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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쓰릴 미>의 막이 올랐다.

피아노 연주자 한 명과 배우 두 명. 뮤지컬 <쓰릴 미>의 무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 사람이 다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의 음악은 피아노주자 한 사람이 담당하고, 연쇄살인, 동성애 등 파격적인 소재로 가득한 이 공연의 연기는 단 두 배우가 책임진다. 인터미션 없이 한 시간 반 동안 한번에 몰아치는 공연이다. 그런데 이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무대 위의 연주자와 배우도, 객석의 관객들도 모두 넉다운된다.

뮤지컬 <쓰릴 미>는 원래 스티븐 돌기도프가 희곡, 작곡, 연출과 출연까지 도맡아 오프브로드웨이에 2003년에 초연을 올린 2인극이다. 1924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네이슨 F. 레오폴드 주니어와 리처드 알버트 로브의 실화를 각색한 것으로, 부유하고 영향력 있던 집안의 자제로서 15살에 대학에 진학할 만큼 뛰어난 두뇌를 가졌던 당시 19살의 두 소년이 강도와 방화 등을 일삼다가 15살짜리 소년을 납치해 살인한 사건을 다룬다. 앞길이 창창한 유력한 집안의 범상치 않은 두 소년이 오로지 '재미'를 위해 살인을 했을 뿐만 아니라, 체포된 뒤 두 사람의 동성애 관계가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다.

이 작품은 극 중 '나'로 지칭되는 네이슨이 가석방 심의위원회에서 '그'로 지칭되는 리처드와의 관계를 고백하며 회고하는 액자식 구성을 이룬다. 작년에 처음 국내에 막을 올린 이 작품은 류정한 - 김무열 페어, 최재웅 - 이율 페어와 나중에 빠진 류정한의 빈자리를 메꾼 강필석까지 도합 5명이 번갈아 출연했고, 회를 거듭할수록 입소문이 나면서 막을 내릴 때까지 계속 매진 행렬을 이루었다. 그 성공의 신화에 힘입어 올해 다시 막을 올렸다. 류정한과 김무열이 자신의 역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페어를 이루지는 않았고, 대신 네이슨 역에 이창용과 김우형이, 리처드 역에 김동호가 가세했다. 류정한과 김무열이 출연하는 날의 공연은 1차, 2차에 걸쳐 티켓이 오픈되자마자 순식간에 매진이 됐다.

새로운 네이슨과 새로운 리처드에 대한 관심도 꽤 높은 편. 아무래도 작년 이 공연이 뮤지컬대상에 나란히 남자주연상(류정한)과 남자주연상(김무열) 후보를 내고 류정한이 수상을 했떤 만큼 작년의 네이슨과 리처드와 줄곧 비교당할 수밖에 없다. 올해 새로 가세한 배우들이 공연 초반에 그만큼 혹평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두 배우 간 성량의 조화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자주 일었다. 심지어 새로운 리처드 김동호를 향해서는 기본적인 음정이 불안하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그러나 공연이 한참 진행된 지금, 이들에 대한 평가는 보다 다양해진 편이다. 작년 초연배우들의 공연이 눈에 익은 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불만이 돌고 있지만, 그럼에도 올해의 <쓰릴 미> 역시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거의 매회 공연이 매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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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을 열연하고 있는 김우형.


<쓰릴 미>가 이토록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단순히 소재의 파격성 때문만은 아니다. 작년 김달중 감독에서 올해 이동선 감독으로 연출자가 바뀌면서 과감한 애정씬들이 늘었지만(키스씬이 네 번이나 된다), 작년의 팬들은 오히려 늘어난 애정씬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두 사람의 사랑이 노골적으로 표현될수록 그 절절함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극의 제목인 '쓰릴 미'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오로지 '스릴'을 느끼기 위해 자행된 잔혹범죄 뒤에는, 당시 동성애를 죄악시했던 사회적 금기와 부르주아 특유의 억압 밑에서 비뚤어진 두 남자의 우정, 혹은 사랑이 있다. 이들이 그토록 '스릴'을 추구한 것은, 이들이 스릴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미성숙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조숙하고 영리했던 그들은 아직 자아를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일찍 사회에 나가고 성인 수준의 지식을 습득하지만, 이것을 적절한 감성과 사회성 안에 소화시키지 못한다. 니체에게 열광했던 이들이 초인 사상을 "뛰어난 인간들은 살인쯤 해도 괜찮다"고 오독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들은 어른의 지식과 아이의 감수성을 가진 불균형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극은 두 남자를 사회적 금기와 억압의 피해자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극이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은 '금지된 사랑'이라는 조건 하에 애정을 빌미삼아 상대를 착취하고, 그것을 역이용하여 자신의 사랑을 묶어두려는 두 남자 사이의 무시무시한 심리 게임이다. 그러면서도 결국 베일을 벗는 것은, 지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랑보다 절실한 사랑이다. 이들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고 상대가 있기에 비로소 완전함을 느끼는 완벽한 한 짝이었다. 비록 그들이 어린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치기어린 바보들이라 한들, 둘의 심리게임을 따라가던 관객들은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잔혹함 뒤의 쓸쓸하고 외로운 얼굴과 부지불식간 마주치게 되고, 결국 그들의 게임에 동참하면서 네이슨의 애절한 사랑의 갈구와 리처드의 미성숙한 열정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만다. 작년 팬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든 올해 처음 공연을 접한 사람들에게 <쓰릴 미>가 여전히 충격적이며 흡입력 강한 작품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두 배우의 호흡과 케미스트리가 극 전체의 완성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후반으로 갈수록 공연이 월등하게 좋아지고 있다는 점도 반복 관람을 부채질하는 요소다.

