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대작들의 치열한 흥행접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가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첫 선을 보였다. <아바타>의 배급사인 20세기폭스는 11일 낮 2시 영등포CGV에서 언론시사를 갖고 전세계적인 관심과 기대를 불러모으고 있는 <아바타>를 드디어 국내에 공개했다. <아바타>는 <터미네이터> 1, 2와 <에일리언 2>, <트루 라이즈>의 흥행작들은 물론, 전세계 흥행 1위작인 <타이타닉>을 연출한 제임스 카메론이 12년만에 선을 보이는 영화라는 점에서 전세계 영화팬들의 기대를 모아왔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만을 위해 신기술을 전격 개발, 도입하여 구현한 영화의 장면 중 20분 가량의 동영상을 일찌감치 공개하면서 전세계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Avatar

드디어 베일을 벗은 <아바타>는 과연 모든 점에서 관객들을 놀래키며 새로운 레벨의 시각적 쾌감과 충격을 안겨줄 만하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자랑했던 이모션 캡처 및 가상 카메라의 위력은 놀라움을 넘어서 경이로운 수준이며, 전반적인 CG 기술 역시 놀랍다. (가상의) 판도라 행성을 수놓고 있는 자연과 기기괴괴한 생명체들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파란 피부에 긴 꼬리와 날카로운 귀를 가진 3미터 장신의 나비 종족 및 이들과 인간의 DNA로 만든 생명체인 아바타(그와 DNA가 맞는 인간이 의식으로 조종한다)의 동작과 표정도 매우 자연스럽게 구현됐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반(샘 워딩턴)의 아바타가 나비종족의 네이티리(조이 살다나)와 함께 거대한 새 이크란을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 숲에서 거대한 생명체에 쫓기는 장면 등도 박진감이 넘치거니와, <에일리언 2>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장면들을 뛰어넘는 전투씬들도 관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다. 2시간 42분의 다소 긴 러닝타임이지만 단 한 순간도 지루해할 틈이 없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벌이는 대규모 전투씬은 그 어떤 이전의 전쟁영화보다도 화려하고 큰 스케일을 자랑한다. 거기에 <타이타닉>에서 다소 실소를 자아냈던 로맨스도 이 영화에서는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러우며 설득력있다. 액션과 모험, 로맨스,그리고 전쟁영화 등 모든 장르가 한 영화 안에 들어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만족스럽다. 한마디로 <아바타>는 속이 꽉 찬 종합선물세트다.

그러나 <아바타>의 놀라움이 단순히 새로운 테크널러지나 화려한 볼거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바타>는 단순히 낯선 행성에서의 모험과 상투적인 두 문명의 충돌 및 전쟁만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인류가 '문명화, 근대화'의 이름으로 침략과 전쟁을 자행했던 이른바 '식민지 근대'의 역사를 혹독하게 비판하며 자연 속에서의 공존을 강조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판도라 행성 도처에 깔려있는 값비싼 언옵타늄이라는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판도라 행성에 기지를 설치하고 채굴을 하는 인간의 탐욕은 곧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남아메리카를 침략해 식민지화했던 근대 유럽의 식민전쟁을 연상시킨다.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어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며 살아가고,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며 죽은 동물들의 영혼을 존중하는 나바족들의 생활풍습은 우리가 흔히 '인디언'이라 불러왔던 아메리칸 네이티브들의 풍습과 닮았다. 쿼리치 대령의 지휘 하에 이들의 정착지가 무자비한 공중폭격을 당하는 장면은 곧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벌어졌던 네이티브 학살 및 착취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지옥의 묵시록>에서의 그 유명한 폭격 장면을 연상시키며 베트남 전의 이미지까지 끌어들인다. (이 장면에서 쿼리치 대령이 사용하는 작전 이름도 '발키리 1-6'이다.) 때문에 영화 중반, 나비 종족들의 거주지가 폭격당하는 장면은 그 엄청난 스케일과 스펙터클 때문에 더욱 참혹하고 경악스러운 학살과 파괴의 공포를 전달한다.

<타이타닉>에서도 제임스 카메론은 거대한 재난영화의 틀 안에 계급사회의 폭력과 휴머니즘을 담으려 시도한 바 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도 그는 일차적으로 눈을 유혹하는 뛰어난 시각효과와 놀라운 상상력 아래에 '기계조차도 배우게 되는' 휴머니즘을 심어놓았다. 하지만 전작들에서 카메론 감독이 시도했던 이러한 '메시지'들은 언제나 화려한 볼거리 앞에서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앙상하게 그 얕음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바타>는 공백의 12년 동안 카메론이 그저 영화의 테크놀로지만 고민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담아야 할 메시지와 철학을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바타>는 감히 '영상 혁명'을 자처하는 데에 토를 달고 싶지 않을 만큼 혁명적인 기술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카메론의 전작의 어떤 영화들도 도달하지 못했던 깊이있는 근대문명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수행한다.

<타이타닉>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제임스 카메론은 "나는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친 바 있다. <아바타>를 내놓은 뒤의 제임스 카메론은 "나는 영화의 신이다"라고 자처해도 그 누구도 감히 반박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될 듯하다. 아마도 <아바타>의 흥행 역시, 단순히 다른 영화들에 비해 얼마나 흥행할 것인가보다 이제 그 자신이 세운 <타이타닉>의 기록을 과연 깰 수 있을 것인가가 더욱 화제가 될 것이다.


ps1. 영화가 끝난 시간이 5시. 지하철 타고 사무실 오면서 지하철 안에서 쓴 기사(새 창으로 열기). 일단은 단평, 제대로 된 리뷰는 다시 쓸 예정. 어쩌면 두어 번 더 볼지도.

ps2.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 후반부의 전투씬들에 열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판도라 행성에서 제이크가 네이티리로부터 나비종족이 문화와 풍습을 익혀나가는 전반부가 훨씬 좋았다. 약육강식이 지배하고 있지만 '순리대로' 살아가며 균형을 지키는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나비족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후반부 전투씬은, 오히려 전투기가 불덩이가 돼서 떨어지며 나무들을 태울 때마다 보는 게 고통스럽더라. 내게는 '신나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씬'이 아니라 저 아름다운 곳이 다 망가지고 파괴되는 상실과 아픔의 전투씬이었다. 사실 그 전, 발키리 1.6 장면에서 아미 나비족의 거주지가 다 파괴돼버리는 바람에... 그 공중폭격씬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는.

ps3. 사실 한번도 제임스 카메론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여전히 리들리 스콧의 1편을 더 좋아하며, <터미네이터> 시리즈도 그렇게까지 열광하며 좋아하진 않았고, <타이타닉>은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바타>를 보고나서 든 생각은, "야 그냥 너 짱먹어라" 뭐 이런 느낌. 그리고 헐리웃에서 로버트 저멕키스와 함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기술오타쿠인 그의 그 집념의 장인정신은 인정해줄 만하다는 거.

2009/12/12 10:52 2009/12/12 10:52

잭 스나이더, 만세!!!!!  (당신이 <300>(새 창으로 열기) 바로 다음 작품으로 사고 한 번 칠 거라고, 난 이미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규!)

2시간 41분. 길다 =.= 어쨌든 잭 스나이더는 드디어 <왓치맨>으로 자신의 정체 증명을 했다. 영화 <왓치맨>은 만화 원작에 매우, 매우, 매우 충실하게 만들어졌는데, 항간에 보니 제작사가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영화로 만들'자는 걸 잭 스나이더가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고 한다. 감독은 영화로 말하는 법이라는데, 나는 이 감독이 <300>에 쏟아졌던 그 온갖 오해에도 불구하고 뚝심있게 그저 다음 영화로 자신의 정체를, 존재를 증명해 버린 것에 대해 존경과 흠모를 바칠 뿐이다. <300>이 미 제국주의와 이라크 침공을 합리화하는 영화라고 굳게 믿으며 불편해하던 분들이 <왓치맨>을 보고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죽겠다. 이분들은 사실 <새벽의 저주>부터 다시 보며 잭 스나이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완전히 뒤집는 힘든 작업을 하셔야 할 듯? 하지만 이것은 <새벽의 저주>부터 그를 지지해온 나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왓치맨>을 계기로 그의 영화들은 다시 한번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왓치맨>을 본 후에도, "잭 스나이더를 알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제껏 그가 연출한 영화 세 편은 모두 원작이 있는 작품들이었고, 그는 자신의 세계관이나 가치를 그렇게 간접적으로만 드러내왔다. 거기에, 단 세 편이다. 다만 그 세 편이 모두 어느 한 쪽으로도 도저히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두 진영의 지옥같은 대립과 전쟁들을 다룬 영화들이라는 점을 조금 되새겨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Watchmen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나?'


아 그래서 <왓치맨>이 어떠냐고?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릴 것 같다. 나는 매우 좋아한 쪽이었다. 사람들이 슈퍼히어로물에서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이 영화는 주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슈퍼히어로물을 보면서 잊거나 숨기고자 했던 주제들을 눈앞에 까발려버린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보며 심지어는 '매우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슈퍼히어로들이 '작전'을 나가 사람들을 구하는 장면이, 소영웅주의에 입각한 '영웅놀이'처럼 보이는데다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짓이고, 나아가 감독이 그들을 놀리는 듯한 뉘앙스까지 깔려있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왜 여자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여자 슈퍼히로인이라고 해야 하려나)가 하위문화에서 포르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영화 초반에 여자 슈퍼히어로 포르노 만화에 대한 농담이 삽입돼 있기도 하다. (이것은 원작에서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영화가 함의하고 있는 사회, 정치적 맥락은 심지어 <엑스맨>에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정치하며 복잡하다. 이 감독, 실은 알고 보니 대단히 지적인 사람이었다 @.@!! 아무리 원작에서 이미 다 다뤘던 주제라곤 해도, 그에 대한 감독의 이해가 떨어진다면 영화에서 이 정도로까지 일관성있게, 체계있게 풀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원작을 안 봤지만 원작을 '아주 잘' 옮겼다는 건 알겠다. 원작이 있는 작품들 특유의, 어딘가 배분이 이상해지고 이야기가 비어있는 듯해 원작을 찾아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래서 러닝타임이 이렇게 길어진 것이겠지만.

