히 받아들인 상태다. 그녀에겐 더 이상 삶을 지속해야 할 논리적인 이유도, 생존 의지도 없다. 삶이 살아지는 대로 그냥 견디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녹슨 총을 찾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날, 홀로 남아 자신의 시체를 치워야 할 엄마가 걱정돼 그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고 만다. 세상 어느 엄마가 "오냐 그래라" 할 리가 없다. 두 모녀의 격한 대화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과 숨기고 있던 비밀들이 드러난다.

모자관계나 부자관계와는 또 다른 모녀관계는 대체로 격렬한 애증과 서로에 대한 연민이 병행되는 경우가 많다. 딸들의 고달픈 삶은 언제나 세상 모든 모녀관계의 단골 레퍼토리인 '엄마처럼 살기 싫었어'와 '이제야 엄마 마음을 알겠어'를 단계적으로 반복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언제까지나 아버지인 것과 달리, 어머니는 딸에게, 혹은 딸에게 어머니는 어느 순간 '친구'가 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딸은, 결국 상대가 자신을, 자신이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원래 친구란 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가장 좋은 친구 관계란, 서로 다르다는 것, 어느 부분에 있어 서로 타인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함께 가며 지지하는 관계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서로 타인일 수밖에 없는 부분에서 절망하고 주저앉곤 한다. 아마도 남자관객이나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하는 여성관객의 눈에 이 연극이 영 낯설게 느껴진 부분이 있다면, 그건 제시가 결국 엄마 앞에서 자살을 행해서라기보다는 애초 수직적 혈연관계였던 모녀가 나이가 들면서 수평적인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 하략)

잘자요, 엄마

모녀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애증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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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9월 추석연휴,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빨간그림자님과 함께

- 내가 본 것은 손숙X황정민. 나문희의 델마가 매우 궁금하긴 한데, 연장공연에서는 빠지셨다. 서주희의 경우 궁금하기는 하지만 <레이디 맥베스> 때의 연기 스타일로 보건데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로 연기를 하실 듯. 손숙의 델마와 황정민의 제시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마 나문희의 델마는 좀더 세속적이고 좀더 낮은 계급의 아줌마를 보여주셨을 것 같다. 이미 연극을 본 사람들의 말로는 나문희와 황정민의 궁합이 더 좋았다곤 하는데... 손숙의 델마는 별로 안 그런데 우아한 척하는 속물적 이미지가 보여서 나름 설득력이 있었고, 황정민의 제시는... 정말 제시가 실존인물이라면 바로 저렇게 생기고 저렇게 말을 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태석의) 극단 목화의 간판배우이자 연극계에선 이미 베테랑으로 소문난 배우이지만 그녀의 연극 연기는 처음이었는데, 말그대로 감동했고, 반했다.

- 마샤 노먼의 작품들은 종종 페미니즘 희곡이라 분류되곤 하지만 정작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마샤 노먼의 작품들, 특히 이 작품을 페미니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긴 여자 작가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모두 페미니즘은 아니긴 한데, 딱히 왜 그런 것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찾아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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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3 16:12 2008/12/13 16:12

모차르트의 대가, 즉흥연주의 천재, 하버드대학 교수. 피아니스트 로버트 레빈 앞에 붙는 수식어다. 모차르트의 미완성 작품들에 관한 연구로 하버드 대학의 학부과정을 최우수로 졸업한 로버트 레빈은 커티스 음악원,뉴욕주립대학,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을 거쳐 현재 하버드대학 인문학 교수로 재직중인 음악이론가, 교육자,피아니스트다. 이론과 연주 양면에 걸쳐 모차르트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는 세계적인 연주자다. 작년 비올리스트인 킴 카시커시언과 국내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열어 전석 매진을 기록했던 로버트 레빈이 올해 다시 한국을 찾았다. 지난 10월 31일 호암아트홀에서는 전곡 모차르트의 곡으로 프로그램을 짠 로버트 레빈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렸다.

이 날의 공연은 '피아니스트 로버트 레빈'보다는 '교육자 로버트 레빈'의 기량과 명성이 확인된 자리였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기량과 명성을 뽐내는 대신, 모차르트의 음악이 어떤 아름다움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들려주었다. 물론 이를 통해 '피아니스트 로버트 레빈'이 더욱 빛났음은 물론이다. 리사이틀이 시작되고 무대에 오른 로버트 레빈은 연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마이크를 잡고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해 재미있고 쉬운 설명부터 시작했다.

"오늘날 음악을 재생산할 때 있어 완성된 음악을 절대시여기는 것과 달리, 모차르트의 시대에는 연주자가 연주할 때마다 음표가 첨가하는 등 변주를 하거나 즉흥연주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음악가들은 음악을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든 예술이란 결국 소통(커뮤니케이션)이라 생각합니다."

로버트 레빈

모차르트 역시 즉흥연주의 대가였다. 모차르트의 즉흥곡이 '작곡된 악보'의 형태로 많이 남아있는 것은 모차르트의 여동생 공이 크다. 즉흥연주를 못했던 그녀는 모차르트에게 사전에 곡을 작곡해 달라고 요청해 이를 미리 연습한 뒤 연주 때 마치 자신이 즉흥연주를 하는 양 피아노를 치곤 했던 것이다.

이렇듯 자유로운 변주와 즉흥연주를 모차르트 음악의 핵심으로 여기는 로버트 레빈답게, 이 날의 리사이틀에서도 그는 매우 흥미로운 음악적 실험을 감행했다. 모차르트에 대한 설명에 뒤이어 그 자신 역시 모차르트와 같은 즉흥연주를 선보인 것. 인터미션 때 청중들이 로비에 비치된 오선지 두 마디의 쪽지에 모차르트적인 테마의 소절을 두 마디 적어내면, 그 중 자신이 선택한 서너 개의 소절을 주제로 삼아 즉흥연주를 펼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미션 때는 많은 청중들이 '소절 적어내기'에 동참했고, 2부가 시작되자 로버트 레빈은 그 중 총 4개의 쪽지를 뽑아 이를 가지고 지극히 모차르트적인 즉흥연주를 해냈다.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 것은 물론이다.

즉훙연주가 아닌 다른 연주들 역시 이런 특성들이 가미되었다. 로버트 레빈의 연주는 1부 프로그램에서는 소나타 15번(바장조, K.533/494)와 우리에겐 '반짝반짝 작은 별'로 알려진 '아, 어머님께 말씀 드리지요'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K.265) 사이에 바장조에서 다장조로 바뀌는 전조 전주곡을 배치했다. 2부에서는 청중의 주제에 의한 즉흥연주와 함께 모차르트의 미완성 곡인 K.400과 K.312 두 곡 중 알레그로 부분을 로버트 레빈이 완성한 버전으로 연주했고, 이를 소나타 13번(K.333)으로 마무리했다. K.400과 K.312는 연이어서 연주했으며(관객들의 박수를 로버트 레빈이 손사레로 막았다), K.312와 13번 사이는 청중의 주제를 사용해 사단조에서 내림나장조로 전조되는 연결하는 즉흥연주로 연결했다.

전반적으로 이 날 로버트 레빈의 리사이틀은 감성이나 정확한 테크닉보다는 학자적 분석이 엿보이는 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즉흥연주와 자신이 완성한 미완성곡을 연주한 2부에서 좀더 생기있는 연주를 선보인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정확한 타건과 한없이 맑고 가벼운 모차르트 연주를 기대한 청중이라면 다소 실망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모차르트를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 연주였다는 점, 모차르트 음악의 비밀의 핵심을 슬쩍 엿보는 듯한 기분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Oct. 31, 2008, 20:00 호암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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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8 05:28 2008/11/28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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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ill Me

올해도 <쓰릴 미>의 막이 올랐다.

피아노 연주자 한 명과 배우 두 명. 뮤지컬 <쓰릴 미>의 무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 사람이 다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의 음악은 피아노주자 한 사람이 담당하고, 연쇄살인, 동성애 등 파격적인 소재로 가득한 이 공연의 연기는 단 두 배우가 책임진다. 인터미션 없이 한 시간 반 동안 한번에 몰아치는 공연이다. 그런데 이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무대 위의 연주자와 배우도, 객석의 관객들도 모두 넉다운된다.

뮤지컬 <쓰릴 미>는 원래 스티븐 돌기도프가 희곡, 작곡, 연출과 출연까지 도맡아 오프브로드웨이에 2003년에 초연을 올린 2인극이다. 1924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네이슨 F. 레오폴드 주니어와 리처드 알버트 로브의 실화를 각색한 것으로, 부유하고 영향력 있던 집안의 자제로서 15살에 대학에 진학할 만큼 뛰어난 두뇌를 가졌던 당시 19살의 두 소년이 강도와 방화 등을 일삼다가 15살짜리 소년을 납치해 살인한 사건을 다룬다. 앞길이 창창한 유력한 집안의 범상치 않은 두 소년이 오로지 '재미'를 위해 살인을 했을 뿐만 아니라, 체포된 뒤 두 사람의 동성애 관계가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다.

이 작품은 극 중 '나'로 지칭되는 네이슨이 가석방 심의위원회에서 '그'로 지칭되는 리처드와의 관계를 고백하며 회고하는 액자식 구성을 이룬다. 작년에 처음 국내에 막을 올린 이 작품은 류정한 - 김무열 페어, 최재웅 - 이율 페어와 나중에 빠진 류정한의 빈자리를 메꾼 강필석까지 도합 5명이 번갈아 출연했고, 회를 거듭할수록 입소문이 나면서 막을 내릴 때까지 계속 매진 행렬을 이루었다. 그 성공의 신화에 힘입어 올해 다시 막을 올렸다. 류정한과 김무열이 자신의 역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페어를 이루지는 않았고, 대신 네이슨 역에 이창용과 김우형이, 리처드 역에 김동호가 가세했다. 류정한과 김무열이 출연하는 날의 공연은 1차, 2차에 걸쳐 티켓이 오픈되자마자 순식간에 매진이 됐다.

새로운 네이슨과 새로운 리처드에 대한 관심도 꽤 높은 편. 아무래도 작년 이 공연이 뮤지컬대상에 나란히 남자주연상(류정한)과 남자주연상(김무열) 후보를 내고 류정한이 수상을 했떤 만큼 작년의 네이슨과 리처드와 줄곧 비교당할 수밖에 없다. 올해 새로 가세한 배우들이 공연 초반에 그만큼 혹평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두 배우 간 성량의 조화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자주 일었다. 심지어 새로운 리처드 김동호를 향해서는 기본적인 음정이 불안하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그러나 공연이 한참 진행된 지금, 이들에 대한 평가는 보다 다양해진 편이다. 작년 초연배우들의 공연이 눈에 익은 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불만이 돌고 있지만, 그럼에도 올해의 <쓰릴 미> 역시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거의 매회 공연이 매진되고 있다.

Thrill Me

'나' 역을 열연하고 있는 김우형.


<쓰릴 미>가 이토록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단순히 소재의 파격성 때문만은 아니다. 작년 김달중 감독에서 올해 이동선 감독으로 연출자가 바뀌면서 과감한 애정씬들이 늘었지만(키스씬이 네 번이나 된다), 작년의 팬들은 오히려 늘어난 애정씬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두 사람의 사랑이 노골적으로 표현될수록 그 절절함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극의 제목인 '쓰릴 미'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오로지 '스릴'을 느끼기 위해 자행된 잔혹범죄 뒤에는, 당시 동성애를 죄악시했던 사회적 금기와 부르주아 특유의 억압 밑에서 비뚤어진 두 남자의 우정, 혹은 사랑이 있다. 이들이 그토록 '스릴'을 추구한 것은, 이들이 스릴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미성숙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조숙하고 영리했던 그들은 아직 자아를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일찍 사회에 나가고 성인 수준의 지식을 습득하지만, 이것을 적절한 감성과 사회성 안에 소화시키지 못한다. 니체에게 열광했던 이들이 초인 사상을 "뛰어난 인간들은 살인쯤 해도 괜찮다"고 오독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들은 어른의 지식과 아이의 감수성을 가진 불균형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극은 두 남자를 사회적 금기와 억압의 피해자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극이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은 '금지된 사랑'이라는 조건 하에 애정을 빌미삼아 상대를 착취하고, 그것을 역이용하여 자신의 사랑을 묶어두려는 두 남자 사이의 무시무시한 심리 게임이다. 그러면서도 결국 베일을 벗는 것은, 지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랑보다 절실한 사랑이다. 이들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고 상대가 있기에 비로소 완전함을 느끼는 완벽한 한 짝이었다. 비록 그들이 어린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치기어린 바보들이라 한들, 둘의 심리게임을 따라가던 관객들은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잔혹함 뒤의 쓸쓸하고 외로운 얼굴과 부지불식간 마주치게 되고, 결국 그들의 게임에 동참하면서 네이슨의 애절한 사랑의 갈구와 리처드의 미성숙한 열정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만다. 작년 팬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든 올해 처음 공연을 접한 사람들에게 <쓰릴 미>가 여전히 충격적이며 흡입력 강한 작품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두 배우의 호흡과 케미스트리가 극 전체의 완성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후반으로 갈수록 공연이 월등하게 좋아지고 있다는 점도 반복 관람을 부채질하는 요소다.

배우는 단 두 명뿐인데도 극 속의 시간은 무려 34년을 아우르고, 장소 변화가 많으며, 두 사람의 미묘한 심리의 흐름이 주축이 된다는 점에서 무대극보다는 오히려 영화에 더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 더 익숙한 관객이라면 몇몇 미묘한 심리적 변화의 순간 '클로즈업'의 필요를 절실히 느낄지도 모른다. 곡들은 극의 성격에 맞게 어둡고 격렬한 편이지만 그만큼 절절한 서정성이 짙은 곡들이 다수다. 특히 주제가인 '쓰릴 미'는 섬세하고 호소력 넘치는 선율로 뇌리에 깊게 박히는 곡이며, 리처드가 아이를 유괴할 때 부르는 '로드스터'는 카리스마 넘치는 곡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랙에서 10월 12일까지 공연될 예정이다.




ps. 7월 16일 수요일 8:00pm,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랙, 김우형 X 김동호 페어

ps2. 프레시안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라감

ps3. 지금은 김동호 음정이 좀 안정됐나? 저 날 공연보러 갔을 때 김동호의 그 불안한 음정은 정말 안습이었다.

ps4. 김우형 X 김무열, 혹은 이창용 X 김무열의 공연을 보고 싶은데, 인기 많은 김무열 군 표가 다 매진이야! <일지매>에서 깐죽대는 연기 보고 '그' 역을 하는 김무열이 무척 궁금하단 말이다...!