배우는 단 두 명뿐인데도 극 속의 시간은 무려 34년을 아우르고, 장소 변화가 많으며, 두 사람의 미묘한 심리의 흐름이 주축이 된다는 점에서 무대극보다는 오히려 영화에 더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 더 익숙한 관객이라면 몇몇 미묘한 심리적 변화의 순간 '클로즈업'의 필요를 절실히 느낄지도 모른다. 곡들은 극의 성격에 맞게 어둡고 격렬한 편이지만 그만큼 절절한 서정성이 짙은 곡들이 다수다. 특히 주제가인 '쓰릴 미'는 섬세하고 호소력 넘치는 선율로 뇌리에 깊게 박히는 곡이며, 리처드가 아이를 유괴할 때 부르는 '로드스터'는 카리스마 넘치는 곡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랙에서 10월 12일까지 공연될 예정이다.




ps. 7월 16일 수요일 8:00pm,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랙, 김우형 X 김동호 페어

ps2. 프레시안에 기사(새 창으로 열기)로 올라감

ps3. 지금은 김동호 음정이 좀 안정됐나? 저 날 공연보러 갔을 때 김동호의 그 불안한 음정은 정말 안습이었다.

ps4. 김우형 X 김무열, 혹은 이창용 X 김무열의 공연을 보고 싶은데, 인기 많은 김무열 군 표가 다 매진이야! <일지매>에서 깐죽대는 연기 보고 '그' 역을 하는 김무열이 무척 궁금하단 말이다...!

2008/08/15 08:02 2008/08/15 08:02
뮤지컬로도, 영화로도 공개된 <스위니 토드> 때문에 작곡가 스티브 손드하임은 이제 국내에서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그 손드하임이 1970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첫 무대를 올린 뮤지컬 <컴퍼니>가 국내에도 상륙했다. 지난 5월 27일 개막해 현재 절찬리에 공연중이다.

서른 다섯 번째 생일을 맞는 바비에게 친구들이 깜짝파티를 치러주는 것으로 극이 시작된다. 번듯한 직장에 매력적인 외모, 쿨한 성격과 유머러스한 말재주를 가진 바비(고영빈)는 화려한 연애생활을 이어가는 독신남이다. 여자의 스타일에 따라 유려한 작업기술을 다르게 적용시켜가며 세 명의 여자친구를 동시에 만나고 있는 그는 이미 결혼했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는 다섯 커플의 친구들에게서 결혼 독촉을 받는다. 다양한 개성대로 다양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친구들은 바비에게 결혼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설득하지만, 바비가 커플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드러나는 건 결혼의 단맛보다는 쓴맛이다.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부부도, 각자 자기 생활패턴을 유지하며 사는 부부도, 고독과 권태를 느끼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다섯 커플이 바비를 대하는 방식은 이중적이다. 바비를 자신들의 '커플 클럽'에 서둘러 가입시키려 하면서도 그의 싱글 상태를 부러워하고, 그와 기혼자의 애로사항을 공유하고 싶어하면서도 싱글이기에 가능한 '화려한 연애편력'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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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해도 결국 남는 건 '친구집단(컴퍼니)'뿐.

그러나 바비의 삶이라고 결혼한 친구들의 삶보다 더 나을 것은 없다. 세 명의 여자 중 다소곳한 타입은 그에게 결혼할 남자가 아니라며 이별을 고하고,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어린 배우지망생은 숭배자를 필요로 할 뿐이다. 하지만 바비가 정말 진지한 관계를 원하는가? 그는 열정적인 하룻밤을 보낸 뒤 자신에게 애착을 보이는 여자를 부담스러워 하며 얼른 집밖으로 그녀를 쫓아내기 위해 골몰한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건 외로움이다. 극 내내 바비는 쾌락을 쫓는 바람둥이처럼 행동하지만, 극의 마지막에서 마침내 폭로되는 것은 외로움과 결혼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다. 누군가와 진정한 사랑과 완전한 소통을 갈구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절망과 체념이다.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물러난 현대 도시사회에서 교육 수준이 높고 전문직종 종사자일수록 평균 결혼 연령이 높다. 죽을 때까지 절대적이었던 결혼의 맹세도 쉽게 깨진다. 이게 현대 도시인들의 삶이다. 자유로운 사랑이 주는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빛을 발할수록, 이 관계가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언제 뒷통수를 맞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빛 뒤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든다. 과거에는 결혼이라는 것이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의 대상이었다면, 현대인들에게는 "해도 외롭고, 안 해도 외로운" 것인 셈이다.