영화 속에서 악당과 주인공들이 드디어 맞붙게 됐을 때, 악당은 "야... 내가 무슨 코믹북에서나 나오는 슈퍼악당인 줄 알아?"라는 대사를 친다. (번역자막으로는 아마 '내가 그렇게 시시한 악당이냐?' 정도로 나왔던 듯?) 굉장히 진지한 농담인 셈인데, 맞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대사를 통해 "야... 현실이 그렇게 만만하고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줄 알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영화 속에 깔린 그 정치적인 콘텍스트 - 단순히 닉슨이 3선에 성공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했다는 가상역사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 를 따지고 든다면, 영화의 본격적인 리뷰도 길어질 수밖에 없겠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슈퍼히어로는 본래 민주주의의 적이다. 영화가 까발리는 건 그거다. 거기에 그 슈퍼히어로가 스스로 법의 집행자를 자처하고 나설 때 정치는, 세계는 완전히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슈퍼히어로의 법 집행과 통치에 거기에 박수를 치는 건 파시즘에 대한 동조다. 우리가 허구화된 슈퍼히어로물을 즐기고 있기는 해도 이게 현실에서 절대로 슈퍼히어로를 중심으로 한 정치가 일어나선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이 영화는 설파한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의 슈퍼히어로는 노골적으로 '미 제국주의' 그 자체다. 이건 비유고 뭐고 할 필요없이 눈앞에 직접 보여준다. 그러니 경찰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완전히 풍자되고 야유를 받는 건 당연하다. (이건 감독이 <300>에서도 했던 짓이다. 미국인이 감정이입할 스파르타 놈들은 골빈 머슬에 야만인들이 아니었던가.) 일단 단평은 여기까지.

2009/02/25 13:16 2009/02/25 13:16

발사진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조리개고 셔터스피드고 화밸이고 나발이고 걍 아무렇게나 셔터부터 눌러대는 버릇 때문에 저 모양 저 꼴이다. 뭐 못 찍으니까 강좌도 들으러 다니고 그러는 건데. 실내 시네토크 사진이 없는 건 한번도 참석을 못한 데다가, 안은 너무 어두워서 어차피 이것보다도 개판 오분전으로 나온다능. 아악 언제 돈 벌어서 밝은 렌즈랑 스트로보 사나효. ㅠ.ㅠ

2009/02/24 00:02 2009/02/24 00:02

억울한 역사의 피해자가 있다. 그런데 그는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과 다르다. 불쌍한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아닌, 자기 인생의 주체로 오히려 다른 이들을 끌어나가는 대상이다. 그때의 한과 상처가 너무다 아파 가끔 눈물을 흘리기는 하지만, 그 과거에 종속돼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힘차게 살아나가는 사람, 그렇기에 더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인 사람을 볼 때 과연 당신의 반응이 어떨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가 차마 공론화되지 못했던 상처와 통한을 드러내며 기록하는 영화였다면,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공론화된 그 상처와 통한을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이 영화 속의 주인공 송선도 할머니는 투쟁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갈 뿐 아니라, 놀랍게도 그를 돕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아픔은 물론, 영화를 보고있는 불특정 다수의 상처까지 치유해준다. 이건 송 할머니가 부처님의 미소를 가진 천사표 성인군자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송 할머니가 말하자면 '욕쟁이 할머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제의 그 엄청난 상처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삶을 열심히, 그리고 충실히 살아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돕는 사람들에게 마냥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100% 헌신을 '요구'하는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죄의식에 송구스러워하는 빚진 자들이 아니라 비로소 당당한 '동지'가 된다. 또한 이를 지켜보는 우리 역사 과거 역사의 희생자들을 볼 때 느꼈던 마음의 답답함과 역사에 대한 부담감 대신, 함께 싸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것인지 새삼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는, 우리가 역사의 피해자라는 사람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생각할 때 흔히 생각하는 장면들, 그러니까 억울한 사정의 피해자가 통한을 쏟아내놓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 함께 비통한 마음이 되며 까닭모를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 장면이 없다.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송 할머니의 주장, "두 번 다시 전쟁은 안 된다"는 말이 얼마나 생생한 감동을 주는지, 이 상식적이고도 명료한 주장이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할머니야말로 그 주장의 가장 설득력있는 '산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제목이 진정 무슨 의미인지, 얼마나, 얼마나 감동스러운 문장인지 새삼 느끼실 수 있게 되실 것이다. 오늘은 '리뷰어'의 입장에서 한 발짝 살짝 나가서 기꺼이 이 영화를 위한 '삐끼'가 되겠다. 개인적으로는, <워낭소리>보다 훨씬 재밌고 즐겁고 감동적으로 본 다큐멘터리였다. (나 변태 아니라능. 정말로 영화가 재밌고 즐겁고 감동적이라능.) 꼭 한번 이 영화를 보시기를. 2월 26일 인디스페이스, 미로스페이스, 시네마상상마당 등에서 개봉.

2009/02/22 12:58 2009/02/22 12:58

애초 이 영화가 그토록 회자된 것도 대런 아르토프스키나 마리사 토메이나 내용이나 소재 기타 등등 모두 다 제낀 채 오로지 '미키 루크' 때문이었다. 그래서 딱 그걸로만 말하자면.

맙소사, 눈물이 난다. 미치도록 눈물난다.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이 무식하고 육중하고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경멸스러운 이 사내가, 미치도록 안쓰럽고 눈물난다. 그리고 거기에 실제 미키 루크의 삶이 겹친다. 그러다보니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결코 이해할 마음도 없었을 이 사내의 그 주름지고 얼룩덜룩한 인생에 다시 한번 눈이 가고, 마음이 간다. 나아가 그는 내가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종종 악몽 속에서 보았던 나의 루저로서의 미래를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내고 있었다. 머리에 뭐 좀 든 인간이라면 다들 암흑기로 기억할 레이건의 80년대를 그리워하고, 철지난 그 시대의 헤비메탈과 디스코를 틀어놓고 "이게 진짜 음악"이라고 중얼거리는 이 촌스런 사내, 그 몸 구석구석에 새겨진, 저마다의 사연과 인생을 기억하고 있을 상처가, 온몸으로 흘려대던 피가, 아무리 참고 또 참으려고 해도 누선을 쑤셔댄다.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딸래미조차 벌레보듯 하는 이 실패한 인생의 사내가, 결코 동정할 마음이 없는데도, 그 모든 게 자업자득이라는 걸 나도 알고 심지어 그 자신도 아는데도, 그런데도 아프고 안쓰럽다. 심지어 마지막 링 위에서의 그는 마치 제왕같다.

결코 그를 사랑하게 되었노라 말할 순 없지만, 실패로 얼룩져 과거의 영광만을 그리워하는 그의 삶이 결코 후지다고, 더럽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 모든 과거의 영광도, 지금의 오욕도, 모두 오롯이 그의 것. 이 세상 모든 루저와 실패자와 패배자들을 위한, 찬가도 아닌, 마지막 장송곡. 그게 바로 <더 레슬러>다. 그의 연기에 대한 그 모든 찬사에 그저 묵묵히 동의할 뿐이다. 그 모든 게 '진짜'임을, 분명히 알겠다.


ps. 2/21 4:24am 추가 : <록키 발보아>(새 창으로 열기)와 비교할 것.

2009/02/20 18:59 2009/02/20 18:59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박용우는 자신이 맡은 역에 대해 '감정노동자'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도시에서 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정노동자가 아닐까, 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감정노동자에 해당하는 바로 그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도시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직군이 낮고 밑바닥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하고 싶다. 그렇게 본다면 '장르영화적 재미'를 기대하고 본 관객에겐 썰렁하고 낯선 이 영화, 실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계급전쟁에 대한 영화라 할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 그랬던 것처럼.) 연예인이라는 자산을 (일시적으로나마) 소유한 소자본가와, 가진 건 몸뚱이에 심지어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최소한으로나마 존중받을 권리마저 임노동에 저당잡혀버린, 우리 시대 새로운 최하층 노동자인 서비스업 종사자의 극대극 대결. 게다가 이들을 둘러싼 각종 첨단 통신기기들, 특히 '핸드폰'의 주요기능과 부기능이 개발해준 일련의 새로운 환경들은, 천박한 자본주의적 욕망이 꾸물대는 이 서울, 멀쩡한 사람들마저 분노 발작으로 또라이와 미친년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는 이 서울이라는 저주받을 도시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어떤 다른 영화들도 감히 따라오지 못할 만큼 생생하게 까발리고 있는 셈이다. 혹자들은 이 영화의 '지나친 PPL'에 눈쌀을 찌푸리기도 하지만, 글쎄, E마트야말로 대형화, 기업화가 가속화되고, 유통이 콘텐츠의 질마저 결정해버리는 이 기형적인 자본주의의 심장 서울을 드러내는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상징적이고,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 아닌가. E마트야 이 영화에 자기네 이름을 대거 노출시키게 됐다고 좋아했겠지만, 감독은 이 E마트야말로 우리의 더러운 욕망의 집합체이자 이것이 체계적으로 어떻게 착취되고 관리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시스템의 대표명사로 사용해 버렸다. (자본주의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일반적이면서도 꽤나 영리하고 효과도 높은 방식이라 해야 할까.) 그리고 이 공간의 '고객관리팀'에 일하는 감정노동자야말로, 그 시스템 안에서 이미 분노 바이러스에 단단히 감염된 좀비들의 분노 배설구로서 좀비 흉내조차 내지 못 하고 다른 좀비들에게조차 착취되는 최하층 좀비들인 셈이다. 그러니까 박용우가 우는 장면에서 실소를 터뜨린 관객들이라면, 대체로 조직 내에서의 밥벌이의 더러움과 서러움, 특히 3D나 비정규직, 혹은 알바인생의 피맺힌 한을 아직 채 못 겪었을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난 도저히 못 웃겠던데... 오히려 눈물이 나던데.