2008/08/15 08:02 2008/08/15 08:02
뮤지컬로도, 영화로도 공개된 <스위니 토드> 때문에 작곡가 스티브 손드하임은 이제 국내에서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그 손드하임이 1970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첫 무대를 올린 뮤지컬 <컴퍼니>가 국내에도 상륙했다. 지난 5월 27일 개막해 현재 절찬리에 공연중이다.

서른 다섯 번째 생일을 맞는 바비에게 친구들이 깜짝파티를 치러주는 것으로 극이 시작된다. 번듯한 직장에 매력적인 외모, 쿨한 성격과 유머러스한 말재주를 가진 바비(고영빈)는 화려한 연애생활을 이어가는 독신남이다. 여자의 스타일에 따라 유려한 작업기술을 다르게 적용시켜가며 세 명의 여자친구를 동시에 만나고 있는 그는 이미 결혼했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는 다섯 커플의 친구들에게서 결혼 독촉을 받는다. 다양한 개성대로 다양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친구들은 바비에게 결혼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설득하지만, 바비가 커플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드러나는 건 결혼의 단맛보다는 쓴맛이다.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부부도, 각자 자기 생활패턴을 유지하며 사는 부부도, 고독과 권태를 느끼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다섯 커플이 바비를 대하는 방식은 이중적이다. 바비를 자신들의 '커플 클럽'에 서둘러 가입시키려 하면서도 그의 싱글 상태를 부러워하고, 그와 기혼자의 애로사항을 공유하고 싶어하면서도 싱글이기에 가능한 '화려한 연애편력'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운다. 

컴퍼니

이래저래 해도 결국 남는 건 '친구집단(컴퍼니)'뿐.

그러나 바비의 삶이라고 결혼한 친구들의 삶보다 더 나을 것은 없다. 세 명의 여자 중 다소곳한 타입은 그에게 결혼할 남자가 아니라며 이별을 고하고,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어린 배우지망생은 숭배자를 필요로 할 뿐이다. 하지만 바비가 정말 진지한 관계를 원하는가? 그는 열정적인 하룻밤을 보낸 뒤 자신에게 애착을 보이는 여자를 부담스러워 하며 얼른 집밖으로 그녀를 쫓아내기 위해 골몰한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건 외로움이다. 극 내내 바비는 쾌락을 쫓는 바람둥이처럼 행동하지만, 극의 마지막에서 마침내 폭로되는 것은 외로움과 결혼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다. 누군가와 진정한 사랑과 완전한 소통을 갈구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절망과 체념이다.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물러난 현대 도시사회에서 교육 수준이 높고 전문직종 종사자일수록 평균 결혼 연령이 높다. 죽을 때까지 절대적이었던 결혼의 맹세도 쉽게 깨진다. 이게 현대 도시인들의 삶이다. 자유로운 사랑이 주는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빛을 발할수록, 이 관계가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언제 뒷통수를 맞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빛 뒤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든다. 과거에는 결혼이라는 것이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의 대상이었다면, 현대인들에게는 "해도 외롭고, 안 해도 외로운" 것인 셈이다.

인터미션을 포함해 총 2시간 반에 달하는 이 공연은 소규모 공연답지 않게 많은 수의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캐릭터 하나하나가 워낙 또렷한 개성으로 치밀하게 구축되어 전혀 혼동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은 바비지만 극 전체에서의 비중은 각 캐릭터에게 고르게 안배된 편. 각 커플들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나열되고 그 사이 바비의 연애 에피소드를 끼워넣는 다소 단순한 플롯임에도 이를 통해 진행돼 나가는 이야기는 신랄하면서도 치밀하다. 다소 난해한 넘버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스위니 토드>와 달리 사용된 넘버들도 하나같이 세련되고 산뜻하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 식의 귀를 확 잡아끄는 달달한 훅은 없지만, 등장인물 전체의 아카펠라 합창과 중창이 주를 이루는 노래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감칠맛이 난다.

배우들의 연기도 매우 좋다. <그리스>, <바람의 나라> 등의 무대에 섰던 고영빈은 세련되고 매력적인 현대 도시의 여피 바람둥이의 역할을 매끈하게 소화해내며, 극 중 베드씬(!)을 펼치는 에이프릴 역의 유나영과 케미스트리도 매우 훌륭하다. 열 명의 친구들 역시 순발력 넘치는 애드립과 코믹한 연기로 극의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서로 대사를 주고받는 리듬감도 매우 좋은 편. 남자 캐릭터보다는 여자 캐릭터들 쪽이 매우 강력한 코믹 연기를 선보이며 좌중을 웃음도가니에 빠뜨린다. 특히 양꽃님(제니 역)의 다양한 목소리 톤의 대사와 방진의(에이미 역)의 경악하리만치 자유자재로 출렁이는 얼굴근육 연기는 극의 코믹한 성격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이런 웃음의 뒷맛은 쓰고 서글프기 짝이 없다. 이것은 밝은 표정으로 마지막 노래를 부르되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야 마는 고영빈의 몫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극중 바비와 비슷한 또래의 싱글남녀들은 이 뮤지컬을 보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고 상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계속해서 미뤄두고 덮어두었던 인생의 중대한 질문을 비로소 대면할 용기를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8월 17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될 예정. <헤드윅>, <바람의 나라>, <밴디트> 등으로 뮤지컬계의 스타 연출가로 떠오른 이지나가 연출을 맡았다.


바비가 부르는 곡, 'Marry Me A Little'


ps. 6월 4일 수요일 8:00pm,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보고 한 달 반이 넘어서야 글을... 으으)

ps2. 결국 95년 브로드웨이 캐스트가 녹음에 참여한 OST를 샀다.

ps3. 고영빈 팬들은 필히 맨 앞좌석 정중앙 자리에 앉으실 것. 고영빈의 '그녀' 중 하나로 극에 2초간 출연하게 된다. ㅋㅋ (고영빈이 손도 잡아주지 아마?)

ps4. ... 글만 보면 무지 우울할 것 같지만, 배꼽 찾느라 미친 듯이 웃게 되는 '코미디'다.

2008/07/17 10:30 2008/07/17 10:30

썸걸(즈)

나쁜 남자의 속내를 폭로한다.

여기 프랑스에서 살며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된 남자, 진우가 있다. 그는 최근 여자친구와 결혼 날짜를 잡은 뒤 한국에 돌아온 터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는 오로지 진우의 호텔 방. 그리고 이곳에 그의 옛 여자 네 명이 차례로 방문한다. 평범한 주부가 돼 있는 수줍은 성격의 15년 전 첫사랑 양선,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민하, 진우의 선배 감독의 부인이자 한물 간 여배우 정희, 그리고 쿨하고 세련된 감성의 레지던트 의사 은후다. 각각의 여자들과 진우의 만남이 계속되면서 관객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다는 진우의 소박한(?) 의도와 시간이 여전히 아물지 않은 그녀들의 상처가 계속해서 충돌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넘치는 매력과 재능으로 여자들에게 저돌적으로, 때로는 수줍게 접근하며 양다리도 불륜도 서슴지 않았던 그는 단 한 번도 책임있고 진지하게 관계를 이어가지 못했고 결정적인 순간엔 언제나 말없이 혼자 도망쳐 버렸던 이기적인 남자다. 그런 주제에 그녀들 기억 속에 자신이 '나쁜 남자'로 기억되는 것은 또 두렵고 싫다. 한 마디로 '좋은 건 다 하고싶고, 나쁜 짓은 해도 나쁜 놈은 되기 싫은' 남자다. 게다가 가장 쿨하게 시작해 감정적으로 가장 격하게 충돌하고 폭발하는 은후와의 만남에서 진우의 또 다른 찌질한 비밀이 드러난다. 이쯤 되면 객석에 있던 여자관객의 입장에서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 주인공 진우 역을 연기하는 배우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분노와 짜증이 극도에 이르기 일쑤다. 하지만 그에게 그렇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10년, 15년이 지난 후 그의 연락에 그녀들이 결국 호텔방을 찾아왔듯, 관객들 역시 저 이기적이면서도 어린애 같은 남자를 결국 완전히 증오하지는 못 한다.

1997 년 영화 <남성전용회사>로 데뷔해 선댄스영화제에서 각광받은 뒤 <너스 베티>, <포제션> 등을 만든 닐 라뷰트 감독은 재능있는 희곡 작가이기도 하다. <썸걸즈>는 닐 라뷰트가 2005년 각본을 써서 초연을 올린 작품. 미국에서는 인기 TV 시트콤 <프렌즈>의 '로스' 데이빗 쉬머가 주인공을 맡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국내에는 뮤지컬 배우 이석준과 베테랑 연극배우 최덕문이 주인공 강진우 역에 더블캐스팅되어 작년에 초연되었다. 올해 앵콜 공연으로 다시 무대를 찾아온 <썸걸즈>는 여배우 중 일부가 바뀌기는 했지만 이석준과 강진우가 그대로 다시 진우 역을 맡는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남자배우들이 그간 유부남이 됐다는 것, 그리고 뮤지컬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등에서 주연을 맡으며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뮤지컬 배우 전병욱이 7월 3일부터 새로운 강진우로 합류했다는 것이다.

썸걸(즈)

뻔뻔하고 찌질한 나쁜남자와 그의 다양한 과거의 여자들의 '과거 디비기' 공방전.

우리말로 상당히 매끄럽게 번역, 각색된 <썸걸즈>는 생생한 구어체 대사를 '맛있게' 주고받는 배우들의 호연 덕택에 "내 주변에 저런 남자, 저런 여자 꼭 하나씩 있지" 싶게 만든다. 기자가 관람한 회차에서 이석준의 강진우는 각각의 여배우와 대사를 주고받는 감각이 상당히 리드미컬하면서도 자연스러워 객석의 자연스러운 웃음을 이끌어내며, 자기과시욕이 강하고 여자들에게 적당한 타이밍에 '불쌍한 모습'을 보일 줄 아는, 그래서 밉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강진우를 '미끈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대화가 계속될수록 남녀 모두의 쪼잔함과 상처가 폭로되면서 당연히 나올 법한 신랄한 블랙 유머의 느낌은 다소 둔한 편이다. 15년 전 자신을 버리게 만든 그 여자가 누구였는지 집요하게 따져묻는 첫사랑 양선은 충분히 이해받고 감정이입될 수 있는 캐릭터임에도 다소 단순하고 우스꽝스럽게만 묘사된 감이 있다. 연극이 진행될수록 각 캐릭터들이 드러내는 상처와 이 속에 들어있는 처절함과 치졸함과 억울함과 뻔뻔함은 관객들 각자 얼굴을 붉히며 찔려 할 면들을 매우 통렬하게 끄집어내고 폭로하지만, 이것이 막판으로 갈수록 물기나 유머가 전혀 없이 처절한 악다구니의 형태로만 가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썸걸즈>는 이기적인 '나쁜 남자'와 알면서도 속아주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여자들의 연애 관계가 실은 어떤 권력관계의 기반 위에 서 있는지, 연애 관계를 통해 사랑이라는 환상을 한쪽이 일방적으로 착취한 결과가 상대에게 어떤 식의 상처로 남는지를 매우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연극이다. 나아가 인간이란 존재가 빛 좋은 말잔치 뒤에 어떤 치졸한 본성을 숨기고 있는지, 사랑이라는 달콤한 마취약이 실은 어떤 섬뜩하고 고통스러운 가시를 품고 있는지 통렬하게 폭로한다. 4월 11일 오픈해 애초 8월 중순까지 공연될 예정이었던 이 연극은 입소문에 따른 인기에 힘입어 현재 대학로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오픈런으로 공연중이다.

ps. 7월 6일 일요일 3:00pm, 대학로설치극장 정미소

ps2. 프레시안무비에 올라간 글

ps3.  네 명의 여자가 모두 이해되더라.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첫사랑 양선마저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내가 가장 예뻤던 때가 있었다"는 믿음을, 사실은 누구든 갖고 싶어하지 않을까. 혹은 어차피 저 남자가 나를 즐기는 대상으로만 대하는 거, 뻔히 알고, 뻔히 아니까 상처는 안 받아도, 그래도 섭섭하고 아픈 것. 혹은, 저 빛나는 꿈과 비전과 재능을 가진 남자와 어느 한 순간이라도 함께 하고픈 욕구. 그리고 쿨하려고 쿨하려고 그렇게 애써도 결국 처절한 절규로 상처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ps4. 사실 이 연극의 진짜 본질은 '연애는 권력, 사랑은 환상'이라기보다는, 사랑을 핑계삼아 여성들의 감정을 착취하며 지탱되는 남자 예술가에 대한 고발극이다. 쓰다보니까 그 부분을 홀랑 까먹어버렸네...

ps5. 그래서 결국 뒤로 요런 잡담글이나 쓰고 앉았다는. 하하;;

2008/07/08 23:34 2008/07/08 23:34


김수철 - 나도야 간다


배창호 감독의 1984년작 <고래사냥>의 주제가는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아니라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이다. 물론 송창식의 곡이 먼저 나왔고(아마도 75년, <바보들의 행진> OST에서였다고), 배창호 감독의 영화 제목은 거기에서 따왔을 수도, 혹은 다른 데에서 연유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건 마지막에 일행이 춘자의 고향에 도달해 무사히 어머니의 품에 안착할 뿐만 아니라 춘자가 말을 되찾기까지 하는, 매우 낙관적이고 희망이 넘쳐나는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에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노래가 아닐 수 없다. 송창식의 노래가 아무래도 좀 우울한 구석이 있는데다 가사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간다기보다는 아무래도 '도피'의 고래를 찾아나서는 듯한 느낌인 반면, 김수철의 노래에는 청춘다운 패기와 정말로 희망을 찾아나서는 적극적인 힘이 살아있다.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부분이 "젊은 나이를/세월을 눈물로 보낼 수 있나"인데, 잘 알려져있다시피 이 노래의 가사는 원래 박용철이 1925년에 발표한 시 '떠나가는 배'의 1연을 베이스로 한다.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 눈물로야 보낼 거냐 / 나 두 야 가련다) 김수철의 '젊은 그대'도 그렇지만, '나도야 간다' 역시 굉장히 단순하고 힘찬 로큰롤 가락인지라 박용철의 원시의 비장하면서도 절망어린 표정 대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나는 희망의 힘이 훨씬 더 강하다. 그리고 이런 건강한 희망과 낙관이야말로 현실을 돌파하는 가장 큰 힘, 나아가 예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네이버를 검색하다가 저 뮤직비디오를 찾았는데, 2002년에 제작된 거라고 하는 듯? 이미숙과 안성기가 찬조출연을 해주고 있는데, 이미숙의 추억 속 앨범에 등장하는 <고래사냥> 원래 영화 장면, 이라는 시작도 좋고(미숙언니 너무 예쁘심 ㅠ.ㅠ), 안성기가 <고래사냥>의 바로 그 거지왕초 캐릭터로 다시 등장하는 것도 너무 좋다. (안성기 최초의 뮤직비디오 출연이라고 한다.) 다만 현대의 아이들은 너무... 곱고 팬시하다는. 뭐 뮤직비디오니까 어쩔 수 없는 거려나. 남자애가 보고 있던 TV에 나오는 장면이 유곽에서 도망치는 장면과 기차 지붕 위로 올라타는 장면인데, 특히 저 기차 장면은 영화적으로 매우 아름답게 잘 찍힌 명장면이다. 음악은... 기타 사운드가 좀더 일렉해지고, 전체 템포가 좀더 빨라진 듯한. 소박한 원래 버전이 더 좋지만 이 버전도 나쁘진 않다.