인터미션을 포함해 총 2시간 반에 달하는 이 공연은 소규모 공연답지 않게 많은 수의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캐릭터 하나하나가 워낙 또렷한 개성으로 치밀하게 구축되어 전혀 혼동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은 바비지만 극 전체에서의 비중은 각 캐릭터에게 고르게 안배된 편. 각 커플들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나열되고 그 사이 바비의 연애 에피소드를 끼워넣는 다소 단순한 플롯임에도 이를 통해 진행돼 나가는 이야기는 신랄하면서도 치밀하다. 다소 난해한 넘버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스위니 토드>와 달리 사용된 넘버들도 하나같이 세련되고 산뜻하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 식의 귀를 확 잡아끄는 달달한 훅은 없지만, 등장인물 전체의 아카펠라 합창과 중창이 주를 이루는 노래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감칠맛이 난다.

배우들의 연기도 매우 좋다. <그리스>, <바람의 나라> 등의 무대에 섰던 고영빈은 세련되고 매력적인 현대 도시의 여피 바람둥이의 역할을 매끈하게 소화해내며, 극 중 베드씬(!)을 펼치는 에이프릴 역의 유나영과 케미스트리도 매우 훌륭하다. 열 명의 친구들 역시 순발력 넘치는 애드립과 코믹한 연기로 극의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서로 대사를 주고받는 리듬감도 매우 좋은 편. 남자 캐릭터보다는 여자 캐릭터들 쪽이 매우 강력한 코믹 연기를 선보이며 좌중을 웃음도가니에 빠뜨린다. 특히 양꽃님(제니 역)의 다양한 목소리 톤의 대사와 방진의(에이미 역)의 경악하리만치 자유자재로 출렁이는 얼굴근육 연기는 극의 코믹한 성격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이런 웃음의 뒷맛은 쓰고 서글프기 짝이 없다. 이것은 밝은 표정으로 마지막 노래를 부르되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야 마는 고영빈의 몫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극중 바비와 비슷한 또래의 싱글남녀들은 이 뮤지컬을 보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고 상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계속해서 미뤄두고 덮어두었던 인생의 중대한 질문을 비로소 대면할 용기를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8월 17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될 예정. <헤드윅>, <바람의 나라>, <밴디트> 등으로 뮤지컬계의 스타 연출가로 떠오른 이지나가 연출을 맡았다.


바비가 부르는 곡, 'Marry Me A Little'


ps. 6월 4일 수요일 8:00pm,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보고 한 달 반이 넘어서야 글을... 으으)

ps2. 결국 95년 브로드웨이 캐스트가 녹음에 참여한 OST를 샀다.

ps3. 고영빈 팬들은 필히 맨 앞좌석 정중앙 자리에 앉으실 것. 고영빈의 '그녀' 중 하나로 극에 2초간 출연하게 된다. ㅋㅋ (고영빈이 손도 잡아주지 아마?)

ps4. ... 글만 보면 무지 우울할 것 같지만, 배꼽 찾느라 미친 듯이 웃게 되는 '코미디'다.

2008/07/17 10:30 2008/07/1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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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의 속내를 폭로한다.