그렇다면 김한민 감독은 이런 사회고발적 성격을 애초에 의도하고 영화에 공을 들여 집어넣은 걸까, 그저 이야기에 치중하다 보니 소 뒷걸음치다 쥐잡은 격일까. 나는 전자라고 생각한다. 전작 <극락도 살인사건>에서도 그는 거대 제약기업(우리 실제 현실에서 이는 대부분 재벌에 속해있다)의 탐욕에 의한 착취라는 코드를 슬쩍 집어넣은 바 있다. 다만 <극락도 살인사건>이 장르영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충실하며 그 코드를 감추려 애썼다면, 그 영화에서의 성공에 자신감이 붙어서인지 <핸드폰>에선 좀더 노골적으로, 때로는 촌스럽게 직접 드러내는 부분이 많아졌다는 것인데, 영화의 아쉬운 부분은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직설법으로 소통의 도구는 발달했으나 정작 소통의 방식은 후퇴한 아이러니나 감정노동자가 당하는 착취의 부분을 고발하면서도 이에 대한 내용은 다소 붕뜬 면이 있으며, 이것이 다시 장르영화로서의 미덕과 살짝 겉도는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극락도 살인사건>에서도 그랬지만 인간에 대해 애초 전제돼버린 냉소, 그로 인한 무자비한 피범벅의 역겨움이 여전히 매니악하게 드러나 버린다. (님하 호러 코드는 그리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게 아니라능. 그런데 두 영화 다 스릴러로 시작해 호러로 맺다니, 댁도 고집 좀 센 사람이겠다능.)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2시간 20분이나 된다는 걸 극장에서 나와 시계를 보고서야 알았고, 이 정도면 사회고발 영화로서 충분히 점수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좀더 지적인 내공이 있었다면 영화도 한결 세련돼지면서 더욱 엣지해졌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지만은... 뭐 아직 젊은 감독이니까... 평자들 사이에서 평이 엇갈리는 것도 바로 이 지점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영화를 '읽는' 사람들이 이 부분을 충분히 제시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ps. 그런데... 이런 영화를 보고나오는 와중에 사람이 너무 많아 정체되는 걸 '빨리 가라고' 밀치는 간이 배밖에 나온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겁이 없는 작자들인지 모르겠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그렇게 밀침을 당하고 넘어질 뻔하는 와중 새치기까지 당한 뒤에, 새삼스레 엄태웅에게 잔혹하게 복수하는 박용우로 나도 변신할 뻔했다능. 가뜩이나 분노 바이러스를 잔뜩 자극받고, 그럼에도 그거 함부로 분출하면 안 되겠다 교훈을 얻고 나온 직후에...

ps2. 제일 놀란 건 역시 박용우였는데, 이 사람... 어째 주연급 된지 오래인데도 본인이 조연급 캐릭터에 더 만족하는 것 같아. <원스 어폰 어 타임> 때도 '자뻑 장면'에서 영 스스로 민망해하는 것 같더니만. 하여간 이 사람의 필모그래피를 보다보니, 참 재밌는 행보를 가고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ps3. 2월 19일 목요일 오후 3시, 추가 : 이 영화에서 영상통화니 녹음이니 하는 핸드폰의 각종 부가기능들을 척척 사용하는 주인공들이 조금 경이로웠고, 20대 때만 해도 새로운 기계들의 기본적인 기능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어른들을 살짝 비웃은 적도 있었는데,... 방금, 30분간에 걸친 중요 통화를 하면서 그 전에 녹음 기능을 분명 확인했음에도, 통화 끊고 보니 전혀 녹음이 안 된 것을 발견... 나 녹음되는 거 믿고 메모도 안 했단 말이다! ㅠ.ㅠ

2009/02/18 23:57 2009/02/18 23:57

조나단 드미가 이런 식으로 귀환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살짝 충격이었다. 90년대 뉴욕 독립영화 스타일이잖아. 그때 뉴욕 독립영화들의 스타일이란 것도 꽤나 다양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꽤 전형적이다. 좀 거칠고 투박하고, 일부러 헨드헬드 카메라 많이 써서 많이 흔들리고 그래서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고, 심지어 음악도 따로 밖에서 입힌 거 없이 다 화면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연주할 때 나오는 곡들 뿐이고, 화면 입자도 좀 거친 것 같은, 대신 주인공한테 카메라가 아주 가까이 밀착해 들어가며 극클로즈업 화면도 많은, 그리고 이야기 규모는 가족, 혹은 딱 몇 명으로 한정된 아주 작은 영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낡았다는 건 아니고, 영화는 꽤 감동적이었다.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이가 또한 그 가족의 일부라면, 그 봉인된 과거를 과연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 그를 향한 애증의 울타리 사이에서 대체 어떡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또 상처를 가한 이는 그 치명적인 죄책감과, 그럼에도, 가족에게서까지 미움받고 내쳐지지고 싶지는 않아 절박하게 매달리는 심정, 사이에서 헤매게 되고, 또 그런 이들이 가족 경사를 맞아 잠시나마 함께 지내며 서로 애정을 표하면서도 또 부딪히고, 상처주고 상처받고, 또 죄책감을 느끼고, 하는 그 세세한 과정들을... 조나단 드미는 카메라를 매우 가까이 배우들에게 가져다 대면서도, 정작 감독 자신은 그들에게 섣불리 개입하지 않은 채 그들 내면의 그 심리를 누구에게도 치우침없이 조근조근 풀어낸다.

대체 얼마나 잘했나 궁금증을 일으킬 정도로 미국에선 앤 헤서웨이의 연기에 대해 호들갑을 떨어댔는데, 보고나니 그럴 만했구나 싶다. 잘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틴에이지용 로맨틱 코미디로 시작해 20대용 로맨틱 코미디를 하던 예쁘장하고 팬시한 여배우가 다른 연기도 곧잘 한다는 걸 증명했을 때 격려하는 차원에서 더 박수를 보내는, 그런 종류의 찬사도 덧붙여진 듯. 언제나 이 배우 얼굴이 참 재미있게 생겼다고 생각했고, 그 지나치게 큰 눈 때문에 팬시한 로맨틱 코미디 여주인공 외에 다른 역을 맡는 게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잘해내더라. 그럼에도 역시 인형 같은 분위기가 나는 건 사실이기도 하고. 극중에서 "재활원에서 살이 쪘다"는 대사를 다섯 번 정도는 하는 것 같던데, 그래서 일부러 살을 찌운 것도 같고, 또 원래 기자와 평론가들이란 배우가 일부러 살을 찌우거나 빼거나 혹은 다른 식으로 외모에 소위 손상을 가하거나 하면 급 호감을 나타내며 또 가산점을 주는 버릇들이 있기 때문에. 앤 헤서웨이의 언니로 나온 로즈마리 드윗과 아버지 역으로 나온 빌 어윈 연기도 좋았고, 오랜만에 얼굴을 본 데보라 윙어도 무지 반가웠다. 이제 많이 늙긴 했지만 아이고 그래도 여전히 고우시더란.

Rachel Getting Married

2009/02/14 00:57 2009/02/14 00:57

한줄평 : 베티 프리단의 역저 [여성의 신비(새 창으로 열기)]가 나온 배경을 생생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중산층'이란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단순히 사회계층을 지칭하는 것 이상이다. 포디즘(포드주의)이 정점을 찍으면서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소비의 증가를 통해 노동자들이 중산층으로 안정을 누렸던 시기는 포디즘이 처음 등장한 1910년대가 아니라 1950년대에서 60년대였다. 그러나 이 때가 과연 행복한 시대였냐 하면, 그건 아니다. 재즈의 시대(Jazz Age : 1920년에서 1929년까지, 혹은 세계1차 대전 직후부터 뉴욕 증시 폭락까지)에 반짝 등장했다가 대공황과 전쟁으로 잠시 유예됐던 물질주의와 소비 향락 속에서 중산층은 안정과 함께 권태와 무력감을, 그리고 지리멸렬한 자기혐오 등을 경험하게 된다. 자본과 물질과 소비에 대한 정신의 패배, 라고 해야 할까. 이를 풍자한 조지 로메로 감독의 좀비 3부작, 그러니까 <리빙 데드> 혹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X> 시리즈의 첫 작품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처음 나온 게 바로 이 영화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해로부터 13년 후인 1968년이다. 참고로 미국의 50년대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고르라면 '매카시즘'이 될 것이다. 매카시 광풍은, 또 한편으로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 중산층 혹은 그 위로 계급이동을 하기 위해 소위 애국심을 무기로 기존의 기득권자들에게 도전했고 이를 일정 정도 성취했다는 측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특히 이 시기는 소위 '현모양처'로서 가정에만 충실하던, 그러나 제대로 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수많은 중산층의 여성들이 이유없는 무력감과 우울증, 히스테리를 호소하던 때였다. 물론 당시는 이것이 그저 개인의 특성처럼 치부되었지만, 이 현상을 연구하던 한 심리학자는 이것이 그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중산층 여성 일반에게 나타나는 대단히 공통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임을 밝혀내는데, 그 학자가 바로 베티 프리단이고 그 연구의 결과서가 바로 미국에서 제2의 페미니즘 운동을 일으켰다고 평가받는 [여성의 신비]다. 그리고 이 시기의 불안하고 어두운 면들을 속속들이 잡아내고 묘사해낸 영화가 바로 <레볼루셔너리 로드>다. 영화 안에서 이 작품의 배경이 1955년이라고 명시되고 있기도 하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사랑에 빠져 결혼한 프랭크(리어나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이 교외에서 살며 지리멸렬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둘이 처음 만나던 순간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만남과 사랑, 결혼 등에 관해 별다른 시간 할애 없이 곧장 아이 둘 낳고 살고 있는 7년 후를 보여주며, 이들의 과거는 간간히, 극히 짧은 대사나 플래시백으로만 제시될 뿐이다. 적당히 바람을 피우거나 성질을 내며 싸우는 이 부부가 연애 시절의 불꽃을 되찾는 것은 파리행을 결심하고서다. 에이프릴의 열정적인 제안에 설득당한 프랭크는 에이프릴과 함께 잠시잠깐의 행복과 혼연일체감을 느끼는데, 이들의 짧은 행복은 승진을 제안받은 프랭크의 망설임과 에이프릴의 임신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프랭크는 에이프릴의 임신을 '무기'로 사용하며 파리행을 포기할 것을 에이프릴에게 설득하고, 심지어 에이프릴을 비난하며, 그들이 함께 꾸었던 꿈을 삽시간에 짓밟는다. 낙태를 고려하는 그녀를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모는 심중엔, 정말로 생명에 대한 배려가 있다기보다는 물질적 성공과 사회적 출세에 대한 욕망과, 그녀를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모든 윤리적, 도덕적 판단과 그에 대한 책임까지도 에이프릴에게 미루는 비겁한 면모를 보이면서까지 그가 지키고 싶었던 자존심과 권위란,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당시에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이었을 것이다.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란, 남자들에겐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지켜야 할 신성한 무엇이다. 여자가 아름다움과 사랑받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든다면, 남자는 가족을 부양하는 경제력과 가장으로서의 권위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그것이, 오랫동안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통제되던 사회에서 일반적인 남녀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몇 가지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아내를 사랑하는 좋은 남편이라 스스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시하는 에이프릴에게서 정말로 상처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지금의 눈으로 프랭크를 일방적으로 손쉽게 비난하기보다, 당시의 기준을 고려해 프랭크의 심리를 추측해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프랭크는 여전히 속물적이고 비겁하고 나쁜 놈이긴 하지만.