<고래사냥>이 저토록 희망차고 낙관적인 영화임에도 나는 영화를 보다가 여러 번 눈물을 흘리며 아픈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 '신나는' 2002년 뮤비 버전도, 처음에 볼 땐 혼자 막 눈물 찔끔대며 가슴이 아팠더랬다. 웃다가 울다가 가슴 부여잡다가, 그럼에도 너무나 밝은 저 김수철의 표정이 참 좋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아, 근데 다시 들어도 진짜 명곡이다. 25년 전 노래가 이토록 세련되고 여전히 힘있을 수가 있다니까. 김수철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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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3 00:57 2008/07/03 00:57


... 그리고 16년이 지났다.

이것이 매우 감상적인 마스터베이션, 혹은 감상의 소비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지금 광장에 서야 시민이라는 누군가의 호소력 강한 설득을 보고 들으면서도, '노동자이자 시민'이 아닌 '노동자의 계급성이 거세된 시민'으로서 그 광장에 서고 싶지는 않다고 여전히 고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아프다.

다시는 시청광장서 눈물을 흘리지도,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던 다짐, 그 약속. 16년간 참으로 많은 이들이 참으로 꾸준히도 피눈물을 흘리고 경찰의 곤봉에 맞고 방패에 찍혀왔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오늘, 이제는 거리에 나올 일이 한번도 없었을, 저 16년간 방패에 찍히고 경찰의 곤봉에 맞는 사람을 과격하고 정신나간 사람들이라 생각했을 사람들마저 다시 물대포에 쓰러지고 군화발에 짓밟히고 있다.

이 나라 이제 그만 뜨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뜰 돈도 여유도 없으니 결국 죽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든다. 결국 빚을 지거나 남에게 사기를 쳐서라도 돈을 모아 이 나라를 떠야 하는 걸까, 아니면 신경정신과라도 찾아가 하다못해 플라시보 약이라도 처방받아야 하는 걸까. 살아남으려면, 차라리 죽고싶다는 생각을 떨치려면 대체 어째야 할까. 암만, 우울증은 사회적 질병이 맞다.


2008/06/30 12:05 2008/06/3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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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향한 야망과 명분 없는 야망에 대한 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던 맥베스의 등을 떠밀며 그의 악행을 격려했던 맥베스의 부인, 즉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의 악행에 강한 동기를 부여해주고 함께 뒤처리를 하는 중요한 공범이면서도, 정작 셰익스피어의 원작희곡 [맥베스]에서는 그 중요성만큼 복합성과 입체성을 부여받지는 못하는 캐릭터다. 그런데 <레이디 맥베스>는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맥베스가 아닌 레이디 맥베스가 주인공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지녔던 웅장한 비극적 인물의 광휘, 야망과 양심 사이의 격렬한 고뇌와 갈등은 이 연극에서 오롯이 레이디 맥베스의 몫이 된다. 맥베스는 그저 주인공의 남편으로서 부인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심약한 기질과 성품의 공처가로, 유약함과 우유부단으로 한껏 희화화된 채 표현된다. 심지어 연회 장면에서는 원작보다 더 나아가 만인 앞에서 옷에다 실례를 하기까지 한다.

한태숙이 창작하고 연출한 연극 <레이디 맥베스>가 1998년에 초연되었을 당시 얼마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이 연극이 "셰익스피어에 대한 모독 및 훼손"이라는 평을 받았다면, 이것은 정말 고전 중의 고전에 손을 댄 것에 대한 불편함보다는 여성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를 압도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원작들이야말로 대체로 여성 캐릭터들이 남성 캐릭터에게 종속되거나 주변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거부감이 꼭 남성우월적인 구시대의 유물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에 대한 모독 및 훼손'이라는 비판 역시 구차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톰 스토퍼드가 [햄릿]의 두 조연 캐릭터를 등장시켜 무려 '코미디'로 재창작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가 에딘버러에서 초연된 게 벌써 1966년이 아닌가. 1998년은 톰 스토퍼드가 각본에도 참여한 영화 <세익스피어 인 러브>가 개봉된 해이기도 하다.

레이디 맥베스

셰익스피어의 번외작, 사실 좋은 공연이긴 한데 기대에 비해 실망이 컸다.

지난 4월 13일 막을 내린 2008 <레이디 맥베스>는 예술의 전당이 개관 20주년을 맞으면서 기획한 '최고의 연극' 시리즈 제1호 작품이다. 초연된 지 10년, 2002년 이후 오랜만에 재공연된 이 극은 초연 때처럼 서주희가 다시 레이디 맥베스를 맡았고, 실험 오브제극의 성격이 더해졌다. 진흙과 밀가루를 적절히 이용해 레이디 맥베스의 부서지고 공중에 휘날리는 심리와 덩컨 왕이 암살당하는 장면을 매우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무대 위 삼면에 객석이 설치되어 관객들은 중앙무대를 내려다보게 되고, 배우들은 객석 사이 통로들까지 적절하게 무대의 일부로 이용함으로써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관객은 이 연극을 관람하는 관중이자 동시에 레이디 맥베스가 보는 거대한 환영의 일부로 극의 일부가 된다. 타악기 위주의 효과음, 그리고 스산한 분위기를 한껏 강화하는 무시무시한 여인의 구음 역시 이 연극의 완성도를 더욱 높인다.

그럼에도 이제 10년째인 만큼, 시대의 변화 앞에서 이 연극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들이 살짝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도 있는 장면들이 재해석되는 장면들은 여전히 매우 좋지만, 레이디 맥베스의 고통과 광기는 이제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세익스피어의 원래 대사와 새로 덧붙여진 전의-레이디 맥베스 사이의 대사가 그 밀도에 있어 도드라지게 차이가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에서 전의와 광대들의 존재가 실재가 아닌 환영이라는 사실이 폭로되고 전의가 직접 자신의 정체를 레이디 맥베스의 '검은 마음' 나아가 그녀의 '죄의식'으로 굳이 명시해 버리는 장면은, 앞에서 차근히 쌓아올린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최고조로 폭발시키지 못 하고 도리어 맥없이 주저앉혀 버린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관람한지라 배우들의 에너지가 많이 떨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레이디 맥베스의 내면의 갈등과 그 고통, 그리고 갈등이 지나치게 '피로감'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도 이 연극이 원래 지향하고자 했던 방향과 거리가 있는 듯하다. 오브제들이나 대사들은 피로감보다는 '격렬함'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레이디 맥베스가 지친 몸을 겨우 끌고 원래의 객석 위치에 마련된 길을 따라 걸어가는 엔딩 역시 그 의도와 근거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지나치게 노골적이다. 차라리 맬컴과 맥더프가 버냄의 숲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레이디 맥베스가 자살하기 직전의 긴박한 장면으로 마무리가 됐다면 어땠을까. 안 그래도 배우에게 육체적, 심리적으로 강도 높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이 연극이 '배우에게 더욱 가혹한' 극이 될까.

10년을 맞은 <레이디 맥베스>가 그간 쌓아온 명성에 충분히 어울리는 연극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과 그 10년간 사회가 너무 많이 변한 만큼, 그리고 이 극에 명성을 더해준 전통 - 여성의 입장에서 다시 쓰고 재해석하는 페미니즘 예술의 전통 - 이 이제 충분히 대중화된 만큼, 이 연극이 계속해서 명성을 이어가려면 다른 식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번 2008년의 공연은 이 작품이 어떤 기로에 서 있는지를 보다 명확히 밝혀주고 확인해 준 데에서 진짜 의미를 찾아야 할 듯싶다.




ps. 4/13 일, 3:00, 토월극장

ps2.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새 창으로 열기) 올라간 글

2008/04/23 01:22 2008/04/23 01:22

Evil Dead, the Musical

피의 향연을 즐겨라!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샘 레이미 감독의 저예산 호러영화 <이블데드> 시리즈가 뮤지컬로 거듭났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2003년 초연되어 매진행렬을 기록했던 이 뮤지컬이 2006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 무대를 거쳐 드디어 한국에도 라이선스 뮤지컬로 상륙한 것.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들, 이른바 '무비컬'들이 근래에 점차 숫자가 늘어가고 있다고는 해도 원체 피 튀기는 좀비 스플래터 영화가 원작이었던 만큼 뮤지컬 <이블데드>가 끄는 호기심과 관심은 일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국내 버전 <이블데드> 시리즈가 다시 한 번 눈길을 모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본토 공연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무대 바로 앞에 스플래터 존을 마련해서, 극 중 좀비로 변한 배우들이 스플래터 존 관객석으로 난입해 관객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며 관객의 옷에 피를 뿌리고 발라준다. 당초 극단측은 한국적 정서에 맞지 않을 것을 우려해 스플래터 존의 좌석을 적게 배정했지만 이 좌석은 3차에 걸친 티켓오픈 때마다 오픈과 동시에 매진될 정도로 치열한 예매 경쟁이 벌어져 현재 마지막 공연날까지 모두 매진된 상태다.

뮤지컬 <이블 데드>가 눈길을 모은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배우들 때문. 소극장 공연임에도 현재 국내 뮤지컬계에서 티켓파워가 가장 높은 배우에 속하는 류정한과 조정석이 주인공 애쉬 역에 나란히 더블 캐스팅된 것. 특히 <오페라의 유령>부터 시작해 국내에 굵직한 라이선스 대작 뮤지컬들의 주연을 도맡아온 류정한이 이런 작은 공연, 특히 코믹극의 주연으로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캐스팅 초기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애쉬뿐만 아니라 셸리와 애니의 1인 2역을 하고 있는 백민정, 셰릴 역의 최혁주, 정상훈과 더블 캐스팅인 스콧 역의 김재만, 제이크 역의 양준모 역시 다른 뮤지컬들에서 주연급으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이다. 더블 캐스트 중 기자가 관람했던 조정석 - 김재만의 공연의 경우, 역시 차세대 뮤지컬 스타답게 조정석은 시종일관 발랄한 연기 가운데에서도 탁월한 가창력을 보여주며, 가장 먼저 좀비가 되어 계속 애쉬를 좀비의 세계로 회유하는 셰릴 역의 최혁주는 작은 체구가 무색하게 무대 전체를 장악하는 놀라운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1인 2역을 하고 있는 백민정 역시 백치미의 금발미인 셸리와 지적이지만 허영기도 엿보이는 검은머리 미녀 애니 역을 완전히 상반되게 연기하고 있어 사전에 1인 2역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관객들은 이것을 공연 마지막이 돼서야 알아차릴 정도다.

Evil Dead, the Musical

셰릴 역의 카리스마 최혁주.

Evil Dead, the Musical

애쉬 역으로 열연 중인 류정한과 좀비들.

뮤지컬 <이블데드>는 영화 <이블데드> 1, 2편을 적절히 섞으면서도 1편이 코미디보다는 호러에 치중했던 것과 달리 뮤지컬은 처음부터 끝까지 코믹한 웃음을 선사한다. 라이선스 공연들이 의례 보이는 번역투의 어색한 가사는 다른 뮤지컬들보다는 그래도 적은 편. 오히려 'What the Fuck Was That' 같은 곡은 우리말로 '조낸 황당해'로 옮겨졌을 만큼 비속어도 섞여 있다. B급 정서를 전면에 표방한 만큼 비속어뿐 아니라 인터넷식 용어와 성적 농담도 다수 등장하지만 그 수준은 '귀엽게' 마무리되는 편. 배우들의 에너지도 매우 발랄하고 생기가 넘친다. 대학생 다섯 명이 산 속 오두막으로 여행을 가는 설정인 만큼, 배우들의 젊은 열기가 무대를 꽉 채우고 있고, 반복 관람하고 있는 배우팬 관객들의 열띤 호응도 극의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 데에 일조한다. 스플래터 존 좌석의 관객에게 일부러 나눠주는 우비 대신 일부러 흰옷을 입고 와서 배우들이 뿌리는 피를 기꺼이, 그리고 반복적으로 하사(!)받는 관객의 수도 많고, 이들은 매 노래마다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보내며 흥겨운 분위기를 이끈다. 왼손을 잘라낸 애쉬가 전기톱을 비로소 손에 장착하는 장면은 객석에서 터지는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장면이다. 배우들 역시 A열 관객석의 일부부터 스플래터 존과 R석 맨 앞줄 사이의 통로까지 적절히 무대의 일부로 활용해 더욱 관객들의 열띤 반응을 이끌어낸다. 인터미션 15분을 포함해 총 2시간의 공연 시간 동안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다. 공연 마지막엔 배우들이 각자 등장해 다른 배우의 곡들을 부르고 장기를 보여주는 보너스도 추가된다.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랙에서 6월 15일까지 공연될 예정.



ps.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라간 글

2008/04/07 18:21 2008/04/07 18:21

애초에 파격으로 시작했던 만큼 끝까지 그냥 판타지나 가상역사/대체역사로 가버렸으면 더 좋았겠다 싶기도 했지만, 그건 사실 홍자매의 야심을 오해한 거였다. 홍자매 버전의 홍길동은 굉장히 세심한 설정에서까지 원전 홍길동을 가져오는 반면, 원전 홍길동이 오늘날에 가질 수 있는 전복적인 의미를 최대한 끌어냈고 원작의 시대적 한계는 물론 주제의 한계까지 가볍게 뛰어넘었다. 15%의 시청율 속에서 이 드라마를 열렬히 시청했던 팬들마저도 대체로 '드라마가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다'고 불평을 하지만, 내 감상은 그렇지 않다. 비록 무수한 단점들과 아쉬움이 노출되긴 했어도, <쾌도 홍길동>은 한국의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가 해내지 못한 어떤 경지를 획득했다. 그것은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상업적인 매체가 어떻게 가장 건강하고 올바른 사회성을 획득해내는가, 어제의 고전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확장해 나가는가에 대한 어떤 전례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전에 프리미어에 기고했던 글블로그에 올렸던 글에서 썼듯, 이 드라마는 한 사람의 영웅이 민중을 이끄는 게 아니라 민중이 영웅을 만들어내고 그 영웅을 앞세워 그 어깨에 짐을 얹어주는 방식을 보여준 한편, 실재와 허구 간의 상관관계와 실재가 허구화되는 방식 및 허구가 다시 실재화하는 방식을 흥미롭게 보여주었으며, 나아가 이미 충분히 쌓여진 예술과 이야기의 전통 안에서 수직의 방향이 아니라 '팬픽'이라는 형식을 통해 수평의 방향으로 어떻게 예술의 범위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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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실 <쾌도 홍길동>은 허균의 원전인 '홍길동전',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홍길동'이라는 허구 캐릭터에 대한 팬픽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기존 원전을 분명히 밝히면서 원전과 지금의 현재 사이의 틈새를 비집어 새로운 의미로 채우고, 기존에 존재하던 캐릭터에 새로운 색깔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항간에 사람들이 말하는 '포스터모더니즘적인' 예술방식일 수 있다. 이 안에서 한 시대에 머물렀던 고전은 현대적인 옷을 갈아입으며 새로운 의미를 덧입는다. 그리고 왜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고전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해내고 어떻게 교훈을 현실세계에 접목시켜야 하는지 깨닫는다. 조선시대의 홍길동은 적서차별에 들고일어났지만, 현실의 홍길동은 계급에 들고 일어나야 한다. 홍길동이 죽은 직후 <쾌도 홍길동> 안에서의 조선은, 이제 신분제는 폐지됐으나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시대가 되는 것도 슬쩍 스쳐지나간다.