여기 프랑스에서 살며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된 남자, 진우가 있다. 그는 최근 여자친구와 결혼 날짜를 잡은 뒤 한국에 돌아온 터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는 오로지 진우의 호텔 방. 그리고 이곳에 그의 옛 여자 네 명이 차례로 방문한다. 평범한 주부가 돼 있는 수줍은 성격의 15년 전 첫사랑 양선,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민하, 진우의 선배 감독의 부인이자 한물 간 여배우 정희, 그리고 쿨하고 세련된 감성의 레지던트 의사 은후다. 각각의 여자들과 진우의 만남이 계속되면서 관객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다는 진우의 소박한(?) 의도와 시간이 여전히 아물지 않은 그녀들의 상처가 계속해서 충돌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넘치는 매력과 재능으로 여자들에게 저돌적으로, 때로는 수줍게 접근하며 양다리도 불륜도 서슴지 않았던 그는 단 한 번도 책임있고 진지하게 관계를 이어가지 못했고 결정적인 순간엔 언제나 말없이 혼자 도망쳐 버렸던 이기적인 남자다. 그런 주제에 그녀들 기억 속에 자신이 '나쁜 남자'로 기억되는 것은 또 두렵고 싫다. 한 마디로 '좋은 건 다 하고싶고, 나쁜 짓은 해도 나쁜 놈은 되기 싫은' 남자다. 게다가 가장 쿨하게 시작해 감정적으로 가장 격하게 충돌하고 폭발하는 은후와의 만남에서 진우의 또 다른 찌질한 비밀이 드러난다. 이쯤 되면 객석에 있던 여자관객의 입장에서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 주인공 진우 역을 연기하는 배우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분노와 짜증이 극도에 이르기 일쑤다. 하지만 그에게 그렇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10년, 15년이 지난 후 그의 연락에 그녀들이 결국 호텔방을 찾아왔듯, 관객들 역시 저 이기적이면서도 어린애 같은 남자를 결국 완전히 증오하지는 못 한다.

1997 년 영화 <남성전용회사>로 데뷔해 선댄스영화제에서 각광받은 뒤 <너스 베티>, <포제션> 등을 만든 닐 라뷰트 감독은 재능있는 희곡 작가이기도 하다. <썸걸즈>는 닐 라뷰트가 2005년 각본을 써서 초연을 올린 작품. 미국에서는 인기 TV 시트콤 <프렌즈>의 '로스' 데이빗 쉬머가 주인공을 맡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국내에는 뮤지컬 배우 이석준과 베테랑 연극배우 최덕문이 주인공 강진우 역에 더블캐스팅되어 작년에 초연되었다. 올해 앵콜 공연으로 다시 무대를 찾아온 <썸걸즈>는 여배우 중 일부가 바뀌기는 했지만 이석준과 강진우가 그대로 다시 진우 역을 맡는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남자배우들이 그간 유부남이 됐다는 것, 그리고 뮤지컬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등에서 주연을 맡으며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뮤지컬 배우 전병욱이 7월 3일부터 새로운 강진우로 합류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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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하고 찌질한 나쁜남자와 그의 다양한 과거의 여자들의 '과거 디비기' 공방전.

우리말로 상당히 매끄럽게 번역, 각색된 <썸걸즈>는 생생한 구어체 대사를 '맛있게' 주고받는 배우들의 호연 덕택에 "내 주변에 저런 남자, 저런 여자 꼭 하나씩 있지" 싶게 만든다. 기자가 관람한 회차에서 이석준의 강진우는 각각의 여배우와 대사를 주고받는 감각이 상당히 리드미컬하면서도 자연스러워 객석의 자연스러운 웃음을 이끌어내며, 자기과시욕이 강하고 여자들에게 적당한 타이밍에 '불쌍한 모습'을 보일 줄 아는, 그래서 밉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강진우를 '미끈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대화가 계속될수록 남녀 모두의 쪼잔함과 상처가 폭로되면서 당연히 나올 법한 신랄한 블랙 유머의 느낌은 다소 둔한 편이다. 15년 전 자신을 버리게 만든 그 여자가 누구였는지 집요하게 따져묻는 첫사랑 양선은 충분히 이해받고 감정이입될 수 있는 캐릭터임에도 다소 단순하고 우스꽝스럽게만 묘사된 감이 있다. 연극이 진행될수록 각 캐릭터들이 드러내는 상처와 이 속에 들어있는 처절함과 치졸함과 억울함과 뻔뻔함은 관객들 각자 얼굴을 붉히며 찔려 할 면들을 매우 통렬하게 끄집어내고 폭로하지만, 이것이 막판으로 갈수록 물기나 유머가 전혀 없이 처절한 악다구니의 형태로만 가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썸걸즈>는 이기적인 '나쁜 남자'와 알면서도 속아주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여자들의 연애 관계가 실은 어떤 권력관계의 기반 위에 서 있는지, 연애 관계를 통해 사랑이라는 환상을 한쪽이 일방적으로 착취한 결과가 상대에게 어떤 식의 상처로 남는지를 매우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연극이다. 나아가 인간이란 존재가 빛 좋은 말잔치 뒤에 어떤 치졸한 본성을 숨기고 있는지, 사랑이라는 달콤한 마취약이 실은 어떤 섬뜩하고 고통스러운 가시를 품고 있는지 통렬하게 폭로한다. 4월 11일 오픈해 애초 8월 중순까지 공연될 예정이었던 이 연극은 입소문에 따른 인기에 힘입어 현재 대학로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오픈런으로 공연중이다.