Revolutionary Road

지나치게 과시적이라 짧게 끝날 수밖에 없는 부부간 행복과 일체감.

중산층의 이런 신기루같은 일상은 두 부부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건 아니다. 다른 이에게 호들갑스럽게 친절하고 소위 교양있는 젊은 부부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내며 남편을 휘두르는 헬렌(캐시 베이츠의 놀라운 연기!)은 실제로 남편에게 무시를 받으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병 때문에 '현모양처로서의 실패감'을 컴플렉스로 안고 살아간다. 프랭크-에이프릴 부부와 친구로 나오는 셰프-밀리 부부 역시 겉으로 금슬좋고 평화롭지만 공허한 가족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건 마찬가지. 밀리는 남편도 자유를 꿈꾸며 자신을 낯선 세계로 데려가려 할까 봐 겁을 내고, 그러면서도 남편의 눈치를 보기에 바쁘고, 셰프는 자신의 꿈과 소망을 속으로만 은밀히 판타지로 남겨둔다.

아마도 영화를 보는 이의 성별에 따라 아마도 감정이입의 대상이 다를 것이다. 샘 멘데스 감독은 프랭크(리어나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 둘의 꿈과 사랑과 갈등과 대립을 묘사해 내는 듯하다. (남자 관객의 반응을 듣고 싶다.) 여자 관객인데다 삼십대 중반이 되도록 여전히 소위 '철없이' 살고있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에이프릴에 전적으로 감정이입해서 보았고, 에이프릴의 꿈과 희망이 다소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은 십분 인정하더라도, 그녀에게 파리가 구체적인 지명이라기보다는 중산층의 현모양처라는, 그 보이지 않는 유리벽의 갑갑한 굴레를 벗어나 도달하고픈 곳의 일종의 '상징'이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 직설법 대사로도 드러나 버리기는 하지만. 이후 그녀를 집에 잡아두려는 프랭크의 설득과 위협이 과연 어떻게 에이프릴을 '정신병자'로 만드는가. 그 패턴은, 베티 프리단이 연구했던 주제를 그대로 눈앞에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결국 에이프릴이 선택한 위험한 행동 역시,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격렬하게 외쳤던 권리와도 명백한 연관이 있다. 

둘이 직접 맞붙어 (원래대로라면) 불꽃같은 전쟁을 벌이는 장면도 나오는데, 케이트 윈슬렛의 포스에 못 미치는 리어나도 디카프리오 연기가 좀 안타깝다. 케이트 윈슬렛은 역시, 가슴 속에 불꽃을 안고 살아가며 시대와, 혹은 주변과 불화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 가장 빛나고 에너제틱하다. 사실 데뷔작 <천상의 피조물들>부터 그녀가 맡았던 역은 거의 언제나 그랬다. 심지어 <센스, 센서빌리티>에서도 그녀의 마리앤은 '여염집 규수'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조신한 행동거지 대신, 사랑하고 느끼는 대로 거침없이 행동하는 캐릭터이지 않는가. 겉모습은 단아한 옷차림의 중산층 주부지만 가슴 속에 천불을 안고 사는 열정적인 에이프릴은 케이트 윈슬렛에게 그야말로 적역의 캐릭터다. 반면 '두 딸을 거느린 아버지' 리어나도 디카프리오는 어쩐지... 좀...

샘 멘데스의 연출은, 아무래도 그가 연극연출가로서 더 명망이 높다는 사실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장면 장면이 어쩐지 대단히 연극적으로 보인다. 심지어 거실과 식당을 유려하고 요란하게(...) 그리고 컷 없이 오가는 카메라 워킹에서도, 나는 어쩐지 프로시니엄 아치를 벗어나지 못 하는 갑갑함을 많이 느꼈다. 이건 한편으로는, '중산층의 집' 안에 갇힌 주인공들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더없이 어울리는 연출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영화로서의 미덕이나 장점이 상당 부분 무시되는 듯한 느낌이기도 해서 뒷맛이 개운하지도 못 하다. 연극을 그대로 영화로 옮겨온 듯한 느낌이 드는 수많은 영화들, 예컨대 최근에 본 <다우트>의 경우에도 그런 연극적인 특징들이 개운치 못 하다거나 답답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느껴지진 않았는데, <아메리칸 뷰티>에서도 그랬지만 샘 멘데스의 연출엔 어딘가 모르게 사람 참 깝깝하게 만드는, 그리고 인공적으로 갈등이 압축된 듯한 느낌이 좀 있다. 하지만 이건 <로드 투 퍼디션>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지어 말하기에는 좀 위험한 점이긴 하고...

그런데 이 영화가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에 대한 굉장한 해설서 기능을 하기는 하지만, 역시 만든 이가 남자라는 점은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에이프릴의 열정을 이해하거나 존중하는 사람들은 어째 모두 남자들뿐이란 게, 내게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만든 감독 입장에서는 전혀 어색하거나 걸리는 점이 없었을 듯.

(근데 무슨 단평이 이리 기냐능? ㅋㅋ)

2009/02/13 03:26 2009/02/13 03:26

사랑에 빠져 결혼한 신혼부부가 우연히 개를 키우게 된다. 그런데 이 개가 또 유독 지독스럽게 말썽과 사고만 치는 개다. 도저히 적응 안 되는 이 개한테 그래도 정 붙인답시고 온갖 고생을 다 하는 와중에 부부는 수많은 일을 겪는다. 아이를 사산하기도 하고, 진로를 바꾸고, 직장을 옮기고, 임신에 성공해 아이를 낳고, 또 낳고, 실수로 하나를 더 낳고, 이사도 한다. 그렇게 서로 나이를 먹어가며 '가정'을 이루고, 함께 살아가고,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이야기. 그리고 사람보다 빨리 늙는 개를 보내며, 죽음도 함께 하는 가족의 이야기다. 

<말리와 나>는 그렇게 제니와 존 부부가 세 아이를 낳고 기르고 나이가 들어가는 아웅다웅 살아가는 일상을 '개 키우기'라는 소재를 통해 펼쳐놓는 얘기다. 말썽쟁이 개 때문에 벌어지는 코믹한 에피소드는 주로 영화의 전반부에 포진돼 있고, 그 사이사이 부부의 일상사가 끼어들더니, 어느새 부부의 가족 이야기가 전부를 차지한다. 하긴, 그게 맞을 것이다. 이들의 말썽쟁이 개, 말리는 그저 개가 아니라 함께 지낸 시간이 쌓일수록 점차 이들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어가니까 말이다. 때로 힘들고 어려워 화를 내고 싸우고 울고 하더라도, 이들은 '가족'이기에 어려운 시간을 함께 도우며 헤쳐나간다. 그래, 결국 '가족' 이야기고,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이다. 다만 유머감각과 글줄 쓰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손에 의해 맛깔나는 이야기로 씌여졌다가, 솜씨 좋은 감독의 손에서 다채로운 희로애락의 삶의 빛깔을 가진, 재미있고 웃기며 찡한 '영화'가 됐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함께 시간을 견디어 가며 나이를 먹고 서로 성숙해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그것이, 여신보다는 이웃집 소녀 같았던, 그리고 이제 우리처럼 얼굴에 주름살을 하나둘 새긴 제니퍼 애니스톤과, 불미스런 사건 이후 한결 순하고 차분해진 표정으로 돌아온 오언 윌슨의 모습이어서 더욱. 그들을 개인적으로 아는 게 아닌데도, 어쩐지 역경과 시련을 헤치고 함께 시간을 지나온, 함께 나이를 먹고있는 동지와 같은 느낌이 든달까. 영화의 마지막 엔딩에서 동물을 전혀 키워본 적이 없는 나도 눈물이 찔끔, 났다. 아마도 동물을 키워봤고, 특히 죽음을 겪었던 이들이라면 이 영화가 더욱 남다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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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동물을 키워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길에서 유기견이나 유기묘를 봤을 때 반응이 다르다. 예컨대, 몇 년 전에 알던 어떤 사람은 자기 아파트 근처에서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해 며칠 음식을 챙겨 갖다주더니, 그예 새끼묘 한 마리는 집에 가져가고, 자기 직장 동료들에게 말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 사람들에게 나머지 새끼묘들을 키우도록 나눠주었다. 그는 이미 당시에 한국에도 출판된 [말리와 나]를 읽으며 펑펑 울곤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우연히 길에서 상처입은 유기견을 발견하곤 일단 병원에 데려가 치료부터 받게 한 후 집으로 데려갔다. 자신이 키울 처지는 아니었기에, 열심히 주변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개를 맡아줄 사람을 찾아냈다. 내게는 그런 감정이나 행동이 경이로운 종류의 것이다. 만약 내가 조그마한 아이들이 꼬물락대는 걸 봤다면 안됐다 여기기는 해도 음식을 챙겨다 줄 생각까지는 아예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런 불쌍한 동물 자체가 내 눈엔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저 지인들의 행동을 목격한 이후 동물에게 관심을 아주 조금 갖게 된 게 변화라면 변화일까. 결국 그런 감정도 '학습'을 통해 배우고 고양이 가능한 듯하다. 물론 확실히 배우기 위해서는 결정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이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싸이코패스라 부르는 사람들 중 일부도 실은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감정을 배울 기회가 아예 없었던 건지도, 어쩌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2009/02/11 10:28 2009/02/11 10:28