우리는 이미 극장가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BBC에서 어떻게 드라마화되었는지(열정을 주체못해 호수에 풍덩 뛰어드는 미스터 다아시의 새로운 면이 추가된), 그리고 이 드라마가 또다시 어떻게 팬픽의 형식을 통해 소설과 영화로 확장되었는지(브리짓 존스 시리즈 소설 및 영화)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홍자매가 이전에 시도했던 <쾌걸 춘향>과 다른 점은, <쾌도 홍길동>이 직접적으로 지금 우리 현실에 대해 발언하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영어공용화 정책과 FTA를 비꼬고 병역비리와 삼성비리를 씹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현실풍자는 시청율이 알파요 오메가인 드라마라는 장르에서 오히려 시청율을 떨어져나가게 만든 주범으로 작용한 감도 있다.) 8, 90년대의 거대담론에 지친 사람들이 탈정치를 부르짖으며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고, 사적인 영역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폐쇄적인 개인에 갇혀 자폐증적 동어반복만 부르짖고, 그 와중에 딴 거 다 필요없고 경제 살리기가 제일이라며 함량 미달의 사람을 지도자로 뽑았을 때, 타인의 사정과 사회의 돌아가는 꼴이 알게 뭐냐며 자기 한에만 집중하던 길동이와, 그저 오늘 하루 잘 먹고 재미있게 지내는 것에 만족하던 이녹이는 점차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미셸 바렛의 저 유명한 구호를 직접 몸으로, 아주 자연스럽고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에 목이 말라 한량으로만 떠돌던 길동이는 점차 사회 모순에 눈을 뜨고, 자신이 만들고 지켜가야 할 세상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현실화시켜낸다. 이녹이 역시 지식으로 알아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옳은 길을 찾아 그 길을 그 스스로 선택하는 과감성을 보여준다. 이들의 죽음은 비록 어떤 면에서는 '자살택'에 불과할지 몰라도, 죽음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꿈을 영원히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는 점에서 '영생을 얻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회에서 내가 특히 울었던 장면은 활빈당 일동이 굳이 곰이를 산채 밖으로 내보내 살리고, 연씨가 곰이를 무사히 나가게 하기 위해 대신 화살을 막고 죽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홍자매가 단순히 시청자를 억지로 울리기 위해 만든 장면이 아니라고 확신하는데, 이건 내가 홍자매 중 언니 되는 쪽과 동갑이고, 바로 이것이 우리 30대 초중반의 소위 X세대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정서라고 믿기 때문이다. 온갖 무용담을 가지고 있는 386 선배들에게 쨔질 수밖에 없고 별 거부감없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그 경쟁의 생존방식을 몸으로 익힌 20대들에게 걱정을 느끼는 이 세대는, 선배들의 가치는 유산으로 받았으나 선배들의 과오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그러나 후배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되는 게 당연하고 그 후배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볼 수 밖에 없는, 그 와중에 자신의 이야기는 별로 가질 수가 없었던 세대다. 386 선배만큼 권력을 탐할 주제도 못 되기 때문에 그저 후세대들을 위해 내 한 몸 거름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고. 연씨의 죽음은 바로 그 정서를 극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결코 지도자는 될 수 없으나 그 지도자의 가치와 이상만큼은 그대로 유산으로 받은 이 세대가 할 수 있는 게 과연 뭐가 있을까? 그 이상이 어린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것밖에 없다. 이것이 88만원 세대 바로 윗세대에 속한 지금의 30대 초중-후반 사람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정서다. 연씨의 죽음은 바로 이 정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식인들이 현실에 분노하되 결국 절망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거짓희망을 대표하는 율도국 따위를 건설하고 심지어 거기서 왕으로 군림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대신, 위아래 없는 작은 공동체(이것이 바로 '꼬뮨'이 아니겠는가)를 건설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홍자매 버전의 홍길동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한다. 아울러 저 율도국이 등장하고 초인 영웅이 등장하는 홍길동전의 저자가 시대의 시스템 한계에 갇힌 기득권자인 은혜(권력의 핵심인 좌의정 영감의 외동딸)로 설정된 것 역시 지극히 타당하고 설득력있는 설정이라 생각한다. 홍자매의 '작가'라는 자의식과 정체성은 물론 그 작가 집단의 '한계'마저도 겸허하게 투영시킨 것이 바로 은혜가 홍길동전의 원저자라는 저 설정이다.

<쾌도 홍길동>이 이토록 내게 준 것이 많은 만큼, 이것이 끝난 현재 가슴 한구석이 참 싸하면서 허하다. 단순히 수요일과 목요일 저녁 채널을 고정하며 열광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져서, 혹은 내가 길동이 역을 했던 강지환에게 반해버려서 더이상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아쉬움 탓도 아니다. 아니, 드라마가 끝나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나는 강지환보다는 홍자매가 만들고 강지환이 그려낸 '홍길동'에 너무나 반해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 물론 현실로 눈을 조금만 돌리며 여기저기 참 많이도 보인다. 내가 명함을 여러 장 바꾸는 시간 동안 딱 한 곳에서 여전히 인권운동을 하고 있던 그녀나, 여전히 문화운동을 하고 있는 그를 몇 년만에 다시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이 바로 우리 현실의 홍길동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홍길동에 그토록 반했던 것은, 어쩌면 내가 길동이가 꾸었던 이상, 그리고 길동이가 현실화시켰던 그 코뮨에 더이상 함께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008/04/05 22:24 2008/04/05 22:24

MBC의 <뉴하트>가 시청율 30%를 찍으며 종방했을 때, 고전을 면치 못하던 SBS의 <불한당>도 함께 종방했다. 그 틈을 타고 KBS의 <쾌도 홍길동>가 수목 드라마 1위를 했지만, <쾌도 홍길동>의 영광은 고작 한 주에 머무르고 말았다. <불한당>의 후속으로 편성된 <온에어>가 무섭게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온에어

아무래도 진짜 주인공은 송윤아의 서영은.

작년 연기대상 화면을 활용했는지 다 새로 찍었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게 편집된 연말 연기대상 장면으로 시작한 <온에어>는 드라마 속에서 싸가지 없고 제멋대로이나 연기를 못 하는 최고 스타인 오승아(김하늘)가 대상 수상을 거부하며 벌어지는 소동으로 확실하게 시선을 끈다. 드라마의 다른 주인공들, 즉 오승아의 에스코트를 맡은 까칠한 이경민 PD(박용하), 공주병 9단에 싸가지 없기로는 오승아 서럽지 않을 드라마 작가 서영은(송윤아), ‘못 나가는’ 매니지먼트사 사장 장기준(이범수)도 이 연기대상 장면에서 모두 자신의 기본 성격을 확실히 드러내며 포지셔닝을 마친다. 근래 한국 드라마에서 이토록 인상적인 1회를 보여주는 드라마도 참 드물었지 싶다. 보통 16부작으로 구성되는 월화 혹은 수목 미니시리즈는 인물과 플롯 세팅에 2회 가량을 안배하기 마련인데, 원래 20부작으로 구성됐다는 <온에어>에서는 이미 인물 소개는 물론 기본 갈등구조의 세팅을 1회에서 끝낸다. 그리고 <온에어>에서 가장 큰 재미를 주는 오승아와 서영은의 살벌한 대결이 곧바로 2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후 과정은 이경민 PD와 서영은 작가, 오승아가 팀을 이뤄 드라마 한 편 찍기 위해 겪게 되는 온갖 고초와 장애물들을 묘사한다.

애초 국내 드라마 제작환경에 대한 고찰과 반성을 담으며 드라마 제작의 뒷얘기를 해보겠다는 거창한 기획의도로 시작한 <온에어>는 초기에 정말로 속시원한 강대사들을 날려줬다. ‘재벌2세, 신데렐라, 불치병’ 나아가 ‘출생의 비밀’이 빠지지 않으면 드라마가 되지 않는다는 한국 드라마들의 상투적인 설정을 대놓고 ‘씹어’버리는가 하면, 일반 사람들 입장에선 그저 추앙과 동경의 대상인 ‘스타’가 개차반으로 구는 모습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드라마의 질과 주제와 상관없이 오로지 ‘시청율’ 하나만이 드라마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이 된 현실조차 솔직하게 언급하고, 연예인 성상납, 정체불명의 돈봉투 같은 어두운 뒷얘기도 삽입된다. 이 와중에 ‘얼음 싸가지’ 오승아와 ‘공주 싸가지’ 서영은의 대결은 <온에어>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볼거리다. 머리채를 잡거나 하는 일 없이 서로 우아하게 앉아 ‘말’로만 싸우는데도, 서로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잔뜩 벼린 칼 같은 말을 주고받는 그 완벽한 타이밍과 리듬감은 칼과 주먹을 주고받는 남자들의 싸움보다 훨씬 서슬퍼렇다. 김수현의 드라마가 아닌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보게 되는 것도 참 드문 경험이다.

그런데 초기에 그렇게 흥미와 기대를 모았던 것들이 회가 거듭될수록 미심쩍고 수상스러운 방향으로 나간다.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한국 드라마 일반에 대한 비판이 제작현장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종종 입에 올리는 그 상투적인 수준에서 결코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방송계를 둘러싼 뒷얘기를 속시원하게 ‘까발리는’ 것 같지만, 실상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방송계에 대해 ‘그렇게 믿고 있는’ 이야기를 할 뿐 지금의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반성적이고 통찰력 있는 분석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게다가 이들이 생각하는 대안 혹은 ‘좋은 드라마’라는 것의 정체도 애매하다. 이들은 과연 ‘좋은 드라마’란 어떤 드라마냐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도 못 한다. 이들이 제작하려고 하는 ‘7살 지능을 가진 25살의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에서 대단히 신선하고 야심찬 의도가 과연 보이는가? 게다가 이 와중에 ‘재벌 2세, 불치병, 신데렐라’ 이야기를 찾는 시청자들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기어이 오승아의 입을 통해 날리지만, 시청자들이 왜 그런 이야기에 그토록 천착하는가에 대한 성찰은 없다. 게다가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해오던 드라마는 지난 주 8회에서 다른 여느 드라마와 별 다를 바 없이 멜로 전선을 삽입했다. 이쯤 되고 나면 이 드라마가 정말로 방송계에 관한 애환과 함께 드라마 한 편을 성공적으로 만들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고군분투를 그리는 드라마인지, 아니면 기존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적 의자마저 시청율을 위해 팔아먹으려는 드라마인지 애매모호해진다.

그나마 기대를 거는 것은 오승아와 서영은이 보여주는 대립구도이다. 이들의 ‘싸가지 없음’이 더없이 척박하고 무시무시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그것도 최고가 되어 살아남기 위해 쓴 가면이라는 사실이 회를 거듭하며 밝혀졌고, 그렇기에 지금은 저토록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두 사람이 실은 세상 그 누구보다 상대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가장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시청자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이 사실을 ‘노래방 씬’을 통해 일차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오승아는 이미 서영은의 가면 뒷모습을 꿰뚫어본 것 같고, 이제 남은 것은 콧대를 세워도 결과적으로는 상대방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야 마는, 그리고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둔감하기 짝이 없는 서영은이 언제 오승아의 진심과 본래 모습을 보는가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서로의 본 모습을 보고 연민과 동병상련을 느낀다 해도 겉으로는 여전히 고양이와 개처럼 물고 뜯을 것이라 예상된다는 점이다. 여성 캐릭터들의 이런 갈등구도는 확실히 참신할 뿐만 아니라, 기존 드라마에서 언제나 불만스럽게 여겨졌던 지점들을 통쾌하게 부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두 남자, 즉 이경민과 장기준은 별다른 발전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서영은과 오승아의 대립에 드라마가 너무 집중한 탓인지, 이경민은 드라마가 8회가 되도록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1회에 제시됐던 그 까칠하고 자존심 센 성격조차 희미해져 버렸다. 이들이 만들려는 드라마가 기어코 중단되고 만다면, 매회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돌발상황들보다는 이경민의 저 우유부단함 때문이지 않을까?



ps. 프리미어 드라마리뷰 기고가 중단됐습니다. 이 글은 역시 프리미어에 팔아먹은 글이긴 하지만 책에는 실리지 않을 예정이므로 일찌감치 공개합니다.

2008/04/04 14:25 2008/04/04 14:25

<싱글파파는 열애중>은 제목만 보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대디의 연애담을 다루는 로맨틱 코미디 같다. 물론 드라마의 시작도 그러하다. 너무 일찍 철이 든 아이를 키우는 철없는 아빠 강풍호(오지호)가 한국 드라마들 특유의 ‘우연에 우연이 겹친’ 사건들 덕에 지나치게 명랑하고 씩씩한 24살짜리 의대생 아가씨 전하리(허이재)와 엮인다. 둘은 애 딸린 홀아비와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가씨라는 점에서만 대립을 이루는 게 아니라 계급과 신분에서도 격차를 이루고 있고, 이들의 세계는 곧 이종격투기 vs. 피아노라는 세계의 대립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언제나 그렇듯 처음에는 티격태격하던 두 남녀는 곧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상대의 사정을 알고 인품을 좀 더 겪으면서 호감은 애정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잠깐, 여느 드라마와 달리 두 사람이 애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무척 빠르다. 총 16부작인데 벌써 4부에서 둘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고 알콩달콩 연애모드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의 연애는 시련도 보통 큰 시련 앞에 놓인 게 아니다. 하리의 예비 새엄마 윤소이(강성연)가 실은 풍도의 아들 산이의 친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둘 사이의 연애 전선은 뜨뜻미지근하기 그지없다. 윤소이가 하리의 새엄마가 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강풍호가 알게 되는 시점은 드라마에서도 꽤 이른 5회이다. 하리의 부친인 전기석 박사가 풍호가 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시점도 6회에서다. 풍호는 윤소이와 전기석의 사이를 알게 된 직후부터 하리에게 거리를 둔다. 하리에 비하면 나이도 많은 데다 애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너무나 솔직한 하리와 달리 풍호는 여러 모로 신중하고 어른스러울 수밖에 없다. 풍호가 거리를 둘수록 애가 타서 더욱 직접적이고 저돌적으로 풍호에게 구애하고, 풍호는 그럴수록 더욱 냉정하고 의연하게 하리를 피한다.