ps. 7월 6일 일요일 3:00pm, 대학로설치극장 정미소

ps2. 프레시안무비에 올라간 글

ps3.  네 명의 여자가 모두 이해되더라.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첫사랑 양선마저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내가 가장 예뻤던 때가 있었다"는 믿음을, 사실은 누구든 갖고 싶어하지 않을까. 혹은 어차피 저 남자가 나를 즐기는 대상으로만 대하는 거, 뻔히 알고, 뻔히 아니까 상처는 안 받아도, 그래도 섭섭하고 아픈 것. 혹은, 저 빛나는 꿈과 비전과 재능을 가진 남자와 어느 한 순간이라도 함께 하고픈 욕구. 그리고 쿨하려고 쿨하려고 그렇게 애써도 결국 처절한 절규로 상처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ps4. 사실 이 연극의 진짜 본질은 '연애는 권력, 사랑은 환상'이라기보다는, 사랑을 핑계삼아 여성들의 감정을 착취하며 지탱되는 남자 예술가에 대한 고발극이다. 쓰다보니까 그 부분을 홀랑 까먹어버렸네...

ps5. 그래서 결국 뒤로 요런 잡담글이나 쓰고 앉았다는. 하하;;

2008/07/08 23:34 2008/07/08 23:34


김수철 - 나도야 간다


배창호 감독의 1984년작 <고래사냥>의 주제가는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아니라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이다. 물론 송창식의 곡이 먼저 나왔고(아마도 75년, <바보들의 행진> OST에서였다고), 배창호 감독의 영화 제목은 거기에서 따왔을 수도, 혹은 다른 데에서 연유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건 마지막에 일행이 춘자의 고향에 도달해 무사히 어머니의 품에 안착할 뿐만 아니라 춘자가 말을 되찾기까지 하는, 매우 낙관적이고 희망이 넘쳐나는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에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노래가 아닐 수 없다. 송창식의 노래가 아무래도 좀 우울한 구석이 있는데다 가사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간다기보다는 아무래도 '도피'의 고래를 찾아나서는 듯한 느낌인 반면, 김수철의 노래에는 청춘다운 패기와 정말로 희망을 찾아나서는 적극적인 힘이 살아있다.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부분이 "젊은 나이를/세월을 눈물로 보낼 수 있나"인데, 잘 알려져있다시피 이 노래의 가사는 원래 박용철이 1925년에 발표한 시 '떠나가는 배'의 1연을 베이스로 한다.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 눈물로야 보낼 거냐 / 나 두 야 가련다) 김수철의 '젊은 그대'도 그렇지만, '나도야 간다' 역시 굉장히 단순하고 힘찬 로큰롤 가락인지라 박용철의 원시의 비장하면서도 절망어린 표정 대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나는 희망의 힘이 훨씬 더 강하다. 그리고 이런 건강한 희망과 낙관이야말로 현실을 돌파하는 가장 큰 힘, 나아가 예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네이버를 검색하다가 저 뮤직비디오를 찾았는데, 2002년에 제작된 거라고 하는 듯? 이미숙과 안성기가 찬조출연을 해주고 있는데, 이미숙의 추억 속 앨범에 등장하는 <고래사냥> 원래 영화 장면, 이라는 시작도 좋고(미숙언니 너무 예쁘심 ㅠ.ㅠ), 안성기가 <고래사냥>의 바로 그 거지왕초 캐릭터로 다시 등장하는 것도 너무 좋다. (안성기 최초의 뮤직비디오 출연이라고 한다.) 다만 현대의 아이들은 너무... 곱고 팬시하다는. 뭐 뮤직비디오니까 어쩔 수 없는 거려나. 남자애가 보고 있던 TV에 나오는 장면이 유곽에서 도망치는 장면과 기차 지붕 위로 올라타는 장면인데, 특히 저 기차 장면은 영화적으로 매우 아름답게 잘 찍힌 명장면이다. 음악은... 기타 사운드가 좀더 일렉해지고, 전체 템포가 좀더 빨라진 듯한. 소박한 원래 버전이 더 좋지만 이 버전도 나쁘진 않다.

<고래사냥>이 저토록 희망차고 낙관적인 영화임에도 나는 영화를 보다가 여러 번 눈물을 흘리며 아픈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 '신나는' 2002년 뮤비 버전도, 처음에 볼 땐 혼자 막 눈물 찔끔대며 가슴이 아팠더랬다. 웃다가 울다가 가슴 부여잡다가, 그럼에도 너무나 밝은 저 김수철의 표정이 참 좋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아, 근데 다시 들어도 진짜 명곡이다. 25년 전 노래가 이토록 세련되고 여전히 힘있을 수가 있다니까. 김수철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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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3 00:57 2008/07/03 00:57


... 그리고 16년이 지났다.