<문 프린세스 : 문에이커의 비밀>은 여러 모로 <판의 미로>와 닮은 구석이 있다. 어린 소녀가 부모 중 한쪽 혹은 양쪽을 잃고 새로운 환경으로 이사하여 부적응의 기간을 갖는다. 우연히 낯선 이의 '미션'을 받고 그녀는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곧 그 미션의 모험에 임하게 되며, 결국 자신을 희생해 미션을 수행하며 다른 이의 목숨을, 혹은 세계를 구한다. 특히 이들은 '달'의 정기를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달 부분을 제외하고 이는 실은 훝한 영웅신화 및 이의 변용인 판타지 소설들의 모범 플롯이기도 한데, 우리나라 바리데기 설화에서도 드러나듯 주인공이 소녀인 경우 '희생'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문 프린세스 : 문에이커의 비밀>이 <판의 미로>를 닮았다기보다는, 두 작품 모두 전통적인 판타지 플롯(이것은 다시 영웅신화의 플롯의 변형이다)을 따르는 데에서 공통점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 1947년 영국에서 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를 만들었던 가버 추보가 연출을 맡았는데, 극장에 걸리는 둥 마는 둥 하고 사라졌던 이 영화는 뒤늦게 작품을 본 팬들에 의해 양 엄지 모두 치켜올린 평을 받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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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 프린세스 : 문에이커의 비밀>은 다소 실망스럽다. <황금나침반>에서도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소녀를 연기했던 다코타 블루 리처즈는 이 영화에서 단조롭고 뻣뻣하기 짝이 없는 연기를 보여주며, 영화의 리듬은 종종 길을 잃은 채 툭툭 끊긴다. 소녀가 마침내 문에이커 영지의 비밀을 알아내기까지, 영화의 전반부가 너무 길고 지루한 반면, 나머지 시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별 성의없이 건성으로 비약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볼 만한 것이라면 주인공 마리아 역을 맡은 다코타 블루 리처즈가 입고 나오는 고전미 가득한 의상과, 오랜만에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나타샤 멕켈흔 정도. 물에 빠진 다코타 양을 업은 유니콘들이 바다에서 유니콘들이 파도를 타고 떼로 달려오는 장면은 이 영화가 야심차게 준비한 '스펙터클 볼거리'겠지만 이야기가 이렇게 툭툭 끊기는 영화에선 오히려 실소를 자아낼 정도. 아쉽다, 소녀가 주인공인 탄탄한 판타지는 과연 언제쯤 나오려나. 개중 <잉크하트>가 그나마 나았던 듯(하지만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소녀보단 그녀의 아버지 브렌든 프레이저가 주인공.)

2009/02/10 12:38 2009/02/10 12:38

어제월요일 밤에 <타이드랜드> 일반시사회에 참석을 하기는 했는데, 일단 시작을 놓쳤고, 앉은 자리가 스피커 때문에 화면이 가려져서, 자포자기하고 그냥 자버렸다. 하여 리뷰도 단평도 아직은 쓰기 어렵고, 그저 반쪽자리 수다나 떨어볼까 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게 화요일이라 요일 표기에 문제가 있었다.)

1. 적어도 내가 확인한 장면들에만 의한다면 <타이드랜드>를 표현할 한 단어는 바로 이것이다, 밑을 긁어보시라.

똘.끼.충.만

도중에 사람들이 나가버리고, 끝나고나서도 여기저기서 한숨과 원망의 짜증이 들린 게 당연했다. 판타지인 줄 알고 애를 데리고 온 부모나 월요일부터 회사에서 퇴근하고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와 피로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자 했던 직장인들에게 이 영화는 거의 악몽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12 몽키스>의 브래드 피트나 <브라질>의 조너선 프라이스한테서 엿보이듯 원래 테리 길리엄 감독한테 똘끼가 좀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작정하고 똘끼를 끝까지 밀어부쳤다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아빠가 애 앞에서 버젓이 마약주사를 준비하고, 그걸 열두어 살짜리 애가 '숙달된 조교'의 손놀림으로 아빠 팔뚝에 놔준다고 생각해보라. 심지어 그애는 편하게 취해있으라고 아버지 팔도 머리 위로 올려주고 옆에 거슬리는 물건도 치워주고 다리도 의자 위로 펴준다. 기겁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정신지체인 성인 남성과 어린 여자아이 사이에 성적인 코드가 묘사된다고 할 때 그걸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애가 보는 앞에서 사람 시체, 그것도 애 아버지의 시체를 박제로 만들기 위해 배에 칼을 꽂는 건?  이 정도면 법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거의 아동학대 수준이지 싶다.

2. 그래서 이 영화가 완성도가 이상한 졸작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과잉'의 측면이 없지 않지만, 내용 자체가 애의 기괴한 현실과 더 기괴한 판타지가 섞여들어가는 내용이고 그걸 표현해내는 수단으로 '과잉의 비주얼'을 선택한 거라면, 그 선택은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이 스타일에는 나름의 일관성과 원칙이 보이고, 보기에 따라서 사람 억장을 무너뜨리게 만들 수도 있다. 반토막만 보고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내가 본 부분들은 이 아이가 아무리 끔찍한 상황에 처했다 한들 그것을 아이다운 천진난만함과 상상력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겐 악몽일지 몰라도 제대로 보살핌받지 못한 데다 사회로부터 격리돼 있는 이 아이에겐 총천연색의 천진난만한 꿈의 세계이자 현실인 셈이다. 이 아이의 현실과 꿈을 우리가 '악몽'으로만 인지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또 다른 편협함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악몽'으로 느낄 수밖에 없으며 이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편협함이야말로 테리 길리엄이 그토록 드러내고자 한 대상, 목적하고자 한 대상일 수도 있다.

Tideland

3.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 성적코드에 대해 말하자면, 이건 정신지체인을 등장시키고 성을 다루는 텍스트들이 응당 주기 마련인 익숙한 그 혐오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그 혐오감을 떠올리며 몸을 떠는 관객들을 멋적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유는 주인공인 여자아이 질라이자 로즈와 정신지체인 딕킨스, 두 당사자들은 너무나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순수하게 발현되는 형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되지않게 어른의 세계로 아이의 세계를 억지 흉내를 내는 형태도 아니다. 이들은 분명 자기 인생의 어른들의 행위를 모방하고는 있지만, 그 행위는 채 사회화된 방식(그러니까 관습을 인지하고 그것을 좇는 방식)이 되지 않은 형태로 자신들의 진심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어린아이의 (덜 억압된) 무의식적 성의 측면과, 성인이지만 정신지체를 겪는 억압된 성의 측면이 충돌하여 어느 한 지점으로 수렴된 형태,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은 형태로 드러나는 측면이 있다.

4. 영화의 분위기가 급반전되는 건 영화의 말미, 기차사고가 나서다. 처음으로 소위 '정상적인' 어른이 등장하면서, 아이의 몸을 한 여신은 비로소 아이로 돌아간다. 여기서 '정상적인 어른'이라 함은, 아이를 보았을 때 당연히 그 아이를 걱정하고 보살필 줄 아는 어른을 말한다. 이 아주머니는 손지갑에서 귤을 꺼내 그냥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까서 건네준다. 아이는 아주머니의 품에 안겨 귤을 먹으면서, 대규모 기차사고로 탈선이 된 그 지옥의 현장에서 비로소 평안을 찾는다. 물론 그래서 앞으로 그 아이의 삶이 비로소 제 궤도를 찾을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5. 제니퍼 틸리와 제프 브릿지스가 각각 아이의 부모로 짧게 출연한다. 주인공을 맡은 조델 펄랜드는 <사일런트 힐>에 나왔던 지금 15살의 소녀인데 연기가 아주 섬뜩할 정도다. 아이의 외모에 아이와 어른의 분위기가 같이 있으면서 너무나 아이스러운 천진함을 그대로 표출하는, 아주 신기한 아이다. 다코타 패닝이나 엘 패닝이 '더없이 사랑스럽고 깜찍한' 분위기로 천재 소리를 들었다면, 이 아이는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외모 안에 그로테스크하고 미스테리한 매력으로 천재 소리를 충분히 들을 만하다.

결론 : 영화 개봉하면 반드시 제대로 다시 보자.

기타 : 미치 컬린의 원작소설(새 창으로 열기)이 국내에 출간돼 있다. 참고로 이 작가는, 홈즈 트리뷰트 소설로 늙고 연약한 홈즈를 등장시켜 홈즈 팬들로부터 어마어마하게 욕을 들어먹은 [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새 창으로 열기)]을 쓴 바로 그 사람이다.

2009/02/05 20:04 2009/02/05 20:04

Highschool Musical 3 - Senior Year

고교 농구챔피언쉽 대회의 결승전 시합, 시즌 마지막 경기 16분을 남겨두고 우리의 주인공 팀은 무려 20점 가까이 뒤져있는 상태다. 잠시 작전타임이 있은 뒤 주인공과 농구팀원들은 뮤지컬 씬을 선보인다. 그런데 이 씬이 재미있다. 이 씬의 안무는 인위적인 춤들이 아니라, 철저하게 농구 시합 와중 선수의 움직임이 음악과 노래에 맞춰 짜여졌다. 소리를 죽인 채 설렁대며 보면 이 씬이 노래부르며 춤추는 씬이라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이들의 움직임은 자연스럽다. 고작해야 마지막 골의 순간, 우리의 주인공을 향해 응원과 다짐을 주고받는 남녀 주인공의 짤막한 이중창이 있을 뿐. 이 장면은 곧 손에 땀을 쥐는 역전극으로 이어진다. 시작부터 사람 눈과 귀를 확 휘어잡는 안무와 노래와 카메라다.