싱글파파는 연애중

30대 애아빠와 20대 발랄처녀를 어떻게든 엮어주기 위한 몸부림.

그런데 이 드라마는 7회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방향을 틀면서 드라마의 진짜 정체가 드러난다. 풍호의 아이 산이가 뇌종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드라마는 한편으로는 가난한 싱글대디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의 의미를, 또 한편으로는 낳는 것만으로 무조건 성립되지는 않는 모정의 의미를 탐구한다. 어릴 적 양친을 모두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 혼자서 세상의 풍파를 헤쳐온 풍호에겐 어려울 때 손 벌릴 수 있는 가족이나 친척도 없다. 안 그래도 혼자 애를 키우는 게 시련일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아이가 아프기까지 하니, 사회안전망이 별로 갖춰지지 않은 데다 복지제도의 지원에 있어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남성 한부모 가정의 가장인 풍도의 시련은 이중삼중일 수밖에 없다. 한편 어릴 적 아이를 버리고 떠난 소이는 아이의 친모임에도 자신의 친권을 행사할 수 없는 반면, 엄마 노릇을 하기엔 너무 어린 하리는 아이에 대한 애정 하나로 아이의 병간호를 하면서 산이의 엄마의 빈자리를 조금씩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가부장제 사회 어디에서나 그토록 신성시되고 신화화된 모정이라는 것에 대해, 어머니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여성에게 얼마간은 선천적으로 잠재돼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것은 아이를 낳는 시점이 아니라 아이에게 애정을 갖고 아이와 시간을 함께하면서라는 사실을 이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알콩달콩 연애담을 기대하고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시청자들에게 드라마의 이런 방향은 일종의 ‘배신’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결혼이 당사자의 의사만큼이나 그 부모의 허락이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데다 한부모 가정이나 이혼 가정을 ‘결손가정’이라며 삐딱하게 보는 게 여전히 일반적인 한국사회에서, 애 딸린 홀아비 내지 이혼남이 미혼여성과 결혼을 하는 것은 처음부터 큰 시련을 예고할 수밖에 없다. 애초 이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 역시 그런 시련과 편견을 헤치고 결국 해피엔딩에 도달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문제는 그러한 배신이 아니다. 드라마를 통해서건 어떤 형태를 통해서건 대중매체에서 한번쯤은 반드시 다뤄져야 할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오히려 높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역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등장인물들의 행동 반경이 아이의 뇌종양 투병을 중심으로 재편성되면서 이야기가 다소 느슨해지고 지지부진해지는 바람에 드라마의 재미가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점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모정에 대해서 진일보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소이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신비화된 모정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한계가 보인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 자신이 낳은 아이를 버린 잔인한 모정에 대한 성토는 풍호와 그의 주변인물뿐만 아니라 심지어  풍호와 전혀 연관돼 있지 않은 조연들에 의해서도 계속 반복되지만, 정작 너무 어린 나이에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을 한 뒤 자신의 꿈과 재능을 아이 때문에 접어야 한다는 상황에서 패닉에 빠졌다가 잘못된 선택을 한 소이의 입장은 별로 성실히 다뤄지지 않는다. 그녀는 아이를 부담스러워하며 애를 팽개쳐놓고 피아노 앞에만 앉아 아이와 아이아빠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결국 혼자 우는 애를 방안에 내팽개쳐놓은 채 도망쳐버린 나쁜 엄마다. 그리고는 돈 많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나이든 남자를 만나 세계로 뻗어나가는 피아니스트가 되어 화려하게 돌아온 뒤 기석을 속이고 풍호와 하리의 사랑을 방해하며 아이를 위해 돈이나 내놓을 수밖에 없는 파렴치한 악역을 맡는다. 물론 뇌종양에 걸려 대수술을 받고 고통스럽게 항암치료를 받는 아이를 멀찍이서 지켜보며 눈물지을 수밖에 없고 엄마의 자리를 번번이 하리가 대신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녀의 모습은 꽤 비극적이고 연민이 가도록 묘사되지만, 그녀의 고통은 드라마에서 그저 기능적으로만 묘사되는 측면이 크다.

10회 마지막에서 소이와 풍호 사이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하리가 눈치챈 만큼, 그리고 기석이 순수한 애정과 호의에서 소이의 아이(소이는 자신이 버림을 받고 애까지 뺏겼다고 기석을 속인 상태다)를 찾고 있는 만큼, 소이의 정체와 비밀이 드러나는 게 머지않았다. 문제는 그 이후다. 과연 사실의 전말을 알고도 하리가 풍호와 산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니면 해피엔딩을 위해 소이의 비밀이 영원히 비밀로 봉인될지, 비밀로 봉인된다 하더라도 과연 풍호가 하리와 커플을 이룰 수 있게 될지, 어느 쪽이든 시청자 입장에서는 꺼림칙한 찝찝함이 남을 수밖에 없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기막힌 해결책을 과연 이 드라마가 제시해줄 수 있을까? 그 누구보다 드라마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산이의 행복을 위해서, 드라마의 작가가 반드시 그런 해결책을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프리미어 169호.

ps. 바로 뒷 회에서 풍도와 소이의 관계가 폭로되고, 이 드라마는 뻔한 신파의 멜러를 향해 그대로 달려나간다. 프리미어에 줬던 별점의 5점 만점 중 2점도 아까워지는 게, 이거 연출과 편집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ps2. 난 도저히, 허이재가 이쁘게 봐지지가 않아. 싫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리고 허이재뿐만 아니라 요즘 '귀여움'을 무기로 내걸고 나오는 배우/탤런트들 거의 대부분 그 억지 맑은 척을 도저히 못 견디겠다. 원래 이 과는 그저 보는 사람 그 누구든 저 맑음을 지켜주고 싶다, 는 마음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건데... 연기 테크니컬한 면에서 그런 맑음과 대치되는 면이 분명 있긴 있고, 그래서 오히려 이런 과들이 연기를 정말 잘 하면 경이로운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런 건가? 그렇게 보면 <리틀빅맨>의 더스틴 호프먼이나, 오드리 헵번 같은 배우는 정말 경지의 배우인 거구나 싶기도 하고, 그런 배우들에게 지금 탤런트를 견주는 것 자체가 양쪽은 물론 영화관객/시청자에게 실례인 것 같기도 하고.

ps3. 오지호 처음 <미인>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고놈 참 잘생겼네, 했다. 한동안 참 방향 못 잡더니 <환상의 커플>에서나 여기에서나, 드디어 자기한테 딱 맞는 이미지를 찾은 듯. 얘는 그저 막노동계급의 좀 우악스럽지만 내심 착한 그런 마초가 딱이다. 정말로 내가 느끼과를 좋아하긴 하나 봐.

2008/03/31 21:25 2008/03/31 21:25

3월 21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에서 1회에 한해 열린 존 홀로웨이 바로크 바이올린 리사이틀은 클래식 음악, 그 중에서도 특히 고음악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었을 듯도 싶다. 솔직히 클래식 잘 모르고, 바로크 바이올린이 현대 바이올린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는 나같은 문외한들은 그저 좋은 공연을 싼값에 볼 수 있다는 소리에 존 홀로웨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달려갔지만. 독주회인 만큼 존 홀로웨이 씨는 캐주얼한 차림으로 무대에 나와 편안하게 공연을 했는데, 인상 좋고 푸근해 보이는 저 아저씨의 이력을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허걱, 맘 푸근하고 그냥 편하게 영감님, 부를 수 있는 옆집 할아버지가 결코 아니었어... 1948년생에 8살 때 첫 콘서트 무대에 올랐고 1970년대부터 바로크 바이올린을 잡았으며 최근엔 지휘자로도 명성이 높은 한 마디로 대단한 양반이더라는.

오늘의 프로그램은 텔레만의 바이올린을 위한 환상곡 1번 B플랫 장조(TWV 40:14), 바흐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1번 G장조(BWV 1001), 비버의 파사칼리아 '미스터리 소나타', 그리고 인터미션 후 다시 텔레만의 바이올린을 위한 환상곡 10번 D장조(TWV 40:23)과 바흐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2번 D단조(BWV 1004), 이렇게다. 마지막에 연주된 저 파르티타가 그 유명한 사라방드와 샤콘느가 있는 바로 그 곡.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반적으로 상당히 섬세하고 고우면서 부드럽고, 마치 유리공예품을 만지듯 아주 수줍은 듯하면서도 매우 여유있는 소릴 들려주더라. 푸근하고 안정되고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달콤하지만 지나치게 달달하지는 않은 꿈을 꾸는 듯한 소박한 연주였다, 전반적으로. 비록 후반으로 갈수록 소리에 약간 노이즈가 끼었고 심지어 마지막 샤콘느 연주 때는 삑싸리까지 났지만(!), 그래도 좋았다. 특히 비버를 연주할 땐 정말 너무나 섬세하고 곱고 마음까지 차분해지고 행복감까지 느껴지는 것이, 듣다가 눈물이 다 나더라. 비버 연주할 때가 가장 좋았고, 탈레만 연주도 너무 좋았던 반면, 상대적으로 바흐 쪽은 약간 불만족스러웠다. 그게 내가 이제껏 들었던 바흐가 지나치게 명암을 대조하며 형식미를 강조하는 연주여서였는지, 이 사람이 원래 바흐보다 탈레만 해석에 훨씬 더 뛰어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터미션 직후 연주한 탈레만의 바이올린 환상곡 10번은 아융... 어찌나 경쾌하고 가벼우면서도 예쁘던지.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데 숨이 다 멎었다가 연주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숨을 내쉬었다는.

하지만 연주들이 마냥 곱기만 했다는 건 아니다. 아마도 이것이 이 양반의 내공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은데, 상당히 라이트하고 산뜻하며 고우면서도 '곱기만 한' 연주와는 상당히 달랐다. 가볍지만 촐싹대거나 얄팍하지 않고, 고난과 고통이 다 지난 후 관조와 여유가 깃들여 있는 연주라 해야 하나. 대체로 나는 불같은 열정과 폭풍치는 고뇌를 담은 연주를 좋아해 왔지만, 이 사람의 연주는 원래 내 취향이 아님에도 '이렇게 연주할 수도 있구나' '이런 것도 꽤 좋구나' 싶은 생각을 들게 해줬달까. 아마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바이올린이란 악기 자체가 원래 상당히 신경질적이고, 그래서 사람 신경을 참 곤두서게 하는 악기라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곱고 부드러운 바이올린 연주라니 상당히 놀랐다. 이것이 J언니 말대로 원래 바로크 바이올린의 특성인지, 아니면 이 연주자의 연주 스타일 때문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ps. 객석에서 박찬욱 감독을 봤다능.

ps2. 20대 초반에 영화나 보러 갔던 호암아트홀, 정말 오랜만에 간 셈인데 '어머나, 호암아트홀이 이렇게 작았었나' 싶더라. 하지만 소규모 공연장으로는 딱 좋더라는.

ps3. 자리가 예술이었다. 그야말로 정중앙. 가운뎃줄 정 가운데자리. 좋은 공연을 좋은 자리에서 싸게 볼 수 있게 해준 J언니에게 감사.

ps4. 어쩐지... 이 아저씨 비버 연주로 대박 성공하고 명성을 휘날린 사람이었어! 역시 좋더라니. 이 아저씨의 홈페이지 : http://johnholloway.com

2008/03/21 23:39 2008/03/21 23:39

버버리 코트를 휘날리는 멋진 형사가 아니라 생활형 아줌마 형사다. <천하일색 박정금>(이하 ‘<박정금>’)은 가족시청자 대상의 주말드라마답게 문제 많은 가족이 등장하지만 시종일관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혼당한 어머니와 살고 있는 정금(배종옥)은 그 자신 역시 남편에게 이혼당했고, 그 와중에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여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경찰계에 투신해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고등학생인 둘째 아들과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매일 “벌어먹고 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투덜거리고 때로 칼을 맞으면서도 형사일을 그만두지 못 한다. 어머니를 내쫓고 안방을 차지한 청주댁(이혜숙)과 그녀의 딸 유라(한고은)는 정금과 원수지간이고, 간간이 나오는 대사들을 통해 유라가 정금의 아픈 과거에 대단히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들을 둘러싼 두 남자, 즉 용준(손창민)과 경수(김민종)는 정금을 둘러싸고 삼각관계를 만들어갈 예정이다.

경수의 말을 빌면 ‘얼굴이 다 구겨질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사는 정금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일과 생활에 대단히 충실한 여자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어떤 억울한 일에도 그저 착하게 참고 사는 캔디형 여자는 아니다. 성격도 급하고 새어머니에게는 꼬박꼬박 청주댁이라 부르며 목소리를 높이며, 심지어 새어머니의 얼굴에 봉투를 던질 정도로 성격이 괄괄하다. 하지만 그녀는 성년도 안 된 아이가 소매치기 초범으로 붙잡힌 뒤 겁에 질려 떨자 놔줘버리고, 폭력행위를 고발한 남자가 오히려 뻔뻔스러운 파렴치범임을 알자 고발당한 남자를 동정하며 고발한 이에게 린치를 해버리는 따뜻한 면을 가지고 있다.

정금이라는 캐릭터를 한층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건 바로 배종옥의 존재다. 언제나 똑 부러지고 당당한 캐릭터를 연기해온 배종옥은 불과 2002년 출연했던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만 해도 문성근과 박해일을 동시에 휘어잡은 싱글여성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억척스러운 ‘아줌마’ 역할로 연기폭을 넓혀왔다. 그런데 <박정금>에서의 배종옥은 여전히 억척스러운 아줌마이면서도, 기존의 아줌마 역할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대체로 아줌마 역할을 하면서도 언제나 똑부러진 이혼녀 역할이 대부분이었던 배종옥은 <박정금>에서 무려 고등학생을 둔 엄마이고 똑부러진다기보다는 털털한 면이 더욱 많이 드러나며, 위장 근무를 흔히 하는 형사라는 직업상 갖가지 위장과 변신의 모습을 선보인다. 배종옥의 팬들이라면 매회 범인을 잡기 위해 전력질주하고, 다소 어설픈 면이 있긴 하지만 범인과 싸우는 액션연기를 선보이며 때때로 갖가지 변신과 위장을 하는 배종옥을 보는 재미만으로도 주말을 손꼽아 기다릴 법하다.