이것이 매우 감상적인 마스터베이션, 혹은 감상의 소비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지금 광장에 서야 시민이라는 누군가의 호소력 강한 설득을 보고 들으면서도, '노동자이자 시민'이 아닌 '노동자의 계급성이 거세된 시민'으로서 그 광장에 서고 싶지는 않다고 여전히 고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아프다.

다시는 시청광장서 눈물을 흘리지도,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던 다짐, 그 약속. 16년간 참으로 많은 이들이 참으로 꾸준히도 피눈물을 흘리고 경찰의 곤봉에 맞고 방패에 찍혀왔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오늘, 이제는 거리에 나올 일이 한번도 없었을, 저 16년간 방패에 찍히고 경찰의 곤봉에 맞는 사람을 과격하고 정신나간 사람들이라 생각했을 사람들마저 다시 물대포에 쓰러지고 군화발에 짓밟히고 있다.

이 나라 이제 그만 뜨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뜰 돈도 여유도 없으니 결국 죽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든다. 결국 빚을 지거나 남에게 사기를 쳐서라도 돈을 모아 이 나라를 떠야 하는 걸까, 아니면 신경정신과라도 찾아가 하다못해 플라시보 약이라도 처방받아야 하는 걸까. 살아남으려면, 차라리 죽고싶다는 생각을 떨치려면 대체 어째야 할까. 암만, 우울증은 사회적 질병이 맞다.


2008/06/30 12:05 2008/06/3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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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향한 야망과 명분 없는 야망에 대한 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던 맥베스의 등을 떠밀며 그의 악행을 격려했던 맥베스의 부인, 즉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의 악행에 강한 동기를 부여해주고 함께 뒤처리를 하는 중요한 공범이면서도, 정작 셰익스피어의 원작희곡 [맥베스]에서는 그 중요성만큼 복합성과 입체성을 부여받지는 못하는 캐릭터다. 그런데 <레이디 맥베스>는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맥베스가 아닌 레이디 맥베스가 주인공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지녔던 웅장한 비극적 인물의 광휘, 야망과 양심 사이의 격렬한 고뇌와 갈등은 이 연극에서 오롯이 레이디 맥베스의 몫이 된다. 맥베스는 그저 주인공의 남편으로서 부인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심약한 기질과 성품의 공처가로, 유약함과 우유부단으로 한껏 희화화된 채 표현된다. 심지어 연회 장면에서는 원작보다 더 나아가 만인 앞에서 옷에다 실례를 하기까지 한다.

한태숙이 창작하고 연출한 연극 <레이디 맥베스>가 1998년에 초연되었을 당시 얼마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이 연극이 "셰익스피어에 대한 모독 및 훼손"이라는 평을 받았다면, 이것은 정말 고전 중의 고전에 손을 댄 것에 대한 불편함보다는 여성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를 압도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원작들이야말로 대체로 여성 캐릭터들이 남성 캐릭터에게 종속되거나 주변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거부감이 꼭 남성우월적인 구시대의 유물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에 대한 모독 및 훼손'이라는 비판 역시 구차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톰 스토퍼드가 [햄릿]의 두 조연 캐릭터를 등장시켜 무려 '코미디'로 재창작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가 에딘버러에서 초연된 게 벌써 1966년이 아닌가. 1998년은 톰 스토퍼드가 각본에도 참여한 영화 <세익스피어 인 러브>가 개봉된 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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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번외작, 사실 좋은 공연이긴 한데 기대에 비해 실망이 컸다.

지난 4월 13일 막을 내린 2008 <레이디 맥베스>는 예술의 전당이 개관 20주년을 맞으면서 기획한 '최고의 연극' 시리즈 제1호 작품이다. 초연된 지 10년, 2002년 이후 오랜만에 재공연된 이 극은 초연 때처럼 서주희가 다시 레이디 맥베스를 맡았고, 실험 오브제극의 성격이 더해졌다. 진흙과 밀가루를 적절히 이용해 레이디 맥베스의 부서지고 공중에 휘날리는 심리와 덩컨 왕이 암살당하는 장면을 매우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무대 위 삼면에 객석이 설치되어 관객들은 중앙무대를 내려다보게 되고, 배우들은 객석 사이 통로들까지 적절하게 무대의 일부로 이용함으로써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관객은 이 연극을 관람하는 관중이자 동시에 레이디 맥베스가 보는 거대한 환영의 일부로 극의 일부가 된다. 타악기 위주의 효과음, 그리고 스산한 분위기를 한껏 강화하는 무시무시한 여인의 구음 역시 이 연극의 완성도를 더욱 높인다.