내용이야 미국 고3들의 관심사, 그러니까 졸업파티와 진로와 연애가 다인데, 이걸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엔터테이닝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재주고, 원래 시리즈의 3편임에도 1, 2편(이 두 편은 TV용 영화로 공개됐고, 3편만 극장판이다.)을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도 재주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한동안 면면이 이어지다가 <브링 잇 온> 이후로 맥이 끊기다시피 한 명랑발랄한 틴에이저물의 계보를 아주 상큼하게 다시 이으면서 동시에 "틴에이지물의 진화"라고까지 부를 수 있을 만큼 형식의 면에서 한 단계 도약했다. 일단 오리지널 영화용 뮤지컬이라는 것도 신선할 뿐만 아니라, 쇼 뮤지컬의 전통을 가져오기 위해 극 중 극, 정확히 말하면 영화 속 무대 뮤지컬의 형식을 가져가면서 극 중 인물의 현실 이야기가 극 중 극의 이야기가 되는 만큼 영화와 무대를 자유자재로 교차시키는데, 이는 단순히 영화와 무대를 결합하거나 단순히 병치한 것이 아니라 이 둘의 변증법적 '합'의 형태를 도출해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뮤지컬 공연 / 영화의 오래된 관습, 그러니까 갑자기 멀쩡히 잘 있던 주인공한테 스폿라이트가 비춰지며 말로 해도 되는 걸 굳이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것을 극 중 공연의 장면으로 한정시킨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런 관습을 극 중 극의 형태에는 수용하되 이 영화 자체에선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들은 모두 이들의 공연 '연습' 장면으로 화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뮤지컬 관습에 대한 재미있는 농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일정 정도 메타-뮤지컬의 성격까지도 드러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애초 이 배우들이 1편에 캐스팅될 때는 대부분 10대들이었다는데, 고작 그 나이의 아이들이 그런 예쁜 외모들을 가진 주제에 심지어 이 정도의 쇼맨쉽과 노래, 춤, 연기를 소화할 수 있다는 것도 쇼 엔터테인먼트가 상당한 정도로 숙성한 문화에서만 나올 수 있는 상당한 공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브로드웨이의 전통을 적극 수용한 헐리웃에서만 나올 수 있는 고도의 엔터테이닝 쇼인 셈이다. 배우들 하나하나가 나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어린 나이에 너무 뛰어나다. 특히 주인공 트로이 역의 잭 에프런, 요놈 아주 물건이다. 이쁘고 잘생기고 몸매좋은 놈이 노래도 춤도 잘 하고 연기까지 잘 하면 대체. <헤어스프레이>에서 링크 역으로 나왔던 그 예쁜 놈인데, 이제보니 링크 역은 <하이스쿨 뮤지컬> 시리즈의 트로이의 인기와 후광에 덧댄 배역이지 싶다. 이 녀석과 여자친구 가브리엘라 역의 바네사 앤 허진스가 함께 듀엣을 하는 장면이 많은데, 그때마다 청춘의 첫사랑을 진하게 앓는 녀석들 특유의 반짝반짝한 빛과 수줍고 달뜬 열정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눈이 아주 반짝반짝 빛나며 진짜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과 웃음과 표정이 나온다. 그래서 더욱 영화가 예쁘다. 아니나 다를까, 둘은 실제로도 사귀는 사이란다. 사라 미셀 겔러(버피!)를 살짝 닮은 샤페이 역의 애쉴리 티스데일은 고난도의 완숙미를 선보여야 하는 쇼 뮤지컬 장면을 그만하면 썩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컬킨 가 아이들을 살짝 닮은 라이언 역의 루카스 그래빌도 살짝 게이삘을 내보이며 훌륭한 쇼맨쉽을 펼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강추! 결론은 쇼 머스트 고 온!

2009/02/02 23:41 2009/02/02 23:41

Doubt

그러니까 영화의 줄거리가 아무리 소박해도, 불꽃튀는 배우 둘(... 셋이기도 하고...)을 붙여놓으면 이렇게까지 스펙!따!끌! 해질 수 있다는 거. 게다가 이 정도면 연출도 아주 좋고. 원래 연극인 작품, 꽤 훌륭하게 영화로 옮겨놓은 건데, 정말 배우들이 훌륭하시니 영화가 번쩍! 번쩍! 막 광채를 발한다. 오죽하면 영화 끝나고 우연히 만난 다른 매체 기자랑 같이 본 우리 객원기자랑 해서 한 시간이 넘게 수다를 떨고 앉았어, 영화 감탄하느라;;; 원래 메릴 스트립은 거의 매년 아카데미상에 그저 예의차 후보가 올려지는 편이었지만 이 작품에선 정말 고개가 절로 흔들릴 정도로 미친 연기를 선보이신다. 케이트 윈슬렛이 못 타도 앤 헤써웨이가 못 타도 메릴 스트립이 오스카 여우주연상 가져간다면 내 두말 못 하고 그냥 닥치고 박수칠 거다. 게다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앙앙앙 우리 곰돌이 아저씨 어쩜 여기서도 그렇게 연기를 잘 하시나효. 이 아저씨 아무리 표정은 순둥이에 이따만큼 배나오고 해도 걍 막 왕쎅시 왕귀염일 수밖에 없다능. 연기를 이렇게 잘 하시는데. 게다가 젊은 수녀 에이미 아담스도 참, 발군이더라. 거기에... 난 사실 밀러 군의 어머니가 짧게 한 씬에서 나오는데 길 걸으면서 메릴 스트립과 대화나눌 때 우와, 정말 뻑 갔다. 그러니까 진짜 타짜인 배우가 진짜 제대로인 연기를 선보일 때 가슴 한줄기에 서늘하게 바람이 부는 거, 이 영화에선 어째 한 씬 조연이 나올 때도 부냔 말이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게, 아마 이 아줌마도 골든글로브에선가 조연 후보에 올랐었지, 단 한 씬인데. 사람 눈이 다 거기서 거기구나 싶기도 하고. 한줄기 눈물 주룩 흘리면서 뭐라뭐라 말하는 그 장면 진짜, ...

영화 내용도 사실 상당히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그러니가 뭐야, 확신과 의심과 의지 사이에서 사람 일이란 게 이럴 수도 있구나 싶은 게. 난 이 영화가 끝내 바로 그때 그 사건을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게 탁월한 선택이었고, 실은 그거야말로 이 작품의 본질이었는데 영화로 매체가 옮겨지면서도 그 본질을 잘 지켜냈다고, 진짜 막 감탄하고 박수치고 싶다. 그래, 지 믿고싶은 대로 믿는 게 사람인기라. 난 여전히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메릴 스트립의 그 마지막 장면, 그 울음 터뜨리는 장면은 진짜...

아아 제발 두르두르들 보고들 배우셈. 이런 각본은 진짜 닥치고 배워야 한다. 고맙습니다, 여러분들, 이런 영화를 보여주셔서. 전 이 영화로 오늘 하루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ps. 김혜자 주연으로 국내에서도 막이 올려진 적이 있다. 확실히 마지막 장면에서 부감숏으로 그렇게 끝나는 건 연극 원작답더란.

2009/01/31 03:46 2009/01/31 03:46

대체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제발 이 따위 필름뭉치를 '영화'랍시고 만들지 말아달란 말입니다. 그건 영화에 대한 모독이라고요.

마린보이

가뜩이나 수면부족에 시달리는데 내 이 따위로 시간낭비해야 쓰겄나.


아니 뭐 처음 40분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 조금 껄렁할락 말락하는 김강우가 딱히 나쁜 것도 아니었고 참 필사적으로 이쁜 척한다 싶긴 했는데, 딱 박시연 등장하고서부터 어째 장면들이 죄다 헐리웃 누아르를 참 쉽게쉽게 그것도 참 쌈마이로 모방한다 싶었지만 그래도 아니 뭐 그래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싶었다. 근데 이건 뭐 가면 갈수록 대체 이런 괴상하기 짝이 없는 필름 뭉텅이를 진지하게 영화랍시고 만들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놀라움에 이 싸람들이 장난하나 허탈한 웃음까지. 조재현이 참 욕 봤다. 사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조재현이다, 아 그 절절한 순애보라니 ㅠ.ㅠ 이원종도 나쁘진 않았는데 절정에서 이원종이 우스워진 건 이원종의 연기가 아니라 연기 연출을 괴상하게 해댄 감독의 잘못이다. 야, 원래 광기에 찬 캐릭터라 배우는 광기에 차서 돌아가는데 그 순간에 코미디가 하고 싶냐? <하피>의 뒤를 이을 진정한 괴작이로구나. 민규동 감독님 미안해요, 아무리 애정어린 차원이었다곤 하나 <앤티크>를 괴작이라고 불렀던 건 제가 뭘 모르고 한 짓이었어요, 아니 전 정말 이런 수준의 영화가 나올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을 못했다니깐요.

장난하지 마라. 영화가 장난이가? 몇십억 들여 만들어 다시 몇십억 들여 홍보하는 상품이, 장난이가?

2009/01/31 03:32 2009/01/31 03:32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케마님 만세여요 ㅠ.


F. 스콧 핏제럴드와 데이빗 핀처라니 이게 대체 어떤 조합이야, 가능하기는 한 조합이냐, 이러면서 궁금해 죽을 지경으로 두근대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드디어 시사회를 가서 봤는데, 어머나, 전날 밤에 imdb 찾아보고 조금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원작에서 그냥 80세 노인의 몰골로 태어나 나이를 거꾸로 먹다가 갓난아기로 죽는 벤자민 버튼, 이라는 설정만 딱 가져오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다. 주요 기둥은 그가 데이지([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 이름이 바로 데이지다. 물론 영화에서의 성은 책과 달리 뷰캐넌이 아니라 풀러이지만)라는 여자와 평생에 걸쳐 나누는 사랑 이야기인 셈인데 이 사랑 이야기가 나는... 미칠 듯이 좋았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나 이런 데에서 그냥 피상적으로 다루는 일생의 단 한 명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사랑 운운이 아니라, 가장 완벽한 형태의, 서로 완전히 신뢰하고 아끼며 우정에 기반하면서도 불꽃을 가진 바로 그런 사랑이다. 그래서 이들이 사랑의 절정을 맞는 것도 20대가 아니라 40대가 되어서고. 하지만 뭐 어린 데이지가 침대 밑에서 노인 몰골의 어린 벤자민의 뺨을 만지던 그 짧은 순간도 무지 로맨틱하고 예뻤다. 늙은 데이지가 갓난아기 벤자민을 품에 안고 있는 장면도, 그 갓난아기 벤자민이 할머니 데이지 품에 안겨 생의 마지막 눈을 감는 장면도 눈물이 절로 나왔다.

이 영화의 색채는 사실 내가 핏제럴드의 소설들을 읽으며 느끼고 그렸던 색과는 많이 다른 편인데,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풍겨나오는 그 빛나는 로맨티시즘은 핏제럴드의 로맨티시즘에서 속물성과 시니컬함을 살짝 뺀 버전과 똑 닮았다. 그래서 더 빛나고, 아름답고, 황홀하다. 성인이 된 데이지가 처음 등장하는 데에서 데이지는 영락없이 [위대한 개츠비]의 그 속물적이고 얄팍한 데이지와 똑 닮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달라진다. 핏제랄드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묵직한 진지함이 벤자민과 데이지에게 스며든다.

당연히도,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사랑만은 아니고, 실은 삶과 죽음의 교차이다. 원작과 전혀 달리 벤자민 버튼은 친부한테서 버려져 양로원에서 자라게 되는데, 이크 양로원이 어딘가.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곳 아니던가. 애초 영화의 시작부터 죽음을 눈앞에 둔 데이지의 회상으로 시작하면서 이 영화에는 끊임없이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죽음이 삶의 일부임을 조용히 웅변하고, 그리고 인생의 이런저런 순간들이 얼마나, 정말 얼마나 빛나는 순간들인지 절절하게 그려내는지라, 이 영화만한 '삶의 찬가'도 보기 힘들겠단 생각이 든다. 실제로 벤자민 버튼은 나이를 먹으며 점점 빛나는 젊음을 얻어가고 그간 인생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바탕삼아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낸다. 반면 데이지는 교통사고 이후 꿈을 접고, 한없이 빛나는 육체를 가진 벤자민 앞에서 자신의 늙은 육체를 부끄러워 하는데, 아이고, 그 절절함과 애잔함이 못내 마음 아프면서도, 원숙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데이지의 모습이 또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면서, 치매를 겪으며 '아이'가 된 벤자민을 거두는 그녀의 손길의 그 따뜻함이 스크린을 보는 나한테까지 온몸으로 전해지면서, ...