천하일색 박정금

주부이자 생활형 형사, 박정금 여사는 오늘도 달린다, 범인 잡으러!


하지만 이 드라마가 갖는 매력은 단순히 배종옥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니다. 회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약혼자인 경수를 사이에 두고 정금과 신경전을 벌이며 제대로 악녀의 역할을 해주는 유라(한고은)에게도 그만큼의 관심과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이에게 독하고 막돼먹게 대하며 심지어 친어머니에게서도 ‘미친년’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막 가는 유라는 청주댁과 함께 정금의 인생에 가장 큰 굴곡과 고통을 주는 인물이지만, 유라 역시 청주댁의 비뚤어진 모성의 직접적인 피해자로 정금 못지않은 상처를 지고 있기도 하다. 씩씩하게 고통을 이겨내며 생활을 영위하는 정금과 달리, 유라의 막돼먹은 성격은 죄책감과 모멸감으로 인한 강력한 방어벽이자 자기파괴적인 위장이다.

그간에 해온 수많은 악행과 모진 말버릇과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실은 어머니의 악행의 뒷수습을 하며 원치 않게 공범자 역할을 강요받으며 분열한다. 7회에 이르러 정금이 잃어버린 아들 지훈과 자신의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된 유라는 아들을 잃은 어미의 고통 못지않게 어미의 죄짐을 그대로 지고 가야 하는 자식의 고통과 오열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금에게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달려갔던 그녀가 결국 입을 다무는 것 역시, 그녀 입장에서는 정금의 이기주의로밖에 볼 수밖에 없는 일련의 행동들로 받은 상처 때문이다. 경수의 말대로, 유라는 어느 면에서는 그 어떤 인물보다 순수함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더욱 고통스럽게 자기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 와중에 정략결혼으로 약혼한 경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리고 경수가 정금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을 보면서 유라는 더욱 ‘준비된 악녀’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사실 유라의 캐릭터야말로 주말드라마로서는 파격적인 인물이며, <박정금>을 다른 여타의 주말드라마와 차별화해주는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다. <경성스캔들>에 이어 완숙한 퇴폐미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는 한고은의 연기 역시 배종옥만큼이나 드라마에 강력한 무게를 제공한다.

변호사인 경수와 의사인 용준, 두 남자가 정금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며 삼각관계로 치닫게 되는 것은, 그간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온 정금의 인생에 일종의 보답으로 주어진 상황일 것이다. 두 남자의 직업이 남편감의 직업으로는 최고라 여겨지는 변호사와 의사라는 설정, 과연 주말드라마다운 통속성과 속물스러움을 적당히 보여주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러한 통속성이야말로 우리가 주말드라마를 보는 이유 아니겠는가. 처음엔 동병상련과 연민에서 시작했던 경수와 정금 사이의 감정은 점차 중요한 시간들을 함께 나누며 서로 호감을 품지만, 매우 더딘 속도로 서로 감정이 발전해가면서도 이 감정은 유라와의 관계 때문에 번번이 자체 검열과 자기 금지의 길로 들어서며 정체를 맞곤 한다. 한편 아파트 사기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정금네 가족과 한집에서 살게 된 용두, 용준 형제의 경우 처음엔 마치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대지만, 용준이 정금의 초등학교 짝꿍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껏 밝고 유쾌한 분위기로 진전된다. 정금의 고통을 함께 나눠주는 이가 경수라면, 정금의 일상에서 즐거움과 씩씩함을 한껏 배가해주고 정금에게 힘을 주는 이가 용준인 셈이다.

<박정금>을 보면서 가장 감동을 하게 되는 장면들은 재미있게도, 정금이 범인의 뒤를 쫓아 질주하고 있는 장면들이다. 그 ‘달리는’ 장면들이야말로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정금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들일 터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속물적이며,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전력을 다해 즐거워하고 열심히 사는 정금의 모습, 그리고 그런 정금에게 무한한 자격지심과 죄책감을 느끼고 그 때문에 더욱 망가져가며 고통을 받는 유라,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을, <박정금>은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그려내고 있다.



ps. [프리미어] 168호.

2008/03/21 22:53 2008/03/21 22:53

24부작으로 기획되어 현재 14회분까지 방영된 KBS의 <쾌도 홍길동>은 ‘퓨전사극’을 표방하는 드라마답게 파격적일 정도로 현대적인 감각을 많이 집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허균의 원작소설을 토대로 알고 있는 일반적인 홍길동의 이미지에도 상당 부분 변형을 시도한다. 역사적 고증과는 거리가 먼 머리모양과 선글래스까지는 그렇다 쳐도, 비보잉과 테크노댄스까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인물과 갈등의 기본 세팅이 끝난 3회부터는 빠른 속도로 스토리가 전개돼 나가는 한편, 배꼽춤과 춤추는 코브라, 중국 무협영화식 의상, 격구(골프) 등마저도 ‘원래 저 시대엔 저렇지 않았을까’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자연스럽게 화면에 녹아들어간다. 그런데 <쾌도 홍길동>이 눈길을 끄는 건 이러한 비주얼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홍길동의 이야기를 현대에 맞게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영웅신화의 모티브를 느슨하게 변용하여, 기성세대의 질서를 강요받고 있던 젊은이들이 각성하게 되면서 기존의 ‘아버지들의 질서’에 정면으로 맞대결하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는 일종의 성장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쾌도 홍길동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로이 옷을 입은 홍길동과 활빈당.

본래 영웅신화에서 영웅은 동굴 혹은 고래 뱃속 등 좁고 어두운 곳(자궁)에 갇혔다가 물(양수)을 통해 세상으로 다시 나오는 과정을 겪게 되고, 이는 ‘죽음과 부활’ 혹은 거듭남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인 영웅은 모험을 떠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나 괴물로 형상화되는 ‘권위를 가진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殺父) 의식을 치름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왕이 된다. <쾌도 홍길동>에서도 이 모티브는 홍길동의 궤적을 통해 그대로 나타난다. 세상사와 담을 쌓고 살았던 길동은 억울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로 한 뒤 8회에서 관군의 화살을 맞아 강으로 떨어졌다가 도적패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렇게 상징적인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친 홍길동은 당대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던 자신의 아버지 이조판서 홍서영 대감(이하 ‘이판’)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며, 이 가운데 자신의 운명의 주인 혹은 영웅이 된다. 원작소설에서는 길동이 아버지보다 형인 홍인형과 대결하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길동과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는 창휘에게서도 이런 영웅신화 모티브의 흔적이 발견된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그의 대사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듯, 그는 과거 화재사건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죽어있는’ 상태이다.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요구를 당연하게 내면화하고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던 그는 ‘배를 타고’ 돌아온 조선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나고, 특히 길동의 직접적인 질문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던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창휘는 길동과는 약간 다른 처지에 속해있다. 길동이 철저하게 아버지의 세계 안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창휘는 아버지의 질서를 체화한 강력한 (유사)-어머니, 즉 노객주의 세계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창휘가 앞으로 싸워야 할 상대에는 아버지의 세계뿐 아니라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강력한 문지기, 즉 가부장제의 어머니도 추가돼 있다. 영웅으로서의 거듭남에 있어 창휘가 실패하거나 타락할 가능성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쾌도 홍길동>에서 정말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드라마가 영웅신화의 모티브를 차용하고 있으면서도, 1인 영웅 혹은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영웅신화의 한계를 돌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쾌도 홍길동>은 ‘거듭남’의 경험을 홍길동이라는 영웅 한 사람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확산시켜 민중의 집단적 각성의 과정까지도 묘사하고 있다. 단적으로 9회부터 12회에 걸쳐 삽입된 심청전의 변주를 살펴보자. 여기에서 길동은 고리대금 빚 때문에 딸을 넘긴 무수한 힘없는 약자들을 일련의 작전에 직접 참여하게 만드는데, 이들이 취한 방법은 바로 ‘물에 뛰어들어’ 배에 구멍을 냄으로써 배의 출발을 연기시키는 것이었다. 딸들을 구하는 일에 스스로의 힘을 보탬으로써, 이들은 주어진 비극적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로서 거듭나게 된다. <쾌도 홍길동>의 민중은 단순히 홍길동의 영웅적인 활약에 도움을 받거나 은혜를 입는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자신의 뜻을 표출하는 매우 적극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홍길동이 각성하기 전 그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했던 일들을 ‘의협의 활약’으로 각색하는 동시에, 이름 없던 홍길동 무리에게 비로소 ‘활빈당’이라는 이름을 선사하며, 공개처형 위기에 처한 활빈당에게 시위를 통해 지지와 위로를 표현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쾌도 홍길동>이 기존 영웅신화의 모티브를 느슨하게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픽션화’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영웅신화를 해체하고 있는 재미있는 현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9회는 아주 흥미로운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우리는 허이녹을 키워준 허노인이 ‘신화화한’ 길동의 이야기를 하며 약을 파는 장면에서 사실이 픽션화되면서 허구가 진실을 대체하는 과정, 혹은 영웅이 신격화를 거치며 영웅신화가 탄생화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허노인의 이야기 속 길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홍길동의 외모, 즉 패랭이를 쓰고 파란 답호를 걸친 차림이며, 허균의 소설의 설정 그대로 용꿈으로 잉태됐고 축지법과 분신술 등을 쓸 줄 아는 비범한 영웅으로 표현된다. 이는 드라마 자체가 홍길동을 해명스님으로부터 무술을 전수받긴 했으나 주로 저자거리에서 싸움질을 통해 단련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인물, 게다가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며 다소 철이 없는 한량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홍길동이 실제 인물이었다는 설도 계속 제기되고 있는 만큼, 이는 말하자면 허균의 소설이 일반인을 신격화시켰으며, 드라마가 다시 신격화 해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장면만이 아니다. 앞서 지적했듯 홍길동은 의협이 되고자 해서 의협이 된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민중에 의해 ‘각색’되는 경험을 겪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실이 픽션화되며 민중전설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단적인 묘사이다. 이들이 ‘활빈당’이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 활빈당은 스스로 활빈당을 조직한 뒤에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저 느슨한 도적패였던 이들은 우연히 엮인 사건을 해결하고 민중들에게서 ‘활빈당’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바꿔 말하면 활빈당이 조직된 것은 이들을 민중이 ‘호명’했기에 가능해진 것이었다. 활빈당으로 불리는 이들은 각각 구체적인 정체성을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게 되는데, 이 역시 민중에 의해 민간전설이 먼저 만들어진 뒤에 그 전설의 내용이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허구가 실재를 창조하는(혹은 신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신비가 구체적으로 재현되는 순간인 것이다.

원작소설과 다른 새로운 이야기와 뉘앙스가 많이 가미되어 있는 만큼, 이제 반을 넘긴 <쾌도 홍길동>이 앞으로 과연 어떤 이야기로 전개될지는 알 수 없다. 과연 창휘는 반정에 성공하여 새로운 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길동은 원작소설대로 율도국을 건설할까? 길동과 이녹, 이녹과 창휘, 은혜와 길동의 연애라인은 과연 어떤 식으로 정리될 것인가? 이녹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과연 얼마나 영향을 미칠 것인가? 자신의 서자는 방치하면서도 서자 출신의 왕에게는 끔찍하게 충성을 바치는 모순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이판은 과연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는 세 주인공이 자신들의 현실과 상황을 외면하고 도피하거나 아무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 채 순응하며 살고 있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스스로 모색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상태라는 것을 이미 목격한 상태다. 스스로 선택하고 이것에 대한 통제권을 쟁취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어른으로서 세상을 사는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의 주인공들이 깨달은 이상, 시청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들이 제발 옳은 선택을 하며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기를 기원하며 지켜보는 것뿐이다.




ps. 영화잡지 [프리미어] 167호.

ps2. 영화잡지 [프리미어]의 2008년 3/1일자(통권 167호)부터 드라마 리뷰를 싣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잡지가 나간 후 일주일쯤 후에 원고를 이곳에다 (기록 및 보존 차원에서) 올려놓겠습니다. 'The Pillowman Comes' 카테고리에 올릴 예정이며, 프리미어 원고가 아니더라도 지나간 드라마들에 대한 리뷰도 가끔씩 올릴 예정입니다.

ps3. 이 리뷰는 14회까지 본 뒤 작성되었습니다.

2008/03/21 22:45 2008/03/21 22:45

<쾌도 홍길동>은 '퓨전 사극'이라는 좋은 핑계(!)를 내세워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이야기를 펼치지만, 그 안에 지금까지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도 해내지 못했던 진취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들의 기성질서에 대한 '저항'은 물론 세대 내 '연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연대는 곧 깨질 수밖에 없지만.) <쾌도 홍길동>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뭉클한 지점들, 가장 빛이 나는 장면들은 홍길동이 아버지 홍판서 대감과, 창휘가 당대 왕이자 자신의 이복형인 광휘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장면들이며, 10회가 넘도록서로 적으로 대립하거나 서로의 이익을 위해 '거래'를 하며 할 수 없이 협업했던 길동과 창휘가 15회에 이르러 서로를 인정하며 우정을 맺는 장면들이다. (이 미니시리즈는 총 24부작으로 기획되었다.) 16회에 이르면 길동과 창휘는 서로 친구와 동지로서 협동하며, 16회의 마지막 장면은 길동에게 향해진 화살을 창휘가 대신 몸으로 막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홍판서와 광휘는 각각 실질적 / 명목적으로 최고의 권력자들인 만큼, 길동과 창휘가 저항하는 대상은 단지 사적인 아버지와 형이 아니라 당대 강고하기 짝이 없는 제도이며 기성질서이다. 그런데 창휘의 저항은 기성질서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있는 제도에서 부패한 사람을 대신하려는 것이며, 형에 대한 그 저항은 결국 선왕, 즉 아버지의 질서를 복권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즉, 퇴행이며 반동이란 얘기다. 창휘가 지금의 노선을 고집하는 한, 아마도 앞으로 길동의 발목을 가장 강력하게 붙잡는 존재는 아버지도 왕도 아닌 창휘가 될 것이다. 그 자신 아직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혁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길동은 창휘와 일시적으로 접점은 이룰지언정 결국 갈라설 수밖에 없다. 민중이 새로운 왕의 후보 창휘에겐 별 관심이 없지만 부자들의 재물을 털어 나눠주는 홍길동은 초인적인 영웅으로 여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적으로는, 창휘와 길동, 이녹 모두 너무나 안쓰러우면서도 예쁜 만큼, 길동은 결국 새로운 왕이라는 것 역시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근본적 혁명을 시도하고, 창휘 역시 기존 질서 자체에까지 의문을 가지고 결국 적통대군의 자리마저 버리는 것이 내가 바라는 진행방향이다. 아마도 길동인 내 바람대로 갈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창휘의 경우 내 바람은 말그대로 '바람'일 뿐,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길동과 창휘가 이녹을 둘러싼 삼각관계의 연적 관계이기도 한 만큼, 이런 상황에서 작가들은 결국 앞으로 전진하는 영웅과 퇴행하고 꺾이는 악당의 대립모드로 몰고가는 걸 좋아하기 마련이다. 나는 다만 연적인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인정하고 잠시나마 연대를 이루었다는 사실에서 지극히 짧은 유통기한의 기쁨을 느낄 뿐이다. 