그럼에도 이제 10년째인 만큼, 시대의 변화 앞에서 이 연극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들이 살짝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도 있는 장면들이 재해석되는 장면들은 여전히 매우 좋지만, 레이디 맥베스의 고통과 광기는 이제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세익스피어의 원래 대사와 새로 덧붙여진 전의-레이디 맥베스 사이의 대사가 그 밀도에 있어 도드라지게 차이가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에서 전의와 광대들의 존재가 실재가 아닌 환영이라는 사실이 폭로되고 전의가 직접 자신의 정체를 레이디 맥베스의 '검은 마음' 나아가 그녀의 '죄의식'으로 굳이 명시해 버리는 장면은, 앞에서 차근히 쌓아올린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최고조로 폭발시키지 못 하고 도리어 맥없이 주저앉혀 버린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관람한지라 배우들의 에너지가 많이 떨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레이디 맥베스의 내면의 갈등과 그 고통, 그리고 갈등이 지나치게 '피로감'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도 이 연극이 원래 지향하고자 했던 방향과 거리가 있는 듯하다. 오브제들이나 대사들은 피로감보다는 '격렬함'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레이디 맥베스가 지친 몸을 겨우 끌고 원래의 객석 위치에 마련된 길을 따라 걸어가는 엔딩 역시 그 의도와 근거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지나치게 노골적이다. 차라리 맬컴과 맥더프가 버냄의 숲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레이디 맥베스가 자살하기 직전의 긴박한 장면으로 마무리가 됐다면 어땠을까. 안 그래도 배우에게 육체적, 심리적으로 강도 높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이 연극이 '배우에게 더욱 가혹한' 극이 될까.

10년을 맞은 <레이디 맥베스>가 그간 쌓아온 명성에 충분히 어울리는 연극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과 그 10년간 사회가 너무 많이 변한 만큼, 그리고 이 극에 명성을 더해준 전통 - 여성의 입장에서 다시 쓰고 재해석하는 페미니즘 예술의 전통 - 이 이제 충분히 대중화된 만큼, 이 연극이 계속해서 명성을 이어가려면 다른 식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번 2008년의 공연은 이 작품이 어떤 기로에 서 있는지를 보다 명확히 밝혀주고 확인해 준 데에서 진짜 의미를 찾아야 할 듯싶다.




ps. 4/13 일, 3:00, 토월극장

ps2.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새 창으로 열기) 올라간 글

2008/04/23 01:22 2008/04/23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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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향연을 즐겨라!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샘 레이미 감독의 저예산 호러영화 <이블데드> 시리즈가 뮤지컬로 거듭났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2003년 초연되어 매진행렬을 기록했던 이 뮤지컬이 2006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 무대를 거쳐 드디어 한국에도 라이선스 뮤지컬로 상륙한 것.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들, 이른바 '무비컬'들이 근래에 점차 숫자가 늘어가고 있다고는 해도 원체 피 튀기는 좀비 스플래터 영화가 원작이었던 만큼 뮤지컬 <이블데드>가 끄는 호기심과 관심은 일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국내 버전 <이블데드> 시리즈가 다시 한 번 눈길을 모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본토 공연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무대 바로 앞에 스플래터 존을 마련해서, 극 중 좀비로 변한 배우들이 스플래터 존 관객석으로 난입해 관객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며 관객의 옷에 피를 뿌리고 발라준다. 당초 극단측은 한국적 정서에 맞지 않을 것을 우려해 스플래터 존의 좌석을 적게 배정했지만 이 좌석은 3차에 걸친 티켓오픈 때마다 오픈과 동시에 매진될 정도로 치열한 예매 경쟁이 벌어져 현재 마지막 공연날까지 모두 매진된 상태다.

뮤지컬 <이블 데드>가 눈길을 모은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배우들 때문. 소극장 공연임에도 현재 국내 뮤지컬계에서 티켓파워가 가장 높은 배우에 속하는 류정한과 조정석이 주인공 애쉬 역에 나란히 더블 캐스팅된 것. 특히 <오페라의 유령>부터 시작해 국내에 굵직한 라이선스 대작 뮤지컬들의 주연을 도맡아온 류정한이 이런 작은 공연, 특히 코믹극의 주연으로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캐스팅 초기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애쉬뿐만 아니라 셸리와 애니의 1인 2역을 하고 있는 백민정, 셰릴 역의 최혁주, 정상훈과 더블 캐스팅인 스콧 역의 김재만, 제이크 역의 양준모 역시 다른 뮤지컬들에서 주연급으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이다. 더블 캐스트 중 기자가 관람했던 조정석 - 김재만의 공연의 경우, 역시 차세대 뮤지컬 스타답게 조정석은 시종일관 발랄한 연기 가운데에서도 탁월한 가창력을 보여주며, 가장 먼저 좀비가 되어 계속 애쉬를 좀비의 세계로 회유하는 셰릴 역의 최혁주는 작은 체구가 무색하게 무대 전체를 장악하는 놀라운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1인 2역을 하고 있는 백민정 역시 백치미의 금발미인 셸리와 지적이지만 허영기도 엿보이는 검은머리 미녀 애니 역을 완전히 상반되게 연기하고 있어 사전에 1인 2역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관객들은 이것을 공연 마지막이 돼서야 알아차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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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 역의 카리스마 최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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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 역으로 열연 중인 류정한과 좀비들.