사실 나는 퀴니가 처음 등장해 벤자민을 향해 첫 대사를 칠 때부터 그냥 눈물 펑펑펑이었는데, 퀴니 역의 타라지 P. 헨슨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고 백배 동감을 했다. 그냥 퀴니 언니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완소 감동 대사들이라능. 2시간 46분, 꽤 긴 러닝타임에 중간에 살짝 지루한 부분도 없진 않지만, "내 인생은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말그대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그깟 세 시간에 보는 거면, 짧게 보는 거지. 그냥 이 영화는 논리적으로 어쩌고 저쩌고 떠들기보다 그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느끼는 수밖에 없는 듯. 큰일이다, 리뷰를 쓰려면 아무래도 개봉 전에 한 번 더 봐야겠다. 하여간에 결론은,

핀처행님 만세! 케마님 만세! 핀처행님 짱이에요 케마님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주시다니 엉엉엉

2009/01/31 03:13 2009/01/31 03:13

작전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들만큼 폼재며 살고 싶은데 가진 밑천이 너무 없을 때, 사람들은 종종 도박이나 복권의 유혹에 빠진다. 그 도박의 종목이 옛날엔 투전이었고, 고스톱이었고, 포커였고, 이젠 주식이 됐을 뿐이다. 아무런 생산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허수의 돈을 사고파는 주식시장, 그리고 그 바닥에서의 '타짜'를 다루는 영화. 그러니까 결국 <작전>은, 종목이 주식일 뿐인 도박 범죄영화다. 한 탕 크게 하기로 하고 작전을 세운 한 팀의 인물들이 각자 딴 궁리를 하며 제 주머니를 챙기려 하고, 그래서 배신과 배신의 틈바구니 와중에 목숨과 운명이 왔다갔다 하는. 일견 복잡해 보이는 대결구도도 결국 악당 박희순 대 우리편 박용하로 심플하게 정리된다. 그러니까 결국, 화투패 모른다고 <타짜> 못 보는 게 아니듯 주식 모른다고 <작전> 못 보는 건 아니라는 거. (나도 주식은 전혀 모른다.) 굳이 캐릭터에 억지로 힘을 주지도 않고 착한 척 포장하지도 않고 담백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간다. 악당이라고 그냥 평면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결국 주식시장에서 중요하기 짝이 없는 게 '타이밍'인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전형적인 장르영화의 플롯에 심플한 대결 구도 속에서 배신과 공격과 방어를 언제 하느냐, '타이밍'이 관건이 된다. <작전>은 신인감독치고는 무난하고 적절히 긴장을 잃지 않은 채 플롯을 풀어나간다. 때로 카메라가 답답한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큰 흠은 아니다. 최동훈 감독도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에서 신인감독다운 자잘한 실수를 했으니까. 뭐 이만하면 세련된 범죄영화고, 주목할 만한 데뷔작이다.

'껄렁한' 박용하가 의외로 잘 어울리고, 비열하고 경박하면서도 무서운 악당 박희순은 역시 기대대로 아주 좋다. 뮤지컬계에서 각광받다가 드라마 한 편(<일지매>)을 거쳐 영화에 입성한 '뺀질한' 김무열도 그만하면 데뷔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그런데 처음 티저 포스터 풀렸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박용하가 대체 언제부터 짝퉁 지현우가 됐나염.

2009/01/30 03:54 2009/01/30 03:54

東京マ-ブルチョコレ-ト

하나의 사건을 그 남자의 관점, 그 여자의 관점으로 다시 풀어주는 게 언제적 유행인데 이걸 또... 귀에 적당히 달달한 J-Pop에, 알콩달콩하면서도 수줍고 소심한 자신감 없음을 표하는 캐릭터들에, 별 사건 없이 그런 식의 소소한 감성을 그렇게 일일이 세밀하게 그러나 상당히 순정만화스러운 터치로 그려내는 방식까지, 확실히 '감수성 예민하다'고 자처하는 십대들이 좋아할 만하겠다 싶다. 내게는 그냥 거대한 뮤직비디오로 보였다. 뮤직비디오, 좋지, 짧은 건. 장편 애니메이션치곤 짧은 55분이지만, 뮤직비디오로는 끔찍하게 길다. 결정적으로 노래들도 내 취향이 아니다. 딱, 포스터에 나온 공중부양 그림만큼은 참 예쁘더라만. 숨겨놓은 나의 1인치 소녀감성이 오늘 이 영화엔 반응하지 않았다.

2009/01/16 16:49 2009/01/16 16:49

Changeling

1. 1928년에서 1935년. F. 스콧 핏제럴드가 명명한, 1차 세계대전 이후 반짝 누렸던 번영과 풍요와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인  이른바 '재즈의 시대(Jazz Age)'가 종언을 고하고 뉴욕의 주식시세가 폭락하면서 대공황을 경험한 바로 그 때다. 안젤리나 졸리의 짙은 화장과 직장을 다니며 혼자 아이를 키우는 진취적인 여성의 특징은 재즈의 시대를 통과한 여성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2. 경찰을 묘사할 때마다 누아르적 화면이 등장한다. 특히 경찰청장이 존스 반장을 사무실에서 꾸짖는 장면은 강한 명암 대조를 이루며 특히 존스의 얼굴의 반 이상을 그림자로 채운다. 구스타프 목사(존 말코비치)가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에게 LA 경찰의 부패를 말해주는 장면에서 등장한 경찰들의 인써트 씬도 누아르 장르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사실 이 영화의 토대가 된 사건은 누아르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이야기이다.

3. 지혜로운 보수주의자 남성은 때로 진보를 자처하는 친페미니스트 남성보다 더욱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쉽다. 이 영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대체 아무리 크리스틴이 "얜 내 자식이 아니라"고 강변해도 경찰과 그 일당은 너무나 어이없는 말로 그녀의 말을 무시하는데, 후반부에서 크리스틴을 돕는 착한 남자들도 크리스틴의 말에 별로 귀를 안 기울이는 건 마찬가지다. 재판 장면은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씬이다. "당신같은 경찰들 때문에 저 여자의 아이가 죽었다!"고 강력하게 변호사가 선언할 때 크리스틴의 그 묘한 표정이라니. 여성을 억압하는 것도 가부장제 하 남성들이지만, 여성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도 결국 남자들의 말을 통해야만 할 수 있었던 시대에 대한 극단적인 고발. 이 영화에서 크리스틴을 제대로 존중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를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다. 감독은 크리스틴의 뜻과 의지를 고스란히 듣고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이스트우드 감독 역시 남자다. 이스트우드 감독도 분명 이를 통찰하고 있을 것이다.

4. 크리스틴의 말과 의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존중해준 사람이 클린트 한 명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체인질링>을 거장의 범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들은 대체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긴 한데, 그것은 바로 이스트우드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위해 포기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의 완성도를 일부 포기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의 의지를 전적으로 존중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체인질링>은 내게 진정한 의미의 진짜 걸작이다.

5. 솔직히 이 영화, 쉽지 않다. 보고 나면 진이 빠진다. 그런데 7, 8천원 내고 별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를 보거나 별 감동적이지도 않은 영화를 보며 기분 상하느니 이 영화를 보고 제대로 진을 빼는 편이 훨씬 낫다. 세상에, 이런 걸작을 보는 데에 7, 8천원밖에 안 내도 된다는 건 이 '대량복제 시대가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스트우드 감독이 최근 10년간 내놓은 영화들 중엔 걸작 아닌 영화가 없다. 범작이라도 웬만한 감독의 잘 찍은 영화 이상은 된다. 하나씩 다 찾아볼 것을 권한다. (누가 어디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회고전 좀 해줬으면.)

6. 그러니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 부디 계속 건강하시어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많이도 안 바라고 그냥 1년에 영화 한 편씩. <그랜 토리노> 벌써부터 기대 만빵입니다.

7. 정식 리뷰를 쓰고 있는 중, 아마도 이번 주 내에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2009/01/15 15:09 2009/01/15 15:09

2월 15일.

<보딩게이트>, 필름포럼 - <바보>를 건너뛰고 <보딩게이트>를 보러가는데, 집에서 넉넉히 출발했음에도 택시를 탔다가 길이 왕창 밀려 10분을 놓쳤다. 아, 정말 주 내내 이상했다. 이게 뭐야. 올리비야 아싸이야 감독 영화는 처음이었는데, 이 감독 의외로 애증과 집착과 배신과 기타 등등의 그 끈적하고 징글한 감정을 제대로 뽑아내는 분이구나 싶다. 난 또 장만옥의 <이마 베프>나 <클린> 같은 영화들, 스틸 한 장씩만 보고 엄청 우아한 감독인 줄 알았다는. 근데 거참 극장 안 분위기는 난삽하더라는.


2월 22일.

<데어 윌 비 블러드>, 용산CGV -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6편을 모두 제끼고 금요일 딱 이거 보러 갔다. 간만에 J.가 동행. 꽤 보고싶어했던 <27번의 결혼리허설>은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딱 겹치는 바람에 통과. 그나저나 이거 제목 꼬라지 봐라. 전날 잠을 제대로 안 자고 갔다가 죽을 뻔했다. 몸의 진을 다 빼놓는 영화, 난 나오면서 '이러다 죽을지도 몰라'라고 잠깐 생각했다니깐.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나보다 겨우 4살 많은 주제에 무슨 도인이 돼버렸다냐. 이거 완전 호러영화라는. 영화란 매체의 시적 구현, 근데 서사시다. 아웅, 이거 다시 보러 가려면 각오 단단히 해야 할 듯.


2월 25일.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신촌 메가박스 - 그놈의 졸업식 때문에 이대 앞에서 차가 꽉 막혀서 무려 15분 지각, 그러나 놓친 건 5분 정도인듯. 아놔 헤더 그레이엄 너무 귀여우셔. 진작 좀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들 하시지, <부기나이트>부터 야한 역할들만 맡으셔서리. 전반적으로 라이트한 연기를 하면서도 꽝 뱃속 깊게까지 때려주는 연기, 이 언니 그냥 귀엽기만 한 게 아니라 확실히 연기를 잘 하시는구나. 근데 난 아무리 봐도 브리짓 모이나한은 영 안 끌리던데(몸매는 좋더라만), 미국애들은 이 아가씨가 엄청 섹시하다고 생각하나 봐? 흥, 나도 위 아래 짝 맞춘 비싼 속옷 사모을 거야! 함박눈이랑 묘하게 잘 어울리는 영화였어.