쾌도 홍길동

원작과는 다른 '자유인' 홍길동(강지환)의 모습. 사진출처는 KBS 공식 홈페이지.

<쾌도 홍길동>의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원작이 16세기 초를 배경으로 했던 것과 달리, 드라마는 왕인 광휘와 그의 자리를 넘보는 적통대군 창휘는 각각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모델로 했고 이는 이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지만, 광휘에게선 연산군과 영조의 그림자도 살짝 함께 엿보인다. 청나라가 이미 조선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대국으로 자리잡았고 저자거리에도 청나라 물품을 파는 가게가 입점해있다는 설정을 보면 명과 청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했던 광해군 치세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 그러니까 18세기 경의 조선을 상당히 참조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라면 색안경과 불꽃놀이용 폭죽, 천축국에서 유래한 코브라와 배꼽춤(!), 색목인의 언어(영어), 골프의 변형(혹은 개인놀이화된 격구) 등이 한양땅에 등장한다 해도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거침없이 전개되는 이 드라마의 스토리가 어느 순간 그러한 것들을 '그 시대에 정말로 그랬으려니' 하는 이상한 착시의 설득력을 제공한다.

퓨전 사극이라는 측면, 그리고 혁명을 다루고 있고 서로 입장이 다른 주요 인물들의 3각관계가 극 중심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쾌도 홍길동>은 여러 모로 <다모>를 떠올리게 한다. 과연 2003년에 방영되었던 <다모>가 드라마계와 시청자에게 남긴 영향은 매우 커서, 이제 우리는 사극이라 했을 때 무조건 엄숙하고 딱딱한 형식이나,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소도구와 의상에서 벗어나서 조선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불과 2, 3백년 전 역사가 '판타지'의 공간으로 등장할 수 있고, 이런 식의 사극 판타지는 결국 지금의 상황과 현실을 조금 에둘러 풍자하는 '우화'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쾌도 홍길동>은 이 점을 십분 살려 대부업 광고나 FTA, 새 정부의 영어정책 등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장면들을 집어넣고, 이를 단순한 일회성 코믹 장면이 아니라 드라마의 스토리와 에피소드에 긴밀하게 엮어넣는 시도를 했다. 대부업 풍자는 9회부터 12회까지 심청 이야기의 변주와 함께 이루어졌으며(심청의 이야기가 좀더 현실성 있게 묘사된다), 16회에 삽입된 청나라 사신과의 아편 전쟁은 FTA를 비롯해 미국에 종속된 한국의 정치/외교관계와 새 정부의 영어정책을 비꼰다.

하지만 <쾌도 홍길동>이 <다모>와 명확하게 선을 긋는 지점은, 바로 <다모>가 실패했던 바로 그 한계지점들에서다.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 소영웅주의에 입각해 혁명을 논했던 <다모>는 결국 인간을, 그리고 사랑을 도구적 입장에서 다뤘고, 사람의 진심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렇게 착취하고 결국 퇴행해버림으로써 방영 초기의 팬 일부에게 극렬한 배신감을 안겨줬다. <쾌도 홍길동>에서는 여성이, 사랑이 오히려 혁명을 깨우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폼을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은 대의를 위해 작은 이들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그런 이들의 목숨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을 배워나가는 쪽으로 성장해 간다. '알 게 뭐야'란 말을 입에 달고살던 홍길동은 사람 하나하나의 작은 마음과 상처까지 배려할 줄 아는 인간, 나아가 힘없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인간이 돼가고 있고, 소위 '대의'를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노릇을 해왔던 창휘는 사람들의 아픈 비명소리가 양심을 아프게 함을 깨닫고 그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이녹이란 존재다. 그리고 길동과 창휘는 이녹을 사랑하면 사랑하게 될수록 선택의 기로에서 옳은 길을 선택하게 된다.

나아가 <쾌도 홍길동>은 단순히 멋진 영웅 한 명의 활약이 아니라, 그가 민중과 소통하고 그 자신이 바로 민중 중 한 사람임을 선언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홍길동이 민중을 깨우치고 민중을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의적' 홍길동을 만들어낸 것이다. 권력자에겐 칼과 창이 있고, 민중에겐 '말'이 있다. 태초에 말이 있어 그 말에 의해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구절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의 힘의 신비와 비밀을 드러내는 구절이기도 하다. 초인으로 각색되는 홍길동, 저자거리에서 약장수에 의해 얘기되는 홍길동. 영웅이 신격화되고 다시 탈신격화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이 창작의 힘을 메타적으로 고찰하고 활용하며 여기에 유쾌한 농담을 곁들인다. 웃음 와중에도 다시 한번 돌아볼 가치가 충분한 방식. <쾌도 홍길동>은 바로 이야기의 힘을 믿고, 이것을 전면에 배치하는 드라마다. 그것도 창작자 개인이 아닌, '집단창작'의 힘과 저력을 탐구하는 드라마다. 사실 내게 이 드라마가 이토록 특별한 것도 바로 이 이유가 가장 크다.

앞으로 8회분이 남은 만큼 <다모>가 그랬듯 기대를 배반하며 퇴행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껏 보여준 이야기만으로도 <쾌도 홍길동>은 기존 그 어떤 드라마도 해내지 못했던 영역의 이야기를 특별한 방식을 통해 보여주었다. 달달한 싸구려 당의정으로 말초적 재미를 만족시켜 주면서도 그 안에 올바르고 건강한 이야기를 오롯이 담아내는 이 능력, 이거야말로 내가 그간 드라마나 영화에 그토록 기대해왔던 것들이다. 진심으로 홍자매 파이팅!을 외칠 수밖에 없다.



ps1. 강지환 버닝모드. <경성 스캔들>을 클리어하고 <90일, 사랑할 시간>을 보고 있다. 이 사람이 보여주는 연기, 참 재미있다. 기술적으로 아직 세련된 수준은 아닌데, 저돌적이다 싶을 정도로 캐릭터에 곧장 달려들어가 몰입하는 듯한 느낌이고, 거기에 대사나 작은 제스추어에 의외로 세심하게 디테일을 추가해서 캐릭터를 좀더 풍성하게 만들더라. 무엇보다도 진지모드와 코믹모드 사이를 별 어색함없이 순식간에 오가는 능력에 꽤 놀랐다. 본격 상업영화 쪽으로 진출하게 되면 과연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궁금하고 기대도 되고. 그 특이한 목소리는 처음엔 영 적응 안 돼서 기겁을 하며 TV를 끄곤 했는데, 요즘은 '익숙'을 넘어서 심지어 '감미롭게' 들린다. 언제나 굵은 저음 목소리를 좋아해왔던 나한테는 의외의 현상. (그러나 모님의 "그 앵앵거리는 목소리"라는 표현에 완전 박장대소했다는.)

ps2. 너무 동안인 근석군에겐 이제껏 관심이 없었는데, 세상에 여기에서는 뭘 입고 뭘 두르든 "순정만화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그것도 김진 만화) 미모를 자랑한다. 근데 역시 너무 동안인지라 성유리와 같이 연기하는 씬에서 (이모-조카처럼 보여서) 도통 감정이입이 안 된다는. 제일 좋아하는 모습은 눈만 빠꼼히 내놓은 채 검은 두건을 썼을 때.

ps3. 이문식, 최수지, 임현식 같은 배우들이 1회 한정 카메오 연기를 펼친다. 아놔 이문식의 당수 캐릭터는 딱 보는 순간 무지 기대했었는데, 그 회에서 바로 칼맞고 죽어버리데... 최수지는, 정말 최수지 맞나 싶어 깜딱 놀랐다는. 광휘 역의 조희봉, 허노인 역의 정규수, 해명스님 역의 정은표의 연기는 후덜덜 수준, 홍판서 역의 길용우와 노객주 역의 최란은 TV 베테랑다운 연기. 좌상대감 안석환은 요즘 완전히 이쪽 캐릭터로 굳히기 하시는 듯. 그러나 역시 그 포스는 어쩔 수 없다는. 그러고보니 어마어마한 양반들이 조연으로 떡 버티고 있는 드라마로세.
2008/02/26 18:23 2008/02/26 18:23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호랑이와 눈>에서는 톰 웨이츠의 노래 You Can Never Hold Back Spring이 매우 특별하게 사용된다. 그저 특별하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톰 웨이츠가 직접 특별출연해서 직접 피아노치며 연주를 하신다. 오랜만에 보고 듣는 톰 웨이츠의 모습과 그의 노래, 참 좋은 영화와 더불어 더욱 특별한 빛을 내던. 게다가 그의 '연기'도 참으로 좋은. (2005년이긴 하지만 아저씨, 여전하시더라는.) 맥주 한 잔 앞에 놓고 노래를 청해 그저 조용히 그가 직접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싶은 건 내 머나먼 꿈 중 하나. 곡이 거의 끝나갈 때쯤, 홀딱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


톰 웨이츠의 팬과 베니니의 팬들은 <호랑이와 눈>이 개봉하면 필히 달려가서 보실지어다. 물론 이들을 잘 모르는 분들도 꼭 보시면 좋은 영화. (간만에 강추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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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5 19:51 2007/09/05 19:51

곧 개봉 예정으로 오늘 시사회에서 본 영화 <오버 레인 미>는 9.11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의 소위 '외상 스트레스 증후군'을 다룬 영화인데, 영화의 제목의 출처이자 영화의 주제가로 쓰인 곡인 'Love, Reign o'er Me'는 원래 Pete Townsend가 곡을 썼다. The Who의 오랜 명곡. 엔딩 자막이 올라가면서 거의 절규에 가까운 보컬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걸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지다가, 설마 이 목소리, 에디 베더? 했었는데, 맞았다. 펄 잼이 카피한 버전이 영화의 주제가로 쓰인 것. 미국인이 아닌 제3국 사람으로서 9.11 후유증을 극단으로 밀어부치는 이 영화를 보며 가슴 한쪽으로 살짝 삐딱해 있었다가, 에디 베더의 절규에 마음이 좀 움직였다. (아 정말, 에디의 목소리에는 야수성 가득하면서도 사람 마음을 그냥 무장해제시켜버리는 진정성과 큰 울림이 있다. 내공 높은 무당 같은 사람. 뮤지션으로서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또 남자로,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사람 중 하나다. 노래를 완벽하게 잘 부른다기보다, 충만한 필로 부르는 사람.)

그래, 미국땅에서 평범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던 그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잘못이겠는가. 국가의 부도덕의 대가를 죄없는 사람들이 대신 지고 치른 셈이지 않나. 그네들이 그 상처를 서로 보듬는 걸 보며, 위로의 말을 건넬지언정 비아냥대진 말자.

아래에 붙인 버전은 올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라이브할 때의 모습.

혹시 정규 앨범에 속해 있는데 내가 여태 몰랐던 건가 싶어서(난 펄잼 정규앨범 다 가지고 있거든...) 찾아보니, 아니구나, 그럼 그렇지. 올해 6월 코펜하겐 공연 때 처음 불렀고, 그 다음 8월 시카고 공연 때, 이렇게 딱 두 번 연주했다. 음, 올해 크리스마스 싱글에 포함되려나? 아니면 그냥 라이브 앨범이나 B면곡 모음에 붙이려나? 요 몇 년간 펄잼은 꾸준히 명밴드들의 명곡들을 커버하고 있다. 아무렴, 지금 남은 락밴드의 혈통 중 가장 정통성을 인정받는 마지막 밴드로 자리잡아가는 듯. 닐 영도, 패티 스미스도, 도어즈도 더 후도 모두 펄잼과 공연했다. 에디가 어르신들한테 이쁨 좀 받나봐. (왜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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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역시. 2006년 크리스마스 싱글에 실렸던 곡이라 한다. 보노와 함께 연주했던 Rockin' in the Free World와 함께 실렸다는데... 아악 올해는 반드시 텐클럽 가입해서 크리스마스 싱글 받고야 말리라.

2007/08/21 23:30 2007/08/21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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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로 구독하고 있는 PJ News (Pearl Jam의 공식 팬클럽 Ten Club의 뉴스)에서 며칠 전에 들어온 걸 오늘에야 확인했다가 깜짝 놀랐다. 올해의 롤라팔루자를 스폰서링한 AT&T에서 웹캐스팅하던 도중 펄잼이 불렀던 노래 "Daughter"의 가사 일부를 지워버린 것. 펄잼은 Daughter를 부르면서 노래 후반 간주 부분에서 Pink Floyd의 Another Brick in the Wall의 일부를 삽입해 연주했고, 보컬인 에디는 가사 일부를 다음과 같이 바꿔 불렀다고 한다.

    George Bush, leave this world alone.
    George Bush, find yourself another home.

그리고 이 부분을, AT&T가 웹캐스팅을 하면서 사운드를 지워버린 거다. 공연 당시엔 몰랐던 펄잼은 나중에 팬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텐클럽 게시판에 '정중한 사과'와 함께, Daughter 곡 전체 동영상과, 편집된 부분/원래 부분을 나란히 붙인 동영상을 올려놓았다. 또한 이 사태가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시민으로서 중대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받고 검열당했다고 AT&T를 비난하고 있다. 멤버 중 가장 성격이 참하고 얌전한 Mike McCready 아저씨의, '한 미국인의 생각'이라는 에세이도 올라왔다. 자신은 자본주의에 찬성하지만 AT&T와 같은 자본주의 기업은 찬성할 수 없으며, 미국의 정신을 떠받치고 있는 중대한 근간이며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고 있는 언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검열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조근조근하지만 힘있는 목소리의 항의.

국가권력을 능가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은 이제 과거 폭압적인 국가권력이 자행하던 '검열'을 자신이 스스로 자행한다. 비록 <다이하드 4.0>에선 흘러간 밴드 취급을 받긴 한다만 Pearl Jam은 여전히 슈퍼밴드이며 막강한 영향력과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밴드인데, 그런 밴드도 정치적인 메시지는 이런 식으로 검열을 당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현재 사람들이 국가권력의 검열엔 저항해도 자본의 검열은 당연하게 여기며 오히려 박수치고 응원한다는 사실. 또한, 자기들이 스스로 떼로 일어나 힘을 행사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검열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기분이 더욱 안 좋다. 나는 표현의 자유를 빙자해 다른 이에게 언어폭력과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폭력을 저지르는 폭력의 자유에는 반대하지만, 여전히 표현의 자유는 소중한 가치이며 지켜야 할 가치라 생각한다. 국가권력이든 자본 권력이든,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막을 순 없다. 당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다른 사람이 같은 권리를 누리는 것을 억압하지 않기를.