뮤지컬 <이블데드>는 영화 <이블데드> 1, 2편을 적절히 섞으면서도 1편이 코미디보다는 호러에 치중했던 것과 달리 뮤지컬은 처음부터 끝까지 코믹한 웃음을 선사한다. 라이선스 공연들이 의례 보이는 번역투의 어색한 가사는 다른 뮤지컬들보다는 그래도 적은 편. 오히려 'What the Fuck Was That' 같은 곡은 우리말로 '조낸 황당해'로 옮겨졌을 만큼 비속어도 섞여 있다. B급 정서를 전면에 표방한 만큼 비속어뿐 아니라 인터넷식 용어와 성적 농담도 다수 등장하지만 그 수준은 '귀엽게' 마무리되는 편. 배우들의 에너지도 매우 발랄하고 생기가 넘친다. 대학생 다섯 명이 산 속 오두막으로 여행을 가는 설정인 만큼, 배우들의 젊은 열기가 무대를 꽉 채우고 있고, 반복 관람하고 있는 배우팬 관객들의 열띤 호응도 극의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 데에 일조한다. 스플래터 존 좌석의 관객에게 일부러 나눠주는 우비 대신 일부러 흰옷을 입고 와서 배우들이 뿌리는 피를 기꺼이, 그리고 반복적으로 하사(!)받는 관객의 수도 많고, 이들은 매 노래마다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보내며 흥겨운 분위기를 이끈다. 왼손을 잘라낸 애쉬가 전기톱을 비로소 손에 장착하는 장면은 객석에서 터지는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장면이다. 배우들 역시 A열 관객석의 일부부터 스플래터 존과 R석 맨 앞줄 사이의 통로까지 적절히 무대의 일부로 활용해 더욱 관객들의 열띤 반응을 이끌어낸다. 인터미션 15분을 포함해 총 2시간의 공연 시간 동안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다. 공연 마지막엔 배우들이 각자 등장해 다른 배우의 곡들을 부르고 장기를 보여주는 보너스도 추가된다.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랙에서 6월 15일까지 공연될 예정.



ps.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라간 글

2008/04/07 18:21 2008/04/07 18:21

애초에 파격으로 시작했던 만큼 끝까지 그냥 판타지나 가상역사/대체역사로 가버렸으면 더 좋았겠다 싶기도 했지만, 그건 사실 홍자매의 야심을 오해한 거였다. 홍자매 버전의 홍길동은 굉장히 세심한 설정에서까지 원전 홍길동을 가져오는 반면, 원전 홍길동이 오늘날에 가질 수 있는 전복적인 의미를 최대한 끌어냈고 원작의 시대적 한계는 물론 주제의 한계까지 가볍게 뛰어넘었다. 15%의 시청율 속에서 이 드라마를 열렬히 시청했던 팬들마저도 대체로 '드라마가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다'고 불평을 하지만, 내 감상은 그렇지 않다. 비록 무수한 단점들과 아쉬움이 노출되긴 했어도, <쾌도 홍길동>은 한국의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가 해내지 못한 어떤 경지를 획득했다. 그것은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상업적인 매체가 어떻게 가장 건강하고 올바른 사회성을 획득해내는가, 어제의 고전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확장해 나가는가에 대한 어떤 전례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전에 프리미어에 기고했던 글블로그에 올렸던 글에서 썼듯, 이 드라마는 한 사람의 영웅이 민중을 이끄는 게 아니라 민중이 영웅을 만들어내고 그 영웅을 앞세워 그 어깨에 짐을 얹어주는 방식을 보여준 한편, 실재와 허구 간의 상관관계와 실재가 허구화되는 방식 및 허구가 다시 실재화하는 방식을 흥미롭게 보여주었으며, 나아가 이미 충분히 쌓여진 예술과 이야기의 전통 안에서 수직의 방향이 아니라 '팬픽'이라는 형식을 통해 수평의 방향으로 어떻게 예술의 범위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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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실 <쾌도 홍길동>은 허균의 원전인 '홍길동전',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홍길동'이라는 허구 캐릭터에 대한 팬픽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기존 원전을 분명히 밝히면서 원전과 지금의 현재 사이의 틈새를 비집어 새로운 의미로 채우고, 기존에 존재하던 캐릭터에 새로운 색깔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항간에 사람들이 말하는 '포스터모더니즘적인' 예술방식일 수 있다. 이 안에서 한 시대에 머물렀던 고전은 현대적인 옷을 갈아입으며 새로운 의미를 덧입는다. 그리고 왜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