<마이 뉴 파트너>, 서울극장 - 눈길에 늦겠다 싶어 지하철 타고 급하게 날아왔는데 다행히 시간 딱 맞게 도착. 조한선 군을 비롯해 안성기와 기타 등등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했는데, 기자간담회는 가볍게 생까고 걍 집으로 왔다. 와, 조한선 키 크더라. 까무잡잡한 피부에, 다리도 길고, 의외로 어깨 넓고 상체가 우람한 몸매고, 그럼 당연히 내 가슴도 조금은 벌렁여야 하는데, 그것도 참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어쩜 아무 매력이 없을 수가 있니. 안성기 아저씬 여전하심. 근데  언제나 멋지신 최일화 아저씨가 안 오셨어 어째. 영화는...  착각을 좀 많이 하셨더라.


2월 26일.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신촌 메가박스 - 이틀 연짱 신촌메박. 배우님들 짱이셔요. 주드 로도 좋지만 레이첼 와이즈 언니 너무 멋지셔요. 나 울 뻔했자나. (데이빗 스트래턴도 무지 좋았다는.) 사실 한번도 왕가위한테 열광하면서 좋아한 적은 없으니 '지나간 내 청춘' 운운하기도 좀 그렇지만, 그래도 왕가위 영화는 <2046> 빼고 다 봤을걸. 근데 왕가위는 그러니까, 결국 (서)유럽인으로 태어나지 못해 좌절한 아시아인이었던 거야? <중경삼림>까지 기분나빠질려고 그래. 필름2.0에 Bad 쪽으로 단평을 보냈다.


2월 27일.

<허밍>, 롯데시네마 홍대입구점 - 걍 두 마디만. 이게 영화면 내가 심은하다. 한지혜가 영화배우면 난 철인3종경기 세계챔피온이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 시네마 상상마당 - 가뜩이나 참석한 기자 수도 적었지만 영화 끝나고 기자간담회 때 남은 기자가 겨우 3명. 평소에 창피하다고 절대 하지 않는 질문을 그래서 기자노릇 시작한지 1년만에 처음으로 해봤는데, 나 혼자 질문을 네 개인가 하면서 1:1 토론 분위기가... 끝나고 나와서 감독님과 인사하고, 마케팅팀 이목 제대로 끌고. (아우 창피해.) 김세진, 이재호 열사 기념사업회에서 의뢰하여 만들어진, 인터뷰로만 구성되어 기존 다큠벤터리 공식을 다 깨버리는 다큐멘터리다. 이건 제대로 기사를 쓰고 싶다. 여력이 된다면 인터뷰도 제대로 하고 싶다.

2008/02/28 00:19 2008/02/28 00:19
2월 11일.

<주노>, 대한극장 - 한국의 많은 여자들이 주노보다 배의 나이를 먹고서도 주노만큼의 처신도 못 하는 경우가 많은 건 이 사회가 편견에 맞서 내 식대로 살겠다 결심하기엔 너무 험악하고 터프하며, 여자들에게 특히 더 그러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에선 <주노>가 코미디였을지 몰라도 한국에선 참 많은 여자들을 몰래 눈물짓게 할 영화가 될 게 틀림없다. 인터넷에서 더러운 방식으로 왈왈대는 남자들과, 애 낳는 날 운동복 입은 채로 뛰어와 주노를 꼭 끌어안아 주고 있는 폴리 사이의 간극.

<터질 거야>, 하이퍼텍 나다 - 좌석수도 많지 않은 하이퍼텍나다인데, 여기서 하는 시사회는 언제나 자리가 널널하다. 스크린이 좀 작은 걸 빼면 참 운치있는 곳이다. 예전엔 자주 다녔는데, 근래엔 시사회 아니면 거의 올 일이 없는 듯. 여기서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를 봤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그저 그랬다. 자의식에 똘똘 뭉쳐있는 것도 별로인데 안 그런 척 하는 건 많이 짜증난다.

<매뉴얼 오브 러브>, 명보 - 3호선 을지로3가 역과 명보극장은 참 가까운데 이상하게도 출구에서 극장까지 5분이 넘게 걸린다. 이유가 뭘까. 자국에서 흥행폭풍을 일으키는 영화들은 분명 이유가 있고 봐두는 게 좋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해 나도 이토록 여유롭고 유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달달한 영화도 좋아라 하는 거 보면 역시 내 취향은 꼼짝없이 상업 기획 장르영화인데(이게 뭔 말이다냐), 종종 예술영화 애호가로 오해받곤 한다.


2월 12일.

<점퍼>, 용산CGV - 맨 앞에서 보려니 눈이 훽훽 돌아가두만. 조금 늦게 도착해서 허겁지겁 명함을 냈는데, 난 늦게 와서도 여유만만한 기자들은 이해를 잘 못하겠어;;; 마음은 급한데 앞에서 떡하니 막고는 시간 질질 끌 때는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다행히 예고편을 여러 개 상영해준 덕분에 처음부터 제대로 봤다는. 덕 라이먼이 원래부터 그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자기 작품 후속편의 폴 그린그래스 영향을 받았나, 컷을 너무 짧게 끊어 우다다 붙인 장면들이 많다. 액션씬을 이렇게 찍어놓으면 참 난감하다.

<밤과 낮>, 용산CGV - 사실 이 영화 때문에 DSLR을 낑낑대며 가져갔는데, 감독, 배우들이 베를린에서 아직 안 왔다고 그냥 영화상영만. 그러고 나서야 감독, 배우 안 온단 보도메일을 본 것 같아서 요즘 안 그래도 멍청한 실수를 연발하는 자신을 탓하고. 일반관객 시절엔 절대 볼 일이 없던 홍상수 영화지만, 지금 내 처지에는 개인적 호불호와 상관없이 봐야만 한다는. 영화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아니면, 홍상수 영화가 원래 30~40대 감성이었던 거거나. 아니면 내가 이제 남자들처럼 적당히 타락한 거거나.

<스파이더위크 가의 비밀>, 용산CGV - <매뉴얼 오브 러브>와 마찬가지로 일반시사의 자리 한 켠에서 본 것. 사람이 너무 없어서 상영관 맞나 하고 직원에게 물어봤을 정도. 아동 대상 판타지라고 하면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무조건 안 보는 경향들이 있나 보다. 이 영화는 분명 아동 대상, 그것도 저연령 아동층 대상이 맞지만 영화는 또 나름 훌륭하셔서. 이 집안에서 자발적 동의에 의한 가모장 가정이 완성되는 그 폭력의 순간이야말로 정서적으로 클래이막스 장면일 터이다.



2월 13일.

<3:10 투 유마>, 용산CGV - "3시 10분 유마행 기차"라고 제목을 붙였으면 더 좋았을걸. 이틀 연속 세 편씩 본데다 잠이 부족했더니 이 영화를 보면서 우왕ㅋ굳ㅋ 하면서 보는데도 계속 졸았다는. 이럴 때가 괴롭다. 재밌다고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정신차려 보면 깜빡 졸았고, 근데 존 시간은 길지 않았던지 장면은 그럭저럭 다 연결되고, 이게 계속 반복되고. 영화를 제대로 못 봤다는 느낌 때문에 짜증은 쌓이고 몸도 너무 힘들어진다. (차라리 푹 자버리면 몸은 덜 힘들지.) 제임스 맨골드는 딱히 팬은 아니고, 언제나 연출에 좀 문제있거나 지지부진해지곤 하지만 캐릭터를 워낙 잘 뽑아낸다, 라고 생각해왔다. 이 영화도 그런 듯. 난 모두가 좀 아니라고 하던 이 영화의 엔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가 추측하고 있는 헐리웃 영화들의 어떤 경향을 보여주고 있고, 그건 영화미학적 고뇌보다는 윤리적 고뇌의 결과라 생각한다. 하여간 다시 봐야 할 영화.

<연을 쫓는 아이>, 용산CGV - 한 30분쯤 보다가, 재미없던 것도 지루했던 것도 아닌데, 그냥 푸욱 자버렸다. 역시, 너무 무리하면서 시사회를 보러 다녀서도 안 되고(하루 세 편 이틀 연속이라니 내가 미쳤지), 그런 와중에 수면시간을 소홀이 해서도 안 되며(생각해보니 3시간 자고 나왔어, 이틀 연속 코피도 난 주제에), 반드시 커피를 먹고 극장에 들어가야 한다. (이 날은 몸도 피곤했던 주제에 커피를 깜빡했다는. 아무 생각없이 콩차를 사서 들고 들어갔다는.) 간만이다, 이렇게 푸욱 자버린 것도. 제대로 다시 봐야지 싶다.


2월 14일.

<4개월, 3주... 그리고 2일>, 명보 - 저 쩜쩜쩜을 '그리고' 다음에 붙였으면 더 좋았겠다 싶다. 기사 하나를 급히 쓰느라 <데쓰노트 L> 시사회는 패스하고, 이 영화는 워낙 칸영화제 수상작이라 반드시 챙겨봐야 한다며 보러 갔는데, 결국 5분 지각. 아쒸 사무실과 극장은 겨우 지하철 두 정거장,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인 데다 15분 전에 나왔는데 5분을 늦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눈앞에서 지하철 한 대 문닫는 걸 놓치고 다음 차 기다리는데 플랫폼에서 5분이 지나도 안 오더라고. 4호선은 3분 간격으로 제깍제깍 오는데 3호선은 종로3가 을지로3가 같은 곳을 지나는 주제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래도 영화는 좋았다. 이 단순한 얘기를 이렇게 단순하게 찍으며 픽스된 카메라로 롱테이크 씬 남발하는 주제에 어쩜 2시간 내내 조금도 지루할 틈없이 얘기를 끌어나갈 수가 있는 거지? @.@


애초 이 시리즈를 써보자 했던 직접적인 계기는 <어톤먼트> 시사회였는데,  그놈의 구정 연휴 때문에. 음, 근데 이런 게, 재미가 있나... 서너 번 더 해보고 재미없으면 때려칠 테야.


2008/02/15 06:25 2008/02/15 06:25