Daughter 전곡 연주 동영상


편집된 부분과 원래 부분 대조

2007/08/12 09:49 2007/08/12 09:49

원래는 Because The Night 동영상을 붙이려다가, 데뷔앨범 Horses의 자켓 사진 그대로 입은 언니가 앨범 낸 그 해(1975)에 공연한 동영상이라 해서 역시나 Gloria를...

한동안 완전히 잊어먹고 안 듣고 있었는데, 최근 CD를 빌려간 J.가 열혈팬이 돼버리는 바람에 덩달아 오랜만에 다시 듣고 있다. 한국에서 Patti Smith의 팬을 발견하는 건 꽤나 드문 일인데, J.가 그녀의 팬이 된 것이 어찌나 반갑고 놀랍고 기쁘던지. 이참에, 이빠진 앨범들을 채워넣어야겠다 생각. Horses 30주년 기념으로 2005년도에 나온 나온 legacy edition도 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건 5장쯤 되는데, 빌어먹게도 Horses 앨범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Peace and Noise 앨범은 알맹이는 어디로 도망가고 CD 케이스만 있질 않나...

위의 동영상은 첫 앨범을 낸 1975년도의 공연이라고 한다. 앨범재킷 사진에서 입었던 그 셔츠에 그 타이 차림. 아아 정말 멋진 언니. 언니가 부르는 People Have The Power 공연 동영상(1998) 보고 또 감동의 눈물 줄줄. 디스코가 전세계를 지배하던 88년 당시, 10년의 공백 후 컴백해서 부른 노래가, 여전히 이런 가사라는 사실 역시 또다른 감동.



ps. 관심있는 이들은 Patti Smith의 블로그인 Patti Smith의 MySpace를 방문해 보시라.공식 홈페이지는 여기다.

2007/06/07 04:42 2007/06/07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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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스타일에서 시즌2 방영중. 원래 연속극 절대로 꼬박꼬박 못 챙겨보는 성질에 - 그렇다고 어둠의 경로를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 이것도 시즌1 초장만 보다가, 어쩌다 보니 벌써 시즌2 중반을 방영하고 있더라는. 그토록 오래 사귀고 사이도 좋았던 벳과 티나가 찢어져 있어서 충격이었고, 제니는 작가 공부 계속 하고 있고, 셰인은 여전히 멋지고 앨리스는 여전히 귀엽고... 그리고 새로운 캐릭터들이 있다.

나오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다들 외모가 멋져서. 뚱뚱하거나 못 생긴 레즈비언은 나오질 않는다. 티나가 실제로도 임신하면서 몸이 분 게 전부. 드라마들이란 게 그렇기 마련이지만, 이 시리즈는 유난히 훌륭한 외모의 배우들만 모아놓은 듯. 씁쓸하다면 씁쓸한 부분이지만, 처음으로 시도되는 본격 레즈비언 드라마라는 한계란 그럴 수밖에 없을 듯. 게이 드라마보다 레즈비언 드라마가 훨씬 입지가 좁다. 그래도 미국에서는, 4시즌까지 무사히 방영된 모양. 제니퍼 빌즈도 미아 커시너도 영화에서 낯이 익었던 배우들을 오랜만에 보는 거라 반갑다.

2시즌부터 새로 메인 테마가 된 곡 같은데 일단 오프닝 테마라 딱 1분, 매우 짧은 곡인데 파워풀하고 가사가 꽤 마음에 든다.

가사

2007/05/27 04:58 2007/05/27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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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추종주의자들은 언제나 '그래도 원곡이 최고!'를 외치기 마련이지만, Sonic Youth의 이 리메이크 버전은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이 곡을 내게 소개해준 이는 이 곡에 거의 절대적인 애정을 갖고있다. (그래서 여기에 냉큼 이 곡 포스팅을 올리는 것이 그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평소 내가 듣고 좋아하던 음악들과는 좀 다른 스타일이지만, 며칠 전 그와 간 단골 바에서 이 곡을 들은 후 머릿속에서 저 혼자 이 곡이 계속 자동플레이 되고 있다. 지직거리는(일명 'noisy'한 기타 소리와 몽환적인 보컬, 그리고 이따금 짚는 낮은 키의 건반 소리가 심장을 건드린다.

The Carpenters의 원곡 동영상

2007/05/25 17:38 2007/05/25 17:38

the pillowman

베개사나이의 비밀?!

막이 열리면, 영문을 모른 채 취조실에 끌려온 카투리안이 두 형사에게 취조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끌려온 자가 이유를 모른단 점에서, 그리고 형사들의 유독 권위적인 모습에서 잠깐 경찰국가 혹은 감시국가의 양심수가 아닌가 의심이 되지만, 그가 끌려온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가 쓴 잔혹한 동화들의 수법 그대로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카투리안은 바로 그 사건의 범인 혹은 공모자로 끌려온 것이지요. 물론 이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있다는 점, 그리고 극 종결 부분에서 즉결처분을 당한다는 점, 또한 형사 중 하나의 직접적인 언급(대사)을 통해, 그가 전제국가 하의 양심수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건 카투리안이 관련되(었다고 여겨지)는 사건은 연쇄 어린이 살인사건입니다. 그것도 아주 잔혹한 방식의. 그의 옆방에는 정신지체인 형 마이클이 끌려와 있고요.

형사들의 고발, 카투리안의 직접적인 내레이션 등을 통해 이 극에 삽입된 동화들은 제각각 대단히 음울하고 잔혹하면서도 슬픕니다. (하긴 '잔혹 동화'라는 것들은 원래 슬픈 이야기들이죠.) 그렇기에 이 연극은 거대한 이야기 속에 작은 이야기들이 여럿 액자처럼 끼워져 있는 구성이고, 달리 말하면 여러 개의 작은 이야기들이 그것을 관장하는 창작자와 조금 특별한 입장의 독자간 갈등이라는 메타적 이야기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카투리안과 마이클, 카투리안과 형사들 사이의 갈등관계는 단순히 이 작은 이야기들을 연결하기 위한 장치도 아니고, 또한 이 작은 이야기들이 단지 저 갈등관계들의 소재로만 작용하는 건 아닙니다. 작은 이야기들끼리, 그리고 작은 이야기와 큰 이야기의 사이는 매우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상호의 상징 및 비유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다시, 인류가 그토록 '허구'라는 장르를 발전시키고 사랑하면서 한편으론 그토록 의존해온 이유, 혹은 '언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만든 세상에 대한 애착의 이유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마이클과 카투리안의 실제 이야기에 기반한 잔혹 동화의 예를 보세요. 실제와 허구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이 이야기는 허구라는 틀(안전판과도 같은)을 통해 진실을 말하며, 다시 창작자의 욕망을 드러냅니다. 모두들 그 이야기가 철저히 허구라 믿을 것이기에 작가는 안심하고 자신과 자기 형이 당한 끔찍한 일을,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떠들어댈 수 있습니다.

워낙 그 '작은이야기들'이 매혹적인 까닭에 마틴 맥도너(혹은 마틴 맥도너휴)의 희곡은 강렬한 인상과 함께, 보다 깊은 곳에서의 인간의 상처와 꿈을 보듬으면서도, 인류가 이제껏 존속시켜온 상징체계를 가져오면서도 이를 변주하고 비꼬며 새로운 상징체계로 발전시켜 나갑니다. 이것이 무대에서 구체화되는 방식은... 일단 배우들의 연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영화에서 최민식의 연기를 끔찍이도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하느라 배우 최민식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건만, 이 연극을 보면서 배우 최민식의 비극에 대해 조금 가슴이 짠해졌습니다. 카투리안 역의 최민식은 무대 위에서 정말로 좋은 배우더군요. 짐작 못한 건 아니지만,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지요. 그런 배우가 연기력 탄탄한 배우가 절실했던 영화판에 흘러들어와 스타도 되고 뭣도 됐지만, 솔직히 스크린은 배우 최민식에게 그닥 어울리는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밀양>을 보며 확인한 것이 송강호는 전면에 주연으로 나설 때보다는 후면에서 다른 주연배우를 돋보이게 할 때 진가가 발휘된다는 거였는데, 송강호나 최민식이나 사실 전면에 주연으로 나서기에 어울리지 않는 배우들이 워낙 배우기근의 한국영화판에서 앞으로 떠밀려 나올 수밖에 없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민식의 성량은 생각보다 작아서 살짝 실망이었습니다만, 이건 최민식의 성량이 원래 그런 건지 거의 공연 막판이라 목이 가서 그런 건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다른 배우들 역시 살짝 목이 가있는 게 느껴져서, 후자의 이유가 클 거라고 짐작할 따름입니다. 최민식 뿐만 아니라 투폴스키 반장 역을 맡은 최정우나 에리얼 형사 역의 이대연, 마이클 역의 윤제문의 연기가 아주 좋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서로 빚어내는 케미스트리가 너무나 훌륭합니다. 바로 눈앞에서 배우들이 대사와 동작을 주고받는데 이것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리듬감있게 척척척척 오고 가면서 전체적인 극 분위기가 고양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지금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연극 특유의 생동감이 이 쾌감을 더욱 배가시키더군요.


the pillowman

카투리안과 마이클, 빚진 자와 학대받은 자

무대 활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카투리안의 잔혹동화들 중 일부는 형사의 '증거물 낭독'을 통해서, 일부는 마이클과 한 방에 넣어진 카투리안이 마이클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통해서 전달되지만, 카투리안이 아예 내레이터가 되어 극 중 극 형식으로 직접 내레이션 되기도 합니다. 마이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일부와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대 윗쪽에 재현극 형태로 펼쳐지고요. 무대 전면엔 마이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카투리안 혹은 내레이터가 된 카투리안이, 무대 후면 윗쪽에 카투리안의 이야기의 시각적 재현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한정된 공간에서 내레이션이 직접 울러펴지는 건 자칫 잘못했더라면 저 혼자 떠버릴 수도 있을 듯한데, 굉장히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요. 게다가 극중 극의 재현극 형식은 별다른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나 공포스럽고 끔찍하던지. 중간에 비명을 지를 뻔했습니다. 덕분에 중간에 인터미션 포함 2시간 40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아주 몰입해서 극을 봤고, 끝나고나서 최민식에게 기립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좀 오바라 생각될 무렵, 저도 모르게 난데없이 눈물이 툭, 떨어지더군요.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제목 '필로우맨'은, 카투리안이 쓴 잔혹 동화 중 한 편의 주인공입니다. 불행하고 슬픈 아이들이 자살하고 싶어할 때, 그것이 사고사처럼 보일 수 있도록 자살을 도와주는 인물, 온몸이 크고작은 베개로 이루어진 인물이 바로 필로우맨입니다. 마이클이 가장 좋아한 이야기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투폴스키 반장이 자신의 사적인 비극을 카투리안에게 들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이야기죠.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이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개개의 독자들에게 어떤 식의 의미로 해석되고 재구성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이야기랄까.  극중 투폴스키의 이야기 하나도 삽입이 되는데 - 이건 투폴스키의 입을 통해 그냥 이야기됩니다. - 이 이야기는 확실히 투폴스키의 세계관을 보여주지요. 각 인물들의 사연들이나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세계관'이 아주 명확하게 충돌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마틴 맥도너휴의 작품은 <필로우맨>을 통해 처음 소개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친구가 문유님의 극찬을 보고 가볼테냐, 하길래 심적 충격에서 도피도 할 겸 그러마 하고서 아무 정보도 없이 갔다가 "이렇게 쎈 이야기인 줄 몰랐어." 했는데, 잔혹동화라 무슨 엽기 코드가 있고 그래서가 아니라, 워낙 잘 짜여진 극이라 임팩트가 아주 강합니다. 게다가 아주 만족스러운 공연이었고요. 아쉽게도 이 공연은 20일로 막을 내렸고, 앞으로 <필로우맨>이 언제 또다시 누구에 의해 공연될지는 모르겠군요. 아마 다른 버전의 <필로우맨>이나 마틴 맥도너휴의 다른 작품이 공연된다면 관심을 갖고 보러 가게 되지 싶군요.


the pillowman

투폴스키 반장과 카투리안. 독자와 창작자, 혹은 사회화에 성공한 정상인-속물과 내면으로 움추러든 트라우마의 순수인




ps. 다 쓰고서 다시 읽어보니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싶었는데, 아항, 연극을 본 경험이 평생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연극을 잘 모르는 주제에 마치 연극을 잘 아는 사람처럼 써놨군요. 어쨌건 영화를 통해 '극'이라는 형식에 꽤 단련이 되어서일까요.

ps2. 연극을 보면서 내내 이유를 모르지만 웬지 "참 영화적이다"라고 느꼈는데, 아마도 이것은 극 자체가 영화적인 특성을 갖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제가 워낙 연극에 무지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ps3. 영화와 책 외의 것들을 뭉뚱그려서 다룰 새 카테고리 'The Pillowman Comes!'의 이름은 바로 이 연극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ps4. 이미지들은 모두 <필로우맨>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갖고 왔습니다.

+ LG아트센터, 19:00 Sat. May 19, 2007

+ 제작 : 뮤지컬 헤븐 | 연출 : 박근형 | 주연 : 최민식, 윤제문, 최정우, 이대연


빨간그림자 님의 리뷰 : 연극 필로우맨(Pillow Man)

2007/05/22 01:11 2007/05/22 01:11


확실히 60년대는 서구 유럽과 미국은 참 재미있는 시대였다. 이런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이렇게 노래를 불렀으니, 고루한 어르신네들이 패닉에 심장마비 직전 상태가 되어 '락은 사탄의 음악' 어쩌고 입에 거품 무실 만도 했군. 참 멋진 시대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꽤 좋아하지만, 맨 마지막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마다 TV 화면에다 대고 욕을 해대며 리모콘을 던져버리고픈 충동이 인다. 역시 이 곡은 Rolling Stones의 곡이다. 제아무리 Guns & Roses라 한들 어찌 감히 Rolling Stones의 아우라를 흉내나 낼 수 있을쏘냐.

그나저나 벤 위쇼가 키스 리처드로 출연한 영화 스틸을 얼핏 본 적이 있는데, 정말 닮았던 거구나, 벤 위쇼... 아니 그 영화, '마성의 믹 재거님'으로 도대체 누굴 출연시켰던 거지?

2007/05/21 00:32 2007/05/21 0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